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오늘, 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녹취자: 송미옥
I. 본문해설
안녕하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코로나가 스치고 지나가는데 또 태풍이 오고, 태풍이 지나갔는데 또 다른 태풍이 온다고 하니까 쉴 틈이 없는 우리의 인생살이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새 아우구스투느스의 삼위일체를 읽고 있는데, 읽는다기보다 봄부터 연구를 해서 너무들 못 읽으니까 삼위일체 해설집을 쓰고 있습니다. 4권 정도로 1,800페이지 정도로 쓸 계획을 가지고 첫 번째 권을 쓰고 있는데, 정말 행복합니다.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지만 이상하게 완전한 답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답은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여러분들이 믿음생활 잘하시면서 문제가 세상에 많을 때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신다면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과입니다. 이번주와 다음주까지 공부하면 이 책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고, 한주 쉬었다가 다음 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힘을 내서 오늘도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자 오늘은 마지막 장인데 오늘, 염려하지 말라. 본문이 나오는데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자, 이것이 예수님께서 염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사실상 마지막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앞의 모든 19절부터 모든 가르침을 망라하시면서 결국 그렇기 때문에 ‘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 교훈을 마지막으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들은 중요한 교훈들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크게 하나님의 사랑은 세 국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참음과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획일적으로는 말할 수 없겠지만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오래참음과 자비가 많이 계시되었다면 신약에서는 그것과 함께 구약에서 덜 드러나던 성품이 아주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인간의 비참을 공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에 의해서 악이 오고, 악으로 말미암아 당한 비참이 유래되는 것입니다.
비참은 어떻게 보면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들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의 책임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에이 그럴줄 알았다 하는 짓이 그렇더니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나.’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칼을 가지고 놀다가 손을 베었다든지 뜨거운 음식을 부주의하게 취급해서 데였다든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그 책임이 그 아이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엄마는 그 아이의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지금 칼에 베거나 혹은 불에 데서, 뜨거운 음식물에 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상태를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자기 아픔을 생각하는게 긍휼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은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 이러한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교육하시는 한 방법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시대에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가 70장로들과 함께 아론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 하나님 자신을 본 것이 아닙니다. 들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당신을 발현하신 거기에 하나님의 실체가 있으셨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에 대한 강력한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 어떤 신간과 공간 안에서 사물들을 움직여서 어떤 징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싸인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은 감각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그 신비한 불꽃이나 어떤 광경을 보고 또 귀로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감각적인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번 성경구절을 보십시오, 요한일서 1장 1절에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런 방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신 이유는 사람 예수그리스도에 주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의 감각으로 보고 만지고 듣고 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지성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그게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그러면 왜? 여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씀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비참을 얼마나 공감하시는지를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의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 어떤 눈물도 당신 자신이 스스로 불쌍해서 우신 그런 눈물은 없습니다. 그 눈물은 모두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한 눈물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뵈오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염려에 적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면 그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내가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대신 고통을 당하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덜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결국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염려하지만 그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까지 슬프도록 사랑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면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시고 내가 당신을 찾는다면 당신이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염려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미워하는 사람 없이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 때문에 사람이 비겁해지기 때문에 염려가 없다면 거기서 진정한 용기도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성경은 내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비인격체입니다. 추상명사입니다. 비인격체이고, 추상명사인 내일이 염려를 할 수 있습니까? 염려하는 것은 정신과 마음의 작용이니까 인격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라고 하신 이 말씀은 깊은 뜻이 있는데 결국 그것은 ‘네 몫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국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염려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을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다.
