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목양 2
녹취자: 이재호
5. 우리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에드워즈의 참된 미덕에 관한 견해를 통해 살펴봅시다.
문제 5번을 오늘 하루만 공부하는 걸 보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문제 4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여기서 다루는 것이 사랑과 목양입니다. 우리들이 목양을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배우고 그렇게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알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여성이라고 합시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훤칠하고 멋있는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확 마음이 끌려서 자신의 생애를 던져서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결혼할 뜻이 있는지 어떤 인격을 가졌는지 모르는데 확 마음이 끌려서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신뢰하지 않고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입니다. 종종 문학가들은 인생을 종종 그렇게 삽니다. 거기서 뭔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끄집어내서 우리에게 전달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우리에게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이 따라가면 행복할 삶의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거기까지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알려주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때에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려주는 그 사람의 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연자 맷돌을 목에 걸어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다’ 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렇게 잘못 가르치는 것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한 사람의 인생과 운명과 결정될 때에는 무시무시한 것이란 점을 알려주신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의 뚜껑을 잘 닫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거나 들어오도록 방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안 묻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이것 하나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플라스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이라고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극단적으로 이런 말도 합니다. ‘마귀도 선한 구석이 있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라고 했을 때 ‘자연적으로는 선하나 도덕적으로는 악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선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원래 마귀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타락해서 마귀가 된 것이기 때문에 원래 만들어질 때에는 자연적으로는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타락해서 나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자연적인 면에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도덕적인 면에서는 추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잘 설명할 때 그 때에 마음이 끌리는데 우주의 모든 사물에 묻어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아는 것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아름다움은 희미한 흔적에 불과하고 죄인의 눈은 어두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감격한다는 것은 자연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 모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느냐면 여러분 자신을 놓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사건이 여러분에게 더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건이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창조되지 않았다면 타락도 못했을 것이고, 타락 안 했으면 예수가 안 오셨을 것이고, 안 오셨으면 구원도 못 받았을 테니까 시간이나 논리적인 기초의 면에서는 창조 없이는 구원이 성립을 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창조의 바탕 위에 놓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창조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어도 내가 구원받지 못하고 내가 미개인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창조되고 태어난 것이 인생의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를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요? 믿고 나서 거꾸로 추적해서 내 인생을 보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 너무 온 몸에 비늘이 돋는 것처럼 살이 떨리는 감격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 수 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거기서 얻는 행복이 보이는 모든 인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내가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며칠에 한 번씩 인간으로 창조된 것에 대해서 감격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번, 세 번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우주 공간의 작은 티끌에도 지나지 않는 그런 존재가 그 모든 우주를 이미 너머선 무한한 하나님과 일대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이 나를 알고 사랑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 마음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그 무한한 힘을 나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비참함과 동시에 위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의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사회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인간의 일을 분석을 해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당신을 멀리 떠나 불행해진 인간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구원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창대한 드라마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물줄기가 벌판을 가르고 흐르면서 수많은 풀들과 꽃들이 생겨나고 수풀들이 생겨나서 눈부신 아름다운 천지가 되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이 이루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관심사입니다.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우리가 주인공을 착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끝나는 순간까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영화는 시작하면 불과 1-2분 안에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암시합니다.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 사람의 행동이 극 전체를 흘러가는 물줄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관심을 딱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물처럼 흘러가면서 재밌게 보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읽으면 피곤하고 따분하여 잠 올 때에 딱 좋은 책이 되는 것입니다. 읽으면 늘 졸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속에서 참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써 어떻게 육화 되는지를 체화 되는지를 자기와 하나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4부 예배의 설교시간이 매우 길었습니다. 80분 정도 한 것 같은데 제가 강조한 것이 그것입니다. 매일 염려하고 매일 걱정하고 매일 자기 현실이 힘들다고 낙심해서 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려움에 처했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건강이 나빠졌을 때 건강을 나쁘게 한 습관을 끊으려고 애를 쓰고 약을 먹고 심하면 째고 수술을 받고 건강해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가난하면 돈을 벌거나 경제의 운용을 다시 하거나 심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궁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경이 나쁘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교회의 의무가 아닙니다. 교회는 어떻게 용돈을 절약해서 돈을 모으고 재테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많은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것보다도 그런 현실을 계속 살아가는데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계속 염려하고 불평을 쏟아냅니다. 10명중의 9명은 여러분들의 불평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물론 들어주고 기도해 줍니다. 다만 거기까지입니다. 뒤집어서 바꿔주지는 않습니다. 돈을 좀 도와줄 수 있고 힘들 때 집안일을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있는 사랑이 여러분에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임했고 우리는 그 나라를 충만이 누림으로써 우리들이 그 현실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남성으로서 여성을 좋아했습니다. 정말 좋아해서 프로포즈를 했고 yes를 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의 느낌이 모든 것이 어제와 같으나 아무것도 어제의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어제의 모든 골목을 어제의 것이 아니게끔 만들어주는 원천은 모릅니다. 이유는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yes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뭉클뭉클 쏟아져서 삶의 힘을 주는 것은 그녀의 yes가 아닙니다. yes는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만져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것입니다.
