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위하여Ⅲ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마1:7上) 1999.5.2 주일오전 1
2. 아사는 여호사밧을,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마1:8) 1999.5.9 주일오후 11
3. 부모를 공경하는 길(엡6:2-3) 1999.5.9 주일오전 22
1.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마1:7)
오늘은 기독교에서는 꽃 주일 혹은 어린이 주일이라고 불리 우는 날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어린이날이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많은 행사들도 있고, 또 그 동안 아이들에게 잘 해주지 못했던 부모들도 이제 어린이날만큼은 뭔가 아이들이 원하는 데로 해주고 봉사하는 날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왜 이 어린이주일에 족보 중의 한 구절을 읽은 이유가 무엇이냐 이겁니다.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았다.”그랬습니다. 이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아다했는데, 이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자손입니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에 와서 나라가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갈리게 됩니다. 그 때에 남 왕국에 르호보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도 나쁘고 신앙도 나쁜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중에는 신앙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라도 좋았는데, 이 사람은 신앙도 없고 머리도 나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아프게도 동족들이 남북으로 나뉘어서 분단의 처지에 있게 되었는데도 부역을 더 무겁게 하고 세금을 더 많이 물려서 민심을 잃어버린 그런 왕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 시대에 애굽의 시삭이라고 하는 장군이 쳐들어와서 커다란 상처를 이 남 왕국 유다가 겪게 됩니다.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백성들은 패배를 하고 많은 보물들을 빼앗기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유다 임금으로서 르호보암이 재위하는 가운데 큰 국가적인 환난을 겪고 끔찍한 전쟁을 치루게 되었던 가장 큰 원인이 교만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머리도 나쁘고 신앙도 없는데다가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 사람이 나라를 다스릴 때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녀를 낳아서 기른다 할 때, 이것은 참 무서운 겁니다. 두려운 겁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만난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면 관계를 청산하고 해어지면은 됩니다. 그렇지요? 헤어지면은 됩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지간은 헤어져도, 그게 헤어진 게 아닙니다.
요즘 세상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부부는 헤어지면 헤어지는 것 같습니다. 헤어진 부부가 그냥 남편이 그리워서 눈물 흘리고, 아내가 보고싶어서 상사병에 걸리고 그러한 부부 봤습니까? 만약에 그럴 양이면은 헤어지지 않으면 됩니다. 그렇죠? 그런데 자식은 이건 헤어져도 헤어진 게 아닙니다. 어디가도, 어디가도 그 자식은 돌아다니면서 내 아들이라고 말한단 말입니다. 누구 아들이냐? 그 난. 내가 죽어도 내 아들은 돌아다니면서 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것은 산 것이 아닙니다. 헤어졌다고 해서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내와 남편은 헤어지면 그걸로 끝일지 모르지만, 자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식하나를 바로 길러놓지 못하니까 그 나라백성 전체가 커다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만약에 이 르호보암을 잘 길러서 자기 아버지 다윗과 같은 사람을 만들든지 아니면, 거기에는 못 미쳐도 자기가 정신차리고 살았던 처음 은혜 받았을 때에 그러한 상태를 본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할 것 같으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어느 역사가가 말하기를 역사의 무슨 공식이 있는 것처럼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역사에는 어떤 사람이 나오느냐 거기에 달렸다 그래서 역사는 무슨 공식이 있다기보다는 어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특성 하나에 휘말려 가지고 큰 전쟁의 불행을 겪기도 하고 또 두루두루 선정을 펼쳐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기도 하는 것이다 하는 그 말을 다 동의할 수 없지만은 상당히 통찰력이 있는 그런 말 아닙니까?
등소평이 불란서 유학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십대후반인가 이십대 초입니다. 그 사람이 불란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유학을 할 때, 그 만약에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고 도 중국의 지도자가 됐다면 역사는 바꿨겠죠? 뭐, 다 물 건너간 이야기이지만은, 그러나 하여튼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이처럼 한 사람은 참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하고 관계가 아주 최악이었을 때, 카터 대통령이 왔습니다. 그 사람은 신앙노선은 우리하고 같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은, 하여튼 전세계 국가 원수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그 사람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미국 내에서도 아주 비아냥거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도대체 뭐, 대통령 시켜줬더니 전도사하냐?”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니 박대통령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만났는데, 뭐 저도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서 들은 이야기니까 얼마나 정확한 줄은 잘 모르지만은 분위기가 둘이 만났을 때, 아주 어색하고 딱딱했는데, 카터 대통령이 예수를 좀 믿으시라고 그러니까 박대통령이 그 말을 받아서 탁 받아서 “나도 주일학교 때 교회 열심히 다녔다.”고 그러면서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 어린 시절에, 가난하던 시절에, 시골에서 자라면서 교회를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때 만약에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실한 기독교인이 됐다면 ‘아마 틀림없이 인생을 그렇게 불후하게 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된다. 또 아마 그가 그렇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 사름 때문에 불행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불행을 당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고, 따라서 우리 조국의 역사는 크게 바꿨을 지도 모른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증거를 오늘 이 르호보암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탁 낳으면은, 또 낳을 사람들도 여기 많잖아요? 낳을 사람, 난 사람 그럴 때는 좀 긍정적인 의미에서든지, 부정적인 의미에서든지, 좀 생각을 크게 가지십시오. 이 내가 낳은 이 아이, 혹은 내가 기른 이 아이가 그저 뭐 뭐가 될까? 그저 자라다가 그저 공부 잘하지도 못하고, 그저 아주 못하지도 못하고, 그저 쪼금만 못하고 그렇게 점점 자라고 여자 아이 같으면, 그저 뛰어난 미모는 될 리는 없고, 왜? 내가 그러니까. 그냥 그러고 그저 그렇게 자라다가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그저 이름 없이 살다가, 그저 그렇게 가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은 내가 잘 키운 자식이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될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역사가 내가 낳은 이 아이 하나에 달려 있는 것 같은 그런 역사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고. 그런 의식을 좀 가져야 됩니다. 아무도 아멘을 안 하는 것 보니까 여기에는 주인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들이느냐 하면 뭐 아이들을 보고 허영심을 키우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책임의식을 느끼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뭐가 될지, 아 누가 알겠습니까. 여기서 이 설교를 듣던 어떤 여러분들 중에 자녀 하나가 자라나서 다음 세대의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지 누가 알겠으며, 세계의 평화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지 누가 알겠느냐 말입니다. 아무도 아멘을 안 하는 것 보니까 가망성이 없나 봅니다. 그 누가 알았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이 머리도 좋지 않고 얼굴도 못생긴 애 하나 놓고, 우리들이 허영심을 갖자 이런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서 이 아이 하나만 행복해 지고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역사가 바뀔 수 있다 그거를 말하느냐 하면 깊이 마음에 새기게 하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르호보암이 불행하게도 정말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교만하고 머리도 나쁘고 아주 세속적이고 하나님이라고는 안 중에 없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불신앙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격이 없는 사람이 왕이 안 되면 되지 않냐?” 그런데 세상 역사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다. 가격이 있는 것 같은 사람도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가 하면 전혀 자격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수많은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영향력 있는 위치를 갖게 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도 지도를 받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학식도 아주 뛰어나고, 그리고 또 모든 면에서 그렇게 뛰어나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대해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겠지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가르치던 학생 하나가 있었는데, 얘는 이상해. 신앙도 없고, 공부도 못해, 얼굴도 못생기고 키만 커! 키 큰사람 속없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니다가 집어 치웠습니다. 그런데, 뭐만 잘하느냐 하면 수학만 잘합니다. 그래서 강남에 와서 수학학원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정말 이름도 없는 시시한 학교 2학년인가 다니고 중퇴를 했는데, 비서는 일류대학교 나온 자매입니다. 공부 못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성실하지도 않고 그런데, 자기보다도 훨씬 공부 잘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들 밑에 거느리고 그런 학원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교수들 한 번 만나서 “이제야 제 소명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그래 뭐냐?”, “열심히 돈버는 겁니다.”, “돈 많이 벌면 학교에 좀 내겠습니다.” 냈는지 안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나중에 될 일이고 일단 내 아이, 내가 키우는 이 아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긴장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제 첫 번째야. 르호보암은 신앙이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그 밑에서 누가 태어나요? 누가 태어나요? 아비야가 태어나는데, 그 아비야 역시 신앙이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아비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이 아비야를 낳았다 그랬는데, 아비야는 신앙이 없는 아들이었으니까 우리는 첫 번째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어떤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까? “신앙이 없는 아버지 밑에서는 신앙이 없는 자식이 나온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잘 키우기 싫어하는 아버지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자식은 그래서 하는 말이 그렇잖아요? “애비는 이랬어도 넌 그러지 말라.” 꼭 게가 옆으로 걸어가면서 “왜 넌 똑바로 안 걷냐!”고 몽둥이 들면서 야단치는 것과 똑같단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좋은 밭에서 좋은 열매가 맺는 법입니다. 밭이 나쁘면 거기서 좋은 나무를 심어도 좋은 열매가 맺혀지기 어렵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신앙은 상당 부분이 그 부모에 의존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버지가 불경건하니까 그 밑에서 뭘 보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뭘 보겠는지! 어느 집 애들이 모여서 소꿉장난을 하는데, 애들이 소꿉장난하니까 , 한 애는 “넌 엄마하고, 난 아빠하고.. 넌 애들하고” 그러니 이 애가 각본을 다 짰는데, 애가 아빠역할 제일먼저 하는 게 뭐냐하면은 가서 물병을 들고 문 발길로 문 차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매일 아빠가 술병 들고 발길로 문 차면서 들어오는 거 그거 봤으니까 아빠 역할 하면은 그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 본 것이 그것이니까 어릴 때 딱 입력되어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자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의 역할을 해라 하니까 맨 본 게 바가지 긁고 소리 빽빽 지르는 것밖에 배운 게 없으니까 똑같이 그렇게 흉내내는 거예요. 자식은 말이죠. 그저 서너 살까지는.... 서너 살도 안 될지 몰라도....서 너 살까지는 엄마, 아빠 앞에서 배우지만 그 이상 나이가 먹으면 앞모습을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저는 살아갈수록 이것이 자신이 없고 두렵습니다. 정말! 그래서 내가 요즘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결혼만 응답 받고 할게 아니라 애도 응답 받고 낳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명 있냐고 물어보고 아기를 나야 될 것 같다며 열린 교회는 뭔지 하여튼 복잡합니다. 결혼 안 하는 사람에게 독신의 소명 있냐고 물어보고 장가 갈려고 청첩장 들고 온 사람에게 결혼의 소명 받았냐고 물어보고, 아기를 날 때에는 사명 받았냐고 다시 또 물어보고. 아- 정말 우리들이 얼마나 부족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우리의 부족한 것을 하나님은 이해해 주는데, 우리 아이들은 이해를 안 해줍니다. 그렇잖아요? 하나님한테는 잘못하고 나서 눈물로 빌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음부터 잘할게 용서해 주세요.”그러면 하나님은 이해를 하십니다. 애들은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슴에 사진이 찍혀 지듯이 퍽-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참 무섭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비교적 어른보다 순수하고 잘 받아들이지만, 그 잘 받아들이는 그 성품자체가 하나님께서 무슨 은혜를 베푸셔 가지고 아이들의 영혼을 새롭게 한 신령한 의미의 마음 밭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순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빨강, 파랑색 물감만 잘 묻는 게 아니라 흙도 잘 묻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제가 읽은 어느 책에 보니까, 그 저자가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기독교 사회학자인데, 사십이 훨씬 넘어서 자신의 내면에 깊은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자기 부인을 포함해서 웬만한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고 뿌리를 깊이 캐들어 가니까 어렸을 적에 부모에게 실컷 야단맞고, 뒷방에다가 딱 가둬놓은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걔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혼자 조용히 좀 생각해보라고 가두는데, 컴컴한 방에서 혼자 탁 있는 그 순간에 이 어린 아이 마음에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태어나서 최초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모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진이 찍히듯이 가슴에 콱-하고 찍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자라면서 계속해서 그 사람의 행동과 사고에 영향을 주는 방어 기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자녀를 기름에 있어서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처럼, 아이들도 그렇게 하나님이 마음을 붙들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아이들의 가슴에 잘못된 사진들이 막 찍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것까지는 여러분들이 자신할 수 없습니다.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이해를 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마음에 일단 콱-하고 한번 찍힌 것은 지워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한 번 신뢰가 깨뜨려지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그 치료되는 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딱- 찍히는 것입니다. “저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딱- 찍히는 것입니다. “저 사람. 괜히 나 싫어하는 사람.” 그러고 딱 찍히면 이게 “아, 그렇지 않아.” 그리고 이게 바뀌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십 년 전에 미워하는 사람, 지금 눈물나게 좋아하는 사람 봤습니까? 십 년 전에 눈물나게 사랑하다가 지금 미워하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좋은 감정은 좋은 감정대로, 나쁜 감정은 나쁜 감정대로 찍힌 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게 그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변화가 일어나면 가능한데, 그게 없으면 그 밭에서 그 나무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아비야를 낳았습니다. 누가? 르호보암이. 그러니까 보면서 “야, 이건 당연하다.”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그 밭에서 무슨 선한 나무가 나겠느냐?”딱 맞았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공식입니다. 좋은 자녀를 기르려면 자녀를 많이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좋은 존재자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아버지 자신이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도 좋은 사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좋은 사람이어야 됩니다.
