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 (2)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녹취자 : 오희열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직장 다니시는 분들을 위해 밤에 강의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코로나가 급증해서 많이 걱정하셨을 것입니다. 하루 빨리 잡힐 수 있길 바랍니다. 어제는 저도 생애 처음으로 예배를 공식적으로 못 드리고 온라인으로 예배드렸습니다. 모든 일상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우리가 감염병 예방과 확산의 방지를 위해서 협조는 하지만 하루 빨리 정상적으로 교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제 8장 “이 모든 것을 더 하신다” 후반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 그것과 함께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갈망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시편 57편 5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땅에 내려오신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이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은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높이 들려 올라갈 수 없는 분이시만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 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잘 살면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은 높이 들려질 것입니다. 여기서 “높이 들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중요하게 취급되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방에서 살다가 수도권으로 이사를 와서 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너무 신앙생활을 잘 하니까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저 사람은 우리 교회에 와서 처음 예수를 믿은 것도 아닌데 어쩌면 저렇게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지?” 하며 물어볼 것입니다. “저 사람 어디서 왔어요?”, “부산에 있는 아무 아무 교회에서 왔대요.” 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부산에 있는 어느어느 교회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겠습니까? 부산에 있는 교회는 수도권에 없지만 그 교회의 이름은 여기도 있어서 여기서 그 교회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 그런 효과가 사람들 속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시면 “거룩”을 이렇게 쓰는데 이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만 쓰면 형용사입니다. 우리가 잘 안 쓰는 말인데, “거룩함”이라고 해야 명사가 됩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자신의 번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앎으로써 이것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다른 것을 찾는데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치고, 또 이 세상을 향해서는 구별되면서도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이루며 사는 삶,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거짓된 신자는 예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번영을 꿈꾸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기 보다 거룩해지기를 꿈꾸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식,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가능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존재와는 비교될 수 없이 높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고 있다는 것, 그분께로부터 와서 그분께 속해 있고 그분께 돌아갈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믿을 것 아닙니까? 믿는 그 지식에서 경배가 우러나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때와 같았던 삶을 이 사람들도 버리고 내가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그 의가 성취되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세상 속에 있는 사람이면서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제일 큰 기쁨은 내가 아는 누군가가,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할 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그 사람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사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부흥을 간절히 갈망하는 이유는 그런 부흥이 바로 저런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나면 나 혼자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하게 됩니다.
제일 분노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너무 너무 마음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근거없는 비난이나 모함을 받고 있을 때, 그때 얼마나 분노하겠습니까? 그리고 한 편으로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사랑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모욕을 받는 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계속 보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면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첫 번째 생명은 육체로 태어납니다. 두 번째 생명은 영혼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영혼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원래 영혼은 그 자체가 생명을 담지한 사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의 육체를 창조하셨지만 그것으로서는 사람이 되지 않고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 육체와 결합시킴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타락하고 타락면서 육체는 그대로 살아있지만 필멸할 몸이 되고 영혼은 죽은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서 영혼이 죽었다고 할 때는 육체가 죽었다는 것과 똑같이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물에 따라서 뒤 따라오는 말의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컵이 있다.”라는 말과 “내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말은 다릅니다. 이런 컵은 크기와 색깔, 모양, 형체, 부피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지만 마음에 사랑이 있는 것은 이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습니다. “죽었다”는 것도 육체는 물질에 속했으니까 물질의 방식대로 죽는 것이고 영혼이 죽었다고 할 때는 영적인 방식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죽음을 영혼의 죽음에 똑같이 대입하면 안 됩니다. 만일 실제로 영혼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육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예 없는 동물들도 살아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죽어있지만 살아있습니다. 왜? 동물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영혼의 힘들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로 타락했어도 인간 사회를 동물의 세계처럼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어느정도의 빛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성의 빛이라고 합니다. “The light of nature”, 본성의 빛입니다. 이 본성의 빛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부모를 공경할 줄 알고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또 국가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인간의 도리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도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이 얘기는 하면 굉장히 긴 이야기니까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죽어있는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 분께로부터 오는 그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망가진 상태에서 망가진 삶을 살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어느 정도 훌륭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복종하는 질서는 아닌 것입니다. 육체로 한 번 태어나고 이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한 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육적 생명이고 이 생명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심겨집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나누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혹은 사랑이 부어집니다. 그것으로서 이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죄들을 누르고 성령 충만하게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구속의 의도를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이 생명을 신자로서 어떻게 충만히 누리면서 사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사람들의 삶이 너무 팍팍하고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그런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보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유가 없으면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고 아주 작은 일에도 엄청난 폭력이 행사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기쁨이 있고 여유가 있으면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러워집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사회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당연히 범죄도 많아집니다. 