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제6장 죄의 지배의 특성_신자의 순종을 사용함(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녹취자 : 오지윤
성도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눈이 내리는 것을 봤습니다. 대기 중에 흩어져있던 많은 먼지들이 눈에 씻겨내리면서 공기가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 땅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모든 것을 맑게 해주는 삶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참 어려운 때에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찰하기에 매우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죄와 은혜의 지배를 공부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를 다 같이 복습하는 의미에서 읽어보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고 했습니다. 죄의 지배의 특성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그 잔존하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지배력을 가지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큰 지배력을 갖게 되는데, 그 특성이 바로 신자의 순종을 사용해서 그렇게 힘을 얻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은 자기가 키운 세력입니다.
신자의 순종을 통해 지배력을 가진다고 했는데, 첫 번째는 생각에 가해지는 죄의 힘과 혼란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촉감을 느끼거나, 눈으로 보거나, 이렇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보를 우리 몸에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 등, 접촉하는 모든 감각작용들이 일어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 중 어떤 것들은 머리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마음속까지 내려오게 되고, 그중에 어떤 것들은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제일 먼저 죄가 인간의 생각을 두드리게 되고, 사고기능에 간섭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이 그림은, 내재하는 죄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사고기능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판단해야 할 것을 이렇게 판단하게 됩니다. 이 사람을 이렇게 그려놨지만, 이 그림은 이 사람의 마음이 전체가 죄 인 것처럼 그렸지만, 그게 아니라 이 사람(신자)의 마음은 죄와 은혜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은혜 생활을 잘하고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면 이 빨간 부분이 훨씬 커질 것이고, 빨간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반대로 은혜에서 멀어지는 사람은 당연히 이쪽이 커질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매일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것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이미 지배 상태에 있게 된다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이만큼이든지, 이만큼이든지 간에, 죄가 지속적으로 사고기능에 관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모든 것에 관여하게 되지만, 특히 이 사람의 욕망과 관련되어서 넘어지기 쉬운 것들에 작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공과 공부를 하는 여러분들 중에는 명품에 중독되신 분들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중독은커녕, 하나도 살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사고기능에 관여해서 명품을 사야 된다. 명품을 갖고 싶다. 명품이 없는 게 너무 불편하다.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나의 사고기능에 관여해서 나를 심각하게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중독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계속 사고기능에 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보면서, "저것을 가져가면 명품을 살 수 있을 텐데, 그래서 그 백을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도표로 돌아가면, 그렇게 될 때에 마음속의 은혜의 틀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많이 사랑했었는데, 얼마 되지 않은 이것이 간섭하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흔들리면 이것이 계속해서 넘어오기에 좋은 상황이 됩니다. 이해되십니까? 이해를 못 할 게 없습니다. 또 하나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신자가 죄와 싸우고 있는 한 죄가 지배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 것은, 더 이상 죄에 대해서 전투적으로 항거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이 만났습니다. 여러분들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갈등하는 것을 굉장히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러한 갈등을 느껴, 물론 그중에는 순수하게 성도들에게 기도를 많이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기가 갈등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주 높은 영성의 증거인 것처럼, 때로는 2, 3 정도밖에 갈등을 안 하는데, 대화할 때는 그것을 8, 9로 부풀려서 엄청난 갈등을 느끼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위선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허영입니다. 허영은 사실이 아닌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정도까지의 깊은 갈등을 느끼는 사람이니까, 이런 갈등을 처음 듣는 너하고는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의 영적인 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일종의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자기의 영적 생활이 허전한 데서 나옵니다. 진짜 돈 있고, 남편의 사랑을 받고, 집안에서 인정받고, 자존감이 확고하게 있는 여성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비싼 물건을 산 것을 자랑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자존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자기 자신을 포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절대로 위대하기 보면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무엇을 이야기해도 절반 이하로 깎아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어의 습관 속에 베여 있는 사람들은 진실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감정의 과장만큼 큰 영적인 허영은 없습니다. 신앙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갈등을 느끼는 것을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갈등을 느낀다는 것과 죄와 투쟁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죄와 투쟁하는 사람은 갈등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났는데, 용감한 병사는 총 들고 전투하러 뛰어나갑니다. 갈등하는 사람은 용기가 모자란 사람입니다. 전투할 용기도, 항복할 용기도, 둘 다 모자란 사람이 전투를 할까 말까, 투항을 할까 말까 갈등하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대게 말씀에 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러한 오류에 빠집니다. 아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그런 것을 하지도 않습니다.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죄와 갈등하는 것이 죄와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보면, "죄와 싸우고 있는 한, 지배는 불가하다." 아까의 말로 대입하면 어떻게 됩니까? 갈등하고 있는 한, 지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등해도 충분히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정욕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 정욕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좁은 의미입니다. 그릇된 성적인 욕망입니다. 이것이 정욕입니다. 스쳐 가는 유혹은 아닙니다. 그것을 붙잡는 것이 죄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면, 이것은 자기를 주인 삼고자 하는 모든 욕망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과부가 된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정욕으로 마음이 불타는 것보다는 시집가는 것이 낫다.'