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위하여Ⅱ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마음으로 섬길 부모님Ⅰ(룻1:16上) 1998.5.3 주일오전 1
2. 마음으로 섬길 부모님Ⅱ(룻1:16中) 1998.5.10 주일오전 14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효도(룻1:16下-17) 1998.5.17 주일오전 27
4. 남편에게 복종하라(벧전3:5-6) 1998.5.24 주일오전 39
1. 마음으로 섬길 부모님Ⅰ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强勸)하지 마옵소서(룻기1:16上)
룻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참 고전적인 작품에 속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꼽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땅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향기로운 효행을 담고 있기 때문에 더 더욱 룻기를 통해서 받는 감격이 남다릅니다.
그러나 이 룻기는 또한 단지 자녀가 어떻게 부모에게 잘하고 공경하여야만 복 받을 것인가 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이 룻기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고한 위대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구속사적인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이제 나오미와 룻과의 관계를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모 공경의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우리가 한번 이번 시간부터 더듬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은 내용이긴 합니다만 베들레헴 다시 말하면 후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바로 그 베들레헴 동네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부인의 이름은 나오미였고, 그리고 그들에게 그 아들이 있었는데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깐 기근이 들어서 양식이 없으니깐 요단강 건너 이방의 땅으로 말하자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잠시 망명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습니다. 양식을 찾아서 모압 지방으로 갔지만 그러나 거기 간지 얼마 안되어 기둥과 같은 남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러면서 그 자체만 해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겠습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거기서 위로가 있었다면 사랑하는 두 아들 모두 장가를 들였습니다. 이방 여인이긴 했지만은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해서 며느리를 맞았는데 하나는 오르바였고 하나는 룻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였습니다. 1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무슨 연고인지 모르지만 생때 같은 아들 둘이 모두 이방 땅에서 죽어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3명의 과부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얼마나 처량하고 얼마나 고통스런 일이었겠습니까? 결국은 이제 나오미는 더 이상 모압 지방에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없이 고통스런 인생의 상처를 남겨 주었던 타향살이를 정돈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고향에서 소식이 들려 왔는데 이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고향에 다시 비가 내려서 곡식들이 무르익고 또 이제 양식이 풍족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그럴 바에는 왜 내가 이 상처 많은 타관의 땅에 남아 있으랴.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두 며느리였습니다. 두 며느리는 바로 그 떠나려고 하는 모압 지방이 고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자기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 베들레헴으로 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간들 무슨 기쁜 일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나오미를 보고 나오미의 며느리 둘, 세 과부가 모여 사는 집안을 보면서 그 동네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할까요? 아들 데리고 잘 살아보겠다고 저희들끼리 떠나더니 남편은 잡아먹고 자식 둘 잡아죽이고 이제 껍데기만 남은 며느리 둘 데리고 세 과부가 올라왔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이 여인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이방 여인이었으니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것도 참 눈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 이였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한 이 나오미는 이제 너희들은 돌아가라 그랬습니다. 당시에는 형사 취조 제도가 있었습니다. 즉 형이 죽으면 형수가 동생을 취해서 아이를 낳아서 자기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나오미에게는 말론과 기룐 그 밑에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너희들이 왜 나를 쫓아오려 하느냐? 내가 시집을 가랴? 내가 이렇게 나이가 먹었는데 무슨 시집을 가겠으며, 또 오늘밤에라도 시집을 가서 잉태를 한다고 치자 그 아이가 자라서 언제 너희의 서방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러니 혼자 살지 말고 타관 땅에 가서 고생하지 말고 너희는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말할 때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다가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합리적인 선택을 한 여인 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이 룻은 기필코 떠나지 아니하고 며느리로써 이 시어미니를 붙들었습니다. 자기에게 제발 가라고 말하지 말라고 매달리면서 오늘이 사연이 나온 것입니다.
1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교회만큼 중요한 영역이 있다면 이것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많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명절이 다가오면 신이 나고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기 시작합니까? 우울해지기 시작합니까? 저는 정말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명절이 되면 우울해하는 방황하는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났습니다. 특별히 중추가절이 되면 이제 명절이 다가오는 때에 달은 둥근데 마음은 일그러져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깨뜨려지고 망가뜨려진 가족들간의 관계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혹은 결혼해서 부부가 따로 떨어져 나와서 도회지에서 살거나, 혹은 분가해서 살 때는 도무지 모르는데 큰일이 되어서 고향에 돌아가거나 온 식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자리는 참 견디기 힘든 피하고 싶은 자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가지고 많이 고민하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일들이 너무도 많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 문제를 회피하지만 말고 성경이 우리에게 어쩐 태도를 요구하는지 대해서 깊이 경청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우리가 이 문제들을 풀어가야 할 의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아름답게 되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걸 먼저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오늘날은 말이죠 가정 세미나나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세미나의 내용은 대게 부부가 어떻게 하나되고,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가? 자녀는 어떻게 양육하고 어떻게 길러야지만 좋은 아이를 만들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데 근본적으로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며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가 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잡지나 혹은 월간지에서 군데 군데 부록으로 끼워져 있는 가정에 대한 수많은 관심사들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우리 아이 IQ를 높이는 법, 당신의 자녀를 천재로 만드는 법, EQ가 IQ보다 중요합니다. 감성 지수를 높이는 길 여기 있다, 태교의 신비 등등의 이야기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부부 사랑을 체크하는 법, 남편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가, 남편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런 여자가 되라, 뭐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들여다봐도 당신들 부모님들 이렇게 공경하라는 이야기는 제가 아직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시부모의 핍박을 살살 피해 가는 방법을 말하자면 그것은 기술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시집가자마자 기선을 제압하라. 시부모를 손에 넣는 법, 이런 것은 나오는데 부모님을 공경하는 길이 부록으로 실린 잡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실린다면 안 팔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건강하고 올 바라야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그 가정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해서 고통받지 않고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가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 와서 이번 주에 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이제는 잘하겠습니다 결심할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교회가 천국이 됩니까? 그래도 교회에 대해서 맘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모나 자식 붙들고 회개하면서 “엄마, 내가 죽을 죄를 졌어, 내가 죽을 년이야” 하며 엄마에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거나 부모가 “애야, 내가 잘못했다. 내가 부모로서 정말 너에게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손목 잡고 일주일에 한번씩 회개하는 집 있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회개가 있고 하나님과 만남이 있고, 결심이 있고 해도 교회가 완전한 천국이 안되는데 새벽에 꼭두새벽에 헤쳐 하면은 가족이 밤중에 각자 들어오면 아들 코 골고 이불 뒤집어쓰고 자는 이런 형국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이 복잡한 현실에서 가정에 상처가 없고 갈등이 없다면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근데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안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관계에 우리가 투명한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를 진심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자식,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식, 부부에게 벽 쌓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정말 마음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교회라고 하는 이 작은 영역에서 정말 아름다운 승리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면 큰 교회에서의 삶이 정말 자유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 매일 성경 찬송 끼고 열내면서 교회 가는 너희 가정 봐라 쪽박처럼 깨졌지, 우리도 깨졌다. 너희나 우리나 다른 게 뭐 있느냐? 오늘날 우리 가정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드니 너희나 우리나 잘된 것이 뭐가 있느냐? 뭐 하나님이 예수 믿으면 복 준다고 하는데 너희 가정이 정말 복 받은 가정이냐? 너희 시어머니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너 욕하고 다니고 너희 부부는 등지고 사는 것은 벌써 동네 소문이 났고 너희 자식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기로 이름나지 않았느냐? 에게 너희 가정이 정말 복 받은 가정이냐? 행복한 가정이냐?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이웃에게 가장 잘 보이는 그 부분이 바로 가정입니다.
여러분 같이 살면서 큰 소리 한번만 나보십시오. 동네에 뭐라고 소문나는지 아십니까? 저 집은 매일 싸운다고 소문납니다. 매일 싸운 것이 아니다 안 싸운 날이 훨씬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매일 싸운다고 욕하는 사람들에게 뛰어가서 매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쟎습니까? 부부만 몇 번만 손잡고 계단을 걸어 다니면은 저 집은 매일 잉꼬 부부라고 소문이 납니다. 사실은 매일 손잡고 가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손잡고 내려가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서 우리들 매일 손 안잡고 다닌다고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우리의 가정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우리의 가정 생활들이 정말 온전하게 되고, 이 부모와의 관계도 정상적이고 온전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하나님 앞에 깨뜨려져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공경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결혼식에 주례를 하면서 몇 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신랑신부들에게만 서약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형제 자매를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그렇게 사랑하겠느냐? 서약을 하는 것은 좋은데 두 사람만 서약을 해서는 안되고 부모의 서약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의 원리는 부모를 떠나 여자와 남자가 한 몸을 이룰지니라 되었으니깐 부모에게 자식을 장가 보내면서 다짐을 받아야 됩니다. 당신은 이제 이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 끼어 들지 않기로 다짐하십니까? 그리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지만 장가간 다음에는 부모님께 순종하면 안됩니다. 공경해야 됩니다. 결혼했을 때와 안했을 때와의 덕목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시집 장가가기 전까지는 순종하면 됩니다. 시키는 대로 주안에서 순종해야 됩니다. 결혼하고 나면 순종하는 것이 주가 아니라 공경하는 것이 주가 됩니다. 그러니깐 시집 장가를 보내 놓고 돈 몇 푼 보태주면서 손아귀에 넣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려하는 부모도 문제입니다. 다 깨뜨려져야할 패역입니다.
길렀으면 잘 길러서 훨훨 내보내고 행복하게 살수 있어야된다 말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부부간에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부부간에 절벽을 쌓고 사니깐 자식만 바라보고 살다가 휙 날아가 버리니깐 상실감에 미치는 겁니다. 내 새끼 찾다가 결국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둘 다 살아 있는 부모님 이야기지 혼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혼자 사는 사람도 일이 있습니다. 아들 혼자 키웠는데 아들이 장가를 갔다. 왜 아들을 뺏겼다 생각하는 겁니까? 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까?
여기서 제가 말씀 드리려는 부모의 정의란 자기 낳은 사람이 부모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지니라. 결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이 이제 한 몸입니다. 나누어질 수 있는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있어서 부모도 결합하는 순간부터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부모나 처갓집 부모님이나 모두 결합을 한 두 사람에 있어서 똑같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너희 엄마, 너희 아버지,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서 부모로부터 각자 독립을 했고, 이제는 공경함에 있어서는 모든 부모가 자신들에게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속에 돌멩이 같이 박혀 있는 이 편견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친’자가 모두 좋고 ‘시’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치가 떨린다.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은 시집살이를 했기에 친자가 들어가면 모두 좋고 친정 엄마, 친정 동생, 친정 아버지 다 친자가 들어갑니다. 그러니 다 좋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이갈리는 시누이 하여튼 아주 질색을 합니다. 그런 여자는 남편도 그냥 남편이면 안되고 친 남편이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편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이 모순을 일으킬 때 우리는 용감히 세상의 견해를 버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룻은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가 어디를 가시든지 나도 갈 것이며,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리라. 이렇게 어머니에게 자기 결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결국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제일 먼저 마음의 결합, 즉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 여기로부터 부모 공역에 모든 원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소개하시면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그리고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런 계명들은 모두 약속이 있는 계명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들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약속이 있는 계명입니다. 즉 너희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이 땅에서 너희의 생명이 길리라 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공경하면 이 세상에서 길게 싫도록 그렇게 오래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의 모든 범사에 복을 주시고 평안함과 축복 속에서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주님이 왜 이렇게 다른 계명에는 약속하지 않는 이 놀라운 축복을 왜 이 부모 공경의 계명에 두셨는고 하니,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창조의 질서가 지켜지게 되고, 또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 그렇게 부모를 공경함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이 이 세상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나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나 그 공경이라는 자체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없는 예물을 드리는 것, 마음에 없이 절기를 지키고 마음에 없이 당신이 성전에 뜰을 밟는 것에 대해서 심히 불쾌해 하시고 진노해 하셨습니다. 문제는 모든 하나님에 향한 제사나 고백, 성전을 드나드는 것이 하나님이 불쾌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좋은 것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심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철철이 무슨 날을 챙기고 무슨 날을 지키고, 무슨 날에 선물을 해 드리는 획일화된 공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드려서 두 사이에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인격적인 사랑의 흐름이 있어서 함께 있는 것이 좋고, 그 부모가 살아 있고, 자식이 살아 있는 것이 그들 자체에게 한없는 위로가 되는 그런 삶이 마음을 주고받는 공경에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많은 자식들이 부모를 향해 마음을 달리 살는지 모릅니다. 부모님은 아예 자기와 상대도 되지 않고 마음을 터놓고 나눌 수 있는 교통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는 사람으로 아예 못박아 놓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욱이 열심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이렇게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파산해 버린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회의 아픔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나름대로 깊은 사연이 있고, 견디기 힘든 어려운 남들이 쉽게 알 수 없는 그 가정만의 고통과 비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주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속 제물로 주셨을 때 믿어지지 않던 수많은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것이 믿어질 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은혜에 깊이 감동 받은 삶을 사는 것이 또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 아닙니까?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남다른 은혜 속에 살고 남다른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결국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남에게 주시지 않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삶의 현장을 외면해선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겠습니까? 때가 되어서 밥을 차려 드리고 절기가 되어 옷 사다 드리는 것은 사육하는 것이지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경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부모님이 살아 계셔서 저는 참 좋습니다. 부모님이 거기 계셔서 나는 참 행복합니다. 당신이 계시지 않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하는 서로 인격적으로 의존하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화) 빚을 내어 상을 제일 좋은 것으로 보상 심리를 보임.
