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4장_죄가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법 : 속임과 강압(2)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로 6;14)
녹취자: 이 솔
지난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나요. 충격적인 일이 있었죠. 코로나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우리 모두 놀랐습니다. 결국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라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주님을 더 의지할 수밖에 없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 많이 하면서 우리 현실을 이겨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쯤에는 조금 기세가 꺾일 거라고 전망들 하니까 그래도 열심히 기도하고 또 개인 위생도 철저히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이제 죄와 은혜의 지배 중에서 죄가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법 속임과 강압 그 중에서 이제 우리 후반부 어떻게 그런 죄의 그 활동에서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을 이기면서 우리가 살아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을 보시죠. 은혜 아래 살기 위한 투쟁. 은혜 아래 살기 위해서는 결국 신자가 그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이제 주의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죄와 싸운다 그런데 신자가 죄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사실 신자에 순종은 죄를 죽이는 수단일 뿐이에요. 그 수단을 사용하셔서 진짜로 죄를 죽이시는 주체는 성령님이세요. 그래서 죽은 영혼을 살리실 때는 하나님 혼자 살리시지만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성화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의 인격적인 순종을 사용하셔서 함께 일 하시는 거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신자들에게 그렇게 많이 죄와 싸우고 또 순종하라고 명령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매일 날마다 죽노라고 했는데 진짜 죽는다는 이야기겠습니까? 그렇게 자기 하고 싶은 게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죽는 것처럼 그것들을 포기하고 버린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런 점에서 이제 성경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죄와 더불어서 싸워야할 신자의 의무 그러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죄를 죽이신다는 그런 것을 보게 된 거죠.
최근에 이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이 여러 개 있었지만 우리의 눈길을 끈 사건이 조주빈이 40년 선고를 받은 사건이었어요. N번방 사건이죠. 그래서 검사가 무기 징역을 구형했는데 40년형이 떨어지고 30년을 전자발찌를 차도록 그렇게 1심 판결이 나왔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조두순이 12월 10 몇일 날 출소한다고 돼 있어서 이런 사람을 풀어 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다 끔찍한 범죄잖아요.
저는 아침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사람이 조주빈처럼 될 수 있고 조두순처럼 될 수 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고 이게 죄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뭐 그보다 더 끔찍한 범죄로 갈 수 있다 이렇게 보거든요. 결국은 신자에게도 이와 같은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이것들과 더불어서 어떻게 죄와 더불어서 싸우고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배우고 있는 거예요.
그럼 그림을 보시면 신자와 죄가 이렇게 나란히 있죠. 그래서 죄는 두 가지 무기를 쓰죠. 그래서 먼저 속임이에요. 가면을 쓰고 있잖아요. 이건 당연히 지성과 관련된 거예요. 속일 수 있어야지 숨을 수 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게 되면 마음에 죄가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인간의 총명이에요. 이걸 흐려요. 그래서 결국은 죄가 숨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는 거죠.
두 번째는 뭐냐면 이 죄가 이렇게 요건은 지성이라 했잖아요. 요건 의지에요. 이건 당연히 감정을 포함하는 거예요. 감정이 의지의 일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 이제 강압을 하게 되는 거죠. 강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지냐면 죄를 짓고 짓고 짓고 지으면서 내 죄를 지을 수 있는 성향 혹은 경향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경향 때문에 인간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빠지게 되는 거죠.
그렇잖아요. 대표적인 게 흡연이잖아요. 흡연해버릇하면 처음엔 그게 고통스럽지만 몸에 배게 되면 담배 없이 살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담배피던 시절에 애연가들에게 그런 말이 있어요. 담배를 끊었다고. 야 살인도 할 사람이네.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자면 성향이라는 것이 무서운 거다 이런 얘기죠.
