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2(1)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녹취자: 이새봄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는 화요구역예배 라이브 공부시간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그래도 위로가 됐었죠? 코로나 사태가 거의 10명 단위로 줄어들었고 해외입국자들이 좀 있긴 있었지만, 그런데 또 슬픈 소식도 있었습니다. 홍수가 너무 많이 나서 여러 사람이 인명을 잃었고 뜻하지 않은 수해를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시면서 아픔에 동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구역공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들어온 사연들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많이들 들어오셨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눈치를 보고 눌려 산 사람에게 자아를 죽이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죽을 자아조차 없어 보입니다. 뭔가 살려놓고 자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 이게 순서가 아닐까요?” 상처를 받고 그렇게 억눌려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는데, 자아라는 게 사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부모로부터 거의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강요된 교육을 받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고 칩시다. 그러면 당연히 상처는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나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사실은 자아가 잘못된 방향으로 발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또 인척들에게 넘겨져서 인척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런 것을 계속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나이가 벌써 중년이 넘으셨는데 그러는 가운데 방어기제가 생긴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제외하고는. 이런 경우에 자아가 없다는 게 아니라 자아가 잘못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이 옳은 자아고 그른 자아인가,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지으실 때 나에게 합당치 않은 것은 버리고 그리고 나에게 주셨지만 그런 이유로 내가 갖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갖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죽이라고 그럴 때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놓고 텅 빈 사람이 되어라 그런 식의 요구가 아니라, 그릇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아를 함양해서 그래서 이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질문하신 분은 좀 궁금하시면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꼼꼼히 읽으시면 아마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네, 반갑습니다. “장마라 촉촉합니다. 우리 마음도 은혜 넘치기를 바랍니다.” 네, 동감입니다. “충남서산에서 목회하고 있는 예장대신교단 오지성 목사님입니다.” 제가 옛날에 첫 번째 교수 생활을 대신교단에서 시작을 했었습니다. 또 “은혜의 빛줄기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셔츠가 멋지시네요.” 그러는데 셔츠가 아니라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티셔츠입니다. 매일 빨아 입는, 며칠에 한 번씩 제가 직접 빨아서 입는 티셔츠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2부 제 7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들어가기 전에 6장 3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지난 시간서부터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이 이렇게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이제 ‘나라’의 개념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 ‘의’가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면서 이제 많은 분량이 필요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하면 ‘먼저’라는 게 또 무엇인가, 그 다음에 ‘너희는’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그 ‘너희’가 누구인가, ‘그런즉’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말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단어 한 단어를 정확하게 잘 이해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들어가는 말, 첫 번째를 보겠습니다.
자, 사람들은 이제 ‘사랑' 그러면 좋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을 용납해주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보고, 이제 ‘사랑’에 대해서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뭔가 불의가 용납되고 타협이 이루어지고 그런 것이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러고 또 이제 정의라고 이야기하면 살벌합니다. 더군다나 거기에 공의라는 말이 들어오게 되면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정의가 펼쳐진 것이기 때문에 잘못한 자들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형벌이 있고 어쩌면 그렇게 살벌한 그림을 좀 어느 정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이제 이처럼 우리는 사랑과 정의 자체가 우리말로 한다면 사랑과 공의, 혹은 사랑과 의라는 그 자체가 전면적으로 이렇게 대립하는 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에서 보면 그렇지가 않고 사랑과 의는 결국은 하나의 하나님의 성품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성은 하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없는 어떤 정의, 사랑을 하나님의 외부로부터 획득하시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실체가 정의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발현되는 그것이 바로 그 사랑과 정의입니다. 얘기하면 굉장히 깁니다.
