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1장 신자 안에 있는 은혜와 죄 (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녹취자: 백지영
안녕하십니까? 성도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주에는 우리들이 금요일 날 공부를 했는데 오늘 직장 다니시고 또 일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저녁시간에 만났습니다. 좀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참에 한번 우리들이 이 말씀을 잘 배워서 우리들이 영적인 생활에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삶이다.”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불신자는 죄가 절대적인 지배를 하고 신자는 상대적인 지배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로부터 용서받는 그리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즉각적인 구원이 있고, 그 다음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그 죄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죽여 가는 죄죽임이 있음으로서 우리가 성화되어 가고 이렇게 하면서 결국 우리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또 이루어져가는 측면도 있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이 신자가 됐는데도 계속해서 그렇게 죄가 살아있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는데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커다란 괴물이 있고 그 괴물이 만약에 죄라면, 사탄이라면,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시기 전까지 그것들은 펄펄하게 살아 다니던 것이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을 받아서 등뼈가 다 부러지고 그리고 겨우겨우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잘 믿으면 전혀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이 죄는 우리 안에서 번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커다란 좌절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은혜의 통치아래 있다 그랬는데 그 은혜가 무엇이냐 할 때 개념을 좀 명료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크게 은혜를 이야기할 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루이스 벌코프의 말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완전한 성품이기 때문에 신전 완전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속성 혹은 성품으로서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죄와 허물의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이며 무한한 호의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이것을 말할 때 바로 첫 번째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객관적인 준비,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마련된 구원의 길 그 자체를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 2번을 합성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받을 길을 만드셨는데 그 구원받을 길조차 우리들이 은혜라고 부른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할 때는 1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1번을 통해서 믿음과 함께 구원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이것이 성화와 관련지어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용례입니다. 그래서 잘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성령에 의해 발현되는 하나님의 은혜, 그러니까 구속사역, 하나님의 은혜, 값없이 주어지는 용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게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값없이 주어지는 용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용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깨끗이 정리를 하자면, 너무 복잡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 때문에 우리에게, 가치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넘치는 호의. 이게 은혜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 이것을 우리가 은혜라고 부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은혜로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두 번째 은혜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첫 번째 은혜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음으로서 성화되어 간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그림을 보시면 이렇게 됩니다. 첫 번째 원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 안에 심으십니다. 이 말이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간단하게 말하면 죽었던 사람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 나오는 것처럼 잃었던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생명을 주셨는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진 것이지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말하자면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고도 이야기하고 또 영적 생명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영원한 생명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태어나는 것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또 한 번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번 더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어로 중생(重生)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탄생은 육체와 관한 것이고 두 번째 탄생은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왜 생명이라고 부를까,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 한번 생명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두 개가 아주 훌륭한 유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몸이 아프고 커다란 병에 걸리는 것은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의 감손입니다. 생명이 많이 사라지니까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력이 충만할 때만큼 움직이고 활동하고 심지어는 생각하고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너무너무 생명의 기운이 떨어졌을 때는 그냥 가만히 그림처럼 누워서 식물인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렇게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많이 받은 사람도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삶의 현실을 극복해 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한 것, 은혜 충만한 것.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있으니까 아주 못된 인간을 만나서 참 힘든 삶을 살게 되더라도 만약에 그 생명이 없었으면 찌그러지고 망가진 인간이 됐을 텐데 생명이 충만하게 주어지니까 결국은 그 생명이 사랑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생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 때문에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영혼답게 살아가게 한다는 면에서 보면 생명이고, 그런 것들이 그렇게 충만할 때에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관계적인 측면이 그게 사랑인 것입니다. 둘은 항상 짝입니다. 그래서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굉장히 많이 물려받았습니다. 하기 좋은 말로 어거스틴의 아주 훌륭한 학생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생명을 훨씬 강조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는 자기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관계적인 측면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은혜 많이 받으면 남편이 굉장히 힘들게 하는데도 그것을 다 받아주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아내가 정말 힘들게 하고 언사도 그렇게 곱지 않은데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래, 없는 집에 시집와서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내가 더 기도하고 사랑해 줘야지.”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별로 동의를 안 하시는데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앞에 보면 사람이 작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장합니다. 영적 사람이지요. 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사랑한다는 듯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람도 더 많이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점점 점점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나오는 것이냐 하면 죄를 죽이는 경건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실천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죽이는 게 무엇이냐? 이것은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죄의 절대적인 지배와 상대적인 지배,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발에 커다란 쇳덩어리가 묶여 있습니다. 옛날에 죄수들에게 도망을 못가도록 하는 하나의 속박의 수단이었습니다. 가슴은 시커멓습니다.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만큼 당연히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죄를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땀을 뻘뻘 흘립니다. 살아가는 게 더럽게 고달프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머리에 보면 어지럽습니다. 지성이 아주 혼란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걸어갑니다. 신분은 죄의 종입니다. 그게 예수를 믿고 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음과 영혼의 상태는 죄의 법에 매여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를 믿으면서도 지독하게 죄를 짓는 사람과 전혀 안 믿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주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도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을 드릴 테니까 이 사실을 항상 가슴에 새기십시오.
