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I-(1)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녹취자: 이새봄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지난 일주일 동안도 코로나 안 걸리기 위해서 애 많이 쓰셨습니다. 잠잠할 줄 알았는데 다시 또 이렇게 감염 병이 번져가고 있는데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으니까 우리가 마음을 다잡고 어찌하든지 경건생활을 잘 해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자, 오늘은 이제 이 책의 1부를 끝냈고 2부 하는 첫날입니다. 첫째는 ‘염려하지 말라’, 그 다음 2부는 ‘의미 있게 살라’, ‘염려하지 말라’는 것만 목적이 아니라 염려하지 말아야지만 인생에게 주어진 고유한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제 염려에 관한 가르침의 결론을 6장 33절로 끝맺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 같이 한번 6장 33절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아마 요한복음 3장 16절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이고 또 우리 모두 어려서부터 들은 구절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그 의미를 잘 모르는 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한 두 시간에 걸쳐서 이것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세상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루는 나라이고 세상 나라는 이방인들이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이루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도 획일적으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도 여전히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면서 세상 나라를 위해 봉사하며 사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좀 더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자녀들의 삶의 방식과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방사람들은 끊임없이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의 신들에게 먹고 입고 마실 것을 구하면서도 계속 염려 속에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으면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생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다, 이 뜻입니다.
그러면 좀 더 설명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국가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제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신정통치가 이루어지잖습니까? 모세 시대 때. 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고서도 ‘사사’라는 사람들이 재판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왕을 구합니다. 그래서 왕 제도가 들어오지만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분노하심으로 왕을 주시고 진노하심으로 그 왕을 폐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왕을 허락하신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정의 제도나 교회의 제도같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그것을 요구했고 하나님이 주시고 결국은 왕국이 파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를 보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본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 나라에는 왕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들이 아주 공통적으로 자신이 신이라고 그렇게 칭한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신의 아들, 곧 ‘신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아들이라고 해서 ‘천자’라고 불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라고 하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고 어쨌든 왕이 된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 같이 그런 위치에서 이 왕국을 통치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피할 수 없는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나라는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아주 질서 있게 이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 같이 그렇게 다스리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이 아주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 저런 사랑의 질서를 올바르게 구현하지 못할 때 나라가 굉장히 혼란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사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그런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국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뭐라고 말했을까 한번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이 놔두면 욕구가 팽창해서 결국은 수많은 갈등과 고통들이 발생하게 되니까 법과 제도를 가지고 사람들의 욕구를 정화시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는 것, 이게 국가의 의미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크게 세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것을 사람으로 표현하자면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지혜, 이런 지혜를 가지고 다스릴 수 있는 통치자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손발의 역할을 하면서 생산 활동에 종사합니다. 그리고 배, 이것은 욕구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손발을 사용하고, 욕구가 움직이니까 손발이 움직이면서 생산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이런 이상을 실제 이 사회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외적이 침입하면 그걸 또 막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계급에 종사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전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플라톤에 의하면 가정을 이루어서도 안 되고 좋은 음식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인생의 즐거움을 취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먹는 것은 많이 먹어도 되는데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삶의 가치를 왕의 아름다운 이상을 세상 속에, 사회 속에 구현하는 것을 보람으로 느끼면서 살아야 됩니다. 이들에게는 수도사 같은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욕을 많이 먹는 대목이긴 한데, 애들도 누구 집 애, 누구 집 애 하면 거기서 편애하고 욕심이 생기니까 다부다처제로 해서 아이들이 누가 누구 애들인지 모르게 공동생산해서 길러야 된다, 그런 우리 현실하고 안 맞는 얘기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넘어와서는 정치적 결사체라고 보는데 플라톤하고 비슷합니다. 덕과 정의를 통해서 최고선을 실현하는 공동체로 봅니다. 그리고 생존경쟁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자급자족하고 선한 삶을 살게 하는 데에 국가의 의무가 있다, 그리고 국가는 정치적인 결사체다, 라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 쪽으로 오면 백성들의 권리와 공동체의 선이 충돌하게 되잖습니까?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잘 보장되어야 하는 나라여야하고 왕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이 잘 혼합되어있는 가운데에 이루어져야 된다고 말합니다. 저런 이상들이 이제 로마정치에서 나타나잖습니까. 민주정적인 요소를 그리스문화에서 받아들이고 또 왕정의 요소와 귀족정의 요소, 원로원이라든지 이런 걸로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동북아 쪽에서는 이제 노자 같은 사람은 주전 7세기 때 사람인데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야기했습니다. 작고 백성이 적은 사회, 그렇게 하면서 자유와 행복이 있는 사회가 진정한 국가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지, 어마어마한 제국이 되면 결국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묵자는 겸애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여러분들 학교 다닐 때 배우셨잖습니까? 주전 5세기 때 사람인데 그 사람의 기치가 ‘천하무인안생생(天下無人安生生)’입니다. 글자를 그대로 번역하면 ‘천하에 사람이 없으니 편안하게 살고 또 산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인’이라는 말인데, 이 ‘인’이 뭐냐 하면 타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에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번역하면 안 되고, ‘천하에 남이 없으니 편안하게 살고 산다.’