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제5장_죄의 지배의 성질 : 거역과 악(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14)
녹취자 : 오희열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코로나가 다시 세력을 떨쳐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죄와 은혜의 지배 제 5장 죄의 지배의 성질에 대해서 공부할 차례입니다. 죄의 지배의 본질은 거역과 악입니다. 죄의 지배의 성질에 두 가지가 나오는데 거역과 악입니다. 차례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죄의 지배는 부당한 거역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타락 후 인간은 존재와 행위의 모든 것에 있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 필연성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만약 막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리가 없습니다.
복습하겠습니다. 죄와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크게 네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맨 처음에 죄가 들어오기 전, 무죄 상태에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였고, 타락한 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 세 번째로 중생하고 난 다음에는 의지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 그렇다고 해서 무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이렇게 네 가지 상태로 나눴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타락한 후에는 죄을 짓지 않을 수 없는, 중생한 후,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네 번째로 천국에 올라간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후 인간의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고 어떤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어거스틴은 못을 박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뭐라고 했습니까? 의지는 노예 상태에 있으며 죄를 짓는 것은 궁극적으로 의지가 선택해서 짓는 것인데 그것이 노예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자기의 주권이 없습니다. 그리고 강압 받는 대로 하게 됩니다. 그 결박 받은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인가 구원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 그림에 보면 마귀가 불신자를 죄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합법입니다. 합법이라는 뜻은, 이것이 좋다거나 하나님이 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마귀가 죄를 짓게 하는 힘과 이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무한정으로 내버려두셨다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사회가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 양심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 사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불신자는 마귀에 의해 죄의 지배 아래 있는데 이것은 정당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죄인이 죄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여기 나옵니다. 죄와 관련된 네 가지 상태가 나옵니다. 타락이전의 인간,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 타락 이후의 인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 중생 이후의 인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영화 이후의 인간, 하늘나라에 간 이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중생을 합니다. 여기서 “중”은 “다시”라는 뜻입니다. “다시 태어난다”, 뭐가? 육체적으로 보면 사람이 한 번 태어납니다. 육체로 한 번 태어났는데, 이것이 첫 번째 태어난 것이라면 이렇게 죽어있던 영혼이 다시 태어납니다. 이것은 육체의 태어남이고 이것은 영혼의 태어남입니다. 영혼의 중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영혼을 창조하실 때는 살아있는 영혼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에 의해서 죽습니다. 그것을 다시 살려냅니다. 그러면 다시 살아있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육체가 첫 번째 출생이고 영혼이 다시 사는 것이 두 번째 출생이라는 면에서도 이것은 “중생”이고, 살아있는 영혼이 죄 때문에 죽었는데 다시 하나님을 믿고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영혼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난 영혼이 다시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재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그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됩니다. 여기서 “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바깥에서 법률로 공포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내적인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성 안에서 법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공포함으로써 법이 된 것입니다. 본성 안에서 법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어디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면 안 된다고 법이 있고 처벌조항이 있습니까? 참새 안에 낱알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 그 사람 마음에 있는 성향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일을 행했을 가능성은 적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것도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얽매여 있는 죄의 지배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해방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면입니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면인데, 생명의 원리가 영혼 안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를 보신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목각인형으로 만듭니다. 요정이 와서 거기에 생명을 부여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죽어있는 영혼을 살리셔서 그 안에 생명을 부여하시면 그 자체로 원리가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몸도 이 안에 의학적인 원리가 작용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 음식물이 잘게 잘게 분해되면서 에너지를 만듭니다. 우리의 몸을 움직입니다. 근육을 형성하고 피가 돌게 하고 몸의 모든 찌꺼기들은 몸 밖으로 나옵니다. 에너지로 변합니다. 당연히 하루를 쓰면 다 떨어집니다. 그 전에 우리는 음식물을 보충해서 다시 에너지를 만듭니다. 이런 생명의 원리가 우리 안에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으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옛날과는 비교되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마귀에 의해서 죄의 지배를 받고 살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도록 창조된 사람입니다.
