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과 목양 1
녹취자 : 오희열
즐거운 구역장 공부, 새 책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이 공부를 사실은 정말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멋있게 해 보려고 했는데 그날만 비가 오는 바람에 가지 못해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것을 쓰느라 하룻밤을 꼬박 세웠는데 또 하룻밤을 꼬박 세우면 뭔가 나올 수 있을테니 그때 다시 새로운 주제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공부하는 것은 세 번에 걸쳐서 하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예전에 배운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처럼 예습을 하든 안 하든 비슷하게 은혜 받은대로 썰을 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소화하지 못할 공과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을 만난 이야기만 해도 되겠지만 이것은 그런 식으로 썰을 푸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구역원 중에 직접 연락이 오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 구역장님이 이것을 이렇게 가르치는데 그게 썰입니까? 맞는 이론입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이게 어떤 구역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뽑기를 해서 다섯 개 교구였는데 어디 가서 식사를 하신 분 손 들어보십시오. 바쁘셨나봅니다. 이야기를 좀 들어보려고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랑의 신학을 공부하겠습니다. 에드워즈에 관한 책들은 퓨리턴 도서관에 다수 소장되어있습니다. 저에게 말로만 듣지 마시고, 쉬운 책이 없지만 그래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 있는데 목사직에 대한 책입니다. “진리지킴”이라는 책인데 굉장히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 책에서 제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들으니 대단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가 한창 길고 복잡할 때는 대지 1부터 49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별로 놀라시지도 않으십니다. 1부터 쭉 설교를 해서 49번째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 설교를 한 사람보다 그 설교를 들어준 성도들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지는 않고 요즘은 좀 간단하게 하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를 들으셨습니까? 사실 토요일에 설교준비를 다 해 놓았습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마지막으로 보는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직원들을 다 퇴근시키고 혼자 앉아서 다시 교정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보통 조금 보면 일곱 번 정도 보고 교정을 다시 쓰고 많을 때는 열두 번까지 다시 씁니다. 그런데 설교준비를 다 해 놓았는데 이게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쳤습니다. 새벽 3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라고 말하고 전도가 안 된다고 말하고 신앙의 열정이 식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바꿔야 할 것도 있지만 바꾸지 말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 이런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시대는 바뀐대로 가라고 하고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어찌하든지 간에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힘써서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은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바꿀 수 없는 목표입니다. 저 영아부에서 시작해서 소망부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과를 잘 가르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 드릴테니 메모를 많이 해 놓으시고 구역장 사이트에 올라가면 두 번 정도 꼼꼼히 보시고 듣고 메모하셔서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혹시 논쟁이 일어나면 잘 적어두었다가 목사님께 여쭤보고 가르쳐드리겠다고 하면서 논쟁을 피하고 쭉쭉 나가십시오. 첫 번째 공부, 사랑과 목양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 목양이 무엇인지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답은 시대가 격변하고 있기 때문에, 두 번째는 목양에 대한 교회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입니다. 바깥에는 환경의 문제이고 안으로는 교회안의 인식의 문제입니다. 여기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헛갈려합니다. 폭발적인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집니다.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책 속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30년 전에는 미래를 예측하면 어느 정도 맞았다고 합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1900년대 초에는 우리가 없었지만 1960년대에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들 중에는 한 10년 후쯤에는 우리나라가 이 정도 발전할 것이다, 1971년도 중학교 때는 담임 선생님이 확신하듯이,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지나가지만 너희는 보기 드물게 잘 사는 나라에 너희들이 살 것이다. 안심해라.” 하셨습니다. 그때 어느 정도 가난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늦게까지 공부하시고 집에 가시면 너무 많은 음식을 드시지 마십시오. 따뜻한 우유 한 잔에 계란 후라이 하나 정도 드시고 주무세요.” 하니까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집에 가서 저녁때 그 정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라는 의미였습니다. 집 안에 화장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70명 중에서 열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에도 선생님은, “너희 세대에는 아주 잘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보증한다.” 하셨는데 그것이 정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1993년에 미국의 이리듐이라는 회사에서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불편한 국제 통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공중에 위성을 60개 정도 띄우고 어느 시간에든지 위성으로 연결되도록 해서 전세계 어디에서든지 통화가 될 수 있는 이리듐 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간 돈이 56조가 들어갔고 여러나라가 컨소시엄을 구성했는데 결론을 말씀드리면 몇 년 후에 망했습니다. 