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름다움과 감화 2
녹취자: 이새봄
즐거운 구역장 공부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한 문제만 풀고 끝내겠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6. 에드워즈의 미학이 성령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과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한 문제를 가지고 한 주간 공부를 해야 될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매우 복잡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감정론』 같은 두툼한 책을 놓고 펼쳐보면 하얀 것은 종이이고 까만 것은 글씨라 생각하게 될 만큼 도대체가 밀림 속을 헤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설명을 들음으로써 여러분들이 10권의 책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한 큐에 쫙 북어를 꿰듯이 정리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여러분들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재밌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인생에서 재밌는 사건이 뭐가 있겠습니까? 재밌는 것이 없습디다. 뭐가 재밌습니까? 맛있는 것을 먹어도 입맛도 별로 없으니까 그냥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좋지만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입니다.
자, 결론부터 보시면 ‘에드워즈의 미학’이라는 것이 뭡니까?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고 또 어떨 때 아름답게 보이는가, 그리고 이 ‘미’에 대한 인식론, 인간 안에 뭐가 있기에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때로는 추한 것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들의 견해가 각각 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학’인 것인데, 이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넓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있었지만 좁게 보면 낭만주의 이후에 생겨나게 된 학문입니다.
요새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 거의 압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미학’이라고 하는 개념자체가 숭고함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를 들자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아래 쫙 펼쳐진 세계를 볼 때, 여기 수락산 같은 정도가 아닌 최소한 백두산이나 한라산 정도면 될까 모르겠습니다. 백두산 정도에서 쫙 펼쳐진 장백산맥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같은 이런 것들을 무한대 확장시킨 데서 오는 어떤 숭고함, 자연에 대해서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미학이 출발하게 됩니다.
낭만주의 시대 때의 관심사는 뭡니까? ‘낭만’입니다. 낭만을 자극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소위 얘기하는 음악, 미술, 문학 등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낭만주의가 흘러가게 됩니다. 나중에 낭만주의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인터넷으로 한 번 검색해보십시오. 간략하게나마 나옵니다. 한 때 제가 깊이 빠졌던 사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덕적인 가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낭만’이라는 말은 ‘로망스’에서 온 것입니다만, 이 ‘낭만’이라는 것이 사실은 최종적인 가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 때 미학이 시작됩니다.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으로 미학을 살펴본다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1703년생이니까 한창 활동할 때가 1730년대라고 봤을 때 그때부터 시작됐을 것이고 40년대 정도가 에드워즈의 신학을 활짝 꽃피운 시대였을 것입니다. 이 미학은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니까 1740년대를 본다면 벌써 100년 정도 지나서 확 개화하고 있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이것을 독창적으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한참 낭만주의 사조인 독일과 영국 등 유럽에서 나오는 책들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독일어를 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특히 영국에 있는 목회자들 중 에드워즈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에게 끊임없이 책을 보내줍니다. 그래서 사실은 에드워즈가 영국의 스코틀랜드로 목회자로 초빙을 받기도 하는데 안갑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낭만주의 사조, 특히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도덕 심미주의’라고 하는 사상, 그러니까 자연적인 아름다움에서 어떻게 해서 도덕적인 아름다움으로 연결되고, 선한 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아름답게 느끼게 만드는가,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도덕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와 같은 굉장히 중요한 논의들이 어마어마한 자료들을 쏟아내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사상사적으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냐면 이미 15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7세기로 넘어가면서 개혁파 정통주의가 활짝 꽃피다가 그게 시들어가면서 17세기 하반기쯤 들어왔을 때에는 굉장히 많은 교회들이 벌써 신앙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합리주의가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중요한 것들을 다 빼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도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착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모범적인 교사로 가르쳐준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도덕에 대한 관심사가 많아지면서 이제 소위 이야기하는 ‘도덕 심미주의’ 같은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한 많은 지적인 교류 속에서 에드워즈의 사상이 형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미학의 중심이 뭐냐 하면 이 ‘미’에 대해서 지난번에 배웠잖습니까? 아름다움의 원 본체가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님을 본떠서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에 관한 설명을 미학적으로 하면서 이게 성령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소위 영적인 총명이라는 새로운 미적 감각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 눈에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세상에서 인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밖에 없습니다. 