다시 이제 도표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시편 85편에 보면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10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이게 아주 절묘한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인애’는 사실은 좀 사람이 잘못하고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다 품어주는 것이 우리는 이제 ‘인애’라는 것, 우리는 잘 안 쓰지만 저게 ‘자비’입니다. ‘헤세드’인데 그렇게 사용하고 진리는 타협이 없잖습니까? 언제나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어서 그래서 그 진리로 사람들이 판단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의롭다, 불의하다 이렇게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데 둘이 만납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의’와 ‘화평’도 마찬가지이거든요? ‘의’는 정의인데 역시 심판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잖습니까? 또 그 ‘의’가 나타날 때 심판하는 요소와 상급을 주는 요소 이렇게 둘로 나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든지 간에 약간의 허물이 있는데 덮어주고 그 다음에 약간 잘해서 상급을 받을만한데 어떠한 이유로 그 사람이 그것을 못 받고 이렇게 하면서 사실 화평이 이루어지잖습니까? 손해를 보면서. 그런데 이게 ‘인애’, ‘진리’로 약간 대립되는 개념이고 ‘의’와 ‘화평’도 대립되는 개념인데 사실은 ‘의’와 ‘진리’는 이렇게 만나서 ‘인애’와 그 다음에 ‘의’는 이렇게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이렇게 대립이 되면서도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그 사랑과 정의에 관한 설명을 사실 어거스틴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설명한 사람을 못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거스틴에게는 사랑과 정의가 만약에 대치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정의일수도 없고 진정한 사랑일수도 없다, 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니다. 에티엔느 질송(Étienne Henry Gilson)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유명한 에드워즈 연구가가 있습니다. 굉장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 의해서 이제 중세에 결국은 그 교회가 철학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철학이 없다, 라고 하는 이론에 대해서 그 당시에 이제 평범하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이론에 대해서 이제 그 이의를 제기하고 그분이 처음 논문을 발표한 게 이제 1910년대였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그 사람의 공로로 결국 중세시대가 아주 굉장히 철학을 발전시켜온 시대다, 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 그런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에티엔느 질송이 어거스틴과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한 사상가의 철학이 사랑이라는 주제로 집약되면 집약될수록 그의 사상은 어거스틴적이다”, 이렇게요. 그러니까 모든 사상을 사랑으로 통합시킨 최고의 성과를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얘기를 하면 또 긴데 그가 이제 『본성과 은혜』라는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여기에서 제44권 290쪽인데 여기에서 이러한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정의의 시작이며 사랑의 진보는 정의의 진보이다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정의니 완전한 사랑이야말로 곧 정의다.” 이렇게 정리를 해줍니다. 좀 어렵게 느껴지시죠?
그런데 어거스틴의 모든 관심사는 바로 이 사랑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에 있어서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찬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낳도다” 어거스틴은 사랑을 피조물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실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성자를 낳으시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시고 그 사랑이 세상을 창조케 하고 그 사랑이 세상을 돌보고 그 사랑이 창조목적으로 빗나가는 인간들을 다독여서 창조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관점입니다.
옆의 그림을 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하잖습니까? ‘정의’란 사랑을 떠받드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래서 우리 보고 그린다 그러면 이렇게 그리지.. 아마 이렇게 그리지 않겠습니까? 총을 콱 쏴버리는 것입니다.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사랑은 무슨 놈의 사랑, 그리고 이제 총을 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요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역사상 예수 믿은 사람이면 거의 모두 알고 있는 책인데 가장 읽지 않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유명하긴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책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강요』는 개신교들만 격찬하지만 가톨릭 사람들이 보기에는 쓰레기 같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책은 안 그렇습니다. 개신교, 그다음에 가톨릭 할 것 없이, 심지어는 이단까지도 이 책에서 배웁니다. 그렇게 유명한 책입니다. 그런데 거의 안 읽는 책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삼위일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도 시종일관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목표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들을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 책의 목표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제가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곧 책을 쓰려고 합니다. 거기서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 구절 한 구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정의의 시작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평생 안 잊어버리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기 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인간이 이렇게 씩씩 거리면서 이 길로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 이게 뭡니까? ‘배향’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등을 돌린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거역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이렇게 가는 것인데 이걸 안가고 씩씩거리면서 반대편으로 가는 게 ‘배향’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살아봅니다. 그런데 막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인간이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이걸) 회개라고 하잖습니까? 그리고는 이제 다시 힘을 내서 이쪽으로 걷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 이쪽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전향’ 혹은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 간첩 전향한다고 그러잖습니까? 전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이렇게 가다가 이렇게 돌아가면 헛수고잖습니까? 그렇지요? 그런 사람 되게 많잖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여기 딱 서서 꿋꿋하게 이 길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그것을 이제 저는 ‘정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정향의 삶.