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음을 다하여(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
녹취자: 조경훈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구역 공부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 유종의 미를 거두면 새로운 공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마지막 장 3번까지 풀었고 오늘은 4번 문제부터 풀 차례입니다. 우리 모두 같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4)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마음을 빼앗는 시도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나타납니까?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경계심을 늦춰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조 목적과 정반대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죄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상세하게 설명해 드려 보겠습니다. ‘도둑맞은 마음’이라고 표제가 붙었는데 사람들이 아무리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처음에 그런 죄를 지으려는 유혹이 왔을 때 응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항상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가 항상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좋아하는 본성이 두 가지가 같이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인데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지 살지 못합니다. 둘 중에 어떤 것을 강력하게 이끌어내느냐에 따라서 신자의 삶은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여기 보면 죄가 속삭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음 공과에서도 배우겠지만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게 만들어주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염려는 죄에 대한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 경계심을 늦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던 온전한 사랑의 마음을 망가지게 하는 것이 모두 지성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마음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확장이 돼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성을 지키는 것과 같은 삶인데 여기 보면 항복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요구하는 것은 마음 전체를 빼앗아서 완전히 죄가 지배하는 상태가 되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죄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원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깨어있다.’라고 하는 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작용들이 근원이 어디인지 마음이 계속해서 발전할 때에 마지막에 어디로 향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사실 지식이 없으면 깨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설교에서 한 번 한 얘기입니다. 어느 해인데 잇몸에서 계속 피가 나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날 신문의 한 섹션의 한 면 전체에 잇몸 관리에 대한 어느 전문의의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었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잇몸에 염증이 생겨서 피가 나올 때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계속 삼켜서 우리의 체내로 흡수가 돼서 핏속으로 들어가면, 정수기의 물을 거르는 멤브레인인, 중요한 필터에 뜨물을 붓는 것처럼, 뜨물과 같은 고름을 멤브레인과 같은 기능을 하는 우리 몸의 신장을 통과하면서 기능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심장에까지 가서 심장의 질환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잇몸에서 흐르는 피가 신장, 심장 심지어 뇌에까지 영향을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다음 날 황급히 병원에 가서 제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치과의사 선생님이 우습다는 듯이 “목사님! 원래 그런 거예요. 모르셨어요?” 모르잖아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의사들이 요새 많이 하는 것이 통합진료입니다. 외과수술을 할 때 외과 의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부분에 있어서는 내과 의사가 모여서 여러 과의 의사가 함께 의논해서 수술에 관한 사항들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은 움직임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보십시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둘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첫째는 감각입니다. 보고 듣고 감각하는 것 그중에서도 시각이 제일 큰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 감각이 들어오면 그것들이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지 인상을 남깁니다. 강약의 차이도 있고 호불호의 차이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보이지는 않지만, 기억을 가지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미지네이션(imagenation) 입니다. 예를 들면 점심시간이 다가오는데 칼국수가 먹고 싶다. 그러면 칼국수가 냄새도 납니다. 말하자면 환치입니다. 너무 좋아하면 먹는 소리도 들립니다. 환청입니다. 더 심하면 눈앞에 음식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환상입니다. 이렇게 실물처럼 감각으로 본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상상의 작용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감각적인 사물과 관념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잠깐 들어왔지만 사라져가는 것들은 우리가 무관심하기 때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걸어오시면서 보도블록의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납니까? 별로 기억이 안 날 겁니다. 개수가 몇 개였는지 더더욱 기억이 안 날 겁니다. 어떤 의미 있는 것들은 마치 엄마의 자궁에 수정란이 착상하듯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마음에 자라는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근심 걱정 이런 것들로 연막을 피우고 집착을 가져오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점점 신뢰할 수 없게 만들고 죄에 대한 유혹이 좀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끔 만듭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은 도둑을 맞게 됩니다. 누구한테 도둑을 맞은 것입니까? 자기 자신한테 도둑맞은 것입니다. 내가 훔쳐 갔는데 내가 도둑맞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인간 정신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가져야 할 마음과 갖지 않아야 할 마음, 이 두 가지를 욕구하는 의욕이 우리 안에 공존하기 때문에 후자의 경우에 우리의 마음을 도둑맞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했을 때 모든 것이 내 마음인데 그중에 어느 것은 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내 것이 되어야 할 마음 그 기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지성에서 비롯되지만, 우리가 갖지 말아야 할 마음은 죄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도둑맞게 됩니다.
