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위하여Ⅵ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네 종류의 효도(엡6:2)2002.5.12 주일오전 1
2. 부모 공경의 축복(엡6:3)2002.5.12 주일오후 10
3. 부모 공경의 핵심, 순종(엡6:1)2002.5.15 수요예배 21
4.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들(엡6:4上)2002.5.19 주일오전 31
5. 주의 훈육과 가르침으로(엡6:4下)2002.5.19 주일오후 45
6. 네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1)(엡6:4上)2002.5.22 수요예배 58
7. 네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2)(엡6:4上)2002.5.26 주일오전 69
8. 시어머니는 없다(룻1:16下)2002.5.26 주일오후 93
9. 형제사랑과 가정생활(1)(시133:1上)2002.5.29 수요예배 107
10. 형제사랑과 가정생활(2)(시133:1下)2002.6.5 수요예배 118
1. 네 종류의 효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엡6:2)
어버이 주일만 되면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부모님에 대해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식들은 그 부모를 한껏 효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엇인가 모자라고 깨어진 관계를 힘들게 부여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도 화목을 이루지 못한 부모와의 관계, 성경에서 자식인 자기에게 요구하는 그 공경의 표준과 실제의 삶과의 괴리 속에서 그 무거운 영적 부담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모 공경에 진정한 도리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식보다 훨씬 뛰어난 부모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 명예를 빛낸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자식들은 평생동안 그 부모의 후광을 입으면서 살아갑니다. 부모님의 사회적인 지위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 후광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아버지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명문에 집안에 태어나서 그 가문에 명예를 빛낸 부모님들을 두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에게 늘 부담이 될 정도로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탁월한 삶을 살았던 부모님을 둔 자식이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인품에 있어서 자신의 조잡한 성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상한 삶을 살아서 그 부모님만 생각하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고 무릎을 꿇게 되는 부모를 둔 자식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재산도 아주 많아서 나이 들어 가정을 이루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는데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부모로부터 자비한 도움을 받아 살기 때문에 그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자식들도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 부모를 볼 때에 자기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그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부모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자식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 “공경하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가 갖는 의미는 원래는 값을 매긴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무게를 단다. 혹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의 부모님은 정말 무게가 나갑니다. 그리고 값을 매길 때도 자기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고개가 숙여지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부모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부모 앞에 함부로 못하고 그 부모를 공경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모 공경은 그런 종류의 공경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의미의 효도를 ‘숭배적 효도’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숭배적 효도입니다. 부모님이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탁월하고 자기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족탈불급이기(?) 때문에 그 부모님을 깊이 인정하고 무릎꿇지 않을 수 없고 그 부모님의 팬이 되어서 그 부모님을 자랑하고 존경하는 것,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효도라기보다는 숭배적 효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효도는 믿는 사람들만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효도입니다. 제 주위에는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아버지, 이런 어머니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님을 향한 존경심과 이런 것들은 정말 탁월하고 놀랍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효도합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그래서 아니라 모든 면에서 아버지가 자기보다 훨씬 낫습니다. 돈도 자기보다 아버지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까 잘 보여야지 나중에 국물이라도 있으니까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숭배적 효도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부모가 그렇게 훌륭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젊은 날에 방탕하기도 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자기에게 상처도 많이 주고 괴롭게도 하고, 바람도 피고 가정도 돌보지 않아서 자기는 나가서 호의호식하면서 식구들은 끼니가 간데 없이 그렇게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또 어머니가 있는데 그 어머니도 나실 때 괴로움은 다 잊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는 대신 가정을 돌보지 않고 내 팽개치고 제멋대로 젊은 날 살아서 자식인 자신의 마음에 많은 고통과 아픔을 준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효도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 효도는 무엇인가 하면 그냥 그런 것들은 다 가슴에 섭섭한 것으로 있고 그 부모님을 깊이 존경하고 그런 것은 아닌데 이제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고 가족들을 괴롭힐 힘도 없이 늙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줄 정도로 그렇게 강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인생을 가만히 돌아서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젊은 날에 패기 충천하게 살아가면서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어느 날 보니까 비참하게 쇠약했습니다.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 있으면 죽을 노인네인데 잘 해드려야지 그리고 효도를 합니다. 이것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효도는 아닙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저는 ‘동정적 효도’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님들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숭배적으로 효도하거나 동정적으로 효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숭배적으로도 효도 안하고 동정적으로도 효도하지 않아 그래서 효도하고는 거리가 먼 그런 인생을 사는 짐승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런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성경의 정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연세가 드실수록 늙어 가십니다. 힘도 기력도 옛날과 같지 않고 기억력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특별히 연로해져서 몸이라도 불편하고 심지어 자식들의 병 수발을 받아야 할 정도로 몸져누우시고 나면 정말 불쌍합니다. 젊어서 어떻게 사셨든지 간에, 존경스런 삶을 사셨든 그렇지 못하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인간적으로 너무 불쌍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늙을텐데,
그래서 어느 자식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부쩍 쇠약해지고 자식들의 눈치를 살피는 그 아버지를 보면서 울면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보다는 오히려 우리 아버지가 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야단치시고 큰 소리를 치실 때가 그립습니다. 어느 날 양복을 입으신 아버지의 팔을 만져보니 그 체격이 쇠약해지신 것이 느껴지고 그리고 그렇게 쇠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예전에 그렇게 혈기 충천하셔서 그렇게 가족들을 사로잡고 뒤흔들던 그때가 힘들고 괴로웠지만 건강하고 힘찬 아버지를 볼 수 있어서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런 내용의 글을 쓴 것을 읽어봤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너무나 불쌍하고 그리고 효도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런 어느 정도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효도도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보면 이상하게 우리가 철들 나이쯤 되면 부모님이 젊으셨을 때는 철이 안 듭니다. 이상하게 우리가 철들어서 어머니의 은혜, 아버지의 사랑 이런 것을 알 나이쯤 되면 부모님들은 불쑥 늙으시고 그리고 정말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정적인 효도가 전체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여튼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의 효도는 아닙니다.
세 번째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또 하나의 효도가 있는데 그것은 동양 사상과 깊이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동양 문화권에서 배워온 효도의 원리는 부채적 효도입니다.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만 부채적 효도입니다. 즉 무슨 뜻인가 하면 부모님을 왜 공경해야지 되는가. 그렇게 물을 때 부모가 없으면 네가 어떻게 태어났겠는가. 그러니까 그게 부채입니다. 신체의 발부는 수지부모 했으니 신체와 모발, 피부 이 모든 신체의 장기들이 다 부모로부터 자기가 물려받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고열을 짜내어서 자기가 빚어졌다. 그래서 동떨어져 나왔어도 자기는 결국은 부모의 신체의 일부를 떼어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자식들로 하여금 일생동안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서 그 부모로부터 받은 부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큽니다. 그러니까 자라면서 인간적으로 나를 가르쳤고 교육했고 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나중 문제이고 우선 자기가 근본이 부모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부모 자체를 작은 창조자로 보고 그 부모가 자기를 빗고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부채의식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언제 우리 부모에게 낳아달라고 했는가. 그리고 부모들이 정말 다른 사람 말고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까? 노력했습니까? 그런데 그 부채적 효도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내가 우리 부모보고 낳아달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부모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당신과 같은 사람을 낳아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피투(?)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던져진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래서 그 부모로부터 부채의식을 가지고 평생 채무자처럼 살아가면서 그 위에서 부모 공경의 원리를 세우는 것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에 효도는 아닙니다.사실 그 부모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부모님을 빌려서 도구로 해서 우리를 만드셨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런 부채적 효도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효도라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마리아와 요셉을 대하시는 그 모습은 뭔가 동양적인 사고방식에서 보면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마리아와 요셉의 몸에서 자신이 부채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하는 의식 속에서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 속에 있는 오히려 또렷한 의식은 하나님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의식이 훨씬 더 분명하고 또렷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렸을 때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으니까 그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으실 때에도 그 어머니를 요한의 손에 부탁하시는 장면이나 이 모든 것들을 볼 때에 그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그 마리아를 깊이 사랑하고 효성스러운 육신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신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 어디에서도 내가 부모의 몸을 찢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 어떤 부채의식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이면서도 자기 자식에게 네가 부모가 아니면 어디서 태어났겠는가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서 효도를 호소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효도 교육입니다. 요즘들 효도에 대해서 교회에서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범주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양 사상에 호소해서 그렇게 효를 말하고 심지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런 동물들의 자기 종족의 법칙 같은 것들을 들이대면서 호소하는 것은 너무 궁색하기 짝이 없는 효도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정말 이야기하는 진정한 효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공경적인 효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값을 매기다, 중요하게 생각하다, 무게를 달다. 그런 뜻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공경이 구약으로 배경을 옮아가면 구약 속에서 공경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부모를 공경 하다는 단어와 하나님을 공경 하다는 단어는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한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하면 그러면 부모를 하나님처럼 공경해야지 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 부모가 하나님과 같은 반열에서 인간에게 하나님과 동일한 경외와 존경사랑 공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공경적 효도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공경적 효도는 단지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효도하는 그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그 자체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기초되어 있어서 그 부모님께 하는 그 효도를 공경적 효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전에 말씀드린 숭배적 효도나 또 부채적 효도 그리고 동정적 효도는 신자가 아니어도 주님의 은혜의 의해서 그의 심령에 깊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여러 종류의 효도입니다. 그러나 이 공경적 효도는 그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아버지의 참 사랑을 알고 그의 영혼의 진실한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드릴 수 없는 효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공경적 효도는 부모와의 자신과의 관계뿐 아니라 그 이전에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먼저 정립되어야만 가능한 효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공경적 효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그 부모의 무게를 달고 그 부모를 측정해서 정말 이 부모님은 소중하다 그런 결론에 도달한 가운데 그 부모님께 드리는 효도가 공경적 효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즉시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부모님을 달아보고 우리가 그 부모님이 정말 중요한 존재인지를 측정할 때 정말 그 부모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너무 소중하고 그리고 너무 귀하고 그분께 정말 효도를 드릴만큼 공경과 사랑을 드릴만큼 그런 분위기에서는 그분들이 진짜로 그런 분이어야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아까 당신이 이야기한 숭배적 효도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릅니다.
오늘 이 편지를 사도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고 지금처럼 보편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이 편지를 받는 어떤 교인들은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신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의 동족을 깊이 사랑했고 골육지친을 향한 뼈가 녹는 것 같은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믿으면서 일생을 살았지만 뺄 수 없이 가슴에 못 박힌 채 살아가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뼈 속 깊이 타들어 가는 자기의 동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골육지친을 향한 사랑, 그리고 자기의 부모와 동기들을 향한 그 뼈저린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 골육지친 중 모두도 아니고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바로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천국의 생명수 물가를 거닐며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자기의 부모 형제를 보기보다는 지옥의 불붙는 고통 속에서 생명수 물가를 주님과 함께 거니는 자기의 부모와 형제들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가족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쓴 이야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종교지도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젊은이가 예수를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더럽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죄인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그렇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많은 학문이 그를 미치게 하였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그 사랑을 알고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한 분을 얻기 위해서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져서 지옥의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과 동족들로부터 끊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비록 그 부모가 신앙은 달랐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와 원수 된 도를 따르는 자기 동기간들이었고 골육지친이었고 나아가서 부모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을 향한 사랑은 멈추지 않고 주 밖에서 명하는 바가 아니기만 하다면 그 부모가 유대교를 믿던 동기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이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주안에서 하는 명령이기만 하면 순종할 용의가 있고 그리고 사랑하고 섬기고 공경하고 싶었던 사도의 그 눈물어린 마음을 우리는 이 속에서 읽는 것입니다.
무게로 달아봐도 그렇게 존경할만하지 않은 부모님들을 가진 사람들도 이렇게 공경적으로 효도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는 완전하지 않고 이 세상에 어머니는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 부모님들을 통해서 받지 못한 사랑을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들이 어떤 분들이든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공경적으로 효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재산이나 나보다 높은 학식, 사회적인 좋은 평판이나 물질적인 영향력 때문에 그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큰사랑 때문에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존경할만한 부모를 만나서 일생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식들도 있지만 그러나 부모님을 잘못 만나서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하고 그리고 마음에 그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간직하면서 실로 어둡고 긴 날의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와 함께 싸우며 흐느끼면서 일생을 지내야하는 아픈 자식들도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렸을 때에는 자식들 편이었지만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저도 부모님을 모신 자식이고 동시에 자식을 가진 부모가 되고 보니까 정말 중립적인 입장에서 한편으로는 아버지로서 한편으로는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고 그리고 용납할 수 없었던 부모님들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고 자식의 위치에 대해서도 좀더 분명하고 객관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나이가 바로 우리네 나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들어오고 자식과 부모 누구의 편도 아닌 하나님이 그 중간에 서셔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려 그렇게 화목을 이루며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느껴지고는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발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부채의식 때문에 우리 부모를 공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모든 것이 뛰어나고 아직도 내가 신세를 져야지 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부모님이 연로하고 기력이 없어 곧 죽을 것 같으니 불쌍해서 공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라고 이렇게 말씀드린다면 여러분 가운데 틀림없이 아니야 나는 부모로부터 그렇게 큰사랑 못 받았어.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죽어버렸는걸. 살아있어도 이제 것까지 내 가슴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고 있는 걸, 이렇게 말하면서 부모님의 눈물겨운 사랑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호소할 때 동의하지 않을 지체들이 여러분 가운데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드리는 이 말에는 여러분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육신의 부모는 여러분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 아버지 그 어머니를 대신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오히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필요하도록 만들었고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복음이 깨닫게 할 때 불쌍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 품을 더 깊이 파고들게 되지 않았습니까? 의지할만한 능력을 가진 부모님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방법을 배웠고 그리고 그렇게 일평생 주님을 의지하고 살면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고 하는 시인의 고백 속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못 받았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더 많이 긍휼히 여기셔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상처는 하나님의 더 큰사랑을 맛보는 계기가 되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더 큰 긍휼과 은혜의 대상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어린이날이 되고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제가 그렇게 가슴이 아픈 애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거나 혹은 가정이 깨어져서 아빠가 없는 아이들, 그렇게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이제 올해도 학용품 그런 것 사주어봐야 애들이 좋아하지 않으니까 애들이 제일 좋아하고 교육적인 장난감을 하나 돈이 좀 들더라도 사라. 그래서 제가 거기다 하나 편지를 써서 사인을 해서 그래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인을 하면서도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도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들이 비록 일찍 아버지를 여위었고 혹은 부모들이 잘못해서 가정이 깨트려져서 엄마와 함께 혹은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 이것이 저들이 잘못되는 계기가 되지 말고 오히려 우리들처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더 가슴에 사무치고 그래서 아버지이신 주님의 손을 놓으면 일생에 자기가 평생을 고아로 살 것처럼 그렇게 전심으로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살아서 그래서 집나간 아빠도 용서하고 일찍 자기를 내버려두고 간 아버지도 깊이 사랑하고 마음속에 그리워하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에게 진 빚을 모두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정이 깨트려졌기 때문에 더 주님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 되지 않았습니까?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그 아버지라고 불러보고 싶은 것이 평생에 소원이었는데 그 아버지 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처는 되었지만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그 아버지 놓으면 천생에 고아가 될 것처럼 믿음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약한 것을 통해서 자기의 강함을 보이시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서 주님의 공급하신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상처를 통해서 그것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만 온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온전하지 못한 우리 엄마 우리 아빠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부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 쓸모 없는 인간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우리들이 깊이 빚졌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의 부모님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뭐가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게로 달아보았을 때 그렇게 중요한 존재들입니까?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까? 악의 종자요 죄에 씨였습니다. 하나님을 배역하고 거슬려서 죄짓기를 즐거워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인생에 업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주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주님 거역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오셔서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종의 형상을 입으시기까지 낮아지시도록 우리를 섬겼습니다. 우리는 효도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사랑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는 주님을 공경하지 않았는데도 흉악 무도한 죄인들을 주님께서는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죄인처럼 다루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당신께 돌아올 사랑하는 아들딸로 다루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의 패역을 이겨서 주님이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저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받았습니다. 남들이 받지 못한 그 특별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불행하게도 우리 부모님들이 받았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부모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여러분들이 아픈 마음을 쓸어안고 고통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안에서 우리의 부모들이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부단한 자기 깨어짐과 그리고 자녀인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계획, 자기의 형상을 가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얼마나 큰 의무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졌더라면 그 분들도 우리처럼 그렇게 우리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 의지하면서 일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들이 더 많은 복음의 빛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잘못한 사람이 죄인이지만 신령한 신앙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사람이 죄인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은 사람이 죄인이고 그리고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그 성실하신 은혜를 맛보고 그 진리의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빚쟁이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덜 받은 사람을 용서해야지 되고 그리고 더 많이 양보해야지 되고 십자가 더 많이 져야지 되고 더 많이 사랑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한껏 어리광을 부리며 떼도 쓰고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용서를 받고 싶은데 젊은 나이에 영적으로는 자기의 육신의 부모인 영적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이 상처를 받았는데도 그 부모를 위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자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효도의 상급과 진실한 영적 부모의 상급을 하나님께 함께 받을 것이며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부채의식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내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이 공경적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 인내하면서 사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들의 인생이 하늘나라에서 귀한 상급이 될 것이며 이 십자가를 참기 위해서 눈물을 흘린 한 방울 한 방울의 그 눈물은 천국에서 쓸 빛난 면류관의 한 알 한 알의 보석이 되어 맺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부모를 깊이 공경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숭배도 아니고 동정도 아니고 부채감도 아닌 진정으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그 사랑 때문에 부모님이 어떤 분이든지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내 부모님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그 부모님을 통해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분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게 해주셨다 라고 하는 그 깊은 확신 때문에 그 부모님들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그분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매순간 그 부모님들이 아직까지도 살아 계신 그 자체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불효하고 인생을 산후에 깊이 깨달아서 자신이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를 깨닫고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뼈저리도록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을 섬겨야 할지를 알고 그리고 자식들을 키우면서 늙어서 부모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도 알게 되어서 그 부모를 진심으로 섬기고 싶은데 그 부모님들이 이 세상에 생존하지 않을 때 그 뼈저린 후회와 가슴아픈 것은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들이 듣고 있는 바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이북에 어머니를 두고 홀로 남하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어머님이 팔순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편지를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거의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어머니 그리워하고 그래서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그 어머님 한번 만나서 그래서 같은 상에서 저녁 한번 먹고 그리고 그 품에서 한번 하루 밤 자는 것이 육십을 넘은 그 아들의 간절한 눈물어린 소원이었습니다. 아마 그래도 살아 계시니까 그런 소원이라도 품어보지, 통일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보지 돌아가셨다면 아마 그것은 더 뼈저린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많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여러분들이 자식으로서 동기간 모여서 부모의 과실을 이야기하고 지난날의 부모의 가슴아픈 기억을 들추면서 여러분들이 자신들이 부모를 효도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면 여러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죽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마다 이 사랑은 우리 아버지가 베풀어주었어야 할 사랑인데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받은 사랑을 당신 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에게 도로 갚기를 원하신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 은혜 받을수록 부모님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끼고 그러나 그 부채의식이 노예적인 부채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감화 받은 인격적인 부채의식이 되어서 그래서 그 부모님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고 그래서 나도 그 부모님이 곁에 계셔서 좋고 부모님도 내가 당신 옆에 있어서 좋은 그런 행복한 여생을 살도록 그렇게 돌봐드리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이 여러분들 안에 풍성하게 나타나서 효도하는 여러분 보면서 오히려 그 속에서 여러분의 착한 심성이 아니라 포악하고 완악한 여러분들을 변화시켜 움직이신 예수의 사랑이 느껴질 수 있도록 그래서 그분들이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여러분 안에 있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자녀들로 변해갈 마음을 갖도록 그런 주님의 도구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부모 공경의 축복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3)
그래서 저는 이 부모 공경의 계명을 ‘현상금 붙은 계명이다’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셔서 그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드셔서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그 관계 속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이행하려고 애쓰는 삶을 주님이 기대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이렇게 약속 있는 계명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면서 사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무조건 그냥 ‘믿습니다’ 하는 그 ‘믿습니다’ 를 세게 하는 사람은 대게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게 안 해도 믿음 좋은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안 믿어지니까 자꾸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꼭 될 것이다 그리고 떠들면서 다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상금 붙은 계명이라’고 제가 불렀는데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은 그것을 붙들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부분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런 유의 해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 효도하면 첫째는 땅에서 잘되고 두 번째는 장수하리라 그런데 재미있는 게 희랍어로는 ‘메크로 크로니오스’ 라는 것입니다. 메크로는 멕심언 그런 뜻이고 크로니오스는 시간입니다. 시간 중에서도 이것은 어떤 의미에 집착하는 시간이기보다는 그냥 기다란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장수’라고 하는 말이 아주 기가 막힌 번역입니다. 그래서 하여튼 아주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땅에서 잘 된다는데 싫은 사람이 없고 또 아무리 잘 되어도 젊은 나이에 객사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두 가지를 현상금으로 거셨으니까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 효도하자. 효도하면 주님이 잘 되게 해주시고 그리고 이 땅에서 오래 살게 해주시는구나. 그리고 이제 그렇게 효도를 했더니 복을 받고 잘 산 사람들이 이제 이런 해설의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많은 효자 효부들이 등장을 하면서 부모를 공경했더니 이렇게 먹고 살만해졌더라. 복을 받았더라 뭐 그런 이야기,
그런 중에 황당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부모님을 그냥 공경했더니 죽을 때 되어서 땅문서 하나를 주고 돌아가셨는데 저 산꼭대기에 양파도 갈아먹을 수 없는 땅을 주고 돌아가셨더라. 그래도 남는 것은 없지만 부모님의 성의를 생각해서 매일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제 일을 해서 개관을 해서 거기에 파라도 심어먹으려고 일구었더니 거기에서 금덩이가 나왔더라. 그것 봐라. 그리고 또 거기서도 가공의 구름 같은 효도의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다 헛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 효자라는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일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뭘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면 가장 좋은 성경의 해석은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며들게 하면 하나님이 뭘 말씀하시는지 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효도를 하는데 그 효도의 동기가 복을 받고 잘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어디 효도요 사육이지, 부모가 우리 안에 계신데 그 부모를 잘 먹이고 입히고 사육하면 그럼 자기가 복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성경에서는 결코 믿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하고 약속을 붙든 그 신앙 뒤에는 반드시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다 필요 없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사는 그것이 최면이지 신앙이겠습니까?
그러면 우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잘 된다, 장수한다’ 하는 이런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첫째는 내가 땅에서 잘 되고, 희랍어에서는 이것이 유로 나옵니다. 유는 영어로 말하면 good입니다. 그래서 다른 단어의 앞에 붙어서 유 안겔리온, 복음 소식 앞에 유가 붙어서 좋은 소식, 하나의 말이 됩니다. 세베이야 두려움인데 앞에 유가 붙어서 유 세베이야 그러면 경건이 되고, 이런 식으로 어떤 단어의 머리말에 붙어서 good 좋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토브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정확하게 번역하면 ‘선한’ 입니다. 네가 선하게 될 것이며,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보다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길이 good 좋게 될 것이며 그런 뜻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 한참 다니셨다면 제가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을 몇 편 정도는 아마 틀림없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가 되셨으리라 고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면서 누누이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결국은 신앙에 있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이 깨트려졌고 얼마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이 선에 대한 신앙관이 얼마나 성경이 말하는 그 선에 대한 관점으로 교정되었는가 하는 그것이 결국은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시면 저에게는 반가운 일입니다. 다 이해를 하면 제가 뭐 할게 있습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이 처음에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 그 역경과 고난으로 점철된 초기 종살이를 할 초기에는 전혀 그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국무총리가 된 다음에 자기들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형들 앞에서 너무 근심하지 마라.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사,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악 자체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도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을 깨고 싶은 게,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 그랬을 때 그게 결국은 요셉이 생각할 때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선을 행하셨다 이렇게 고백한다고 해서 애굽에서 그 긴 세월은 참 행복이었어. 그 이야기입니까, 아닙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었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뜻입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웠으면 총리가 되었는데도 과거는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생각하기 싫은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아주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이 감사한 것과 달콤하고 행복한 것은 별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고 주님의 사랑도 많이 받고 은혜도 받고 그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입어서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래서 그 고통의 때에 대해서 참 감사한데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힘들고 고난이 많았던 때에 살았던 그 동리에는 가기가 싫습니다. 진짜 므낫세입니다. 아들을 하나만 더 낳으면 그렇게 짓고 싶은데 가망성이 없습니다. 정말 잊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는 사실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잊고 싶다니, 그런데 정말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그런 마음이 변하겠지 그랬는데 아닙니다. 이상하게 세월이 흐를수록 정말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고통스럽고 아팠던 때에는 여전히 므낫세입니다. 잊고 싶습니다. 요셉이 주님이 선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이야기는 나는 애굽에서 그렇게 달콤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보디발의 집에 팔려오겠습니다. 그 이야기입니까, 아닙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뭘 깨고 싶은가 하면 좋은 것 니꼴 나의 행복 니꼴 내가 생각하기에 좋다고 생각하는 그 상식을 깨는 것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단히 그 수많은 섭리 속에서 이 교만하고 완고한 자아가 연단을 받으면서 박살이 날 때 그 과정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선의 조정기 입니다. 하나님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깨트려지면서 조정이 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맞추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날 확 오셔서 우리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애야 내가 잘못했다. 너 보고 자꾸 돌아오라고 그랬는데 그냥 살아라. 내가 그냥 죄 많은 세상으로 가지. 그래주시면 좋겠는데 참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그리고 돌아오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서 땅에서 잘 되고, 옳지 아! 이것 내가 사놓은 그 코스닥, 나스닥 이런 것들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런 것들이 상종가를 치고 대박이 터지기 위해서는 부모님에게 좀 잘해야지 되겠구나. 내가 부모님이 좋아서 그런가. 그래도 복 받고 살려니까 어쩔 수 없지. 그것은 꼭 뭐와 똑같은가 하면 잘 날아가는 제비 다리를 부러트리고 약 발라주고 붕대 감아주던 놀부 심보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하나님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을 하며 그런 건수가 통할 리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잘 되고’ 라는 것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 뭐 이렇게 되고 효도를 한 집안을 조사해보니까 뭐 국무총리가 몇 명이 나오고 계속 효도해도 땅파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하게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도 또 어떤 경우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 신, 불신을 막론하고 고려시대 조선시대 당나라 송나라를 넘나들면서 그 허다한 효도의 증인들을 불러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전을 받은 사람이 뭐 자기 부모가 복권 만드는 기계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생각하면 순결한 영이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그 본성을 생각하면 가당치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는 ‘잘 되고’ 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인생에 적극적인 하나님의 간섭,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한 과정으로서 그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선입니다.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우리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당신의 수중에 넣으시고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도구로 삼으시면서 우리 속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선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잘 되고’ 이것을 보면서 고관대작이나 떼돈을 버는 졸부의 길이 효도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샤머니즘적입니다. 주님이 쓰시면 모든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살고 싶은 삶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진정으로 누리고 싶은 삶이 어떤 것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 인생에 있어서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일까요? 배불리 먹고 자신의 욕망을 펼칠 수 있는 재능들을 손에 넣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면서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진흙과 같은 우리를 내버려두시면 굳어져서 사람의 발부리에 채여서 이리저리 굴러다닐 아무 가치 없는 인간들을 주님이 그 진흙으로 빚으셔서 그래서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어느 도자기를 전시하는 곳에 가봤는데 참 매력이 있는 그런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자기 하나를 잘 만들어냈는데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정가에 공이 한참 붙어 있기에 그래서 저는 한참 붙어 있으면 신기한데 그래서 손가락을 꼽으면서 세어봤습니다. 천 오 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도예 가의 손에 붙들려서 빚어지니까 그게 천 오 백만 원으로 둔갑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흙이 한 두 바케스, 두 바케스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이 웃는 이유를 내가 알겠습니다. 흙의 원가가 얼마인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예술가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머리 감는 이발소의 원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가위가 얼마나 닳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한 두 바케스는 안 될 것 같고 한 바케스 조금 넘을 것 같은데 흙이 그게 세계에서 제일 좋은 흙이라고 그렇게 칩시다. 원가로 쳐서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저 써서 한 이삼 만원 할까요? 요즘 바케스에 이삼 만원이나 가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기에 물을 붓고 반죽이 되어진 상태에서 쌓아 났는데 도예 가가 잠깐 잊어버려서 안 빚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놀러갔다가 와보니까 다 굳어졌다면 그러면 얼마치 정도가 가치가 있을까요? 아마 그냥 진흙으로만 있는 것보다 못해서 아마 지금쯤은 사람의 발에 밟혀서 작은 흙덩어리가 되어서 굴러다녔을 것인데 그 도예 가의 손에 붙들려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정성껏 빚어지고 거기에 유약을 먹이고 그리고 거기에 칠을 하고 그렇게 하면서 불에 구워졌다가 나오니까 그 몇 만원 짜리 진흙에서 수천 만원 짜리 도자기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말 흙덩어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흙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흙이 뭐 하나님 앞에 대듭니까? 진짜 우리는 진흙과 같사오니, 티끌과 같사오니 그 티끌이 히브리말로 ‘아파르’인데 그게 결국은 진흙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만 되면 할아버지입니다. 나는 요즘 그렇습니다 벌레와 같은, 벌레가 얼마나 착합니까?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 봤습니까? 벌레가 불순종합디까? 벌레가 하나님을 대적합니까? 우리가 기도 속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벌레의 명예를 심하게 실추시키는 것입니다. 벌레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벌레의 이름을 만홀히 여겼습니다. 그만도 못합니다. 정말 그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에게 정말 최고의 행복이 있다면 정말 유가 되는 것입니다. 선하고 좋은 잘 되는 것입니다. 누가 보기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래서 주님이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재물이 없고 높은 학식이 없어도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잘 빚어진 그 사람의 인생이 자기 보다 이 세상 적으로 훨씬 훌륭한 사람의 인생을 부끄럽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효도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러니까 헛된 꿈을 버리십시오.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장수할 것이오 ‘메크로니오스’ 라고 희랍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사실 우리들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패역 무도한 인간도 장수하면서 살기도 하고 그리고 정말 부모밖에 없는 것처럼 효도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부모를 뒤에 두고 먼저 인생의 길을 접는 그런 불행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장수할 것이며, 오래 살 것이며’ 라고 하는 그 의미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 사람들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 효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을 때 특별히 그들을 돌보셔서 그들의 인생을 보호하고 그들의 인생을 지켜주신다 라고 하는 이런 의미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우리들이 ‘장수할 것이며’ 라고 되어 있는 이것은 이미 약속 자체가 사도 바울이 새롭게 제시하여 만들어놓은 약속이 아니라 구약 시대 출애굽기에 존재하고 있는 약속, 신명기에 존재하고 있는 약속을 다시 반복해서 다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진리들을 신약에서 해설해서 설명할 때 항상 그렇듯이 이제 이것도 구약에 있는 의미를 토대로 신약에서 좀더 영적으로 풍부한 뜻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분명하게 계시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섭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십계명을 받았을 때에 그들은 정말 생명의 위협을 시시각각으로 느끼는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애굽에서 탈출해 나와서 시내 산에서 11개월 동안 머물면서 애굽에서 경험했던 모든 더러운 습속들을 씻고 하나님과의 충만한 신령한 만남을 경험하며 한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심으로서 구체화된 가운데 나온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었던 깊은 두려움과 하나님의 이 계명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공경하는 자를 이 세상에서 오래 살게 해주신다는 계명이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배경을 그런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애굽에서는 노예생활을 할지언정 그들은 안전했습니다. 적어도 어디로부터? 외적의 친입이나 그리고 불시의 공격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안전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자기들을 보호할 국가도 없고 왕도 없습니다. 지도자 모세가 있을 뿐인데 그는 왕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들이 가야할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먼지 모릅니다. 오솔길을 따라서 지금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자신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나라들의 국경을 지나서 그들과의 생사를 건 싸움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험난한 순례의 길을 걸어서 약속의 땅으로 갔는데 약속의 땅에도 거기가 뭐 아파트 다 지어놓은 미 주거 상태의 분양 안된 아파트 같은 땅이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이들은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더욱이 그들 못지 않게 무서운 것은 전쟁과 함께 광야에서 꼭 좋은 것이 굶어죽는 것, 그리고 또 농사도 지을 수 없으니까 그런 굶어죽는 것, 목말라죽는 것, 그리고 질병, 풍토병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그래서 여러분 굉장히 놀랍습니다. 18세기 1800년도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통계 낸 것을 보면 남자의 평균 수명이 35세도 채 안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잘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상황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속에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에 부모 공경의 계명을 주시면서 그들의 생명의 연장을 말씀하시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명이 길게 오래 사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장수한다라고 할 때 그런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예를 들어 더 오래 거슬러 가기 전에 여기에서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이런 사람들의 생애를 이렇게 보면 그들의 생애가 단지 시간적으로 길게 산 인생만이 아니라, 지리멸렬하게 길게 산 인생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맥스하게 누리면서 크로니오스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누리면서 그런 축복으로 이 세상에서 강성한 삶을 사는 그것을 여기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구절을 오늘 우리의 시대에 적용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엄밀하게 말하면 효자가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의료혜택을 많이 보는 사람이 오래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국가의 선진도와 국민의 수명 사이에는 어떻습니까?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라파에 가면 뭐 관광 다닌 적도 없지만 집회라도 가서 어디 관광지 가자고 하면 싫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노당 입니다. 머리가 하얗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노년에 갈 때가 없으니까 관광 나온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래 삽니다. 왜 의료혜택이 좋아지니까.
우리 나라도 점점 국민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연령이 점점 길어집니다. 효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전보다 훨씬 가정은 많이 깨트려지고 부모 자식 사이에 증오와 가정의 분쟁들 문제는 너무 많이 일어나는 데도 그런데도 사람들의 수명은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그게 너무 오래 사는 게 그게 행복이라고 그렇게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한번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냥 파리 목숨처럼 죽지 못해서 그냥 한 130년쯤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은 싫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렇게 길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의 연장을 위해서 신세를 지고 의탁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짧게는 괜찮은데 너무 길게 계속된다고 하면 그것은 본인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가슴아프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자기의 죽음을 위해서 일평생 기도하면서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죽어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고 그리고 너무나 오래 괴로워하다가 죽어서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고통받게도 말고 그저 섭섭할까 말까 할 때 죽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 따라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교회 짓느라고 사는 것도 바빠서 죽음을 위해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살기에 바쁘니까.
그런데 보세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장수할 것이오’ 하는 그것은 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 속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 나는 그쪽에 훨씬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정말 공경적 효도를 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은 정말 은혜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풍성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을 살수 있다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째든 여기에서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이 자기의 부모를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진정으로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하여튼 무엇인가를 그렇게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애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아십니까? 애들이 자기 손잡고 가라고 혼자 가지 말아요 합니다. 오늘도 열린 공간에서 1500원이나 외상을 졌습니다. 애 빵 하나 사주고 제 하나 사주고, 나는 잘 모르는데 저는 날 알거든. TV에서 늘 보니까. 우리로 말하자면 스타입니다. 그 애는 나에게 접근할 때 내가 자기를 굉장히 잘 아는 것으로 접근합니다. 내가 이야기를 했잖아요. 대구에서 ‘용의 눈물’ 한참 할 때 유동근과 옆자리에 앉았는데 나는 친한 것 같아서 내가 TV를 전혀 안 보는 목사인데 용의 눈물을 대게 재미있게 본다고 당신 참 잘한다고 그랬더니 아주 굉장히 별로 안 좋아하는 눈빛입니다. 아주 귀찮다는 듯이 어 그래요. 나는 굉장히 친해 보이는데 자기는 날 모르나봐. 애들이 그런 것입니다. 매일 봤다는 것입니다. 막 울기에 너 이름이 뭐니? 그러니까 누구며 몇 살이고, 나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나보고 싶었니? 그러니까 많이, 많이 또 더 한 애는 목사님보고 싶었니? 하니까 네, 이래서 제가 아이들을 자꾸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경적 효도를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효도하는 사람을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 과해 보일 정도로 현상금을 거시면서 그렇게 우리에게 잘해주시고 효도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그토록 해주시고 싶어하는 이유가 뭔가 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아침에 반복이 되겠습니다만 목사님, 나는 그래도 우리 부모에게 하느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물질적인 축복도 없고 잘 되는 것도 없이 살았는지 참 불만이 많았는데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까 잘 되는 것에 대한 관점이 내가 너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것을 지금 목사님이 해석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해석을 해서 그러면 효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영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풍성한 삶을 산다고 그랬는데 나는 사실 그것도 별로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효도는 하지만 교회에 오면 매일 졸고 이번에는 의자까지도 졸기 좋은 것으로 바꾸셔서 푹 자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에 새 시대를 평촌에서 열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설교의 진실성이 입증이 되겠습니까? 그때 저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효도가 공경적 효도는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숭배적 효도든지 아니면 또 동정적 효도든지 또 하나는 부채적 효도든지, 이 부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이 축복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부모를 공경적으로 효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과할 정도로, 사실 모든 축복을 다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약속이 다소 추상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사실 하나님 앞에 또 받아야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 주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그런데 말하기를 돈은 안 주신다면서요?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애들이 엄마가 어디에 가자고 하면 별로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아빠도 간다고 하면 와! 가자 그리고 갑니다. 가기만 할뿐 차비도 네가 내고 밥도 안 사주고 좋은 선물가게에 가서 그 대신 네가 꼭 갖고 싶은 선물 구경만 시켜주마. 그렇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은 압니다. 아버지의 성품이 그게 아니니까.
그런데 사실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 정도로 현상금을 거신 것을 우리들이 성경에서 찾기가 쉽지가 않은데 그런데 어떻게 거실 수가 있는지. 우선 이게 놀랍지 않습니까? 전혀 안 놀랍습니다. 이러니 내가, 놀랍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 그렇게 해야지. 놀랍지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게 그렇게 힘든 십자가입니다. 아십니까? 공경은커녕 용서할 수 없는 부모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화해를 지나서 사랑하고 사랑을 지나서 주께 하듯이 주안에서 순종하면서 그분이 소중한 분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그분을 공경하며 효도하는 그것은 자기가 십자가에서 수십 번 매달리면서 죽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십니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증거를 대볼까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부모와의 관계가 깨트려지면 죽을 때까지 화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물론 남들이 볼 때에는 기본적으로는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물론 돌아가시면 울고, 생신 때 되면 고기 근 이라도 끊어서 가고 어버이 날이면 꽃이라도 하나 해서 봉투라도 들고 줄래줄래 갑니다. 그것 말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처럼 그것 말고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듯이 부모님을 깊이 용납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한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의 세월을 보내게 했던 그 부모의 이름 석자가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움이 되기까지 아로새겨지는 것은 수십 번 십자가에 매달려서 스스로 죽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인간적인 가책이나 도덕적인 후회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아버지로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그 큰사랑 앞에서 자신이 무너지면서 그러면서 자기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그 부모의 형상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읽어내고 그리고 그분들을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들에게 효도하면서 그것이 동정에 흐르지 않는 공경적인 효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기의 목숨을 건 사람이 아니면 그런 정도의 변화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모든 걸 건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는 지체들에게 꼭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에게 잘하려고 하지 마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부모를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의 인생과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적 동반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교회 안에서 끊어놓을 수 없는 한 지체로서 그의 살아온 배경의 다름과 자신에게 준 상처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같이 자란 부모이면 미운 정 고운 정 들면서 자랐겠지만 생전 보지도 못한 사람 어느 날 이끌려서 남자가 좋아서 결혼했는데 이 사람이 너의 부모다. 굉장히 황당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렇게 공경적인 효도를 다할 수 있는 삶은 힘듭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그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기는 교육도 받았는데 엄마 아빠는 교육을 못 받아서 말하는 것도 촌스럽고 옆에 있는 것도 창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부모님을 보이면 자기가 위신이 깍일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를 부모로 깊이 생각하고 그 부모를 받아들이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부모와의 관계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지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맺어진 한 형제 자매로 주셨는데 그들과 더불어서 주님이 하나되도록 명하신 것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여러분처럼 착한 교인을 처음 봤습니다. 교회도 처음 해봤지만 정말,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네 교인들처럼 착한 교인들이 없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딱 한 교회가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하니 어디냐고 해서 우리 교회가 조금 더 낫다고. 착합니다.