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딱 이것입니다. 어떻게 배향하던 인간이 전향할 것인가, 그리고 전향한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정향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늘 넘어지고 늘 깨어지고 코로나 때문에 제가 영적으로 침체되어있다, 그분은 코로나 없을 때도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 부패성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결국은 배향하는 인간(은) 전향하려고 하지 않고 전향한 인간은 정향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잘 보십시오. 한 사람이 이렇게 살다가 그리스도께로 전향을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울며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렇게 들어갑니다. 여기서 이렇게 깊이 회개한 사람의 마지막 열매가 뭡니까? 사랑입니다.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때 이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아, 하나님이 나보고 이런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구나, 하면서 의의 개념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이 아니라 무릇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의 시작은 정의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시죠? 이 이상 쉽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간, 이 속에서 솟구치는 결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결심이 일어납니까?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리고 지금 할 수만 있다면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특성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아내를 너무 끔찍이 사랑해서 오늘 저녁에 그 아내를 생각하니까 나 같은 사람, 이렇게 실수도 많고 돈도 많이 못 벌고 얼굴도 잘생기지 않고 가문도 내세울 것 없고 아 이런 사람을 그렇게 헌신적으로 사랑해준다는 생각이 들고 자기가 잘못한 것을 뉘우치게 됐을 때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 어떤 결심이 일어나는 겁니까? 사랑은 사랑이고 오늘 쭉 가다가 술은 먹어야지, 도박은 해야지, 그러지 않잖습니까? 뭘 하든지 간에 얼굴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일이 아내를 가슴 아프게 하진 않을까,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정의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요기가 우리 신학 언어로 말하면 ‘회심’이라고 한다면 여기 이게 말하자면 conversion이라고 ‘배향’, 이게 이거라면. 사랑의 진보입니다. 이것은 뭡니까? ‘성화’입니다. ‘성화’는 사랑의 진보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진리도 결국은 사랑을 증진시키는 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리를 아는 그 자체로는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는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대충, 아니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은 대충 살고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 맘대로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맘에 안 드는 내 마음의 살이 있다면 도려내주시면 내 뼈가 있다면 깎아주십시오.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고 일생을 왕처럼 호위호식하며 사는 것보다는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부잣집 앞에 얹혀살던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 그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것은 간단하게 풀립니다.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정의니 완전한 사랑이야말로 완전하다”, 이 하반 절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이런 위대한 사랑이 극도로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그 위대한 사랑은 하나님만이 사랑이잖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것은 위대한 정의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완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것은 완전한 정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랑 때문에 정의를 훼손하거나 정의 때문에 사랑을 짓밟는 그런 일은 없으셨습니다. 어거스틴의 사랑에 관한 말 중에서 한 백 구절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명언입니다. 이 구절이. 전 되게 감동이 되는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 그러면 또 한 번 볼까요? 네. “성경구독가운데 신약이나 구약에서 숫자 7이 나오는데 어떤 이유가 있나요?” 별 의미 없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완전 숫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책 기다려집니다.” 시간이 걸리겠죠? 처음에는 한 400페이지 정도 쓰고 싶었는데 정리하다보니까 1000페이지 정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알려진, 읽지 않은 『삼위일체』, 이름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읽습니다. 고백록은 그래도 사서 겉장이라도 넘겨보는데 이 책은 아예 겉장도 안 넘겨보는 책입니다. 네, “수십 년 동안 살아온 빗나간 삶의 습관이 바뀌지 않습니다.” 네, 바뀌지 않습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새로운 삶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맞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삶에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2번입니다. 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 그랬습니다. ‘그의 나라’는 길게 설명을 했고 ‘의를 구한다’ 할 때 그 ‘의’가 뭐냐 그것입니다. ‘의’를 조직신학적으로 설명, 교리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정의가 나옵니다. “의란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속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것을 지키는 성품입니다.” 이제 나답과 아비후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이제 번제단에 불을 붙이는데 하나님이 지정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번제단에 불을 지핍니다. 결국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 다음에 웃사의 경우에는 법궤를 싣고 이동을 하는데 이게 마차가 흔들리면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그 법궤를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냐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다른 불을 옮겨 담았다고 해서 거기서 불이 쏟아져 나와서 사람이 죽어버리고, 아니 그럼 법궤가 쓰러지는데 그러면 법궤가 쪼개지도록 나둬야 되나, 어떻게 하든지 붙들었을 텐데, 이게 뭐 그렇게 어마어마한 잘못이라고 그렇게 죽을 수 있는가, 너무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아닌가. 저런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신실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잘 지내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조폭 두목들이 그 옛날에 <대부>라는 영화 있었잖습니까? <대부>라는 영화를 보면 같이 회의를 하다가 맘에 안 드니까 보스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회의하는 사람들 뒤에 돌아다니다가 가차 없이 쳐서 죽여 버리는 그런 끔찍한 장면들이 나오잖습니까? 저런 장면을 보면서 그런 혼란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설명을 더 들어보셔야 합니다.