우선 첫째로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실 때 은혜로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데도 그 율법에 대한 인식이 아주 뚜렷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하고와는 상관이 없이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철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 믿으면서도 항상 은혜 충만하고 믿음으로 살 때에는 당연히 그렇게 살지 않는데, 은혜에서 멀어지고 정욕이 번성하게 되면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네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냐?” 이런 호소는 그렇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게 교회 안에서 혹은 성도들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말하자면 죄를 짓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해결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그렇게 예수를 안 믿는데도 도덕적 의식이 아주 투철해서 잘 사는 사람은 기독교 안에서 은혜가 충만해서 죄를 짓지 않고 성결하게 사는 사람만큼이나 드뭅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사태들을 보면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대부분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고 혹은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법과 탈법 그리고 반칙 이런 것들이 유행을 하는 것을 보면 결국은 외적인 사람들의 지위나 이런 것들이 사람을 그렇게 높은 도덕성을 저절로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알아들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를 좀 못하셨으면 책을 잘 읽어보시고, 앞으로 이 설명은 반복되니까 여러분들이 좀 더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자랑할 수 없는 게 무엇이냐 하면, 결국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안 믿어도 아주 훌륭하게 도덕적인 삶을 산다, 성령의 작용입니다. 성령의 일반적 작용, 하나님의 율법이 가슴에 잘 새겨지게 하셔서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는 특별한 은혜의 작용,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주셔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다음에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이 사람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살아가면 평생을 살아가면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으로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자신의 자유가 없고 주인에게 속박되어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신분은 종이고, 마음과 영혼은 죄의 법에 묶여 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다른 삶을 살 수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에게는 진노의 대상이고 결국은 죄에 대한 심판이 주어지는데 그게 죽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죽습니다. 그게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죄의 종이고 불신자들만 죽습니까? 신자도 죽는데.” 신자도 죽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죽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성화를 완성시키셔서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장례식에서 물론 혈육의 정, 이제껏 까지 간직했던 인간의 정에 의해서 눈물 흘릴 수 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이해하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보면, 계속 죄의 절대적인 지배와 상대적인 지배에서 말씀을 드리는데, 죄와 사망의 법에서 쇠사슬을 차고 그렇게 힘들게 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혼자서 넉넉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절대 예수 안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 나와도 다른 이유로 교회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믿기 전에 정말 그랬습니다. 단 하루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슬픔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느끼는데, 그냥 이 세상의 쾌락에 취해서 혹은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갈 뿐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절대적인 지배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말하자면 죄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면,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내가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 주시고 회심하게 해 주셔서 신자가 됩니다. 그러면 신자가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게 얼마나 격렬한 눈물과 폭풍과 같은 흐느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냐, 아니면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거듭났느냐, 설교를 듣다가 감동을 받아서 거듭났느냐, 그 양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결과는 똑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하고 회심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은혜의 지배 속으로 즉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제 이렇게 매달고 다니던 그 죄와 사망의 법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차서 그 사랑이 이제 법이 되는 것입니다.