사소한 다툼으로 원한을 사고 사람들이 다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지금 스트레스 지수가 어마어마하게 높을 때 아닙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골이 나 있는 사람같고, 긴장해 있고, 길거리에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표정이 다릅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이해를 못하지만 자신에게 기쁜 일이 있고 행복한 일이 있으면 너그러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옵니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을 영혼답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바라시는 영혼답게 기능할 수 있도록, 그래서 참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이 북돋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혼내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하면서 생각이 바뀔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태어나서 건강하게 이렇게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자체가 너무 행복하고 좋다!” 하고 마음을 바꾸고 나면 분노도 사라지고 아이들을 향한 사랑스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요즘 시험을 많이 받을 때입니다. 아이들이 아무데도 안 가고 남편도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재택근무하면서 밥 세 끼씩 차려달라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입니다.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한 끼는 아이들보고 챙겨먹으라고 하고 한 기는 남편보고 차려먹으라고 하고 한 끼만 차려주십시오. 가족들이 서로서로 짐을 나눠져야 합니다.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게 누구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면 안 됩니다. 짐을 서로서로 나눠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영혼이 영혼다워집니다. 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십시오. 사람이 살아있으면 다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면 맨날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것 같고 누구와 다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가시가 돋쳐서 악악거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지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어디 가겠습니까?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에 내 영혼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살아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제가 왜 여러분에게 그토록 안타깝게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줄 아십니까? 모든 좋은 것들이 주어져도 결국 영혼의 생명이 충만하게 있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생명이 넘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가끔 그 사람이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쏟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때 저는 느낍니다. “아!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이게 주님의 마음이구나!”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살게 되든지 저는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나보다 곤고하고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그 아픔이 절절하게 가슴에 다가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항상 잠을 못 자서 늦으면 새벽 1시, 빠르면 12시 정도에 잠을 잡니다. 새벽에 아내가 기도하러 갈 때 “달칵”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그날은 새벽이 아니라 금요기도회였던 것 같습니다. “달칵”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가 금방 다시 들어왔습니다. 기도하러 간다고 했는데 뭘 놓고 갔는가 보다 했는데 얼굴이 심하게 붓고 찢어지고 피가 나서 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겨울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뛰어가다가 보도블록 공사를 하다가 튀어나온 곳에 걸려서 넘어지면서 얼굴을 땅바닥에 긁은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아플까? 그리고 몇 cm만 비껴갔다면 눈을 다쳤을 텐데… 한 이틀 동안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옵니까? 우리 자신에게서 고유하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존 오웬의 목사님이 죄에 대한 의지의 동의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심지어는 불신자들이 죄를 짓는 것은 단일 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이야기하고 신자들이 죄를 짓는 것은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의지가 단일하냐 복합하냐 하는 것은 두 개가 합쳐졌다는 그런 뜻보다는 불신자들이 죄를 지을 때는 죄에 대해서 전적이고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의도적이고 지배적인 동의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까 말씀드린 본성의 빛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원해도 양심의 소리가 들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럴 때는 이 사람 자신도 그 정신 속에서 어떤 균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의지의 면에서 볼 때는 그런 본성의 빛에 의해서 자극은 받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생과 함께 그의 영혼 속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죽은 영혼이 아니라 살아난, 생명을 받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죄를 짓고 물러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실제로 타락한 삶을 살아도,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의지와 죄를 따라서 살려는 두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경험이 죄의 힘보다 작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 신자 안에 죄와 은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를 지배하고 우위를 차지하려고 싸우는지 그것이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다룬 것입니다. 그것을 다음 공과 교재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 책을 출판사에서 찍고 있는데 교회에 등록된 지체들에게는 코로나 사태로 너무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서 교회에서 구입하여 여러분에게 배포하려고 합니다. 곧 공지가 나갈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어떻게 새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 것인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동안 많이 들어오셨습니다. 올라온 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잘 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것입니다.” 네, 정확하게 요약하셨습니다. “몇 분간 진행되나요?” 하셨는데, 이제 10분에서 15분 정도면 끝이 납니다. 40분에서 45분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나중에 다시 보기를 할 수 있나요?” 네, 보실 수 있습니다. “강의 진행하시다가 채팅에 답변 좀 해주세요.” 네,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외삼촌에게 맞아 죽은 아이, 그렇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개입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그렇게 때려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폭력을 행하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사람은 그 영혼 자체가 이미 심각한 죽음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파키스탄에서도 들어오셨습니다. “강의를 듣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용실 사장님이 말씀하시기를 요즘 사람들은 머리가 너무 많이 빠집니다. 20년 넘게 일하면서 처음 겪는다고 합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머리도 좀 빠지는 것 같습니다. 영화 “밀양”을 말씀하시면서 회개를 너무 악용한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셔야 하는데… 네, “감사합니다. 너무나 은혜가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맞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이 코로나 사태가 내년 12월까지 갈 것이라고 제가 이야기 했었는데 빌 게이츠는 상황을 잘 알고 있고 백신개발도 후원하고 있는데 그분도 내년 12월까지는 이대로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백신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백신 하나로 모든 코로나를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안정성 문제도 있기 때문에 바로 맞는 것 보다는 세계의 사람들이 맞는 것을 6개월 정도 보면서 뒤따라 맞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 이런 저런 것을 고려한다면 럭키할 경우, 후년 6월은 되어야 상황이 해소되고 여행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염치도 없는 사람은 양심에 화인을 맞은 것이 아닐까요?” 네, 심각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때에 아이들이 스마트 폰에 너무 많이 몰입해서 어른들이 다들 속상해 하시는데 그렇기도 하실 것입니다.
