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위하여Ⅴ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엡6:4上) 2001.5.6 주일오전 1
2. 부모를 공경할 3가지 이유(삼하18:33) 2001.5.13 주일오전 18
3. 가족의 영혼을 향한 고통(롬9:1-3) 2001.5.20 주일오전 30
4. 기다리시는 하나님(눅15:11-24) 2001.5.27 주일오전 43
1.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上)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잠시 시리즈를 오후로 넘기고 그리고 아무래도 5월 달에는 가정에 관계된 설교들을 예년처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게 해주는 역할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는데 첫 번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그들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교양과 훈계로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 적극적인 교육이라면 그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은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한 기초적인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엽게 한다”라는 말은 “분노하도록 자극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필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이지 부모로부터 분노하도록 자극 받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들은 어린아이일 때에 부모로부터 받는 교육의 영향이 그의 평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이 말씀을 한번 해설해볼까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자녀로부터 상처를 받은 부모도 많지만 그러나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녀들도 많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녀들은 자녀로부터 상처를 받은 부모들보다 더 많이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인생을 거의 살았으니까 또 남은 인생의 날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고, 또 부모들은 자녀로부터 상처를 받았어도 그 부모들은 이미 형성된 사람이기 때문에 자녀로부터 상처를 받은 것이 마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은 되지만 그 사람 자신을 망가진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데 있어서는 영향력이 적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부모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으면 그의 긴 생애를 두고 그의 가족 관계, 심지어 그의 결혼, 그가 후에 낳게될 자녀들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방법으로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볼 때에 이 부분이 심각한 부분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자녀가 무엇 때문에 부모로 인해서 노엽게 되는가. 저는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데 첫째는 부모의 사랑 없음을 인해서 자녀들이 크게 노엽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태어나면 처음 만나는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오늘 여기서 특별히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의무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거론하면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아비들아”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아버지가 가정의 교육에 최종적인 책임을 맡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아버지가 여러 가지의 성품으로 볼 때에 자녀들을 노엽게 할 가능성이 많다라고 하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식들에게 압도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것까지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깁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부모로 인해서 노엽게 되는 첫 번째 가장 커다란 원인은 사랑이 없음 때문입니다. 자녀가 태어나면 첫 번째 만나는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이고, 자라나는 동안에 그 부모는 자신의 전세계입니다. 모든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부모로부터 자녀들은 많은 사랑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으면 그는 성장의 과정에서 사랑을 받을만한 다른 대상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따뜻한 보살핌을 통해서 자녀들은 하나님을 배웁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배웁니다. 부모로부터 용서를 받으면서 아량 속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심성을 갖추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로부터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경험하며 그 사랑 속에서 안식을 누린 경험이 있는 자녀들은 또한 동시에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그런 안식과 그리고 위로를 베풀 수 있는 심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특별히 내팽겨치고 아버지가 자녀를 향해서 사랑이 없는 가정을 많이 봅니다. 무관심하게 자녀를 치고 아무렇게나 살도록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돌보지 않는 어머니. 방치된 채로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동안에 그 아이들은 마음속에 부모를 향한 노여움을 품게 됩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랑을 받아야 할 관계 속에서 사랑이 흘러 들어오지 않으면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해주어야 할 대상들에 대해서 분노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족들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구별되는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도 자녀들에게 이런 마음의 고통을 주고 분노를 불러일으키는데 심지어 가정에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들이 아직도 있다고 하는 것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그 중에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 속에 이렇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부끄러움이오 수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곤란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교회의 성도들의 가정, 그 중에서 그런 폭력의 주범이 되고 있는 가장을 교회가 아주 분명하게 확인을 했다면 그를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땅히 필요하면 근신에 처해야 하고 그리고 그를 성찬에 참예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그런 교회의 끊임없는 권고를 듣지 않으면 더 중한 징벌을 내려서 자성할 수 있도록, 그리고 교회에 남은 지체들이 그런 징계의 과정을 보면서 깊이 경고를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거룩 성을 보존하는 교회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아직까지 교회 안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 남아 있고 심지어 교회의 중직 자들이나 심지어 교회의 교역자들 가정 속에서도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 발견된다라고 하는 것은 실로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회개하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가정을 목양하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성경의 지침을 여러분에게 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교육적인 이유가 있어서 자녀들에 회초리를 대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성경 적으로 그런 것들은 부모에게 허락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자녀들 교육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자녀를 때린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당한 징계의 태두 리를 넘어서는 월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들을 명분상으로는 교육하는 것이지만 자녀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그런 교육과는 전혀 관계없이 술을 먹고 들어와서 자녀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행패를 부리고 심지어는 아주 작은 일에 분노를 폭발시켜서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구타하는 것은 이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영혼들을 돌보면서 가끔 보면 어린 시절에, 심지어는 중 고등학교 시절, 심지어는 청년이 다 된 다음에도 그 부모가 자녀를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폭행을 하는 부모들을 봅니다. 그 중에 신앙을 가진 학생들을 보면 중 고등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는 더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제가 여러 번 봤습니다. 신앙이 없는 애들은 맞지 않습니다. 부모가 때리면 용돈을 안 준다고 부모를 두들겨서 때려죽이는 세상인데 애들이 왜 맞겠습니까. 신앙이 있으니까, 착하니까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경우를 몇 번 봤는데 그때마다 따끔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너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첫째 너희 아버지가 나쁘고 그 다음에는 맞고 사는 네가 나쁘다.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은 너희 아버지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합니다. 못하게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남편이 아내를 때리고 구타하는 가정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이런 세상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나쁜 사람은 때리는 사람이지만 그 다음은 나쁜 사람은 그렇게 얻어맞고 사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죽 했으면 때리는가 하는데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오죽해도 그냥 살아야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니까. 때리면 즉시 고발해야 합니다. 지금 가정의 폭력이 위험수위입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아이들이 막 부모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합니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 막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런 일관되게 그런 지체들에게 내가 충고합니다. 즉시 고발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믿는 아버지인데 용서해주어야지, 감옥에 가서 용서해주십시오. 감옥에 가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눈물을 뚝뚝 흘릴 때 그때 용서해주십시오. 남편도 때리면 당장 고발해야 합니다. 경찰서에 집어넣으십시오. 그 대신 헤어지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용서해주십시오. 그 못된 버릇을 단절시키지 않고 계속 맞고 사는 것은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대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형상을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처음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처음에는 죽는 사람보다 자기가 더 부들부들 떤다고 합니다. 무서워서. 그러다가 몇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능숙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짜 엽기적인 살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정당한 교육적인 목적도 없이 집안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가장 그런 남편을, 그것은 일단 정신병이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정신병자는 병원에 격리를 시켜야지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자녀를 낳았지만 부모에게 하나님이 그런 식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면 자녀들은 거기에 대해서 항거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 술을 먹고 폭력을 행사하고 집어던지면 구석방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덜덜 떨면서 잘못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잘못했다고 그러고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그 애는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가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일들이 교회 널리 알려지면 교회는 마땅히 교회 법으로 치리 해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교회의 모든 직분을 박탈해야지 됩니다.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역자가 되고 교회의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그것에 대해서 항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속으로 그 분노는 속으로, 속으로 스며들어서 그의 인간성에 영향을 줍니다. 누가 그 사람의 망가진 성품에 대해서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녀를 자기가 낳아서 그 자녀에게 그런 식의 분노를 불러일으켜서 그렇게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해서 그 자녀의 마음속에 응어리지게 만들어서 그들이 망가진 사람이 되고 나면 누가 고쳐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유산을 물려주면 그것이 고쳐지겠습니까? 무엇으로 해서 고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식을 낳고 결혼을 해서 그런 폭력을 행사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수많은 지체들을 파괴하면서 살아가는 이런 현실을 우리는 방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에서 치리해야지 된다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한 두 번은 용서하고 목회 적인 권면을 할 수는 있겠지만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그는 반드시 치리하고 교회의 모든 직분은 박탈해야지 됩니다. 그것이 성경 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법이 정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정신병원에 격리 수용이 되든지 아니면 적절한 형벌을 받도록 그래서 가족의 용서하는 사랑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저에게 전화를 하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경찰서에 전화를 하십시오. 함께 심방을 가도록 합시다.
자녀들, 특별히 어린아이 때의 심성은 비온 뒤의 황토 길과 같습니다. 부드러운 길과 같습니다. 무엇을 찍든지 그대로 찍힙니다. 무엇을 , 어떤 신을 밟든지 그대로 발자국이 찍힙니다. 그 속에서 그 아버지를 보며 하나님 아버지를 배우고 그 어머니를 보면서 교회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자녀를 사랑 없음을 넘어서서 자기의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때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긴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마디로 다 해결이 될 것 같으면 그 애가 성자지. 그런 한 마디 말, 옛날에 자기가 준 영향들이 해결될 것 같으면 그 애는 그런 말조차도 필요가 없는 성자입니다. 그것을 이해를 해야지 됩니다.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런 어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닙니다. 언어적인 폭력, 가정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더러운 말이나 욕설들이 오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 그런 더러운 욕설이 오간다고 하는 것은 이미 벌써 그런 폭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성도로서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그렇게 욕을 하고 그런 가정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하고 고함을 지르고 욕설이 오갔다는 사실 자체도 교회에서 치리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것을 다 치리하면 교회에 누가 남겠는가. 그렇지요. 아무도 안 남아도 올바르게 하면 그것을 당하고 바르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가정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의 폭력, 심지어 “이 놈의 새끼” 그러면서 욕을 합니다. 이놈은 누구입니까? 자기 남편이 이 놈입니다. 이 놈은 옆에 있고 새끼는 이 앞에 있습니다. “빌어먹을 놈의 새끼” 빌어먹는 것은 자기 남편이고 새끼는 그 앞에 있습니다. “병신 놈의 자식” 병신이 자기 자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입에서 토해놓으면 좀 생각을 하면서 토해놓아야지. 토해놓은 것이 그대로 거꾸로 들어가서 자기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열린 교회 신문에 그리스도인의 말과 영적 삶에 대해서 어느 자매가 소감을 썼는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일주일이면 듣는데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신앙의 실패의 40%이상이 말입니다. 그런 언어의 폭력 속에서 시달리는 것입니다. 이 새끼, 저 새끼 그러면서 막 욕을 해도 자녀들은 “아빠 왜 나에게 욕해” 그렇게 대들 어떤 반항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대로 당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한 마디만 하면 찍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찍소리 못하지요. 이게 사회적인 약자니까. 그런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못난 사람입니까? 직장에 가서 매일 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 사회에 나가서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그런 못난 사람들이 가정에 와서 폭력을 휘두르고 언어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가족들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결국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폭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일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깊이 이 어린이 주일에 회개하고 오늘 저녁에 자녀들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여러분들이 가정을 목회 하는 가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그릇된 모본입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도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커다란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일치와 조화를 볼 때에 그의 도덕적인 심성이 이렇게 일정한 룰을 가지고 바르게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모순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단지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진 아버지가 무엇인가 아이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매질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폭력입니다. 아버지가 말은 그럴싸한데 행동은 거짓이다. 