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필요한 것을 아신다(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녹취자 : 허혜숙
먼저 ‘아신다’는 것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인간을 아시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관련지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항상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아시는가에 대해서 염두에 두셔야만 성경을 읽다가 독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 우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것은 인간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시니까 모르는 것이 있는 인간과 어떤 사물을 보시는데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전통적으로 신학에서 하나님이 이 모든 사물에 대해서 아시는 굉장히 많은 분류가 있습니다만 지식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오성 단순지라고 합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 보면 ‘오성’이라는 것은 이성과는 조금 다른 말입니다. ‘이성’은 무엇을 알 때에 인과관계가 중요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A라는 것이 있어서 이 결과가 B가 되고 B라는 결과가 다시 C와 연결이 될 때에 A는 원인이고 B는 결과입니다. 그 다음에 C에 대해서는 B가 원인이 되고 C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리들이 어떤 규칙에 의해서 필연성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항상 규칙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능력이 이성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가르칠 때 잘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남이 말하는 내용 중 논리적으로 말하기만 하면 아주 잘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남이 해 놓은 공부를 하기에 아주 적합한 능력이고 자기가 어떤 것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이에 비해서 오성은 고전철학에서 조금 다릅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캐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변증적인 능력입니다. 변증적인 능력이란 것은 증명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이성의 논리를 초월해서 단박에 확 알게 되는 그런 능력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감각으로 들어서 아는 것도 오성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이성의 연결고리를 초월하는 것을 아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오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낮은 것은 감각이지만, 평범한 수준의 것을 이해할 때는 이성의 능력이 소용되지만 아주 탁월하고 뛰어난 것을 이해할 때는 오성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오성과 이성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가지고 이성과 오성이 작용을 하면서 무엇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성은 판단능력과 관련이 되고 이성은 추론능력과 관련이 됩니다. 복잡한 설명 같지만 조금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아실 때는 논리를 통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을 인간이 안다고 할 때에는 모르는 부분, 감추어진 부분이 있고 알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넘어오면서 이치를 깨닫게 되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데 하나님께는 몰랐던 것들이나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라는 논리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두 한꺼번에 아십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모두 아시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인간은 현재 것을 알지만 모두 아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것은 알았지만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고 미래의 것은 추측해서 알 뿐이지 아직 눈앞에 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은 다릅니다.
첫째 오성 단순지라고 합니다. 단순하다는 뜻과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될 경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로 교통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고안해 낸 설명인데 이런 것입니다. 내가 방황하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사실이 새로운 사실일까요? 새로운 사실이 아닐까요? 당연히 새로운 사실일 수가 없습니다. ‘오, 네가 내게 돌아왔냐?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의 지식 바깥에 있었으니까 하나님은 뭔가 능력이 모자라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나 새로운 일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내가 언제 태어날 것, 언제까지 방황할 것, 언제쯤이면 내가 주님께로 돌아올 것, 언제쯤이면 내가 당신을 멀리 떠날 것,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감격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깁니다. ‘하나님, 제가 먼 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모든 삶을 회개하고 이제 제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새롭게 당신의 의견을 표명하실 이유가 없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인식할 수 없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격려를 받으며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할 동기부여를 어디로부터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에게는 새롭지 않다, 이는 내가 모두 알고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인간과 교통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위 눈높이로 우리 인간을 대해 주시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인간과 공감하시는 모습을 인간이 느끼고 경험하게 해 주심으로서 도덕적으로 인간과 교통하고 당신이 원하시는 올바른 길로 인간이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멀리 떠나있는데 2005년도쯤 제가 한참 이런 사유에 깊이 빠져 들어갈 때 창세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모두 끝내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더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왜 하나님이 당신 속에 모두 있는 계획대로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참 보기 좋았다고 하시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러한 사유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창조 된 것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계획 된 대로 그대로 됐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면서 아주 좋게 느끼시는 그 경험이 인간에게 전달됨으로서 인간들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현견지(現見知)라고 부릅니다. 현견지(現見知)라는 말은 제가 번역을 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라틴어로 번역을 하면 ‘visionis’ 본다, 봄, 바라봄, 바라봄의 지식,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저는 현견지(現見知)로 번역을 했습니다. 인간은 대부분 현견지(現見知)로서 사물을 압니다. 