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죄에 대한 사랑
녹취자: 허혜숙
성도여러분, 무척 덥습니다. 더운 것만큼이나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기 쉬운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마음을 다잡고 말씀을 꼭 붙들면서 우리들이 기도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자, 지난 시간에 우리가 제 1장을 공부했고 오늘 제 2장을 나갈 차례입니다. 오늘 제 2장에서는 ‘죄에 대한 사랑’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한 번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신자 안에는 옛 본성과 새 본성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옛 본성은 결국 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고 새 본성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옛 본성은 원래 땅으로부터 나왔고 새 본성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신자의 삶은 결국 옛날처럼 자기를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옛 본성과 구원받을 때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갈등으로 점철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본성입니다.
옛 본성의 특징을 보겠습니다. 저기 위에 큰 컴퍼스가 있습니다. 여기 중심에 핵심을 자기 사랑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동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이렇게 놓고 이것을 계속 확장하면서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여긴 예를 드는 것인데 사람이 잠을 잡니다. 게으름을 표현하는 것이겠죠. 막 화를 냅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가장 바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인데 밟아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가는데 그 모든 자기사랑의 뿌리가, 그 모든 죄가 결국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죄와 관련해서 보자면 죄의 뿌리가 뭐냐 할 때 지성적으로는 교만(superdia)입니다. 의지적으로는 자기 사랑(Amor Sui)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을 했지만 ‘자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자기’라면 사실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기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본성의 특징을 보면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아, 여기 하나님 아닌 것들이 많겠구나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이 있지만 그것의 뿌리는 자기사랑이다. 자기가 만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자기’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옛 자아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신자의 마음 안에서 뿌리를 내리는가? 제일 먼저 공격이 ‘지성’입니다. 생각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그 생각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이성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성이란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성이 아니라 참된 논리를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대포가 되는 것입니다. 무 대포란 철포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총입니다. 일본 역사에 보면 군벌이 싸웁니다. 한 쪽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서 총을 가지고 있고 한 쪽은 총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들이 전쟁을 할 때 총이 없어서 무대포로 싸웠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참된 논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향 내지는 성향이 되어서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향이 된 것은 다시 생각을 주장하게 되고 계속해서 이렇게 환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점 죄에 사로잡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생각을 부주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지킴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헛된 것들에 몰두하게 되고 마음지킴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렇게 하면서 마지막에는 사랑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사랑지킴을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부주의하게 되고 헛된 것에 몰두하게 되고 이성의 추론을 방해하게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제일 먼저 이런 일들이 지성을 속임으로서 들어오게 됩니다. 생각의 명정함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지킴은 생각지킴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뿌리내리게 되는 방식이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식에서 이뤄지게 됩니다.
두 번째는 영혼의 전일성을 파괴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전일성(全一性)이란 하나로 꽉 차있다는 것입니다. 물인데 물이 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순수한 물일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전일은 순일입니다. 순전하다라고 할 때 결국은 이런 것입니다. 영혼이 참된 영혼의 본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으로서 영혼 자체로 통일적인 일체성을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빨갛던 마음이 까맣게 변합니다. 이러면서 영혼의 순수성이 파괴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계속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도저히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 갈 힘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하고 그 다음에 성화하는데 파괴가 됩니다. 그러면 회복이 필요합니다. 회개를 통해서 다시 새롭게 다시 이 전일성을 회복하는 데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하는 일들을 통해서 이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개인의 신앙생활이고 교회는 이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서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영혼의 전일성이란 영혼이 참된 영혼으로서의 본질로 꽉 차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순수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사랑함으로서 전일성이 파괴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계속 살게 됩니다. 당연히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회복이다. 회복은 회개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영혼을 강압함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법이 있어서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나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결국 여기에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악이 함께 있는 것, 이것과 동의어입니다. 이것이 ‘함께 있다’라고 하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힘은 어느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운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될 때 이 힘과 반대방향에 있는 것, 힘이 있는데 이것을 힘 1이라고 하고 이것을 힘 2라고 하면 힘 2는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음 안에 악과 선이 있어서 서로를 밀쳐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이 자기의 상당함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법의 판결을 내리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런 종류의 법이 아니라 밀어붙이는 힘으로서의 법입니다. 공표하는 법이 아니라 법은 크게 두 가지의 법이 있는데 공표되는 법, 언제 언제 부터 이런 일을 하면 처벌 받는다, 이것은 공표되는 법입니다. 이것은 마음 안에 있는 법입니다. 이것은 밀어붙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협하고 강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적인 힘이고 이것은 외적인 힘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벽’이라고 하는 것, 성벽이라고 합니다. 도벽이 있다, 도적질하는 마음에 벽이 있는 것입니다.