이럴 때 그 아이는 그 자체가 커다란 분노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노할 때의 그 분노가 아이들의 심성에 영향을 주어서 도덕적 가치 체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탄을 합니다. 아이들이 도덕적인 관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에는 문제 가정에서 문제아가 나온다고 그랬는데 그것은 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에서 문제아가 막 나옵니다. 얼마 전에도 원조 교제에 관한 기사들로 계속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여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1-2등을 다투는 애가 자기도 원조 교제를 했을 뿐 아니라 자기 반의 반 이상의 아이들이 다 원조 교제로 하게 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집도 잘 삽니다. 왜 그랬느냐. 용돈 몇 푼 갖고 치사하게 구는 부모들이 너무나 싫다는 것입니다. 난 내 스스로 사는 방식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도덕적으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회 탓을 하는데 사회가 결국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그 아버지, 그 어머니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 와서 아무리 자녀들에게 잘 살아라. 똑바로 살라고 이야기를 해도 어렸을 때는 부모 앞에서 배우지만 나이가 들면 부모 뒤에서 배웁니다. 앞에서 그림책을 펴놓고 이것은 사자다. 기린이다 고 하면 그 말이 하나님의 음성이줄 알고 듣고 배우지만 자라면 아이들이 부모 뒤에서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도덕적인 모순을 배울 때 자녀들은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아버지 멱살을 잡고 “너 위선자”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수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놓고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이가 공부를 해서 먹을 것을 갖다 주는데 문이 이만큼 열렸습니다. 공부를 안 하고 전화를 하고 있기에 야 그 자식이 있지, 그 년이 있지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기에 누구를 말하는가 하고 들으니까 자기와 자기 남편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아이들이 그런 감각을 모두 잃어버린 것을 사회 탓을 하는데 그 사회가 결국은 가정에 작은 단위들이 합쳐져서 구성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사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보다는 아이들이 사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가정에서 도덕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집에서 아이들보고 원조 교제를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고 아이들에게 그런 음란한 문화에 접하고 그리고 야비하게 살고 그리고 부모와 스승을 몰라보는 그런 막된 삶을 살라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덕적으로 가정에서 행동을 해도 그런 아버지들이 모여서 부도덕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문제가 없는데 애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가서 만들어놓은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과 속이 일치되는 삶을 살지 않고 가정에서만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밀폐된 교육이 아니라 다 개방된 사회 구조 속에서는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가정에서 애들과 몇 시간이나 같이 있습니까? 일주일 내내 대화를 하는 길이를 따지면 제 한시간 설교가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구조적으로 출근할 때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퇴근하면 아이들은 학원에 가서 안 오고, 자면 아이들이 오고 이렇게 온 가족의 활동하는 시간대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지 내가 가정에서 뭔가 아이들에게 흠 잡힐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자신으로부터 깊이 감화를 받기를 기대하는 것 그것은 바보입니다. 아이들은 다 압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으니까 그 아들놈이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야, 저거 순 뻥이야. 사기야 사기” 그런 속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자라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러니까 부모가 어떻게 이렇게 여기에서 여기에서나 어디에서나 이렇게 일치된 그 행동을 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순히 의식을 가지고 어느 공간에서는 내가 조심해야지 되겠다는 이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비군 훈련을 가면 그런 것을 느끼는데 직장에서 넥타이를 매던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예의바르고 정중하고 위아래도 잘 알아보고 하던 사람이 이 옷을 벗어놓고 예비군에 모이면 엉망입니다. 아무 데나 드러눕고 가래침을 뱉고 담배를 핀 것을 버리고 또 교관의 명령을 어기고 몰래 술 사서 뒷산에 먹다 또 멱살을 잡고 싸우고 진짜 개입니다. 본성이 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변화가 되어서 인간 그 자체가 새로운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될 때에 그때에 그 사람이 여기에 나오든 들어가든 하나님 의식을 하면서 살 때 모든 삶이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지, 그 수준 안에서만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성경 적으로 볼 때 그 아버지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주 앞에서 온전한 신자가 되려고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자식을 낳으나 마나 입니다. 성경 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도덕적인 모순들이 자녀의 가치 체계를 엄청나게 뒤흔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그런 모든 가치의 체계들이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전수시켜준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습니다. 가정의 원리나 교회의 원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최고인줄 알고 살다가 교회에 와서 잠깐 생활하지만 잠깐 교회에서 생활하고 교회에 있는 지체들과 교제하면서 여기에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신앙적인 가치관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고 확인할 때에 비로소 세상에서 막 살던 자기 자신이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가정 안에 그런 분명한 가치관이 있을 때에 세상에서 그렇게 살다가 그런 영향을 받지요. 세상이 더러우니까. 가정에 와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그것을 깨닫게 되고 손을 씻는 이런 역할들을 가정에서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의 신앙적인 인격이 일치성이 있어야 합니다. 집에 와서는 부모에게 거짓말한다고 야단을 하면서 자기는 가서 다 거짓말하고 돌아다니면서, 그런 식으로 도덕적인 그릇된 모본을 자녀들이 보면서 자녀들은 속으로 분노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일그러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무엇인가 큰 유산이나 아니면 무슨 이런 것들을 물려주려고 하지 말고 뭔가 여러분들이 자녀가 무슨 혼란 속에서 고뇌할 때에 생각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였다면 내 인생의 자리에서 아마 이렇게 안 하셨을 것인데. 그렇게 생각나는 사람이 도덕적인 모본으로서 말입니다. 뭔가 가치와 이익 사이에서 고민할 때 이익을 선택하기 위해서 도덕적인 가치를 버렸을 때에 그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책을 느끼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도덕적인 일관성을 가진 아버지, 그런 어머니가 될 때에 그때 자녀들이 일관성 있게 올바로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어릴 때는 판단이 어립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어느 여학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매일 낡은 프레스토를 몰고 자기를 데리러 오는 아버지가 너무 싫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못났을까. 제발 나 혼자 집에 돌아가게 내버려두면 좋을 텐데. 여학교 앞에 밤중이면 애들을 데리러 오는 차들이 쭉 서있습니다. 그런데 애는 그 수 십대의 차들이다 떠나갈 때까지 교실에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초라하게 아버지가 모는 덜덜이 차를 타고 집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어렸을 때는 생각이 그럴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한 것에 대해서 아주 강렬한 수치심과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세상이 무엇이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그런 것들을 다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에 있어서는 뭔가 일그러진 상처가 있어도 그런 것들은 충분히 자기 스스로 인생에 대해서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복원이 됩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문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큰 것부터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애를 데리고 공원에 가면서 야, 3살이라고 그래. 4살부터 돈 받으니까. 애는 4살인데. 엄마 나는 4살인데. 쉿! 3살이라고 그래. 이렇게 큰데. 쉿! 돈이 얼만데 너 몇 살이니 물어보면 엄마가 3살이래요 그래서 한 2-3000원 절약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 속에서 일그러지는 도덕적인 모순에서 오는 아이들의 영향은 2-300만원을 들여도 회복이 안 됩니다. 얼굴이 못 생긴 것이야 요즘에 나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하여튼 워낙 못생겨서 가서 코도 높이고 눈도 좀 찢고 입도 좀 벌리고 이런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마음이 그렇게 망가진 사람은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기 전에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잘 보십시오.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아버지 대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 임상 경험에 의하면 90% 이상입니다. 그것이 입증이 안 되면 90%이상은 그 사람이 낳은 자식이 반드시 자기처럼 삽니다. 그 고리를 끊는 방법은 하나님을 기적적으로 만나고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슬쩍 믿는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 도덕적인 모순입니다.
제 어렸을 때 하여튼 도덕적으로 혼란을 느낀 것이 그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앞에서 파는 모든 먹을 것은 균이 득실득실 하기 때문에 먹으면 큰일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사는 것은 죄라고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는데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가서 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의 마음에 혼란이 이는 것입니다. 똑같은 번데기인데 왜 나 혼자 가서 사면 균 덩어리고 할머니가 사주시면 괜찮을까? 선생님이 어른이 사주는 것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게 이제 굉장히 혼란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사주는 순간에 균이 사라지나. 도덕적인 혼란이었습니다.
어느 길에서 육교 밑인데 엄마는 빨리 건너자고 하고 아이는 그리로 가면 안 된다고 하면서 야단을 치며 데리고 갑니다. 그것은 완전히 폭력입니다. 가치관의 폭력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입만 열면 거짓말하고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수시로 도덕적인 가치를 포기하는 그 부모들을 보면서 그는 시류를 따라서 살아가는 영악함 이외에 아무 것도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속에 배우는 것입니다. 돈 봉투 들고 쫓아가서 선생님들 주는 것, 다 아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그래서 선생님이 자기를 좀 낫게 대우해준다면 아이들이 그 부모의 가치관의 균열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을 넓은 의미에서 분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아이들이 도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노한다는 의미가 넓은 의미에서 그런 아이들에게 그런 그릇된 영향을 주어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가치관의 영향을 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가정에서 무의식 속에서 얼마나 행해지고 있는지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가치관에서 그런 도덕적인 모순을 느끼는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도덕적인 훈계를 받을 때에 승복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승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격적인 승복이 없는 한 가정의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교육의 제도, 뭐 이런 것, 저는 오늘날 한국 교육제도를 보면서 분노를 느끼는 사람인데 어째든 이런 일그러진 교육의 제도 속에서 우리는 교육의 방법을 가지고 많이 탓하지만 그러나 이런 공적인 교육이 정말 믿을 수 없어도 모든 것이 사실 이런 공적인 교육의 책임만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학교보다 큽니다. 아니 도저히 자기 마음에 안 내키면 학교에 안 보내면 됩니다. 그리고 부모들끼리 모여서 저는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첫 아이 중하교 갈 때에도 학교에 보내지 말자는 주의였습니다. 대안 학교에 보내자. 그래서 뭔가 자연 속에서 아이들이 인간답게 성장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세우는 그런 학교에서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봐서 가면 됩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무리 좋은 교육을 통해서 좋은 지식과 정보가 널려진다고 할지라도 오늘날과 같은 구조 속에서 학교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정직하고 진실한 심성이라든지 이런 어떤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이런 인격의 기초를 기대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 교실에 5-60명을 집어넣고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가정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고 고유한 교육적인 역할을 가정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도덕적인 일관성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에 당분간은 이해를 합니다. 당분간은 좋은 운동화 사주지 못하고 좋은 학용품 그리고 좋은 옷을 사주지 못하는 부모를 원망할지 모르지만 그 애가 가치관이 형성되고 나면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적당 주의로 살아가고 도덕적인 불감증에 걸린 이런 사람들이 자녀들을 아주 특별한 자녀들로 기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부모들이 먼저 깨닫고 도덕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인격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그릇된 기대입니다. 부모들은 흔히 자기의 자식을 녹로에 얹혀져서 토기장이 손에 의해서 빚어지는 찰흙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자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결국은 자기의 자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폭력을 남겨주게 되고 또 자신도 그 자녀로 말미암아서 그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자녀는 자기가 낳았지만 자기의 손에서 빚어지고 있는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보기보다는 자기가 심는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자기가 심는다고 생각해야지 됩니다. 농부가 사과나무를 심으면서 사과는 빨간 것이 매달려야지 되는데 아래는 매달리면 안 되고 위에만 매달리고 7개가 꼭 매달려야 하는데 그리고 7월 28일 몇 시에는 열매가 맺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심고 그리고 요즘처럼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주고, 때가 되면 비료를 주고, 벌레가 생기면 약을 주고, 혹은 그 벌레를 잡아주고, 꽃이 피면 봉지를 잘 싸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고 그것만 잘 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심지어는 유치원에 이제 다니는 아이들을 3-5개씩 학원에 다니게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막 엄청난 고액의 돈을 들여서 고급 과외를 시키고 정신이 없게 만듭니다. 어떻게 그 애들이 모두 피아니스트가 되겠으며, 어떻게 모두 발레리나가 될 것이며, 어떻게 그들이 모두 수영 선수가 되겠고,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재 교육 그렇게 하는데 영재 교육에는 수 백 명에 한 두 명 나오는 것이지 평범한 애를 낳고 그 애를 영재라고 생각을 하고 특수 교육을 시킨다고 부모가 특수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일단 애를 낳으며 우리 애는 평범하려니 생각하는 것이 평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애들을 말도 되지 않는 고액의 과외를 시키고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애를 특별한 사람으로 기르려고 하고 학교에 들어가면 나면 고액의 과외를 시켜서 애를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대학에 들어보내려고 그냥 휘몰아치듯이 아이들을 억압하면서 교육하는 것은 모두 범죄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어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정한 범주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게 다 내가 잘되려고 하는가 너 잘되라고 그런 것이지”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잔소리를 하고 자기를 막 강압적으로 자기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다 너 잘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엄마 제일 싫고 가서 자기 야단칠 때에 아빠가 나가서 이렇게 뼈빠지게 힘들게 돈 벌고 그러시는데 너는 가서 공부도 못하냐. 그것이 제일 싫어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뭔가 비관적으로 아이들에게 그런 심성을 심어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참 불쌍하다. 우리 먹여 살리려고 그거 돈 몇 푼 받아오려고 상사한테 구박을 받고 그 먼지 속, 매연이 가득한 곳으로 오늘도 봉투 하나 끼고 저렇게 출근하는구나. 가엾은 우리 아빠’ 그렇게 생각합니다. ‘밥 벌어먹기 위해서 저 짓을 하고 다니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자기를 비참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청소부를 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세계, 한 모퉁이를 정화하는 그런 창조 질서를 유지 보존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으로 그렇게 자기를 좀 부각시키면서 살아야지, 그게 자존 감이지.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 애들이 내가 설교하는 것을 저 텔레비전을 보면서 벌어먹으려고 그렇게 오늘도 주절주절 또 떠들고 있구나. 그래도 매주일 저렇게 해야지 우리가 밥이라도 먹지.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직업이 창조론의 관점에서 보면 목사를 하든 여러분들이 가서 땅을 파서 돈벌이를 하든 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가꾸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직업의 구분이 없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웃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발 그렇게 신파조로 나가지 마십시오.