그런데도 늘 마음이 아픈 날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보다도 훨씬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사실 저보다도 감정적으로 훨씬 풍부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웬만한 죄에도 누가 이러이러한 죄에 잘못했다고 하면 그래, 왜 그래 사람이 그리고 지나가지만 하나님은 작은 죄에도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작은 정직을 잃어버리는 것에도 괴로워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그렇게 배경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 다른 지체를 단지 주님을 함께 경험했다는 이유 때문에 한 교회를 이루고 한 가족이 된 사랑하는 그 지체들이 그렇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우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하나 되게 해주신 것을 끝까지 지키며 그렇게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수없이 하나님 앞에서 깨트려진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그런 상처를 준 지체들은 기억도 못합니다. 그래, 내가 한마디 안 보이는데서 욕했기로서니 뭐 그것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고 남자가 쩨쩨하게, 저는 어떻습니까? 저는 더 합니다. 남이니까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교회가 화평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교회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자녀인가를 깨닫고 깨트려져서 날마다 이기적인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런 진실한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 만드시는 한 과정으로 주님이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빚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가 한 것은 작은 것인데 주님이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큰 상급을 이야기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마 지체들과 싸우는 것이 옳지 않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온 세상에 충만하려면 내가 저 인간을 용서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목사님이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서 내가 참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우리에게는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우리 개인적으로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작은 일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관계를 넘어서서 그 부모를 숭배적인 효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동정적인 효도도 아니고 부채적인 효도도 아닌 이런 공경적인 효도를 그 부모에게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이 십자가를 지고 깨트려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아픔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 아픔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졌던 사람들이 부모님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공경적으로 효도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다시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한번 망가진 사람은 영원히 망가진 상태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거기에 어떤 이변이나 이적, 이런 것 없습니다. 한번 망가진 사람은 영원히 망가진 채로,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은 부모님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게 사랑 없음을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이 우리보다 훨씬 완전하신 아버지로서 우리가 자녀들을 용납한 것에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언제나 신실하게 거기 계셔서 우리들을 찾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이 사람의 형상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그런 도성인신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모를 공경적으로 효도하는데 이르기까지 자신이 깊이 깊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복음화가 안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자기가 그 가정을 순교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이 내게 베푸신 그 사랑을 한 몸으로 끌어안고 내 사랑하는 형제, 내 사랑하는 자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내 골육지친을 위해서 거기서 죽으리라 그런 각오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책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진실 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인데,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인데 여러분들 정말 주님 앞에 이렇게 공경적인 효도를 드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도 얻고 부모도 얻고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복 주고 싶은 그런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부모 공경의 핵심, 순종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사도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권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부모공경에 따른 그 놀랍고 소중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알고보면 이것은 2절과 3절은 1절을 구체적으로 해설해 나간 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그 부모에 대해서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1절에서 설명하고 그리고 2절 3절에서 부모공경의 대의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공경적으로 효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들을 이제 사도가 구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논리에 의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종이야말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공경한다.“ 히랍어로는 ”히팝쿠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휩포“는 언더 ”아래서“라는 뜻이고 ”아쿠오“는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듣는데 그 듣는자세가 언더 낮은자리에서 명을 받들 듯이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얘기하는 순종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쿠오오“하는 그 듣는다.라고 하는 그것이 히랍어로 되어있지만 그러나 배경은 성경에서 ”듣는다.“하면 여러분 벌써 성경에서 듣는다라는 것에 대해서 쓰여진 것을 여러분 쭉 생각이 나지않습니까. 그렇죠. 듣는다. 구약에서는 동사가 ”샤마“입니다. 이것은 ”듣는다.“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듣는 목적어가 하나님일 경우에는 그 ”듣는다.“라고 할 때 그 듣는 개념은 단순히 그냥 이렇게 들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자 하는 어떤 욕구를 가지고 그리고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듣는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특별히 아주 대표적인 용례가 사무엘이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때 듣는다.라고 하는 것은 내적인 순복의 의지를 가지고 분부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자신사이에 비할데없는 존재의 차이를 느끼면서 겸비하게 엎드린 가운데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단어가 쓰여졌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충격적입니다. 그것이 순종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도 많이 먹고 죽을날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그렇게 야박하게 할것이 뭐있는가? 그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면서 동정적으로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베풀 듯이 들어주는 그런 시어적인 그런 것 말고, 그 부모가 자신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모자란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공경적인 효도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부모앞에서 제일먼저 겸손해지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사실 자식만 못한 부모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는 평생 땅파고 농사져서 낫놓고 기억자도 몰라도 오직 애들은 이 까막눈으로 일생을 살게 할 수 없다.라고하는 각오를 가지고 그 자녀들에게 교육을 받게할려고 논팔고 땅팔아 가지고 열심히 교육을 시켜서 자식은 훌륭하게 성장시켜서 말하자면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학문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못배웠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고, 자기가 공부를 많이 하고 학문의 세계에 눈을 뜨고 지적으로 갖추어지고나니까 자신의 부모가 정말 무식하고 그리고 무지하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그렇게 무식하고 무지한 부모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자식이 다행히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의 지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소유한 인간의 그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높이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고 그렇게 겸비해지는 것을 배웠다고 할것같으면 그러면 그 사람이 얼마나 겸손해질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의 부모를 하찮게 여기는 일이 있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거의 도움도 못받고 공부하겠다고 하니까 나가서 소 풀이나 먹이라고 내쫓고 직장에나 다니라고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내 보내는 그 부모 싫어서 뛰쳐나와서 자기 손으로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자수성가해서 물질도 많이 모으게 되었을 때 그 가난하고 하찮게 사는 부모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그 사람이 갖추어지면 그런 것들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에는 똑같이 부모도 사람이고 자기도 사람인데, 그런 우월감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인격적으로 그렇게 잘 영근사람이 아닌데도 지난주에 말씀드린데도 숭배적인 효도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보다 월등히 나아요. 돈도 많고 공부도 훨씬 많이 했고, 힘도 더 세요. 그러니까 그 아버지에 대해서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고개를 죽이고 그 아버지의 영원한 팬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식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아버지는 별로 없지만 아버지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자식들은 많습니다. 그 얘기는 무슨이야기냐하면 얼마든지 그 아버지에 대해서 자신이 교만해지고 우월감을 느낄수가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반대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때에 얼마든지 인간은 그 아버지 앞에 겸비한 대신에 우월감을 갖고 그 아버지를 무시하고 그 아버지 그 어머니보다 자만심을 갖는 그런 존재가 충분히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너희 부모에 대해서 ‘휙파쿠오’ 하라.” 그러니까 아래서 자기 자세를 낮추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 듯이, 신하가 상전의 명을 듣듯이 그렇게 부모의 발 앞에서 낮아져서 그 부모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어라. 내적 순복의 그 준비자세를 갖추고 듣는 사람이 되어라고 할 때에 우리들이 성경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주님을 그렇게 만나고 은혜생활하고 효도한다고 하면서도 저와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 정말 부모에 대해서 겸비한 마음이 있는가? 한번 돌아 보아야합니다. 교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모를 무시하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항상 말도 안되는 말만하는 쓸데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효도를해도 공경적 효도는 안되고 동정적인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잘하면 동정적인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런 반론을 제기할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부모님은 실제로 정말 나보다 못났는데 어떻게하냐? 모든면에서 나보다 못났는데 어떻게합니까? 남들도 다 그러더라. 아들인 네가 아버지 보다 낫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 안들으면서 자란 사람이 누가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다 그런 소리 하는거죠.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 하는 이야기가 이것이 원래로 말하자면 사도바울이 믿음의 가정을 일차적으로 염두해두고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뭐 가족이 모두 예수를 믿은 사람도 있을것이고, 아니면 사도바울 자신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혼자 신앙에 귀이한 사람도 있겠고, 뭐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 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일차적으로 염두해둘 때는 이 가정이 주님을 믿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의 경우에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앙이 좋은 부모를 둔 자녀들은 그들이 좋은 신자가 되지 않으면 받을 형벌이 훨씬큽니다. 신앙이 좋은 부모를 둔 자녀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잘해야할 의무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크고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그 신앙 안에서 살지못할 때 받을 책임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훌륭한 부모를 둔 자식은 하나님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안해주셔도 모자라다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배웁니다. 그분이 하신 일을 배웁니다. 그분들의 반듯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자가 무엇인지를 배워갑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지를 같이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의 관계속에서 24시간 보면서 살아간다.라고 할 때, 그렇게 받은 그 축복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수 없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경건한 부모를 두었어도 그런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뼈저리게 감사하는 자식들이 너무나 소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모에게 순종해야하는데 그 부모가 정말 자기보다 훨씬 못하고 모든면에서 자기 자신이 무릎을 꿇고 그 부모로부터 무엇인가를 귀담아 듣고 순종하여야할 그런 필요를 못느끼는 그런 상황이 될 때에 어떻게 해야되느냐?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서 그들이 모두 참된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좋은 신자가 되어가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터득하고 그 안에서 지속적인 성화의 진전을 이루어갈 때 그 때는 문제가 비교적 단순해지는데 그렇지가 못할 경우에 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이 계명은 이제 우리에게 거의 정말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가 아니면 실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부모님이 전혀 예수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이 완전히 신앙하고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분입니다. 그리고 삶의 방식도 너무나 세속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적절히 교육도 받지 못하거나 혹은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성이 아주 나빠서 그래서 정말 보편적으로도 반듯하고 사람들에게 우리 부모님이라고 내세울만한 삶을 살지못할 때, 그 때에 거기에다가 순종을 대입하면서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은 보통 커다란 형벌이 아닙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그 부모님이 너무 황당한 요구를할 때, 신앙을 버리라는 말은 아닌데 너무 황당하고 어려운 요구를 부모들이 계속해서 자식된 자신들의 마음을 힘겹게 만들 때 그 때에 무한정 들어줄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리적으로. 그렇다고해서 부모를 무릎꿇어 앉혀놓고 “에이 내가 부모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줄께요. 따라하세요. 아빠는 1.이렇게 이렇게 해야됩니다.” 현실적으로 그럴수는 없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라는 스위치를 딸칵 꺼버리는 것입니다. 안되니까. 실제로 여러분들이 경험해보았지만 그 대입이됩니까? 부모가 정말 신앙하고는 담쌓은 사람인데 그 부모에 대해서 존중해 여기는 마음을 갖고 아래 엎드려서 하인이 상전의 명을 받들 듯이 그 부모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렇게 그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부모가 심지어는 이교도일 경우에는 어떻게하겠습니까? 이단에 속해있을 경우에,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탁월한 열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집도 팔고 논도 팔아서 바치고, 자식을 다 중만들겠다고 서원하고, 그렇다고 한번 쳐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영적인 대립은 물론이거니와 근본적으로 서로 선교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 그 관계가 어떤식으로 그 부모에게 순종할수 있을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시급한 것이 자신의 부모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이 부모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이 효도의 모든 문제를 푸는 첫 번째 키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주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가 복음의 빛가운데, 신앙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그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그에게 매우 특별히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고 참된 신앙을 찾아가도록 그 부모를 인도하는 것이 효도의 첫걸음입니다. 보십시오. 한집이 함께 주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달라서 부모가 자식을 미워하고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고 동기간들이 서로 의가 갈리고 그러는데 하물며 한쪽이 불신자이고 신자일 경우,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교회는 다니지만 신앙 그 자체가 거의 형식적이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거의 없을 때. 또 한쪽은 무엇인가를 좀 안다고 하더라도 한쪽은 거의 아는 것이 없어서 무지할 때 이 때에 그 속에서 주안에서 순종하는 비결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런 경우에, 가정이 모두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거나 혹은 그 부모님들이 현저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해서 어떻게 자신이 제대로 순종하면서 살기 어려운 그런 정도의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때에 이제 필요한 것이 뭐냐하면 결국은 자기 자신이 주님께 깊이 은혜를 받고 그 부모를 깊이 용납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내가 자식에 대해서 부모가 지각이 있어서 내가 자녀에 대해서 주 안에서 무엇을 요구할수 있을까를 판단할수 있고, 자식이 신앙심이 있어서 부모의 저 요구가 주님 안에서 내가 순종하여야할 의무가 있는 부모의 명령이고 부모의 뜻일까?라는 것을 서로 헤아릴수 있다면 그러면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될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식들이 먼저 순종이전에 그 부모를 깊이 그의 무지함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판단이 그것밖에 안되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서는 육신으로 보면 아버지가 모두 아버지가 아버지이고 어머니가 어머니이고, 자식이 자식이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아는 지식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영적인 부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부모를 사실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여러분들이 입양해야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순종의 문제, 그 이전에 부모를 깊이 한 영혼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그런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사는 자식들에게는 이 땅에서 잘되게 해주시고 이 땅에서 오래주님과 동행하며 살수있도록 축복해주셔도 좋을정도로 그렇게 큰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복음화,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참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내 남편, 그러나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인 내 남편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말하고 주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나를 통해 일생동안 보여주지 아니하셨느냐고 반문할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를 먼저안 그 아내가 거의 일평생을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야합니다. 더군다나 아버지 어머니가 불신자이거나 그렇게 우리들과는 신앙의 깊이가 워낙 현저히 차이가 나서 신앙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교통을 나누면서 그 안에서 서로 이해하면서 살아갈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난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아버지, 그 어머니에게 내가 주 안에서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어머님, 아버님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내게 정말 소원이 있다면 아버지가 가지고계신 그 유산이 아니라. 아버님 어머님이 예수믿고 나와함께 영생의 소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말할수 있기 위해서는 그는 그 아버지 어머니를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수있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속에서 인내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안그렇습니까? “얘야, 주님께로 돌아와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고 어떻게 일생을 주님 앞에서 살아야할지는 이 엄마 아빠가 일생을 살면서 너에게 다 보여주었지않니?”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정말 땀과 눈물로 얼룩진 신앙이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라는 마음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말이죠. 가정복음화를 이야기하면 마음이 오그라드는 이유는 뭐냐하면 우리 자신의 양심이 우리를 향해서 송사하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행복해졌으며 나는 변화되었으며, 그리고 나의 가장 절박한 아픔은 우리의 가족인 그대들이 주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와함께 영생의 소망이 참여할수 있다면 나는 아무것이 없어도 나는 행복할수 있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이 신자 자신안에 없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가정복음화에 대해서 자유한 사람은 아무도 업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교만 들으면 영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것입니다. ”아, 금년에도 또 가정의 달이 돌아오는데 우리 엄마, 우리 아빠, 그 완고하기 짝이없는 내 남편, 하나님께로 안돌아 오는구나. 그리고 가슴을 쥐어짜고 아파합니다. 그런데 그런 어떤 양심의 부자유함 말고, 실제로 우리가 삶에 있어서 그 가족들이 모두 복음의 빛가운데로 돌아와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에 대해서 불퇴전의 목표의식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복음화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누군가가 그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없으니까 늘 하는 이야기가 “나는 우리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누군가 사용해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 정면승부를 회피하고 나말고 누군가가 대신와서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해줄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실제로 가정이 그렇게 복음화되지 않으면 처음서부터 모든 문제들이 접촉점 자체가 거의 없이 이렇게 평행선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떻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한다고 해도 그 부모의 가치관을 바꿔놓을수가 있겠습니까? 매일같이 때때옷을 입고 그 나이드신 부모님 앞에서 재롱을 떤다고해서 그 부모님이 행복해지실수가 있겠습니까? 말도되지 않는 황당한 부모님의 말씀에 대해서 몇번이를 악물고 가산을 탕진해가면서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부모님의 일생을 바꾸어놓을수는 없지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너무 시급한 것은 뭐냐하면 주 안에 서 있는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모든 가족들, 특별히 우리의 부모님들이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며 그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에게 동정적인 효도가 아니라.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우리의 부모가 나보다 교육도 못받고 재산도 많지않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지않지만 그러나 주님이 내 부모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고 그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아야합니다. 우리 부모가 젊은날에 무능해서 나를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하고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가 신앙의 지조가 뛰어나서 청결한 삶을 살지못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그분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과 그 은혜의 교제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의 마음을 우리 자신이 읽고, 주님의 사랑에 빚졌기 때문에 또한 그 주님이 우리의 가족을 향해서 간절히 원하시는바가 내가 동의할수 없이 그렇게 모자라는 우리 부모, 그리고 여러면에서 도저히 무릎을 꿇고 그 명령을 받들 듯이 그렇게 그 아래서 그분의 명령을 받들 수 없을 그런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분들의 중요성을 그분들 자신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나에게 한없이 은혜를 베푸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으면서 그러면서 깊이 순종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부모님께 사랑과 순종을 드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께로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 가정, 더욱이 그 부모가 변화되지못한 아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이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유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랑해야할 자녀들을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하고 원수처럼 대하는 그 가정에서 살아가는 그 자녀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합니까. 그가먼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알지못했더라면 그런 기로움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그 자리에 세워주신 것은 바로 그런 핍박을 잘 감당하면서 그러면서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실려고 우리를 먼저 은혜받게 하셔서 육신적으로는 우리의 어머니가 우리의 어머니고 나는 그분의 자녀이지만 나를 먼저 예수믿게 만드셔서 신앙적으로 우리 어머니의 모친이 되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그 영혼들을 끌어안고 어미닭이 그 새끼를 날래아래 모음과 같이 그렇게 끌어안고 가족들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복음화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죄를 더 많이 짓게됩니다. 부모 미워하게되죠. 그리고 부모와 의사가 통할수 없으니까 공경적인 효도대신에 동정적인 효도를하게됩니다. 그러니까 점점더 죄를 짓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도의 첫걸음은 그분들을 어떻게하든지 하나님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으로 태어나서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다면 그 부모들이 주님을 믿지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정말 가슴아파하는 자녀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모님이 예수를 안믿으시는데 먼저 믿었다는 자식이라는 것들이 부모하고 다투기나하고 대들기나하고 해서 가족들이 모이면 풍지박산 싸움질이나하고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현저히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참아야합니다. 인내해야합니다.
그러면 그 순종이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여기에보니까 “주 안에서 순종하라.” 여기에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라고 하는 것은 우선 부모가 자신에게 하는 명령이나, 부모가 자신에게 보여준 뜻가운데 모든 것을 순종할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하면 “주 안에서 순종해야합니다.” 다시말하면 그 부모가 현저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나가 신앙적으로 자신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을 때에는 부모자신이 주 밖에서의 명령을 자녀들에게 요구하는법이 없겠죠. 아니 그런데 그런 황당한 경우는있습니다. 제가 아는 옛날에 어떤 사람은말이죠. 집사인데, 뻔히 자기 부인이 있는데 또 장가를 몰래갔습니다. 그것을 또 적극적으로 누가 주선했느냐하면 집사인 자기 엄마가 주선했습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장가간지 5년인가 몇 년이 되었는데 아이가 없데요. 그러니까 손을 봐야된다. 그러면서 씨받이 여자를 얻어서 그렇게 자식을 낳게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것낳다고 감사헌금도 하고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라. 현기증이 나는정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혀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경배와 공경을 받을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경배와 공경을 받으시기에 절대적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한번 청년교구 사역자들을 불러놓고 얘기했는데. 누가 그런 전통을 세웠는지 모르겠는데 교회에서 결혼예식할 때 부모님께 넙죽 엎드려서 절을해서 하지 말아라고 말했습니다. 여태까지는 몰라서 그랬으니까. 하지말아라. 왜냐하면 여기는 예배당입니다. 이 예배당에서 그런 정도의 경배를 받으실수 있는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뛰어나도 집에가서 하세요. 집에 가서는 그보다 더많이 엎드려서 한 300번해도 아무도 안말립니다. 여기는 교회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일평생 새배를 안받으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왜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은 오직 한분에게만 절하면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배돈도 줄일이 없었겠죠. 그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드는데 어쨌든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추호의 양보도 없습니다. 그것을 깊이 이해해야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자녀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형제도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부모도 공경하고 그렇게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부모도 내가 자녀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데 이것이 주님의 뜻안에 있는가? 하는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데다가 자식조차도 부모가 하는 그 명령을 어디까지가 주님의 뜻안에 있고, 어디까지가 주님의 뜻밖에 있는가 하는 것을 헤아릴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할 때에는 뒤죽박죽이 되는것입니다. 자식된 자기만이라도 정확하게 그것을 알고있으면 그러면 부모가 무엇을 요구할 때, 그 부모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모의 요구를 판단하고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뜻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애매할때에는 기도하고, 그래서 부모의 뜻을 받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부모의 판단력부족함을인해서 멸시하거나, 동정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적의 순복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세우신 그 가정의 질서를 깊이 존중하면서 그러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미는 뭐냐하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한다.라고 할 때에 이것은 정말 주 안에서 순종할수 있는 일입니다. 그 부모자신이 동기가 되어서는 순종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이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그 베드로와 사도 바울도 비슷한 권면을 로마서에서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직장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당해요. 믿지않는 상사에게 혹은 믿지않는 동료에게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됩니까?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참는것입니다. 하물며 주님이 주신 명령을 효도하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명령을 준수함에 있어서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주 안에서 인내하고 용납하고 사랑할수 있는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삶 없이는 결코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도 그 부모들이 아직 신앙이 부족하고 분별력이 없어도 자식들이 반듯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주님의 은혜안에서 살아가는 자식들이 되면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가정을 이루어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이 아직까지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배나 은혜생활을 잘해야합니다. 그래야 그 십자가를 지죠. 그래야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더많이 기도하고, 가족들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하고, 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수 있지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주님을 믿을 때에 그 사람은 영적으로보면 그 집안의 옹달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가족의 식구들, 영혼이 메마르고 갈급한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고, 나로부터 위로를 받고, 나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받고, 나로부터 분에 넘치는 호위를 경험하고 이렇게 살아가야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내 안에 고갈되기 않고 무엇이 있어야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넘치는 기쁨, 예수 안에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내 안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게하는 어머니 아버지이지만 너무 사랑스럽고 불쌍하고 그러면서 어찌하든지 저분들을 주님을 아는 은혜와 지식의 빛가운데 데려가고 싶고, 사람은 좋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이 거의 없어서 정말 내 마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는 내 남편, 그리고 내 아내를 위해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할수 있는 그런 자원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끊임없이 힘입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가족들의 영혼이 자신에게 달렸다.라고 하는 목회자적 심성을 가져야합니다. 누가? 먼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된 신자들이. 목자적인 심정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주 안에서 능력을 공급받을 때에만 그런 모든 것들을 참고 인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의 가슴을 찌르듯이 순간적으로 와서 박히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그냥 나는 그래도 참느라고 참았는데, 잘 하느라고 했는데 어느 한순간에 오장육보가 뒤틀려서 한번 성질부리고 났더니 그때가 기회라는 듯이 우리 엄마 하는 말씀이 “아이고, 교회 다는다는 것들이” 한 걸음 더 나가면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너 따라 교회 안간다.” 그 때에 그 고통은 받아보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진짜 악마의 손톱이 가슴을 후벼파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저는 하여튼 일생을 살아오면서 304장만 부르면 그렇게 눈물이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눈물나는 구절이 뭐냐하면 “아침 저녁 읽으시던 어머님의 성경책” 그때 만약에 “우리 어머니가 나 어렸을 때에 그런 어머니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일” 시시때때로 읽으며 눈물 흘리시던 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상처는 아니지만 그 나이가 벌써 이렇게 먹어서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런 찬송을 부를때에는 한없이 엄마 아빠의 호보가 필요한 그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그리고 인생의 이 끝없는 불안과, 견디기 힘든 고뇌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것인가? 이런 것들을 주님을 깊이 경외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무릎에서 하나씩 하나씩 배워서 인생의 의문을 풀수있었더라면 나의 젊은날이 얼마나 부요했을까. 그것은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그러면서 심지어는 많은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주님의 마음에 많은 못을 박으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사는것이고, 그런 방황과 번뇌의 끝이 어디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어버이로서 말해주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정말 그 뼈저린 소원이 있다면 다시한번 태어나서 주님을 잘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그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그 엄마의 아들이 한번 되어보고, 그 하나님을 정말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경건한 아버지의 자식이 한번 되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304장을 부를 때마다 그렇게 가슴깊이 스며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실현될수 없는 희망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에게는 먼 훗날 304장을 부르면서 나처럼 울게하게는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않고는 도저히 우리의 부모에게 순종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을 빼놓은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벌벌떠는 사람 아닙니까. 일만금이 내게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온 천하를 다 얻을수 있는 기회가 내게 있다고 할지라도 소중한 대가를 나에게 준다고 할지라도 사소한 계명을 지치는 것과 그엄청난 대가가 약속되어있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순종하지 않는 그것이 주님을 공경하는 사람의 인격적인 특성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분부, 하나님이 내게 이런 뜻과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벌벌떨지 않는 사람의 하나님 앞에서의 벌벌떠는 모습은 그것은 공포이지 경외의 감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래서 자신이 부지불식 간에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불순종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가치가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아름다운 순종, 그것이 인생의 참된 가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진짜 우리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은혜의 힘없이는 할수 없습니다. 정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에는 애들반, 어른 반이지않습니까.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주일날 여러분 한번 유심히 보세요. 그러면 뭐 다 그렇게 비슷하게 생긴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모릅니다. 얘네들은 매일 텔레비젼에서 나를 쳐다보니까, 내가 자기를 잘 아는줄 알고 막 와서 “목사님 나에요.” 그러는데 누구인제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나는 그 아이들을 이렇게 보면서 그런 생각이듭니다. “이 부모들이 진짜 부모로서의 소명을 받고 애를 낳았나?” 이런 생각이듭니다. 정말 심각한 반문입니다. 주님의 부모로서의 부르심을 엄중하게 느끼면서 그러면서 자녀를 낳아야합니다. 보세요. 좋은 부모를 만나면 그 사람의 인생이 놀랍게 변합니다. 무엇을 보면 알수있느냐하면 육신적인 부모는 우리에게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아버지이신 하나님 만났는데 여러분들의 인생이 이렇게 놀랍게 변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아버지께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그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그 부모 슬하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비할데없는 축복입니다. 정말 비할데없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에게 정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물론 그 길은 쉬운길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져 있을수록 이 계명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살을깍고, 뼈를 깍는 것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요구일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는 더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정말 그 부모님 앞에서 그 부모는 나에게 부모의 길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나는 그 부모님 아래서 하나님을 믿는, 주님을 경외하는 자녀의 참길이 무엇인가를 그 부모에게 보여주어서 눈 어두워 하나님을 직접 보지못하는 그 부모들이 나를 통해서 나와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나와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을 발견해서 자신도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녀인 우리들이 너무 부러워서 자신도 그 은혜의 빛아래 살고싶어하는 마음을 갖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선교적인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날마다 남모르게 가슴알이를 하며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서 그 부모님을 참고, 그 부모님께 인내하고 예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안고자 애쓰며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끝까지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반쯤만 승리하는 사람 말고, 끝까지 승리하는 사람, 예수의 사랑으로 승리.
부모가 자신에게 모자라게 보일 때 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시는 분에 넘치는 사랑이 사실은 그 부모님을 대신해서 주님이 값을 치루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진 그 사랑과 은혜의 빚을 부모님에게 갚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인내하고, 사랑하고, 용납하고,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길인지 모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성도가 얼마나 성화되어가는지 아십니까? 그는 날마다 자기 깨어짐을 경험할 것이고, 날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경계를 늦출수가 없을 것이고, 날마다 자신의 사랑없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이 보기에는 그렇게 아픔속에서 살아가는 그 상처받은 가정, 그리고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 갈려서 찢어진 그 가정 한복판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그 고통을 통해서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마치 해변에 부딪히는 그 파도가 바닷가에 사는 조개껍질을 때려서 점점더 그 조개로 강한 껍질을 가진 갑각류가 되게 하듯이 또한 시련과 이런 많은 고통들이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강하게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또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도록 만드셔서 그래서 불경건한 부모밑에 태어나서 고통받는 자녀의 그 탄식을 자신들에 대에서 그치게 하시고 그 자녀들에게서는 오히려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으며 자신이 그렇게 꿈꾸고 그리워하던 그 자식의 자리에서 자녀들로 하여금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이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 정말 깨뜨려진 가정들,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하고 사랑하고 고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에게 공경적인 효도를 다하라고 권면한 사도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에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부모가 자녀에게 대한 의무를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를 말하기에 앞서서 “아비들아” 하고 부르면서 마치 어머니를 제외하고 있는 느낌을 주지만 사실은 여기서 “아비들아” 하고 부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니 첫째는 아버지가 그 가족들의 관계를 책임지고 있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부른 것이고, 또 하나는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잠시 주어도 자녀들과 대하면서 사는 시간들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 어머니의 잔정에 의해서 아이들이 받은 상처들이 씻겨져 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좀 다릅니다. 옛날부터 아버지는 집안에서 살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밖으로 도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나 이런 것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를 부르지 않고 “아비들아” 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모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자녀들을 잘 기른다 하면 자녀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 양질의 교육을 시키고 또 그 자녀를 아주 뜨겁게 깊이 사랑해주고 등등의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많이 거론을 합니다만 그러나 오늘 사도는 여기에서 그런 것들을 모두 다 치워버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 입니다. 여기 “노엽게 하지 말아라”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오르기조’라는 단어와 ‘파라’ 라는 단어, 파라 그리고 오르기조 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된 말인데 오르기조는 오르게라는 명사가 온 근원입니다. 오르기는 ‘분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너희 자녀를 자극해서 분을 품께 하지 말아라. 너희 자녀를 자극해서 분을 품게끔 그렇게 하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것은 아주 굉장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자녀 사랑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부모로 말미암아 깊은 상처를 입고 그리고 화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다른 것들은 부모가 모두 넉넉히 주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자녀는 그 속에서 부모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아서 분노의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모든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자녀들이 그 부모와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몇 시간에 걸쳐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해설해나갈텐데 오늘은 우선 그럼 도대체 어떨 때 자녀가 노여워하는가. 이 문제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사랑 없음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 만나는 사람이 엄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나는 사람이 아빠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경험하는 사회가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그 엄마 아빠를 향한 의존의 마음은 가히 절대적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배고프지도 않고 오줌이 마려운 것이 아니고 그런데 엄마가 눈에 안 보이면 아이들이 그렇게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벌써 엄마가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아빠가 없다는 그 이유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공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해도 거의 좋습니다. 그 아이가 아직 철들기 전까지 그 엄마 아빠는 그 아이에게 있어서 거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거의 모든 것을 그 엄마 아빠를 통해서 아이들이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렇게 자라나는 데 부모가 그 아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계획에 따라서 그 아이를 이렇게 키울 수도 있고 저렇게 키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부모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그 무엇으로 그 아이를 키우든지 어떤 교육의 방침을 가지고 그 아이를 교육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그 아이를 인간답게 양육할 수 있는 토양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가? 그런 것,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모두 내어주고 자기에게 사랑 받는 그 존재가 사랑하는 자신의 존재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하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인격적인 그와 결합되어 있는 교제의 상태, 그게 사랑입니다. 그것을 느끼면서 자라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인 성장의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할 가장 커다란 의무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많이 사랑하신 것처럼 그 아이를 그렇게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의무는 부모에게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자식인데 왜 사랑하지 않으랴. 아닙니다. 자식을 향해서 치우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과, 치우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아이를 인격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를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지 않아도 자기 아이와 남의 집 아이가 경쟁을 할 때 둘이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생각할 때 저 자식 특별히 우리 애가 나쁜 짓을 해서 얻어맞을 거야, 맞아도 싸. 반쯤 죽여라.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싸워도 우리 애는 잘못이 없어도 아마 제가 집적였을 거야. 얻어맞으면 저것 봐. 그렇게 얻어맞으니까 제가 잘못하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때리면 맞을 짓을 했으니까 우리 애에게 맞을 거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격적인 사랑이 없이도 치우친 어떤 집착만으로도 자식에 대해서 그런 견해는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있으면 월드컵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이제 막 응원을 하면 누구를 응원하겠습니까? 한국팀과 다른 나라가 한다면 한국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자기는 여기서 강도 짓을 해먹고 살아도 응원할 때는 한국을 응원합니다. 애국심이 없어서 군대도 안가고 탈영하고 탈세하고 그래도 응원할 때는 모두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경기가 끝나면 다시 털러 가도 어째든 한국팀을 응원합니다. 그게 사실 나라를 향한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치우친 집착입니다.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그렇게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해주지 않는 것, 그것이 자녀들에게 있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하는 가정에서 그렇게 자란 아이는 망가진 채로 성장합니다.
아니 뭐 그래도 다들 장성해서 잘 사는데,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설악산에 가보면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면 권금성이 나옵니다. 그 위로 올라가면 그냥 돌맹이만 잔뜩 있는 그 산이 나옵니다. 사진 많이 찍어 오는데 거기 올라가 보면 나무들이 수십 년 된 나무가 뭐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란 게 거의 없습니다. 그 나무들이 모진 바람을 맞으면서 그 바위틈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서 있습니다. 바람이 하도 불어서 이쪽은 아예 가지가 없습니다. 이쪽은 다 휘었습니다. 그것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나무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나무 크기를 보고 나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나무가 자라는가에 따라서 워낙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해주지 않은 가운데서 아이들이 자라지만 그렇게 망가진 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다가 그래도 주님을 만나서 깊이 변화되고 자신의 내면의 상처로 말미암는 패역같은 것을 발견하면서 새사람이 되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럴 기회조차 못 갖는다고 하면 그 사람의 불행은 따놓은 것입니다. 보증해놓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비결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깊이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저는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도, 우리 어렸을 때는 또 다 그랬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님 말씀이, 그런데 나는 우리 엄마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준 기억이 없어서 언젠가 항의를 했습니다. 왜 좀 안 안아주셨습니까? 그러니까 아버님 말씀이 야, 그때는 다 그렇게 길렀다. 그런데 요즘들은 그렇게 안 기릅니다. 그래서 나는 기회만 있으면 그게 마음에 남아 있어서 우리 애들을 안아줍니다. 큰애가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라 저보다 키가 커서 밖에 외출하고 돌아오면 팔을 벌리고 내 품에 안깁니다. 그래서 안아줍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아빠 엄마 마음에 너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아직 너는 몰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옛날에는 자식을 물고 빨면 흉이었던 시절이 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사는 그런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없음이 자녀들의 마음에 깊이 가슴에 못이 박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결국은 오랫동안 그 억눌린 분노의 감정을 갖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가 되어서도 정상적으로 자녀를 사랑하며 살수 없는 사람으로 그렇게 망가트려 놓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런 것 하나는 편애입니다. 그러니까 딸만 쭉 낳은 집인데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만 뜨겁게 사랑한다든지 반대도 있습니다. 쭉 아들인데 왠지 아들은 부실해.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하는 짓이 신통치 않고 그런데 딸은 똑똑하고 예쁘고, 또 딸들이 얼마나 애교도 많습니까. 아빠에게 와서 볼을 비비고 용돈도 얻어가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미인계에 넘어갑니다. 딸들만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런 편애, 그것은 사랑 없음의 또 다른 변형된 형태입니다. 그게 굉장히 무섭습니다. 편애를 많이 하면 편애를 받은 사람은 상처될 게 별로 없습니다. 왜 엄마는 아빠는 언니를 미워하고 나만 이렇게 사랑할까? 너무 아파. 이런 것은 없습니다. 받는 쪽에서는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무지하게 편애하셨습니다. 동생들은 지금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별로 라 생각합니다. 나는 상처받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불편한 적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편애 받은 사람은 손해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편애 때문에 피해를 받는 쪽은 괴로운 것입니다.
(예화: 알고 계신 자매는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데 부모님이 오빠와 편애를 하셔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 한가지 오빠보다 인정받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공 부를 잘해서 성적표를 가지고 왔을 때 오빠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에서 부모에게 인정을 받으니까 부모님께 증오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
뭐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 애들도 나에게 복수 좀 하면 참 좋겠다. 집에 가서 야, 복수 좀 해라. 그런 사람이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결국은 공부를 잘해도 뼈아픈 상처를 남깁니다. 그런 편애,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정도가 아니라 가정에서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교역자 가정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니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절대적으로 못하게끔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외국에 가면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자마자 제일먼저 가르쳐주는 것은 나인 일레븐, 엄마 아빠가 때리면 911로 전화해라. 그럼 위치를 추적해서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해서 부모들을 처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에 있어서 굉장히 담대합니다. 누가 그랬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아이를 좀 때리고 싶은데 때리면 현행법에 걸리니까 아이를 꼬셨다고 합니다. 야, 한국에 우리 놀러가자. 그러니까 이 애가 자기에게 별로 잘해주지도 않는 엄마가 왜 이렇게 난리인가. 가자고 해서 애와 함께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따귀를 막 때리면서 전화해봐라. 해봐. 여기서는 때려도 된다. 이놈의 자식 하면서 막 때렸다고 합니다. 한번 때리는데 비행기 값이 많이 들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때리면 안 됩니다. 부모가 가정에서 아이들이 잘못했으면 정확하게 잘못한 것을 지적해주고 동의를 얻었을 때 그때 아이가 맞는 이유를 알고 얻어맞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정에서 공공연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아버지들은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교인들을 그렇게 지도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집에서 주먹을 휘두르면 둘 중에 하나 전화를 하는데 담임 목사에게 전화를 하든지 경찰서에 전화를 하든지 그렇게 해서, 그럼 용서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철창에 집어넣고 밖에서 용서해주고 위해서 기도해줘도 감옥 속에 집어넣고 그리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정말 커다란 죄와 악이라고 하는 것을 남편이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얻어맞고 사는 것은 책임이 많습니다. 맞는 사람들이 맞아주니까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 사람 자신의 인성을 파괴하는 것이고 신앙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런 가정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에 부모를 향한 분노가 쌓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상적인 자녀의 양육이 불가능해집니다.
두 번째 자녀를 진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부모의 잘못된 모본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에 대한 기대치는 가히 절대적입니다. 저는 눈이 나빠서 군대에 갔다가 도로 와서 방위 생활을 했는데 우리 후배가 있었는데 항상 군부대 들어가서 이제 잔디를 뽑는데 앉아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자기 아들 때문에 죽겠다고 해서 왜 그런가 했더니 아이가 세 살인데 창피하게 자기는 방위 복을 입고 아침에 출근하는데애가 온 동리에 돌아다니면서 소리소리 지른다고 합니다. 우리 아빠가 헬리곱터를 타고 지나간다고, 아빠가 군복 입고 나가는 게 개구리 복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가 봅니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저렇게 늠름하게 도시락 옆에 차고 출근하니까 저 정도 비행기는 몰고 다닐 것이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는 그 엄마 아빠가 절대적인 영웅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깨트려지면서 상식 선에서 그 부모를 볼 수 있는 그런 점진적인 성숙이 이루어지는데 그게 아니라 그렇게 절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부모에게서 어떤 도덕적 모순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부모로부터 받는 상처라고 하는 것은 벌거벗겨놓고 구두 발로 짓밟는 것, 그 이상을 자녀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부모 앞에서 배우지만 나이가 크면 부모 뒤에서 배웁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의 치마폭에서 자라면서 배우지만 자라서는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겨우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람다운 사람이 안 되면 교육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형편없는 가운데서 아주 훌륭한 자식들이 태어나는 것, 소위 이야기하는 개천에서 용 났다 것, 그런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제 몇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났던가 아니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었던가 하여튼 뭔가가 그의 생애 영향을 줄만한 아주 과격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삶을 답습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니까 개천에서 용 났다는 것은 용이 왜 개천에서 올라가겠습니까? 용이 할 일이 없어서. 별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모본을 부모로부터 정확하게 삶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기 위해서는 단순히 어느 한순간에 부모가 자식에게 잘 보여야지 되겠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아이들이나를 보고 감명을 받고 인생에 대해서 뭔가를 깨닫겠지 하는 우발적이고 간헐적인 실천 가지고는 안되고 인격적인 부모에게서 인격적인 삶이 흘러나오듯이 자녀들이 그 부모를 통해서 일반 된 그 부모의 존재와 성품 속에서 흘러나오는 삶을 보면서 자녀들이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모들이 도덕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 때 그때 자녀들이 항의할 수는 없습니다. 아빠, 나에게 그렇게 가르쳐주고 왜 아빠는 그렇게 살아. 6-7살 먹은 아이들이 아빠에게 손가락 들이대고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대신 가슴에 꽂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남아 있어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를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올바른 가르침이 부모로부터 흘러 내려가려 해도 아이들이 일단 그 부모 자체를, 존재 자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없다고 봅니다.