인공위성을 8개인가 10개쯤 쐈을 때 인터넷으로 무료통화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56조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70조가 넘는 돈을 투자할 때는 세계적인 귀재들이 미래를 분석하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한두 푼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통신에 일어나는 폭발적인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일부를 믿지 전체의 그림을 보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엘빈 토플러같은 사람이 미래학자로서 제3의 물결을 쓰고 미래학의 지평을 열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이 살아있지도 않지만 지금 30년 후의 미래에 대해서 써 보라고 한다면 아마 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유발 하라리가 부분적으로 추측을 하지만 그것이 정말 맞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고 나면 변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 받는 데 한 시간, 두 시간을 기다리거나 저녁에 다운로드를 실행하고 다음날 아침에 다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 현재는 일본의 28짜리로 하면 한 편에 5기가 바이트의 영화가 0.8초면 다운로드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도저히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는 후기 산업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산업화 시대까지는 나름대로 뭔가 룰이 있었는데 후기 산업화가 되면서부터 가치관들이 전부 붕괴되었습니다. TV에서도 둘이 무슨 사이냐고 물으면 “우리 동거하는 사이에요.”합니다. 심지어는 청년을 자식으로 둔 엄마인데도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아이는 바로 결혼하지 말고 살아보고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이 중요한 결정을 그렇게 한 순간에 하고 도장을 찍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4차 산업혁명까지 나오면서 기술 융합들이 일어나고 이제는 분야별로 나누어져 있던 것들이 요동을 칩니다. 아프리카의 빈국들도 스마트폰을 팔뚝에 올려놓으면 진료를 받고, 심지어 의사가 약 처방까지 해서 처방전을 보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A.I로 말하자면 독일에는 A.I 설교자까지 등장했습니다. 컴퓨터에 “내가 너무 곤고한데 위로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라고 입력하면 수십만 편의 설교를 돌리면서 그것을 합성해서 그 항목에 맞도록 맞춤 설교가 나오는데 아무렇게 하는 설교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도 사향산업입니다. 정의선 부회장이 엊그제 나와서 완전자율 주행차 시대를 보수적으로 볼 때 2030년으로 본다고 합니다. 최대한 늦게 본 것입니다. 빠르면 2년 정도 당긴다면 2028년쯤, 앞으로 한 9년 정도 후에는 노인 운전의 위험 같은 것이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평택이라고 하면, 거기서 평촌 열린교회 후문을 입력하면 차에 누워서 TV나 보고 책이나 읽다가 도착하는 것입니다. 운전대에 손을 대면 그것이 블랙박스에 기록되어서 패널티를 물어야 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웃을 일이 아니라 진짜 사실입니다. 이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많은 것들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축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고 이쪽에서 진리를 붙잡자니 그것도 확고한 것 같지 않고 말입니다. 결국 현대의 주변인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목양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의 인생과 교회에 대한 경륜들을 결합시키면서 우리의 생각의 폭을 훨씬 넓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목양이란 무엇입니까?
목양이란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짐승, 양을 치는 데서 온 것입니다. 양을 치는 것은 사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맹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문제가 될 꼴들을 먹이지 않고 부지런히 제 때에 꼴을 먹이고 다치면 치료해주고 아프면 고쳐주면서 양으로 이용가치가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자라나게 하는 것, 그래서 후에 그 가죽과 고기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목양입니다. 목양이라는 그림을 따올 때 털을 벗기고 자르고 각을 내서 고기를 뜯어 먹는 모든 과정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부위, 목자가 진심으로 양을 돌볼 때의 그림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때에도 이스라엘의 목자는 거짓목자와 참 목자가 있었습니다. 거짓 목자는 사기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양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그 일에 직업이 되는데 양이 그렇게 숫자가 되지 않아서 자신에게 농사같은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양을 길러야 하는데 혼자 돌보기에는 너무 많으니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일본말로 하자면 “가부시키”를 하는 것입니다. 열 집이 모여서 200마리의 양을 칠 목자를 한 명 사고, 그리고 양들마다 누구네 집 양인지 표시를 해두고 새끼를 낳으면 또 표시를 해놓습니다. 이런 식으로 같이 돈을 모아서 월급을 주고 그 양떼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양떼가 자신의 양떼처럼 살갑게 돌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는 월급을 받으면 양을 치는 것이니까 돌볼 수 있을 때까지는 돌보겠지만 너무 위험한 곳으로 간 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내려가서 그 양을 구해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림으로 봐왔던 것처럼 벼랑 끝에서 손을 내밀어서 구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삯꾼 목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너무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문제는 목양이라고 할 때의 그림은 그런 직업적인 그림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양떼를 애정을 가지고 돌보는 목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봉사인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해서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교회를 지으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신자로 만드신 그 목적을 따라 살도록 돕는 것이 목양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요소들의 그림이 들어오게 됩니다.
