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참 자유를 누리는 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녹취자: 이솔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지난주에는 제가 미국 출장 때문에 여러분들을 뵙지 못했고 또 마침 진도에 뒤떨어지신 분들도 있어서 이렇게 한 주 걸러서 이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사잇공과 마지막 시간입니다. 여섯 번째인데요. 어떻게 그동안에 여섯 번 설교 들으시면서 좀 많이 정리가 되시고 은혜를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은혜를 누리고 또 어떤 분들은 좀 설교가 좀 어렵다. 그리고 평소에 듣던 설교의 틀하고는 좀 다르다는 것 때문에 조금 주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에게 은혜가 되리라고 봅니다.
드디어 이제 장마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어제는 비가 폭포수처럼 정말 쏟아져서 오래간만에 메마른 대지를 풍성하게 적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렇게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6장을 시작하기 전에 적용과 실천을 위한 나눔 영상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자랐지만 율법에 갇혀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저에게 얼마나 충만한지 다시 한 번 깊이 새기게 되는 시간이었는데요 제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또 불완전해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지고 연합되었다는 것이 저에게 굉장히 큰 감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하나님 자녀라는 정체성이 제게 큰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쨌든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가도록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근데 결국 살아간다는 의미는 살려서 현실에 그 목이 묶인 채 끌려가는 삶이 있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끌고 가는 삶이 있습니다. 근데 전자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늘 나의 삶인데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는 이렇게 개줄에 묶여서 개가 가기 싫은데 막 이렇게 이게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걷기를 제가 요새 많이 하거든요. 굉장히 좋아진 것 같아요. 그런데 수면의 질은 아직까지 회복이 잘 안 돼서 좀 힘든데 나머지 요소들은 굉장히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이제 언덕 같은 데를 오르면서 제가 터득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걷는 게 힘들수록 힘을 주어서 걸어야지만 덜 힘들다. 그래서 힘에 걷는 게 힘들다고 힘을 쭉 빼고 걸으면 걷는 것 자체가 더 힘들어요. 그리고 발을 삐기가 아주 쉬워요. 이게 기왕에 걸을 것 하면서 다리에 힘을 주고 걸으면 끌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삶의 원리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자 그럼 보겠습니다.
참 자유를 누리는 길. 자 이제 그 갈라디아 교회 안에 본래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라지자 교회는 반분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다시 말하면 할례도 받고 안식일도 지켜야 한다는 이런 율법주의의 도전이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율법 폐기론 그래서 그 율법은 모두 옛날에 구약의 것들이니까 우리가 지킬 것이 없다라고 해서 율법 폐기론을 통해서 방종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결국은 어느 것도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 된 가운데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학계에서는 구원이 구원의 확정성과 그 다음에 구원의 긴장성 이 두 개를 놓고 논쟁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구원이 일수불퇴냐’ 아니면 ‘그런 게 아니다 구원은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고 그리고 불확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하며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두 의견들이 크게 나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논쟁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 단번에 얻은 자신의 구원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사실은 자신이 구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성화의 긴장 속에서 살았어요. 그거 그 두 개가 양립할 수 없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그래서 남녀 사이에도 막 대하는 사이가 되면 사랑 없는 거예요. 사랑하면 항상 그 사랑하는 사람 속에는 긴장이 있기 마련이에요.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떡하면 나를 만나서 그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떡하면 내가 저 사람을 더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긴장이 같이 있는 거지. 그리고 그런 긴장이 없이 한없이 편하기만 해가지고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건 이미 마음에 싫증이 나고 물린 거죠. 그 관계를 포기할 때가 가까웠다는 뜻이지 사랑하면 그럴 수 없는 것이죠. 그런 단순한 사실을 생각하고 나면 그것은 이론적인 그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 이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 안 이루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구원의 확정성 속에서 쉼을 얻고 또 한편으로는 성화의 불확정성 속에서 그래서 끊임없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구원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거기에 참 자유가 있다는 거를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이렇게 보시겠습니다. 결국은 이제 교회가 있죠. 그렇죠. 여기 이렇게 이렇게 교회가 있고 모두 이렇게 죄로 넘어졌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피로 그 피를 믿고 그 다음에 이렇게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근데 이 교회 속에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요. 근데 그게 뭐예요. 그게 바로 이 생명이에요. 더 큰 생명 교회 근데 이 생명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를 사랑하시고 이 사랑이 이 교회를 향하여 생명이 되는 거죠. 그 생명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그러면서 자신들도 이 생명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여기에 이것이 이제 자유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이거지. 생명 사랑이. 생명은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고 그 생명이 바깥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사랑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그런 생명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가운데 거기에 자유가 있는 거죠.