그럼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교육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 한사람만의 인생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들에게 인생까지 다 딸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나를 경외하고 사랑하면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고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것은 하나님이 너 나를 경외하지 않는구나. 너 벌 좀 받아야지 되겠다. 그리고 채찍을 들지 않으셔도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고 그릇된 모본을 보면서 도덕적인 성품이 그런 폭력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이 가만 나둬도 망가진 아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망가진 아이가 다시 망가진 아이를 낳고 그렇게 하면서 대대로 내려가면서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이 그 밭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채찍을 들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정말 그런 부모와의 인연을 끊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부패성을 보고 그리고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자기의 결함 많은 자기의 자녀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 영향을 자녀들이 받으면서 그런 축복된 삶이 전수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런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모본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부모로서 살아가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아버지를 가정에 목회자로 봤습니다. 어머니를 여전도사로 보고, 그러니까 그만큼 가정을 목회 하는 것이 힘듭니다.
멀리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평가는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사람됨을 보려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그 평가가 좋을 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멀리서 봤을 때 아! 정말 그 사람이 멋있어, 탁월해, 훌륭해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글쎄, 가까이 갈수록 별로, 가족들에게 가서 물어보니까 인간도 아니야. 이러면 그게 사실입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것은 포장된 것이고 밖에서 사람들이 별로야. 신통한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그래. 그런데 점점 들어가서 자녀들에게 부모를 물어보니까 훌륭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아내는, 우리 남편은, 우리 아빠는 훌륭해요. 그럼 진짜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덕적인 모본이 되지 못할 때 자녀들이 깊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세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과다한 기대, 그런데 사실 아이를 낳아놓고 아이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부모에게 아이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다. 그러면 사실 주어온 아이에게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에 대한 기대가 참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을 만나면 그분과 제일 빨리 친해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 이야기를 꺼내고 자식이 워낙 별 볼일 없을 때, 그때 노인네 분들이 입을 꽉 다무시고 조금이라도 자랑 할 것이 있으면 자랑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계속 장단을 맞추어주면 아주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만큼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애는 이러 이러할 것이다. 그런 기대는 또 필요합니다.하나님도 자녀인 우리를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항상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진 사랑이기는 하지만 계획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부어주신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를 향한 아름다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당연히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해서 그런 기대를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빗나간 기대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에 능력을 넘어서는 과다한 기대,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다른 자식들과 비교해서 아이들에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아직 일생 살면서 아직 자녀들에게 한번도 그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야, 어느 집 봐라. 이번에 90점 맞았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냥 그 애가 맞은 것은 맞은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뭐 90점 맞은 애하고 80점 맞은 애하고 바꿀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는 해봐야 아무 유익이 없고 그런 식으로 비교해서 이야기를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들이 아니라고 그래도 부모들이 가장 예민한 것은 애들 공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는 뭐 아주 자유하다고 그래도 한번 대학 몇 번만 떨어져보지 자유하나. 자유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를 해도 부모들이 받는 자극은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날 남의 집에 갔습니다. 남의 집 아들을 봤는데 자기 아들과 비교해보니까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집에 생각하니 남의 집 아이는 저렇게 너그럽고 성품도 서글서글하고 저렇게 인간성도 좋고 그런데 왜 우리 애는 그렇게 야비하고 주접스럽고 애가 그렇게 쫌팽이 같을까! 그러면서 가슴 아프게 고민하는 부모들이 많지 않습니까? 더 찔리는 이야기를 해줄까요? 신앙이 좋은 애보고도 사실은 마음이 찔리지 않습니다. 세상에 남의 집 애지만 제는 어떻게 저렇게 신앙이 좋을까? 그것에 비하면 우리 애는 얼마나 신앙이 없는가. 내가 믿는 가정의 부모로서 진짜 아이들을 제대로 못 가르쳤더니 저렇게 신앙이 없구나. 그리고 뼈저리게 아파하지 않습니다. 오직 뭔가 하면 가서 누구 어디서 과외하고 어디서 학원을 다니고 고액과외를 해서 어떻게 올라갔다더라. 넌 도대체 왜 못하나. 돈을 벌어 오라고 했나. 땅을 파라고 했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등록금 다 대주는데 공부만 하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못하나. 그런데 사실 자기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땅파는 게 쉽지, 공부하는 게 쉽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 소용없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자극을 받지 말고 자녀를 향해서 기대는 가지고 있지만 그 자녀에 대해서 자녀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흙과 같기 때문에 내가 빚으면 빚는 대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자녀를 보면 안 됩니다. 오히려 자녀를 화초처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화초를 기른다고 할 때, 물을 주면서 어느 날 물을 주다가 확 물바가지를 집어던지면서 발길로 화초를 차버리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왼쪽에 꽃이 피라고 하니까 오른쪽에 꽃이 피다니, 발길로 뻥 차고, 이 나무는 물을 매일 줘도 자라는 것 같지 않아. 그리고 발길로 차고 말이지, 네게 열매 맺으라고 하니까 하나만 맺고 꼴도 보기 싫어! 그리고 도끼를 들고 사과나무로 뛰어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게 그렇게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에게 그 아이를 틀에 넣어서 찍듯이 그렇게 빚으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뭔지 아십니까? 네 아들은 내가 기른다. 너는 물이나 잘 주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부모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우리를 영원히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런 못난 자식을 두어서 뭐하겠습니까? 일평생 살았는데 아버지는 태산같고 자기는 동리의 동산 같습니다. 아버지! 내 완전한 우상, 그렇게 사는 자식을 두어서 뭐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자식이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딛고 일어서서 그래서 신앙적으로도 아! 정말 아버지가 내게 신앙을 가르쳐주셨지만 아버지 어깨가 있었기 때문에 난 아버지의 어깨를 딛고 아버지가 볼 수 없었던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아! 그렇게 해야지. 감탄을 해야지. 그리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있으셨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나 그 부족한 아버지를 보면서 저는 온전해지려고 몸부림치는 하나님 자녀의 본분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되어야지 그게 성공한 것이지, 아! 자기 부모를 보며 절망감이나 느끼는 자식을 일평생 두고 있으면 뭐합니까? 그럼 그 밑에 태어나는 자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똑같이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저는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믿고 정신차리고 이제 목사가 되려니까 공부를 해야지 되겠다 생각을 하고 열심히 했습니다. 잘했습니다. 애가 하도 공부를 안 해 그래서 화가 나서 저 밑에 있는 대학 졸업할 때 전체 수석 한 것, 대학원에서 상 받은 것 쭉 펼쳐놓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자극을 받으라고 보여주었는데 한참 설명하고 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기 엄마에게 가서 엄마, 나는 죽어도 아빠처럼 못 될 것 같아. 그러니까 이것도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다 쓸데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신앙입니다. 그 아이가 주님을 만나서 불안전한 우리 아버지로부터 배워서는 안 되는 것들을 배울 때는 그 친아버지가 지워주시고 우리가 가르쳐주어야 하는데 못 가르쳐 주는 것은 그 아버지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그 작용을 통하지 않고는 온전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기대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닌데 방향이 빗나간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고뇌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빗나간 기대를 갖게 되면 그 아이는 망가집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정말 제 생애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전환점을 만났습니다. 그게 바로 이 자녀의 문제였습니다. 저희는 결혼을 하고 7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패역해서 한번도 자식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안 했는데, 둘이 사는 게 편했습니다. 그리고 애들 많이 난 동역자들을 보면 불쌍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든 열심히 기도를 집사람이 해서 그래서 7년만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뭐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랐는데 아이가 참 예뻤습니다.
저는 사실 외모에 콤플렉스를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잘생겼을까? 그런 콤플렉스가 아니라 아니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자기는 로션도 안 바른다고 하는데 자기가 로션을 바르고 가면 자기 과 학생들이 모두 시험에 든다고 해서 그렇게 다니는 친구도 있는데 나는 그래도 콤플렉스가 많은데 아이가 아주 예쁘게 잘 자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좀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애는 활달하고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오줌도 못 가리는 애가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 30개월 때 테이블 위에 앉혀놓고 둘이 앉아서 대화를 하는데 30개월쯤 되었을 때 벌써 어른들 쓰는 용어를 거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아이 대화에 제가 용어를 선택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의사소통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기저귀는 찼습니다.
그런데 뭘 잘못했기에 내가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논리적으로 야단을 쳤습니다. 네가 잘못하지 않았나. 맞다 고 했습니다. 세 번 네 번을 다그쳤더니 할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더니 그렇게 말 잘하던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있더니 고개를 들더니 하는 말이 ‘그래 아빠는 잘났다’ 그때 고두심이 나와서 한참 ‘그래 너 잘났어’가 유행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기저귀 차는 아이 입에서 그래, 아빠 너 잘났어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나. 그러면서 아주 똘똘하게 잘 자라면서 유치원에 가서도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고 사진을 찍어오면 그림같이 예뻤습니다. 다들 자기 자식이 그렇게 보이겠지. 그런데 아니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이 굉장히 예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참 예뻤습니다. 그런데 우리 애가 그 애보다 조금 더 예뻤습니다.
(예화: 애가 자라면서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이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변해지는 아이 의 모습 이야기)
그렇게 한 3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심경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디 누구에게 들은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뭘 생각했는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는 단어를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깊이 묵상했는데 하나님이나를 향해서 때로는 나에게는 과분하리 만치 아주 높은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사실 오늘날 저의 괴로움 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그렇게 도저히 살수 없는데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그런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와 하나님 사이에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면 나도 자식을 향해서 그런 기대를 갖고 있고 하나님 아버지도 나에게 그런 기대를 갖고 계신데 나는 그 기대를 자식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니까 관계가 끊어졌고 하나님은 내가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사랑하시면서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
그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차이입니다. 우리 아들은 부족하니까 나에게 와서 아버지라고 말을 못하는데 나는 내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내 아버지십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데 가리까 그런 고백을 늘 할 수 있게 하시는 그런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이 아이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이 아이를 정상적으로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내가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를 한번 냉철하게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뭘 생각했는가 하면 일단 첫째 공부를 기대치만큼 못한다. 저는 사실 공부를 좀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잘하는 것 말고 진짜 아주 탁월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탁월은 커녕 아주 괴로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사실이지만 지금도 그 중요성은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까 말씀드렸듯이 나는 내 아이가 정말 부모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공부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 파괴하고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자식에게 버림을 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저보고 목회를 잘하면 너는 내 아들이지만 목회를 신통치 않게 하면 넌 짤린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목회 하는 기계지, 그러면 그런 것 접자. 두 번째 그 애는 진짜 짜증날만합니다. 이불은 뒤집어지고 그 다음에 파자마는 흘러내려서 발만 쏙 빠져 나왔습니다. 양말은 하나는 책상에 하나는 책꽂이에 있고 사과 먹다버린 것은 쓰레기통에 던지다가 옆에 떨어져서 그대로 있고 그 방을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그래.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 인생이 직장생활하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깔끔하게 잘 살기 때문에 나를 열 받게 하던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직장생활 할 때 자기 책상서랍에 자기 연필 같은 것 단정하게 정돈되고 이렇게 놓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보면 대게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창의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뭘 시키려면 머리가 안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잘합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줄 오십 개 그어, 그러면 자 같고 똑바로 긋습니다. 여기다 한번 이 분위기에 어울리게 그림을 그려봐 그러면 못 그립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물론 정리정돈도 잘 하고 창의력도 있으면 좋겠지. 그런데 나도 못합니다. 나도 못하니까 우리 부모님도 나를 보고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입맛대로 되는가. 그렇게 안되게, 이렇게 그게 중요한가. 안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고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 애는 더 마음놓고 어지릅니다. 어느 날 방문을 열어보니까 아주 초토화입니다. 폭격을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우리 집 자식이 만약에 죽었다면 방에서 냄새도 안 날 것이고, 먹다버린 사과 방바닥에 굴러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뱀 껍데기 벗듯이 파자마 벗어놓고 도망치지도 않았을 텐데, 이 구릿한 냄새 이게 사람 사는 냄새가 아닌가. 양발 줍고 파자마 주어서 빨래 통에 갖다가 넣으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생각을 바꿔보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안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회가 있으면 정리정돈해라. 그런데 지금은 옛날처럼 정리정돈 안 했다고 밖에 나가서 몽둥이 들고 안방으로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아버지와의 관계 다 파괴하고 칼같이 정리하고 산다면 그게 뭐입니까? 그게 그렇게 치명적으로 중요한가. 그리고 그게 안 중요하다. 중요한 게 뭔가 하고 다 빼보니까 옛날에 내가 그렇게 자식 때문에 힘들어하고 분노하고 그런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그 사랑스러운 그 관계, 그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빠가 생각이 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인생의 난관을 만나면 아빠는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텐데 하는 기대를 심어주고 내가 만약에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일을 하고 어두움 속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린다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나를 손가락질해도 아빠는 와서 나를 안아줄꺼야. 하나님이 우리 아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 그것이 가장 소중한데 그것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자식을 그런 식으로 다룬 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아이가 고백을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서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아빠와의 관계 자체가 없다. 그리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아빠의 기대에 못 미치게 사는 자식이기 때문에 아빠가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는 부담감을 갖고 사는데 그 부담감이 자기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하면 전혀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죄책감 그 자체가 여러분들의 영혼의 회복으로 인도합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죄책감 그 자체가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회복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고 출발일 수는 있지만 그 죄책감 자체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죄책감을 가지면서 적당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서 회복되지 못하면 죄책감 때문에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범죄의 심리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탁 접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영적 존재가 되어서 야, 오늘부터 내가 변화된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 이야기를 안 해도 애들은 어느 시점을 계기로 아버지가 마음을 완전히 돌이키고 새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아이들은 압니다. 아주 정확하게 압니다. 왜냐하면 이게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서로 인격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에 다 압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다 압니다. 그래서 접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내가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전에 나는 그 아이를 흙덩어리로 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그릇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가 하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마치 자식을 기르는 것은 꽃나무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잘 자라기를 바라고 그리고 메마른 계절에는 물을 주고 또 바람이 많이 불면 바람막이를 해주고 날이 너무 추우면 화분에 담아서 실내에 들어놓기는 하지만 그것을 보고 꽃잎파리 세 개, 다음 주 까지 실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열매 3월 8일날, 6월 며칠 날 입당해서 안 맺으면 끝이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무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자라면서 이렇게 휠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휘다니 우리 가문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리고 짤라버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접는 것입니다.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아빠 생각에 못 미치고 그런 생각하지 말아라. 넌 새처럼 훨훨 날아라. 새처럼 훨훨 나아서 살아라. 아이가 한번은 아빠 나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런 것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뭐가 될만한 그런 것 생각한 적도 없고 이러 이러한 직업을 가지게 도와주십시오 하며 난 기도도 하지 않는다. 새처럼 훨훨 날아라. 그래서 주님을 향한 신앙을 가지고 아빠 엄마로부터 사랑은 받지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그리고 자유롭게 창공을 나르는 새처럼 그렇게 훨훨 날아서 너 살고 싶은 삶을 살아라. 네가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고 그런 속에서 네가 이렇게 인생을 사는 것이 가장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런 일에 생명을 건다면 아빠도 박수를 보낸다. 그게 무슨 일이든지 간에, 그러니 자유롭게 훨훨 날아서 살아라. 이제 성적표를 가지고 와도 보여주면 복 안 보며주면 안 봅니다. 나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봅니다. 나아지겠지. 전에는 갖다놓고 도대체 이것을 점수라고 받아 오니? 괴로운 일입니다. 이렇게 받고 밥을 먹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공부 가르치려고 고생하는 이 애비가 불쌍하지도 않니?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자존심만 상하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자유롭게 그래서 한 장의 종이 쪼가리보다 나는 더 소중한 것이 있다. 네가 구김살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랑할 때 사랑할 줄 알고 그리고 눈물 흘릴 때 눈물 펑펑 흘릴 줄 알고 분노할 때 부르르 떨면서 불뚝 일어날 줄 알고 결단을 내릴 때 결단할 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라.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너의 존재 그 자체보다 귀한 것이 없다. 그것은 너라고 하는 존재, 그리고 너와 나와 나누는 부자간의 이 사랑이라는 것, 그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런 정도로 귀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과의 관계밖에 없다. 그리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믿어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매일 몽둥이 들고 물론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랬지만 공부를 그렇게 못해서 어떻게 하는가 하며 종 주먹을 들 때는 공부하라고 하면 만화나 그리고 컴퓨터나 하고 있고 그렇게 믿어주니까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런 관계들이 회복이 됩니다. 지금은 아빠보다 훨씬 커서 외출하고 돌아오면 제일 먼저 팔 벌리고 달려오는 애가 그 애입니다. 껴안아줍니다. 안기는 게 아니라 내가 안깁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그런 나 자신의 깨어짐을 통해서 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정말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낍니다.
비록 우리들 중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의 아버지로부터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는 모두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왜 이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까? 죄 가운데 살아서 버려 두어야 마땅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히시고 그래서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 내려보내셨습니다.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는 대신에 멸시와 욕, 그리고 쓰라린 고통을 당하게 하시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서 33년이나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주의 백성 되게 하셨을 때 그렇게까지 우리를 주님이 사랑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공부 잘하라고, 정리정돈 잘하라고, 회사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라고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까?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아무 이유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에게 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고 헌금 많이 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살 때에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었을 때도 주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서 쓰라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언제든지 우리들이 찾아가면 하나님이 가시고 없으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거기 계셨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그런 영혼의 고향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과 다름이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들의 죄를 위해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던 것처럼 우리들이 자녀들을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이게 가능한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 집안 애보다 공부를 못하는 자식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현저하게 제주가 없고 현저하게 삶에 있어서 부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그 아이를 어떻게 우리들이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사실 우리가 아무리 부모라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부모로서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인품이나 사랑만을 가지고는 부족한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처럼 그렇게 용납하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필요한가 하면 그래서 부모인 우리들이 끊임없이 아버지인 우리들이 그런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입는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어떨 때 자식들에게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니 나는 하나님 앞에 자식도리를 못하면서 내 자식보고만 자식 도리를 하라고 그럴 수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서 있을 때 늙었건 젊었건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수시로 실망시켜드리는 자식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 많은 기대를 갖고 계시지만 그 기대 속에서 성취될 업적보다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우리 주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관계라는 사실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돌아가면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확신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죄의 길에 돌아 갔다가도 잠시 후에는 곧 돌아와서 하나님 품에서 회개하고 다시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면서 살아가야지 만 우리의 자녀들이 바르게 살아가고 바르게 용서하고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결점을 보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고 그렇게 부족한 자식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 온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의 손에 맡기셨다 라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부모로부터는 그렇게 돌봄을 받지 못했어도 이제 여러분들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고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았으니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이렇게 노엽게 하지 않고 사랑해서 그 자녀들이 여러분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주의 형상을 가진 자들로 아름답게 성장하도록 그렇게 돕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주의 훈육과 가르침으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下)
그러면서 사도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양육할 때 그 부모들이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고 그들을 이해해주고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들이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주면 하나님이 그들을 기르십니다. 그런 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신이 좋은 신자가 되어서 자기가 부족한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후히 대해주시는 그 은혜를 날마다,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아감으로서 기대에 어긋난 자녀를 용납하고 품고 그리고 그들의 부족한 부분까지 깊이 사랑하며 그렇게 그 아이를 노엽게 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귀로만 듣고 흘리지 말고 여러분의 삶 속에 실제로 적용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말을 못하고 여러분에게 논리적으로 대들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의 소유물인 것처럼 그렇게 취급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리고 또 정반대로 애들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그런 식의 부모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하고 자식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식으로 자식에게 죽어지는 부모들이 나중에 효도를 받는 것 같아도 버림받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뭔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그리고 부모로서 자신의 삶을 다 까발려서 자식들에게 벌거벗겨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을 살면서 자식이라고 길러야지 그들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지 그 부모들이 공직 생활을 하면서 뇌물이나 받는 모습을 자식들이 보고 사업한다고 하면서 탈세나 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후려치는 것이나 보고 그 아버지의 그런 그 비열한 삶을 다 보면서 그 아이들이 그 속에서 어떻게 참된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상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아이들을 때리고 발로 차고 월급 타서 집에 안 갖다주고 알코올 중독이 되어서 거리에 뒹굴고 그렇게 해야지 만 가족들이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내 아버지가 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그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 그 자체가 어린아이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지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도 그냥 나이가 들었으니까 시집 장가를 가려고 걸떡 거리고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언제 한번 기회를 달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아직 기회가 안 오는데 그 소명이 있어야 결혼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지, 그냥 봄만 되면 또 이제 짝을 찾아서 연애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게 연애도 응답 받고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언제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연애하고 그렇게 해서 무슨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게 결혼할 계획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연애의 소명이 없으니까 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리고 자신을 순전히 지키면서 정말 주만 바라볼지라 그리고 사십시오. 이제 뭐 18-9세 된 사람들이 이제 연애를 시작해서 신앙이 들어갈 틈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청년들 다는 모르지만 몇 지체들을 쭉 다루어보면 영락없습니다. 그런 연애 감정 속에 파고 들어가면 그 심령을 그냥 송두리째 다 비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자식 낳는 것을 그냥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이 아이의 영혼과 아이의 생명, 그리고 이 아이로 말미암아 빚어질 그 인생, 그 인생을 통해서 영향이 미쳐질 모든 사람,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서 영광을 받거나 모독을 받으실 하나님, 이 모든 것에 대한 굉장히 무거운 짊을 지고 그리고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기를 심각한 부르심을 느껴야 합니다. 유아 세례 응답하는 그것도 못해서 뚝뚝 떨어지고 결국은 몇 번 떨어지니까 아기를 세례를 안주고 그렇게 해서 왜 낳는지, 그렇게 해서 무엇으로 가르칠 것입니까? 좀 우리 부르심을 따라 삽시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기뻐하시는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이들을 그렇게 깊이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본을 보이고 이제 헛되고 그릇된 기대를 버리고 그 자녀와의 관계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부모들이 되어야지 만 자녀들이 아비로 혹은 어미로 말미암아 노엽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른 심성을 가진 아이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기독교 교육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면이 만약에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소극적인 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위에 적극적인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땅에다 무엇을 심으려고 하면 딱딱한 땅을 곡괭이로 파고 삽으로 뒤집어서 그래서 거기서 돌멩이들을 꺼내고 그리고 잘 땅을 간 다음에 나무를 심습니다. 그런데 교육에 있어서도 역시 비유를 하자면 그렇게 먼저 그 아이들이 소극적인 면에 있어서 뭔가 이 속에서 쓴 뿌리들이 올라오고 역하고 거역하는 그런 감정들이 노여움 속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자라지 못하도록 충분히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비유로 말한다면 아이들을 부모가 충분히 사랑해주는 것은 땅에 거름을 주고 그리고 제초제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충분한 사랑, 부모의 반듯한 모본,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가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지, 자기가 공부를 잘하고 뭘 하고 뭘 하고 그것에 의해서 자기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체험을 부모와의 관계로부터 갖게 될 때 그 아이는 성품에 있어서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성품이 이상하면 이 세상에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니까 성품이 나쁘고 힘들고 그래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내하고 품어주고 그렇게 살지 가족들도 싫어합니다. 성품이 이상하면 동기간들도 상대를 안 합니다. 그리고 혼자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품이 그렇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부모로부터 도덕적으로 짓밟히지 않고 그리고 부모로부터 자기 존재 그 자체가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그 대접을 받으면서 그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이 잘 자라갑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용납되고 아이들이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 라고 하는 그런 것을 아이들이 충분히 느끼면서 그렇게 자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소극적인 교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위에 적극적인 그 무엇이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그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사람, 부모가 자식이 그렇게 되었으면 영광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시켜서 그대로 되도록 그렇게 하는 그런 것 말고 주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자녀를 세우고 길러서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자녀를 기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자녀가 주님의 손에 의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듯이 “주의 교양과 진리로 양육하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양육하다”는 말이 희랍어로 말하면 ‘영양을 공급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소아과에서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아이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공급되는 영양분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이제 교양과 훈계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양육하라”는 이 말에서도 우리들이 이제 이런 중요한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다분히 그 아이들을 진흙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래서 손에 넣고 빚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모습대로, 빚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인간성을 파괴하는 그런 행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사랑해도 그래도 그 자식은 완전히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렇게 빚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자기의 자녀를 위해서 교육하고 가르치고 사랑하고 그렇게 하지만 마지막 그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되는가 하는 것은 결국은 부모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고 진짜 주님 앞에서 내가 하나의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유명한 목사님들 중에서도- 우리도 아직 자식을 기르고 있으니까 아직까지 내놓고 이야기할 처지는 못되기 때문에 늘 조심합니다. -- 자녀들 때문에 깊이 고통 하는 그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이름만 되면 다 아는 목사님은 자기 아들이 얼마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지 우리 그 아들만 변화시켜주는 목사가 있으면 자기가 뭐든 것을 다 주겠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밖에서 나가서는 다른 집 아이들은 많이 변화시키는데 내 집에 와서는 내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개! 그러면 깜빡 죽어도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가 매일 나타나도 깜빡 죽지 않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 한국에서 신학자로서 정말 많은 역할을 하시고 성경 전체의 주석을 쓰신 분이 아니십니까? 거의 전부다 쓰셨고 그분의 경건이나 이런 것은 전설적으로 유명하고 새벽 4시에 모란봉으로 평양에 있을 때 성경 찬송 들고 올라가면 12시나 되어 내려오실 정도로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돌아버릴 직전까지 갔다니까 굉장한 분입니다. 그분의 자서전도 제가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분이 간절히 눈물 흘리는 기도 제목이 자기 아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목사님을 붙들고 제자인데, 우리 아이 누구, 누구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거의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모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안 했겠습니까? 그것을 단순히 그 목사님이 자식에게 너무 못되게 굴었기 때문에 자식이 그 모양이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경건한 아버지 밑에는 불 경건한 아들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성경은 안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동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기간도 사랑하고 복음 전하고 그렇게 해준다고 해서 동기간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가 하면 안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목사님 한 분은 정말 은혜를 많이 받으셨고 신앙이 펄펄하십니다. 교인들을 강하게 기르는 목사님인데 몇 달에 한번씩 동생이 목사님 사시는 그 사택의 골목에 찾아와서- 그 골목에 다 그 교회 교인들 집인데 -소주병으로 유리를 다 깨고 골목을 누비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만 되면 목사님이 너무 괴로워서 죽으려고 합니다. 술병을 한 손에 들고 그래서 교인들이 나와서 왜 그러느냐고 하며 팔을 잡으면 까불지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우리형을 겸손하게 하는 가시야 그런다고 합니다. 그럼 한 한달 동안은 교인들 앞에 얼굴을 못 든다고 합니다. 설교의 자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똑바로 하라고, 아 그렇다, 어제 저 목사님의 동생이 와서 유리창 다 깨놓고 장독단지도 깨고 그랬다고, 더군다나 어디서들은 이야기는 있어서 내가 없으면 우리형이 겸손해져! 그러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괴롭고 곤고하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 대신 부모로서 우리가 정직하게 성찰하고 부모로서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이렇게 해도 좋은가. 그저 뭐 일년 내내 애비 노릇 못하고 엄마 노릇 못했다고 어린이날 그냥 장난감이다 뭐다 팍팍 써서 가서 한아름 안겨주면 아버지로서 권위가 서지 그러나 24시간 밖에 안 갑니다. 장난감 놀다가 진력이 나면 그 다음부터는 다시 또 원 위치입니다. 그런 것 말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내가 아버지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진짜 부르심이 있게끔 아이에게 하는가 그런 것을 진지하게 성찰해야지 됩니다. 그런 성찰이 없이 아이를 기르는 것은 소명감 없이 목회 하는 삯군 목자와 똑같은 것입니다. 삯군 아빠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삯군 엄마, 선한 아빠 선한 엄마가 되어야지 삯군이 되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오늘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양육하라” 영양을 공급하라.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마음대로 빚는 것이 아니라 영양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 오니까 여기도 역시 내방은 햇볕이 안 듭니다. 뭐 어둠과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저쪽 방배동에서도 어느 날 가면 한 9시 반이나 10시쯤 되면 아주 잠깐 20분 인색하게 짝이 없게 한줄기 딱 들어왔다가 사라집니다. 그 한줄기가 방에 비추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꽃을 사다가 놔도 죽는 것입니다. 꽃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꽃 사러 갈 때 항상 물어봅니다. 이거 응달에서 잘 자랍니까? 하고 물어보는데 사실 응달에서도 잘 사는 꽃이 무슨 별 볼일이 있겠어요. 이끼 같은 것이나 잘 살지, 그러니까 꽃 파는 아줌마가 응달에서 잘 산다고 해서 얼마나 보는가 하니 두 달은 기본이고 잘하면 넉 달까지 본다고, 보기는 뭘 봐. 한 달이면 그냥 죽습니다. 벤자민도 사다놓으니까 그냥 시들시들해서 잎이 후드득 떨어져서 다 죽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다음부터 방법이 생겨서 한 한 달쯤 되어서 죽을 만하면 복도에다 내놓고 있다가 교회 어디다 두고 이렇게 했는데 그래도 성이 안 찼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나무 하나를 골랐습니다. 이것은 어떤가 하니 이 나무는 햇볕에서보다 어두움 속에서 더 잘 자란다고 그런데 거짓말입니다. 그것을 사다가 놓고 한 두 달 보면 잘 보겠지, 그런데 지금도 잎이 청청합니다. 쑥쑥 자라는데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양육했습니다. 식물 주는 비료, 비닐봉지에 들은 그 비료를 한 두 바케스 사다놓고 물을 타서 한 달에 한 두 번씩 큰 병에다 물을 타서 줍니다. 그리고 가끔 물걸레로 닦아주었습니다. 정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가 주인이 이렇게 날 사랑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말라죽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 쭉쭉 자랍니다. 아주 굉장히 키가 컸습니다. 이만큼 컸습니다. 이제 쭉쭉 올라옵니다. 얼마나 예쁘게 자라는지 모릅니다. 가지가 나오고 잘 자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참 사람도 이렇구나. 이게 만약에 분갈이도 한 2년 동안 안 해주었는데 그런데도 잘 자라는데 만약에 누가 그렇게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면 아마 물을 주었어도 뿌리가 썩어서 벌써 죽었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잎이 떨어지고 그랬을 텐데. 그렇게 주니까 잎이 파랗게 올라오면서 쑥쑥 자랍니다. 그게 있으면 방안에 들어가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이게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구나. 그것을 어떻게 말하라고 나 지금 비료를 주려는데 자랄지 안 자랄지 약속을 하자. 자랄 것 같으면 주고 안 자랄 것 같으면 안 주고 식물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아이들이 뭐가 될지 어떻게 압니까? 사도 바울이 골목에서, 그때도 그런 것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나 할 때 애가 기독교 역사를 바꾸어놓을 인물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손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자기 아들을 의사로 만들든지 무슨 ‘사’자 들어가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거의 생명을 걸다시피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또 이제 자기애들이 도저히 그 실력이 안되면 그런 집에 시집을 보내려고 아예 뜻을 정한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냥 부모는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 아이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아이를 돌보면서 일생을 살면 주님이 그 아이를 들어서 무엇으로 쓰실 지 그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나는 부모들이 자기 아들을 목사로 바칩니다. 나는 그런 서원 경솔하게 서원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왜 자기가 서원 하는지, 그 아들이 은혜를 받으면 어련히 될까. 목사 만들고 싶으면 똑바로 신앙생활을 시키고 그리고 영혼들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너무 너무 사랑하면 그것밖에 할게 뭐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영혼의 비참함에 대해서 가눌 수 없는 슬픔이 한 신자의 마음속에 있을 때 그가 어떻게 영혼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되지, 뭐 자기 아들을 서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을 의사로 만들겠다고 서원을 하고 그런데 애들이 그 서원을 바쳐주어야지, 실력이 안 되는데, 그런 모든 것들은 너무 인위적이고 인간적입니다. 그런데 쓰레기꾼으로 만들겠다고 서원한 사람은 못 봤습니다. 다 좋은 것만 서원하지, 그렇게 해서 부모의 하나의 욕심이지, 그런 것들을 버리고 자녀를 잘 양육하면 하나님이 쓰십니다.