다시 도표를 보시면 이렇게 속임을 통해서 죄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그 다음에 강압을 통해서 영혼의 의지를 부패시켜서 영혼의 강건함을 잃어버리게 해요. 그럼 결국은 반대로 말하면 속임을 이기는 길은 총명을 회복해야 되는 것이고 그 다음 총명과 지식에 의해서 속임을 극복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영혼의 강건함에 의해서 강압을 이길 수 있잖아요. 쉽게 얘기하면 죄가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는 유혹보다 그것과 싸워야 되겠다는 의지가 훨씬 크면 유혹은 받을 수 있지만 죄는 짓지 않게 되는 거죠. 모르실 것이 없죠. 이해되시죠?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결국 죄의 강압에 대항하는 길은 은혜를 받는 거예요. 은혜 그 자체가 죄도 성향이고 인간의 마음에 들어 올 때 성향이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은혜도 인간의 마음이 들어오면 성향이 되는 거예요. 정확히 어떤 성향이냐? 죄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성향이고 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에요.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성향이 된다 이 뜻이예요. 이해되시겠죠. 그죠.
그래서 결국 여기 두 개의 그림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죄는 욕망을 품게 하고 영혼을 파괴해요. 죄가 들어올 때까지는 굉장히 강건한 사람이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제 이렇게 시름시름 앓게 되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엎드려져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파괴가 되어서 이건 정상적인 손이 붙들고 있잖아. 이게 뭐 생명 없는 뼈 쪼가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지탱할 수 있겠어요. 못하잖아요. 그런데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게 죄가 들어 오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사람이 기력이 없어져 가는데 여기 은혜 안에 있으면 이렇게 될 수 사람이 점점 점점 점점 이렇게 능력 있게 되어 가는 거죠. 그래서 은혜 안에서 강해져간다. 은혜 안에서 강건 하라. 고린도전서 16장에도 나오잖아요. 은혜 안에서 강건 하라.
그 다음에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걸까요? 이거 잖아요. 결국은 죄를 짓는 것은 결국은 자기 사랑이에요. 자기 사랑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이건 뭐냐면 여기에 뭐내면 주인이라는 깃발이에요. 내가 주인이다 라고 자기가 이렇게 서서 깃발을 들고 자기의 왕국을 넓혀가는 것이 인생을 사는 관심사였어요. 넓혀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돈도 모으고 더욱더 권력도 갖고 힘을 비축해야겠죠.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이걸 지역을 넓혀가는 거죠. 당연히 어떤 사람이 또 이렇게 넓혀 가는 사람이 자기 같은 사람이 있다고 쳐요. 이렇게 그럼 여기서 부딪치겠죠. 이렇게. 충돌이 일어나겠어요. 여기서.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여기서 분쟁과 그 다음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거지요. 나라가 이렇게 될 때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결국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는 한때 하나님께 이 깃발을 꽂고 그분께 순종하는 그곳으로 들어 온 거죠. 그런데 그 것을 모두 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 다음에 순종함으로써 이렇게 결국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질서가 이 세상 쪽에 이렇게 그려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해요. 그러면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거잖아요. 그걸 이렇게 꺽는 거예요. 이게 회개예요. 회개. 믿음이고 회개예요. 결국은 자기 사랑을 포기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 자기 자랑에서 비롯되는 죄를 짓고 자는 욕망을 포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이런 사람이 이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지요. 그 때에 아까 보았던 이렇게 은혜를 잃어 버리고 연약했던 인간이 다시 이렇게 강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게 죄인데 죄를 이기고 다시 강건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사람들 속에 있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상중 하나가 이거예요.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동등해요. 그러나 그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는 모든 인간에게 동등해요. 그래서 가장 나쁜 사람에게도 인권이 주어 져야 되는 거죠.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가치가 동일할 수 없잖아요. 그럼 그 가치의 차이를 규정짓는 것이 무엇이냐 그게 어거스틴은 선한 의지의 크기라고 보았어요. 거기서 선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질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는 의지의 크기에요. 그 마음이에요. 유의해야 될 것은 이것이에요. 한 사람의 가치는 사회적인 지위, 재산의 여부, 미모나 젊음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잖아요. 어거스틴은 직격탄을 날리면서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그걸 성경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크기에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거죠. 이해되시죠?
그 다음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이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 구절이 됩니다. 우리 모두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오직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자라 가라는 게 몇 가지 조건이 나와요. 여기에 두 단어가 나오는데 은혜와 지식이에요. 이것 두개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은혜도 점점 많아지고 지식도 점점 많아 져라 이런 뜻이에요.
