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장 신자 안에 있는 은혜와 죄 (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14)
녹취자 : 오지윤
성도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주에는 한 주 쉬었습니다. 쉬고싶어서 쉰 것이 아니라, 못 따라오는 구역과 순이 있어서 한 주 쉬어서 진도를 맞추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죄와 은혜의 지배를 들어가게 됩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저의 강의가 아니라, 새로운 말씀의 세계를 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6장 14절은, 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한 성경 구절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로마서 6장 14절의 의미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과를 시작하기 전에 몇 달 동안, 아마 내년 3월까지 매주 읽게 될 구절일 것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노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율법 아래 있음이니라'
이 책 전체의 요지를 30초 안에 설명하고 오늘 공과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죄와 은혜가 우리를 서로 지배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지배한다고 하는 것은 영어로 도미니온이라고 하는 것인데, 우세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배권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힘이 있어서 그 힘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을 때 우리가 즉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신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하면,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이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성화라고 하는 것은, 믿음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칭의가 즉각적인 구원이라면, 성화는 점진적인 구원입니다. 성경은 두 구원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점진적인 구원이 없다면, 즉각적인 구원은 없는 것이고, 즉각적인 구원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점진적으로 구원을 이루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너희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라고도 표현하고,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성화의 구원이 없이는 신자가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는데, 100퍼센트 그 문제는 성화의 문제,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구원이 안 되고 있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면 죄는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그것은 죄다'라고 말할 때 의미는 다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 아직도 내 안에 죄가 나를 힘들게 합니다'라고 할 때는 서로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앞의 죄는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고 규정된 죄입니다. 뒤에 이야기하는 죄는, 무슨 힘을 계속 내 안에서 발휘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나를 계속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도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당연히 신자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주관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가 다 차지했다는 뜻이 아니라, 지배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주인 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법 아래 있다'라고 하는 것의 '법' 은 율법이고, '은혜 아래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 , 성령의 은혜 아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림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여기서 만세를 부르는 것은 행복입니다. 한 편으로는 자기가 이길 수 없었던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이것이 불신자고, 이것이 믿음이고, 신자가 된 것입니다. 신자가 되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꽉 채웁니다. 그 기간이 몇 달, 몇 년, 며칠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진심으로 믿는 순간, 거듭나고 회심하는 순간 하나님은 사랑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표에 눈여겨서 보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시는데, 사랑의 감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흐르는 물이라면 하나님이 이 구원을 통해서 이런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려보겠습니다. 수도를 주시는 것입니다. 물이 계속 나올 수 있는 것을 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생명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샘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샘에서 계속 솟아난다면 계속 물이 흐르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을 우리 안에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의롭다 칭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죄가 남아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순간에도 이 죄는 남아있습니다. 이 죄들이 우리가 기도 안 하고 말씀의 은혜를 못 받으면 점점 커져서 우리 안에서 지배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원이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처럼 너절하게 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면서도 우리들이 매일매일을 영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그림을 보겠습니다. 불신자는 율법이 있습니다. 무엇을 행하든지 그 율법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이 율법은, 세계를 향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고 명하시는 명령입니다. 이 율법을 인간의 두 곳에 하나님이 새겨주셨습니다. 하나는 돌판에 새기셨고, 십계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마음에 새기십니다. 이것이 양심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예수 믿은 사람들은 이 계명을 배우니까 압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불신자일 때 이것이 있었고, 이 사람이 신자가 된 이후에도 당연히 마음에 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모두 외우지 못해도, 이런저런 죄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기 전에도, 믿은 후에도 우리의 마음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 사는 세상이 짐승 사는 세상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양심과 율법이 있는데, 그 두 개가 똑같은 율법을 담고 있는데, 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양심은 송사를 합니다. 소송이라고도 합니다. 율법은 판단을 합니다. 마음에 새겨진 율법으로 계속 우리 자신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네가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 '양심을 속였다.', '네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이러한 죄를 범했다.'라고 고발을 합니다. 율법이 기준이 되어서, '그렇다면 나는 정말 죄를 지었구나, 이렇게 나는 벌을 받아야 하는구나' 하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을 성경에서 정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자잘하게 스캐너처럼 지나가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그대로 지나가면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에 가져가는 것이 사망입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불신자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하나님 삼은 삶입니다. 이것은 우주입니다.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기중심적이게 됩니다. 이타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과 절제에 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모든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여기는 마음도 포함되고, 당연히 행동도 포함됩니다.
