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14장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녹취자 : 김경애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잘 지내셨습니까? 퇴근하시고 한가한 시간일 것입니다. 날이 더워졌습니다. 건강에 특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사태가 오래 지속되고 있지만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적지 않습니다. 보다 더 많이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할 수 있었고 또 우리들이 이렇게 온라인으로 담임목사와 직접 만나서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공부할 내용은 신자가 죄를 짓지만 죄가 신자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 이유를 쭉 설명하면서 14장으로 이 책의 거의 끝자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지성적인 혼란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정리하고 나면 죄를 이기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비유를 하나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해안가에 적이 침투했습니다. 캄캄한 밤중입니다. 제일 먼저 총부터 쏘는 것이 아니라 조명탄을 쏩니다. 조명탄을 수백 발을 쏘면 대낮처럼 밝아집니다. 목표물을 발견하고 나면 그 다음에 사격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지식의 빛을 제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러면 죄와의 싸움에서 적을 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패배할 위험성이 적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나눔 질문)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 제일 먼저 생각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신앙이 약화되고 은혜 생활이 방해를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 해 봅시다.
성도1) 오래전 믿고 신뢰하던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며 처음에는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괴로워하다가 정작 관계를 쌓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거짓이었나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상대방의 안 좋은 기억들만을 생각하며 나의 입장을 합리화했고 나의 의를 더 내세웠으며 마음은 상대를 향한 원망과 나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런 마음은 기도의 자리에 나갈 수 없게 만들었고 은혜의 지배에서 멀어져 전보다 괴롭고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성도2) 확실히 은혜의 지배아래 있지 않으면 생각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신앙이 약화되는 것 같습니다. 일을 함에 있어서 정당한 대가만 받는 것이 신앙적으로 명백함에도 은혜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되면 편법을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실정법을 위반하여 더 큰 대가를 받아내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나는 충분하지 않은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그런 식으로라도 하여 충분한 대가를 얻어내야 하지 않는가? 현실은 그런 것도 능력이 되어 그들만의 견고한 이너써클을 구축하는 경우가 있다 보니 이런 유혹이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승자가 아닌지 정당화까지 시도하며 생각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급기야 죄와의 지속적인 싸움을 강조하는 교회가 요즘말로 아싸들만 양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 신앙도, 경건생활도 형식화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가족 및 교역자와 대화하며 생각이 정리되어 그런 죄의 유혹을 버렸지만 조금만 은혜 아래 있지 않다면 또 생각이 혼란스러워질 것이기에 늘 깨어 있기를 간구합니다.
성도3) 나름대로 말씀도 묵상하고 기도생활도 하고 신앙생활에 매진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힘든 상황의 전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만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죄하며 괴로워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가족은 특별한 타인이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도 나와 동일체로 착각하며 모든 기준은 나의 기준이어야만 했습니다. 그 기준에 합당하지 남편과 자녀를 주신 것을 원망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받은 은혜의 대부분은 이기심과 혈기로 가정 안에서 다 소진해버리고 내 안에 무성하게 자란 죄가 무딘 감성을 갖게 하였고 그래서 나의 실체를 정직하게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은혜생활을 방해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죄가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이중적인 나의 모습에 가족들이 더 혼란스럽고 신앙생활에 회의적인 생각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가족 안에서 보여주지 못한 하나님 사랑, 타인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여 서로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면서 신앙생활의 가장 친밀한 동반자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 세 분이 서로 나누어 주셨는데 공통점 하나는 은혜에서 멀어질 때 생각이 확실히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은 그냥 생각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기준과 판단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상황은 죄가 아주 좋아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가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옛날에는 재래식 무기로만 싸웠는데 지금은 모든 첨단전투무기들은 통합시스템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한 대가 뜨면 예전에는 무전으로 ‘뒤에 적기가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1번기, 2번기가 네 밑에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계기판에 모든 것이 다 뜹니다. 그리고 전투사령부에서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전쟁시스템을 한 사람이 다 보면서 말하자면 축구 게임할 때 혼자 공을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22명이 어디에 있는지 다 보면서 경기를 하듯이 그런 시스템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전쟁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뜨는 비행기가 글라울러기라고 하는 전자전파괴비행기입니다. 