보십시오. 산에 나무가 많아도 대들보 세우려고 지팡이를 짚고 산에 올라온 산판장이(?) 눈에 띠는 나무가 정해져 있습니다. 다릅니다. 잘 자식을 농사지어서 심어놓아서 바르고 굵고 튼튼하게 잘 자라게 하면 내 아들 주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그렇게 애원하지 않아도 주님이 어련히 들어서 각자, 각자 필요한데 쓰시고, 주님의 쓰시는 데가 가장 좋은 데입니다 그렇게 살면 됩니다. 오히려 그럴 시간에 아이에게 자양분이 있는 그 무엇을 아이에게 공급해주는 역할을 부모가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자양분이 무엇인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그럼 교양이 무엇인가? 교양이 있어지자.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야, 좀 교양이 있어라.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양은 물론 그런 것과도 통합니다. 그런데 희랍어 원어로 보면 ‘파이데이아’ 라는 것인데 어린이를 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어린이 훈련이라고 그럴까? 훈육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말하자면 'discipline' 라고 하는 것인데 아이들을 벌할 것은 벌주고 혼낼 것은 혼내고 이렇게 하면서 딱 아이를 붙잡아주는 것, 그런 것을 여기서 번역한 교양이라고 하는 게 그런 의미입니다. 훈육이라,
요즘 학교에 다니신 분들은 훈육이라고 하는 말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요즘도 있나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좀 모든 게 부드러워졌습니다. 옛날에는 모든지 살벌했습니다. ‘훈육 부’ 라는 게 있었습니다. ‘훈육’ 이름은 참 좋습니다. 훈육, 잘 가르쳐서 길러낸다는 뜻인데 훈육 그러면 몽둥이하고 통하는 그런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딴 짓 하다가도 야, 훈육 부 주임 온다 그러면 애들이 경찰이 떴다 그것과 비슷해서 막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양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까 말씀드린 그런 교양은 그런 디스플린 그런 어떤 훈육의 도움을 통해서 잘 갖추어진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영국 사람들을 ‘젠틀맨’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원래 보면 거기 원주민들이 일찍 건너온 사람들이 굉장히 켈트족도 있고 이베리아부터 시작해서 켈트족 그 이후에 건너온 앵글론 섹슨족 도이치 계통의 사람들, 게르만 계통의 사람들인데 그 모두 북방에서 사냥이나 해먹고 살고 싸움이나 하고 살던 사람인데 굉장히 거칩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친 사람들의 나라가 오늘날 젠틀맨이라고 이름이 불리어질 정도입니다. 영국 사람들이 야구를 싫어하는 이유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도루’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도망가서 딱 이루로 튀나. 그게 너무 비신사적이다. 그래서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직 축구를 오직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젠틀맨, 기사도를 가진 나라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게 어떻게 보면 좀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 후에 정치 지도자들이 그 사람들을 다루는데 너무 성격이 괄괄하고 와일드 하니까 애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엄한 규율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아주 강력하게 주입을 시키고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깍듯한 예절을 갖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강한 훈련을 통해서 이제 아이들을 교육을 시키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을 자꾸 기준에서 어긋난 사람이라고 보고 그들에 대해서 나쁘게 평가하니까 그런 역사가 계속 밟아져 오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아주 젠틀한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모두가 젠틀하겠어요. 그런 사람들만 그렇겠지. 하여튼 그런 사회가 예의범절이 있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절대로 하나님이 그 아이를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시고 하나님을 간섭하셔서 그 아이들을 자라게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이들을 기를 때 부모님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이를 부모의 손에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아이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이들이 신앙이 깊이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기를 고쳐 가는 신앙이 있기 전까지 그 아이를 가장 심각하게 책임을 질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부모입니다. 교회에서 교육을 똑바로 못시킨다고 하는데 물론 교회도 교육을 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교회보다도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을 부모가 훨씬 더 많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몇 시간 와서 가르치는데 어떻게 애들이 무슨 구역 예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모가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 또 하나 아이가 성장해서 사물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그 아이에게 왜 나쁘고 좋은지는 나중에 가르쳐주고 우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그런 교육의 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나 것 뺏어 먹으면 안돼. 그런데 그 아이가 빼어 먹으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심어줄 수 있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왜 남의 것을 뺏으면 안 되는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서 이해를 하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은 체험적인 면도 많지만 선언적인 면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체험을 하면서 이런 것이 좋겠구나 하면서 가르치기 이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자라면서 그것이 왜 참된 진리인지를 아이들이 터득해가도록 만드는 그런 교육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양, 즉 훈육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훈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 자신이 그 자식에게 훈육을 잘하기 위해서는 관점 자체가 이 아이의 훈련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분명한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야단칠 때, 나도 그랬습니다. 너 왜 이렇게 어질러놓을 수 있는가. 아빠가 뭘 제일 싫어하는지 알지. 이것부터가 사실 잘못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빠가 원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왕적 발상이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모에게 준 어떤 교육자로서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가 자라면서 아버지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그리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를 부모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더 먼저 하는 방법들을 가르쳐줄 경건한 의무가 부모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습니다. 진짜 사소한 것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분노하면서도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너그럽습니다. 그런 면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들입니다. 그런 경중이 어떤 사안이 무겁고 가벼움이 아이들에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 무게와 똑같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이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부모가 굉장히 너그럽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부모 비위를 건드리면 마치 배교 자를 만난 것처럼 펄펄 뛰면서 자기를 순교시키려고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잘못된 훈육입니다. 그런 잘못된 훈육을 통해서는 아이들이 공정하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훈의 경종을 따라서 처신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의 훈육으로 아이에게 영양을 공급하듯이 아이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아이들에 삶을 끊임없이 달아보는 부모의 평가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아이들의 삶을 그냥 방치해버리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공정하게 자기 아이의 삶을 달아보아서 이것이 옳다 옳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부모가 정확하게 판단을 하고 아이에게 부모가 판단한 그 판단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판단을 받을 때에 그들의 삶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느끼시는 그 심적인 고통 같은 것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이 달아볼 수 없으니까 부모가 달아주는 것에 자신의 삶에 현주소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택할 것은 택하게 그렇게 지도해주는 것이 이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훈육, 여기서는 ‘교양’이라고 번역된 그 훈육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계속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한쪽으로는 너무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내팽개쳐서 사랑이 너무 없고 그냥 엄격하기만 하거나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그냥 모든지 자식 하자는 대로 내버려둬서 그래서 결국은 자식을 망가트립니다. 요즘에 보면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 사회 생활에서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훈육이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책임만 아닙니다만 일차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제는 아이를 낳으면 하나나 둘밖에 안 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세 사람 놓은 사람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네 사람 놓은 사람도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하여튼 일반적으로 하나나 둘을 놓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식을 불면 꺼질 새라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가운데 과보호 내지는 아주 아이에 대해서 방종하도록 부모가 여건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음식점 같은데 가보면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올라가서 식탁에서 길길이 뛰고 그래도 부모들이 안 말립니다. 그래서 신문에 났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좀 조용히 하라 그러니까 옛날 같으면 창피하다. 왜 그렇게 하니, 그럴 텐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당신이 뭔데 우리 애를 기죽이는가. 계속 뛰어라. 그리고 거기서 주먹다짐을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왜 자식을 낳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그 속에서 아이가 무슨 판단을 하면서 자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가정에서 만이라도 그렇게 자라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이가 일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그 가정에서 배워가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잖아요. 교회에서 덕의 가장 근본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살핌입니다. 그게 덕의 근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양 없이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기르면 안됩니다. 그런데 심각합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우리들이 사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심각하고 예전에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어른들이 꾸짖기도 하고 야단했는데 요즘은 투사적인 각오가 아니면 그렇게 야단을 못 칩니다. 훤한 전철에서 이제 18-9밖에 안된 남자 여자 애들이 타서 끌어안고 거기서 볼을 비비고 입을 맞추고 그러니까 노인네가 보다 못해서 중년 아저씨가 야,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이 대낮에. 그러니까 그 남자 녀석이 당장 중년 신사의 목을 딱 잡으면서 내가 뽀뽀하는데 네가 보태주는 것이 있어?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주먹다짐을 받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누구도 이놈!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교양 하게 아이들이 자라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자기 자식을 위한다고 가르치지만 마지막에 결국 이 똥물이 자신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회가 더러워지고 혼탁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매맞을 각오하고 태권도라도 배워서 가서 그런 애들 바로 잡자 그게 아닙니다. 그런 애들이 말을 듣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너무 너무 사회가 악해집니다. 그런 아이들 붙들고 안됩니다.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우리 손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일은 하지 않도록 그렇게 아이들을 훈육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토대 위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고 그렇게 살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잘 다듬어져서 그래서 교양 있는 사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위에 한가지가 더 붙었는데 주님의 훈육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런 세상에서 예의범절이 바른 사람으로 기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주님이 보시기에 반듯한 사람으로 삶을 훈련시키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런 것입니다. 반듯한 사람으로 삶을 훈련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그런 사회를 배우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우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그런 자세를 배워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출 줄 아는 그런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요즘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저도 애들이 있으니까 남의 말못합니다만 이상하게 중 고등 학생들 중에서 반듯하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아이들이 여럿 있습니다만 많지 않습니다. 집에서 훈련을 안 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너무 창피합니다. 오래 만에 목사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안 하니까 야, 인사를 똑바로 해라. 결국은 안 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평소에 그 아이를 부모가 그것을 장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제 주장은 그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는 어렸을 때는 매를 대고 그리고 크면 매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대입니다. 하도 귀하니까 아이 때는 못 때립니다. 벌벌 떨며 날라 갈까 봐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그러다가 한 15-6세 이렇게 되고 나니까 어느 날 가방을 뒤져보니까 도색 잡지도 나오고 담배도 나오고 그러니까 이 자식이 형편없는 놈이네. 그리고 이놈의 자식이 하는데 아니 자기가 그놈의 자식인데, 한 대 때리려니까 벌써 하루에 1리터씩 우유를 먹으면서 쑥쑥 커서 1미터 75 쯤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덩치는 이렇고, 아버지가 이놈의 자식하고 치려니까 중학교 2학년 된 애가 손목을 꽉 잡더니 허허 왜 이러십니까? 혈압도 높으신 데 완전히 아버지를 졸로 보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매를 대야 합니다. 매가 아프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쯤 되어서 따끔하게 혼을 내고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초등학교 한 5-6학년쯤 되면 힘듭니다. 한 5학년 때까지는 매가 통합니다. 빠른 애들은 벌써 4학년부터 사춘기가 오니까 그러니까 저학년일 때 따끔하게 때려서 탁 잡아서 그래서 올바르게 해놓고 대화로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풀면서 아이들을 길러가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때린다고 무서워하겠습니까? 그 아이가 그러니까 안됩니다. 물론 아버지가 워낙 강해서 고등학교에 다녀도 장작으로 후려 팰 수 있는 완력을 가졌다면 모르지만,
(예화: 고등학교 친구 중 예비고사가 끝나고 독립선언을 한다고 술을 먹고 아버지께 나섰으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쫓아와 도망갔다는 이야기)
그 정도 되면 또 가능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한번 해볼래. 대부분의 사람은 때리는데 있어서도 무슨 특수부대 출신이 아닌 이상 아마추어 수준입니다. 애들이 안 무서워합니다. 속으로 웃습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때리고 그 다음에는 매를 접고 사정도 하고 가르치기도하고 모본도 보이고 이렇게 하면서 전심으로 그 아이를 훈육시켜야 합니다. 생활을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의 훈육으로 그 아이를 그렇게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정직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가 살고 싶은 게 있는데 훈육이라는 것은 살고 싶은 것을 못 살게 하고 살기 싫은 것은 자꾸 살게 하는 것이 그게 훈육입니다. 그런데 그게 할 적마다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훈련, 그러면 싫은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들을 그렇게 치열하게 훈육시켜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삶의 열심히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법도와 명령을 따라 그렇게 살아가고 자기 자신을 훈련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는 기쁨이 있고 그런 부모들은 자식 그렇게 내놓고 못 봅니다. 어떻게 보겠습니까? 할 수 없으면 나와서 눈물로 기도하고 눈에 보이면 어떻게 하든지 매를 대든지, 눈물로 하소연을 하든지, 상을 걸든지 어떻게 하든지 그 아이의 삶을 바꾸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아이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제가 말씀드린 아이가 모두 결함이 있는데 모두 봐준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과도기적인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다 풀어주고 내버려두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인데 그것을 바꾸며 그것을 파괴시키면서까지 성취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소중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지, 그러니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관계를 든든히 붙들고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끊임없이 그 아이에게 요구하고 가르치고 타이르고 때로는 책망하고 그렇게 해서 이 아이가 주의 훈육으로서 훈련되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게 희랍어 원문에는 권면도 되고 혹은 책망도 되는데 하여튼 권면입니다. 충고, 권면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이 공중에 붕 뜬 가르침이 아니라 삶과 실제적으로 직접 연결된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그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아이를 그렇게 확 잡고 가르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배우는 많은 성경 지식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매일 성경 공부 교제 끼고 다녀서 1단계, 2단계, 3단계 그런 것 배운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싸들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무슨 코스로 공부하고 무슨 공부하는 그런 것보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씨름을 해야지,
나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성경공부가 재미있다는 사람들은 다시 쳐다보입니다. 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뜻으로 재미있다고 하는 것일까? 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에게 그 천사가 두루 마리를 주면서 받아먹으라고 합니다. 먹으니까 너무 달고 맛있습니다. 배속에 들어가니까 어떻습니까? 써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뭘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하고 맛있지만 그것이 들어가서 진짜 소화된 것은 달콤하고 정말 은혜롭다, 좋다, 행복해, 이런 말씀을 깨닫다니 아이 좋아라, 이런 정도 가지고 안 됩니다. 그게 진짜 살아있는 말씀도 그 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살아있는 신앙으로 반응하면 그 말씀이 자기 속에 들어갔을 때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기를 책망하고 교훈해서 고뇌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의 삶이 드러나고 그것 때문에 삶을 고치지 않을 수 없고 그 말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잘못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에 고통을 느끼고 그런 작용을 그런 식으로 성경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배라는 자체가 그 사람들이 영혼의 자리가 배라고 믿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영혼의 번뇌입니다. 그게, 그런 식으로 성경의 진리를 알아가야지 만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쌓여갑니다.
그런데 부모라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배웁니까? 그냥 무지와 고집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렇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 이야기하면 펄펄 뛰고 교회 이야기를 하면 침을 튀길 정도로 열렬하게 이야기를 해도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그런 우울한 분위기가 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급해줄 그런 훈계를 소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훈계라고 하는 것은, 아니 뭐 강아지가 사람을 훈계하겠습니까? 그 사람보다 경험이 많거나 지식이 뛰어나서 그 사람보다 앞서 삶을 사는 어떤 지혜자로서 훈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도움을 주려고 하는 말은 조언이라고 하지 훈계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에게 살게 하고 싶어하는 삶을 부모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 그 아이를 대신해서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밤늦게까지 책가방을 들고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람답게 그 아이를 기르고자 할 때 그 아이가 살아주었으면 하는 삶을 삶의 스승으로 부모인 우리들이 먼저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자기는 짐승처럼 살면서 자식은 훌륭하게 키우려고 하는 사람은 탐욕입니다. 안 됩니다. 되지 않습니다. 이변이 일어나기 전에는 안되고 그리고 진짜자기는 짐승처럼 사는데 자식이 정말 훌륭해져서 그렇게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면 자기는 아버지 취급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련한 인생이 되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보고 살려고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풍부한 지식, 그 지식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삶의 지혜들이 쌓여갈 때, 그때 그 자녀들에게 훌륭한 스승으로서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교리를 아나, 성경을 아나, 아빠 엄마가 되어서 에스더서를 찾으면 구약인지 신약인지 헤매고 말이지, 아이 세례 줄 때가 되어서 유아 세례문답 한다고 하면 지금 우리 교회만큼 철저하게 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안 줍니다. 아니 그것도 안 외우는데 무슨 세례를 줘, 세례 할 때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아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경건한 종교의 도리를 아이에게 힘써 가르치며 자기의 영혼인 것처럼 그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치겠는가 하잖아요.
그런데 아니 뭐 백성머리인데 뭘 가르치겠습니까? 아니 컴퓨터에 뭐가 있어야 가르치지, 그러면 아이 낳은 다음에 그럼 와서 별도로 공부를 해서 아이를 가르치지 뭘 가르치겠어요. 그냥 비싼 동화책이나 사서 아이들에게 안겨주고 좋은 이유식이나 사서 먹이려고 하지, 좋은 옷 메이커 옷이나 사서 입히려고 하지, 그 애를 무릎에 놓고 인생의 근본이 무엇이고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며 살고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자의 삶이고 그것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 자신이 먼저 깊이 그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사실은 이 아이가, 사람의 삶이 다양한 것 같아도 다 남이 산 것입니다. 다 살아본 것입니다. 대부분, 다만 내게 경험이 새 경험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의 삶은 그 신앙이 그만 못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따라오는 삶이 이렇게 거의 다 그 사람의 산 삶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리 고뇌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면 제가 신앙이 훌륭한 선배들이 살아갔던 그 삶의 고뇌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지체가 한번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험의 이야기를 하다가 도대체 목사님은 연세도 얼마 안 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신앙의 경험이 많으세요. 그 경험의 폭이 얼마큼 되세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절대로 교만해서가 아니라 자네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다 경험했다. 왜 그도 주님을 닮기 위해서 따라가는 사람이고 나도 주님을 닮기 위해서 따라가는 사람이야. 내가 돌산에 가서 돌을 캐다 팔아먹는 돌쟁이가 그 사람이 바다에 가서 멸치를 잡아서 팔아먹는 뱃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내 삶 사이에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다면 내가 거기 건너갈 수 없지만 적어도 거기서 이야기하는 경험이라는 게 그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험을 이야기합니까?
주님을 찾아가기 위해서 직면하는 어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 부딪치는 한계, 거기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님을 붙잡고 살수 있으며 어떻게 죄 많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찾아서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고 그리고 경험하지 못한 진리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굉장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이것이 진리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성경 속에 어떤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깊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는 모두 피묻은 진리입니다.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피와 눈물과 땀과 함께 아! 그렇구나.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상식적입니까? 난 그런 설교도 옛날에 많이는 아니지만 몇 번했습니다. 뼈저리게는 못했지만 당연합니다. 자식들을 사랑해주어야 한다. 부모가 원하는 바만 애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그런 말은 내가 중 고등부 전도사 때도 학부형 모아놓고 다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트려지니까 이제는 그런 상식선의 이야기가 아니라 뼈 속 깊이 스며들어서 아! 진짜 그렇구나.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이나를 그렇게 안 다루시는데 나는 왜 내 자식을 그렇게 다루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지난날들이 너무나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런데 아는 게 그것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계속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훈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샘이 다 마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모든 지식이 거의 성장이 없고 그 옛날에 받은 그 은혜 그리고 아이하고 교회에 와서 꺼덕꺼덕 졸다가 그래서 아이가 아빠 졸지 말고 집에나 가자. 그런 소리나 듣고 말이지,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 무슨 훈계가 나오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정말 이 모든 것들은, 더군다나 최악의 상황은 아버지가 신앙이 없거나 아니면 자식이 신앙이 없거나 혹은 둘 다 신앙이 없을 때 접촉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 하나님을 믿어도 어려운데 그 아버지다. 그 아버지에게 누가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식이 안 믿는 자식이다. 부모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야기해도 그 아들은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인데, 무슨 접촉점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가족 구성원의 모든 문제에 들어가면 마지막에 결국은 필수적으로 섬겨야 할 과제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가정 복음 화입니다. 그게 선별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식들이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가슴아파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은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대신 울어주어야 할만큼 여러분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식이 회심하지 않았는데, 주님을 모르는데 그냥 비위만 맞추어지면 잘될 것이라는 그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그 아이에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남보다 조금 잘하는 성적표나 한 장 들고 희망을 걸고 사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정말 믿음의 집안의 가정의 모습이라고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위에 자신의 삶의 현장에 가지고 들어가서 고뇌하고 그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사는 비결들을 터득해서 그래서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도움을 주고 이렇게 하면서 함께 손잡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그런 부모와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네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上)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을 주일날 낮에 설교했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을 오후에 설교했습니다. 두 설교 모두 그 대상이 부모와 자기의 친자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이런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이 구절을 우리의 삶의 적용해볼까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에 그 부모속에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포함되느냐? 하는 그 문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렇다. 라고 말해야합니다. 성경속에 흐르는 전통역시 모계사회 보다는 부계사회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모계사회였던 때도 있고, 부계사회였던 때도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 시대의 문화를 타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부장제라고 하는 문화를 타고 우리들에게 부모공경에 대한 대의들이 전달되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우리의 부모들에 적용되는 것, 그것이 곧 시부모님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더 엄밀하게 말한다고 할것같으면 그 부계사회라고 하는 전통을 통해서 그 문화의 맥락을 타고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해서 그 남편과 아내가 결혼함으로 맺어지는 양가의 부모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만은 부모로 생각하고 그리고 결혼과함께 자기의 어머니 아버지를, 편한말로 하면 친정 어머니 아버지, 남편으로 말하자면 장인 장모, 우리는 복잡한 명칭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쪽의 부모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우리의 입장에서는 출가외인이다. 그래서 호적까지 파가지 않느냐? 그러면서 그 집안하고 완전히 인연을 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유교전통에서는 어떻게 해야됩니까? 죽어도 거기에서 죽는것이고 그리고 한번 출가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런 윤리가 적용되어왔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부계사회의 어떤 영향력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몸을 이룰지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 성경 구절을 보면서 이것이 모계사회의 전통이 아니냐. 그러는데 모계사회, 부계사회 따질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몇사람 안되었으니까. 아담이 만들어져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담을 보면서 갈비뼈를 취해서 그래서 하와를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둘이 결혼을 하고 그다음에 자식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이 결혼에 있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몸을 이룰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어떤 모계사회의 전통을 암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결혼한 후에 여자보다는 남자가 부모에 의해서 결혼에 필요한 독립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본것입니다. 말이 너무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여자는 창조될때부터 좋은 남자 만나면 부모를 쉽게 잊어버리게 되어 있는데 남자는 좋은 여자를 만나도 부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명하실때에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몸을 이룰지니라.” 이런식으로 명령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그 아담과 하와의 부모가 있기전에 그 후에 태어날 사회가 어떻게 될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런식으로 지정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면으로 볼때에 오히려 저는 이러한 성경의 진리가 문화를 타고 흘러들어왔지만 그래서 우리에게 흘러들어온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문화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정하게 성경적인 입장에서 우리가 부모공경의 대의를 가지고 우리들이 본다고할 것 같으면 남녀가 결혼해서 한몸을 이루는 동시에 그는 양쪽의 부모를 함께 모시는 그런 사람들이 된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과 적절하게 관계를 갖고 그분들을 섬기고 그리고 부모공경의 대의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한 공동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결혼정신이라. 이렇게 보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양에 있는 개인주의적인 전통도 벗겨내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유교적인 전통도 벗겨내고해서 성경이 부모공경의 대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할 때에 그 때에 그 부모공경에 대해서 우리들이 그 부모를 어떻게 적용해야되는가?라는 질문에 다가올때에는 이 현대적인 그 삶의 진리를 적용해야 되는 문제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때에는 이것을 그런식으로 지평을 펼쳐야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식으로 적용을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에 계모일 경우에는 어떻게합니까? 혹은 계부일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럴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바는 뭐냐하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에 이 부모는 핏줄을 따라서 자기를 낳아준 그 부모를 의미할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가족공동체를 이루게된 그 인연까지를 포함해서 부모라고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이제 그렇다고 볼때에 결혼을 해서 시집이니, 친정이니 하면서 서로 부부가 마음상하고 다투고 하는 것은 너무 세속적인 것이고 특히 신자인 남성들이 여자측에서 볼 때 시집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것을 부인에게 부당하게 강요하는 이런 태도들은 성경들을 균형을 잃은 태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같은 상황을 보면 부모로부터 독립되서 산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생활권과 그 이면들이 접촉점들이 시댁에 훨씬더 많고 친정에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문화자체는 악한것도 아니고 선한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한순간에 어떻게 바꾸어놓은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뭐 시집이 바로 옆집에 산다고 친정도 불러서 뒷집에 살아라고 그렇게 물리적으로 할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사고에 있어서 남성들이 자기 부모가 자기 집안의 유일한 부모인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아내의 부모는 하찮게 생각하는식의 그런 풍조들은 신앙적이 아니라고 하는것입니다.
이제 그래서 오늘 둘다 다루면 너무 설교의 줄거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서 일단 가장 많이 부딪히는 지점이 이제 시어머니와 며느리입니다. 그렇죠. 장모님 때문에 너무 시험에 많이 들어서 신앙생활을 못하겠다는 사위는 물론있지만 비교적 적을것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때문에 너무 힘들고 괴로워하는 며느리들 많고, 반대로 며느리 때문에 괴로워해서 며느리 만날때마다 받은 은혜를 쏟아뜨리는 시어머니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사위 때문에 너무 만날 때 마다 시험에 들어서 신앙생활을 잘못하겠다는 장모님들은 적습니다. 그리고 무슨 사위가 매일 장모님하고 만나겠습니까. 둘이같이 살지않는한, 그렇죠. 이런 보다 일반적인 경우로 본다면 이제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그렇게 많이 부딪힐까? 그 이유를 네가지정도 들수있는데 그 이유가 다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대표적인 것이 네가지정도 들수잇는데 우선 첫 번째는 뭐냐하면 결혼에 대한 정리되지 못한 생각 때문에 많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할 때에 아들, 딸 가진 사람들은 잘 들어야합니다. 그래서 가슴에 깊이 새겨야합니다. 미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교훈은 꼭 예방주사와 같습니다. 그래서 천연두 앓고난 다음에는 예방주사가 필요없습니다. 건강할 때 맞아야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에 이런 교훈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이것이 진리다. 진리다. 진리다. 이것을 붙들고 몸에 흠뻑 젖은 다음에 그다음에 자식이 장가가면 그 진리대로 행동하면 50%이상 이 며느리와의 충돌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 오늘 설교는 틀렸구나, 나는 딸밖에 없는데 아들가진 시어머니 설교라니. 에이 맛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없습니다. 다 적용하면 적용이 되니까. 또 아세요. 늦둥이 낳을지. 그러니까 잘들어보세요.
결혼에 대해서 정리되지 않는 생각이 무엇인고하니.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밖에 안나았을 경우에, 외아들일 경우에는 그것은 더 심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해할수 있지 않습니까. 그 자식 하나보고 살았는데 그렇죠. 그 자식 하나 바라보고 살았고, 더군다나 그 위에 남편을 일찍 여위고 외아들을 기르면서 자랐다. 그런 정도 되면 그 아들은 그 어머니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거의 신앙의 대상이었다고 봐야합니다. 그저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그 아이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살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그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 아들은 죄인인 한 여자의 손에 들리워진 옥합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괴로움과 고통, 이것을 받으면서도 그 옥합에 늘어가는 향유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또한 그 어머니도 그렇게 살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가정이 아니고 남편과함께 잘 살면서 아이를 길렀다고 하더라도 요즘은 아이를 무슨 7,8명씩 낳아서 이름도 못외울 정도로 그렇게 대가족을 거느리고 사는 사회가 아니거든요. 그저 하나, 아니면 둘, 그리고 매우 특별하면 셋, 아주 원시인적이면 넷, 이런식으로 낳아서 기르고 그것을 남녀의 비를 따진다고 할것같으면 그저 아들은 많아야 둘, 그렇지 않으면 하나가 일반적인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니까 이렇게 사회가 개인화 되어가고 현대화 되어가면서도 오히려 아이에 대한 집착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기르면서 그 아이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을 가졌다가 어느날 그 아이가 연애를 하고 어떤 여자를 좋아한다. 이겁니다. 그 때에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심리적으로 보면 두 개의 질투심이 함께 작용하는데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질투심과 그러니까 모성애로 사랑할수 있는 대상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과 그리고 잠제적으로는 자기 아들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이성 상실에 대한 질투심이 같이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더더욱 그런 애정관계를 뛰어넘어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일생동안 신앙처럼 바라보면서 기대며 살던 그 아들이 어느날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나고 그리고 더 이상 그 아들이 자신의 섬김을 필요로 하지않는 독립된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리고 그가 그렇게 독립할수 있는 것은 그를 옆에서 돌보아주고 그리고 대신 챙겨주는 한 여자가 존재한다라고 생각될 때 그때에 어머니가 느끼는 허탈감과 이런것들은 그 자기 며느리를 향한 모정의 질투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게보면 사실은 아들에대한 보복적인 감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사랑하던 사람이 변신하면 복수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런데 아들에 대해서는 그래도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집적적인 복수의 감정을 표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굴절되어서 며느리를 향해서 공격적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한 사람이나, 조금한 사람이나, 뭐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나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신앙생활 독실한 여성도들 가운데서도 독한 시어머니가 얼마나 많은데요. 여러분들은 모르시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랑 어머니될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훌러덩 시집갔다가는 그분들이 얼마나 환란과 핍박과 박해를 지나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인데, 웬만큼 박해하겠습니까. 자기가 박해를 많이 받으면서 살아왔는데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합니다. 정말 조심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 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집에 돌아와서 며느리하고 대판 싸우고 핍박하고 그리고 그다음날 새벽기도에 가서 회개하고 힘을 얻고 와서 그다음날 와서 또 싸우고, 이렇게 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것들은 무엇때문이냐하면 아들에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일 큰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해야되느냐? 처음서부터 지식적으로 먼저 정리가 되어야합니다. 무슨 정리냐하면 자식은 결혼하기 전까지 내 자식이고, 그리고 이 아이는 결혼과함께 나를 훌훌 떠나야될 아이다. 그런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효도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효도할 것을 기대하면서 노년을 설계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효도를하든 뭘하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뜻을 붙들고 부모에게 효도하게끔 그렇게 만들어야합니다. 물론 어려서 아직 지식이 어리고 아직 빚어지지 않았을 때에 열심히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해야될 도리들을 가르쳐야합니다. 성장하면 이미 그 때는 가르칠수가 없습니다. 이미 다 자란 사람들을 가르칠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가 뿌린데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그 자신의 노년의 삶을 그 자식에게 의탁하며 살아야되겠다. 라는 그런 인생의 계획들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가 어리니까 뭐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은 나는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에대해서 반대입니다. 결혼할 때 아이가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고, 뭐 우리 교회에도 보면 총각 처녀인데 결혼할 때 부모신세 하나도지지 않고, 1억 2억짜리 아파트 사가지고 시집 장가 가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유능한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알뜰하게 산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렇죠. 그것도 또 각자가 대학이라도 좀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든 대학을 졸업하든 하여튼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6,7년 혹은 7,8년 해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전세방이라도 얻어갈수 있게끔해서 자기가 가면 좋은데 그러든지 아니면 아예 빚을 내서 가고 월부로 갚든지 그러면 좋은데 이 능력도 안되고 저능력도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만나서 이제 대학 갓 졸업해서 입사 통지서 받아놓았는데 당장 강자를 가겠다고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모가 방한간이라도 얻어서 주든지 아니면 워낙 능력이 많으면 뭐 한 15평, 18평짜리 아파트라도 하나 사준다든지 그런 것은 괜찮습니다. 50평 60평 사주는 것은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보내는 것 까지는 이해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서부터는 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아야합니다. 아주 예외적인 일이 없는한, 그것을 왜줍니까. 그리고 혼자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멀거니 살아있는데 그 유산을 다 도장찍어서 물려주느냐하고요. 그것 돈이 아깝고, 그 돈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자식들이 효도한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 생활하는 것입니다. 나는 외국에 있는 사람들처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 가지고 그것 가지고 살아요. 그리고 살다가 죽으면 유산물려주지 말고, 교회에 기부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단 5달라씩밖에 주일헌금 안하고 십일조도 안하고 그래도 그 교회들이 그렇게 버티고 운영되는 이유가 가끔 몇 년에 한번씩 돌아가시는 노인네들이 기부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내는 헌금가지고는 목사님 사례비도 안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액의 유산을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쓰는 것입니다. 물론 자식이 오갈데가 없고 길거리에 나 앉았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죽는다는 것을 옳지않겠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는 그럴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무슨얘기냐하면 성경적으로 볼때에 부모는 자식이 성장해서 한 가정을 이룰 때 까지 부모가 그 아이에 대해서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주님께로부터 위탁받은 권위를 가지고 그를 보호하면서 주의 교훈을 양육하고 혹은 징계하고 교훈하면서 기르는 것입니다. 결혼하면 그것과함께 이제 자신의 아들은 독립해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러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비성경적이겠네요.?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도 이제 뭐냐하면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비성경적이다. 그렇게 말할수 없고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 문화의 문제이지 그것을 가지고 부모와함께 사는 것이 비성경적이고 핵가족을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다. 우리는 그런식으로 이야기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 이런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부모와함께 살아도 가족단위에 대한 구별은 아주 분명해야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2층에 살고 아들은 1층에 부인하고 사는데 월급봉투 가지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고 부인은 시어머니가 던져주는 푼돈가지고 살림하게 하는 이런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정의 재정은 완전히 독립되고 그리고 부모에게 이 필요이상으로 기대거나 그렇게 하고 사는 것은 옳지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해당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나는 생활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하는것에 대해서 나는 반대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 그러는데 누가 모시고 사는 것입니까? 부모님이 데리고 사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몇 년씩 부모님의 신세를 지게하고 그런속에서 그 아내와 남편이 독립된 가정을 이루어갈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외곡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같이 살아도 선이 분명해야합니다. 심지어 무슨 어머니가 며느리와 아들 사이에 이불을 펴고 드러누워서 잠다는 이야기도 여러분 많이 듣지 않습니까. 심심지않게 듣는데 그런것들은 정말 바보같은 짓입니다. 그런정도로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독립안된 사람하고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직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는 성숙했는데 아직까지도 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충분히 다 자란 사람하고 결혼해야합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니면 신앙적으로나, 다 자란 사람하고 결혼해야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루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런 모든 면에 있어서 독립되어서 살아가야합니다. 물론 부모가 아제껏까지 인생을 살아온 경륜의 도움을 받고 그 지혜를 힘입어서 자신의 인생의 갈길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받고 이렇게 살아갈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카운슬러로서의 역할이지 그 부모자체에 붙잡히고 휘둘려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왔는데 계속해서 시집에서 행하는 자신의 모든 생활이나 남편에 대한 태도, 시부모님에 대한 태도 이런것들을 친정 어머니로부터 원격조정을 받으면서 그 사주를 받아서 그렇게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판단력이 없는 여성들, 아직 시집갈 나이가 안된 것입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성숙하지가 않았습니다. 남편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성경적인 정신으로 보면 아내와 남편이 둘이 있고 시어머니가 있는데 아내가 도저히 시어머니와 어떻게 노력을 해도 화합해서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부모와의 관계를 끊을것이냐? 아내와의 관계를 끊을 것이냐? 그러면 부모와 의절하는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들은 섭섭하시겠지만 섭섭할 것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면 사랑하되 너무 많이 사랑에 대한 보수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보수를 바랍니까? 지들 잘살면 되지“ 여기에서 보수라는 것은 보증수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보상을 포함해서 모든 것, ”내가 이렇게 쏟아부었으니 저 아들도 일평생 나만 태양처럼 바라보고 살것이고 내가 자기를 뼈저리게 사랑한 것, 그것 은혜와 공로를 다 알고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 모두다 보수를 바라는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세요. 무슨 뜨거운 사랑이든지 간에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 사랑은 항상 빗나갑니다. 제가 질문하나할께요? 어머니의 사랑을 못받고 자란 남자. 문제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자란 남자 문제있습니까? 없습니까? 더큽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이 말이죠. 사랑이면 모두 치유가 된다.라고 노래도 많고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결국 무슨이야기냐하면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서 융화되어서 흘러나온 그 어떤 거듭난 사랑이 아니면 많이 받아도 문제이고 안받아도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도 망가졌고, 사랑을 받는 대상도 망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어쩔수 없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여기와서 설교 안듣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생각을 꽉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애꿎은 여자 시집와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먼저 정리가 되어야합니다. 자식 아들, 장가보내면 그러면 남이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비켜줘야합니다. “야, 이제는 엄마가 제일이 아니다. 네 아내를 엄마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한단다. 엄마는 이제 네가 새로 데리고 온 예쁜 색시의 선구자 세례요한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제 진짜가 나타났으니 나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고, 진짜 빛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네가 요즘 폭빠진 그 며느리다. 그러니까 많이 사랑해라.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하면 엄마인 나는 네 마음에서 거의 잊혀질 정도로, 엄마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한 여자를 사랑해라.” 그렇게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해당되는 사람들은 아멘을 안하고 시집도 안간 사람들만 아멘을 하는군요. 여기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며느리고하고 시어머니하고 둘이 앉아서 시어머니는 벌레씹은 얼굴을 하고 있고 며느리는 아멘, 아멘. 그런데 저는 제삼자잖아요. 그리고 성경에 의해서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그 생각이 정리가 안되었기 때문에 제일 하지 말아야 할것이 뭐냐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자식을 기르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식을 유아세례줄 때 그 약속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 아이를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기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떤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기른 것입니다. 그런 얘기는 일평생 하지 마세요. 자식 기른 부모, 고생 안 한 사람 어디 있는지 어디한번 손들어보라고 하세요. 그런 이야기를 왜해요. 정말 바보같은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어떻게 낳기는 다 똑같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그런 얘기를 해서 성공하면 겨우 동정적 효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식은 아들은 장가를 가면 그때까지 내가 보호자일뿐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훨훨 날아서 가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이제 두 관계에 있어서 성공한 사람인지 실패한 사람인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관계가 뭐냐하면 첫째는 남편과의 관계, 남편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깊은 연합을 이루면서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자식들이 빠져나가니까 시몬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걸려서 못다니던 곳도 다니고 더많이 시간을 갖고 그리고 행복하고 오붓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내가 제일 불만인 것이 젊은 사람들이 아무게 아빠, 아무게 아빠 이렇게 부르는 것 말이죠. 자식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겨우 자식이 끈이 되어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쑥 빠져나가면 꼭 문고리 떨어진 문처럼 말이죠. 그래서 문꼬리빠진 문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연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물밀 듯이 서러움이 밀려오고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고 그러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는 아무렇게나 하고 자식에게 폭빠져가지고 그냥 모든 것을 퍼주는 그런 부인들있지않습니까. 그것은 번지수를 헛짚은 것입니다. 계는 곧 갈 사람입니다. 가고나면 마지막까지 봐야될 사람은 자기 남편입니다. 있을 때 잘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떠나가고나면 남편하고 같이 살 사람이다. 얘네들을 잠시 나와 남편이 사는 집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영원히 함께 가정의 기본단위이다. 부모로부터 우리가 떨어지고 자식이 우리로부터 떨어져나가도 우리는 영원히 한 형제요, 한 자매요. 한 공동체요, 한몸으로서 살아간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져야됩니다. 생선 한토막이라도 있으면 아들 주지말고 남편주세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또하나 드러나는 관계가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정말 제가 말씀드리지않습니까. 인간에게는 이 마음속에 그릇같은 것들이 있어서 어떤 그릇은 엄마 사랑에 의해서 채워지고 어느것은 아빠사랑, 어느것은 동기간 사랑, 어느것은 아내사랑, 남편의 사랑, 뭐 자녀의 사랑,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 골로루 가득찰 때 그 사람이 이 성품이 원만한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느냐고요. 정말 부모님으로부터 원없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마 사랑도 많이 받고, 아빠 나 밖에 모르고, 그리고서 자랐는데 동기간도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줘서 오빠 사랑도 많이 받고, 그리고 동생 사랑도 많이 받고, 그리고 갔는데 또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이 사랑을 많이 해줘요. 그리고 살았는데 자식을 낳았는데 너무 효자 효녀에요. 그래서 늘 더욱 자식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았는데 그런 사람 어디있습니까? 어디있어요. 아니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하세요. 어디있어요? 지상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지상이 살기좋은 세상이었다면 주님이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는 잘 만났는데 자식들로인해서 그렇게 마음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식들은 그렇게 효자인데 남편으로부터 견디기힘든 고통을 받은 사람도 있고, 엄마는 나밖에 몰라, 그렇게 사랑했는데 아빠는 가정을 돌보지 아니하고 훨훨 날아간 기러기처럼 날아가 버려서 어린시절을 반쪽 사랑속에 어두운 사랑속에 보내는 사람들도 있고, 무엇에 걸려도 한두개는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를들면 어머니로부터 받을 사랑을 못받았는데 아버지 사랑을 배나받았다. 그러면 숫자로보면 아버지 컵에 담고 남는 것 엄마컵에 옮겨담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안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영원히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들이야 안그렇습니다. 워낙 우유가 발달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최고로 호강하는 것입니다. 귀저기도 전 세계에서 제일 좋은 귀저기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합니다. 일본에 가면 한국제 귀저기 그러면 부인네들이 어쩔줄을 몰라합니다. 그렇제 좋아합니다. 선진군에도 그렇게 좋은 귀저기가 없을정도로 잘만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강스럽게 아이들이 자라서 영향의 문제가 그렇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문제가 안되는데 어렸을때에는 모유를 먹지않습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일찍 죽거나 젖이마르거나 그러면 그것을 못먹는데 우유를 먹을 돈이 있나. 그러니까 밥끓인 국물을 먹고 자라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면 밥끓인 국물 먹고 자란 애들은 벌써 누군이지 벌써 금방압니다. 얼굴이 까많고 키가 째끄마한 애들은 전부다 그런 애들입니다.
무슨이야기냐하면 그후에 아무리 아구처럼 밥을 많이 먹어도 아이들이 크는게 한계가 있습니다. 그 먹어야될 그 나이에 잘 먹어야지만 아이가 이 체격의 기본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되는것처럼 엄마 사랑 못받았으면 세월이 많이 지난다음에 아내사랑 많이 받고 자식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도 해결이 안됩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이 딱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부족한 사랑에 대해서 대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사랑을 많이 못받았어도, 엄마 사랑을 많이 못받았어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그 엄마사랑 못받고 아빠 애정없이 자란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그 물붓듯 부어주시는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을 때 오히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못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망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더 깊이 붙잡힌 사람이 되고, 그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했던 영향을 그보다도 더 완전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배우며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되어갈수 있는 재생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인생 마지막에 붙잡은 기회입니다. 망가지는 인생의 마지막에 붙드는 기회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평소에 자식을 외아들을 길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워낙 위로가 넘쳐요. 그리고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을 위해서 일생을 기쁘게 헌신하며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훨씬 더 좋아요. 주님이 훨씬 사랑스럽고, 그 주님께 깊은 애정을 바치며 살아계신 그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능력과 은혜를 입으면서 그분의 교제속에서 즐기는 그 충만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그것들이 결코 이 세상에서 아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를 통해서 주는 위로와 기쁨보다 비교할수 없이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세계가 있어요. 그러면 외아들 장가갔다고 와르르 무너지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럴수 있습니까?
제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양수리로 중고등부 교사로 수양회를 갔다가 수영을 워낙 잘하니까 애들이 배타고 건너는데 그 배를 뒤쫓아간다고 헤엄치고 가다가 배는 다 도착했는데 이 선생이 안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까 오가다 심장마비 쇼크를 일으켜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냥 못찾는거죠. 시체를 찾을수가 있나. 여름인데. 그것도 나쁜 사람들이죠. 천상 잠수부를 동원하는데 그 당시에 하루 잠수부를 동원하는데 10만원인가 그랬습니다. 엄청나죠. 그런데 몇일을 들어갔나 나와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할수없이 찾아내면 100만원을 준다. 300만원을 준다. 그러면서 현상금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시체를 찾아서 돌에 묶어서 가라앉혀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값을 한없이 올려서 가서 끌러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에 어쨌든 그렇게 해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권사님이고 아버지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우리처럼 아들이 발로 채이는 집 애들은 죽지도 않아요. 그 애가 하나 죽었는데 그 아이가 삼대독자래나, 사대독자래나. 그 아이가 20살인가 21살 때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 처럼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거기까지는 이해가갑니다. 그런데 교회를 안나오더라고요. 장로나 되고 권사나 되었다는 사람이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그런 사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현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식 자랑할수 있죠. 안사랑하면 안되죠. 어떤 부모들은 자식에 대해서 애정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 자신이 워낙 헌신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남은 애정이 없어서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고 그런식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신종바리세인들입니다. 항상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것에 대해서 죄송하게 생각해야지, 그렇게 떳떳하고 마치 자기 자신은 하나님만을 워낙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은 세상이요.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처럼하면서 하나님과 아들을 대결구도 놓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주님의 사랑가지고 자식도 사랑하고 아내도 사랑하고 남편도 사랑하고 동기간도 사랑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워낙 부실하기 때문에 자식이 가버리고 가면 그 뚫어진 가슴을 매울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식에 대해서 한을 품거나 말이죠. 그렇지않으면 그것도 자식이 불쌍해서 할수없으니까 애궂은 며느리 붙들고 말이죠. 그렇게 갈등을 일으키면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소속감을 확인하고 이러는식의 삶은 너무 성도로서의 삶이라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비굴한 삶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신앙생활은 젊었을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이들수록 더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살아야될 필요성을 점점더 가중됩니다. 늙으면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그렇죠. 돈이 많으니 자기 원하는데로 쓰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수있습니까. 죄를 짓자니 기력이 있습니까? 사랑하고 좋은 친구들이 있습니까? 한사람 두사람 다 떠나죠.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한사람 두사람 죽고 그들의 장례식에 오가는 상황쯤 되어서 이제 남은 친구들보다는 보다는 먼저 앞서간 친구들을 많을 때, 그 파고드는 인생의 외로움과 허무, 이제는 아무도 내 앞에 방패막이 되어줄 사람이 없이 죽음의 전선에 자신이 직면했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에 그 처절한 한계감, 이런것들을 신앙이 없으면 극복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이죠. 젊은이들은 신앙생활하면서 깊이 깨뜨려지고 그래도 은혜생활 제대로 하지 않아서 나이들면서 말이죠. 몸이 굳어지는 것처럼 영혼까지 함께 굳어져서 아무 딱딱하고 질이나쁜 신자가 되어가는 그런 것들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적어도 성령충만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예민하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그분의 위로속에서 새힘을 얻는 삶을 산다면 적어도 치사하게 노년에 장가간 아들을 붙들고 그 소유권싸움을 며느리고 하고 하면서 마음 상하면서 서로를 물고뜯는 그런 저질적인 삶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서부터 아주 명쾌하게 정리하세요. “얘네들은 다 떠나갈 애들이다.” 좀더 오래까지 남는 사람이 한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 남편이다. 그래 이사람도 결국은 떠나가 버리고 마지막에 한분 영원히 내 신랑이 계신데 그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래서 아들보다는 남편이 소중하고 남편보다는 주님이 훨씬 소중한, 그런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그런 것들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며느리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아니 월급타서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자기 아내 갖다주는데 그것이 왜 상처가 됩니까? 당연하지. 자기도 맨처음에 시집왔을 때 생각해보세요. 자기 남편이 월급타서 시어머니에게 가서 다 털어놓고, 빈봉투 들고와서 내일 아침 쌀값은 엄마에게 타서 써, 그러면 자기는 좋으냐고요. 그런 생각을 해보아야지 성경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지않습니까. 가정의 도리라는 것이 독립되어있는데 그런데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살면 반은 시험을 이길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선수를 치세요. 자식이 엄마, 목사님께 가서 결혼 교육을 받았는데 엄마로부터 독립하래,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한, 엄마는 나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래요. 거기에서 또 나도 엄마에게 도움을 받으면 안된데. 그런 이야기는 또 빼지. 빼고 나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래, 나보다 아빠를 더 사랑하래. 아들이 그렇게 말할 때 까지 내버려두지 말고, 뭐하러 그래요. 기왕에 줄 것, 그렇게 주느냐고요. 기도 많이 하고, 둘을 불러놓고, 가슴이야 쓰리겠지만 둘이 앉혀놓고, “내가 일러주마 나는 이제껏까지 내 치마폭에서 살았고, 진자리 마른자리 내가 갈아뉘면서 너를 이만큼 길렀다. 그러나 이 애미에게 너무 부채의식을 느끼지 마라, 나는 너를 사랑해서 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래서 너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만 하면 나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만분의 일이라도 값을 것 같아서 내가 신앙생활 잘못해서 제대로 살지 못했고,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주님께 부름받은바 그 부르심을 따라서 살지못한 많은 부분을 너를 통해 살게함으로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값을까 하는 그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너를 길렀고, 물질적으로 어렵고 가정적으로 모든 어려운 시련과 어려움속에서도 하나님이 나혼자 내버려두셨더라면 너를 못길렀을 터인데 날마다 내게주신 그 은혜가 너무 크고 그 신비한 비밀속에서 그 많은 시련의 시간들을 하나님과 한없이 동행하면서 너를 길렀다. 그러니까 너를 너되게 한 것은 이 애미의 희생이 아니라. 이 애미와함께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였음을 네가 기억해라. 나는 잊어도 너를 길러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너는 잊지말아야된다. 그리고 이제 이제껏까지 너는 내품에서 자랐과 나만 바라보면서 살았고, 네가 어디에서 울든지 내가 제일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리를 여기에 있는 이 아이에게 물려준다. 이제는 네 아내가 내 자리에 서서 너를 그렇게 섬기고 너를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합니다.