자식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내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평생 너만을 보면서 살았는데....” 그것은 바보입니다. 왜 그 애만 보고 삽니까? 볼게 얼마나 많은데,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그리고 일평생 자기만 보면서 자기만 사랑하고 산 어머니 아버지를 가진 애들 치고 행복한 애들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엄마가 나만 보고 사는 것,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엄마나 아버지가 그러면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리십시오. 나보고 살지 말라고 하십시오.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지. 주님을 몰라서 그러면 가리켜서라도 엄마 나만 보고 사는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나 쳐다보고 살면 결국 엄마 나 때문에 실망할거야. 하나님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 자식을 바라보고 삽니까? 바보같이. “오, 너만 보면서 내가 너를 어떻게.....” 애들은 괴롭습니다. 자식은 그런 부모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무를 산에다 심는 산 아저씨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심고 돌보고 고민합니다. 올해는 해충 때문에 산 전체가 극성이니 어떡하면 좋을까 하며 고민합니다. 항공기를 띠어서 방제를 하기도 하고 일군들을 풀어서 약을 치기도 하고 영양이 떨어지면 주사를 놓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는 정도 이상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영향에 한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자식 앞에서 그것을 인정해야지 됩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에 부모들은 자녀의 신앙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결혼을 하고 저는 7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낳았으면 지금 아마 계산을 해보니까 빨리 학교에 들어갔으면 대학교 3 학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사내아이면 군대에 가있든지 했을 것입니다. 딸이어서 빨리 처치를 했으면 시집을 갔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아쉽습니다. 하여튼 7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7년만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때는 너무 가난하던 때이니까 고생이라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났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애가 두 세 살쯤 되었을 때 학교 교수가 되고 잘 살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어디에 가서 무시를 안 당할 만큼 그렇게 가정적인 형편도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교수’ 그러면 그래도 사람들이 잘 사는 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잘 사는 적은 없었지만. 그런데 애가 점점 자라는데 처음에 어렸을 때는 귀여운지 몰랐습니다. 너무 경제적으로 힘들고 사역을 하랴, 가정을 신경쓰랴, 너무 힘드니까 좋은 줄 몰랐는데 애가 3-4살이 되어 자라면서 너무 너무 귀여운 것입니다. 보다시피 저는 얼굴이 잘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애가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는 별로 인데 자라면서 얼굴이 너무 예뻤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세 사람만 모이면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못하던 내성적인 사람이었는데 애는 뭐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기가 살아서 이야기를 잘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그렇게 예뻐해 주고 그리고 애가 생활도 반듯합니다. 식구들이 불을 켜놓고 다니면 자기가 가면서 절약을 해야지 하고 다 껐습니다. 오죽했으면 차를 타고 가는데 5-6살쯤 되었을 때 차에 라이트가 켜져 있었고 겨울이라 히타가 켜져 있었는데 아빠 가스가 많이 나와. 불꺼, 애는 가스를 태워서 돌아가는 줄 알고 그랬습니다. 전기세 나오니까 불꺼, 휴지가 떨어지면 돌아다니면서 다 주어서 누가 이것을 휴지통에 안 버리는 것이야 하며 휴지통에 가서 버립니다. 공부도 잘합니다. 그래서 이제 진짜 천재가 났구나. 그리고 아마 꿈에도 그리던 이상적인 아들이 하나 태어났는가보다. 그런데 정말 너무 기쁜 것입니다. 매일매일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유치원을 잘 마치고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초등학교에 가서 시험지를 받아오면 앞에도 백 점, 뒤에도 백 점 다 백 점입니다. 그래서 야 수재가 났구나. 성격도 좋고 다 좋은데 진짜 제대로 하나 생산을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3학년 때까지 잘나가더니 4학년 때부터 서서히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상심이 많이 되었습니다. 우선 무엇인가 하면 4학년 때까지 탁월했습니다. 정말 성적표를 받아오면 전부 다 올 수였습니다. 그런데 5학년이 되면서 이게 서서히 그게 아니었습니다.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게 이제 실망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정리정돈을 죽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못 봅니다. 일을 할 때는 막 어지럽혀도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하는데 그런데 책상에는 책들이 막 널려져 있고 옷은 옷대로 막 집어던지고 침대를 번쩍 들어서 보니까 그 밑에서 양말도 나오고 바지도 나오고 팬티도 나오고 툭하면 학교에다가 가방을 두고 와서 엄마가 창문까지 넘어가서 가방을 가져오고, 왜 그러고 사냐. 아니 공부를 하고 책은 여기에 놓고 옷은 벗었으면 빨래 통에 넣고 입은 것은 다시 장롱에 넣고 그리고 자고, 자고 일어났으면 이불을 개어 놓고 그리고 청소를 하고 이게 왜 안 되는가. 내가 이야기를 한 것 중에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번 이야기를 해봐라.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다 말해라. 다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그렇게 해라. 들어오면 또 개차반입니다. 그래서 누가이기나 해보자. 몽둥이를 하나 이만한 것을 꺾어들고 매일 저녁마다 방을 검사를 하고 책을 조사를 해서 애를 회초리를 때렸습니다. 그 동안은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는 밤 시간에 아빠가 들어올 때 거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정돈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매일 그러고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도 해이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또 원 이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공부도 뚝뚝 성적인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잘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도 많이 먹어서 살이 쪄서 얼굴이 다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름답던 윤곽이 다 사라졌습니다. 학교도 한번 데리고 가면 보는 교수들과 직원들이 전부다 너무 예쁘다고 그랬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자꾸 예쁘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 교만해지니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이렇게 막. 내가 꿈에도 그리던 그런 아들과 비슷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자기 나름대로 어떤 삶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개입을 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중학교 올라가고 청소년이 되고 나면 그것을 막 강제로 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더 크다는 것을 교육적으로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래 안 되었습니다. 깊은 깨달음을 가진지 몇 년 안 되었는데 언젠가 복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내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라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식은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배우는데 나는 이 자식에게 대해서 어떤 자식이 되어야지 된다라고 하는 것이 명쾌하게 있는데 내가 애 앞에서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있는가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자식들을 쥐잡듯이 잡습니다. 대게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아버지 자신을 교제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겠는가. 그때 내가 탁 깨달은 것이 저도 상처가 많은 그런 성장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깊이 깨달은 것은 이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아버지들의 모습으로서 나의 모본을 삼을 수는 없고, 그리고 내가 진짜 이 아이들에게 모본이 될 수 있는 그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어야지 되겠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이제껏 주님을 믿게 하시고 훈련시키고 교육시키시면서 데리고 오셨는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그 아버지 아래서 영향을 받고 자란 것처럼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을 볼 때에 내가 꿈에도 그리던 자식하고 내 자식하고 거리가 먼 것보다도 훨씬 더 멀리 하나님 아버지의 상과 아버지로서의 나의 상이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게 진짜 생애 적인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뭔가 가장으로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깨달은 것이 내 사고가 얼마나 비 성경 적이고 이 시대에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그 탐욕 같은 것들로 영향을 받은 가치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어떻게 기르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녀에 대해서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집착하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별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나면 둘둘 말린 내복, 양말, 파자마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널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버립니다. 이렇게 보면서 지금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래, 저것보다는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는 접어서 넣어놓고 학교에 가는 것이 난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식과의 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꼭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할 정도도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교육 전문가의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는 군대 같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모범생은 될지 모르지만 창의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정을 소개하는데 자기네는 아이들이 태어나서 여태까지 “치워라”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마음껏 살게 내버려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다가 밥그릇을 놓고 책 펴보고 책 보다가 드러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그러면서 자라면서 아이들이 창의적인 아이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용기가 생깁니다.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벗어놓은 것을 보면 막 치밀어 올랐습니다. 막대기로 두들겨 패서라도 똑바로 해놓고 말게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은 내가 하나씩, 하나씩 걸면서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또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을 할 때 집중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집중하지 않는 것이 싫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강의를 할 때도 수 백 명이 강의실에 모여도 엎드려서 다른 짓을 하고 그러면 전 덮어놓고 강의실에서 퇴장하라고 합니다. 엎드려서 자고 그러면 일으켜 세워서 내보내 버립니다. 모든 사람들이나를 다 집중해야지 만 설교도 되고 강의도 되는데 집중을 잘 안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 어느 책을 읽어보니까 집중하는 사람들은 이해력은 뛰어난데 다양한 창의성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게으르고 그리고 뭔가 이렇게 좀 엉뚱한 이런 아이들이 굉장히 창의적입니다. 머리를 굴리는데 창의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암기하지 못하고 그런 것 고민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있어서 한가지 기능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구나. 그러니까 뭔가 집중을 안하고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가끔 보면 학교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그러면서 전교에서 그리기 대회를 해서 1등을 했다고 상을 받아오고 그렇게 합니다. 하루는 상을 하나 받아 갖고 왔는데 금상이라고 액자에다 근사하게 걸어서 가져왔습니다. 1등을 했다고 하면서 아빠 그런데 이상한데 선생님들이 내 그림을 거꾸로 걸었어. 지금도 거꾸로 걸려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들이 이렇게 자녀들을 억압적으로 이러는 것 중에서 진짜 가치 있는 것들이 다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몇 가지는 아직도 가치가 있지만 그렇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모든 것들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그릇된 기대에서 표출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한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저런 돌연변이가 나왔는가 창피하다. 형들을 다 보아라 무슨 대학교 뭐, 뭐 나왔는데 넌 창피하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그것이 왜 창피한가 하는 것입니다. 전부다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얼마나 획일적입니까? 좀 다양하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좀 처진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해야지 그것을 형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도 잘해야지 된다고 강요를 받으면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다 무언의 폭력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누가 와서 꽃잎 갖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냥 물만 주면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자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역할은 그 자녀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느끼면서 자기가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성취되는 어떤 것들을 보면서 그것이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에 대한 그릇된 기대, 자녀들에 대한 그릇된 기대, 자기가 이룬 것들을 자녀를 통해서 계속 유지하려고 하고 또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들은 한이 되어서 자녀들에게 이루어보려고 하는 식의 교육의 태도를 가지고는 결국은 폭력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계속 분노를 촉발 받게 되고 그리고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자매 하나는 남매인데, 집에서 오빠만 예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도 꼭 오빠만 사고 자기는 헌 것을 주고 학용품을 사도 오빠를 사주고 오빠가 쓰던 것을 물려받게 하고 그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는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가져와도 오빠, 오빠 매일 오빠 타령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에 있어서는 자기에게 관심을 집중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적표, 공부입니다. 그러니까 애가 아주 오기를 품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부모님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우리 애들도 나를 좀 미워하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해서 공부를 참 잘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수하는 심정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겉으로는 공부가 남았지만 이제 공부가 다 끝나고 가정을 이룰 나이가 되었는데 그런 잘못된 동기에서 공부를 해온 동안에 망가진 그의 성품은 배고픔처럼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 치료되어야 할 목표입니다. 그 애는 그래도 하나님을 만났으니까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아야겠다는 길이라도 알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여전히 살아갔더라면 공부를 해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갔을지 모르지만 그런 그릇된 구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일그러지고 노여움을 사면서 자기의 심성이 일그러진 것에 대해서는 자기 스스로 그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야 할 정도의 상황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랬을 때에 자녀를 다루고 보살피는 그 어떤 삶의 방식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돌봄을 받아왔던 것과 얼마나 유사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 되신 주님이 이제껏 여러분들의 인생을 인도해오셨습니다. 가르쳐오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가르쳐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이런 자녀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목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표들을 성경을 통해서 기록을 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아버지의 요구대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드렸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다루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깨닫지 못하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그 길로 계속 걸어가면 잘못될 것 같아서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했지만 때린 후에는 매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어루만지셔서 주님의 징계가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이신 주님에게 있어서 모든 기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폭압적으로 다루시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학대를 받으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들이 누군가와 이렇게 비교되면서 상대적으로 하찮은 취급을 받으신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능력이 있는 사람대로, 능력이 없으면 능력이 없는 대로 젊은 날에 주님께 부름을 받아서 신앙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면 젊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이가 많아서 봉사할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는 연세에 부름을 받았으면 그런 데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여러분들을 다루어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만족을 드리는 자녀였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아픔을 드렸던 것 같은 그런 자식이 우리들에게 있었더라면 벌써 의절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아버지의 자녀로서 지금도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살아갈 터인데 왜 우리는 자녀들을 돌보고 가르침에 있어서 그렇게 소중한 우리의 아버지께로부터 영향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국은 여러분들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는 은혜, 그분의 성품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감화 이런 것들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자식을 야단칠 때 신앙 뚝, 신앙은 그것으로 끝나고 이제는 너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기대대로 너를 가르칠 뿐이다 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가히 폭력배 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셨습니까? 인간 아버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 말입니다. 어떤 아버지셨습니까?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어떻게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구원해주셨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 가운데 펑펑 우는 눈물의 감격으로 아버지의 큰사랑을 이해하고 효성스런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살절음이라도 베어서 아버지의 마음에 맞는 자녀가 되기로 결심한 날들,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면서 산 날들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저는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근심과 번민을 안겨 드린 그런 고생스러운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의 또 다른 이름은 은총의 덩어리들입니다.
