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2장 은혜의 상태 아래서도 사라지지 않는 죄와 파멸되는 죄 (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14)
녹취자 : 오희열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반팔 티셔츠를 벗어버리고 따뜻한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코로나도 심각하지만 독감에 걸리지 않도록 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구역공부를 인터넷으로 하는 것이 상당히 익숙해지셨을 것입니다. 저도 오히려 편안합니다. 사람을 앞에 놓고 하라고 하면 부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공과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공과이니 즐겁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강의를 쭉 하니까 문제를 중심으로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오늘부터는 친절하게 공과를 하고 문제까지 같이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죄와 은혜의 지배 1장을 했고 2장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2장에서는 은혜의 상태 아래서도 사라지지 않는 죄와 파멸되는 죄, 둘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 내용을 골자만 이야기하자면, 구원받기 전에는 인간이 죄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있고 구원받은 후에는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순종과 죄 죽임의 생활, 말씀과 기도에 은혜 받는 생활을 계속 하지 않으면 잔존하는 죄들이 번성하게 되고 신자도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불신자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불신자는 절대적 지배라고 하고 신자는 상대적 지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하는데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은혜를 받고 죄 죽이는 삶을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은혜의 상태에 있으면 그런 상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고 다음 시간에는 파멸되는 죄에 대해서 공부할 것입니다.
이제 죄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불신자일 때는 절대적이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신자가 되었을 때는 상대적인 지배 아래 있습니다. 신자는 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불신자는 이것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죽게 되고 은혜의 지배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은혜의 지배에 있어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리 엄청난 은혜의 지배 속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역시 죄는 잔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작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인간의 몸에 암세포가 있는데 전혀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웬만한 사람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10만 개가 넘지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도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폐를 찍어보면서 의사 선생님이, “결핵을 앓으셨습니까?”,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혼자서 결핵을 앓다가 나으셨습니다.” 하시면서 “폐결핵이 걸릴 염려는 없겠습니다.” 합니다. 사진을 보니까 폐가 이만큼이 상했습니다. 폐결핵이 오다가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면역력이 싸워 이겨서 항체같 은 것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가 있어도 괜찮고 죄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사는 데에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죄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죄를 아는 깊이가 신앙의 깊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죄가 있지만 은혜에 붙들려 사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진실한 참회가 늘 있고 경건한 삶을 삽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쪽에 있는 것은 옳지 않고 이쪽에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사실 이쪽에 있는 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보고 대화를 해 보면 느껴집니다. 죄가 거의 온전히 죽은 상태에서 정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기도의 눈물이 있고 말씀의 은혜가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의 특징은 거룩한 정서가 아주 풍부합니다. 무릎만 꿇으면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고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가슴에 와서 꽂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보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납니다. 신자의 가장 좋은 삶은 이런 상태의 삶을 죽을 때까지 살다가 이 상태에서 죽는 것입니다. 아멘?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여기 어디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 어디엔가 걸쳐있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상태에서 이렇게 되었으니까 여기 어디엔가 걸쳐서 먹고 마시고 놀면서 살면 사랑은 조금 남아있지만 죄의 지배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돌아올 때도 다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십시오. 20년 전에 예수를 믿어서 15년 전, 10년 전, 5년 전, 지금과 내가 죄의 지배 아래 있었다가 은혜의 지배로 들어간 게 어떻게 되었는지 그래프를 그려보십시오. 하나님께 은혜를 받습니다. 신자는 당연히 그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것이 점점 커집니다. 까만 것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아주 커집니다. 온전히 이렇게 커집니다. 그런데 만약 은혜 생활에서 멀어지고 죄를 죽이지 않고 말씀과 기도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점점 반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이렇게 되는데 이렇게 은혜를 많이 받아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번에 코로나가 나오고 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프리카 사람들과 파키스탄 등의 서남아시아 사람들이 걸리기는 많이 걸리는데 심각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냥 그 바이러스를 지니고 다니면서 살다가 낫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비교적 청결한 환경에서 삽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거의 멸균 상태에서 살기를 좋아하는 민족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감염병과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좋은 점도 있지만 어려서부터 거의 멸균 상태에서 사니까 아이들이 면역력을 기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잘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 몸에 바이러스나 병균이 없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세상에 살아있는 한, 그리고 타락한 인간으로 있는 한은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죄는 신자 안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을 “참 좋다, 뭐 어때?” 하며 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데에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조차 찾아내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져야겠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은혜생활을 하면 사라질 수 있는 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신자의 삶을 속박하기 때문입니다.
