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먼저 사랑하셨기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녹취자: 조경훈
오늘은 8장을 두 번에 나눠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제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서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질서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당연히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이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과거의 결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용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림에 보면 한 사람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전에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사랑해서는 안 될 것들을 사랑한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2세기의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Quinrus Septirnius Florens Tertullianus, 160-220)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역사적으로 그분은 오류와 진리를 한꺼번에 쏟아낸 활화산 같은 존재였습니다. 나중에 몬타누스주의자가 되기는 하지만 굉장히 용감한 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던 요지는 이것입니다.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나님께 자신을 다 바쳐도 결국 자신 안에 죄성이 있고 그 죄는 결국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을 날마다 알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처벌하고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면 잘못된 율법적인 생각 때문에 회개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회개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회개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도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성과 관련이 된 것일 것입니다. 이 깨달음과 함께 당연히 뉘우침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서와 관련이 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돌이킴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의지와 관련이 된 것입니다. 이것 전체를 합쳐서 우리들이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인격적인 변화를 통해서 자기를 움직이게 하고 있는 자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괄적입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할 때에도 똑같은 순서를 밟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 대신에 속는 것입니다. 속임을 당하고 잘못 감동받고 그릇되게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짓는 과정이고 전자는 회개하는 과정입니다. 죄의 열매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소외되어서 외롭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하나님이 친밀하지 않고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무한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반대로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과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 자녀라는 정체성을 회복하게 만들어주고, 비록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다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소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아주 친밀함을 느끼게 되고 낯섦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거리감 대신에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개는 결국 회개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한때 정신을 집중해서 듣던 음악이 있었는데 케빈 컨(Kevin Kern)의 리턴 투 러브(Return to Love) 라는 노래가 있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들어보세요. 큰 깊이는 없지만 글 쓰고 생각하기에 좋은 음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입니다. 회개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 회개가 복음적인 회개인 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회개를 거의 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마음이 많이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명료하지 않습니까?
들어오는 사연들을 보겠습니다. “구역공과는 유투브에 올려 줄 수 없나요?” 잘 모르겠지만 부목사님들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열린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내부적인 것인데 올려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문학적인 사연이 들어왔네요. 김현진 자매님. “하나님의 사랑으로 꽃놀이 할래요.” 굉장히 여유가 있으시네요. “교회의 마당이 그립습니다.” 목련은 아직 안 피었지만 조금 기다리시면 나올 겁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연을 주신 김현진 씨께 책 한 권 보내드리겠습니다.
문제 2) 사랑의 정서가 낳은 또 다른 정서는 무엇입니까? 특별히 거룩한 분노는 다른 분노와 어떻게 구별 됩니까?
질문의 의도는 사랑하게 되면 또 다른 반대편에 어떤 정서가 생겨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대게 드라마나 소설의 제목을 보면 전쟁과 평화,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두움 이런 식으로 대조되어서 나옵니다. 그와 똑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생겨날 수 없는 또 다른 정서는 무엇일까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거룩한 분노와 바리새적인 분노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남에게 보이도록 의를 행함으로써 좋은 평판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는 사람은 굳이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데 그런 방식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바리새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씩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될지는 모르지만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하지도 말고 분노하지도 말자.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만큼 하나님께 흔들리는 사람이 되자.