목양을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사상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TV에서 어떤 골목을 보여줍니다. 어느 나라인지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라트비아”라고 하는데 솔직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골목을 보여주는데 장삿꾼이 있고 시장이 있고 보기는 좋은데 어디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드론을 띄우거나 더 좋은 방법은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지구의 반쪽이 나타나고 그것을 더 좁히면 열 몇 개의 나라가 나타나고 더 클로우즈업이 되면서 그 골목을 비춥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구글맵을 열어봐도 금방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목양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치료하고 위로하고 가르치고, 그래서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가르치는 것은 이단이 더 많이 하고 교인들도 성경공부에 더 열심히 참석하고 심방도, 우리는 그냥 사랑으로 심방하지만 거기는 결사적으로 심방합니다. 하나가 낚시에 물렸다고 생각되면 집중적으로 전도하고 거의 폭격을 하다시피 해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한번 온 사람은 죽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걸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행동만 놓고 본다면 거기가 훨씬 목양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통교회에서 이단으로 가는 사람은 여전히 많고, 이단에서 정통교회로 오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것만 보고 목양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돌보고 심지어 장학금을 주고 구제금을 주고 가르치고 재밌게 하고 밥을 먹이면서 전체를 엮어서 데려가고자 하는 곳이, 성경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의 쪼가리 쪼가리 하나는 목양에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목양 전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지도를 보여주는 것이 “목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제 입으로 하면 웃기지만, 목회자들에게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봉사는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무엇에 속박받지 않고 마음껏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게 놓아 주는 것, 그것이 교회가 목회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봉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계십니다. 제가 이 교회에 나온지 5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밥을 함께 먹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나 자신을 소진하고 나면 정말 고유한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집니다. 제가 돌아보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고마웠던 것은 제가 공부하는 것을 여러분이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책도 많이 볼 수 있도록 시간도 주시고 휴가는 많이 못 갔지만 정말 밤늦은 시간까지 공부할 수 있었고 돈이 부족해서 필요한 책을 구입하지 못한 적이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에게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그렇게 제가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열린교회를 이끌어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설교로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여러분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썼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고 제가 그렇게 많이 썼어도 표절 문제로 한 번도 출판계에 오르내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뒷받침들을 여러분이 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워즈는 이런 사상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이분은 저보다 더 했습니다. 하루에 열세 시간을 공부했습니다. 열세 시간 공부하고 자고 기도하는 시간을 빼면 실제로 남는 시간이 뭐가 있겠습니까? 가족들과 밥 먹고 몸이 연약해서 산책을 해야만 했습니다. 성도들과 거의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100%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지가 분명했습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이분은 연구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존경할 점이 많은 분입니다. 정말 많은 감화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 사상은 신앙이 당연히 있어야 하고,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기도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학문을 탐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언젠가 교회를 이동하고 어디로 가게되면 거기서 한 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매력적인가에 끌리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재능있는 사람이 웬만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설교를 계속 들어보고 성경을 얼마나 성경답게 풀어내고 있고 그것이 얼나마 깊이가 있는지, 깊이가 있는 사람이 넓이를 갖추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깊이가 없는 사람은 넓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감화를 끼치는지 보셔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성도들을 보고 그 목회의 열매가 은혜스러운 지를 보시고 자신이 출석할 교회를 정하는 것입니다. 구역 식구들에게도 누가 이사를 가면 자꾸 교회를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네가 다닐 교회니까 네가 정해라.” 하시고 정통교회에서 찾아보고 이런 점들을 눈여겨 보며 찾으라고 조언해주셔야 합니다. 결국 그 학문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 누구인지, 죄가 무엇인지만 설명하지 말고 그 죄가 왜 일어나는지, 사랑만 설명하지 말고 그 사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는 지금 어떤 모습인지, 그런 고민을 하는 세계들을 보아야 합니다.
