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필요한 것을 아신다 (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리라”(마 6;19~24)
녹취자: 이 솔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에 벌써 한 주가 지나갔군요. 코로나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그리고 마음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굉장히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할 줄 압니다. 그래서 좀 내밀한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이제 1부 염려하지 말라 의 제4장 필요한 것을 아신다 거기에 제2부를 우리가 공부를 하게 되겠습니다. 여기 나와 본문을 같이 한번 읽고 우리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인격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좀 설명을 해드렸죠. 좀 어렵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다고 하는데 또 뭐 오래 살다 보면 좀 어려운 내용도 들어야지 항상 듣는 내용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면 발전이 없지 않겠어요. 해서 이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고유하게 그 사람이 되게 하는 자립적 본질이에요. 그것 때문에 인간은 인격성을 가진 주체성을 가진 인격이 된다 말씀을 드렸어요. 그렇게 되면 인제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을 이제 설명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좀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십시요 라든지 아니면 우리의 우리 엄마는 나를 너무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아 라든지 난 그 선생님 너무 좋아 왜냐면 인격적이셔 하는 말.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규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설명을 들어 보면 결국 인격적인 관계란 서로 자유롭고 독립된 존재로 여겨서 인격체 대 인격체 이건 주체로 여긴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주체에 대한 존중이 이 안에 깔려 있는 거예요. 인격체 대 인격체로서 교제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학교 다닐 때 저 선생님은 인격적이셔. 그 이야기는 개인의 경험이 그 안에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한테는 너무 인격적으로 잘해주고 자기한테는 막 폭언과 폭력과 폭언으로 일관했다면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꺼예요? 그것은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도 그 안에 함께 포함되어 있고 또 비록 개인적으로 그분을 뭘 아직 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대우 받으리라는 잠재적인 기대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선생님을 인격적인 분이다 이렇게 묘사를 하는 거예요. 표현을 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떤 선생님이 참 인격적이시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만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 선생님 자신에 관해서도 말해주는 거죠. 뭐냐 하면 학생들한테는 너무 그렇게 잘해주는데 혼자 있을 때는 온갖 나쁜 짓을 한다더라 그 소문이 나오면 우리는 인격적이라고 안하고 위선적이라고 얘기하죠. 그래서 인격적이라는 건 무슨 자립적인 주체로서 선하고 훌륭하게 있는 것 그런 자립의 상태를 포함하는 게 인격적이라는 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인격적이라는 말 속에서 사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다른 사람과 선한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결코 나뉘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접하면서 가장 크게 감동을 받았던 그 부분이 그 인격적인 거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나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존재인데 그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격적으로 여겨주시는구나. 나를 주체로서 인정해 주시는구나. 너무나 부족하고 심지어는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악하기까지 하는데도 여전히 나의 주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구나 하는 그것이 가정에서는 사회에서나 학교에서나 어느 사회에서도 받아 보지 못했던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열린 교회를 세울 때도 가슴 깊이 미어지도록 밀려온 그 욕구가 인격적인 그런 교제가 있는 그 모임이 너무 그리웠어요. 그것이 개척에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제 결국 어떻하냐면 두 사람이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당연히 이 사람이 이제 모든 활동을 하고요 이 사람은 인격에서 이런 활동이 이렇게 나오겠죠. 그렇죠. 그런 것이 결국은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거죠. 그것이 사랑의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결국은 선을 지향하는 거죠. 그래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또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자 하고 이런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사랑으로 교통하면서 개인만 선을 향할 뿐 아니라 이렇게 이루어지는 교제 자체가 묶여져서 선을 향하게 되는 그래서 이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있어도 결국은 이렇게 이렇게 엮어져서 전체적으로 개인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선을 향하지만 이게 전부 다 묶어졌을 때 전체가 하나의 그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의 선을 향하게 되는데 이 선이 결국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요새 그 외로움에 대해서 좀 최근에 읽고 있는데 그 속에서 아주 그 저도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누가 얘기를 잘 하더라구요. 뭐냐면 혼자서 외로운 사람이 그런 사람이 둘이 만나서 외롭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 드렸잖아요. 혼자 살아서 행복한 사람이 혼자 살아서 행복한 또 다른 사람과 만나서 행복해지는 것이지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둘이 만나서 행복할 가능성은 없다. 설교 시간에 그런 얘기 여러 번 했잖아요. 그런데 외로움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 둘이 만나서 그 만났기 때문에 외로움을 해소할 가능성은 없다는 거죠. 그걸 극복해낼 수 있는 자아의 성숙을 이뤄가야 된다 라고 하는거지요.