우리의 마음이 사람 때문에 출렁거리느라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반성은 뒷전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 만큼 인간은 허한 것을 자꾸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면서 분노합니다. 결국 자신이 우월감을 느끼는 심리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내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의로는 흠이 없는 자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고 자랑을 했는데, 다 옛사람 시절의 자랑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까 그것은 전부 다 배설물과 같다. 번역을 우아하게 해서 그렇지 그것은 다 똥이다. 그리고 진짜 아름답고 고상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거룩한 분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될 것은 사람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설교를 해 오면서 한 가지 깊이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혈기가 충천할 그때에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었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설교할 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에 대한 미운 감정을 마음속에 가지고 설교할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모두 회개했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 자신이 예수인 것처럼 혼돈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그 사랑이 진짜 그 영혼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심히 불쌍히 여기시니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라는 이 말씀이 사실 열린교회를 개척하게 한 저를 움직인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민망히 여기셨다고 나오는데 사실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희랍어로 에스프랑크니스데(εσπλαγχνισθη) 라는 단어인데 창자가 떨리는 것을 말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창자가 떨린다는 표현이 예레미야에서도 나옵니다. 그것은 더이상 깊이 들어갈 수 없는 인간 영혼의 가장 내밀한 좌소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의 표현으로서 그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최고로 강력한 표현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혹은 저미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입니다. 저민다는 말 아십니까? 생선회를 잘라서 요렇게 넘기고 또 하나를 저밉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아주 얇게 고기처럼 칼로 저며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군다나 그 사이사이에 소금을 뿌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통증을 느끼기 전에 죽어버리겠지만 그 통증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의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거기에 백성들이 나와 있었는데 모두 다 한결같이 예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것처럼 당연히 말씀을 들으러 왔지만 어제 저녁까지 나쁜 짓 하다가 온 놈도 있고 수배를 받은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들이 다 섞였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시면서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에 대한 연민인 것이고 그러면서도 죄에 대한 분노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그 이름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픔과 분노가 있습니다. 그 분노는 누구를 미워하기 위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구하게 하고 자신을 더 돌아보게 하는 종류의 분노인 것입니다.
사연 들어온 것 한 번 보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너는 매일 회개하느냐? 회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신앙에 부딪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합리화에 부딪치는 신앙을 회개함으로 사랑이 회복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소녀 집사님에게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jy님의 질문입니다. “자기 사랑에 이글거리며 사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거룩한 분노를 표출할 만한 주제가 못 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정확하게 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사랑하면 사랑하고 안 사랑하면 원수고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다. 만나면 좋은 친구도 있지만 만나면 좋은 친구인데 안 만나도 괜찮은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 만나면 보고 싶어서 너무 그리운 친구도 있습니다. 날 보러 오면 도망가 버리고 싶은 친구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좋아함의 차이 때문입니다.
참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만 참사랑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먼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절대자이십니다. 다신교의 문제가 이런 것인데 만약에 이러한 존재가 하나 더 있다고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또 다른 신 둘이 공존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절대자 역할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문제는 절대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절대자는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둘이면 철학적으로 둘 중에 아무도 Nessessary하지 않습니다. 꼭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논리적으로도 하나님은 한 분이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1번입니다.
2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한 분이 계시다고 칩시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왜 참사랑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드리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하나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향해 어떻게 이것들이 질서 지워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이렇지 않다면 세계는 건물 부시고 막 쏟아놓은 것 같은 무질서한 건축폐기물과 같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자연도 인간도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그것이 아름다움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미학의 이야기를 좀 하자면 누구라고는 얘기를 안 드리겠는데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아는 사람입니다. 누드사진을 찍었는데 건물이 다 부서지고 쓰레기도 버려진 아주 지저분한 곳에 젊은 여자가 옷을 다 벗고 누워서 마치 버려다 놓은 시신처럼 쓰러져 있는 것을 찍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생각을 한 것이 너무 흉측해 보기 싫어! 