자 비유해 볼까요. 갓난아이가 응애 하고 엄마 몸에서 태어나요. 그 아이가 엉금엉금 기어 다녀요. 걸어 다니면서 온갖 집안의 살림살이를 어지럽혀요.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어요. 그 아이가 늙었어요. 그 아이가 할아버지가 돼서 이제 죽어 가요. 자 그럼 보세요. 이 중에 사람이 아닌 사람은 없어요. 다 사람이에요. 사람인데 사람의 상태가 각각 다른 거예요. 응애 하고 태어났을 때도 사람이고 기어 다닐 때도 사람이고 또 어린이가 되었을 때도 사람이고 청년이 되어도 사람이고 장년이 되어서도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장년에 이르기까지 이 과정을 성장이라고 부르고 그 정점을 기준으로 이제 사람이 늙어가잖아요. 의학적으로 여자는 스물 세살부터 남자는 스물 다섯살 여자는 스물 세살 남자는 스물 다섯살이 육체적인 나이에 정점이래요. 거기서부터 여성은 24세부터 늙기 시작하는 거고 남자는 25세부터 늙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까지는 생명의 기운이 점점 가득 차 가는 거고 그 다음부터는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이제 늙어서 이제 움직이지 못하고 교회도 못가고 밥 숟가락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생명의 기운이 거의 빠져 나오고 죽음의 기운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모두 어느 시기에도 사람이 아닌 적은 없어요. 그런데 자라가는 거는 그림이 나오잖아요. 태어나서부터 그 다음에 어른이 될 때까지 의학자들의 표현을 빌면 23세 그리고 25세까지 그때까지 육체적으로 자라가는 거예요. 계속 성숙해져가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자라 가라고 요구하실 때 결국은 방금 태어나서 똥 오줌 못 가리는 신자도 귀한 하나님의 자녀고 성장한 신자도 하나님의 자녀지만 하나님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가 다 자란 어른이 되기를 원하는 거지요. 그 어른에 상태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그런 원숙한 완숙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그런데 육체적으로는 정점이 있고 하강 곡선을 그리지만 영적으로는 그런 게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청소년 때 타락해서 신앙을 버리고 곤두박질을 쳤는데 청년기에 다시 주님을 깊이 만나서 상승할 수 있는 거고 일생을 정말 그렇게 바닥을 헤매면서 살았는데 죽기 직전에 영혼이 고양되어서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빛이 들어오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절정에 이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라가라는 말은 모든 세대 육체적인 나이와는 상관없이 모든 세대의 사람들 모든 영적인 수준인 사람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좀 더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크게 우리들이 두 가지를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소극적으로는 죄 죽임이 필요한 거지요. 그래서 이미 설명했지만 죄를 죽이고 살리고 그런 거 없어요. 뭐 이렇게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죽인다는 이야기는 죄를 완전히 박멸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은 현세에서 일어나지 않아요. 영혼이 죽었다 할 때도 진짜 영혼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기운이 약해졌다. 생명의 기능을 잘 못한다는 뜻이니까 죄를 죽였다 할 때도 죄가 있긴 있지만 거의 작동을 별로 제대로 못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거의 목숨만 붙어 있게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죄 죽임의 정체에요. 죄 죽임의 의미예요.
그래서 죄를 죽이면 죄를 죽이는 것만큼 은혜가 살아나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거예요. 이건 적극적이죠. 그런데 이게 서로 따로 따로 따로 따로 노력을 해야 되는 게 아니라 죄가 죽는 것만큼은 은혜는 살아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존 오엔 목사님은 은혜 살림에 대해서 별로 얘기 안 해요. 왜냐면 죄를 죽이면 죄를 죽인 것만큼 빈 공간이 되는 게 아니라 죄를 죽인 거기에서는 은혜의 살아남이 있는 거죠. 죄를 잘 죽이면 그냥 은혜는 계속 살아나는 거죠. 그리고 죄를 죽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빈 공간이 없다 이 뜻이에요.
