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하여
(1999-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가족을 돌아 보라(딤전5:8) 1999.10.3 주일오후 1
2. 가족들의 영혼을 위한 고통(롬9:1下-3) 1999.10.6 수요예배 10
3. 잃은 양이여 돌아 오라(눅15:3-7) 1999.10.10 주일오전 22
4. 전도하지 않는 죄(겔3:18) 2000.5.24 수요예배 33
5.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라(딤전5:8) 2000.5.21 주일오전 46
6.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전도하라(롬9:1-3) 2000.5.21 주일오후 55
7. 기다리시는 하나님(눅15:21-24) 2000.5.28 주일오전 63
8. 구원받지 못한 형제들을 위하여(시133:1) 2000.6.4 주일오후 75
1. 가족을 돌아 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저는 오래도록 이 말씀이 마음에 고통이 된 적이 많았습니다. 추석이 지났고 한참 있으면 명절이 또 다가옵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면서 청년들을 보고 장년들을 보면은 명절이 되면 우울해지는 지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절이 돌아오면 끔찍합니다. 가족들을 만나고 흩어졌던 친척들을 만나는 그 순간이 가장 괴로운 순간입니다. 교회 와서는 정말 열심히 하고 펄펄 나는 생활을 하는데 명절이 되어서 가면 예수 믿는 사람이 나하나 밖에 없어 너무너무 초라해지고 왜소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자리가 점점 싫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저와 여러분 속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모두 조금씩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교회에 펄펄 날고 정말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데 만약에 온 가족이 주님을 나를 통해서 잘 믿는다고 한다면, 집에 가서도 내가 그렇게 펄펄 날고 가족들이 내게 와서 “애야,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지 잘 할 수 있느냐? 너 오기만 기다렸다.” 이렇게 물어본다면 훌륭하게 가르쳐 줄 수가 있는데 가족들이 주님을 믿지를 않으니 무슨 수가 필요 있겠습니까?
오늘 디모데전서 5장의 맥락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부의 문제를 다루다가 가족들의 문제가 불쑥 튀어나온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가 과부를 돌봐라 그런데 자식들이 있으면 무조건 도와주지 말고 자식들에게 먼저 자기 어머니를 돌보도록 그렇게 가르쳐라. 그래도 돌볼 사람이 없으면 교회가 과부의 사정을 돌아보고 힘껏 과부와 자식들을 돌아보는 것이 옳다.’ 그 말을 하다가 사도 바울이 문득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부모를 제대로 돌보지를 않고 의무를 기피하는 자식들이 불현듯 생각이 난 것 같습니다. 악한 세상에 그때라고 그런 자식들이 없었겠습니까? ‘믿음이 있다 하고 너희들이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말한 거니까 일차적인 문맥은 경제적으로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돌아본다라는 의미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전에는 건강이 무엇이냐? 그럴 때 건강은 그저 몸이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어떤 사람이 정의를 내리기를 ‘건강이란 몸이 안 아플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을 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어야만 그 사람을 비로소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인간이 철이 들면서 참된 건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단순히 육적인 필요에서만 보지 않는 안목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족이라고 할 때 특히 가족은 두 종류의 가족을 함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 가족이고 하나는 육신의 가족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너희가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되 특별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더욱 그리할지니라.’ 이렇게 강조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다는 뜻이고 어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봉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착하게 보였으면 예수 믿는 사람을 봉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착하게 너그럽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을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착한 사람, 영악하고 모질고 악독한 사람 말고 착한 사람, 그러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더 그렇게 어질고 착하게 살아가야 할 부딪히는 대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족들입니다. 첫째는 믿음의 가족이고 둘째는 육신의 가족입니다. 믿음의 가족들에게 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영악하게 살아가지 말고 믿음의 가족들에게 착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마음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충성된 마음이고 또 한편으로 사람을 향하여 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작은 상처를 보고 많이 아파할 수 있는 사람, 고통하는 타인의 아픔이 언제든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신의 마음에 전해올 수 있는 마음의 감각을 가진 사람, 그래서 무엇인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때 거기에서 자기가 그 일에 연루될까 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어려운 일에 자기가 관계되어서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은 고통을 인해서 많이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그것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 거기에서 보람있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언젠가 오래 전에 책이 한 권 나왔는데, 한참 부자들이 잘살고 가난한 사람들이 어렵고 노사분규가 일어날 때 책 한 권이 나왔는데 산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쓰신 책입니다. 책 제목이 정확하지 않는데 이름이 ‘혼자만 잘 살면 그게 무슨 재미여!’라는 제목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마음이 착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이 기쁜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시기하기는커녕 기쁜 마음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지체가 감사헌금을 했는데 ‘하나님, 제 친구 취직을 시켜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착한 마음입니다. 믿음의 식구들을 향해서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원 때 만난 교수님이 한 분 계시는데 영국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신학교에서 돈 없이 힘들게 고생을 하며 책을 사서 볼 돈도 없고, 더군다나 영국은 책값도 엄청나게 비쌉니다. 그런데 일과 끝나고 강의 노트를 챙겨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열어보면 책갈피 속에 봉투가 하나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100파운드, 200파운드씩 봉투에 들어있었는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도 누가 거기에 갔다 놨는지 모른 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살아오면서 열렬한 신자들을 많이 만났어도 그런 것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배웠다면서 여유가 조금 있을 때 어려운 학우들에게 무명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착한 마음입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정말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워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착하지 않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전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되겠습니까? 나폴레옹이 비전을 이루려다가 수천 만 명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까? 히틀러에게 비전이 없었겠습니까? 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착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중요한 것은 착한 마음입니다.
우리 전도사님들하고 모였을 때에 저가 고백하기를 왜 이렇게 더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지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러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깊어지고 영성이 깊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착한 인격과 깊이 연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래 전에 유치원 다니는 조그만 아이가 나무 가지가 부러졌는데 집에 가서 붕대를 가지고 와서 묶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 지금 뭐하고 있니?” 그러니까 “아저씨, 이 나무가 ‘아야아야’ 해!” 그것이 착한 마음입니다. 그런 착한 일을 믿음의 식구들에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지체들 궁핍한 지체들 돈 있고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어도 정말 마음 둘 곳이 없는 지체들, 무엇인가 따듯한 위로와 격려는 필요로 하는 지체들을 섬길 때 우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부드러워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들을 보면서 또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도대체 인생에 대해서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사람들은 원자력 병원에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에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이고, 우리가 모자라다 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각각 자기의 돌아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이것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기도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보여주는 우리 주님의 희망을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열린교회의 교인들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교만하지 마십시오. 옛말에 창출어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감을 들일 때에 쪽빛 남색 물을 들일 때에 쪽이라는 풀에서 물감을 빼내는데, 풀빛은 녹색인데 거기에서 나오는 물감은 짙은 청색입니다. 설교자는 후지지만 그러나 설교를 듣고 자란 여러분들은 저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에 대해서 저는 깊은 자부심을 느끼고 수만 명 앞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여러분 앞에 설교하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조금 부족한 것이 있다면 착한 삶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돌아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보다 연약하고 고통스러운 지체들, 몸 둘 곳 없어서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함께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출입문에서 교회에서 혼자 서성거리는 쓸쓸함을 여러분들은 이해합니까? 그들이 우리 주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착한 마음에서 주님께 섬기는 섬김이 우러나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가족들에게 해야될 것입니다.
저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들도 많은 친구와 함께 어울려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어쩔줄 모르다가 책을 읽거나 해서 열린교회를 찾았는데, 그때에 주님만 바라보고 나왔지만 막상 다른 사람도 너무 주님만을 바라보는 나머지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요. 식당에 내려가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여러분도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믿음 하나로만 살면 되지!’ 하지만 인간은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믿음의 가족으로 선한 행실 속에서 함께 기대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불러모으신 것입니다. 콩나물 시루를 보십시오. 콩을 넣고 물을 뿌리면 콩나물이 자라는 데 차려 자세로 콩나물이 시루에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아, 콩나물은 원래 서서 자라는구나!’ 콩을 하나 놓고 물을 주면 서서 자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쓰러질 것 같지만 서 있는 사람들의 돌봄과 그들을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서가고, 그렇게 서가는 우리들이 언젠가는 쓰러지는 사람을 위한 도움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사람을 세워주는 것은 아니자만 우리의 섬김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세워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착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름을 모르고 성을 몰라도 우리 교회에 처음 등록하는 것을 보면은 그 사람의 천사가 되어 주는 것도 보람있을 일일 것입니다. 형제에게 다가가서 자신도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나누어줄 때 얼마나 좋아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기쁜 일이고 좋은 일입니까? 그러한 착한 삶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도 아까워하지 말고 가난한 지체들을 위해서 도와주고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많은 재물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누리면서 살지 않아도 미래에 한꺼번에 누릴 생각으로 재물을 쌓아두는 것에 대해서 정말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 그런 것들을 한번에 하나님이 털어 버리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 할 수 있을 때 지체들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이렇게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가족은 우리 육신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육신의 가족에게 해주기가 영적인 가족들에게 잘 해주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육신의 가족들에게 해 주는 것이 더 쉬웠는데 은혜를 받고 나면 육신의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육신의 가족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오늘 나와 있는 것처럼, 가족들 중에 특별히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공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능력이 없으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견딜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주면서 교회에 다니고 직분을 맡아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오늘 성경에 의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들, 동기간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세상 말로 아양을 떱니까? 자기 가족들에게 그렇게 하냐하는 얘기입니다. 동기간을 돌아보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이면 동기간들과 어울려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을 하고 가족들을 돌아보고, 특별히 가까운 친척들을 돌아보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착한 삶입니다.
그러한 의무를 다 하지 않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듣겠습니까?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가서 ‘하나님 저가 한 마디 할 때 내 입에서 불이 나가서 저 인간을 거꾸러뜨리게 도와 주시옵소서, 저 마음의 강퍅한 철판을 뚫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도 응답이 안 올 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가까운 가족들을 오늘 안수하다 불 받아서 예수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깊은 감화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사실이 너무나 웅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로 표현하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웅장한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실로만이 아니라 명백하게 말로서 예수의 복음을 말해야 됩니다. 그것이 이웃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간증이, 자기 집안에 여러 세대가 모여서 세 들어 사는데, 두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하고 순복음교회에 다니는 여 집사님이셨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같이 사는 사람들하고 항상 싸우고, 돈을 꿔서 못 갚아 욕을 먹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렇게 믿어서 복음이 전해지겠는가!’ 그래서 자신은 돈을 빌려도 잘 갚고 전기요금을 더 많이 내주면서 자신은 항상 행실로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웃고 친절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네 교회에 가지 않고 싸우던 그 사람의 교회에 가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을 얻어먹으면서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야! 당신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인생 아무 것도 아니야!” 매일 그랬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또 반대인 것 같지만 또 맥을 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인데 당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증언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오히려 당신이 입을 벌려서 나에게 전하는 예수의 복음은 잘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런 경우가 바로 그 사람의 삶을 늘 보는 가족들의 경우입니다. 그들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너무나 크고 그 소리를 늘 들으면서 사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전해줄까? 나에게 성경을 배워볼래?” 그리고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가르침이 너무 모기소리와 같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먼저 의무를 다하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진실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안 믿는 가족들하고 안 믿는 친지들하고 앉아서 ‘내가 지금 무슨 시간 낭비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선교지에 왔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착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물질로 돕고, 여러분들이 인간적으로 돕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을 구원해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해주고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들의 육신적인 면을 돌봐야 됩니다. 무조건 어려움에 처하면 “그것 봐 예수 안 믿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것이 겨우 서곡이야! 똑바로 믿지 않으면 죽는 거야! 내가 보장할 수 있어!” 그런 식으로 공갈치고 협박하면서 강하게 때릴수록 그게 큰 믿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신앙이 들어갈 것 같다면 설교시간에 공갈치면 수많은 신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신앙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항상 믿는 사람들끼리만 마음을 통하지 말고 믿지 않는 여러분의 가족을 향해서 먼저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들로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용서하십시오. 믿지 않는 가족을 미워하고 나면 마지막에 뭐가 남겠습니까? 평생 달리다 지옥에 가는 것밖에 뭐가 남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우리가 상처받을 정도로 그 사람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사랑을 베풀 정도로 우리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방배 4동에 사는 사람이 얼굴도 모르는 방배 7동의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을 리는 없습니다. 늘 만나는 가족들, 믿지 않는 가족들이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때는 그것을 상처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다. 고난을 받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이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어떻게 오래 참으심으로 여러분들을 대해주셨는지를 기억하면서 먼저 용서해야 됩니다. 마음속으로 ‘나에게 상처를 준 저 인간, 나는 정말 당신의 아들인 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힘은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서 전해질 때 성령의 움직임을 동반하고, 그래서 그의 영혼에 감화를 끼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장어집에 갔답니다. 장어를 주는데 구우면서 가위로 뚝뚝 잘다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사인 목사님이 “예수 믿어!” 그러니까 싫다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야, 그래 잘났다 평생 장어나 자르다 죽어라”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나왔더랍니다. 그래서 왜 나왔냐고 물으니까, 마지막 말이 충격적이더랍니다. ‘평생 장어나 자르다 죽어라!’ 나이가 많아서 머리가 하얗게 됐는데 자신이 아직까지 장어집에서 장어나 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생이 너무 처량해서 교회에 나왔다고 하더랍니다.
그런 은혜는 정말 예외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지 마십시오. 오히려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께 돌아오면 정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혼자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이 무겁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착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 아닙니까?
먼저 마음에 맺힌 것들을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청산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믿지 않는 가족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깊은 상처를 줬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매달리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부모님이나 동기간들이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니까, 그 상처가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준 고통스러운 아픔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께 돌아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복수를 하십시오. 사랑으로 복수를 하십시오. 그것을 먼저 풀어야 됩니다. 불신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못 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커녕 지긋지긋하고 미운 것입니다.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깊이 용서하고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못 생긴 사람이나 스스로 못생겼다고 자각하는 사람에게 “아이고 얼굴도 못생긴게!” 그러면 금방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빼어난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얼굴도 못생긴게!” 그러면 아주 즐겁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내 미모가 시기 나면 저런 식으로 말할까!’ 신앙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에게 “아이고 그 꼴에 신앙도 없이!” 그러면 상처를 받지만,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어이구 믿음도 없나봐!” 그렇게 얘기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깊이 용서해야 됩니다. 마음을 불신 가족들에게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말로 우렁차게 복음을 전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삶으로 드러내 보았습니까? 이만큼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그러므로 먼저 마음 깊이 그들을 용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육신적인 삶을 먼저 돌봐야 합니다. 불신 가족을 더 섬기십시오. 그리고 불신 가족들을 더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들에게 진정으로 섬김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십시오.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완전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아무리 생각의 차이가 깊고 사상이 달라도 진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사랑은 아직까지도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가 엄청나지만 아직도 그 두 사이에 다리가 되어줄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이 진실과 사랑입니다. 깊이 불신 가족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저 사람들보다 거 끔찍한 삶을 살았을 텐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맺힌 것을 풀어주십시오.
그 다음에 가족들을 돌봐야 할 영역이 영혼의 영역입니다. 은혜 받고 변화를 받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변화 받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 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모는 아직 주님을 모릅니다. 내 동기간들은 나는 아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모릅니다. 주님의 은혜로부터 너무나 많이 소외되고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어요.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렇게 쉽게 받아드려지게 하면서 우리 가족들에게는 좀처럼 이 복음의 문이 열리지를 않아요. 그때 여러분의 고통이 어떤지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어가 보지 않았어도 저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압니다.
지금도 우리 가족들은 거의 교회에 다니지만 그러나 가까운 친척들 중에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냥 모르는 채 죽어갑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주님을 열심히 믿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왜 우리 때문에 덕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돛대 밑에 살면 죽은 생선이라도 몇 마리 더 먹는다는데, 내가 이렇게 복음을 열심히 믿고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데,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사람들이 받고 구원의 이르지 않을까!’ 오랜 세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씩 둘씩 돌아오고 있지만 돌아오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훨씬 많지만, 그래도 아직 안 돌아온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을 돌아봐야 됩니다.
오늘 성경은 명백하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가족들의 영적인 상황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육적인 상황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 왜 불신자보다 더 악할까요? 불신자들은 그들의 영혼의 운명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들의 영혼의 운명도 알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고, 자기가 불신자였던 시절에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셔서 이처럼 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르게 하셨는지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불신자족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을 배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금식하게 하고 몸부림치게 해 놓고도 결국은 안 믿고 우리의 가족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구원 받았느냐의 여부를 우리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네 식구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느냐?’ 그것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하게 하시려고 하필이면 우리 가족 중에 나를 먼저 부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셔서 섬기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정말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을 돌아보고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도 저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마음은 정말 없습니다. 그런 동기로 했다면 얼마든지 더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아픔들을 이제는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가족이 복음의 빛 가운데서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예배하고 함께 사랑하고 기대면서 좋으신 주님 높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거기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아픔을 우리 이후에 태어나는 자식들에게까지 분열될 가족의 아픔을 물려주어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누군가 사명의 잔에 피를 채워야 됩니다. 사명의 잔에 눈물을 채우고 땀을 채워야 됩니다. 그래야지 하나님이 닫혔던 섭리를 여시고 돌같이 굳었던 가족들의 마음을 두드려서 하나님께서 돌아올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불신앙 가족 때문에 고통하는 여러분들을 보는 목사의 마음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 현장에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할퀴는 것처럼 아프겠습니까? 이제는 이것을 종식 시켜야 됩니다. 이것을 하나의 인간적인 상황 타계책으로는 안되고, 영적인 싸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이 한 주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하십시오.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150여 명 밖에 안 나오는 어느 주일이었는데 전도설교 한다고 모였는데 그 때에 여덟 명이 일어나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불과 20여명에 불과했으니까 확률로 따지면 40%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족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마음에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되면 최선을 다하십시오. 1주일 남았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고 하나님이 명하시면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불의한 재판장에게 과부가 나가서 호소하면서 매달렸던 것처럼 ‘주님 내 마음에 맺힌 이 못을 빼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애처롭게 부르짖으면 하나님도 그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외면하시겠습니까? 절대 하나님이 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포기해 버린 우리들의 가정의 복음화가 이제는 현실로 이루어져서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남편과 아내 함께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의 손을 잡고 함께 교회당에 들어서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날들이 이제는 와야되지 않겠습니까? 부모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하면 이해하시고, 자식에게 복음을 가지고 깨닫게 하면 순종하는, 주님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시는 그런 가정이 되는 것이 우리를 이렇게 예수 믿게 하셔서 은혜 받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일주일 남았습니다. 내일부터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복음을 듣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보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음주에 정말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구원받고 또 당장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교회의 좋은 인상을 가지고 출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도구로 잘 섬겨서 여러분의 가정에 이 추수감사절에 구원받은 영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물이 될 것입니다.
