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제16장 죄의 지배에 작별을 고하며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녹취자 : 허혜숙
그 동안 죄와 은혜의 지배에 대한 교리를 우리가 꽤 오래 공부했습니다. 이 설교를 처음 들었던 분들이 참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 공과 공부를 마치면서 이 공부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성도1: 크리스찬으로서 삶의 목적이 거룩이고 그 거룩에 있어서 가장 핵심 이슈 중의 하나가 죄 죽임이라고 한다면 죄와 은혜의 지배 책을 통해 얻게 된 것은 마치 전자기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사용설명서처럼 죄 죽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지 알려주는 훌륭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도2: 이번 공과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에 빠지는 과정, 은혜가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의 유혹과 싸움, 회복 후 다시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신앙생활을 체계적으로 알게 되었고 제 신앙생활이 죄와 싸움 중인지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상황인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성도3: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을 통해 제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고 처방을 받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저는 제가 충만한 은혜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죄의 지배아래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책을 통해서 제가 은혜에서 많이 미끄러져 있으며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제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공과를 계속 공부를 하면서 책의 내용이 저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괴로운 마음도 있었지만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가면서 공부를 하면서 다시 죄에 대한 민감한 마음도 다시 살아나고 죄를 경계하게 되고 또 저의 연약한 부분에서는 유혹이 올 때 처음부터 뿌리치고 죄를 죽이는 일에 이전보다 분투하며 더 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되었고 미약하지만 죄를 이기는 경험을 하면서 조금씩 회복하는 은혜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형제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죄 죽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산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데 새벽에 뒤척이다 보니까 뭔가 허벅지 사이에 묵직하고 굵직한 무엇인가가 턱 걸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한 마음에 툭툭 치다가 이것이 자꾸 움직여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뜨고 이렇게 보니까 엄청나게 커다랗고 굵은 작은 나무 굵기 정도 되는 뱀이 허벅지 사이로 해서 품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직 뱀은 자기의 위험을 모르는지 내 몸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바로 옆에는 마침 야영도구로 쓰던 아주 날카로운 좋은 칼이 있었고 뱀은 바로 자기 옆에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었습니다. 오른손으로 칼을 쉽게 잡을 수 있었고 재빠르게 찌르기만 하면 정확하게 뱀의 머리를 관통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위치였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당연히 답은 재빨리 칼을 들고 정확하게 숨골 사이에 칼을 내리 꽂으면서 뱀을 찔러야 하j는 것입니다. 몸부림이야 치겠지만 결국은 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형제 말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요즘 그 뱀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찌르고 싶지 않은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결국은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잘못이라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안일하게 있고 싶은 그런 마음이 결국은 미끄러지는 마음이 아니라 미끄러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죄와 은혜의 지배 16과를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살아야 한다. 항상. 그것으로 요약이 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문제1) 은혜의 지배 아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의하면 빛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직역을 하면 그들, 그들은 혹은 우주라는 말도 되고 세상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들 가운데서 발광체들로 나타나며, 그러니까 이 성경이 쓰여 질 때 기록자의 마음에는 캄캄한 밤하늘에 우주, 즉 코스모스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 혹은 빛을 발하는 우주의 발광체들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유비를 하자면 그들 가운데 캄캄한 세상인데 빛이신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빛들로 나타나며, 그리스어 원문에 발광체들로 나타나며 그랬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산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발광체는 아닙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가 발광체라면 우리는 그 발광체의 빛을 받아서 빛을 내는 그러한 우주의 사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을 보면 신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받지 못한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이 세상을 향하여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유일한 빛을 받음으로서 우리도 그 빛을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유일하신 빛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말했는데 그 빛이 한 빛이 아닙니다. 어떤 빛? ‘한 빛’이 아니라 ‘그 빛’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빛은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일반은총의 빛, 혹은 인간 본성의 빛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짐승 같은 약육강식의 극단적 불행은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길을 걷다가도 저기 따라오는 사람이 나를 잡아먹을까봐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살해당할 위협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사람들 마음 안에 여전히 한 빛이 있기 때문에 그 빛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빛’은 아닙니다. ‘한 빛’이 일리라면 ‘그 빛’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신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혜로 그 빛을 추구하면서 살 때 그 사람이 찬란한 빛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대게 청교도들은 두 가지를 이야기 했는데 저는 세 가지로 나누고 싶습니다. 본체적 영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 본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당신의 독특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본체적 영광체입니다. 발산적 영광은 어느 한 장소에서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처럼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라고 이야기하는데 구약에서 흔히 쉐키나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에서 불을 보았지만 그 불은 타지 않은 불이었습니다. 성질이 다른 우리가 흔히 밥을 해 먹는 그런 불과는 성질이 다른 그런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든 안 계신 곳이 없지만 특별한 때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바로 거기 계신 것처럼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효과적 영광은 이것이 중요한데 앞에 있는 두 가지는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시는 영광이라면 세 번째는 그런 영광의 하나님을 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저런 아름다운 분이시구나 라고 것을 인정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을 가리켜서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이 세 번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주님 할 때에는 첫 번째 본체적 영광을 가리키고 주님이 여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아니면 하나님이 여기 임재하심은 두 번째 발산적 영광을 말하지만 효과적인 영광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삶과 언어, 인격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 영광입니다.