조금 정신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은 정신적이고 도덕적이고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찾지만 육체의 감각이 떨어질수록 결국은 예쁜 사람, 예쁜 물건, 예쁜 옷, 예쁜 집, 예쁜 음식, 맛있는 음식 등등 모든 조건들이 육체에 어느 정도 만족을 주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움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육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도 아름다움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사람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을 불러일으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욕망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지금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의 원형, 원체, 본체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럼 결국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이잖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만져지는 분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물리적으로 만져진다고 해서 만져지지 않으면 우리가 감각할 수 없냐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 중국의 수많은 네티즌들을 눈물바다로 만든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른다섯을 먹은 남자가 서른네 살 먹은 여자와 결혼을 하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죽었습니다. 시신에다가 예쁜 드레스를 입히고 결혼식과 장례식을 함께 하는 장면이었는데 온 네티즌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사연인즉슨 3년 전 연애하던 시절에 이 여자가 암에 걸렸습니다. 2년 동안 투병을 해서 결국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년 후에 암이 순식간에 퍼져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죽고 나서 이 여자가 쓴 핸드폰을 찾아보니까 드레스를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가 약속했답니다. “내가 너를 데리고 올 때, 세계에서 제일 예쁜 드레스를 입혀주겠다.” 그래서 그 여자가 골라놓은 드레스를 구입하러 갔더니, 그 사연을 듣고 이 사장이 눈물을 흘리면서 1위안만 내고 원하는 것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최고급 드레스를 1위안, 166원을 주고 사다가 입히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말하자면 ‘영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막 눈물바다가 된 것입니다. 그 죽은 시신은 아무리 화장을 했어도 예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스토리를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이유는 그 안에서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었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느끼잖습니까? 아무리 해도 만져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승연애’라는 것을 아십니까. 남자하고 연애하다가 더 좋은 조건의 남자가 나오면 갈아타는 것을 ‘환승연애’라고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저세상 개념 없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 아십니까? ‘대박’을 요새는 ‘저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극단적인 개념 없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동받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이 가정해서, 일반 대기업 사원을 만났다가 환승연애를 해서 한국 최대 재벌의 3세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우린 그 안에서 감동을 주는 요소, 사랑 같은 요소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없기 때문에, 그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혀 사랑 안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스토리에서는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사랑에 대한 감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져지지 않습니다. 사랑, 신령함, 하나님의 아름다움, 고결한 가치, 이런 것들이 어떻게 만져지겠습니까? 안 만져지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파악되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되겠습니까? 감각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촉각이 살아있으니까 만지면서 느끼고 후각이 살아있으니까 훅 하고 냄새 맡을 때 약간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시각이 있으니까 보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영적인 것들을 감각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영적총명(spiritual understanding)’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영적총명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누어지겠습니까? 우선 ‘영적인’과 ‘총명’, 이렇게 나눠집니다. 대상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어떤 사물들을 뉴턴주의, 물리적인 감각에 의해서 크기나 부피, 모양, 질감 등을 보고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이는 물질 자체를 초월해서 무언가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본다면 결국은 영적인 것들을 감각하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것은 육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얘기합니다. 영적인 것은 무엇으로 알아야 할지니라? 영으로 알아야 할지니라. 그래서 결국은 육의 감각에만 몰두하던 인간이 천상의 가치, 말하자면 영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영적인 것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감각을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지 않고는 결코 신령할 것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가장 뚜렷한 표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거룩하고 신령한 것에 의해서 감동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감격하고 아름답게 생각하고 목매어 하는 그런 하늘의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해 감동을 받는 그 이유가 뭔지 모릅니다. 서로 이야기가 통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게 ‘미적 감각’입니다. 이게 영혼에 속한 미적 감각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 마음에 속한 미적 감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겠습니다. 영적인 총명을 이제 설명 드렸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각’이라는 것은 뭡니까? 