그것이 떠서 강력한 ENP 폭탄을 터뜨려서 전자기기를 다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적을 멍청하게 만들어놓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미국대통령이 타고 다니는 에어포스원이 그런 폭탄의 공격을 받아도 그런 전자시스템이 망가지지 않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유명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본 내용에 들어가 보면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어떤 혼란을 겪게 되느냐 하면 사실은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이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할 때 모든 판단력이 다 정상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와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와 관련된 것이고, 이것은 정서와 관련된 것입니다. 의지와 정서가 이런 식으로 오염이 되고 나면 반드시 여기 지성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신령한 방식으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판단해서 영적으로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고 겨우 본성의 빛이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따르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본성의 빛이 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도 마음이 옳다고 믿는 선을 안 쫓아가고 악을 쫓아가게 됩니다. 정서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비중생자는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중생자의 경우에는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면 생각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자꾸 죄에 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어디까지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의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래도 구원을 못 받은 것 같다. 이렇게 살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등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판단이 맞았을 수도 있습니다. 진짜 자기가 구원을 못 받은 비중생자인데 구원을 받은 중생자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실 이 지성에 혼란이 찾아왔기 때문에 사실은 이 안에서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사라지니까 구원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죄에 자주 패배하게 됩니다. 백기를 들고 있는 장면입니다. 빈번하게 패배하다 보면 어떤 상황이 되느냐 하면 싸워보기도 전에 나는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상태에서 죄에 종노릇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워낙 무지합니다. 구원을 받았을 뿐이지 너무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구원이 무엇인지? 이런 것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해지고자 하는 소명보다는 당장 지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죄와 거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괴로우면서도 죄를 죽여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했고 또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실은 교회를 개척하고 일 년쯤 되었을 때 존 오웬의 죄 죽임의 교리를 원서로 읽으면서 굉장히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을 만나고 받은 충격과는 다른 종류의 내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죄가 정교하게 인간의 마음속에 파고들면서 결국 인간을 장악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뒤를 돌아보니까 정말 무지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지하게 살면 무지하게 살수록 죄에게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은 적어지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도표로 돌아가 보면 이렇게 무지가 큰 악입니다. 그래서 무지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왕에 자기 인생을 우리가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 인생을 신앙이라는 기반위에 얹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앙이 무너지면 우리 인생도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신앙은 내 인생을 위해서라도 그 신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워야할 것 아닙니까? 그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 때에 죄 죽임의 필요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인 충만한 생명령을 누리지 못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떤 혼란이 생기느냐 하면 첫째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럼 내가 사랑하고 있지!’ 심지어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까 우리의 죄가 애가 바닷가에서 싼 오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 같으니까 죄가 있든지 없든지 너무나 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다 덮이는 것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은 맞는데 결국 그 죄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 영적인 고통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연히 무지입니다. 당연히 평화에 대해서도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이 정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정욕대로 자기가 행동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왜? 욕망이 충족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더 큰 죄를 짓기를 욕망하게 됩니다. 자기가 죄를 짓고 싶은 것을 한번 확 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평화가 찾아옵니다. 왜? 욕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졌으니까 말입니다. 그거나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보다 더 큰 욕망을 갖게 되고 더 큰 죄를 마음이 원하게 됩니다. 그것을 하기 전까지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또 죄를 지으면 안정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더 큰 죄의 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 그림에서 보면 사단과 죄와 악수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느끼는 안정을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화는 아닙니다. 죄의 종이 되어가는 평화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 다음에 보면 상황이 자꾸 죄에 집니다. 죄에 자꾸 져서 내가 죄에 이길 수 없다는 상황을 고정시켜 놓고 그 다음에 그것을 복음의 진리를 아예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죄를 짓고 살아가는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 나오는 구조가 무엇이냐 하면 지성 대 정서, 의지입니다. 지성적으로는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서와 의지가 이미 배신했습니다. 그럴 때에 인간은 1번을 따를까요? 2번을 따릅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당연합니다. 2번을 따릅니다.
