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왜 내가 울어야 하나?
“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가 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께 간구하되 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이 그의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이 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2:15-23)
녹취자: 오희열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벌써 여름으로 성큼 다가서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밤에 산책해보면 기후가 가을 같은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습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세 번째 시간입니다. “왜 내가 울어야 하나? 삶의 불행을 뻥 차버리는 길” 제목이 매혹적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제 3장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5절부터 23절이 본문인데 그 중에 한 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중간에 생략하고 중요한 부분만 앞뒤로 딴 것입니다.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아멘.
우리의 인생의 실체에 대해서 시편기자는 90편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당시로서는 이것도 많이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때 70 넘어서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건하다면 80인데 그래봤자 그 연수에 남은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번영하고 성공하고 영광을 누리고 즐거워하고 쾌락을 경험하는 인생사를 한방에 꿰뚫으면서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네가 많이 살았다고 자랑하는데 그것은 네가 수고와 슬픔을 더 많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겪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 고백을 합니다. “나의 살아온 날이 내 조상들의 나이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내가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가슴이 짠해지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이, 심지어는 악한 인간들조차도 살아온 인생길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아이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립니다. 비록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관계를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에게 똑같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그 아이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왕궁의 산해진미가 얼마나 많은데 금식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일체 만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밤새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결국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의 태도가 바뀝니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이 단어로 미루어볼 때, 식탁은 간단하게 미음이나 한 그릇 놓은 식탁이 아니라 제대로 차린 정찬입니다. 그것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하들도 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헐~” 세상을 다 뒤집을 것처럼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금식하며 몸부림을 치더니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기도를 포기하고 일어나서 깨끗이 씻고 기름까지 바릅니다. 당시에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를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단정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복을 갈아입습니다. 금식하면 몸에 냄새도 배고 몸부림치며 기도했으니까 눈물이며 땀이 배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다 갈아입고 어디로 갑니까?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갑니다.
이걸 주목하셔야 합니다. 거기 가서 뭘 했습니까? 기도한 게 아니라 경배했습니다. 경배할 게 뭐가 있습니까? 아이는 죽었고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꾸도록 몸부림치겠지만 바꿀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안 받아들이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을 가지고 후회하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내가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을까?” 이런 것을 가지고 청년이 다 되고 40대가 되어가면서 그런 생각이나 하는 미성숙한 태도를 인생에 대해서 가지면 안 됩니다. 바꿀 수 있는 일인지, 바꿀 수 없는 일인지 판단하고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제가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겠다는 출발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게 다르게 될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따위 상황을 주시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고 투덜댈 경우에는 아직 믿음으로는 사는 삶은 출발도 안 한 것입니다.
오늘 영상을 보시는 분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낭비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나 많은 인생의 시간들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며 보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오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자신을 향한 한탄, 하나님을 향한 원망, 사람에 대한 미움, 그것 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무슨 믿음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모두 환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 가봐야 압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때만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아이를 다시 살려달라고 한 번 더 기도해보자,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 여기는 내가 포기해야 할 시점이구나.”하고 깨끗하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었다고? 알았다. 그럼 죽었다고 치고 내 인생을 거기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설교를 준비하던 때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예전에 읽었던 성경이지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아! 이렇구나! 우리가 이렇게 못하기 때문에 삶의 명랑함을 유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구나, 그러면서 아무 쓸데없는 염려와 근심으로 가슴을 태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진 가운데 사는구나.” 그런 태도를 계속 갖는다면 마지막에 우울증 걸리는 것 밖에 뭐가 남겠습니까? 우리가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인생을 완전히 절망에 반납하고 망친 것처럼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서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깨끗이 받아들이고 주님께 경배하십시오. 아멘.
