제7장_죄의 지배의 환경 :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으로써 (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141)
녹취자: 백지영
성도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이번 주에는 눈이 많이 왔지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들이 한번 봤습니다. 그 대신 고생한 사람도 많았지요? 서울에서 신촌까지 가는데 3시간 반 걸렸다고 하니까 굉장한 교통대란이 일어났었습니다. 어쨌든 뭐가 있든지 간에 한번 눈이 싹 덮고 나니까 새하얗게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렇게 눈같이 희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내용은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세력입니다. 그리고 죄가 어느 한 순간에 저절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먼저 신자의 마음이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으로서 죄가 깃들기에 적합한 환경이 된다 이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신자가 은혜가 고갈된 상태에 있을 때 그때 신자는 지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 대표적인 혼란이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거짓된 관념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쉐퍼드라는 청교도는 이것을 크게 네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우선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사단이, 여기 세 번째하고 비슷한데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단에 속한 사람을 보면 “야, 어떻게 저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랬는데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결국 영적인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이 인간의 마음에 받아들여지는 가장 폭넓은 원인은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목회자의 과오입니다.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신자의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평화의 관념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확인받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혹은 거짓으로 감추어 놓은 상태에서 자기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네 가지 모두 결국은 신자의 마음 없이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신자의 마음이 이런 것들에 충분히 미혹될 정도로, 거짓된 관념을 받아들일 정도로 부패하고 지성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 그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이에만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샬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사람들과의 평화 그리고 만물들과의 평화입니다. 그러니까 샬롬 자체가 통째로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면 빵집에 가서 ‘텐리 샬롬’, 빵을 자르지 않은 통째로 하나 다 달라고 할 때 ‘샬롬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무 커서 절반만 자르고 싶으면 ‘핫찌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처럼 평화는 전체적인 게 통일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깨집니다. 당연히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지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동물 무자비하게 학대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엊그제도 영상에 보니까 고양이를 줄로 묶어서 물맷돌처럼 돌리기를 하는 광경이 인터넷 기사에 보도가 됐습니다. 사람들이 막 분노했지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얀 개가 지저분하다고 세탁기에다 넣고 돌리는 것입니다. 살겠습니까? 왜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까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신이 목회하는 기간 동안에 극적으로 회심한 사람의 예를 들면서 자기의 교인이 된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알코올중독자입니다. 아침에 밥을 먹으려고 샌드위치를 올려놓았는데 개가 와서 먹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이 개를 확 모가지를 휘어잡고 빵 써는 칼로 목을 끊어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잔혹할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며칠 전에 사진에 나온 어떤 개는 누가 그랬는지 뜨거운 물을 몸 절반에 뒤집어써가지고 다 털이 익었습니다. 껍데기가 익었습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하고 좋은 모습도 그 사람 모습이고 극렬하게 악한 사람의 모습도 그 사람 모습입니다. 정인이 살인 사건도 보면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대학을 나오고. 왜 그렇게 됐을까요? 처음에는 죽은 정인이가 너무 불쌍해서 마음이 아팠는데 요새는 기도하면서 정인이를 죽인 그 두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너무 불쌍합니다. 망가진 영혼이 아니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만물을 선하게 대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없습니다. 그런데 간헐적으로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가끔.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거절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죄가 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성적으로 혼란스럽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오해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어떤 죄를 짓고 간절히 기도하고 느낌이 옵니다. 인간이니까 느낌이 올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갑자기 자기 자신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엾다’라는 생각을 스스로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또 마음이 죄 가운데 있지만 마음이 어느 한순간 따뜻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이 나의 그 죄를 용서하셨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따지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때 지나간 죄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짓고 있는 죄도 용서하셨고, 사실 앞으로 지을 죄 까지 용서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미래에 죄를 지으면 우리가 그 죄를 모두 빼놓지 않고 생각을 할까요? 또 생각한 죄는 모두 회개할까요? 안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단번에 모두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개별적인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안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매우 거의 죽어있습니다. 매우 작습니다. 