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삶의 속박으로 힘겨워하는 그대에게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녹취자: 김정호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화면에 나오는 것처럼 저렇게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가고 여름이 한껏 자기를 뽐내는 그런 계절입니다. 저런 곳으로 가서 그늘에 해먹이라도 하나 달고 옆에는 시원한 수박을 깨뜨려서 먹고 난 후에 자리를 쭉 뻗고 누워서 책을 보면서 쉬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는 매우 그러고 싶습니다. 드디어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종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5장까지 왔고 한 장만 더 하면 됩니다. ‘삶의 속박으로 힘겨워하는 그대에게 -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입니다. 본문 말씀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멘. 나눔 영상을 먼저 보시고 시작하겠습니다.
나눔 : 작년에 구약을 읽으면서 그동안 성경의 사건을 잘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거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렇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저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와 믿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에 대해 크게 회개하게 되었고 저의 신앙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눈물로 회개했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저의 인생의 주관자라는 생각이 더 명확해지며 마음이 맑고 가벼워졌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도우시는 주님을 더 생각하며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우리 하나씩 풀어볼까요? 먼저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에 매어서 산다면 삶을 명랑하게 살 수 없겠죠?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속박하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명랑한 삶을 살려면 먼저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유는 무엇인가요? 엄밀하게 정의를 하자면, 타자에게 속박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은 채 언제든지 자기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자유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뜻대로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안 되면 그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육체로만 본다면 우리 인간은 바닷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 중에 하나밖에 아닌 인간인 것 같고 산에 수천만 그루의 나무가 있어서 나무 한 그루마다 수만 개의 이파리들이 달린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냥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결코 우리의 인생은 세계의 한 부속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금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남이 살 수 없는 나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은 다른 사람처럼 돈 많은 인생이 아니고 그 사람의 탁월한 재능과 같은 것을 지닌 인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의미에 있어서는 아무도 써보지 못한 그런 글을 쓰는 것 같은 것이 내 인생이요. 누구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예술품 같은 것이 나의 인생이라고 바라보면 나는 내 인생이라고 하는 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도덕과 관습입니다. 거기에다가 모든 도덕과 관습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아무 도덕도, 관습도 안 배우고 안 받아들이고 살았다면 짐승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런 점에서 도덕과 관습은 대부분 시대의 문화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뭔가 사람을 판단하는 평가, 유행, 법, 사회제도에 이르는 모든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항상 옳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부당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이조시대 여인의 잔혹사 같은 것을 보면 남존여비사상이 들어오면서 여자들을 거의 재산 취급하지 않았습니까? 소유물로 취급하고 놀음판에 마누라를 갖다 주는 조건으로 돈을 빌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고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돈 받고 자기 마누라 팔아버리고 채무변제의 수단으로 자식을 넘겨줘 버리고 그런 것들이 용인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관습은 관습인데 통용되는 도덕으로서의 관습인데 부당하지 않습니까? 니체 같은 사람도 인간의 자유를 외쳤지만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 같은 것을 보면 여자는 그저 인간 남자를 완성하는 한 수단 정도로밖에 안 봅니다. 그 사람이 1899년도에 죽었는데 불과 100여년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인간의 자유를 외친 사람이 여자에 대한 생각은 저 정도밖에 안 될까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기함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 도덕과 관습이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다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사는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주체적으로 그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입니다.