의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은 이런 식견을 높여주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되고 Non christian 서적 가운데서 특별히 이 세계의 변화와 관련하는 책들이 있는데, 다음 달에 소개해드리려는 책이 Non christian 서적인데 그런 책들,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 인데 Non christian 책이지만 여러분에게 굉장한 충격을 줄 것입니다. 왜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풍조를 따르게 되었는지, 어떻게 미국이 나르시즘의 본산지가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설명합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데에서는 명확하지 않던 것들을 이 책에서는 수많은 통계를 통해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결론은, 자기를 사랑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은 그 아이를 망치고 사회를 망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사상과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변화 등에 관한 책들, 문제작이라고 읽혀지는 것들을 봐야 합니다. 조심할 것은 자신이 신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수준까지에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르면 와서 물어보기도 하고 토론을 해도 좋은데 어쨌든 자기의 능력이 닿지도 않는 책들을 읽다가 오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제가 전도사를 하는 동안 청년 대학부의 아주 신실했던 아이들이 이문열씨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다 실족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지적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그 정도는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튼튼하게 신학의 체력을 강화한 후에 그런 책들을 소화하고 비평하며 읽어가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제 책을 제외하고는 아무 책이라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제 책을 읽으면서, “이건 가짜일거야!” 하면서 읽으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공과를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은 확실하게 그 책의 진실성에 도장이 찍힌 책들을 제외하고는 비판적인 눈길로 봐야 합니다. 특별히 신문이나 방송을 들을 때는 100% 믿으면 안 됩니다. “틀림없이 뭔가가 섞였을거야.”하고 보면서 그 이면의 가능성을 항상 생각하고 스스로 비평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해석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후에 완벽할 수는 없어도 이 속에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르쳐주지 않을 수 있는 균형잡힌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목회자가 되는 과정은 정말 어려운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망망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래의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빌딩을 짓고 센터를 짓는 것도 좋겠지만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을 정말 잘 길러내서 이런 신앙과 학문으로 무장시켜서 훌륭한 목회자 한 사람을 세워 놓으면 그 아래에서 몇천 명이 혜택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사역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상가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선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시대의 모습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시대를 보면서 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음식도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쭉쭉 맛을 보고 “맛있다!”, 쭉쭉쭉 먹으면서, “진짜 맛있네!” 다 먹고나서 “나 한 그릇 더 먹을래.” 그리고 “다음에 또 오자.” 합니다. 그 사람에게 “뭐가 그렇게 맛있어?”하고 물어보면, “맛있잖아! 맛 없어?”합니다. 무슨 요인이 음식을 이렇게 맛있게 만들었는지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쉐프의 수준에 올라간 사람은 나온 음식의 모양과 색깔을 보면서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봅니다. 첫 수저를 먹으면서 들어간 재료들이 어떤 순서로 배합되었는지를 생각합니다. 어떤 음식의 식자재와 재료가 어느 정도의 퀄리티인지, 질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더 좋은 변수는 없었는지, 어떤 것들은 궁합이 맞고 어떤 것들은 맞지 않는지까지 구별해내서 비평하는 것이 음식평가의 전문가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대는 누구나 다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구름이 끼면 비가 오는 것은 분별하는데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상가였는지를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을 모아놓고 영화 한 편을 보여주고 해설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학생이 레포트를 썼는데, 영화를 수없이 봤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고 어땠냐고 물어보면, “재미 더럽게 없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정말 끝내줬어. 손에 땀을 쥐게 하네.” 합니다. 이런 것은 마치 음식을 먹고, “맛있네, 또 오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영화 안에 무슨 메시지가 들어있는지 찾아서 파내야 합니다. 세계에 현대라는 상황을 움직이는 사상의 손이 있고 그것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젖어 들었기 때문에 그 코드가 자기와 딱 맞을 때 불꽃이 튑니다. 불꽃이 튀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불꽃이 튀는지는 본인도 설명을 못합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이 대중들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중요한 임무는 그것들을 분별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헛갈리지 않고 시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우리를 움직이는 손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학문, 사색, 그리고 삶의 현장 중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생물, 심지어는 운송, 무역, 이런 일대일로의 계획 같은 것들도 스쳐 지나가지 않고 그 의미를 끝까지 찾아가면서 인류의 문명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공부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다 에드워즈처럼 할 수는 없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펼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명을 어느 정도 나눠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이런 시대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면 잘못된 삶을 살 텐데,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면서 바르게 사는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상으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세계가 열리고 인간의 마음이 열리고 우주가 열리고 자신의 삶이 열리는 것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경험해서 새로운 세계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 이것이 사상가로서 봉사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3. 