오늘의 요점은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이것이 참된 미덕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미덕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체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하나님도 들어가고 이웃들도 들어갑니다. 그것의 정체가 그 영혼의 힘이 사랑입니다. 하나의 이런 물건을 이렇게 보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측면이지 두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일반’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 없을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그 안에 있다고 설명하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 있다고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있는 수많은 것들은 이것들을 품고 있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존재일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다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랑합니다. 혹은 저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결국은 A를 사랑하면 나머지는 여기에 종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가치 면에서 종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잉크병이 툭 쓰러졌을 때 그 밑에 있는 종이가 내가 쓰는 중요한 논문이라면 굴러 떨어지면서 잉크가 쏟아질 때에 잉크병이 매우 비싼 잉크입니다. 그런데 잉크병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잉크병을 받치겠습니까? 논문을 빼겠습니까? 그것은 모릅니다. 이 사람이 논문을 썼지만 언제든지 다시 쓸 수 있고 카피본이 있다고 하면 이 비싼 떨어져서 깨지지 않도록 잉크병을 붙들 것이고 이 논문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면 이 논문을 뺄 것입니다. 다른 예로, 결혼하기 전에 세상에 수많은 남자가 있지만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자기의 이상형은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사랑에 빠졌습니다. 알았습니다. 갈수록 점점 아름다워집니다. 이 사람 없으면 못살 것 같아 결혼했습니다. 나머지는 둘이 결혼해서 함께 사는 기준으로 모두 재편되는 것입니다. 홀로 계신 부모님도 떠날 수 있고 그 남자가 간다면 이민도 갈 수 있고 공부를 계속해서 학자가 되고 싶지만 남편을 위해서 알바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면 그것에 의해서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질서가 재편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질서의 재편은 인격적 헌신입니다. 그래서 매우 사랑하고 정신 못 차리던 남녀들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결혼했는데 손쉽게 헤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 헌신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이 사람이 하나님을 안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면 어떤 논리의 모순이 생기나 하면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하나님을 안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A가 있는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A를 갖는 것을 방해하면 하나님을 버릴 수 있습니까? 덜 사랑하는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 무엇이나 하면 1번은 2번부터 무한대 아래까지 다 합해도 1번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사랑이 1번 2번 순서가 있다고 하면 1번의 무게를 2번부터 무한대까지 합해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론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좀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주의적인 사랑’이라고 할 때에 인간이 ‘주의’가 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중심에 인간애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중심축이 되어서 나머지 것들을 모두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 안의 하나의 대상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편안하고 행복한 것을 해치면 가차 없이 제거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상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공감을 얻는 것은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것입니다. 인도주의적인 사랑이 거기서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현상이 중요하냐, 본질이 중요하냐에 관한 논쟁을 계속합니다. 하나의 사물이 중요하냐, 그 사물이 나온 그 근원이 중요하냐와 같은 것은 사상사에서 계속 강조점이 달라지고 서로 싸웁니다. 다투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휴머니즘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기독교나 다른 종교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가가 (휴머니즘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휴머니즘에 대해 반대하면서 ‘절대로 인간중심적이 되면 안 되고 비인간적이 되어야 한다.’라는 식의 논쟁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슬람도 기독교도 무엇이든지 사실은 올바로 해석해서 들어가게 되면 신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파괴적으로 짓밟는 사랑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를 들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나 기독교에서는 상반되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상반되는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제외해 버리는데 이는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복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하십니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묘한 점은 ‘인간이 이렇게 하면 내가 행복하다’라고 하는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그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자기의 기원도 설명할 수 없고 목적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의미는 더더욱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이 사랑의 중심원이 되는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핵심 A에 합치하지 않는 것들은 이것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에 대해서 재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편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 중심으로 재편되지 않습니까?