어느 집에 가장이 몸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가니까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돌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어디 갔느냐? 그랬더니 부인은 아기 때문에 못왔다고하더군요. 엄마가 가서 아기를 보고 부인이 와서 그 옆에서 봐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정신이 시어머니에게 필요합니다. 아들이 아프다. 그러는데 아슴이 녹죠. 장가를 가서 저는 아내에게 빠졌지만 어머니인 내 마음은 안그렇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그 며느리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가 그 아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빛깔이 진하고 정말 원색적이겠습니까. 진짜 살쩌름이라도 떼어서 주고 싶고, 진짜 심장이라고 떼어서 이식시켜주고 싶은 그런 마음일 것 아닙니까. 사실일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진짜 그 아내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 어머니가 그 아들을 더 사랑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집에서 애기 보고, 그리고 며느리를 보내는 그런 시어머니가 되어야합니다. 병원에 너무 가고 싶어서 손자를 끌어안고 눈물로 자기 아들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지라도 그 아들이 가장 외롭고 고통받는 그 시기에 그 며느리를 보내서 이렇게 “네 남편이 고통받고 아파하는 시기에는 네가 여기 있어야된다. 그리고 그렇게 있게하지 못하는 짐을 내가 일시적으로 맡아주마“ 이런 정신을 가져야합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 오시면 “어머니 집에 들어가서 애나 보세요. 우리 집사람 보내세요.” 그래야됩니다. 이 정리가 안되었으면 이 시어머니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가슴에 칼맞은 것처럼 아프겠습니까. “저 자식이 말이지 장가를 가더니 돌아도 보통 돈 것이 아니구나.” 자식이 돈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돌아야될 때 안 돈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됩니다. 그러면 시험의 절반은 극복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알고, 그 어머니에게 그런 자리를 양보하면 안됩니다. 난 실제로 들었습니다. 실제로 아주 독실한 크리스챤 가정인데 그 어머니가 아들하고 같이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부생활을 하기 위해서 두사람이 나가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러브호텔을 전전해야 하는. 실화입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그 사람이 망가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면 뭐합니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서는 이렇고 후는 이렇고 진리의 말씀으로 명확하게 갈라놓아서,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알고 살아가야할 삶을 아는 사람이 되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며느리하고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그점에 있어서는 단호해야합니다. 아니 그런 자리들을 양보하는 것을 마치 신앙으로 인내한다. 그것이 아니라. 가정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양보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교회의 책임이 큰것입니다. 교회가 시집 장가 가서 갈등을 일으킬 때 그 어머니 불러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자식은 갔으면 남이라고 그러면 이제 목사님도 이제 우리 애들하고 같은 통속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방 주사가 필요합니다. 미리 아직멀었을 때 계속 가르쳐서 그것을 정리해야됩니다. 그래서 제가 시집 장가 가기전에 결혼할 사람을 놓고 부부교육을 시키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진짜 교회에서 목사주례를 받고 결혼하고 싶으면 부모들이 와서 교육을 받아야됩니다. 그리고 합격해야합니다. 교리문답도 하고, 그래서 합격하면 그 증서를 만들어서 2년간 유효하다고 도장을 찍어서 줘야합니다. 그리고 2년후에 다시 제발급 받아야합니다. 아니 진짜입니다. 그러니까 정리가 안되어있으니까,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을 받고도 진리의 말씀을 접해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 며느리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7. 네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2)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上)
두 번째는 왜 며느리하고 그렇게 갈등을 일으키느냐? 그것은 뭐냐하면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 때문입니다. 결국은 말이죠. 아들과 어머니는 같은 문화권속에서 한 가정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엄마하고 많이 부딪혀도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 살았기 때문에 포기할부분은 포기하고 이해할 부분은 이해하고 그리고 같이 공동체적인 삶을 사는데 상당히 많이 익숙해져 있고, 그리고 어느정도는 서로 타협할줄도 알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이가됩니다. 물론 죽어도 일부분이라도 용납할수 없어서 이를 가는 어머니와 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하고는 완전 생면부지입니다. 자기하고 무슨상관이 있습니까. 어느날 그 아들 녀석이 데려오기도 전에 “엄마 만나나 마나 엄마 마음에 꼭들거야” 벌써 통고죠. 그리고 “엄마 딴 얘기하면 안되.” 벌써 한발 누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이미 아들은 다 빼았겼습니다. 그리고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겠다고 각오를 하고 그리고 데리고 왔는데 사실 울며 겨자먹기지. 요즘같이 “어머니가 안된다. 그러시면 포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웃잖아요. 그럴 리가 있느냐이거죠. 물론 그럴수는 있죠. “어머니가 안된다. 그러시면 어머니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러겠지.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진짜 이미 벌써 마음정하고 오는 경우가아닙니까. 그러니까 싫으나 좋으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 여자를 좋아한다. 아들이 함께 살고싶어 한다는 것 이외에 어머니는 그 여자에 대해서 아는바도 없고, 그리고 깊은 교제나 뭐 이런 것은 있을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냥 마지못한 인사치례로 결혼하기전에 몇번 와서 그림처럼 앉았다가 설거지랍시고, 싱크대 앞에서 그릇 몇 개닦다가 “야야, 옷에 물틴다. 비켜라. 비켜라.” 그러면 마지못해서 물러앉는 그런 정도의 몇번의 만남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하겠습니까. 문화가 완전히 다른데 그렇지않습니까. 그런데도 당한 한 동공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만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정말 찰떡 궁합처럼 잘 맞아가지고 그냥 너무 좋아서 마치 남편보다 시어머니가 더좋고, 아들 잊어버릴 정도로 며느리한테 폭빠지는 사이가 있다고하면 그것은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소설에서나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지 일상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때에 가장 커다랗게 대두되는 것이 뭐냐하면 성품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많이 살면서 자기 성찰을 많이 하고 그래서 인품이 잘 갖추어지고 사람을 용납하고 품는 인격적인 깊이 넓고 크고, 호방한 성품을 갖게되면 그래도 그런 선상에서 자기의 며느리를 그렇게 끌어안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경우에는 이제 더 많이 부딪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부단히 깨뜨려지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은혜속에서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살아서 교회 안에서도 용납할수 없는 지체들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그런 지체들의 결점을 극복하고 섬기면서 살아온 가운데 인격이 거룩해지고 성품이 많이 온유해진 사람들은 보다더 까다로운 며느리들도 잘 감당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모질고 악한 세월을 살아왔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별로 사랑받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겨서 자신의 성품이 깍여지고 변화된 기억은 별로 없을 때는 그냥 날카롭게 칼처럼 날이 선 부서진 돌맹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성질이 팔팔하게 살아있고 그리고 거기에다가 자식에 대한 빚나간 집착까지 있는 그 시어머니가 아직까지도 사회적인 경험이 어리고 부족한 부분도 많고 거기에다 인간이 사는 도리에 대해서 정리되지도 않고 심지어는 연세드신 분들과 어떻게 화합하면서 살아야되는지 그런 인생을 사는 기술조차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그런 젊은 여성이 그런 어머니를 어떻게 이길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듬어지지 못해서 거기에서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와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욕을하면서 이년아 저년아 그래도 그것이 구수합니다. 왜냐하면 받은 사랑이 있으니까.
예수 믿어도 욕하는 습관 안없어지는 사람 많습니다. “야, 이년아, 너 보고 싶어서 혼났다. 이 망할년아 보고싶지도 않냐” 그래도 그것이 구수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야, 이년아”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시어머니하고는 탐색중이기 때문에 한마디만 날카롭게 다가와도 그냥 그 사랑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에 깊게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며느리야, 며느님, 내 딸아, 뭐 몇번을 불러도 그 박힌 그것이 깊이 꽂혀서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품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품이 원만하고 이렇게 사람을 품어앉고 다듬어졌으면 한두번의 그런 것이 있어도 이것이 저 사람에 대한 결정적인 평가일수 없다.라고 하고, 그런 것을 꺽고 스스로 말하자면 누르고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은혜까지 한꺼번에 받은 사람이면 은혜로 그런것들을 극복하면서 자기가 끝까지 사랑해야할 한 가족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품자체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더욱이 그 며느리로 들어온 여성이 정말 심성이 곱고, 그리고 사람들을 너그럽게 잘 이해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속에 있어서 비록 마음으로는 그 어머님을 용납못해도 깊은 기도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면 그 불쌍한 시어머니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에게 부어진바 되어서 마음이 다시 물같이 녹고 그 시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용서할수있게 하는 이러한 은혜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것같으면 그래도 승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쪽다. 전혀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 가서 시어머니 여기에 앉고 며느리는 저기에 가서 앉고, 그러면서 아이고, 예배 드리고 시어머니가 열심히 기도하면 “아이고 집에서는 이렇게 여기 와서만 잘 기도한다고 말이지.” 그러면 시어머니는 또 “집에서는 새는 바가지가 교회 와서는 또 뭐 봉사한다고 뭘 들고 다니고말이지. 아이고 성도들에게 잘하지 말고, 니 시어머니한테나 잘해라.” 이러면서 서로 야지를 놓는 정도가 된다고 할것같으면 물건너 간것입니다. 진짜 그렇게 되면 영원히 평행선입니다. 누구 한사람이 빨리 죽는 것이 성화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에 들어가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뭐냐하면 이것입니다. 자식을 낳을 때에도 소명받고 낳고, 그리고 시집 장가 갈 때에도 주님 부르심 받고 가고, 그리고 아들을 장가 보낼려면 내가 남의 한 집안의 딸을 내 집안에 받아들여서 내 식구처럼 용납하며 살수있을 정도 그릇이 됐는가. 라는 소명을 좀 느끼면서 내가 진짜 시어머니로 불리울 자격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들을 장가 보낼때에 그냥 어디에서 돈 마련해서 진탕해서 주고, 사둔집에서 예물이나 실컷 받아야 되겠다.라는 식의 그런 세속적인 사고방식 같지 말고, 그것은 다 죄짓는 것입니다. 아니 시집 오면 되지, 뭘 그렇게 많이 해가지고 오라그래요. 예수 믿는 집에서도 그런것들 때문에 혼사가 깨뜨려지는 일이 많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세속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세요. 그것은 다 결혼의 제도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살면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난 돈이 있을만큼 있다. 나는 애들 해줄만큼 해준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아라” 오직 좋은 신앙과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안고 와라. 그것이면 충분히 족하다. 이런 아량으로 며느리될 사람을 자기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거친 성품이 변화되지 않은 까닭에 그럴정도의 아량과 인격적인 도량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도 있지않습니까. “얘야, 장가 가는 것 조금만 미룰수 없겠니?” “왜요 엄마 내가 사랑하고 결혼할 준비가 되었는데” “그런데 내가 아직 며느리 맞을 준비가 안되었구나, 나도 소명좀 받자. 나도 좀 더 많이 깨뜨려져서 그래서 까다로운 며느리 들어와도 그 며느리를 깊이 용납하고, 나는 사라져도 너희들을 행복한 가정으로 잘 세워줄수 있는 그러한 성품에 많이 변화받은 그런 어머니가 되도록 내가 특별히 기도하고 너희 가정을 축복해주고 싶다.” 그렇게 하고 그리고 맞아들일수 있는 그런 어머니가 되어야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장가간 아들 사랑에 목매어 산다라고 해서야, 그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까.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러면서 며느리에게 섭섭한 일이 있으면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아, 정말 내 인생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고백할수 있는 것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내 아들은 나를 모른척 하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그러면서 신앙의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어머니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품의 다듬어지지 못한 것이 아주 굉장히 그 관계가 불행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시지 않습니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서로 이해하지 않는 그 치열한 다툼 때문에 결국은 가정이 깨뜨려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결혼을 했는데 아직까지도 이 남편과 아내가 사랑을 할지는 모르지만 아직 신뢰가 두텁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와서 매일 “야, 너 없을 때.” 뭐 나이면 “야, 내가 몰래 보니까,” 이러면서 신뢰를 계속 허물어요. 처음에는 “에이, 어머니가 쓸데없는 얘기, 어머니가 잘못 알았습니다.” 그러지만 그러면서 계속해서 신뢰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죠. 한 가정을 파괴시키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차라리 자식에게 좀 섭섭함을 당하고 그 자식들이 그 자식에게 불효해도 둘이서만 행복하게 잘 살고 하나님 잘 믿으면 시어머니로서 성공한 것입니다. 결론은 주님 밖에는 없다라는 고백을 가져야합니다. 자식 너무 의존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님 더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믿습니까? “어, 목사님 그래도,” 내려 놓으세요. 하나님 떠나서 집착하는 것은 모두 세상입니다.
세 번째로 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커다란 요인중에 또 하나가 뭐냐하면 결국은 사랑없음입니다. 모든면에서 옛말에 그런말이 있지않습니까? "형만한 아우없다.“ 그래서 제가 맏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맏이로서 이렇게 긴 세월을 살면서 보니까 맏이는 생각이 참 많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생각이 나쁘게 말하면 자기 일에 전념할수 있으리만치 담대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맏이의 처지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봐도 말이죠. 어느것이 정확한 통계인지는 모른데 맏이보다는 오히려 둘째가 유능한 사람들이 많데요.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게 부모와의 연관, 그다음에 동기간들의 연관, 모든 것들에 대해서 짐을 느끼고 또 좋은 큰아들일 경우에는 아버지를 여위고나면 자신이 자기의 동기간들에 대해서 아주 커다란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형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내리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사랑이 아래로 내려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면 오히려 며느리 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 며느리를 깊이 이해하고 그럴수 있는 야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젊었을 때에는 속이 좁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주관이나 주체성, 이런 것으로 비춰질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아량이 없고 아랫사람들을 잘 품어, 따뜻하게 안아줄수 있는 그런 관용이 부족한 것은 추한것입니다. 아주 추합니다. 그리고 곱게 늙어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적은데 그렇게 추하게 늙으면 누가 가까이에서 좋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머리가 히긋히긋해지만 그 흰색에 대해서 책임을 질수 있어야합니다. 자신의 인격도 함께 성화되어 가야합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어리가 얼룩얼룩하여도 깨닫지 못하고 철이없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며느리 아들보다 신앙생활 더 잘해야합니다. 영적인 우위를 정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끊임없는 사랑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므로서 부단한 자기깨어짐을 경험하면서 그 자식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많이 용서하고, 더많이 돌보고 하면서 그러면서 그 자식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데 오히려 기쁨을 느낄수 있는 그런 어머니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교회의 역사를 이렇게 보더라도 교회에서는 노인네들이 교회에 모이면 안좋다. 뭐 나는 솔직히 말해서 어디가서도 우리 교회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 가지고 내가 자랑한적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좀 부러워하죠. “청년들이 얼마나 되느냐고” “반쯤 청년이라고” 그러면 “에에” 그렇습니다. 반만 좀 바꾸자 그러고 정말 교회가 미래가 있다고 나는 그 얘기 안믿습니다. 젊은 사람이 많다고 미래가 있다고요. 내가 다시 얘기하지만 주님께 승복된 젊은이들이 많을 때에만 교회의 미래가 있는것이지, 짐승처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다면 무슨 교회가 미래가 있느냐고요. 젊다는 것 그 자체를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왕년에 안젊었던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모두 젊었지,
한 사람의 젊은이가 주님을 깊이 알고 주님께 인격적으로 승복되었다고 할것같으면 주님을 위해서 살 날이 그만큼 많은 것이고, 짐승과 같다면 하나님의 영광 가리면서 살 날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지, 젊은 그 자체가 뭐가 대단합니까. 그것 괜히 이 세상에서 청춘 예찬이나 하는 것 가지고 젊다는 이유 자체 때문에 들뜨고 그렇게 오만해지고 하는 것은 젊음에 대한 성서적인 견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교회에 노인네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보세요. 전통적으로 보면 한국교회에서 이 교회에 오래 남아서 깊이 기도하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머리 히긋히긋한 노인네들이 그렇게 밤이나 낮이나 교회에서 그렇게 기도하고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우리 교회에 그런 모습이 나는 너무 그립습니다. “뭐 우리 목사님은 젊은 사람만 좋아한다.” 누가그래요. 누가, 나 청년들 만나서 “너희들, 젊은이 어떻고” 그런적있는지, 청년들보고 물어보세요. 제 눈에는 젊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고, 늙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주님께 깊이 승복하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그 열망으로 충일한 마음이 되어있으면 소년이라도 소중하고 그렇지 못하면 청년이라도 가치없는 것입니다. 곧 죽어가는 노인네라도 가슴속에 그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주님의 착한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려고만하면 정말 훌륭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니까 경망해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그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청년들이 와글와글 들끓는 그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다 교회를 떠나가도 뭐 특별히 돌아가봐야. 남편도 없고, 그리고 집안에 돌아가봐야, 자기를 꼭 필요로한 사람도 없고 교회에 남아서 주님을 위로로 삼으면서 기도로 밤을 새우고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하지만 미처 미치지못한 기도의 부분들을 끌어안고 그 흰머리 쓰다듬으면서 깊은밤 기도로 밤을 지새우는 그런 연세드신 할머니들이 있는 그런 교회, 얼마나 그리운 교회인지모릅니다. 젊은이들이 아멘을 해야지. 정말입니다. 진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에 노인들이 많이 와서 생애적으로 회심하고 젊어서 주님을 위해서 못살았던 그런 삶을 마치 그 빚을 갚듯이 그 노년을 정말 불꽃처럼 사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면 교회 옮기는데도 말이죠. “우리 목사님은 말이지. 어린애들을 위해서 키즈랜드를 만들고, 청소년들을 위해서 농구 골데를 만들고, 도서관을 만들고, 우리 노인네들은 찬밥이고,” 안그렇습니다. 나도 조금 있으면 그렇게 될터인데 내가 그러겠습니까. 얼마 안 있으면 다 동지들인데 3층에 방하나 만들어 줬지않습니까. 그래서 점심시간 끝나고 가서 거기는 아무도 못들어갑니다. 연세드신 분들은 가서 다리도 쭉뻗고 드러누워서 쉬시고,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기도하시느라고 피곤하실터인데 가서 열심히 쉬시고말이죠. 그대목은 참 부담이 가네.
그런데 이것이 참 신기한 것이 말이죠.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더 옹졸해지고, 사랑이 없고 거칠어집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만져주심속에 살지않으면 학같은 노년은 없습니다. 연세가 들면 더 물욕이 많이 생깁니다. 젊었을 때는 내 한몸 무엇을 먹으면 어떠리, 아무데서나 자면 어떠리. 그러다가 나이가들면 물질에 대한 탐심이 더심해집니다. 물질에대한 탐심이 더심해지고 그리고 집착도 더 심해지고 그리고 사람도 더 옹졸해져서 요만한 것만 있으면 그렇게 가슴이 아리도록 섭섭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 그렇게 호방했는데 나이 들면 말이죠. 조그만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섭섭하고 마음이 아프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더 나이가 들어서 노년에 이를수록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 노년이 되면 외로움도 더 많이탑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노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러니까 노년부를 말하자면 유년주일학교 처럼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진짜 특별한 돌봄과 위로가 필요한 세대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성도인데 역사와 전통에 빚나는 교회생활만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만져주심 속에서 성장해온 성도라고 할것같으면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잘 살아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사랑속에서 자기 자신이 날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만져주심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됩니다. 그런데 노년이 되어서 영적으로 게으른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도 커다란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적으로 내 며느리가 어디가 잘못되었고, 그리고 어느 부분은 고쳐야되고, 그리고 어느부분은 연약한 부분인데 그러니까 내가 더많이 사랑해주고, 그리고 내가 돌봐줘야되겠다. 그런식의 사고방식을 가질수 있을정도면 그 사람은 은혜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성경이 시어머니인 나의 자리가 뭐라고 말하는가 며느리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우리관계는 어떤관계이고 아들과의 삼각관계에서 나는 어디에 서야되는가, 그런 것은 작동도 안합니다. “며느리 어때요? 어느 부분이 부족해요?” “아, 말말아요. 싹아지가 없어요.” 그러면 끝입니다. 완전히 초신앙적입니다. “싹아지가 없어요” 끝입니다. 그 싹아지가 뭐냐? 성경적으로 볼 때 그 싹아지가 뭐냐? 그러면 그런 것은 필요없어요. 하여튼 못써요. 그리고 단칼에 끊어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 결국은 개선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들의 가슴에도 깊이 못박고, 그 아들은 얼마나 그 사이에서 괴롭고 고통스럽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 것을 대놓고 “야, 당장 말해봐라. 엄마가 소중하냐? 네 마누라가 소중하냐?” 그런식의 질문은 정말 동물적인 질문입니다. 그런식의 질문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어머니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설자리를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마지막으로 들어가보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사랑이 없다니. 내가 내 아들을 어떻게 길렀고,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어머니 가운데 나만큼 우리 아들에게 희생한 사람이 있는가 한번 나와보라. 그러라고” 그런데 그것은 미안하지만 사랑이 아니고 집착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빚나간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아니라.
형제의 모습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진정한 사랑은 자기와 아무상관이 없어도 그 사람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읽어내고 그 주님의 형상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수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그 무슨 사랑이든지간에 아가페의 사랑으로 극복되지 않은 사랑은 항상 행복한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아들이 장가들고난 다음에 가슴깊이 맺히고 평생 그 아들 이름을 끌어안고, 한많은 소외감을 느끼다가 죽는 그 부모들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은 그런 후유증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니 인생은 너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 넌 니길로 가고 나는 내 길로간다. 그러는 부모들은 자식이 날아가서 자기 부인에게 훨훨날아가서 가슴에 가슴알이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결국은 뭐냐하면 그렇게 희생적으로 자기 아들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오히려 그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의 즐거움의 근원을 단지 아들과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그까짓것 며느리보다 내가 돈이나 몇푼 더있다. 그래서 가끔 불러내어서 볼수하듯이 돈이나 몇백만원씩 쥐어주면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그런것들, 그래서 며느리를 꼼짝못하게 자기 손에다 넣으려고 하는것들은 너무 세속적인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격적오르 그 며느리가 깊이 머리숙여지게 만들고, 그 안에 시어머니기 이전에 신앙의 한 동지로서 주님을 많이 닮은 그분속에서 단지 아들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신을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인간, 물설고 낮설은 남의 집안에 와서 어느자리에 서야할지를 몰라서 안절부절할 때, “여기가 네 자리다.”라고 말하면서 이제껏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벌떡 일어나 그 의자를 털어주면서 며느리인 자기에게 앉혀주며, 그리고 두사람의 손을 꼭잡아주면서 “너희들이 행복하게 살아라. 이것이 이 지상에서 너희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분복이다.” 그렇게 하면서 그런 야량으로 자기의 며느리를 끌어안아줄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어머니가 가야할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없음 때문에 며느리와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그 안에서 파괴되고 그러는 가운데 가족들이 고통을 받고 그래서 결국은 아들과 며느리와의 관계도 깨뜨려지고 하는 그런 불행한 상황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은 너무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결국은 우리들은 우리안에 없는 사랑은 보여줄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사랑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숨길수 없는 것이 우리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뭐냐하면 결혼하면서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 잘해야되겠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마음을 먹지말아라. 왜냐하면 3일을 안간다. “시집장가 가면 1주일에 한번씩 찾아가서 뵙죠” 몇 달 계속해요. 내가 한번 물어볼께요. 몇 달 계속됩디까? 그런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남편과 자기 사이를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한 가족이다.라고 하는 공동체속에 그 시어머니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시어머니는 그 며느리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시“자 자체가 사라져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시“와 ”친“자가 오가면서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맞이할 때 마치 자신의 딸을 맞이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그 며느리를 자신의 딸로 맞아서 한 가정을 일구어갈수 있으리만치 그렇게 사랑있는 사람이 되어서 남의 식구를 용납할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행복한 가정을 일구어갈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결국은 어디에서 옵니까? 결국은 그 사랑은 우리 자신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주님은 결국은 당신의 낮아지는 그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그런 사랑속에서 마음껏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먹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사랑의 감화화 은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한 며느리를 목회한다.라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이것이 모든 삶에 있어서 “너랑 나랑 대등하다. 네가 하는만큼 내가 한다.“ ”너 부모에게 효도해야지“ ”엄마는 맨날 나 노엽게 했잖아“ ”남편에게 순종해야지“ ”당신 나 사랑안 하잖아“ 그런식으로 해서 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의 삶에 어떤 덕목들 자체를 거래관계라고 생각하는 자체는 잘못된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니까 남편에게 순종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성공해봤자. 남편의 노예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니까. 그러니까 비로소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겠다. 그것은 자식의 노예입니다. 부모가 나를 잘 길러주었으니까 내가 부모에게 효도해야되겠다. 그래서 효도 안하는 자식들은 말이죠. 부모가 나에게 상처밖에 남겨준 것이 뭐가있느냐고 말이지 나는 학교도 내돈으로 벌어서 고학하면서 다녔고, 장가갈때도 10원도 도움받지않고, 엄마 아빠가 나에게 고통을 준것말고 뭐해줬는데 효도는커녕 위자료 내놓으시오. 이럴정도의 삶이 내 삶입니다.”이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없는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사랑하니까, 아내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나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라 나에게 순종하든 순종하지 않든, 나는 그를 연약한 그릇으로 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나를 부모대우 하기 때문에 노엽게 안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인 나에게 명하신 주님의 분부이고 그 주님이 그렇게 살지못하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희생 때문에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나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도 내가 노엽게하지 않고 사랑할수 있고, 또 그 반대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덕목 하나하나가 상대방을 보면서 그 대가로서 주고받는 것이라 그러면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문을 하나 할테니까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은 목사인 내가 진짜 목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시죠. 그런데 그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네들이 양같이 굴때에만 내가 목자처럼 살겠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목자의 생각을 옳은 생각이라고 할수있겠느냐고요. 목회 똑바로 하면 내가 성도노릇 다하지. 그렇게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를보고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 보고 목회하는 것이냐고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그 자리에 있어서 그래서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바르게 목회할려고 날마다 애쓰고, 여러분중에 누가 와서 나 멱살을 잡으면서 “목회 똑바로 해” 그러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깨뜨려지면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주님께 유익한 사람이 될까? 괴로워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뭐냐하면 “너 목회 똑바로 해” 이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너 나한테 순종해” 이렇게 얘기할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당신 나 사랑해야되” 하나님 한분입니다. 그것을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어떤 권세인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가족 구성원들에게 아무리 아름다운 가르침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할지라도 그 구성원들이 하나님 앞에서 승복하는 삶을 살지않으면 그 주옥과 같은 교훈들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교훈을 주셨는데 기껏하는 것이 “너 나한테 순종해” “넌 나 사랑해” “너 나한테 효도해” “엄마나 나 노엽게 하지마” 주옥과 같은 교훈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지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면전에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런 진실한 위로와 사랑을 힘입어서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상처 상처 너무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모르니까 자꾸 상처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나면 그 상처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기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가슴앓이 하는 사람들에게 있고, 하나님의 평화가 평정이 깨뜨려진 번민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진리의 참빛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서 화합과 일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큰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런 상처는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받을수 있는 너무 아름다운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그런삶을 살지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며느리를 인격적으로도 그것을 품어안고 그 며느리를 목회할수 있는 그릇이 안되는 것입니다. 아주 성격이 조잡하고 용렬하고 그리고 자식에 대해서 아주 병적인 집착이나 있고, 그리고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많이 들어도 정리는 하나도 안되고 말이지, “출가외인이다”이런 어떻게 이상한 뒤틀린 세속적인 논리같은 것이나 이 속에 가득차 있고, 여자는 남자에게 죽어 지내야한다. 이러고 말이지, 자기 아들이 가서 싱크데 앞에서 설것이 하나 하는 것 보고 그 며느리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고 말이죠. 그런 정도의 사람이 되어서 그럴바에야, 진정 사랑하는 아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런 노년의 삶이 하나님 앞에 빨리 가는 것이 자식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랑하는 아들의 일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입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며느리하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그리고 그 어머니와 그 아내 때문에 그 아들이 한없는 기쁨과 위로를 받으면서 훨훨 날아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얼마든지 아름답게 일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창창한 젊은 세월이 있는데 그런식으로해서 여러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렇게 뒤틀린 가정사를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노년에 들수록 찬란한 밝은 하나님의 빛앞에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이 엄청난 불행을 막을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시어머니라고 할것같으면 정말 정신차리고 그리고 이런 삶에 있어서 아주 급격히 돌이켜서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합니다. “그러면 왜 목사님은 시어머니만 집중적으로 얘기하세요.” 며느리도 얘기할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하자구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등을 일으키는 네 번째 이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이냐?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네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6:4上)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上)
오늘 주일 낮에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리는 이 설교는 지난 주 수요일에 했던 설교의 연속되는 부분입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 제목은 ‘네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 1’ 그리고 오늘은 제 2입니다. 그래서 오늘로서 며느리와 시어머님에 대한 설교를 끝내고 그리고 오늘 오후에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에 대한 설교를 오늘 하려고 합니다. 지난 수요일 ‘네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설교의 뚜껑을 열면서 저는 며느리가 분명히 시어머니의 자녀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 시어머님과 며느리의 관계가 아들이 한 가정을 행복하게 이루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치명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는 이유를 시어머니의 측면에서 네 가지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 중에서 세 가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 끝난 다음에 문서 선교부에 들려서 수요일 설교를 꼭 사 갖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며느리가 사 가지고 가지 말고 시어머니들이 사 가지고 가십시오.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다고 하면서 세 가지를 지난 수요일 날 말씀을 드리다가 10시 30분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키는 첫 번째 이유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성경이 시어머니의 자리에 대해서 말하는지, 가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에 대해서 지식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결혼을 해도 그 아들을 끝까지 주장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아들은 결혼을 함으로서 자신의 품을 떠나가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으로서 아들은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루고 나가는 것이 성경의 가정 원리라고 하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이제껏 자식을 낳고 길러온 모든 한 많은 세월을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바꾸어서 며느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사랑하되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하지 말라. 그래서 하나의 규칙을 만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남편은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말고, 아들은 사랑하되 남편보다 사랑하지 말라. 그대들의 남편 앞에 아들이 있게 하지 말지니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는 애정의 결핍이 자식을 향한 비뚤어진 기대로 돌변할 때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들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그런 결과를 낳기 때문에 먼저 명백하게 정리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도리에 대해서,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런 면에서 지금이라도 그런 면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 때문이라고 했는가 하면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 오랜 세월 인생을 살면서 신앙생활 하면서 날마다 경건한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많이 깨트려져서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진 사람이면 보다 많은 사람을 용납하며 살수 있는데 시어머니가 그렇게 잘 다듬어지지 못한 모난 성격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씀드린 것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 없음으로 인해서 차가운 의견의 대립만 있고 그래서 며느리와의 갈등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10시 30분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그러다가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그리고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 다음이 이번 설교입니다.
그럼 마지막 네 번째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키면서 오래도록 그 갈등을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원인은 무엇인가? 네 번째 가장 큰 문제는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뭔 믿음인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서 시어머니가 교회에 가면 집사요, 권사요, 그렇게 교회에 충성스럽게 살고 며느리도 여전도회 회장이오, 여전도회 일을 한다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섬기면서 사는데 그런데도 그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고 가정이 불행하기는 믿지 않는 가정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고부간의 갈등은 하나님도 어떻게 못하신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이라는 것은 단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오래된 교회의 출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출석하고도 지옥 갈 수 있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출석 오래한 사람들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또 믿음은 자기 중심적인 기대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이렇게 내 자리를 버티고 있으면 내 기가 꺽이지 않고 시어머니로서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는 내 며느리가 깊이 탕자가 돌아온 것처럼 뉘우치고 돌아와서 시어머니인 나의 치마 자락을 붙들며 어머니, 제가 시집와서 지은 것이라고는 죄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나같이 탕자와 같은 이 며느리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나는 어머니의 며느리라 일컬음을 받을 수가 없사옵나이다. 그러면 그때 내가 눈을 아래로 내려보면서 괜찮다. 이렇게 해줄 날이 꼭 오리라. 그렇게 믿는 믿음,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기 중심적인 기대화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믿음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 믿음이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이 환경이 어떻기 때문에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바라보고 있어도 그것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바라보고 사는 것, 이런 것이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라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교회에 잘 출석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하나님이 싫어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지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근심과 한숨이 그치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지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말하기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베푸시는 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그것이 곧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자신의 모든 삶을 지켜보고 계시다라고 하는 사실과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끔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추구하면서 살면 그것이 곧 믿음이라고 보시는 것이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며느리와의 갈등이 그치지를 않는다 라고 할 때 그러면 시어머니가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져야지 만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살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내려다보고 계시다라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쁜 한복을 입고 안내설 때만 여러분들을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서 여러분들이 예배 시간에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척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다가 만 가두어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 인식 속에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비근한 예로 성경 속에 나타난 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시선을 인식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과 함께 범죄 하도록 유혹하는 그 상황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범죄 할 수 없으니 라고 말했으니 보디발의 아내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우리 둘뿐이라고 말했지만 요셉은 또 하나의 시선을 의식했으니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사로 권사로 교회에 와서 잘 봉사하면서 사람들에게 만연의 미소를 띄우며 교회에서 봉사할 때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람들을 만나서 여러분들의 며느리를 흉볼 때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믿음으로 먼저 살아야 합니다. 아니 왜 며칠 째 계속해서 시어머니만 들볶나! 그렇게 하는데 오후 시간에 며느리 볶을 테니까 투덜대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고부간의 갈등에 있어서 며느리보다는 시어머니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리사랑이 아닙니까? 그리고 한 집안에 있어서 영향력이 시어머니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된통 당했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에게 가서 아니 어떻게 그런 여자한테 장가를 드셨어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 아주버님에게 가서 시 아주버님 그런 신통치 않은 어머니한테서 그 긴 세월동안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대부분 며느리들은 당하면 대게 움켜쥐고 있습니다. 또 동서들에게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믿을 수 없는 것이 동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돌변해서 시어머니에게 가서 형님이 이렇게 하던데요. 그러면 사실 뒤집어지니까 대부분 그것을 끌어안습니다.