저자는 에드워즈의 목회의 목표를 어떻게 세 가지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사람마다 보는 견해가 다릅니다. 저는 적어도 에드워즈의 전집 27권 중에서 불과 몇 권을 빼고는 거의 모두 읽은 사람으로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에드워즈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사람의 내공이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에드워즈의 이야기만 간접적으로 듣지 말고 에드워즈의 책을 쉬운 것부터, 설교집이라도 하나 꺼내서 읽어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열매 같은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하고 있을 때 그 책이 나왔기 때문에 내가 에드워즈의 것을 베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내가 고린도전서 13장을 내기까지는 읽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친 학생 중 재미있는 학생 하나가, 제가 한 설교와 에드워즈가 한 설교를 비교하면서 매주 발표해주었습니다. 저는 부분적으로 인용하기 위해서는 읽었지만 읽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읽을 계획이 없습니다. 참고해두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표절문제가 나오고, 심지어 신경숙 씨가,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서 제가 심각한 결정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사이에 나온 설교집은 읽지 않겠다. 이것은 제 우월감의 표시도 아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에 휘말릴까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론서들을 표절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교는 그 말이 그 말 같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이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도록 변화된다면 여기에서 “미”를 제시해야 합니다. “심미”를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서 세상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보여주면 저절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느냐?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거저먹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뭐가 필요합니다. “감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결국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동”으로 설명했습니다. 세 가지 요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이것은 주관적인 것이고 이것은 객관적인 것인데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융합시켜주는 것이 바로 세 번째인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것을 차례대로 설명한 것이 이 책 내용의 전부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가지고 또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 사람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그런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본인이 깨닫고, 그때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당연히 이 사람도 언젠가는 이 사람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고 이웃을 사랑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일들을 계속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의 양보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여러분에게 왜 구역장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1초도 망설이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 구역장으로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내가 성도들을 섬기고 말씀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해주는 모든 것의 마지막 하나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라고 물을 때, “나를 본받아라.” 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위임 목사식을 할 때 옥한흠 목사님께서 오셔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설교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성도들에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래야 할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감화를 받게 합니다. 지식을 전해줍니다. 이 지식에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동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출렁거림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여성들을 봤는데 별로 가슴이 안 뛰다가 인연이 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가슴은 뜁니다. 인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가슴이 뛰어야 인연입니다. 혼자 뛰면 인연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맥이 뛰듯이 뛰는 것이 정동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어디선가 발견하고 이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랑을 이웃들을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하게 대해 주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 목양을 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복잡한 이유를 대지 마십시오. “당신은 왜 목양을 합니까?”, “단 하나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을 나도 사랑하고 여러분도 사랑하게 하려고 목양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우면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관적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인데 어떻게 당신은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내가 감동을 받을 때 그 감동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만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이 책을 거의 다 끝낸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설명을 듣고 한 챕터씩 읽어보십시오. 이 설명을 다 듣고 읽어보시면 하나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책을 주면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신학대학원 학생들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아무리 이야기해도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런 것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변화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이야기를 하겠지만 결국 거기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욕망대로 사는 사람의 마지막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았던 삶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그러한 것을 값비싸게 배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설득되고 감화가 일어나는데, 지성적으로 설득되어야만 감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설득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감화가 일어날 수가 없고 설득만 되고 감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지성적인 설득과 함께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감화를 불러 일으킬 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금 사랑했던 사람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더 사랑하게 만들어주고 점점 더 점점 더 쉬지않고 그 사랑이 증대되도록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목양을 다 받았다. 