그림을 그리면,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실 때 당신을 중심 삼아서 파문처럼 질서를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밖으로 퍼져나갑니다. 여기에 사람도 있고 교회도 있고 집도 있고 아파트도 있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여자도 있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질서 속에 있습니다. 자기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위치를 바꾸자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쪽으로 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정해주는 질서 안에 있으라고 하나님께까지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라는 것이 어떤 행동을 하고 그러한 것은 그저 나타나는 것이고, 이것을 자기가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이고, 모든 것들은 다 자기의 행복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삶입니다. 후에 배우겠지만, 죄의 지배가 있는데 이것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절대적인 지배와 상대적인 지배로 나뉘어집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대 입니다. 여기에 하나 있고 둘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없이 이것만 있는 상태가 절대입니다. 두 개가 같이 있는 상태를 상대라고 부릅니다.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비교해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고,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는 다른 것이 개입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불신자는 절대적인 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절대적이겠습니까?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것들은 자기의 행복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이 절대적인 죄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모든 질서를 자신이 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신 삶과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고, 이렇게 자기가 하나님 같아지려고 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입니다.
상대적인 지배는 무엇이겠습니까? 상대적인 지배는, 절대적인 것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죄인이 못 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수시로 그러한 것처럼 생각을 가집니다. 그렇게 하라는 죄의 유혹에 굴복합니다. 종종 우리의 마음 안에서 데모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습니다. 만약에 커다란 폭동이 일어나면, 데모가 일어나면 실질적으로 나라는 없는 것처럼, 그 시위대에 의해서 거리가 지배되는 것입니다.
저는 민감한 정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리핀에 가면 민다나오라는 섬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필리핀의 섬입니다. 그런데 반군들이 이미 오래전에 지배했습니다. 자기네끼리 세금을 걷고 군대도 양성해서, 불법적으로 나라 안에 또 다른 나라를 만들어서 운영을 합니다. 그러한 것처럼 신자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때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지배라고 보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칼빈은, 죄로 인한 영혼의 부패는 모든 부분에 침투해서 총명은 눈멂에, 마음은 타락함에 복속됐다. 머래이는, 죄는 단지 어떤 것의 부재가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인 것이다. 존 오웬은,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적의다. 라고 말합니다. 그루뎀은, 죄는 행동과 태도,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지 못하는 모든 것, 그것이 결국은 죄고, 이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다음을 보면, 신자의 삶은 불신자의 삶과 대비가 되지 않습니까? 바뀌고 대비되는 신자의 삶은 어떤 삶인가? 그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 다루어지는 본문입니다. 8장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구절 밖의 모르는 데서 많은 문제가 파생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즉각적인 구원을 통해서 얻는 신자의 유익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익을 신자가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신자가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삶입니다. 죄는 죽이고, 은혜는 살리는 삶을 살아가야지만, 지금,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놀라운 기쁨과 해방, 자유를 계속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나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라고 할 때, "너희가"는 당연히 여기에 나온 너와 같은 청중입니다. 여기에 너가 거기에 나오는 너희입니다. 신자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성령 받은 신자라도 육신대로 살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뜻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질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죄는 무엇인가?, 신자 안에 죄가 거할 수 있는가? 당연히 있습니다. 