영어의 표현 가운데 나는 너를 찬양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나는 너를 찬양한다라는 뜻이지만 정확한 번역은 내가 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도 나를 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 반대는 영광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가 살아가는 삶이나 인격을 보면서 ‘아이고 하나님이 어디 있어? 저런 하나님이라면 내가 안 믿겠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빛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희랍어라는 말은 한자어로 희랍어라고 부르고 예전에는 제가 저 말을 좀 썼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구요. 헬라어라고 하는 것도 비 그리스도인들은 ‘헬라’라는 말을 잘 모릅니다. 그리스라고 해야 잘 압니다. 고대 그리스입니다. 현대 그리스어도 많이 다르긴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의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여 빛으로 나타나며’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체 구절을 직역을 하면 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아서 결함이 없는 자녀로서 그렇게 빛들로 이 세상에 혹은 우주에 나타나며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범법 혹은 범죄가 있다는 뜻이고 섞였다는 것은 불순한 것이 들어왔다는 뜻이고 이것은 망가진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전혀 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불순한 것이 없고 일체의 망가진 것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없지만 그것이 적고 작으면 작을수록 빛은 더 찬란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의 바라보면서 가야할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보겠습니다. 하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은 명사로 사용을 합니다. 우리의 거룩, 거룩을 위해서 그런데 그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가 우리말에서 형용사입니다. 정확히 거룩한 생활 하면 어법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문법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습관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생활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거룩한 생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목적적인 이렇게 형용사 어구를 하나 더 붙이듯이 그렇게 한 것이 거룩한 이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명사를 사용하고 싶으시면 ‘우리의 거룩’하면 안 되고 ‘우리의 거룩함’ 이렇게 쓰셔야 됩니다. 자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거룩해지지 않으면 빛들로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아직까지도 선한 구석들이 남아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시기에는 어그러지고 거스른 세대입니다. 이것은 질서에 어긋났다는 뜻이고 이것은 하나님께 대향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모두 마음이 죄로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어두우니까 여기 빛이 나타나면 찬란하게 비취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없다, 어그러진 세상이기 때문에 질서 있게 살 수 없다, 세상이 거스르는 세대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기회를 핑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두운 세상이 어두운 밤하늘이 별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회인 것입니다. 왜? 낮에는 별을 볼일이 없습니다. 별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지금도 다 있습니다. 제 자리에, 그리고 땅에는 천체의 질서에 따라서 정확하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별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자는 구원 받았지만 아직은 여전히 마음 안에 죄가 남아있는 사람이고 승리했으나 아직은 더 싸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성, 정욕이 있고 매일 실패합니다. 내적 부패성입니다. 이것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될 때 이 사람이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처럼 그 형상을 본받은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우리가 따라야 할 인간의 참 도리가, 참 모습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윌리암 에임즈라고 불리는데 당시에 라틴어로 부르면 아메스가 됩니다. 영국 태생인데 화란에서 활동을 했던 신학자였습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쓴 책이 ‘신학의 정수’라고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간략하지만 초기 형태의 교리서인데 아주 잘 되어있습니다. 아메시우스가 신자가 성화에 힘써야 할 이유를 다섯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거룩함이 없으면 주를 뵈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성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성화를 통해 얻는 거룩함이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 그 완전한 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를 선택 구속 소명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를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하셔서 완전한 사귐이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거룩함은 영광과 영원한 축복 중 작은 부분이 아니라 거룩함이 없으면 나머지가 아무 의미가 없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성화 없이는 진정한 믿음이나 칭의, 혹은 양자됨도 증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진정으로 칭의받은 사람이라는 것도 그가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고 또 그 진전을 이루는데서 진실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아래서 거룩하게 살아야지만 우리가 빛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신자가 결국 죄의 지배아래 살면서 너무나 많은 인생의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4~17)
자, 긴 공과를 끝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제가 바라기는 공과를 모두 끝냈으니까 한 번 날을 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통독을 하면 아마 많은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명료해지실 것입니다. 더 좋은 방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내용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더 큰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긴 공과를 끝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감동이나 은혜가 있었다면 한 가지씩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성도1: 죄와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작은 순종을 보시고 죄를 미워하고 분투하는 마음과 은혜의 방편 특히 마음을 다해 지속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죄를 죽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총체적인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죄의 세력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신자를 붙들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성도2: 죄와 은혜의 지배를 통해서 나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시간이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살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강해져 갈 수 있는 말씀과 기도만이 죄를 이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3: 공과를 하면서 나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저의 모습이 죄의 지배아래 있는 모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간헐적인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죄의 지배 아래 있었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제게 더 많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 한 번 신앙생활이 미끄러지고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면 들어갈 때는 쉬운데 나올 때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주자주 미끄러지는 사람은 언젠가는 크게 미끄러집니다. 자주자주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포기하면 제일 불행해지는 사람은 바로 자신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몰랐을 때는 내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 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주셔서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죄에 빠질 때 우리가 미끄러져 어둠속에 지내 불신자와 똑같이 살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무슨 대안이 있겠습니까? 인생이 무겁다고 자꾸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원래 그런 것입니다. 혼자 고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래서 고난과 슬픔을 이기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분명이 아픔이 있는데 아픔보다 큰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징징거리지 마십시오. 미국의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한두 번 그런 말을 할 때는 듣지만 더 이상 말하면 그 사람들은 짜증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소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주체성을 가지십시오.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리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르면 모른다, 알고 싶다.
