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깨어짐
녹취자: 백지영
성도 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덥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런데 저는 그제도 어제도 열심히 걸었습니다. 덥지만 운동을 하면 훨씬 몸이 좋아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경건의 훈련이 있을 때, 그때 우리의 영혼도 더 힘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서부터 이제 자기 깨어짐 공과를 들어가는데, 제가 여태까지 쓴 책 중에서 제일 사랑하는 책이 무엇이냐 그러면 사실은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운데, 잊히지 않는 책을 한권 고르라면 저는 이 책을 꼽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가장 잘 썼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쓰기 직전에 제가 깊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잊을 수가 없고, 두 번째는 그것을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실 깨어진다는 이 말을 미국사람도, 영어권에서도 이것을 쓰기는 씁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이렇게 이런 뉘앙스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이게 아마 동양의 정서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이것을 한국 사람으로서 최초로 신학적으로 한번 풀어내었다고 하는 점에서 제가 이 책을 잊을 수가 없고, 세 번째로는, 저의 글쓰기는 최근 ‘아사밤’ 이후를 제외한다면 자기 깨어짐이 분수령이 되어서, 작가로서 김남준의 이력이 최근의 한 2, 3년을 제외하고 나면 자기 깨어짐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정도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 당시에 어거스틴을 깊이 만났고, 그리고 엄청난 열심으로 어거스틴을 탐독하고 거기서 나 자신이 녹는 경험을 하고, 그리고 이제 이전의 청교도적인 논리적 글쓰기에서 여러분은 좀 안 좋아하실지 모르겠는데 철학적 글쓰기로 돌아서는 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쓸 때는 많은 책을 참고했지만 어느 하나도 책상 위에 계속 펴놓고 쓴 책은 아무 책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참고는 여러 권을 했지만, 그러나 이 책의 논지는 한 번에 한두 달 동안에 확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고, 6개월 정도 걸려서 모든 것을 다듬어서 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 책을 잘 이해하시는 분들은 이후의 제 책을 따라오는데 매우 수월할 것이고, 또 이 책을 이해함으로서 이 이후에 나온 저의 설교를 이해하는 것도 굉장히 빠를 것이다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모든 책은 목사님 설교가 있는데 이것은 무슨 시리즈에서 한 것입니까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은 없습니다. 다만 2004년인가로 기억이 되는데, '성화와 헌신'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소제' 부분을 다룰 때 이 모티프가 이미 나왔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책을 잘 이해하고 싶으면 '성화와 헌신', 신년사경회거든요. 그리고 아마 도서관에 가면 그때 설교한 것을 풀어서 쓴 교회 안에서만 쓰던 공과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오래 교회 다니신 분들은 아마 아직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시리즈를 모두 들어보신 후에, 정 바쁘면 ‘소제’를 다룬 한편만 들으신 다음에 이 책을 보면 아마 눈이 확 열리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꼭 한번 들어보시기를 바라고, 그 다음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한 1.5배속이나 1.7배속 정도 해 놓고 확 들어보시면 아마 이 책이 확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 책을 보면서 정글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고 표현하셨는데 좀 과장이고요, 논리적인 것을 모두 기억 못해도 좋으니까 번뜩번뜩하는 번뜩이는 그런 인사이트들만 발견해 낸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큰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 정도로 책 소개를 마치고, 더 많은 이야기를 저는 하고 싶습니다. 이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그리고 이 표지 그림이 제가 여태까지 낸 책 중에서 제가 아주 애착하는 열 개 작품 안에 들어갈 정도로, 이게 우리 나동원 집사님이 디자인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제가 사랑하는 디자인입니다. 뭔가 이렇게 옛 자아를 끌어안고 있는 그런 모습의 자기 깨어짐이라는 켈리그라피를 어느 작가가 써줬는데, 이렇게 예쁜 켈리를 못 볼 정도입니다. 요즘은 켈리시대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애착을 가진 책이기 때문에 한번 최선의 공과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오늘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러면 오프닝 영상으로 들어가서, 자기 깨어짐에 관한 공과를 공부하면서 청년부에서 1분짜리 스킷(skit)드라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번 보시면서 워밍업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늘과 대지사이에서 일상을 살아갑니다. 분주한 일상을 보내며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의 것들이 쌓이게 됩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삶에 원치 않는 고난이 닥치곤 합니다. 고난 앞에서 우리는 자기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깨진 마음에서 잡다한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옵니다. 분노, 슬픔, 세상의 가치관, 자기중심성, 깨어짐을 통해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들린 신자에게 자기 깨어짐은 파괴가 아닌 발견입니다. 깨어진 신자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누리는 영원한 생명, 이러한 발견 가운데 신자는 위로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더욱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깨어짐 가운데 오늘을 살아갑니다.”