부모님의 생신을 잊어버리지 앓는 것이 도리이고,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 이런 소소한 날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부모에서 전혀 마음을 주지 않고도 기계적으로 그런 날들을 챙겨서 무슨 날에는 굴비, 무슨 날에서 옷, 무슨 날에는 쌀, 무슨 날에는 술 그렇게 갔다가 마치 뇌물 바치듯이 바칠 수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세상에서는 효도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것들을 효도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부모를 섬기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공경하라 인데 그 공경은 마음으로부터 먼저 시작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공경, 그래서 부모와 자기가 하나로 연합된 그러한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에 있어서 정말 부모님께 물질은 주고 있고, 철철이 필요한 생활비를 보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말 마음의 벽이 없이 자신을 허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야 물질만 손해봐서 섬길 수 있지만 그러나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정말 자기 깨어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 나오고, 주일날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단지 다른 일 안하고 주일만 교회 오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일날 교회 왔냐? 물으시면 아주 당당하게 이렇게 걸어서 갔습니다. 그리고 발 높이 들고 손 높이 들고 올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애야, 이 거룩한 예배 시간에 네가 마음으로 나를 공경했느냐?’ 대답이 참 쉽게 안 나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명령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누군가에 대해서 깊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깨뜨려지지 않으면 그런 사랑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그 명령은 바로 그겁니다. 부모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염불 외우듯이 그렇게 많이 기도하는데도 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압니까? 의무감에서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문제는 그 영혼에 대한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그 깊은 가슴 저미는 사랑은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한 후에 생겨나는 겁니다.
제가 목회자인데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저거 성질머리가 고약한데 들어와서 물 흐려놓는 거 아닌가? 저거 잠바만 걸치고 들어왔는데 돈이라도 내 놀 사람인가? 돈이라도 뭐가 있겠는가? 전에 교회에서 사고 쳤다는데 또 여기 와서 깽판 놓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계속 갖고 있는 동안에 목회자인 내가 그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 할 수 있겠느냐? 물론 눈물로 내 보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안 들어와도 좋으니깐 그런 쭉정이는 닫친 교회 보내 주십시오. 그러니깐 매일 기도해도 사실 그 기도 속에 부모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데 아직도 내 부모 하나 구원을 못했다 교회에서 말발이 서는가 이런 것 때문에 부모가 예수 안 믿고 살아가는 것이 자기에게 너무 부담이 되고 양심이 가책이 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 일어날 리가 있습니까? 주님이 보실 때에 이미 영혼은 그만두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부모를 향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이 없는데 그런 사람이 부모를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보기에는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질로 섬기는 것도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마음으로부터 부모를 공경하라. 그래서 부모와 하나가 되라는 그래서 이 룻과 같이 어머님이 어디 가시든지, 나도 거기 갈 것이며 어머니가 어디에 유숙하든지 나도 거기에 유숙하겠나이다 라는 완전한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죽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자기가 깨뜨려지지 않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자기가 깨뜨려지고, 자기가 무너지고, 자기가 부서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이런 특별한 놀라운 사랑을 내가 받았으니깐 불쌍한 우리 어머니, 불쌍한 우리 아버지, 그 부모님의 깊은 마음과 그 분이 살아온 인생까지도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그 영혼까지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자신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니깐 특별히 이런 일들은 며느리에게 많이 일어납니다. 큰일이 다가오는 구나. 드디어 기다리던 우리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뵙는 날이구나. 삼일동안 아니 어떻게 거기 가서 견디나,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늦장을 부리고 최대한 만날 시간을 축소시키고 가서 최대한 묵묵히 열심히 일하다가 해치우고 속히 첫 번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삶이 아닙니까? 그게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런 이세상의 며느리들의 모습입니까? 친 부모님이 되었든, 처가 집이든, 시부모님이 되었든, 모두 부모들입니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물질로 표하고 하는 것 나중 문제고 우선 마음으로 전심으로 마음을 열고 결함이 있는 그 분들의 모습을 그래도 받아들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가금에 가시, 송곳, 못, 바늘, 이런 것만 잔뜩 들어있는 고물상 같은 우리들을 주님이 받아 주셔서 그 사랑으로 우리 마음에 가시를 녹이시고 변화시키셔서 새사람 만드신 것처럼 그렇게 부모들을 받아들여 주고 용납해 줄 수 있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공경히 아니라면 진정한 의미의 효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룻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와 철저히 하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철저히 결탁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완전히 망가져 버린 가정이 이제 문자 그대로 미망인에 불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산도 없고, 가져갈 것도 아무 것도 없고, 마지막에 결국은 뒤편으로 넘어가 보면은 알지만 이 며느리 룻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삭을 주워서 이 나오미를 공경합니다. 이 룻이 눈물을 흘리며 나오미 곁을 안 떠나겠다고 하는 것은 부모공경의 측면에서 보면 당신이 나 없이 어떻게 혼자 사시렵니까? 당신은 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어찌하든 멀리만 있으면 좋다라는 사고 방식을 가진 며느리,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사람들이겠습니까? 특별히 며느리에게서 있어서 정말 넘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넘어서지 아니해서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관계에서 정말 축복 받을 수 없습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 가혹할 정도로 그렇게 대접하면서 교회 와서 이웃에 있는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베푸는 모순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결국은 자기가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나님 앞에 부서지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문제를 피하지 말고 문제 앞에 마주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나가고 문제가 없는 곳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잘나 보입니까? 우리도 제법 쓸만하고 주님이 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잘난 사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앞에 서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얼마나 초라해 보이고 나 같은 조인이 정말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결혼하기 전에 형제, 자매가 사귈 때 자매보고 우리아버지 좀 만나자 그러면 자매들은 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엄마가 좀 보게 하면 떨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는 고사하고 본전치기만 해도 좋다고 하는 전략적인 생각을 한 자락 깔아놓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믿는 며느리에게도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도 어디 가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시 자만 들어가면 치가 떨린다고.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견해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부가 이제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면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한 몸이란 말입니다. 한 몸이 그 부모를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편견을 떨쳐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집을 왔으니깐 나는 이 집사람이다 이런 생각도 하나님이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겁니다. 우리를 소유하는 것은 집안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남편도 여러분들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박고 이 땅에 태어나서 자라고 만났습니다. 그래서 한 가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한 가정을 이룬 사람들로써 부모를 공경하면서 부모님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 주님의 분부에 따라서 거룩히 택함을 받은 성도답게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한 자락을 깔아놓고 사는 며느리들을 위해서 어느 그리스도인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으로 시를 한편 썼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에 읽어드립니다.
우리들의 어머님, 나의 어머님, 시어머니
사람들은 당신을 시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하지만 나는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나의 사랑인 남편의 생명이 시작되게 하시고,
그에게 맨 처음으로 기도와 찬송을 가르치신 어머니
당신은 그이가 피곤하여 잠들었을 때 당신의 팔에서 안식을 취하였으며,
넘어졌을 때도 당신의 손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이가 자랄 수 있도록 언제나 내 사랑하는 그이 곁에 머물러 계셔 오셨으며
그이가 위엣 것을 바라며 기도할 수 있도록 무릎을 꿇어 기도하셨습니다.
그 남자로 하여금 사랑하는 내 남편이 될 수 있도록 도우신 당신의 사랑에 나는 빚진
자입니다. 이제 나는 사랑하는 그이와 함께 당신을 영원히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이것이 바로 성경의 정신입니다. 인간은 모두 허물이 많은 존재이지, 시어머니나 시아버지이기 때문에 특별히 결함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 모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머니도 되고 언젠가는 시어머니도 되고 시아버지도 됩니다. 결함이 많은 사람들만 모여서 시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데 다만 그 부모님들과의 관계에서 죽어지지 않는 며느리의 사악하고 강퍅한 마음이 편견이 그 관계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부모에 대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사랑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깨뜨려진 수많은 가정들이 이렇게 고통 가운데 이 세상에 살면서 빛으로 부르신 특별한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공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정 의 고통이 그대로 교회의 고통이 되고 이 교회의 고통이 이 세상에 고통과 패역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례요한이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에 이 세례요한이 출생하기 앞서서 주의 사자가 400년만에 하늘이 열리는 계시를 받고 이 땅에 주님의 음성을 부여받은 선지자로서 말라기의 예언에 따라서 이 땅에 출현하는 이 선지자의 출현에 대해서 뭐라고 예언하고 있습니까? 세례요한의 출생. 세례요한이 이 세상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은 정말 세기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닫혀진 하늘에서 400년만에 하늘의 신령한 계시가 들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라기의 성경이 구약을 끝낼 때에 세례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면서 끝나고 신약이 시작될 때 세례요한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 이였습니다. 큰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것이라 말하는지 아십니까? 죽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앞에 많이 돌아가게 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원래 부모 자식간에는 사랑을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하나님과 관계에서 오는 패역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패역하고 내가 하나님의 관계가 다소 무너졌어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 앞에 내가 패역하고 무너진 것이 적게 나타나지만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식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 패 역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내 패역을 고치지 아니하면 그 고통과 아픔이 그대로 부모와 자식에게 전달되고 그대로 퉁겨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가정이 온전하지 않고 다 조각나고 깨뜨려진 가정이야 그게 가정입니까? 각자 벌어다가 돈 내고 밥 먹는 기숙사지 가정입니까? 기숙사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사감이 있고 부사감이 있고 실장 있고, 방장 있습니다. 가정이 단지 밥 먹고 자면 그런 것밖에 더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질서들이 첫 기초를 놓는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으로 부처 우러나오는 공경이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고 무결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는 선한 것밖에는 해 주신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린 매일 죽지 않습니까? 우리가 매일 죽어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깨뜨려져야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좋은 것밖에는 주신 것 없고, 완전하신 분이고, 우리를 향해서 정결하고 순결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힘든데 우리의 부모가 얼마나 결함이 많고,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은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떨 때는 교육은 우리만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보다도 아는 것도 적고 어떤 때 인격도 우리보다 일천할 수 있습니다. 고집은 있고 자기 주장은 있지만은 그러나 우리처럼 이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같이 자라나는 세대를 깊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변화하는 이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좁을 수도 있고 이 성경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덜 박식할 수도 있고, 신앙에 대해서도 우리보다도 훨씬 체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허물 많고 그런 부모들을 공경하며 산다는 것이 자기가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이 자기가 죽지 않고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불행하게도 어떤 부모들 가운데는 자식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런 세월을 보낸 부모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 자식이 그런 좋은 하나님 아버지도 공경하기 힘든데 그렇게 자기 눈에 이렇게 볼 때에 결함과 부도덕한 것이 뻔히 보이는 그 부모를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공경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계명을 주셨지만 이 계명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게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죽어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 당신이 선택해서 애굽의 그 압제에서 끌어내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그래서 정말 새로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보면서 그 능력 속에서 하나님을 신망하면서 살 마음을 가진 그러한 백성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 그렇게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모님과의 관계를 거칠고 거친 의무감 하나로 때우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버이날이 다가옵니다. 꽃 한 송이에 다가 돈이나 몇 푼 넣고 고기나 한 근 사서 얼른 갖다 주고 오면 그것이 정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거라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한번 직면해 보시기 바랍니다. 꽃 한 송이 하나 달아 드리면서 그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웃으시는 이 세상의 우수와 고통에 살아온 그 부모님의 얼굴을 보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생을 살면서 내가 정말 이 부모님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드려본 적이 있는가? 내 젊은 날, 내 어린 날에 당신이 내게 상처를 주었으면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용서하며 그리고 지난날들에 내게 준 많은 부모님의 상처가 오히려 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은즉 본의는 아니지만 당신이 주신 상처로 인해서 내가 하나님을 더 알게 되었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아버지의 사랑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니 또한 당신의 허물은 나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부모님들이 당신들을 향해 온전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도 또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온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신앙으로 우리 부모의 허물을 용서하고 신앙으로 우리 부모의 연약한 부분들을 덮고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 부모님을 공경한다면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우리의 많은 허물도 우리들의 자녀들에 의해서 용서되고 이해될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것입니다.