그런 생각보다는 이게 뭘까 일부러 가라고 그래도 안 갈 아주 더러운 건축폐기물과 쓰레기 더미가 가득 있는 그곳에 젊은 여자가 누워서 누드사진을 찍은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사진은 그 사진을 높이 평가합니다. 아주 의미가 깊다고 평가를 합니다. 미학적으로 보면 거기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과 대비되는 특별한 의미나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원래 있는 아주 균형 잡힌 모든 아름다움에 기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완전한 대상과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이 있는데 늘 그렇게 생각하다가 다른 쪽으로 아름다운 것을 표현해 보려고 하는 불규칙성들이 그 규칙성 때문에 특이하게 보이는 순간의 쾌락을 거기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있다면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있다면 이 안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이렇게 질서 지워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수많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삽니다. 이런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모두 하나로 사랑이 향해야지만 이 안에 하나의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쉼과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데 그것을 가리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다음 문제를 들어가기 전에 사연을 보냈습니다. “죄에 대한 분노와 죄인에 대한 연민을 분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 몸처럼 달라붙어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면서도...” 그리고 죽 적어 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분노와 죄인에 대한 연민이 이상적인데 실질적으로 보면 죄가 여기에 있고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죄와 사람이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죄가 이 사람한테 있으니까 미워하는데 죄도 미워하고 죄인도 미워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죄는 안 미워하는데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떻게 죄지은 사람과 그 사람의 죄가 분리된 채로 하나는 불쌍히 여기고 하나는 분노하면서 다룰 수 있느냐고 말을 하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용서 안 해준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게 있습니까? 물으면 저는 아직도 있습니다. 누구한테 어떻게 했는데 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면 처벌은 안 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냥 의식 속에 살아있는 것이지 진짜 자기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n번 방처럼 누가 끔찍한 죄를 지었으면 그냥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저 사람들은 정말 큰 벌을 받는 것일 거야. 굳이 저 사람의 인신을 구속하고 형벌을 때리고 종신형에 처하고 할 필요까지 있을까? 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의 의미는 아주 심오한 것입니다. 정말 심오한 것입니다. 몇 시간을 설명을 해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은 자기의 몸을 학대하고 전혀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을 해야 될 때 뭐 만들고 일하면서 먹을 때 안 먹고 잘 때 안자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몸이라는 것이 단순히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늘 즐겨 드는 비유가 있습니다. 비염을 달고 사는데 굉장히 꽃가루 날리는 계절이 오면 콧물이 나오고 아주 힘듭니다. 그런데 그 코를 도려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무좀 때문에 고생한다고 전기톱으로 발가락을 깨끗이 잘라버리고 무좀균 없는 깨끗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가슴이 저미도록 아픕니다. 그 사람은 아프게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가슴이 아파보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에 깊이를 잘 모릅니다.
권형희님. “말씀을 통해 거룩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들다가도 누군가 말과 행동에 제 마음이 스크래치 당하는 순간 욱하는 복능에 충실한 나로 회귀합니다.” 자기가 많이 살아있어서 그럽니다. 자기가 충만하게 살아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설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은 자기합리화래요. 회개는 그런 자신의 것을 예리한 말씀 앞에서 뽑아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정말 아이디만큼 문학적이시네요. 문학적이신 분에게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한 권 보내드리겠습니다.
중요한 내용이 들어왔습니다. “매일 회개만 하라고 하시니까 우울하고 주눅이 듭니다. 잘 살려 하는데 매일 잘 못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해야 힘을 낼 수 있을까요? 경건생활만으로 반드시 힘이 나는 것도 아니고...(눈물표시)”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잘 살려 한다는 것 아닐까요? 진짜 막 사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잘 사는 게 뭘까요? 맨날 회개만 하고 하시니까. 하셨는데 저를 두고 하시는 말은 아니겠지요? 회개하라고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잘못한 게 있는 아이들이 남한테 야단을 쳐도 자기가 놀랍게 해석을 해서 듣습니다. 주눅 드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요즘 공과 책을 계속 쓰고 있는데 쓰다가 저녁마다 기도도 많이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중에 한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멀리 떠나고 나면 느껴지는 게 소외감입니다. 여러분 소외감 아시죠? 소풍을 갔는데 모든 아이들이 어울리면서 선생님과 같이 온 부모님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서 먹으며 너무 즐거워하는데 자신은 같이 밥을 먹어 줄 사람도 없고 도시락은 가져왔는데 맛있는 도시락도 아니고 찾아갈 친구도 없고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따라온 부모도 없습니다. 자신 혼자 흩어진 집합장소에 남아있는 그 감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에게는 소풍이 소풍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태풍일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소외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런 것을 주목했던 사람이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소외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어 보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죽음에 이르는 병’ 입니다. 그가 단정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 진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끔찍한 죄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절망입니다. 희망을 상실하는 것이 결국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본 것입니다.
