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름다움과 감화 1
녹취자 : 장미연
아름다움과 감화입니다. 표지를 보면 첫 번째 페이지에 “정동”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정동”이라는 단어가 우리말 사전에 찾아보니까 있습니다. 있는데 사전에 나오는 건 제가 쓰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을 만들어서 써도 되냐? 어차피 모든 언어가 개념을 다 담지 못하면 연구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것을 규정하고 그 다음에 진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정동”이라는 단어가 서서히 학자들이 이 단어를 한국에서 쓰기 시작하는걸 보면서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정동이라는 단어는 그냥 감정이라고 나옵니다. 사실은 이 정동이 감정이라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쓰는 게 아니라 감정은 피할 수 없는데 설명은 몇 번 설명했지만 다시 한 번 개념을 설명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수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돌멩이가 떨어졌다는 그림을 옛날에 그렸잖아요. 그러면서 물결이 일어나잖아요. 당연히 여기는 크게 일어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지나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정동”이라고 그럴 때는 이게 인간의 감정입니다. 인간의 감정이 가만히 내버려두면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자극을 하면 감정이 출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새카맣게 잊어버렸던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내 마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그 사람이 그 얘기하기 전에 너 뒤에서 엄청나게 욕하고 다녔어. 그래서 너한테 그 얘기 태도로 보인 거 그 얘기를 한 거는 너를 욕보이기 위한거야.’라고 이야기할 때 이렇게 감정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이것은 미움의 감정도 마찬가지고 사랑의 감정도 그렇습니다. 미움의 감정과 사랑의 감정은 같은 감정의 반대면 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미움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1. 인간 존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 존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관련할 때 인간의 본성은 어떤 인간은 어떤 본성을 가진 존재입니까?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결국 태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가진 반항적인 존재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없냐? 그것도 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은 인간이 그런 점에서 굉장히 불가해한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 한편으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멀리멀리 이탈하려고 하는 그런 자기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죄인에게 부어주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 인간이 심장에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야 언제나 사랑하시지만 이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감화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의심 없지요?
2. 계시, 섭리, 조명을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생각해 봅시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씁니다. 이것은 감추어진 것을 이렇게 드러낸다 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보자기가 이렇게 덮여 있었는데 보자기를 거두었습니다. 당연히 여기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사람들에게 나타날 거 아닙니까? 이게 계시라는 의미입니다. 섭리는 인간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당신의 뜻을 어떤 인간사의 전개에 의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이것이 섭리입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도대체 왜 수없이 분양권 신청을 했는데 평촌에 당첨이 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제일 그래도 오고 싶지 않은 데였는데 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열린교회가 길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그렇게 강남으로 가려고 애썼는데 안 된 게 맨 처음에는 내가 경쟁률이 너무 높아서 안 됐나보다. 아니면 돈이 없어서 안 됐나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열린교회를 만나게 하시려고 여길 보내셨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린교회를 왔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좋은 형제를 만났습니다. ‘아, 시집보내려고 여기를 보내셨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이성을 가진 인간의 지성이 있습니다. 이 지성에는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 아닙니까? 여기에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셔서 이 지성에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서 조명이 없었더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보게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조명입니다. 영감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필요한 것이었고 조명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작용입니다. 당연히 조명하시는 주체는 성령님 이십니다.
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이십니다. 그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계시로 표명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특별한 계시가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특별계시의 기록된 형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특별계시의 기록된 형태다. 이게 성경입니다. 이렇게 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 성경을 보면 성경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제대로 깨달을 때. 성경에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나타나있는 것은 아닙니다. 농도가 흐리긴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너무 아름답고 웅장한 광경을 보면 약간 두려운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경건한 느낌.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높은 산에 올라가서 에베레스트산 같은 곳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고 싶습니다. 아래를 한 3분만이라도 내려다보면 어떤 감정이 될까요? 아마 신비한 감정이 들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있는 것을 어렴풋이 인간이 느끼는 것입니다. 예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예쁜 내 여자 친구도 하나님을 닮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하게 느끼게 만드는 감정의 작용 같은 것들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닐까요? 그 다음에 조명은 철저하게 성경과 관련이 된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조명을 해주시면 하나님의 아름다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는데 이것이 심미입니다. 심미안이라고 하잖아요.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심사한다할 때 이 ‘심’과 그 다음에 아름다울 ‘미’. 그 다음에 ‘안’.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감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섭리는 전개가 됩니다. 전개가 처음엔 잘 안 보입니다. 시간이 흘러야합니다. 계시는 드러난 뜻이고 섭리는 감추어진 뜻입니다. 천천히 드러나면 연관관계를 몰랐을 때는 그냥 덤덤했는데 연관관계를 알고 나면 아주 가슴이 시릴 정도의 감동이 다가오게 됩니다.
