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제15장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녹취자: 이새봄
새벽에 천둥 번개가 쳤습니다. 참 오래간만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근데 밤중에 자다가 천둥 번개 소리를 들으면서 에드워즈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무서웠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가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 중 한 때가 바로 그렇게 천둥과 번개 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창가에서 비오는 대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랬습니다. 어쨌든 비가 오고 나니까 공기는 훨씬 맑아졌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이제 끝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말씀의 세계를 탐구해보겠습니다. 자 15장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제 우리가 이 책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지배적인 성경구절이 로마서 6장 14절에 나옵니다. 한번 우리 반추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까? 시작.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아멘.
자, 죄에 빠졌다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될 때 어떤 심경이었는지 한번 지체들의 경험을 들어보겠습니다.
“작년에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제 안에 웅크리고 있던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에 아주 좋은 빌미를 주는 환경이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제 안의 걱정과 염려의 불신앙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작년 가을 전도학교를 통해 다시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나의 복음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증거하고 싶고 다시 그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내고 싶은 마음을 성령께서 제 마음에 불어넣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작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기쁨과 자유와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거의 제대로 된 대화나 소통 없이 자라난 저는 하나님도 육신의 아버지처럼 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일 거라는 생각과 그로 인해서 머리로 알고 있는 생각들과는 달리 정서적 또는 감정적으로 몰려드는 오해와 반감들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간들이 습관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낙심과 반감의 올가미는 강력했고 사면이 갇혀있는 듯 하다고 느끼고 있었을 때 어느 날 습관적으로 반복하던 성경 통독 중에 마치 어둠 가득한 방에 문을 열고 들어오시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한 능력으로 저항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가지고 오해의 사슬들을 제 마음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산들을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며’라는 이사야 54장 10절의 말씀이 비참한 자를 오래 참아주시는 하나님이 참된 아버지 되심을 깨닫게 해주시는 소중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구역모임에서 어느 성도님이 본인은 살면서 죄를 별로 지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많이 지었는가, 너무나 많은 죄들이 생각났습니다. 지난달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부끄럽게 지은 죄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머리에서 인식할 수 있었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 같은 죄인도 받아주시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죽이시면서까지 어떻게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저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듭니다.”
자, 그 죄에 빠졌다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된 세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또 그 사랑으로 말미암는 감격, 이런 것이었습니다. 결국 완전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죄를 지은 사람은 바로 그 지은 죄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의 이야기를 한번 전개해보겠습니다.
자, 죄가 있고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는 복음이 있어서 복음을 통해서 인간은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 베푸시는 기회로 삼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 지혜, 하나님의 지혜의 통치 속에서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좋게 지으셨는데
왜 죄가 들어왔을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반하는 일이고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게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다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지를 않는가?”라는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 신앙을 가지면서 철학적 사유에서 벗어나게 되고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좋은 것을 좋게만 하실 뿐 아니라 나쁜 것까지도 좋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이시다, 이런 결론이 도달하게 됩니다. 참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죄 속에서 인간의 어떤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사·밤』을 좀 꼼꼼하게 읽으신 분이라면 인간이 결국 위대하기 때문에 죄도 짓는 것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철학적인 이야기는 접어둡시다. 그럼 어떻게 죄가 은혜의 기회가 되는가, 이것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는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만 가지고 보면 이런 뜻이잖습니까? 율법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아라” 이렇게 하실 때부터 이미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아주 체계적으로 세워진 것이 이제 십계명을 통해서 세워지고 나머지 성경 전체의 율법은 바로 그 율법을 확대해서 해석하고 각각 서로 다른 상황에 적용한 것입니다.