자녀들에게, 어린아이들에게 앙케이트 조사를 했더니 [부모에게 제일 실망할 때가 언제냐] -언행이 불일치 할 때, 일관성이 없을 때 이럴 땐 이러다가 저럴 땐 저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보고는 횡단보도로 건너가라 그랬다가 자기는 급하면 무단횡단 하는 것. 그것이 뭡니까. 우리 보고는 법을 잘 지키라고 했다가, 자기는 이익의 문제가 걸리면은 언제나 탈법하는 것 그런 것들이 가장 자녀들이 부모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르호보암은 하여튼 아비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비야는 르호보암 닮은 아들이 됐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얻는 첫 번째 메시지가 뭡니까? 우리가 정말 변화된 아버지가 되어지지 않으면, 자기는 변화되지 않으면서 자식들이 훌륭한 자녀가 되기를 기대하는 건 도둑심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 뭐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좋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교제가 되도록, 살아있는 그 존재 자체가 말하자면 신앙의 교제 자체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우울하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냉혹한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는 것과 신앙이 무너지는 것은 엄청나게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 땅에 보냄을 받았을 때에 ,세례 요한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얘기되었어요?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아가게 하고....” 어떤 사람은 아비를 하나님이라고도 푸는데, 아닙니다. 가정의 그 하나님을 떠난 그 세상의 상태가 가정적인 질서들이 모두 파괴되어서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아비에게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파괴된 관계입니다. 그것을 신앙이 치유되면서 그 관계도 치유될 것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버지로서 똑바로 생활하고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준다든지 많은 돈을 주면 그날 하루는 권위가 있습니다. 줄까 말까할 때, 그 동안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고 나서 하루만 지나가고 나면 그 권위는 자식들이 인정하지 않는 권위입니다. 그러나 언행이 일치되고, 말과 믿음이 일치된 삶을 살아가서 존재 자체가 신앙의 교과서인 아버지, 그러한 부모가 있는 집의 아이들은 삐뚤어지게 갔다가도 그걸 보고 다시 돌아올 기준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먼저 이 어린이 주일에 그런 부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는 아비야가 아사를 낳았다고 그랬습니다. 아비야가 아사를 낳았다. 그것은 아버지는 아주 나쁜 사람인데, 신앙이 없는 불신앙의 사람인데, 아사라는 신앙적인 인물이 그 뱃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사는 이 다윗 이래로 아사는 기울어져 가는 유다 왕국의 신앙에 불길을 다시 불러일으킨 신앙 부흥의 임금입니다. 이 아사는 정말,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아사를 많이 회고합니다. 그만큼 신앙적으로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유대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진실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면은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원칙이 깨집니다. 아니,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은 그냥 살아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원칙이 또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 원칙이 불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경건한 자식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희망이 생깁니다. “아, 그래 맞아. 나 이렇게 개떡같아도 우리 아들은 찰떡같겠지!” 어쨌든 이 아사는 정-말 훌륭합니다. 그 훌륭한 점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은, 유일신 여호와의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분명하게 한 왕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딱 임금이 된 다음에 한 일이 뭐냐하면은, 그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처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 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 속에서 은밀히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그러한 잘못된 습관이나 그런 것들 죄악들 있습니다. 말로 할 때는 그런 것들을 미워하지만, 실제 그것을 청산할 때에는 엄청난 고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최근에 엊그제 어떤 분이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네 성경공부 팀에서 우리교회에서 설교된 [죄 죽임의 교리]를 매 주 하나씩 들려주는데, 재미있는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고 간증을 한참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테이프를 들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그런 충격적인 고백을 하는데 자기는 이제까지 자기는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사실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칼을 딱 들고 자기 삶 속에 죄를 잘라버려야 되겠다 라고 마음을 딱 먹으려고 칼을 딱 들고 보니까 사실은 너무 아깝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속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뭐 신앙이 없어서 우상을 섬기게끔 내버려두었겠습니까? 물론 그가 나중에는 말년에 타락해서 많은 신앙에 우상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사를 비롯해서 아주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결국은 우상을 모두 척결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뛰어납니다. 대게 사람들이 개혁을 하면 바깥에서부터 개혁을 합니다. 그러니까 개혁! 그러면은 자기는 괜찮고, 칼 빼들고 저기 먼데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찌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개혁이 성공하는 예가 드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정말 개혁이 성공하려면은 자기 마음속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삶부터 먼저 청산되어야 합니다.
프랑스에 드메로라고 하는 사회개혁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젊은 시절에 늘 기도제목이 “하나님 이 세상을 확 뒤집어버리게 도와 주시옵소서.” 이것입니다. 그러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뭐 뒤집어 지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년쯤 접어든 다음에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가정 하나도 맘대로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 내 가정을 내가 개혁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죽기 직전 노년에는 결국은 자기 자신도 자기에게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내가 변화되도록 도와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힘든 일을 해냈습니다. 자기부터 유일신 여호와를 진심으로 신봉하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결심했고, 어머니라고도 나오는데 이 어머니는 실제 육신의 어머니였다고 보기보다는 ‘태후’ 그러니까 할머니쯤 됐을까요? 그랬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이제 자기가 등극했을 때에 섭정 비슷하게 하면서 막후정치를 많이 하고 그랬으니까 사실은 대모 비슷하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왕이 되어서 딱 철이 들고나서는 그것을 버리라고 태후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버리지 않으니까 그 위에서 폐해버렸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그런 걸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힘이란 말입니다. 신앙의 힘. 그럼 이제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아버지 밑에서 그런 신학을, 신앙을 가진 그런 진실한 인물이 나타날 수 있느냐?’ 그것은 아버지가 아비야. 진짜 말 그대로 아비야! 아비야 이렇게 신통치 않았지만 그 아비야가 아비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훌륭하고 경건한 샛별과 같은 신앙이 저절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가 그런 아버진데,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의 인물이 태어났을까요?
다행히도 그에게는 훌륭한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아사랴라고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선지자와의 만남이 있으니까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 대신 그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주 진실한 그런 그 사람으로 변해간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마치 요시야가 여호야다 라고 하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변화된 것처럼 아비가 신통치 않으면 선생이라도 잘 만나야 됩니다. 정말입니다. 아비가 신통치 않는데 매일 돈 봉투 들고 가면 그거나 받아 챙기는 그런 선생 만나면 희망이 없습니다. 또 세상에서는 그런 선생을 만날 수밖에 제도적으로 없다 제도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쳐도, 신앙적으로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를 정말 기도해야 됩니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부모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러한 일을 그 자녀의 마음에 이루어 놓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수준에 맞는 선생님들만 만나게 하면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그 밥에 그 나물입니다. 그런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 아사라는 훌륭한 인물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사에게 있어서 아사에게 있어서, 아비야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숙명적으로 아비야와 같은 아버지를 가지고 그 아버지에게 배우면서 소망 없는 인생을 살아가다가 결국은 아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망가진 가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사랴와 같은 스승이 된다면 그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겠어요?