(예화) 어느 날 남편을 출근시키고 열심히 청소를 하다가 화장대에 앉았는데 예쁜 리본이 달린 물건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뜯어보니까 화장품입니다. 남편의 메모가 들었습니다. 감동이 됩니까? 안 됩니까? 뜯어봤습니다. 그런데 자기 딸의 남자친구의 글씨가 쓰여 있는 겁니다. 딸이 받은 것을 모르고 거기다 놓고 간 겁니다. 감동이 됩니까? 안 됩니까? 연관관계가 없잖아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래서 이해 안 되는 현실을 믿음으로 살고, 살고 나서는 회고하면서 그 연결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게 살아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돌아보면 가슴이 시려올 정도로 그 때는 왜 그렇게 고생을 해야 되는지, 왜 그렇게 힘든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나중에 살아보니까 그것들이 연결이 되면서 아름답게 흘러온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슴이 시릴 정도로 하나님이 과거에 그렇게 세밀하게 간섭해서 인도해 오셨다는. 지금도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런 회고를 잘하는 사람이 전망도 잘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이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특별히 예비하신 것이고 여기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미래가 있다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로는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이 안 됩니다. 설명이 된다 그러면 안 믿을 사람이 없지요. 그러니까 거기서 믿음이 요구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거기로 가서 기적을 보는 거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섭리가 전개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인간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3.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에드워즈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원천과 절정은 무엇입니까?
결론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첫 째는 어려운 말 같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입니다. 어떤 물건 하나가 있으면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치가 있을 거 아닙니까?
(예화) 예를 들면 안경이 있는데 제가 3년 썼는데 만족스럽습니다. 기스가 많이 났는데 그런 거 빼놓고는 딱 썼는데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내가 너무 까다로운데 만족스럽다고 할 때는 완성도가 높은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것을 우리들이 좋은 물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획일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웬만하면 참는 사람이 있고 너무 너무 예민해서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힘들어하고 못 견디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저는 공기가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에 딱 나오는데 이게 안 좋구나.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 힘듭니다. 저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좋은 징조일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민감하지 않으면 아무데나 있을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보면서 이정도면 됐지. 후∼하∼ 공기가 이정도면 됐지. 더 나쁜데도 있는데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어떤 사물에 대한 개별적인 완전성입니다.
두 번째는 어울림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함께 어울릴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옷이 몇 개 없어도 이렇게 위, 아래 맞춰서 예쁘게 입는 사람이 있고 굉장히 비싼 옷인데도 촌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어울림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이렇게 존재하는 것과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일치를 이루고 그 다음에 일치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딱 맞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두 개가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울릴 수는 있잖아요. 그 다음에 연합. 이것들이 함께 이렇게 엮어져서 어떤 아름다움을 더 큰 아름다움을 산출해낼 때 우리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예를 들어서 둘이 뚜엣을 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은 노래를 너무 잘 부릅니다. 그런데 화음이 안 맞습니다. 그럼 듣는 사람은 최악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상대방 없이 혼자 노래를 했더라면 갈채를 받았을 텐데 둘이해서 안 맞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울림이라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울림이 관계가 복잡해서 잘 어울릴수록 장엄한 아름다움을 연출합니다. “아름다움은 불일치나 부조화에 있지 않고는 일치와 어울림 속에 존재한다.” 만약에 불일치하고 조화를 이루지 않는데 아름다움이 있다고 느낀다면 느끼는 사람이 마음에 뭔가 고장이 난거라는 이야기를 에드워즈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지성적인 존재는 지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 마귀, 천사,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런 존재를 지성적 존재라고 부르는데 좁은 의미에서는 지성적 존재라고하면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읽은 많은 책에서는 합리적 존재라고 이야기하는데 rational이거든요. 합리적인 존재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지성적인 존재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일반과 관계된다.” 존재일반은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지성적인 존재가 쉽게 인간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과 관련된다면 또 보편적인 존재계의 한 부분이라면.” 무슨 뜻이냐면 존재가 이렇게 있는데 모든 것들이 그와 관계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위에 존재가 있다면 그런 뜻입니다. “그것에 한 부분이라면 전체와 연관을 가진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고.” 너무 당연합니다. “그 지성적인 존재의 보편적이고 참된 아름다움이란 거대한 전체와의 일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감동적 아닙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세계가 해와 달과 별과 헤아릴 수 없는 수천억개의 모인 은하계. 멀리서 보면 왕별처럼 보이는데 그 별 하나 속에 수천억개의 별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거리는 수십만 광년입니다. 그게 하나의 별처럼 보이는 겁니다. 은하입니다. 은하가 어마어마하게 보이는게 아니라 가까운 건 그렇게 보이지만 멀리 있는 건 엄지손톱 같은 빛 하나 모양으로 구슬하나 같이 보이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헤어 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함께 일치를 이루면서 돌아가고 있다는 우주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저는 많이 오프가 되었지만 옛날에 한창 과학에 빠졌을 때 얘긴데 우주 공간의 이런 별들과 달과 이런 것들이 이게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초속 약 300㎞정도로 우주를 이동하고 있다는 얘기 제가 말씀드렸지요. 