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2(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녹취자: 조경훈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국이 비가 와서 많은 물난리를 겪고 피해를 보았는데 여러분들은 두루 평안하신지요? 자연에 힘 앞에 너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저희들은 겸손해지지 않습니까? 수해 피해를 겪은 많은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도와와 되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두 번째 과에 두 번째 시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공과를 진행하기 전에 지난 과에서부터 해 온 것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먼저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는 이미 공부를 했고 지금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저는 처음에 회심을 했을 때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습니다. 감히 목사님에게 질문 할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의 나라를 위해 살라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그의 의를 구하라는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정의롭게 살라는 뜻인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까 그것은 간단한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 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 하셨으면 창조된 세계가 어떻게 굴러 갔으면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도 없이 세상을 창조 하셨다면 그 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해 보면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두 가지로 나뉘어져 적용이 됩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이루면서 어떤 삶을 살아서 이웃에게 올바르면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고민하던 두 가지 숙제가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신 앞에서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되는가? 그리고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회에서 어떻게 선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두 가지 질문이 자기를 참다운 인간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에 우리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깨지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져서 죄 때문에 무지해지고 무능해지는 인간이 됩니다. 인간은 타락한 다음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의로운 상태로 돌아가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시는 갈망이 곧 구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의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행함으로 우리가 의로워지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따라 살아가되 그것으로써 우리는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율법적인 의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에 나 자신이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적인 의입니다.
복음적인 의의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내 안에서 생산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입니다. 그 의를 통해서 원래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의로운 상태로 돌아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회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참 행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의를 얻어야 되는데 그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마르틴 루터의 고민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는 미친 듯 이 고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이 되고자 몸부림 쳤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슈타오비치가 기독교의 도리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념에 눈을 뜨고 그 유명한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체험을 통해서 그의 영혼이 자유를 얻게 됩니다.
결국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의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하나님에 뜻을 따라서 심판받는 의를 감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는 사랑받는 의만을 전달해주셔서 그 의에 이르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결국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하나님 의존적이구나! 하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심에 있어서 이토록 하나님 의존적이게 하셨을까?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하셨을까? 그 경륜을 우리가 한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서 삶과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은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깊이 심어주시기 위해서 이런 방식에 구원의 길을 선택하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면서 살게 되고 하나님이 그 의를 실현하시는데 그 의가 한 편으로는 심판하시는 의로 나타났고 또 하나는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신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를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로는 율법으로 죄를 깨달음으로써 의가 이루어지는 출발이 있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림에 보면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이라는 기준이 없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야 율법의 기준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율법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깨닫겠는가?
하나님이 저 율법을 돌 판에만 새기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도 새기십니다. 왜냐하면 저 율법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하나의 대 계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돌에만 새기시면 그 돌을 보거나 들은 사람이 아니면 무법한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인간의 마음에도 새기십니다. 율법은 돌 판과 인간의 마음에 함께 새기십니다.
모든 사람이 열 개의 계명을 범했을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니까 양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윤리학자들이 양심을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했지만 이것을 배상하거나 원상복구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바라보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오른쪽에 그림을 보면 십자가에 뱀이 감겨져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민수기에 보면 호르바를 지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 때 불 뱀이 내립니다. 히브리어로 세라핀이라는 것인데 학설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불 뱀이라는 것이 모양새가 불꽃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다고 해서 사라피 라는 말이 ‘불타오르다’ 라는 뜻인데 그것을 불 뱀이라고 보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한 쪽에서는 물렸을 때의 효과가 온 몸이 불타는 것 같이 독이 퍼지는 기운을 느끼기 때문에 불 뱀으로 불렀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명하셔서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리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바라보는 것 seeing,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우리가 가로수를 쳐다 본 다든지 지나가는 사람을 흘낏 쳐다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 아니겠습니까? 그런 종류의 바라봄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광야에서 구리 뱀이 장대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도 높이 들려야 되리라 라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성경에 잘 안 나오지만 바라봄 입니다. 생사를 걸고 오직 그 분의 은총을 의지하면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보는 마음이 구체적인 믿음으로 나타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받는 것이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가장 짧은 말로 요약하면 영어로도 네 단어고 한국말도 네 단어입니다. Jesus died for us. 예수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위해’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덕을 본다는 의미가 저 안에 포함돼 있습니다. 예전에는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고 진노의 자식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신분상 죄인이었고 사망에 메여있던 영혼의 상태에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대신’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가 죽었는데 왜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가? 라고 할 때는 죽음으로써 받을 수 있는 이익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셨다. 라고 하는 의미가 저 안에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 십 억의 사랑을 위해서 수 십 억 번을 죽으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표의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표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크게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되시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다가 쫓겨납니다. 도망가듯이 쫓겨 간 곳이 프랑스 혹은 독일하고 국경이 왔다 갔다 하기도 했던 스트라스부르 라는 프랑스 국경에서 그 당시에 난민들을 목회하고 있었던 마틴 부서에게 가서 의탁하면서 거기서 결혼도 하고 학생들도 가르칩니다. 마틴 부서는 칼빈보다 훨씬 연배였고 아주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거기서 그 분이 목회하는 것을 보면서 칼빈은 목회적인 성숙을 이루게 됩니다. 저 분의 글이 너무 어려워서 칼빈의 글처럼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지 않게 되는 결과가 됐습니다.