“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법이 들어와서 죄를 더 짓게 됐다는 뜻도 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죄가 죄인지를 몰랐는데 율법이 들어옴으로써 죄로 확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도로를 새로 깔고 그다음에 건널목이 그려지기 전까지는 아무런 선도 없으니까 이리저리 건너다닙니다.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뚜렷하게 선이 그려지고 신호등이 생겨지게 되면 다른 데로 건너는 것은 도로교통법 위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니”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죄가 더한 곳에는 더 많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죄가 어떤 죄여야 하냐면 신자가 사랑하는 죄가 아니라 그에 대항해서 싸우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여야 하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시면은 이렇게 조건이 있는데, 신자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죄가 아니라 지금 그것을 미워해서 대항하고 싸우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 그것 때문에 신자는 자기의 힘으로 죄와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죄를 죽이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의 사람들은 모두 죄의 괴롭힘을 당해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자, 죄의 존속을,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이 죄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아주 큰 복음의 비밀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한 사람이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제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점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데 모범적인 사람이겠죠?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이렇게 다른 길로 오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여기서 다시 회개하고 용서를 경험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들이 성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죄가 죄를 죽이고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계시고 구원받은 자녀지만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왕으로서 옛날처럼 우리를 종 삼아서 통치하지는 못하지만 영향을 끼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영향력을 키울 때 그건 상당한 큰 힘이 되어서 그래서 비참한 탄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심히 괴로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가 남아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살아갈 때마다 이 죄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있으니까, 그 빛으로 비추어 보아서 자신이 마음속에서나 행동에서나 죄가 역사하고 있다는 거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서 잘못 선택하면 그냥 그 죄를 따라가 버려서 그냥 죄악된 삶을 살아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는 이렇게 하지 못하고 이 죄와 씨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기도를 하면서 결국 이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은혜를 받는 통로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 속에서 은혜 많이 받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 잘났다고 자랑할 때에 은혜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의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안타까워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의 큰 위로와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죄의 존속을 은혜 베푸시는 기회로 삼으신다, 이런 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 우리 안에 남은 죄를 선하게 사용하신다, 이러는데 죄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니까 죄 자체만 역사하도록 두면 결코 선한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결국은 죄의 결말은 악입니다. 그래서 이 짝으로 죄와 악이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영어로 옮기면 씬(sin)이 되는 거고 악은 이블(evil)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어에서 씬이라는 말과 크라임(crime)이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있는데 이거는 형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니까 이러한 죄를 저질렀을 때는 이건 형사처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그래서 토스트에프스키의 죄와 벌 그럴 때, 씬 앤드 퍼니시먼트(punishment)가 아니라 크라임 앤 퍼니시먼트입니다. 그럼 이 씬은 뭐냐, 이건 아주 내면적이고 내적인 죄입니다. 그래서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저 빌딩을 사기를 쳐서 내가 갖고 싶다, 내가 아무리 수백 번 생각해도 그거를 상상했다는 사실로만은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양심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바깥으로 행동으로 드러났을 때의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는, 성경에서는 크라임보다도 씬을 더 관심사로 삼습니다. 더 관심사로 삼는다기보다는 본질적인 관심을 여기다가 둡니다. 왜냐하면 이 씬이라고 하는 뿌리에서 여기에서 크라임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없애지 않고 이걸 내버려두는 것은 결국은 임시 조처일 뿐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이 씬, 결국 이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거를 결국 성령의 은혜로 사라지게 하셔서 그래서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사랑으로 바꿔서 그래서 여기에 자비의 열매를 맺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정리를 하면 우리 안에 남은 죄를 선하게 사용하신다고 했는데 죄의 자체가 선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선하게 하신다, 이 뜻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이쪽 그림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오냐 하면 결국은 죄를 선택합니다. 그때는 즐겁습니다. 이것은 결국 반드시 고통을 가져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고통을 안 느끼는 인간은 없고 만약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양심의 화인을 맞은 인간입니다. 절대 구원받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즐겁지만 반드시 고통을 가지고 온다, 결국은 그 고통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면 구할수록 결국은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백기를 들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마지막에 의지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모두 경험한 이야기들입니다.