라고 이야기할 때는 좁은 의미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산다고 할 때는 여기(넓은 의미)에 해당됩니다. 정욕에 순종하게 될 때, 이것이 반복되면서 죄의 지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에 갈등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졌느냐 이겼느냐에 따라서 죄의 지배는 계속 힘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지배는 계속해서 은혜에 순종합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의 말씀에 계속 순종하게 될 때, 그때 지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도 계속해서 지배가 올라가게 됩니다. 죄의 지배를 계속 받다 보면, 거의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되고, 이 성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죄가 유혹을 합니다. 유혹을 받는 것이 죄겠습니까?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만약에 유혹을 받는 것이 죄라면,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하와가 유혹을 받았지만,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음에 품을 때, 그것을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할 때 그것은 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젊고 건강한 남자가 아주 아리따운 여성을 보면서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와 마음이, 감각기관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욕망으로 품게 될 때, 그때 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에 아주 작은 아기씨가 떨어져서 난자와 합하여 수정란이 되듯이, 그렇게 생각을 타고 들어온 것 중에 어떤 것들이 마음에 떨어져, 놀라운 집중력으로 마음이 그것을 품을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유혹은 죄의 집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고, 죄는 그 집을 다시 찾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혹은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이고, 죄는 그 새가 머리 위에 집을 짓도록 허락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으로 간음하였느니라" 이것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음욕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지를 발동해서 그것을 마음에 품을 때, 의지의 작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상이 기쁨을 줄 때, 그는 더 다른 것을 끊임없이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행위로써 죄를 짓게 만들고, 죄를 지은 다음에는 반복해서 짓도록 만들고, 반복해서 지은 다음에는 그것이, 그 죄가 그 사람을 사로잡아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제약 없이 그 죄를 저지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죄의 목표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도 더 너절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가 산산이 부서진 상태에서 불행하게 살도록, 그 보상은 순간순간 느끼는 죄의 즐거움입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후기 청교도에 의하면,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되면 더 이상 그 죄를 지을 수 없도록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리거나 늙어버리게 됩니다. 그때 그것을, 그가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그를 버린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신자에 대한 죄의 궁극적인 원대한 계획입니다.
그래서 어떡합니까? 죄의 유혹이 사방으로 밀려옵니다. 그런데 은혜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와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죄의 지배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상태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죄를 받아들이고, 품고, 그것을 사랑하게 될 때, 은혜의 지배에서 죄의 지배로 서서히 넘어가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그대로, 죄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반복해서 정욕에 순종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죄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는데, 죄의 능력이 강화됩니다. 이 죄는 신자 안에 있는 죄입니다. 경향성입니다. 자연적 경향성이 있고, 도덕적 경향성이 있습니다. 자연적 경향성은, "나는 물에 말은 밥을 좋아한다." 저 같은 경우는 성상이 분명하지 않은 음식을 싫어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죽입니다. 맑은 나박김치, 좋습니다. 식혜, 매우 좋아하는 음료입니다. 떡, 괜찮습니다. 과자, 먹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모호한 상태에 있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저의 아내는 죽을 참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이 프랑스의 유명한 식당에 가서, 불어로 된 메뉴판을 보고 다섯 접시를 시켰다고 합니다. 웨이터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뭐라고 말하는데, 불어를 못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오케이, 오케이" 그러니 마지막에 요리를 가져왔습니다. 수프만 다섯 접시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저는 싫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경향성입니다. 여태까지 안 바뀌었습니다. 그 자연적인 경향적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전에 저는 밥을 퍼놓은 후 불어서 밥알이 모두 흩어져 날라가야지만 밥이 맛있었습니다. 지금도 진밥은 싫은데, 그렇게 너무 고슬고슬한 밥은 오래 씹어야 합니다. 조금씩 변합니다. 고기를 전혀 못먹다가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러한 것이 자연적인 경향성입니다. 도덕적인 문제와는 상관없습니다. 서로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은 서로 존중하며 사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성상이 불분명한 음식을 내가 싫다고 하는데, 굳이 호박죽, 미역죽, 낙지죽, 김치죽 이렇게 죽만 주면 뭐가 좋겠습니까? 서로 존중해줘야 합니다.
도덕적 경향성은 다릅니다. 그것은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남의 물건만 보면 훔치고 싶어 하고, 부정직한 것,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도덕적 경향성입니다. 옳고 그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고쳐야 합니다. 죄는 당연히 자연적 경향성이 아니라, 도덕적 경향성입니다. 이 두 개의 성향이 완전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성향을 도덕적 경향성이 많이 이용합니다. 이러한 원리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은혜가 들어가면 자연적 경향성을 사용해서 도덕적인 선한 것들을 많이 이루도록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의 성향이 오지랖이 넓은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별의별 사람들 모두에게 참견하면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이러이러한 형편에 있으니 돕자고 많이 도와줍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집니다. 온갖 사람에게 참견을 해서 분탕질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 염장을 지르고,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향은 특별히 나쁜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신 성향이니까, 그렇게 강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림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의 삶을 삽니다. 기도하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다 못 그렸지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매우 많은 그림이 나옵니다. 이것은 결국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순수하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우리들이 순결하다고 부른 것입니다. 색깔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의 순결은 흰색이 아니라 빨간색입니다. 예수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상태, 그것이 진정한 순결입니다.