자, 신자 안에 두 종류의 죄가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들과 인간의 이해 안에 있어서 파멸될 수 있는 죄입니다.
여기 비둘기 모양이 나오는데 성령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적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즉,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내가 점점 더 알아가고, 성령 안에서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그럴수록 죄를 인식하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잘 때 완전히 암막처럼 커튼을 치고 잡니다. 그것이 몸에 굉장히 좋은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어둠 속에서 면역 물질이 형성됩니다. 특히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그렇습니다. 11시에 잠드는 적은 별로 없지만 11시에 자면 새벽 3시에 깹니다. 할 수 없이 12시까지 기다렸다가 자야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작은 등불 같은 것을 켜놓고 자거나 바깥에서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는 상태에서 자면 피곤이 덜 풀립니다. 완전히 암막커튼을 하고 주무시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그런 상태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납니다. 역시 밖은 환하게 밝은데 커튼 때문에 방이 어둡습니다. 그 어두운 방에서 이불을 갭니다. 창문을 살짝 엽니다. 그러면 그 사이로 햇빛이 강렬하게 들어오면서 얼마나 많은 먼지가 날아다니는지 알게 됩니다. “억!” 하며 입을 막게 됩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말씀의 빛이 많이 비치고 영적으로 민감해지게 되면 죄에 대해서 잘 깨닫게 됩니다. 청교도들의 설교가 통계에 의하면 50%이상이 죄에 대한 설교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설교했던 가장 큰 이유는 죄 자체를 미워했다기보다는 거룩함을 사랑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자가 되는 강의를 듣는다고 하면, 부자는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먼저 말해주지 않을 것이고 왜 가난하게 사는지에 대해서 먼저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부자로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식을 압니까, 부동산을 압니까, 돈을 굴릴 줄 압니까, 아니 굴릴 돈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볼 때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다시 ppt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하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죄를 인식하는 능력이 뛰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뛰어나게 돼도 깨닫지 못하는 허물이 있습니다. 시편 19편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을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숨은 허물은 감추어진 허물입니다. 발견되지 않은 것입니다. 숨으면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성의 일반적인 탐색으로서는 발견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죄들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도 이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깊이 안에 내가 여전히 이렇게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도 죄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겸손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항상 이것은 너무나 과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발견하지 못하는 죄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겸비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을 보겠습니다. 신자 안에 두 종류의 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들입니다. 그래프가 나옵니다. 신앙의 깊이의 정도가 더해집니다. 이쪽 축에서 신앙의 깊이는 얕은 것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신앙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이것은 죄의 속임수입니다. 속임수의 교묘함이 정도가 작은 것이고 여기는 점점 많은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의 속임수도 아주 고도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죄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 정도의 신앙의 깊이에 있는 사람에게 이 정도 얕은 수준의 잔꾀를 가지고 도전해봐야 이 사람은 이것을 안 받아들입니다. 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철야기도에 새벽기도까지 하고 오는 사람에게 “야, 저 앞에 술취해서 가는 저 친구, 저기 지갑에 돈이 잔뜩 들었다. 저거 퍽치기 해서 빼앗아서 반지도 사고 소고기도 사먹어라!” 하고 유혹한다면 밤새도록 철야기도하고 새벽기도까지 끝내고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하면서 가는 사람에게 그런 유혹이 통하겠습니까? 안 통합니다. 그래서 그 속임수가 점점 고도화 되어갑니다. 이렇게 고도화되어 갈수록 그 특징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발견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정도 수준에서 발견하는 것은 상식적인 성경의 생각을 가지고도 발견이 되는데 이런 정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당한 지식,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대한 정직한 성찰, 이런 것들이 함께 있어야만 죄를 발견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런 때는 죽처럼 무른 음식을 먹어도 됩니다. 말씀으로 따지자면 말입니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의 지식이 이 고도화되어가는, 크기로 말하자면 이렇게 컸다가 여기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작아지는 것까지 가는데, 그것을 다 파악해낼 수 있는 힘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이 2004년도쯤에 나왔는데, 출판되고 나서 이 책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금방 반응이 왔는데,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두 가지였는데, “150년 후에도 읽힐 책”, 그리고 또 하나는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을 알고 있다.”였습니다. 