뭐 너무 잘 이해하시겠지만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게 되는데 마음이 이렇게 있잖아요. 마음. 여기에 이렇게 죄가 있어요. 이렇게 있었어요. 이만큼 있으면 이만큼은 은혜 안이에요. 이건 죄고 이건 은혜 안이에요. 그런데 죄를 죽였어요. 그래서 죄가 이렇게 죽었어요. 그러면 이제 존 오엔 생각에는 이렇게 죽어난 것만큼 계속해서 성령의 은혜가 이 사람 마음 안에 함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가서 결국 마지막에 거의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거죠. 겨우 요만큼 간신히 남아 있는 상태.
그래서 이제 이쪽에 이쪽 그림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왜냐면 은혜의 정서예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죄의 정서가 있고 그 다음에 은혜의 정서가 있어요. 죄의 정서는 욕망이죠. 그리고 자기 사랑이에요. 정욕이에요. 은혜의 정서는 하나님 사랑이에요. 다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착한 마음이에요. 그런 것들을 계속 받으면 은혜의 틀이 형성이 돼요. 이건 마음에 형성되는 거죠.
예를 들어 봅시다. 옛날에 할머니가 다식을 만들어 주셨어요. 이렇게 돼있죠. 이렇게 다식 구멍이 있어요. 밑에는 요런 게 있어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된 판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이판에 올려 놓고 그 다음에 다식을 꽉 채운 다음 그 다음에 이걸 꽉 누르면 이쪽으로 다식이 튀어 나오는 거지요. 이렇게. 그러면 이 다식판에서 찍은 모든 다식은 똑같은 모양으로 나오게 되어있어요. 붕어빵 틀에다가 곰표 밀가루를 넣든지 무슨 터키 밀가루를 넣든지 프랑스 밀가루 넣든지 어쨌든 똑같은 반죽을 무슨 반죽을 넣든지 똑같은 틀로 나오잖아요. 그게 이게 은혜 틀이 형성 되면 그러면 이 속에서 모든 것들이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것들을 하나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의지가 생기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겠어요?
이게 바뀌어서 만약에 죄의 틀이 되면 뭘 생각하든지 자기 사랑, 욕망, 쾌락, 탐욕 이런 것으로 다 해석이 되는 거죠. 그러면 사실은 그 사람이 이런 은혜의 틀로 잘 마련이 되어 있으면 선을 행하기 굉장히 쉬워지는 거죠. 그래서 은혜에서 자나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 은혜는 지식과 함께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지식 얘기가 나와요. 아까 나온 거는 이제 아까 나온 건 은혜 능력이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이제 다시 두번 째로 넘어 와서 이렇게 이렇게 넘어 와서 지식의 총명이에요. 지식으로 총명해 지는 것 그것이 이제 죄와 싸워서 이기는 대항의 수단이 되는 거죠.
어두워져요. 그럼 당연히 죄에 속해있죠. 여러분 우리나라는 그래도 위조지폐를 거의 사용 안하잖아요. 이제 옛날에 위조지폐 많았어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써요. 그래서 칼라 복사기에다가 아주 유사한 종이를 갖다가 돈을 복사를 해요.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5천원 짜리 하나를 똑같이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거의 똑같이 만들 수 있답니다. 비용이 3만원 든데요. 그러니까 경제성이 없잖아요. 복사기는 복사가 되잖아요. 그 대신 이제 은색 줄이나 홀로그램 같은 것들은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해가지고 위조지폐를 복사를 했어요. 당연히 한 장으로 잘 펼쳐서 줄 리가 없겠죠. 잘 구분이 되니까. 접어서 꼬깃꼬깃하게 접어서 여러분이 그런 돈을 가지고 쓸려고 마음 먹는다면 어느 시간을 쓰시겠어요? 아침에 손님 없을 때 개장할 때? 아니죠. 밝은 대낮에? 아니죠. 어둡고 사람들이 많은 시간에 물건을 봉지에 싸고 여기 있어요. 아줌마. 그리고 돈을 얼른 내고 도망치지 않겠어요. 왜 그래요? 어두워지면 사람이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눈이 아무리 좋아도 빛이 어두우면 눈의 성능 좋은 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에도 어둠이 깃들게 되면 다음에 죄가 아주 속이기에 적합한 환경이 마련이 되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둔하게 해요. 뭘 둔하게 해요? 판단력이 저하되게 한다는 거죠. 뚝 떨어져요. 그래서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래서 어두워지면은 여기저기 부딪히고 그 다음에 발을 헛딛는 사고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너무 쉬운 얘기죠.