이런 가정의 진정한 변화가 어디로부터 옵니까? 그것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요,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공경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공경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아직 죽지 아니하고 우리가 아직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사랑할 힘이 자신의 인격에서 솟아난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직 까지도 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 얼마나 훌륭한 인격이 있겠습니까? 그 속에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인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머리를 뒤져봐야 돌밖에 없고, 가슴을 훔쳐봐야 찌꺼기와 흙탕물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 인간일 진데, 그 속에 아름다운 인격이 나오기에 인격을 믿고 부모를 공경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공경을 받기에는 너무나 허물이 많은 과거를 살아 오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을 보면서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셔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주의 백성 삼으시고 이전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렇게 더럽게 음탕하게 살던 우리의 죄 덩어리였던 인생을 그의 피로 말갛게 씻기셔서 우리를 새사람 만드셔서 새로운 옷과 그리고 새로운 신발을 신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새로운 가락지를 끼워 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시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사라져 갈 때우리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은혜 받으면서 그 사랑이 다시 우리에게 솟아나기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드릴 수 없는 사람을 받아 드리며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부모가 정말 존경할 만한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라면 여러분은 부모를 공경해야 할 더 커다란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는 대신에 사랑을 베풀고 여러분들이 고통을 느끼는 대신에 만족을 느끼면서 살아오도록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에 있어서나 모든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신 분이 바로 여러분들의 부모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훌륭한 부모님들을 공경하며 살아야 될 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일천하고 우리의 마음의 밑바닥은 냄새나는 시궁창과 같은 더러운 밖에는 남은 것이 없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우리를 향해 베풀어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허물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향한 사랑만을 보이셔서 오늘도 허물 많은 조인들을 불러 용납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우리가 기동하고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랑이 우리가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깨어져서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관계들을 치료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의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주님이 두 교회를 세우셨는데 하나는 가정 교회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맡겨 주신 가정의 교회가 모두 깨뜨려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해 질 수 있겠으며 우리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면서 약속 있는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이 첫 번째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면서 마음의 구김이 없는 삶을 살지 못할 때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말, 그리고 많이 주고받는 거래의 관계가 없고 받을 유산 없고, 남겨질 재물이 없어도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계속될 수 있는 정신적인 사랑의 교통이 마음으로 공경하는 삶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가정의 행복을 위한 주춧돌이요, 기초가 아닙니까? 누가 여러분들의 가정에 이러한 깨어진 모습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까? 성령이 오셔서...., 아닙니다. 성령도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망가진 가정을 홀로 고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들은 이렇게 내 부모들을 정말 마음으로부터 공경했는가? 그리고 시부모님에 대한 편견이 정말 뿌리 깊이 박히지 않았는가 생각하면서 여러분이 그러한 사랑에 피해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타락하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복음의 빛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도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못박은 일을 후회하신 적 있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많은 인생이 하나님의 구원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자기 아들 순결한 예수로 이 세상에서 못박아 죽게 하신 것을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후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부모에게 마음을 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아들을 향해서 자기의 잠언 속에서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네 마음을 나에게 주며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그 자식에게 받고 싶었던 것이 부귀영화 보다 더 훌륭한 값진 명예가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마음 자식이 부모에게 바치는 진정한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이 이 부모에게 한없는 힘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말 행복하고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그런 사실을 삶을 통해서 공경하는 태도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독일의 신학자 폴 딜리힐 - 나치 시절 독일에서 추방당해 미국에서 강의 중 발음상의 어려움을 겪던 이야기.
누군가가 우리를 인정해 주고 우리가 거기 있는 것을 행복해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가장 행복하게 해 드리는 비결은 그분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의 무게가 되고 십자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거기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하고 우리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것을 부모님에게 심어 드려서 부모님에게 삶의 용기와 힘 그리고 자식들이 자기와 함께 있고, 자기가 살아 있는 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자식들에게 물질로 주는 것이 없어도 존재 그 자체가 자식들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심어 드릴 수 있는 자식이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거둘 때 없는 노인들 우리가 거둔다 이러한 마음이 부모에게 전해지면은 진정한 의미에서 효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은 이러한 의미에서 깊은 치유가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깊이 섬기고 깊이 사랑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열린 심정을 가지고 인격적인 교제와 서로 오가는 깊은 그런 가족간의 연합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 흐르는 관계가 되도록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더 깨뜨려지고 더 변화가 되어서 그래서 부모님이 이 세상에 살다가 마지막에 운명하실 때 너희들이 이 세상에 있어서 나의 고적한 인생에 큰 위로와 큰 행복이 되었다고 그렇게 고백 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실 때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2. 마음으로 섬길 부모님Ⅱ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留宿)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룻1:16中)
저는 지난 시간에 룻기에 나오는 감동적인 장면을 가지고, 부모 공경의 첫 번째 대의는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먼저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효도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마음 없이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위선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마음을 그 부모님들께 드리는 그러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그저 자녀인 우리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부모에게 마음을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부모의 자식이기도 하였고 이제는 아이들의 부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그런 자식들이 얼마나 드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마음을 드려야 하는데 실지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상처받은 자녀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목회를 하고있기 때문에 남달리 가슴아픈 사연을 참 많이 듣게 됩니다. 기가 막힌 사연도 듣게 됩니다. 가슴에 묻어두며 지내지만 그러나 많은 사연들을 여기저기서 듣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식에게 상처받은 부모도 물론 많지만 제가 보기에는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자식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자녀들이 마음을 부모에게 주고 싶어도 부모의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교인이 조금 준 것 같은데 시골에 내려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난 주 설교가 확실히 감동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덜 감동되게 했어야지 오늘 많이 모이는 건데… 일주일 동안 직장에 묶이고 학교에 묶이는데 주일밖에 내려갈 시간이 있겠습니까? 내려가서 마음을 드리라니까 열심히 드리고 있겠지요? 그런데 부모에게 상처받은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지난 주 같은 설교를 들으면 “내가 부모 생전에 잘해드려야지”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속에서 늘 흐르는 삶 자체이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일년에 한 번씩 무슨 기념식 하듯이 어버이 주일 전 주일에 눈물 흘리고 가서 어버이 주일날 꽃 달아 드리고 고기 한 근 사드리고 돌아와서 다시 잊어버리고 마음에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 문제를 다루어 야지만 지난 주 설교에 쐐기를 박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룻이 “어머님 다시는 저에게 따라오지 말고 내 고향으로 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어머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거기 쫓아갈 것이며 어머님이 어디 유숙하시든지 내가 거기 유숙하겠나이다”하는 결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은 마음이 그 부모와 완전히 하나된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룻이 나오미를 그토록 공경하게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래도 먹고살아 보려고 눈물나는 사연을 안고 가족들을 데리고 타관 땅으로 가서 사랑하는 남편 묻고 자식 둘 땅에다 생떼같이 묻고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홀몸으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러한 인생에 대해서 나오미는 스스로 해석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팔자소관이나 재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시는 것이다.’ 바르게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큰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 어머니인 나오미를 이처럼 죽기까지 따라가려고 하는 것은 나오미가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삶에 있어서 룻에게 커다란 감화를 끼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고 이제는 슬픈 여인으로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오미에게서 무슨 커다란 감화와 큰 감동, 신앙적인 존경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이렇게 나오미와 같이 온전하지 못한 부모를 가진 자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상처를 받는 원인도 여러 가지 입니다. 때로는 부모가 무능해서 너무나 가난한 것도 자라나는 자녀들에게는 깊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가정을 돌보지 않고 젊어서 자기의 향락을 쫓아 방종한 일생을 산 부모의 무책임한 가정생활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큰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보는 눈앞에서 어머니가 폭행을 당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가해한 당사자들은 곧 잊어버리지만 자녀들의 가슴에는 흑백사진처럼 깊이 남아서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영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가슴에 주절이 주절이 남아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부모님께 왜 안드리냐. 내놔라. 부모님을 마음으로 공경해라.”하면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단지 그것이 옳다는 것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자기중심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가슴에 상처와 고통을 많이 주어서 자녀들 속에 그런 깊은 아픔이 있기 때문에, 도무지 가슴속에서 부모와 더불어 화해가 되지 않아 고통을 받는 자녀들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될 것은 이렇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이 많지만 그러한 상처와 고통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징벌이요 저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누군가가 끊고 거기로부터 벗어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계속 대를 물려가면서 가정에 깊은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늘 폭행하는 그 아버지를 그렇게 혐오하고 싫어하던 그 아들이 결국은 커서 자기의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방종하고 바람피고 가정을 다 뒤집어엎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어머니에 대해서 한을 품었던 딸이 자신도 그 방종한 패역을 물려받아서 그렇게 타락의 길로 걸어가는 예들을 우리는 많이 보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것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 또한 배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포악한 성품이나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이나 육신적인 쾌락을 쫓는 방종함 혹은 무능으로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다면 이미 그의 마음속에 부모를 향한 미움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미움과 사랑이 어떻게 한 마음 속에 공존 할 수 있겠으며 마음으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같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둘 중의 하나가 위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지만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공경으로 부모님을 섬기고 그 마음을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부모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잘못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녀인 우리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면 이미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도 그 부모의 죄악의 유업으로 하나님의 징벌 아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십계명 속에서 우리에게 부모에 대한 계명을 명령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고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방종하고 무능한 삶을 살고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면 그것은 징벌 받을 죄이고 그것은 결코 당대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처를 물려받은 자녀가 있고, 그 자녀인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 안에서 적절하게 이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 상처와 고통은 여러분들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물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워도 마음을 부모에게 드려서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이것을 회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무감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의무감이 아니라 고쳐져야 할 것들이 고쳐지고 치료되어야 할 부분들이 치료되어져서 그래서 영혼 깊은 밑바닥에서 진정한 마음이 부모를 향해서 솟아오를 수 있는 그러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상당히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버이날이 다가오거나 중추가 절이 되어서 보름달이 높이 뜨는 때면 우울해지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어진 가족들의 관계를 명절이면 이런 어버이날이면 마주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신앙도 맥을 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바로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도저히 끊을 수 없고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고통과 아픔을 유업으로 물려받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문제가 있는 여러분들은 깊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여러분들의 그 고통이 변하여 참 기쁨이 되고 그러한 가족의 구조 속에서 고통을 받는 자리에서 오히려 병든 가족들의 관계를 치유하는 그런 하나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왜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들이 존경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왜 우리가 존경해 줄 수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았을까요? 생각만 하면 아버지 이외에 존경할 분이 없고 어머니 이외에 훌륭한 분이 없는 것 같은 그러한 거룩한 그리움과 존경심을 우리에게 남겨주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우리같이 귀한 자녀들을 버려 두고 가정을 등지거나 육신적인 방종을 위해서 고귀한 가정을 팽개치듯이 그렇게 이기적인 인생을 살아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우리들 가슴에 남겨주셨습니까? 왜 우리들의 부모들이 오늘 우리들이 마음을 다해서 화해하려고 해도 화해할 수 없는 그러한 깨뜨려진 삶을 살아서 도덕적으로 파산하거나 혹은 도덕적으로 파산하지 않아도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하는 부모의 자비를 베풀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까? 왜 우리의 부모는 우리가 존경할 수 없는 삶을 살았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갖고 얼마나 다니고 무슨 일도 많이 했는데 그러면 우리 부모님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이 다 믿는 것입니까? 신앙생활 하는 것이 다 신앙 생활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날라리 같은 신자들을 참 많이 보면서 가슴아파했습니다. 깡통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에서 큰 직분을 꿰차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교회를 이끌어 가는 대열에 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몇 번씩이나 마음 아파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부모가 그런 허울 좋은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일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지만 일평생 하나님께 마음을 주어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떻든 그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으로 불러주시고 자신을 한 가정의 어머니와 아내로 새워주신 그 위치가 얼마나 거룩하고 고귀한 자리인지를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멋대로 살았기 때문에 자식인 우리들에게 커다란 고통과 아픔을 나눠준 부모들이 되었습니다. 그 부모들은 잊었을지 모르지만 자식된 여러분들은 그 상처와 고통이 가슴에 남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잊힐 줄 알았는데 잊어버린 사람은 고통을 준 사람이고 고통을 받은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지워지기 힘든 깊은 상처가 가슴에 새겨지게 됩니다. 일정한 여건이 조성되고 상처를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신앙도 맥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그 부모와 화해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저는 많이 만났습니다. 나는 그분들의 처지를 깊이 동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보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라면 내 부모를 용납할 수 있었겠느냐?” 얼마나 가슴에 저미듯이 파고든 상처가 크면 감히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모든 고통받는 자녀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온전해져야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후일 우리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 지라도 후일 여러분들의 자녀가 여러분들을 그렇게 판단하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은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 부모들이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원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택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식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화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사랑의 피로 우리 한 사람 한사람들을 씻어서 주님의 자녀 삼으셨는지를 알았다면 어떻게 그분들이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들이 그런 삶을 살아서 우리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준 것도 알고 보면 그들이 주님을 몰랐기 때문이며 그분들과 나의 차이가 있다면 단지 그분들은 하나님을 몰랐고 나는 지금 그 분들의 나이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다는 것, 그것밖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내가 잘나서 내 혈육이나 내 육신의 어떤 공로가 그 일들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그 차이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만약에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모르고 그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우리에게 상처를 준 부모보다 배나 더 악독한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의 가정을 짓밟고 우리의 가정에 더 많은 상처와 고통을 남겨주어서 어쩌면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스스로 이 세상 살기를 마다하고 이 세상을 등지게 만들었을 수도 있는 그러한 죄악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어둠과 무지 속에서 부모들이 그렇게 살아온 것,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깊이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 자기를 깊이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부모들을 용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에 있는 미움의 고리와 상처를 받은 사람 속에 생기는 독특한 원망의 감정을 정리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을 품고야 어찌 데지 않을 수 있으며 총기를 휴대하고서야 어찌 언젠가는 그 총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들이 그러한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말미암아 그 죄와는 직접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여러분들이 그 부모로 말미암아 저주를 유업으로 물려받아서 지금 마음에 고통하며 가슴앓이를 하고 그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들으면서도 진정 그 부모와 화해할 수 없는 감정적인 앙금을 남겨놓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그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고 그 관계를 치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고통과 상처는 아무 죄도 없는 여러분들의 후손에게로 또다시 물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살았던 죄의 대가가 철저하게 그 후손들에게 유업으로 물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떠나온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시내 산에서 주셨습니다. 