시어머니는 안 그렇습니다. 뭐 섭섭하다 하면 남편에게 제일 먼저 여보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저 며느리 잘라야지 되겠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가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야, 네가 불쌍하다. 어떻게 저런 여자애가 걸렸나. 왜 말을 못하겠어요. 다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첫째 며느리, 둘째 며느리, 셋째 며느리 데려다가 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에게 가서 야. 셋째 거 손 좀 봐야지 되겠더라. 둘째에게 가서 야, 너는 첫째처럼 되지 말아라. 그리고 또 첫째에게 가서는 야, 너는 둘째처럼 되지 말아라. 그냥 자기 기분 내키는 바에 따라서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향력이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할 때는 시어머니도 좀 봐야 합니다. 그래도 기도 응답 받고 그 남편에게 시집가려면 그 시어머니를 볼 때 좀 까다롭고 문제가 있는 시어머니면 진짜 고난받는 선교 지에 가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시집을 가야지 됩니다. 그리고 잘 감당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오후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인가 하면 시어머니가 그런 면에서 고부간의 갈등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고 그랬으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함께 살아가면서 자기가 고부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많이 깨트려지면서 자기가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노력을 하면 며느리는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기를 알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날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여보, 남편 말에 순종해야지 그러니까 부인이 당신 나 사랑해?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나 좀 사랑해 줘. 그러니까 남편이 순종만 해봐, 사랑 안 해주나.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영원히 아내에게 말로 하나님이 나에게 순종하라고 그랬으니까 순종해.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끔 그렇게 자기가 삶을 그렇게 살아야지,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뉘우치고 남편은 아내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그것이 자기의 패역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그렇게 해야지 그 가정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서로 서로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 매일 그렇게 하고 살면 하나님 앞에 가서 너 아내를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네 인생 살아온 길을 보니까 너 아내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구나. 아내보다는 길거리 여자들을 더 사랑했구나. 너 왜 그렇게 살았니? 그때 뭐라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아담하고 똑같이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가 순종치 아니함으로 나도 사랑치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 잘했다. 모두 내 탓이구나. 그러시겠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아내를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당신 언제 나를 사랑했어? 그런 식의 사랑이 성공하면 동정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들도 잘 가르칠 필요는 있지만 효도를 구걸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야, 이 애비가 불상하지도 않니? 실직해서 용돈도 없고 그러면서 신파조로 무성 영화시대의 변사처럼 그렇게 읊어서 자식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효도를 하면 동정적인 효도입니다. 그런 효도를 받아서 뭐 하겠습니까? 차라리 복지연금 받고 사는 게 훨씬 낫지.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 참고 그리고 내리사랑인 며느리를 사랑하고 이 며느리를 위해서 잘 헌신하고 그래서 이 며느리를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가족과 융화되어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면 며느리는 그것을 몰라주고 남편도 몰라주고 내 아들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산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주실 것이다. 그 믿음이 바로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그 신앙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며느리는 시집을 가면서 보통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긴장합니다. 내가 시어머님 마음에 들까? 시아버님은 그냥 좋다고 그저 허허 웃으시는데 시아버지는 그렇게 문제가 안될 것 같은데 애교 좀 떨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저 시어머니 마음에 들까? 잘해야지 될텐데. 어떻게 할까? 이런 생각 많이 합니다. 또 그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시어머니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며느리 시집 올 때 가슴이 설레면서 저 며느리가 이렇게 다듬어지지 못한 이 시어머니로 인해서 힘들어하지 않을까? 내 며느리가 원한다면 좀 바뀌어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우리 며느리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수 십 년 동안 며느리와는 상관없이 살아온 내가 나도 모르게 굳어진 삶을 통해서 며느리를 힘들게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며느리가 불행해지면 자기 아들도 불행해지는데 시집만 와봐라. 너는 국물도 없다. 반 죽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아들 빼앗았지. 너도 고통을 맛봐라. 그러면서 부엌에서 칼 갈고 있는 시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모두 며느리에게 잘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권위주의적입니다. 똑바로 해. 그러면 사랑해 주겠으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관계에 대한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은 없고 자기가 그려놓은 며느리의 상이 있습니다. 그리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이 사랑해주고 그리고 네가 더 좋아하는 돈 좀 주마. 유산도 물려줄 용의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만약에 그렇게 변화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며느리와 깊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원인이 며느리가 자기가 정해놓은 그 구역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되 먹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설정해놓은 구역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에 며느리가 못 맞추어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분노했는데 그러면 자기는 그 며느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분노해본 적이 있는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가슴아파 해본 적이 있는지,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그 며느리에 대해서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그 자리를 자신이 대신하려고 하는 그런 권위주의적인 마음이 그 시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그런 며느리, 이조 시대 18세기의 며느리같이 그렇게 단아하고 청초하고 지조 깊고 지혜가 뛰어나면서도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무시하지 않고 남편보다 훨씬 훌륭하면서도 남편을 세워주고 그러면서 유능해서 요즘 같은 시대에는 뒤에서 돈도 잘 벌고 그런 훌륭한 며느리가 왜 여러분 같은 시어머니에게 시집을 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하도 못 살게 구니까 안방 머리맡에 써 붙여 났다고 합니다. 시어머님 그대도 한때는 며느리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시어머니를 그렇게 완전히 만족시켜드릴 수 없었잖아요. 세상에 사람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눈에 콩꺼풀이 씌어서 느끼는 것이지 실제로 살아보면 결점 투성이고 모자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사람이 함께 다듬어져가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며느리에게 깨트려짐을 강요하고 자신은 변화되지 않는 그런 어머니,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지 않는 그 시어머니가 바로 고부간의 갈등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시어머니인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낳은 아들이 한 가정을 세워갈 때 여러분들이 그 가정을 세우는 좋은 도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아들을 잃어버린 박탈 감에서 며느리를 향해서 적대감을 품은 그런 사람이 되거나 자기가 원하는 며느리로 만들고 말겠다 라고 하는 그 무지막지한 그런 용사 적인 각오 같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내가 빚는 것도 아니고 네가 빚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자녀들 교육을 하면서도 이런 것을 진짜 확실히 믿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이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를 잘 교육해서 이런 저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적절히 교육을 시키고 입히고 먹이고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그들을 가르치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재료일 뿐이고 그들을 진짜 사람으로 빚으시는 분은 그들 안에 그들과 함께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생각을 여러분들이 깊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며느리도 그런 면에서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 주의자가 한국에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서 일본이나 미국, 구라파에서는 여자가 시집가면 다 성이 바뀝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에서는 ‘뭐가 아니면 내가 성을 간다’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을 수시로 가니까, 시집가면 다 가니까 그 남편의 집안에 복 속되는 것이고 한국 봐라. 한국 같은 곳은 동양에서도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자기의 성을 고유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사실 한국의 전통 속에는 여자를 아주 독립적인 그런 인격체로 보는 그런 고고한 사상이 한국의 역사 속에 흐르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아주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못 읽어도 한참 못 읽는 것입니다.
사연은 그것이 아닙니다. 뭔지 아십니까? 영원히 그 여자를 자기집 사람으로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존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잘렸습니다. 그리고 시집을 왔는데 시집에서는 영원히 성을 안 바꿔주는 것입니다. 너는 홍씨고 나는 김씨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바꾸어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투쟁할 일은 아니지만 여성들이 스스로 그것을 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을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구라파에서 성을 바꾸는 이유는 너는 이제 그 집안과는 끝났고 너는 내 밑에 들어와라 그것이 아니고 가족으로 받아준다고 하는 ‘웰컴’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그렇게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바꿔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친정에 가서 호적 파서 이름 바꾼다고 하지 말고 어째든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친정에서는 출가 외인이라고 잘리고 시집왔는데 아직까지도 성도 안 바꿔주고 그리고 그 가족으로서 완전히 한동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 아닙니까?
시어머니 시집 식구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한참동안 시집을 가면 경계의 눈으로 그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잘하면 우리도 잘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래 관계의 눈빛으로 봅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한가정의 한 여인이 그 집안에 있는 자녀와 결혼을 해서 한 가족이 될 때 그 가족들이 정말 따뜻하게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을 이제는 했다. 그리고 너는 이제 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우리와 한가족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며느리를 바라보고 그런 눈빛이 정말 오늘날 시어머니들에게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되어서 아들 찾아가서 야, 갈라서라. 갈라서려면 자기는 갈라서지.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 아들 힘든 꼴 못 보겠다고 갈라서라고 그러니 처음부터 그 며느리는 자기의 가족이었던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며느리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집에서는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잘려서왔는데 가장 접촉을 많이 하는 시어머니라는 사람이 자기를 가족이라고 생각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 생각에 영향력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퍼트리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런 일이 왜 없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어머니가 접촉하면서 그 영향력을 가지고 며느리를 고립되게 만드는 그런 경우가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믿는 사람일수록 고집이 강하고 집착이 세서 한번 눈밖에 나면 그 사람 다시 안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미워하는 것을 신앙처럼 생각하는 사람, 그렇게 하면서 초지일관 며느리와의 갈등을 그치지 않으면서 살아갔는데 그러다 그 갈등이 증폭되면 아들에게 가서 갈라서라 꼴 보기 싫다. 아니 자기가 꼴 보기 싫은데 왜 아들이 이혼을 해야지 되는지, 믿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한 교회를 파괴하는 죄와 똑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마지막 대에 자기 자신들이 도저히 살수 없어서 갈라지면 그것도 못하게 가로막아야지 되는데 가정을 파괴하는 선도 권을 부모가 쥐고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그런 권한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저렇게 의사 결정을 해서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는 그 아들도 아직 장가가면 안 되는 사람인데 괜히 실수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자녀를 교육시킬 때 절대적으로 어머니가 자기의 사람을 만드는 의식 속에서 자녀를 교육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자녀를 한 사회를 살아가는 주님의 사람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첫째는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숙한 인간으로 그 아이를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장가가서 아이를 몇씩이나 거느렸는데도 그런데도 가정 사를 어떻게 할지 몰라서 어머니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그렇게 어머니의 하명을 기다려야 할 것 같으면 이미 그 자식은 교육이 잘못된 것입니다. 불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를 그런 식으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양적인 마음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서 가져야 합니다. 목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랑을 가지고 한없이 기다려주는 것 그게 목양입니다. 그리고 목양을 하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다 못합니다. 해볼까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해볼까요? 한 사람도 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안됩니다.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견디면서 그러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 사람이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될 것이고 지금은 주님을 떠나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저 사람보다 더 주님의 나라에 요긴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장 패역한 죄인을 향해서도 가지면서 그러면서 그를 돌보는 것이 목양입니다. 어머니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는 수 십 년의 세월을 그 집안에서 몸담고 살았고 이제는 그 집안에서 뼈를 묻을 것이기 때문에 그 집안에 내력도 잘 알고 그 집안에 전통도 가풍도 모두 익혔고 이제 어떻게 살다가 보니까 자기도 그 집안에서 그럴싸한 위치를 가져서 며느리도 거느리고 자식들도 자기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위치를 가졌지만 며느리는 무엇입니까? 친정에서 출가외인이라고 끊어냄을 당하고 그리고 이제 이 집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서 살고 싶다고 한 남자를 사랑해서 시집을 왔는데 우군은 없고 모두 적군뿐이라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누구에게 가서 마음 한번 편히 붙일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 며느리입니다.
며느리들이 시집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가장 무엇 때문입니까? 설거지하고 밥하고 그런 것 싫어서가 아니라 친정에 가서 있으면 편안한 이유가 친정에는 가서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를 해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가족 구성원들이 자기를 모두 따뜻하게 받아들여주는 용납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집에 가면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시어머니에게 눈밖에 나지, 동서가 나보다 더 부지런히 설거지를 하는데 이러다 나 찍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들이 다 쌓여서 그래서 마음 편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가정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갈 도리를 가르치고 가정을 지키는 규칙을 가르치면서도 자기가 이제는 피할 수 없이 이 집안에 한가족이 되었구나. 그리고 이 사람들이 모두 나를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나를 붙든 이 손을 이제 시집 식구들이 놓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하는 것을 며느리가 느낄 수 있게끔 해주어야 하는데 그 일에 있어서 가장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시어머니입니다.
그렇게 해서 며느리를 깊이 용납해주는 그런 마음, 그런데 그게 쉬운가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합니다. 똑바로 찾아가서 똑바로 해, 한마디하고 나면 얼마나 시원할까. 넌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래, 너는 네 집안에서 그렇게 가르쳤니? 이렇게 한마디만 하고 나면 체중이 확 내려갈 것 같은데 그것을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지 말아야 될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야, 너는 그래 네 집안에서 그렇게 배웠냐?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며느리뿐만 아니라 그 며느리 배후에 있는 사돈집과 적대관계에 서겠다는 선전포고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 의식 속에 뭐가 깔려있는가 하면 시집을 와서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흘렀는데도 아들이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여전히 그 며느리를 자기의 가족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집안 이야기를 하면 안됩니다.
모자라는 사람인줄 알고 자기 아들이 사랑했어. 그리고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제는 며느리라는 그런 생각을 버리고 딸이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냥 한 여자아이를 자기 집안에 딸로 입양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좀 전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게 이제 고와도 못나도 내 새끼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내가 가르치고 잘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칭찬해주리라, 그렇게 해서 네가 잘살든지 못살든지 결국은 우리 집안에 명예, 나의 신앙의 행복과 관계되어 있는 끊을 수 없는 사이다 생각하고 그를 거두어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어머니들이 매일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이 대하는 태도들이 틀리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틀립니다. 자기가 딸하고 며느리하고 대하는 태도가 틀리니까 그것을 며느리들이 읽어내면서 그렇게 정확하게 칼로 긋듯이 시어머니와 그 관계를 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이 가서 사람들과 부를 때는 시어머님 진지드셨어요?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밖에 나가서 삼자하고 이야기를 할 때는 시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는 며느리는 많지 않습니다. 모두 우리 시어머님이 그 ‘시’ 자를 꼭 붙여줍니다. 그 ‘시’ 자가 그렇게 싫은 ‘시’자인데도 그 ‘시’ 자를 꼭 붙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그 시어머니는 어머니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선을 긋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여자가 시집을 와도 성을 갈아주지 않은 것, 이 모든 것, 아까 말씀드린 네 집안에서 그렇게 밖에 못 배웠냐. 그런 시어머니의 생각과 모두 맞물려서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집와서 10년 20년이 지나서 심지어는30년이 지나서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가서 시집 장가를 갔는데도 여전히 시어머니 계신 곳에 가는 것은 영원히 불편한 것입니다. 긴장이 되고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사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가정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나라와 같이 시부모님을 모시고 며느리가 같이 살아야 하거나 아니면 바로 앞 뒤 집에 살면서 매일 얼굴을 마주보아야 하는 이렇게 끊을 수 없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의 도움을 받으면서 가정이 형성되어 가는 이런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런 삶은 너무나 불행하고 낭비적인 삶입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시어머니가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면서 그렇게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서 변화되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시어머니 자신이 며느리 앞에서 변화되기를 더 많이 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들이 실제로 그런 노력을 별로 안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구박하지 않고 잘 데리고 있는 것만 해도 우리 며느리는 은혜를 많이 입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향해서 일정한 선을 긋고 그 선 이상을 넘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피와 살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만나서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의 삶도 그럴 수가 없는데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가족이 되어서 살아가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가 그런 식으로 금을 긋고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어머니에게 끊임없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삶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많이 변화되고 그래서 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아름답게 유지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변화되기 위해서 애쓰고 그런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자신의 수고와 그 눈물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는 상 주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시어머니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시어머니는 일반적인 가정에서 며느리보다 우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가문이라도 넉넉해서 돈도 있고 유산도 있고 그리고 세도나 좀 있으면 그리고 또 며느리가 아주 후진 집안에서 진짜 은혜로 데리고 들어온 며느리 같은 경우에는 정말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식모처럼 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 가족의 공동체가 유지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시어머니가 목 자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 신앙생활도 자기가 하고 있고 또 며느리는 이제 처음 시작을 하지만 자기는 며느리로서 인생을 많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선배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며느리를 맞을 때 자기가 며느리였던 적을 생각하면서 그 며느리를 이렇게 잘 돌보고 이럴 수 있는 목자 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목자 적인 마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사랑과 인내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고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한없이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때 돌보신 구역에서 어느 집안의 이야기- 권세 있는 한 여자 집사님이 당신의 며느리가 직장에 갈 때 인사를 하지 않고 가기에 화가 나서 생각한게 손자를 안고 며느리가 나갈 때 손자에게 인사를 시키니까 며칠 후 며느리가 깨닫고 시어머님에게 인사를 하더라는 이야기)
목적은 성취가 되었는데 누구도 상처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들에게 가서 야, 나 진짜 괴롭다. 너 어떻게 그런 애에게 장가를 갔니 인사 좀 하라고 해라. 가서 남편이 아내에게 가서 인사 좀 해. 이 사람아. 창피해 죽겠어. 어머니가 그것 때문에 마음 아프시데. 그렇게 하면 인사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방법이 목양적인 방법입니다. 그 자존심 강한 그 아줌마가 그 며느리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엄마 다녀오세요. 며느리가 어떻게 자기 엄마입니까? 엄마 다녀오세요. 그게 지혜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며느리 때문에 마음 고생 많이 하면 여러분들이 목사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목사님에게 한 그대로 우리 며느리에게 받는구나. 며느리가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게 살았는데도 목사님은 목자의 마음을 가지라고 했으니 내가 나 잘난 줄 알고 신앙생활 할 때 목사님의 마음이 이랬겠구나 그런 생각을 가져보십시오. 그리고 참아야 합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양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너는 잘못했어. 너는 그렇게 살면 인간도 아니야. 단칼에 날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을 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거기 가서는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며느리는 이게 잘못됐고 이게 잘못했고 이게 부족합니다. 하나님 그래서 내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나 어디 하나님 어디 사람이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저 아이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어떻게 하든지 깨닫게 하셔서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으로 고쳐주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처음에는 며느리 이르려고 하나님 앞에 갔는데 한참 며느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다가 보면 자기가 잘못된 시어머니라고 하는 부분들을 많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또 용서를 빌고 깨트려지고 그러면서 며느리와의 변화되는 관계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고 교회도 잘 섬기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하며 은혜 생활하면 왜 그런지 며느리도 그렇게 부드럽고 그렇게 입에 녹는 사탕처럼 착착 달라붙게 그렇게 잘합니다.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교외에서 시험 들고 그리고 마음에 악한 감정을 품고 그러면 며느리도 이상하게 관계가 힘들어지면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깎아서 사람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철없이 교회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까불고 다니던 형제들이 어느 날 청첩장 들고 옵니다. 목사님 우리 결혼합니다. 그래, 참 잘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까지도 애 같은데 언제 되면 아기를 하나 안고 옵니다. 애들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라고 옵니다. 그러니 이제 신앙생활 하다가 연애라고 하고 푹 빠졌으니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신앙의 기초가 아직 미약한 형제 자매들은 그 사랑에 빠져서 이제 신앙 좀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이제 건조하게 살다가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변화된 환경 속에서 시달리고 말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던 사람들이 한 4-5개월쯤 지나면 그렇게 얼굴이 우울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도 이제 게을러지고 그렇습니다.
그러다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이를 가지고 자기를 깎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 가지고 하면 대판 싸우겠는데 자기가 신앙생활을 안 하면 왠지 아기가 아픕니다. 밤새도록 안자고 보채고 울고 그래서 아내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병원에 가면 이 병원 가라, 저 병원 가라 그러면서 아이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는 사이에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집니다. 그래서 깎여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병원에 가는 것이지만 그러다 아이를 기르면서 성품이라도 비뚤어지고 그릇된 길로 나가면 부모의 마음에 정말 한없이 고통이 되고 못이 박힙니다. 그것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많이 성화 됩니다. 그래서 아이를 안고 와서 목사님, 우리 아기를 위해서 기도 좀 해주세요. 왜 그러느냐고 하면 밤에 전혀 자지를 않고 낮 밤이 뒤바뀌고 그리고 아파서 병원에 가고 그런다고 해서 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왜요? 이제 너희들 사람 만드는 길은 아기밖에 없다. 이 아이가 너희의 스승이다. 이제, 아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너희들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자식을 한참 기르고 나면 이제 담대해집니다. 담대해서 이제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그렇게 담대해질 때 그때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집에 가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통해서 잘 연단을 받고 그 관계를 통해서 많이 훈련을 받으면서 주님을 찾고 그래서 주님이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것이라는 기대도 별로 안하고 더군다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맞이하면서 이 아이에게 어떻게 효도를 받을까만 생각하지 아 아이가 들어와서 한 가족이 되어가면서 너나 나나 하나님 앞에 부족한 부분이 많이 깎이면서 우리 두 사람의 아픈 관계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야, 우리 서로 잘 깎이자. 그리고 악수하는 시어머니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믿음이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관계를 가지고 많이 우리들을 깎고 다듬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상실감, 잘못된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런 상실감 그런데서 오는 소외감 그런 것들을 다 짊어진 속에서 며느리가 자기를 효도하고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채워주기는커녕 그 며느리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가 깊이 깨트려지고 다듬어지면서 결국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각자 시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 주님 앞에 독립적으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갖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그 은혜의 비밀이 없이는 결코 그렇게 아픈 것들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애지중지 하는 자식을 빼어 간 것도 모자라서 내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은혜의 힘,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사랑의 능력,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소망의 인내 이런 것들을 힘입으면서 부족한 며느리를 용납하고 그리고 자신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끈끈한 가족 공동체로서의 정신이 없으면 결국은 그 가정이 일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화목하게 하러오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물론이거니와 시어머니들이 은혜생활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내가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시어머니 위해 기도하지 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말을 할 자격이 없고 며느리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단점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위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서운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의 비밀이 있으면 며느리로부터 서운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해주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저를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고 자기의 장막에 비밀이 감추시리이다” 하는 시편 31편의 고백을 가지려면 자기가 은혜의 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식보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서 이제 연세 드신 나이에 바쁜 일도 좀 접어두고 그리고 뒤에 앉아서 자녀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면서 그 며느리를 위해 아름다운 후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그 며느리를 위해서 며느리를 부린다라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섬긴다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왜 내가 이 세상에 시어머니라면 그런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시어머니인 내가 왜 부족한 며느리의 섬김을 받아야지 그를 섬긴다고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고 자기가 어느덧 한 집안의 시어머니가 되어서 남편과 그리고 자기의 자식들, 그리고 자기의 아들 그리고 아래로는 자신의 며느리들에게 신앙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사명의 자리에 하나님이 세워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며느리 때문에는 그것을 할 수 없고 아들 때문에는 할 수 없지만 자기를 위해서 그토록 사랑하셔서 그런 사명의 자리에 자기를 세워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런 사명을 감당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의 형체를 가져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종 된 삶을 사심으로서 원수 된 하나님과 화해케 하시고 원수 된 사람들과 막힌 담을 허무셔서 그들로 한 이웃이 되어서 살아가게 하신 평화의 제물이 되신 것처럼 또한 자기 자신이 며느리로부터는 받은 것이 없고 아들로부터는 입은 혜택이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래서 아직까지도 시집와서 아는 것이 없고 일천한 자기의 며느리를 가족처럼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께 받은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자기의 그 며느리에게 펼쳐주고 베풀어주어서 그래서 오히려 그 며느리가 친정에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시집에서 받고 그래서 자기를 낳아준 그 어머니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이상적인 어머니의 상을 시어머님인 자기에게서는 발견해서 그래서 나오미와 룻이 그 마음이 하나되었던 것처럼 자기가 그렇게 희생해서 그 며느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께 부탁함으로서 그런 일치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는 시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아름다움 감화와 향기를 그 며느리에게 끼치고 온 가정이 자신의 그 헌신적인 희생과 며느리에 대한 깊은 아가페의 사랑을 통해서 가족들을 치유하고 싸매고 고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어머니들은 영원히 자기 자신이 이제 이 며느리에 의해서 시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로 불려지고 싶은 그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 며느리의 마음속에 자기를 깊이 사랑했던 그래서 자기와 함께 생명적으로 연합되었던 그런 어머니와 딸로서 그런 사랑 받는 관계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사는 시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아들로부터는 받은 것이 없고 며느리로부터는 섬김 받은 것이 없어도 예수님께 진 부채는 많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뇨
사람마다 손을 벌려 사랑 받기 원하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나지 않으며 저들 실망하도다
정말 그 며느리를 아들을 빼어 간 여자로 보지 말고 주님의 형상을 가진 한 주님의 자녀, 낯설고 물 설은 집안에 와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자기의 아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정말 아름다운 삶의 동반자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 속에서 그 며느리의 신음을 읽을 수 있는 자비로운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과 며느리의 갈등을 오히려 조정하고 그리고 온 가족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며느리와 연합시켜줄 수 있는 그런 평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을 우리들이 알았고 주님이 그 놀라운 희생을 통해서 우리들이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을 이 세상에 많이 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수고하고 핍박을 받으며 모욕을 받으면서도 주님이 살아 계시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견디고 승리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이시라고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거늘 더욱이 하나님이 내 집안에 시집을 보내서 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며느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영원히 남의 집안에 자식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딸로 생각하고 그리고 그 며느리의 마음속에 시어머니가 어머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기까지 내가 내 힘, 내 사랑, 내 능력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가지고 목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자식을 이제껏 양육하면서 오래 참고 눈물로 기도하고 그 아이를 위해서 한없이 기다려주었던 것처럼 나도 내가 예수 사랑 받은 그 사랑대로 내 며느리를 향해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와 함께 기도하고 그리고 시어머니인 나의 모난 성격과 다듬어지지 못한 그런 부분 때문에 우리 며느리의 마음을 노엽게 하는 시어머니가 되지 말아야지 하는 끊임없는 자기 고백, 그리고 끊임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성찰의 삶이 필요합니다.
며느리라고 해서 나에게 부당한 요구를 받거나 부당하게 억눌리는 일이 없이 이 집이 시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아니하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들 시 아주버님 다 이 집이 정말 자기의 집에 온 것처럼 훨훨 자유로운 느낌으로 한 가족 중에 일원인 것처럼 당당하게 자기의 삶을 펼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이 평화의 조정자가 되어서 가족들간에 그런 평화를 심고 그 며느리를 끝까지 보호하고 사랑하는 위치에 서게 하려고 예수 사랑 주님이 먼저 알게 하셨고 하나님 사랑 자기가 더 먼저 받았으니까 내가 그렇게 살아야지 되겠다 라는 마음을 시어머니들이 먼저 가져야 합니다.
더더군다나 며느리가 아직까지 신앙이 매우 어리거나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인 며느리일 경우에는 정말 시어머니들이 더 많이 본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지체들 중에서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신앙에 실족해서 믿음에서 미끄러진 지체들이 여럿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삶을 모두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며느리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 시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시아버지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많이 참고 인내하면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사랑을 가지고 끊임없이 용서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 며느리를 사랑하고 대해주면서, 물론 힘듭니다. 혼자 우는 날도 많을 것이고 변화되지 못한 며느리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사랑 먼저 안 사람이 빚쟁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의 은혜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때문에 참고 아들 때문에 참는 것이 아니라 내게 희생적인 사랑으로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하고 예수 사랑처럼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며느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를 돌보고 그를 위해서 희생하는 시어머니가 될 때 그 며느리가 복음 화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마음에, 특히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만들어주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깊은 감화를 끼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걸어가신 그 많은 사랑의 길, 가치 없는 죄인들을 끝없이 용납하신 그 아름다운 희생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늘 감화를 받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각오를 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감화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자기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다 바친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에게 당신을 통해서 아버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당신이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를 보여주면 우리도 우리를 버려 예수님 당신을 보여줄 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주신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분이 마지막 자기의 육신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 아름다운 표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며느리를 깊이 끌어안고 이제껏 잘못한 것이 있으면 시집 와서 그 며느리의 마음에 많이 박힌 그런 아픈 못들을 빼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그를 품에 안을 수 있는 그런 시어머니로서 살아갈 때 가정에 참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8. 시어머니는 없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라” (룻1:16下)
오늘 설교 제목은 ‘시어머니는 없다’ 저는 참 제목을 짓는데 은사를 타고났습니다. 시어머니는 없다. 또 출타 중이신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되고 시어머니는 없다. 저는 두 시간에 걸쳐서 내 며느리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시어머니들이 깊이 회개하고 며느리 아프게 한 것들을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사람으로서 집안의 어른으로서 속 좁게 살아가고 그래서 며느리를 힘들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 깊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리고 자기 아들에 대한 부당한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고 그리고 며느리와 깊이 화해하고 신앙의 동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거기에는 일방적으로 시어머니에게 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설교만 듣고 거기에만 전념하십시오. 거봐라. 며느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그 며느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며느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문제가 있다는 설교는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고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각자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내가 이렇게 하리라고 하는 거래 적인 정신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며느리인 나를 향해 갖고 계신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시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날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살리라 그런 신앙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엘리멜렉과 그리고 나오미 그리고 오르바와 룻 말론과 기룐, 그렇게 여섯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사사 시대에 흉년이 크게 들어서 유서 깊은 유대 땅 베들레헴 근처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이제 식구들을 데리고 이제 거기를 떠나서 모압으로 갔고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이 오르바와 룻이라는 모압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토리 자체가 벌써 어둡고 칙칙하게 시작이 됩니다. 우선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떠났다는 것도 좀 그렇고 또 떠났어도 잠시 떠났고 속히 돌아가서 신앙의 집안에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지, 그 당시로서 이방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포기했다는 말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하여튼 어둡고 칙칙한 과거가 시작되었고 그러다가 엘리멜렉도 죽고 또 조금 있다가 큰아들 작은아들도 모두 죽고 그리고 이제는 다시 약속의 땅인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이 나오미에게 생기는데 무슨 하나님 앞에 깊이 뭔가 묵상하고 회개하고 그러다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제 흉년이 다 지나가고 농사가 된다더라 그 소리를 들으니까 그럼 나는 이제 가야지 되겠다 그리고 한 남편과 두 아들을 그 땅에 묻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몇 번 나오지만 사실 이 사람이 여호와라는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의 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피곤하기 이를 데 없이 지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생애 길목에서 보여주는 그런 좌절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간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쌍 과부가 아니라 과부 셋이 같이 사는데 그 중에 한 과부인 시어머니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남편이 없는 며느리 둘입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내 고향에 가서 뭐하겠는가. 나오미 라는 말이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우면 이름이 나오미이겠습니까! 미국 사람도 나오미 라는 이름을 가끔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뜻인데 김 고통, 박 고생, 한 근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식 이름을 그렇게 짓는지, 거기에 가면 누가 반겨주겠는가. 가라. 이 속에서 보는 나오미 라는 여인의 사고방식은 아주 극히 세속주의고 나는 확실히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빨리 가라. 너희 부모님께 가라. 그래야 너희들이 또 시집가지 않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그래서 그것을 보면 이 나오미의 마음속에 남편 없이 살아가는 한없는 처절한 무게, 그런 것들을 며느리들에게 전가시키고 싶지 않은 그 시어머니로서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가라. 그랬는데 아닙니다. 어머니 따라 가겠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이 펑펑 웁니다. 그래도 나오미가 굴하지 않고 가라. 한번 더 그랬더니 오르바가 그렇게 말씀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하듯이 입맞추고 자기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가고 있는 며느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룻’이라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창출 어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빛이 쪼개서 나왔는데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어름이 물에서 나왔는데 물보다 더 차다. 신앙이 거의 없는 이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어머니와 어떻게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 고백이 언제 읽어도 눈물이 나는 고백입니다. 며느리들, 시어머니들에게 이런 고백을 한번 해봤습니까? 다시 한번 감정을 잡아서 읽을 테니까 한번 감동을 받아보십시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신에게로 돌아가리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하는 며느리가 성경에서도 이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여기서도 나오미의 신앙 없음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야, 네 동서는 제집으로 갔고 그리고 그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가라.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겨우 그 집안에 전도되어 왔는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그 신이나 섬기라. 그렇게 하더라도 시집가서 잘 살아야지 그게 행복하지 않나. 아주 지극히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존경할 만한 인품이나 아니면 깊이 흠모할만한 신앙이나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이 많았습니까? 지금 룻이 유산을 노리고 지금 어머니를 안 떠난다는 것입니까? 땡전 한푼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말하자면 유숙한 나그네와 같은 처지가 된 그 어머니인데 뭐가 좋다고 나를 다시 강권하여 어머니 곁을 떠나라 하지 마시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그 곳에 나도 가며 어머니가 유숙하신 그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며 어머니의 죽는 그곳에서 나도 죽어 장사될 것이오, 죽는 일 외에 내가 어머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이렇게 외웠겠습니까? 참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 공경은 부모로터 받은 혜택이 있어나 아니면 존경할만한 분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며느리가 시집을 와서 시어머니를 대할 때에는 웬만큼 훌륭해서 그 며느리가 어머니를 존경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며느리한테 존경을 받는 어머니는 진짜 모든 사람이 존경할만한 사람입니다. 웬만큼 뛰어나서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또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그 며느리가 시집을 와서 가장 경계하고 피해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시어머니입니다. 그런 경계의 심리가 있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면 그 어머니를 그렇게 마음을 열고 존경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힘듭니다. 성품이 얼마나 뛰어나면 존경할까요? 돈이 얼마나 많으면 존경할까요? 사회적인 지위가 얼마나 높으면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를 존경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 자체가 그렇게 미묘합니다.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인 자신에게 해준 어떤 대가나 어떤 호의 그리고 받을지도 모르는 어떤 보상, 그런 것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어떤 보상적인 의미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참된 공경히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룻이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을 보면 사실 부모를 공경하고자 하면 그런 외적인 요건들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냉정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룻이 나오미 보다 백 번 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맨 처음 여호와를 전해준 사람은 나오미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와서는 나오미는 신앙을 다 팔아먹은 여자고 룻은 오히려 그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미 다 알거지가 되고 깡통을 찬 거지가 되어서 이제 환영해주는 사람도 없는 고향을 밥숟가락 붙들고 가지만 그렇지만 룻에게는 어머니를 따라가는데 있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며 어머니가 뭐 유럽 여행이라도 갑니까?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가 무슨 특급호텔에 갑니까? 그것은 아니라 나그네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나오미의 고백에 핵심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리이다. 이미 이 여자의 마음속에 신앙이 들어가서 그래서 기업 되시는 하나님을 소유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이 어머니를 놓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신앙이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의 문제는 단지 부모의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며느리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접근을 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격이 있는 부모를 공경하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단지 그 부모님이 나를 낳았고 아버지와 결혼 관계에 있다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 시어머니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못 살았으면 하나님이 계산하실 것이고 너는 그 집안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어머니를 깊이 공경하라고 하는 이것이 성경적인 효도의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만약에 그 부모의 자격을 운운하고 그리고 쥐꼬리만큼 부모에게 해줄수록 더 많이 해달라고 그렇게 한다는 둥, 뭘 또 그렇게 많이 해주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마치 효도 그 자체를 어떤 부모를 향해 베푸는 동정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선 부모의 공경을 진실하게 하지 아니함으로 죄를 짓는 것이고, 쥐꼬리만큼 헌신한 것을 가지고 그것을 스스로 의로 삼으니까 하나님 앞에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부모를 공경하는 그것은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을 포함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그것은 부모의 자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에 생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책망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를 대고 부모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부모에게 뭘 좀 드려야하고 또 부모가 섬김을 받아야 할 텐데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은 ‘캬라브’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 고르바는 하나님께 이미 가까이 드려진 것,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조금 공경해야지 될텐데 아 이거 하나님께 벌써 바친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부모 공경에 대의를 외면하면서 가장 종교적이고 거룩한 선생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 바리새인들을 예수님께서 그렇게 철저하게 질타하신 것입니다.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도 뭐라고 합니까? 자기 친척 곧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사람이라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그것은 부모가 자신에게 해준 그런 어떤 공로 그것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나에게 이렇게 살아라 고 주시는 주님의 분부입니다. 그래서 그 시부모님을 보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까지 아낌없이 십자가에 매다신 예수님의 그 사랑에 감화를 받아서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공경하는 대의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며느리가 시어머님을 그렇게 깊이 공경하면서 살지 않으면 시부모님 모두 포함되지만 그렇게 공경하면서 살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신앙이 끊임없이 파괴됩니다. 미움과 원망, 갈등 이런 것들이 돋아납니다. 자, 사랑하면서 살아야할 될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으면 대안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완전히 무관심해든지 아니면 미워하든지 둘 다 죄짓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어머니는 배우지를 못해서 도대체 학력이 높은 나와는 의사소통이 안돼. 그러나 사람에게는 학력을 가지고 겨우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정보도 있지만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소통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오가게 만드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여기에 보면 룻은 나오미에게서 존경하고 그분을 이렇게 높이 공경할만한 어떤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좀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며느리 둘이 안가니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빨리 가라, 나는 이제 더 이상아들이 없다. 오늘밤이라도 내가 시집을 가서 아이를 갖는다고 치자. 그러니까 대게 시집을 가고 싶어하는 그런 할머니였습니다. 여자의 인생의 행복은 시집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어머니인데도 깊이 공경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시어머니의 자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룻이 만난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해 연합된 룻에 신앙적인 마음이 이 어머니의 모든 인간적인 결점에 눈이 멀게 만들었고 그리고 오히려 주님이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그 어머니의 백성이 자기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는 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다운 그 기업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부모를 어머니를 이렇게 깊이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고 시어머니가 교회에 안 다닌다고 했으면 말도 내가 안 해, 시어머니 신앙은 교회가 매일 가서 박수치고 예배 시간에 매일 제일 앞에 앉아서 아멘 아멘 하고 아들이 용돈 주면 전부다 갖다가 교회에 바치면서 삶은 엉망이고 시어머니가 본이 안되어서 내가 효도를 못한다니까. 그런데 그런 모든 우리의 인간적인 고백들을 룻이 한번에 싹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부모의 공경은 부모의 부모 된 자격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살라는 명령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도대체 이 룻의 어머니가 누군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냐하면 모압에 살고 있는 룻이 이제껏 살고 룻을 낳아준 그 어머니가 룻의 어머니인지 아니면 남편도 이미 죽었는데 그 시어머니가 진짜 이 사람에게 어머니인지 분간이 안 가게 됩니다. 분간이 안 간다기보다는 우리는 오히려 룻을 낳아준 그 어머니를 룻이 새카맣게 잊고 남편도 없는 가운데 며느리와 시어머니만 남았는데 그 시어머니를 정말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이 룻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러니까 ‘시어머니는 없다’라는 말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시집와서 성도 안 바꿔주니까 며느리도 영원히 그 어머니의 이름 앞에서 시 자를 안 떼버리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시어머니 그 시라는 말이 ‘싫어’ 거기서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 말은 괜히 하는 말입니다. 하여튼 시어머니, 그래서 어떤가 하면 그 시 자 하나로서 그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금을 긋고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들이 참 얼마나 무섭습니까?한 지붕 밑에서 자기가 진짜 자기를 낳아준 생모 밑에서 살아봐야 몇 년이나 살았겠어요. 한 25년 정도, 늦게 시집을 간다고 해도 한 35년 정도, 그렇게 엄마 밑에서 살다가 그 다음에 남편을 만나서 시집으로 시집가서 80까지 산다고 그러면 25-30년 정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긴 세월을 그 집에서 보냈는데도 여전히 이 며느리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긴 세월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도 그 어머니는 시어머니입니다. 한번 시어머니는 영원한 시어머니입니다. 그게 가슴에 딱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한풀 딱 접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 자신이 더군다나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몇 번 받고 그것이 한이 되고 고통이 될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더더욱 자신이 가졌던 생각이 옳다고 하는 굳어진 심령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 자신이 그 집안에 살면서도 어머니를 향해서도 결국은 시어머니라고 하는 그 경계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금을 그어놓고 사는 동안에 그런 삶 속에서 룻이 보여준 것과 같은 이런 그 시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그 어머니와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연합된 그런 모습을 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시집갈 때 시어머니는 없다 그런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저 마음에 드는 형제 하나 만났다고 짝짓기 해서 사는 것은 그것은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행복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남녀가 만나서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고 결혼할 때, 우리 결혼해서 한번 불행해보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다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둘이 사랑하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두 사람만 사랑한다고 해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둘이서 열렬히 사랑했는데 어려움을 헤쳐나가게 되던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성간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자아 중심적이고 그만큼 어떤 의미에서 변형된 자기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에로스 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서는 물론이거니와 그리고 시어머니에게서도 그리고 시집 식구들에게서도 모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모습 속에서도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 그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형상을 읽어내고 그 모든 사람들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회복해야지 됩니다. 그럴 때에 두 사람이 나누는 그 사랑으로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때 너무 좋아하던 찬송이 그것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입니다. 처음 만난 엄마부터 시작해서 아빠와 언니 누나부터 시작해서 유치원에서 만난 사람, 선생님, 초등학교 중학교 거치면서 만난 그 다양한 선생님들, 교우들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중에 여러분들을 보면서 진심으로 애야, 너는 이 세상에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런 사람 몇 명이나 만났습니까? 있습니까? 심지어 어머니도 안 그렇습니다. 저 놈의 자식, 호랑이도 안 물어간다고, 더 심하면 요즘 귀신은 뭐 먹고사는 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진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는데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그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받고 싶어할 뿐이고 받으면 행복하리 라고 하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그렇게 사랑할 능력은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불행에 한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그들을 그렇게 사랑을 받을 필요는 있지만 그렇게 사랑할 수는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서 며느리 될 사람들이 시어머니는 없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남자와 함께 결혼함으로서 저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어머니 노릇 잘하면 내가 좀 동정적인 효도를 베풀어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 결혼은 행복해지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 여러분들이 여러분 좋은 대로 결혼하기 전 싱글의 시절에 여러분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하고 여러분 좋은 대로 인생을 살면 어느 날 시집을 가서 여러분들이 엄청나게 부딪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애 그런가 하면 편하게만 살아왔기 때문에 만나도 자기 마음에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용납해주는 사람만 가까이 하고 여러분이 사람들을 통해서 다듬어지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변화되는 그런 거룩한 성화의 경험들을 안 했거나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러 자매들이 이 다음에 시집가면 남편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테니까 그러면 우리 시어머니는 교양이 있고 그리고 또 워낙 시어머니가 못생겨서 자기에게 보탬이 될 것은 없습니다. 적당히 이 어머니가 우리 시어머니라 라고 모시고 밖에 나갔을 때 그런 사람들이 야, 네 시어머니 참 세련되었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좋지, 어머니 시골에서 농사를 지시니? 그런 소리 듣는 게 안 좋잖아요. 농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모시고 가고 말귀도 못 알아듣고 보청기 끼고 다니는 그런 시어머니보다는 말귀도 잘 알아듣고 반짝 반짝 하고 옷 하나를 입어도 세련되게 입고 말이지 교양미가 있는 그런 시어머니가 좋잖아요. 그런 시어머니, 경우가 바르셔서 자기 할 의무를 똑바로 분명히 하는 어머니, 남에게 절대로 게기지 않고 아랫사람에게도 예의가 있는 어머니, 그러면서도 넉넉한 관용이 있어서 며느리인 자기가 잘못하면 야단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면서 안아주고 잘못하면 얼마나 고생했니? 이럴 수 있는 시어머니, 거기에다가 또 시어머니가 가난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시어머니가 넉넉해서 가서 큰일 때 가서 설거지라도 끝나고 나면 너 이거 얼만 안 된다만 가다가 쌀이라도 보태서 사먹어라. 그리고 한 50-100만원이라도 봉투에 넣어서 남편 모르게 주머니에 넣어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지위도 좀 있어서 신문에라도 가끔 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면 좋겠지요. 그런데 아니 그런 훌륭한 어머니가 왜 여러분을 며느리로 맞이하겠습니까? 결혼한 사람들이 뭐 또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제일 안전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나는 평범한 자매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시어머니도 한국의 평범한 시어머니일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의 평범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시어머니일 것이다. 아들 장가보내고 뒷방에 앉아서 며칠씩 울면서 가슴아파하는 그런 어머니 일 것이고 그리고 시어머니 보는 앞에서 남편이나를 너무나 많이 사랑해주면 혼자 돌아앉아서 눈물을 흘리실 그리고 홀로 자식을 길러온 그 긴 세월을 되씹으면서 마음 아파할 그런 연약한 어머니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는 원래 바탕은 평범하지만 나는 그 평범한 어머니를 끌어안기 위해서 주님의 사랑으로 특별한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안전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싱글로 지낼 때 많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그러면서 참기 힘든 것을 참아버릇하고 양보가 무엇인지를 배워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기 위해서 치르는 그런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보고 그리고 부당한 사람들에게 끝까지 인내하면서 선대하는 그런 희생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도 배우고 정말 마음속으로는 싫은데 그 사람의 마음에 좋아지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도 배우고 그러면서 부단한 자기 깎임 속에서 그런 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도 이렇게 보면 너그럽고 성품도 좋고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눈물도 많고 사랑도 있고 이런 자매들은 조금 안심이 됩니다. 신앙도 있고 그렇게 성품이 좋을까! 그런데 옆에만 지나가면 칼바람이 생생 불어요. 목사가 옆에 지나도 그렇게 칼바람이 부니 목사만 못한 사람이 지나가면 그 칼바람이 무슨 바람이 되겠습니까? 한번 다이아몬드 바람이 되려나. 그러니 아! 저 어떻게 살까?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길거리 가다가 어른들 만나면 왜 그렇게 인사를 하는데 인색해. 안녕하셨습니까? 목사님, 평안하셨습니까? 집사님, 오늘은 굉장히 활기차 보이네요? 요즘 교회에 봉사하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시죠? 매일 나와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네요?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아니 그러면 어디가 덧납니까? 쌩쌩! 그렇지 않으면 나라도 만나면 (?) 그게 왜 그렇게 살아. 그러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자기 사랑 자기가 받는다고 그런 성품으로 남의 집에 시집을 가서 홈그라운드가 아니라 어이(?) 경기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다 자기편이 하나도 없는데 거기서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나는 정색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이 든 집사님들이 젊은 사람들이 인사를 안 한다더라. 그런 소리해서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그런 소리 들리지도 않고, 그리고 그런 면에 있어서는 저는 좀 너그럽습니다. 아직 하나님 제대로 못 만나서 윗사람들 못 알아보고 그래서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이 인사를 안 합니다. 그러면 내가 옆에서 다 제 책임입니다. 제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안 그럴 텐데 은혜를 못 받아서 그런데 여러분도 똑같이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몇몇 지체들에게 내가 심방인가 뭔가 할 때 내가 대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 그렇게 쌀쌀맞게 그렇게 사니,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니요 제가요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요 무시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요 그렇게 잘 안나오고요 윗사람들에게 인사할 때는 꼭 닭살이 돋는 것 같고 그래요. 그래서 하는 말이 사실 알고 보면 저도 참 연약해요. 그래, 연약한 것은 아는데 인사 좀 해라. 그리고 항상 말을 친절하게 건넬 수 있는 그런 삶의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말이지 어떤 남의 신체적인 특징이나 꼬집어서 밟아버리면 그렇게 뭔가 끌어내려서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그런 것 말고 어, 파마를 하셨네요. 폭탄 맞으신 줄 알았어요. 그것도 농담이라고 해.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풀어주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긴 대로 살지 마십시오. 절대, 생긴 대로 살면 안됩니다. 생긴 대로 살지 말고 주님이 빚으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그 사람의 인생이 변화가 되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서부터 꼭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나쁜 것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을 소재로 삼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합니다. 오늘도 새가족 환영회를 하는데 방송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고 찬양도 잘 부르시고 그러더니 교회에 와서 목사님 얼굴을 뵈니까 방송에 들었던 이미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가 사과했습니다. 못생겨서 미안하다고, 실망을 드려서 죄송하다고, 그래도 주님께서 다 용서하신 것인데 못생겨도 용서하셨잖아요. 나쁜 것은 자기 자신을 소재로 삼고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추켜 주고 그렇게 하면서 이렇게 부드럽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그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게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 룻은 지금 이 시어머님을 자기 어머니 이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잘난 것이 없는 여자입니다. 그런데도 남편도 잊어버리고 과부입니다. 그리고 자식들 둘도 잊어버리고 그리고 자기만 홀로 뒤에 남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밥술이나 뜨려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 서글픈 나그네길에 서 있는 이 여인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룻이 그렇게 사랑했을까요? 그렇게 목숨을 걸고 그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래서 그 어머니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기를 너무나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신앙이라고 하는 그것들을 시어머니에서 시 자를 빼고 시아버지에서 시 자 빼고 시아주버니에서도 시 자를 빼고 그리고 아주버니, 그리고 시동생에서도 시 자를 빼고 다 빼십시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주버님 우리 동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집에서 이들과 함께 정말 온전한 가족 관계를 가지면서 일생을 살다가 이들과 함께 죽으리라. 그리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나의 존재가 너무나 우리 가족들의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빼버리기를 나는 원합니다. 시어머니 그것을 빼버리기를 진짜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나는 좀더 과격한 제안을 하자면 나이가 많이 들면 힘들지만 나는 시집을 금방 간 그 며느리를 맞은 시어머니에게는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보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느냐고 내가 제안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엄마하고 어머니하고 동의어인데 시 자를 빼라고 한참 그랬더니 친정 어머니는 엄마고 시어머니는 어머니야. 그렇게 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지어먹은 마음이 삼일을 안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집 올 때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시집 온지 한 15년 된 사람에게 내가 묻는 이야기입니다.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하는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어머니에게 잘해야겠다는 그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제 우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사는 한 식구들이라고 하는 그 가족에 대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가족은 자신을 모두 공궤하고 가족들의 모든 허물을 알면서도 그 허물이 가족들간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이 가족이 가진 애정 관계의 독특성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잘랐어. 지워졌어. 그러면 끝입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게 자를 수도 없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게 그게 가족들간의 관계가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평생 살아야된다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그럼 보세요. 만약에 그렇게 사랑하는 관계가 되지 못하면 둘이 갈등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시어머니 죽기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날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먼저 죽든지, 그런데 자기 먼저 죽기는 싫을 것입니다. 그 관계가 얼마나 비참한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에 가서 그 분을 시어머니로서 생각하지 말고 어머니처럼 깊이 사랑하며 그렇게 효도하라고 보내주셨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라고 일러주셨는데 가서 기껏 하는 게 언제 돌아가시나. 그러면서 그런 날을 기다려야 된다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모습으로 살 바에야 차라리 깊이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시어머니라고 하는 그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리고 그 분을 자신의 진정한 어머니로 모셔들이고 우리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우리 서로의 좋고 나쁨, 장점과 단점으로 인해서 단절되거나 다시 이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어머니를 먼저 그 어머니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를 마음으로 진심 어리게 받아들여주는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특별히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거의 본성에 가까운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향해 마음을 여는지 열지 않는지,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그렇게 대해주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서 시어머니를 그렇게 형식적으로 대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아무리 바보 같은 시어머니라도 그것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며느리인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들은 가난을 무서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생활도 모두 살아왔습니다. 실제로 아들 딸 며느리들이 어머니를 효도함에 있어서 물질적으로 공경을 안 해주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는 경우는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에서는 별로 없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돈을 안 보내주기 때문에 사이가 나빠진다기보다는 어머니인 자신이 아들의 마음속에서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고 그 사라져 가는 것을 며느리가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아들의 마음속에서도 잊혀져 가는데 며느리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처음부터 존재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 소외감, 이런 것들이 결국은 아들과의 관계,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적대적인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가장 쉽게 너희들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나. 그리고 내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카드가 무엇인가 하면 물질적인 공경입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들 입장에서 자식을 이미 보내고 이미 딴 살림까지 하고 있는 아들에게 원하고 바라는 것이 그렇게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품안에 자식이지 놓고 떠나가면 세월이 점점 흐르고 나면 점점 잊혀지는 것입니다. 애들 군대에 갔을 때도 그렇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저놈의 자식 군대나 가지, 도대체 연기만 계속하고 가지도 않는다고 하다가 군대에 가면 그날 밤 펑펑 울고 옷이 오면 한번 더 펑펑 울고 처음 휴가 나오면 버선발로 달려나갑니다. 야, 네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서 왔니? 군대에 갔는데 왜 죽어. 그러면서 그냥 좋아하다가 두 번 세 번 나오면 너 또 나왔니? 언제 들어가니. 나중에 하도 힘들면 그 군대는 휴가를 그렇게 자주 보내주고 근무는 언제 세우냐? 네가 이렇게 휴가를 자주 나오면 삼팔선은 누가 지키나. 서양 속담에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가서 오랫동안 살아가면 점점 마음속에서 잊혀지는 것입니다.