그 다음에 이제 그렇게 되면 이제 이것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맹목적으로 구할 때에 이방신에게 뇌물을 받치듯이 빌거나 혹은 비는 그 자체에 무슨 힘이 있어 신을 꼼짝 못하게 한다든지 그런 개념을 가지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제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기도를 통해서 보이게 됐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또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응답해주셔요. 그렇죠.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셨잖아요. 그리고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간구하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그러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학습하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에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거야. 이게 부인이죠. 부인. 그러니까 자기가 예전에 몰랐던 것을 깨닫고 아 이건 아니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어서는 안 돼. 혹은 이렇게 해서는 안 돼 하는 그런 자기 부인이 생겨나게 된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그렇게 되면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만이 아주 순수하고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계시고 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나의 모든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질 때 이러한 기도의 과정이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오는 거야.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뜻에 대해서 숙고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기 부인과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거죠. 여기에서 이제 하나님의 순수한 지혜이고 자기는 욕망에 물든 지혜란 말이야. 이런데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믿음이 좋아요.
그래서 오늘도 지금 제가 삼위일체를 읽다가 왔는데 어거스틴이 8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알고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알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까 똑같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드리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닌 거죠. 참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좀 빨리 나가겠습니다. 자 3번에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6장 32 절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시느니라는 말은 이제 희랍어로 오이다 인데 현재 완료 동사예요. 그래서 무엇 무엇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알았다. 이미 완료형이지요. 이미 알았다 알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알았다. 그러니까 필요 우리의 필요가 생기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또 우리가 그 필요를 느껴서 기도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고 이런 의미예요. 그게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이제 육신의 필요에 대한 두 가르침을 우리가 여기서 만나게 되는 거죠.
첫째는 하나님의 지식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학습이라는 것이 없어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이만큼을 알고 계셔요. 이게 하나님의 지식이에요. 그런데 이게 그러니까 한계잖아요. 그런데 이게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사실들이 여기 존재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데 새로운 사실들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알려졌어요. 하나님의 지식이 확장이 되겠죠. 그러면 이만큼 하나님이 모르셨다는게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뭐냐 하면 이만큼을 아셔야 했는데 그 전에는 이걸 모르셨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만큼 불안전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지식에는 이게 경계거든요. 경계예요. 여기는 지고 여기는 무지예요. 이런 경계가 하나님에게는 없는 거예요. 경계가. 그래서 그것을 결국 우리들이 무한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거예요. 무한히.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하든지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것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은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것을 적용해 보면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태어나고 태어난 후에 운명도 우리가 우리의 그 인생을 지탱하면서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들을 이미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것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을 위해 염려하지 말아야 된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전지식 모든 걸 알고 계시다는 이 지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를 주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를 주지 못해요. 이게 차이는 뭘까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이게 위로가 되는 거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불신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 라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예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될 때 그때에 이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하나님 전능하시다 라는 사실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엊그제도 아내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참 그게 이런 시대에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렇죠. 그리고 특히 저는 목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봤거든요. 그중에는 정말 하나님 좀 더 살려주시면 안돼요. 이렇게까지 기도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죽음의 마지막이 너무 너무 달라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추호의 요동이 없어요. 믿음 생활 잘 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신 집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임종을 앞두고 신방을 갔어요. 두렵지 않으세요? 목사님 뭐가 두렵습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는 이제 유한하고 고생이 많은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갑니다. 마음이 아주 평안하고 감사합니다. 얼굴이 환하게 빛났어요. 그게 결국은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는 사람이 누리는 특권이예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요. 염려할 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어떤 불행한 일이 있다면 일어나라 그래라. 나는 무섭지 않다. 왜? 나의 일생이 주님의 손에 의지하고 있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과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야 염려 필요 없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워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때에 일반적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기도함으로써 우리에게 응답해주셔요. 그걸 통해서 우리들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죠.
첫째로 배우는게 뭐냐하면 모든 좋은 것에 기원이 그분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우는 거죠.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시나니 그는 변함도 없 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다. 사실 그 뒷부분이 신약 성경에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예요. 저게 무슨 뜻일까? 회전하는 그림자가 무슨 뜻일까? 두고 인제 여러 가지 설들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앞에 나오는 변함도 없으시고를 반복하는 설명이라고 전 해석을 해요. 그래서 그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런 뜻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물체가 있어서 움직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림자도 따라 돌겠죠. 그러면 어느 시점에서는 그것이 있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또 없고 있고 없고 있고 없고 할꺼 아니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바람개비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만약에 이쪽으로 이렇게 빙빙 돈다면 어쨌든 지간에 이 시점에 이게 있는데 이게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 여기 비어 있을꺼 아니예요. 이런 식으로 있고 없고 있고 없고 이렇게 될꺼 아니예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결국 변동성을 얘기하는 거죠. 그런 변동성이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분이시다. 존재에 있어서 변함없이 계속 있으시고 그의 성품에 있어서도 있는 것은 계속 있으신 분이다. 즉 선했다 악했다 신실했다 거짓됐다 이렇게 변화하는 분이 아니고 존재가 계속 있는 것처럼 그의 성품도 계속 있으셔요.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성품과 존재가 하나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이 동일한 말이 되는 거죠.