제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생에서 불행은 피할 수 없지만 통증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을 만나는 것은 내 맘대로 안 되는 때가 많지만 통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차피 불행은 만납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을 제외해 놓고 인생을 생각해보면 신나는 때가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언제 그렇게 신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신난 것 말고,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 있는 것 때문에 살만하고 신나는 일이 한 달에 몇 번쯤 있겠습니까? 얼마쯤 되십니까? 하루에 한 번은 있다고 하셨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누가 그럽니까? 대부분의 시간은 우울하고 내 뜻대로 안 되고 그렇게 보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특별이 없다는 사람들은 특별히 원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도 없고 안 이루어진 것도 없는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불행은 우리가 피할 수 없지만, 어떻게 보면 인생의 본질과 같은 것이 수고와 슬픔이니까 불행을 줄일 수는 없지만 통증은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미련을 버려라. 쓰레기통에 무언가를 버리듯이 미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만일...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옛날에 그랬더라면...” 이런 타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현실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미래의 삶을 훨씬 낫게 하는 비결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아이가 죽었다고 하니까 아주 깨끗하게 물러납니다. 아이의 시체를 붙들고 “내가 너 없이 살아서 뭐하겠느냐?”하면서 찌질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죽었어? 알았다.” 하고 털고 일어납니다. 미련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무 자르듯이 되겠습니까? 다윗이 그 아이가 죽은 이후로 생각도 나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 그렇습니까? 그러나 연연하면 안 된다는 신앙과 인생에 대한 지혜를 가졌던 것입니다. 미련을 버리십시오. 두 번째는 현실을 대면하십시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일상의 할 일을 계속 하면서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실타래처럼 계속 풀려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고민하는 것 때문에 일상을 멈춰서 약속도 깨뜨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펑크 내고 망가뜨립니다. 그러면 오늘 그렇게 한 것이 내일 혼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더 많은 삶의 에너지를 낭비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실 것입니다.
멀티테스킹이라고 아실 것입니다. 컴퓨터에 작은 창들을 여러 개 띄워놓고 글을 쓰다가 카톡이 오면 답장을 하고, 일정을 정리하는 것처럼, 이렇게 멀티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내일의 고민거리가 좀 줄어듭니다. 오늘 중요한 사업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현실을 대면할 용기를 갖지 못해서 무기력감에 빠져 오늘 일을 다 펑크 냈다고 합시다. 연락은 계속 오고 신용을 잃어버리고 다시 정신 차리고 사업을 할 때 파트너를 찾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오늘의 불성실함은 내일의 더 큰 인생의 무게로 다가오게 됩니다. 할 일을 하면서 해야 합니다. 일종의 삶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이 하나로 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삶을 구획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목회자라고 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없겠습니까? 물론 지금은 없지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누가 그런 고민거리를 만든다거나, 저는 그런 일이 없지만 가정에서 괴로운 상황이 벌어진다거나 아이들이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거나 아내와 다툰다거나 가정에 큰 우환이 생겨서 염려한다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토요일인데 그런 고민을 하느라 설교 준비를 안 합니다. 그 다음날 주일 설교를 개판으로 망쳤다면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안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안 됩니다. 토요일은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주일에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고, 주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월요일에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말처럼 그게 쉽냐고 하시겠지만 그것이 삶의 무게를 줄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삶을 뭉개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완전한 무기력으로 떨어져버립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좋은 삶의 태로를 가진 사람들은 고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일로 풀어버립니다. 고민해봐야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을 가지고 이불 뒤집어쓰고 울먹이면서 괴로워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병자처럼 누워있으면 없던 병도 생깁니다. “그런 일이 있구나! 참 괴롭구나. 주여, 도우소서!” 찬송가 크게 틀어놓고 청소를 하는 겁니다. 빨래도 돌리고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내일의 무게가 덜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가 없습니다. 무기력해졌을 때 뭔가에 기대고 응석을 부리면 해결될 것이라는 유아기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뭐가 자기 맘대로 안 되면 밥그릇 내던지고 두 다리 쭉 뻗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울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믿는 게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그런 아이를 보고 달려와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의 살아야 할 삶을 살아나가면서 정신을 분산시키며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집중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여기 여러 가지 그림이 나오는데 모두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음식을 만드는데 자기 혼자 먹으려고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화장을 하는데 누구에겐가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아이와 놀아주고 있고 여기는 과제를 하거나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처럼 쭉 뻗고 드러누워서 발을 뻥 차고 덜덜 떨며 소리소리 지르며 울어봐야 아이와의 관계도 깨어지고 통화하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얼굴은 죽상을 하고 나타날 것이고, 가족들의 밥 같은 것은 나 몰라라 하고 팽개칠 것이고, 그러면 가족들도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문제들이 계속 증폭됩니다. 