정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면은 희망이 없는 그런 가정들 너무 많습니다. 물론 아비야와 같은 아비를 두지 않았으면 좋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내 맘대로 되는 겁니까?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이란 던져진 존재같이 태어난 것.”인데, 그 사람들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는데, 그 아버지가 아비야와 같은 인물인데 내가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내 아들이 되면 좋겠지만 그게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내 아들이 되었으면 우리 아버지는 나처럼 안 됐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어떡합니까. 주어진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망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내버려두면은 아비야 밑에서 태어났느냐하면 아비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불경건하고, 막되 먹은 아버지 밑에서 막되 먹은 자식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버려두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자손들이 자손을 막 퍼지면서 나갈 때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가계에는, 그 족보에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한은 그 저주의 족보입니다.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족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라고 얼마나 놀랍습니까! 한 사람이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을 알게 만들고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씨앗을 같게 만들어 주는 것은 대대로 이어질 수 있는 그 끔찍한 저주를 단칼에 베어 버리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그 가문에다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가문에다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부모님들에게 말씀드리는데, 학교 열심히 찾아다닌 것 가운데 3분의 1만 교회 선생님들 찾아다니십시오. 학교 선생님은 뭐 강아지 이름까지 다 외워도 말이지 (교회)선생님 이름은 누군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의 아들, 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누구입니까? 한 번 만나서 아이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한 번 어머니로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 자녀를 위해서라도, 그 선생님들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정말 우리 아들에게 있어서 이 아사의 선생님과 같은 그런 선생이 되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깊이 관심을 가져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로부터, 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는데, 그 아버지에게서부터 받은 영향보다는 선생님에게로부터 받은 영향이 더 크니까 그 선생님이 경건하고 훌륭한 선생님이니까 이 사람이 돌연변이 같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다 있을 만 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냥 뭐 어느 학원에서 뭘 좀 잘 가르쳐 준다고... 요즘 학원은 뻥도 심합니다. 뭐 전단지 오는 것 보면은 우리 학원은 나와서 앉아 있기만 하면 저절로 됩니다. 되긴 뭐가 되겠어요? 뭐 그런 거.... ‘뭐 이상한 기계를 머리에 뒤집어쓰면, 저절로 장학생이 된다.’ 바닥에서 헤매다가 수석을 했다는 둥 황당 무계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이 공부하고 이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쓰면, 그러니까 이렇게 지나 다니다가 “아부개가 영어를 잘 한 대. 어느 학원에서 영어를 잘한대” “와 그러면 거기다 붙여 줘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신앙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 “어머, 저런 사람이 한 달에 단 한마디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뭔가를 좀 말해주면 우리 자녀들이 얼마나 바르게 자랄까?” 그런 욕심을 좀 가지란 말입니다.
그것은 참 큽니다. 정말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래서 이 아사의 선생님은 숙명적으로 아비야 밑에 태어나서 아비야를 능가하는 더러운 인간으로서 살아가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아사를 캄캄한 유대나라의 역사 가운데 찬란한 신앙의 횃불을 높이 든 샛별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어 준 그런 사람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정을 잘 돌아볼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이 좋은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고, 또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아버지로서 자녀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서는 바른 사람이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 단지 교육을 받을 뿐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알 가능성도 없는 그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내가, 내가 이 영혼을 가르치는 것이 이 사람의 족보에 흐르는 그 저주스러운 숙명적인 흐름을 끊어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영향을 미쳐서 이 사람을 신앙적인 돌연변이처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저주로 이어지던 그 가문이 이 아이 대에게 그 저주가 모두 끊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받은 혈통으로 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보내셨다하는 적어도 한 영혼을 다룰 때에는 우리는 이런 정도의 생각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화목케 하는 직책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를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선교의 사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이 주일 설교하다 자연스럽게 교사주일 설교까지 나왔습니다 만은 교사들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다니엘 서 7장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많은 사람을 의로운 길로 돌아가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리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그리고 누구도 돈 봉투 가져다주는 사람 없어도 그것과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러분 교사들이 그 누구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적습니다. 한 명을 목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로부터 태어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후손들을 그 태어날 수많은 후손들을 그 아이 한 씨 안에 담아서 그렇게 여러분들이 교육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니면 희망이 없습니다. 잘 가르쳐야 됩니다. 바르게 가르치고 잘 가르쳐야 됩니다. 특별히 경건한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보다도 그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가르쳐야 됩니다. 가르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하면 ‘나는 이 아이의 선생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 아이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이 아이에게 있어서 정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신앙의 영향을 미친 그런 존재가 되도록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영혼들을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아비야 같은 집에서 태어난 아사와 같이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오늘 이처럼 빛나는 샛별과 같은 사람으로 키워서 어두운 역사와 새벽빛이 깃들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사의 종교 개혁을 통해서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러니까 남북으로 갈려졌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북으로 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쪽에서 신앙의 부흥이 확 일어나서 사람 사람, 가정 가정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에서 살아가고 거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니구나! 정말 내가, 우리가 이래선 안 되겠구나.’ 그래가지고 굉장히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따라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월남을 하는 기이한 역사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역사까지 일어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공식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공식을 만날까요? 불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는 불 경건한 아들이 태어나게 되어 있으나,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예외도 있을 수 있다 이것입니다.
2. 아사는 여호사밧을,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마1:8)
지난 시간에는 르호보암이 아비야를 낳은 것과 아비야가 아사를 낳은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제 아사가 여호사밧을 낳은 것과 또 여호사밧이 요람을 낳은 것을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희귀한 대물림과 그리고 신앙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참 희한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르호보암이 아비야를 낳은 것은 불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불 경건한 아들이 낳았음이 콩 심은 데 콩 난 것인데 그런데 그 아비야에게서 아사와 같이 샛별과 같이 빛나는 신앙의 사람이 탄생한 것은 콩 심었는데 팥이 났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됐다고 했습니까? 누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잘 못 만났지만 누구를 만났습니까? 그렇습니다. 훌륭한 신앙적인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라보고 살고 싶은 인물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큰 비극입니다. 반짝하는 방법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는 그런 재주를 가지고 나타난 사람들은 가끔 있지만 그게 아니라 거목과 같이 그렇게 오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 가슴에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자꾸 그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신앙적인 스승을 못 만나는 것이 오늘날의 비극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몇 백 년에 한번 태어날 만한 영적인 거목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우리 같은 자식을 낳겠습니까. 그 말이 좀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그건 아주 희귀한 일이고, 이제 그런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의 시대는 분재와 같은 지도자와 묘목과 같은 교인들이 모여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묘목입니다. 열린 교회 산 자락에 심겨진 묘목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결코 분재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묘목이지만 언젠가는 커다란 거목이 되어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감화를 끼쳐서 이렇게 아비야에게서 태어난 아사와 같이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 아비는 잘 못 만났지만 이제 여러분들을 만나서 이렇게 그 불행하게 인생을 마칠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들로 그렇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저는 몇 일 전에 묵상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나무를 심을 때 묘목의 시절에는 땅이 묘목의 신세를 집니까? 아니면 묘목이 땅의 신세를 집니까? 당연히 묘목이 땅의 신세를 집니다. 거목이 되면 거목이 땅의 신세를 집니까? 땅이 거목의 신세를 집니까? 땅이 거목의 신세를 집니다. 신기합니다. 같은 나무인데, 왜 묘목은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바람불면 흔들리는 것밖에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잎사귀가 열면 몇이나 열겠으면 또 씨앗이 떨어지면 얼마나 떨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땅의 기운만 빨아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목이 되고 나면 달라집니다. 큰 거목이 되고 나면 가을이 되면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지면 몇 트럭 분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땅에 떨어져서 썩습니다. 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그늘이 지니까 많은 벌레들이 모입니다. 벌레들이 모이니까 또 그것을 잡아먹는 새들이 모입니다. 새가 둥지를 틀고, 모이고, 짐승들이 깃들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묘목이던 시절에는 나무가 땅의 신세를 지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그 거목이 땅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뻗어 나온 그 거목에 .그 땅바닥으로 뻗어나간 그 많은 이 뿌리들을 통해서 산에 있는 토질들을 새롭게 하고 그것들을 다 움켜져서 그래서 웬만한 비바람이 불어도 사태가 나지 않게 막아주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렇게 교회에 심겨질 때는 교회가 여러분의 신세를 집니까? 여러분이 교회 신세를 집니까? "아 내가 교회 와서 신세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밥 먹었지 않았습니까." 교회 신세를 집니다. 그런데 이제 영적인 거목이 되고 나면 그러면 교회가 그 사람의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쭉 가르쳐주면 그 한사람이 살아있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신통치 않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 낳기 때문에 신통치 아니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서 이렇게 가정에 대대로 흐르는 불 신앙의 기운들을 끊어버리고 그리고 신앙의 사람으로 돌연변이가 되는 그런 역사가 이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좋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녀들에 스승을 위해서도 기도해야됩니다. 자녀들이 여러분과의 만남,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좋은 스승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해야됩니다. 그냥 단지 촌지 안 받는 청렴한 선생 정도가 아니라 아이에게 깊이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을 만나도록 여러분 기도해야되고, 또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제가 우리 모두가 그런 선생님으로 살아 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얼마나 복된 역사인지 모릅니다.
자! 그러니까 이 아사는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행운아였습니다. 선생님을 잘 만나서 말도 안 되는 신앙이 없는 아버지 밑에 태어 낳는데 청사에 길이 빛날 신앙의 임금으로서 한 시대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습니까?
그 사람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여호사밧 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 샤파트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신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 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또 참 물건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진짜 신앙의 임금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결론을 내려보자면 이번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경건한 아들이 태어 낳습니다. 이 여호사밧은 이 우상숭배에 대해서 아버지보다도 더 강력한 미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앙이 정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세라 목상을 찍어 엎고,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다 두드려 엎고, 아버지도 다 정리하지 못하는 남색 하는 자들, 산 당 같은데서 동성 연애하는 그런 남색 하는 자들을 모두 다 쓸어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 하셨습니까. 그런 신앙을 누구에게서 물려받았습니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기도하는 것도 꼭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전쟁을 기도로 이기더니 이 아들 여호사밧도 모압, 암몬, 에돔 3개국이 연합군을 만들어서 쳐들어 왔을 때 간절히 기도해서 그 적군들을 물리쳤습니다.