인간에게는 안 그렇죠. 인간의 존재가 있고 그 속에 일부분이 선함이 있는 거죠. 선함을 빼버려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선함을 빼버릴 수도 없지만 선하시지 않는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신 거죠. 그런 불변성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칼빈도 이 사실을 강조해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기도하라고 하실까?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좋은 것들이 그 분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런 말을 칼빈도 합니다.
그래서 2번은 이제 둘째는 첫째의 결과인데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야 되겠구나. 학습을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결국은 여기서 느끼는 것이 결국은 강력한 소외감이예요. 소외감. 단절감. 이걸 경험하고 그 다음에 이제 하나님을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자신이 하나님께 소속되었다는 연합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거지요.
그 다음에 이제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하늘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제 나오거든요 그 동안에 많이 지금 댓글들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조금 이제 보고 우리 하겠습니다. 자 또 BR연습님. 오솔길 주세요. 가져가세요. 추첨 되세요. 316농장님 반갑습니다. 빅토리아님 서울사진 멋있네요. 석양이 참 멋져요. 서울이 굉장히 아름다운 도시예요. 신나는 봄님. 말씀에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시죠. 또 금계국. 저희는 동네 산책길이 정겹습니다. 최미숙님. 말씀에 감탄하신게 아니라 달고나 빙수에 감탄하셨네요. 우와 달고나 빙수 러블러블러브 하트하트 하셨네요. 또 어떤분 오셨는데. 사진 추첨 결과가 나왔죠.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일본 나고야에서도 들어오셨네요 나고야입니다. 좀 늦게 들어왔습니다. 환영합니다. 그다음에 또 목사님과 소통할 수 있는 이 공간이 너무 좋고 감사합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많이들 들어 오셨는데 또 처음 댓글 달아 봅니다. 제가 오늘 살이 빠져보인다 그러시는데 지금 그냥 경미하게 빠졌습니다. 저녁 잘 먹으면 다시 회복할 꺼예요. 이소영님. 살면 살수록 제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으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죠. 그래서 저는 누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 그러면 저는 결코 아니고요 그러실리도 없지만 하나님이 딱 제가 죽을 때 그냥 한번 다시 한번 그냥 아직 오지 말고 다시 한번 1세부터 다시 한번 살아 볼래 그러면 주님 됐습니다. 전 충분히 살았습니다. 그러겠다고 얘기를 해요. 왜냐하면 한 인간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자립 정신적인 자립을 이루는데까지 피 흘리는 수많은 고통을 겪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요. 요새는 기도할 때마다 자아가 확립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어린 학생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또 어른들도 마찬가지에요. 뭐 늙었다고 해서 그렇게 자아가 확립되는 게 아니거든요. 보면은 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 그러면 그 눈물이 나요.
그런 의미에서 인제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했어요. 그 아버지라는 말이 희랍어로 파테르예요. 재미있죠. 이렇게 파테르 그 다음에 영어에 파더 그 다음에 독일어의 바터 히브리어의 아브. 어쨌든 좀 뭔가 이렇게 비슷비슷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파테르라는 말을 찾아 보면 자기를 태어나게 한 진짜 아버지를 가르키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 사용되면 아예 그냥 우리로 말하면 단군이 우리의 파테르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먼 조상까지 다 이 파테르 속에 들어가게 돼요.
예수님이 이 교훈을 주실 때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개 국어를 했어요. 못하는 사람도 아마 있었겠죠.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이제 코인에 헬라어예요. 히브리어는 자신들이 이제 종교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히브리어를 교육 시키고 지금도 초등학교 한 6학년 정도 되면 구약 성경 히브리어 아랍어 성경을 자기 스스로 읽는다 그래요. 신학적인 뜻은 다 모르겠지만 읽는다 그래요. 그래서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어를 못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죠.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이제 로마제국 이전에 마케도니아 제국이었잖아요. 대 알렉산더가 제국 전체를 관할하기 위해서 공용어를 채택해요. 그 공용어가 코인에 헬라어였어요.
그래서 그때 파테르라는 단어가 이제 가족 속에서 부르는 명칭으로 쓰여지기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걸 아빠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는데 확신은 저는 안 들어요. 이렇게 아버님 뭐 이런 거보다는 훨씬 더 가까운 그래서 영어에 데드 이렇게 번역을 한다고 하는데 어쨌든 가족들 사이에 불리는 친근한 명칭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얼마나 이렇게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그 아버지를 가깝게 느껴야 되는지를 예수님이 이런 호칭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거죠.