요즘 지금 뭐 난리가 났죠. 요즘 요새 그 신문 기사를 보기가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안타까운 세상이에요. 그게 뭔지 아세요. 이제 그 한 일 년 전만 해도 젊은이들 2030세대 사이에 벼락 거지라는 말이 나왔어요. 아 이러고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가는 벼락 거지가 된다. 집값은 오르고 그 다음에 물가도 오르고 월급은 별로 오르지 않고 이러다가는 벼락 거지가 된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투자에 올인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엄청난 또 대출금도 쌌잖아요. 그러니까 싼 이자의 신용대출도 많이 해줬어요. 그 대출을 얻어가지고 코인에 투자한 거죠. 근데 지금 코인 시장이 어떻게 됐습니까?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지금 비트코인이 60,000불, 65,000불 이렇게 올라가던 뭐 70,000불 그렇게까지 올라가던 비트코인이 지금 뭐 18,000불 이하까지 떨어졌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뭐 원금의 한 70%가량을 날린 거죠. 그리고 그나마 비트코인 같은 데 했던 사람들은 살아났지만 루나코인 같은 데 투자했던 사람들은 한 푼도 못 쥐고 다 날렸어요.
테슬라 열풍이 불었죠. 주가 35%까지 빠졌습니다. 그래서 삼성전자 뭐 7만 전자, 8만 전자, 9만 전자 이야기를 하더니 이제 5만 전자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그리고 이제 그 비대면 시대에 네이버, 카카오가 최고다 하고 주식했던 사람들 34% 이상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다가 지금 주택담보 금리는 이제 8%까지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제 영끌 해가지고 마지막에 막차 타면서 집을 산 2030 세대는 이제 죽을 지경입니다. 월급을 모두 타도 원리금 상환하기 빠듯할 정도로 힘겨운 상황이 되고 그리고 이제 빚 갚으라는 독촉이 은행으로부터 이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심지어는 세상을 등지고 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죠.
근데 결국 뭘 보여주는 것입니까? 인간이 결국 그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거는 확실합니다. 그 물질이 필요 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은 결코 그 물질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속에 이 생명과 자유가 사라질 때 그때 우리의 삶은 곤고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참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렇죠. 어떻게 우리가 마음 안에서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우리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사신 것이라 그가 내 안에 사신 것이라”(갈 2:20) 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날 사랑하셔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유명한 구절이죠. 그렇죠. 여기에 나오는 ‘못 박혔나니’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여기 이 부분이 ‘쉰’이 이게 ‘with’ 예요. 혹은 ‘together’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스타우로’ 이거는 ‘못 박히다’ 이렇게 ‘막대기 같은 데 박히다’라는 거고 이제 이렇게 접두어 붙고 이렇게 인칭사 붙어서 해서 현재 완료 시제를 얘기합니다.
그래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요 사건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렇게 못 박혔는데 이게 지금 말하는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순간 현재까지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표현할 때에 현재 완료 시제를 써요. 그러니까 십자가에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언제였을까요? 다메색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자기 자기도 그 의미에 못 박힌 거죠. 근데 그 효과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걸 얘기하는 거죠. 결국 여기서 뭘 보여줘요? 구원에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그 말하자면 즉각성과 그 다음에 점진성 한 번 단 번에 구원을 얻은 것과 그 다음에 계속해서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점진성 이걸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감격과 영향력을 어떻게 하면 계속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라고 하는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는 뜻입니다.