더 이상 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 사랑은 증가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하기 쉬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있게 어제보다 오늘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목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자연만물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선대하는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사랑한다고 표현합니다. 나의 일을 사랑하고 코코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옳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은 영혼을 가진 사물들입니다. 선대한다고 표현하면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종이컵을 쓰고 막 버리는 것, 이런 것은 하지 마십시오. 종이컵이 1년에 250억 개씩 사용되어 없어지고 빨대가 거북이에 꽂히고 비닐봉지에 돌고래 목이 걸려서 고통하고, 죽은 고래의 배를 갈라보니 뱃속 3분의 2가 플라스틱으로 가득 차 있고, 이런 것을 수없이 듣고 보는데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한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250억 개의 종이컵 이야기를 들은 후에 제가 소비한 1회용 컵이 20개가 안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안 쓰는 것입니다. 텀블러까지 가지고 다닐 가방의 공간은 없지만 안 쓰려고 노력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실천해야 합니다. 할 수 없이 썼으면 반드시 재활용할 수 있게 하여 더 이상의 플라스틱이 생산되지 않도록 규제를 해야 합니다. 만약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5년 내로 플라스틱은 못 쓰도록 유럽에 있는 나라들처럼 못을 박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생태계를 보호해서 모든 만물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4.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양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만 해도 두꺼운 책을 써도 다 쓰지 못할 질문인데, 기본적으로 세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우선 사랑은 좋아하는 것이다. 원래의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쾌락을 좋아하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까?”, “방탕한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은 방탕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을 가르쳐주셨는데 그 사랑을 자기 욕심으로 꺾어서 잘못 사용한 것이 방탕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함은 하나님의 높으심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람들을 향한 정죄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최종적 심판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르게 배워서 올바로 적용한 것이 선이고, 하나님이 좋은 것을 보여주셨는데 자신의 욕망과 죄를 투입하고 잘못 곡해해서 적용한 것이 악입니다. 예를 들어 쾌락은, 하나님은 영원한 행복이시고 현재적인 행복이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즐겁고 행복하십니다. 완벽한 행복이십니다. 인간은 그런 행복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는 싫고 나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심리가 나타난 것이 쾌락입니다. 그래서 쾌락은 종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쾌락에 빠져 미친듯이 살아가는 젊은이들 - 구역공과중입니다. -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거스틴이 결론을 내린 것이, 인간은 이러나 저러나 하나님을 본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에서 올바른 것을 배워서 올바르게 하는 사람은 그것을 보시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죄와 욕망을 투영시켜 삐뚤어지게 적용하여 잘못되게 악을 만들어 행하는 사람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기가 막히게 설명해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우리에게 주사를 놓듯이 그런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 중생의 때를 제외하고는 사랑은 이런 식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사를 맞아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약이 있다면 나는 교회 예산 전체를 털어서 그 약을 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약은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호, 불호가 있습니다. 혐오라는 것은 hatred 라고 하는데 에드워즈는 이 두 개를 동일한 것의 반대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서, 사랑은 좋아하는 것인데 그 좋아하지 않는 요소를 가지고 있을 때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가능성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더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에게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람에게서 너무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미워집니다. 사랑은 같이 있고 싶고 일치를 이루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것인데 미움은 멀어지고 싶어 파괴해서라도 없애버리고 싶고 기억에 있다면 메모리를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미움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의 이면이듯이, 두 가지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기가 막히게 예쁜 세계적인 미인이 있는데 그 여인의 코를 3cm만 옆으로 이동시켜놓으면 절대 미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추함이라는 것은 독립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어떤 요소가 비틀어진 것입니다. 한 번도 써먹지 않은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미인, 미남의 조건은 있는데 추남의 조건은 없습니다. 