두번 째 문제 그 다음을 계속해서 보면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구해요. 결국은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이게 지성적으로 보면 이렇게 노력할 경우에 영혼의 밝음을 회복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빛이 환하게 비치면 그러면 분별하기 좋을 것 아니에요.
해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선박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무선으로 경고를 했어요. 그런데 수신도 잘 안 해요. 그럼 어떻게 되요. 이제 경비정이 빠른 속도로 출동을 해서 엄청나게 큰 스피커를 이용해서 경고 방송을 하겠죠. 거기 있는 괴선박 정체를 밝혀라. 불을 켜라. 그리고 갑판 위에 모두 올라와서 손을 들어라 등등 요구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발사 하겠다. 등등 이야기가 나오겠죠. 그래도 말이 없어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두두두두둑 하는 기관총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배에 여러 발 맞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제일 먼저 해야 될게 뭐죠? 이건 적대적인 의지를 가진 위험한 배구나 라고 하면 경비정이 아니라 해군이 출동하겠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뭘까요? 조명탄을 쏘는 일이예요. 조명탄을 보신 적 있어요? 전 봤는데 거짓말 같아요. 쏘면 높이 올라가요. 그것이 낙하산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면서 어마어마한 빛을 뿜어내요. 대낮같이 만듭니다. 심할 때는 그런 걸을 몇십발 몇백발을 쏘는 거죠. 그러면 대낮하고 다름없이 모래사장 위에 왔다 갔다 하는 작은 움직임까지도 다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조개까지도 다 파악할 수 있게 돼요. 그러면 드디어 그 빛 아래서 저 선박이 도대체 무엇이 뭐 얼마나 사람이 타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그게 공격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 될 거잖아. 왜? 보여야지 조준도 하고 뭐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제일 먼저 현상이 빛이 들어오는 거죠. 영혼에 밝음을 회복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자기가 모르고 생각했던 이 죄라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그 죄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렇지 않겠어요.
여러분들에게 어떤 음식이 늘 좋아서 먹다가도 그 음식이 얼마나 위험한 음식인지를 알고 나면 설명을 듣고 나면 그 음식을 멀리하게 되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잘 설명하면 또 좋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성령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요. 우리 구역 공부 하는게 여기 올라왔네. 너무 웃기지요. 어쨌든 말씀을 공부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순종의 삶을 살아요. 그래서 경건의 비밀을 습득하게 돼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말로 설명을 하면 잘 몰라요. 실제로 경험해 보면 죄가 무엇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죄가 어떻게 죽는 거라는 것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 거라는 것까지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경건의 비밀이 쌓이게 되는 거죠. 습득하게 되는 거죠. 영적인 거인이 되어 가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가는 거예요.
자 드디어 문제입니다. 자 사도는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서 죄의 강압하는 힘 뭐라고 했어요. 강압과 또 하나 뭐라 그랬어요. 두개. 속임 두개로 역사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강압하는 힘이에요. 힘에 사로잡히지 않는 더 쉽게 얘기하면 그 힘에 지지 않는 길. 지지 않는 길이 뭐라고 말합니까? 죄의 힘보다 더 큰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있어야 되는데 그걸 은혜 안에서 성장이라고 부르는 거죠. 이해되시죠?