그들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 공경이 무슨 의미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공경이라는 단어는 이전에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을 명령하실 때 자주 쓰이던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공경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정이 있는 정서를 갖춘 그런 공경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대는 달라도 인간의 경험은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지금 상처를 받는 자녀들이 있고 고통을 받는 부모들이 있으면 그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모세의 율법 가운데 부모를 때리거나 치는 자를 향한 저주가 기록된 것을 보아서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흔하게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부모를 쳐죽이거나 부모에게 폭행을 하는 자식들 이러한 패륜아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전혀 인간의 경험은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식들이 많은 그 공동체에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약속도 주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땅에서 너희의 생명이 길리라.” 약속까지 주시면서, 말하자면 현상금까지 거시면서 부모를 공경하도록 그 백성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는데 그리고 그 상처가 종식된 것도 아니고 이전에 자기를 괴롭게 하던 그 일과 그 고통스러운 관계가 어떤 경우에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데 어떻게 그 부모를 용서할 수 있겠으며 용서를 뛰어넘어서 안보고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함께 모시고 살며 마음의 중심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듯이 그렇게 부모를 섬길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상처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닫고 상처를 받거나, 아버지께서 자기의 뜻대로 모든 일들을 이루어 주시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토라진 마음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하고 흠이 없으신 아버지에게서도 이렇게 상처를 받는 인간들인데 흠이 많고 죄가 많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이 상처를 받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고 그 때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모로 말미암아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바로 그러한 부모들을 공경하라고 그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경건하고 나를 잘 믿는 부모만을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정의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었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나 보다 훨씬 잘 믿는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부모의 정의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아주 단순하게 부모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오히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계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이 거기다가 현상금까지 거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의 표준에서 볼 때에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그렇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 자식, 그사이에 흐르고 있는 얽힌 미움의 줄,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그저 묻어두고 살아가면서 여전히 미움의 가시가 남아 있는 이 모든 옛 관계를 청산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어려움이 있는 이 계명을 그렇게도 쉽게 우리에게 주시고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첫 번째 계명으로 약속까지 달아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계명을 볼 때마다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도록 만들어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이 계명에 순종하라고 우리에게 이런 계명을 주셨습니까? 우리는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을 받았는지를 기억해야합니다. 이 계명이 두 번 주어지는데 한 번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고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 시내 산에서 머무는 동안에 주어졌고 마지막에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반복된 명령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주어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떠나기 전에 미리 이 계명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행진을 하기 전에 이 계명을 주셨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능력을 맛보기 전에 이 명령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계명도 없이 그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야 하셨습니다. 큰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애굽에는 저주가 내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센 지방에는 평화가 깃들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독점적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을 대책이 없는 홍해바다를 기적으로 건너게 하셔서 바다를 건넌 후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심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 받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놀랍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광야 길에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만나의 기적으로 생수를 내시는 축복의 놀라운 역사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신 후에야 이 부모 공경의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허물이 많은 부모를 주목하는 동안은 진정으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효도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처를 많이 받은 자식들이 있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으로부터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중 누군가가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이제껏 까지 어떻게 내 부모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왔는지 하나님은 아시지요.” 이러한 고백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자녀들은 가슴 아픈 가운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백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라치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너의 모자라는 부모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부모를 통해서 많은 고통과 아픔을 당하였지만 그러나 너의 부모가 네게 없는 동안에 나 하나님 아버지가 너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부모로부터 소외되는 것 같았을 때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그런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일평생 상처로 인생을 살아온 믿음의 사람 다윗의 고백은 언제나 이런 진리를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이여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그는 자기의 집으로부터도 그러했고 처가 집으로부터도 그러했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부모로부터 소외를 당하거나 말할 수 없는 미움을 받으면서 부모에 의해서 생명이 표적이 되는 상처뿐인 인생을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보다 더 풍성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더 큰사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없고 어머니의 사랑은 낯설었어도 그는 언제나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가 없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고통받을 때에 거기 함께 임하시고 비난을 받을 때에 그 가운데서 자기를 위로하시며 아픔 속에서 자신에게 참 소망과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한없이 받고 그 큰사랑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이 그 인생을 불행하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에게 있어서 어렸을 때의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고, 장성해서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며, 나이가 먹어서는 자기 자녀들로부터 받는 사랑이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절대적인 모든 사랑은 상대적인 것으로 변했습니다. 부모의 참 사랑이 없고 사랑 대신에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인 그 사랑을 못 받았어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참사랑을 알고, 원망과 미움으로 칼을 품고 사는 대신에 하나님 안에서 용서하고 화해하는 정신을 배워왔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은 이처럼 인간의 사랑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그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일들이 눈에 들어오거나 하나님의 사랑 말고도 또 다른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알고 그분이 나를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므로 우리가 하나된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했습니다.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었고 거기에 기쁨이 있었고 그것이면 인생의 어떤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는 그런 어두운 밤도 능히 지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와 같은 그런 상처를 받고도 부모를 공경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은 여러분, 우리는 아무 공로 없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밖에는 없지만 그러나 쓰레기 같은 우리 인생을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형상을 입혀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결핍과 고통 속에서 일생을 살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 앞에 변론하며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도록 그렇게 아들을 이 세상에 주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대속제물로 주셨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러한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 그런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사랑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우리 인생이 모두 일그러지고 망가져서 하나님이 뜻을 드러낼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없도록 사랑을 받은 그런 사람들인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말씀하실 때에 무엇을 바라보기를 원하셨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허물이 많은 우리의 부모나 도덕적으로 파산하거나 우리 인생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무능한 부모를 바라보며 동정심에서 그를 공경하도록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 명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허물 많은 부모들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바라보며 그런 아가페의 사랑으로 부모를 공경하도록 부르고 계신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부모의 허물과 부모로부터 받은 가시와 같은 상처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돌 던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돌 던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상처와 그 아픔의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돌 던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그들 각자 각자에게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상처보다 더 큰사랑을 맛보았고, 오히려 그 상처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았을 불순종하고 무디기가 한량없는 우리의 인생들이 말할 수 없는 신비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로 그 상처와 고통과 아픔 때문에 더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되었고, 부모의 품에서 맛볼 수 없는 안식과 위로를 그 하나님의 품에서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품에 더 깊이, 살 깊이 파고드는 그러한 자녀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의 부모는 완전하지 않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품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런 모든 과거와 우리의 모든 이 은혜 받은 기억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상처도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 가고 차가운 상처받은 관계만이 살아서 우리에게 이 거룩한 계명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감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신 것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리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핍절할 때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상실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셨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그분의 품안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참 인자하심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감적으로 이런 자비와 이런 인자와 이런 사랑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셨던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머니의 몫까지 그렇게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에 감화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부모들을 용서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화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몫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화해하고 진정으로 과거와 더불어 용서의 화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공경하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생각해야 합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하나는 그런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부모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배워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고통과 우리 인생의 가시라도 하나님은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로 그러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징검다리 삼아서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안으로 인도하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이정표로 사용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아픔까지도 하나님 앞에 감사 할 수 있고 고통까지도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승리한 성도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와 깊이 화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축복을 물려주고 우리의 신앙과 아름다운 믿음의 인품을 물려주지 못할지언정 하나님 앞에 그 자녀들을 선물로 받은 우리가 그 자녀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고 저주를 유업으로 남겨주는 부모들이 되어서야 우리의 부모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사실을 깊이 새기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부모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상담을 하다보면 부모와 화해하고 싶은데 그 변하지 않는 부모 때문에 고통 하는 자녀들을 만나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이렇게 권면합니다. 살아봐야 이제 얼마나 더 사시겠느냐,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되 특별히 부모를 향해서는 그런 마음을 더 많이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큰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그렇게 고통 하는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여러분들이 피를 타고 혈통을 타고 흘러오는 그 죄의 유업을 종식시키도록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남 모르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슴에 심겨주신 그 놀라운 신앙의 기쁨, 그 은밀하고 거룩한 교제의 기쁨들을 여러분들은 어디에 사용하시려 합니까? 문제는 여러분들의 소명이고, 고통이 있는 곳은 바로 여러분들이 가야 할 곳입니다. 화해의 복음을 한 몸으로 받은 여러분들이 부모와 화해를 하지 못하고 그래서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고통 하는 이 세상과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독생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이끄는 중보자가 될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어떠한 사연이 있든지 이제 하나님의 더 큰사랑을 보고, 화해하지 못한 과거와 화해하고, 부모님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가 사는 길이고 여러분들이 사는 길이고 여러분들의 자녀가 사는 길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서 읽게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왜 룻은 나오미에게 이처럼 같이 가기를 그렇게 간청했을까요? 어머니가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할 것이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나오미가 이십에 결혼을 해서 이십 세쯤 말룐과 기룐을 차례로 낳았고 말룐과 기룐이 이십 세쯤 되어서 결혼을 하였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나오미와 룻이 대화를 주고받는 이 시점에 그녀의 나이는 오십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앞부분에 떠나지 않는 자부 둘을 향해서 “내가 당장 시집을 가서 아들을 갖는다고 치자. 내가 다시 남편을 맞아들인다고 치자” 이렇게 반반의 가능성이 섞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제 감각으로는 이 여자의 연령이 폐경기에 가까이 이른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기가 시집을 가도 아이를 잉태할 것을 확신 할 수 없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그 나이는 정말 연로한 나이였습니다. 그러한 이 나오미를 룻이 굳이 동행하겠다고 한 그 이유는 결국은 단순히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백입니다. “어머니, 그 연세에 그 먼 길을 어떻게 혼자 돌아가시렵니까? 품을 팔아도 내가 팔고 돈을 벌어도 내가 벌어서 당신을 봉양하겠나이다”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뒤편으로 넘어가 보면 실제로 나오미는 있고 룻이 나가서 이삭을 주어서 나오미를 공경하는 갸륵한 효성의 실천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실천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과 마음으로 화해하고 그를 진심으로 용서 할 뿐 아니라 물질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 나이가 먹어간다는 증거지만 이제 나이 어린 사람들이 갓 결혼을 하고 새 생활을 설계하는 것을 보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인지 집을 소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결혼만 하고 나면 큰 아파트 하나 덜컥 계약 해 놓고 뒷돈 대느라고 꽁지가 빠지는 삶을 삽니다. 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그러는 동안에 물질로 하나님 섬기는 것도 인색해질 수밖에 없고 자신들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부모를 향해서도 물질적으로 공경하지 못합니다. 왜 그런 식으로 삽니까? 몇 년 더 세를 살면 무슨 문제가 벌어집니까? 큰 평수가 작은 평수면 그렇게 큰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들은 한몫에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언제 하나님께 불려갈 지 누가 압니까?
제가 항공권을 살 때마다 신용카드로 사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꼭 신용카드로 삽니다. 죽으면 이 억이 나오는데 그 돈 가지고 교회라도 건축하라고. 우스개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불러 가실지 압니까? 목포에서 아시아나 항공이 떨어졌을 때 아주 유명한 부흥사를 하나님이 불러 가셨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의 생명을 거둬 가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만약에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거둬 가시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집 마련하고 차 사고 땅 산 다음에 주님을 섬기고 효도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인생을 산 것을 돌아보니까 부지런히 부금 넣고 월부금 붇다가 인생 끝났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과 그 말할 수 없는 은혜 때문에 이렇게 살아서 숨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모으거나 미래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모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 일년을 살아도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님들을 향해서 그렇게 자신의 소유를 떼어서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자신의 쓰고 누릴 수 있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려는 희생 정신이 없으면 부모를 진정으로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모들을 섬기는 것은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나아가서 버르적거려서 벌어온 돈과 자녀들이 갖다가 공경하면서 바치는 그 물질적인 섬김은 부모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일부라고 하는 것을 처음부터 배우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한때 한국에 있는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미우라 아야꼬’의 간증에 보면 자기 남편과 결혼하고 모든 수입의 이십 분의 일을 부모를 위해서 사용하기로 따로 떼어놓는 그런 아름다운 결심을 봅니다.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물질로 부모를 섬기는데 있어서 인색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더욱이 몇 푼도 안돼는 물질로 부모를 섬기는 것을 가지고 네 부모 내 부모 친정 식구 시집 식구 하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부부가 있다면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고 그 유치한 생활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모들의 생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의 생애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자기의 누릴 것을 끊임없이 포기하면서 살아오신 생애였습니다. 자녀들 때문에 입을 것도 못 입고 먹을 것도 스스로 절제하는 그런 삶을 살아온 부모들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국가적으로 궁핍하기 짝이 없던 때에 우리들을 양육한 부모님들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핍절한 가운데서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끼니를 굶고 우리를 바르게 자라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자신들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모든 생활의 편의를 저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은 다 잊혀진 말이 되었지만 상아탑이 우골탑이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부모들이 자기의 목에 쟁기를 매어 밭을 갈면서도 소를 팔아서 서울에 있는 자식들의 등록금을 대주었다는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던 지가 불과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의 희생 위에 서서 이만큼 시집 장가가서 잘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모의 그런 헌신적인 물질적 기여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렇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돌아가신 제 할머니를 통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궁핍한 생애를 살아 오셨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더 많이 가슴에 와 닿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예화) 옛날 자녀를 많이 둔 가난한 부모가 자신들은 굶으면서도 자녀들을 먹이다가 결국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할머님의 이야기.
자기는 굶주려 죽으면서도 그렇게 자식들의 핍절하는 것을 보지 못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물질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살아온 것이 부모들의 생애였습니다. 그런데 자식된 우리들이 부모를 위해서 얼마나 물질적으로 희생하고 있습니까?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대면서 물질로 도무지 섬기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단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의 자녀를 향해서 과도하게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범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돈으로 쳐 바르면서 기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 다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들을 향해서는 인색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자식들에게 그렇게 쳐 바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화) 목요일마다 거지들을 위한 예배를 드리는 한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리고 그 거지들 중에는 성공한 자녀를 둔 노인도 있다는 이야기.