자! 이거 보면 확실히 이 신앙이란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바르게 믿으면서 살아가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면 그 아버지를 매일 업고 다녀야합니다. 자가용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업어다 출근 시켜드리면 되지. 왜? 그런 축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만 다녀서 예배시간에 졸다 오는 그런 아버지 말고 진짜 은혜 받은 아버지, 주님의 뜻 데로 살고,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역경에 처할 때나 언제나 경건하게 하나님만 섬기며 살려고 하는 그런 아버지를 가진 자녀는 이 세상을 모두 가진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놀라운 특권은 이렇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왕의 계보를 살피는데도 그런 특권을 누리는 왕이 얼마나 됐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에 왕 가까운 데서도 그런 축복을 받은 임금이 몇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까짓 것 유산을 물려준 것 그런 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그까짓 것 무슨 그 유산이, 훅 바람이 불면 다 날라 갈게 유산인데 또 물려주면 얼마나 물려주겠습니까. 요새 세금도 비싸다는데, 다 떼고 나면 얼마나 남겠습니까. 그까짓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버지가 준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쉽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복 주시려고 맘먹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예정대로 복을 받는 것이 더 쉽겠습니까? 그것은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아버지 주머니나 바라보고 아버지 운명하실 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제일 희망 없는 사람입니다. 쓰레기, 인간 쓰레기입니다. 그거 해서 뭘 합니까? 다 종량제 봉투에다 넣어서 버려야됩니다. 오죽 못 났으면 그렇게 삽니까.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망하게 하려고 작정하신 사람을 안 망하게 하는 것과 주님이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을 복 못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리는 비를 멈추는 것만큼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면 누가 멈추겠습니까?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아무리 우산을 쓰고 난리를 쳐도 내리는 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런 재산이나 그런 것들이 없어도 신앙을 물려준 아버지는 모든 것을 물려준 아버지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다시 할 테니까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물려줘도 신앙을 안 물려준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안 준 것이고 모든 것을 주지 못했어도 신앙을 물려준 아버지는 모든 것을 물려준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이런 어머님 가지신 분들은 하늘이 낸 사람들입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할 때 참 비록 부유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산 우리 어머니, 고달픈 인생을 사시면서도 세상을 보고 낙망하시는 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셨던 어머님, 그래서 고달픈 일상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돋보기를 끼고 성경을 읽으시면서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기록을 읽고 늘 눈물을 흘리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시던 그런 어머님에 대한 기억,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우리 머리맡에서 우리를 신앙적인 사람으로 잘 자라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그런 어머님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그래서 난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늘 눈물 없이는 부른 적이 없습니다. 왜? 나는 그런 어머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라도 예수를 믿게 되어서 그런 부모가 우리 자식들을 향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받았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또 섭섭하고 원망스런 눈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도 흐르는 것입니다. 아! 그래 적어도 우리가 바르게 살면 우리의 자식들은 다음 대에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에게는 왜 그런 어머님, 그런 아버지가 없었을까? 하고 눈물 흘리지는 않게 만들어 줄 수는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모의 신앙으로부터 자녀에게 그 신앙의 영향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그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공식은 그 부모의 신앙이 자녀의 인격 속에 그대로 흘러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사 밑에서 여호사밧과 같이 경건한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사밧은 정말 본받을 만한 훌륭한 점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였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반을 나누어 가지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제사장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당번인 제사장이 있고 비번인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전에는 비번인 제사장들이 그냥 자기 당번이 아니면 돌아가서 다시 자기의 일에 종사하고 그랬는데 이 여호사밧 때는 비번인 제사장들을, 그 사람들은 전부다 그 사람은 제사보다 하나님의 율법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이 행동보다 그 율법에 가까이 있는 사람 이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목사가 예배드려주는 기능공은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그 제사장들이 그런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데리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율법 공개 강좌를 열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쭉 돌아다니면서 방배동에 와 가지고 율법 공개강좌 해 가지고 사람들을 다 모으면 그 다음에는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율법을 잘 가르쳐서 백성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얼마나 은혜로웠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려는 제사장들이 대접을 받고 환영을 받는 그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부흥이 이 여호사밧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잘 가르치는 그러한 왕으로서 살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버지로부터 기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려움이 오면 기도했던 것처럼 그 신앙을 본받아서 이 아들인 여호사밧도 어려울 때마다 깊이 기도하는 그런 기도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신앙은 앞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야단치고 일어서서 뒤돌아서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삶 자체가 자녀들에게 모본이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로 가르치고 잘못했을 때 가끔 슈퍼맨처럼 나타나서 몽둥이로 휘두르는 건 별로 비용이 안 드는데 우리 부모 자체가 자식들에게 본이 되는 교제가 되는데는 정말 살을 깎는 그런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따라 사는 그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 데로 살아야 되겠다. 그러니까 자식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워낙 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부모 밑에서 자식들이 대부분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부모의 경건을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물론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범죄에도 빠져보고, 하나님을 떠나도 보고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정말 뼈저린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도 복되지만 더 복된 사람들은 그렇게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왕년에 타락했던 것을 자랑처럼 생각하는 시대이니까, 그게 뭐 그렇게 자랑할 일입니까. 정말 얼마나 복됩니까.
어느 목사님이 한국에 설교 세미나를 하러 왔는데 워낙 설교를 잘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같은 동창생 하나가 가서 물어봤더랍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잘 하시느냐고, 외국 사람인데, 하나님을 혹시 크게 만나신 적이 있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별로 그런 특별한 기억이 없다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잘 하시느냐고 그러니까 이분 대답이 걸작 이였습니다. 난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여태까지 설교 같지 않은 설교는 듣지 않고 자라왔다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잘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그것이 축복입니까. 그래서 걸출한 로이드 존스나 제임스 팩크나 이런 사람들의 설교만 들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 그게 자랑스럽습니까? 아니면 도대체 무슨 말 갈 때, 소 갈 때 성경 가지고 갈 때, 안 갈 때 다 돌아다니고 실컷 한 십 년 가르치고 나서 여러분, 여태까지 가르친 건 알고 보니까 다 거짓말 이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 더 납니다. 그러고도 돌아온 것이 안 돌아온 것보다 낫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래서 이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인가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고 나에게 신앙적인 아버지, 믿음으로 사시는 어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 신앙의 아름다운 본을 본받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야 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우리들은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죠? 신앙에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한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이 한없이 가슴 아리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 우리는 비록 우리의 부모는 아사와 같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사와 같은 부모가 되면 됩니다. 우리가 아사와 같은 부모를 못 가졌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그래서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보다도 불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더 많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만 변화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도 변화시켜주셔서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정말 이 성경 속에 흐르는 여러 대 가운데 아사와 여호사밧의 대와 같이 그렇게 경건한 신앙을 물려주고 물려받은 그런 부모와 자식간에 관계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사모함을 갖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아사가 여호사밧을 낳았는데 그런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 이였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자녀에게 전수되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그러니까 이 아버지의 이러한 경건한 신앙, 기도의 힘,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신앙의 결단 이런 것들을 아버지에게서 많이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부모의 경건한 신앙의 모습, 그것을 자녀들이 인격적으로 깊이 보고 영향을 받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은 아사와 같은 사람 이였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여러분들에 그런 신앙이 아사에게서 여호사밧에게 물려졌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그렇게 믿음을 배반한자요, 악한자가 나오지 아니하고 이렇게 믿음이 되 물림을 한 것처럼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되 물림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특별히 자녀를 위해서 신앙으로 가르치기를 힘쓰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 다음에는 여호사밧에게서 요람이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요람 혹은 여호람이라 이렇게 부르는데 이건 '하나님이 높이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요람은 정말 형편없는 불신자입니다. 행악자 일뿐만 아니라 이교도에 가까운 왕 이였습니다. 사실 여호사밧이 신앙은 참 좋은데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명석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판단력과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왕 이였을 때 북 왕국에 유명한 왕이 하나 나오는데 그 사람이 아합 입니다.
그런데 이 아합은 말하자면 삼국지에 조조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지 신앙은 없어도 머리가 비상한 사람 이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신앙은 훌륭했는데 머리는 좀 빈 사람 이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그저 좋은 점만 합쳐져서 한 사람이 나오고 나뿐 점만 합쳐서 한 사람 나왔으면, 즉 신앙도 좋고, 머리도 명석하고, 또 한 사람은 신앙도 없고, 머리도 텅 비고 그랬으면 한 사람은 망가졌겠지만 한 사람은 다윗과 같은 임금이 됐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신앙적으로는 참 훌륭했는데 불행히도 그 신앙이 정치에 영향을 깊이 미쳐서 신앙 화 된 정치를 했으면 청사에 길이 빛나는 아사와 같은 왕이 됐을 텐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기도 열심히 하고. 그저 말씀 잘 보고, 그저 경건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 사람이 ( ? ) 같으면 뭐라고 꼬집을 수는 없는데 아닙니다. 그리고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사람 밑에서, 그런 지도자 밑에서 생활하기는 뭐 매일 기도하자고 그러고, 금식하자고 그러고 하는데 하여튼 뭔가 이렇게 명쾌한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경건한 사람의 지도를 받는 위치에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잘 이루어 갔으면 훨씬 성공적인 인생을 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좀 모자랐기 때문에 이 사람은 아합에게 이용을 많이 당했습니다. 북방에서 군대들이 쳐들어오니까 아합이 뭐라고 그랬냐하면 우리 연합군을 만들어서 같이 싸우자. 우리는 형제의 나라가 아니냐 그러니까 이 정 많고 머리 모자라는 여호사밧은 그냥 그러자 그리고 나갔습니다. 아합하고 같이 나갔더니 아합이, 왕이 둘이면 같이 전쟁을 나갑니다. 그런데 자기는 평상복을 입고 여호사밧에게 왕으로 탁 씌워서, 그것이 무엇입니까? 적군보고 '애 죽여라' 그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도 좋다고 또 말을 듣습니다. 이렇게 빈 사람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적으로만 훌륭하고 개인적인 경건에 있어서만 훌륭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신앙이 삶 자체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전 삶이 신앙의 영향아래 있도록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회사 가서는 탈세하고, 불법을 행하고, 뇌물 주고, 다 못할 짓하고 교회 와서는 거룩한 사람 이것은 사기라는 말입니다.
이 여호사밧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지만 하여튼 좀 비슷한 유형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결심하는 가운데 그런 결심을 합니다. 나에 모든 삶에 동기가 신앙이 되게 하자. 신앙적인 이와 원리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말자. 그런 신앙의 이치를 만약에 여호사밧이 터득했더라면 아마 명철한 임금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사람은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삶이고, 정치는 정치고 이렇게 따로 구별된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 여호람이 있었는데 그 여호람이 이 아버지에게서 경건한 신앙의 영향을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사랑하고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 아버지의 그 경건한 신앙, 그 아버지와 늘 접촉하면서 살았는데 왜 그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받지 못했을까요? 불행히도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 여호람이 바로 누구냐 하면 아합에 딸과 결혼한 남자입니다. 아합에 아내는 누구입니까? 이세벨입니다. 그 사이에서 아달랴 라고 하는 아주 간교한 여자가 태어납니다. 이 사람은 아예 그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할 선교사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여호사밧이 그것을 판단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를 자부로 맞아들여서 여호람과 결혼을 시키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어떤 원리를 또 하나 깨닫습니까? 야! 한 가정이 신앙으로 잘 서는데 있어서는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밖에서 자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저히 그 아버지 밑에서 그 경건한 아들이 나올 가능성이 없는데 누가 영향을 미칩니까? 그 가정에, 선생님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경건한 아들이 나올텐데 누가 영향을 미칩니까? 밖에서 웬 여자가 시집을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남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쳐서 이단자 가까운 왕이 되게끔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장가를 잘 가라는 말입니다. 아니 왜 웃습니까? 난 하나도 웃음이 안나오는데, 그러니까 외모로만 취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외모에 자신이 없는 자매들이 소망을 갖겠지만 외모로만 취하면 안됩니다. 간교한 여자들이 미모입니까? 메주입니까? 말해 보세요.? 아니 왜 대답을 못합니까? 대충 미모입니다. 왜? 얼굴이 미인형이 아니면 간교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가 상대를 안 해주니까. 막 호리는 말을 해도 그 얼굴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미모를 가진 사람들이 대게 간교합니다. 그러면 오늘도 어휴! 큰일났다. 난 미모인데, 그런 자매들도 여기 많겠죠? 대부분일 것입니다. 열린 교회 자매들, 그러니 조심해야됩니다.