어떤 조건을 갖춰야 추녀, 미운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거의 동전의 양면이지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서 추하다고 느끼는 것은 예쁜 것에 대한 기억이 이미 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밉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도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을 사랑에 적용해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거기서 아름다운 요소를 발견하고 내 마음이 끌렸기 때문인데 거기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추한 것을 발견하여 내 마음이 배척하고 있다면 그것이 미움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사랑의 감정과 미움의 감정도 종이 하나의 앞뒷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와도 이 이상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미움과 사랑은 이렇게 양면적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랑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부, 성장, 성령님이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존재하며 이 사랑과 지혜 속에서 세계가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난 것은 자신을 태어나게 한 원래의 것들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보면 엄마 아빠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닮아 보여도 성질은 빼다 박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종자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원천의 영향을 당연히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당신처럼 사랑의 사회를 이루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창조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창조하셔야 했고 한꺼번에 수십억 명을 기계처럼 찍어내어 확 쏟아놓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만드시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몸 안의 것으로 만드시고 그 다음에는 둘이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사람이 태어나게 하셔서 자신들 속에서 태어난 아이를 통해서 모두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하게 하시면서 사회를 이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를 세상에 먼저 보여주시기 위해서 모아놓은 사람들이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은 얼마나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는지, 거기를 뛰어넘고 교회 담장을 뛰어넘어서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살았는가에 의해서 한 사람의 인생의 성패가 걸린 것입니다. 이 교회의 한 일원이 된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렇다고 때려치고 저렇다고 때려치고 목양도 받지 않으며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심히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자신을 좋은 날을 보지 못합니다. 자녀들도 잘 되지 못합니다. 정말 경건하고 열렬하게 살아도 자식들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런 부모에게서 무슨 신앙이 물려지겠습니까? 신앙 때문에 행복한 부모를 두어도 그 자녀들이 신앙을 갖지 않는데 부모가 신앙 때문에 거의 행복한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 자녀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겠습니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랄 뿐입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양립주의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작용과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고 두 개가 모두 양립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양립주의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결정이 있으면 인간은 기계처럼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결정하셨어도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해서 그것을 이룬다, 하나님의 결정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모두 양립가능하다는 것이 양립주의입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정되어 있다면 기계적일 수밖에 없고 기계적이라면 자유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많이 논쟁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바는,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완벽한 비유는 될 수 없겠지만 이런 비유로 즐겨 설명합니다. 살아보지 않고는 하나님이 무엇을 결정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선하게 살아라” 이런 것은 알지만 내가 3년 뒤에 누구에게 장가를 갈 것인지는 모릅니다. 내가 10년 뒤에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모르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보면서 “아, 네가 그랬구나. 이런 식으로 전개해 나가는구나.” 하신다면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고 답을 가지고 계신데 그것들이 내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꿈에 그 비유를 찾습니다. 우리는 꿈을 절대적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태몽을 꾸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꿈을 꾸었는데 누군가 굉장히 반가운 사람을 만날 꿈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냥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꿈 꾼 것도 잊고 살아가는데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납니다. 길에서 악수를 하고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 집에 오면서 생각을 합니다. “이 일이 있으려고 내가 꿈을 꾼 것인가? 꿈이 내 앞에 있는 일이 결정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 꿈은 신기하게 내가 그쪽으로 가도록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갔고 수천만 분의 일의 확률로 내 친구를 만나고 거기서 기뻐하며 즐겁게 해후를 했다.” 놀라운 양립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이 양립주의는 성경의 사상을 신봉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이 두 가지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양립주의입니다. 결국 인간은 사랑함에 있어서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것은 에드워즈의 정의가 아니라 저의 정의입니다. 사랑은 인격적인 존재가 하는 것입니다. “개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표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어법이지 학문적인 어법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 - 사람입니다- 가 하나의 대상을 고정하여 - 마음이 하나에 꽂혀있는 것입니다 - 지속적으로 기쁨을 누리려는 마음과 정신의 성향이다. 이용하는 것의 끝입니다. 어떤 자매에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너는 왜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왜 사랑해?”, “나도 몰라” 하고 답을 해야지, “니네 아버지가 부자잖아.” 하면 그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은 부자인 아버지의 덕을 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마지막에 “왜?”라는 이유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나도 모릅니다. 마음이 계속 끌립니다. 그것을 올바른 대상에게 작용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5. 우리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에드워즈의 참된 미덕에 관한 견해를 통해 살펴봅시다.
이것은 너무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공과공부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