어떤 사물과 접촉했을 때 그것을 그것으로 알아보는 인지능력이 감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의 감각은 ‘오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그리고 피부에 접촉하는 이 다섯 가지 감각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혓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쓴, 신, 짠, 단, 기름 맛, ‘오미’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모든 사물들의 정보가 이 안에 실어 나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보지 못한다든지, 귀를 듣지 못한다든지, 입맛을 잃어버렸다든지 마비가 되어서 감각이 없든지 할 경우에는 외부세계와의 소통이 극히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감각하지 못하니까 그 사물이 거기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비가 되고 감각이 없어지면 여기가 곪고 상처가 나도 그것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감각이 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들이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를 에드워즈는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성’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이 아름다움이 두 개로 갈라진다고 그랬습니다. 도덕적인 아름다움과 자연적인 아름다움으로 갈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도덕적인 것은 도덕적인 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아까 말한 것처럼 한 번 사랑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이런 특징들이 도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죽은 사람까지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고 죽었을 때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영혼의 결혼식은 우리가 성경적으로 권장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럼 영적인 아름다움은 여기서 어떻게 위치하느냐? 결국은 이 도덕적인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원인이 영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것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영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직관성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아름다운 것을 본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미의 근원이 하나님인 것처럼 똑같이 영적인 모든 아름다운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영적인 아름다움은 이 아름다움의 본체인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곧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자비하심, 신실하심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영적인 총명은 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성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에 꿰뚫어보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감각이 이런 촉각이나 후각 같은 것들이 아니라 영적인 감각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므로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감각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자신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 비 자발성’입니다. “자, 이 나이쯤에는 내가 좀 봐야 되지 않겠어?” 그러면서 눈을 뜨는 사람 없습니다. “아 그래도 이 나이되면 귀가 들려야지” 그러면서 자기가 청각을 갖는 사람도 없고 “요즘 너무 괴로우니까 미각을 잃어버려야 되겠어.” 이렇게 스스로 자기가 결심하고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다시 갖거나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눈을 파버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것은 말고, 자기가 의지적으로 마음을 먹는다고 감각을 잃어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감각의 비자발성’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똑같이 하나님이 영적인 감각을 주실 때에도 “우리가 갖고 싶다”고 주시고 “아 이제 싫어요.” 그런다고 거둬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거듭났을 때에 그런 비자발적인 방식으로 영적 감각을 수여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권으로 말입니다.
그럼 세 번째를 보십시오. ‘이 아름다움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은 이성의 추론이 아닌 감각지각에 속함’.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래야 멋있어 보이잖습니까? 쉬운 말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은 이성의 추론이 아니라 한 번에 팍 하고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여기서 어떤 분이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얘기를 했더니, 그런 거에 의문제기 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누가 그럽디다. 그런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아주 똑똑하신 분, 스마트하신 분은 어떻게 제기하냐 하면, “아니 그러면 목사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예를 들자면 우리가 곰곰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내가 왜 이 교회에 왔을까? 오기 전에 어떻게 방황했지?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여기에 왔구나. 이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오히려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럽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런 것들이 어떤 논리이냐 하면, 잘 보십시오. 아주 재밌습니다. 이것은 시점입니다.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f라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뒤를 돌아보니까 f라는 사태를 내가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g라고 하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이것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니까 그 다음에 e, d, c, b, a 이렇게 갑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러한 논리는 이성적입니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이 연결되는 이 지점에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신 것에 대한 의미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이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하나님이고 얼마나 세밀하신 하나님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감각이 생겨나면서 불꽃처럼 튀면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f, g, d, c, b, e 똑같은 길을 걸은 불신자는 이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때 불꽃처럼 튀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성의 추론이 아닌 감각지각에 속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이것은 이미 존재했던 관념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 단순한 관념의 원천이다’입니다. 