거의 죽어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죽게 된 것 'going to die'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작고, 그 다음에 죄는 매우 큰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원적으로 해결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 하나하나 용서받았다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또 하나의 죄가 해결되면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죄를 짓게 되고 또 다른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해결의 길이 무엇이냐 하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마음이 이렇게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죄가 남아 있겠지만 이렇게 역전이 되어서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사랑의 힘이고, 그 사랑의 힘이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제 여기에서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7장에서 하는 이 고백을 두고 이게 사도 바울이 불신자이었던 자연인일 때의 고백이라는 설과 성도가 되었지만 이런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기도라고 이렇게 보는데 이게 맞는 학설입니다. 이게 맞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영어사전에 보면 ‘O miserable man that I am!’이렇게 나옵니다. ‘아주 비참한 사람이다.’, ‘정말 비천한 사람이다.’ 시편에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그러니까 ‘죽기로 운명 지어진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내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연인으로서의 탄식이 아니라, 성도로서 살아가다가 이런 죄의 커다란 힘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경험하면서 토해놓는 탄식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만 할 수 있는 탄식입니다. 그러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할 때 이미 이 전에 곤고하지 않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던 기억이 이 곤고함을 더 깊이 느끼게 만들고, 그 다음에 ‘죽음으로 운명 지어진 자신의 몸’이라는 표현은, 결국은 생명을 향하는 자신의 기쁨을 안 사람이 역설적으로 토해놓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런 속에서 결국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의 기도의 응답을 잘못된 희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여전히 죄 아래 있는데 이렇게 자기가 짐짓 생각한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 확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응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자기가 처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죄의 지배의 상태에서 구체적으로 죄를 죽이면서 그러면서 은혜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못된 희망을 갖지 말고 오히려 올바른 절망을 하는 것이 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절망할 때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간절한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신자는 거듭난 사람이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해방된 사람이고 정죄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아무리 무지막지한 삶을 살아도 결국은 그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게라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삼중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게 되느냐 하면, 맨 위에서 보면 인간이 그럴듯하게 착한 척하고 보입니다. 남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쁩니다. 이게 본성입니다. 그런데 더 밑바닥으로 들어가면 이 사람의 영혼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바 된 피조물이라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소멸되지 않지만 이것은 이렇게 크다가 작다가 거의 사라지다가 합니다. 당연히 이 죄도 역시 이렇게 크다가 작다가 사라지거나 하는 것이지요. 이게 큰 만큼 이것은 작은 것과 짝을 이루고 이렇게 짝을 이루고 이렇게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은혜와 죄가 신자 안에 공존하는데, 그런데 무엇이 우세한 삶을 살 것인가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히브리사람들에게 이 ‘미워하다’라는 말은 아주 입체적인 뜻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 서양 사람들이 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동양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이해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겠습니다. 어린아이 둘이 있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둘이 똑같이 사이좋게 놉니다. 그런데 딸이 ‘엄마, 나 사탕 줘.’ 그래서 딸에게 사탕을 줬습니다. 아들이 ‘엄마, 나도 줘.’하는데 얘는 충치가 너무 심합니다. ‘너는 안 돼.’ 그리고 안줬습니다. 그랬더니 아들 하는 말이 ‘치, 엄마는 나만 미워해.’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를 미워한 게 아니라 누나를 더 예뻐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히브리사람들의 ‘미워하다’라는 단어 안에 있습니다. 특이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가슴에 아주 확 다가옵니다. 아주 선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혹 이를 미워한다.’라고 한 그 뜻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보다 덜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재물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미워한 게 아니더라도 결국 미워하는 게 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재물을 미워한 적이 없으나 미워하는 것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사랑의 등차문제입니다. 어느 것이 더 위에 있고 아래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의 보좌에 앉아있는 그것이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긴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종이 상전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재물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재물을 섬기며 하나님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우리의 섬김을 받는 그 대상은 하나님이든지 재물이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보좌에 재물을 올려놓았다고 하는 것은 재물이 주인이 되어서 나를 다스린다는 게 아니라, 그 재물을 욕망하는 내가 주인이 되어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성경 요한일서 2장15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정말 세상을 사랑합니까? 원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피조물 사이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세상을 즐거워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 사랑이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한다고요? 잉크냄새밖에 더 납니까? 돈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는 그 돈 가지고 누릴 수 있는 모든 효용가치를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래서 결국은 궁극적인 숭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든지 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탄을 숭배한다고 하는데, 사탄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사탄을 통해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상숭배의 동기였던 것입니다.
