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허무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1-4)
녹취자: 김경애
목사님) 성도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날이 매우 더워졌습니다. 여름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햇볕이 따갑지만 저녁에는 선선해서 걷기도 좋고 묵상하기도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두 번째 시간으로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허무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질문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눔1) 현대인들이 소확행을 통해서 삶의 허무와 불안을 달랩니다. 여러분에게도 소확행이 있습니까? 있다면 나누어 보고, 그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생각해봅시다.
성도1) 소확행을 목사님 설교에서 처음 듣고 찾아봤습니다. 임창정 노래도 들어보고 유튜브 동영상도 보고 뜻과 분위기를 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서 기원했음을 알았습니다. 저의 소확행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토요일 아침 식사 후 아들과 ‘걸어서 세계 속으로’ 보기, 아침 수영을 같이 한 회원들과 잡담하며 샤워하기, 일 년에 한두 번 콘도를 잡아 여행하기입니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획일적인 삶의 오아시스가 되어준 것들이었습니다. 저의 소확행은 감당할 수 있고 주변사람들이 인정하는 수준의 것들이라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삶의 허무와 불안을 달래거나 잠시 잊게 해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성도2) 온갖 부귀영화를 원 없이 누렸던 솔로몬 왕은 하나님 없이 살아간 인간사 전부와 만물의 존재가 헛되고 헛되다고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때 모든 일들이 의미가 있고 인생의 허무에서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참으로 아는 자만이 나그네의 삶 또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주시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특히 날마다 건강하게 마주 보게 되는 가족들 코로나로 인해 오래간만에 자유롭게 만나는 친정 언니들과의 즐거운 식사교제, 화요여리고 전도를 통해 지체들과 함께 복음 전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 것 또 오늘 살아있게 해주셔서 아름다운 봄날을 만끽하게 해주신 은혜등 생각하면 할수록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 소확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충분한 인터뷰는 아니지만 양쪽의 서로 대조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이 설교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순간순간 살아가는 삶에서 느끼는 행복감과 만족감을 누리는 것이 나쁘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오늘날 멀리 퍼지고 있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들을 한번 용어를 통해 한번 살펴보려고 한 것입니다. 삶 자체가 큰 것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작은 것, 눈에 보이고 감각적인 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에 거기서 그것이 가장 믿을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확’이고 행복은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묶여있는 것이 오늘날 소확행이라는 용어로 나타난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 어떻게 하늘의 영원한 의미에 비추어볼 때 행복한 삶을 살면서 또한 대지 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면서 또 이 대지 위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겠느냐는 두 가지 조화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좋은 만남, 좋은 시간, 즐거움, 이런 것들을 정죄하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확행의 연속이 되어야지만 인생이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인간으로서 너무 대지만을 생각하고 하늘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설교를 좀 더 꼼꼼하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대지라는 말은 두 발을 디디고 사는 곳 그리고 보이는 세계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행실인데 하늘은 내가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존재의 토대, 내가 이렇게 잠시 살다가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하늘이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초월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니체 같은 사람은 여기서 요것만 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고 그 사람들을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금욕주의자들과 시온주의 사람들은 이쪽을 인정하지 않고 이쪽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은 불완전한 세상이고 잠시 지나가는 곳이고 하늘의 모형들이기 때문에 여기는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고 결국은 여기 땅이라는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세계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오늘 잠언 본문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성경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의 토대와 삶의 목적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았지만 여전히 보이는 세계 속에서 두발을 딛고 살고 있기 때문에 있는 현실을 긍정하고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도서 2장 11절이 나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너무 괴로워합니다. 괴로워하면 슬픔이 치밀어 오릅니다. 근심과 수고로 얼룩진 삶을 삽니다. 그러면 괴로움과 슬픔을 그런 슬픔 속에서 근심과 수고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해 아래에서 뭔가 목표를 세우고 산다는 모든 것, 바쁘게 일하고 살아가는 것이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바람이 손에 잡힐 리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무익한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허무함은 인생에 늘 따라다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전도서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앞에서 보는 것처럼 이렇게 하늘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을 때 그래서 자기의 존재의 토대와 삶의 목적에 대한 기초를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대지에만 몰두하게 되는데 그때에 자칫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쾌락에만 치우치게 되고 그러면서 먹고, 마시고, 지위를 얻고, 재산을 가지고 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들로 인생의 추구하는 바를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까 나온 그림처럼 마지막에 인간이 가는 것은 죽음인데 이런 것들은 이런 인간의 허무에 대해서 궁극적인 해결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의 번뇌가 깊어지게 될 때 유혹을 받는 것이 쾌락입니다. 쾌락은 통증을 잠시 잊게 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쾌락을 찾기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현대의 풍조가 이런 자신의 삶의 기반에 대해 답할 수 없는 허무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설교에서 나온 양치기의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허무하다는 현실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이 밀려오는데 그 생각을 계속하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써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연히 신을 의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니체는 생각했습니다. 