자식도리를 하지 못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을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돌보시면서 길러오셨습니다. 가는 길을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늘 교훈 하셨고 교훈 하셔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책망하셨고 그래서 바르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면서 여러분들을 신앙 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지만 한번도 창칼로 여러분들을 위협한 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인격적으로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는 자녀들을 향해서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러면서 여러분들의 아버지의 노릇을 해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한때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주님의 뜻에 거스르며 살았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채찍과 몽둥이로 단련 받지 않고 살아왔는데도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는 정말 그렇게 살지 못해서 그렇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실망시켜드리지 않고 아버지, 좋은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면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하는 착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처럼 망가진 사람들이 이 나이에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 앞에 그런 자녀가 될 수 있었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정말 주님을 알아가면서 그러면서 처음에는 우리가 주님의 그런 사랑,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어떤 의미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믿음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이 누구인지를 배워 가면 배워갈수록 이제 하나님의 그런 목자 되신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그런 놀라운 이 관계의 사랑, 인격적인 하나님의 훈련 이런 것들이 몽둥이와 칼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하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마음 아플 때가 언제입니까? 그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서 얻어맞았다. 사업이 거덜났다. 직장에서 짤렸다. 이때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내가 그 하나님의 마음에 너무나 많은 아픔을 드렸구나. 그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식인 우리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반드시 성적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우리부모, 아버지인 우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그것만이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기 위해서 사실 우리 아버지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용서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결단과 용기가 무엇인지 다른 지체를 헤아리는 섬세함이 무엇인지 거룩을 추구하면서 도덕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면서 아버지는 이상하게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 아버지는 싫어하는 것이 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갖고 싶어하는 것이 어떤 것은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것들이 우리 아버지에게는 너무 소중하고 다른 아버지는 성적표 놓고 가슴을 끓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의 사람되지 못함을 인해서 아파하시는 분이시구나.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아버지이외에 누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배워가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의외로 믿음에 대해서 냉담한 자식들이 생겨납니다. 교회에 중직을 맡은 사람들의 자녀들 가운데 반 신앙적인 돌연변이들이 생겨납니다.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국은 물리적인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살았고 교회 안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교회 안에서 자랐지만 신앙은 그렇게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하는 아버지, 신앙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아버지, 그래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아버지의 삶이 올바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한 기준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자식의 삶,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식들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를 가르치고 교육하는 모든 동기들이 거듭나야지 됩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르시고 돌보신 그 심성으로 자녀들을 돌보아서 그래서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고 한 그루의 나무를 가꾸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녀들도 사랑 속에서만 자기가 완성되어 갈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누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여러분들은 한 세계입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아버지인 여러분들, 어머니인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헛된 기대를 신앙으로 타파하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일관성이 있는 삶을 살고 나아가서 자녀들을 깊이 사랑함으로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목표자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기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각자 자식의 몫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잘 교육받고 자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줄 의무는 부모들에게 있지만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교육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하는 것은 아이가 어느 학교에 들어갔는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가 얼마나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는가에 의해서 부모의 교육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인간다운 인간으로 사람을 만들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구겨짐이 없이 고운 심성을 가지고 그렇게 이 사회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그를 길러내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제 미래의 사회는 6-70년 때처럼 그렇게 달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외워서 이 시험 저 시험보고 직장에 들어가던 그런 사람들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이런 방식의 기독교적인 교육이 자녀들에게 있어서 필요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의 모범생을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더 창의적이고 그리고 무엇인가 혼돈 된 가치관으로 얼룩진 이 시대에 참다운 신앙의 사람은 어떻게 혼란을 극복하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가 그런 또 다른 종류의 가치를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이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 어린이날을 맞아서 뭔가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것들로 보상을 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정말 깊게 고뇌하면서 이렇게 여러분들이 어떤 잘못된 편견 중에 어떤 것으로 인해서 자녀들이 분노하고 노여워하고 있는지를 헤아리면서 지금이라도 구겨진 그들의 심성을 펴주고 그리고 복음 안에서 신앙으로 무럭무럭 좋은 사람,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자녀들을 돌보고 가르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2.부모를 공경할 3가지 이유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성경에 특별히 어버이를 공경하는 주일을 만들라는 계명은 없지만 사람들이 마땅한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한 주일이라도 특별한 날을 만들어서 일년 내내 유지하며 살아가야 할 삶의 정신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대해서 십계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신약에 넘어와서도 부모공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가족들에게 버림받았을 사도 바울 조차도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않은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상기시키면서 부모공경 대의를 설명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세 가지 이유를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우선 첫째는 이것이 창조의 질서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부모를 공경하지 않은 사람들,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부모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흔히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실제로 동물들의 세계를 돌아보십시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지 못한 천한 피조물들이지만 그러나 작은 벌레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커다란 짐승에 이르기까지 그 미물들이 자기의 새끼를 보존하는 방식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 확실히 그 피조물들의 삶에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 속에 주신 질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작은 벌레로부터 시작해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기르는 그 동물들의 세계는 우리들로 하여금 숙연해지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창조해놓은 이 세계가 질서를 유지하고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특별히 죄가 들어와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화목한 관계가 깨트려진 이후에는 이런 필요성들이 더 증대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창조의 질서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동물들이 자기의 새끼를 낳고 보호하는 것과는 훨씬 차원이 높은 도덕적이고 숭고한 덕이 작용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여전히 그런 창조의 질서를 따르고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경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잘 보존하시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창조의 질서들을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잘 낳고 기르는 것은 창조의 질서이고, 특별히 이런 창조의 질서 때문에 우리들이 보존되고 잘 생명을 간직하고 사람답게 살아왔으니 짐승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고 인격이 없으니 그 이상의 무엇을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들은 그런 부모들의 돌봄을, 보호를 통해서 이어가는 창조의 질서를 깊이 이해하는 인격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들은 마땅히 그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부모가 자식된 우리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보면 자식은 우리들은 그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오늘 다윗의 집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압살롬의 반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세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는데 그 암논은 이 압살롬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먼저 하기 전에 어째든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 반역은 다윗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압살롬은 그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서 무려 사 년 동안이나 실제적으로 꼼꼼히 사병들을 기르고 무기들을 모으고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며 그렇게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윗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이제 압살롬의 편에 붙어서 왕의 목에 칼을 대는 그런 불행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왕은 반군에게 쫓겨서 정처 없는 망명에 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일평생 지워지지 않는 뼈아픈 부끄러움이었으며 고난이었습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다윗 이전의 사울을 추종하던 세력들과 다윗의 통치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있던 무리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고 그리고 그는 자기의 고백대로 하나님 앞에서 재를 무릅쓴 외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그 반역은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고 그는 신앙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의 편을 들어주셨고 압살롬은 이제 다윗의 군대와 마지막 격전에서 여지없이 패하고 자신은 도망을 가다가 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려 다윗의 장수에게 찔려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돌에 파묻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왕국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그 끔찍한 반란에 사건은 종식되고 괴수는 처치되었습니다. 이제 왕국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그런 점에서 이 승전보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이 토벌되었다는 기쁜 승전보를 접하고 다윗은 실성한 사람처럼 “내 소년 압살롬은 어찌 되었느냐?” 물었습니다. 전쟁의 승패보다 자식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진군하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그 군인들에게 다윗은 나의 소년 압살롬을 만나거든 나를 생각하여 너그럽게 대접을 해달라고 목숨을 구하면서 자기의 장군들에게 사정을 하였습니다. 내 소년 압살롬, 나의 소년 압살롬, 반군을 이끌고 역모를 꾀할 정도로 장성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 다윗의 마음에 압살롬은 한 어린 소년,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 어린 소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을 “나의 소년”이라고 불렀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은 압살롬이 죽었다고 하는 우회적인 보고였습니다. 보고를 듣고 압살롬이 죽은 것을 알고 승전의 기쁜 소식도 아랑곳없이 자기의 왕국을 되찾기 위해서 피 흘렸던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역모를 꾀하고 자기의 사랑하는 병사들을 수없이 죽이고 자기의 목에 칼을 겨누었던 압살롬을 인하여 슬피 울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압살롬아” 하며 그는 슬피 울면서 통곡을 하면서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다윗을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정도였고 그리고 다윗을 추종하던 백성들이 반감을 사서 마음을 왕에게로부터 돌릴 정도에 이르기까지 슬피 울었으니 압살롬을 향한 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압살롬이 정말 그렇게 엉겁결에 그렇게 불현듯 반란을 일으킨 것 이외에는 다윗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런 아들이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살펴보기 전에 우리들이 깨달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압살롬은 다윗에게 있어서 반역의 사건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다윗을 향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이었고 다윗의 집안에 칼과 난리의 소문이 그치지 않게 한 장본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는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그 암논은 이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유는 이것입니다. 압살롬이 자기의 배다른 누이 다말을 강간하였는데 그 다말이 바로 이 압살롬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여동생이었습니다. 이 압살롬과 딸 다말은 아람지방의 한 작은 섬의 임금인 ‘마하가’라고 하는 공주의 몸에서 태어난 소생들입니다. 그는 이방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로서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도 있었을 것이고 또 열등감도 많았을 것입니다. 결국 복수의 감정을 품은 이 압살롬은 큰형 암논을 연회로 초대해서 자기의 모든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죽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그 일에 동의해줄 줄 알았는데 무서워서 모두 도망치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황급히 피신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큰아들이면 왕위를 이을 아들인데 그 아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이 때려죽였으니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왠만하면 당장 잡아다가 대역죄로 다스려서 죽였어야 마땅한데 아버지의 사랑은 참 맹목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이 여기에서 보여주는 이 모습은 위대한 신앙 인으로서의 다윗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아들은 죽은 아들이고, 살아있는 이 아들 압살롬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3년만에 이 아들을 다시 불러오고 2년 후에 정식으로 모두 용서하고 화해하게 됩니다. 그 화해를 통해서 아버지의 신임을 얻던 그 때가 바로 압살롬이 구체적으로 반역을 도모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이 자식의 패역함과 아버지의 맹목적인 사랑이 함께 겹쳐지는 이 그림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상처투성이의 고통을 안겨준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상처가 많았을 것이고 틀림없이 아마 이 압살롬은 아버지를 전혀 존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마 이 자식 압살롬은 아버지라고 하면 가장 혐오스럽고 아주 더럽고 비열하고 야비한 인간, 그래서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만약에 압살롬에게 아버지를 죽일 기회가 왔다면 아마 자기 손으로 자기 아버지의 목을 찌르고도 남을만한 그런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그렇게 비쳐졌지만 그러나 압살롬이 아버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향한 가슴 저미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나타나있습니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오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날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늙어도 우는 자식은 거의 없지만 젊은 날에 자기를 앞서 죽은 자식을 생각하며 늙은 날에도 우는 부모는 많습니다.
언젠가 한번 텔레비전에서 이산 가족이 만나는 가운데 상봉을 했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서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그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메모를 해서 아이를 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장성을 해서 이제 가정을 가진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어머니를 끝까지 추적을 해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화상으로 서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자식이 부모와 상봉하는 때에 대조적인 어머니와 자식의 광경을 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이제 확인이 끝나고 난 다음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머니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나를 버려서 나는 알지도 못한 사람의 손에서 근본이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긴 세월을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막 우는데 그 눈물은 원한에 맺힌 눈물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졸도할 정도로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용서해다오. 그때는 내가 생각이 짧았고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너를 데리고 있으면 너도 굶어죽고 나도 굶어죽을 것 같았단다. 죽어도 너와 같이 죽었어야 되는데 정말 용서해다오. 그러면서 한없이 울면서 하는 이야기가 너를 그렇게 버리고 즉시 가봤지만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30년이 넘어 오는 이 세월동안에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고 한순간도 너를 잊은 날이 없고 매일 너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단다. 자식이 하는 말이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를 버렸는데.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자식은 부모만큼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에 따라가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나쁜 부모의 사랑이 아주 훌륭한 효자의 사랑보다 더 뛰어납니다.
(예화: 존경하는 목사님의 이야기: 한 달에 한번씩 서울에 있는 모든 거지들을 위해 예배를 드 리며 복음을 전하고 갈 때에 오 천 원을 주면서 보냈는데 어느 노인이 끝나고 갈 때마 다 목사님이 입으신 코트를 만지며 갖고 싶어했는데 한날 불러서 선물을 받은 것이기에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돈을 주겠으니 잠바를 하나 사 입으라고 하면서 전혀 그런 거지 생활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에 그의 사정을 물어보니 자식이 여럿이 있는데 그 자 식들이 하나같이 잘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어떻게 자식들이 부모를 돌보지 않아 이 렇게 거지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가 불러서 이야기를 해야지 되겠다며 자식들 연락처 를 묻자 그 다음부터 아무 말도 없었는데, 그 목사님의 말씀이 만약에 자식이 그 처지가 되어서 누군가 물으면 아버지에 대해 비판했을 것이라며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들의 명 예를 보존해주고 싶었던 것이라는 이야기)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시집 장가가서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이 자기의 마음을 잘 몰라주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기 전까지는 부모의 사랑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입으면서 우리들이 자라온 것입니다.
몇 주전에 제가 국민일보에다가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이제 자식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까 부모를 깊이 용서하고 한 가정이 되어야한다고 글을 썼더니 어느 독자가 전화를 했습니다. 나는 안 받고 부 목사님이 받으셨는데 그분의 하시는 말씀이 김남준 목사님의 책도 좋아하고 말씀도 좋아하지만 이것은 잘못 쓴 것 같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데 이 세상에는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식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부모들이다. 본인이 그랬는가 봅니다. 그러니까 본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몇 주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도 일리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식은 돌아다니면서 자기 부모의 욕을 많이 합니다. 술술 털어놓습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우리 엄마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네 하며 술술 털어놓습니다. 부모들은 좀처럼 털어놓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자신은 구차하게 살아도 자식들에게는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건 사랑의 마음입니다.