죄는 신자 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거스르면서 살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으로 생명의 성역을 거스린다면, 죄와 사망의 법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이상 그 법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영향을 받아서 생명의 법이 약화될 수는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인데, 은혜 생활을 형편없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 얼굴을 잘 봅시다. 제가 보이스피싱에 속을 사람 같습니까? 안 속을 사람 같습니까? 한 번 당했습니다. 7, 8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목사님,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캐나다의 아무개 전도사입니다.' 캐나다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네, 그런데요?' '아~ 어느 도시에 오셨을 때 제가 목사님을 모시고 하루 동안 구경도 시켜드리고 그랬던 전도사입니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고맙게 교회에서 빌려준 차로 우리 부부를 좋은 곳을 구경시켜 줬습니다.' '그래서 그런데요?' '목사님 1000불만 속히 보내주십시오.' '왜요?' '아버지가 한국에서 돌아가셨는데, 고향이 섬이라서 섬으로 시신을 옮겨야 하는데, 제가 급히 들어오느라 돈을 못 가져왔습니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부인이 회계 사무실에서 일하고 그럴만한 집인데, 만난 지 10년도 더 된 한국의 목사한테 전화해서 1000불을 보내 달라고 해서 조금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보내주었습니다. 불과 몇 분 후에 은행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 계좌가 경찰에 의해서 출금 정지된 계좌인데, 선생님이 돈을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못 찾아가고, 수신자도 못 찾아갑니다. 그때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이 흘렀습니다.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사람을 조사 차 경찰에서 부르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그 사람을 만나고 계좌를 풀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안 풀어주시겠습니까? 와서 사인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목소리까지는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너무 잘 아는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그 스토리를 이용해서 나에게 돈을 갈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났습니다. 제가 만났던 그 젊은이였습니다. 교회 전도사가 보이스피싱 범죄자로 변했는지에 대해서 잠깐 앉아서 물어보았습니다. '모두 다 털어놓지는 못하지만, 너무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아내하고는 이혼했고, 저는 캐나다를 떠나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캐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내가 본 젊은이는 신실한 전도사였고, 지금 있는 이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그가 정말 불신자였는데 전도사 흉내를 낸 것이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학교도 다니고, 신자였습니다. 지금도 신자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은혜가 사라지고 죄가 번성하고 보니까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생활은 어디서 하냐, 무엇을 먹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들어보니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주라고 사인하고 왔습니다.
사망의 법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데, 생명의 법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법이 약화되면 죄가 번성하게 됩니다. 음식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뚜껑을 열고 부엌에 두면 됩니다. 안 상하게 하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냉장고에 넣든지, 얼리든지, 기름에 담가놓던지, 바짝 말려버리던지, 소금을 왕창 쳐서 부패하지 않게 하든지 등등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죄가 번성하게 되면 성령의 법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거의 불신자같이, 어떤 의미에서는 불신자보다도 더 말도 안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가 신자 안에 있다면 신자가 구원받은 실체는 무엇인가? 죄가 있어도 하나님 앞에 믿음과 순종으로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의 감화를 계속 주시고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구하면 무한히 죄를 용서해주시고 무한히 죄를 이기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결론은,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절대적인 지배는 종식되었으나, 죄는 현존한다.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번성하게 되었을 때, 죄의 상대적인 지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첫 번째 시작했는데, 댓글을 읽어보겠습니다.
댓글: 모든 알곡이 익어가고 추수를 준비하는 가을에 우리 영혼을 단단하게 해 줄 라이브 구역 공과 다시 새롭게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제가 할 말 같은데, 권사님이 해 주셨습니다. 달려가겠습니다!
댓글: 우와 배경이 너무 멋집니다.
정말로 야외에 나가서 찍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용이 들더랍니다. 좋은 곳을 찾았는데, 사용하는데 돈을 달라고 해서, 그냥 뒤에 실사 프린트를 했습니다.
댓글: 배경이 너무 멋집니다.
배경만 멋집니까? 사람은 별로입니까?
댓글: 모든 것이 리뉴얼입니까?