신이 있지도 않다고 보았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버려두거나 신을 인정하면 다시 그런 종교적인 것에 빠져서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또 그런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나서 반대쪽으로 가면 소위 이야기하는 데카당 즉 허무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퇴락한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도 말아야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굳이 인간은 현실 이상을 생각하는 것 그런 근거 같은 것을 묻는 것 자체를 하지 말자. 그런 주장이 바로 뱀 대가리를 씹어버리는 동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묻고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세계에 하나님으로부터 지은바 된 인간으로서 이 세계에 있기 때문에 세계를 창조하고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결국은 많은 불행을 만나고 고통을 당해도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육신의 쾌락에 매몰되는 대신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인간으로서 여기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그 의미를 가지고 확신 가운데 현실의 삶을 헤쳐 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인생관입니다.
대지 위에서의 삶은 아무리 소확행을 추구해도 항상 좋은 것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기도 하고 가난으로 인해서 불행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질병에 걸려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이 요양원에 누워있는 신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으로 끝난다면 이전까지는 명랑하게 뛰놀면서 살 수 있겠지만 이런 고통이나 이런 불행이 닥치고 질병까지 걸리게 되어서 삶이 무너지게 될 때 그때에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면서 무수하게 이웃들의 불행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불행이 이웃들에게 일어났으면 내게도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내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엄연히 있는 현실에 눈을 감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연세 많이 드신 분들이 건강검진을 돈을 안 내도 국민건강보험에서 받을 수 있는데 안 가십니다. 왜 안 가시느냐고 물으면 무서워서 못 가신답니다. 갔다가 만약에 덜컹하고 어떤 병이 걸렸다고 판정되면 무서워서 어떻게 하느냐는 어른들을 여러분 만났습니다. 그것이 현실을 회피하는 인간의 심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현실을 똑바로 계속 들여다볼 때 오히려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이지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막상 그런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삶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나에게 이런 이웃이 당한 사고, 질병, 그리고 가정의 여러 가지 불행한 일 모든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를 더 많이 느낄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이렇게 살아 숨 쉬고 가족들과 함께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다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렇게 많이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다가 그런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삶의 뿌리까지 흔들리는 매우 커다란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학자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남의 죽음은 그렇게 위로하고 평안하게 눈을 감게 도와주면서 자신의 죽음은 죽어도 못 받아들이면서 몸부림치는 그런 모순이 일어나는데 왜 일어납니까? ‘여태까지 내가 말하는 것은 남의 죽음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것은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까 그렇게 엄청난 충격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지혜는 이것입니다.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하고 어려운 일들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 내일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원래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주님을 의지하여 그것 또한 이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조금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혹은 불행해져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인생에 대한 견해입니다.
자, 그러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전도서 3장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이 구절을 보면 논리가 조금 이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그런데 앞에서 뭐라고 합니까? 허무하고 허무하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했는데 진짜 좋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일에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너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네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허무한 세상에 살면서도 내가 오늘 대지 위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가 즐거워하는 일에 몰두하며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몫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유업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기업을 받게 되는데 어느 땅은 누가 받고, 누가 받고, 분배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 기업이 있기 때문에 그 기업 위에서 자기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대지 위에서 사는 삶이 그만큼 중요하고 거기서 모든 삶이 허무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허무를 딛고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 이상의 행복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시간에 특히 2시 예배에는 다른 설교를 했는데 결혼과 비혼 이라는 설교를 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삶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안에서 자기를 즐거워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같이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셨고 네 인생의 목적을 주셨음을 잊지 말라. 괴로운 날이 있겠지만 명랑하게 살라. 일찍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오래 살면 괴로운 일도 그만큼 있겠지만 오래 살면서 즐거운 인생을 살라. 이것이 행복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나눔2) 전도서 지혜자는 세상이 헛되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는 않습니다(전 9:9).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일어난 일들 중에 자신에게 기쁨이 되었던 일을 생각해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어 봅시다.