공부하고 나면 진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린교회 성도들을 뒤흔들어놓았던 열 가지 설교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가능하면 여러분은 이것을 공부하는 동안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죄와 은혜의 지배” 시리즈를 14개를 다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따라오면 굉장한 유익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얻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attain 인데 “내가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아! 이제 나는 이미 의를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요, “나는 온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큼 순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기억하면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들어온 내용을 조금 보겠습니다. “오늘도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사이에 시야를 넓혀주는 시간인 것 같아서 너무너무 좋습니다.” 이런 공부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없습니다. 잘 안합니다. 마음을 너무너무 많이 기울이고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을 다루는 의사들도 대학에서 4년, 본과에서 2년, 인턴, 레지던트, 마지막에 전문의까지 되려면 10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들어갈 때도 전국에서 1% 안에 드는 머리 좋은 사람들만 가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가 복잡하겠습니까, 영혼이 복잡하겠습니까? 육체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정신이 시켜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공부를 어렵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 풀이까지 해 준다니, 목사님, 너무 기쁩니다.” 구역장이신가 봅니다. “한줄 요약, 신자는 내주하는 죄가 없어지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확신하고 죄죽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영적 생활의 생명력과 활력에 대한 약속이 죄를 죽이는 데 달려있다.” 네, 정확하게 보신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시리즈는 14개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을 흘려듣고 두 번째는 필기하며 듣고 있는데 마음 속에 늘 죄와 싸워야 함을 느낍니다. 죄를 계속 죽이는 삶을 살면 영적으로 살아나고 정욕을 따라 살면 계속해서 영혼이 죽습니다.
다음을 보겠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들이 있습니다. 이런 죄들은 쉽게 찾아낼 수가 없는데 이런 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책임을 덜 물으십니다. 죄가 여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데 큰 방해가 되지 않고 말씀의 은혜를 받는데 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당연하다”, “내버려둬라”, “좀 더 자라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면 안 됩니다.
병원에서 당뇨 판정을 받을 때, “아직 약을 드실 때는 안 됐지만 계속 관찰을 해야 합니다. 1년에 한 번씩 오지 마시고 6개월에 한 번씩 오십시오, 심하면 석 다에 한 번씩 와서 검사를 받으십시오.” 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예의주시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책, “그리스도에 대한 앎”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영광과 탁월함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된다.” 무슨 뜻입니까? 먼지가 빛보다 먼저 있었지만 빛이 들어오고 나면 먼지가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온 죄는, 인간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게 되면 인간의 영혼의 모든 기능에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에 들어온 죄는 영혼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에 영향을 미쳐서 잘 못 보게 만들고, 정서에 영향을 끼쳐서 올바른 정서에 감동을 받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정서에 감동을 받도록 만듭니다. 찬송가를 부를 때는 눈물이 안 나오는데 트롯트를 들을 때는 눈물이 납니다. 성찬 시간에 포도주를 마실 때는 눈물이 안 나오는데 소주 한 잔을 할 때는 눈물이 쏟아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의 정서가 움직이도록 죄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의지에 영향을 줍니다. 정말 은혜 받을 때는 관심이 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그 일이 하고 싶어지고 자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일단 죄가 들어오면 가만히 있지 않고 이 안에서 계속 우리의 마음의 기능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여기 불신자가 있습니다. 죄가 있습니다. 본성적 양심이 그 죄를 인식합니다. 여기 보면 conscience가 있는데 라틴어에서 왔는데 con 은 함께, 그리고 스끼엔띠아, 지식입니다. 양심은 의식 속에 붙어서 함께 움직이는 그 무엇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의식에 함께 붙어서 그것을 죄라고 인식하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억력이 상실되면 양심도 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본성적 양심이라고 하는데, 자연적, 타고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넓게 보면 성령의 작용입니다. 이것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가 동물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고유한 기능이 있는데 시비의 판단과 보응의식입니다. 양심에 근거해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 “나 진짜 아무도 모르게 그 일을 하기는 했는데 진짜 양심에 내가 너무 잘못한 것 같아.” 이렇게 하는 것이 시비의 판단이고, “나 벌 받을 것 같아.”, “나 이러다가 벌 받지.” 이것이 보응입니다. 이런 고유한 기능이 이중의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송사입니다. 송사가 무엇입니까? 자꾸 소송을 거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이러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몰랐습니까? 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하면서 계속 고발하고 고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송사입니다. 양심이 우리에 대해서 그런 역할을 합니다. “너 이런 죄를 졌잖아? 아무도 안 봤지만 이런 나쁜 짓을 했지? 너 마음으로 이렇게 했지?”하며 계속 고발을 합니다. 어디에서? 양심의 법정에서 고발합니다.