자,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의지하였던 때는 언제였을까요? 또 그렇지 않던 마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마음이 되었는지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학생들의 영혼을 책임져야 하는 교회학교 교사로 부르셨을 때 어찌 나같이 죄 많은 사람이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일을 감당할 수 있냐며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반문하며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 많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음을 곧 깨닫게 하셨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쳐서 죄와 싸워 이겨내는 승리를 맛보게 하시고 그 힘을 의지해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 또한 풍성한 하나님이 주시는 자원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끄는 교사로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교사로서의 헌신의 삶은 제 자신이 더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되었고 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나 사람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풀리지 않고 갈등이 다시 반복되는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의 무능함을 보며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결코 이것이 풀리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 나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과 선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의지했던 때는 가족들이 병에 걸렸을 때였습니다. 몇 달 전 작은언니가 신경 손상을 당해서 손가락이 마비되는 일이 생겼었고 또 조카가 난소에 혹이 생겨서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조카가 수술한 그 다음 날 이번에는 여동생이 허벅지에 약 20cm 정도 되는 혹을 제거하는 그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족들이 연달아서 아프고 질병에 걸렸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일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 어쨌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던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았더니 세 분 다 공통점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세분은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그 어려움을 믿음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 평화롭고 잘 되기 때문에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뭔가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때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라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뭐 솔직히 얘기해서, 아니 남편이 아파서 죽게 되어도 기도 안 하는 아내들도 있는데. 없다고요?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뭔 상관입니까? 얼마나 먼 사이입니까? 그런데 그 조카가 병에 걸렸을 때 그렇게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내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저분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가장 가까운 사람도 타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얼마나 가깝습니까? 그런데 돌아볼 마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넘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굶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마음이 찢어지는 겁니다. 은혜는 그렇게 우주적인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마음이 되었느냐 하면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든 것입니다.
설명을 들어볼까요? 자, 보십시오. 죄가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죄가 능력을 발휘할 때 하나님은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약속하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시는 겁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전쟁이 일어났는데 남의 나라 군대가 와서 우리는 그냥 그늘 아래서 다과나 먹으면서 노는데 남의 나라를 군대가 와서 싸워주는 게 아니라 무기를 주는 것입니다. 싸우라고.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표를 보시면 죄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조건이 뭡니까? 믿음과 순종으로 그 죄와 싸워 이기려고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은 죄에 복종할 때이지 죄와 싸우고 있는 한 결코 죄는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와 싸우고 있을 때, 그때는 죄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마지막까지 죄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항복하는 그 순간 죄에 저항하며 싸울 수 있는 은혜도 함께 사라지는 겁니다. 그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죄보다 큰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
자, 한 사람이 지금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이 지금 정죄하고 있는 겁니다. “너는 이런 죄를 지었다.” 이렇게 고발하고 그리고 이제 정죄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고발과 혹은 이걸 송사라고 하는데, 이제 법정의 판사에게 제기를 하는 겁니다. “이 인간이 이런 죄를 졌습니다.” 그리고 송사하는 겁니다. 이 역할을 하는 게 있고 그 다음에 정죄, 이거는 ‘이런 정도의 벌에 해당한다’ 하고 정죄를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거는 양심이 하는 기능이고 이거는 율법이 하는 판결입니다. 이거는 말하자면은, 여기 나옵니다. 고발이고. 이거는 판단입니다. 합당한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일들이 자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끔찍한 죄를 지으면 자살하잖습니까? 끔찍한 죄를 지었을 때 자살하잖습니까? 그게 자신의 양심이 “너의 죄는 죽음에 해당한다”라는 판결이 반영된 겁니다. 물론 자살하는 모든 것이 다 그렇지는 않고 다양한 마음의 기재들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잖습니까?