두 번째 도표에서 보면 바깥에 있는 것이라면 죄와 본성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속박입니다. 참된 자아 대신에 이기적이고 병리적인 자아를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사회 속에서 부가 균등하게 배분되고 생산수단이 변혁됨으로써 부의 공정한 배분이 이루어지고 하는 이런 것 만을 가지고는 우리를 진정으로 속박에서 구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 아닙니까? 끼니가 간 곳이 없을 때에는(10:58) 어떻게 하든지 한 푼이라도 벌어서 끼니를 이어가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염려가 없이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확실한 것은 굶주림으로부터는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굶주렸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또 다른 속박이 나를 얽매어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향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이 진정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 둘 때 인간은 가장 속박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게 살도록 해방시켜줄 때 가장 속박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존주의자들은 자유에서 오는 불안 같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선택지가 없을 때는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선택지가 많을 때에는 인간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자유롭기 때문에 부자유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봅시다.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데 이중의 자유를 줍니다. 그것은 신분의 자유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결국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인데도 마음이 짐승의 마음이면 인두겁을 썼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사람의 껍질을 썼는데 속은 짐승입니다. 인간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겉모습만 인간이 되지 말고 속도 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상태의 자유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 그러니까 죄에 얽매인 상태에서 마음과 영혼이 자유를 얻게 해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신분에서 위엄을 느끼고 신분에 걸맞은 자유로운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서 인간의 진정한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주의하에서의 자유의 개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읽어보셨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하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성경도 읽을 시간이 없는데 뭘 읽어보고 있겠습니까? 아주 유명한 고전 같은 작품입니다. 해설을 하면 1∼2시간 해야겠지만 읽어보고 싶으시면 읽어보십시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책 제목을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사람의 이름이고 왜 그리스인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채 읽습니다. 조르바는 그리스 사람이고 카잔차스키 자신이 크레타 사람입니다. 그리스의 크레타섬이 있지 않습니까? 에게 문명의 발상지고 크레타섬의 문명이 그리스로 들어가면서 그리스의 문명을 꽃피우고 크레타섬에서 애굽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의 무역들이 이루어지면서 정신이 만나게 됩니다.
짧게 이야기하면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할 때 그리스가 함의하는 것이 뭐냐면 아폴론적인 특성과 디오니소스적인 특성 두 개를 결합한 것입니다. 아폴론은 이성에 가까운 것이고 디오니소스는 감정, 충동에 가까운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적인 명랑성과 관련이 됩니다. 어떠한 현실의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어떤 의미에서 마땅히 현실에서 기대해야 될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피안 없이 현실에 충실해서 살아가는 그러한 특성을 가진 인간을 그리스라는 특성이 그리스인이라는 말속에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무덤이 아직도 크레타에 있는데 묘비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쓰였냐면 ‘나는 바라는 것도 없다.’ 두 마디 말이 나오는데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더 이상 희망하는 것도 없다. 바라는 것도 없다.’ 마지막에 ‘나는 자유다’라고 쓰여 있다고 하는데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생명을 이야기했던 앙리 베르그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명랑함인데 대지에서 충실한 명랑함입니다. 하늘과의 균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냥 어떻게 보면 현실을 긍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결국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결국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자유는 그냥 인생의 근원도 묻지 말고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마라. 그냥 대지는 대지일 뿐이다. 거기에서 그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찾으면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허무하다고 묻지 말고 이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긍정적인 삶을 살아라. 그리고 도덕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나는 자유다. 이것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자유라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책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현대인을 보면 우리가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이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감동을 받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우리도 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를 외치면서 그런 세속적인 자유의 개념을 추종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당한 속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도덕과 관습, 법과 사회제도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주체성이 없이 생각 없이 그냥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복종하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해서 칼을 빼들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항거한다면 만신창이가 되겠지만 그 정도까지 아니더라도 자기의식 속에서 과연 이 도덕이 부당하지 않은가? 이 관습이 잘못 되지는 않았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성경의 정신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관계 설정을 해나가는 것이 주체성이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결심문에서 인상 깊은 것을 남깁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안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내가 할 것이다.’ 그런 것이 놀라운 주체성의 표현이고 그 기준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는 것이 여러분들은 현실에 대한 항거가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항거하는 방식이 한이 서린 복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종류의 항거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그랬습니다. 그것은 진짜 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감화력으로 세상을 지배해가는 광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은 사람을 굴복시키지만 그 땅을 자기의 땅처럼 자기의 유업처럼 만드는 것은 온유함입니다. 그래서 칼과 병력으로 무장한 로마는 온유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 앞에서 정복당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현실에 대한 항거가 있느냐 사랑과 함께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부할 수 있는 당당함.