그렇게 살아가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여러분 똑같은 것 아닙니까? 자기의 쾌락이 좋고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자식을 짓밟은 그 부모나, 마지막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 부모를 거리로 내몬 자식이나 그 인생들이 그 인생 아니냐는 겁니다. 무슨 상처고 무슨 돌 던질 여지가 있겠습니까? 마지막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받는 그러한 율에 처해질 심판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질에 있어서 이기심을 버리고 물질을 받을 적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부모들과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을 섬기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물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돈을 모으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 아닙니다. 많으면 많은 대로 나누어주고 흩고 보람있는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정신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모가 결핍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것은 믿음을 배반한 자요 믿음에서 파산한 자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모를 위해서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보고 그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해드리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유익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쓸 수 있는 것들을 줄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하고 물질적인 필요를 줄이므로 말미암아 부모를 위해서 다소간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부모는 일평생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남아있는 분들의 이 세상에서의 수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들이 그렇게 상처받은 옛 과거와 화해하고 물질로 부모들을 정성껏 섬겨서 결국은 우리의 가계 가운데 흐르고 있는 그 모든 불순종과 죄의 유업을 끊어버리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제 그 부모와 완전한 화해를 해서 자식들에게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만이 전수되도록 그런 삶을 살아야지 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이렇게 어버이 주일을 지납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기념식과 같은 계명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하는 마음을 그렇게 성심껏 섬기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효도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葬事)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下-17)
부모공경에 대한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로써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을 마치고 다음 시간부터는 부부의 도리에 대해서 강론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두 시간에 걸쳐 첫 시간에는 부모를 공경하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그렇게 마음을 드려야 하지만 깨어진 관계들을 고치기 전에는 마음을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마음으로만 부모를 공경할 것이 아니라 물질로 섬겨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희생이 없이는 되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항상 분수에 맞춰서 사는 삶을 자랑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은 큰집이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모두 주님을 모르던 옛 시절에 자랑하던 자랑거리였습니다. 만약 아직도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자랑한다면 그는 아직까지도 그러한 것들을 사랑거리로 사랑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거리는 자랑거리이고 자랑거리는 사랑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을 받은 모든 형제자매들은 이제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있으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모든 관심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승리했을 때는 세상의 사람들이 100평 아파트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뜻이 나의 인생을 통해 이루어졌을 때 사람들이 외제 승용차를 타고 기분 좋아하는 것 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명백한 신앙의 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살아가야 할 의무를 느낀다든지 이렇게 살고싶다고 하는 마음의 소원조차 갖지 않는다는 데 모든 신앙생활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의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정말 공경하기 위해서는 물질로 섬겨야 합니다. 부모가 계시고 그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금방 갖고 싶은 것을 참고 나중에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서 오직 삶의 목표와 꿈이 큰 아파트 장만하고 큰 집 사고 큰 땅을 차지하는 것에 매달려서 살아가는 허무한 젊은이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습니다. 젊어서는 집을 마련하는 데 애를 쓰고 집만 마련하면 사람도리하며 살 것 같은데 집을 마련하고 나서 30대를 지나 40대에 접어들게 되면 이젠 그 집이 좁아 보이기 시작하고 더 넓은 집을 갖고 싶어하게 됩니다. 집이 만족스러워지면 그 다음엔 땅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아름다운 재물 보기를 돌같이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모를 물질로 공경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그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 어떻게 사랑을 이룰 수 있겠으며 부모공경의 도리를 이룰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곧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성취해야 할 것이고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고 고난이 필요하면 그것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마음으로부터 부모와 화해하는 것과 물질로 섬기는 것 두 가지를 우리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진정으로 사랑하면 물질로 섬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자기 자녀들에게 물질에 있어서 얼마나 후하고 그들에게 얼마나 아낌없이 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향한 사랑의 표시에 3분의 1만 부모에게 해도 유례없는 효자 효부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무엇을 보여 주느냐 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내리사랑의 본성을 물론 보여 주기도 하지만 우리의 부모들도 부모의 부모들에게보다는 우리들에게 훨씬 잘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 속에는 이렇게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가 낳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더 직접적이고 피부에 와 닿습니다. 그런 내리사랑의 본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부모를 향해 물질적으로 인색한 것은 대부분 마음의 부족 때문이고 마음이 부족한 것은 결국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준 부모의 과거가 용서되고 옛날의 깨뜨려진 관계가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을 받아야 할 관계에 있어서 상처와 고통을 받는 것은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 놓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큰 은혜를 안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부모에 대한 본성적인 기대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자기의 부모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이 불완전해도 자기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완전할 것이라고 믿는 본성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배신해도 부모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본성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예화) 제가 어렸을 때 늘 친구로 같이 지내던 초등학교 시절의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 머니가 아주 터무니가 없었습니다. - 아버지는 점잖음-두 아들과 한 명의 딸-아내 때 문에 괴로워하다가 자식들과 함께 자살함-쥐약 먹고 자살함-아버지가 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쥐약이어도 먹고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자녀들에게 있는 것임.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들로부터는 배신 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혹은 예기치 않은 사랑이 다가와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해도 부모를 향한 나의 기대를 부모는 배신할 리가 없다라고 하는 본성적인 믿음이 자녀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깨뜨려지기 시작할 때 그것은 단지 현실 감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튀면서 무엇인가 그러한 부모에 대한 신뢰가 깨뜨려질 때 가슴속에서는 커다란 상처가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처는 순수한 상처가 아니라 상처받는 사람 내면 속에 원래부터 있던 선하고 거룩한 본성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죄악되고 패역한 본성과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를 입었는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에는 부모에게 피해를 입은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를 다닌다 안 다닌다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면 속에서 그런 패역이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을 들어보면 부모로부터 상처를 입었으니까 눈물나는 사연이고 부모가 부모도 아니고 자식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고 눈물 없이는 그 사연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상처를 받은 것까지는 죄가 없는 일반적인 피해였지만 그런 상처는 반드시 인간의 내면 속에 깃들여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성품과 손잡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죄악된 성품과 손을 잡아서 패역의 씨앗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결국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부모가 그러한 고통을 안 줬더라면 그러한 패역의 뿌리들이 생기지 않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원인을 누가 제공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결국은 패역한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자신 속에 부패한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이 상처와 손잡고 계속해서 패역한 삶을 이어가는 것 자체를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자동차 고치는 곳에 갔는데 서로가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차가 가다가 차선을 넘었다는 것입니다. 겁이 나서 피하다가 중앙선을 침범해서 다른 차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얘기인즉 이 차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했더니 보험회사 직원의 말인즉 원인제공이라는 말은 보험법에는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무죄하려면 그 차가 튀어나왔을 때 그냥 피하지 말고 똑바로 가서 받아버리면 그 쪽 책임이 되는데 당신이 피했고 그 차는 어디론가 도망을 갔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잡는다고 하더라도 원인제공이라고 하는 말은 보험법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상처를 받을 때 그 상처가 참 크고 불쌍하지만 그러나 그 상처를 기화로 해서 우리 속에 계속해서 죄가 더 자라고 패역이 자라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에 대해 자신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자신은 피해자이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에 대한 본성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거나 혹은 이런 것들에 대한 기대가 배신감으로 나타나게 될 때 사람의 마음속에는 깊은 미움과 원망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망과 미움이 자리하게 되어서 대부분 부모와의 관계는 어제는 한 가지 상처로 평생 못이 박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랜 동안 누적되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의 본성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한 두 번 실망시켜서는 자식들이 저 사람은 우리 부모일 수 없어 인간도 아니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향해서는 그런 본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랜 동안 누적되면서 그러한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 사람들을 만나 면담을 해보면 부모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 아예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봅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렇게 부모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모가 자기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엄밀하게 보면 그것은 부모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런 상처가 자신 속에 들어와서 죄악된 본성과 손을 잡으면서 거기서 미움과 죄악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나중엔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로는 다 이해하라 용서하라 이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이렇게 결정적으로 부모와의 관계에 깨뜨려짐이 있게 되면 평생 화해 안하고 사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흉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의 도리를 다 하고 마음에 없는 사람으로 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죽었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자식들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시골 노인네들이 와서 자식들 등을 한번씩 때리면서 야 임마 거짓말로라도 좀 울어라 안 나오는데 어떻게 웁니까? 화해가 안되었으니까 그 죽음이 슬픔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눈에 보이는 관계는 남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관계는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부모는 이미 장사 지낸 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두고 어버이날 고기 사 가지고 가고 명절날 옷감이나 끊어 가지고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다라고 할 때 그 단어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라고 할 때 쓰여진 단어와 똑같은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이 있는 진정한 봉사, 섬김 이것이 바로 공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명절날 시골에 나타나고 어버이날 고기나 사보내고 매달 자동이체로 돈이나 몇 푼 씩 빠져나가면 시골 사람들은 그 집 효자 났다고 말하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공경하고 사랑하는 그 관계는 그 이상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정도의 선상에서 효도를 생각한다고 할 것 같으면 굳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얽매인 줄을 끊고 화해할 수 없는 관계를 화해하게 되고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절대적인 신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룻을 보시기 바랍니다. 룻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리이다. 만일 내가 죽는 것 이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니까 이 룻이 오늘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가겠다고 사생 결단하는 동기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먼길을 떠나는 노인네가 불쌍하다라고 하는 인간적인 측은함에서 비롯된 효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룻은 비록 모압 지방의 여인이었고 그녀에게 있어서 나오미와 엘리멜렉과 말룐과 기룐 이 네 식구 이 집안을 통해서 들어온 여호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낯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과 함께 살면서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여호와 종교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 집안은 신앙적으로 성공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집안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 집안을 통해서 여호와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여호와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얻게 되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랬는데 얼음이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더 차고 남색이 쪽에서 나왔으되 쪽빛보다 더 푸른 것처럼 이 여인이 이방여인이었지만 그러나 엘리멜렉의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거기에서 여호와를 만났습니다. 원래 여호와를 자신에게 전해 준 이 집안은 신앙적으로 실패한 가정이었지만 룻은 거기서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님을 죽기까지 좇아가겠다고 결단하게 한 그 힘은 인간적인 연민의 정이 아니라 신앙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서 장사될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죽는 것 이외에 당신과 헤어진다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는 이런 의무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이 이러한 의무감을 그에게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어머니를 좇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나는 비록 짐승과 같은 이방인이나 당신을 좇아가면 그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그 백성이 내 백성이 되면 나도 그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정든 고향을 떠나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도 그는 자신의 육신의 고향을 잃어버려도 여호와를 기업으로 삼고 싶은 강한 믿음이 이 룻에게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에게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게 되는 첫 번째 교훈은 정말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효도는 신앙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식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과 공경함이 그의 죽을 수밖에 없는 부모의 영혼에 대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금생 뿐 아니라 내생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효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화) 함양( ? )으로, 저기 경상도 아래 지방입니다. 청년들을 데리고 전도활동을 갔었습니 다. 주일학교도 해주고 전도도 했습니다. -유교와 미신으로 가득 찬 마을-가가호호 방 문-복음에 굉장한 호기심을 느낀 어떤 아주머니-물동이를 옆에 두고 열심히 경청함-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를 물음-우리 시어머니는 안 믿고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되었느냐-그렇다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함-시부모님이 지옥의 불길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천국의 생명샘 물가에서 과일을 먹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겠느냐-만약 시부모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자기는 더더욱 지옥에 가야 함.
