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6장 죄의 지배의 특성_
신자의 순종을 사용함(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1)
녹취자: 백지영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아침에는 일어나니까 흰 눈이 아주 가득 내렸습니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다들 어려워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저희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잘 이기고 기도하며 견뎌야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세력 중에 죄의 지배의 특성_ 신자의 순종을 사용함’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죄가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죄의 지배를 받아도 신자가 순종함으로서 그 죄의 지배는 실제로 효력을 미치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 같이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의 이중적 공격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이쪽의 그림이 이게 밖이 되겠지요. 신자 바깥에서, 죄의 유혹은 항상 바깥에서부터 오는 거니까, 이게 하나의 공격입니다. 죄가 유혹을 하니까 공격을 하는 것이고, 안에는 내재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넓게 보면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죄는 항상 있게 마련이지만, 좁게 보면 내재하는 죄가 강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경향성이 아주 강한 사람들, 또 특정한 것에 대해서 경향성이 강한 사람들, 예를 들자면 성적인 욕망, 혹은 물질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 이런 특정한 것에 대해서 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경향성에 맞는 유혹들이 주어지게 되면 이제 이중의 공격을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그렇지 않아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내부적으로 공격을 받는데 그런 종류의 유혹이 밖으로부터 들어오니까 외부적인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 두 공격을 받으면서 신자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자, 이제 이렇게 죄의 이중적인 공격이 있는데 이제 깨닫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런데 여기서 법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이 법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자기 바깥에 있는 법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법이 새로 제정되었다고 하더라.” 그런 법을 깨달은 게 아니라, “아! 내가 이렇게 나도 잘 몰랐는데 사실 알고 보니까 이렇게 오락에 빠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러한 어떤 자기 안에 있는 법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참새가 방앗간 곁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그런 법이라는 것이 외적으로 법률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참새의 성향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깨달은 것은 신자나 불신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한 것이 학자들에 따라서 각기 언제 한 것이냐 이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신자 때 깨달은 것이다, 아니면 신자 때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의견들이 갈립니다. 그런데 존 오웬 목사님이나 저나 많은 청교도들은 이것이 신자인 시절에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다시 도표로 돌아가면, 이렇게 신자도 죄를 깨닫고 불신자도 죄를 깨닫습니다. 깨닫는데, 어떻게 불신자인데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양심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양심에 의해서 자기가 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신자나 불신자나 다 양심이 있는데 신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양심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깨달음이 훨씬 더 구체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가 정말 성령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 안에 있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죄를 경험합니다. 신자도 깨닫습니다. 불신자도 깨닫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당연히 죄를 미워하고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기본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깨달아도 이기지 못합니다. 이기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잘 들으십시오. 불신자가 신자보다 항상 도덕적으로 열등한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자도 죄를 깨닫고 불신자도 죄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불신자가 죄를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양심으로 깨달아서 “아, 내가 이렇게 이웃에서 어떤 손해를 입혔구나. 이게 참 비양심적인 것이구나.” 그러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백을 하고 그 다음에 책임을 졌습니다. 그리고 변상을 하든지 뭘 하든지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가 불신자가 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결국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까지는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그냥 하늘이다, 양심이다, 인간의 본성이다, 자연의 도다 이렇게 이야기할 뿐이지 그 죄를 지은 일차적인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가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신자가 죄를 깨달았을 때 죄를 미워하고 싸웁니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심지어 옛날에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조차도 죄를 짓고 그 다음에 추한 일에 빠집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은혜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맨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결국은 죄의 절대적인 지배이고 이것은 죄의 상대적인 지배입니다. 불신자는 절대적인 죄의 지배아래 있고 신자는 상대적인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가 은혜의 지배아래 있지 아니하면 죄를 깨달아도 죄를 미워하고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도덕 생활에 있어서 양심이 없는 불신자와 거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구하고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는 죄의 이중적인 공격 가운데 유혹의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시면 죄가 유혹을 합니다. 유혹은 유혹을 당하는 신자의 동의가 없이는 결코 자신 속에서 죄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죄의 유혹이 옵니다. 