저는 한때 무신론자이던 시절이었을 때 진짜 좋아하던 작가 중 한 사람이 염세주의철학자인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 1788-1860)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많은 반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비관하면서 술이나 담배에 찌들어서 살아가는 그런 종류의 염세주의자를 염세주의자라고 한다면 쇼펜하우어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쇼펜하우어를 무지하게 존경하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톨스토이라는 인물이었고 또 한 사람은 기존 철학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현대사상을 불꽃처럼 일어나게 만들었던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성경에도 굉장히 친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독일에 에카하르트나 수소 같은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글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면서 초월세계에 대한 관심도 많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고 물으면 쇼펜하우어나 그의 사상을 따랐던 니체 같은 사람은 ‘의지’ 라고 딱 하나만을 얘기했습니다. 결국 그것입니다. 인간이 무한한 외로움을 느끼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마지막에 의지로 표출되어서 자신을 꽉 붙들고 살아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주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 절대적인 소외감과 인간이 우주에 홀로 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 속에서 어디에도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당신의 품 안에 품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세계관이고 인생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소외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해결하는 실제적인 방법은 마음 깊은 곳에서 짧은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고, 단어를 연결하여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이어서 문장을 만든 다음에 그것을 마음의 우물에 깊이 담그고 그것을 천천히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자기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단어와 언어가 형성이 되고 구체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면서 우리의 마음에 막을 통과하게 됩니다.
북이 있으면 툭 치면 북이 울릴 것입니다. 이 언어가 밑에서 길어 올려 지면서 이것들이 우리의 마음의 막을 움직입니다. 그러면서 마른 땅과 같았던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예전에 없던 새로운 정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정동은 우리의 기도의 언어를 더 많이 길어오려 줍니다. 올려 지면 그것들이 더 밑으로 내려가서 또 다른 언어의 작용을 불러옵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때가 두 번 있습니다. 너무 사랑할 때와 너무 열 받았을 때입니다. 밤새도록 그 언어가 떠올라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되지 말고 신령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어서 그것이 기도로 번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자꾸 지적인 데서만 답을 찾지 말고 깨달은 작은 부분이라도 기도 속으로 들어가시는 훈련을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힘을 주시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각을 주시고 또 그대로 있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신기한 힘을 우리 안에 주십니다. 그것이 경건의 신비입니다.
문제 3)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쇼펜하우어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를 모르겠는데 너무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리스도인이 됐으니까 그분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제가 만난 철학자 중에 가장 솔직한 사람이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직하게 자신에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다보면서도 무분별하게 모든 도덕세계를 파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라고 하는 고전철학에서의 고민들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의 사랑을 움직이는 것은 자기와 종족 보존의 본능이다. 한 남자가 건강한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에게서 건강한 후손을 얻을 수 있다는 종족 보존의 자기애적 본능이 작용한 것이다.’ 그 당시에 책을 쓸 때 이것의 출처를 찾고 싶어서 난리를 쳤는데 못 찾았습니다. 읽었던 책 이름은 ‘사랑과 고뇌에 대하여’ 라는 책이었습니다. 아마 작은 글들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었던 것인데 그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의 자기애라고 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 같아도 결국 마지막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목적애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의도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자신이 유익을 얻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재귀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사랑하다가 헤어지고 나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라고 말하는데 그게 옛날에 사랑할 때의 본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좋으려고 사랑을 한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사랑의 동기는 어떤 것이어야 되겠습니까? 잘못된 동기에서의 사랑은 육신적인 동기입니다. 사고나 모든 동기가 육신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만족과 마지막에 막연한 의타심이 동기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우체국장으로 퇴사하기까지 팔 년 정도 공무원을 했는데 지금보다 그때가 훨씬 부정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공무원 부정과 범죄들이 아직까지도 있지만, 예전에는 밑에서부터 끝에까지 전부 다 부정이 너무 심했습니다. 젊은 나이였지만 있으면서 그런 것들이 관여될 수 있는 보직들을 스스로 회피했습니다. 왜 보직을 맡아서 똑바로 하지 그랬냐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나에게는 너무 무거운 무게였기 때문에 이권과 관계없는 곳에서 보람을 찾아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제가 많은 뇌물사건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뇌물을 줄 때는 그 사람이 예뻐서 준 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하면서 뇌물을 줍니다. 뇌물을 주고받는 세계에서는 처음부터 의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뇌물을 바칠 때는 위에서 돈다발을 툭 하고 아랫사람에게 던져주는 뇌물을 없습니다. 