그 다음 보겠습니다. 이번 공과를 굉장히 잘 만들었습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대지 위에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것들, 운명은 원래 없는 것이지만 도저히 스스로 바꿀 수 없도록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태어난 사람은 죽는다. 여자와 남자 둘 중의 하나로 태어난다. 인생에 끊임없이 불행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 통증은 자기가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세계와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서 통증은 자기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이해할 수 없어도 그런 현실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의 통증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할 수 없는 것과 씨름하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과 씨름해서 삶을 보다 더 낫게 개선해나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도표로 돌아가시면 제가 한 이야기라고 저렇게 써 놓았는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최악의 삶이라도 마지막에 남은 희망은 그것을 긍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왜냐면 결국 긍정은 대지 위에 쓰는 글입니다. 예수님도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앞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참소를 받으실 때에 글을 쓰십니다. 뭐라고 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쓰셨습니다. 긍정은 대지 위에 쓰는 글씨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가지는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것이 긍정이 가지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긍정할 때 현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리게 만들어 줍니다. 왜? 살아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같은 경우는 하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역으로 우리가 대지 위에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대지와 하늘 사이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을 긍정하고 나면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왜 생겼을까?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일이 결국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면서 내 인생에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다줄 거야. 그리고 이 시련을 만난 뒤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의미를 가진 보다 나은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결코 내 삶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 고통을 받는 삶의 연속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체적 희망이 의미와 단절된 희망이라면 우리가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의 긍정은 의미를 찾아가는 긍정이라는 말입니다. 의미 같은 것은 묻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가는 긍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주 놀라운 발견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지성은 맑아지고 의지는 가벼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여러분 아침에 일어날 때 어떠십니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온몸이 쑤십니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머리는 두통으로 터지는 것 같고 구름이 잔뜩 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주 무거운 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납니다. 자유로운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지개를 쫙 피고 일어났는데 몸이 아주 깃털같이 가볍습니다. 그리고 10대에 눈을 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제의 피로는 모두 사라지고 정신이 아주 또렷하고 맑습니다. 침대에서 딱 일어났는데 몸이 너무 뛸 듯이 가볍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도표를 보면 지성이 맑아져야 하고 의지가 가벼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지성의 혼탁함을 무지에서 오는 것이고 의지의 무거움은 욕망으로 말미암아 짊어지어진 무게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사람에게 살려는 의지를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는 은혜의 힘입니다.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방향성의 욕구를 가져야 합니다. 그저께인가 (영화) ‘범죄도시 2’가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가서 봤습니다. 재미있긴 재미있었습니다. 벌써 650만 명이 넘게 봤다니까 보신 분 많을 것입니다. 거기 보면 살려는 의지가 너무 너무 강합니다. 심지어 남을 죽이면서까지 살려고 하고 돈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도표로 돌아가 보십시오. 방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죽이고 죽고 얻어맞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이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데 방향성이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방향성까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주는 힘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허무와 고독을 이기며 살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과 함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고자 하는 의지로 바꿔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사랑입니다. 재밌죠? 그러면 우리 또 한 번 나눔의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나눔 : 저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께 편지를 쓴다면 감사와 사랑을 가득 담은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죄인인 저에게 찾아와주시고 자녀 삼아 주신 것, 그래서 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또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또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를 만나게 해주셔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좋은 교회에서 목양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주 긍정적인 영상이었습니다. 그러면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1) 우리를 속박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설명해봅시다. 우리 밖에서는 부당한 도덕과 관습, 부당한 법과 사회제도. 우리 안에서는 죄와 본성. 결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말아야 하고 필요하면 항거해야 하고 우리 안에서는 죄와 본성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순간 이중의 자유를 얻습니다. 먼저 신분의 자유, 상태의 자유. 그러니까 신분의 자유가 주어졌으니까 신분으로서의 긍지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쬐지 않는다네.’ 말하자면 옛날에 양반의 꼬장이었습니다. ‘내가 적어도 이런 신분에 있는 사람이다. 죄를 짓고 싶을 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을 때 나의 status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내가 그럴 순 없지.’ 이렇게 살아가는 어떤 당당함, 그런 어떤 기골, 어떤 정기와 뼈대가 있는 그런 것, 말만 그러면 안 되고 실제로 상태가 그래야 하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자유롭게 살려면 부당한 속박을 거부해야 합니다.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경건서적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그것을 자기 자신의 삶과 묶는 그런 적용력, 상관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깨달은 말씀에 묶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하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남의 이야기처럼 읽는 것입니다.
(4) 자유롭게 살려면 현실을 긍정해야 합니다.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나는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사는 존재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생각하자. 끊임없는 하늘의 빛으로 끊임없이 주어지는 대지의 현실을 해석하면서 살아야 한다.
(5) 자유롭게 살려면 그런 의지와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라’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 한 과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공과가 끝날 때 여러분 삶의 명랑함도 회복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