5번을 들어가기 전에 들어온 사연들을 보겠습니다. 달고나 커피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복습한 사람은 적은데 달고나 커피를 만든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지난주 공과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없는데 달고나 커피의 맛에 대해서는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습니다. 지난주는 노동절이어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근로자들이 많기 때문에 쉬었습니다.
[사연1] 목사님 감사합니다. 어떻게 인간의 지식이 사랑과 나눌 수 없는지에 대해서 지난주에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 기다리시면 강의 끝부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연2] 이한나씨. 지난주에 못 들어서 너무 기다렸습니다. 벡스테이지리님. 목사님.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건강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살면 사람들이 주위에서 싫증을 내지 않겠습니까? 아쉬울 때 죽어야지 좋다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사연3] 하나님. 성장반 성도입니다. 구역 공과를 처음 들어서 너무 좋습니다.
[목사님] 구역 공과를 처음 들어오신 분이시군요. 하나님께 지금 하는 공과 공부와 너무 관련이 있는 ‘성화와 기도’ 책을 드리겠습니다. yullin.org에 주소와 본인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당첨되셨던 분들은 안 올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연4] JLOVE님. 의사에게는 의학적 지식과 긍휼함이라는 치료 도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은혜와 진리가 도구가 되는 거군요.
[목사님] 예. 그렇습니다. 진리를 아는 차가운 지식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이 함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연5] 랄랄라님.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가난한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목사님] 그 마음 변하지 마시고, 갈무리해 놨다가 마음이 변할 때마다 한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문제5)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합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죄인들은 하나님을 못 만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환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사실 본인 자신들에게 물어보면 지금보다 환경이 훨씬 어려웠을 때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또 핑계 댈 게 어떤 게 있겠습니까? 시간이 없다. 시간이 아무리 없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합니다.
오래전의 일인데 부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굉장히 길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바쁜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목회에 시간을 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쁜 일이 아니고 좋은 일이어서 대견하다. 잘했다. 그랬는데 그날 밤에 심야극장에서 두 부부가 만났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결국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욕구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하고 싶은 것은 결국 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에서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없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입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대해서 다루는 것입니다.
칼빈도 말하길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인간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인간 자신을 연구함으로써 인간 자신을 알아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인간의 영혼이 무언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게 되면 인간에 대한 지식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사연6] 몇 개 사연을 더 보겠습니다. haehyun byun님. 차가운 지식과 뜨거운 마음. 아멘.
[목사님] 더 시적으로 묘사하자면 하나님과 연애하는 지성. 그것도 안 어울리네요. 하나님을 열애하는 지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고의 지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욕구가 모자라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코로나 자가격리 12일째 분이신 박성남님. 이틀만 참으시면 되겠습니다. 위로드립니다.
그러면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그림이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여기에 죄인, 세리가 나오는데 죄인, 세리만 있는 것은 아니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성경이 말하지만, 죄만 많으면 은혜가 많지 않습니다. 죄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자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할 때 그것을 이기게 해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 자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죄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사용이 됩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성전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바리새인이 자기를 아주 뽐내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고 하는 기도내용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 들으라고 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한 기도를 주위의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자기의 엄격한 도덕 생활에 대해서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못 만나고 돌아갑니다. 세리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도덕적으로 비교를 하자면 절대적으로 세리가 부도덕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 세리들은 나라에서 월급을 받지 않고 특히 피지배지 출신의 세리를 뽑고 감독은 로마의 관리들이 하였습니다. 일정한 지역에 대해서 할당금을 매기고 나머지는 세리가 가져가서 생활을 하는 형태였습니다. 그것은 세금을 못 걷으면 내 생활도 못 하기 때문에 세리를 압박하는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세금징수를 압박하는 수단은 되었겠지만 많은 부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조선 시대의 탐관오리들처럼 가렴주구처럼 하는 착취가 이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로마에 빌붙어서 더군다나 관리도 아니고 세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남자로서 창기와 동등한 수준으로 보았습니다. 창기들을 조나(זנה) 라고 했는데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몽골 시대 때 일이기는 하지만 오랑캐에게 끌려가서 노리개 감으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고 해서 환향녀라는 비하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런 정서를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무시, 선민의식 등과 결부되면서 그 여자들을 무시하고 천대했듯이 동급으로 세리들을 본 것입니다. 여자로서 죄인의 대표는 창기이고 남자로서 죄인의 대표는 세리라고 여겨질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세리가 하나님 앞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는 훨씬 더 열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앞의 바리새인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 이 죄인 안에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간절한 갈망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세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내려간 것입니다.