성도1) 코로나 19로 인해 최근 몇 년간 온라인 구역예배만 드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현장에서 함께 모여 우리의 영혼을 말씀으로 채우고 한 목소리로 찬양하며 기쁜 교제를 나누는 이 시간이 한 주간 최고의 감사임을 고백합니다.
성도2)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에서 18절 말씀처럼 하나님 뜻 안에서 교회와 서로를 위해 중보하며 하늘의 가치를 믿고 믿음으로 오늘을 살 때 감사와 기쁨이 한량없이 넘칠 것입니다.
문제1) 인간의 인생이 허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
- 잘 살아보려는 시도는 근심과 수고
- 슬픔으로 이어짐
목사님) 가장 커다란 것은 인간이 모두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잘 살아보려는 시도는 항상 성공하지는 않고 때로는 근심과 수고 슬픔과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인생은 허무합니다. 허무하다는 것은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 허무합니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면 보람 있는 일이 됩니다. 인간의 인생을 하나님이 허무하게 창조하셨다기 보다는 인간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살아갈 때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람 있게 살려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2) 죽음은 삶보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를 설명해줍니다. 허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심
- 내 인생의 이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
목사님) 세계는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창조하셨기에 있는 것이며 나는 그냥 던져진 존재로 아무 뜻 없이 이 세상에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의미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살면서 수많은 사건과 상황을 만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만나는데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져가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당하는 시련과 어려움에도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결코 허무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의 이 현재의 삶이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3) 대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정신을 주체성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주체성의 근원은 무엇이며 주체성을 가진 신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 하늘 아래에서 의미를 생각하고, 대지 위에서 그 뜻을 찾음.
목사님) 주체적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주체적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누군가에게 휘둘리기 때문에 주체적이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자유로운 존재만이 주체성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으로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입니다. 주체로 살아가도록 자유를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죄와 욕망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방해거리가 되는 것이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의 현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외적인 방해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상황이 나에게 어떤 억압을 가져다주는 것도 자기가 바라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할 때 억압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나는 A라는 상황을 원하는데 B라는 상황에 처하면 억압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A도 괜찮고 B도 괜찮다면 아무 억압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와 함께 경기장에 가기로 했는데 일생일대의 게임이라 죽어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기 위해서 엄청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계획대로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했을 때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봐도 그만이고 보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경기장에 갔을 때 경기장에 들어가도 그렇게 기쁘지 않을 것이고 못 들어간다고 해도 그렇게 힘든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순수한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돌아가 보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와 욕망이 인간의 참된 자유와 주체성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죄 아래로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 도다.” 라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죄와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늘 아래에서 의미를 생각하고 대지 위에서 그 뜻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때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4)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번번이 우리를 배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소망 가운데 오늘의 명랑함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 신자에게 필요한 노력은 무엇입니까?
-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함
- 삶의 문제를 신앙으로 해석함.
목사님)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삶의 문제를 신앙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 당시로써는 너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는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죄를 회개하게 하고,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을 만날 인생의 각오를 새롭게 해주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게 그런 경우는 잘 풀리는 그런 일을 통해서 오지 않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119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지만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당하는 고난은 우리의 눈에 비늘을 벗겨주어서 고난이 아니었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모든 고난이 그렇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음으로 고난을 견딜 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문제5) 하늘과 대지 사이에의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인생의 주체가 되어 고유한 삼을 사는 것
목사님) 자기 인생에 스스로 주체가 되어라. 그리고 자기에게 고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리고 상품과 같은 인생을 살지 말고 작품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전부로 여기고 세상 사람처럼 인생 전체가 소확행의 연속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삶은 곤충의 삶입니다. 인간의 삶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번 한주도 설교를 다시 한 번 들으시면서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시고 성숙으로 도약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주 2시 예배를 드리신 분들은 10시 예배 설교를 들어보시고, 10시 예배와 12시 예배를 드리신 분들은 2시 예배 설교를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동행 하시며 명랑한 삶을 사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