자, 근데 그게 이제 구약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신약에도 나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서 한창 성령이 충만하게 강림하면서 교회가 한창 부흥하게 되었을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있잖습니까?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이제 나오게 되는 그 장면이 있는데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제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 사도들 앞에 자기 땅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이제 바치기 위해서 땅을 정리하고 보니까 문제가 생긴 게 돈으로 받고 보니까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것을 바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 일부만 가지고 옵니다. 그때에 사도가 놀라운 성령의 통찰력으로 그들을 보면서 이것이 다냐 그러면서 결국은 죽습니다. 그래서 실려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의’의 한 측면입니다. ‘심판하시는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사람이 죽었구나, 사람이 죽었구나 이것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어떤 이유와 목적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해보면서 거기서 얻어진 교훈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어떻게 이것을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이 이런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밑에 보면 “De Gubernatione Dei”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게 좀 여러분들에게 미안합니다만 이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 ‘살비아누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마르세이유 사람이고 400년경부터 470년경까지 살았던 사람이니까 어거스틴보다 약간, 동시대나 약간 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쓴 유명한 하나님의 통치라는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어떤 것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매우 작아 보이는 잘못이라도 하나님께 손해를 끼쳐드림으로써 큰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설교시간에 가끔 몇 번 예를 들었습니다만 한 사람에게 주먹을 꽉 쥐고 “이 나쁜 놈” 이렇게 얘기했다고 칩시다. 이것도 모욕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고발을 하면 재판 받아서 자기한테 그렇게 모욕한 사람을 벌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벌은 아닙니다. 심하게 욕하면 벌금 한 30만 원 정도 나옵니다. 그래도 어떻든지 간에 그 사람에게는 전과가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죄가 아닙니다. 벌은 그렇게 크지 않지 않겠습니까? 순전하게 전과 없이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과오의 기록 없이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큰 것이겠지만 감옥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사람에게 그 까짓것 벌금 30만원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 “나쁜 놈” 이렇게 했는데 그 앞에 있는 사람이 황제일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벌금 50만원입니까? 사형입니다. 사형. 왜 그렇습니까?
왕은 어마어마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사람을 정점으로 온 나라가 통치되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성균관의 유생들이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왕이 뭐 잘못하면 전부다 와가지고 왕한테 손가락질하고 돌멩이를 던지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엎드리잖습니까? 땅바닥에 다 엎드려서 “아니 되옵니다” 그러잖습니까? “안 돼 이 자식아” 이렇게 안한다는 말입니다. 사실이면 반역죄입니다. “아니되옵니다. 전하” 하다가 그래도 안 들으면 “차라리 제 목을 치소서. 저희를 다 죽이고 행하시려면 행하시옵소서.” 그러잖습니까? 왕의 지극히 높은 지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살비아누스의 말을 이해하실 수 있겠죠? 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어떤 것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매우 작아 보이는 잘못이라도 하나님께 손해를 끼쳐드림으로써 큰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되죠?
자, 그 다음에 이제 ‘심판하시는 의’를 이제 우리들이 봤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사랑’이시잖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정의와 사랑이 말하자면 입 맞춘다, 조화를 이룬다, 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이제 역사 속에도 나타났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게 이렇게 됐잖습니까?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인자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것, 이게 히브리말로 ‘헤세드’인데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 자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자격이 없는데도 사랑해주시는 것이 ‘인자하심’입니다. ‘자비’입니다. 자격 있는 사람만 사랑해주는 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보면 선생님이 공부 잘하고 집안에 돈도 있고 좀 넉넉하고 어쨌든 맘에 드는 애들 예뻐하잖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자비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이 입증되는 것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하는 자 안에 사랑의 깊이가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헤세드’는 자격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에로스의 사랑은 뭐와 관련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유용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얼마나 많은 만족을 주는가, 그것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 이야기하면 곁으로 나갈까봐 계속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 전에 동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했습니다. 저 멀리로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원수된 적대감을 가지고 태어나고 실제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합니다. 이게 차꼬가 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안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전혀 없는 게 아니라 시커먼 자기사랑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향해 모질게 대적을 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산이 아니라 뿔나는 것입니다. 화나는 것.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그냥 “그래? 그럼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그러고 버려둔다면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차이날 수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의 경륜으로 이렇게 자기도 죄를, 인간에게 죄를 지을 능력은 있지만 해결할 힘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피 흘리시면서. 그래서 결국은 이런 사람의 죄를 다 당신이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여기서 심판하시는 의를 충족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 사랑이 그냥 온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되자 반항하던 이 마음이, 배향하던 마음이 변하여서 전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결국은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잖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게 뭐냐 하면 그 사람 자신의 행복과 명예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남편을 너무 사랑하는데 누군가가 남편을 막 입에 거품을 물고 모욕적인 언사를 합니다. 