그 대표적인 경유가 이것입니다. 누구와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화가 나도 이 말만은 하지 말아야지!’ 지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열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후회할 말을 참지 못하고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서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끄는 뱃머리입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야기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지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지성이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깊이 생각하면 도저히 어떻게 해도 부인할 수 없는 명석 판명한 법칙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따라서 산다면 덕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정의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같은 세대에 살고 있지만 젊은 사람인 파스칼은 인생을 전혀 다르게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파스칼의 이야기가 논리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 엄마이면 엄마에게서 포근한 정을 느낀다고 할 때에 과연 이것이 팩트일까? 라고 생각하면서 감정을 억누르면서 호적등본을 떼어보고 옛날 동네에 찾아가서 이 사람이 우리 엄마가 맞느냐고 이 엄마가 나를 낳는 것을 보았느냐고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에 대해서 사변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훨씬 현실적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인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서가 굉장히 주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웃음의 소리로 늘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찬송가 부르면서 돈을 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랑에 눈물을 흘리면서 남의 여자 침대로 올라가는 남자도 없습니다. 왜? 정서가 그런 행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사랑의 정서로 따뜻하게 채우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이 사랑이 그런 하나님 사랑이 아닌 세속의 사랑에 뜨거워져 있을 때 기껏 해봐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위선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주 잘하면 위선적인 삶이고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대놓고 나쁜 짓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많은 죄가 있는데 이것이 악입니다. 돈도 훔치고 이런저런 잘못을 한다고 치면 이것은 뿌리가 하나입니다. 이것은 결국 죄입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다음에는 이것을 통해서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다시 밑으로 내려가서 만나야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 죄를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두 가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절망하게 되고 다행히 어떻게 해서 그 죄를 그만 짓게 되면 자기자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내버려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회칠한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특히 신앙이 있다고 하는 분들이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에서 나누고 대화하면서 혹은 간증을 들으면서 이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솔직하게 자기를 오픈하면서 자기가 죄와 얼마나 많이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죄의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많이 갈등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10명 중 절반 이상은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이런 죄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는 이것은 자기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영적인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이런 오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죄와의 갈등을 싸우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느낀다는 것은 사랑이 있을 때 갈등을 느끼는 것이지 사랑을 버리고 나면 갈등을 느낄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사람하고 계속 살아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안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기에는 너무 괴롭습니다. 단점이 있습니다.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그런데 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헤어지고 나면 갈등을 느낄 것이 없습니다. 갈등을 느끼면 적어도 그 사람하고 갈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등등의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애착이 있으니까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과대포장해서 자기가 죄와 갈등이 있는 것을 많이 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싸워서 이긴 사람들은 그 갈등상태를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갈등을 말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것을 이야기하면서 영적인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실에서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그런 오류에 빠지시면 안 됩니다. 이런 모든 혼란이 어디에서 생기느냐 하면 이 사람의 머리 지성적인 혼란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정리해보면 깨닫기는 하는데 깨닫는데 갈등도 생깁니다. 그런데 죄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때에 어떤 심경이었는지 지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나눔) 깨닫기는 하는데 죄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성도1) 깨닫기는 하는데 죄를 이길 수 없는 저를 발견할 때 저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듭니다. 또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죄를 이겨야겠다는 의지도 자신도 없고 그 죄들이 오히려 내안에 녹아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어떤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더불어 주님이 내안에 오로지 참 주인이 아니라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성인군자 정도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 괴로움과 서글픔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성도2) 저는 365일 5분 대기조 같은 요즘 상황에 몸과 마음은 빠르게 지치고 월화수목금금금 인 듯 샬롬을 경험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주일에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매번 깨닫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멘하고 덮고 나면 일상과 업무가 생각나고 조금이라도 한가할 때는 우리 가족의 질병가능성과 가난한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뒤덮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알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실천적으로 붙잡고 살지 못하기도 하고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하는 전투에서 전의를 상실한 듯합니다. ‘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성도3) 코로나19로 인하여 일주일 중에서 학교에 2, 3일밖에 등교하지 않는 우리 아이, 학교 줌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들을 보면 칭찬보다는 혼을 내는 일이 일상생활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어제는 왜 그랬을까요?’ 라는 기도를 드리면 ‘왜 네가 키우려고 하느냐?’ 하는 호통과 함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부모이지만 내가 다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 뜻대로 하려고 했던 순간들이 생각납니다. 내가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내 아이를 더욱 사랑하시고 보살핀다는 사실이 정말 은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인 나는 아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과 앞으로의 성장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깨닫기는 하는데 죄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 참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평안이 온다는 뜻이 아니라 무뎌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충동이 있습니다. 