정말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곧 잃어버립니다. 부자 집에 초상이 났을 때 시신을 옆에 모셔놓고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다투는 장면들이 가끔 나타납니다. 유산을 놓고 벌써 싸우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문상객이 오면 황급히 뛰어가서 ‘애고 애고’ 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상을 당한 집에 갔을 때 제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픈 집이 누구인가 하면 자식을 앞서 여윈 그 부모가 있는 그 상입니다. 너무 슬픕니다. 그 부모의 마음이 그런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또 부모가 여러분들에게 바른 도리를 다 못해주었다고 할지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많은 사랑이 그 부모님들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부모가 여러분보다 공부도 훨씬 많이 하고 여러분보다 교양도 뛰어나고 신앙도 아주 깊고 훨씬 여러분보다 도덕적이고 기왕이면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여러분보다 훨씬 높아서 도저히 그분을 존경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그런 부모를 가진 자녀라면 여러분은 행복한 자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부족한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보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우리처럼 신앙으로 살지도 않는 부모들을 봅니다. 우리처럼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판단력도 흐려서 자식들을 늘 곤고하게 하는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을 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일평생을 살면서 마지막 죽는 순간에라도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 하면서 아들의 죽음을 인해서 슬피 울며 목놓는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헤아리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부모의 마음속에 있는 우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길러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비로소 깊이 터득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아직 자식을 낳아보지 못한 여기에 있는 사랑하는 많은 지체들은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판단을 좀 유보해야지 됩니다. 특별히 ‘정말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는 이 판단에 대해서는 좀더 유보해야지 됩니다. 자식을 낳아보면 그 자식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들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 어머니로서 우리 안에 있는 이 사랑의 비밀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도 겉으로는 엄격하시고 겉으로는 여러 가지 점들이 부족하셨지만 그러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그분들 속에 이렇게 있었겠구나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어떤 때에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후에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되어서 이름은 잊혀졌지만 이조 시대인가 어느 시인이 자기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정확하게 옮길 수는 없으니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반 중 좋은 감이 고아도 보이나이다” 다시 말하면 “쟁반 가운데 있는 붉게 익은 감이 참 곱습니다” 그 뜻입니다. “그 감을 품은 즉 하나” 다시 말하면 대접을 받다가 그 감을 하나 품에 이렇게 품어 가져감직 하지만 마지막에 “품어가 반길 리 없으니 이를 서러워하노라” 높은 집에 대접을 받기 위해서 갔는데 그 집에서 내온 감을 보니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나 좋아서 저렇게 잘 익은 그 감을 우리 어머니, 혹은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시는데 그것을 가슴에 품고 가서 부모님께 드림직 할 좋은 감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없구나. 그것을 생각하니까 서러워진다고 하는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이후에야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들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인생이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분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러나 아직 표현되지 않았고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자신이 헤아릴 수 없었던 부모의 마음에 있는 깊은 사랑을 깨닫고 나서 효도하고 공경하고자 하나 그 부모가 없어서 후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처럼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부모가 어떤 것들 하나를 잘못하면 사랑은 가슴에 심겨지지가 않고 상처는 잘 심겨집니다. 그런 것 하나 탁 심겨지면 그 다음에는 부모가 자신을 향해서 잘못한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나 혹은 일 가지고 그것이 가슴에 꽉 찬 나머지 그 아픔에 눈이 멀어서 부모 속에 있는 진솔한 사랑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안 그렇습니다. 우리가 뭘 보면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우리들이 자식을 길러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때 화가 나서 자식을 매질을 하거나 아니면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해서 자식들에게 본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을 향한 사랑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내 자식들 보기에 올바른 신앙 인으로 못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사랑입니다. 그 두 가지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향해서 그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향해서 무엇인가 은혜가 기억되는 부모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자식으로서 먼저 그 부모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 속에 그런 허물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는 내가 마음에 상처나 고통 때문에 차마 보지 못하는 부모님의 그런 사랑들을 깊이 진정으로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전혀 다윗을 존경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회가 있으면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마음속에는 뭐가 있었습니까? 압살롬에게 상처를 준 것도 사실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뭐가 있었는가 하면 무엇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압살롬을 향한 사랑, 무엇을 그 사랑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왕국을 주고서라도,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좋았을 뻔하였다.” 그러면서 압살롬을 인해서 슬피 우는 다윗의 마음을 보십시오. 압살롬에게 다윗은 자식에게 만족을 준 것이 없는 아버지였지만 그러나 다윗에게는 사랑은 진실로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떠한 희생으로 여러분들의 눈에는 부모의 삶이 인격이 눈에 차지 않을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길러왔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모든 면에서 여러분의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없는 행복이니 여러분들은 그 분들을 더 많이 공경해야할 것이로되 그렇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지금 부모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과는 비교될 수 없는 사랑을 그 부모님들은 여러분들을 향해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그 부모의 마음속에 어디로 가든지 어떤 때이든지 잊혀질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고 그리고 자식인 여러분들의 오늘날의 교육, 오늘날의 삶 모든 것들은 그분들의 피눈물나는 인생의 터 위에서 세워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양육하고 길러오게 하셨으니 이제 여러분들이 그런 깊은 부모의 사랑을 헤아리고 그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그가 정말 아들이었습니까? 자기가 여전히 살아있는데 자기의 큰형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이고 그리고 집안을 피가 낭자한 전쟁의 집안으로 만들고 급기야는 자기의 목에까지 칼을 들이대고 생명을 노렸는데 그 아들이 악해질 수 있으면 얼마나 더 악해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압살롬과 같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압살롬은 반역의 괴수도 아니었고 자기의 가슴에 상처를 준 원수도 아니었고 자기의 아들을 죽인 살인마도 아니었고 그저 소년 압살롬이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향해서 이런 사랑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악한 부모도 훌륭한 자식보다 뛰어나게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이런 사랑이 결국 우리에게 빛이 되어서 우리를 양육하고 길렀고 맹목적 적으로 헌신적인 그런 사랑 속에서 우리는 돌봄을 받으면서 이렇게 오늘날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희생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아직까지 부모님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회개할 기회가 있는 사람이고 부모에게 잘못을 속죄할 수 있는 처지이니 행복한 줄 알고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는 이 일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기울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 슬하에서 도덕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존경할만한 부모님으로부터 흠뻑 사랑을 받고 자란 자식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부모를 깊이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 우리 아버지라고 대답하는 자식들은 특별히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는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할 수 없습니다. 그저 모두 평범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처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는 하여튼 이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생각들이 가슴에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자식, 어머니로부터 고통을 받은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와 같은 교회 이런 말들이 쉽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여러분의 어머니가 너무나 부족해서, 여러분의 어머니가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쓴 어머니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노심초사하면서 여러분들을 돌보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여러분들을 어린 시절에 내동댕이친 아주 못된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인자하고 도덕적인 대신에 젊은 날에 허랑 방탕하게 보내고 그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자식들을 폭행하던 그런 막댄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전혀 그분들의 인격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마음이 갈등을 일으켜서 여러분들을 곤고하게 하는 그런 부모를 둔 자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언제 주어졌는지 아십니까? 두 번 주어졌는데 첫째는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한 후에 시내 산에 거할 때 십계명 속에서 처음 주셨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똑같은 계명을 상기시켰는가 하니 가나안 정복을 앞둔 때에 다시 한번 모세를 통해서 이 계명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던 이 다윗은 말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하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의 사랑이 부족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핑계해서 불효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은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은 부모로부터 받아야지 해결이 됩니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필요하고 더 나이가 들면 자식으로부터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내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고 자식의 사랑이 남편의 사랑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이 모든 사랑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남편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 그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극복하고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일찍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망가진 사람으로서 살아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은 누구입니까? 부모는 우리에게 공경 받을 자격이 없을지 몰라도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그 명령을 하실 자격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갔더라면 영원히 죄 가운데 살다가 압살롬처럼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마지막에 짐승처럼 살다가 동물처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에게 주님의 사랑에 눈뜨게 하시고 주님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무릎을 꿇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가지면서 살아왔습니까?
주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살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빚지면서 살아온 부채덩어리의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한 몸에 받으며 그 은혜 속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우리들이 아버지의 큰사랑을 경험하면서 살아온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준 사랑에 빚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 육신의 어머니는 불안전한 부모이었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완전한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모본이 되시지 않은 적이 있으셨습니까? 우리에게 상처를 주시거나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신 적이 있습니까? 지혜가 부족하셔서 마음에는 사랑이 있으나 지혜가 부족하셔서 우리에게 실수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분은 완전하신 아버지였고 완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어서 그래도 우리 부모는 우리를 향해서 아낀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서 아무 것도 아낀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고 이런 저런 일로 상처받은 인생들을 주님 혼자 싸안으시고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장성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영적인 순례의 길에서 주님이 우리를 혼자 있게 하시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먹이시고 기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을 주의 말씀으로 일일이 가르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배우게 하셨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식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를 일러주셨습니다. 육체의 욕심과 방탕한 욕망에 이끌려서 인생에 갈 길을 잃어버릴 때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핑계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앞에 부족한 자식이었던 것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막대 먹은 자식과 같은 우리들을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하셔서 한번 자녀 삼으신 후에 이제껏 까지 한번도 우리의 허물을 인해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믿음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는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는 계명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막대 먹은 우리들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시면서 우리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가정에서 상처가 있고 부모님으로부터는 충분한 사랑을 못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더 완전한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굽은 것을 교회에서 펴게 해주시고 오히려 부족한 우리의 부모들을 통해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갖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신실한 사랑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이나마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되겠다 라고 하는 진실한 결심을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서 우리들이 살아왔습니다.
그럼으로 계속해서 가정의 상처만을 생각하면서 가족들을 사랑하고 화해하며 살아갈 수 없는 그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마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오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아들로서 딸로서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교회를 어머니로 삼으면서 그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하나님께 이런 사랑을 받고 교회로부터 이런 보살핌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모두 그분을 향해서 대적하던 못된 자식들이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목에 칼을 겨누고 반역을 일으켰던 압살롬보다 더 못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식답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를 당신의 자식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의 이름 석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인격적으로 당신에게 승복하지 아니하고 막대 먹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주님께서 몽둥이와 징벌의 매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시고 짐승과 노예처럼 우리를 기르지 않으시고 사랑의 줄로 우리를 묶어 인격에 호소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굴복하게 하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부모님에게는 못 받은 사랑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일생동안 형극의 길을 헤치며 자식들을 사랑한 부모보다 위대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부족하고 모자라는 자신의 부모를 깊이 사랑하게 된 은혜 받은 자식들이 더 위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입니다. 부모를 보면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지 말고 아버지로서 내가 너희에게 베푼 이 큰사랑, 내 아들 십자가에 못 박아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한 나의 이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 간절한 부탁이니 부모를 공경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사랑, 그 은혜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여러분들이 어떤 자식이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앞에 드린 효성스런 삶은 거의 없고 우리들이 살아온 모든 날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용서와 사랑과 은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온 그 삶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반란을 일으키다시피 패역하고 막대 먹은 자식처럼 살면서 주님의 명예를 더럽혔고 주님께 불순종하였지만 아버지에게는 언제나 여러분들이 내 소년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사랑하시고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참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여러분들을 승복시키시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면서 이제껏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부모로부터는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못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확언하건대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의 심령이 굳어져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받은 여러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랑과 은혜를 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 여러분들의 집안에 흐르고 있는 이 불순종과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패역들을 끊어버리고 이제는 깊이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부모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계신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주고 공경해주는 자식들 때문에 소망을 갖는 그런 부모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가족이 되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아버지를 안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십시오. 부모로 하여금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삶의 보람이며 기쁨이 되게 하시고 그 일이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그 사랑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남은 날들을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 그리고 우리의 동기간들, 우리의 부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시간들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리고 자식들로부터 효도 받지 못하고 죽은 부모들에게는 후회가 없어도 부모를 깊이 공경하지 못한 자식들은 언젠가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깊은 고통이 되고 한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설교하지만 저도 우리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못 됩니다. 늘 그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행히 두분 다 살아 생전에 계십니다. 어린 시절동안 할머니가 어머니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저를 양육해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늘 그런 또 한 분이 생각이 납니다. 할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50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생각이 납니다. 이맘때가 되면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딱 하루만이라도 그분이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옛날처럼 가난하지도 않고 부하지도 않지만 모자라는 것도 없고 이제는 그분이 무엇을 원하든지 돌봐드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런 섬김을 한번도 받지 못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지금은 그분을 생각하면서 제가 눈물을 흘리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마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또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저만의 경험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아직까지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깊이 그분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로부터 진 사랑의 빚을 그 부모에게 갚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진 사랑의 빚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 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서 기록을 하여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정말 그 사랑에 빚진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훌륭한 부모님을 둔 사람들은 그래서 더 부모를 공경하고 상처가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 상처 때문에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더 많이 용서하고 사랑해서 그래서 부모님들이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빛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를 돌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마음에 부담들을 풀고 그리고 나의 자녀들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을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그것을 깊이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많이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보면서 비로소 여러분들의 부모로부터 여러분들이 받았던 영향이 아닌 정말 좋은 영향을 보면서 받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깊이 끌어안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부모님이 아직까지도 살아 계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분들에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는 그분들을 그 노년에 더 이상 기쁜 날이 없고 곤고한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것 이상의 효도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만으로도 사실 그 부모님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못다 받은 효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실 필요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고 아직까지도 불행히도 여러분들이 믿지 아니하는 부모님을 가지고 계시다면 여러분들은 깊이 고뇌하며 여러분들이 슬피 울며 여러분들의 부모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함으로 여러분들의 부모가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책임이 여러분 자신에게 만 있는 것처럼 믿으면서 그 부모님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주시도록 하나님께 호소하고 간절히 기도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년에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을 통해 베풀어지는 효도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하시고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이 효도해도 다 채울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으로부터 흠뻑 채워서 노년의 그런 사랑의 빚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또 다른 자녀로서 살 수 있는 그런 부모님들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그분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자녀들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가족의 영혼을 향한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로마서 8장은 아주 유명한 장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는 장엄한 승리의 선포로 시작되는 이 8장은 후반부에 와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격렬한 표현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권세 자들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놀랍게 선포하면서 찬송합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의 마음이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찼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찬송이 끝난 다음에 그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면서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뇌에 대해서 피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구원받지 못한 자기의 가족들, 골육 친척들 나아가서는 한 피 받은 자기의 동포와 겨레들을 인해서 아파하는 그 마음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형식적으로만 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정말 진정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런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는데 그들은 아직까지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한없는 고통을 느껴본 사람이 아니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이런 경험들을 하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는 예수 믿는 자기 자신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고 안 믿고 살아가는 가족들도 그렇게 불행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런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한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구원받은 성도가 얼마나 다행이지를 깨닫고 난 다음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불행한 사람들이 자기의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의 이런 고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족도 “전도를 못하는 주제에”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이 더 어렵습니다. 가족들을 전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지금 그렇게 잘했으면 왜 자기의 골육 지친 아마 “골육”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부모나 자기의 동기간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성경 어디를 돌아봐도 사도 바울이 자기 집에 가서 전도를 해서 가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랬더라면 이런 아픔과 탄식 속에서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구원의 역사를 사도 바울이 일으켰습니까?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로 부름을 받아서 가는 곳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어마어마한 회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자기가 한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자기가 그런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가족들을 위해서 이런 도구로 쓰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강력한 성령의 권세 아래, 설교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똑같은 사람인데 자기의 골육 지친 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 마음을 볼 때 로마의 황제에게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던 이 사람이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전파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도 간단하게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혹독한 박해를 받고 내침을 당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를 잘 안 믿으려고 할 때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원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보면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믿게 되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든 이 가족들을 구원해야겠는데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가족들이 구원받지 않으면 아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를 할 때 한참 아이들이 은혜를 받을 땐데 복음을 전하니까 아이가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놀랍게 아이가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구원의 도리를 설명해주는데 예수를 믿어야지 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러면서 구원의 의미를 쭉 설명해주었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오,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니까 애가 그러면 선생님 우리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애가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령을 불문하고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우리 서로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지 말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의 진수로 돌아갑시다. 노인네들의 건강은 ‘장마철의 햇살’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여지까지 주님을 믿지 않는 여러분들의 부모들이 내일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죽음은 어느 순간에 불현듯 다가올 것이며 예기치 못할 일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정직하게 말하자면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는 끊임없는 불길과 영혼에 견디기 힘든 고뇌와 그리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곳입니다. 어떤 은총의 희망도 없고 하나님과의 어떤 교제도 없는 그런 비참한 곳입니다.