의미 깊은 스킷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결국 자기가 깨어지는 속에서 망가지는 게 아니라, 거기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는 그런 메시지였습니다. 자, 그러면 대망의 자기 깨어짐을 나가보겠습니다. 우선 무엇을 하든지 간에 개념 정의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자기 깨어짐이란 무엇인가를 저 나름대로 성경에 입각해서 정의를 내려 보았습니다. 한번 보실까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자기 깨어짐이란 신자 안에 있는 부패한 자기 사랑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죄에 대한 사랑과 거기에 기반을 둔 자기의(自己義)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이 있지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사랑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사랑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에 대한 사랑, 두 번째는 거기에 기반을 둔 자기 의에 대한 신뢰,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깨어지는 것이지요. 쉽게 예를 들어보면, 예수님께 비판을 받았던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이렇게 자기 의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거룩하고 의롭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제 이해되시지요?
자, 그러면 좀 더 깊은 의미를 우리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 된 옛 본성입니다. 이 옛 본성과 반대는 무엇일까요? 새 본성이지요. 그러면 이 옛 본성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새 본성이 여기에 있다 하면 이 새 본성은 무엇일까요? 이 새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이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BTS가 그룹 리더인 김남준을 위시로 해서 노래 속에서 계속 부르짖는 게 무엇입니까? Self Love, 자기를 사랑하라. Love Yourself. Self Love,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다른 것이냐?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규정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자기를 사랑한다고 할 때, 이 ‘자기’가 대상이지 않습니까? 이 ‘자기'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사랑하는 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런 자기를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새 본성은 활력을 얻고 옛 본성은 죽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자기를 사랑할 경우는 결국 이것은 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이 죽게 되는 것이지요. 증거가 뭐냐고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下) 그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이 소유격이지만 목적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 이 뜻입니다. “그건 자기 사랑이 아니라 세상사랑 아닙니까?” 그러는데,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는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나에게 만족을 주니까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그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세상사랑은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하나 깨닫게 되는 사실은, 결국 신자 안에 있는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이 신자의 삶의 본질이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전쟁이고 실제 삶에 있어서의 투쟁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들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분명히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망설였을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새로운 본성과 옛 본성의 싸움입니다.
그 정도만 설명하고, 깨어진다는 것이 도대체 뭐냐? 아까 스킷드라마를 하느라고 머그컵 하나를 깨뜨려먹었지 않습니까?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 컵에게. 완전히 못 쓰게 돼 버렸습니다. 여기서 ‘깨어진다’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생명이나 기능, 작용 등을 잃어버리도록 망가뜨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은유적인 사용입니다. 그런데 느낌은 굉장히 심오하고 아름답고 좋습니다. 깨어짐이라는 것이지요.
그럼 깨어지면 어떻게 되냐 이것이지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냐면, 하나님을 향한 지순(至純), 이 ‘지순’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순애(至純愛)’라고 얘기하는데, 이것이 우리들이 옛날에 많이 배웠던 ‘까리따스’입니다. ‘꾸삐띠따스’하고 반대이지요. ‘꾸삐띠따스’는 육욕이고, ‘까리따스’는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입니다. 이렇게(caritas) 쓰기도 하고 요렇게(charitas 18.55) 쓰기도 합니다. 둘 다 씁니다. 영어의 ‘채리티(charity)’가 여기서 나옵니다. 그런데 어쨌든 순전한 사랑이 우리 안에 회복되는 것이지요.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계속 안 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은 점점 시들어 가겠지요. 그리고 여기는 이렇게 죽어가겠지요.