그러니까 뭐 얼굴이 어떻게 생긴 것이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세벨을 만화영화로 그린다면 팥쥐 같이 그려놓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그 어머님 밑에서 그 딸이 낳는데 얼마나 잘 호렸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외모만 보고 이 사람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그 폭탄을, 이 여자가 들어와 가지고 유다 나라에 왕가에 씨를 말려버립니다. 왕자들을 다 때려죽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이 육신에 소욕에 좋은 대로 장가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 사는지, 뭐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어디서 굴러 왔는지, 부모는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한 눈에 그저 펑 하고 얻어맞아 가지고 '하나님! 더 좋은 자매도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잘 들어요. 그래서 정말 결혼은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부모님을 만났어도 결혼을 잘못하고 잘못된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요새 연애하지 말라고 얼마나 강조를 했는지 얼굴만 보면, 내가 만나기만 하면 아무나 보고 만나지 말라고, 너 연애하지 말라고 그런 거 하면 큰일 난다고 그랬더니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그 사람들 아마 어디선가 연애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정말 여기를 보십시오. 이 집안은 사실 이렇게 요람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 아이가 그렇게 이단자 비슷한 임금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집안 이였단 말입니다. 그 기도하는 아버지, 기도를 통해서 역사를 바꾸는 아버지를 봤습니다. 무릎으로 승부 하는 아버지를 봤고 그렇게 말씀을 사모해서 이 백성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려고 하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그런 이단자가 되다니 그게 무슨 천 부 당, 만 부 당 한 이야기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영향을 아내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라는 건 신기하게 신앙이 좋은 남편, 신통치 않은 아내, 이렇게 만나면 이게 합쳐져서 중간이 되던지 이렇게 올라와서 상향 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향 평준 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매들이 가끔 뭐 자기가 우리 교회는 아니지만 누구를 사귀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실토를 하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야 그 형제가 하나님의 사람이냐?" 자매를 사귀고 있다면 "그 자매가 경건한 자녀를 기를 수 있는 자매냐?" "아! 목사님! 연애가 뭐 그렇게 복잡한 것인지 아세요?" 그런데 그런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호람이 정말 아니, 아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합도 이세벨만 안 만났으면 그 정도까지는 안 됐습니다. 그 사람 신앙이 있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여호람도 아마 그 여자만 안 만났더라면 이렇게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몇몇 여자들이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나쁜 의미에서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은 늘 조심해야됩니다. 아무리 내가 우리 아버지로부터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았어도 경건한 아내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의 영향보다는 내 아내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이 결혼에 대해 아주 심사숙고 해야됩니다. 그까짓 것 얼굴이 예쁘고 밉고 하는 그런 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물론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많이 하고, 가문도 훌륭하고, 지참금도 많이 가져오고, 신앙도 띄어나게 경건하고 그런 자매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 자매가 자기에게 시집을 오겠습니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건 나중의 문제입니다. 우선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긴 사람인가. 나 없이는 살수 있어도 주님 없이는 살수 없는 사람인가. 나와 주님을 선택하라고 할 때 언제든지 나를 버리고 주님께 달려갈 수 있는 여자인가. 그런걸 봐야 됩니다. 그래야 경건한 가정에서 경건한 후손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이 요람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 이였습니다. 만약에 그 부인만 만나지 않았다 고 할지라도 아마 이 사람은 정말 그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아서 또 어떻게 보면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고 아버지의 정치적인 잘못을 잘 거울 삼아서 보안해 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그런 정치가가 될 수 도 있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만 정말, 일찍 죽습니다. 얼마 안 되어서 죽습니다. 뭐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칩니다.
그러니까 정말 형제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그런 자매가 안 나타나면 안 가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준비한 그러한 자매를 보내주셔서 그래서 혼자 인생을 사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러한 생애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모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경건하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아이들이 저절로 나만 똑바로 살아가면 훌륭한 자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교만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아이들을 위한 신앙의 교제일 뿐 그들이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게끔 만들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들 자신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구가 될 뿐이지, 충실한 도구가 될 뿐이지 우리는 어떤 어린아이에게도 우리 스스로 신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런 일들을 해주실 때에만 그 아이들이 경건한 우리부모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경건한 후손들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주님의 뜻 데로 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주님의 진리 데로 어린 영혼들에게 깊은 신앙의 모본을 끼치면서 잘 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이렇게 힘쓰고 애쓰면서 살지만 우리의 자녀들에게 경건한 신앙을 물려주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그 어린아이들 속에 친히 역사 하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부모들은 아무리 자신들이 경건하게 살아도 자신의 경건 때문에 경건한 자손이 저절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부모가 아닙니다. 이런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 부모는 자신이 경건하게 살면서도 순간순간 자기의 자녀들을 일깨우셔서 신앙의 영향아래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부모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이 경건한 아버지로부터, 정말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정말 좋은 영향을 받아서 그 신앙을 물려받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자녀들은 부모가 절대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적인 면도 있고, 세속적인 면도 있다 이렇게 두 가지 면이 한 사람 안에 거의 비슷하게 공전 할 때에 신기하게 자녀들은 그 좋은 경건한 영향을 빨리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속되고 잘못된 세속적인 것을 먼저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들이 못된 버릇 먼저 배운다고 그렇습니다. 신기합니다. 애들이 찬송가는 세 네 번 불러도 못 외어도 TV에서 막 난리 치면서 춤추면서 하는 그 힙팝 같은 노래는 우리도 못 따라하는데 6, 7살 먹은 애들이 막 기가 막히게 따라합니다. 그 인간이 부패한 성품은 악과 만날 때 그렇게 친화적인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동물처럼 살기 위해서는 노력할 필요가 없는데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막 살기 위해서는 애쓸 필요가 없지만 잘 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렇게 살기 위해서는 인생이 너무나 짧고 잘 살려고 애를 쓰다보면 너무나 긴장이 많이 되기 때문에 인생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교훈을 여기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한번 잘 생각을 해 보세요. 80% 아주 신앙적인 내용으로 우리의 삶에 채워져 있고 20%로가 불 신앙과 비 신앙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20%는 자식들이 영향을 받지 않고 압도적으로 비율이 높은 신앙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80%에 달라붙지 않고 20%에 달라붙어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여호사밧이 개인적인 경건에 있어서는 깊이 성공을 했지만 그 경건이 자기의 온 삶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실패한 그런 모습을 자식이 본받고 그리고 사악한 아내를 맞이하므로 이제 그렇게 주님을 경건하던 샛별과 같은 신앙이 조상들로부터 물려오던 그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신앙이 이제 이 손자 대에 와서는 모두 사라지게 되는 그런 비극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어떤 그 획일적인 공식 같은 것들이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르호보암과 같은 사람이라면 정말 아비야 같은 자식이 태어날 수 있고 우리가 아비야 같은 부모인데도 우리 밑에서 아사와 같은 자손이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사와 같기 때문에 여호사밧과 같은 아들이 당연히 태어날 수 있지만 우리가 여호사밧 같아도 요람과 같은 자식이 태어날 수 있다는 이런 가변적인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가 이 일을 평생 살면서 그 자식에게 좋은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서 방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염려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사와 같든지, 여호사밧 같든지 혹은 르호보암이나 아비야와 같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하나님 앞에 배우고 그리고 그 배우고 살고 있는 그 바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서 그 자녀들이 온전한 부모의 신앙의 도리를 따라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자식들에 결함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결함을 들여다보고 대부분이 좋지만, 좋지 않은 어떤 부분들이 자녀들에게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물려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살피면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를 온전케 해서 정말 거룩한 성도로서 살다가 그 거룩한 씨앗을 보전하고 죽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부모를 공경하는 길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오늘은 모두 지키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새삼스럽게 주일을 정하고 날을 만들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기려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늘 이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또 자녀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잘 깨달으면서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주일이 아마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자라고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서 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교회에서 거룩한 말씀의 영향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속의 영향도 받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 당연한 삶의 도리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날을 정하고 깨우쳐서 우리로 하여금 어그러졌던 길을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바른길을 들어서도록 만들어 주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저희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고 하는 약속까지 아울러 주셨습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입니다. 유교적인 개념에 있어서 부모의 공경은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의 모든 신체와 우리의 모든 육신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채의식 때문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었으면 어디서 태어났겠으며 신체와 이 모든 것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에 부채의식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또 하나는 현실적으로 부모님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식을 잘 보살피고 자식을 위해서 희생을 했기 때문에 그 마음의 노고에 보답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부모 공경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보상적인 심리에서 그 부모에게 잘 하도록 가르쳤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 부모가 오랜 인생을 살았고 이제는 연로하셔서 우리보다는 인생의 남은 날들이 짧아 앞서 가실 터이니 그 부모를 남은 날 동안에 평안히 봉양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믿는 동정적인 심리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부채적인 심리, 보상적인 심리, 그리고 동정적인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며 살도록 이렇게 가르침을 받아왔고 이 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은 짐승과 같다고 사람들 사이에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적인 이러한 도덕의 전통조차도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다 무너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법정에 세우는가 하면 자식이 부모를 유산의 문제로 살해하는 일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제 이런 일이 일어나도 우리에게는 별로 충격이 되지 않는 이러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빠져 갈 것이며 가정은 점점 황폐해져 갈 것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점점 황무해져 갈 것입니다. 이런 때에 그래도 유일한 희망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제 다시 개인주의화된 사이에서 유교사상을 일으켜 세워서 그 사상의 모든 사람들이 감화를 받으면서 옛 질서로 돌아가는 봉건적인 사회의 재건은 불가능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 명제에는 깊이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했던 이유와는 다른 이유를 신앙 안에서 발견하고 우리들이 그 신앙 안에서 발견한 의미들을 우리의 깨트려진 가족들과의 관계에 적용시킬 때 우리의 망가진 가정은 치유될 수 있고 부서진 부모와 자식들간의 관계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인생을 살아가다가 이상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무인도에서나 혼자 살았으면 좋을 사람들, 그리고 무엇인가 이렇게 성격과 인성 자체가 심히 굽어 있어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인간성이 바르지 못하고 굽어있고 생각이나 사고 자체가 깊은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거나 가해적인 심성을 가진 이상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80% 이상의 답, 그것을 가정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결국은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외국에 다녀보면 어디를 가도 한국 배만큼 맛있는 배가 없습니다. 하여튼 어디를 가든지 한국 배라고 딱지를 붙여 놓으면 그 이상은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최고의 배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한국 배 하나를 주면 그 나라 배 한 궤짝을 사는 그런 나라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한국의 그 배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수입해오는 것은 너무 비싸고 하니까 길러보려고 여러 사람이 시도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똑같은 한국에서 종자를 가져다가 좋은 비료를 주고 한국과 똑같은 기후조건에 있는 위도상에서 그렇게 일구어 배를 심는데 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한국에 나는 모든 과일은 외국 과일보다 다 맛이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배는 그렇습니다. 결국은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그 땅이 한국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해보아도 되나, 나는 지질학자는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안될 것이다라고 그랬습니다.