2. 가족들의 영혼을 위한 고통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證據)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下-3)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한 사람이 깊은 영적인 특성을 소유하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살아간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오늘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매우 중요한 해답을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제일먼저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안에서’라는 말을 어떤 주석가들은 맹세하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바울이 쓴 편지 속에서 대체적으로 의미하는 바와 같이 바울이 참 말을 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깊은 교통 속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도 바울은 오늘 자기가 지금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그 말이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통을 통해서 자기의 입술로 고백되어 나오는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는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 라고 말하는데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 라는 그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한다’라고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가 똑같이 깊은 영적인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유능하게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는 이 세상에서는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감추어진 존재일수 있다. 하나님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두루 알 수 있도록 들어내시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당신의 생명 싸게 안에 감추시는 경우가 있다. 이 세상에서 두드러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모을 수 있고 시선을 붙잡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는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람만을 좋아하는 어떤 성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신의 각자의 생각이 있어서 그것과 어울리는 어떤 사람과 추종하려는 본성들이 아울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수 차례에 걸쳐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받는 평가와 하나님 앞에서 받은 평가가 일치하지 않을 종말에 대해서 우리를 여러 번 일깨우고 있다. 참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두드러진 사람이건 두르러진 사람이 아니건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사람이 그 마음을 공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하나님과 갖는 영적인 교통과 연합의 진수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그 순간에 주님께 접붙임 바 되고 생명적인 연합을 갖고 있으며 영적인 교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 연결된 영적인 교통의 상태는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끝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소극 적으로는 죄를 회개하고 적극적으로는 믿음을 가지고 그래서 고대로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이 회개와 믿음을 하늘을 향해 나는 두 날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함께 합쳐져서 회심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니까 소극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해서 정결한 사람으로 정화되어 가고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열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성숙되어 나아갈 때 비로소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언제나 수시로 사람의 마음에 흘러들고 그 사람에 마음에 느끼는 바가 그가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속에서 사는 사람의 인격적인 내면의 반응은 그렇지 못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오래 기도하면서 얻은 결론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마음에 소원을 두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는 말씀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와 더불어 교통하고 언제든지 당신의 마음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믿음이 없고 설령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막혀있고 주님의 마음이 거의 사라진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귀기울여 보자. 다 자기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예를 짓밟고서라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으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소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이 사도 바울은 그의 사도로서의 영성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이 항상 흘러드는 사람이었고 그리스도 예수와의 신령한 영적인 교제 속에서 자신이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는 그러한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성의 심장부’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그 다음 이야기이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의 깊은 교통 속에서 주님께로부터 어떤 감정이 사도 바울에게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큰 근심과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었다. 앞에 표현된 근심이라고 하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기쁨과 대조되는 슬픔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다. 뒤에 나오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과 어떻게 구별되느냐 하면은 앞에 나오는 근심은 내면에서 울어 나오는 슬픔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고통이라고 하는 단어는 그 슬픔이 밖으로 표출되어 나오는 아픔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찬송가에서 자주 듣는 것처럼 ‘속에 근심밖에 걱정 늘 시험해도’ 혹은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 밖에 있으나’ 이런 찬송의 작시 자들과 마음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존재 전체가 내면으로부터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슬픔이 고백되거나 밖으로 표출될 때에는 다시 한번 커다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커다란 종양이나 그런 암 덩어리를 몸에 가지고 있을 때 한없이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살을 찢고 꺼낼 때 또 한번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내면의 세계 전체가 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슬픔이 말이나 어떤 행동이나 고백을 통해서 흘러나올 때 다시 한번 아픔의 강도를 더해서 그야말로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하면서 슬픔에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8장의 정서와 본문이 있는 9장의 앞부분의 정서는 너무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동시에 한 사람의 인격에서 흘러나온 말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이다. 그는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과 자유를 노래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보라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하나님이 어찌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는가? 하나님에게는 아들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겠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심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 없다는 것이다. 환난이나 적신 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 하면서 가슴 벅찬 감격으로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치 벌리면서 그는 예수 사랑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9장에서는 갑자기 그 가슴 벅찬 진한 감동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 감격이 살아지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가득한 그야말로 고통의 사람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 동시에 한 사람에 인격 안에 기쁨의 감격과 견딜 수 없는 슬픔의 고통이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참된 사랑과 놀라운 하나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이것은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듣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뼛속 깊이 체험한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자기를 충성 되이 여기셔서 사도로 삼으시고 자신이 핍박하던 자들을 오히려 사랑으로 돌보고 자신의 동료였던 사람들에게 박해를 당하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세워지기까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그는 단지 예전에 자신이 히브리 사람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매우 엄격한 종파에서 태어난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으로써 사상적으로 주입된 어떤 사상을 전파하였다. 단지 이데올로기스트에 불과했다. 자기가 조상들로부터 배우고 그 시대에 태어나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하여서 배워온 이념을 전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그 사상을 전파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생명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는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났는지를 보게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격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전에는 자신의 견해를 지적하는 자들을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젊은이가 변해서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인격적으로 알고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버리고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께 발견되고 싶었던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동족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혈통으로는 자기의 골육이요 지친 들이었다. 자기의 가족들이었다. 형제들이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기 전 그의 생애에 있어서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 공동체의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사무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사랑의 빛깔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는 진정으로 동족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를 자신의 골육지친(骨肉之親)을 끔찍이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장래 일이나 이 세상에 주관자들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 세상에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는 그 모든 인간의 불행의 요인이 되는 모든 것들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그의 섬김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구 한 귀퉁이에서 몰래 행해진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밝히 볼 수 있도록 대낮에 모든 유대인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동족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던 사도를 일시에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속에는 깊은 슬픔과 곁에는 견딜 수 없는 쉽게 그치지 않는 끝없는 고통이 계속 되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성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일들인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성경을 많이 이해하고 수 없이 테이프를 들어서 모든 시리즈의 줄거리를 다 꿰고 선생 노릇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속에 우리들과 같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슬픔이 없으면 우리들의 영성은 거짓말이다. 우리들은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지식으로 교만해져 있을 것이며 우리들이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않을 것이다. 성경은 삶과 분리되는 영성, 그리고 현실과 격리된 영적인 특성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살아있는 나무가 멈추지 안이하고 뿌리를 뻗고 줄기와 가지를 내어 잎과 꽃을 피우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정말 살아있는 영성은 그 영성이 정말 살아있는 영성이라고 하는 것을 삶을 통해서 넉넉히 들어낸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슬픔이 있는가?
사도 바울이 오늘 자기의 동족들을 생각하며 이 놀라운 예수의 사랑, 이것을 아는 것 없이는 인생 그 자체가 아무 쓸모 없는데 자기가 뼛속 깊이 사랑하는 동족과 자기의 형제들은 주님의 이 사랑을 모르고도 넉넉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짐승처럼 여기고 나치 옛날에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뛰어 다니는 벌거벗은 흑인들을 보았던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보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다. 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가슴을 두드리며 회개하고 “예수 우리 왕이여 내 마음에 오소서1”, “예수 우리 왕이여 오셔서 우리 마을을 다스리시고 우리에게 교회를 세우시옵소서!” 그런 고백들을 이방인들로부터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으로 말미암는 복음의 물결에 떠밀려서 회심하는 광경을 볼 때 사도 바울은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이방인들 가운데 환영받는 복음을 하나님과 그토록 오랜 언약관계를 맺어온 자기의 동족들이 자기를 죽이기까지 미워하면서 이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는가? 이것이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복음전파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화) 아벨라 승용차를 전도 상으로 교회 로비에 전시한 교회이야기.
교인들이 전도를 너무 안 해서 설교 단상에서 카로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낸 어느 교회 목사님이야기.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린다
죄인의 어두운 마음에 예수의 사랑이 보일 때 나 같이 쓰레기 같고 그리고 겨울철에 거지 발싸개와 같은 인간을 주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이시고 늘 넘어지며 진리 가운데 사는 일에 실패하는 인생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무릎밖에 피를 닦이시고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며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그래서 이 세상에는 주님 한 분밖에는 사랑할 분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들의 가슴에 명백해 질 때 그 다음에 우리들이 살고 싶어하는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랑을 우리들이 온몸으로 받으며 감격할 때 단지 기쁨밖에는 느끼는 것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즉시 주님의 이 큰사랑을 한없이 받으면서 받으면 받을수록 감격하면 감격할수록 우리는 뼛속 깊이 예전에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에 생명 적인 연합을 누리고 그리고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내 동포 그리고 내 가족 내 친구들이 내 사랑하는 어머니 내 사랑하는 자녀들 그들의 곤고한 영혼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둘 중에 하나이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진실하지 않는 것이든지 두 번째는 그 사람의 마음에 심각할 정도로 사랑이 없든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일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많이 경험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줄을 모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랑하는 동포와 그리고 내 가족과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면 또 마주쳐야할 영혼들에 대한 슬픔이 없는 것은 정말 진심으로 우리들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교회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그 신령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패커라는 사람은 오늘날의 기독교를 가르쳐서 “천박한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잘못되어 버린 기독교”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기쁨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슬픔을 알게 하신다. 주님의 품에 안기는 감격을 알게 하시기 전에 주님의 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지를 알게 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품에 안기는 감격을 경험하게 하신 후에는 즉시 예전에 자신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 영혼들의 곤고함을 다시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 마음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일 수도 없고 충성된 생애를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겉을 보기에 그가 바쁘고 매우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자기 좋아서 하는 충성스러운 삶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있는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영성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정말 건강한가?
길 선주 전도사와 장로 한 사람에 의해서 우리 나라에 새벽기도가 시작되고 아무 광고도 하지 않았지만 사 백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때 그들이 그 새벽을 가르고 교회당으로 달려 왔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과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 새벽기도의 효시가 되었던 것이다.
한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채 죽어 가는 영혼들에 대한 슬퍼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교회는 이미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부하는 교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는가?
사도 바울과 같이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쉴새 없이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나 쉬지 않고 계속되는 큰 근심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안 날에는 구원받지 못한 파리한 영혼들 거듭나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애써 그 복음적인 결론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일시에 기쁨으로 가득하던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살아지고 그 영혼들을 향한 무거운 부담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이 우리에게 왜 없겠는가?
물론 우리들 중에는 전혀 그런 의식이 없이 일년이 지나가고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한번도 기도하지 않고 그리고 우리들과 가까이서 살을 맞대고 살면서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죄를 전혀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 굳어 버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나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권고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말씀드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자기의 동족을 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든지 큰 근심과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오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동포를 향한 심적인 깊은 고통은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얼마나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우리들이 얼마나 깊이 예수의 사랑을 알고 있는지를 지금 즉각적으로 잴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오늘 저녁에라도 우리들의 가정에서 식탁을 마주하면서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이 벌어먹기 위해 하루 종일 살다가 피곤해 지친 얼굴로 퇴근해서 텔레비전을 몇 분 보다가 피곤에 깊이 쩌른 얼굴로 드러누워 있는 남편을 생각해 보자. 그 남편을 보면서 보약 생각을 하면 부부로서 사랑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남편에 영혼이 정말 보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말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영혼으로 보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점점 나이를 먹어 갈수록 마음이 강퍅해져 가는데 회심하지 않는 자녀를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한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야곱에게 매달리며 나로 빨리 아이를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 버리겠노라 라고 하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의 그러한 몸부림이 회심치 못한 자신의 자녀를 보면서 들리지 않는가? 이 자식이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분명하게 회심해서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과 예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내가 이 아이를 낳은 날은 저주의 날이라고 하는 복음적인 생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만 섬기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가능성과 모질고 악하게 변해서 하나님을 원수처럼 대적하고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짐승처럼 죽을 그 가능성 두 가지를 함께 비교해 보고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측정해 보시기 바란다.
우리들은 정말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녀의 그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가? 수시로 복음을 전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도 돌아오지 않는 그 자신의 자녀들을 향해 회심하지 않은 그 영혼을 향한 몸부림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회심하지 않고 있지만 만약에 우리의 지난날들에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기회들을 그 영혼의 회심을 위하여 어린아이를 갖기 원하는 라헬과 같은 마음으로 진지하게 부르짖고 아버지 앞에 그 영혼의 회심을 위하여 우리의 삶의 목표를 두었더라면 벌써 회심하고 지금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좋은 나무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더 많이 죽고 희생하고 저 영혼들이 나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를 수만 있다면 내가 그 모든 슬픔과 수모를 당해도 관계치 않노라 라는 정신이 자기 부인의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는 삶을 살아서 가족들을 섬겼더라면 우리 집안은 벌써 복음화 되었을지 모른다. 오랫동안 말로 뿌려놓은 복음을 어느 한 순간에 이익에 눈이 멀어서 빼박을 쏟아 버리듯이 쏟아 버리고 가족들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여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돌아서게 만드는 일은 언제나 일어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그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걸림돌들이 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이 가족 복음화 비율이 저조한 것도 결국 먼저 믿음 사람들 때문인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라, 그 사랑 없이 못산다, 기도해 바라, 성령이 너희에게 은혜를 주시고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라고 하는 말은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산신령 구름 타는 이야기처럼 들릴 따름이다.
그들은 보여 달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다. 가족들이 정말 우리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교회 다니는 것 이 외에 “금요기도 간다, 수요기도 간다, 구역예배 있다” 하면서 밤늦게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의 표지가 전혀 없다면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완고하게 태어난다. 우리도 그랬고 우리의 가족도 그렇다. 그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마음이 깊이 상하고 그리고 우리의 가족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슬픔의 사람이 되어도 수많은 눈물 뿌림의 세월이 지나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들이 복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며 본이 되고 자기 부인의 삶을 살고 가족들의 살아가는 삶이 오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으로 보아주고 그리고 그들 모두를 구원받은 사람들이 인박한 사람들로 생각하며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힘껏 예수의 복음을 전하며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슬픈 심정을 토로하며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나니 속에 깊은 근심밖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사도 바울은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 복음이 거절당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가서 꽃이 필 것이고 그리고 종말이 다가와서야 유대인들에게로 다시 복음이 들어와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앞에 보이는 이 수많은 유대인들이 결국은 이 복음을 대다수가 거절하고 그리고 예정 속에서 이 복음을 거절하고 죽어갈 것임을 알았다. 그러면 체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바울의 이러한 슬픔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령의 열정과 영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골육지친(骨肉之親)중에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에 이를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두었지 복음을 거절할 다수에게 기대를 무게를 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오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유대인들 모든 사람들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본 것이다. 왜? 누가 그 소수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를 슬픔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슬픔이 어울리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 자신의 선교의 몫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 사람들이었다. 그의 몫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방인들에게 슬픔을 가져야 하고 유대인들의 몫은 사도들의 것인데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누구의 몫이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속한 것이냐? 복음을 전하여서 구원을 받으면 어느 교회에 갈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사역의 열매로서 영혼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한 그 영혼 자체로서 영혼을 사랑하였다. 우리에게 이러한 정신이 필요하다. 오늘 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전도의 정신들이 이러한 교리에 의해서 정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고백을 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끊어져 저주를 받을 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여기에서 ‘저주를 받는다’라는 말은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런 식의 저주라기 보다는 제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을 구약 히브리어로 옮기면 ‘모호람’이라고 하는 단어가 된다. 그 뜻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짐승이 바쳐지는데 구속받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출될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은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면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이 자기가 ‘저주를 받는다’라고 할 때 그것이 제사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의미했다. 빌립보서에도 사도 바울이 자기를 ‘관제와 같이 드릴지라도’ 라는 말을 했는데 ‘관제’라고 하는 것은 속죄제 제물을 드리고 그 위에 마지막으로 액체(포도주, 기름)를 붇는 의식이었다. 그러니까 속죄의 제물이 없이는 관제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신 장면을 연상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때 그 피를 하나의 속죄 제물에서 흘러 내려오는 그 피를 생각하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그 속죄사역 위에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이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그렇게 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그 결과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전파되어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원하는 그런 소원을 염두해 둔 것이다.
그러니까 역시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굳이 이 사람이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었다는 사실이 잘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결국 이 ‘아나데마’, ‘저주를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이 이 복음을 전하고 자기의 동족과 형제 즉 골육친척들을 늘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그 고난과 고통이 마치 사람들 보기에 예수님깨로부터 완전히 끊어진 자처럼 되어서 그의 그 고통스러운 인생을 조금도 편안하게 바꾸어 줄 만한 어떤 가능성도 없이 처절하게 고난을 받으면서 죽어갈지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내 골육지친(骨肉之親)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바로라 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족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호람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착각을 한다. 자신이 길거리에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상대방이 잘 듣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경험하는데 집에 와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면 잘 받아 드리지 않는다 이때에 우리는 내가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들이고 우리 집에 있는 인간들은 심장에 철판을 깐 강퍅한 존재들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맞지 않을 경우가 더 많다. 아나데마의 정신이 없이는 즉 제물이 되는 정신이 없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 전체를 자신의 친족으로 본 것이다. 동족을 자신의 가족 자신의 형제라고 본 것이다. 그 아나데마의 정신이 없이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안 것이다. 정말 우리들에게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있는가? 제물로 바쳐져서 죽는 것 같은 모호람의 정신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모호람’이라고 하는 동사의 어근이 ‘하람’인데 하람은 ‘싹 쓸어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말 내가 예수의 사랑을 먼저 알고 주님의 크신 은혜를 위해서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가족과 그리스도화 화목하기 위해서 과연 재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게 하려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라고 하는 제 2의 순교의 정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들이 만약에 지금껏 내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가족들이 매우 특수할 정도로 강퍅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회개하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 날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정말 어떡하면 우리들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전해질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고나서 부자 되는 것만을 자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라고 하는 분은 결국 잘 믿는 사람들이 성공시켜 주시는 분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이것이 우리의 복음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 우리가 전해야할 복음의 본질이 이것이냐는 것이다. 정말 우리들이 이러한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자기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죽어도 가족은 우리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놀랍도록 새롭게 살아났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정말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저가 만난 하나님 누구인지도 모르고 저의 영혼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진정으로 죽으면 그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새롭게 산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우리의 양심이 자유롭지 않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알고 열심히 주의 일을 하지만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영원히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우리와 결별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 우리에게 있는 무엇이라도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아낌없이 모든 것을 버리는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 것을 지옥에 문턱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그들이 살아있는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즉 작년에도 구원하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하라고 한 해 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이제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하염없이 세월을 잡고 그리고 때가 되면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홀로 하시리라는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세월만 보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정말 충성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말 우리들이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분이 날 낳아주셨고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둘이 결혼을 해서 한 이불 속에 살을 섞고 자도 내 뱃속으로 낳았어도 진정으로 주님을 알고 그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지식을 공유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우리는 하나되지 못한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관계이고 깊이 이해해야 하는 관계인데 우리는 이해보다도 더 깊은 이해할 수 없는 벽을 믿지 않는 가족들 속에서 우리는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가정 속에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이 식어가고 가정 속에서 평범하게 부가된 자녀로서의 의무, 부모로서의 의무,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함께 우리와 더불어 주를 믿고 우리 모두 복음에 빛 가운데로 나아와서 손잡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가족이 되는 것 이외에 이런 슬픔과 갈등을 종식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진실한 신자의 길을 걷는 한 말이다.