아까 그림을 보면, 이것과 이 죄, 마귀, 일치를 이룹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면 이 사람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고 이런 죄는 성령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연속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법하고 부당한 거역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를 들자면, 일제 강점기에서 우리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패전을 선포했습니다.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순사들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감옥에 가둔다면 그것은 불법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은 불법하고 부당한 거역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생의 세 가지 사용이라기보다는 중생이라는 의미의 용례입니다. 중생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입니다. 성경이 말할 때,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문맥에 따라서 이 셋 중에 어떤 것을 따라야 하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중생의 의미는 이 1번의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좁은 의미에서는 새 생명을 심으시고 신자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으키는 첫 번째 작용입니다. 이럴 경우에 여기서는 인간이 중생한 것을 아직 의식하지 못할 수 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의식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중생하고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서 최초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모두 포함한 의미로도 중생을 쓴다는 것입니다. 가장 넓은 의미의 중생은 아예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부터 시작해서 칭의와 믿음이 다 들어가고 성화까지 들어가고 마지막에 성화의 완성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모든 전 과정을 중생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사용한 용례입니다. 칼빈은 이 중생을 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사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중생이라는 말이 크게 용례에 따라서, 범위에 따라서 세 가지 의미로 쓰는데 가장 좁은 의미는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것, 인간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것은 상관이 없고 인간이 의식하는 것까지 포함할 때는 좁은 의미의 중생, 가장 넓은 의미의 중생은 영혼이 거듭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전 과정을 다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문맥상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알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벤자민 워필드라는 구 프린스턴의 아주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20세기의 세 명의 칼빈주의 신학자 안에 들어가는 사람인데 이 분은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굉장히 비상한 지성을 가지신 분인데 사모님이 편찮으신 분이었습니다. 일평생 교수 생활을 하면서 네 시간이상 아내를 혼자 둔 적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약 사모님이 아프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더 엄청난 업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합니다. 훌륭한 분입니다. 이 사람은, 중생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중생의 본질, 원인, 결과를 이야기하는데 중생의 본질은, 중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성향과 영혼의 경향성을 거룩하게 다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바쳐진다, 혹은 하나님을 향해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인간의 성향이 자기를 사랑하고 악을 행하고 창조의 목적에 거슬러 살고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악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생과 함께 하나님이 이 성향과 경향성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성향을 인간의 마음속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절대 하나님 없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 없이 행복할 수 없는데, 그것을 저처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별로 없는데도 뭔가를 믿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게 됩니다.
중생의 원인은 성령님입니다. 초자연적으로, 즉 학문으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닌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영혼에 즉각적으로 역사하며 행동의 은혜로운 원리를 심으시는 신적능력이다. 행동의 은혜로운 원리라는 것은, 어찌하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심성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뭔가를 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게 되는, 그런 원리를 하나님이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의 원인입니다. 중생은 성령 때문에 중생하게 되는데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모든 행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지배되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너무 사랑합니다. 자녀만이 아니라 연애하는 사람이라면 애인일 수 있고 부모님일 수도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뭘 먹을 때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이 사람도 이걸 먹으면 참 좋겠다.”, “우리 아들도 이걸 먹여주면 좋겠다.”, “우리 딸에게 이걸 먹여야 할 텐데...”, “우리 어머님이 여기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이 일종의 사랑의 원리입니다. 뭘 생각하든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중생의 결과입니다. 회심이 즉각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회심이라는 것은 중생한 것이 우리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입니다. 이것은 의식입니다. 이렇게 중생한 다음에 이것이 의식에까지 와서 닿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회심이라고 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이렇게 일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일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생과 함께 거의 동시에 회심을 자각하는 사람도 있고, 중생했는데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자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것입니다. A 모형의 경우에는 모태신앙을 갖고 조용히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특별한 체험이 없이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알고 보니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경우는 중생과 회심의 체험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기가 중생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중생한 날짜를 묻는데 B의 경우에는 정확하게 그것을 말할 수 있지만 A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생의 결과는 회심이 즉각적으로 뒤따르게 되고 본성의 변화에 의해 행동의 변화가 뒤따르게 됩니다.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저희 집이 시골에 조그마한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땅 주인이 가을만 되면 밤과 감을 자루에 이고 우리 집에 찾아와서 그 땅에서 자기가 경작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소작료는 아니지만 먼 친척이라고 하면서 놓고 갑니다. 그 감이 참 맛이 없는 땡감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먹는지 아십니까? 할머니가 그 감을 세 가지 방법으로 처리합니다. 하나는 아예 몇 달 후에 먹을 생각으로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서 잊어버린 채 장독대에 내 놓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몇 달이 지나고 나면 연시가 됩니다. 겨울에 정말 맛있게 됩니다. 땡땡 얼은 것을 가져와서 찬물에 집어넣으면 얼음이 바깥으로 기어 나오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말랑말랑한 연시가 되어 먹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침시입니다. 소금물에 담그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그 떫은 타닌산이 빠져나가면서 꺼내어 깔로 깎아 먹으면 오늘날 우리가 먹는 단감이 됩니다. 그것도 시간이 걸립니다. 빨리 먹고 싶으면 그것을 시루떡 찌듯이 찝니다. 찌면 맛은 없습니다. 무를 찐 것과 비슷합니다. 그냥 달큰하게 먹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먹고 심하게 체해서 죽다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감이 싫습니다. 저에게 감은 썩 좋아하는 과일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좋아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체했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 속에 시루에 찐 그 감은 생각만 해도 울컥울컥하고 토 할 것 같은, 실제로 토한 적도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그런 충격을 받았으면 그 감을 멀리하는 행동이 천천히 나타나겠습니까, 금방 나타나겠습니까? 당연히 그 자리에서 감에 체한 사람에게 감을 갖다 주면 당장 밀어내어 버릴 것입니다.