아까 직장생활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보면 아침에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고 그러면 다시 마음은 확 이동해서 마치 휴식시간에 잠시 차를 마시고 다시 노동판에 내몰리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그리고 마음은 완전히 떠나서 일주일 동안 그러고 살다가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데 다시 월요일이 되면 마음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침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시간 혹은 또 밤에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좋은 시간에 하면 됩니다. 그럴 때 그 기도가 말씀과 기도가 훨씬 더 깊이 자기의 마음에 호소력 있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힘이 멀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수시로 마음속에서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고 찬송을 부르고 나면 금방 주일날 받았던 은혜, 아침에 읽었던 성경 말씀의 은혜가 쭉 떠오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이 하찮게 느껴지고 주님의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어떤 성도님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그렇게 하면 우리가 아싸가 되고 아싸가 아웃사이더입니다. 밖에서 주변을 도는 사람이 되고 진짜 불법을 행해서라도 돈을 많이 받고 성공해야겠다는 사람이 인싸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인싸는 무엇입니까? 망해갈 세상과 함께 거기에 자신의 영혼을 걸고 인싸가 되어가서 그 인싸가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인싸가 진짜 인싸일까? 아니면 세상에서 아웃사이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계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영원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싸가 되는 것입니다. 한걸음을 내딛어도 인생에 있어서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진짜 폼 나는 인생을 견고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희로애락은 이 세상을 살면서 겪어야하는 것들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어차피 인간은 모두 극복하면서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결국 30년 동안 제 곁에 있던 딸이 결혼을 하고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눈물이 날까봐 의식적으로 결혼식 하는 내내 딴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밤에 집에 들어가면 의식적으로 딸이 있던 방을 피해갑니다.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음에 애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시집을 안가고 있으면 그것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이런 모든 슬픔과 아픔, 고통과 기쁨 혹은 즐거움과 유쾌함들을 이 모든 것들을 함께 섞으면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차피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변해가는 세상이 전부인 것을 알고 매달리게 될 때에는 언젠가는 우리가 거기로부터 버림을 받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받아들이면서 순간순간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짧은 기도 너무 힘들 일을 만났을 때 ‘오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저는 요새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짐이 들 때까지 모든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목회하고 나서 이런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수년 내로는 요즘처럼 이렇게 감사한 때가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잠깨고 나면 잠이 들 때까지 마음의 구김이 없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인데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 제가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아니면 몸이 유난히 건강해서? 요즘도 아플 때도 있고 힘든 때도 있습니다. 은혜가 그것을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필요한 사고와 판단입니다. 첫째는 경청입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경청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그랬습니다. 악인의 꾀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가지고 있는 의미가 ‘카운스’입니다. Counseling 상담입니다. 뭐냐 하면 뭔가 하나님 안에서 이미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지혜를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수단으로써 성경을 읽고 성경만을 가지고 안 되니까 성경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니까 성경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주는 경건서적이 필요하고 그리고 설교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형제자매들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가 탐구입니다. 끊임없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책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라고 하는데 매일 읽는 책이 쓸데없는 책입니다. 먹고, 입고, 놀고 하는 것에 대한 책입니다. 그것이 영을 위해서 기분을 풀기 위해서는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그것이 주된 탐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그런 갈등을 느끼는 그것은 주님께 그대로 쏟아놓으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우리의 마음에 주십니다. 그래서 평화가 넘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불순종하면 할수록 사고의 혼란은 점점 더 증대되면서 마음이 요동치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이길 수 있는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지침은 죄를 잘 감시하고 자신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에 힘을 더 보태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안에 죄가 이렇게 있습니다. 이 죄는 하나의 경향성으로써의 죄입니다. 혹은 마음의 성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렇게 경사가 지면 연필을 놓으면 굴러갑니다. 이것은 성향입니다. 왜냐하면 물체가 중량을 가지고 있고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이렇게 경사진 곳에 놓으면 힘의 방향이 이쪽으로 가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입니다. 이런 애플 펜만 놓으면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연필을 놓고 굴려도 똑같이 굴러가는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놓아도 똑같은 법칙이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표에 보면 내 안에 내재하는 죄의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성향이 계속 강화됩니다. 그것은 그것을 타고 들어오는 경로가 있습니다. 나에게 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것을 죄는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나의 약한 부분을 파고 들어와서 나를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가 저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어쨌든 무슨 맥락이었는지 비트코인을 얼마 전까지 극찬하면서 8,000만원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 며칠 전에 디스를 했습니다. 그리고 테슬라 차를 이제는 비트코인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6,000만원까지 곤두박질 쳤습니다. 이제 한참 고점에서 더 오를 줄 알고 샀던 사람들은 지금 곡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한 개의 값이 2,000만 원 이상 떨어졌으니 말입니다. 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비트코인을 계속 투자할 때 5년 후에 그 사람들이 부자가 될지? 쪽박을 찰지? 저는 반반입니다. 저는 확고하게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문제를 삼는 것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식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내가 안 할 가능성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습니다.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저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느냐 하면 아닙니다.