몸부림쳐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 그리고 자신을 죽여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 경제적인 도움을 주어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 형제들, 비유를 맞춰도 엄포를 놓아도 회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녀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매우 아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도의 아픔을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더 많이 아파야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나데마의 정신이 되어서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기까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이 버려지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가족들이 구원을 얻어 빛 가운데 살 수 있다면 그리고 이 귀한 인생의 날들을 창조주 하나님을 기념하면서 사는 인생들이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아나데마의 상태가 되어도 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고백이 뼛속 깊이 사무쳐야 된다. 믿지 않는 가족의 이름이 우리의 입술에서 언급이 되거나 귀에 들려올 때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인한 안타까움과 고통이 우리들을 찔러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지 않이 하고는 베길 수 없는 사람들이 되고 그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버리고 이전에 내가 사랑하고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아나데마 되겠끔 버린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을 그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원은 여호와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눈물의 기도는 돌멩이 같이 강퍅한 우리 가족들의 마음에 알알이 떨어져서 오랜 눈물은 결국 깊이 홈을 파고 예수님의 사랑이 영혼처럼 분출되어 오르는 그 바닥까지 그 바위를 관통하게끔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그리고 아직 충분히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저미는 슬픔과 아픔으로 통곡과 눈물로 그 사랑하는 영혼들의 이름 석자를 끌어 앉고 속에 근심 걱정 홀로 짊어지고 아나데마의 인생을 살다가 죽은 인생이라면 그래도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심판의 피로부터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모든 가족이 한 사람도 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고 받아야 한다라고 하는 확신이 불타야 한다. 혹시 구원받지 않기로 예정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딴 집 식구들이고 내 집 식구들은 아닐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을 다 쏟아 붓고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진력하고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내가 이들을 복음화시키기 위해서 내 자신을 드린다면 이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고 꿈을 꾸기를 바란다. 우리의 가족들이 어두움의 일을 버리고 그 동안 쌓였던 불화와 반목을 청산하고 사랑해야할 사이이면서도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던 기억하기도 싫은 날을 모두 버리고 손에 손잡고 주일에 밝은 햇살을 받으며 복된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 슬픔을 위로하고 고난 받들 때에 서로를 격려하며 어두운 세상을 빛처럼 살아가는 가족이 되리라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주님 앞에서 우리들이 가져야할 믿음인 것이다.
3. 잃은 양이여 돌아 오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일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이스라엘 지방에는 전통적으로 목축을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 기르던 짐승 중의 대표적인 짐승입니다. 생각보다 이 양은 기후에 잘 적응하고 잘 자라는 모양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풀밭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상 때부터 이 양떼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풀밭을 찾아서 풀을 먹이고 다시 며칠씩 걸리는 길을 돌아서 오거나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양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고 싶으셨을 때 양을 비유로 들어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이 사람들도 양을 늘 보는 사람들이었고 양을 실제로 쳐본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친근하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과 양이 목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로 알기 쉽고 아름답게 말씀하시는데 이 작은 비유 속에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진리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한 번 귀를 기우려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토리를 보니까 양을 기르는 목동이 양들을 풀을 먹인 다음 모두 데리고 와서 세어 보니 아흔 아홉 마리는 있는데 한 마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흔 아홉 마리를 놔두고 한 마리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녀서 결국 한 마리를 찾았고,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그 양을 데리고 와서 한없이 즐거워했다는 간단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이야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 배경은 이스라엘에서 양을 치는 목동은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한 종류는 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 양을 자기가 치는 사람입니다.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양을 기르는 것 자체가 한 사람의 일이 될 정도로 많은 양을 기르지 못해서 동네 사람들이 몇 마리씩 자기 양을 일정한 장소에 맡기고 그래서 많은 양떼가 되면 양을 갖다 맡긴 것만큼 각 세대별로 추렴을 해서 사람을 하나 사서 그 사람이 때가 되면 이 양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풀도 뜯어 먹이고 물도 주고 또 밤에는 양 우리에 집어넣고 맹수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새끼를 나면 새끼를 받아주고 하면 월급을 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삯꾼 목자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달이 차면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니까 양을 키우기는 하지만 양이 새끼를 낳아도 자기의 소유가 되지 않고 넘어져서 다쳐도 자기 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의무감으로 키우기는 하지만 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양을 돌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 없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삯꾼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사람이 있는데 양을 치는 것을 자기의 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농사도 안 짓고 상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양을 쳐서 온 가족이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양들을 치며 새끼를 낳아도 자기 것이고 맹수에게 물려가도 자기 재산에 손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양들을 돌보되 삯꾼목자들이 돌보는 것과는 다른 정신을 가지고 돌보지 않겠습니까? 또 양 한 마리가 얼마이고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고 고기 한 근에 얼마이다고 계산하지 않아도 자기의 소유이며 자기와 함께 생활하며 살아가는 양떼들이라고 할 때 애정이 남다른 것입니다.
(예화) 개를 기를 때 돈 생각하면서 기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예로 든 목자는 전자의 삯꾼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녁 가까운 때 우리에(이스라엘의 우리는 건물에 양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돌을 쌓아 담을 넘어 갈 수 없도록 만 하고 문에 앉아 양을 지키는 것이다) 돌아와 헤아려 보니까 한 마리가 없습니다. 우리도 아이를 길러보고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알 수 있지만 사고치는 아이가 도맡아 놓고 칩니다. 양도 그랬을 것입니다. 세어보니 한 마리가 없어졌는데 직감적으로 이 목자는 ‘부실한 그 양이 또 길을 잃어버렸겠구나’ 합니다. 양 한 마리에 얼마쯤 가겠습니까? (호주에서 물어보니 우리 돈으로 양 한 마리에 15만원 정도였다) 만일 양을 찾아 나섰다가 밤이 되도록 못 찾아서 돌멩이에 걸려 발목이라도 겹지른다든지 하면 병원비가 더 들어가고 강도를 만난다든지 맹수의 습격을 당한다든지 하면 목자의 생명 자체가 위험한데도 이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예화) 개를 잃어버린 두 아이가 현상금을 걸고 개를 찾는 포스터를 붙이던 이야기-개의 값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특별히 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직접 관계가 있는 개였기 때문에 그렇게 찾아 나선 것이다.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설 때의 심정도 그런 것입니다. 물론 양은 결국 털을 깎아서 팔게 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양이 길을 잃고 어두운 밤에 두려움에 떨며 고통받을 지도 모른 다는 마음이 목자의 마음을 견딜 수 없게 만들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 안 다니는 분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길 잃은 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많이 들었고 신앙 생활 밖에서도 길 잃은 양이라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흔히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을 가르쳐서 양 같다고 말하는데 양은 왜 그렇게 길을 잘 잃어버릴까요? 양은 1.5-2.5미터까지만 볼 수 있고 3미터 정도만 넘어서면 보이지 않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독한 근시안입니다. 그러니까 길 잃은 양이라는 말은 많이 나와도 돌아온 양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면 양은 스스로 잃어버린 길을 찾아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자가 고고히 광야를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구하듯이 그렇게 양은 혼자 목적지를 가지고 다니는 짐승이 아닙니다. 항상 양은 많은 떼로 몰려다니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양은 움직이되 자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려도 스스로 돌아오거나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목자의 음성이 들리고 친구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반경 안에서 움직여야지만 자신의 생명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비유인지 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반경 안에서만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갈등과 슬픔과 번민 속에서 아픔을 겪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양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뾰족한 뿔이나 빨리 달릴 수 있는 발굽이 있으면 좋은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강아지도 얻어맞으면 소리를 질러 그 소리가 한 블럭 건너 동네까지 들릴 정도인데 이 양은 아무리 위급한 일을 만나도 위급할 때 우는 것이나 좋아서 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울음소리 이상은 자기를 표현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는 자기가 여기 있다고 하는 큰 함성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의 동물이 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 우리들을 늘 양으로 비유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양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누군가의 보호와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총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실 것입니다. “나는 일평생 하나님 없이 살았고 예수 없이도, 교회 모르고도 이렇게 잘 살아왔는데 무슨 이야기냐?” 맞습니다.
(예화) 1930년도에 프랑스에서 짐승과 더불어 살았던 10대의 여자아이 두명을 발견한 이야기-인 간이 인간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태어나서 얼마안되는 어린 시절부 터 교육을 받아야지만 인간 사회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이지 중간에 인간 사회 속으로 뛰 어든다고 해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됨.
사람 인(人)자는 기대어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 기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발견된 그 어린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가족관계와 인간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지 만 인간이 되는데, 그 아이들은 그런 공식을 깨트리고도 살았습니다. 그러니 산 결과는 생존이지 인간으로서 성장하면서 살아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아오셨지요? 교회 한 번 가보지 않고도 인생을 살아오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 사람답게 훌륭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교회 안에는 쭉정이들이 많습니다. 가짜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는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 다니고도 인생을 살아왔다면 그 살아온 인생이 오죽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도 내가 이만한 재산을 가지고 자식들 다 교육시키고 이만큼 먹고 살만 하고 사람대접 받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동물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영원한 세계에서 내려다보실 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뭘 입고 뭘 먹고 뭘 마시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기초적인 문제이기는 하고 필수 불가결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생 그 자체의 모든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날들이 어떠했습니까? 조실부모하고 동기간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자란 사람들에게는 대개 혼사를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환경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가 조금 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의 사람됨 자체가 자라온 환경보다는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특별한 교육을 통해서 인간성이 놀랍게 새로워져서 새로운 덕성을 함유하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그러한 특별한 사건 없이 부모도 동기간도 없이 혼자 잡초처럼 자랐고 어떻게 하든지 돈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아봐야겠다는 일념하나로 수많은 거친 일들을 혼자서 다 감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다투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와서 뭔가 먹고 살만하게 되었다고 할 때 특별한 사람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 없이 살아온 인생의 자체가 그 사람의 인성을 심각할 정도로 굳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족도 없이 천신만고 끝에 혼자 살아온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의 주장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래서 그 주장에 동조하거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혼자 잡초처럼 자라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환경에 놓인 사람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원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얼굴도 모르는 부모라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쏟아 부어지는 깊은 사랑을 받고, 그에 의해서 양육되고 교육을 받으며 슬프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 어려움을 해소하고, 동기간들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과 애정 어린 교제를 통해서 고달픈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생겨날지도 모르는 이 독소들을 제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생활의 이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깨어진 가정이 많지만 깨어진 가정이 아니라고 해도 인생이 어차피 혼자 사는 것이라고 해도 살아가다 매우 곤고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엄마 내가 시집을 가긴 했는데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어?”하며 눈물이라도 흘리고 자기 하소연이라도 하면, 엄마는 인생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용기를 주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자신이 이런 부모의 사랑을 받으니까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일깨워지고, 아들이 인생의 선택을 해야하는 기로에 있을 때 자신이 인생을 살아온 지식과 경륜을 가지고는 도저히 뭔가를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아버지에게 가서 자문을 구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택을 도와주고 그 선택에 아버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고통과 어려움에 동참해주고, 그 길을 걸어가면서 슬프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동기간들이 서로 자기가 슬픔을 당하는 것처럼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고 어려울 때면 서로 우애를 확인하고 그렇게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며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이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괴로워도 혼자 어두운 밤중에 벽에 머리를 들이받으면서 고통을 씹고 처절할 정도로 외로운 날에는 죽도록 술을 퍼마시고 만취가 된 상태에서 이른 아침에 깨어나서 다시 스스로를 벌어 먹여 살리기 위해서 버르적거리면서 고달픈 직장 일터로 돌아가는 그것이 통상 우리가 기대하는 인간의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껏 살지 않았고 우리의 인생계획에 없는 어떤 특별한 선택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들어 놓으셨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기대하셨을 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시고 그 인간을 향해 기대하신 바는 여러분이 시집 장가가서 아이를 낳아놓고 아이에게 기대하는 바와 똑같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우리들이 기대하는 바는 ‘돈만 많이 벌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이 아이가 사람답게 잘 자라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의 관계를 죽는 날까지 지속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세계를 주름잡는 황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부모인 나와의 관계를 20년 후에는 원수처럼 돌이켜 놓고 떠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런 자식을 낳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 말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셨을 때 그 만들어진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은 가족관계를 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가족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서 그 가족관계를 아주 철저히 파괴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없는데 하나님을 떠날 능력은 있습니다. 죄의 능력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죄가 악한 조상들의 성품으로부터 물려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죄악된 습관과 범죄로 말미암아서 속에서 계속해서 죄를 좋아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경향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저지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된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죄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셨는데도 그 하나님을 몰라보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낳아서 유명한 정치가가 죄었고 돈도 많이 벌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현시대의 최고의 지도자라고 말해도 부모를 몰라보면 여러분들의 입장에서 ‘나를 몰라봐도 그렇게 훌륭하게 자랐으면 됐지 더 바랄 것이 뭐 있겠어’하겠습니까? ‘네가 부모인 나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밖에 나가서 수많은 인정을 받아도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가족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도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재산을 모으고 또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몰라보면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던 자식이 나이가 들면서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내가 이렇게 세상 성공에 미쳐서 부모도 없이 가족도 없이 동기간도 없이 이렇게 내 멋대로 인생을 살아서 뭘 일구어 놓았지만 그러나 내 부모가 있는가? 내게 가족이 있는가? 그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 자식이 바로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은 젊으니까 죽을 때쯤 되어서 교회에서 장례식 하면 보기 좋더라. 돈도 조금 들고. 죽을 때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교회에서 장례식을 지낼 수 있게 기력이 없을 때 예수 믿기 시작해야 되겠다’합니다. 그것은 자기 계획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시간표 정해놓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당연한 가족관계로 돌아갔는데도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는 사실과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새카맣게 잃어버린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 영적인 가족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는지를 가르쳐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야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그런 도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도움을 적절하게 주지 못하는 교회들도 있기는 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러나 어떻든 교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을 나오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목자가 양을 찾아서 갔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내 힘으로는 하나님께 못 돌아온다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언제 나를 찾아오셨는가? 내 인생을 이렇게 길게 살아왔지만 한 번도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것을 본적도 없다’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의 생각입니다.
(예화) 예전 저녁이 되도록 땅따먹기하고 놀 때 아무리 밥 먹으라고 불러도 놀이에 빠져서 그 소 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안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 주님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 돈 잘 벌고 한창 잘나갈 때는 너무나 잘나가니까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안 들린 것이고 인생 살다가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안 들린 것입니다.
(예화) 병원에 가서 어떤 사람에게 응급실을 물어보았는데 대답이 없었다-그런데 알고보니 한없 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날은 잘나가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에는 너무 분주하고 고통 하는 날에는 너무 뼈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뼈 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 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요즘 아이들이 가출을 많이 하는데 집 나간 아이는 부모를 잃어버려도 부모의 마음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바람이 불어 문이 흔들리면 행여나 돌아왔나, 날이 추우면 이 겨울에 어디서 이불이라도 덮고 자는가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런 날은 이래서 주님 만날 수 없고 저런 날은 저래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여러분 가까이에서 수없이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다만 여러분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너무나 골몰한 나머지 이렇게 인생을 사는 것이 가출한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은 밀림에서 부모 내버리고 늑대와 뛰놀며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 번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인생이 너무나 행복한가’면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도 제대로 믿어야지 행복하지 신통치 않게 믿으면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행복합니다.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에는 어려움이 오면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을 원망하고 대판거리 싸우고 술이나 퍼마시고 점 집이나 드나들면서 팔자타령이나 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어려움이 와도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도움을 청합니다.
(예화) 굉장히 잘 살다가 망한 사람이 있는데 단칸방 살다가 예수 믿고 나서 부자가 되었다-자식 들을 위해서 한 번 망한 것이 고맙다고 말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내며 부모 님이 살아 계시고 형제들이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배웠 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인생의 고난을 만나면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제껏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고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담대함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와도 그 고난을 기쁨으로 이기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원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마음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들의 자기체험을 들어보면 어떤 사람들은 죽을병에 걸려서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망해서 예수님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남편과의 불화와 갈등 속에서 시달리다가 예수를 믿었다 등 사연이 많지만 그것은 다 자기 나름대로 하는 이야기이고 인생이 막바지에 가서 벼랑 끝에 매달리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통 당하는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 당하는 사람 가운데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안됩니다. 그리고 가정의 불화와 어려움, 정신적인 갈등 때문에 고통 하는 사람이 천명이라면 그 정신적인 갈등 때문에 예수님 의지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역시 한두 명에 불과 하다는 이야깁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기는 하지만 그런 자체가 우리를 저절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거나 인생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마음이 더 굳어져서 주님 없이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풍족하게 가지고 있든지 없든 지간에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갈 때가 되면 우리 자신이 외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남편이 변함없이 나에게 잘해주는데도 왠지 허전합니다. 돈도 많고 부족한 것이 없는데 왠지 사는 것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항상 공허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없는 것같이 허전한 마음으로 만드셔서 주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 살수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사연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그렇게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나보십시오. 밤새워도 얘기 다 못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깊이 마음이 공허해지고 무엇인가 자기자신의 인생을 가득히 채울만한 좋은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향락에 빠집니다.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질병입니다. 향락에 빠지는 동안에는 잠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반포대교에서 돈 다발을 뿌린 이야기.
사는 것이 얼마나 시시하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차를 세우고 그것을 줍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시시한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은 그렇게 시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가치관도 없고 깊이 갈등하고 고통 할 때 우리는 우리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해 정의하기를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외로운 존재다’고 했습니다. 자기밖에는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 때 조용히 귀를 기우려 보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인생의 허무 속에서 외로워하는 여러분들의 그 가슴 아픈 날에 주님의 음성이 매우 가까이 들립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이래서 하나님 없이 못사는 사람들이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뜯어말려도 오늘도 교회 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이 회개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 아홉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생소한 회개라고 하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예화) 고등학교 때 아버지 앞에서는 꼭 무릎을 꿇어야 하는 친구가 술을 먹고 대문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아버지 손에 있는 도끼를 보고 사정없이 도망쳤다. 그러나 계속 집에 안 들어온 다면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결정한 것이므로 아버지는 최대한 아이를 설득하 려 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오시는 것은 오셨지만 믿기 싫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자율적입니다. 등록하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가르쳐주는 것이고 마지막 결정은 여러분들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뭐가 되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예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책을 쓴 한 학생의 이야기.
인생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이 중요한 결정들은 모두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신앙이지 공갈협박에 못 이겨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돌아오는 것을 가리켜서 ‘회개’라고 말합니다. 회개는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깊이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면서 믿음 안에 살겠다고 각오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입니다.