그가 이것을 해석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받았다는 것은 천 번째로 믿은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은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이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믿은 우리를 의롭다 해주신 것이고, 두 번째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라고 하면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함으로써 의롭다 선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의로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바깥으로부터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여기에서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성령 안에서 거듭나게 해 주시는데 거듭난다고 하는 말은 두 번 태어난다는 것인데 첫 번째는 육신으로 태어나고 두 번째는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자는 운명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말씀과 은혜 가운데 있으면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게 되고 죄와 유혹 속에 있으면 그 사랑이 약해져서 사랑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불신자와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지순애라고 번역하는데 카톨릭에서는 애덕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 안에 있는 순결한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극치로 나타난 것이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해 안타가워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골육지친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것도 어떻게 보면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유래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를 덧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신자가 살고 있는 사회로 그 의가 확장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노력함으로써 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초월적으로 완성해 주시는 나라이고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보탤 수 없지만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의롭게 삶으로써 그 맛보기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 그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고대하면서 죄가 남아있지만 자신들도 의를 고대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 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이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라는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관계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정의, 신실함, 자비만이 아니라 그 외에 많은 것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관계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나타날 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정의를 실현하고 신실하고 자비를 베푸는 등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던 죄인인데, 그리고 앞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 내가 의롭게 될 때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관계 속에서 정의와 신실함과 자비 이런 것들을 행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음으로 이 사람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의 경향성을 주시고 그런 것이 성령을 통해서 생명으로 주어집니다. 이 생명이 관계 속에서 나타날 때 이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충만한 사람은 많이 사랑할 수 있지만 생명이 고갈된 사람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오래 참을 수 없습니다. 이해되시죠? 이러한 사랑이 충만해 질 때 마음속에 사랑의 정이 출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의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게 되고 이들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서 정의, 자비, 신실함 같은 덕목들을 행하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진 사람은 자신이 참으로 의로워졌다면 자신만 의로워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자기 밖의 모든 세계가 의로워지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것 없이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댓글들]
어떤 댓글들이 들어왔는지 보겠습니다.
1. 중부지방은 폭우가 예상된다는데 비 피해 없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아멘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에 국가대표 선수들이 신자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네. 그렇겠죠.
3.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새깁니다.
4. 그리스도의 의에 전가 받은 의인데 자주 잊어버리고 실제로 내가 의로운 지를 착각하게 됩니다.
5. 정동이라는 한자어의 뜻을 갑자기 일어나는 일시적인 급격한 감정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정이 움직인다는 뜻으로 정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예전에 살았던 삶은 자기 사랑의 삶입니다. 항상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왕국의 깃발을 꽂으면서 사는데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겪는 것은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 사람들 속에서 평화가 깨지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불의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자기 사랑을 쫓는 사람은 불의한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하면서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의를 자기를 위한 것으로 삼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오도록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가 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되면 그림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가 이 세상에 성취가 되면서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이렇게 자리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여기에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참으로 어떠한 기준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사회는 더 선해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신자는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 이유라고도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책 속에서도 얘기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인 시대를 살고 있는데 커다란 홍수가 나고 자연재해가 오게 되면 식량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대두가 됩니다.
최근에 시진핑 주석이 먹고 남은 음식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중국이 어떤 의미에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실현이 가능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식당은 의무적으로 N - 1의 주문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일곱 명이 들어가면 여섯 명 분만 주문을 받는 것을 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섯 명이 들어가면 네 명분만 시키는 것입니다. 한 명이 들어가면 어떡하나 그랬습니다. 얼마나 심각하냐 하면 중국 사람들이 먹고 남겨서 버리는 잔반이 우리나라 사람이 일 년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합니다.
원래 중국문화는 손님을 초대했을 때 손님이 먹을 수 있는 양의 두 배 반 정도를 준비하는 게 예의입니다. 다 차려 놨을 때 30프로 정도가 소비되고 나머지는 남아야지 손님에 대한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에 중국을 다닐 때 음식점에 가 보면 접시를 세 개씩 포개 놓고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환경을 위해서도 별로 좋은 게 아닙니다. 이렇게 먹을 게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가난했을 때는 먹을 게 늘 부족하였습니다. 간식이라고 해 봐야 부모님들이 해주는 고무마나 감자를 삶아주는 정도였습니다. 달콤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아이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땅바닥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딱지치기를 하면서 놀고 한참 허기졌을 때 저 골목어귀에서 엿장수가 가위를 짤랑짤랑 하면서 오면 애들이 새까맣게 달려가면 아저씨가 애들이 너무 더러우니까 손도 못되게 하고는 엿을 망치로 쳐서 조금씩 때어서 입만 벌리고 참새처럼 쭉 줄을 서있게 하고 입에다 새끼손가락 마디 반 정도 될까 말까 한 정도를 입에 넣어줍니다. 그러면 애들이 그것을 먹고 거의 미치는 겁니다. 너희 집에 가서 고물을 찾아와라. 그러면 이렇게 큰 것을 주겠다고 하면 집에 돌아가서 모든 게 다 고물로 보이는 겁니다. 할머니가 신던 신발부터 개가 핥아먹은 양은 밥그릇과 형이 사용하고 있는 책까지 다 갔다가 엿장수를 주고 그날 저녁에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는 소리가 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삼아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닌데도 그 나라가 올 때까지 교회를 세워주신 이유는 바로 그러한 맛보기로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존재를 통해서 앞으로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맛보는 사람들이 그 맛이 너무 달콤해서 자기에 모든 것을 다 주고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고 싶고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열망을 느끼게 하라고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에이 씨.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잘못살고 잘못 믿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진짜 쓸모없는 나라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오늘도 어디에선 가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고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로워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아주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혼란 속에서 살던 사람이 단정하고 질서 있으면서도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의 섬김을 받고 교제를 나누다 보면 그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땅에 살고 있으나 소속은 하늘나라구나! 이런 사회가 온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 나라일까? 나도 그 나라에서 소외되지 않고 그 나라 속에서 살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의가 무엇인지 그 의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방법이 어떤 식으로 주어지는지 그 의를 받은 사람들은 왜 이 사회에서 의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되는지 그 사회에서 의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주는지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도 건강하게 잘 보내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