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1년 전에 주위에서 만나는 주식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이라면 나는 지금 항공사주식과 여행사주식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행사 주식이 코로나 이전만큼 올랐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전 국민의 80%가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끝나자마자 거의 러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디든지 가고 싶어 할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무착륙 비행기를 타고 한반도를 빙빙 돌다가 일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몇 십만 원씩 내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현명하다는 것은 아니고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하면 저는 그것을 사놓고 매일 그것을 확인할지도 모른다는 내 자신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사놓고 1년에 한번 정도씩 들어가서 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 두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투자하는 것이 죄는 아닌데 마음을 하도 많이 빼앗긴다는 느낌이 들게 되면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당신을 부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 방법은 아니고 다른 방법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해야지 자신의 신앙의 손해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림을 보시면 반드시 경로를 타고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성에 약한 사람은 기가 막히게 죄가 그것을 알고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와서 넘어뜨립니다. 돈, 또 돈과 이성에 대해서는 크게 유혹을 받지는 않는데 명예에 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기가 막히게 그쪽을 파고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이 자라면서 내재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을 더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욕입니다. 좁게는 성적인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고 넓게는 모든 자기가 주인 되려는 욕심을 가리킵니다. 욕망이 생깁니다. 그 욕망에 순응해서 욕망대로 죄를 짓습니다. 여기에 힘을 더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굴러가는데 요만했던 것이 야구방망이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굴러갈 것입니다. 그런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존 오웬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평화를 느끼는데 그것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도 없을 수 없지만 그러나 여전히 죄에 강한 성향이 있는데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거짓위안입니다. 그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죄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평화는 거짓평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한 혐오감이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가까이 계시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는 안 계신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죄의 혼란을 막는 또 다른 지침은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어떤 예수? 십자가를 참으시고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즉 고난과 영광입니다. 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희생하시고 그랬더니 주님이 영광스럽게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나도 고난을 참고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야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에 있어서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축이 있고 여기에 배가 묶여있습니다. 물결입니다. 배가 이렇게는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결코 육지에서 멀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예수를 중심에 놔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지속적인 감화를 받고 마음을 올곧게 지킬 때 지, 정, 의 사이에서 아주 조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상태가 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느끼면서 많은 일을 하지만 마음이 그 일에 빼앗겨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축을 꽉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간증하신 세분들께 부탁드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을 정해놓고 더 많이 기도하시는 것도 필요한데 마음이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수시로 주님을 생각하면서 짧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십시오. 그리고 찬송을 들으십시오. 아니면 성경구절을 외우십시오. 틈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찬송으로 이기십시오. 자 문제 정리 들어갑니다.
문제1) 비중생자가 종종 죄의 욕구를 이기고 도덕적인 삼을 살기도 합니다. 이 일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리고 그 한계는 무엇입니까?
답) 본성의 빛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본성의 빛을 주셔서 그래서 사회가 이렇게 무질서해지지 않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일반은총의 작요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지만 한계는 죄를 죽이는데 유효인이신 그 성령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문제2) 신자가 되었으나 죄 죽임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제일 큰 것이 무지입니다. 잘못된 교리, 신학적 균형을 잃은 구원관, 거룩함보다 세속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결국 죄 죽임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문제3)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 누리는 평화와 죄에 졌을 때 누리는 평화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 하나님과 화목을 통해 누리는 평화는 신령하고 항구적입니다. 죄에 졌을 때 누리는 평화는 일시적인 평화입니다. 자기가 정욕에 부글부글 끊습니다. 짐승 같은 욕구를 만족시키고 나면 잠시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다음에 더 큰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시간이 얼마 가지 않습니다. 또 죄를 지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 사람이 특정한 죄에 대해서 중독되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4) 말씀을 통해 죄를 발견했지만 죄를 사랑해서 죽이지 않을 때 신자는 어떠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까?
답) 영혼은 즉각적으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마음은 급속히 죄를 향해 넓은 마음으로 문을 열게 됩니다. 물 밀 듯이 죄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더 고통스러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제5) 죄와 갈등하는 사람과 실제로 싸우는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실제로 싸우는 사람은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있습니다. 효과적으로 죄를 죽이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힘보다는 은혜의 능력을 믿습니다. 자신의 결단보다는 성령을 의지합니다. 고민하기보다는 기도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갈등하는 사람과 실제로 싸우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문제6) 죄 가운데 있는 신자들의 지성적 혼란을 막는 구체적인 지침 다섯 가지는 무엇입니까?
답)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감시하라’ 말씀에 깨어있을 때 잘 감시됩니다.
‘죄에 힘을 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피라.’ 정욕입니다. 욕심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평안을 미워하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마음을 지키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고난과 영광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어떠셨습니까? 우리는 죄가 아주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체를 폭로하고 몰라서 헤매던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믿음을 따라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가르침 속에는 묵상할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책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읽으시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승리하는 생활을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평안한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