그럼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염려하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있고 원하는 바에 못 미치는 현실이 있고, 기대하는 바가 있고, 기대하는 바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염려하는 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활기와 생명을 주는 염려가 아니라 끊임없는 죽음의 기운을 가져다주는 염려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게 먹고 입고 마시는 세상일들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왜 그럼 염려할 필요가 없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유형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또박또박하게 생각을 해서 나나 남이나논리적으로 행동하고 처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다시 말해서 추론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염려를 많이 합니다. 논리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캐나다에 127세까지 산 어느 할머니가 계시는데 장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자기 일도 염려하기 바쁜데 남의 일까지 참견하고 염려하면서 살면 인생이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제가 신뢰할 만한 통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처럼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논리적이고 논리에 어긋나면 자신도 괴로워하고 남도 괴롭게 여기는 사람들은 오래 못 삽니다.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장수하는 분들이 생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림에서 보면 염려입니다, 욕망이 있습니다. 당연히 욕망이 있으니까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안 이루어졌습니다. 둘 사이에 갭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염려라고 부르고 쇼팬 하우어라는 사람은 고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뇌는 심오한 것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모든 문제가 우리의 고뇌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모든 고뇌의 근원을 사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염려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발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발생하는 일이 틀림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늙는 것을 염려한다. 늙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염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늙는다고 해서 모두 다 불행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하지 않아도 할 염려를 끊임없이 하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앞으로는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이고 어떤 식으로 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안 하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 하나님 앞에 내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사는것에 장애가 될 정도로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런 삶을 혐오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끔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골치 아프다. 닥치면 어떻게 해결되겠지.’ 때로는 그런 태도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어떤 사람은 너무 슬픈 비유라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 한 적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쩌면 20년이나 30년쯤 지난 후에 우리가 가족도 몰라볼 정도로 치매에 걸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치매뿐만 아니라 몸에 장애가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중풍이 걸린다든지 뇌졸중이 온다든지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 비행기를 탔는데 앞좌석에 낯익은 두 사람이 앉아계셨습니다. 잘 보니 영화배우 윤정희씨와 백건우씨였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입에서 피가 나온다며 의사를 찾으면서 힘들어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최근에 가족들도 못 알아보신다고 합니다. 그분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생각하면서 오늘 살아가는 즐거움을 상실한 채 삶을 영위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현실에 충실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한 가지 이유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에 대해서 염려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염려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을 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은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요즘 우리나라가 참 신기하게 엄청난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중국이나 북한이나 이러한 나라들과 잘 지내고 싶어하면서도 막대한 예산을 군비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과연 잘 하는 것이냐 못하는 것이냐 등등의 이야기나 나올 수 있겠지만 그것은 각자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판단에 달려있는 문제이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눈부신 문명과 발전을 이룩했다 할지라도 외적에게 침략당해서 정복되면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항공모함을 만들 계획이 있다. 핵추진잠수함을 만들 계획이 있다. 등등의 논의들이 오고 갑니다. 그런데 저는 상당히 그런 것을 대비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변국을 침략할 정도의 무력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 위협을 받더라도 이 나라는 쉽게 삼킬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도록 대비하는 일은 국가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 국가의 명운에는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설마, 이런 가정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냉엄한 현실로서 그런 것들을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항공모함 3,4만 톤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배를 만든 나라는 어느 나라인지 알고계십니까? 우리나라입니다. 한 3년전에 세계 최대의 배를 생산해 내는데, 충격 받지 마십시오. 크기가 120만 톤입니다. 세월호가 만 톤이었으니까 세월호 120개 크기이고 중국에 있는 중국이 자랑하는 야오니 항공모함 20척을 합친 크기이고 미국에서 가장 큰 항공모함인 도널드 레이건호 12만 톤짜리 항공모함을 10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크기가 어느 정도냐하면 축구장 4개보다 좀 더 큽니다. 배 위를 다니려면 차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3만 톤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닙니다.