벤자민 워필드는 19세기 말에 있었던 유명한 세계의 3대 개혁신학자 중 한 분이십니다. 이분은 신혼여행을 가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내는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곁을 4시간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학자로서의 야망과 계획들을 모두 포기하고 4시간 이상 떨어지지 않고 아내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몸을 간호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이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통치자가 백성들을 악하게 다스리지 않고 선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 등을 아무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원은 받을 수 없지만 그것을 무시해 버리면 사회에는 도덕가치가 없어져 버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웃에게 친절하게 해도 그분께 상 받을 일이 없고, 내가 아무리 이웃에게 악하고 나쁜 짓을 해도 내 속에 동기만 순수하다면 아무 문제없다고 여긴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고민을 하면서 사랑을 1차적 사랑과 2차적 사랑으로 나눕니다. 1차적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차적 미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미덕입니다. 그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은 다 하나님 앞에 맞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양보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2차적 사랑, 미덕, 선은 그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 상태에서 맺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라고 보아서 하위의 사랑, 미덕, 선으로 본 것입니다. 이런 이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많은데 에드워즈의 의도는 순수하고 현실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면 나라를 엉망으로 다스리나 선하게 다스리나 어차피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마찬가지 인간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어거스틴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 중의 하나는 ‘다섯 명의 현명한 어진 군주를 주신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지는 않았어도 글들이 선하게 나라를 통치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면서 그 나라를 부강하게 하시고 제대로 된 나라가 되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되었을 경우 하나님이 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끊어져 이렇게 세 개가 떨어져 나왔는데 이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으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커집니다. 이것이 작을 때에는 문제가 안 되는데 자꾸 커져간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세계는 결국 하나님 안에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질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꾸 확장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의 질서와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충돌하게 되면 접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확장되는가에 따라서 다릅니다.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이 사랑은 원래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 속에도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계속 확장될 때 언젠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질서와 충돌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질서로 정돈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어거스틴의 명문을 인용한 것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내 안의 사랑을 질서롭게 하옵소서’ 이것은 그의 일평생의 기도제목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질서가 안 잡힌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랑의 크기는 언제나 비슷합니다. 염려하는 것도 애착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으로 향하든지 저쪽으로 향하든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은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가 사랑만 많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이 질서가 질서 지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덜 가치 있는 것들은 더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에 복종하고 굴복하고 더 가치 있는 것들은 더 위의 자리를 차지해서 그 모든 사랑의 단계의 정점에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잘 정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는 잘 안됩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물건을 보고 갖고 싶고 사고 싶고 없으면 불편해 보이고 그럽니다. 나쁜 짓을 해서라고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비추면 진리는 우리에게 사랑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거기서 어긋난 것을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래서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고 멀어졌다고 다시 돌아가고 하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이 결국은 신자의 끊임없는 자기 성숙의 길이고 온전해져 가는 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고 그러면서도 집단적인 사랑에 의해서 인간이 짓밟히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 인간인 것, 인간의 고귀함, 존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안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범 케이스로 하나님이 세상에 두신 견본주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런 점에서 너무 중요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이루고 싶어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