악한 생각이 빈번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게 무엇이냐 하면 지성의 혼란입니다. 지성의 혼란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게 생각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생각이 가지런해지지 않고 지성의 혼란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혼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성이 맑은 정신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죄 된 생각의 간섭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저는 레이더의 원리를 잘 모르지만 예를 들어서 레이더가 있습니다. 그래서 레이더가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전파를 발생하고, 그 다음에 그 전파가 반사되어오는 것을 보면서 이제 목표물을 탐지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옆에서 또 다른 전파를 발생하는 자잘한 도구들이 있어서 전파에 간섭이 일어난다면 레이더의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지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되면 혼란이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욕망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것이 정서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 정서는 결국은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란이 일어나고 옳지 않은 생각이 있는데 이것이 정서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정서의 도움을 받으면 죄에 대한 구체적인 소원을 마음에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옛말에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았는데 어느 날 가게를 지나가다가 어느 물건을 딱 보게 됩니다. 혹은 신문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어느 물건을 보게 됩니다. 살 때가 되면 그것을 사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놀라운 집중력을 갖게 되고 마지막에는 이것 없이는 불편해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물건을 구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물건을 다 그렇게 구매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크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쳐서 구매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광고의 심리 효과가 무엇이냐 하면, 계속 선전을 하면 처음에는 “오, 저런 것도 있었네.” 그러다가 두 번째 세 번째가 지나고 나면 “저거 있으면 참 좋겠다.” 그 정도가 광고의 목표가 아니라, 마지막에는 “네가 이것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냐? 그걸 진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이렇게까지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 광고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저것을 가지면 참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저거 없이는 도저히 불편해서 못살겠다는 생각까지 갖게끔 세뇌를 시켜서 결국은 물건을 사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구체적인 죄에 대한 소원으로 마음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채우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자, 차례대로 설득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지성도 점령이 됐고 정서도 점령이 됐습니다. 그런데 의지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이미 쏠리고 욕구가 확 쏠리게 되면 의지는 좀 기분 나쁜 비유인지는 모르지만 변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껴서 화장실로 막 이동을 하는데 못나오게 참는 그 정도 역할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꽉 차고나면 확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의지의 동의가 이루어지고 실행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실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죄가 실행이 되면 이 죄는 사람 마음속에서 죄의 성향을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이 성향이 강력한 힘이 되어서 더 잘 악한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정서의 도움을 더 빨리 받습니다. 그다음에 이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것입니다. 거침없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마음의 구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자마자 악을 행할 수 있는 그런 구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이 악을 특징으로 하는 악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더 깊은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시험에 들게 되는 때와 시험의 번성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에 들게 되는 때는 특별한 외적 번영의 때, 다윗과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특별한 번영이 있고 그 다음에 사람 마음이 해이해 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도 않고 그렇게 될 때 아주 시험에 들기에 좋은 매우 특별한 때가된다 이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큰 은혜를 맛본 뒤에, 그때에 인간은 당연히 교만해 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해이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침체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영적인 즐거움을 크게 맛보았을 때, 이때도 사람이 교만해 지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이런 큰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다음에 시험에 대해서 경계심이 다 느슨해 진 때입니다. 이게 1번, 2번, 3번. 네 번째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할 때, 고린도서에 나오지 않습니까?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니까 자기는 이제 든든하다, 시편에도 나오지요? 내가 든든하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주께서 얼굴을 가리시면서 결국은 내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특별한 영적인 번영과 은혜, 즐거움, 그리고 굳건함이 있고 난 후에 위기가 찾아오면서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요구하는 게 무엇일까요? 저렇게 특별한 번영의 때 은혜를 맛보고 영적인 즐거움을 맛볼 때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마음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죄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집니다. 