혹시 여러분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어보셨습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음악 시간에 열심히 부르지 않았습니까?
노래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그런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조금 크게 틀어 주시겠습니까? 들어봅시다. 소프라노가 나와야 되는데 피아노 연주만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 듣겠습니다. 이것이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그리그가 작곡한 곡이고, 테르킨트의 모험곡 속에 나오는 곡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민요 속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1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솔베이지가 어느 여자의 이름입니다. 테르킨트라는 사람이 농부였는데, 사랑하는 솔베이지와 결혼을 합니다. 그때의 노르웨이 형편 때문에 너무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아무 희망도 없다. 그래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해외 근로자를 지망합니다. 10년 동안 일해서 돈을 꽤 법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해적을 만납니다. 모두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이 모습으로, 이 거지 같은 꼴로는 아내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돈을 벌어야지 하고, 우리말로 하면 지방으로 내려가서 열심히 노동을 합니다. 그런데 뜻대로 안 돼서 병까지 얻어서 노숙자 신세가 됩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게 됩니다. 죽으려니까,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아내를 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젊었을 때 떠난 그 집은 없고 아주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인적이 없는데, 불빛이 창으로 비쳤습니다. 가까이 가서 창으로 살짝 들여다보니까, 어느 노파가 바느질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내, 솔베이지였습니다. 자기 아내의 이름을 부릅니다. 남편은 그 아내의 품에 안기고, 아내의 무릎을 베고, 병든 몸을 눕힙니다. 그때 부르는 노래가 솔베이지의 노래입니다. "그 여름날이 가고 또 봄이 오고, 또 세월은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그렇게 아내의 노래를 들으며, 아내의 무릎을 베고 테르킨트는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결입니다.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남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갔는데,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여자가 그렇게 늙어가도 순결한 사랑이 그 안에 꽉 차 있었습니다. 그만 심취하시고 공부로 돌아갑시다. 나중에 유튜브에 들어가셔서, 안나 네트레코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동적입니다.
도표로 돌아가면,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사랑이 있을 때, 사랑은 이렇게, 이러한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 제8권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반드시 사랑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문제가 나왔습니다.
4. 죄의 능력은 신자의 생각을 먼저 공격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마음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생각이라는 문을 통과한, 모든 것이 마음까지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을 통하지 않고 마음까지 들어가는 길은 없습니다. 결국은 마음 지킴이라는 책을 읽어보시고, 마음지킴의 교리라는 설교 시리즈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묵상집도 있습니다. 도서관에 와서 빌려 가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지킬 수 없는 분들은 그 교리를 묵상하며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사셔야 합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것은 생각 지킴입니다. 생각에서 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5. 신자 안에 있는 은혜의 지배와 죄의 지배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순종을 통해 지배력을 행사한다. 무엇에 대한 순종이겠습니까? 죄의 지배는 정욕에 대한 순종, 은혜의 지배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겉모양으로만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겉모습으로는 말씀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는 탐욕이 가득합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솔베이지가 베르킨트를 기다리듯이, 마음을 기울여서 지키는 것입니다. 끝입니다.
댓글: 이 시간 사모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절기설교 당첨자들이 나오셨습니다.
댓글: 올해 마지막 구역 공과 시간에 왔습니다.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마지막이었습니다.
댓글: 미혹 받는 것과 유혹받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비슷한 건데, 미혹이라는 말은 그냥 욕심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벗어나는 비진리에 대해 마음이 끌리는 것을 미혹이라고 합니다. 이해되십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정욕에 끌리는 것도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수 없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마음이 끌릴 때, 그것을 유혹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미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댓글: 스쳐 가는 것은 유혹이고 거기 머무르는 것은 죄다.
맞습니다. 한 집을 지나가는 것은 유혹이고, 그 집을 다시 찾는 것은 죄입니다.
댓글: 하나님의 순종은 구원의 근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댓글: 저도 뚱뚱한데 고기만 먹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탄수화물만 줄이시면, 고기를 먹어도 살이 빠집니다. 평소의 먹던 양의 3분의 1만 드시면, 고기를 먹어도 살이 빠집니다. 오랫동안 할만한 식습관은 아니라고 합니다.
댓글: 목사님 음악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 매우 좋아합니다. 가사를 재미있게 써놓으셨습니다. 다 읽어드리지는 못하겠는데, 어쨌든 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공부 계속하시면서 은혜 생활 잘하시고, 교회에 가까이 사시는 분들은 교회에 오셔서 기도 좀 많이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부터 안전하니까 교회에 오셔서 개인기도 많이 하시고,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가시고, 그렇게 하면서 믿음 생활 잘하시길 바랍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한 해 동안, 코로나로 인해서 고난을 많이 겪으셨는데,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번 한 주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힘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