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한 나라 안에 사람들이 있는데 내 가족은 내 골육이고 옆집 사람은 남인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결코 사람(남)이 아닌 형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무인’의 인이 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나라에는 타인이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으니 모두를 형제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평안한 나라’라고 풀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 책을 읽으면 꼭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의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장자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이야기합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다스린다’, 이렇게 아주 훌륭한 성인인 왕이 무엇을 행하지 않아도 나라가 선하게 다스려지는 그런, 말하자면 리더십이 갖추어진 나라가 되어야지 나라가 행복할 수 있다 그런 뜻입니다. 예를 들면 애들이 막 까불고 욕하고 그러다가도 선생님이 딱 들어오시면 자기가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되잖습니까? 임금의 존재가, 왕의 존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 있었던 고대 서양의 철학자들, 그 다음에 동북아 사상에서도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외에도 불교도 있고 많이 있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펼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친숙한 고대서양과 동북아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던 것입니다. 얘기하면 길지만 딱 정리하자면 ‘어떻게 하면 그 나라가 정의롭고 선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행복하고 질서 있으면서도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이것을 계속 고민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나라, 그런 완전한 나라가 사람의 나라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것을 한번 이 땅에서 구현해볼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사유에 의해서 이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고민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결국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과 사회가 올바르게 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중 누가 코로나의 주범입니까? 나는 코로나의 발병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코로나라는 사태로 전 세계에서 천만 명이 질병에 걸렸고 미국에서만 15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죽었잖습니까? 이러한 끔찍한 일들을 보면 결국 나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이 결코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사회의 올바름과 질서, 그리고 개인의 행복 이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서 공동체로 만들 것이냐를 고민한 흔적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이게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왕이 너무 중요합니다. 왕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진 않고 견제장치가 있긴 하지만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이냐,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런 것들을 다루는 학문을 ‘제왕학’이라고 합니다. 제왕학은 진짜 학문의 최고봉입니다. 말하자면 신학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왕학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시서예는 물론이거니와 사물들을 바라보는 통찰, 산업과 인생의 이치, 모든 잡다한 학문들을 모두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면 이 나라에 올바른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를 통해서 이상적인 국가를 수립하거나 혹은 그 이상적인 국가를 유지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왕실에서는 어쨌든 그 왕 가까이에 아주 탁월한 학자들, 인품이 고매하고 사상이 깊고 학문이 걸출한 사람들을 울타리처럼 포진하고 다음의 왕위를 이을 세자를 교육하는 데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심성으로 나라를 다스리냐에 의해서 그 나라가 이상적인 국가가 되기도 하고 혹은 최악의 국가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국가의 명운을 끝나게 할 수 있을 정도까지 그런 것이니까, 온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퇴계 이황이 거의 인생 말년에 대학(大學)을 해설하면서 그것을 갖다가 소위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였습니다. ‘성학’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서 성왕이 되는, 성군이 되는 세 가지 근본을 밝히는데 그것이 이제 ‘대학의 길(大學道)’입니다. “대학의 길은 밝은 덕을 더욱 밝히고(大學之道 在明明德)” 그러니까 사람들 안에 이미 밝은 덕, 명덕(明德)이 있습니다. 그것을 더욱 밝게 하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며(在新民)”, 쇄신입니다. “그들 모두 지극한 선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在止於至善)”.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논란이 되는 것이 원래는 ‘신(新)’이 아니라 ‘친(親)’으로 되어있었는데 권위주의가 들어오면서 이게 ‘신’으로 바뀐 것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친’은 “백성들을 친근히 하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왕은 아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자신의 탁월한 지혜로써 백성들에게 이미 있는 도덕적인 덕들을 더욱 밝히고 백성들을 아주 가까이 하고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그들 모두를 지극한 선에 머물러 있게 함으로써 나라도 흥왕해지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행복해지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충고를 이황이 인생말년에 어린 왕에게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런 나라에 대한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을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이렇게 원으로 본다면 이 가운데에 깃발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렇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순종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하게 살아가도 기본적으로 하나,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결국 이 질서는 하나의 질서로 파문처럼 번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세상 나라)는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이렇게 있는데 결국은 사람들이 다 자기 나름대로의 깃발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라는 깃발을 세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 나름대로 힘이 있는 대로 원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있는 것이고 힘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의 것과 부딪힐 때에는 여지없이 이것을 허물어버리면서 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딪히게 될 경우에는 당연히 갈등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을 힘으로써 극복하고 굴복시키고 자기질서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 나라(세상 나라)도 평화를 꿈꾸고 이 하나님의 나라도 평화를 꿈꿉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나라에서 평화가 계속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욕망들이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서 계속해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국가 간의 일로 번졌을 때에는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편 여기서(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여기 하나님의 깃발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은혜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깃발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 ‘나’라는 깃발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쭉 질서가 이루어지면서 통일, 통합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저항하는 것입니다.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이 사람을 놔주시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고통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악인이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선을 펼치려고 하는데 거기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써 결국은 자기사랑의 깃발을 꺾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회개라고 부르잖습니까? 그리고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남으로 여기서도 평화가 깨지지만 그러나 그 평화는 결국 하나님이 극복하고 다시 평화로 데려가십니다.