남편은 너그러워서 “아유~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이렇게 참지만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는 막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 사랑하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습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소중히 여기는 감정입니다. 소중히 여기는 감정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감정이라고 존 오웬 목사님이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어로 valuation이고 이것은 delight입니다. valuation입니다. 그러니까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거룩하시겠죠? 이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 책을 쓰면서 이렇게 기가 막힌 방법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인도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잘 보십시오. 그래서 이 사람이 이제 이렇게 살다가 결국 이런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처럼 그런데 이것은 결국 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깃발입니다. 십자가의 깃발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사람에 대한 관심은 ‘의’에 있는 것입니다. 왜 ‘의’에 있냐면 제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우선 자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의’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만 그렇게 사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랑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의롭게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악을 응, 아니 그러니까 심판하는 하나님의 의를 배우면서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서 그렇게 보복하고 복수하고 죄 값을 받아서 짓밟히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게 할 수 있을까, 나처럼. 이런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의’라고 했잖습니까. 이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게 결국은 사랑 때문에 그런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이 부분을 반복해서 읽어보십시오. 저는 이 책을 쓰면서 가장 감격했던, 눈물을 많이 흘렸던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그렇게 거역하던 인간을 사용하셔서 참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이루는 데에 사용하시는구나. 이게 사실은 저는 오래도록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거의 회심한 이후로부터 외우는 구절이었지만 피상적으로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피비린내 나는 의에 헌신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옛날에 저를 가르치셨던 교수님 가운데에 김희복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정말 성자에 가까우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참 데모가 일어나고 최루탄이 강의하는 데 그 유리창 앞에까지 떨어질 정도로 최루탄을 쏴대고 그랬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의 일입니다. 너무 나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하게. “사람이 정의감을 가지고 악한 사람들을 대항하다보면 놀랍게도 자기들이 모르는 사이에 악해져간다”. 그러면 뭐 악한 사람 대척하지 말고 살아야 되겠나, 그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악에 대적하는 활동을 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더 많이 기도하고 경건에 헌신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렇게 결국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조화시킬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저는 수시로 그 가르침을 생각합니다. 정말 주위에서 정의감에 넘치는데 사실 본인은 사악해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예외 없이 만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의 배운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에게는 둘로 나타나서 서로 다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정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이게 첫 번째 결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과 성화 모든 것들이 사랑의 진보와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정의의 진보다. 그리고 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두 방법이 있는데 심판하시는 의와 용서하시는 사랑,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실현하신다. 이것이 오늘 배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기 때문에 가슴에 새기시라고 오늘 여기서 공부를 끝냅니다. 오늘 저녁 주무시기 전에 요 부분을 한 번, 배운 데까지만이라도 찬찬히 찬찬히 읽으시면서 그러면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호수로 담으시길 바랍니다.
또 댓글 들어온 것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되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책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삶을 살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 수 있을까요?” 지금 다루고 있는 내용이 그 내용입니다. 꼼꼼하게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어거스틴이 10대 때 동거녀 사이에 낳은 아들이 16살인데 살다가 죽었나요?” 네, 죽었습니다. 이름이 아데오다투스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들이다 그런 뜻이었는데 어거스틴도 아버지니까 약간 자식에 눈을 멀었겠지만 아들을 거의 수재같이 여겼습니다. 실제로 아들과 함께 대화록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뛰어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우리의 삶에 경종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작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 같았었는데” 거룩이라는 말을 쓰시는데 거룩은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이라고 하셔야지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함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면서 그래서 용서하시는 사랑만을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심판하시는 의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사실 반쪽짜리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사랑을 이해하게 되면 굉장히 사람이 방종하게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네, 그 다음에 “사랑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인 것 같습니다. 마음을 들을 때마다 괴로워요.” 이건 비결이 있습니다.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십시오. 계속 기도하시면 사랑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20년이 걸렸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데에 20년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한 순간에 변하게 됩니다. “눈물이 나려고 해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눈물이 나려는 시간이 기도하기에 제일 적합한 시간입니다.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심판하시는 사랑과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너무 좋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네, 이정도로 오늘 우리가 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한주간도 은혜 가운데에 잘 지내시고 그리고 이 책을 그냥 듣기만 하시지마시고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읽으시면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맛보시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