법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법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사람 바깥에서 공표된 법입니다. 여러 가지 법들을 만들면 먼저 공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법을 공표하면서 벌과 상이 없는 법은 없습니다. 대개 벌을 많이 줍니다. 이 법을 만든다, 이렇게 이렇게 해라, 그런데 ‘안할 때는’ 항상 단서가 따릅니다. 그게 양형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이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고 그러면 저 뒤에 다른 추가, 빨간 색깔의 추가 매달리든지 발에 뭐가 매달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법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따르게 하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코로나 사태를 맞이해서 결혼은 했는데 잘 못삽니다. 그래서 굶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너무 너무 힘들게 살아가고, 다가오는 집세를 내고 방값을 올려주어야 되는데 대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코로나는 아니어도 하여튼 병에 걸려서 병원 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오고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생각합니다. “정말 불쌍하다. 우리 아들은 어쩌다가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했는데 왜 저렇게 힘들게 살까? 정말 어떻게 하나?”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근심을 합니다. 그게 법입니까? 엄마가 돼서 자식걱정 안 하면 하루에 5백만 원씩 벌금을 매긴다는 법이 있어서 그렇게 근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뭐가 그러는 것입니까? 사랑이 근심을 시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니까, 가엾게 여기니까,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게 자비이고. 그 사랑의 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그리로 흘러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 보십시오. 사랑을 하면 모든 게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신나는 것보다 그가 신나는 것을 보면서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법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법이 무엇인지를 가장 훌륭하게 보여주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것도 사랑 때문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사랑 때문에,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해주시던 예화가 생각이 납니다. 그때 할머니 사셨을 때는 첩이 많던 사회였습니다. 1930년, 40년,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남자의 외도에 대해서 너그럽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얘야, 사랑은 속일 수가 없단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남편이 양말이 뚫어졌답니다. 그것을 전구다마 같은 데에 넣고 꿰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신던 양말을 꿰매는데 첩은 그 마지막 실을 가위로 자르고 본처는 이빨로 그 실을 자르더랍니다. 그러면서 “그게 결국은 사랑의 차이란다.” 그렇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랑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주고 싶어 하고 그 남을 위하는 그것이 하나의 사랑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의 개념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설명을 해 보면 그 다음에,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세력이 있습니다. 은혜는 불변적입니다. 은혜가 불변적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은 끊임없이 혜택을 주는 게 사랑입니다. “나 너무 사랑해. 너무 사랑해. 내가 너 너무 사랑하거든? 재산 절반만 내놔.” 아니면 “내가 너무 사랑하지? 그런데 너도 지금 굉장히 가난하지? 네 월세 쪼개서 우리 둘 다 사글세로 각자 집 하나씩 갖자.” 그렇게 이야기 안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항상 그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고백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항상 깜짝 놀라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분이 나를 그렇게 사랑했나?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이렇게 나를 끔찍이 생각하는 면이 있구나.” 그런 것들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특히 하나님의 자녀를 너그럽고 분에 넘치는 호의로 대해주시는 것은 불변적인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것이지요.
그런데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여기를 주목하십시오. 그래서 은혜의 상태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늘 우리에게 객관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분에 넘치게 살도록 주십니다. 예를 들자면 호세아 선지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우상숭배를 하지 않느냐? 그런데 우상에게 갖다가 은을 바치고 우상에게 갖다가 재물을 바치는데 그거 내가 준거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은혜로 대해서 굶어 죽을까봐 농사가 잘 되게 하고 그리고 어려움 없이 살라고 재산을 증식시켜 주셔서 그래서 은을 많이 가지고, 우리로 말하자면 은행에 잔고가 풍부하게 그렇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그것을 가지고 너희가 우상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은혜는 계속 주어지고 있지만 은혜의 상태가 멸절 하다시피 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그렇게 끔찍하게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보십시오. 오늘 아침에 밥을 해 먹습니다. “얘들아, 정신 바짝 차려라. 오늘 바알 신에게 경배하러 가는 날이다.” 그리고 밥을 먹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곡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을 가지고 그리고 우상에게 줄 재물을 잔뜩 싣고 갑니다. 그럴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돌아오리라는 기대 때문에, 설령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더라도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보면 은혜의 상태는 가변적입니다.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사람이 시커먼 부분이 있고 빨간 부분이 있습니다. 시커먼 부분은 결국은 자기사랑이고 죄입니다. 은혜가 결핍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에는 성령의 감화가 있는 것입니다. 두 개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대부분의 상태가 저런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빨간 부분이 거의 사라져서 조금 남았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까만 부분이 매우 적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중간 상태에 있고, 이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바로 이렇게 죄와 은혜가 우리 안에 함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예전에는 그럴 수 없었는데 말씀에 한번만 은혜를 많이 받고 회개하고 나도 다시 그 사랑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끄럽구나.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느냐? 죄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의 목표는 이것을 계속해서 완벽하게 까맣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원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를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도 가끔 자살하지 않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자살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에 집니다. 물론 거기에는 정신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죄가 충만해서 죽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죄가 이렇게 가만있지 않고 죄의 세력을 규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합해서 이것들을 집단적으로 모이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력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사람들이 이렇게 세력을 늘려가도록 군자금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군인을 양성하려면 누가 군자금을 계속 줘서 그 돈을 가지고 밥도 먹이고 무기도 사고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군자금이 무엇이냐 하면 정욕입니다.