세상 나라는 자기를 주인으로 삼는 나라고 서로의 이익을 위한 분쟁과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하신 통치가 있는 나라입니다. 신자는 자기 마음속에서 먼저 그런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믿음과 은혜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제 어거스틴이 이것을 싹 정리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마르셀리누스의 편지 136번에 대한 답장’입니다. 138권 3장 1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에 덧붙여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알려질 것이니” 혹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한 것이니”, 왜입니까? “신자들은 세상과는 다른 도성의 백성들이며”, 여기서 이제 ‘신국론(神國論)’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의 왕은 진리이시며, 그의 법은 사랑이시며, 그 도성의 기한은 영원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그러면 이 나라를 다스리실 때에 이 질서는 진리에 의한 통치로서 짜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에 모순되게끔 행동하시지 않으십니다. 정치인들은 모순되는 행동들을 많이 하잖습니까? 그래서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서 아주 사탕발림 같은 이야기를 해놓고 그 다음 당선된 후에는 태도를 싹 바꿔서 약속을 어기거나 현실적으로 타협을 하면서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때에 백성들은 많은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뭐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뚜렷한 변함이 없는 질서,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왕이 진리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있었지만 그 왕이 정상적이기 위해서는 진리를 사랑한 사람이어야 하고 자기를 진리 아래에 두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법은 사랑이며”, 그 진리가 사람들에게 실행되는 방식이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가 멸망하잖습니까? 조선도 오백년 만에 망하고 나라가 망하잖습니까? 그러나 그의 도성은 그런 기한이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이 스스로 왕이 되어 진리로 통치하시고 사랑으로 다스리시며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 그게 하나님의 나라다,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진리에 순종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그것을 지극한 선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백성들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짐승 같은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참 선한 사람으로 살고, 미움과 다툼이 있었지만 사랑하며 살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만족을 안 합니다. 그 이유는 뭡니까? 욕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욕망. 그래서 이 욕망은 진리 안에 갇히기를 싫어합니다. 진리대로 살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게 되면 진리의 울타리를 넘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게 장소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데 이것이 결국 지향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악은 선이 없는 것이 악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예뻐지기 위해서는 조건들이 있잖습니까. 외모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키가 적당해야 한다, 콧날이 오똑해야 한다, 미간이 좁아야 한다, 윤곽이 뚜렷해야 된다 등등 있잖습니까? 그런 요소들이 합쳐서 사람이 예쁜 사람, 멋있는 사람 이렇게 결정이 되잖습니까? 못생기기 위해서는 특별히 어느 기준을 따라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비율이 깨지면 어느 쪽으로 깨지든 간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볼 때 ‘안 예쁜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잖습니까?