우리는 평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방향에서 복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효성스러운 며느리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이생에 있을 때에도 부모의 육신을 수발하고 거두지를 않는데 죽은 부모의 영혼까지 염려하는 마음 착한 며느리, 지금도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자기도 믿고 싶으나 어쩔 수 없어하는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뭐 할 수 없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후레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도덕적인 관념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가 깊이 느낀 것은 이렇게 효성스러운 자식들도 부모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그러나 여러분들은 부모를 위해서 육신으로 섬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영혼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자식이 패역하기 때문에 혹은 부모가 너무나 많이 신앙에서 떠난 삶을 살기 때문에 부모가 전하는 복음이 자식에게 먹혀들지 않고 자식이 가끔 권하는 신앙이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에게 진정으로 효도하는 길이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 드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육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모든 상처가 있었던 과거와 더불어 화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화해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이 이 부모공경의 통로를 통해서 무지한 내 부모들을 하나님 앞에 이끌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갖는 그러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신앙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와 마음의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 고통까지라도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에 실망을 느끼는 대신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신 것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고통스럽기 짝이 없던 그 과거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건너오는 징검다리였다 라고 하는 넓혀진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부모들의 모든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믿음을 가진 자식이 신앙이 없는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부모와 같은 심정을 갖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은 것으로 말하자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지만 우리는 상처를 능가하는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이전에 받은 아무리 커다란 상처 가지고도 그 상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랑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큰사랑을 주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입게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진정한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부모에게로부터 받은 상처를 숙명처럼 가슴에 안고 살아가다가 자식들에게 마음속의 피묻은 칼을 물려주는 그러한 무지몽매한 부모들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화) 남의 집에 세로 가난하게 살다가 인천에 있는 24평형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게 됨-서 울에서는 지겹게 멀지만 천국과 같음-이쪽 창문에서 저쪽 창문까지 한참 걸어감-황홀 했음-온수도 콸콸 나옴-아내가 말리는데도 뜨거운 물을 욕조에 한 가득 받아다가 목 욕을 하루에 두 번씩 함-월말에 가스비가 그 때 돈으로 13만원이 나옴-그 날 학교에 서 통지가 왔음-새벽에 몰래 박사시험을 보았었음-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함-가스비에 대한 고통이 기쁨의 소식으로 중화가 되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참된 기쁨이 상처보다 크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뜨게 되면 상처에 매여 사는 것이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모 때문만은 아니고 자신 속에 있는 죄악된 본성과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신에게 어떻게 했든지 간에 내가 그 부모를 진실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인가 존재 자체에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그의 가정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복될 수 없고 여러분은 영원히 이 십계명 그 중 다섯 번째 계명 앞에 설 때마다 정말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도 이 신앙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비록 내 부모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의 아픔을 능가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에도 있습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구원했네
주님을 만나고 보니까 이렇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이렇게 놀랍게 깨닫고 지금 감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사랑은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계속해 왔고 다만 나는 그 큰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죄악된 길에서 내 맘대로 살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때는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억울한 것입니다. 옛날에 나는 왜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았을까? 그 사랑을 내가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고 나의 인생의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는 도구가 되었을 텐데 왜 그 사랑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을까? 그래서 주님 없이 살아온 옛날이 서러워서 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의 필요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칸 막힌 박스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아무리 가득 채워져도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것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또 부모로부터 아무리 사랑을 많이 받아도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 부분은 부모의 사랑이 채워주지 못합니다. 가끔 자매들이 형제는 사랑이 안가는데 시어머니는 좋으시다고 합니다. 그 때 그럽니다. 시어머니와 결혼하느냐 형제와 결혼하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을 넘나듭니다. 내가 남편에게 아무리 사랑을 많이 받아도 부모로부터 받은 그 상처의 고통이 치유가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넘나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 남편으로부터 아내로부터 혹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도 이 사랑이 넘나듭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는 놀라운 변혁을 일으켜 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그것을 넘나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많이 맛보았으면서도 부모 때문에 혹은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자기가 그 상처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충만하게 못 느꼈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상처가 더 크게 다가오든지 둘 중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의 도움 없이는 근본적으로 고쳐진 가정의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부모 자식 시어머니 시아버지 조카들 손잡고 교회 나오면서 원수같이 사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까? 너무나 많습니다. 뭘 보여 줍니까? 단지 교회 다니면서 가끔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 스쳐 지나가고 자기 미화하는 수단으로 신앙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병에 걸려 난리가 나서 속으로는 다 썩어 들어가는데 분바르고 핀 꽂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정말 근본적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부모가 나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주었지만 이것이 운명이 아니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가 준 상처 때문에 아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셨던 그 놀라운 은혜, 아버지로부터 받아보지 못하고 어머니로부터 못 받아 받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한번도 안아주지 않고 어머니는 나를 살붙게 해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포근하게 안아주시고 살붙게 해주시는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맛보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충만하고 그 사랑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린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의 사랑만 내게 있으면 하나님 난 살 수 있겠습니다. 그런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상처 따위는 하찮게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이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역사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끊임없이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삶 속에서 현재적으로 느끼고 신앙생활하며 살아갈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더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우리가 받으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머니가 죽으신 곳에 나도 죽어서 장사될 것이며... 죽는 일 이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룻으로 하여금 이렇게 강인하고 어떻게 보면 룻이 어머니 나오미보다 상처를 얼마나 더 많이 받은 사람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네 땅에 망명 온 이방인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에서 대접받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데도 이방인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아마 모압에서는 이 여자의 결혼이 흉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돈이 많은 집에 시집간 것이 아니라 망해서 파산해서 먹을 것이라도 찾으려고 온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지만 곧 죽고 홀로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이야말로 쓸쓸하고 돌아갈 곳 없는 처지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여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그러한 상처의 흔적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어머니를 향한 공경하는 마음과 그 어머니를 위해서 살고싶다라고 하는 강렬한 효성심 이외에는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의 기초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기업으로 물려받고 싶다라고 하는 갸륵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먼저 부모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든지 나는 나 편리한 대로 살 것이고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할 것이라고 하는 고집을 쓰면서 살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살아서 이 계명에 있어서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전심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 때문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전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나면 얼마나 많은 곳에서 나 같은 쓸모 없는 죄인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는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섬겨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없음이라고 하는 틀 속에서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다가 예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큰사랑을 알고 나니까 그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하고 미워하며 피묻은 칼을 휘두르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관계 속에 있어야 될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면 내가 가서 저들을 도울꼬. 어찌하면 나의 존재가 저렇게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고통이 있는 곳에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러한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소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망가진 가정 뿐 아니라 이렇게 망가진 세상을 사랑 없어서 모두 파괴된 세상을 고치기 위해 남들에게 흔히 보이시지 않는 크고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거저 주는 것이지만 계획은 반드시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남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남다른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화해하고 그런 부모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끌어안으면서 자기를 온전히 버리면서 오히려 영원한 나라를 향한 소망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마지막에 우리들이 하나 보는 것은 이렇게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 룻이 보여 주었던 비범한 결단입니다. 이 비범한 결단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될 것이며 그리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라 어머니 죽는 곳에 나도 죽어 장사될 것이며... 그러니까 죽음을 담보로 한 신앙적인 결단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정말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비상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족 간 파괴된 관계, 일그러진 상처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 생겨난 것입니다. 묘목을 금방 심었을 때 힘있는 손으로 뽑았을 때는 뿌리 채 뽑힙니다. 그러나 여러 해 지나서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깊이 뿌리 박히게 되면 무엇으로도 그 나무를 뽑을 수 없습니다. 그 나무는 모진 비바람이 불거나 포크레인을 들이대면 부러지거나 뿌리가 잘라질지언정 땅에서 순순히 빠져 나오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상처, 망가진 가족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말 생명을 건 거룩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신앙이 없이 살아온 가족들이 서로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가정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인데 문제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 특히 부모와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녀들이 그저 부모와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마음 좀 바꿔 주십시오. 우리 애들 마음 좀 바꿔 주십시오 라고 기도는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죽음을 건 거룩한 결단으로 우리의 가정이 고쳐져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편의, 시간 그리고 자신의 수고 노력 이런 것들을 모두 자기를 위해 챙겨두고 이 거룩한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알고 그 일을 위해 누군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가진 가정은 망가진 채로 살아가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비록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지만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건지실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과 견디기 어려운 고난에 싸여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적어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신 부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주님의 계명을 좇아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계명에 순종해야겠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상처 난 부모와의 관계를 고치겠다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바치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고치고 치료하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신이 마련해 놓으신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서 모두 하나님을 함께 느끼며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행복을 느끼며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기대며 축복하는 그래서 그 가정이 그들 자신의 삶에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안식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계시는데 어찌 우리들이 믿음이 없으므로 우리에게 있는 그 상처 하나를 빌미로 파괴되어지고 조각난 가족관계를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 원하는 것은 빨리 시집가고 장가가서 딴 살림 차리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영원히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며 살라고 하는 이 거룩한 계명으로부터 도피하겠다 라고 하는 단순한 결심 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습니까? 가치가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고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우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살피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드렸고 얼마나 많은 날들을 주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셨습니다. 거기 계셨다기보다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 어두운 죄악의 길에 들어설 때에도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추적해서 결국 우리를 찾아내서 우리를 그 사랑 앞에 무릎꿇게 만든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알지 못할 때까지는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그래서 상처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부모님보다 더 큰 하나님을 만나고 부모님이 깨닫지 못했던 이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 상처를 준 여러분들의 부모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들이 부모보다 더 많이 더 먼저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여러분들이 영적인 부모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준 여러분들의 부모를 끌어안는 삶으로 여러분들은 나아가야 합니다. 상처 난 부모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거룩한 소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룻이 이렇게 나오미를 향해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를 진정으로 고치고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기까지 내가 정말 부모님이 죽으시는 곳에 내가 장사될 것이요 죽음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나를 부모로부터 갈라놓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을 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다섯 번째 계명을 향한 몸부림이 하나님 앞에서 치는 몸부림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방면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거룩한 성도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상처 난 가정들을 치료하시고 영원히 자식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미움과 원망의 칼날을 받으면서 쓸쓸히 사라져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등져야할 부모들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마음에 맺힌 모든 것을 풀어서 복음의 빛 가운데로 데려오고 그리스도 예수의 찬란한 은혜 가운데로 데려와서 결국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히 함께 즐거워하며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만드시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사랑과 이 큰 소명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이 부르심이 너무나 크고 이러한 일들을 위한 희생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생각할 적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생명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셨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욕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모욕을 원수로 갚지 않으시고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셨습니다. 주님이 평소에 가르치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으로 갚고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축복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죄가 많고 허물로 가득 찬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구속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부모가 상처와 미움으로 포박되어 있을 때 여러분들이 자녀라면 어찌 복음의 칼 하나님의 사랑의 칼 그리스도의 은혜의 칼을 들고 가서 그 포박 당한 것을 풀어 여러분들의 부모로 하여금 자유함을 얻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가정의 달 어버이주일을 한 주 지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제까지 우리가 망가진 부모와의 관계를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던 이 삶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패역하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얼마나 그릇된 반응인지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가정을 고칠 수 있는 치료의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신 것을 굳게 믿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이제 우울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어버이에게 있어서나 우리에게 있어서 98년 어버이주일이 마지막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 죽음이 우리의 가족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위로하고 용서하고 존경하며 마침내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부모와 만날 소망을 가진 채 헤어지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4. 남편에게 복종하라
전에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3:5-6)
저는 지난 3주에 걸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므로 여러분들의 가정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부부의 문제를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2주전 오후 예배 시간에 저는 아내를 사랑하고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는 남편의 덕목이 신앙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못 들으신 분은 오늘 오후에 가실 때에 한 개씩 가져다가 들어보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주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를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본성은 여자의 이 면에 있어서 여자에게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무엇인가 가꾸고 애를 씁니다. 아이를 낳아서 딸아이와 아들 녀석을 길러보면 정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딸아이는 어려서부터 핀, 리본, 그 다음에 목걸이, 빽, 이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남자아이들은 대개 총, 대포, 장난감, 로봇, 탱크 이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자기를 가꾸어서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여성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애를 써서 가꾸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조금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진정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어디에다 두는고 하니 내면의 질서에 다 둡니다. 그 사람 내면의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고 또 그 사람의 내면의 질서가 어떤 가치를 향해서 이렇게 편성되어 있는지를 따라서 그 여성이 아름다운 여성이 될 수도 있고 추한 여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을 떠나서라도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을 볼 때 화장을 했지만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경박스러움까지 감출 수는 없습니다. 내면의 지성과 인격을 소유한 여성은 물론 그러한 여성이 세수도 안하고 머리를 풀어서 산발을 하면 눈에 잘 안 띱니다. 그렇지만 그 자체가 아름다움입니다. 또 화장품을 영어로 코스메틱이라고 합니다. 그 화장품이라는 단어가 코스모스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을 아십니까? 코스모스는 희랍어인데 “우주적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장품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질서가 없는 얼굴에 바르면 새로운 질서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참 그런 면에서 화장품 회사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바르고 열심히 하고 도저히 바르는 것 가지고는 자신의 얼굴의 질서를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 성형 외과를 찾아가서 잘라내고 뜯고 부치고 찢어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기웁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여성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단장하는 것에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이 단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사랑을 깨닫고 영적으로 놀랍게 각성할 때 자기의 단장품을 모두 버리는 것으로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고백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성경은 분명히 이 단장을 죄악시한다기 보다는 큰 강조점을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제가 우리 교회 다니는 우리 자매님들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도 하지 말고 고무줄 낀 바지 입고 슬리퍼 신고 교회 나오자는 뜻은 아닙니다.
예쁘고 단정하게 단장을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는 더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화장발 하나 가지고 폼 잡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화장발 뿐만 아니라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도움을 받아서 내면의 질서가 잡히고 외면의 질서도 상당히 회복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정말 아름다움이 더한 그러한 여성들이 되기를 저는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도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여성, 특히 결혼한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운 단장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성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면 그 인생의 최고 아름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는 기쁨과 즐거움을 모르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반쪽 짜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참사랑을 알고 그 안에서 자신이 날마다 아름답게 새롭게 빚어져 가는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기뻐하고 감격할 수 있는 신앙의 세계를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은 특별히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가져야 될 대치할 수 없는 가장 뛰어난 덕목을 복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간의 사상과 하나님의 복음이 서로 배치될 때는 우리는 무엇을 따라서 믿고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찬송가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인간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세상의 풍조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기준을 둔 삶을 살아야합니다. 얼마 안되는 우리의 짧은 역사이지만 한번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역사가 변해왔습니까?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또 며느리들이 시집살이를 와서 시부모에게 짓눌려서 가슴이 주저리 주저리 한이 맺히는 그러한 고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전세가 역전되어서 부모들이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자식의 눈치를 보는 하극상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대가 한참 지나고 나면 또 신시집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신시집 시대가 와서 다시 또 시집살이하고 마음의 큰 원망과 한을 품는 학대받는 며느리들이 생겨나는 시대가 다시올 지 모릅니다. 이렇게 인간의 풍조는 늘 바뀌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물결을 쫓아서 이리 저리 요동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칙이 되는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경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깨닫고 그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살기만 하면 우리는 염려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세상의 풍조와 성경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우리의 신앙의 태도가 매우 커다란 충돌을 일으켜서 믿음을 지키면서 신앙의 원칙을 지키며 산다는 사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혹은 이방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가 이 세상의 풍조보다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변함이 없는 원리가 무엇인고 하니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질서이고 가정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사라가 자기의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 칭한 것같이 너희도 선을 행하고 어떤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므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의 딸은 사라의 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인 것처럼 이제 비유를 하자면 그 사라의 모든 믿는 여성이 비유하자면 사라의 딸이 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과 같은 말을 문학적으로 이렇게 표현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여성을 하나의 노예와 같이 취급하고 물질과 같이 취급하던 옛 사회의 유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성경 속에서 이제 여성을 자기의 재물이나 혹은 자기에게 속한 어떤 속물과 같이 취급하는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 인간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원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남성이 많은 부인을 거느리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마땅히 지켜야 할 계명들을 이 세상에 통용되는 상식이나 유행하는 인간의 사상을 가지고 합리화시키려고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제 사라가 자기의 남편을 주라고 부른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사라만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 한나도 자기의 남편 엘가나를 이렇게 주라고 부른 기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그러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가정이 질서가 온전히 선다는 뜻입니다.