본성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는 사실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상황이 생길 때 행동으로 그 본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 순종, 회개, 이런 것들이 중생의 결과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중생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성향과 경향을 다시 창조하시는 것이고, 중생의 원인은 성령님이 사랑의 원리를 심으시는 것, 중생의 결과는 회심이 즉각적으로 뒤따르게 되고 행동의 변화가 뒤따르게 된다는 것,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다음으로 이런 부당한 상태, 신자의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은혜가 적고 죄가 크면 결국 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상대적 지배라고 말합니다. 죄의 절대적 지배는 불신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지배는 신자에게만 일어납니다. 그런데 은혜의 살림이 있습니다. 살린다는 뜻입니다. 요만한 작은 불이 있었는데 그 불을 “후~” 불면서 바짝 마른 나무를 올려 놓으며 살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불이 살아납니다. 그런 것처럼 은혜 받을 기회를 계속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라마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고 쓸데없이 세속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살려고 할 때, 은혜는 점점 커집니다. 이 은혜는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커집니다. 죄는 죽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내가 짓는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생각합니다. 죄 지을 마음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천국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서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며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면 죄가 죽을 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뭉게지고 쪼끔 남습니다. 은혜는 훨씬 커지고 죄는 작아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죄의 지배가 아니라 은혜의 지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황으로 변해가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유혹을 이기고 죄를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기도하라고 이야기하고 말씀을 통독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필사하자, 성경공부를 하자고 끊임없이 교회에서 그 일을 하는 이유가 결국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 아래에 살게 하기 위함이고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미끄러져서 다시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목회를 하고 여러분은 그 목회를 따라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설명은 끝났고 문제가 나옵니다. 문제, 신자와 불신자에게 죄의 지배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다 배웠습니다. 불신자에게는 죄의 지배가 정당하고 합법이다, 합법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서 그렇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와 실제 살아가는 삶에서 일치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정당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에게는 부당하고 불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는 이미 그 죄를 이기며 살도록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역사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 성령이 떠나가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어서 죄를 끌어들이는 것은 자기 나라에 적군을 끌어들여서 살림을 차려주고 계속 자손을 낳고 사람들을 포섭하여 번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과 마찬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 되었습니다. 오늘은 문제가 하나입니다. 제가 말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평이 있어서 오늘은 일부러 오토바이를 타고 열심히 말을 했더니 분량을 똑같이 했는데 10분 정도 줄었습니다.
여러 분들이 들어오셨는데, “강의안은 홈페이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홈페이지에 들어오시면 다운받아서 쓸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강의안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구역공과 메뉴를 클릭하면 각 강의마다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강의는 죄와 은혜의 지배를 기본으로 합니다. 구입하실 수 있고 혹시 불편하시면 교회 서점으로 연락하시면 교회에서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현재 398명 코로나 확진자가 있다는데 어쨌든 우리가 기도해야겠습니다. “방금 들어왔는데 다시 듣기가 안 되나요?”, 됩니다. 나중에 홈페이지에 금방 올라갑니다. “끊임없이 은혜의 수단을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허공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 방편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말씀과 기도, 성례, 그리고 여러분이 경건서적을 읽는다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셔야만 은혜를 받게 됩니다. 멀어질수록 자신 안에 있는 은혜도 함께 멀어집니다. “시각적 자료와 함께 설명을 들으니 이미지로 기억됩니다.”, 그것을 노린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브리핑을 할 때는 이것보다 훨씬 단순하게 만듭니다. 지금 만화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머릿속에 기억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캡쳐해 놓으셨다가 복습하실 때 반복해서 보시며 그 그림을 생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자녀들이나 친구들에게 가르쳐 줄 때 그 그림을 보여주며 가르쳐주시면 굉장히 쉽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10분 정도 일찍 마쳤습니다. 앞으로도 들어오셨다가 나가는 분이 없도록 압축해서, 짧으면서도 내용은 더 풍성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 코로나 걸리지 마시고 오히려 더 많이 기도하면서 주님께 은혜를 더 많이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