(예화) 교회 물건을 훔친 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다시 가져와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하는 것이 회개이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찾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회개케 하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은 회개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할 때 그때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가족관계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고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결국 어떻게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를 복원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비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게끔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심판을 받으면서 죽어갈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한 분이신 그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33년 동안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초와 쓰라림을 맛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죄는 없으신 분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슬픔들, 돈이 없는 고통, 가난한 아픔, 권세 없는 집안인 설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하는 아픔, 이런 것들을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는 하지만 골고루 모두 맛보신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가족이나 친구나 심지어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여러분들의 깊은 고통과 마음의 아픔과 인생의 갈등을 다 헤아려주지 못해도, 주님은 그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이 몸소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외로움과 고통과 아픔을 한 몸으로 모두 맛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입을 열어서 “하나님, 제 인생이 지금 이렇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여기 와있는 한사람 한사람을 모두 아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양을 목자가 알듯이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서 여기에 오게 되었나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주님은 모두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말이 밥을 먹는 그 밥그릇에 내려오셔서 거기에서 탄생하시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는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가르치신 것을 주님이 지금 가르치실 수 없기 때문에 제가 대신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셨을 뿐만 아니라 이 가르침을 다 남기신 후에는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우리들이 받아야할 형벌을, 죄지은 우리를 향해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대신 막아서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받으신 형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십자가는 영원히 결별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일수록 이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와 같이 아무 희망이 없는, 죄 때문에 철저히 파멸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화) 다섯살박이 어린 외동아들이 차단기가 내려진 건널목에서 가차가 올 때 뛰어들어갔는데 간 수가 아이를 밀어내고 대신 치어 죽었다-그의 장례식에서 두 부부의 대조적 울음.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형상 볼 때 내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아 그렇군요 하나님, 주님이 나를 낳으셨고 주님이 우리 아버지신데 세상살이에 빠져서, 너무 기뻐서 혹은 너무 슬프고 괴로운 날들이 계속되어서 주님 모르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이 감겨놓은 내 눈을 밝히 떠서 복음을 바라보니 바로 주님이 나 같은 길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군요. 하나님, 좋으신 예수님을 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까? 주님,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어떻게 대신 죽으실 수 있었습니까? 선한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는 의로운 사람은 종종 있는데 선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은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을 위해서 왜 대신 죽으셨습니까? 저는 당신의 사랑을 모르겠습니다’며 흐느껴 우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계곡에서 갈 길을 잃어버리고 슬피 울며 맹수들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떨던 이 어린양이 양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면서 긴소매를 내미는 목동의 손을 보았을 때 이 양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그 목동이 사랑하는 그 양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 그 때에 이 양은 이 세상에서 잠시 잃어버렸던 그 뼈저린 외로움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유명한 위인은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제 인생에 안식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복 받은 날입니다. 여러분들의 이제껏 까지 달려온 모든 사연 많은 인생의 길이 사실은 오늘 이 한 꼭지점을 향해서 달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이제는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데 도저히 돌아갈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저희의 인생이 갈등, 번민, 고통으로 너무나 가득 찼습니다. 나도 내 인생을 어찌할 수 없어서 내 인생의 이 보따리를 전부 당신께 맡기오니 내 아버지의 집에 있게 하시고 이제는 나를 당신의 아들로 생각하셔서 이제껏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내 인생의 길을 주님이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의 목자이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서 여러분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품에 안겨서 그와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결단을 해야할 때인 것입니다.
4.전도하지 않는 죄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3:18)
오늘 이 성경구절은 우리에게 아주 섬짓한 경고를 줍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이 문맥은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인해서 한 백성들을 징벌하고자 하실 때에 그 때에는 인간들에게는 커다란 재앙이 늘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아니면 평화로웠던 환경들이 깨뜨려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이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근 여러 가지 재앙, 질병 그리고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는 그런 것, 이런 재앙들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백성도 동일합니다.
그렇게 다루시던 기억을 한번 상기해 보십시오.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거둬가기도 하셨습니다. 엄청난 전쟁은 수많은 인명들을 앗아갔고 그리고 모든 그들의 그 안락한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뿌리뽑아 버렸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고 없이 이런 일을 행하시는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징벌하실 때에 경고 없이 불시에 일을 행하시지 아니하고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재앙이 크고 환난이 중하면 중할수록 하나님은 더 누차에 걸쳐서 경고하시고 충분히 교훈 하신 후에 하나님이 이제 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이런 경고를 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결단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온 나라에 두루 울려 퍼지도록 마치 중계방송을 듣는 것처럼 그렇게 하늘을 열어서 당신의 음성을 모든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경고하지를 않으셨습니다. 항상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이제 당신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깊이 헤아릴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경고를 바라시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는 인간을 사용하지 않고는 거의 행하시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기지 않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면 전도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면서 날마다 주님 닮은 인격으로 변해 가는 이런 일들, 주님이 결코 혼자 행하시지를 않으시고 그렇게 주님을 닮고 싶어서 애를 쓰는 사람들만 주님을 닮아가도록 주님께서 그들의 노력과 함께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 음성을 듣고 있는 사람은 에스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불우한 시대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망하고 그리고 인민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30세 되던 4월 5일에 그발강가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추측하건데 고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아마 저녁때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작은 강가에 나와서 있을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제사장의 가문이었지만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징계하고 심판해서 모두 포로로 끌려간 그러한 상황에서도 선지자를 세우시는 일은 계속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라도 선지자를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들의 상황이 비록 비극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에게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악인이 계속 악을 떠나지 않고 율법을 행하면 내가 이제 그를 심판할 것인데 나는 그에게 누차 경고한다. 그러나 그는 직접 그 말을 들을 수 없으므로 내가 그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 경고의 음성을 전달해 주는 자들은 나를 아는 내 백성 너희들이다. 그리고 좁게 말하면 에스겔 너다. 그런데 너희가 그것을 그대로 전해서 그들에게 충분히 충분히 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면 그러고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았다면 할 수 없거니와 만약에 너희들이 내가 그들에게 전해주기를 원하는 그 뜻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 가운데서 그들이 멸망한다면 너희도 책임을 면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표현은 훨씬 더 강렬해서 내가 그를 징벌해서 그가 피를 흘리고 죽을텐데 그 피의 댓가를 너에게서 찾겠다.” 굉장히 무서운 얘기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속에서 오늘 전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전도가 무엇인가? 전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그들의 운명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고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돌이키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복음 그 자체가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항상 너무나 경박하고 신중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한테 어느 부인이 와서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요 저희 가정은 너무나 행복해요 아빠는 너무나 자상하고 착실해요 참 훌륭해요 그런데 목사님 예수를 믿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그 말이 복음의 정신에 비춰 볼 때에 맞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역할을 무엇인가 하면은 정확하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그들이 어떻게 된다라는 것을 알려주어서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보이실 은혜와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그들에게 진지하게 알리는 것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그 길을 돌이키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자기의 가족뿐만 아니라 하여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이러한 간절한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큰지를 깊이 알 때에 영혼을 향해서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영혼을 동일한 애정으로 사랑했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모든 이방인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깊은 영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지만은 특별히 자기의 동족, 골육, 친지들을 향해서는 더 절박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이 영혼을 향한 깊은 사랑은 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이지만은 그러나 영혼을 향한 신실한 사랑은 이 그 인간관계의 친밀함에 상당히 많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치다 만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 그 영혼을 향한 한없는 연민에 사무칠 수 도 있지만 그러나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자기가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더 많이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족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깊은 염려와 근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건강함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가족중의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주님 없이 살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요 하나님을 향한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을 향한 도전을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더더욱 더더욱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그런 애정을 가져야된다는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리챠드 백스터가 그의 회심이라는 책 속에서 아주 이런 의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죽어 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길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보기에는 당신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진정한 가족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가족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혈육에 대한 깊은 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가족들을 위해서 많이 희생해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모든 면에 있어서 이해하고 양보하고 그리고 성스러운 바보가 될 필요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용하려고 하면 좀 이용을 당해주세요. 사람들이 자기를 좀 속이려고 하면 좀 속아주세요.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내가 전하는 복음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 수 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 자체가 궁극적인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동기간들을 위해서 가난해지고 부모님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한 것을 포기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이것의 그 궁극적인 목적은 그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 아닙니까? 그리고 그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그 연민의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 속에 있는 것이 불쌍하고 나처럼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해서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정직하게 복음이 믿지 않는 우리 가족에 대하서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복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리 가족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복음이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지금은 이미 죽은 상태에 있고 그리고 계속해서 영혼에 죽은 상태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고 지옥으로 보낸다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지금보다 조금 더 삶의 질이나 여러 가지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해서 새 생명 속에 살지 아니하면 그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복음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하등의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내가 그렇게 포기할 수 없었던,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런 관계,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았던 그 가족들이 그렇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의 운명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런 은혜,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기쁨, 이런 것들만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는 할아버지 먼저 그 다음에 아버지, 그 다음에 나 그 다음에 우리 자식 차례대로 태어납니다. 형보다 먼저 태어나는 아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러 가실 때에는 태어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엄마, 아빠 펄펄하게 살아있는데 자식이 먼저 죽기도 하고 형을 내버려두고 동생이 먼저 작별을 고하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인생의 꿈들이 아직 많고 그의 인생의 계획표에는 아직은 죽어야 될 때라고 되어있지 않아도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벌써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그렇죠? 팔십 몇 년도인가, 소련 상공에서 KAL기가 격추되었죠? 그리고 유족들이 배를 타고 그 비행기 잔해가 떨어진 해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꽃을 던지면서 한없이 바다에서 통곡하는 장면들을 봤습니다.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얘기하기를 짧은 순간이지만은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냐는 것입니다. 퓨-하고 미사일이 날아가고 번쩍하면서 쾅 폭발하는 그 순간이 잠깐이지만은 그 한번 폭발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그 미사일을 맞고 어떤 사람들은 맞는 즉시 죽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불타는 비행기의 화염에 휩싸여서 떨어지고 어떤 사람들은 바다에 닿는 순간까지 안 죽다가 물 속에 들어가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굉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이 우리 가족을 향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다 말해주지는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마치 도전처럼 느껴지니까. 우리가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어느 날 선지자처럼 폼을 잡고 나타나서 ‘예수 안 믿으면 너희모두 끝장이야 엄마도 마찬가지야, 아빠라고 봐줄지 알아?’ 이런다고 해서 울며 회개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랬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회적으로 많이 효도도 하기도 하고 아니면 잘 보이려고 하기도 하고 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우회적인 방법을 택한다고 해서 실재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에 대해서까지 우리가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족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종종 결국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는 그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자리가 사실은 그와 함께 있던 크리스챤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심판 받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고 애를 쓰고 수없이 복음을 전하려고 몸부림 쳤지만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닫고 워낙 강팍해서 복음을 듣지 않고 죽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같이 살던, 그러다가 죽은 가족들도 있어요.
그러나 그 중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만나는 먼 친척이라고 해도 그럴 텐데, 늘 한집에서 마주보는 식구, 식탁에서 늘 마주대 하는 내 가족, 그리고 늘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우리 가족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명백하고 분명하게 복음을 제시받지 못해서 자기가 주님을 믿지 않을 때에 마지막 자기의 결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운명을 했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가 있겠습니까?
부산에 태종대에 가면 자살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게시판이 붙어있습니다. 형법상으로 둘이 있는데 한사람이 자살을 하겠다고 벼랑에서 뛰어 내렸을 때 최선을 다해서 그를 말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자살 방조죄로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됩니다. 이게 세상에서도 그런 법이 있어서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사람은 그와 인척관계에 있든지, 지나가는 사람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옆에 있는 사람이 그를 말리도록 법적인 강제의무를 부가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세계에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죽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살아온 날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행복한 날들이 없었으며 열심히 살았으나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과 반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죽었습니다. 잠시 후에 그들은 부활할 것이지만 그러나 부활은 심판을 받기 위한 부활이고 죽은 즉시는 물론이거니와 부활한 후에는 더더욱 그들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도록 복음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들의 심판이 중하면 중할수록 가장 가까이 있는 그 사람이 그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가를 주님께서는 검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난 확신합니다. 여러분 개인이 아무리 열렬히 믿는다고 할지라도 수없이 여러분과 함께 있는 여러분의 가족과 친지들을 지옥에 가게끔 늘 버려 두면서도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으면서 살게끔 내버려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은 기업을 무르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느 한사람이 예를 들자면 부득불 노예로 팔려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때가 이르러서 그를 속량 할 수 있는 때가 되면은 그 사람에게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몸값을 주고 그를 사와야 합니다. 그것이 의무입니다.
아버지이면 아버지가 하면 되고 아버지도 없고 형제도 없다면 5촌,6촌,7촌,8촌,10촌,18촌 계속 어디로 가든지 간에 끝까지 가서 가장 가까이 있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인신을 도로 속량 해서 도로 사와야 할 의무를 율법이 부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런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그렇게 처절하게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에 관해서 경고하고 골육과 친척들에 대해서 깊은 부담감을 느꼈던 것은 그것은 신약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상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그 돈에 매여서 포로 되어서 사람들에게 노예생활 하던 비참한 그 사람을 건져 내어 오는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그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라 할 것 같으면, 구약의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죽어 가는 자신의 가족, 자기의 늘 마주보는 가까운 친척들을 사망에 이르도록 내버려둔 사람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율법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복을 주시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멸망하는 영혼들에 대한 아주 심각한 의무를 이미 죽음이 무엇이고 심판이 무엇이고 거기로부터 받는 구원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그들이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알고 그 심판의 의미를 알고 주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아는 우리에게 그것을 전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집에 가보면 말이죠 참 재미있는 것이 평소에 자기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동기간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상을 당한 그 자리에서도 그렇게 슬퍼하지를 않습니다. 그 슬퍼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정말 복음을 전하려고 몸부림치고 애를 쓰다가 그 영혼이 결국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복음을 전한 그 가족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일 뿐이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취해 가시면 그것으로 우리는 다시 두 번째 기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가족에서 믿지 않고 혼자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있죠? 그런 사람들 경우에는 그 책임이 더 막중합니다.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더 심각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려야 하는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말이죠 늘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은혜와 거룩한 생명을 풍부하게 누리면서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날마다 복음을 새롭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복음을 새롭게 체험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가 전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을 보고, 변화 받는 것을 보면 진짜 하나님의 복음이 살아있다는 것이 감격으로 다가오고 심지어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기적처럼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족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구원의 이르게 하는 그 일을 우리가 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혼자 만의 힘으로는 않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신앙생활 하라고 늘 재촉하고 바른 말을 하고 그러기도 하지만 때로는 또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렇죠?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또 잠시 복음 전하기를 멈추면서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기다리는 때에는 어떻게 기다리는가 그게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믿겠지, 돌아와야지, 돌아와야 될텐데’ 그러고 아무것도 않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될대로 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믿으면 참 좋겠다 하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구령자의 마음은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온 가족이 복음화 되는 것이 나는 싫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원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모든 것이 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오겠지 우리 엄마, 아빠도 돌아오겠지. 우리 형제들도 돌아오겠지 돌아왔으면 돌아와야 할텐데’ 그것만을 가지고는 우리가 그 영혼이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심판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 앞에 그러한 모습으로 기다려 오던 그러한 방식의 태도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변명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족이 불행히도 주님을 믿지 않고 운명하였고 그리고 성경에서 보는 봐와 같이 여러분들이 낙원에서 음부에서 고통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가족들의 모습을 보게 었다고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을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가족들을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데려가셨을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변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 가족을 구원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우리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그 가족들의 영혼을 결국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셨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께 아뢸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 결국은 내 아빠, 우리 엄마 그리고 내 동생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심판을 받고 주님께 진노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거듭나지 못했고 구원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님이 아시지요? 저의 그 가족을 위해서 내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저는 항상 슬픈자로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가족들을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몸부림 쳤고 내 인생 전부는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향해서 슬퍼하고 사망의 골짜기를 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까? 우리가 정말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서 울어봤습니까? 많이 울어봤습니까? 샘솟듯 멈출 수 없이 솟아나는 그 눈물, 주님을 모르고 늙어 가는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귀에 대고 큰소리를 질러야지 말귀를 알아듣는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 (?) 주어진 상황에서 몸부림을 치며 복음을 전해도 바위에 돌 던지는 것처럼 차갑게 돌아오는 그들의 불신앙의 표정을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많이 울었습니까?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오라
가끔 신문이나 전신주에 붙어있는 사람을 찾는 광고를 봅니다. ‘아무게야 아무게야 엄마가 모든 것을 용서하니 속히 돌아와라 아빠가 매일 눈물로 병석에 누워 계시단다. ’ 집을 떠난 자기 자녀를 향한 그 처절한 안타까움, 견딜 수 없는 이 그 통증이 그런 사람 찾는 광고를 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가족을 버리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풍토병을 앓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언어의 장벽을 넘고 먹기 싫은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의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처절하게 애를 씁니다. 우리의 가족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늘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천사처럼 말을 잘 하지를 못해서 구원의 도리를 김목사 처럼 이렇게 잘 설명해서 빨려들게 가르칠 수 없을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능력이 많아서 잠자는 사람을 위해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주님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고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여러분의 가족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퍅해서 여러분들에게 더 많은 좌절과 고통을 안겨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오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가 물어야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충분히 경고했습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충분히 주님 없는 삶의 마지막이 어떠한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충분히 사랑했습니까? 주님을 모르는 채 죽음과 결별하는 영혼들을 떠나보내면서 통곡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그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지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최선을 다했습니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인생에 아무런 계획 없이 한마디의 유언도 없이 수시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명단에 일년이면 몇 명씩 발견합니다. 누구도 그가 그렇게 홀연히 인생을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도 예외일 수 가 없습니다.
서울 시내에서만 하루에 650명이 죽습니다. 매일 그것도 장례도 치루는 것만 650명이니 장례를 치루지 않고 대충 처리해서 묻어버리거나 죽었는데도 발각되지 않는 사람들까지 합치다면은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이 좁은 서울에서 매일 매일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가족도 그렇게 홀연히 하나님 불러 가시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충분히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결단할 수 가 없어서 불붙는 지옥에 던져졌다면 그 평화가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를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좀더 자세하게 알아듣도록 분명하게 맨날 웃고 장난치는 식으로 경박하게 말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내게 그 복음의 진실을 들려주었더라면 내가 믿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사람이 여러분들의 가족 중에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영혼을 지옥으로 보낸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지 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저는 자기 혼자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족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냉담한 사람 치고 하늘과 땅의 기름진 축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을지 모르지만 가족간에 있는 쓴 뿌리는 여전히 제거되지 않고 그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그런 갈등들이 남아서 그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족들의 영혼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은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면서 살기 위한 일기도 하다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 예수 나타나실 때에 내게 면류관이 무엇이냐 예수룰 믿게 된 너희들이 나의 면류관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나타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편한 삶을 살고 엄마, 아빠에게 만족을 드리는 자식이 되었고 아내와 남편에게 만족을 주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 면류관이 아니라 그때에 면류관은 내가 복음을 전해서 주님을 믿게 만든 사람들, 그들이 나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의 인생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두 가지 중요한 사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제사장의 사명이고 또 하나는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그대로 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반복해서 그들에게 두 번, 세 번 동일한 말로 전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비롯해서 예레미야나 이런 선지자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하도록 주신 그 메시지를 한번 선포하고 거두어 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 전파했습니다. 동일한 말이라도 계속 전파했습니다. 언제까지 둘중의 하나-그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키거나, 아니면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태도를 바꾸시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경고하신 내용들을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도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전도는 가족들을 만날 때나 만나지 못할 때나 계속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계속됩니까? 그들을 볼 때에는 사랑으로 대하고 복음의 진실을 일러주고 그들을 볼 수 없을 때에는 기도함으로써 중보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향해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도록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가족들의 구원의 위해서 작정하며 기도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버지의 영혼, 동생의 영혼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기도해본 적 있으십니까?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내게 은혜 베푸시는 날일수록 나는 슬픈 사람입니다. 가족들의 영혼을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시지 아니함으로 나는 슬픈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저와 여러분이 비록 부흥을 못 만나고 그리고 엄청난 회심의 역사를 못 봐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몸부림 쳤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힘을 다해 경고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샘솟듯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펑펑 울 수 있도록 우리 최소한 그렇게는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는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가정의 복음화라고 하는 것은 흘릴 피를 다 흘리고 쏟을 눈물을 쏟고 찢어질 살을 찢기기 전까지는 그 무슨 뽑기 던져서 맞추듯이 그렇게 요행으로 복음화가 되는 경우는 거의 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먼저 믿은 우리들을 그 제목을 가지고 연단 하는 것입니다.