믿지 않는 우리 남편이 사람 참 좋은데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부르시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정직한 진술입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대로 태어나지만 죽음은 순서를 무시하고 우리를 부릅니다. 그때 가족들에게 만약에 아무리 우리들이 무엇인가 가족들을 위해서 해준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지 아니하면 그를 위해서 해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효도를 다하여 물질로 부모를 공양하고 공경함으로서 기쁨을 누렸던 부모들이 어느 한순간 죽음을 맞이하여 심판의 자리로 이끌려갈 때 그들은 슬퍼하며 여러분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이런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왜 너는 나에게 말해주지 않느냐. 슬퍼하면서 여러분들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다 말해주었는데 아버지가 싫다고 그랬잖아요. 이렇게 변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아닌데, 그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예수를 속히 믿어야 될 이유는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심판 말고도 또 하나 시급한 이유는 화목한 가정이 되려고 애를 쓰는데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 뜻대로 안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맺힌 것을 풀려고 하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무엇인가 그를 위해 해주고 도와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궁극적으로 이 가정이 참답게 회복되기 위해서는 가정을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새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사람을 누가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면서 철이 들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변화되어 가는 가운데 새사람이 되는 것이지 어떻게 새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깊이 캐들어 가보면 궁극적으로는 가난이나 질병 환경이 아니라 변화 받지 못한 자신 때문에 각 사람 때문에 가정이 화합이 깨트려지고 불행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보다도 더 형편없는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믿고 은혜 안에 사니까 철들고 변화되어서 이제는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가족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으로까지 변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만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는 여러분들의 가족들도 변화 받고 그렇게 새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함께 변화 되어갈 때에 진정으로 행복하고 변화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가족들의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이유고 죽기 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속히 이루어져야 할 이유입니다. 교회에서 상이 나면 제일 먼저 초상 소식을 들으면서 묻는 질문이 신앙 안에서 죽었는가. 믿는 사람인가. 안 믿은 사람인가. 안 믿었다고 그러면 다리에 힘이 쭉 빠집니다. 가서 장례를 지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가서 기독교식으로 하든 제례 식으로 하든 그것이 죽은 이 본인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틀림없이 기회가 있었을 것인데. 병들고 이제 죽음을 앞에 둘 때가 되면 마음이 다급해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서 예수 믿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는데, 예수를 믿고 좀 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죽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인데. 왜 안 전했을까? 그 긴 세월을 마주보며 살았을 것인데, 물론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자기가 전도를 못하면 교회에 부탁을 해서 그래서 전도를 해달라고 그리고 길만 열어주었어도 누군가 가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인데.
지난주에도 우리 교회에 한번도 안 나온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서 영접하게 하고 그리고 교리를 가르치고 제가 병원에 가서 병상 세례를 주었습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건강해지면 우리 교회에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가족들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면 거듭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궁금한 것은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답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골육 지친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자기는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 저주는 구약 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주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세 가지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우선 첫째는 자기 자신이 굉장히 불행해집니다. 두 번째는 공동체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선 어떻게 됩니까? 저주받은 사람이 어떻게 되지요? 문둥병 같은 것들은 말하자면 천주의 병이라고 여겼습니다.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문둥병에 걸려서 그래서 온 몸이 전부다 허물어져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공동체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이제는 교제가 없습니다. 사귐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모든 축복과 교제가 끊어져버립니다. 그것은 좀 낫습니다.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저주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을 나누던 공동체의 사람들이 돌맹이를 들어 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것이 저주입니다. 그것을 자기는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만 될 수 있다면, 자기의 골육 지친 중 몇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자기는 원하는 바로다. 이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사랑의 극치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주를 받아” 라는 말이 희랍어로 “아나데마”인데 수동태입니다. “저주를 받은” 그런데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족들이 구원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핑계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 가족들이 너무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그들의 강퍅함 때문이라 자기가 말하면서 확신할 정도가 되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들은 강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심껏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을 수 있고 호의를 베풀고 예수님을 소개해도 안 믿으려고 마음에 결심을 하고 문을 닫아버린 여러분들의 가족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들은 강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강퍅하다고 생각되니까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내가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고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족들의 구원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서 흔히 핑계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께 돌아올 때가 되면 신기하게 놀라운 그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막 열렬히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그때가 가장 열렬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데 신기하게 어느 때가 되면 하나님이 환경을 여시면서 우리 가족들이 마음을 가난하게 하셔서 이제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겨나게 합니다.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분의 가족들이 구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지금 열심히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해봐야 무엇하랴. 하나님이 때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누구 말처럼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큰 사고를 당해서 온 몸에 깁스를 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그때가 그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업에 쫄딱 망하고 가세가 풍비 박산 되어서 그럴 때입니까? 언제입니까? 아무리 때가 흘러가도 눈물을 흘리면서 나 예수 믿게 도와달라고 그런 때는 거의 없습니다. 때가 이르렀는지 안 이르렀는지는 결국은 그것도 우리들이 열심히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에게 무엇인가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애를 쓸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국 이렇게 영혼들이 강퍅하다,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이런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지 우리가 감히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것에 대해서 합리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강퍅하다는 이야기는 그것은 네가 잘못해서 예수를 안 믿는다는 이야기고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두시니까 일이 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그것 말고 무슨 핑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는 무엇인가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 오늘 이 사도 바울과 같은 고뇌가 있는가, 아픔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아픔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막 열심히 교회 일을 하다가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 아버지는, 우리 엄마는, 남편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이렇게 열심히 애들을 가르치는데 우리 애들은 지금 교회도 안 나오지 않는가. 그때 부담이 생기는 것입니다. 힘이 쭉 빠집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 부담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가 보여주는 것은 부담이 아닙니다. 부담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기한 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 감격할수록 그 괴로움은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 이런 십자가의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데 우리의 가족들은 이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다니 하면서 하나님 앞에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강퍅함, 그래 그것이 원인일 수 있고, 때가 이르지 않은 것 그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환경이 허락을 하지 않아서 우리들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그것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정말 우리들이 그 가족을 구원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현실에 대해서 이런 고뇌와 괴로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돌아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고 인격적인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풍성함 속에서 살 때는 항상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르치는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며 가슴아프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와서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신령한 은혜로 가득 찬 그 순간에 지금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그들의 영혼은 안전합니까?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주님을 알아 가는 지식이 그들 속에 쌓여가고 있습니까? 또 그들이 교회에 나온다고 칩시다. 변화 받은 영혼입니까? 그들에게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까? 날마다 은혜 안에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입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한없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랑이 너무나 뼈에 사무친 나머지 차라리 구원받지 못한 내 골육 지친을 보면서 아파하고 이렇게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주를 받는 것이 훨씬 나을텐데,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정신,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강퍅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더 많이 그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고 그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찢었더라면 강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 이름 석자를 가슴에 끌어안고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 영혼에 고단함과 비참함,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영혼의 운명이 나의 운명인 것처럼 아파하며 많이 울고 주님께서 한 맺힌 기도를 풀어주시기 전까지 주님 앞에 매달리는 것을 그칠 수 없노라고 아버지 앞에 부르짖었더라면 때가 이르지 아니한 그때에 주님께서 그 때를 앞당겨서라도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하여 오늘은 함께 앉아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은 우리에게 이 가족들이 구원될 수 있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라고 하는 사랑의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없거나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들의 구원은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반드시 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받아야 한다라고 하는 이 절대적인 필요성,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의 그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무지한 우리의 가족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원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원한 맺힌 과부가 재판장 앞에서 끈질기게 매달렸던 것처럼 밤낮으로 부르짖으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한이 되도록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그들을 위해 매달리는 것과 그리고 또 하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라도, 머리를 잘라서 신발을 삼아서라도 살가죽을 벗겨서라도 옷을 지어서라도 입혀서 그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눈물로 복음을 전하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그 자리를 흠뻑 적셔도 아직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부모들도 있고 우리의 동기간도 있고 우리의 자식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일평생 우리가 기도해도 결국은 예수를 안 믿을 사람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 믿을 때 안 믿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말고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믿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고 만날 때는 전하고 흩어져 있을 때는 그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 호소해서 그들이 악하나 주님이 특별한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그 때를 속히 앞당겨주시도록 어찌하든지 그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은혜가 임하도록 한 맺힌 사람처럼 매달리는 것 이외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구원받은 우리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믿어 구원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열렬하게 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전 까지는 주님이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지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구원의 길을 여셨는데 우리같이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들도 구원하셔서 새사람을 만드시고 제법 철이 들어서 이제는 하나님 없이 잘 살던 우리들을 변화시켜서 주님 없이 살아가는 영혼들의 불쌍함에 대해서 눈뜨고 그들을 위해서 이 뺨에 눈물이 흐르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라도 하실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적어도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 가족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을 밟고 지나가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어느 날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우연한 기회에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희생한 적도 없는데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요행수를 바라는 사행심입니다. 그저 여러분들이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족들을 보면서 이것이 내 신앙의 성적표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직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 내 죄 때문입니다. 우리 남편이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내가 참된 신자가 되어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내가 오히려 복음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당신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난 아무래도 좋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어져서 죽어도 좋다라고 하는 그런 정신까지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리고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죽기까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화)아는 형제 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늘 기도하던 사람이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유산을 조금 준다는 이유로 형제들과 싸웠다는 이야기.
자기가 먼저 예수를 믿었으면 희생을 해야지 됩니다. 유산을 형들이 갖겠다면 다 주어야 합니다. 아우인 나, 마지막 며느리로 들어온 나에게 형님들이 ‘아우가 부모님을 모시게’ 그러면 그냥 하십시오. ‘부모님 생활비는 우리가 여유가 없으니까 자네가 다 대게’ 하면 예수 먼저 믿고 그들에게 복음 전하려고 하는 자기가 희생하고 하십시오. 해도 됩니다. 왜 받은 것이 많으니까. 무엇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동기간들에게 밤톨만한 사랑을 베풀고 해주면 해줄수록 뻔뻔스럽다고 하는 그런 정도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나데마의 정신을 보십시오. 죽기까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자기가 저주를 받아서 끊어질지라도 그래서 가족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자기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의 고백입니다. 손해를 봐야지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할 기회가 있다 그러면 그것을 ‘달란트’ 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이것은 기회구나’ 그들이 필요로 할 때 내가 희생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형들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아우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칩시다. 유산 몇 푼을 갖기 위해서 난 너 같은 인간을 형이라고 생각 안 해. 그렇게 해서 다 뒤집어엎어서 성공하면 유산은 받을 것입니다. 꼴좋네. 영혼들 팔아서 유산을 산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뭐 사랑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지 됩니다. 뭔가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선포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생전 들여다보지도 않던 가족들에게 불쑥 나타나서 ‘형, 똑바로 해. 예수 안 믿으면 그냥 끝이야, 지옥 가는 거야. 하나님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단 칼에 날려버린다고. 교통 사고 일어나서 하루에 몇 백 명씩 죽는 것 봤지. 똑바로 해’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정신병자입니다. 가족들의 구원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사기꾼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수없이 죽어야 합니다. 들어보십시오. 동기간인 내 말, 아내인 내 이야기를 내가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복음, 그리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들이 얼마나 불행해지는 것을 말할 때 깊이 신뢰하고 듣는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희생해야지 됩니다.
어느 자매 하나가 참 열렬했는데 새벽기도마다 나와서 온 집안에 남편과 자기 밖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예수 믿게 해달라고 동서들하고 그 동기간들을 예수 믿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이 여러 가지의 어려운 사정이 생겨서 이제는 네가 한 2년쯤 아버님을 모셔야지 되겠다고 가족들이 회의한 상황에서 결정이 났을 때 뒤집어진 것입니다. 첫째는 아버지께 유산도 많이 받고 둘째는 돈도 많고 셋째는 집도 큰데 셋방살이를 하는 내가 왜 부모님을 모셔야지 되는가 그리고는 집에 와서 남편을 뒤집어놓은 것입니다. 당신은 병신인가. 그 다음날 또 새벽 기도에 가서 또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백날 해보십시오. 그것이 되나. 안 됩니다.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정말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이 40년이 남았는데 20년 깎아 버리면 여러분 엄마 아빠 예수 믿고 온 가족이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거 할 수 없습니까? 20년 더 살아서 무엇합니까? 집을 두 채 가지고 사는데 한 채를 팔아서 날리고 여러분의 동생 중 한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지 않습니까? 돈은 또 벌면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선교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겠는가.