초속. 초속 300㎞정도로 전체가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너무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들을 결국은 하나님이 움직이시기 때문에 조화를 이룬다면 당연히 도덕적으로도 인간, 인간 하나, 하나가 있고 있는 이 모습 자체가 다 서로 연관을 이루면서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이 우주에 떠있는 별처럼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별은 크고 작고 빛나고 그 다음에 빛이 좀 덜나고 어떤 별은 지금 부서져서 타서 없어지는 중이고 어떤 별은 막 펑하고 터지면서 태어나는 중이고 그것이 나중에 수명이 다 한 다음에 쾅하고 폭발하면서 우주공간에서 먼지가 되어서 사라지고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게 우주인 것처럼 인간 존재도 그렇게 되잖습니까? 그렇게 될 때에 이렇게 인간이 이러한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이 전체에 주인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걸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우리의 신앙인데. 이것들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여기에 있는 이 인간들이 이런 질서를 이탈합니다. 그런데 이탈한 것들을 다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겁니다. 그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각기 제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찬란하게 빛나는 겁니다. 아름다움이란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어울림, 연합. “다시 말해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에 대한 마음에 연합이나 지향성은 존재하는 사물가운데 발견되는 최고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에 대한 마음의 연합.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되고 지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성향입니다. 그렇게 되려고 하는 그런 경향성. 의지가 가지고 있는 방향의 성격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모에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의 정신과 영혼이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을 때 최상의 아름다움이 된다. 영적 아름다움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 모든 사물도 개별적인 완전성과 조화에 의해서 아름다움이 되듯이 인간의 영혼도 영혼 자체가 온전하고 순수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그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 그 영혼은 아름다움을 갖는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존재자들의 근본적인 존재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있게 되었으니까.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과의 닮음 안에 있다.”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형입니다. 계속해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들의 일치. 어울림, 연합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하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런 모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스라엘에 역사를 통해 전개가 됩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절정에 도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하나님의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4. 원형적 아름다움과 모형적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원형적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아름다움이고 모형적 아름다움은 그것을 본 딴것입니다. 원형적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영적 감각이 생겨나는데 그 영적 감각에 직접적인 대상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속에 중생함으로 새롭고 단순한 관념이 생기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가 ‘신적 실재’ 라는 게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신다. 그런 뜻입니다. “창조세계를 통해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움은”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아름다움. 자연적인 미, 도덕적인 미 모두 단지 저 존재의 광채의 반영일 뿐이다. 이것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입하신 빛의 반영일 뿐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인데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설명 안 하겠습니다. 도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지성적인 존재인 도덕적 피조물. 인간의 아름다움이고 그 다음에 판단 능력과 사랑의 경향성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사랑하는 것에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모든 도덕적 관계에 정점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예화) 자, A이라는 사람이 B에게 “나는 도둑질 하지 말아야지. 나는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다시 여기 C라는 사람이 A에게 “어려울 때 도와줘야지. 힘들 때는 고통주지 말아야지.” 물론 편안 할 때도 고통주면 안되지만. 이렇게, 이렇게 할 때에 이것을 하게 만드는 모든 이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이런 태도를 갖고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오히려 서로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때 이 정점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어야지만 전체적인 목적의 연관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지난시간에 5번 문제를 풀 때 나왔던 이야기가 이 이야기입니다.
5. 아름다움을 사랑으로 이어지게 하는 원리 세 가지를 말해 봅시다.
첫 째는 지식입니다. 무엇인지를 알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사랑합니다. 두 번째는 그 아름다운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다음에 이게 보통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해야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식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의심할게 없지요? 미감 능력은 아름다움을 지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존재에는 좋음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이게 존재의 차지가 아니라 원리입니다. 그래서 좋음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영적인 총명이 생기고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신령한 아름다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어서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