지금 지난주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 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마음이 아플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위로가 되겠지만 어떤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은 고사하고 목사 앞에서도 얼굴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일년이 지나도록 그들에게 한번도 복음을 전한 적이 없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그렇게 죽어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영혼의 상태가 그대로 나와 하나님 관계에 대한 성적표입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만큼 가족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적표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안전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고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서 그것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감당해 나가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가족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학생부군신의 그것 써놓고 죽는 것입니다. 향불 피워놓고 하나님이 이렇게 심각하게 자기 자녀를 향해서 경고하신 적이 얼마나 됩니까? 피 값을 찾겠다구 ..
여러분 성경을 미루어 볼 때 피는 생명을 의미하는데 사람의 생명을 무엇으로 속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을 속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생명밖에는 없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아주 진지하고 심각해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 중에서 모든 것이 스톱되고 몇 년 정도를 전업으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사하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충분히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까?
나는 우리가 가정을 모두 예수 믿게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서 누구도 정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문제로 삼는 것은 무엇이냐면 구원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향한 찢어지는 마음이 있냐는 것입니다. 찢어지는 마음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 아픔 속에서 기다리는 것은 사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그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샘솟듯 솟아나는 그 눈물의 기도 ,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이 가슴에 아프게 이 비석에 묘비에 글자처럼 가슴에 새겨진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의 이름이 새겨진 그 영적이 묘비에 한없이 적셔본 사람들은 반드시 그 기도는 나는 응답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데 당신의 자녀인 여러분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영적으로 이미 죽어있는 여러분들의 가족의 묘비를 붙들고 그에게 부활을 보는 것 같은 거듭남의 역사를 달라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그 이름 위에 눈물을 쏟아 그 이름으로 눈물로 얼룩진 이름이 되게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의 그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 우리의 눈물이 아직 다 그 잔에 차지를 않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에게 그가 구원받고 생명의 은혜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를 위해서 흘린 우리의 마음의 피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사랑하는 아빠. 그리고 엄마 당신들이 없는 낙원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당신들이 함께 가지 않는 천국이 내게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그 천국에서 울부짖는 내 육신의 식구들의 통곡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거기가 내게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구원을 얻었쟎아요 그죠?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쟎아요? 그러다가 우리가 생명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도 조금 남아있는데 왠지 우리가 침체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이 무겁고 곤고해집니다. 그래서 싸늘해지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렇게 힘들어하고 곤고해 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낄 때 있쟎아요 그렇죠? 그래요 꼭 있죠 은혜 생활 잘 할때는 늘 평펑 쏟아지는 샘솟는 은혜 속에 살지만 어떤 때는 정말 고갈되어서 그래서 곧 쓰러져 엎어질 것 같은 그때에 은혜의 샘을 터뜨리쟎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동안에는 우리의 심령이 건조해 질 리가 없죠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느껴지게 하실 때 내가 충만하고 은혜 있을 때만이 아니라 정말 곤고할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져요 그렇지 않아요?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의 영혼이 고갈되었을 때에도 그 비참한 눈물을 흘리는 것을 하나님이 아파하시는데 전해주는 자 없어서, 구원을 얻을 만한 지식이 없어서, 그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입다물므로 전파해주는 자가 없어서 탄식하며 지옥으로 내려가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막아서는 이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깊은 사모함으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 골육 지친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고백을 한 그것이 결국은 거기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밖에는 우리 가족들에게 우리밖에는 없어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그에게 복음을 전해줄 것이라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런 기도 하나로 그 영혼들을 향한 부담감을 덜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만적인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건강한 영혼을 가졌다면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을 인해서 많이 울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김성은 장로라고 있어요. 뭐 막강한 그 권세를 가졌던 사람이죠. 6.25났을 때 29세에 장군이 되었다고 하니까 진짜 세계의 군인 역사에 현대사에는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29세 이제 대위도 채 될까말까한 나이에 승승장구 올라가서 장군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장군이 되었으니까 그 당시에는 장군이 유난히 없던 시대 아니에요 지금에야 많지만은 없던 시대에 한국사람으로서 장군이 됐으니 굉장한 명예였죠. 자기가 장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급히 어머님에게 알리고 자기의 지휘관들을 거느리고 말하자면 자기의 고향으로 개선을 한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이 초라한 자기의 집 앞에 와서 ‘어머니 성은이 왔습니다. 별 달고 왔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방문을 열지 않아요 ‘어머니 성은이 왔습니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홀어머니로서 아이를 키웠어요. 그런데 이 보통 어머니 같으면은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우리의 장한 아들, 동네 사람들이 사 모였는데 ‘우리 장한 아들 29살에 장군이라니 이게 왠말이냐 그랬을 거에요’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아들 앞에 나온 거에요. ‘아들아 나는 별이 뭔지 모르지만 그게 내 마음에 하나도 기쁘지 않다. 너 한번 보렴’ 그리고 치마를 걷어 올려요. 무릎이 전부다 약대 다리처럼 굳은살이 다 밖혔어요 교회당 마룻바닥에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얘야 너는 하나님에게 바쳐진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내가 이렇게 무릎이 굳은살이 배기도록 네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아느냐’ 그리고 조용히 가서 또 문을 닫더랍니다. 참 우리 역사에는 이런 훌륭한 어머니들이 있어요. 보세요. 이게 정말 영혼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저 황금의 면류관은 광채를 잃겠네
영혼(?)을 본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간절히 그래도 하나님의 대답이 없으면 몸부림치면서 매달리세요 그래도 하나님의 대답이 없으면 굶으면서 매달리세요 그래도 대답이 없으면 가족들에게는 생명을 주고 내게는 죽음을 달라고 매달려 보십시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정말 우리의 가족들에게 선지자의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복음을 최선을 다해 전하고 제사장의 마음이 되어서 믿지 않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샘솟듯 솟아나는 눈물로 그 영혼을 기도해야할 의무는 그 가족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가족들의 영혼을 돌아 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들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요즘 제가 한가할 때 흥얼거리기를 좋아하는 유행가가 하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듣는 가시나무라는 노래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유행가가 아니라 어느 집사님이 12년 전에 복음송으로 발표한 노래입니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쉬실 곳이 없습니다. 내 속에는 너무나 많은 헛된 바람들이 있어서 당신의 쉬실 곳이 없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내 속에 있는 그 많은 가시나무들이 서로 부딪기면서 울어대서 쉴 곳을 찾아서 작은 새가 날아왔는데 결국은 그 새도 가시에 찔려서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습니다’ 자기 속에 자기도 견디기 힘든 잘못된 자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 노래만 보면 푸념처럼 보이지만 그분은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해보니까 정말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자기 속에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잘못된 자아가 많이 있어서 우리 주님이 자기의 마음에 쉬실 곳이 없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알게 되는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아버지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들으면서도 결국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주님을 열렬히 원하면서도 주님이 우리 속에 오셔서 충분히 사실 수 있는 마음을 내어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망가진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가 망가졌는지도 모르고 자기 속에 자기가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서 부모에 대한 설교, 부부에 대한 설교, 자녀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 자신이 늘 가족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에 대해서는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것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주님을 믿으며 살아왔는데도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가족을 보니까 우리들의 모습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는데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은 누가 가르쳐 줘서 그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가족이 원래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시려 했던 그 창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잘 안 되는데 온 식구가 하나님을 안 믿고 있고 복음화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을 논의하기 전에 우선 필요한 것은 어쨌든지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고 교회에 출석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향한 가장 지혜로운 지침이고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이 자기를 고치도록 허락하는 가족들이 되어야지 만 망가진 것들이 변화되고 고쳐질 수 있습니다.
지난 3주 동안 우리들이 들은 설교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단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두 부부가 부부의 인격적 결합을 가로막는 문제들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돈을 하면 가정이 얼마나 변화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혼자만 알아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부부에 관한 설교를 들은 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가서 “당신이 시어머니 말보다 내 말을 들어야 한데” 하면 남편이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면서 ‘주님의 음성이 여기에 있도다’ 하겠습니까? ‘시어머니가 싫으니 어디 가서 뭘 듣고 와서 헛소리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말씀이 그러한가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는 그대로 묻어두고 어버이날이라고 고기나 몇 근 사 가지고 가서 꽃이나 달아들이고 오는 것을 효도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얘기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맺힌 것을 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은혜를 안 받았는데 아버지 혼자 말씀을 듣고 돌아가서 “얘야 내가 오늘 교회에 갔는데 네가 나를 다 용서하고 사랑해야된다고 하더라”하면 자식이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면서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또 부모가 자식에 관한 지난 주 설교를 아이만 나와서 듣고 은혜를 받고 돌아가서 “아버지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그릇된 기대로 나를 폭압적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이래요” 한다면, 아버지가 “내가 그렇게 못산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자식이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고 해결이 됩니까? 아버지가 여기 와서 그것을 듣고 아버지가 변화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내가 남편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펑펑 흘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편이 와서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에 대한 전도는 그냥 죽어 가는 영혼들에 대한 일방적인 전도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일부가 되기는 힘듭니다. 나에게 전도 받고 다른 교회에 가서 등록하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고 안 믿는 것이 내 삶의 자리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면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얼굴표정도 변합니다. 처음에 누구 손에 끌려서 교회에 나왔을 때는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뒤에 앉아서 예배 끝날 시간만 기다립니다. 그래서 인도한 사람이 좌불안석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인간이 변화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끌려나온 그가 나중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화를 받으니까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생각도, 마음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집니다. 예배시간에 주님을 만나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기도 하고, ‘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교인들은 내가 변하는 것을 압니다. 주일에도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억지로 나오던 사람이 수요 예배도 나오고 금요예배도 나오고 새벽기도도 나옵니다. 그리고 얼굴이 확 피면서 기쁨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성도들은 알고 ‘착한 자매’ ‘믿음 좋은 형제’라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우리 가족들입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저것이 교회에 미쳤구나’하는 것 하나입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엄청 많이 변했는데 가족들은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기껏 한다는 말이 ‘교회에만 정신을 팔고 다닌다’고 핍박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정말 변한 것을 충분히 알아주고, 그래서 내가 전하는 복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오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 앞에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래서 넘치는 사랑으로 모든 핍박과 박해를 용서하고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서 가족들에게 본을 보이면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아직 신앙적으로 미숙합니다. 한편으로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새벽에 나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남편이나 아버지, 자식들의 불쌍한 영혼이 주님을 알고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기도하고 가서, 남편과 대판거리 싸우고 아버지에게 대들고 자식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다 보니까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주님이 당신을 너무 사랑하십니다”를 이야기할 용기가 있는데 가족에게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족들과는 신앙을 기준으로 점점 장벽이 쌓여 갑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우리를 이해 못합니다. 가끔 가족들이 우리를 찌르듯이 하는 한 마디는 “예수 믿는 다는 것이...... 그러니까 내가 교회에 안 간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거기에 상처를 받으면서 더 이상 신앙에 대해서는 가족 앞에서 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어울려서 되지도 않는 신앙의 얘기를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교회에 와서 지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좋은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가르쳐 주면 지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주님을 믿은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족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들추어내기 싫은 그 치부를 다시 한 번 들추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예화: 교회 다니던 것을 핍박하던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신앙의 자유를 주셨다’고 말하였다는 자매 이야기)
고개는 끄떡였지만 그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 어머니가 예수 안 믿고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신앙의 자유를 준 것이 됩니까? 그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상당히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가족에게서 느끼는 신앙적인 소외감이 종교적인 생활을 더 열심히 하도록 우리를 내 몹니다. 휴일에도 말도 통하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집에 있는 것보다는 교회에 와서 지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일하면서 신앙이 점점 자라는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집에만 가면, 그리고 “부모님 교회 다니십니까?” “남편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존경하는 목사님의 동생이 두 달에 한번쯤 술을 먹고 횡포를 부리는 것 때문에 강단에 올 라가면 교인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는 내용)
저도 안 믿는 집안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때 마음이 아프고 어떤 때 괴로운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이러한 고민을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
(예화: 부모님의 핍박을 받는 한 자매가 빨리 시집을 가야만 하겠다고 말했다)
시집오라고 하는 형제가 있어도 “우리 부모를 내버려두고 어떻게 발걸음이 떨어지겠느냐”고 말해야 복음적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하며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말이 안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나라 위해 살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교회에 다니는데, 부모님들은 ‘교회에 가면 밥을 주냐 떡을 주냐?’ 합니다.
이렇게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언어가 안 통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중에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말하기가 싫어집니다. 가족간의 대화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태도가 성경적이겠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대접을 못 받으셨으니까’ 한다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제대로 적용을 해야 신앙에 도움이 되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설령 예수님께서 “그래 네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못 받는구나”하셔도 우리는 “주님, 저분들의 불 신앙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족 때문입니다”라고 말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과 대화를 하려고 애를 써야하지 않습니까?
(예화: 중국에서 늦은 밤에 저녁을 먹으려고 나갔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곤란했던 이야기-결국 새우와 코카콜라를 그려서 사먹게 되었다)
언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지만 의지를 가지니까 최소한의 대화는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중국사람입니까? 그림 그려야지 만 저녁 얻어먹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가족 만나기를 소 닭 보듯이 해서 언제 복음이 전해지겠습니까? 교회에 와서나 지체들 손잡고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집에 가서는 소 닭 보듯이 남편을 쳐다봐서 언제 복음이 전해지겠습니까? 그런 것은 우리의 가족들이 예수를 믿도록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구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이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과 이야기를 통할 수준에 있는 사람들만 찾아다니셨습니까? 신령하고 하늘나라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고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만 찾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니고데모와 나누는 대화를 보십시오. 정신병자와 나누는 대화 비슷합니다. “거듭나야 하느니라”라고 하셨을 때,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큰 몸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갑니까?”라고 했습니다. 저라면 “너와 이야기하느니 돌멩이와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 가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절하게 “내가 말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이야기한다. 성령이 어떤 것인 줄 아니? 바람이 눈에 안보이지만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성령도 그러하단다. 그런 성령에 의해서 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단다”하시며 그 수준에 맞게 내려와서 상세하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우리 형제, 그리고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자식들. 살아있으면 주님에게 고통이요, 죽으면 믿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감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심판 받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심한 표현이 아닙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가족들은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가운데, 과부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과부가 있으면 교회에서 도와주는 것이 좋지만, 먼저 자식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자식과 친척으로 하여금 그 과부를 가정적인 차원에서 돌보게 하라. 믿으면서도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삶으로 믿음을 배반한 자이고 불신자보다 악한 자이다” 과부가 된 친족이나, 과부가 된 부모나 형제를 물질적으로 돌아보지 않는 그 사람이 믿음을 배반한 자요 악한 자라고 할 것 같으면 영혼을 버린 채 내버려두는 사람은 주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 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을 보면, 저절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산 넘고 물 건너 집요하게 우리를 찾아와서 결국은 우리를 녹여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먼저 믿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가족을 진정으로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이 이단으로 알려진 교파에서 영생의 보장이 없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거나 혹은 전혀 생명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내버려두는 것은 교회에 명부를 올려놓고 스스로 양심의 부담을 더는 것과 같은 심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신자인가입니다.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교회 출석을 내버려두는 것도 직무 유기입니다. 우리 형제, 우리 남편, 우리 부모, 우리 자녀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을 아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뿌리쳐도 집요하게 산 넘고 물을 건너 우리에게 다가와서 결국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를 굴복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져 온 것입니다.누군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그런 사랑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실어서 집요하게 우리의 가족들에게 다가가서 그 가족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일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해버리고 부모가 죽었는데도 신앙의 자유를 찾았다고 나 생각하고, 부모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면 시집이나 가버려야겠다고나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이 완악한 죄인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는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생각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들을 보면서 실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를 이렇게 예수 믿게 만드셨으니 우리의 가족도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다’하는 바램을 갖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시지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예수를 안 믿을 때 느끼는 믿는 가족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견딜 수 없이 괴롭겠지요. 그리고 온 가족이 손잡고 함께 교회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홀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맺힙니다. ‘내 남편은, 내 아내는, 우리 부모는, 우리 자식은, 언제나 한번 함께 신앙생활 하는 날이 올까?’ 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복음만 전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하는 믿음이 있으면 그래도 난데, 그것도 아닙니다. 교회 좀 나가자고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열심히 권하다가도 한번 수틀리면 남편과 대판 싸워서 그 동안 쌓아온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고 맙니다. 특별히 젊은 부부들인 경우에는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다가도 돈 문제만 나오면 예민해져서 양보를 안 합니다. 오랫동안 부모를 위해서 기도한 것도 진심이었는데 돈 문제와 같은 실제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양보를 못하는 것도 진심입니다. 자기도 자기를 어떻게 가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모두 주님을 덜 사랑하는 미성숙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가족의 영혼이 최고의 가치다. 내 부모가 주님을 믿을 수 있다면 내게는 아까운 것이 없다’ ‘내 남편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내 자식이 예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내가 불 가운데를 자나며 살아도 노래를 부를텐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골육 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물론 여기서 골육 지친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바울이 그 부분을 기록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가슴에 다가왔던 사람들은 자기 가족과 친척들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도바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잘 안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운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그가 자기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황제 앞에까지 섰던 담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 가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뼈아픈 마음이 그 로마서의 구절을 쓸 때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끌어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새겨서 읽어보십시오. “내 살과 뼈를 함께 물려받은 가족들 중에 전부 다는 말고라도 몇 명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져서 저주를 받을지라도 나는 정말 원하는 바이다” 여기서 ‘끊어져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지옥에 들어간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어떤 고난을 받고 그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미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는 몸이니 그 형벌을 받고서라도 내 가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영혼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같은 처지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가족도 구원 못하고 주의 일을 한다고 설치냐’라고 말하지만 얼마나 많이 우리들이 그 문제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잠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도 그 생각을 안 하는 날이 없을 정도로 가족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릅니다. 가슴에 못이 됩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가운데서 깨달으며 가족들이 손에 손을 잡고 신앙생활하고 말씀에 함께 은혜를 받고 형은 동생에게 용서를 빌고 동생은 형을 용서하고 아버지는 자식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식은 아버지와 맺힌 것을 풀고 딸은 어머니에게 용서를 비는 그런 아름다움 복음적인 화해와 사랑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풀리지 않는 그리움이고 해결되지 않는 아픔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애를 쓰고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앙의 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에워싸여서 홀홀 단신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얼마나 정신적으로 외로울까요? 주일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가도 나눌 가족이 없습니다. 밥 먹는 식구는 있고 한 이불 덮고 누워 자는 남편은 있는데 신앙의 동지가 없습니다. 그 외로움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우리는 분명히 힘듭니다. 그러나 밑을 내려다보면 우리는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예화: 북경에 갔을 때 탈북한 한 자매가 준 편지 내용-이미 죽었거나 죽어 가는 자신의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와 팔려 다니게 된 자신의 처지)
‘나는 이렇게 짓밟히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내 동포 내 가족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아무 희망도 없이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하는 피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자매의 마지막 편지에 ‘목사님 내게는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빨리 돈을 벌어 함께 도망한 동무를 사와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빨리 가족들에게 가서 나를 죄와 어두움에서 구한 하나님의 참 사랑, 희망이라고는 편하게 죽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임한 이 예수의 구원하시는 놀라운 사랑을 가족들에게 전파하고 죽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비행기에서 그 편지를 다시 한번 읽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편안하게 살고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생활 하느라고 고생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매에 비하면 우리의 고난은 감히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물론 힘들지요. 그렇지만 고통보다 큰사랑을 우리들이 받았지 않습니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되겠다고 십자가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우리들이 안락한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영접했습니까? 예수를 믿고 나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을 받아들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나, 이제 주님의 사랑에 빚을 진 사람, 어디든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겠노라고 다짐을 했는데 주님이 “제일 먼저 네 가정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주님의 목소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 물론 우리는 그들의 강퍅한 마음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이 기도했더라면, 우리가 가족들의 영혼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애쓰고,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골육 지친을 인해서 쏟아지는 눈물과 고통으로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산 제사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그런 사랑, 그런 인내가 있었다면 지금쯤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찬송;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우리의 사랑 없음, 그리고 우리의 눈물의 부족, 그리고 가족들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자기 헌신의 마음, 그것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가족에게 비치는 복음의 빛을 가리운 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마음속에 가족들을 향한 고통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아버지여 당신이 그렇게 중보 하시던 우리의 가족이 여기 주의 자녀로 서있나이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키를 한자도 자라게 할 수 없고 우리의 힘으로 무엇하나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더군다나 그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복스러운 회심의 역사는 우리의 손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주고 살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힘을 다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이 내 영혼인 것처럼 “나에게 아들을 낳게 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리겠노라”고 몸부림치던 라헬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가족들을 교회에 데려다가 선명하고 분명한 복음을 듣게 하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어두운 마음에 내가 만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를 일으켜주시기를 기도하는 것 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고 우리의 양심이 물을 때 한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의 변화를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려고 복음이 울려 퍼지는 그곳에 그를 데려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온가족이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 살아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우리가 감격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아름다운 사랑을 우리 온 가족들이 함께 하고 우리뿐 아니라 그들도 고쳐져서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된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슬하에서 자라나고 태어날 아이들이 얼마나 더 많이 천국백성들이 될까요? 우리는 아마 우리 혼자서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우리의 가정을 통해서 할 수 있을 것이며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하는 주의 도구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행사를 하듯이 법석을 떨면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성과를 재고 교인들의 수를 늘리기 위한 성공주의적인 욕망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오직 이것, 우리에게 주셨던 그 놀라운 구원의 능력, 우리에게 알게 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하시는 사랑, 그것들을 우리 가족들도 받게 해달라고 그들도 자신의 죄와 강퍅함을 뉘우치고 우리를 고치셨던 것처럼 또한 자기들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상처받은 모든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고칠 수 없었는데- 서로를 통해 역사 하시는 주님의 손이 우리 모두를 고치셔서 주 없이 살았던 어두운 날의 수많은 상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화목제를 드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한 식탁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한 샘에서 성령의 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복된 가정이 되고 싶은 것, 그것만이 우리의 소원일 따름입니다.