그래서 과거는 경험했지만 모두 알지 못하고 현재는 알고 있으나 모두 아는 것이 아니고 미래는 일어날 것이지만 아직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파악하지 못했고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갈 뿐이지 모릅니다. 현견지現見知)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단순지로서 사물을 아시지만 현견지(現見知)로 아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 효과를 전달하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동참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희로애락을 느끼시는 존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런 효과를 느껴지게 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도덕적인 교훈을 받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설명이 길었지만 이것은 지식에 관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삼위일체를 배울 때에도 이것이 굉장히 필요한 지식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아까 이렇게 나왔습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언제부터요? 우리가 그것을 주님께 고백하기 전에도, 심지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가 태어나면 이런 의복을 어느 때 입어야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단순지로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단순지에 관해서 어거스틴이 자기의 신국론 교부들의 시리즈의 전집 48권 9쪽 신국론 11장 21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현재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불변하고도 영원한 현재로 바라보신다.’그래서 하나님에게는 현재, 미래, 과거가 없고 하나님에게는 오직 현재적 현재, 과거적 현재, 그리고 미래적 현재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단순지로서 모든 사물들을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주 자주 현견지(現見知) 안에서 당신의 사물을 보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경험하도록 당신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우리가 그 분의 감정에 동참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라고 하는 것이 온 몸으로 확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기뻐하신다고 하는 느낌이 강물처럼 내게 쏟아질 때 그 때 나는 더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현견지(現見知)로서 우리와 사물을 아시는 것, 이것은 우리의 중요한 교통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 그림을 보십시오. 저렇게 세 사람이 절을 하고 무엇을 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맨 뒤에 있는 사람을 기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가운데 손이 있는데 무엇인가를 달라고 합니다.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계속해서 사회적 지위가 상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저 위에 돈주머니가 있는데 돈을 달라는 것이고 반짝이는 트로피는 영광인데 영광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방신입니다. 신이 아니고 피조물일 뿐인데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대상을 향해서 이런 것들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시대로 돌아가서 보면 구약에 이방인들의 제사가 나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이 인신제사까지 드려 공양을 했습니다. 몰렉 신 같은 경우 금속으로 동물을 만들어서 뱃속을 파서 구멍을 내서 뜨거운 불에 달구고 어린아이를 그 뱃속에 집어넣어 뚜껑을 닫아 태워 죽임으로 이방신에게 공양을 드림으로서 공양을 받는 이방신이 자신들의 신심을 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남다른 영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저 사람들의 제사는 고대 근동에서는 명백히 뇌물 개념의 제사였습니다. 뇌물을 주는데 뇌물에 대해서는 도덕성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너 나한테 이런 제사를 드리는데 이 제물을 어떤 방식으로 마련을 했느냐든지 혹은 정결한 직업 활동으로 번 돈이냐?’이런 것들을 이방신들이 묻지를 않습니다. 뇌물을 받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물어볼 리가 없습니다. 일단 돈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거래관계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그런 것은 모두 우리가 구할 것들이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방인들은 그것을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신조차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신에게 조르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이방인들의 염려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쾌하죠? 모르실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들이 어디에서 또 모순을 느끼느냐 하면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실 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할까요? 그래서 많은 교부들과 많은 해석가들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할 때의 그것을 먹고 입고 마시는 이런 양식이 아니라 아주 초월적인 영적인 양식으로만 해석해야 된다, 혹은 예수님이 친히 ‘나는 생명의 떡이요’ 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해야 된다. 그래서 날마다 초월적인 우리 영혼에 양식을 주시고 혹은 날마다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자들과 교부들을 포함한 그 후에 개혁신학자들은 그것을 그렇게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일용할 양식, 우리들이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고 존속하는데 있어서도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그림 기억나십니까? 요즘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데 어느 늙은 할아버지가 다 낡은 성경 위에 돋보기를 벗어놓고 거친 빵 한 덩어리를 놓고 간절히 감사기도를 하는 그림 말입니다. 그런 그림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을 결국은 이방인들은 신을 이용해서 저렇게 허황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간구하는 것으로서 염려를 해결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저런 어마어마한 영화가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육신의 삶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있다는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저런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추천할만한 책이 두 가지가 있는데 우선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것이 두 챕터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꽤 길게 논설을 했고 논점도 많습니다. 예전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미 공과공부를 하셨겠지만 다시 한 번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를 꼭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찬과 언약’이라는 시리즈에 보면 왜 예수님이 성찬을 하실 때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시고 그것이 주기도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밝혔습니다. 