누가 받겠습니까? 거지예요? 밑에 납작 엎드려서 음식점에 가도 무릎 꿇고 앉아서 상감마마에게 바치듯이 바칩니다. 받는 사람은 단순히 돈이 오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자신에게 종속되어있다. 아니면 오고가는 뇌물 속에 우리의 우정은 깊어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관계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자기 이익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충돌하는 순간에 다 까발려지는 것입니다. 의리라고 하는 것은 그 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동기에서 사랑하게 될 때 결국 그것은 자기사랑의 확장이기 때문에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하는 사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설명한 데로 단 하나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사랑인 경우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한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을 가지고 계시고 나도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자립적인 한 주체로서 주체 대 주체가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등한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안에 있어서 주체인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신병적인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 개척할 때 살던 동네에 가정폭력이 심각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굉장히 젠틀한데, 술만 먹으면 폭력적인 남편으로 변하는데 바위를 집어서 던질 정도로 수시로 때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냐고 동네사람들이 부인에게 물으니까 그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남편이 잘 해줄 때는 무지하게 잘 대해줍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채팅방에 들어오는 사연을 보겠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기대를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고 성화됐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지 말아보세요.” 맞습니다. 사람은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보람을 어떤 사람으로부터 뭘 받는 데서 찾으면 의존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의 의미를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부유함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진리와 사랑의 힘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경아님.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나에게 한 것이 화가 나서인 것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반대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도 그 사랑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애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스마트한 학생입니다. 정확하게 가르쳐 준 것을 이해했습니다.
김진미님.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상급을 쫓아서 행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이기심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참되면 그 사랑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잘 해 준 것이 기억 안 납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에 대상에 대해서 자기가 행한 좋은 일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 대해준 내가 대견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불쌍한 그 사람이 행복해진 것 때문에 내가 더 행복한 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급이야기도 너무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에 가서 우리들이 각자 살아간 삶에 대해서 상급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동기가 된다면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상급, 그 상급을 받을 나 둘밖에 없고 인생을 달려간다면 그게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일까요?
이번에 쓴 글 속에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지금도 번영신학이라고 해서 예수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 잘 믿는 사람은 부자 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스테이지 리 님. “목사님께서 말씀하는 정도의 성화를 한 사람이 생각보다 적은 게 현실. 그러니 다들 자책하지 마세요” 아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말한 정도의 성화에 도달한 사람보고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면 아마 펄쩍 뛰며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얘기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리들이 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도달했다고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런 자랑에 관심이 없습니다. 도달하지 못했다고 낙심하며 자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견디기 때문입니다. 통찰력이 있으신 백스테이지 리 님께 책 한 권 보내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가 난리입니다. 이탈리아에서 들어 온 한 무신론자인 의사의 글 한 편이 저의 마음을 많이 울렸습니다. 여러분에게 함께 보여드리는 것으로 구역공부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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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저들을 도울 수 있다면 진짜 감사하겠습니다. 세상에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는데 저렇게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함께 죽어가는 의료진들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고 모임을 끝내기 전에 구역장님들에게 단단히 일러 드립니다. 공과공부는 제가 가르쳤지만 구역공부는 하셔야 합니다. 어플로 한꺼번에 구역식구들 모두 얼굴 보면서 나누시면서 영적인 교통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저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주시옵소서. 저렇게 죽음에 직면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많은 사람에게 평화를 주시고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복락을 주옵소서. 무엇이든지 우리가 저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사람이 이 현실에서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게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