한국에서도 아무 땅에 다 심으면 그렇게 맛있는 배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몇몇 지방이 정해져 있습니다. 거기서만 그렇게 맛있습니다. 똑같은 종자를 심어도 부모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땅입니다. 그 땅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 하는 것이 그 땅의 결정적인 작용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망가지고 굽어지는 사람의 이면에는 반드시 망가진 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부모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후손이 태어나게 할 땅을 만들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오죽했으면 제가 젊은 사람들 결혼할 때 결혼의 소명이 있느냐고 물어 보겠습니까. 80% 이상 90% 까지 전부다 그 가정 자체입니다.
교육에 대해서 열을 내는데 그것도 웃깁니다. 교육도 훌륭하지만 그러나 부모라고 하는 존재,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 맺는 그 관계 자체가 이미 결정적인 교재입니다. 부모를 그 자체가 좋은 땅이 아닌데 그냥 값진 책, 무슨 별의 별 책들을 같다 놓고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그 아이가 바르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콘크리트에다 나무를 심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망가진 가정에서 망가진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망가진 상태에서 자란 아이가 다시 망가진 가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망가진 후손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대물림을 하면서 계속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후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올바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똑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지 않는 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후손의 문제이고 역사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들은 오늘 설교는 썰렁하구나,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구나 할 것입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도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기 위에서 까만 가운을 입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목사가 된다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목사를 안수하고 하는 예식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확인시켜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면사포에 마력이 있다고 면사포를 뒤집어 쓴 순간 형편없던 사람이 변해서 현모양처 감이 되리라고 생각합니까? 이 길이 무슨 마력이 붙어 있는 길입니까? 이 길이 검은 양복입고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그 순간 주례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이 무슨 새 사람이 된다고 생각을 하느냐 이겁니다. 아닙니다. 오랜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한 사람,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르며 부모가 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된 다음에 좋은 부모가 되려고 하니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자랄 때 좋은 사람, 정말 잘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온전해지기를 노력할 때 그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좋은 아버지, 회사를 가면 좋은 직장인, 교회에 오면 좋은 집사님,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공경이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해서 쓰여질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성경을 뒤져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런 식의 단어를 부모 이외에 사용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부모를 이렇게 공경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모들 자신을 위한 계명이라기보다는 그 자손들을 위한 계명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고 어떠하든지 자녀를 자기 공경하도록 만드는 그 부모에게 축복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녀들에게 주는 계명입니다.
그 축복이 무엇이냐 하면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땅에 있어서 만큼 한이 맺힌 민족이었습니다. 유리하던 조상들이었고 그리고 아브라함도 결국은 땅이 없어서 유리하던 사람이었고 애굽에 가서도 종살이를 하면서 살아야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거기서 땅이 없는 설움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출애굽을 해서 그렇게 그들이 소망 가운데 광야를 뛰쳐나왔던 것도 땅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광야를 유리하면서 수많은 나라와 싸워야 했던 이유도 결국은 땅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신약 성경에 쓰여지고 있는 이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로마에게 빼앗겨 잃어버리고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땅이라면 한이 맺힌 민족인데 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맥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땅과 장수만 있으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그 당시로서는 의료 혜택도 변변치 않고 하던 때이니까 일찍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40년대인지 50년대의 한국통계를 보니까 남자의 나이가 40세가 되지 않는 서른 몇 살입니다. 일찍 죽었습니다. 그런 때에 장수한다 이겁니다. 백일이 왜 생겨났습니까. 어떻게 백일이 되었는데 아이가 죽지 않느냐 해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바로 백일 잔치입니다. 돌은 이제는 걱정이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누가 와서 죽이거나 큰 병이 들지 않는 한 아이는 이제는 살 것입니다.
회갑은 세상에 60살까지 살다니, 70은 예로부터 이렇게까지 오래 산 사람이 없는데 하면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장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들이 가끔 죽어야지 하면서 부엌에 가서 보약을 드십니다. 자매들이 나이 들어서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매일 아침 화장을 합니다. 장사꾼이 남지 않아 하면서도 오늘도 물건을 띠러 가지 않습니까? 3대 거짓말입니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개가 훨씬 낫다고 그랬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고자하는 애착은 대단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꼬방에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80평형 묘지에 묻히고 싶습니까? 80평인데 한 번 해볼만하지 않습니까? 방 7개 있는 묘지에 묻히고 싶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현실적으로는 이 땅의 문제와 장수의 문제가 해결되면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현상금까지 거시면서 이제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를 공경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부모와 자식간에 있는 문제로 말미암아 집안의 저주를 받거나 하나님께 벌을 받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합니다. 전 하나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 인생은 전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인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론 착각으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착각으로 그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사실은 그렇지만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자기 의식의 범위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해결해야할 큰 죄의 문제가 있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비비꼬인 마음이 있다든지 이 신앙 때려 쳐야 될텐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말 저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객관적으로 진심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만 공경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때에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자식간에 문제가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통계가 나왔는데 80%의 젊은이가 부모가 밉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부모가 산 인생을 똑같이 살겠느냐하고 물었을 때에 “예”라고 대답하는 수는 정말 희귀할 정도의 소수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으로 답을 해 보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여러분 부모처럼만 살았으면 좋은 사람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공경이라고 하는 이것은 결국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섬김과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먼저 그 부모를 그렇게 사랑하고 깊이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으면 그가 하고 있는 그 공경이라고 하는 행동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경이 아닙니다.
어떤 자식이 부모가 자녀에게 너는 도대체 어버이날이 되었는데도 꽃도 한 송이 가져오지 않느냐 그러니까 박스에다 스무 송이를 담아 가지고 왔더랍니다. 1년에 하나씩 20년 동안 썩지도 않으니까 달으시라고 그 사람도 이상합니다. 한 개 갔다두고 1년 있다 또 달으라고 하지 왜 20개씩 갖다줍니까. 때가 되면 고기나 사들고 가고 때가 되면 봉투 들고 가서 그저 주는 것, 그것도 하지 않는 자식들도 많습니다. 사실은 자신들은 자식들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 부모는 무료 급식소를 기웃거려야하는 처지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 생각 밖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 문제가 무엇입니까? 부모를 갔다 버리는 것입니다. 약간 치매 기가 있어서 어릿어릿하는 노인네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정신이 말짱해도 그 분들은 자식 이름을 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세상이니까 그만큼만 해도 할만큼은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를 향해 우리에게 의도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들을 모두 깨닫고 실천하기까지는 우리가 다 되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경이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작용인데 어떻게 공경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공경하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를 다 공경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공경 받는 관계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관계를 꿈꾸고 있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계신데 나보다 공부도 훨씬 많이 하셨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해서 무릎이 꿇어지고 뿐만 아니라 공경하면 그 부모님이 배나 기뻐하고 우리가 얼마나 아까운 돈을 떼어서 공경하는지를 잘 알아주고 신앙도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집도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곳에 사시고 유산도 조금 있어서 이렇게 공경하다보면 나중에 국물이라도 좀 있을 것 같은 그런 부모, 그런 부모 밑에서 진짜 공경하고 사랑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사회적인 지휘도 훨씬 높거나 한 때 높았기 때문에 자식인 우리가 살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아버지가 거한 대로 전화 한 통화만 해부면 막혔던 길이 막 열리는 그런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되어서 그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사랑하고 무엇인가 내가 잘못된 일을 행할 때에는 바르게 똑바로 사셨던 그 부모님이 생각이 나서 스스로 마음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말입니다. 그냥 일평생 살면서 우리 아버지만큼 우리 어머니만큼만 살면 한이 없을텐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만한 사람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마음으로 흠모하고 공경하는 대상이 우리의 부모이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그런 부모라면 정말 공경하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회적으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너무나 자상하고 우리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해서 항상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되는 그러한 순교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 그런 분들 밑에서 공경하며 살고 싶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깨십시오. 그런 부모는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부모가 왜 우리 같은 사람을 낳았겠습니까.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정반대입니다. 젊어서 기력이 있을 때에는 막 돌아다니면서 바람도 피고 사업한다고 가정도 팽개치고 기껏 돌아와서는 엄마도 구타하고 자식인 우리들도 발길로 차고 생활비도 대 주지 않고 살던 그러한 아버지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저 돈벌기 위해 태어난 기계처럼 꾸역꾸역 돈만 벌어올 뿐 도대체 인간미라고는 하나도 없고 따뜻하게 한번 안아 줘 본적도 없고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이 그렇게 가정을 팽개치고 산 그러한 아버지, 그러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부모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많이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분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인 어머니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신 그런 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철새처럼 제비족을 따라나선 그런 유한 부인일 수도 있다 이겁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녀인 우리들에게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진심으로 오리에게 자기의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정말 요조 숙녀와 같고 현모양처와 같아서 능력도 있고 인품도 뛰어나고 신앙은 말할 수 없고 그러면서 능력이 없어서 맹하지 낳고 앞길을 개척해 나가면서 아버지도 돌보지 않은 우리를 천재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교육 환경들을 만들어 주고 모든 것을 희생한 그러한 천사와 같은 그 어머니라면 왜 우리 같은 사람을 낳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훨씬 현실 세계로 내려와서 우리 한사람의 부끄러운 가정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말하자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고 싶고 우리 어머니의 딸이고 싶어하는 그러한 애틋함보다는 상처가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요구는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있는 젊은이들 가운데서 명절만 되면 우울해지는 젊은이들을 보았습니다. 명절이 왜 우울해지냐하면 시골을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고 동기간들을 다 만나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절에 가면 거기서 비로소 깨어진 가족들간의 관계를 직면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싫은 것입니다. 거기 가서 보면 내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그리스도인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휘어잡을 때는 사람들은 다 자기보고 신실한 청년이라고,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튼 갖은 좋은 이야기를 다해서 상당히 무엇 좀 하는 것 같은데 휴가를 가면 그냥 가만히 앉았다가 그냥 일각이 여삼추나 빨리 이 명절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것만이 꿈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슨 복음이 그러한 깨어진 관계도 뛰어넘지 못하는 그런 복음이 있으며 도대체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하는 신앙이기에 그러한 망가진 가족들간의 관계도 고칠 수 없는 그런 힘이 없는 신앙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들의 소위 경건이라고 하는 것도 자꾸 안으로 오그라들어서 내면화 되어갈 뿐 삶의 지평으로 뻗어나가서 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때문에 우리들의 가족의 관계가 고쳐지고 세상이 고쳐지는 이러한 선교적인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경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 공경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속에서 정말 그 부모와 화해를 먼저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공경이 가능한 것입니다.