좋은 정보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미국에 “Sight & Sound”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들어가보시면 정확한 지명은 모르겠고 필라델피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거리에 어마어마하게 큰 기독교 극장이 있습니다. 제가 가서 보니 무대의 길이만 150m, 가장 자리까지 하면 200m 쯤 되어 보였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거기서 공연을 하는데 정말 은혜스러운 공연을 많이 합니다. 이번에 요나 이야기를 무료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런 것을 온 가족이 크게 소리를 켜 놓고 아이들과 함께 보시면 아이들의 신앙 교육에도 굉장히 좋을 것입니다. 잘 모르시면 질문하시면 홍보실에서 잘 알려줄 것입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원래 돈을 주고 사야 하는데 코로나 상화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무료로 릴리즈를 해 주었습니다. 거기에 등록만 하고 접속하시면 됩니다. 굉장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봤는데 어마어마한 감동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고래까지 등장합니다. 아이들과 한 번 보시면 대박일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을 달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구원의 은택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이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너희 마음의 중심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데에 두며 살아라, 나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거래가 아닙니다. 육체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뭔가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답고 소중하고 기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를 아시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해 주신다는 것은 수단과 목적 사이에 있는 질서입니다. 목적은 궁극적인 것이고 수단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 A와 B 바꿀 때 삶의 질서가 깨어집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물질이 있습니다. 물질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물질을 단 1 주일만 소비하지 않아도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고 한 달 정도 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환자들의 경우는 더 빨리 그렇게 될 것입니다. 물질은 꼭 필요합니다. 이 물질이 있어야만 사는데 궁극적으로 물질이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제시해주지는 않습니다. 말씀드리지만 지금 서울에서 부산까지 12분에 갈 수 있는 기차를 연구 중이라고 하는데 언젠가는 될 것입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2028년쯤에는 완전 자율주행차가 나와서 손발이 떨려서 운전할 수 없는 노인들도 단추만 잘 누르면 시골에 있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합니다. 물질은 그런 것을 해결해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 하신다”는 것은 질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이런 수단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질서 안에서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목표는 목적보다 하위의 개념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해하는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당연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일부러 전투에서 져 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현대 컴퓨터를 만든 원조는 튜링이라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동성애자로 밝혀져서 비참하게 인생이 끝나게 되는데 2차대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개발하여 적들의 암호를 해독해서 적군이 어떻게 아군을 공격할지 알게 됩니다. 그것을 완벽하게 막아버리면 적군들이 더 이상 그 암호를 안 쓸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아군의 배가 피격당하게 선별적으로 내버려 둡니다. 그런 가운데 윤리적인 모순도 느끼는 합니다. 그런 경우에 일부러 전투에 져 주는 것입니다. 전투에 져서 적을 속임으로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위의 목표는 상위의 목표에 이바지하고 상위의 목표는 최상위의 목표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이런 목표의 질서가 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는 이 아래에 있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 있는 것이니까 만약 이 목표가 삶에서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삶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돈을 많이 가진 재벌들의 죽음을 보면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으고, 한 시간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몇 십억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낼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돈은 또 벌면 되니까 말입니다. 결국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이 지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이어진 어떤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깨어짐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동물의 본능적인 자기애와 다릅니다. 동물들의 자기애는 자신과 종족보존에 국한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사랑은 적극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에도 속박 받지 않고 자기가 좋다는 대로 여기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하고 충동적인 육욕이상의 것으로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이 정욕은 넓게 보면 자기가 이 모든 만물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정욕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가장 최고의 선이시고 우리의 모든 삶은 그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질서 지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신국론에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내 안의 사랑을 질서롭게 하소서.”, “질서를 잡다” 이 말은 명령 혹은 간구형입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질서롭게 해 주시옵소서.” 가장 높은 데 있는 가치를 가장 크게 사랑하고 그 다음 것을 이렇게 이렇게 배분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사랑으로 수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가 세워지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으로 가는 우리를 때리셔서 선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칼빈도 이러한 질서를 강조합니다. 정의에 대한 사랑을 주셔서, 우리가 방황하지 않도록 구체적인 규칙을 주셔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다가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함으로써 가난이나 사고, 핍박이나 모든 것들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1년 전에는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 예배당에도 못 가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가는 지체들이 어느 날 암 선고를 받고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갑니다. 무슨 뜻이 거기에 다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차피 그것은 우리의 인생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세상에 있다면 세상과 함께 모두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영원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 은혜 많이 받으셨기를 바라고 이 공부로 만족하지 마시고 꼭 홀로 책을 읽으시면서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역모임 잘 하시고 어려운 때 일수록 서로 기도하고 의지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