자, 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은혜의 현재적인 통치를 사모하라.” 늘 이야기하면 왕년의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왕년에는 왕년의 은혜로 살았고 내년에는 내년의 은혜로 살겠지만 오늘은 현재의 은혜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은혜 받은 경험 그것은 과거에 끝났고, 간헐적인 은혜로는 살 수 없으니 현재적인 은혜를 받아서 그래서 도표에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분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감화, 감화라는 것 이해하실 수 있지요? 확하고 마음에 밀려와서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는 것, 그리고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감화입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사랑의 감화가 은혜라면, 죄는 자기사랑의 감화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마다하지 않는 욕망의 감화, 그게 바로 자기 사랑의 감화입니다. 두 개가 어느 것에 더 큰 감화를 받는가 하는 것에 의해서 인간의 삶이 좌우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 루더포드는 아주 유명한 청교도였습니다. 그 청교도가 거의 존 오웬하고 비슷한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습관, 그러니까 은혜를 유지하기 위한 습관을 이렇게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은혜의 경향성을 유지하고 불붙이기를 힘써야 한다. ‘유지한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장작을 땝니다. 그래서 활활 타오릅니다. 부지깽이 집어넣고 슬슬하면 부지깽이까지 시뻘겋게 달을 정도로 그렇게 열이 올라옵니다. 그 활활 타오르는 숯을 삽으로 퍼서 밖에 얼음 위에다가 확 뿌려 버립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 붉게 타오르던 숯이 까맣게 변하고 김이 납니다. 결국 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숯을 화로에 담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따뜻한 재를 가득 덮습니다. 그리고 방에 윗목에다 갖다 놓습니다. 옛날 시골이야기입니다. 새벽까지 불씨가 남아있습니다. 신기합니다. 그 불씨를 갖다가 주부들이 불을 떼고 아침을 하고 소죽을 끓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옛날에 성냥이 귀하던 시절에는 그 집 며느리가 그 불씨를 보존하는 사명을 받았고, 그 불씨를 꺼뜨리면 소박을 맞는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쫓겨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은혜를 많이 받고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를 때 그 은혜를 유지할 수 있는 화로와 같은 환경 속에 우리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늘 찬양 듣고 늘 설교 듣고 그 다음에 늘 은혜 안에 있는 사람과 교제하고 선한 일에 힘쓰고 그리고 기도해야 할 선한 목표를 위해 봉사하고 할 때에 간절히 기도가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면서 우리의 관심이 육욕적이고 세속적인 데서 신령하고 은혜로운 쪽으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있을 때 그 은혜가 오래 지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꺼질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정말 싫증을 잘 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을 때까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마지막까지 목사님과 함께 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나 죽었을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한 사람이지요. 그 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보다도 더 믿었던 사람들도 마음이 변해서 떠나는데 사람이 살면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의 원인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살 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 하면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부루투스 너마저” 그랬다고 하는데, 진짜 그렇게 얘기를 했는지 아니면 섹스피어가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설화가 내려옵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배반해도 생각지 못한 일이 아니어야 된다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신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빨을 갈고 게거품을 물고 증오하고, 빨리 죽습니다. 자기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려니 그리고 그 사람들까지도 죽을 때까지 선하게 대하다가 죽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아십니까?
어쨌든, 인간이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그런 잘 보전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지 않을 때 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꺼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꺼지면 다시 불을 붙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나게 망가진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버추얼 사경회에 6천4백 명이 접속을 했습니다. 접속을 한 게 아니라 들어왔습니다. 유튜브에. 그러니까 실제 참여한 사람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히트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일 지지난 주일 월등하게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시청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게 무엇이냐 하면, 말은 안 해도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제일 커다란 고민은 “어떻게 살 것이냐?”입니다. 그 답을 한번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정답이 주어져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든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의지에 작용하는 능력이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식을 때에는 식지 않도록 보호하지만, 식었을 때에는 다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불을 붙이려면 결국은 말씀을 듣고 다시 깨닫고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는 것 이외에 없습니다. 이게 수천 년 동안 계속된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2번에 보면 은혜의 천적인 성향, ‘heavenly nature’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남으로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성향입니다. 그것을 다시 불붙여서 은혜주심에 부합하는 삶,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사는지를 물어야 됩니다. 내가 왜 사나? 내가 달라고 하는 것을 모두 주신 후에는 내가 살 삶이 어떤 것인가? 어떤 삶을 살아서 그분께 기쁨을 드릴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 2번입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경험하는 지적인 혼란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오해입니다. 평화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용서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될 때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게 됩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죄의 힘을 약화시키고 다음에 은혜의 힘을 증진시켜서 은혜가 죄를 지배하는 데로 가는 것이 목표인데 그렇게 밀고나가지를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피상적으로 만족을 하거나 달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 거듭 비관적인 진단이 내렸습니다. 돌팔이의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돌팔이 의사가 돈을 받고 진찰을 해주면서 “그 명의들의 진단이 잘못됐습니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당신은 괜찮습니다.” 이렇게 엉터리로 진단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데도 그 말을 먼저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병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는 힘들게 됩니다.