그리고 인제 하늘이라고 했는데 이제 우라니오스 예요. 우라니오스. 근데 이거는 그냥 하늘이거든요. 의미는 초월 영광 무한 무한한 능력 이런 거를 함께 의미하는 상징어예요. 그래서 하늘 아버지라고 하는 말은 가족 관계에서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대해 주시고 동시에 무능한 아버지가 아니라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 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움직이고 계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아무리 높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모르면 그 분은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또 만약에 아버지가 나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걸 아무리 많이 느껴도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가 온전히 그분을 의지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결국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을 통해서 너희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은 너희를 가족처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초월적이고 영광스러우시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존재이시다. 그러니 그 분을 너희들은 더더욱 의지하며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느냐 이걸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염려는 결국 그림을 보면 염려는 결국 은혜에서 멀어질 때 그때에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어요. 그런 의존과 절대적인 의존과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여기로부터 점점점점 멀어지게 될 때에 그때에 결국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려는 아주 추한 독립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하나님보다는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거여. 그런 속에서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죄가 지배하게 되고 이러면서 참으로 독립적이고 싶어서 주님을 멀리멀리 떠나는데 마지막에 다가오는 건 더 큰 속박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어둠속에서 근심 염려 속에 쌓여서 속박 받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러다 그것을 깨뜨리고 깨뜨리면서 육체의 염려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되는 거죠. 어떻게? 하나님을 더 알고 그 다음에 더 닮고 그 다음에 더 사랑하고 싶은 존재가 되는 거죠.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그래서 하나님을 더 알고 더 닮고 더 사랑함으로써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이 속에서 결국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기 전에 또 들어온 사연들 좀 보시겠습니다. 이철호님. 예수님이 환자 고침에 있어서 어떤 환자는 알리지 말라고 하고 어떤 환자는 제사장에게 알려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제 알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시기를 당하고 그 다음에 그런 일들이 좀 더 빨리 일어나지 않기를 원한 뜻이고 제사장에게 알리라고 한 이야기는 문둥병 같은 것은 그 당시에 사회에서 격리가 되어야 했고 격리된 사람으로서 문둥병이 나으면 율법과 사회법이 일체가 돼 있었잖아요. 그것을 이제 나았다는 것을 확실한 증명을 받아야 해요.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이중적으로 명령을 하시는 것이죠.
또 씨익분. 미래에 고민할 때 4차 산업에 대해 기독교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기도해야 되나요. 4차 산업 4차 산업에는 4차 혁명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미 세미나도 많이 했고 그리고 특강도 했고 책도 저기 퓨리턴 라이브러리에 여러 권 들어와 있으니까 읽으셔요. 제가 여기서 일이분 동안에 대답해 드릴 수는 없고. 그런데 4차 산업 혁명에서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은 누구냐면 자기 세계관과 인생관 정립이 안된 사람들이예요. 그것이 적립이 안 된 사람들에게는 엄청 혼란이 생기는 거예요. 적립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석 가능한 변화예요. 그리고 또 4차 산업 혁명은 좀 과장된 측면도 있어요. 학자들에 따라서는 3차 산업의 고도화지 무슨 4차 산업은 무슨 4차 산업이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인제 가치관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건 분명해요. 그때에 자기 자신이 확고한 가치관과 그 다음에 인생관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이제 혼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잘 배우시면서 그런걸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가시길 바랍니다.
다음에 sj님. 우리에겐 의지미 하나님께 있는 것이 독립미. 의지미가 아니라 의존미입니다. 의존미. beauty of Independent 제가 만든 단어예요
다음에 또 이철헌님. 고맙습니다. 등등 들어오셨어요 오늘은 수업을 조금 일찍 끝내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공과공부를 전부다 분석을 해보니까 다 끝내지 못하고 나가시는 분들이 통계적으로 비율이 꽤 나왔어요. 그래서 한 10분 정도 일찍 끝내는 걸로 앞으로도 그렇게 노력할려고 합니다. 공과공부 끝내면서 여러분들에게 오늘 두가지 선물 드렸죠. 사진과 그 다음에 그 열린 공간 맛있는 파스테르 우유로 만든 그 눈꽃 빙수 달고나 빙수 모바일 쿠폰 쏴드린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메일로 이메일에 올려주시면 열린교회 이메일에 제가 오늘 처음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강의 어떠어떠했습니다. 그리고 전화 번호 남겨주시면 모바일 쿠폰을 추첨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기쁜 소식은 지난번에 제가 달고나 커피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드려서 여러분 많이 만들어서 맛있게 드셨잖아요. 내일은 우리 방학하고 있는 어린이들과 함께 주부들이 아주 편안하게 아이들이 푹 빠질 맛있는 간식을 한가지 여러분들에게 레시피를 알려드리고 제작하는 과정도 영상으로 만들었다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