기대하는 바가 많으면 그 시어머니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아주 너무 단순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자식으로부터 받는 소외감입니다. 그것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이 효도의 첫걸음이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이니셔티블을 쥐고 있는 사람이 며느리입니다. 며느리가 그 집안에 와서 정착할 초기에는 시어머니가 강력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만 시어머니가 점점 늙고 시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해서 점점 소외지대로 벗어나고 나면 그 다음에 주도권은 며느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되기 전까지 새로운 며느리가 자기 자리에 오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그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때 오히려 부모인 시어머니가 소외감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느끼게 해주는 것이 그것이 효도의 첫걸음입니다. 마음을 주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시어머니라고 하는 시 자를 떼어버리고 사람들은 시어머니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당신이 내 어머니입니다. 배만 안 아팠지 너는 내 딸이다. 이럴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부모 공경의 중요한 대의입니다.
세 번째는 며느리가 그런 식으로 그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어머니가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포기하라고 나는 권면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어머니를 잘 가르치고 아니면 부딪히고 아니면 따지고 하면 어머니가 바뀔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버려라 그것은 안 바뀝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며느리 말에 의해서는 안 바뀌어도 하나님을 잘 믿고 깊은 은혜 생활을 하는 분이라면 며느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래서 하나님이 바꾸어놓으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라도 깊은 신앙생활을 하면 항상 한쪽이 집니다. 포기하고 끌어안습니다. 그러면 두 사람의 연합은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막가파처럼 살아가면 희망이 없습니다. 네가 그렇게 하는데 나는 못하랴. 시어머니면 단가. 몇 년만 더 기다려보라고 그래. 내가 밥이나 주나 봐라. 이런 식으로 막가파 식으로 나가면 아무런 해결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결혼을 했는데 만약에 그 시어머니가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자기를 성찰하시는 그런 신앙의 세계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면 그냥 그 집에서 금방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해야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시어머니로 모시고 있는데 죽어도 여한이 없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려고 하는데 며느리보다도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고 싶어하고 며느리에게 작게 마음 아프게 해놓고 돌아앉아서 많이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시어머니가 될 것 같으면 업고 다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시어머니인 며느리로서 일컬음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변화 받는 속도가 좀 더디다고 하더라도 며느리인 여러분보다 빠릅니다. 여러분들은 그 난세에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도 굳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 받으면서 그렇게 자기 깨어짐이 있는 신앙생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삼 십 년의 신앙생활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변화되는 속도가 좀 더디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뭐 효도를 못한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자라난 세대가 다르고 그분들은 그렇게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든 간에 세대 차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이든 세대도 나이간 안든 세대로 인정해야지 되고 나이가 안든 세대는 나이든 세대를 인정해주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학교에 있을 때 지금은 팔순이 다 되시고 은퇴를 하셨지만 그 교수님과 점심을 먹으러 가면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닙니다. 뭘 땅에서 자구 줍습니다. 나사, 못, 철사 줄 이런 것을 줍습니다. 서랍에 하나 가득 있습니다. 왜 줍습니까 하면 아깝다고 합니다. 뭐 하시려고 합니까 하면 몰라. 내가 보기에는 그것을 다 비닐 봉지에 담아 팔아도 천 원도 안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모읍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그 일제 시대 때 가난한 시절 육이오, 그 꿀꿀이 죽 먹으면서 자라던 시대를 그렇게 가난하게 고난받으면서 살아오시는 도안에 근검절약, 누가 하나 흘려서 버리면 나사라도 하나 흘려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그 시대에는,
우리도 생각이 납니다. 우리도 그렇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담배 불 킬 때 성냥불 하나 켜서 세 사람이 모여서 담배 불 붙이던 독일의 재건의 기록들을 들먹이면서 본받아야지 된다고, 그런데 우리는 슬쩍 받다가 나라가 잘살게 되어서 이렇게 왔지만 그 앞 세대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다가 결국은 인생을 다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은혜 받아도 안 바뀝니다.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 보면 요즘 정말 푼수 없이 종이를 한 장 쓰고 뒷장은 버리는지, 그리고 썼으면 그것을 쓰레기통에 넣는가, 불태워서 쏘시개라도 하지, 쏘시개가 어데 있어 다 누르면 전기 들어오고 가스가 들어오는데, 그러니까 그런 사고방식에 차이 같은 것들은 어느 시대든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 깨어짐이 있고 그러면 얼마나 복된 시어머니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느리다고 하더라도 깊이 이해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교회는 다니지만 인격이 형편없어. 내가 시어머니가 하나님을 믿는 한 내가 믿나 보라. 이런 며느리들 깊이 뉘우쳐야지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다려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변화되어야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화: 어느 며느리의 고백- 시어머니가 지식이 있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입만 열면 욕을 하셔서 며느리가 상처를 많이 받다가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면서 시어머니가 비록 함부로 악한 말씀을 하셔도 심성은 따뜻한 분임을 생각하면서 어머니를 이해했다는 이야기)
자신이 깨닫고 변화되기 전까지 기다려주는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말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자기 손으로 시어머니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절대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시어머니를 보면서 그 시어머니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는 그 어머니에게 적응하면서 살려고 하는 그런 신앙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에게 기대하는 삶을 자신이 먼저 살아 보이고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그리고 그 어머니를 용납하는 그런 삶의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더욱이 그 어머니가 신앙이 어리거나 신앙이 없거나 불신자일 경우에 여러분의 십자가는 훨씬 더 커집니다. 결국은 그런 집안에 여러분들을 시집 보내서 결국은 여러분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그 어머니에게 예수님을 알리고 하나님을 알리게 하기 위한 선교적인 목적으로 보내셨으니까 남편 될 사람을 뜨겁게 사랑할 때 주위에서 안 믿는 집은 시집가서 힘들텐데 아 제가 선교사라고 생각하고 가지요. 그때 그런 고백을 상기해야지 됩니다. 정말 선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그래서 내가 죽으면 내 어머니가 살고 우리의 남편도 살고 그리고 우리 모든 가족들이 주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기쁘게 하나님 앞에 감당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네 번째로 그런 며느리들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위로와 사랑이 누구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와 은혜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시어머니를 용서하고 용납할 수 없는 시어머니를 용납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실제적인 힘의 근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며느리가 믿지 않은 집에 시집갔을 때 며느리 한사람이 바르게 잘 살면 그 온 가족들의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며느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모르는 집안 식구들의 옹달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거의 경건한 능력을 잃어버려서 고사되어버리고 나면 그러면 빈 웅덩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길이 없고 그들에게 감화를 끼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시어머니의 마음속에는 며느리가 잘해준 것은 삼일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며느리가 섭섭하게 해준 것은 눈감을 때까지 가슴에 아로새겨져 그저 시어머니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의 차이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 잘해준 것은 오랫동안 기억을 해도 섭섭하게 한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그것이 친어머니의 간사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그럴 수 없는 어머니입니다. 그 한계를 깊이 인정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은혜,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그런 어려운 관계를 극복해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직장도 그렇게 어려운 상사 만나서 집어치우고 친구도 그렇게 까다로운 친구 만나서 때려치웠는데 교회 목사도 하도 까다로운 목사 만나서 집어치우고 다른 교회에 가버렸는데 마지막에 시어머니에게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십자가의 사랑과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전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랑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뭔가 하면 여러분들의 신앙 그 자체는 여러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신앙에 따라서 많은 사람의 생명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을 한 아내들에게 사도 바울이 뭐라고 권면을 했습니까? 아내의 행실로 인해서 남편이 구원에 이르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나중에 예수를 믿었지만 믿지 않은 남편이 헤어지기 싫어하고 가족들과 살고 싶어하면 불신자와 살기 때문에 원칙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참고 같이 살아라.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서 거룩한 아내의 행실을 통해서 그 남편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힘든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남편이 모르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셨고 시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많은 빚을 지게 하셔서 그래서 주님 앞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위만 바라보고 내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시어머니 바라보면서 살아가서 그래서 효도하지 않고 그래서 서로 적대관계를 갖고 마음의 상처를 품고 그래서 시어머니라는 시 자 하나로서 어머님과의 관계에서 접어놓고 살아가는 그런 불신자와 방불한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의 삶 속에는 성령의 은혜가 깃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화 될 수가 없습니다. 가슴속에 가시와 엉겅퀴 같은 것들이 돋아나고 자기의 딸도 꼭 자기 같은 불행한 삶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은 자기 딸과 같은 부인을 만나서 일평생 자기와 같은 부인을 만나서 일평생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마음 고생하다가 어머니도 밉고 그리고 아내도 싫어서 마음 둘 곳 없는 그런 방황하는 남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들이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가 그런 삶을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큰사랑에 감격해하는 은혜의 비밀이 있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 며느리들에게 이야기하는데 기도생활을 잘 해야지 됩니다. 아, 목사님, 애는 어리지요. 밤에는 밥도 안 먹고 울고 기도하고 담쌓은 지 몇 년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소용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둘째 애를 낳을텐데 조금 있으면 또 셋째 애를 낳고 그게 사는 것입니까?
요즘도 가끔 보면 새벽에 유모차 끌고 기도하러 나오는 자모들, 아이들 업고 기도하러 나오는 자매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아기가 새벽에 자는 시간에 자기도 퍼져 자는 것을 알고 아침 시간에 빨래하고 일하다가 버스 한 코스를 타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애를 길러본 사람은 다 압니다. 그렇지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았든지 간에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조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어머니를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부족한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자원이 없습니다. 고갈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원망이 생겨나고 그래서 급기야는 부부의 관계까지 소원해지고 깨트려지는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불꽃같이 사는 백성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를 채우고 불쌍한 우리의 가족들을 하나님 사랑 더 많이 받은 내가 끌어안고 구원받지 못한 우리 시아버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까지도 모자라는 것이 많아서 효도하면서 살고자 하는 자신에게 수시로 좌절을 안겨주는 시어머니와 함께 사랑하며 사는 법들을 배워나가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함으로서 주님이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큰지를 배워나가는 그런 역동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며느리 된 여러분들이 어깨가 몹시 무겁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퀴즈랜드가 다 완성되고 교회가 공사되고 나면 며느리 기도 시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 아이들 오면 다 봐주고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좀 와서 원 없이 1시간이라도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며느리로서 바르게 살지 못했던 것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그렇게 하면서 정말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히 그 집안에 시집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에서 비롯된 것이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려우면 그 자리에 사명이 있다는 표시이고 힘들면 거기에 여러분들이 지기를 원하는 십자가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것을 잘 감당하고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되게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많은 가족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아래 들어오게 되는 그런 복된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형제사랑과 가정생활(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가정의 달, 하면 그저 가정의 달의 관심사는 부모에대한 공경과 그리고 자식에대한 사랑에 집중되어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면 부부간에 화목하게 살아야한다. 그러한 생각들을 주로 하게됩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하면 동기간의 우애입니다. 다시말하면 형제간의 사랑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역시 여러각도에서 이 동기간의 우애의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최소한도 네가지 이상의 동기간의 관계가 한 가정속에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떠나서 시집오기는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보면 친정에 남아있는 혹은 먼저 출가한 그 형제간의 관계가 빼놓을수 없는 동기간의 관계일것이고,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가족속에 있는 형, 동생, 그다음에 언니, 누나와의 친가쪽의 관계도 동기간의 관계입니다. 양쪽을 가로질러도 역시 또 관계가 성립되는데 처가집에 있는 형제들과의 관계도 넓은 의미로 확대해보면 동기간의 관계이고 또 시집와서 필연적오로 맞닥뜨리게 되는 시동생, 시누이와의 관계도 역시 동기간의 관계입니다. 벌써 네 개가 나왔죠. 하나 더 꼽으면 그다음에는 남편의 형제 자매들이 시집장 가서 특별히 남편의 남동생, 그다음에 친형들이 장가를 가서 이제 이루어지는 그래서 함께 그 시집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치게되는 동서관의 관계, 이것도 역시 형제간의 관계라고 우리는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형제간의 관계는 자식에 대한 관계나 부모에대한 관계, 그리고 남편과 아내인 배우자에대한 관계만큼 무게있게 생각하지는 않는편입니다. 부모를 의절하며 살수없지만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형제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가정에는 항상 동강난 형제들과의 관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가 너무 심각하고 혹은 거기로부터 받은 상처가 크기 때문에 그 형제, 자매 동기간의 관계가 그렇게 최고의 우선적인 관심사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일뿐이지 똑같이 형제들의 관계가 깨뜨려진 그런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지모릅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벨래야 벨 수 없는 관계이고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수 없는 관계입니다. 핏줄이아닙니까. 이제 수직으로 이어지는 혈연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부모를향해 섭섭하고 마음아픈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녀의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이 새끼같지않다도 그래도 어떡하겠습니까. 낳아놓았으니까. 그러니까 부모로서 자식이 하는 짓이나 자식의 상태가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아도 그래도 자식이니까 묵묵히 희생하고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어머니 아버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실제적인면에 있어서 더더욱 그러하지않습니까. 마음에 안들어도 그저 이제껏 살아왔는데 또, 헤어진들 뭐 좋은일이 있을까. 그리고 깨뜨려진 가정이라고 하는 손가락질 당할 그런 미래의 자기의 모습, 그리고 독신의 몸도 아니고 어린 아이들까지 달렸으니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어떻게 이해하면서 살아야지, 그러는 자기를 접는 마음이 사실 부부관의 관계에서 많이 있기 때문에 사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것들이 통제장치가 되어서 끌려져야할 위기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간의 관계를 잘 회복하며 살수 있게하는 현실적인 요인이됩니다. 그러나 동기간은 그러나 동기간은 약합니다. 더욱이 이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결혼하기전에는 형하고 동생과의 관계가 형하고 동생만 통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둘이 같이 각각 장가를 들고나면 네사람이 의합하지 않으면 형제의 사이좋은 관계가 계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형하고 동생이야 피를 나눈 사이이고, 고운정 미운정 들면서 어린시절부터 수많은 추억을 쌓으면서 한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고락을 같이하면서 살았지만 이제 새로 시집온 자기 부인이야 자기 형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온 형수가 동생인 자기하고 무슨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보면 남편을 뜨겁게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그 남편 하나 살려고 나머지 전부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동서 다 사은품으로 딸려온것입니다. 강제로 끼어팔기식으로 “미안합니다.” 표현을 그렇게 해서, 이해하기 쉽게. 옛날에 우리 그러던 시절이 있지않습니까. 미원이 아주 풍기현상이 드니까 미원하나 사실려면 기름을 하나 사야됩니다.라든지, 뭐 그런 기워팔기 있었잖습니까. 그것도 공정거래법 위반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여튼 자기 사고싶은 것을 사던 시절이 있었지않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뭐 그렇게 처음만난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기대가되고 달콤하겠습니까. 부담이죠.
그래서 자매들 제가 많이 만났지만 형제들이 많은 곳에 시집가고 싶다는 사람 별로없습니다. 하나는 싫고, 그런데 싫어도 그뭐 누구 생각해서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어머니가 자기 남편될 형제만 바라보고 살다가 자기 괴롭힐까봐 그저 한둘, 그정도 갈려고 그럽니다. 누가 선을 보게 해주는데 만나기로 날자까지 약속했는데 형제가 아홉명이라 그러니까 안나오더래요. 그것이 다 딸려온 식구들아닙니까. 그러니까 형제들과의 결합은 우선 친형제의 경우에도 아까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렇게 강한 필연적인 끈이없다. 더군다나 결혼을 하고나면 이제 그 두사람과의 관계가 삶의 영역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엄마, 아빠 해주는 밥먹고 같이 씻고 같이 뒹굴고 자다가 이제 하나는 개봉동에 하나는 저기 우이동에 살면 그뭐 언제 만날날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결혼을 통해서 형제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삼의 인물들이 둘이나 출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성이 곱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런 부인들을 각각 만나서 그래서 형제를 좋아하고, 우애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행복해하고, 해서 서로 희생하고 그러면 오히려 그 관계는 결혼했기 때문에 더 원만하고 좋아질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몇이나 되느냐이거죠. 결혼하기전에 독신으로 살때에 형하고 동생하고 별로였는데 결혼하고 나서 형동생이 너무 사이가 좋아서 그래서 넷이서 떨어지지 못하는 그 형제우애로 곱게 뭉쳐진 그런 집안, 여러분 보신적이 있습니까?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는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형밖에 모르고 결혼하기 전에는 형제우애밖에 모르던 동생이 결혼하고나서 변심해서 그래서 형도 미워하고 동생도 안아무인으로 생각하고 자기 이기적인 가족주의에 빠져버리는 그런 예는 얼마든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형제우애가 현실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것이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한번 가슴에 손을 이렇게 얻고 그리고 대답을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정말 여러분의 형이나, 여러분들의 동생, 누나, 언니를 정말 피붙이처럼 사랑합니까? 그들의 행복과 그들의 불행, 그들의 삶, 이런것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정말 깊이 관심사가 되고있습니까? 시집왔지만 멀리 떠나왔지만 여전히 친정에 있는 동생생각, 그리고 나처럼 출가해버린 언니, 혹은 누나에대한 생각, 이런것들이 여전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보고싶고,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축복해 주고 싶고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걸은 더 나아가서 여러분들의 시동생이나 동서, 그렇게 결혼관계를 통해서 맺어지는 제2, 제3의 형제관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애착을 느끼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이제 이것이 필연적으로 효도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부모가 아직가지도 활동을 많이 하고 힘차게 움직이면서 실권을 가지고 자식들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그들을 손에 놓고 움직일수 있을 때에는 자식들이 관계가 어떻든지간에 그 아버지는 별로 그렇게 가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많이 들고 현직에서 은퇴하고 활동할 시기도 지나고 인생의 황혼이 깃들때에 그 어머니, 그 아버지의 최고의 기쁨이 무엇인 아십니까. 그것은 남이 먹지못하는 귀한 음식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코피나도록 고단한 그 해외관광, 깃발들고 빠라다니고 그러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나이 많은 아버지, 나이 많은 어머니의 인생의 최고의 기쁨과 보람은 두가지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많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교제를 여전히 원하고 있는 것, 나이 많이 늙어서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는데도 자식들이 자기와의 교제를 원하는 것, 두 번째는 뭐냐하면 그 자식들이 자기의 눈빛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이 자기의 큰아들이 자기의 작은 아들에게 옷한벌 해주는 것이 두아들이 서로 싸우면서 옷 두벌해가지고 옷을 자기 몸에 입혀주는 것보다 훨씬 더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구원받은 여러분들을 볼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공동체가 어떤모습이 되기를 기뻐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각자가 주님을 믿고 어두운 죄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가슴에 깊이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저미도록 간직하고 그리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때문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이 정말 기쁘게 기대하시는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각자 각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헌신적인 일군이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일만할뿐만 아니라. 그들이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정말 아름답게 자기 자신도 거룩해져가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보탬이 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 당신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 밖에 없는것처럼 일생동안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외에도 또한 가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형제가 서로 우애하고 사랑하며 함께 주님을 닮아가고 함께 주님을 섬겨가는 그 모습이 님이 정말 원하시는 모습일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도 보면 성령이 하나되게 하시는 것을 굳게 지키도록 우리에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에 분쟁이 있는 것, 그리고 진리가 아닌일로 인해서 마음이 갈리고 서로를 미워하고 대립하는 이런 상황으로 교회에가 가는것에 대해서 깊이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 교회의 커다란 상처가 되어서 교회전체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떨어뜨리고 마음이 갈라지도록 만들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봉사할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공동체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피로 값주고 사신 공동체입니다. 그분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리시고, 그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참사랑을 깨달았고, 그들이 그렇게 주님의 참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 믿는 자녀들이 되어서 서로함께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깨뜨려질때에 하나님의 마음에는 큰슬픔이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말로할 수 없는 커다란 죄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함께 형제된 지체들에대한 커다란 도전이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신 하나님께대한 말할 수 없는 불효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이렇게 힘과 마음과 뜻, 사랑을 모두 결집해서 싸워야할 대상과는 싸우지 않고 서로가 물고뜯으며 그리스도 안의 공동체를 깨뜨리려고하는 사단의 궤계에 얼마나 쉽게 말려들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면서 여러분의 영혼이 얼마나 갈급해지고 교회의 영성이 얼마나 퇴락해지는지를 한두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지고계신 이 형제간에 화해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그 불화한 공동체에 대해서 가지고계신 하나님의 가슴아픈 마음이고 또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합니다.
그래서 가정이라고 하는것도 하나의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체험이전에 주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이 둘이있는데 하나는 교회와 그리고 가정, 국가도 경험적인 제도입니다. 살다보니까 사람들이 마라라는 것을 만들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이 어느정도는 물려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자기 아버지 앞에서 형, 동생과 다투고 분쟁하며 그렇게 살았지만 그렇지만 자기자신 앞에서 자녀들이 물고뜯으면서 싸우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그렇게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해야지만 우리의 동기간들과 그렇게 화목한 삶을 살아서 그래서 노년에 우리의 부모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형제에대한 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생활에 손해가 되지않는 그런 좋은삶을 살수있을까? 그것이 이제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바입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 영적이고 정신적인 연합니다. 그것을 오늘 뭐라고 말했느냐하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래서 여기에서 연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히브리말로 말하자면 “하나된다.”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된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뜻인가? 하나된다.라고 하는 의미는 즉 연합이라고 하는 의미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일체감속에서 둘, 혹은 그 이상의 형제들이 말하자면 단단한 결속을 이루는 내면적인 특징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이하고는 어떻게됩니까? 그러니까 사랑이라고 하는것도 알고보면 그러한 결속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정신작용이란말입니다. 그래서 그 한 동기간들이 결속되었나, 결속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결속되어있는가, 그렇지않는가 하는 것을 재는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잴 수 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지못하고 그냥 건조하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못합니다. 그래서 그저 자기혼자 열심삽니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넘쳐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됩니다. 그리고 주님 없이 살아온 지난 날들이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고 이제 자신에있어서 최고의 행복이 주님이 나와함께 하고 동행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게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그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그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많이 알고나면 그다음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뭐냐하면 가난하거나 혹은 무슨 고난을 당하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 혼자 자기가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 다시 말하면 주님과의 결속의 행복을 알았던 사람이 그 결속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외톨이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었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 그 절망감과 고통은 이세상의 어떤 물질이나 세상적인 행복으로도 만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신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라고 하는 표현도 되고 예전에 그가 하나님을 깊이 만난적이 있다라고 하는 반증도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그렇게 보고싶으십니까? 며느리들, 시동생이 보고싶으신가요? 시아주버니가 그리워지시나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이 사랑하며 살도록 주신 관계들을 하찮게 생각하며 살아갈때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해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열매맺기까지 이어가기에는 너무 분주한 삶을 살아서도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최고의 재산이시며 이 세상의 그어떤 보물과도 바꿀수 없는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날마다 주님과의 관계속에서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와 행복에 그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사랑에 빚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얼핏보면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의무감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그들도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실때에 그 사랑을 받은 것이 행복한것처럼 주님의 사랑이 넘쳐서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에도 기쁘기 때문에 사랑하고 그들을 섬기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있지않습니까.
예수 사랑 나의 사랑,
내 맘속에 넘쳐
형제를 사랑해
그렇게 동기간에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결속되게되면 그렇게 그 형제들이 보고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들과 있는 시간이 행복하고, 그리고 오래만나지 못하면 그립고, 그리고 그렇게 함께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누구인지를 더뚜렷하게 느끼게되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형제의 연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문제냐하면 우리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사실 그 형제, 동기간들이 함께 하나님의 자녁가 되지 않고는 영적인 연합을 이룰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영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맺어진 연합인데 형제중 한편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불신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와의 영적인 연합은 기대할수 없고, 더욱이 정신적인 연합도 기대하기가 힘든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알아서 어떻하든지 거룩하게 살고싶어요. 그러니 형제들을 만나도 그저 자랑거리가 있다면 “야, 우리 교회 이사갔다. 교회 지었다. 뭐 교회가 예쁘다. 우리는 주일날 가면 맨날 밥준다.” 그런 것, “지난주에는 비빔밥 먹었다. 그런데 계란이 큰 것이 하나 올라왔다.” 뭐 그런것들 자랑하고 싶은데 이북사람들이 들으면 진짜인줄 아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것인데 안믿는 형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부흥회한다.” 그러면 “부흥회가 뭔데” 그러니까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은 사실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힘든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심사가 너무다른데 한쪽은 그저 잘벌어서 잘먹고, 그렇게 살고싶고 죄를 지어서라고 하여튼 인생을 즐겨보고 싶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이 세상을 보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 때 그것이 진짜 정신적인 연합을 이룰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회복을 아무리 많이 말해도 궁극적으로는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돌아와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구원이 그렇게 필요하고 시급한 것입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하겠지” 그러면서 10년지나지 않았습니까. 5년, 10년지납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 중에는 결국은 주님을 모른체 죽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인 동시에 시급한 것입니다. 어버이날마다 카네이션을 다발로 사드리고 그리고 갈비를 짝으로 사다드리고 두툼한 돈봉투 주머니에 찔러준들, 그것 한달쓰면 다 없어집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에 잠시 기쁨을 드릴수 있겠죠. 물론 그것도 해야되겠죠. 잠시 기쁨을 드릴수 있겠지만 정말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이상의 것입니다.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래서 아들이 내 사랑보다 더 큰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되고, 아내나 남편의 사랑보다 더 큰 예수님의 사라을 알게되고, 자식의 사랑과는 비교될 수 없는 우리를 항상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끝없이 넓은 사랑을 우리 부모들이 알아야합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희어지고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할아버지가 되었어도 그품에 안겨서 기뻐할수 있고 어리광을 부릴수 있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부모 혹은 우리의 동기간들이 우리를 통해 누려야할 궁극적인 축복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마음아파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많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대신 회개해줘야합니다. 그러니까 믿지않는 동기간일 경우에 영적인 연합이라는 것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살펴본바와 같이 영적인 연합이 없이 정신적으로 연합이 되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대두되는 것, 한가지가 무엇이냐하면 이제 연합을 이룰수 없는 사이가 될 때에는 일방적인 사랑밖에는 기대할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알고, 동기간들이 아직 하나님을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주님을 모르는 동기간보다도 하나님이 먼저 여러분들을 사랑해주신 것, 먼저 여러분들을 만나서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인생의 불꽃과 같은 이 영화뒤에 존재하는 찬란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그 말씀과 영광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하신 것은 이제 이런 일에 있어서 여러분들을 충분히 희생하게 하실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이런 사랑을 먼저 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은혜를 받고 바르게 정신 구조가 바뀐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볼때에는 정신병자이고 변화받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 이해할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들이 입장에서 보면 예수에 미쳐서 사는 우리들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 사랑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천국에 소망을둔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기간들을 만나도 말이 안되고 얼토당토않은 그 의견의 충돌이 생기고 그러는 것,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않고도 워낙 이 인생을 깊이 명상하면서 살고, 그리고 신앙은 없어도 인간이 사람답게 살아가야할 도리에 대해서 반듯하게 잘 배우고 교육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복음의 본절적인 면에 있어서는 부딪혀도 살아가는 삶의 기준에 있어서는 부딪히지 않는 세련되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동기간이나 혹은 여러분들의 시동생, 혹은 여러분들의 동서들이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그런경우에는 연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럴경우에는 그저 주님을 먼저 안 사람이 빚쟁이가 되어서 예수님이 상식도 통하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 예수 믿은 다음에도 정말 몰상식하게 살아왔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오래참으심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케 하셔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주님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 “저렇게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까? 이 더러운 세상에서 저렇게 살고싶을까?” 그런데 지금은 철이들어서 그렇게 말하지만 여러분들도 주님을 만나기전에는 그 구정물 먹으면서 더럽게 짐승처럼 인생을 살던 사람들아닙니까. 그러니까 그저 그들과 여러분 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들이 더빨리 더많이 받았다는 것이고, 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금 덜 받았고 늦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것이라고 하는 차이점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기간들을 깊이 사랑하고, 정말 희생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함께 믿는 사람들일 경우에는 얼마나 좋습니까. 만나면 늘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가족들이 모이면 예배드리고,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함께 간구하고 헤어져있어도 기도시간마다 영적으로 교통하고, 그래서 형제우애의 사랑, 성도의 사랑으로 하나도 묶어져서 어디에 있든지 항상 주님 붙들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형제들이 되는 것, 얼마나 아름답고 하나님 앞에 고귀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형제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있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감사해야합니다. 내 형이 먼저 예수를 믿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것, 내 동생, 내누이, 내 동서, 그리고 내 처가집 형제 지친들이 주님을 믿어서 우리가함께 예배할 수 있고, 그리고 함께 하나님 앞에 경배하면서 살수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함께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한형제가 되었어도 그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지않습니다. 지금쯤 만약에 내 형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정말 은혜안에 있기만 한다면 지금도 어느 교회, 어두운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 형을 위해서 내 형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내 동생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지금 인생 어느 모퉁이쯤에선가 이 동생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흘리며 많이 기도하고 내 동생만 하나님께로 돌아올수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표현했듯이 “내 골육지친중 몇이라도 구원얻을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그것이 은혜 받았으면서 자기의 골육지친중에 지옥의 불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눈물로 범벅된 고백입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놀랍게도 우리 집안의 형제들을 모두 믿는 형제를 주셔서 우리의 동서들, 우리의 친정의 형제 자매들, 정말 주님 믿는 형제 자매들을 주셔서 그러니까 그것을 인해서 정말 행복해해야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직까지도 여러분의 형제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떤 영적인 연합도 없고, 그리고 정신적인 연합도 없고, 저 인간들은 진노의 자녀들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일뿐이다. 그렇게 대결의 논리로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보세요. 그것이 오늘날의 일입니다. 그 많은 탄식소리중에 그 한 흐느낌이 내 육신의 형제의 영혼에서 토해져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내 삶을 모르고 나와관계 없는 이 동네, 저 동네, 이골목 저골목을 누비면서 노방전도하면서 사는 것 괴장히 힘듭니다. 그리고 그런삶을 사는 사람들은 복될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못지않게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늘 이해관계가 얽히고 매일 보면서 살고, 그리고 떨어질수 없게 내 삶을 모두 들여다보는 내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은 그저 단순한 헌신만을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그 “저주를 받아“가 히랍어로 ”아나데마”라 그랬죠. 그런 아나데마의 정신없이,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서 진노를 받은 한 제물과 같이 되는 것 같은 그런 철저한 자기죽음, 철저한 자기복종,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내가족들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나아가서 복음을 전해보면 이 세상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마음에 복음을 받아들일수 없도록 망가뜨려놔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주 악질적인 고용주를 만나서 임금을 받지못하고 착취를 당하고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고용인들은 그를 통해서 예수를 잘못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다하지않는 며느리를 통해서 시어머니로서 한이 많이 맺힌 사람들은 그 며느리가 그 아직까지도 복음에 눈이 어두운 시어머니에게 하나님을 잘못 소게했습니다. 잘못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막 자라는 어린 우리의 자녀들에게 폭력이나 휘두르면서 짐승처럼 자기의 분노를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그 아버지를 보면서 구겨진 그 모습, 그 상처들은 그 아버지가 그런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한, 그의 열심있어 보이는 교회생활이 그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위선적인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를 보고 뭐라그랬습니까?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니” 또 뭐라그랬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니”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달이 돌아오면 가슴에 찌르도록 다가오는 평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오해는 하지 마세요. 문학적인 표현이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죄인인 것 처럼 살아야합니다. 그런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기간들과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것처럼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연합할 그 날을 기다리면서 그러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날을 기다리면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왜? 예수 사랑 많이 받았으니까.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제가 몇해전에 중국에 갔을 때 거기에 있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했습니다. 천진이라는 도시에 중국사람 돈좀 벌어볼려고 독일 사람도 오고, 미국사람도 오고, 일본 사람도 오고 다 왔는데 하나하나 힘드니까 다 보따리 싸가지고 갔데요. 한국사람만 인내와 끈기로 버티고 거기 앉아서 돈을 버는데 복장이 터진다는 것입니다.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너무 상식이하고힘이 들어서 하루에도 몇번씩 보따리 싸가지고 한국으로 가고싶은 마음이 굴뚝같더래요.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공장을 하는분이 있는데 중국에 있는 전기업자하고 계약을 하면서 한200평 공장에다가 수백개의 전기 형광등을 달기로 계약을했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한 일주일 열심히 공사를하더니 납품을 다했으니 돈을 달라그러더래요. 그래서 가보니까 200평에 스위치가 딱 하나더래요. 그래서 한번켜면 200평이 불이 확 들어오고 끄면 다 꺼지더래요. 아니 그래서 어떻게 이런 것이 있느냐, 스위치를 군데군데 달고, 아니면 하나하나 다 달아줘야지, 스위치 없는 형광등이 어디있느냐? 200평이 한꺼번에 꺼지는 형광등이 어디있느냐. 그랬더니 계약서를 펴내면서 하는말이 형광등 단다. 그랬지 스위치단다는 말이 어디있느냐? 그리고는 계약변경이니까 돈을 내놓아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깨끗한 세단을 타고 시내에 갔는데 오토바이가 달려오더니 신호대기중에 서 있는 차를 들이받고 쓰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짝이 다 박살이 났죠. 사람이 쓰러져서 피를 흘리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래서 뛰어나가서 그 사람을 일으켜서 오토바이는 치우고 그 사람을 차에 싣고 병원으로 황급히 달려가서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2-3일 지났는데 전화가 왔더래요. 오토바이 사주고 와서 나 위자려달라. 그러더래요. 하도 화가나서 “내가 서 있는데 니가 받았는데 내가 왜 널 주냐?” 그랬더니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소송을 했더니 판사가 재판을 내리는데 명판을 내리더라는 것입니다. “니가 물어줘라.” 그러더래요. 그래서 이 사람이 거기에서 펄펄뛰면서 그랬데요. “나는 신호대기중에 가만히 규정대로 서 있었고, 이 사람이 차선을 어기고 와서 들이받았는데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랬더니 판사님 하시는 말씀이 “니 말이 맞다. 너는 잘못한 것이 없고, 쟤가 잘못했다. 그렇지만 니가 물어줘라.” 그러더래요. “아니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수 있느냐?” 그랬더니 판사님 하시는 말씀이 “쟤가 잘못했지만 니가 물어줘라. 왜냐하면 돈은 니가 많지않느냐?”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사실입니다. 똑같은 경우를 또한번 당했는데 또 그사람에게도 또 그러더래요. "쟤가 잘못했지만 니가 물어줘라.“ 그 사람은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물어주느냐” 그랬더니 “넌 보험들었잖아." 그러더니 판사가 보험타는 방법을 거기에서 가르쳐주더래요.