그러면 그 정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쓰이는데, 첫째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의 총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정욕”이라고 이야기할 때,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슬러서라도 나를 행복하게 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욕망, 그 큰 힘이 어디론가 흘러가면서 작용을 합니다. 그게 정욕입니다. 그 정욕은 불신자는 절대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신자는 상대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신자가 작다 그 뜻이 아니라 언제든지 기도하면 그 정욕이 물러가게끔, 말씀을 깨닫고 다시 성령의 은혜를 구하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찬송 부르면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그런 정욕이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 번째로 쓰이게 되면 성적인 욕망입니다. 올바른 성적인 욕망이 아니라 부당한 성적인 욕망입니다. 그래서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성적인 욕구를 느끼고 그것은 그렇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도 너무 과하게 되면 어거스틴은 매우 불행하고 나쁜 것이고 그것도 신앙에 해가 된다고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열매로서 자연적으로 우리 속에서 성적인 욕망이 생겨나지를 않으면 인간의 번식이라는 게 불가능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런 성적인 것을 아내와의 정신적인 연합, 성례전적인 결합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자녀의 생산을 위해서 이렇게 한정적인 범위 내에서 성적인 욕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상담 편지 들어오는 것 보면 특히 포르노그래피 중독에 빠진 사람들, 연령층도 다양합니다. 십대부터 시작해서 사십대, 오십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심지어 여성들도 그런 상담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굉장히 많이 망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치료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욕을 먹이 삼아서 규합을 해서 그래서 그것이 큰 세력을 이런 식으로 이루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이렇게 보면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불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건강하다고 여러분 다 그래도 여러분 몸에 세균이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리고 암세포도 1도 없는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십만 개정도까지는 괜찮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군데 뭉쳐있어서 자리를 잡을 때 그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들어온 많은 균들이 스스로 죽고 살고 이러는 것입니다. 이십대 때인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엑스레이를 찍더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보니까 폐결핵에 결렸었는데 병원에 다닌 적이 있느냐고 그런 것 전혀 없고 걸린 줄도 몰랐다고 그랬더니 그냥 저절로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불법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합니다. 여기서 복음적인 죄죽임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죄죽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는 죄죽임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도 있느냐? 복음적이지 않은 죄죽임의 실천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했던, 예를 들어서 어떤 죄를 지었으면 어떤 선행을 하라, 고해성사를 해라,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오르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구원의 확신을 달라고 그런 식으로 사는 그것이 비복음적인 죄죽임의 실천입니다. 복음적인 죄죽임의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에게 이러한 충만한 은혜를 주신 것을 믿고 그 은혜를 따라서 내가 믿음으로 죄와 싸우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서 내가 그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죽인다’라고 하는 이 말은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영어로 말하면 'Put to death'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에다 딱 가게 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mortify인데, 죄를 죽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죄도 크게 두 가지 용례로 쓰이는데. “야, 너 그렇게 커닝하는 것은 죄지.”라고 할 때는 이 죄가 객관적인 것입니다. 바깥에 있는 기준으로서의 죄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죄가 내 마음에 가득차서 끊임없이 악한 생각이 되고 정욕적인 생각이 나고 이럽니다.” 할 때는 이게 두 번째 죄입니다. 성화에서 문제가 되는 게 이 두 번째 죄가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죽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있지만 그러나 내가 은혜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데 있어서는 그게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암세포가 몇 개 있다고 해서 우리 생활에 방해받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또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다주는 아주 놀라운 작용을 하는데 도구로 사용되게 됩니다.