지난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만 목양실이 저쪽에 있었습니다. 환기통을 타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데 웬 참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습니다. 넓은 창공을 날아다닐 때에는 참새가 참 이렇게 자기 방향을 잘 잡고 날아다닙니다. 참새가 날라 다니다가 충돌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교통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좁은 공간에 오니까 어찌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막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책꽂이에 날개를 부딪치다가는 저 책꽂이 뒤편 구석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책꽂이를 전부다 못을 박아서 연결을 해놓았는데 할 수 없이 그것을 다 뜯었습니다. 책꽂이에 책이 다 쏟아지고 방 하나가 온통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전도사님을 시켜서 새를 잡아 창 밖으로 날려주었습니다. 그 새를 꺼내기 위해서 책꽂이를 뒤집으면서 책을 쏟으면서 하루 종일 난리를 친 것은 공중에 새가 날아다닐 때에는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웠는데 방안에 들어오니까 너무 너무 더러웠습니다. 그리고 쥐가 들어왔을 때의 그 기분하고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내버려두면 거기서 죽을 것 아니겠습니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더러워서 잡아서 바깥으로 내어주었습니다. 꼭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저기다가 저렇게 에덴 동산을 만들어서 어저께 다시 보수공사를 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동산이 되었습니다. 저렇게 만들어 놓으니까 다들 보는 사람마다 예쁘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저것을 확 뜯어다가 여기다가 늘어놓으면 더럽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성경책이 놓여야 할 자리이지 흙이나 풀이 놓여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남편은 서로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먼저 자기가 서야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그래도 그 가정이 고통을 덜 받고 그 질서 속에서 평화를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집을 마련하고 혼숫감을 마련하기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남성이 한 여성이 이렇게 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완성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아내가 남편을 주라고 부르는 것,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이제 이 사도가 믿는 가정을 염두해 두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안 믿는 집안에서도 원리는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든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특별히 안 믿는 가정보다는 믿는 가정을 염두해 두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남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그러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한 가정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에 있어서 하나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그 아내들의 아픔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까? 교회 와서 봉사하고 열심히 주를 섬기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양심의 송사가 옵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잘 믿는데 너의 남편은 왜 교회도 나오지 않느냐 하는 이러한 아픔이 혼자 예수를 믿는 부인들에게는 누구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더욱 지금과 같이 개명한 세상에도 예수를 믿는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이혼을 강요당하고 구타를 당하고 박해를 받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구타를 당하고 박해를 받겠습니까? 때리면 자기도 때리고 부수면 같이 부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살고 이혼하는 법정에서도 당당히 서서 자기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남편은 믿지 않은 채 혼자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신앙의 몸부림은 곧 남들이 알 수 없는 가슴앓이와 다름없습니다.
더욱이 남편이 다른 종교를 믿겠다고 버티면서 그 아내를 박해하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줄 때에 그 아픔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까?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정말로 알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말하지 아니하지만 혼자 예수를 믿는 부인들의 경우에는 모두 이러한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남편이 어떤 신앙을 갖든지 내버려두고 혼자만 믿는 형식적인 신자만 아니라면 그는 언제나 눈물 없이는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 없을 것이고 주님의 은혜가 갈급하면 갈급 할수록 고통스럽고 주님의 은혜가 넘치면 이런 은혜를 자기의 남편이 깨닫지 못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예수 안 믿는 부인하고 살아보지도 않고 잘 아느냐하고 물으면 그것은 교회에서 늘 보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늘 보니까 뻔합니다.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때에는 80%는 그 남편으로부터 받는 고통과 핍박이 꼭 성경을 집어던지고 불 속에 집어넣는 포악한 사람도 많이 있고 아직도 교회를 한번 갔다오면 머리채를 끄집어 잡고 방바닥에 집어던지는 포악한 남편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눈물 나는 사연을 알고 있습니까? 조금 정도가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한때에 교회를 나오지만 도무지 남편이 신앙의 확신도 없고 도무지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된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아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변화되지 않는 그 아픔을 또 전에 말씀드린 아픔에 못지 않습니다. 자기를 생각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는 나와주는데 도무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놀라운 사랑, 그리고 나를 새 사람 만들어준 십자가의 그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기도할 때 느껴지는 하늘에서 부어지는 거룩한 은혜의 감격, 말씀을 쫓아 충성스럽게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 거룩한 위로, 이런 것들을 남편이 함께 느끼지 못하는 그 현실로 말미암아 당하는 이 아내들의 고통은 전에 말씀드린 불신자의 남편을 두고 고통을 받는 것만큼 그렇게 심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오히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보다 훨씬 커다란 고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주님을 찬송하고 함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의 세계는 다른 세계를 헤매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더욱이 열심히 믿으면서도 남편이 사상적으로 다른 이단에 빠진 가운데 아내들이 고통하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가겠다고 함께 나와서 한 사람은 이단으로 가고 한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아내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변화 받지 못한 남편을 두고 흘리는 그 아내의 눈물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남편이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이요, 구원도 받지 못했으며 형편없고 돌아다니면서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처지에 있지도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남편을 감싸면서 한편으로는 그 남편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그 영혼에 진정한 변화의 때가 이르기를 왜 이렇게 더디 해주시는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가슴 저미는 사연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을 둔 아내들의 행복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여러분 그 축복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해 본적이 있습니까? 젊었을 때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서 쌀을 지금도 머리에 이고 혹은 떡을 머리에 이고 마음에도 없이 시부모님과 같이 절간에 가서 우상에게 절을 해야하는 그런 며느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제 남편이 그 신앙을 인정해주고 여러분들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앙 생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런 남편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주님이 작정해 놓으신 부부의 도리와 가정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해야 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복종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 범사에 좋은 것과 그른 것을 헤아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 여인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장식품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의 가정의 질서를 보십시오. 믿음의 가정의 질서조차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나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의 질서를 하찮게 여기고 그 남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남편을 스스로 주장하고 뒤흔들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면류관으로 삼는 그러한 여성들이 아직까지도 교회 안에는 많습니다. 심방을 한번 가보거나 부부를 한번 만나보면 이 가정의 질서가 어떠한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고루한 유교적인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창조의 질서와 가정의 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이제는 그 남편이 여러분의 가정에 영적인 가장인 것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들이 똑바로 신앙 생활을 해야 됩니다.
주머니에 몰래 담배나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구석에서 담배나 피고 술 먹고 김 먹고 들어오고 술 먹고 김을 먹으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음주 운전이나 해 가지고 체포되고, 그러한 황당한 삶을 사니 아내들이 어떻게 복종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거기에 복종했다가는 가정이 어디로 가서 박히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장이 똑바로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가장이 똑바로 예수를 믿으면 가정을 똑바로 섭니다. 시간은 걸릴지 모르지만 섭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가정은 주님이 세우신 작은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하려고 그래도 목사라는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이 전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리 찢어지고 저리로 흩어지고 결국은 그럴 것이 아닙니까. 남아 있는 사람은 네가 목사이냐고 그러고 대판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신앙도 없고 제멋대로 인데 정말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을 가진 능력이 있는 목회자가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좀 걸리지만 잠시 지나고 나면 다 평정이 됩니다. 정신 못 차리던 사람, 혼내서 변화시키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교회가 다 평정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여러분들은 한 가정의 목사입니다. 목사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 팽개치고 돌아다니면서 술 먹고 놀이하고 바람피우고 자신의 삶을 자식들이 보면 어떡하나, 아내한테 걸리면 어떡하나, 이렇게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많은 삶을 살면서 무슨 존경을 받기를 원하느냐 이것입니다. 남편들이 먼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투명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구김이 없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장이 무엇인가 어둠이 있는 일을 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하나님을 함께 믿는 가정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아내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며 사는 그 가정은 이렇게 아내가 남편에게 주라 부른 것처럼 가정에 있어서 가장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앞에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꽁꽁 감추고 살아도 결국은 주위에 모두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자녀를 기르면 다 비밀이 세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내 귀에는 슬슬 들어옵니다. 저장해 놓고 있을 뿐이지 다 들어옵니다. 이런 일만은 목사님 모르시겠지 하면 그러한 것도 다 들어옵니다. 그렇게 가정은 열려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뭐 할 일이 없어서 여러분의 집에 도청 장치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흘러서 다 밖으로 나갑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아내가 함께 손잡고 교회에 나가면서 그냥 순간적으로 참지 못해서 성질을 부리고 가끔 큰 소리가 오고 가고 나중에는 육박전이 벌어지고 이튿날에는 시퍼렇게 해 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의 복음이 그 가정을 통해서 전파되겠습니까?