그러나 이제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자살을 할 때 심리 자체가 그 엄중한 율법의 판단, 자기 마음에 있는 양심 자체가 율법이 되어서, 그래서 이게 이 두 개가 그러니까 동전에, 이렇게 보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겁니다. 이 두 개, 양심 율법 두 개가. 그래서 양심은 고발하면서 동시에 그 양심이 율법이 되어서 판단을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죄가 되는 겁니다. 그때 너무너무 살고 싶습니다. 한 번 잘못한 걸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해결의 길을 찾는 겁니다.
자, 이런 사람을 위한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함께 읽어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죄의 가책의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정죄 받을 죄인을 향한 분에 넘치는 호의. 좋은 뜻이라는 겁니다. 자비, 이것은 슬픔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은 비애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비애. 이 애 말고 이건 그냥 슬픈 거고 이거는 슬픈 사랑, 슬픈 사랑입니다. 슬픔을 동반한 사랑. 그 다음에 이거는 오래 참으심,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이게 다이아몬드와 같이 사랑의 여러 측면들을 드러내는 겁니다. 자, 문제를 정리해드리겠습니다.
1번, ‘죄의 존속을 은혜로 기회로 삼으십니다. 다윗의 예로 생각해 봅시다.’
그 범죄와 그것을 회귀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의 계시를 이해함에 있어서 최고의 담지자가 되었다. 지니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이 과연 3000년 전에 사람이 맞을까 할 정도로 복음에 대한 풍부한 이해들을 갖게 됩니다. 시편 23편 설교를 들어보시든지 책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2. ‘남아 있는 죄가 아름답게 쓰이는 세 가지 이유?’
첫째, 어려움을 통해 은혜를 구하게 됨. 자기를 포기하게 됨. 하나님을 의지하게 됨.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의지하게 됨.
3. ‘죄와 싸우는 것은 헌신과 순종, 성실과 부지런함을 요구하기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소망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으로 싸우고자 할 때 이길 힘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틀림없는 약속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죄와 싸우고자 할 때 능력이 모자라서 지는 법은 없다. 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공급이 약속돼 있기 때문에.
4. ‘구체적으로 어떻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은혜가 넘치게 하십니까?’
죄의 정죄하는 율법의 능력을 종식시키심. 어떻게 종식시키겠습니까? 이건 네가 죄를 지은 것은 맞다. 그러나 너의 죄를 내가 모두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너는 나를 믿고 이 복음을 의지하면 너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두 번째, 무한한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래서 죄인들은 자신이 죄인이었던 사실을 오히려 부끄럼 없이 자랑하는 이유는 죄가 자랑스러워서 죄 때문에 넘치게 된 하나님의 은혜가 자랑스러워서 그리하는 것입니다.
5. ‘신자가 사죄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를 나누어봅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은혜는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다음에 자비는 하나님이 슬퍼하기까지 나를 생각하신다는 것.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토록 오래도록 참으셨다는 것. 이게 결국은 사랑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통해서 이 세 가지를 필요로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커서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자, 여러분 이 예쁜 책을 모두 받으셨죠? 그죠? 근데 이 책에 굉장한 비밀이 책에 숨어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보면 은색이잖습니까? 제가 시범 보여드리겠습니다. 핸드폰을 꺼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찍으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찍는 방향과 조명에 따라서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찍힙니다. 한 번 실험해 보십시오. 되게 신기합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사진 보십시오. 신기하죠? 여러 권을 찍었는데 다 다르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한번 찍어서 한번 놀이를 한번 해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이걸로 공부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신문에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밑에 있는 그 다음에 온라인 북 콘서트입니다. 그래서 6월 19일날 이제 우리가 전도를 겸한 또 성도들 모두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북콘서트를 합니다. 6월 19일날 오후 8시에. 네, 이때 이제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님도 오셔서 게으름에 대한 심리적인 설명을 해 주실 것이고요. 또 요즘 2030대들에게 인기가 많은 팬텀싱어에 유명한 출연자들도 그리스도인들인데 오셔서 봉사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들 기도 많이 하시면서 다음 공과에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