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게으른 본성이 있다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성에 탐닉하는 성벽이 있다,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죄의 경향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을 점점 강화하려고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죄의 목표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용할 때 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데 마음 안에서는 육체의 욕심, 정욕, 이기심 같은 것으로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정욕은 넓은 의미로 보면 자기중심적으로 살려는 모든 욕망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욕망입니다. 좁은 의미로 보면 이것은 그릇된 성적인 욕망입니다. 정욕이 결국은 죄라는 나무를 성장시키는데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나무가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는데 정욕이라는 비료들을 먹으면서 죄의 나무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악의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에 가까이 가게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정욕을 불러일으킵니다. 은혜 아래서 살면 정욕이 일어나도 이것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이 정욕에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게 됩니다. 무력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정욕을 좇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안에는 정욕이 죽고 정욕을 따라 사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에 즐거움을 줌으로서 죄가 사랑으로 마음 안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그래서 즐거움이라는 것이 결국은 원천적으로는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즐거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원천적으로는 그런데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즐거움을 얻지 않고 자기에서서 자꾸 즐거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자기는 무엇인가 세상과 관련을 맺고 소비하고 향락함으로서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죄의 낙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모세를 두고 한 말입니다. 죄의 낙, 죄도 즐거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상상함으로서 즐거움을 줍니다. 내가 이렇게 돈을 가지게 됐다, 아니면 이성을 갖게 됐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자기의 욕망하는 것들을 상상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면 참 좋겠다라는 상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돈을 정상적으로 벌 수 없는 능력이 없을 때 훔칠 생각까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마음에 있는 죄의 즐거움은 상상을, 상상은 실행을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죄는 마음 안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음의 틀을 바꾼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존 오웬이 썼던 말인데 ‘Frame of heart’입니다. Frame 은 성향입니다. 마음이 있는데 마음이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틀이 만약에 선하고 도덕적인 틀이라면 이 틀에 걸러집니다. 악한 것들, 부도덕한 것들이 나타나도 마음에서 이것이 걸러집니다. 그래서 탈락시킵니다. 마음으로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굉장히 못 참는 것이 비린내입니다. 비린내를 맡으면 밑에서부터 먹은 것이 올라오는데 토할 것 같습니다. 유명한 생선 집에 가 보면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비린내가 꽉 차서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돌아서 나옵니다. 너무 예민합니다. 저 같은 경우 마음의 틀이라기보다는 감각의 틀인데 감각이 비린내를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비린내 나는 생선을 취급하는 곳, 생선은 좋아하는데 비린내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비린내 나는 곳에 가서 비린 생선을 먹거나 아니면 그 비린내를 참고 그 생선을 즐기거나 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일종의 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순간 하나하나 판단을 내리면서 사는 것은 너무 중요하지만 마음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틀이 너무 정직해서 남의 돈을 떼어 먹는다든지 아니면 남의 돈을 사취한다든가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틀입니다.
언젠가 보니까 유명 연예인의 부인인가 그랬습니다. 잘 사는데 남의 가게에 가서 물건을 집어온 것입니다. 물건 판 사람도 그 사람에 연예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지고 오겠지 했는데 안 가져오니까 그 주인이 화가 나서 SNS에 고발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은 실수였다고 하는데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모르지만 돈에 대해서 깨끗한 사람은 마땅히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돈이 옆에 있으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왜 나한테 있나? 얼른 갖다 던져 주던지 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의 마음의 틀입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모두 적용을 해 보십시오. 그런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여기에서는 비린내니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도덕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틀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죄를 극복하며 살기가 매우 좋습니다. 지식을 사용하는 마음의 경향성입니다. 그리고 죄는 이런 덕스러운 틀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중생과 함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심겨진 사람인데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선하고 아름답고 탁월함을 가진 미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내제하는 죄가 마음의 은혜로운 틀을 허물어서 악한 마음의 틀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악덕스러운 틀 안에서 죄와 정욕이 보호하는 것입니다. 악덕스러운 틀이 뭡니까? 마음이 변해서 누구 돈이든지 내가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물건을 훔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수틀리게 하면 주먹부터 올라가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해 보면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내 안에 괴물이 있는 것 같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탐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미덕스러운 틀을 파괴하는데서 죄는 그치지 않고 악덕스러운 틀을 구축 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힘으로도 죄의 욕구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도 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음의 지배력을 함구화 하는데 수월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노예가 된 상태이고 신자의 구원은 취소 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죄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스르며 살다가 죽어버리게 하는 것, 그것이 죄의 계획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못 받게 하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죄의 작용에 대해서 무지하고는 우리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죄를 알아야지만 우선 자기 자신의 불행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고 사랑에 대해서 알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이 2006년도에 나왔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책입니다. 2006년도에 나왔고 22세가 찍혔습니다. 대단한 것 아닙니까? 이런 어려운 책을 사람들이 꾸준히 사서 읽는 다는 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생각 없이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야 의무적으로 읽지만 그러나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사서 읽는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딱딱해 보이는 책인데 결국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 ‘죄와 은혜의 지배’ 책이 나왔을 때 독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을 알고 있다’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면 무슨 행동을 할지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알면서 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화의 길입니다. 요즘 부목사님들이 요약하고 있는데 누가 하셨는지 모르는데 이번과는 기가 막히게 정리를 했습니다. 작품입니다. 진짜 저자인 저의 마음에 꼭 들게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기가 막히게 너무 잘 하셨습니다.