매우 심오한 의미가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방인들은 바로 그런 식으로 산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굽신 거리면서 기도하고 온갖 종교적인 열심을 바치지만 그러나 자기 신들을 이용해서 돈, 지위, 영화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마지막에 자기를 신처럼 떠받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해결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요? 여기에서 인격이라는 이야기를 꽤 길게 설명하고 시작을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요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적인 신앙이 아니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를 들어 당구공이 세 개가 놓여있습니다. 큐 대로 제일 앞에 있는 A라는 공을 탁 때립니다. 그러면 당연히 B라는 공을 움직이고 B라는 공은 C라는 공을 때릴 것입니다. 제대로 맞춘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A, B, C 라는 공 모두 자기 의지는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물리적 힘이 가해지니까 그 법칙대로 움직이면서 A는 B를 때리고 B는 그 충격으로 C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 A, B, C 세 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겠고 아주 유능한 당구 선수라면 어느 정도의 힘을 줄 때에 이 세 개의 공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과 각도까지 계산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은 당구공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 속으로 들어가서 인격에게 전달되어서 한 인격체로서 그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어떤 두려움과 공포 같은 것에 메여서 일정한 방향으로 간다면 겉으로 보기에 그 방향이 선한 방향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더 재미있는 오락기구 같은 것들이 많으니까 그런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서커스를 보러 가면 음악이 나오면 개가 아주 놀랍게 춤을 추는 것을 어렸을 때 본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어떻게 개가 음악에 맞춰서 저렇게 춤을 출 수가 있을까?’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어떻게 시키는지 아십니까? 그 당시에는 전기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니까 차가운 철판 위에 개를 올려놓습니다. 당연히 가장자리에는 못 나가게끔 울타리가 처져있습니다. 밑에서 불을 떼고 음악을 틉니다. 한참동안은 괜찮았는데 조금 있으니 뜨거우니까 개가 발을 떼는 것입니다. 그 때 음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면 이반 파블로브의 조건반사에 따라서 개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그 음악을 틀어주기만 하면 그 때의 트라우마가 생각나면서 뜨거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발을 옮기면서 그것이 춤이 되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은 개가 시청하는 사람의 즐거움에 참여하면서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사실 그 음악을 틀 때마다 뜨거웠던 철판을 기억하면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조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성경의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이성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더라도 순종을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무효화 시키는 이론은 아닙니다. 신앙에서 순종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순종을 아주 중요하게 봅니다. 일단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길을 돌이켜서 순종할 때 이 마음에 평안이 오고 정신에 맑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리분별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순종한 공로로 그 순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은 형식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데 그 순종은 순종한 공로로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 할 때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일을 선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이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텐데’ 하면서도 선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순식간에 마음의 평안이 사라집니다. 아주 뛰어난 신앙의 사람들도 아주 순식간에 평안이 사라집니다. 말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거나 혹은 정신이 혼란에 빠집니다. 아니면 아주 무감각한 상태로 들어가거나, 그러나 그것을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정신의 맑음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일단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판단하게 하는 기본이 인격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한 사람을 주체로서의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기체입니다. 기체라는 것은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기본이 되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기초할 때 ‘기’자와 몸 ‘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랍어의 프로소폰에서 왔습니다. 프로소폰은 원래 얼굴입니다. 여기 보면 가면이 있습니다. 가면이 있는데 극중에서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했습니다. 경극 같은 것 보면 갑자기 까만 얼굴이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하얀 얼굴이 나타나고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의 얼굴들이 나타납니다. 그런 것을 프로소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프로소폰은 얼굴 용모, 또 어떤 사람의 모습이나 외관, 연극 등에 사용되는 가면, 그 사람의 인격, 이런 것들을 제가 자의적으로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아주 두꺼운 그리스어 고전 사전에서 이 뜻을 찾아 본 것입니다. 위 네 가지가 대표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인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한 번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극중에 나오면서 가면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가면이 종의 가면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것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의 얼굴만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처럼 행세하고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그것이 한 사람의 속과 겉을 일치시키는 인격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person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personality 라고 해서 개성이라는 단어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중요하냐고 하면 그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기독교 이전에 그리스 철학에서는 한 사람을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기체라고 본 것입니다. 한 주체가 되게 하는 기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초기 기독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느냐 하면 신과 결합된 존재성이 인격이라고 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의 위격을 가지신 것처럼 그것의 유비(類比)라고 하는 것은 A를 보면서 B를 연상할 수 있도록 서로 같은 ‘류’로써 비교가 되는 것을 우리들이 유비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 아무 생각 없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졸졸 따라다닌다. 