제가 중국에 가서 목사님을 한 분 만났는데 열심히 젊은 시절에 예수를 믿고 그러다가 문화혁명 때 대 숙청 작업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강제 수용소에 갖진 것입니다. 거기서 진짜 노예처럼 일하면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거기에서 혹독하게 강제 수용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월이 바뀌어서 풀려났습니다. 그 동안 가족들에게 연락도 못 했었는데 이제 가족들에게 돌아오니까 자기 아내는 이미 죽었고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은 아주 열렬한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정은 이제 반동분자의 집안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젊음도 이제 다 잃어버려서 기력이 없는 노인네가 다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마루에 엎드려서 막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신앙 하나로 살고 일평생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20년이 넘는 세월을 강제 수용소에서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데 내게 돌아온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슬픈 마음이 들어서 울고 있는데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애야, 보아라. 네가 일평생 나를 믿고 따랐지만 넌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거기서 이 양반이 깊이 통곡하며 주님 사랑합니다. 아내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어린 아들도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지만 주님 자신을 저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이 선교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아프리카 오지, 식인종들이 살고 있는 그런 곳으로 여러분들이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유산을 아낄 것입니까, 건강을 아낄 것입니까, 돈을 아길 것입니까, 아니면 안락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믿지 않은 가정에서 이런 선교사입니다. 아나데마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저주를 받아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하셔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면 이제는 종을 놓아주셔도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 평안히 돌아가게 해주셔도 저는 충분합니다. 그런 고백, 그런 고백이 우리에게 정말 없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들이 아직까지도 우리를 통해 예수의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우리 안에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보지 못합니다. 무수한 자기 죽임과 희생,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그 십자가의 희생과 나를 위해 버리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끊임없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손해보고 멸시를 당하고 그러면서 그들을 부둥켜안고 사랑하는 그런 자기 포기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강퍅한 우리의 가족들이 녹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 선지자와 주의 종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주님의 구원을 거절하니까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정말 완악하고 강퍅하다면 그들에게는 그 강퍅함을 능가하는 헌신적인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강퍅함보다 더 뛰어난 사랑, 얼음장같은 마음이라도 녹일 수 있는 그 헌신된 사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서 목을 드리우고 순교도 하는데 나를 길러주고 낳아준 우리 아버지, 나를 위해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던 우리 엄마, 그리고 한 피 받은 내 동기간, 너무나 사랑하는 내 핏줄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무엇인가도 아직까지도 아끼고 있다면 하나님이 아주 가슴아파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은 더 많이 빼앗겨도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도 우리의 가족들은 못 받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가족들은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 모르는 십자가의 사랑, 나를 핍박하고 박해해도 그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자기를 주신 헌신적인 사랑,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것을 다른 어떤 것과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그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그 헌신적인 눈물에 사랑을 알고 난 다음에는 우리들이 주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가져가셔도 그 사랑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많이 받았잖아요. 이제는 주어도 되지 않습니까? 빼앗겨도 되잖아요.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것은 모두 우리 것이었습니다. 일생을 사시고 난 다음에 마지막 남은 것은 통 자루로 된 옷 한 벌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마지막에 자기의 몸까지 찢어서 피 흘려주신 자기를 다 주신 이 아나데마의 이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아나데마를 받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저주를 받지 않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희생하지 않고 쉽게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예수님이 그런 종류의 복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까? 회개해야지 됩니다. 동기간들과 작은 이익을 놓고 다툰 사람들은 당장 회개하고 오늘이라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보상을 하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내가 새사람이 되려고 하니 나를 용서해달라고 진심으로 비십시오. 그래서 청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형제들이 볼 것입니다. 희생했지만 죽기까지는 아니었잖아요. 양보했지만 모든 것을 양보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맨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저희 집안은 아무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생부터 시작을 해서 하나씩 돌아왔지만 그러나 결혼했을 때도 우리 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제 밑에 동생밖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닌데도 이제 내가 예수를 믿어야지 되겠다고 생각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조카들까지 자식들까지 모두 우리 사택에서 같이 식사를 나눕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전에 가족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항상 그랬습니다. 네가 전도사인데 도대체 누구에게 전도한단 말인가. 아버지 예수를 믿으시냐? 안 믿으십니다. 어머님 믿으시냐? 안 믿으십니다. 지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변화가 일어나면 아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하나님, 이들은 위해서는 나를 도구로 쓰시는데 왜 가족들을 위해서는 도구로 안 쓰십니까?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은 그는 숱한 날들을 눈물로 보낸 사람입니다. 가족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운 우리들의 눈물을 병에 담으면 몇 병이나 될까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밤이고 낮이고 잠잘 때고 구원받지 못한 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막 살아가는 우리 동생, 그리고 우리 형, 그리고 우리 엄마, 우리 남편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한 우리의 눈에는 끊임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고 그 눈물은 병에 담아도 아마 한동안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눈물의 세월들이 지나가고 어째든 온 가족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 감사하고 너무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또 견디기 힘든 통증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교회를 나오고 있지만 그 중에 여러 사람은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참 사랑에 대해서 아직 모릅니다. 우리를 향한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 죄인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살아야 할 그런 신앙이 아직 부족합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족들 속에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마지막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발견된다면 그때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은 피눈물을 흘리게 될까요? 세월은 흘러가는데 저들이 속히 변화되어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이제 또 다시 예전에 가슴속에 있었던 그 고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교회에 돌아오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지만 이제는 어떡하면 저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에 이끌려서 신앙 안에서 살아갈까. 주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억눌리는 슬픔이 있습니다.
내가 설교할 때 그 육신에 속했던 사람들이 깨트려지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아가고 하루가 다르게 놀라운 신자로 변해갑니다.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가족들에게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저 완악한 사람, 저 이방 신을 섬기던 사람도 내 설교를 듣고 저렇게 변화되는데 내 형제들, 우리 가족들 중에 어떤 사람은 왜 저렇게 변화되지 않을까요? 언제나 되면 변화의 때가 올까요? 그때마다 들리는 것은 내가 죽어야 저들이 살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엄마, 엄마의 영혼만 구원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이든지 다 주겠습니다. 돈을 원하면 돈을 줄 것이고 내 희생을 원하면 희생을 할 것입니다. 일평생을 당신의 종으로 살아가라면 내가 그것도 하겠으니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우리의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고 이제는 믿지 않는 가족들 앞에 서면 우리가 큰 사람이 아니라 왜소한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감추고 싶고 신앙 생활을 감추고 싶은 것과 같은 왜소함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왜소함입니다.
(예화)아는 어느 형제의 부모님은 절에 열심히 다니시며 열렬히 섬기시는 분인데 집에 우상을 들여놓고 섬길 정도라 이 형제는 명절이 되어도 집에 내려가지 않아 목사님이 야단을 치 시며 그래도 집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진정 하나 님의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야 한다는 이야기.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어머니로 보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이교도로도 보지 말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해야지 됩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물론 너희 엄마 끝까지 예수를 안 믿고 그리고 불교도로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는 끝까지 너희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구원을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처럼 믿고 너 할 일을 다하면서 희생적인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 가족 교회에 오는 날을 한번씩 하는데 이것이 총동원 주일이 아닙니다. 동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계속 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 개인적인 한이 서려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정말 한번이라도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변화 받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 사경회를 하는데 그 십자가 사경회 설교가 그렇게 쉬운 설교가 아닌데 믿지 않은 여러 가족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공통점은 그 지체들이 헌신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금식하며 철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 기회에 열매를 맺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회개해야지 됩니다. 그러나 지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지 아니하는 가족들,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세워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 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단 일주일만이라도 늘 하지만 일주일만이라도 새벽에 나와서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기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그리고 데리고 와서 예수의 복음을 듣게 하고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면서 그 영혼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구원의 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이 뉘우치면서 이제는 남은 인생을 이렇게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고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들을 구원하고 우리의 친척들을 구원하고 내 동포들을 구원하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걸어가셨던 것처럼 그렇게 희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썩어지는 한 알의 밀 알이 되도록 결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기다리시는 하나님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못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11-14)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 물려받는 것인데 살아서 아버지가 계신데도 유산을 물려달라고 했으니 불효 막심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현금으로 모두 바꿔서 다른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게 지내면서 물질을 다 쓰고 그러다가 가난해져서 죽을 고생을 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조차도 찾지를 못해서 결국은 아버지께로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는 아버지의 집에 와서 품이나 팔면서 노예처럼 살아도 죽지는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돌아왔지만 그러나 뜻밖에도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로서의 모든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그래서 그 아들이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탕자의 비유의 요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집을 멀리 떠난 탕자와 같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우리들을 아버지께로 부르시기 위함이었고,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아들 되는 참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형식적인 신자들을 일깨우시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들은 이 예배 시간에 여기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비유를 가지고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생각해 봄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집을 떠나는 아들입니다. 이 집안은 유산을 물려받을 정도로 잘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요구해서 유산을 물려달라고 했고 그리고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이 아들에게 얼토당토하지 않은 요구를 들어주셔서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도 없고 식구들의 감시의 눈초리도 없는 먼 곳으로 가게 되었고 그리고 그는 거기서 허랑 방탕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랑 방탕한 세월을 보낸 후에 그는 지극히 굶주리고 고통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집을 떠난 아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행복할 줄 알고 떠났지만 불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집을 떠난 아들을 말씀하셨을 때 누구를 생각하시면서 이 아들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실 때에 염두에 두신 사람이 두 사람들이었으니 하나는 지금 전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를 뿐 아니라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예전에는 믿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믿었지만 주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은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집을 떠난 아들에 다름이 아닙니다.
예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사랑 속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잠시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서 하나님과 함께 신앙 안에서 사는 것보다는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세상으로 나아가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했기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오늘 비유에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없고 그분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의 집을 떠난 아들일 수가 있는가 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산 사람이 되게 하셨고 우리는 모두 그 한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창조된 피조물들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낳으신 부모라고, 아버지라고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그 사람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자기에게 밖에 없는 영혼을 인간에게 주셔서 가족관계 속에서 이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 가족관계 속에서 인간과 함께 교제하고 사귀면서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셨고 인간은 그를 위한 모든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그 후로부터, 그 불 신앙 속에서 태어나는 많은 사람들은 근본조차 알지 못하는 불효 막심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 적에 밖에 버려진 아이가 고아원에 가서 길러지고 그렇게 자라난 아이가 자기의 부모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듯이 또한 우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고아원에 자란 그 아이가 부모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지만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미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자녀들이 자기의 집을 떠난 자녀들로 여기시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지금도 모든 노력을 쉬지 않고 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랑은 집을 떠난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의 사랑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서 보면 집을 떠난 이 아들을 살펴보면 이 아들은 먼저 잘못된 판단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는 아무 쓸모가 없고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많은 물질을 가지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자기 마음껏 생활하는 것, 그래서 허랑 방탕하게 지내서 육체의 즐거움을 만족시키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잘못된 판단 때문에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드셨을 때에는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도록 주님이 그렇게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넉넉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그리고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모두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아버지의 간섭 없이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 인생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원대로 이루어졌을 때에 그의 인생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이 물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지배당하는 대신 지배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문이 훌륭하고 명망이 있는 집에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에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은 비로소 그것이 인생에 참된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정복할 야망에 불탔던 알렉산더 대제를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이제 그리스도로부터 태어나서 그 서부 아시아와 유럽을 모두 점령하고 마지막에는 아프리카 끝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프리카 끝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했다는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어떤 유언을 남긴지 아십니까?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나를 모두 땅에 묻되 두 손은 땅 밖으로 나오게 하라.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손을 보게 하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었습니다. 결국은 온 천하를 통일한 알렉산더 대제도 마지막에 인생을 마름 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권력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전에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그 왼쪽에 네모반듯하게 지은 집이 있었는데 이름만 되면 알만한 여러분 모두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D 그룹의 건설회사 회장의 집었습니다. 엄청나게 큰집이고 그 집을 교회에서 사려고 하니까 52억을 달라고 했다니까 얼마나 큰집인지 여러분들도 짐작이 갈 것입니다. 마당에 농구코트가 있고 커다란 개들을 기르고 있으며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수시로 산책을 하는 집이니 얼마나 돈이 많은 집이겠습니까.
일년에 몇 차례씩 돈을 벌면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고 있는 그 집이 어느 날 신문에 났습니다. 교회 옆에 있는 이웃집이니까 궁금해서 찾아갔는데 평소 불교를 믿는다고 그렇게 알려진 그 집안에 커다란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장본인 회장이 안방에서 어느 날 부엌칼로 자기의 가슴과 배를 난자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이 들면 부엌에 들어가서 식칼을 가지고 와서 아무도 없는 방에서 윗통을 벗고 자기의 가슴과 복부를 난자하여 죽기를 원했지만 결국 자살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있는 사람이 보여주는 불행한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인간이 결코 행복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만 가지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예전에 2-30년 전에 가난하게 살던 우리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결혼을 한 7쌍 중에 1쌍이 이혼을 하고 작년에는 최고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한 해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적인 상황을 보면서 넉넉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그 본질적인 원인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우리의 소유에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평범한 사실은 예수님이 드신 이 비유에서도 그대로 입증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돈을 가지고 부모의 집을 떠나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그런 먼 나라로 갔고 거기에서 허랑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친구도 많았고 그리고 가진 것이 많으니까 따르는 여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최고의 환락하는 삶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예전의 즐거움보다도 더 깊은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물질은 모두 사라지고 그는 곤궁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주던 친구들도 모두 떠났고 그리고 함께 있어주던 많은 여자들도 자기를 홀로 남겨두었습니다. 어울리던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는 끊어지고 그는 이제 내팽개쳐진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 방황을 하다가 돼지를 치는 집의 머슴살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돼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가증하게 여기는 그런 짐승이었으니 그런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비유에 나오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유대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까지도 팽개치고 그리고 인생에 막장에 까지 내려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고장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인심은 더 사나워지기 마련입니다. 일을 해도 품삯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먹을 것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쥐엄 열매라도 돼지와 함께 나누어먹기를 원했지만 그것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심은 황폐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굶주림에서 허덕이다가 그 돼지우리간에 엎드린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집을 떠난 그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이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산 사람이지만 나는 그렇게 궁핍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예수님께서 돼지우리간에서 쓰러져 죽어가면서 한줌의 쥐엄 열매를 얻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것조차도 얻지 못하는 이 탕자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한끼 먹을 음식이 없어서 방황하며 빌어먹는 거지의 모습을 그린 것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서 고통 하는 그런 사람의 모습입니다.