당연히 열렬하고 간절한 눈물이 있는 기도 생활이나 이런 것들도 모두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히 훌륭하게 보이는데 내적으로는 서서히 고갈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적절한 때 시험이 한번 강타를 하면 아주 쉽게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험이 번성하는 세 가지 여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끊임없이 계속될 때, 이것은 매우 특별한 때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종류의 유혹이 계속 될 때 그때는 사단에 의한 집중적인 공격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럴 때는 일상적인 경건생활로 대처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도 대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죄가 사회적으로 보편화될 때, 예를 들자면 어떤 죄가 있는데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그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그런 죄를 지으면 사회적으로 사람이 아주 강력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 버리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시험에 대한 경계심, 죄의식 같은 것들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악의 상황과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왜 타협을 할까요? 힘이 드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힘겹고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상황으로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무엇이냐, 내가 어떻게 믿고 살아야 될 것이냐, 이것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안하고, 그냥 “난 힘들어. 나는 모르겠어.” 그리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되어 있든지 죄에 지는 자신의 상황으로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급속하게 시험에 떨어지고 인간은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인데도 역시 저기에 해당되면서 급속한 타락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이 ‘유혹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에드워드 페이슨이라는 후기청교도인데 자기의 회상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라는 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라틴어로 ‘코람데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뒤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있다고 하는 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식을 갖고 사는 일 자체가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기도하고 매일매일 말씀의 은혜를 받고 살아야 됩니다. 어제 밤에도 교회 와 보니까 굉장히 추운데 지체들이 나와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시켰습니까? 기도하러 밤에 안 나오면 누가 혼냅니까? 그리고 기도하러 안 나오면 신자가 아니랍니까?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하던데 그렇게 기도를 안 하면 교회에서 집사를 안 준답니까? 아니면 열린교회 교인이 아니랍니까? 아무도 나무랄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안에 깨어 있을 때에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혹에 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유혹을 받았을 때 고백했던바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너와 나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의 생각이었고 죄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도 사실상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다. 당신과 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기 한 분 더 계시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또렷하게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죄에 물러가지 않게 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 죄의 이중적인 공격에 대해서 그러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죄의 유혹에 대한 것입니다. 죄가 유혹을 합니다. 유혹을 할 때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죄에 지는 것은 순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죄에 대해서 아주 즉각적으로 대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군인들의 중요한 자세가 그것입니다. 언제든지 군인의 마음은, 적군과 어느 순간에라도 싸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적을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공격이 실행되면 천천히 천천히 생각을 하면서 싸워야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반격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군인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대항입니다. 유혹에 대해서 대항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훌륭한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주리셨을 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봐라.”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께서 “진짜 그렇게 한번 해 볼까? 그러면 내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지?” 아주 오랜 장고 끝에 “에이, 그래도 내가 그럴 수는 없지.” 이렇게 하신 후에 사단의 유혹에 대해 반응하신 것이 아니라 즉시 물리치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죄에 대한 대항입니다.
이렇게 대항할 때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이 무엇이냐 하면 죄는 신자의 영혼에 대해 지배력을 가질 수가 없다, 실지로 지배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영혼에 대해 지배력을 갖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부당하다 이것은, 혹시 갖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부당한 것이다 불법으로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죄가 내 영혼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리고 강력하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경건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꽉 차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우리 몸에 이런 데를 무엇으로 꽉 찌릅니다. 그러면 금방 기다릴 필요도 없이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온 몸에 피가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쿡 찌르면 피가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경건이 가득 차 있어서 죄가 유혹할 때 즉각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결국은 이 경건의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해야 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말씀의 은혜를 붙들고, 그리고 존 오웬이 친히 말하기를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생각하지 못한 오늘 하루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회개의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 문제로 들어갑니다.