6.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전도하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하고도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8장을 읽을 때마다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오함, 그리고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집요함과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지,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으로 접어듭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고백하기를 “내가 참말을 하고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이 아신다”고 전제하면서 자기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족과 형제, 친척들, 동포를 향한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분명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런 사랑을 모르는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이 얼마나 강한지 그것이 마음속에서 고통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 때문에 오는 경우도 있지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워낙 강한데 현실이 그 소망을 이루어 주지 못할 때 그 강력한 희망은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통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1절부터 3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가정이 왜 복음화 되지 않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를 고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복음화되지 않는 것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제일 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가족들의 마음이 워낙 강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지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 서신을 기록한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과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역시 우리의 그런 추측은 가능합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보다 넓은 안목에서 보면 아직 가족들의 구원의 때가 이르지 않고 추수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상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역시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복음화 되지 않는 것이 그런 이유 중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는 가정을 복음화 하기 위한 중요한 변수라고 하는 것만은 여러분들이 인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다른 답이 나옵니다. 그중 두 가지가 오늘 성경에 나오는데 첫째는 사도 바울과 같은 로마서 8장의 사랑의 감격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가족의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와 관련지어서 물어볼 때는 우리는 적어도 ‘섭리가 아직 안되었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 ‘마음이 강퍅하다’고 핑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자기를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면서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온 세상을 향해서 부르짖듯이 외칩니다. “내가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사망이 나를 위협하고 악한 영들의 세력이 나를 도전하고 세상의 죄와 유혹이 나를 괴롭히고 환난과 기근과 핍박과 견딜 수 없는 고난이 나를 에워싸도 너희들이 그것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줄 알았더냐?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면서 한없이 자유한 것입니다. 핍박을 하면 핍박을 받지만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미치지 못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공로입니까? 환난이나 핍박이나 어떤 이 세상의 피조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어주심, 그 은혜의 강력한 부어주심이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을 향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했거나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며 살지 못했던 것조차도 뛰어넘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해 부어지고 있는 것들을 사도 바울이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넘치면 넘칠수록 한 쪽에서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이 얼마나 큰데 내 사랑하는 동포, 내가 사랑하는 친척, 어린 시절부터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내 형제들, 그리고 나의 부모,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그들은 이 사랑을 모른다’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밀려오면 밀려올수록, 골육 지친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찬송: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도만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처럼 위대한 삶을 살지 못했고, 이 사람처럼 헌신적으로 살지 못했지만 우리도 주님의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이 누구를 향해서 차별이 있는 고난이었습니까? 바울을 위해 더 많은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서는 살절음 하나 주시지 않았던가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사도뿐 아니라 사도가 감격하고 있는 이 사랑을 우리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고 우리에게도 한 때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좋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감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쓰레기같이 더러운 추악한 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주님의 사랑에 감격했습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올 때에 우리는 정말 우리의 가족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의 구원과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주시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주 앞에 기도하면서 흘린 눈물을 병에 담는다면 얼마나 많은 눈물일까요?
문제는 우리들이 항상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알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우리 동포, 그리고 우리의 골육 지친들을 향한 사랑을 항상 간직하고 그들이 돌아와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날까지 우리들이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쉼 없이 간구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중국을 다녀오면서 늘 생각했지만 북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그 자매의 표현에 의하면 ‘아무 희망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고 그들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이관데 우리에게 이런 자유를 주시고 마음껏 하나님 믿고 하나님 섬기고 의지하고 전파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을까?’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많은 지체들을 향해서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달라. 우리 조국 교회에는 아직 길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고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목회자가 분명하게 가르쳐주면 아마 넘치도록 헌신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족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여러분의 가족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그 가족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로마서 8장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줄 알고 왜 (찬송: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하며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좋으신 주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이제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로마서 8장의 사랑의 감격을 매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혼을 위한 깊은 사랑은 우리가 가져야 되겠다고 의지를 갖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영혼 속에 터트려져서 생수처럼 쏟아져 나올 때 우리의 말, 우리의 언행, 우리의 모든 것들 속에서 그 사랑이 흘러나와서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어떠한 영적인 힘보다 위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화: 전에 모시던 목사님의 간증-가난한 시골교회에 복음을 전하러 가서 귀신들린 청년을 만났는데 그를 고쳐달라고 끌어안고 3일 동안 울며 기도하자 귀신이 나간 이야기)
사랑은 그 모든 능력보다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 매맞고 신앙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매가 여러분들을 돌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때리시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혹독한 징계에도 녹아지지 않던 마음이 환난 속에서 우리를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주님의 사랑에 녹아져서 누가 우리를 두들기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무릎을 꿇고 인격적으로 승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힘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족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는 했지만 얼마나 그 사람들을 영혼으로 보고 사랑하는 지에 대해서 한번 반성해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사랑에 감격하고 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사는 내적인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오늘 로마서 8장의 감격을 갖고 동족을 깊이 사랑하고 골육 지친을 아꼈던 바울과 같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깊이 반성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이제 여러분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고 사도에게 권고를 받는 사람은 그 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그 주 예수를 믿으면 자기와 자기의 집이 구원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아직까지도 가족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을 향한 주님의 성적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한없는 감격을 유지하며 살았더라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모든 것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의 성적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 안에서 변화 안되고 고쳐지지 않을 때 여러분들은 목회자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에게 다가가서 “너 때문에 목회 다 망친다”라고 말해주면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빌면서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가 받는 성적표입니다. 교인이 늘어나지 않아도 제 책임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저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서있는 내 성적표입니다. 하나님, 가족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전하는 통로인 제가, 그 통로가 막혔기 때문에 그 사랑을 온전히 전해줄 수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이 가정의 달에 정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여러분들의 가족을 살아있게 하셔서 여러분들에게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긴장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님 사랑을 회복하는 선교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아나데마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아나데마는 사도가 오늘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말한 ‘저주를 받아’라는 말이 희랍어로 ‘아나데마’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저주를 받는 것이 성경에서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 형벌의 의미를 사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그런 형벌을 기꺼이 감당하면서라도 자기의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나는 하나님이 없어도 좋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수사법적으로 과장을 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비참하고 고난과 버림 받은 삶 같아서 사람들이 볼 때에 ‘하나님도 너를 버린 자와 같다’라고 하는 욥과 같은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골육 지친 과 동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택하겠다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족이 복음화되지 않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최대의 소원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족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실 것입니다. 위해서 기도하시지요? 기도하실 것입니다.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시지요? 원할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죽을 수밖에 없는 가족들이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온다면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생명을 취해도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가정이나 성도들의 가정을 돌아보고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표리부동한 인간이고 연약한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새벽마다 눈물로 가족들의 구원과 변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예수 믿으라고 권하고 예수 믿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희생을 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예화:집안이 예수를 안 믿는 어느 형제의 소원은 형제들이 한 교회에 다니는 것이었는데,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더 줘야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결정적으로 넘어진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 형제에 의해서 그 집안이 복음화 될 가능성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형제들의 마음이 유산 문제 때문에 갈갈이 찢겨졌는데 복음을 전하면 듣겠습니까? “형님, 그리고 아우들아, 나는 유산이 필요 없다. 나에게는 다른 유산을 달라. 너희들이 1년만 교회에 출석해서 신앙생활을 하면 내 유산을 다 주겠다” 그렇게 못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안 갚아 주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그 정도입니까? 또 안 갚아 주시면 얼마나 신이 납니까? 하늘나라에 그대로 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식의 시험에 결정적으로 넘어져서 다 쌓았다가 한번에 다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때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모든 소원이 되게 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죄와 어두움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제 말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생을 막 살다가 이 세상의 문제가 인생의 큰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대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크게 다가와서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뭔가 신앙에 대해서 결단하지 않으면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것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모아지면서 우리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가족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진심인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유산 문제 하나를 가지고도 가족들의 영혼과 유산을 바꿀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그런 기도가 진실일 수 있습니까? 역으로 믿는 사람들의 가족들 가운데에는 믿는 사람에게 질려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라도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다니는 교회에는 안나가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기심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소유가 없으니까 마지막 남은 것은 자기 몸, 자기 영혼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처럼 저주받은 자가 되어서 완전히 버림받는다고 할지라도 원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주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욥과 같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내가 짓이겨진다고 할지라도 나를 한 번 죽일 수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세계가 내 동포, 내 지친, 내 골육들에게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자기가 그렇게 되어서라도 가족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데마 정신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을 구원으로 인도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과격하게 다루시는 지 모릅니다. 포기하십시오. 달라고 하면 다 주십시오.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예화: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 중 식인종을 만나게 되어 ‘하나님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서 이 렇게 죽는 것이 한없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내 동포들이 보내준 이 많은 선교비를 쓰고 선교도 못하고 여기에서 이렇게 죽는 것은 최선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족들의 구원을 희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것밖에는 소원이 없는 것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이런 모범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언제 용서하셨나요?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겸비함이었습니다. 그 내려오신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감탄을 하셔서 “그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왔으니 이제 내가 너의 이 희생을 기억하고 내 백성의 죄를 용서하리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유대 광야에서 그 모진 굶주림 속에서 사십 일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시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그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골고다에 가는 순간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힌 순간도 아닙니다. 완전히 숨을 거두신 그 순간에, 제물이 완전히 죽은 그 처참한 죽음 위에 우리 구속의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밟고 가족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나를 넘어 가족들에게 전해지도록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이 무엇인가 곤궁하거나 필요한 위치에 놓여 있을 때 신 불신 여부를 불문하고 헌신적으로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의 그 선한 행실을 통해서 복음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아무 짐도 지지 않으려고 하고 마지막에는 가서 큰 소리 치면서 횡포하듯이 안 믿으면 모두 지옥 갈 것이라고 협박하는 식의 복음 전파를 하면서 자기가 무슨 엄청난 능력을 받은 초대 교회의 성도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합니다. ‘저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목표이고 그것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내 영혼에 자유가 없겠노라’고 하는 갈망이 있다면 희생하는 과정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과정입니다.
고린도서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허비하도록 내어주면서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고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얼마나 기쁩니까? 사랑이 그 일을 시키고 있는 동안에는 무거운 것이 무겁지 않고 아픈 것이 아프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종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고 여러분들이 그런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데마의 정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집안의 며느리이고 생활이 같은 차지에 있다면 여러분들의 동기간보다 훨씬 더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안 믿는 형제들이 하루 한번 찾아간다면 여러분은 두 번 찾아가야 합니다. 교회 핑계를 대면 목회자인 제 가슴에나 다가오지 안 믿는 형제들의 가슴에 그것이 다가옵니까? 모든 방면에서 자기가 희생을 하고, ‘그 희생을 하는 것이 손해다, 고통이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한 투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저 자녀는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었구나’를 입증할 수 있는 삶 속의 선교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라’고 말했는데, 그가 동족을 위해서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엇을 아껴둔 것이 있었습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동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바울을 그렇게 심하게 핍박했습니까? 가는 곳마다 바울을 박해한 주인공들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골육 지친이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도 수없이 맞고 돌로 참을 당하고 죽은 자처럼 여겨져서 성밖에 내침을 당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아픔, 그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동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사도는 그런 수많은 동족들로부터 당한 그 고통과 견딜 수 없었던 그 모든 아픔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무작정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페가 가져다준 아나데마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그런 정신을 가졌더라면 우리 가족들은 벌써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오래 전부터 빛 가운데 살아서 그 영혼들이 더 놀랍게 치유되고 고쳐져서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에게도 화해와 은혜를 베풀어주는 도구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첫 번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다음에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갔을 때, 우리의 가장 빛나는 훈장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어떤 지위를 누리며 살다 왔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아마 그 나라에서는 부끄러움이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부끄러움과 저주받은 것 같은 삶이 그 나라에서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 성도가 5천명이 넘는 중국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야기- 강제 노동수용소에 유배되어 30년 가까운 세월 고난받다가 풀려났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죽었고 자녀는 신앙을 전혀 모르는 열렬한 공산당원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이렇게 저주받은 자처럼 되었는데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울고 있을 때 “얘야,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선명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분이 “그럼요 주님, 저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유 때문에 가족도 잃어버리고 청춘 도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자녀들도 잃어버렸고 나를 알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폐인처럼 취 급을 해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했다는 내용)
이것이 아나데마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가족의 구원을 바랬다고 하지만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양보했습니까?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저주받은 자처럼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역사는 피를 밟고 지나가는 역사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은혜의 역사는 피 뿌리는 고난의 길을 밟고 지나간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에게까지 복음이 그렇게 미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정의 선교사로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먼 곳에 나가서 전파하지 못해도 거기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거기서 죽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가족이 삽니다. 거기서 우리가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면 우리의 가족들이 삽니다.
7.기다리시는 하나님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11-24)
원래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는 것입니다. 혹은 부모가 그런 유언이 없이 유산을 남기고 죽으면 자식들이 법에 따라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의논을 통해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물려받는 것을 유산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의사 표현인 동시에 설령 부모가 유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더라도 자녀는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유산을 처분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이런 도리를 모두 뭉개버린 아주 패륜아적인 한 아들이 나옵니다. 한 아버지 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번째 아들이 바로 그런 몹쓸 자식이었습니다. 멀쩡하게 눈뜨고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가 죽으면 내게 돌아올 그 유산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재산을 나누어주자 얼마 못되어서 그는 재산을 전부 현금으로 처분해서 돈을 가지고 멀리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 그리고 가족들의 감시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남의 나라 땅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아버지의 집에서 꿈꾸던 방식대로 소신껏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했습니다. 성경에는 허랑방탕 했다고 나오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뭔가 돈을 계속 벌어보려고 애쓰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재산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를 해서 죽을 때까지 허랑방탕한 삶을 계속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아들은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아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의 손에 이끌려서 오늘 저희 교회를 처음 찾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기분 나쁜 이야기지만 성경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집나간 자식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찾아서 먼 나라로 갔던 것처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 중의 어떤 분들은 ‘내가 하나님의 품에 있어 본 적이 없거늘 어떻게 당신이 나를 향해서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물으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과 가족관계로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어서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성품과 영혼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비록 자기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그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꿈꾸셨던 것은 우리는 그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자녀가 되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죄가 들어왔고 그 죄는 온 세상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그 죄는 우리를 불행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눈을 멀게 만들어서 자기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불효막심한 자식들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전에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다고 할 지라도 결국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며 살도록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여러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전에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안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전에 하나님을 믿거나 혹은 교회에 출석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마음에는 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고 커다란 두려움이 있거나 아픔과 시련이 닥치는 어두운 인생의 밤이면 하나님이 생각나는 그런 분들도 여기에 계실 것입니다. 그분들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택하셔서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을 주셨고 하나님을 믿게 만들어 주셨는데도 불순종하고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아버지의 간섭을 뿌리치고 도망간 자식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 속에는 두 개의 욕망이 늘 싸우고 있습니다. 한 쪽으로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이제 하나님을 믿어야 될 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과 또 한편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면서 살기 싫고 내 마음과 육신이 원하는 대로 내 멋대로 인생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살고 싶다’는 이 두 가지 욕망이 우리 속에 싸웁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 슬프고 외롭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이 한없이 두렵습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우리 인간 속에는 공존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들이 그렇게 우리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원래 친구가 많은 법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돈이 있으면 대부분 대접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는 그저 자기네 나라 시골구석에서 평화로운 가족적인 삶을 떨쳐버리고 거액의 돈을 거머쥐고 이국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낯설고 물 설은 곳이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도 구할 수 있었고 사업도 얻을 수 있었고 여자들도 구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의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집에 조용히 있었더라면 맛볼 수 없는 수많은 즐거움과 쾌락들을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친구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어디에 가든지 돈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그러한 인생을 살면서 그는 얼마나 신났을까요? 그는 아마 아버지의 집에 그냥 머물러 있는 자기의 형보다는 자신의 선택이 훨씬 훌륭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렇게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서 이 먼 나라로 도망 나와 가족들과의 관계를 끊은 것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은 계속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 사업에 실패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허랑방탕한 삶으로, 다시 들어오는 물질보다는 쓰는 돈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날 그는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리고 나서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돈이 사라지자 친구도 떠났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의 인생은 잔치집처럼 즐거워하는 나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실직자가 되었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설은 타국의 땅에서 그에게 인정과 자비를 베풀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커다란 흉년이 닥쳤습니다. 당시에는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해서 먹고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곡식이 귀해지고 곡식이 귀해지면 인심이 각박해 집니다. 처처에 도적과 강도들이 날뛰고 민심은 흉악해 지기 시작합니다. 하필이면 이 사람이 거기 있는 동안에, 하필이면 이 사람이 실직을 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돈들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 있는 주민들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이런 흉년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국에서 온 부랑아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겠기에 사정을 해서 그 고장 어떤 사람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고 그를 종으로 받은 그 주인은 그를 먼 들에서 돼지를 치는 사람으로 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가증스럽고 더럽게 생각하는 동물이 돼지입니다. 그래서 이 돼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가장 불결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유대인으로서 돼지를 치는 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 남은 마지막 자존심까지 모두 내팽개치고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생의 막장에까지 내려갔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돼지를 쳤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쥐엄 열매라는 것이 있는데 작은 감 같은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먹지 않고 사료로 쓰는 야생 열매입니다. 너무 허기지니까 돼지우리를 기어다니면서 그 사료라도 먹어보려고 뒤졌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 표현으로 말하자면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우리를 기어다니다가 뜨물이라고 먹어야 되겠다고 돼지 죽 통으로 기어갔는데 그것마저 깨끗이 치워져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막장까지 내려갔고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도록 자신의 모든 존귀함과 자존감,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내어 던졌지만 그는 결국 굶어죽는 상황에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을 창조하시고 우리들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떠난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굶고 거렁뱅이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까? 나는 오래도록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없이 살았지만 이제껏 까지 잘 먹고 잘 살았고 지금도 한 시민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재력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이 산 것이 다 산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모두 죽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도 이 둘째 아들과 같이 극단적으로 비참하게 굶어죽을 위기에 놓이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의 양식만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먹고 입을 것은 있어도 자신의 영혼의 진정한 양식이 없기 때문에 곧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굶주림, 영혼의 목마름은 육신의 배고픔 못지 않게 그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재앙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인류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잿더미가 된 다음에 굶주림과 가난으로 고통받을 때에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강한 나라가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로 그런 신념을 가지고 60년대와 70년대를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마 가장 근면한 민족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만한 부를 누리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이렇게 부유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옛날보다 훨씬 행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모든 것이 넉넉한 속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옛날을 회상합니다. 최근 어느 신문에 보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이 누리고 있는 생활 수준은 옛날로 말하자면 왕족들이나 누릴 수 있었던 수준의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왕족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폐하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도 왕족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오늘날을 생활보다는 보리밥에 감자 그리고 채마밭을 일구고 논밭을 갈아엎으며 이웃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옹기종기 모여서 살던, 적당히 결핍했던 그 옛날 젊은 시절의 고향이 훨씬 행복했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물질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화: 전에 다니던 교회 맞은편에 모 건설의 회장집이 있었는데 그가 자살을 기도했었다-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웠으면 자신의 가슴을 칼로 짓찌어야 했을까?)