이 설명을 들으면서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이제껏 들었던 열린교회 한 10개 시리즈 가운데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한 시리즈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한번 맞추어보십시오. 무슨 교리를 다뤘던 설교가 생각나지요? 힌트를 드리면 한 서른네 개정도 설교로 되어 있는 매우 방대한 시리즈입니다. 그리고 로마서6장 14절을 기초로 한 절을 가지고 그렇게 긴 세월을 설교한 것입니다. 무엇이었지요? 그렇지요. ‘죄죽임’의 교리입니다. 죄죽임의 교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신자 안에는 죄가 있다. 그런데 그 죄를 죽이면 죽이는 것만큼 은혜는 산다.” 우리 장로님 하시는 한의원에 가니까 이만한 액자가 써 붙여져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다.” 그래서 제가 거기다가 하나 일러드리고 왔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에서 멀어지면 인간은 질병에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건강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똑같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 부어지는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은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긴급동의입니다. 긴급동의 아시지요? 막 의논하다가 “긴급동의입니다.”라고 하면 그것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요. 긴급동의는 그냥 한 의견이 아니라 회의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동의입니다. 이것(긴급동의)과 같은 것이 이것(죄죽임의 교리)입니다. 만약 이 교리를 못 깨닫고 대충 살면 어떻게 되냐? 계속 위선적인 삶을 살거나 알 수도 없는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사는데, 교회는 나오는데 내 마음에 기쁨도 없고 인생을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주체적인 확신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아주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제가 이 책을 쓴 저자인데 여덟 번을 이 책을 읽었습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스물일곱 번 읽은 것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이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많은 기도와 그리고 큰 눈물 속에서 쓰였습니다. 읽으시는 분들은 그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만약에 회개를 가장 좁은 의미로 해석을 한다면 자기의 죄를 깨닫고 그 다음에 그것을 슬퍼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고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지정의(知情意)로. 그런데 이것은 가장 좁은 의미이고, 넓은 의미로 보면 결국 이 회개는, 부패한 옛 자아, 옛 성품은 죽어가고 새 사람에 대해서는 살아가는 전 과정입니다. 옛 자아에 대해서는 죽어가고, 그러니까 옛 자아는 죽어가고, 새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새로운 자아는 살아나가는 과정, 점점점점 살아나는 과정 그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 회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루툴리아누스라고 하는 2세기의 교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제 가슴을 울린 말이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그러면 이 앞부분에서 죽는다는 얘기를 했는데, 부패한 옛 자아가 죽어간다고 했는데, 죽는 그 주체가 뭐냐? 죽음을 겪는 그 자신이 뭐냐? 그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본성, 그 다음에 옛 사람의 성품, 이것의 공통점이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뜻을 거스르고 어긋나는 것, 그게 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데 잘못된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면 삶이 적극적이 되지 못하고 계속 정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자기 자신이 위축이 됩니다. 그런데 또 이것을 잘못 다루면 죄에 대해서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자기의 영혼에 해로운 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스스로 자초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것 하나하나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계를 끝장내실 만큼 우리를 징벌하신다거나, 아니면 일체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죄와 죄의 결과를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율법주의 쪽으로 가서 그렇게 해석을 하든지 무율법주의로 가서 방종주의로 나가든지, 이 양 갈래 길로 갈라지기가 쉬운 것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아들이 계속 말을 안 듣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맨날 지적을 받고, 하여튼 엄마가 머리가 터질 지경입니다. “너 오늘 또 학교 갔다가 집으로 안 들어오고 딴 데 가서 말썽 피우면 너 죽을 줄 알아.”라고 이야기할 때, 방점이 “I will kill you.”라고 해석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어느 엄마가 설령 얘가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우고 pc방에 가서 못된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칼 들고 가서 아이를 찌르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엄마가 그만큼 화가 나니까 넌 딴 짓 하지 말고 집으로 바로 와라.” 거기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죄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릴 희망을 갖는 방식으로 죄를 얘기해야지, 기를 필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결국은 그 죄에 대한 끊임없는 정죄의식 때문에 그것을 마귀가 사용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상황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죄를 설교하거나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더 할 이야기가 많은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데, 결국은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이 뿌리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비료가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물, 햇빛, 영양분, 이게 골고루 주어질 때 나무가 자랍니다. 