좀 더 보겠습니다. 그래서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의 세력입니다. 절대적인 지배와 상대적인 지배를 한꺼번에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왼쪽에 있는 그림을 보면 불신자입니다.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뜻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도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아도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그래도 선하게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복을 주시고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선이라도 행하면서 살아서 짐승 사는 세계같이 되지 말도록 보호하시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불신자는 이렇게 죄가 충만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절대적인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활할 때에는 심판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부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상대적 지배에 있는 신자는 이런 것입니다. 은혜가 쇠퇴하고 정욕이 번성하게 되면 보시다시피 죄가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는데 아주 조그맣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불신자와 아주 흡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교회 나오는 것하고 가끔 기도하는 것하고 그런 일반적인 의무는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사랑은 바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을 너무 사랑하고 열렬하게 기도합니다. 당연히 사랑하면 할 말이 많습니다. 연애할 때 보니까 둘이 앉아서 잠깐 이야기했는데 여덟 시간씩 흐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할 말이 많은 것이지요. 이 사람이 죽을 경우에는 결국은 성화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이렇게 죽습니다. 이 앞에 보면 마귀가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이런 마귀의 속삭임에 이끌리면서 은혜가 쇠퇴하고 정욕만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죽습니다. 죽을 때 하나님께서 못살았던 성도나 잘살았던 성도나 모두 죽는 것과 동시에 그 성화를 완성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절대적인 지배와 상대적인 지배에 대해서 존 오웬이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 안에 죄가 자리를 잡았는데 죄가 산출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저 사람의 물건을 갖고 싶다 그런데 훔치지는 않습니다. 내가 저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정욕이 드는데 실제로 범죄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장애물과 예방책이 인간의 마음에 착상된 죄가 자동적으로 범죄의 열매를 맺는 것을 막아줍니다. 이것도 하나의 원칙인데, 예를 들어서 제가 들었던 예 중의 하나 생각이 나는데 이런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해서 유감은 없었는데 좀 잘난 척은 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지독하게 편애를 하고 그래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요셉이 팔려갈 지경이 됩니다. 그런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서 무엇 하겠느냐고 하면서 요셉을 그렇게 팔지 말자고 유다가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아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도 뭐냐 하면 마음속에는 그를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렇게 장애물과 방어책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돈이 갖고 싶어서 강탈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것을 가기만 하면 가져올 수 있는 돈이 가방에 오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묻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도둑질하고자 하는 열망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거기를 가겠습니까? 거기를 혼자서 등반할 수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걸 자기 힘으로 가겠느냐 말입니다. 셰르파의 도움을 받아서 가야 되는데 그게 몇 억입니다. 가겠느냐고요, 못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방해가 되어 가지고 못하는 것입니다. 양심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죄가 착상이 됐는데 그것이 행동으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충분히 산출할 수 있는 힘, 그 다음에 그것을 범죄하고야 말리라는 의지의 존속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가 존속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의 삶을 살려면 순종하기에 필요한 영혼의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실천할 때까지 그 의지가 계속해서 존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은혜 특별은혜 할 것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저런 힘을 빼앗아가고 의지가 존속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죄를 안 지으면서 사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은혜 아래 있는 신자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한번 로마서 5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에 죄를 행하라고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거룩하게 살고 경건하게 살고, 또 하나 그 율법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라 이렇게 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죄의 지배를 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율법은 결국은 끊임없이 그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는 게 아니라 율법의 효과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냥 맘대로 하십시오.’ 할 때는 하다가, ‘하지 마라’ 그러면 왠지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간신히 몰래 몰래 하고 다니다가도 ‘하지마라’ 그러면 하고 싶어지고, 늘 안하고 다니던 것인데 ‘하지마라’ 그러면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고 다니던 것인데 ‘하지마라’ 그러면 더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율법이 가져다주는 하나의 효과입니다.