우리에게 물질이 있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삶에 만족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옷을 입고 잘 먹는다고 해서 만족을 누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약간 고등하고 문화화된 짐승일 뿐이지 인간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물질로서만 살 수 없는 영혼의 목마름이 있고 정신적으로 자유를 찾아서 날아가고 싶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중 가난한 사람들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점심 끼니를 염려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도 역시 만족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양식은 있으나 정신적으로 흉년이 든 것과 같은 이 때에 어디를 찾아봐도 우리의 마음에 참된 위로를 얻을 길이 없고 지치고 낙심한 우리의 영혼이 돌봄을 받을 수 없는 황폐한 외로움에 휩싸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다고 해서 그가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군중들이 오가는 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어도 그는 얼마든지 외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 안에 있는 참된 외로움은 단지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옆에 있어주거나 이런 저런 세상적인 위로를 해주는 것만을 통해서 진정으로 그 영혼의 고통이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결국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 바로 이런 지점입니다. 그래서 모두 흉년이 들고 인심이 사나와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통에 고통이 가중되어서 마지막에는 자신을 스스로 짊어지고 서있는 존재의 무게조차도 무겁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 바로 마지막 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고통 하는 모습의 그림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중에 이런 분들은 없습니까? 가만히 설명을 듣고 보니 오늘 예전에는 부자인 아버지의 집에 살았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이 외롭고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돼지우리를 기어다니며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없어서 엎드려져 흐느끼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저는 묻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불행하게 되었습니까? 왜 그렇게 마음과 정신의 고통이 가중되어서 인생에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대답은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돈도 많고 아버지가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어디가도 무시당하지 않는 가문에서 태어나서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런 돌봄을 받으면서 그런 훌륭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비록 가난하게 자란다고 할지라도 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흠뻑 받으면서 자라나는 아이는 가난으로 인해서 인성이 굽거나 혹은 집안의 문벌이 높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에게 무시를 당해서 비굴한 인간이 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망가진 자식들을 우리들이 많이 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지 못하면 이 세상에 물질이나 좋은 환경으로도 해결할 수 없도록 심성이 굽어버리고 잘못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쓰레기 같은 엘리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쟁쟁한 사람들이지만 저 사람도 인간인가 할 정도로 내면 세계가 다 썩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망가진 사람들이 엘리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을 기면서 살아가는 막장 인생들에게도 있습니다. 반대로 막장에도 건강한 인간이 있습니다.
요지는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으면서 자라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되는 첫째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란 자식들은 이 세상을 향해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존감이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좌절과 억압, 슬픔,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고통스러운 눈빛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친구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억압하고 고통 주는, 맞서 싸워서 꺽어야 할 적수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좋은 것은 알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도 전 이제껏 잘 살아왔습니다” 사셨겠지요. 그러나 산다고 해서 그것이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에 가면 사람 키 몇 배나 되는 굉장히 커다란 선인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아시스 옆이 아니라면 사막 한가운데에서 나무를 볼 수는 없습니다. 뻗어있는 선인장에는 젓가락만큼 큰 가시도 있습니다. 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가시가 원래는 잎사귀였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비는 별로 안 오고 땡볕이 내려 쬐는 사막에서 자라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어쩌다 한번 빨아들이는 수분을 밖으로 토해내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스스로 보호하다가 보니까 잎사귀가 그렇게 가시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산다고 해서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는 고아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고아를 부러워하는 고아가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모는 있지만 오히려 부모가 없는 고아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식이 있지만 무자식 상팔자를 외치고 다니는 부모도 있습니다. 모두 정상적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지 이 세상에 생존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생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단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가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장 벽에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입니까? 우리가 파리입니까? 우리가 시골 쾌쾌한 헛간에 살고 있는 지렁이나 벌레입니까? 단지 목숨을 부지하고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마시며 사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의 전부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여러분들을 창조해 놓으셨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가족관계를 가지고 교제하면서 살아서 살아도 영원히 사는 사람들로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셨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해서 완전한 만족을 누리고 잠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영원을 향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이 인생이 끝날 때에 여러분들이 인생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존재들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청구해서 먼 나라로 떠나가서 허랑방탕 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살아가면서 하나님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외로움과 고통이 어떤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더 많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만 한다면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인지를 알텐데 말입니다. 오늘 이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는 지위를 잃어버리고 이제는 돼지의 사료를 주어먹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지금도 그렇거니와 마지막에는 이와 같은 고통을 느끼고 철저하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로서 맛보는 뼈아픈 외로움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이런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이 인생에 있어서 막다른 고통에 직면할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포자기해 버리고 절망해버리거나 또 하나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서 다른 쪽으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들이 바로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택했습니다. 전자를 택했더라면 아마 이 사람은 그곳에서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희망이 아직 남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무서워하고 죽음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에 빠지게 되면 죽음이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 다니던 죽음이 언제든지 그 죽음의 강물에 자기 스스로 옷 벗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이 절망의 상태에서 인간의 심리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이 사람이 바로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는 생각은 떠날 때도 하지 못하였거니와 돼지우리에 들어오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절망의 지점에 이르게 되자 이 사람은 결국 생각을 바꾸게 되었고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사람은 지금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기의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일하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품꾼들이 생각났고 그 품꾼들의 처지와 자기를 비교했을 때 그들의 처지가 자신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전에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처지와 품꾼들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마지막 인생의 벼랑 끝에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하시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둘째 아들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그 마지막 지점에 서서 쥐엄 열매 조차 찾을 수 없고 굶어 죽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갈등과 고통 속에서 남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죄의식 속에서 그리고 인생의 곤고한 여러 가지 많은 일들로 인해서 외롭고 괴롭고 힘든 처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기쁘고 주님은 당신을 믿고 의지하면서 사는 우리 때문에 행복해 하시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나면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아들이 인생의 절망 중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식 세계 속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최초로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여야 하리라’ “아버지, 내가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것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로 여기지 말고 품꾼 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우를 해주십시오. 그렇게 대우를 해주셔도 저는 먼발치에서나마 아버지를 뵈옵고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도 그런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청소년 때까지 교회를 다니고, 다시 스물 한 살 때에 제 발로 교회에 걸어 들어와서 회심을 하고 그 이후로 이제껏 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밤새 공부를 하다 새벽이 되면 멀리 밭 한가운데 있는 교회에서 손으로 치는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처음에는 그냥 들었는데 종소리가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오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닌데 그 새벽공기를 가르고 안개 속에서 울려 퍼지는 깨끗한 종소리가 마음에 와서 닿을 때마다 어렸을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이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주님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는데도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하면서 그 종소리가 강력하게 저를 이끌었습니다. “내가 너를 택했노라. 너는 내게 돌아와야 하느니라” 그 종소리를 6개월 정도 들었는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종소리가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밀려드는 것은 ‘내가 그렇게 쓸데없는 책들을 많이 읽고 내 나름대로 인생의 생각과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살았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글들을 읽고 그런 것들에게서 무엇을 얻어먹으면서 인생을 살았는데 인류평화는 그만두고 왜 이렇게 내 자신의 인생의 무게조차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까?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사상가들, 내가 그렇게 심취했던 소설가들,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철학자들, 이런 사람들이 도대체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들은 정말 이런 인생의 무게로부터 벗어났는가?’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인생의 무게를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약간은 지성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비용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점점 무거워 질 때에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저 종소리 안에 해답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지금 내가 이처럼 내면에 갈등을 느끼고 죽을 것처럼 몸부림치고 실제로 죽음 근처에 여러 번 다가갔지만 아무도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내 부모도, 동기간도, 심지어 친구도 알지 못하는데, 한 분이 그 종소리 속에서 ‘나는 다 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싫다고 몸부림치고 종교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쇠사슬이라고 부르짖으면서 하나님께 반항을 했지만 그러나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6개월이 넘는 갈등 끝에 생전 처음 제 발로 손바닥만한 작은 교회를 찾았습니다. 수요일 저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고 누군가가 풍금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풍금가락이 울려나왔습니다.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인생에 태어나서 최초로 안식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예전에 내가 와본 공간도 아닌데 거기에 들어가서 그 풍금 소리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마치 오랜 방황의 길에서 고향집에 돌아와서 씻고 식탁 앞에 앉는 것 같은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만 그런 마음을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예전에 하나님께 범죄해서 주님의 품을 떠났고 계속적인 불순종으로 우리의 인생에는 죄의 상처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그 잘사는 집에서 살던 아들이 오랫동안 타국에서 돼지를 칠 정도의 비참한 생활을 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의 몰골은 보통 동네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하고 더러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돈 보따리를 들고 손을 흔들며 고향을 떠날 때의 당당함은 사라지고 아버지를 보기를 원하면서도 아버지를 만나면 어떻게 하나, 그 고향에서 살고 싶으면서도 사람들의 눈에 띄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가슴 졸이며 동구 밖 먼길에서 힘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 원했지만 그를 발견한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 이 스토리를 성경에 기록하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는 아버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떠나던 그날부터 자기의 아들이 돌아오기를 그 동구 밖에서 행여나 행인 하나라도 지나가면 그 사람이 자기의 아들일까 슬픔으로 짓무른 눈을 뜨고 먼길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깊은 밤이면 바람에 구르는 낙엽소리를 들으며 행여나 아들일까 살며시 문을 열고 등불을 밝혀놓는 그러한 심정으로 아들을 기다렸으리라고 하는 것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 성경을 읽으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가끔 부모와 자식 사이에 골 깊은 간격이 생겨서 자식은 부모를 안 보려고 하고 부모는 자식을 안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재산 문제를 가지고도 부자간에 서로 고소하는 세상이니까 막가는 세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를 향해 그럴 수 있는데 부모가 자식을 향해 그러면 그것은 인간도 아닙니다. 자식이 그래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럴 수 없습니다. 부모는 부모 그 자체가 자식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베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기다리고 계신 이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보십시오. 그가 나누어 가진 재산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타국에서 지었을 지도 모르는 죄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그렇게 집을 떠나고 나서 동네 사람들에게 받았던 손가락질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에 있을 때도 그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이 사랑이었고 재산을 모아 가지고 자기의 가슴에 못박고 떠났을 때에도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에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구약에서 다윗이라는 인물을 기억할 것입니다. 압살롬이라는 자기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반란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나 다윗이 제일 먼저 물은 질문은 “내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느냐?” 였습니다. 반란군의 두목인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다윗은 미친 듯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던 이 아버지처럼 그런 사랑을 가지고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돼지우리에서 나왔으니 그 몰골이 얼마나 더러웠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들을 알아보고 아버지는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끌어안고 그 더러운 얼굴에 입맞추었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아들을 본 순간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흉악한 몰골을 보면 볼수록 그가 고통가운데 살아온 날들에 대한 연민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의 차림이 남루하면 남루할수록, 그것은 아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마음은 미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징벌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지은 죄와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의 나날들 보다도 지금 그 죄와 불순종의 나날들로 인해서 지치고 상한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단 자기의 것으로 부르신 자기의 사람들을 결코 잃어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나서 누구든지 뼈져리게 느끼는 깨달음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오래 전부터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찾기 이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간절히 찾으셨고 끊임없이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이 애를 쓰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은 ‘그랬는데도 나는 그런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을 모르고, 혹은 무시하고 이제까지 살아왔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그렇게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난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주님이 기억나지도 않고 생각나지도 않지만 여러분들이 재산을 모아 가지고 떠나던 그날부터 허랑방탕하고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하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그 때에도 기다리시고,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기다리시고,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쥐엄 열매를 찾는 순간에도 그 아버지는 기다리셨습니다.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돌아오는 그 순간에 그 아버지께서 정말 긴 세월동안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난 인간들을 다시 아버지 앞으로 부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오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들을 그분이 대신 짊어지시고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그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어떤 죄를 많이 지었든지 여러분들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여러분들을 자기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받아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고백하기만 하면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동구 밖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 실패한 모습이든지, 범죄한 모습이든지, 인생에 있어서 절망에 지친 모습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다가오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넓은 품에 여러분들이 쓰러지듯이 안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나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아들의 이 진실한 고백에 대해서 아버지는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네가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들 너는 내 아들인데 어떻게 내가 너를 내 아들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입니다. 그리고 가락지를 끼우고는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신을 신기고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하기를 “이는 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은 여러분 한 분이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상처받고 고통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을 받으면서 주님 닮은 사람으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여기에 여러분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실패하며 혼자 외롭고 슬프게 살았던 날들은 지난날들로 족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아들로 주님의 딸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이 탕자를 받아준 아버지처럼 돌아오는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8.구원받지 못한 형제들을 위하여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오늘 저는 동기간의 사랑에 대해서 가족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서 가족 시리즈를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백성들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이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뿐 아니라 가족관계 속에서도 형제 자매가 연합해서 동거하는 것, 이것이 참 선하고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133편의 시를 지은 사람이 다윗이라는 사실을 먼저 주목하고자 합니다. 다윗이 먼저 이 시의 주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대단히 불행한 가족 관계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는 물론이고, 아내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아울러서 동기간들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윗은 일평생 육신의 아버지의 몸에서 태어난 형제들과 연합하여 동거한 적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런 갈등 속에서 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가족관계에서 이루지 못한 형제와의 연합과 동거의 꿈을 신앙의 세계 안에서 찾고 그런 것들을 적절하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연세가 드실수록 그분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일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입신양명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덕망을 한 몸에 받고 적절하게 재산도 가지고 있어서 품위 있는 생활을 해나가는 자녀의 삶이 부모에게는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부모의 마음에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보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점점 적절하게 신앙의 세계에 살든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정신적인 세계를 가지면서 늙어가면 늙어갈수록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우리의 내면에 있는 가치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 하나 하나가 부유하고 존귀하게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들이 자기 앞에서 우애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부모를 위해서 효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함께 그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들과의 관계가 미움과 다툼과 시기로 깨트려지고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는 망가진 관계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가장 커다란 근심은 형제와 형제들이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제일 먼저 당해야 했던 커다란 형벌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에덴 동산에서 쫒겨난 것, 가시와 엉거퀴만을 내는 땅을 경작하고 그 소산을 먹어야 하는 것, 이 모든 것들도 낙원에 사던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가 들어온 것을 보다 더 선명하게 느끼고 그 죄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고통 했던 때는, 자기의 낳은 자녀인 가인이 아벨을 미움에 못 이겨서 돌로 쳐죽였을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때의 아담과 하와의 고통을 느끼실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자 남편과 아내로서 가지고 있었던 사랑으로 가득 찬 부부 사이에 금이 가고 갈등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도 죄의 커다란 영향력을 느꼈겠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이후에 첫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의 자녀였고 같이 태어난 또 다른 자녀에 의해서 쳐죽이는 광경을 보았을 때 죄의 무서운 영향력을 보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화합하고 화목하지 않으면 서로 사랑하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동시에 또 한가지 살아있는 부모를 향해서 불효하는 죄를 아울러 함께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형제간에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고 반목하면서 사는 것은 가족관계를 파탄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흔히 가족관계를 이야기 할 때 형제로 말미암는 상처와 고통을 덜 이야기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래도 형제들은 결혼하고 분가해서 흩어지고 나면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보다는 훨씬 적은 영향을 서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흩어져서 살아가는 것만이 능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우리 나라의 가족제도가 참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대가족으로 한집에서 모여 사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결혼하고 흩어져서도 명절이면 모두 함께 모이고, 생일을 당하거나 큰일을 당하면 모두 같이 모이는, 흩어져 있으면서도 아직 한 가족이라고 하는 연대 의식을 끊어버리지 않고 형제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한가족임을 확인하면서 사는 이 삶은 서양에서는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훌륭한지를 보시려면 여러분들과 부모님들과의 관계도 보고 여러분들을 향한 부모님의 관계도 보아야겠지만, 여러분들의 부모가 그 동기간들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하고 우애하는지를 보면 그 부모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개중에는 공부도 많이 해서 학식도 뛰어나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데 형제들과의 관계가 모두 박살나서 완전히 의절하고 외톨박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쪽짜리 가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벌거벗은 민둥산에 나무 하나 심어 놓으면 그 나무가 잘 자라겠습니까? 나무는 나무들이 모여 사는 숲 속에서 잘 자랍니다. 옆의 나무들이 흘려주는 낙엽이 쌓여서 이루어진 부엽토의 신세를 지면서 그 그늘 아래서 습기를 보존하면서 나무들이 함께 아름답게 커갑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는 소나무들이 밭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숲 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녀들이 나서 자랄 때 부모들의 동기간에 서로 우애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가면 그것이 삶의 방식인줄 알고 그들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 모든 환경들이 자녀들의 심성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정상적인 사람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차, 좋은 집, 빽빽하게 짜여진 학원 스케쥴, 학교 성적표, 이런 것들만이 자녀들을 사람답게 기르는 도구가 아니라 그런 모든 환경들이 한 인간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숙하는 필수불가결한 환경들입니다.