그 다음 5번. 죄의 속임에 대해서 총명해 지기 위에서 신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게 죄의 속임. 아까 하나는 뭐라고 했죠? 강압이라고 했죠. 그래서 강압은 은혜로 이기고 속임은 총명으로 극복하는 거야. 그런데 결국은 총명은 지식 없이 안 되는 거야. 당연히 이 지식을 받아들이는 수단은 믿음 믿음이 되는 거죠. 믿음과 이성에 의해서 총명과 지식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럼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예요. 성령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거야. 당연히 이 공부는 순종하기 위한 공부지 호기심에서 알았나 보자라는 공부가 아니지요. 그렇게 될 때 죄에 대해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오늘 채팅방에 들어오신 분들 한번 보실까요. 쭉 나오셨는데 내 힘으로 죄를 없이 할 수 없다고 하니 오히려 죄책이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는 않고요 내 힘으로 죄를 없앨 수 없다고 하니까 내 책임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아 이게 모두 내 책임으로 죄를 지었는데 그런데 결국은 내가 이걸 못 없애는 구나.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이런 결론에 이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화제를 바꾸셨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는데요.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파고들어오는 죄를 순종하면 멈출 수 있는 의지를 주신다고 했는데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겠죠. 근데 결국 자기가 하나님 앞에 순정하려고 그 자체가 믿음이에요.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내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셔요. 문제는 뭐냐면 죄가 우리 안의 융성해 지면 그 죄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죄를 지으면서 이 죄를 진심으로 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지 않아요. 인간의 마음의 구조가. 결국 그것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기가 끊임없이 죄를 선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도 신자가 죄를 온 마음을 다해 죄를 짓잖아요. 죄를 지을 때 그렇게 그 사람 안에서 은혜 작용이 거의 정지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이성적으로 설득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계속해서 죄를 지을 때 어떻게 될 것이냐? 아까 우리가 뭐 조주빈 이야기도 하고 조두순 이야기도 했는데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자기 안에 있는 죄라고 하는 짐승을 안 기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것을 자기에 신앙과 이성의 창살에 가둘 수 없게끔 방치되었을 때 그게 얼마나 무섭게 돌변하는가 하는 걸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그런 생각을 잘 정리하셔 되요. 제가 권하고 싶은 것은 성화와 올곧음 인가요? 성화와 올곧음이죠. 그리스도와 인간의 의무라는 두 시리즈들을 한번 더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들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파고들어오는 죄가 있는데 순종하는 것이 힘들다. 그렇잖아요. 그렇게 느껴진 순간이 순종하기 가장 쉬운 때예요. 그걸 내버려두고 죄가 더 들어오도록 두면 그 다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순종하기 더 어려워지는 때가 오는 거죠.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 책임지는 거죠.
개인별로 속도에 따라서 선명도가 달라 보일 수 있는데 여기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가지고 있는 디바이스의 문제랍니다. 그리고 어떤 분이 미국 몽고메리에서 들어 오셨네요. 마음에 의자가 있는데 성령님과 사단이 서로 싸운다. 사단이 앉는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의 마음과 함께 앉는 거겠죠. 그죠.
다음에 뭐 등등에 대해서 많이 들어 오셨는데요.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기쁨 소식 ... 또 하나 있네요. 조두순과 같은 누가 봐도 명백한 죄도 그렇지만 나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죄일 수 있는 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 죄를 분별하는 것이 힘든 것 같습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알아네 그렇죠. 대한민국 법령집이요 이게 두 팔을 벌려서 안을 수 없을 정도로 법이 많아요. 물론 거기에는 시행령 같은 것도 다 포함돼 있지만요. 그런데 모르면 잘못하게 되는 거죠. 제가 요새 처음 배운 게 있거든요. 법적으로. 그게 뭐냐면 사실 적시 명예 훼손죄라는 게 있데요. 굉장히 저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충격적 이었어요. 어느 법조인이 와서 설명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했어요. 그 사람이 잘못한 내용을 적었어요. 근데 하나도 틀린 말이 없어요. 그걸 그 사람 직장 앞에서 들고 있으면 그게 죄랍니다. 전 처음 알았거든요. 사실이면 문제가 없을 꺼라 생각되는데 안 된데요. 그렇게 할 수 없대요. 그래서 여러분 조심하셔야 돼요. 모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죄를 짓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경을 열심히 배울려고 해요. 이유는 뭐냐면 순종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제일 싫어하는 게 말씀에 지식이요. 왜냐하면 지키지도 못할 텐데 자꾸 알려주면 부담스러운 거예요.
다음 한 주간 동안도 여러분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바라고 염려가 많은 시대에 염려를 읽으면서 염려에 관하여 읽으면서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