새롭고 단순한 관념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렸을 때에 “친구를 때리는 것은 나쁜 것이야” “친구 것을 훔치는 것은 나쁜 것이야” 그렇게 얘기할 때에는 그 대상이 장난감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친구 집을 몰래 훔친다,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서류를 위조해서 친구 집을 통째로 그 권리를 뺏는다, 여섯 살짜리가 그런 생각은 안합니다. 걔가 이야기할 때 국한점은 각각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나 학용품에 국한됩니다. 그러다 이게 점점 더 감각이 발달해서 글을 쓰게 되고 도덕관념을 갖게 되면 남의 글을 한두 줄이라도 표시 없이 인용하는 것은 훔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미 존재했던 도덕관념이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해하시죠? 이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총명은 그런 식으로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이 발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한 번에 우리에게 심듯이 확 하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 아니더라도 거의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한 여자가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럴 때에는 이만큼 좋아하던 게 원래 있었는데 그게 뭐 보이지도 않게 있다가 천천히 발달해서 몇 년을 두고 결국은 사랑으로 이렇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않고 어느 날 훅 하고 가슴 쪽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주먹이 들어오듯이 훅 하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것이 훅 들어왔었는데 이 여성이 그렇게 크게 감각을 못 느낀 채로 훅 하고 들어온 것입니다. 성격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길거리 지나가다 코트만 멋있게 입은 남자만 봐도 기혼, 미혼 생각 안하고 주먹처럼 확 들어오는 여자도 있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훅 하고 들어왔는데도 그것을 애써서 누르고 안 그런 척하는 사람,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조그만 감정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한 눈에 딱 보는 순간에 화학적인 변화가 확 일어나면서 뇌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탁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랑에 대해, 한눈에 막 들어와서 그날 밤에 잠을 못 잤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뭐가 어느 순간에 확 하고 들어오는 게 그게 사랑이지, 그게 들어오지 않고 자기 안의 인류애가 발동돼서 그 사람이 천천히 불쌍해지기 시작하는 것, 사랑이 그런 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애적인 감정의 발전이라는 것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은 불우이웃돕기 사랑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혼을 하는 사랑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했던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딱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뭐냐 하면 ‘새롭고 단순한 관념’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이전에 내게 들어와 보지 않은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왜, 막연하게는 하나님에 대해서 느꼈을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사진으로 팍 찍히는 것처럼 확 감동이 다가와서 그것을 느끼는 것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습니다. ‘단순한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복잡한 판단들이 들어와서 그것을 훼손할 수 없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잡한 이성의 논리가 들어와서 훼손할 수 없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그런 훼손되는 경험 많습니다. 어떤 남자를 딱 보고 “오, 저 남자 멋있어” 했는데 나중에 친구가 “외모는 굉장히 훤칠한데 성격이 아주 사차원이래” 이렇게 얘기하면 자기감각에 흠집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감각은 그런 식으로 훼손되는 감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성으로 하는 것보다 더 아주 확실한 어떤 논리적인 귀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적이며 영적인 이 빛만이 총체적인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한다. 종교적 교리의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지식은 이것에 비견될 수 없다.” 이것은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빛은 마음의 저 심연에까지 이르러 본성을 변화시키며, 총체적으로 순종하고 싶도록 유효하게 작용한다.” 유효하다는 것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그 빛은 효과 있게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 빛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는데, 이는 참되고 은혜롭고 총체적인 순종의 유일한 원리이다.” 이 은혜롭고 총체적인 순종의 유일한 원리는 결국 아름다운 것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아서 그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일수록 소중하게 여긴다고 그러면서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주 비싼 잉크가 엎질러졌는데, 잉크병을 붙잡을 것이냐 아니면 그 밑의 원고를 잡아채서 잉크에 안 젖게 할 것이냐. 전자가 답이라 했습니까? 후자가 답이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게 써놓은 원고의 복사판이면 젖어도 괜찮습니다. 비싼 잉크병 깨지지 않게 붙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 하나의, 매우 중요한 몇 달을 투자한 원고라면 그 잉크병이 10개가 깨지더라도 이것을 낚아채서 훼손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잖습니까? 소중히 여기는 것부터 먼저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이 났을 때에 자기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갖고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돈이면 돈을 갖고 뛰어나올 것이고 아이를 사랑하면 아이를 안고 뛰어나올 것이고 자기 혼자 뛰어나오면 자기를 제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