자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 신자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다.” 그렇죠.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이거잖아요. 내가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해요. 이게 결국은 그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는 회개와 은혜로 나타나는 거죠. 회개 자체가 은혜이기는 하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자기의 죄를 가지고 권고하게 살다가 회개를 해요. 그리고 회개를 하면 그 자기가 지은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여기에서 자아의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병든 자아와 그 다음에 건강한 자아가 구별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얘는 얘를 원망하는 거죠. 탄핵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 회개를 통해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사 십자가에 죽으신 이 죽음의 의미가 침투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는 거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결국은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가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 병든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하는 거죠. 당연히 여기는 고통이 따르지요. 이게 자기 깨어짐이에요. 이게 그러면 결국은 죄에 대한 사랑 자기 의에 대해서 깨지는 거예요. 그렇게 깨서 죽게 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이게 생명이에요.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경험을 내 마음속에서 실제적으로 다시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그게 이제 기쁨이에요. 생명이에요. 은혜 받은 사람에게 항상 기쁨과 생명이 있어요.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나면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지고 이 죄에 대한 두려움이나 압박감이 사라지고 기쁨이 솟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 다음 보겠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문제 오늘날 신앙의 문제가 뭐냐 하면은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정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걸 정사라 그러거든요. 정이예요. 정. 이게 못을 얘기하는 거예요. 못. ‘못 박혀 죽는다.’라는 뜻이죠. 근데 그런 정사의 경험이 없는 거죠.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 다음에 죽는 경험 그 다음에 매달리지 않아요. 그 마음이 부유해요.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권고한 것을 놀이 세상의 소비 이런 것들로 달래면서 지나가는 거죠. 그래서 보면 요즘 TV 켜기가 싫을 정도지요. 켜면 맨날 놀러 가는 데 아니면 책 이야기도 별로 안 해. 거의 없어요. 책 이야기하는 데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거 해가지고는 광고 못 받아요. 재미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안 본다 이거지. 그럼 뭐 여행지 놀러 가는 거 그 다음에 먹는 것 어느 집이 맛있다 어디가 풍경이 좋다더라 그거예요. 먹고 그리고 그 다음에 새로운 무슨 상품이 나왔다더라. 전부 다 감각적인 것에 다 쏠려있는 거잖아요.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요. 자기를 반성하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데는 돈이 안 들어가는데 그 감각적인 것들을 다 따라 하려면 돈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소비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미친 듯이 일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소비에 올인 하는 거죠. 근데 어떻게요? 결국은 그 소비를 못하는 때가 올 텐데 아주 가까운 시간 나이 들잖아요. 돈이 별로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왜 그러니까 뭐 병원에 가고 그러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왜 쓰러 다닐 기운이 없어요. 못해요. 그러니까 결국은 바보 같은 짓이에요. 그래서 솔직히 다른 사람은 모르겠어요. 저는 돈 많은 사람 별로 부럽지 않아요. 물론 가난한 사람이 부럽지도 않아요. 그냥 있을 만큼 있으면 되요. 더군다나 나이 든 사람들에겐 아무 쓸데없는 거예요. 그리고 가난하게 죽은 사람들은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도 재산을 남기고 많은 재산을 남기고 죽은 자녀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소송이 벌어져요. 우애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쓸모없는 거죠. 선하게 베풀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에요.
그다음에 뭐냐 하면 그래서 뭐가 또 뭐냐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죽음에 대한 경험이라면 이건 삶에 대한 경험이에요. 이건 기도예요.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건데 이것들이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거죠. 그 무슨 그 하나의 그 데코레이션처럼 기독교 신앙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능력이 없어요.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지 못해요.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정욕을 따라 살려고 하는 병리적인 자아가 있고 예수 사랑하려고 하는 건강한 자아가 있어요. 이 두 개의 싸움이 늘 있는 거예요. 근데 이제 은혜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이쪽이 커져요. 이렇게 넉넉히 이거를 누르는 거죠. 이렇게. 근데 만약에 말씀과 기도가 없어요. 그 다음에 세속에 대한 사랑과 정욕에 빠지게 돼요. 그럼 어떻게 돼요. 당연히 이렇게 되죠. 그래서 결국은 이게 이거 이거 이렇게 이렇게 좀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항상 예수를 사랑하려고 하는 건강한 자아가 이 병리적인 자아를 이길 수 있어야 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과 끊임없는 기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경건의 실천을 해야 되는 거죠. 그걸 따라서 이기고 승리하고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이게 그리스어로 ‘사르크스’예요. 이게 살, 고기, 육체 특히 죄가 깃들 수 있는 육체를 얘기해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은혜를 받아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이게 사랑으로 엮여져야 됩니다. 가족들이 만약에 돈이 없고 뭐가 없고 가족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이렇게 사랑으로 열렬하게 타오르고 있다면 극복하지 못할 시련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래서 어려움 속에 있는 거잖아. 가족들이 고독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나머지 가족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거야. 결국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 속에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건강한 자아가 없는 거예요. 힘이 없는 거예요. 자기만을 위하는 탐욕적인 탐욕적이고 병리적인 자아가 득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밖에 모르는 거죠.