이게 그대로 잘 주어지면 분재 같은 것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어느 섬인가를 갔는데, 지금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남해 무슨 섬에 갔는데, 여객선이 투어를 하면서 벼랑 끝에 바위에 서 있는 소나무 하나를 보여주면서 해설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 천년이 됐다고 합니다. 그 소나무가. 제가 보기에는 3미터정도 될까 말까 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몇 백 년이 돼도 영양분이 부족하면 큰 나무로 안자란다 이 뜻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이 조건이 딱 맞아서 주어지면 나무가 자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런데 이 자기 사랑이 무얼 먹고 이렇게 무성하게 죄가 성장하느냐? 그게 바로 정욕입니다. 정욕을 먹이 삼아서 자기 사랑은 죄의 뿌리를 성장시키고, 그 결과로 나타난 열매가 악한 삶입니다. 실제로 삶에 극악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심지어 가정을 깨뜨리고,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하고, 공금을 횡령하고, 부도덕한 일을 하고 그런 것들이 가능합니까? 가능한 것이지요. 왜? 정욕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 뿌리는 죄입니다. 그래서 악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욕이라고 부르는데, 이 정욕을 콘큐스케이디아이라고 부릅니다. 이 정욕을 성경에서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성적 욕망입니다. 고린도서에서 과부들에게 말하기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 下)라고 할 때 그것은 성적욕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요일 1:2 上)할 때 그 정욕은 넓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중심적인 욕망, 모든 악한 육욕의 원천, 이 모든 것을 광범위하게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그러면 여기에(좁은 의미) 해당하는 것이고, “인간은 정욕을 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넓은 의미) 해당되는 것이지요. 모두들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고자하는 욕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서론이니까, 오늘은 이 교리를, 이것을 다루어보는 유익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상세하게 쓴 책이 없습니다. 청교도 쪽으로 들어가면 더 깊이 있는 책도 많이 있지만, 일단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번 자기 깨어짐을 생각해 보고 전개해 보는 이 책의 의미가 무엇이 있느냐? 그 유익을 크게 나는 네 가지로 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성령의 은혜가 어떻게 자기 사랑을 파괴하는지를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어떻게 보면 죽어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거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일평생 운명과 같은 그것이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이지요. 그런데 파괴된 그것이 계속 유지되느냐 하는 것은, 또 성령과 어떻게 동행하며 사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제가 영국에 갔을 때 한 10여 년 전에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목회자 한 사람이 갑자기 목회지에서 사라졌습니다. 천 명 넘는 교회를 목회하던 분이었습니다. 아주 영향력 있게 책도 쓰고 강연도 많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당연히 결혼한 사람이었고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애인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정부(情婦)와 함께.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정부가 남자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즉석에서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 원래 게이였지요?”, "오, 어떻게 아시느냐?" 대학교 때 게이였는데 2학년 때 깊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된 다음에 도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동성애인과 함께 가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긴 말이, 쪽지에다가 남겼는데, “내 인생에 두 번 실수했다. 첫 번째는 예수를 믿은 것이고, 두 번째는 결혼을 한 것이다.” 배교이지요.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돌이켜서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돌이켜선 길을 어떻게 계속 은혜로 걸어갈 수 있느냐 이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자기 깨어짐이란 무엇인가? ‘부패한 자기 사랑이 파괴되는 것’.
자기 깨어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의 회복",
깨어짐의 대상이 되는 ‘자기 사랑’은 무엇입니까? "정욕",
교리를 배울 때 얻게 되는 유익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은혜가 어떻게 자기사랑을 파괴하는지, 그 다음에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 다음에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깨닫게 만들고, 신자의 거룩한 삶의 실천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나면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도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이것입니다. 제3의 것은 없다. 오늘 공과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즐거운 저녁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