그러면 마치 개가 주인을 따라다니듯이 저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B라는 사람을 졸졸 따라다닌다. 이렇게 둘 사이에 유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계셔서 세 분이 각각 위격을 가지고 계신데 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처럼 인간은 이해와 의지와 기억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관을 이룸으로서 이것이 하나의 인격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사람이 신이신 하나님과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성을 가리켜서 인격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은 신과의 관계가 없이는 인격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영혼입니다. 인간으로서 영혼인 동시에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하는 영혼, 그리고 그 영혼의 기능인 인간의 마음, 마음 안에서 작용하는 영혼의 기능인 이해, 지성, 의지, 기억 이런 것들이 한 사람을 한 인격이 되게 한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격적으로 사람을 본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잘해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잘해주는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 가족들도 코코한테 잘해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개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강아지한테는 좁은 의미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이 사용될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고유한 사랑은 영혼을 가진 대상끼리만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상대방이 하나님과 결합된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즉 쉬운 말로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엄청나게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면 아마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전에 내가 존경하던 사람을 자꾸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영이신 당신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셨으면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런데 오늘날처럼 비인격적인 신앙이 판을 치는 시대에는 이렇게 인격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질문 보겠습니다.
. 오성이 직관과 일치하나요?
딱 일치하지는 않는데 오성이 직관의 기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슬퍼하시지 않나요? 하나님께 새로운 것이지 않나요?
-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연약해서 혹은 악해서 죄를 지을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실체를 슬프게 하거나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슬퍼하시는 효과를 우리에게 전달하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만들고 그 죄악을 버리도록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굳이 맞춰주실 필요가 없는데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아주 즐거워하게 합니다. 제가 할아버지가 되어봐서 아는데 손녀가 얼마나 예쁜지 지금도 많이 보고 싶습니다.
. 성경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의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하나님이 현견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심으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용할 양식과 그리스도인의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 주식의 투자나 부동산 투자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탐욕입니다.
.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했을 때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믿음으로 갔다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배워서 무조건적 순종이 중요하다고 배웠는데요?
-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그 사람을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존엄하게 대하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다녔을 때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존 로크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성경에 주석도 많이 쓰고 성경 해설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고전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이신론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커다란 원리로 보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떻든 영국에서의 존 로크는 경험주의 철학자로서 거두이고 세계 사상사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 사람을 애독했고 저도 인간 오성론이란 책을 꼼꼼하게 읽어 본 적이 있는데 평범하게 읽기에는 쉬운 책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전이니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 책에 직접 들어가서 이 사람 인격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가 보니까 한글로도 여러 가지가 제 각각 있습니다. 원문을 놓고 꼼꼼하게 대조해서 보고 제가 다시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2장 27절과 9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내가 생각하기에, 인격이란 첫째, 생각하는 지성적 존재로서 두 번째 추론(reason)과 반성(reflection)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세 번째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 여길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 여길 수 있다는 의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자기를 마치 타자인 것처럼, 남인 것처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인격을 가진 사물의 특징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신 바깥에서 봄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물(thing)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그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로서 독특하게 일정한 일관성 있게 생각하는 존재가 ‘인격’이다는 뜻입니다. 추론은 원인과 결과를 추적하는 것이고 반성한다는 것은 그냥 과거를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때 있었던 나와 마땅히 있었어야 할 나 사이의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성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견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인격적인 사람의 특성은 반성이 없습니다. 마땅히 되어야 할 나와 실제 있었던 나 사이에 차이를 인식할 수 있을 때 그 때 반성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쉬운 점이 남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 그 때 내가 이런 존재가 되지 말고 저런 존재가 됐어야 하는데, 혹은 그 때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저렇게 말하는 존재가 되었어야 할텐데 하고 아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성입니다. 