형제가 고통받을 때 어떻게 서로 위로하고, 슬픔과 시련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형제들이 어떻게 서로 기대고 우애하면서 살고, 형제가 어떻게 서로를 섬기고 귀하게 여기고 관계를 깊이 사랑하는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보고 숨쉬는 관계가 그들이 인간답게 자라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거듭나고 새로워지지 않고도 그런 것만 있으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고 변화되어도 역시 그런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그런 인간성들이 숨쉬고 자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합니까? 나무가 높으면 뿌리가 한없이 뻗어 서로 뒤엉키며 흙 속에 깊이 박혀 있어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게 자라가야 합니다. 학식이 있고 재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동기간들과의 관계가 전부 박살나고 철저하게 높은 담을 쌓고 혼자서 헉헉거리며 살아가는 외로운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자라나는 자녀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실제적으로 돌아가서 믿는 형제도 있고 안 믿는 형제도 있고 믿는다고 해도 진실하게 잘 믿는 형제도 있고 대충 교회에 나오는 깡통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도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으로 회복되고 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 자매들이 모여있는 한 가정이 회복되어서 동기간들이 서로 깊이 사랑하고 우애하면서 살아가서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또 그 가정 자체가 아름답고 신령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그런 참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 일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형이든 동생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동생만도 못한 형도 많고 형보다 훌륭한 동생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빚을 지고 그 빚은 사람을 향해서 갚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그 일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했는데 연합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연합할 것입니까?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관계에서 그러하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하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자매들이 나이가 차서 시집을 가고 나서 즉시는 시부모가 거의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기침만 하고 움직여도 어쩔 줄을 모릅니다. 형제들은 한술 더 뜹니다. 장가갈 때쯤 되었거나 장가를 가고 난 즉시에 처가집에 하는 것을 보면 절대적입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혼하기 직전과 직후에 모두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한참 세월이 흐르면 많은 갈등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무모될 분, 혹은 장인 장모 되실 분들을 향해서 어떻게 환심을 살까 하지 말고 정신적으로 먼저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족은 잘해주고 못해주는 개념이 아닙니다.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족과의 관계는 계약제로 잘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과 내가 일정부분 삶을 공유하면서 저 사람 없는 나의 존재, 내가 없는 저 사람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게끔 서로가 어느 정도 적절하게 결탁되어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이 가족관계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먼저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아부하고 아첨하면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모두 부서지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결혼하고 나서 초긴장상태로 몇 달 흐르다가 아이를 갖게 되면 긴장감이 풀어지기 시작해서 아이를 한 둘 낳고 나면 완전히 풀어집니다. ‘이 정도 뿌리를 내렸는데 시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하랴’하는 심리가 작용하는 모양입니다. 더 이상 부모님 앞에 무릎꿇고 다소곳이 앉는 법도 없고 할 말 다 합니다.
동기간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충동적으로 내 형, 내 동생, 우리 언니, 우리 동생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유대를 갖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연합을 갖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내가 아무리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하나님이 명하셨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형제들이 없다고 해서 우리들이 못사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를 안본들 겁이 납니까, 자식을 안본들 겁이 납니까? 살면 살지 왜 못살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살면 그것이 사람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호적 파가라고 하고 의절하고 살고, 자식이 부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부모를 잘라내고, 동기간에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잘라내고, 부인과 아이들만 남았는데 그 부모가 언제 잘릴 지 모릅니다. 아이들도 언제 잘릴 지 불안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인생일 수 있습니까? 그냥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왜 이런 집안에 시집을 와서 이렇게 힘든 인간들을 만났을까?’ ‘다른 집은 보태주는 동기간도 많다던데 어떻게 한결같이 나에게 고통의 십자가를 메워주는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돈이 없으면 인격이라도 훌륭하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격도 개떡같아서 오기만 하며 내 속을 긁어서 내가 성화되지 못한 모습을 만천하에 폭로하고야 마는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 정말 지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남에게는 ‘내가 저희에게 받은 것이 무엇이냐 나는 저희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잘산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가족관계는 그렇게 말해서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직장이라면 하기 싫으면 집어치우면 되고 동호인 클럽도 안 나가면 되고 헬스클럽이라면 다른 데로 옮기면 되는데 가족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유대를 가지려고 노력을 해야되는 상황이면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트려진 형제간의 우애는 하나님을 믿고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면 기대를 걸기 힘든 것입니다. 어떻게 연합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형제가 모두 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신앙과는 상관이 없이 술이라도 먹으면서 가끔 만나서 풀면서, 돌아가실 때 화목하게 살라고 손잡아 주시며 눈을 못 감으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며칠은 잘 살아보겠지만 그것도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형제들만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들의 부인들도 마음이 통하지 안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은 각자 자기의 가정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나면 그 부인들에게는 혹은 그 남편들에게는 자기 배우자의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이 삶의 절실한 문제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동기간을 안 봐도 얼마든지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유산 문제나 그밖에 다른 문제로 형제들과의 관계가 다 깨져서 풍지박산이 되었는데 몇 년 뒤에 그것이 완전히 치료되어서 아버지 앞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자녀들로 관계가 다시 태어나는 관계를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깨지는 것은 쉽게 깨지는데 다시 연합은 안됩니다. 더군다나 거기에 순수한 성격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이익의 문제라든지 차용의 문제들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부인들이 개입되어서 회복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아무 힘을 쓸 수 없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가정 설교를 하면 기가 죽습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대목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기를 하나, 남편을 뜨겁게 존경하기를 하나, 자녀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눈물겹게 사랑해본 적이 있기를 하나,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위해드려서 부모님이 우리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끼게 하나,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신이 있나, 그저 자신이 있는 것이라고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출석뿐인데 교회에 올 때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일 무인도에서 신앙생활 했으면 우리는 굉장히 잘 믿는 줄로 착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되먹지 못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이제 나도 굉장히 성화되었구나’하며 자랑스럽게 간증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움이 닥치고 동기간들과의 관계에서 말도 안 되는 대접을 받거나 부당한 취급을 받거나 어떤 고통을 강요받아서 관계가 깨트려지게 되면 다 뒤집어집니다. ‘저 인간들을 보고 살아야 하는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한 남자(여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사야하는 사은품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사은품이 다 불량품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서 설교만 들으면 ‘주님의 사랑으로 끌어안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맺힌 것을 풀면서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으로 한없이 용서하라’고 고린도전서 13장에 좋은 얘기는 다 하는데 살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고 지체들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는지를 자랑하는 우아한 모습이 자기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그 인간들 속에서 한없이 그 인간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슴에 원망과 시기, 불만이 잔뜩 맺혀있는 이것이 자기의 진짜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원래 은혜는 거저 준다는 것인데 거저 주시기는 하더라도 계획이 참 많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고 난 다음에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도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삶의 무게를 우리들이 지탱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고생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형제들간의 깨어진 관계를 보고 아파하면서 부서진 것이 마치 모두 여러분들의 책임인 것처럼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 무지막지한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 형제 자매들이 우애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관계가 되기를 안타까와하며 깊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형제 중 누가 그렇게 기도하겠습니까? 교회는 출석하지만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 뼈빠지게 화목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저 좋은 대로 살아가는 막되먹은 형, 동생들이 그렇게 가슴 아파하면서 형제의 우애를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그냥 단선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던 시야를 신앙이라는 글라스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글라스가 없을 때는 ‘내 인생 재수 옴 붙은 인생이다. 왠 사은품들이 저렇게 많이 따라와서 내 인생을 이렇게 고달프게 만들까? 정말 지구를 떠나고 싶다.....’하다가 신앙의 시야를 가지고 보게 되면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망가진 가정으로 보내셔서 이 조각난 인간성, 깨트려진 우애 한복판에 나를 서게 하시고 “네가 고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보게되는 시야가 생겨납니다. 그런 시야가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공중에서 새 한 마리가 뚝 떨어졌을 때 신앙이 없을 때는 ‘이 새가 게을러서 날개를 안 저었네’ 생각하는데 신앙이 있으면 ‘무슨 하나님의 듯일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이런 집으로 시집 보내시다니 하나님이 큰 실수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실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을 실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그 환경에 두십니다. 그것은 한을 품으면서 이를 갈면서 살아가라고 그 환경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가책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이 바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괜히 좋아하면 안됩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은혜 받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화 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은혜와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사는 것이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은혜와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산 사람이 문제가 많은 가족 관계 속에서 형제를 대신 해서 피를 흘리고 자매를 대신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들이 아파하지 않는 부분을 가지고 대신 고통해 주는 삶은 정신적인 이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눈물을 생각하고 슬픔을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실제로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려야 하는 삶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이 그런 일을 맡기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연합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형제들과의 관계를 치료하고 고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나를 베풀면 저쪽에서는 그것을 깊이 감격하며 둘 셋을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의 메아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니겠지만 우리 초등학교 때 부르던 노래 가사에 보면 ‘벌거벗은 붉은 산에는 메아리도 살 수 없어 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붉은 산과 같습니다. 메아리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변화 받고 하나님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메아리를 잘하셨습니까? 메아리는 무슨 메아리입니까? 수십 년 동안 벽창호처럼 지냈습니다. 주님의 피묻은 손이 수없이 가슴을 어루만지고 지나가도 그 사랑에 메아리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우리 인격의 문을 두드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흐르는 손의 두들김이 그날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에는 주님의 피가 많이 저려있습니다. 수 없는 두들김에 메아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의 그 사랑에 메아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망가진 사람입니다. 고통을 느낄 줄 알 뿐 자기들이 무엇이 망가졌는지 모르는 사람들이고 사랑을 받아도 그 사랑에 올바르게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의 망가진 형제 자매들이 그렇게 가망성이 있는 사람이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겠습니까? 왜 성경이 우리를 그렇게 가망성이 없는 인간이라고 수없이 말하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인간에게 많은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베풀었는데 그들은 인간이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성도 이하의 사람인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내게 상처를 준 부모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끊임없이 내 기대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퍼부어 주고 무엇이든지 용납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내게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내게 불복종하고 순종하지 않는 아내를 깊이 용서하고 그 씩씩한 모습 속에서 연약함을 읽고 그를 귀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남편을 주님 섬기듯이 섬길 수 있겠습니까?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우리 동기간들이 경우가 없고 인간성이 야비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내게 사랑 없음이 문제입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합니다.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동기간의 정신적인 연합을 말하면서 그들을 한없이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그런다고 연합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한쪽 인간들은 세상이 최고인줄 알고 사람을 짓밟아서라고 돈을 벌고 악하게 해서라도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신앙에 가치관을 두지 않는 세속적인 인간들이고, 우리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는 가정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된 가정인데, 불신자인 동기간이 신앙을 돈독히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가정과 하나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안 되는 것을 마음을 열고 사랑하라는 것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모든 베풂과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그 영혼들을 획득하고 함께 복음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가족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내가 신앙에서 느끼고 있는 이 기쁨의 세계를 가족들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느끼는 이 처절한 아픔과 고통을 내 형제 내 부모 내 자녀들이 나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일 힘듭니다.
(예화: 한 목사님이 가족 중 혼자 예수를 믿었는데 동기간이 이해를 못하니까 동기간들과 관계가 멀어지고 가족에게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형제들이 전도를 받아 완전히 새사람들이 된 후 목사님인 형을 이해하게 되었고 무척 잘 섬기게 되 었다)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고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인간들 지겹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인간 이하의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시선을 가지고 그들을 보는데 그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영혼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 자체가 그런 식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가정 복음화의 장은 그 동안 여러분들이 배우고 익힌 신앙과 영적인 생활과 모든 것의 총체를 동원해서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예화) 군대 가면 전쟁과는 실제로 상관이 없는 ‘앞으로 가’부터 배운다. 눈도 깜박이지 않는 차
려 자세를 배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자기의 습득한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싸운다.
이것이 가정 복음화의 현장입니다. 복음화가 아직 안되고 있는 가정에는 반드시 죽지 않고 펄펄 살아있는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전쟁을 하겠다며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하나님, 내가 우리 언니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면...”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는 시동생을 제가 건질 수 있다면 하나님,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영혼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한번의 웃음소리로 저의 모든 희생을 통해서 맛본 고통은 잊혀질 것입니다”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끼는 것이 많으면 가정 복음화는 안됩니다.
동기간들이 복음화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이 우리입니다. 오랜 세월 기도하다가 작은 이익 때문에 모든 관계들을 박살 내버립니다. 희생하기 싫어서 가정 복음화고 뭐고 다 집어치우는 식의 삶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 빚을 영혼에게 갚는다고 생각하고 많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해를 봐야 합니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어차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 덤으로 사는 인생도 아버지의 것입니다. 늘 울어도 갚을 길이 없는 큰사랑을 우리가 입었는데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망가진 동기간들을 고치고 형제가 우애하며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도구로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쓰임을 받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한없이 영광스럽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깨어진 가족 관계와 망가진 동기간들을 다 끌어안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베풀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면서 희생하며 살아온 그 날들이 하나님 섬기며 살아온 날들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엄청난 짐을 져야지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그 짐은 더 쉽습니다.
(예화: 빚을 많이 지게 된 한 교회에서 매달 장로님들이 돌아가며 집을 팔아 갚았다는 이야기) 얼마나 큰 희생입니까?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동기간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은혜를 나에게 욕으로 갚을 때 그것을 용서해주고 한없이 사랑하면서 “그들의 영혼만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집을 팔아 바치는 것보다 훨씬 힘드는 것입니다. 겪어본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훨씬 상급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강력한 편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을 깊이 캐들어가 보면 그렇게 만든 주범이 가족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운 희생적인 삶을 살아서 예수를 자랑하는 삶이 되든지 아니면 자기 챙길 것 다 챙기면서 부끄럽게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화:언니를 위해 늘 기도하던 한 자매가 어느 날 자기 스케이트를 탔다고 언니와 싸운 이야기)
한 영혼의 가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욕,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손해보지 않는 가운데 단지 기도함으로서만 그 영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희생 없이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저희 가족 복음화의 문제는 그저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안 하겠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라고 가르칠 수 있는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발을 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가 고향해서는 대접을 못 받는다’고 말하는데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은 것은 선명한 메시지 때문이었고 그를 너무나 잘 아는 삶 때문이었지만 그 사람이 대접을 못 받는 것은 양보할 줄 모르고 희생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삶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데나 선지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고매한 선지자를 욕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먼저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그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 획득되어질 수 있고 그 영혼들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래서 우리들이 온전히 연합된 신령한 가정으로서 망가진 가정을 회복하고 그 가정 속에서 잘못 살아온 우리들의 이 불행한 삶이 우리의 자녀들의 대에는 물려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없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 가정의 진정한 복음화와 회복에 대한 참된 사랑이 없는 그런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하고 사랑은 없으면서도 가끔 만나면 “너 지옥 1번이야”하며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 만나지 않았을 때는 관심도 없고 영혼에 대한 아픔도 없다가 어느 날 천하의 모든 권세를 혼자 가진 것처럼 “회개하시오. 형, 천국이 가까왔오”하면 형이 “너나 믿어라”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용서가 필요하고 그들의 영혼을 향한 진실한 염려, 사랑하고 진정으로 염려하면 무엇인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쌍하고 고통받는 그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형제가 진정으로 화합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가정은 한 형제들이 한 교회에 다니면서 우애하고 사랑하며 서로 은혜 받고 서로 신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서로 교회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 모습을 자녀들이 보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형제와의 관계가 다 깨트려져 있으면 자식들과의 관계도 다 깨트려져 있습니다. 부부가 만나서 시동생 욕하는 이야기를 자식들이 들으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우리 삼촌은 인간도 아니구나’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쪽 집에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것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런 관계를 보면서 뭘 배우겠습니까? ‘형제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사이구나’ 얼마든지 형제를 떨쳐내고도 능히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다는 이기적인 자기 보호의 생각들을 키워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우리들 때에 가정을 복음화해서, 새롭게 구축을 해서 우리 대에 치료되고 우리 자녀들 대에는 이런 고통과 아픔들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나 동기간의 관계에서나 물려받지 않도록 회복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생이나 자매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커다란 집단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자신과 부모와 형제들과 거기에서 태어난 자녀들과 이루어질 가정, 은혜 받은 여러분들은 그러한 커다란 가정 복음화의 책임을 진 한 커다란 가정의 목회자입니다. 원통하고 서럽습니까? 그러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많이 받고 주님의 사랑에 넘치면 문제가 기회로 보이는 것입니다. 충만하고 은혜로운 목회자들을 만나보면 교회의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섬겨서 고쳐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불만입니다.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동거한다는 것은 장소적으로 함께 모여서 살아가지는 않아도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화: 전에 모시던 목사님이 자식들을 모아놓고 한 달만에 만난 형제가 어찌 소 닭 보듯이 하느 냐고 말한 이야기)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어두움 가운데에서 구원해내셨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형제들 속에서 일어났는데 망가진 가정에서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공식이 성립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습니다. 둘이 뜨겁게 사랑하는 부모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게 한 저 여자가” 하면서 아담이 하나님 앞에 둘러댔습니다. 깨트려졌습니다. 그리고 죄악 가운데 가인을 잉태했습니다. 그런 번뇌와 고뇌 가운데 아이가 잉태되었는데 정상적인 아이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인과 같은 인간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다행히 신앙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인이 쳐죽였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일으켰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죄의 불을 끄는 소방수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놀라운 능력으로 파괴시켰는데 그것을 종식시켜서 가정의 참된 모습을 복원시키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니까 얼마나 고귀한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완벽하게 파괴된 가정이 이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그 모든 죄 가운데 구속하시고 우리를 향한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셔서 우리를 주님 믿게 만드셔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변화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변화 받았습니다. 부모는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트려져있고 죄가 지배하고 있고 두 분의 사이에도 금이 갔습니다. 그러나 치료의 도구가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된 가정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와 함께 주님의 성품을 배우는 어머니,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족, 우리를 향해서 한없는 용서와 다함이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부모들, 그리고 동기간들이 모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처럼 부모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함께 싸안고 살아가는 그런 가정이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천국에서 맛볼 행복을 미리 당겨 맛보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하고 매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삶이 있고 힘과 눈물과 땀과 피가 요구되는 엄연한 삶의 현실을 무시하고 어디에 가서 선교를 꿈꾸고 어디에 가서 신앙의 참된 회복을 꿈꾸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꿉니까? 모두 값싼 낭만입니다.
죽기 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비옥한 선교지입니다. 다른 선교지는 내가 안가면 다른 사람이 가는데 이 선교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나 외에는 선교사가 없습니다. 자기의 터에서 자기가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동기간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회복시켜서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아버지, 어머니, 당신들의 사랑이 우리를 하나되게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하며 한없는 기쁨을 드리고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우리의 동기간들과 함께 서는 복된 역사가 있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희생을 많이 하고 애를 쓰면서 여러분들에게는 없는 사랑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없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없는 관용과 이해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없는 자비한 마음을 구하십시오. 희생한 것만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쏟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 복음화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놀랍게 주님을 닮아가는 지 모릅니다. 황폐하게 된 한 가정을 복음화한 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인생의 절반 이상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수한 날을 울었고 수없이 많은 날들을 사랑하는 가족들의 영혼을 끌어안고 흐느끼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악마의 수많은 도전 속에서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겼습니다. 그리고 복음화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하나님 앞에 값진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