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항공기를 싣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잠수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잠수함을 2척 이야기하는데 제 생각으로는 최소한 6척 내지는 8척 정도를 5천톤 가까운 잠수함들을 바닷 속에 띄어놓고 거기에서 최소한 2톤에서 4톤되는 재래식 탄두 미사일을 싣고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하고 마지막 국가의 보험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비하는 것을 나쁘다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의 어느 나라를 간 적이 있는데 거기는 전통적 개혁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주일은 시가지가 전부 문을 닫습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개혁 신앙이 뛰어나서 보험을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조금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연금도 타지 말아야 합니다, 매달 벌어서 쓰든지 아니든지, 일당을 받아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급을 받아도 안 되고 월급을 받아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김없이 써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대비하면서 대비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사라지거나 약해질 때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셔서 우리에게 누리게 하셔도 하니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덜 의지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이 여럿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특히 아빠들이 누구를 예뻐하는지 보십시오. 모범생인 자녀를 아빠가 예뻐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며느리가 예를 들어서 3명 있있다고 합시다.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님의 사랑을 받을 것 같습니까? 일체 시어머니에게 신경 안 쓰고 자기의 할 일을 딱딱하는 교과서 같은 며느리가 사랑을 받을까요? 아니면 덜렁덜렁하면서 부족하고 끊임없이 시어머니를 귀찮게 하고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며느리가 사랑을 받을까요? 후자입니다. 결국 사랑은 의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일을 위해서 보험들 들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전혀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화재가 났습니다. 옛날에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처럼 수많은 아이들이 불에 타서 죽고, 화상을 입어서 장애를 얻게 되고, 그럴 때 교회가 보험이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것들을 대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대비하는 자신의 노력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때 그리고 또 대비하면서도 끊임없이 염려함으로써 하니님을 신뢰하는데서 멀어질 때 이것이 질병과 같은 영혼의 상처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저것을 키로 번역을 했는데, 저런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보다는 ‘염려함으로써 자기 키가 자란다?’ 사실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시간의 길이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훨씬 많습니다. 무슨 뜻이가 하면 목숨이 있는데 염려한다고 더 살겠느냐? 그 뜻입니다. 염려한다고 더 살겠느냐? 그래서 갓난아기에서 기저귀를 차고 있고, 어린이가 되고 마지막으로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염려한다고 해서 늙는 것을 늦출 수 있거나 죽는 것을 늦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요. 그리고 나는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 의지하면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야겠다. 이렇게 결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가르침입니다.
자, 오래간만에 많은 분들이 들어오셨는데, “염려에 관하여 마지막 장 공부 시간입니다. 열심히 달려오신 분들에게 기쁨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유튜브를 컸는데 강의 시작한다고 뜨길래 들어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책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이렇게 계속 늦어져서 그런데, 마지막 원고가 저한테 왔어요. 제가 빨리 해서 보내면 25일쯤 나올 수 있다고 하니까 기대를 해봤으면 좋곘습니다. 저는 참 행복하게 썼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읽어줄지 모르겠습니다. “계속되는 태풍에 피해 없으시길 기도합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단히 조심하셔야 됩니다. “자가격리 중이지만 이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어쩌다가 자가격리를 하셨어요? 안전하게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지난 7, 8년 고난을 시간을 지내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다음 구역공부 내용은 무엇인가요?”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당회에서 죄와 은혜의 지배는 교회에서 구입해서 성도들에게 코로나 때에 너무 어려우니까 재난지원 차원에서 무료로 나눠드리기로 했습니다. 인쇄소에서 찍고 있습니다.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2 이야기를 하는데 언제 나오냐고 물으시는데 삼위일체 쓰고 있는데 4권으로 1,800페이지를 쓰는데 첫 번째 권을 450페이지로 내려고 하는데 그거 탈고하고 바로 신나2를 시작해서 원고를 써놨습니다. 교정을 보면 되는데, 연구도 좀 해야 하고, 꼼꼼하게. 제 1순위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공부하고 마치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핵심감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핵심감정이 사실 한국에 학자 한 분이 이걸 제안을 했는데,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는 이론이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감정들이 있는데 그 감정이 항상 동일한 지배력을 우리의 마음에서 갖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감정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으면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감정을 핵심감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핵심감정에 의해서 다른 감정이 배열이 되면서 결국 삶의 다양한 행태가 어느 한 방향으로 질서가 잡히게 됩니다.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간에. 그게 뭐냐면, 예를 들어 정의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핵심감정이 된다고 칩시다. 분노가 정의에 의해서 해석됩니다. 그러면서 정의라고 하는 것이 여러 감정들이 있는데 그중에 분노라는 감정과 만나게 되어서 분노가 핵심감정이 될 때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저런 식으로 되면 안 됩니다. 저렇게 될 경우 삶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판단하고, 이해하고, 또 느끼고,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서 골고루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아 질서를 찾게 되는 것, 그 질서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올바른 의무를 행하게 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 염려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염려가 핵심감정이 되어서 하위의 모든 감정들을 해석해버리면, 모든 미래에 대해서 비관하게 되고 우울하게 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하면서 극단적인 선택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결국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내일을 대비해야 하지만 염려에 사로잡혀서 오늘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삶에 매우 커다란 독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일 일에 대해서 대비는 하지만 염려함으로 우리의 인생을 먹칠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 바라보면서 사는 기회로 삼아야 되겠다.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마지막 공부를 뜻깊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태풍 주의하시면서 평안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