네, 그리고 공과를 못 받으신 분들 받아가세요. 책이 있는데, 책이 너무 낡았거나, 새 책으로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도 드리겠습니다. 교회에 오셔서, 교역자들하고 연락하셔서 드라이브스루로 받아가시길 바랍니다. 평일 날도 오셔서 받아가시고, 멀리서나마 마스크 쓰고 교역자하고 인사도 하시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가시면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입니다. 책이 너무 낡았거나, 새 책으로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은 달라고 하십시오. 드리겠습니다.
댓글: 배경이 탁 트이니 좋습니다.
계속 배경 이야기만 그렇게 하십니까? 상당히 빈정상했습니다.
댓글: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20년 전에 첫 신앙을 열린교회에서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깨어나게 되었고, 눈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씀의 반석에 대해서 믿음의 뿌리를 잘 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의 말씀이 너무 반가워서 적어보았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댓글: 첫 번째 구역 공과가 죄와 은혜의 지배였습니다.
댓글: 환경에 장사가 없네요
장사가 있습니다.
댓글: 유능한 뱃사공은 잔잔한 바다보다 약간의 파도가 칠 때 자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더 빨리 간답니다.
댓글: 죄와 은혜의 지배, 보이스피싱으로 이해가 쏙 됩니다.
확실히 민감하십니다.
댓글: 타 교인은 공과 책을 받을 수 없나요?
네, 타 교인은 인터넷으로 주문하시면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네
조금 더 공부하겠습니다. 그다음으로 넘어가 보면 이렇게 됩니다.
왼쪽에는 마음이 시커먼 사람이 있습니다.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반대쪽에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왼쪽은 불신자고 오른쪽은 신자입니다. 불신자인 상태에서 오른쪽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불신자들도 선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안 만드셨다면, 세상은 짐승 사는 세계와 거의 똑같아졌을 것입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신자들에게는 마음에 주신 양심의 율법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그게 무슨 뜻입니까? 땅을 파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국회에 나와서, 심지어는 법정에서까지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사람이 할 짓인지 아닌지는 누가 정해주는 것입니까? 자신이 정한 것입니까? 자신이 정하면 자신이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할 짓이냐? 고 물었을 때의 기준은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건을 거래할 때 사람을 자꾸 속입니다. 속이지 않더라도, 잘못된 쪽으로 자기의 생각을 관찰하려고 합니다. '이보시오. 경우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때의 경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법학에서는 조리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으로 그러하여야 한다고 합의를 이룬 도덕적인 원칙입니다. 경우가 그런 건 없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부여합니까? 세케이 체스터턴 이라는 영국의 사상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사람 둘이 만나서 싸우는 것은 나쁜 거야, 그치? 우리 싸우지 말자. 이러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서 이것은 나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싸우지 말자고 하게 되는데, 싸워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살아도 사회가 개판으로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고도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양심의 통제도 못 받을 때 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여기에 있고, 이 사람은 신자입니다. 이 사람만 신자인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모두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성령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만큼 보면 이것이 있고, 이만큼 보면 이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은혜가 공존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절반 정도니까, 그렇게 좋은 상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보이는 곳에서는 선행도 행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죄도 짓고, 마음 안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할까, 내 마음대로 살아볼까 하며 항상 두 가지의 마음이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냐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기도하게 하심으로, 성례에 참여하게 하시는데, 이것도 사실은 말씀의 일부입니다. 성례가 보이는 말씀이니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당연히 예배를 드릴 때도, 그 속에서 말씀과 기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들어오면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감화를 일으켜서 이것을 먹어들어갑니다. 이 정도의 상태만 돼도, 아까보다는 훨씬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순종하기 쉬운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목표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 특별히 명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 은혜 많이 받으시고 신앙생활 잘하시길 바랍니다.
정부에서 허락을 해줘서, 본당을 기준으로 50명이 들어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1층도 그렇고 공간이 났습니다. 이번 주에는 10시, 12시, 2시 예배를 드립니다. 미리 신청하시고 교회에 일찍 오셔서 대면 예배를 드리시면, 더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이번 한 주,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