그런 자연적인 반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의 지혜가 늘어나도록 만들지만 도덕적인 반성은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작업을 하는데 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네, 아, 이렇게 하는 것이었네 생각하면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도덕적인 반성을 하게 됩니다. 아, 이것은 악이었다, 이것은 죄였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 마땅히 인간으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반성을 하게 되면 좀 더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격을 한 마디로 정리를 하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내적인 실체, 혹은 내적인 기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인격체가 되게 하는 자립적 본질입니다. 하나의 독립된 사람으로 서게 하는 본질입니다. 그래서 인격을 어떻게 함양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인간이 될 것이냐가 결정이 되고 그 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길을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인격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격의 색깔이 서로 다릅니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내적인 실체는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름 다움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살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의 다름을 보면서 그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은 죄와 상관이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문제도 왜 저 사람은 나와 다른가? 그것을 똑 같게 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쌘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글을 썼는데 그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문에서 읽은 것 같습니다. 남편은 바다를 좋아하고 아내는 산을 좋아합니다. 이런 경우 결국은 목소리가 센 사람이 이겨서 아, 무슨 지자요산이라고 했는데 산으로 가야지 하면서 끌고 가거나 아니면 젊었을 때 저처럼, 저는 바다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솔직히 동해안에 가면 설악산은 눈에도 안 들어왔습니다. 저는 바닷가에 하루 종일 앉혀놔도 충분히 있을 정도로 그렇게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경우 저도 이런 처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서로를 속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속초까지 같이 가서 하루는 아내가 좋다는 산에 가고 하루는 남편이 좋다는 바다에 가고 아니면 오전에는 산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바다를 가든지 아니면 더 많이 즐기고 싶으면 숙소를 정해놓고 당신은 산에 가서 구경하고 나는 바다에 가서 구경하고 우리 다섯 시에 만나서 저녁 먹자, 얼마나 좋습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 할 때 서로 다름다움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굳이 그렇게 갈등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도 자녀를 교육시킬 때 딸은 살짝 뺨 한 번 때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몇 번 혼을 냈습니다. 정리정돈을 안 해서 그렇게 혼을 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해 주시니까 정리정돈이 뭔데? 그것이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인가? 그 다음에 내려놓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이를 야단치고 상처주고 했다는 생각에 많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다름을 존중해 주며 사는 것,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탐욕,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도 다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 다룰 것도 없습니다. 순식간에 큰돈을 벌고자 하는 그런 욕구를 버리십시오. 결국 그것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 선한 불신자들은 어떤가요? 예수 안 믿어도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나은 인간들
-그럴 수 있습니다. 결국 선을 무엇으로 보느냐가 다릅니다. 만약에 단지 선을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손해를 안 끼치는 것, 또는 이웃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 자체를 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제가 책에서 설명을 했으니 굳이 알고 싶으시면 도덕적 통치의 책을 읽으시거나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아니면 죄와 은혜의 지배 같은 관계된 것들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 어떻게 하면 생각하는 지성적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 이미 지성적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여기에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맛 집을 생각하거나 패션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최근에 지은 최신 아파트, 비싼 아파트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온전한 인간인가?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인간과 현실적인 나 사이에는 어떤 격차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자기 자신을 비교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하고 비교를 합니다. 그것은 별로 좋지를 않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과 비교를 해야 합니다. 1년 전의 나, 그리고 2년 전의 나, 그리고 일주일 전의 나, 자신과 비교를 하면서 참되게 그렇게 되어야 할 나에게 어제에 내가 가까이 다가가 있나, 아니면 오늘의 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 때 인간은 자존감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잘못 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 인격을 중요시하고 개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질서가 무너지지 않을까요?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 자녀들에게 인격을 너무 중요시하면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자녀들에게 인격을 무시하면 가정교육은 교육이 아닙니다. 그 인격보다도 더 앞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적이지 않으면 하나님께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돌아오는 것도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노예적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지 않고 인격적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중요시하고 개성을 중요시하면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더 조화롭게 됩니다. 심포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쪽에 콘트라베이스에서부터 저 쪽 바이올린에서 베이스 엘토 테너 소프라노까지 악기들이 되어있습니다. 바이올린은 굳이 첼로의 소리를 흉내 낼 필요가 없고 모든 악기가 같은 음색을 낼 수도 없고 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바이올린은 가장 바이올린다운 소리를 내고 첼로는 가장 첼로다운 소리를 내고 심벌즈는 가장 심벌즈다운 소리를 내고 많은 악기들이 어울릴 때 최고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