여러분 소시오패스가 뭔지 아세요? 사이코패스하고는 또 다르죠. 소시오패스는 사회적 공감이 안 되는 사람이야. 근데 이런 사람들이 그건 뭐 그런 사람이 있지만은 나하고 뭔 상관이 있을까 백 명 중에 네 명이랍니다. 살다 보면 꼭 만나요. 저도 많이 만났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공감 없어요. 모든 것이 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엮이지 말아야 돼요. 신앙으로 이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느냐고 누가 그렇게 묻는데 물론 변화되죠. 그러나 쉽지 않죠. 그러니까 이거는 일종의 정신병이에요. 마음에 깊은 병이 든 거예요. 치료가 필요한 거지요. 그러니까 심각한 거죠. 공감을 못한다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사회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 서로 그 참여할 수 없는 그런 단절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은혜는 소통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자기 사랑은 자기의 이것은 단절적 사랑이에요. 자꾸 울타리를 치고 자기를 가두어요. 근데 이제 이 하나님 사랑 얘는 사회적인 사랑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이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이지. 이거는 계속 사랑을 확장해 가는 거야. 그게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에요. 결론적으로 육체 가운데 살면서도 죄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자신의 경험을 성경에 비춰보는 거죠. 그래서 왜 나의 신앙생활에는 진실함이 없는가? 왜 나의 신앙생활은 눈물이 없는가? 달콤함이 없는가? 행복해야 되잖아요. 행복해야지.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해야 되잖아. 왜 없는가? 이건 왜 진리가 없는가? 이건 뭐냐면 진리를 자신에게 붙들어 매는 적용이 없는가? 라고 하는 거죠. 거꾸로 뒤집으면 결국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진실해지려고 노력을 해야 되고 그러니까 자꾸 나를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지 말고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라는 거죠. 그 다음에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거죠. 그래서 그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이것이 인간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결론이에요.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삶의 명랑함에 관한 전체에 대한 결론이에요. 결국은 이 유한한 대지와 그다음에 무한한 하늘 사이에 살고 있어요. 여기는 신적인 세계고 여기는 물질의 세계이에요.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 사이에 있어요. 둘 중에 하나를 부정하려고 할 때 그는 매우 잘못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두 발을 디디고 두 발을 이렇게 디디고 땅에 있는 인간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의식해야 되는 거죠. 하늘이고 대지 그래서 대지에 속 대지에 속해서 운명처럼 지워진 것들 뭐 예를 들어서 인간이 죽는다는 것 그 다음에 생로병사 한다는 이 현실 이런 것들을 예외가 있을 것처럼 생각을 하고 생각 살아갈 때 그 때의 자신의 삶은 매우 고통스럽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불행의 연속이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일 용기를 가져야 되는 거죠. 내가 죽어야 할 존재로 태어났다는 거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병든다는 것 늙는다는 것 그리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있다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그냥 그대로 인정을 하면서 그것을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돼요. 그게 삶을 명랑하게 사는 아주 중요한 이유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제 진짜 이 대지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지 말고 하늘로부터 해석된 그 다음에 이 대지의 현실을 하늘의 의미로 연결시키는 해서 의미 그러면서 대지 위에 살면서 하늘로부터 해석하고 의미가 주어져서 그래서 오늘 이게 여기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오늘의 이 삶이 영원을 향해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에 답을 가질 수 있어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신앙이에요. 신앙. 신앙이 그걸 가능하게 해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박 사건이에요. 이러한 인류 역사에서 누구도 완전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 대지와 하늘의 의미를 정초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쪽으로 방향 지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의 근거를 얻게 되었다는 거 훌륭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 현실이 의미가 있고 내가 이 현실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무한한 하늘 세계가 나에게 해석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 속에서 우리는 순간을 살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상 한 개를 더 보시겠습니다. 예전에 부흥에 참석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포하시는 말씀에 너무 큰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나왔을 때 저를 둘러싼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 마음에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바쁘게 살다 보니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것이 생기고 세상의 문화와 즐거움이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성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신앙에 있지 않다는 내 자신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는 것, 죄에 대한 인식과 민감성이 둔감해지는 것,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 의식이 약해졌다는 것, 예배를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이 종합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 풀어봅시다.
문제1) 율법주의나 율법 폐기론에서 참 자유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 자유는 율법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연합된 가운데 자유롭게 살아가는 데 있다.
문제2) 구원받은 신자가 사랑으로 연합되는 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것.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죠.
문제3)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죽게 됩니까?
죄에 대해서 죽게 됩니다.
문제4) 예수 생명이 자기를 살리는 경험을 하기 전에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까?
마땅히 당해야 할 형벌을 예수께서 대신 당하신 것을 경험하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문제5) 신자는 옛 사람을 짊어지고 삽니다. 세 사람이 옛사람을 반복적으로 이길 때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성령 안에서 살아갈 그리고 은혜를 받아야 된다. 당연히 이것은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열렬히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6주 동안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사잇공과를 진행해 보았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이 삶의 명랑화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단 하루도 설교한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많은 것들이 내 마음 안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더 설교하고 싶고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시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 시리즈를 시작을 했는데 우리가 이 기도 생활을 통해서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배운 이 공과를 삶으로 실천하면서 은혜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더 많은 은혜를 주님께 구하며 이것으로서 삶의 명랑함의 모든 공과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