문제1. 신자에 대한 죄의 능력은 안과 바깥 두 가지 방향으로 역사합니다.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밖에서는 상황으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면서 성적으로는 거의 욕심이 거의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둘 다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물질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는데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각각 다르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을 쓰러트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면 죄를 지어서라도 부당한 방식으로 그릇된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됩니다. 상황이 주어져야 됩니다. 그런 상황으로 밖에서 안으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안에 이미 명예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감투 쓰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경건으로 많이 깎여지고 약화되지를 않고 경건이 약화되어서 이것이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완충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밖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안에 있는 명예욕이 극도에 달했을 때 딱 만나게 되면 즉각적인 악의 선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명예욕을 성취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돈에다 도입하든지 성에다가 도입하든지 무엇에 도입하더라도 원리는 다 똑같습니다.
문제2. 유혹이 신자의 생각 안에 힘을 가할 때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은 무엇입니까?
자, 잘 보십시오. 이것(악한 생각이 빈번하게 떠오름)은 생각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밑에 것(악한 생각이 마음에 착상됨)은 생각이 아니라 정(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욕구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의지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지와 정서는 거의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선 악한 유혹이 힘을 가한다고 했는데 힘을 가한다는 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술을 좋아한다고 그럴 때 술을 많이 먹고 싶은 욕구가 아주 강한 때도 있고 살짝 있는 때도 있을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이 강의를 들으면서 많이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조금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또 똑같은 사람인데도 어느 날은 너무 보고 싶고 또 어느 날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렇게 욕망의 크기가 각기 다른데, 힘을 가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욕망의 크기가 매우 커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생각이 빈번하게 떠오릅니다. 이것은 이미 벌써 정서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좋으니까 자꾸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먹으러 가고 싶다고 할 때는 결국 먹고 싶은 특정한 음식이 계속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악한 생각이 빈번하게 떠오릅니다. 이게 죄의 생각에 대한 공격입니다. 지성에 대한 공격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에 착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착상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이것(着床)입니다. 착상(着想)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고, 이것(着床)은 안착되는 것입니다. 착상(着床)이 되는 것입니다. 엄마의 태가 있습니다. 여기에 수정난이 딱 들어가게 됩니다. 수정난이 들어가서 착상이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라서 아기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생명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이 생각으로만 돌 때에는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체는 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착상이 된다는 것은 머리위에다가 집을 짓는 것입니다. 거기에 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이 생각과 마음이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악한 생각이 마음의 사랑을 받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유혹받을 때 나타나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두 현상입니다. 어떤 죄도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3 죄가 아무리 강력하게 신자를 유혹하며, 신자의 생각 속에 힘을 가한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뭐냐 하면 대항입니다. 의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항하는 것이냐 다음 시간에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는데 좀 보겠습니다. “감염병과의 싸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업무 중에 듣고 있는데 나중에 다시보기 할 수 있나요?” 예, 다시보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광고이론에서 본 것 같아요. 질 낮고 형편없는 광고라도 반복적으로 보면 세뇌가 된다고 합니다.” 예, 그게 광고업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6개월이라고 봅니다. 두통에는 아무 것, 두통에는 무엇, 두통엔 무엇, 그리고 하면 6개월만 되면, 두통 그러면 ‘아, 그거’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게 광고비를 한 20년 전 기준으로 한 20억을 쓰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상황으로 성경을 덮어버림” 예, 맞습니다. “은혜 가운데 있던 신자가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유혹 속에 노출되다보니 미끄러지는 자신을 자각하고 신자로서 정체성조차 포기해버리는 지체들을 어떻게 격려해 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냐고 물어보십시오.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세상과 휩쓸려 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법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절기에 관한 책이 나온 것을 축하드립니다.” 절기설교 나온 것을 아셨나봅니다. “종교의 역사를 보거나 신대륙의 역사를 볼 때 악을 저질렀는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죄악사이지요. 그래서 신대륙을 점령한 사람들이 원주민들 속에 과연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영혼이 있다고 보지를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악한 행위들을. 전부 다 회개해야 될 죄들이지요. 예, 오늘 40분에 강의를 끝냈습니다. 우리 은혜 안에서 한 주간 또 사시다가 다음 주에 또 공과공부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