결국 이중적인 공격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한편으로는 파괴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축을 하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공격입니다. 그 다음에 삶 속에서 개별적인 죄의 실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앞에 것은 준비기간입니다. 내적인 취향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긍정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하게 경쟁을 해서 돈을 버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복입니다. 손이 수고하는 데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재분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정당하게 벌었으니까 어떻게 내가 쓰던지 상관이 없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재분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서도 쓰고 이웃을 위해서도 쓰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사용하고 그렇게 하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 물질이 재분배가 되어서 이 땅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이바지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소비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겨서 돈을 많이 벌어봐야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점점 악하게 하는데 돈을 쓸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돈을 재분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 취향을 따릅니다. 죄를 산출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양심의 죄악을 덜 받는 상황을 만나면 죄가 산출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은 건널목에 모두 정돈해서 서 있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양쪽에서 50명씩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나 혼자 거기를 건너는 것은 왠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갈 때 살짝 묻어서 건너갈 때에는 좀 덜 합니다. 그것은 양심의 제약을 덜 받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개인의 정의 뿐 아니라 사회적인 정의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료들의 부정부패나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우리들이 신경을 쓰는 이유가 그런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아도 좋다라고 하는 아주 큰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이 도덕교육이 제대로 잘 안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부패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들이 많았습니다. 가나, 에티오피아, 필리핀, 심지어 캄보디아도 우리에게 쌀을 많이 보내주었고 다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들이 다 주저앉았습니다. 공통점이 부패입니다. 부패하면 민주주의가 될수록 나라는 썩는 것입니다. 도덕이 없이 인간의 욕심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실행의 불편함이 제거됩니다. 처벌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왜? 내가 잘못 한 것은 사실인데 한 두 사람이냐?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느냐? 그 사람들을 다 처벌하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산출하는 기대에 대한 즐거움이 극대화됩니다. 그러면서 죄의 경향성이 강화가 되고 의지가 동의하면서 여기에서 덜컥하고 죄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실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산출된 죄의 목표는 죄를 반복해서 불순종하고 죄에 종이 되면서 점점 죄를 짓기에 용이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계속 은혜의 지배를 떠나서 죄 아래 들어가게 되면 정욕을 억제할 수 있는 기능이 파괴됩니다. 결국 원천적인 정욕이 강화되고 죄스런 환경의 틀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주는 기쁨 때문에, 집착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정죄 받을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함으로서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로움도 회피할 수 있고 두려움도 회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 1) 자기 깨어짐의 경험 안에서 깨어져야 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 죄에 대한 사랑
. 자기 의에 대한 사랑
문제 2) 죄의 본질은 무엇이며, 죄에 대한 사랑이 깨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죄의 본질 – 하나님을 배향하고 대적하는 것.
. 깨어져야 하는 이유 -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 분과 사랑으로 연합된 삶을 살기 위해 죄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함.
문제 3) 죄가 신자의 ‘영혼 안에서’ 뿌리내리는 방식을 설명해 봅시다
. 지성을 속임으로
. 영혼의 전일성을 파괴함으로
. 영혼을 강압함으로
문제 4)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뿌리내리는 방식을 설명해 봅시다.
. 정욕을 불러일으킴으로서
. 죄의 즐거움을 줌으로서
. 마음의 틀을 바꿈으로서
문제 5) 죄가 신자의 삶 속에서 뿌리내리는 방식을 설명해 봅시다.
. 개별적인 죄의 실행
. 죄의 반복
문제 6) 신자가 죄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
. 죄가 주는 기쁨 때문에
. 죄에 대한 집착 때문에
. 혼자 있을 두려움 때문에
. 정죄 받을 두려움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