원수가 만나서 갑자기 사랑에 빠질 수가 있습니까? 부모가 원수일 경우에 자식들은 소설처럼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가 원수이지 자기가 원수는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먼저 우리들이 마음속에서 그 부모와 부모를 용납하고 잇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먼저 깨트리고 그 부모와 먼저 화합하고 마음으로 먼저 용납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인간은 상처를 준 사람들은 곧 그것을 잊어버리는데 받은 사람들은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제가 수없이 상담을 하고 심방을 했는데 부모 때문에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 자식들은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 한이 되어서 눈물 흘리는 부모는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똑같은 한 사람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눈물을 흘리는데 그 사람은 지금 자기의 삶이 자기의 자녀를 얼마나 아프게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약점입니다. 우리들이 남들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것은 잊어버리지만 그러나 가슴에 새겨진 것은 깊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은 먼저 부모를 공경하기 전에 그 부모와 화해하고 그 부모와 맺힌 것을 풀고 그 부모와 용납하는 사이가 되는 이 화해를 위해서는 이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상처를 받은 자녀들이 쥐고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받은 자녀들이 모두 부모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화해할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것을 다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식이 보통 자식이어서는 안됩니다. 보통 자식이어서는 안되고 은혜 받은 자식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인생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망가진 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이 있고 지위만 높으면 행복이 보장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인간이 불행해지는 원인은 외부적인 환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년에 다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안목이 신앙을 가져야지 생겨나지 신앙을 갖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똑바로 믿고 신앙 생활을 바르게 잘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는 길이고 여러분들의 자손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똑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리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들면서 인생을 살면 주님이 벌을 주시지 않아도 그 집안은 저절로 무너집니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개판 같은 인생을 살았으니 자식들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돈은 벌어다 주었기 때문에 건강하게 자라서 대학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겉모습은 번지르한데 속이 완전히 골았습니다. 그 골은 아이가 장가가서 시집가서 또 골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대를 물려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이러한 저주를 끊어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잘 믿으십시오. 내 부모는 나에게 그런 깊은 상처와 아픔을 주었고 그것이 늘 아픔이 되어서 일평생을 살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 부모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듯이 그 부족하고 모자란 부모를 섬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자식이 보면서 시청각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다 압니다. 아이들이 조금 철이 들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워낙 일찍 자손을 두게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온 삶이 손자들 눈에 쭉 보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선뜻 지나가지만 그림은 남아있고 어렸을 때는 없었던 판단력이 생기게 되면 옛날 그림을 가지고 오늘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저렇게 사시는 것은 진짜 살아서는 안되는 인생을 사시는구나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부모가 도저히 공경할 수 없는 그 할머니, 할아버지를 공경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녀들이 그 부모의 인격 속에서 무엇을 보냐하면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사랑할 수 없는 부모, 용서하고 용납할 수 없는 부모, 공경할 수 없는 부모, 그런 부모를 우리의 부모가 저렇게 공경하며 사랑하는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 알고 보니까 신앙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훌륭한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이웃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공경의 동기 자체가 우리의 공경을 받는 사람들의 인격이나 위치, 존재, 지위, 재물, 영향력, 이런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 앞에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박애적인 정신과 이타적인 정신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당수는 가정에서 이런 것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이 문제다 이것입니다.
먼저 우리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마음으로부터 그 부모와 맺힌 것을 풀어야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차라리 돈을 주는 것이 낫지 마음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푸는 것은 살인보다도 더 커다란 고통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럴 때에는 우리 인생을 살면서 상처받은 것이 생각이 납니다. 상처받은 것이 생각이 나면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아파할 때의 유일한 위안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게 되면 신기하게도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한을 품은 사람들은 무섭습니다. 돈을 벌어도 눈에 핏발이 서도록 돈을 벌고 한이 맺힌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해도 무섭습니다. 심지어 인간 관계를 가져도 무섭습니다. 오락을 해도 승부근성이 있습니다. 한 맺힌 마음으로 공부하는 사람들도 나는 가끔 보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형제들 위에 뛰어나는 길만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다라는 것입니다. 한이 맺힌 공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무섭습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의 인생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깊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이 상처의 아픔이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용서하고 화해하라 그러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유일한 위로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생겨날 때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 미워하던 그 마음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니까. 인생을 살다가 자기가 너무나 아프고 힘겹고 우리 부모가 아니면 내가 이런 인생을 살지 않았을 텐데 하고 옛날의 부모에 대한 아픈 기억을 새기면서 한을 품고 한번 미워하는 것인데 그리고 물론 회개하겠지만 하여튼 미워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커다란 고통입니다. 차라리 상처를 한번 더 받는 것이 훨씬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그 마음의 상처들을 스스로 치유한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도지지 않는 환경에서 자극만 받지 않고 살아가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정신병자와 같은 사람들을 다른 환경에 집어넣게 되면 거기선 삽니다. 사회에 나오면 살수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특별한 환경이 만들어지면 됩니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이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흔히 그런 생각을 해야됩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많은 지체나 내가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하지 말고 상처를 많이 받고 박살이 나 버린 여러분들의 가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할 줄 아는 사람이 참된 영적인 사람입니다.
참된 영적인 사람, 그리고 한 사람이 정말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가정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제일 먼저 신앙이 출발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용납되어지는 일들이 있고 나서야 신앙이 출발합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다가 그 언젠가 주님 앞으로 나아올 때 여러분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을 벌리 떠나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탕자와 같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돼지우리간에서 쥐엽 열매라도 주워 먹으려고 했지만 그것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몰골이 처절한 거렁뱅이와 같았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아무 근심 걱정이 없고 염려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자기 혼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신앙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을는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모두 주님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있었고 주님의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영혼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주님이 어떤 태도로 여러분들을 대해 주셨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을 모르면서 살아왔던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마음에 상처를 드리면서 살아왔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마음에 고통과 아픔을 드리면서도 가책을 느낄 줄 모르고 살아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 돌아오던 그 날도 바로 우리들이 똑같이 그런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우리의 어두운 영혼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살아 계심과 그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과 관계가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경험되었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우리가 믿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그 순간,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를 구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체험하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어두움 속에 사랑의 빛이 들어오고 주님 없이 살았던 많은 날들을 그 여정을 끝내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에 안기는 그러한 감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주님께로 돌아간 바로 그 때에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가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날 동안 주님의 마음에 드렸던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꽁하고 간직하고 계시다가 우리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자 그것을 터트리면서 우리에게 보복을 하셨으면 여기에 남아 있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했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든지 간에 그것과는 관계없이 지금 자기가 낳은 자식인 우리들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심지어는 우리를 통해서 조차도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채 살아가고 있는 그 쓸쓸한 부모의 그 모습, 그것을 보면서 논리를 초월해서 그분들의 그 모습 자체가 너무 측은하고 불쌍하다라고 하는 그 마음이 아가페의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지 않고는 부모와의 깨어지고 망가진 관계를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치료의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자기 부모를 욕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집안을 부끄럽게 하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를 믿었어도 망가진 채 자기의 신앙이 전혀 그 망가진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렇게 깨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자기의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모가 그렇게 공경할 만한 부모였고 자기의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자기가 무릎을 꿇고 공경할 정도였으면 왜 자기 만한 며느리나 자기 만한 아들을 맞았겠습니까?
항상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부모와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기 전에는 결코 가족 관계를 회복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슬기로운 부모는 차라리 하나님을 움직여서 자식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합니다.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망가진 부모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그나마도 은혜를 주셔서 그런 관계를 치유하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들을 우리는 자랑을 합니다.
남이 못 본 것을 보고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독점적으로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남이 받지 못하는 특별한 은혜, 그리고 남에게는 없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느끼고 살아갈 때 우리는 뿌듯한 마음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사랑을 부어 주셨을까, 나 같은 성질 못되고 형편없는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는데 아무리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이런 은혜를 받을만한 인간이 아닌데 왜 이런 은혜를 주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덜 익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다니면서 자기에게 상처를 준 부모를 욕하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않고 있는 자기의 시부모들을 욕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바로 자기가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족과의 관계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코너에 몰린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난 안됐어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냅둬, 그대로 살다가 죽게,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의 부모나 우리에게 인생의 상처를 많이 준 부모들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 이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가치 없는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이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남이 못 만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남이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남들이 할 수 없는 기도하게 하시고 남들이 보지 못한 신앙의 체험들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러셨을까요?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나라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만약에 내가 아니라 우리 부모가 더 많이 은혜 받고 변화되었으면 우리 부모처럼 안 변하는 나 때문에 피 눈물 흘리고 용서해 주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많이 빚진 자입니다. 그 빛이 무거우면 은혜 받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럴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우리는 캄캄한 세상이 없으면 우리의 사명도 없습니다. 망가진 가정이 없으면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정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깨트려지고 망가진 부모와의 관계,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그저 원망과 한과 슬픔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가 흐를 그 가계에 나타나서 그 집안에 흐르는 불신앙의 저주를 끊어버리고 축복 받는 가정으로 치유하는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가 못 본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받아보지 못한 그 크고 넓은 사랑, 그리고 우리의 부모가 느껴본 적이 없는 연약한 인간을 끊임없이 주를 위해 살도록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우리들의 부모, 지난날들의 우리에게 상처를 준 부모를 기억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에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반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서 못되고 금방 죽을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미래가 뻔합니다. 이 세상에서 허기지고 굶주린 인생을 살 것이며 행여나 어떻게 불법한 방법으로 재물을 손에 넣었다 할지라도 그의 인생말년에는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될지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요절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 계명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합니다. 몇 푼 어치나 우리 안에 사랑이 있습니까? 한없이 친밀하고 사랑스러웠던 사람도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게 하면 단번에 그 관계를 발로 차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주님의 모본을 본받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되기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느냐 이것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우리 부모와의 관계를 치유하고 맺힌 것을 풀고 화해한 가운데 궁극적으로는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하는 계명까지 나아가서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그 망가진 관계를 고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우리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눈을 들어서 나같이 소망이 없는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고도 그 사랑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오늘도 뻔뻔스럽게 나와서 하나님을 감히 하나님에게 불명예스럽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이런 더러운 모습들을 용납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에게로부터 우리의 신체와 몸을 물려받았다 라고 하는 부채의식이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 태어나게 하시려면 그 부모 말고 다른 부모 뱃속에서 태어나게 하셨을 것입니다. 뱃속에서 우리를 주님이 짓지 않으셨으면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피 한 방울 살 한 톨 물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부모입니까?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에게 대한 부채의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두 아버지가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못 갚아 준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갚아주셨습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돌아왔을 때에 공교롭게도 여러분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받게 하신 분은 또 다른 아버지이셨습니다. 