제가 교인을 많이 심방하던 때 아주 심하게 야단칠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안 믿으려면 차라리 신앙을 버려라. 그리고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시험해 보아라, 목사가 신앙을 버리라는 말이 진짜 버리라는 말이겠습니까? 정신차리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을 볼 때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사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연약한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 않냐 그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주님 앞에 제가 연약합니다. 혹은 지체들에게 내가 이러이러한 점에 있어서 매우 부족합니다. 날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뭔가 똑 부러져야 합니다. 뭘 원하는지도 알 수 없게 징징거리면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불평하는 것을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안에 남아있는 은혜까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이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헤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용기를 내야 합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은혜의 도움을 구할 때 놀랍게 새 힘을 주십니다. 문제를 정리하겠습니다.
문제1) ‘빛들로 나타나며’의 그리스어 번역은 ‘발광체들처럼 빛나게 하시려고’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진실한 신자가 거짓된 삶을 사는 적은 없습니다. 거짓된 신자도 진실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진실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적은 있습니다. 외식입니다. 위선입니다.
문제2)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빛의 어원적인 의미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빛’ 히브리어로 ‘오르’ 그리스어로 ‘포스’입니다. 언어만 다르지 같은 말입니다. 빛입니다. 이 빛이 여러 가지 뜻으로 성경에 쓰이는데 하나님을 빛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빛으로 말하기도 하고 우리를 빛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종합하면 지성적인 빛이고 윤리적인 빛이고 신학적인 빛입니다. 신학적인 빛이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삶으로 인격으로 말로 그래서 그 진리의 영향을 받아서 바로 그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을 빛으로 삼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그리스도를 빛으로 삼아라.
문제3) 흠 없고 순전하게 되면 빛으로 나타납니다. 신자가 빛으로 나타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결국은 타락한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내적인 부패성이 거기에 부화뇌동합니다. 이러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삶은 기본적으로 진리가 지배하는 삶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문제4) 은혜의 지배아래에 있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빛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낮에 등대가 여전히 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대낮에는 등대가 불빛을 안 비추는 것 같을 것입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나무를 계속 때서 등대에 불빛을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음 사람들은 고래 기름을 체취해서 등불을 계속 밝힘으로서 등대에 불빛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석유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 사람이 거기에 살면서 등대를 켰던 것입니다. 그 때에는 당연히 낮에는 불을 안 켜고 밤에 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좋아지면서 축전기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축전기가 나오니까 등대 관리가 매우 요긴했습니다. 왜? 며칠에 한 번씩 배가 가서 축전기를 갈아 끼우고 오면 됐습니다. 그런데 타이머가 없어서 한 번 켜 놓으면 밤이나 낮이나 계속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낮에는 햇빛이 너무 밝기 때문에 아무리 거기에서 전기불이 들어와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진가는 어두운 밤에 잘 나타납니다. 더욱이 달빛 찬란한 밤에는 별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칠 때에는 밤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 도대체 포구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때 비취는 하나의 등대는 그들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시간을 설정해 놓습니다. 그래서 일출 일몰 시간에 맞춰놓으면 낮에는 안 켜지고 밤에 켜집니다. 더 좋은 장비도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것은 감광기입니다. 어두워지고 날이 흐려지면 자동차 라이트가 들어오고 터널에 들어가면 들어오듯이 등대도 그런 식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이 쓰여질 때만 해도 석유도 아닌 기름으로 식물성 기름이나 짐승의 기름이나 고래의 기름으로 등대를 태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놓고 보면 세상이 어그러지고 뒤틀렸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빛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해서 대서사시 같은 죄와 은혜의 지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