놀라운 것은, 양심이 정죄의 기능도 합니다. 이것은 의식을 사용합니다. 죄를 지었다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송사를 받습니다. 기억이 사라졌으면 송사를 받지 않습니다. 자기가 한 일 자체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사용합니다. “네가 이런 죄를 지었지? 너 그거 벌 받는 거야. 이 정도의 벌을 받는 거야.” 하면서 자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내가 그때 그래서 이런 벌을 받는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심은 율법을 사용해서 정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에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은 송사를 받지만 기껏해 봐야 변명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그 변명에 그렇게 쉽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변명을 비집고 양심이 계속 송사를 합니다. 그 기능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양심이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진짜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입니다.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같은 사람들은 이런 기능이 거의 무너진 사람들입니다.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문제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런 죄들이 아니라 이렇게 양심을 거스르는 실행죄, 이것을 자범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원죄와 자범죄가 있습니다. 원죄는 물려받은 죄이고 자범죄는 자기가 지은 죄입니다. 혹은 고범죄라고도 하고 저는 이것을 실행한다고 해서 실행죄라고 합니다. 신자의 양심에 인식되는 범죄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신자를 죄에 대한 지배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 찰스라는 청교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양심은 죄의 존재와 그것의 악을 가리키지만”, 이것이 양심이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이것을 부인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힘을 준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신기하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솟아나는 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놀랍게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배운 공과입니다. 문제 두 개가 나옵니다.
죄는 신자 안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답은 이미 설명에서 다 나왔습니다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지배력을 획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은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의 감화. 하나님 사랑의 감화력이 실제적으로 지배력을 획득해서 죄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할 수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몇 년 전에 인턴십을 할 때 어떤 교역자가 이 죄와 은혜의 지배를 공부했습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전도사지만 가끔 마음에 정욕이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공부하고 나서 그런 순간, 예를 들자면 성적인 욕구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나 어떤 세상적인 욕심이 일어날 때 간절히 기도하면 그때 그것을 휙! 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죄에 대한 생각이나 욕구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닌데 쉽게 제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네 살 먹은 아이가 욕을 하면서 덤벼든다고 하면 그 아이를 제압하는 것은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120kg짜리 씨름 선수가 여러분에게 덤벼든다고 하면 여러분이 제압당하는 것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결국 은혜의 지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우리의 마음에서 실제적으로 지배력을 획득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2. 시편 19편 12절, 아까 읽은 성경구절입니다. “숨은 허물”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어서 인간의 지식으로 쉽게 찾을 수 없는 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지식으로는 찾을 수 없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죽는 날까지 발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그리고 인간의 평범한 지식으로는 찾기가 결코 쉽지 않은 그런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나는 죄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것이 아니라 생각나지 않는 죄, 내 안에 있다고는 확신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죄까지도 기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어려운 것을 아주 쉽게 가르치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다시 즐거운 성경공부로 만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