악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지켜야 할 기준이 있지만 진리가 필요하지만 짐승처럼 막 살기 위해서는 무슨 기준을 이렇게 살아야지만 네가 짐승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그 기준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살면 그게 악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어떤 미의 기준을 충족한 것이고 추한 것은 추한 기준을 충족한 게 아니라 미의 기준을 상실하면 추한 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것은 진리의 기준에 부합한 것이고 그 기준을 저버리고 나면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속(악)에서 결국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깃발이 무엇입니까? 이 깃발이 바로 자기 이름이 새겨진 깃발입니다. 이것을 들고 까불고 하나님 대신 여기에 자기 이름 써서 흔들고 돌아다니다가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우니까 와서 이 깃발을 내려놓음으로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어떤 분들이 들어왔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특별한 얘기는 없습니다. 자, 그 다음에 이한나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러 왔습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분, “안녕하세요 이번주에도 또 들어왔습니다.” 다음에 “지난주 주일 부모님 이야기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제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어려운 길이지만 그래도 사랑 안에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또, “맘에게 쉽게 요약을 해서 공부 좀 하라고 만든 책을 공부 안하는 성도들에게 요약해주시네요.” 필요해서 한 것입니다. “나고야에서 참석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정도로 들어오셨습니다. 오늘은 많이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입니다. ‘구하라’인데 ‘구하라’라고 번역된 단어가 그리스어로 ‘제테이테’입니다. ‘추구하라’, 명령형입니다.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희망한다’하고는 다릅니다. “부자가 됐으면 참 좋겠다”, 누가 싫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것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알뜰하게 살고 어떻게 사업을 할지 혹은 돈을 저축할지 이런 목표를 세우고 열렬하게 그 목표의식에 불타서 그렇게 실현되기를 애쓰면서 사는 그런 삶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 누가 그것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희망일 뿐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안 되도 할 수 없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추구하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훨씬 더 의지를 가지고 열렬하게 자신의 삶의 행복을 그 꿈의 실현에 두면서 살아가는 삶이 그게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먼저(πρῶτον)’라는 말이 우선 나옵니다. ‘먼저,’ ‘프로토니아’라고 하는데 ‘프로토스’는 머리입니다. “죄인중의 괴수”라고 할 때, 그 첫 번째라고 하는 것이 ‘프로톤’입니다. ‘프로토스’가 사람의 머리이고 그 다음에 단계적으로 내려갑니다. 시간적, 의미적으로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앞서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먼저’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는 이 목표가 첫 번째 것이 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먹고 마시는 것, 먹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좀 더 나은 음료를 마실 수도 있고 추우면 따뜻한 옷을 입고 더우면 시원한 옷을 입고 돈 벌면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그렇게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 자체의 즐거움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을 따라서 살수도 없고 그렇게 살면 이 사람이 행복할 수도 없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먹을 수 있다, 마실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이런 것들이 너희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그것들 속에서 어느 정도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원기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사는 것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이바지해서 더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저앉아서 이렇게 먹고 입고 마시고 세상의 즐거움에 그냥 푹 빠지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 수 없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고,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기 위해서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린 채 살아가게 되서 결국 본인도 행복하지 않다, 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의미도 없고.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염려하면 결국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아가는 이것에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와 의가 무어냐, 그것은 좀 더 공부하면서 우리들이 배워보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의 나라’는 누구의 나라이겠습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랬는데 ‘그의’가 누굴까? ‘그의’, 소유격입니다. his. ‘그’가 누굽니까? 26절에 보면 ‘하늘 아버지’라고 나오고 30절에는 ‘하나님’, 32절에는 다시 ‘하늘 아버지’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가르치신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가 ‘그의 나라’입니다.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다 결국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당신의 진리를 최고의 권위로 삼고 사랑으로 통치방식을 삼아서 그 나라를 영원한 왕국으로 다스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에 대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 보십시오. 이렇게 한 사람이 지금 여기에 보면 색깔이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잖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데 부패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패했는데 하나님 앞에 이제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가슴속에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이것이 이렇게 행복하구나,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나 말고도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가 변절을 해서 부패했다가 다시 은혜를 받고 다시 부르심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 것이잖습니까?
이 사람이 불신자일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불신자는 변절한 게 아니라 원래 부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받고 ‘아 내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다가 죽으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도록 내가 부름 받았구나’하는 소명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기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모두 다 지나가는 것들이잖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권세를 누리거나 혹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육체가 소멸되면서 그 모든 것도 함께 사라져갈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죽어도 하나님 앞에 계속될 수 있는 그런 의미를 따라 사는 삶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그 사이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차원이라고 하고 그것은 이미 임한 나라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예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진 것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이렇게 마음이 녹도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우리 마음속에 충만히 임하시는 이 성령의 은혜 그리고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내가 다시 살아나는 이 부활의 영적체험, 이런 것들은 이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는 또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사는데 왜 그렇게 유혹을 받습니까? 그리고 내 마음이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두 차원과 이후의 내용들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접속하시고 하는 것들을 모두 통계를 내보니까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은 이정도 길이를 견디시는데 이게 굉장히 산만하고 오랜 시간 집중을 못한다는 것이 그 접속 통계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50분 정도에 딱 끝내려고 합니다. 지금 딱 48분정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요약을 하자면, 1분 동안에 요약을 해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염려가 무엇이고 염려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들을 1부에서 공부했다면 2부에서는 그러면 왜 그렇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셨을 나라인데 그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나라이다, 그래서 그의 왕은 진리이고 그의 법은 사랑이며 그 기간은 영원이다, 그런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결국은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이 모든 구원의 계획을 마치고 초월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겠지만 그러나 그런 나라를 이미 경험한 우리가 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런 나라가 이웃들 속에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도 행복하고 그리고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잠시 육신을 입고 있다 사라지는 우리의 인생이 끝나도 영원을 향해 이어지는 그러한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여러 가지로 어렵고 고단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고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시는 그 목표를 잃지 않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번 한 주 기도 많이 하시고 은혜 많이 받으시고 다음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