지나간 과거는 흘러갔고 오늘 살아야 할 삶은 내가 일을 해내면서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두 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믿는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심지어 죄를 지었어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한번 넘어졌다고 인생이 끝난 것처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우리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지체들이 오늘 설교 청취하면서 어떤 것을 느꼈는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교구 전선영입니다. 4월에 38년 동안 헤어져 보고 싶었던 친엄마의 부고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이별에 고통과 슬픔이 밀려오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엄마와의 이별, 불행을 피할 수 없는 아주 연약한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에게 기도요청과 합력하여 기도로 힘을 모으며 내가 친척들의 미움 속에서도 장례절차를 용기있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0년간 깨어진 남동생과의 관계회복을 경험하였고 온 가족이 위로예배로 복음을 듣고 감격하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모든 거친 인생길에 고사리 같은 내손을 붙들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보다 신뢰하고 사랑하며 감사로 일상을 명랑하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꽤 오랫동안 환경이 어려웠고 몸도 많이 안 좋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도와주셔서 지금은 그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동안 그런 상황에 있다 보니까 무기력감과 좌절, 절망, 이런 것들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은혜를 주시고 거기에서 실제로 건져주셨지만 저는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명랑함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정말 그 설교를 들으면서 내내 울었습니다. 지금은 현재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최고의 삶이라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 한 분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시면서 병원 선교를 하셨는데, 깊은 병이 든 사람이 많이 절망하고 가벼운 병에 걸린 사람은 덜 절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망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환자 한 분을 소개하셨는데 병원 전체를 명랑하게 하는 환자였답니다. 그 분은 10년 이상 아무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입만 움직이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말할 수 있는 입으로 병원 사람들을 그렇게 즐겁게 해 준답니다. 그런 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자기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의식이 또렷해서 가족들을 알아볼 수 있고 그런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결코 명랑함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만 스스로 불쌍한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새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로 들어가겠습니다.
1번) 고통이 없는 삶은 가능합니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신자의 삶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2번) 다윗은 자녀가 죽기 전까지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첫째, 바꿀 수 없는 일과 바꿀 수 있는 일을 구분하라. 바꿀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금식만 하겠습니까? 그 이상이라도 할 것입니다. 바꿀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며 바꿔야 하고 바꿀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삶의 명랑함을 회복하는 길이다.
3번) .불행은 피할 수 없지만 통증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훈련은 무엇입니까?
미련을 버려라. 미련을 갖지 말라. 두 번째, 현실을 용기 있게 대면하라. 그리고 세 번째로, 스피노자는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하는데 스피노자의 이야기라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처럼 죽는 그날까지 일상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일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4.번) 나의 인생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현실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나는 과거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미래를 꿈꾼다고 할지라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입니다. 현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 무엇도 내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5번)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경배를 합니다. 어떤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다윗 자신도 왜 하나님이 이 아이를 데려가셨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좋으시면 완전한 지혜의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선하게 이끌어 갈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지혜는 완전하시고 능력은 전능하셔서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의 실수로 잘못 가게 하시는 법은 없다는 것을 굳게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분의 전능하심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신앙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명랑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공과공부 어떠셨습니까? 오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이기며 명랑하게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