정말 도덕적으로 가정의 질서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엇으로 알겠으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떤 가정을 이루어 가느냐를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공식을 한번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잘 받습니다. 그래 참 남편에게 순종하고 잘해야지, 사실 핍박받지 않고 이렇게 교회에 다니게 해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잘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결심한 날, 바로 사단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남편이 꼬챙이를 가지고 마음 깊은 뜬 물독에 쿡 꽂고 한번 흔들어 보는 것입니다. 이제 밑에 있는 것 한번 올라와 봐라 하며 마구 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옛 성품이 막 살아나는 것입니다. 콱 성질을 부리면서 한 판하고 나면 남편도 보기 싫고 하나님도 만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며칠 지나고 한 두 주일 지내고 나면 또 말씀을 들으면서 찔리고 괴롭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등지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날 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주여! 잘못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똑같은 일들을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가고 남편과 아내는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도 도무지 영적으로 하나된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부부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부부와 다름이 없고 영적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면 영적이 동반자 의식이 생겨야 되는데 그런 의식은 전혀 생기질 않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 아내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낮아지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섬기며 순종하는 그러한 아내들이 되어서 그러한 신앙의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장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남편에게 정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 때문에 남편과 부딪치고 싸우는 그러한 가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하고 교인들하고 머리가 터지게 싸우는 교회 치고 영성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를 본적이 있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화목하고 질서를 지키는 관계가 될 때에 그 가정이 하나님 앞에 복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사도가 말하기를 그 복종하는 삶을 가리켜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어떤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므로 말합니다. 남편에게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 부분을 사도가 말할 때에 염두를 둔 사람들은 남편이 아직 신앙이 없는 가정의 부녀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남편은 예수를 믿지 않고 혼자 예수를 믿는 아내, 그리고 아내는 믿지 않지만 혼자 믿는 그러한 남자, 그러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염두해 두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서에서 믿지 않는 남편과 함께 살다가 남편이 헤어지기를 싫어하면 헤어지지 말고 계속 살아라 하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행실로서 하나님이 혹시 그를 구원해 주실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똑같이 나옵니다. 도를 믿지 않는 남편이 있다고 할지라도 선한 행실로 모본을 보이면 그가 구원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느냐, 나의 행실로 저절로 남편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내의 경건하고 정결한 행실이 남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어서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바뀌게끔 만들어 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그런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을 행한다 라고 하는 이 말은 그야말로 착한 행실을 남편에게 보여준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전도를 해본 사람들은 전도가 얼마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인지를 압니다. 여러분 전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해서 그 한 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나와서 예수 믿게 하기까지 인간적으로는 참 치사할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그에게 정말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때로는 김치도 담가주고 또 아이도 봐주고 때로는 청소도 같이 해주고, 마음에는 없지만 말동무도 같이 해주고 그러면서 이제는 그의 마음을 천천히 움직여서 교회에 나와서 그가 예수를 믿기까지 쏟는 정성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교회에 나온 사람이 영원히 교인이 되면 정말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한참 교회 생활하다가는 마음이 변해서 집어치우고 또 교회를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전도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전도한 사람들 가운데 마음에 내키지 않고 자기에게 많은 고통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을 전도할 때는 참 잘 참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남편에게 전도할 때는 도저히 참지를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말로는 매일 나와서 “하나님 저희 남편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 역사해 주시옵소서. 주 앞에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해놓고 자기가 와서 못나오게끔 바리게이트를 치고 담장을 쌓는 것입니다. 가서 한바탕 참고 참았다가 성질을 부리면서 막 쏟아놓고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 남편이 다시 한번 마음이 한번 더 굳어집니다. 그런 일들을 계속하면서 몇 십 년째 남편의 구원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지만 진전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삶이 그 기도와 하나가 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 단지 하나님 앞에 세게 기도한다고 해서 무엇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 없음입니다. 그 영혼에 대한 사랑, 어찌하던지 자기 같은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셔서 이제 이 가정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기에게 전도의 소망을 주셔서 이 가정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성질을 부리고 왈칵 뒤집어 나서 자기의 행실을 보면서 교회에 못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나가겠습니까? 내가 남편이어도 나가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만나는 것 만해도 감당할 수 없는데 돼 교회에서 또 만나 우리 교회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서는 자기가 남편이니까 괜찮은데 교회가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자기 부인은 집사이고 권사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가면 더 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왜 목 매이는 일을 스스로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집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데 왜 교회까지 가서 코를 꿰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먼저 그 남편에게 착한 행실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착한 삶을 사는 아내들의 남편이 모두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성경은 여러 곳에서 남편에게 이런 감화를 줄 때에 그 남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망성을 여러 차례로 열어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정말 그 남편이 여러분 자신을 귀하게 여기면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들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남편이 보기에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복음을 향한 소망에 대해서 아무런 아는 바가 없는 그러한 남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의 남편을 한 사람의 남편이기 이전에 자기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할 그런 한 마리의 목자 잃은 양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에게 다가가는 그런 사랑의 마음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가 같은 세계 속에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도 마음이 하나 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남편과 함께 살면서 남편을 버려 두고 혼자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른 사랑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잘 믿는 경건한 아내 옆에는 언제나 소외당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을 염두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눈에 보이는 다른 남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하나님이실 뿐이지 역시 그 사랑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의 사랑에 깊이 빠지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다가 보면 그러한 사랑의 세계를 갖지 못한 아내와 남편 사이에는 점점 골 깊은 나뉘어진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교회에 와서 또 오늘 한 주를 살면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감격하고 내 마음을 크게 감동시킨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남편하고 그 사랑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딴 세상에 빠져있습니다. 술 먹고 오늘도 놀러가고 고스톱을 치는데 거기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다. 각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노력을 할 리도 없지만은 노력을 한다고 해도 육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세계를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진정으로 부부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함께 주님을 믿고 변화되어서 서로 신앙적인 동지가 되어서 천로역정과도 같은 인생 길에서 함께 걸어가는 영적인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바로 인생을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진정한 의미와 맛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하루를 말할 때 아내가 기뻐하고 아내가 하루 종일 가정을 지키며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게된 하나님의 진리를 남편에게 이야기하며 나누며 서로가 영혼에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때 그것이 진정한 가정의 모습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고 나면 더 많이 남편에게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안에서 복종하며 내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고 당신을 만나게 해주셔서 우리를 부부 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 가정을 향한 소망이 아직까지 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 불신하는 남편에게 느껴줄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내가 교회 생활을 하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있는 상당히 많은 원인 제공을 성숙하지 못한 아내들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그 인간은 깨져야 됩니다. 말로해서는 듣지 않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박살을 내셔야지 정신을 차립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너나 깨져라’고 합니다. 남편에게 자기가 했으면 얼마나 했길래 변화되지 않는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한이 맺혔습니다. 남편에 대해서 진정으로 희생하고 그 남편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정말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면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사랑이 더 깊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니까 그 인간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그러한 우매한 삶을 살아가서 주님이 주신 가정이 온전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을 우리 스스로 가로막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사는 무지한 여성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지 마십시오. 좀 통 크고 넓은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를 아는 참 아름다운 신앙, 이러한 신앙을 가진 가정으로 돌아오면 내가 무엇이 아까우랴 하면서 양보할 수 없는 복음에 있어서 담대하게 서서 살아가는 대신 많은 부분들을 서로 서로 죽어지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죽어야됩니다. 그래서 내가 대놓고 그랬습니다. 그 부인한테 말은 좀 부드럽게 했지만 당신 남편은 절대 박살나지 않습니다. 어떤 제품인데 박살이 납니까. 당신이 깨뜨려질 때 그 때 깨뜨려질 것입니다. 부드럽게는 했지만 결론은 그것입니다.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만큼 변합니다. 목회를 해보면 이게 진리입니다. 목사가 변하는 것만큼 교회가 변합니다. 여러분이 변하는 것만큼 남편이 변하고 여러분이 변하는 것만큼 가정이 변화되어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방인의 종교를 강요받거나 박해받지 않고 남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러한 사명을 주셨으니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하고 결혼을 하는 자매들은 그럽니다. “목사님 저는 그 가정에 선교사로 시집을 갑니다.” 선교사가 선교사하고 결혼을 해야지 왜 불신자하고 결혼을 하느냐 그런 각오를 가지고 결혼을 했으면 순교하기까지 그 선교를 감당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모든 젊은 시절에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은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를 힘겹게 생각하면서 자기가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해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존경받지 못하면서 이 모든 고통이 마치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온 것처럼 그렇게 자기가 마치 십자가의 희생양인 것처럼 폼잡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눈꼴이 사나운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모든 나쁜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왔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에게 나는 오늘 권면합니다. 여러분, 시집을 꼭 가야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믿지 않는 남편에게 시집을 가서 장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는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까? 그럴 정도의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남성을 구하고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남성을 사랑하면 변화 받기까지 하나님 앞에 기다리는 인내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남편과 살고 있는 이 아내들은 그야말로 자신의 처지를 고통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그 자리에 세워주셔서 이제는 자기가 하기에 따라서 이 가족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되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소망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만약에 그 가정을 하나님이 아예 포기하셨으면 여러분도 신앙을 버리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들이 여러분들을 여전히 신앙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때로는 온전하지 못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갈등하고 범죄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갈등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나면 여러분들 속에는 분명히 이렇게 남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고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이 느껴진다는 사실 자체가 여러분들의 남편을 포기하지 않으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여러분 그 믿지 않는 남편의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에게 정말 선을 행하고 그래서 예수 믿고 변화된 그런 가정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아내들이 되어야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을 다하고 가정을 팽개친 그 아내들은 그 교회에서 인정해 줄 수 없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냥 교회의 크고 작은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같아도 가정을 팽개치고 버려 둔 모습을 하며 살아가는 그 아내는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일에 얽매여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이 가정에 있어서 정말 가족들에게 특별히 믿지 않는 남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아내가 되어야합니다. 이전보다 더 너그럽고 이전보다 더 사랑이 깊으며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그밖에 이 세상에 소중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싶은 그 소망을 보여줄 수 있는 경건한 부녀들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혹시 믿지 않는 여러분의 남편들이 손해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감동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유익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할 수만 있으면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기회가 있는 대로 착한 행실을 보여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모본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어서 성경에 보면 두려운 일에 놀라지 아니하고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남편으로부터 어떤 충격적인 일을 당하는 그러한 박해를 염두해 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 아내의 마음이 커다란 놀라운 일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남편이 부당하게 핍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어려운 일들을 벌일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일체의 단정함으로 자기를 지키는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먼저 믿은 아내들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까다롭고 말이 많고 비유 맞추기 힘든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인내할 수 있는 신앙의 인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관계이고 물으려고 해도 물릴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 안에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사는 것 밖에는 참 소망이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먼저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그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들에게 그런 남편을 아직 남겨두신 것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이제 그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생명의 역사가 어찌 고난 없이 일어나겠으며 영혼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는 일이 어찌 희생이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목회를 해보면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행실로 자신의 남편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남편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말은 비용이 들지 않지만 행실은 희생이 따르고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 소망 때문에 여러분 죽어지내는 적이 있습니까? 내가 옳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에게 깨달아지고 예수님의 참사랑을 알게 되기 위해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러면서 정말 자기의 성질을 죽이고 자기의 유익을 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았던 거룩한 부녀들은 이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 위해서 믿지 않는 이 가정에서 나를 먼저 예수 믿게 만드시고 또 변화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큰사랑을 알게 하셔서 이제까지 나를 데려오셨으니 이제 내가 남편을 위해서 이러한 희생과 고난쯤은 감당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살 때에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박해가 상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렇게 박해할 수밖에 없는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깨닫고 그러한 사랑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마음,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온전히 자기가 죽을 때 그런 사람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들을 펼쳐나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은 아내들은 하나님 앞에 각오를 새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가 도대체 언제부터입니까? 10년 혹은 20년이 지났는데도 지리멸렬하게 복음화의 길이 막히고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한번 그 영혼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서 결단을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바뀌어서 그 일이 가능해진다면 자신이 바뀌기를 원해야할 것이고 정말 바꾸어 놓으셔야지만 이 일이 가능하다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그 어떤 신비하고 놀라운 방법과 기회들을 통해서 그 남편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도록 기도해야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를 가정에 일으키는 도구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인간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은 안 그러실지 모르지만 이 영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은 고난의 잔이 가득 차야지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방법이나 계획을 갔고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각자 각자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고 흘려야할 눈물과 피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짜서 바쳐서 그 고난의 잔이 가득 찰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의 변화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 순간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실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가 지체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다급한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가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신의 삶도 모두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만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그 가정의 복음화를 앞당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이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부녀들도 하나님께 소망을 둔 부녀들이 자기의 남편에게 복종하고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편 자체를 보고 인내하고 참으려고 하니까 성질이 솟아나고 말하자면 뻗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예수의 복음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할 때에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의 경건했던 부녀들, 거룩한 아내들이 그렇게 모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남편을 주라 부르고 신약의 경건한 하나님의 거룩한 그 아내들이 자기의 남편을 그렇게 선을 행하고 봉사하며 그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 복음에 매인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자신들을 위해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바라보아야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매일 바라볼 때마다 깨닫는 것은 “아! 하나님 우리 남편을 돌 중의 돌입니다. 하나님 박살 내지 않으면 깨뜨려질 기력이 없습니다.” 그것 밖에 확인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다시피 했습니다. 여보 나하고 같이 교회 좀 가달라고, 교회를 가서 일주일 동안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이번에 가서 우리 남편 변화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옆에 다 앉혀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남편이 잠시라도 자기 이야기하는 것은 좋아해도 남의 이야기하는 것은 못 듣는데 조용히 앉아서 목사님 말씀을 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만 쳐다보면서 있었습니다. “하나님 변화시켜주시옵소서” 한참 그러한 마음으로 타는데 옆에서 코고는 소리가 나더랍니다. 그때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아내의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남편을 바라볼 때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참 한심합니다.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의 쾌락과 즐거움을 매몰되어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남편, 죄와 세상 사랑에 때가 찌들어서 어디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햇살처럼 마음에 깃들 만한 여유가 없는 그 남편을 이렇게 보면서 무슨 소망을 갖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우리의 가정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인내하고 사랑하고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아내가 이렇게 거룩한 행실로 모본을 보이면 그를 위해 기도하면 남편을 구원하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하나님 오늘도 그 약속을 제가 의지하면서 고난을 받습니다. 선교사와 목회자들은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을 들고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20세기 이 개명한 시대에 예수 때문에 순교한 사람이 몇 명쯤 되는 것 같습니까? 삼천 만 명이 온 세계에서 예수 때문에 피 뿌리고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고 애를 쓴다고 해도 설마 여러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어떠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우리의 가정이 믿음에선 가정이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결단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정의 복음화가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 옛날의 여지까지도 예수 믿지 않고 있는데 뭐한 것이 있는가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옛날에 부녀자들이 남편이 먼길 떠났을 때에 매일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그 정성만큼 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빌어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추운 날에도 정한수를 떠놓고 마당에 앉아서 빌던 그 여인들의 정성이라도 한번 가져본 적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말로만 느끼지만 그것은 남편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여러분 여전히 남편 없이 다니는 여러분들의 쓸쓸한 교회 생활 속에서 오는 자존심 상하는 그 이유 때문이 아닙니까?
언제까지 지체하고 언제까지 홀로 사는 신앙 생활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죄송스러운 마음을 알고 내가 아직까지도 주님 앞에 바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그릇된 길을 걸어갈 때에도 부모가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되거늘 하물며 한 몸으로 주신 남편이 정신적으로 자기와 나뉜 불신앙의 길에 서 있을 때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러한 삶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삶인지를 하나님께서는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거룩한 부녀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걸어갔던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까지도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서 우리가 더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신 그 십자기의 고난을 기억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많이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이 거룩한 복음이 남편과 온 가족들에게 전해지기를 소망해야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바라볼 때는 참을 수 없고 남편을 바라볼 때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지만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오래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당신은 버림받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해 내시기 위해서 당신을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고 못 박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예수의 사랑을 미리 알려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수많은 사람들 중 특별히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교회에 나오는 아내인 나에게 남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주셔서 그 은혜 깊은 사랑을 맛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직까지도 우리의 가족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데 유독 딸인 나를 아들인 나를 그리고 며느리인 나를 먼저 예수 믿게 만드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큰사랑, 내가 받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하심이라,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전에 모르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이전에는 내가 깨닫지 못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어떠한 희생도 다 감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쫓아가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게 하시려고 오늘 홀로 그렇게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 즐거워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희생하고 고난을 받으며 이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아직까지도 주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가족들과 특별히 우리의 남편,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가장의 지위를 팽개치고 세상을 향해 빠져있는 여러분들의 남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가족 없이는 여러분도 없고, 여러분의 남편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서는 그러한 신앙의 회복 없이는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면밀히 돌아보고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하며 한편으로는 내 남편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물지 않았는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일들을 감당하기 어렵고 분에 넘치는 것 같고 고난이 쌓이는 것 같을 때 여러분들은 그래도 피할 곳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내가 주님께로부터 이 가정을 건져내고 믿지 않는 남편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았으나 하나님 이 일이 내게는 너무 벅차고 고난이 내게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때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새 힘을 주시고 슬픔이 변하여 새로운 소망을 갖게 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 되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먼저 주님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도구가 되어서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회복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을 위하여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