문제 3번,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 시급한 것은 특정한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지배하는 죄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지배력이 유지되면 그 죄는 안 짓더라도 다른 죄를 짓게 됩니다. 쓰레기차 피하려다가 똥차를 만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건축 인테리어 하는데 하나의 철칙이 있습니다. 시공자들에게 통하는. “물은 어디론가 반드시 새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이 확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층에서 표가 안 납니다. 안 보입니다. “아, 이상없겠구나.”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물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속으로 스며들든지 아니면 눈에 띄지 않는 천정에서 새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선가는 새고 있는 것입니다. 물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말려서 증발시키지 않으면 어디로 흐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가 출렁출렁하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것을 뚜껑도 없이 출렁출렁 넘치는 그 시뻘건 페인트 같은 것을 찰랑찰랑 트럭에다 싣고 뚜껑도 없이 달려가는데 어떻게 그 페인트가 안 쏟아지겠느냐 이것입니다. 어디론가 튑니다. 같은 방향으로 똑같이 튀지는 않지만 다른 방향으로 얼마든지 튈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도박을 안 한다고요? 도박을 하다가 깊이 깨닫고 안 하게 됐다고요? 다른 것에 빠지겠지요. 뭔가 죄가 좋아하는 뭔가에 또 빠지겠지요. 그래서 결국은 죄의 지배력 자체를 약화시키는 일을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결국은 성령이 죄를 죽이시는 데 말씀과 기도와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친구 만나서 자동차 이야기를 하면 집에 올 때 갑자기 차 바꾸고 싶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좋은 화장품 써서 예뻐졌다는 이야기 들으면 좀 무리가 되더라도 한번 사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노인들은 누가 그 약 먹고 오래 살았다고 그러면 겉으로는 맨날 왜 내가 안 죽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면서도 뒤돌아서서는 보약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약간 세속적이었던 사람도 그렇게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계속 이야기하면 “나는 왜 이렇게 살까?” “나에게 좀 더 다른 삶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사람들에게 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뜻입니다.
문제 4번, 신자에게는 은혜와 죄가 함께 공존합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지배권을 가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정경제권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둘이 똑같이 갖는다고요?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남자가 끝까지 안주든지 아니면 여자가 가지고 있어서 남자가 그냥 어떻게 하면 마누라한테 좀 더 타낼까 그렇게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좀 맡기세요. 남편이 경제권을 아내에게 안 맡기면 세계 평화는 누가 지킵니까? 더 큰 일을 해야지요. 아내가 잘 못한다고요? 원래 잘 하는 사람 없습니다. 몇 년 해 보면 다 합니다. 그리고 좀 더 높은 일을 해야지요. 그리고 아내가 나이 들면 즐거움이 뭐겠습니까? 그런 거라도 남편이 자기 눈치 보는 것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야지요.
문제 5번,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이 죄의 지배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일 매일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어제까지 받은 은혜가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성경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가 넘어진다.” 그래서 “여보, 정말 당신한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이런 남자들은 고생 안 시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시켰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여보, 내가 당신을 이렇게 밖에 사랑을 못해줘서 미안해.” 그러는 사람은 진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짜 사랑 안하는 사람은 “내가 뭘? 아이고 나 안 만났으면 파밭이나 맬 사람이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고 도시에서 사는데 이러지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 은혜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아셨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부족을 끊임없이 느끼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도 많이 들어오셨네요. “설명이 쉽고 기가 막힙니다.” 기가 막힐 정도까지야 되겠습니까? 그 다음에, “설교를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도 괜찮을까요?” 성경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그렇게 해야지요. “사람의 본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예, 본성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은혜는 본성도 바꿉니다.” 예, 맞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라는 그리스의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성은 운명이다.”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성향 검사 같은 것 그런 것들은 정확하게 우리 성향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원래 성향이 뭔지 그리고 은혜로 바뀐 성향이 뭔지 그런 것은 그런 검사기법으로 구별이 안 됩니다. 구분 못해냅니다. 여러분, 제가 말을 잘합니까, 못합니까? 잘합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제 앞에 십만 명을 모아놓으면 제가 떨 것 같습니까, 안 떨 것 같습니까? 십만 명의 청중이 모여 있다면 떨 것 같습니까, 안 떨 것 같습니까? 안 떨 것 같지요? 안 떨 것입니다. 백만 명이 모여도 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청소년 때 세 명이 모이면 말을 못하던 사람이었다면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그 중의 한 명이 여학생이면 저는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눈길도 못주었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목회와 사명이 저를 그렇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가고, 또 그게 좋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경제권? 본인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축하합니다. 너무 남편에게 짜게 하지 마세요. 품위를 잃게 하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즐겁게 보내셨습니까? 주일에 은혜로운 설교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