하나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셨습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젊은 시절에 여러분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많이 주고 연로한 시절에 돌아서서는 여러분들에게 상처 준 것을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 용서해 주는 윤리가 통하지만 부모와 자식지간에는 사과하는 말이 없어도 이해를 해주어야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 없어도 용서를 해주고 맺힌 것을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부채의식 속에서 우리의 부모를 보는 대신 우리의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차피 살아가는 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면서 나는 남보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아마 하나님께서는 남보다 특별한 상처를 치료하라고 이 아픔이 많은 가정에 나를 태어나게 하셨나보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부심을 가지고 긍지를 가져야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크고 또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문제가 많은 그 곳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을 세우셨겠습니까. 주님이 정말 극복할 수 없는 문제, 그 앞에서 고통 당하다 죽게 만드시려고 주님이 사랑하는 우리를 문제 앞에 세우셨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것은 한 다리 건너 두 다리에서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당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시라도 우리 아버지는 용서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용서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은 꿈속에서 그리는 사랑일 뿐이지 자기의 것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고 마음먹은 그 사람에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그 부모를 깊이 용서하고 화해해야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젊은 시절에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예수는 믿지 않더라도 전에 하시던 일을 계속하지만 않으면 용납을 하겠는데 지금도 술 먹고 와서 식구들을 개 패듯이 패고 인간 이하로 살고 있는 우리 부모도 용서하란 말입니까?” 용서하여야 됩니다. 먼저 그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처지를 숙명처럼 생각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일평생 그렇게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가도 그 부모가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해 주는 것 밖에는 무슨 희망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부모에게 사랑을 받거든 많이 기뻐할 것이요 혹시라도 부모가 너희를 미워하거든 그래도 부모를 미워하지 말고 참을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선조들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불공평한 삶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시기 시기마다 받아야할 사랑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가 최고입니다. 좀 커서는 아버지, 어렸을 때에는 젖 물려주는 어머니, 울 때에 달려와서 안아주는 어머니만 있으면 인생이 최고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조금 크면 이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또 조금 크면 이제 남편이나 아내와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습니다. 더 연로하게 되면 이제 자식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남편이나 아내를 만나서 사랑을 많이 받으면 그러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마음의 불구가 된 것들이 치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망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신앙과 은혜의 개입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집가고 장가가지 말라고 합니다. 불행해집니다. 대안이 있는데 그래도 가고 싶으면 빨리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차피 팔자대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그러한 부모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치유하는 관계로 바꿔야합니다. 그렇게 망가진 관계는 다른 관계에서 오는 넘치는 사랑 때문에 채워지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 하나를 못 받았는데 남편으로부터 둘 사랑을 받으면 그것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덜 불행해지만 그러나 망가진 것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예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결핍에 대한 대안이 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의 품안에서 있으면 오히려 부모가 자기를 버린 것도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진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깨어진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주님을 이렇게 목마르게 붙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인은 평생 남편을 존경했습니다. 얼마나 존경했는지 부러운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저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어서 하는 고백이 뼈아픈 눈물을 흘리면서 하였습니다. “사실 저의 가정이 깨트려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는 여자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못 믿어도 내 남편만큼은 나만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그 사람이 바람을 피워서 아이를 낳을 처지가 된 것입니다. 거기서 남편과의 신뢰와 이런 것들이 다 깨어지면서 박살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나서 나중에 남편과 가정이 다 치유가 된 다음에는 무엇이라고 그러면 그렇게 남편의 사랑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실망을 하게 된 것이 자기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더 재미있는 고백은 남편이 그렇게 자기를 배신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배신하기 이전보다도 더 많이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하나님을 바로 믿고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불행하게도 존경스럽고 몇 백년에 한 두 사람 역사에 태어날까 말까하는 위인이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아닌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부모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은 바로 그런 문제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망가진 아버지나 고장난 여러분들의 부모를 보는 대신 완전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감화를 받으면서 그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망가져서 대책이 없는 여러분들의 부모와의 관계를 고쳐서 다시금 치료된 관계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먼 훗날 우리의 아버지가 존경할만한 분이 아니고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준 부모였기 때문에 그런 부모를 주신 것을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때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의 묘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고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우리의 팔자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손금보는 사람이 “저도 옛날 예수 믿기 전에 손금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은 이러한 팔자고 저러한 팔자인데 내가 보는 이 손금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 예수를 믿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점괘가 나오지 않으면 팔자대로 살지 않습니까?” 왜 팔자는 팔자대로 가고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대로 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을 예수 믿지 않는 점쟁이가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팔자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끝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그래 남들이 보기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가정에서 상처투성이의 아들로 망가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밑에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팔자, 나의 운명은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서 망가진 가정을 이루고 이 사회에 고장난 자동차처럼 달려가다가 이 사람, 저 사람 치고 다니는 그런 불행하게 만드는 기계 같은 인생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내 운명이었고 내 팔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내 팔자는 내 팔자대로 가고 나는 그 팔자를 떠나서 주님이 내게 기대하셨던 그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손을 쓰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이 불행하고 가슴 아픈 상처와 고통은 여러분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식들에게 물려지고 지금 벌써 상당부분이 그들의 핏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 인생의 관심은 두 가지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과 우리의 자녀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에 있어서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나는 부족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부모가 될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 안에 계신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나처럼 허물 많은 자식들이 우리를 용서하고 내 안에 있는 이 패역과 부패 때문에 우리의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인생이 되도록 힘쓰는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인생의 가장 커다란 명제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그 자리를 인정하려고 해야합니다. 니체가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곱사들을 가진 사람에게서 그 곱사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혼을 빼앗는 것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모두 맞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고통과 아픔의 원인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비록 우리가 깊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과 같은 인격자와 같은 지체 높은 그런 부모가 우리에게 없었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처뿐인 가정에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상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모가 망가진 채 살아갈 때 그 망가지게 한 것에 대해서 아무 책임이 없는 자녀된 우리들이 어떤 아픔과 고통을 느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모든 슬픔과 아픔은 우리의 대로 족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이 저주스러운 상처와 고통에 검은 피가 우리 자손의 혈액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들이 막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막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부모를 마음 깊이 용납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면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은 부모가 부모이지만 은혜의 세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더 큰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영적인 부모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여러분의 부모가 끌어안고 다독거리면서 키웠지만 영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면 여러분들이 이제 여러분들의 부모를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영혼의 목자가 되어서 육신의 부모가 여러분들을 길렀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영의 부모가 되어서 육의 부모를 길러야 되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에 흐르는 깊은 아픔과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깃드는 축복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가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돈독하고 훌륭한 부모님들에게 태어나서 돈은 많지 않고 사회적인 지휘는 높지 않아도 언제든지 부모님으로부터 삶의 본을 배운 복된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두 사람으로 내가 택함을 입었다고 하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해야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육신의 부모일 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부모이기 때문에 그분들에게서 신앙을 배우고 그분들에게로부터 감화를 받아서 자랐은 즉 그 부모를 육의 부모와 영혼의 부모를 섬기는 그런 갑절의 충성스런 마음으로 그 부모를 공경하기를 힘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내 부모와 맺힌 것을 풀라 그리하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질 않고 주님께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뛰어넘어서 너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맺힌 것을 풀고 원한을 삭히고 복수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와 화해한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더 많이 부모를 섬기는 그런 공경의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 공경의 마음은 항상 배려하는 마음이고 나보다는 공경을 받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도록 가르치셨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통해 마음의 기쁨을 얻으실 수 있다면 우리가 정말 주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자신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강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이나 사회적인 지휘도 모두 빛나는 태양 앞에 횃불이나 작은 촛불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되 그런 마음으로 공경하고 섬기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제일 먼저 결혼 교육을 하면서 하는 충고가 빨리 부유해지도록 애를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는 충고입니다. 빨리 부해지려고 빨리 안락한 삶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들은 목표를 세우고 돈을 모으고 무리를 해서 집을 장만하고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꿈꾸지 않습니까?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부모를 향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아서는 이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형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해 진실한 사랑을 베풀고 마음을 여는 사람들의 섬김은 잠시는 오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오해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부모와 망가진 관계에서 고통했다면 사랑으로 복수하시는 여러분들의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고통을 오히려 자비로 복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치 지난 날 부모와의 망가진 관계를 보상이라도 하라는 것처럼 그렇게 갈등과 고통 속에서 살아왔던 그 많은 날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제 주님이 나에게 남다른 특별한 은혜를 주셨은 즉 이제는 내가 생명이 있는 날 동안 그리고 우리의 부모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남은 모든 날들을 빛 가운데 살고 사랑 가운데 살아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내가 언제 다시 하나님의 이 큰사랑을 입고도 부모가 준 상처를 되씹으면서 한 맺힌 인생의 길을 택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모든 사연들을 내려놓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로 마음으로 깊이 사랑한 후에 그 다음에 실제적으로 여러분들이 물질로 섬겨야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가 먹고 입고 기본적인 인간의 살아가는데 있어서 심각한 장애를 느끼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자식된 여러분들의 범죄 행위입니다. 물론 우리들 가운데는 스스로의 식생활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는 있지만 그 부모를 물질로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관심을 갖는 것이고 사랑은 그들이 처해진 삶의 자리를 그들이 처해진 삶의 자리에서 보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들의 필요를 자기의 부족처럼 느끼면서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결코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을 배반하고 파산한 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은혜의 사람이 된 혜택을 제일 먼저 여러분들의 가족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남편이 혜택을 받고 여러분들이 남모르는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들 아내가 혜택을 보고 부모가 혜택을 보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가까이 있는 혈육들은 우리의 능력 있는 말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상처로 가득 찬 가족들은 좀처럼 그 상처가 난 마음을 풀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려고 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가족들에게는 우리의 말과 혀로 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바르고 그리고 그 마음에서 짜낸 그런 희생과 섬김의 모본에서 흘러나온 그 피로 그들의 마음에 발라 그들의 마음에 바르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만들고 가치 없는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가오셔서 관계를 새롭게 맺으시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드시려고 남이 못 본 하나님,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맛보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곤고할 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싶을 때에 그리고 상처에 매이지 않고 그 상처를 뛰어넘는 삶을 살아서 불꽃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싶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 앞에 앉아서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아버지 앞에 기여할 때 여러분들 중에 거져 돌려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시시 때때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약하고 무능하지만 주님 뜻대로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능력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나, 그리고 우리의 부모들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복수심에 불타고 아픔 때문에 어둠 가운데서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먼저 빛 가운데로 나아와서 하나님 나같이 망가진 사람을 고칠 수 있다면 우리의 부모처럼 망가진 사람들도 고치실 수 있다는 이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시려고 남이 알지 못하는 은혜의 세계로 여러분들을 데려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고치게 하시려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먼저 불러서 주님의 큰사랑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상처가지 사랑하고 그 부모를 공경하려고 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우리들이 경험한 것 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들이 모두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와 그리고 빛 가운데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을 위하여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