여름에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하복을 입었습니다. 셔츠인데 반팔 와이셔츠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학교 학생들은 다 내놓는데 굳이 우리학교만 전통이라고 하면서 집어넣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 버클을 탁 차고 이렇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게 하여튼 애들이 기를 쓰고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놓고 다니라는 애들은 또 기를 쓰고 집어넣고 다니는 것입니다. 두발로 마찬가지입니다. 자유화하라고 하니까 그렇게 요상하게 머리 안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결국 율법은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옆에 그림을 보시면 미워하고 있는데 그 죄와 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힘듭니다. 그러면 죄로 인해서 겸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 힘으로 못 이기는구나.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게 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비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이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면, 안토니 벌티스(Anthony Burgess)라는 아주 저명한 청교도입니다. 17세기 청교도인데, 이 사람이 신자(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 죄를 죽이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은혜아래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냐는 것을 죄와 관련해서 말합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사실 청교도를 따라올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연구를 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영국의 아래 쪽 청교도들이 많이 했습니다. 그 이유가, 법적으로 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개혁을 스코틀랜드처럼 그렇게 정치적으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에 대해서 깊은 탐구를 하면서 성결하게 살아가는 법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 의무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우리 마지막이니까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직 스스로 깨닫지 못한 죄가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깊이 겸비하여 질 것”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확 받고 나면 깜짝 놀라는 게 있습니다. “아, 내가 이런 죄가 있었구나. 내가 이렇게 죄인이었구나. 심지어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정도구나.” 이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읽겠습니다, “마치 금속을 녹여서 정련하는 정련 기술자처럼 자신의 마음 안에 숨은 죄를 진지하게 부지런히 탐사할 것” 광속 속에 쇠 성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녹입니다. 녹이면 당연히 거기서 금속이 녹으니까 금속이 흘러내려올 것입니다. 재료 분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기 안에 숨어있는 죄를 부지런히 탐사할 것. 세 번째, “자신의 지나온 인생길을 뒤돌아보아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는지 살필 것”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에. 그런데 하나님이 용서를 경험하게 해 주실 때, 한편으로는 우리가 감격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4번입니다. “이중의 회개, 곧 드러난 죄에 대한 회개와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한 회개를 함께 할 것” 그래서 죄라고 깨달은 것만 회개하지 말고, 드러난 것은 일부이고 드러나지 않은 죄가 내 안에 많이 있을 것이니, “나는 하나님 사랑하고 싶은데 이러한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 예수여 날 도와주시옵소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회개하겠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5번, “아직 파악되지 않은 죄를 위해서도 용서를 빌 것” 그래서 “내가 아직 지식이 부족하고 영적인 생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성경도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죄가 내 안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내가 모르는 죄에 대해서도 간절한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덩어리입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그래서 그렇게 죄를 죽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 죄 짓기가 너무 싫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예를 들자면, 맛있게 밥을 먹는데 거기에다가 꿈틀꿈틀 거리는 아주 그것도 크기가 꽤 큰 시뻘건 지렁이를 하얀 접시에 잔뜩 담아서 소금을 뿌려주면서, 소금을 뿌리니까 이 지렁이는 미친 듯이 더 펄펄 뛰지요, “같이 좀 드시지요?”할 때 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안 먹습니다. 그게 뭔지를 몰랐을 경우에는 시도를 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새로운 형태의 낙지인가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렁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것을 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밥 전체를 안 먹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죄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때 우리는 그 대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기쁨과 그리고 넘치는 행복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연들 한 번씩 보겠습니다. 외부 분이네요. 인천에서 십 년 전부터 목사님 책, 설교로 힘들 때마다 은혜를 받고 있는 성도입니다. 힘 안들 때도 계속 은혜 받으셔야 합니다. 열린교회 근처로 이사하게 해 달라고 기도가 나오네요. 예, 오시면 잘 해 드릴게요. 또, 목사님께 은혜 충만하다고 하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처벌을 받겠지만 그 은혜가 (? 1.01) 아, 그러니까 은혜가 충만하다고 해서 선과 악이 다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악을 행해도 그렇게 악을 행하는 것은 미워하는데 그 악을 행해서 비참해진 사람은 가엾게 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녀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못된 짓하고 왔을 경우에는 말로는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래도 군대 가서 오면 또 그것 붙들고 엄마는 제 방에 가서 한참 울지 않습니까? 그게 결국은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상대방이 더 죄를 짓게 버리도록 놔두는 상황이 그려질 때는 그럼에도 주님의 성품으로 자녀가 되었지만 육신적인 한계인 인간이 느끼는 나약한 감정을 피력할 여지없이 상대방을 계속 품어야 합니까? 제일 좋은 것은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품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이 그게 안 되는 게 문제이지요. 그런데 일단 하나님이 주신 것만큼은 사람을 품으면서 살아가야 하겠지요. 또, 은혜로운 추석명절 보내세요. 예,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에서 오셨네요. 은혜로운 설교 감사합니다. 예전에 구역공과 했던 내용인데도 새롭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코로나 덕분에 은혜의 쇠퇴와 죄의 정욕이 커지지 않도록 말씀을 사랑하고 열렬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열망이 커집니다. 예, 맞습니다. 저는 요새 코로나 상황인데 아주 정말 은혜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다음에 쓸 공과 책도 제가 지금 준비하느라고 힘을 많이 쏟고 있고 그렇습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 금요일 강의는 휴강입니다. 한글날 가족들하고 좀 편안하게 보내시고 또 더 듣고 싶으신 분들은 뒤로 돌아가서 한번 공부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복습하는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고, 16일 날 금요일 세 번째 강의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은혜롭게 승리하는 기쁜 생활되고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