온 세상을 정복하고도 마지막에 두 손을 땅위에 내놓고 묻힌 알렉산더 대제나, 일년에 몇 천억씩 돈을 벌면서도 부엌칼로 자기의 가슴을 난자하고 안방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재벌의 회장과 같은 사람들 모두 이 탕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가진 음식은 있고 재물은 있으나 그러나 자신을 거처하게 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처소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굶주린 자와 같이 한 조각의 마음에 평안함과 그리고 안식을 얻기 위해서, 혹은 인생의 그 엄숙한 고통들을 외면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쾌락에 빠지기도 하고 그리고 더 방탕하게 혹은 더 많은 물질에 탐욕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일들을 만족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는 죄악을 서슴지 않고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서 인생에 궁극적인 불안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인생에 비참함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집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항상 곤궁함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넉넉하고 아주 평안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무엇인가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 찾아와서 만져주어서 여러분들을 정말 사랑 받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그 무엇이 여러분들에게는 필요가 없습니까? 집을 떠난 이 아들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참할 정도로 인생의 막장에까지 내려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열린 교회를 찾아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 이 집을 떠난 탕자와 같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인생을 살거나 예전에 하나님을 믿었고 교회를 다녔으나 지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 일에 바쁜 나머지 하나님을 믿는 일을 포기하고 대신 세상으로 돌아가신 분은 안 계십니까?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 거침돌은 없습니까?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갈등이 있어서 하나님을 떠난 여러분들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예전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갔던 그 믿음 생활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일은 없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마음의 소원이 생겨나지는 않으시는지요?
저는 젊은 시절에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복은, 인생의 모든 가치는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인생의 모든 척도가 되며 자기가 만족하고 행복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충분히 신뢰할만하며 그리고 인간이 나약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지만 아주 강하고 훌륭한 인간, 하나님이 설령 있다고 해도 하나님 없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곤고했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그리고 많은 사상적인 고민을 했지만 그러나 저는 점점 더 곤고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난 후에 경험해본 적이 없던 곤고함을 젊은 시절에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살아가는 것보다는 죽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을 하는 그런 희망을 잃은 젊은이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밤을 새워서 공부하고 낮에는 쉬는 그런 때가 6개월에서 1년 정도 있었습니다. 낮에는 너무 시끄러우니까 쉬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잠들 때 일어나서 공부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되면 멀리서 어디선가 뎅그렁 뎅그렁 그러면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똑같은 시간에 4시에 한번 울리고 그 다음에 4시 25분에 한번 울리고 4시 반에 새벽기도가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집 뒤에는 넓은 밭이 있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밭 한가운데 어떻게 해서 교회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새벽 4시만 되면 뎅그렁 뎅그렁 종이 울리고 그리고 4시 25분에 다시 종이 쳤는데 저는 어느 새 몇 달이 지나니까 그 종소리에 이끌려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밖으로 나가서 아직 밝지도 않고 안개에 쌓여 있는 그 벌판을 바라보면서 교회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과 그리고 그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참 신기한 것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제가 말로 해서 한 30분 정도 이야기를 해서 떡을 만들어서 돌려보냈습니다. 하나님 믿으라는 소리를 못하게 끔 아주 떡을 만들어서 돌려보냈는데 그 새벽에 아무도 나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뎅그렁 뎅그렁 종이 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기가 막히게 가슴에 막 울리면서 와 닿았습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가슴에 파고 들어왔습니다. 결국은 6개월 정도 견디다가 제 발로 걸어서 우리 교회보다도 한 20분의 1정도 될까 손바닥만한 교회, 한 30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이층 교회에 나가서 제 발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수요일인데 그것도 벌판에 있는 교회였는데 벌판을 지나서 작은 교회였는데 들어가 보니까 한 3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3분의 1은 할머니들이고 그리고 젊은이들과 섞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냥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싼 장판을 깔고 누덕누덕 깃은 방석들을 하나씩 깔고 톱밥 난로가 타고 그리고 작은 공간에서 피아노도 없어서 누군가가 덜컹거리면서 풍금을 치고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탁 들어가는 그 순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꼭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따뜻한 난로, 그리고 그 난로 위에 비치는 붉은 불빛이 저녁때니까 사람들의 뺨에 이렇게 비치고 그리고 저쪽에서는 풍금 소리가 들려오는 그 작은 공간에 들어서면서 나는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부인하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거기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내가 주님을 믿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 저의 믿은 생활에 시작이 되었고 이제 그렇게 된지 25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저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항상 곤궁함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그렇게 살 수 있을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비유할 때 우리를 양이라고 비유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동물 중에 양은 특별히 구별되는데 그는 연약한 눈과 빠르지 못한 다리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그 다음에 남을 받을 수 있는 뿔이나 변장술도 없어서 누군가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짐승 그 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유하신 것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탕자는 아버지의 간섭을 떨쳐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가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지나가자 그는 비로소 아버지 없이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지고 허랑 방탕한 곳으로 간 곳까지 마지막에 그렇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가난과 병든 육체, 곤고한 정신 피폐해진 마음 이것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집을 떠난 아들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은 기다리시는 아버지십니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너무 그리워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가면서도 마음을 졸였을 것입니다. 식구들이나를 문전 박대하면 어떻게 할까, 손가락질을 하면서 그렇게 말려도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다 말아먹고 이제 그 거지 신세가 되어서 돌아오니 꼴좋다. 누군가가 자기를 조롱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야단치시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용서를 빌면서 아버지의 집에 아들은 고사하고 품꾼의 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아버지의 집에서 품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렇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보니까 이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난 그 날서부터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잘 사는 집안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고 아들은 그 화려하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고 돼지우리에 뒹굴던 아주 더러운 몰골을 해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얼굴은 병색에 가득 찼고 누구도 그가 옛날에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얼굴을 쓰다듬고 온갖 애정을 퍼부었습니다. 그 아들의 옷이 더럽고 남루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온몸을 씻지도 못해서 더러운 것이나 병색이 가득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끌어안고 그 아버지는 펑펑 울면서 애정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둘이 끌어안고 한없이 기뻐하며 감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이제 새카맣게 잊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그 순간서부터 아들이 가지고 간 많은 유산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리고 그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도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 나의 사랑하는 그 아들이 속히 내게로 돌아와서 다시 내 아들이 되어주고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이 아버지의 유일한 관심사요 가장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출한 자식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밤잠을 못 이루는 아버지는 있어도 집을 나간 아버지로 인해서 슬피 울면서 그 아버지를 염려하는 자식들은 없습니다. 이것이 고래로 아버지의 마음이고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마음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반영해주는 그림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에 나오는 이 아버지는 죄인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우리는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슬퍼하시고 돌이키지 않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때로는 형벌 하심으로서 그들을 깨닫게도 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책망하심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깊이 뉘우치게도 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죄는 미워하시는 아버지시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죄인인 자신의 자녀들이 회개하지 않고 망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이렇게 집을 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기다리시고 계시는 아버지십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당신 곁으로 돌아와서 당신과 함께 교제를 가지고 가족처럼 지낼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낭비했던 인생의 많은 낭비를 문제로 삼지 않으시는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까지 지었던 많은 죄와 하나님을 떠나면서 살았던 불순종했던 옛날들을 주님께서 문제로 삼지 않으시는 아버지십니다.
오늘 모든 아버지의 재산을 먹어버리고 육신까지 병들어서 비참한 몰골로 아버지께 돌아오는 이 탕자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융숭한 대접을 아버지께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은 것이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면 그 표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좋은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살진 소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도록 하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당시 도장은 반지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반지를 끼워주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유산을 다 먹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아버지의 집에서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정상적인 아들로서 법적인 지위를 회복시켜주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에 두 커다란 절벽이 있다면 한쪽 절벽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고 한쪽을 영생하도록 우리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쪽 벼랑에서 저쪽 벼랑으로 넘어가는 다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것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아멘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팔을 벌려 탕자를 안아주고 그를 끌어안고 입맞추며 예전에 그가 누렸던 모든 지위를 회복해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며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전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용납해서 주님의 자녀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오늘도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이처럼 여러분들을 여기에 나오게 하셔서 오늘 이름 모를 설교자로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집을 떠난 자들이 돌아오는 이 탕자의 귀로에 대해서 듣게 하시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처럼 집을 떠난 자기의 아들이 예전의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를 주님의 품으로 부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곤궁함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물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구하는 자에게 자기의 뜻을 따라서 물질을 주시고 육신이 병들고 곤궁한 사람들에게는 치료의 은혜를 주시고 인생의 불행을 극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극복하고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그 외로움을 능가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교제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갈 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가르쳐주셔서 갈 길을 알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혼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저처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그리고 돌아올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찬란한 교제의 기쁨,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며 그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으며 아버지와 함께 인생의 난관을 헤쳐나가며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집을 나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며 여러분들을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신 채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집을 떠나서 죄를 지은 아들이 이렇게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세 번째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 번째 생각하게 되는 것은 돌아가는 아들의 결단입니다. 이 집을 떠나고 허랑 방탕하게 살았던 불효 막심한 이 아들이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을 다시 받게 되기까지 아주 중요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탕자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쥐엄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어서 돼지우리를 헤매다가 비로소 배고파 엎드려진 처지가 되면서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얼마나 풍족한가.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굶주려 죽게 된 것이 결국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께로 도움을 받을 수가 없고 자기는 이제 아버지 없는 이국 땅에서 이렇게 굶어 죽어가고 있고 그 아버지의 아들로서 모든 인생의 자존심까지 모두 잃어버리고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 아버지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그 관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한 일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아들로 다시 써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는 아버지의 집을 찾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유산을 나누어 가지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는 없었고 그래도 아버지는 품꾼들을 많이 쓰시는데 아버지는 나를 아들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먼 발치에서나마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인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품꾼처럼 일하고 그 품삯을 받아서 먹고산다고 할지라도 남의 나라 땅에서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며 비참하게 죽어 가는 이 모습보다는 훨씬 나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단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일어섰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러나 무조건 아버지께 용서를 빌 마음으로 그는 절룩거리며 아버지의 집으로 빈털터리가 되어서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결단은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큰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부르심에 대해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손들고 반응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로 돌아오고자 하는 자를 돌이키시고, 지난 날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입니다. 이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자기의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계시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심으로 이제는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적극적으로 자기의 집을 떠나서 탕자가 된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찾으십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사람을 보내도 떡을 만들어서 돌려보내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셔서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셔서 내 영혼의 곤고함을 헤아리고 아버지의 집에서 맛볼 수 있는 안식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불행한 일들은 아마 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길에서 돌부리에 채여서 넘어짐으로서 다시 한번 자기가 가고 잇는 길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고통과 좌절이 우리의 인생에 큰 스승이 될 때도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저 같은 젊은이들도 한번 인생의 좌절을 경험하고 나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이 누군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그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싶다라고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뿐 아니라 또한 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구속의 사랑으로 그 사랑에 사무친 사람들을 보내어서 여러분들을 구원하고자 애를 쓰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힘으로 여기에 나와있는 것 같지만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날 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와 탕자와 같이 불행한 인생의 상황에서 모든 것을 예비하고 준비하신 아버지의 넉넉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아내들이 이곳에서 밤이나 낮이나 눈물로 기도하며 남편 된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께 추수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불행하게 살면서도 모든 불행의 원인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친구, 여러분들의 이웃,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새벽마다 밤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더욱이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복잡한 이 세상을 살면서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육신의 것들을 위해 멀리 아버지를 떠났던 사람들은 더 많이 주님이 기다리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이 흐르게 만들어줍니다.
목자의 음성이 싫어서 먼길로 떠났던 양들은 어떻게 됩니까? 가시에 찔려서 고통 하거나 혹은 그 넝쿨 속에서 짐승의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아무도 도울 길이 없는 그런 상태에 그런 위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고 우리의 마음도 아프고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영혼에도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주님을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맸네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가시에 찔리고 상처를 입는 여러분들은 괜찮아도 여러분들의 고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괜찮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모든 것이 있고 당신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그 살을 찢고 피를 흐르게 함으로서라도 구원하고자 하셨는데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고통 하는 여러분을 인해서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눈물겨운 사랑으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단하였을 때 좋은 새 옷을 입고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단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돼지우리의 더러운 오물에 묻은 그 모습 그대로 영광스러운 자기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죄송함과 부끄러움은 아버지 없이 살아가던 그 옛 삶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용기를 내어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전도했더니 담배를 끊을 수 없어서 교회를 못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담배를 피라고 그랬습니다. 나중에 끊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된 사람에게 전도를 했더니 술을 끊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가서 술을 먹어도 좋으니 교회에 나오라고 그랬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지금 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인가, 술꾼인가, 노름을 하는 사람인가, 협작꾼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결단, 예전에는 아버지 없이 살았으나 아버지, 이제 제가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아무 것도 여러분들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마음을 열고 이제 내가 나 혼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 힘겹다. 나에게는 위로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하고 그리고 내 인생에 길에 나와 함께 해줄 동반자도 필요하고 아버지와 같고 친구와 같고 형님과 같고 내 보호자와 같고 임금과 같아서 나를 동행해줄 나의 그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시면 지금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나는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탕자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죄인도 받아주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내가 오늘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여러분들이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떻게 하나님을 멀리 떠났든지 오늘 돌아오게 하셔서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에 집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혼자 살아가던 길고 고달픈 인생의 길에서 돌아와 이제는 따뜻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그 교회라고 하는 가정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을 위하여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