그래요. 여러분 형제들이 여러분만 못하겠죠. 여러분의 형제들이 잘못했겠죠.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물어주세요. 왜? 하나님 사랑 많이 받았잖아요.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도다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위해 저희들
오래 참고 있었네
뭐 저는 그저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한적도 그렇게 대단한적도 없지만 늘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아프리카의 난민들입니다. 이번에도 타임즈에보니까 약 1250만명 가량의 인구가 절대 기하에 직면해있다고합니다. 어떤식으로든지 우리들이 도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최고의 피해자가 누구냐하면 3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도 병신이됩니다. 그런데 계네들이 피골이 완전히 상접한 가운데 광대뼈가 튀어나고 그리고 해골처럼 이 하얀이만 드러내고 몸을 가눌수도 없어서 땅에 기대서 손을 벌리는 그 아프리카 기아난민들의 그 그림을 아마 여러분들 보셨을것입니다. 물론 내 동생이, 우리 형이, 우리 누나가, 우리 언니가, 이렇게 경우에 어긋나고 정말 내가 볼 때 짐승처럼 사는것입니다. 그런데 당신도 한때는 짐승이었잖아요. 우리들도 한때는 짐승이었잖아요. 그 사람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부당한 대우를하면서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예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영적으로 말하고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아프리카의 기아선상에 있는 1250명의 난민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벌벌거리고 손을 내밀고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형처럼 부자 만들어 주시지는 않았고, 우리 언니처럼 넓은 땅주고, 내 동생처럼 부자집 남자에게 시집가서 떵떵거리며 살게 만들어주시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이 참많지않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그렇게 기근이 들지는 않았지않습니까.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할 때 여러분들이 왜톨박이처럼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내팽개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갚은 것이 없는데도 은혜의 부채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도 주님은 탕감받지도 못한 우리에게 오셔서 더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당신과의 연합,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살, 그런 위로와 소망들을 우리에게 가장 많이 주셨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왜 우리가 무엇이 나은 것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그랬을까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살라고, 아직까지도 주님의 그 눈물겨운 사랑,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자기를 거스리는 방탕한 자녀들을 무한정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라고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야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나와 관계없는 이웃들에게는 그렇게 베풀기 쉬운사랑, 그리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 쉬운 그 사랑이 이해관게가 얽혀있는 내 동기간들에게는 그렇게 힘들어요. 무엇때문인지 아십니까? 자기 이익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그런 마음으로 살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불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형제의 모습속에서 자기가 한없는 사랑의 빚을진 그 아버지의 형상을 읽을수 있어야합니다. 그러지않고는 사랑할수 없습니다. 용납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지않는 동기간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9번 예수의 사랑을 베풀며 용서하다가 1번 혈기에 받혀서 부딪혔는데 9번 그렇게 물질적으로 인격적으로 희생한 그 본된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본이된 삶은 기억도 못하고 한번 열받아서 부딪힌 그것을 붙들고 우리의 가슴에 깊이 박히도록 “그래서 내가 형 믿는 예수 안믿는다니까” 그리고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것처럼 끝까지 참는 것, 그것이 곧 끝까지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성경가운데 이 끝까지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심장 하게 여러분 나옵니까. “끝까지, 혹은 죽도록, 나중까지 견디는자는 복이있으리로다. 그래서 주님 앞에 그 아나데마의 정신을 가지고 나는 이제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 때문에 저는 즐거이 주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몸종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죽음으로 내 안에 예수가 살고, 내가 그렇게 죽음으로 우리 지체들의 마음에 우리 골육지친의 마음에 그 예수님의 참 사랑을 샛길 수 있다면 제가 그렇게 살아야 될 것입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갖는 그런 형제자매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다음 수요일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형제사랑과 가정생활(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일이 지난 지 3일 동안 우리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그 은혜의 날개 아래 품어주셨다가 오늘 이처럼 복된 수요일 이 저녁에 저희들 아버지 앞에 나아와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는 시간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해주셔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로 저희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저희들이 주님을 말씀 속에서 인격적으로 만나고 저희들이 주님을 먼저 믿은 자녀로서 어떻게 형제우애의 삶을 살 수 있을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지난 수요일에 저는 신자의 형제 우애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첫째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연합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전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 하는 감탄사가 나오기 전에 그렇게 시인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는 형제의 두 가지 모습이 있었는데, 하나는 연합하는 모습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동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랬습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긴 합니다. 정신적인 연합 없이 함께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거라고 말할 수 없고 정신적인 연합을 이뤘다고 말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연합을 이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제 형제 우애의 두 번째로 동거할 때에 아름답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동거는 문자 그대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합해서 함께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만 계실 분은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믿는 우리들 중에 대다수 사람들은 뒷골목에서 하나님 만나고 신자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하나님 만나고 신자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라고 세워 놓으실 때에 그 장소에 대해서 어떤 신비한 힘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지어놨어도 세월이 흘러가서 교회가 떠나고 건물이 헐리고 가게가 들어서면 가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뒷골목에서 주님 만나지 않고 교회에서 대부분 주님을 만납니다. 그 이유가 뭐 때문인가 하면 교회 건물 때문이 아니라 뒷골목에는 형제의 연합함이 없잖습니까? 물론 깡패들은 거기서 연합을 하겠지, 그런데 깡패 가운데에 주님이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교회에 모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형제가 함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나누면서 연합을 느끼고 그리고 그들을 그 연합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공동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겨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을 개인적인 삶 속에서 완성해갈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모든 공동체에게 주신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할 삶의 소명을 서로 격려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 가는 것입니다.(6:5~) 그런 현장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주님이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그렇죠? 어디든지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님이 교회에 함께하시는 이유는 거기에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거룩한 공동체의 성립요건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들이 피부색이 다르고 또 태어난 집안이 다르고 나이가 달라도 그들이 모두 영적인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많이 받은 교인들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 교회 안에 형제의 연합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거기서 자기를 만나주신 것처럼 자기의 사랑하는 지체들을 만나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고 또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신다, 라고 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런 영적인 부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아름답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합될 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같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인 생활을 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하나님께서 흩어져있는 많은 성도들을 보고 “너희들 모두 와서 함께 살아라.” 그렇게 명령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인위적으로 은혜 받았으면 집도 팔고 논도 팔고 다 팔아서 다 갖다 교회에 디밀고 그리고 교회에 와서 같이 밥 먹고 살아야 된다, 그렇게 명시적으로 누가 강요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것을 원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나니까 너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이 동일하게 은혜 받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연합의 이 연대감이 이제껏 자기의 공동체 삶을 지탱해온 핏줄이나 인연 학벌 그리고 친구, 세상의 직장 이런 것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가고 싶은 소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하나님 앞에 바치고 그리고 공동체의 삶을 시작하고 그들 모두가 한 그룹이 되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자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명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 이전에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한 것을 분명히 믿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시인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할 때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자들의 공동체, 영적인 형제자매들의 연합과 동거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결코 가족에 있어서 공동체를 제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 시인은 나라 그 자체가 교회인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태어나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고 공동체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혈통을 따라난 형제자매 핏줄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하나님을 은혜롭게 만나고 그 언약 안에서 하나로 묶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의 연합이 훨씬 더 말하자면 주된 관심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이 여러분들의 집안에 많이 있다고 할 때에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이 동기간의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어디서 찾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이 많이 있는데 그 동기간들이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또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또 열심히 나가는 여러분 같은 사람도 있고 또 가끔 교회에 나가는 형식적인 신자도 있고 혹은 여러분 혼자만 예수 믿고 그 수많은 동기간들 단 한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다 그럴 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데 동기간들이 불신자이거나,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교도일 때, 절에 다니고 이단에 빠지고 그럴 때, 무당이나 하고 그럴 때 말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의 동기간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가장 아름다운 소원이 무엇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것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먼저 여러분들이 그렇게 불신 동기간들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받지 않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이 이단의 사술에 빠져있거나 혹은 이교도의 가르침에 빠져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유혹으로부터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순결하게 지키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거기에서 끝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여러분들의 가족,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이 모두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그것도 막돼먹은 그리스도인,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형식적인 신자들이 아니라 정말 진실한 신자들이 되어서 그래서 핏줄로 맺어진 여러분들이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보혈로 맺어진 동기간이 되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함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합을 이루고 함께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것이 단지 육신의 동기간으로서가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의 공동체로서 만나면 형이 동생을 위해서 기도하고 동생이 형을 위해서 기도하고 형제들이 서로 예수를 닮기를 권면하고 형제들이 서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것을 독려하는 그런 동기간들의 모임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의 동기간의 모임이 그러하다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임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가정이 두 가정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처음 예수를 믿고 나서부터 부러워했던 가정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경건하고 신앙심이 뛰어나고 진실한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 그래서 아버지를 많이 존경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리고 그분들의 삶의 모습, 그분들의 인격적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어린 시절부터 배워나가는 그런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 그들이 정말 부럽고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형제가 여럿인데 그 형제들이 모두 우애할 뿐만 아니라 그 형제들이 모두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아름답게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그 동기간들이 모인 집안. 제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가장 부러워한 그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거기까지 입니다. 겨우 형이나 형수한테 싫은 소리 안 듣고, 동생들한테 원망이나 안 살면서 그저 적당하게 사람도리하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동기간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저 괴로움도 주지 않고 기쁨도 주지 않고 그저 몇 달을 만나지 못해도 보고 싶지 않고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마치 가까운 이웃만도 못한 서로 피해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남과 같은 그런 수평, 평행선을 달리면 그런 평이한 인간관계에 그런 사무적인 관계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에는 “나 할 도리는 하고 삽니다. 나는 형으로서 뭐 못한 것도 없고 특별히 잘한 건 없지만 손가락질 받을 일 하지 않고 내 할 도리는 하고 삽니다. 동생들보다는 내가 훨씬 할 도리 하고 삽니다.” 그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할 도리를 하면서 살고 안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그 동기간들이 어떤 모습이 되기를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겠습니까? 불신동기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이교도에 빠진 동기간들이 함께 있고 그리고 명절이면 한두 번씩 마주치는 것 그 이상의 만날 필요도 못 느끼고 만나고 싶은 바람도 별로 없는 그런 관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육신의 핏줄이 맺어준 그 연합을 뛰어넘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연합이 되기를 원합니다. 형이 동생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고 동생이 형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주님을 위해서 일한 것은 기쁘게 고백하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형제들의 연합을 통해서 두 아버지를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삶, 육신의 아버지를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서 기쁘시게 해드리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이처럼 육신의 형제 그 위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 됨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사는 그런 진실하고 착한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실 동기간에 갈등 없이 그냥 평행선으로만 살아도 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형제가 넷이면 한 사람이 세 관계를 맺으니까 넷이면 열두 관계가 되고 거기에 자기 부인들까지 함께 겹쳐놓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서 태어난 자기 자식들의 관계까지 함께 보태면 그거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보통 반듯하게 살면서 서로의 선을 넘지 않고 반듯하게 자기 할 도리를 하지 않는 한 형제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반듯합니까? 예수를 믿어서도 반듯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주님을 안 믿었고 하나님 앞에 깨뜨려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경우 없이 구는 동기간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참 힘들게 하고 그래서 형제가 함께 동거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괴롭고 고통스러운 그런 경험을 갖게 해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형제들과 의절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실제로 형제의 인연을 끊고 멀리 의절하여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보면서 사실 그 공동체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로 연합되어서 성도로서의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그런 정도를 겨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단 함께 살아가는 것,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듯하게 사람도리를 하면서 동기간을 만나고 또 자기도 그렇게 살아가면서 함께 평행선을 달려가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육신의 동기간으로 서로 사랑하고 연합할 뿐 아니라 그걸 뛰어넘어서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들로서 함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합하고 주님의 그 아름다운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시니 정말 우리에게 거시는 그 하나님의 기대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 때문에 늘 마음아파하고 그리고 내 남편, 내 동기간, 내 부모가 교회에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기도해도 도무지 하나님 앞에 돌아올 줄 모르고 세상에 빠져 사는 여러분의 동기간들이 어느 날 부부가 모두 손잡고 여러분과 한 줄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언젠가 한번 그런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그 남편이 하도 교회를 안 나가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을 했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자기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 시아버지까지 어느 날 모두 교회에 나와서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며느리는 자기 남편하고 그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은혜를 받든말든 그것은 나중 문제고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들과 이렇게 모두 자기가 부러워해온 그 가정처럼 함께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신 그것만으로도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렇게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애달픕니다. 정말 애달픕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렇게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서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복된 날이 오도록 우리는 그것 이상 더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합과 동거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동기간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때는 만나도 별로 할 얘기가 없습니다. 만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돈벌어먹고 사는 이야기, 은혜를 받고나면 동기간들이 만나도 이게 지금 남전도회가 만난 것인지 동기간이 만난 것인지 구분이 안갑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 자기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성도의 교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동기간들에게 원하는 기대가 거기까지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인간들을 교회에 한번 데리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어려운데 언제 그들이 변화를 받아서 주님의 사람이 되어서 저처럼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서 함께 손잡고 주님이 우리 각자의 영혼에게 베푸신 그 크고 아름다운 사랑, 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할 수 있을 그런 상황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길입니다. 정말 어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그 훌륭한 섬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동기간들은 동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을 먼저 믿은 우리는 이 동거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합됨, 그리고 함께 동거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훌륭한 도구처럼 사용하셔서 그래서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요긴한 그런 공동체, 그런 요긴한 집안이 되기를 원하신다, 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형제사랑의 멍에는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런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정뱅이 우리 형이 언젠가는 놀랍게 변화되어서 한 교회에서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다, 지금은 돈밖에 모르고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내 동생, 우리 형수가 정말 주님만나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너무나 훌륭하게 일하는 그런 값지고 보배로운 일꾼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기대, 우리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 우리가 모두 주님을 처음 믿는 그 순간에 우리들이 종자가 다른 사람들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그렇게 작정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도 예전에는 더 많이 세상에서 방탕하고 흉악한 죄인들이었고 뼛속 깊이 깊이 썩어 부패한 인간들이었고, 심지어는 주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된 후에도 우리는 옛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도 주님이 만나주셔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고쳐 주셔서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들의 동기간을 볼 때에 그들이 너무 불쌍해 보일 정도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고 우리를 그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로 변화시켜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아주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이처럼 놀랍게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변화된 것을 보면 자신의 형제들도 또한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고 기대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기대를 갖지 못하는 것은 사실 그 일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결핍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으면서 주님이 내 동생을, 내 형을, 그리고 내 동기간들을 이렇게 바꿔놓으실 수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정말 아름다운 신앙으로 자라서 그래서 우리와 함께 형제의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고 형제의 아름다운 동거하는 공동체의 생활을 일구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들이 한 형제로 손잡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큰 보탬이 되고 우리들이 그렇게 함께 공동체로 형제 우애를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우리가 그때까지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주님이 우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 형제들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하신 이유이고 형제들보다 더 많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유이고 형제들보다 더 밝은 진리의 빛 가운데로 들어오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섭리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먼 길입니다. 또한 먼 길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즉각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길이지만 그러나 그 길은 또 먼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전도지를 들고 복음을 전하러 나가보면, 나가보면, 복음을 전혀 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저 단순하게 싫다거나 아니면 바쁘다거나 아니면 잘 모르겠다거나 하는 정도의 반응인데, 의지를 가지고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난 안 믿는다.”, “안 받아들이겠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까? 대부분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아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또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한테 커다랗게 상처를 입거나 많이 실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더 단단해져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복음에 접촉해보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보다 배나 더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기간의 관계가 얼마나 이해관계가 많이 얽혀있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죠? 큰 일 때 돈 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뭐 또 무슨 뭐 명절에 아버님 뭐 해드리나 부터 시작해서 또 더 확대시키면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부터 시작을 해서 생활비를 분담하는 문제부터 시작을 해서, 얼마나 많이, 또 뭐 서로 돈 좀 빌려달라는 문제부터 시작을 해서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혀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정말 복 받으려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복을 받아야 그게 복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밥술이라도 먹는데 동기간 일곱 여덟 명 있는 친구들이 전부다 다 밥을 굶고 돌아다닌다, 실직했다, 뭐 이혼했다, 가정이 깨졌다, 뭐 부도내고 도망갔다, 사기 치다가 걸려 들어갔다, 그러면 평화가 없습니다. 의절하고 살기 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참 오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주시면서 하신 약속이 뭔지 아십니까?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너로 말미암아”라는 부분이 ‘베카’라고 나오는데 직역을 하면 “네 안에”입니다. “모든 민족이 네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와 연합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합된 사람들이 축복받지 않으면 그들과 필연적으로 연합되어서 살아가는 자기의 사람 아브라함이 고달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요셉이잖습니까? 보디발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요셉은 그 집안에 팔려간 노예에 불가하였지만 노예를 돈 몇 푼 주고 사왔을 때 그저 몸종 하나가 들어왔거니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이 요셉을 보고 하나님이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왜? 요셉이 그 보디발의 집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셉 때문에 하나님이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궁극적으로는 요셉 때문에 하나님이 애굽에 복을 내리시잖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이 축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만 아니라 그들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복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동기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믿는 사람, 하나님이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시고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들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잘 모르시지만 여러분들 너무 사랑하셔서 그들을 축복해주실 수 있는 그런 복의 근원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진짜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먼저 하나님을 믿은 우리들이 동기간의 이 관계가 그렇게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많이 수고하고 그리고 손해보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면서 용납하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목표가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 목표가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을 주어도 형제가 하나님 안에서 연합해서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이어가고 자신들의 그 연합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가정의 교회가 되어야 되겠다는 이 목표 자체가 너무나 고상하고 탁월하게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얘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모님 모시는 문제로 동기간에 싸움질이나 하고 돈 그거 몇 푼 때문에 형, 동생 의 가르고 좁아터진 아녀자들의 소견으로 남편과 동기간들의 의나 갉아먹고, 이렇게 하면 그들의 삶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생각 하냐면 이게 사실 그런 집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동생들이 수시로 와서 형인 여러분들한테 돈이나 달라고 하고 그리고 사고 쳤을 때나 인감도장 가지고 나오라 그러고 이런 빚보증이나 서달라고 하면 여러분 정말 인내하고 사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또 다른 생활의 지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지혜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오래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서 인내하고 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동기간이라는 게 열 번을 내가 희생하고 잘 섬긴 것은 기억도 못하는데 한 열댓 번 그렇게 양보하고 섬기다가 인간이니까 참는데 한도가 있어서 네 이놈 하고 한번 소리 질렀는데 그것은 일평생 가슴에 어쩜 그렇게 확 꽂히는지 말도 못합니다. 자기는 수시로 칼을 던졌으면서 자기 던진 칼은 다 잊어버리고 내가 던진 칼, 그것도 쪼그만 것, 자기는 말이지 청룡도로 배를 갈랐으면서 말이지, 그 쪼그만 바늘만한 것으로 찌른 것, 그것을 움켜지고 제일 자존심 상하는 것, 그것 우리를 그 자리에서 떡을 만드는 것, “형이 그따구로 하니까 내가 교회 안 나간다, 형수가 믿는 하나님이면 난 안 믿는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서 그것을 아주 심장을 후벼 파듯이 찌르는 것입니다. 아주 고단위의 핍박입니다. 그러니까 참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관계 자체를 말입니다. 선교사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선교사의 마음으로. 선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선교지에 갑니까? 어떤 마음으로 갑니까? “(찬양)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 선교사의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괴롭고 상심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저런 인간이 내 동기간일까, 평균만 돼도 내가 이제 이러진 않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무슨 섭리가 있어서 저 개떡 같은 인간을 내 동기간으로 만들어놓으셨을까?” 그 개떡이 우리를 사람 되게 만듭니다. 선교사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 그 사역을 하는 것 있잖습니까? 선교사역을 하는 것은 그것을 성취해가는 그 힘을 보람에다가 둔다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한 것입니다. ‘아도니람 저드슨’이라는 사람이 보스턴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버마에 선교사로 갔는데 6년 동안 한명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보람을 보고 일을 한다면 그 사역을 계속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죠? 그러면 안 됩니다. 언제 한번 어느 목회하시는 분을 오래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교회를 좀 옮겨 보시려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교회가 강북에 있고 지리적으로 너무 열악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 보람이 없다 이것입니다.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은 관심도 없는데 우리가 보람을 느낀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건 너무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역을 감당해나가게 하는 궁극적인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모두 선교사의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쓰시든지 저렇게 쓰시든지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사역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사역의 질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긴 세월동안 동기간들의 이름을 끌어안고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 앞에 그 영혼들을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이단이나 이교에 빠진 여러분들의 그 끊을 수 없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매일 초죽음이 되도록 울며 그 형제들의 이름을 불러도 어쩌면 여러분들이 무덤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여러분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여러분들의 육신의 형제들이 여전히 불신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람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을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나를 이 집안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시켰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꼭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그러나 내가 간절히 부르짖으면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 믿고 조각난 우리 동기간의 우애가 하나로 합쳐져서 그래서 우리 서로 우애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 아름다운 한 형제들의 연합이 되어서 그래서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 참 신기합니다. 뭐가 신기하냐 하면, 전도를 내보내면 그 전도 받는 사람들이 “하이고 이 더운 날씨에 열린교회 전도대원 여러분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나같이 무지몽매한 죄인에게 은혜의 복음 전파하는 복된 발걸음인데 들어오십시오. 냉차라도 한잔 들고 가십시오.” 이렇게 해주는 집이 있지만 그것은 희귀합니다. “싫어요” 쾅. “안돼요” 쾅. 시간 좀 내주세요. 그러니까 사람은 안 나오고 개가 왕왕왕 짖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한 번 좀 어떻게 해보려고 손을 넣으면 쾅 닫다가 손까지 찧고 말입니다. 그러는데도 멱살 잡고 싸우는 사람 없습니다. 다 용서합니다. 그러면 또 그 다음날 찾아갑니다. 그 다음 주에 또 찾아갑니다. 와서 기도하고 또 욕을 해도 또 찾아가고 또 찾아갑니다. 남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인내하면서 전도를 잘하는데 동기간에는 한마디만 하면 “어떻게 인간이 되어가지고 말이야. 동생이라는 것들이, 형이라는 게 말이지, 그 따위로 해가지고 말이지, 도대체 내가 상식이 안 통하는 인간들하고 내가 살수가 없다, 내 인생의 최대 실수는 이 집안에 시집와가지고 이런 사람들 만난 것이다" 왜 아버지는 나만 낳지, 왜 내 밑으로 줄줄이 낳아가지고 나를 이런 갈등 속에서 살게 하는가. 하 동생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똑같은 사람이 왜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아까 구박받으면서도 다 용서하고 손 찧으면 그 다음날 붕대를 감고 가서 또 열린신문 나눠주면서 복음 전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선교사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본 것이고 자기 동생들은 선교사의 마음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형의 마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도리, 우리가 전도하다가 선교사의 마음을 품고 그런 적 있습니까? “인간의 도리를 알아라” “어떻게 내가 전도하러 왔는데 문에다 손을 찧었는데 아까재끼도 안주나?” 그리 말하진 않잖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어떻게 집안에서도 동기간들을 향해서 선교사의 마음으로 살라고 합니까? 그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래서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어렵습니다. 그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가족들은 친절하게 하고 사랑을 베풀어줘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어느 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형 손을 잡으면서 “형이 그렇게 날 사랑하는지 몰랐어.” 어느 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형이 무릎을 꿇고 “나는 짐승같이 널 대했는데 넌 천사처럼 날 위해 기도했구나. 내가 너를 그렇게 아프게 했던 것들 용서해라” 이런 일은 잘 안 일어난단 말입니다. 가족관계는 그런 일 잘 안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그래본 적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들이 얘기할 때 여러분 동기간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그래본 적 있느냔 말입니다. 형 찾아가고 동생 찾아가고 형수 제수씨 찾아가고 동서 찾아가서 그렇게 여러분 자신이 깊이 인간의 사랑 앞에서 깨뜨려져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해가 얽혀있는 이 가족관계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봐야합니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나는 진짜 그 아이들에 관한 한 회심을 했다고 난 그렇게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랑을 하는 것은 아니고. 교회 개척을 하고 방배동 교회에 이사 와서까지 나는 아이들이 싫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하여튼 참 아이들이 너무한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애들이 아고~ 내가 솔직히 말해서 엄마들도 가끔은 서로 원망을 했습니다. 애들이 왜 그렇게 나대고 유별납니까? 왜 그렇게? “요기 앉아서 장난감 가지고 놀아라.” 그러면 그렇게 쭉 앉아서 나 한번 만지고 너 한번 만지고 그렇게 놀면 얼마나 좋아, 그지요? 그러고 말이지, 큰애는 작은애 돌봐주고 작은애는 더 작은애 돌봐주고 그러고 사이좋게 엄마아빠 예배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놈들이 길길이 뛰어다니는데 거 왜 그럽니까? 깨끗이 도배지 발라놓고 색깔까지 예쁘게 해놓고 가면 판박이 종이 가져와서 다 무슨 요술공주 밍키 뭐 무슨 곰돌이 푸 이런 거 막 그냥 잔뜩 해놓고, 그거 판박이 해놓는 놈은 그래도 또 신사적입니다. 거기다가 또 동양화 그리는 놈도 있고. 그건 또 애교로 봐줘. 교회 물건은 왜 그렇게 부수는 거예요 그래? 집어던지고 깨뜨리고 그것은 또 나아, 왜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예배시간에는 그렇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회개하려면 예배시간 전에 회개하지 말입니다. 그렇게 울고 불어서 남 은혜도 못 받게 만들고 복도에다가 오줌 싸는 놈에다가 굴러다니는 똥 기저귀, 거기에다가 또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은 이제 안 그럴 줄 알았더니 그 애들이 왜 그럽니까? 아니 유리가 있으면 피해가면서 놀아야지, 왜 그것을 발로 다 밟아서 깨뜨리면서 그 위에서 겅중겅중 뛰느냔 말입니다. 담벼락에 올라가서 무슨 서커스 집안에서 태어난 애 마냥 이러고. 쳐다만 보면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저희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느 날 할머님이 심각하게 물어봅니다. “애야”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됐을 땐데, “천국에 가면 애들도 있냐?” 그래서 “있지요.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 어린 아이들 있지요.” 굉장히 낙담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천국에도 애들이 있다고? 그러면 얘야,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냐” 그렇게 하여튼 애들 소리를 싫어하셨습니다. 물론 당신 손자는 안 그러셨지만, 당신은 평생 애 없는 나라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제 마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눈을 피해서 아이들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선교사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덧붙이자면 그 엄마아빠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다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문제가 아닙니다. 애들이 막 벽에다가 판박이도 하고 동양화도 그리고 다니잖습니까? 그 나중에 도배 다시 하면 되잖습니까? “아 진짜 그렇구나. 한 번 더 도배 하면 될 걸.” 막 부수고 깨뜨립니다. 다시 사놓으면 되잖습니까? 지 엄마가 헌금 많이 하겠지. 사면 되지. 그러고 애들이 막 깨진 유리 위에서 겅중거리고 뛰고 담벼락 위에서 막 떨어질 것같이 이러면, “얼마나 놀데가 없으면 저럴까.” 그러면 그 다음서부터는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진짜 솔직한 소립니다.
제가 신경이 아주 예민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설교할 때는 다른 교회에 가서는 설교하기가 너무너무 힘듭니다. 떠들고 부시럭거리는 게 아주 습관화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조용하지가 않습니다. 유아실도 뒤에다 크게 만들어놔서 마루로 놔서 50, 60, 100명씩 들어가서 이쪽저쪽에서 뛰어다니고 먹을 거 집어던지고. 아이고 그 속에서 어떻게 예배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막 애들이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고 막 우는 소리가 나고 뭐 집어던지는 소리가 나면 순간적으로 탁 하고 마음이 갈라지면서 설교가 맥을 놓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야, 도대체 저 부모는 애들 간수 안하고 뭐하나. 저게 지금 유년부야, 초등부야, 저게 유치부야? 예배 끝나고 하여튼 전도사 한 번 보자,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정도밖에 안됐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밖에서 떠들고 여기 애들 데리고 와서 막 울고 그러면 설교가 자꾸 ??(1:02:51~) 제가 설교시간에 맥을 놓치고 자꾸 오락가락하면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시끄럽고 환경이 정돈이 안됐던가, 앞자리에서 누가 자꾸 내 앞에서 딴 짓 하면서 있던가, 그러면 막 그럴 사람들은 저 뒤로 가라고 합니다. 앞에 앉지 말고. 모범생들만 여기 앉으라고 합니다. 막 다리 꼬고 말이지, 졸고 그러면 막 내려가고 싶습니다. 내려가서 “똑바로 앉아요.” 그러고 다시 올라오고 싶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또 이 얘기를 기화로 해서 막 “목사님 무조건 너희들 사랑한다니까 본당으로 가자” 그러고 데리고 와서 울고불고 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건 아닌데 아이들의 떠들고 집어던지고 그러는 소리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런 게 나는 어린이 선교사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분 망가지면 다시 사놓고. 찢으면 다시 하면 되잖습니까? 물론 그래, 오늘부터 가서 그려라 그러면 안 되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선교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야 그렇구나.” 마음 하나를 이렇게 바꾸어 놓으시니까 그렇게 심각하던 것들이 하나도 심각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괴롭던 것이 괴로운 게 아니고.
요즘은 말입니다.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잖습니까? 걔네들이 엄청나게 많아가지고 지금 온 교인이 거의 밥을 먹고 가는 것만큼 숫자가 나옵니다. 여기서 밥을 하는데 점심시간에 천백명이 밥을 먹는다니까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이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지나가다보면 어른 반 애들 반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신날수가 없습니다. 주일만 되면 너무 재밌습니다. 걔네들이 똑같은 애가 하나도 없잖습니까? 까만 놈, 하얀 놈, 기다란 놈, 동그란 놈 해가지고 큰놈, 작은놈 해가지고 골목을 새까맣게 누벼대는데 나는 맨날 설교하면서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오니까 자기들이 내가 자기를 잘 아는 줄 알고 만나기만 하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하여튼 인사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가족을 향해서, 형인데, 내가 동생인데, 내가 형순데, 내가 그래도 내 집안의 맏인데, 내가 누군데 이런 생각 가지면 여기서 얘기하는 그 연합하여 동거하는 형제의 그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선교사의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선교사의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많이 사랑하고 많이 용서하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그렇게 자기의 동기간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복음화 되면 그때야 대접을 받습니다. 대접을 받는다고요.
그 선교사들의 생애를 보면 그렇잖습니까? 얼굴색깔도 다른 선교사가 복음 전하러 한 동네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양코쟁이라 그러고 말이지, 된장 집어던지고 말이지, 돌멩이 집어던지고 줘 패고 말이지, 그러고 말이지 몰래 밤에 자는데 불때가지고 불나게 만들고, 온갖 골탕을 먹이잖습니까? 그러다가 이제 사람들이 그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참습니다. 그 ‘새뮤얼 모펫’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바로 그렇게 평양에 와서 그렇게 선교해서 거둔 열매 중에 하나가 이기풍 목사입니다. 제주도 선교사로 가신분입니다. 초대 총신의 학장 하셨잖습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하나씩, 그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변화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교인이 되기 전까지는 대접 못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다 믿고 주님의 사람 되고나면 그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우리 선교사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이렇게 놀라웠구나,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많아도 목회자가 은혜 받은 교인들한테 대접을 받지, 은혜 받지 못한 교인들한테는 다 무시당합니다. 여러분들 마찬가집니다. 선교사의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아직 주님께로 돌아오고 은혜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동안에는 대접 못 받습니다. 그렇죠? 대접 못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여러분들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그 은혜 속으로 그들도 들어가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여러분들이 자기들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인내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고 그리고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자기들의 구원과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삶을 위해서 보내어주신 하나님의 값진 선물이라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선교사의 마음으로 집안을 바라봐야 합니다. 먼저 은혜 받은 사람이 선교사고, 가정은 선교지이고 은혜 못 받은 사람들은 토인들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토인들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게 어렵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우셨겠습니까? 그죠?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눈물로 선교사의 마음으로 인내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혼자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항상 찾아오셔서 위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십니다. “(찬양)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깊은 깊은 깊은 기쁨을 내게 주노라” 주님이 그렇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생은 그런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일생동안 사는 것입니다. 고난도 많이 받고 시련도 많이 당하고 손해도 많이 보지만 그러나 그게 바로 주님 섬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가족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흔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끔 찾아와서 자기네 집안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엄마로 받은 상처,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 동기간으로부터 받은 그 아픔, 그 할퀸 것 같은 그런 쓰라림, 이런 것 다 얘기합니다. 그런데 얘기 다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말은 잘 안하지만, 물론 말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내가 꼭 하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게 그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대가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아서 지금은 견디기 힘들어하면서 가슴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도록 이렇게 아프지만 그런데 넌 한 가지를 모른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그 상처보다 깊지 않냐. 문제는 뭐냐 하면 지금 그 사랑을 내가 충분하게 느끼고 있으면 그 상처가 오히려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기회가 된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지 못하면 항상 마음속에 피해자로서의 의식만을 가지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선교사의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선교지에 보내줬더니 질질 울며 하나님 앞에 찾아와 “쟤들이 때려요”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선교를 하겠습니까?
(찬양)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님이 주신 은혜, 베푸신 사랑이 없으면 선교사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도 안하십니다. 그런데 상처보다 더 큰 사랑,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의 놀라운 돌보심을 입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할 만하니까 그 마음 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기독, 크리스천의 존재 그 자체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영성이 정말 주님께로부터 온 영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그 열매가 사랑입니다. 주님께 진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조금 아까 부산에서 올라왔습니다. 집회가 끝났는데 누가 봉지를 하나 갖다 주면서 이름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이것을 건네주고 갔습니다. 가서 호텔에 들어와서 뜯어보니까 선물이 하나 들었는데 아직 안 열어봤습니다. 뭐가 들었는지. 그런데 편지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를 탁 여니까 깨알 같은 글씨로 간절하게 글을 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낸 헌금으로 보내는 그 방송을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상처 속에서 살아온 부인 같았습니다. 보니까. 50세가 넘었다고 하니까. 52세라고 하는데 사실 그게 잘 변화되겠습니까? 본인이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 받고나서 가장 놀랍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자기가 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모두 용서했다고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러고 나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변하지 않던 가정이 놀랍게 변화가 일어나서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라는 사실, 그리고 자기를 통해서 이렇게 고귀한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보면서 진짜 너무 너무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고 그러면서 열린교회를 사랑한다고 그 편지를 써서 보내왔습니다. 그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경험한 가장 뚜렷한 증거가 뭐냐 하면 선교사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일평생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형제우애의 아름다운 관계도 가족의 모든 복음화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많이 희생해서 주님의 말씀하신 것처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그렇게 선교사의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동기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찢어진 마음이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의 동기간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래서 그 은혜 안에서 하나 되어서 여러분들의 육신의 부모님 앞에서 사이좋은 공동체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사랑받는 보혈로 연합된 그런 형제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서 그렇게 여러분들의 동기간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하나님 보기에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런 가정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저희들을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동기간들을 주셨는데 선교사의 마음으로 그 동기간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께서 축복해주시고 정말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들이 인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이 시간에 우리 같이 한 번 기도하겠습니다.
가정을 위하여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