그 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어떤 의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혜택입니다. 그것 때문에 의롭다고 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작용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떨 때는 작은 어려움이 생겼는데도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교회를 찾아서 울며 기도하고 싶어지고 어떤 때는 더 큰 일을 만났는데도 마음이 강퍅해지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마음까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셨기 때문에 내 마음이 강퍅하지 않으냐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자유로운 작용과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 사이에 일체의 모순이 없습니다.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받는 자가 하나님을 더욱더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번 맛보면 마치 과자에 굶주린 아이가 더 많은 과자를 먹고 싶어 하듯이 또 다른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이 죄인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주님을 간절히 찾았을 때 원하는 게 무엇일까요? 세리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원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동족들이 인간으로 취급도 안 합니다. 거의 창녀와 같은 수준으로 여김을 받습니다. 유일한 위로라면 동족들의 돈을 뜯어내서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삶이 너무 헛되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나님. 나는 정말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그가 원하는 것이 뭐였겠느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행복이 있는 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갈망했던 바입니다.
[사연7] 댓글 좀 보겠습니다. 한덕경님. 갈망하는 것만큼 은혜를 주시는데 갈망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니 어디부터가 나인지요?
[목사님] 다 자기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칩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인가요? 자기는 하나님을 떠났다고 했지만 거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너 정말 혼날래? 이런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나 자신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은혜를 받는 나도 나요. 은혜를 안 받으려고 하는 나도 나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도 나요. 갈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나입니다.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디서부터가 나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 자신입니다. 그러면 마치 자신 안에 자신이 여럿 있는 것 같은 현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이렇게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제일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통일성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찢겨 나와서 자기와 자신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행복해지기보다는 불행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사연8] 김가희 님이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너무 괴롭습니다.
[목사님]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김가희 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그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줬다고 칩시다. 그러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겪는 괴로운 일들은 형태를 바꿔서 당신의 인생에서 또 일어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너무 괴로운 데 도대체 무엇이 나를 괴롭게 하고 나는 왜 괴로워하는가? 이 괴로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공부하셔야 합니다. 김가희 님께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읽으시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사연9] 김현진 님. 삶과 현실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감
[목사님] 공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실감입니다. 사랑에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처럼 사랑해서 후회하지 않을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공허함을 없애는 비결입니다. 가치 있는 삶을 확신하며 살지 못할 때 거기서 공허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 선택된 가치일 경우에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언젠가는 공허를 느끼게 됩니다.
[사연10] 홍성욱님. 공의와 의로 빛나 열국이 성도를 찾아오는 것으로 지난 강의를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성경의 증언은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까요? 최권능 목사님처럼 ‘예수천당 불신지옥’라고 피켓을 들고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쳐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것은 그 시대의 문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소망이 있다. 라고 하는 절절한 구령의 열정은 물려받아야 하겠지만 형태를 똑같이 물려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선포가 존재의 울림이 있고 말의 울림이 있습니다. 존재의 울림은 그 사람이 거기 있음으로써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인격과 삶의 방식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하는 울림입니다. 말의 울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희랍어 성경에 보면 ‘아카이로스 유카이로스’ 라고 나오는데 ‘때가 없든 때이든지 좋은 때이든지’이라는 뜻인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좋다고 생각되는 상황이나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나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들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오니까 존재의 울림과 말의 울림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연11] 오은혜 님. 형편없이 산 사람. 저도 진실하게 회개할 수 있는지요? 회개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문제로 너무 심각합니다.
[목사님]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의 가치를 하나님 앞에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은혜 님도 공과 교제 ‘염려에 관하여’ 책을 받으셨을 건데 서문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엄숙하도록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이유로 해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이번에도 어느 교회에서 훈련한다고 하면서 고통을 주고 심지어는 인분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인지 조사를 더 해 봐야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을 형편없이 보고 인간을 멸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 자신으로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때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인간에게 은혜를 주셔서 형편없는 사람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심으로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자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이고 자기가 약했던 것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고 기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편없이 산 사람이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정말 새사람이 되실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타 교회 분이시군요. 오은혜 님에게 마지막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책이 좀 어려운데 이 책을 되게 행복하게 썼습니다. 어거스틴이 남긴 3부작의 책이 있는데 모두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3부작이 첫째는 고백록이고 둘째는 삼위일체이고 셋째가 신국록입니다. 고백록은 자아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신국록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책인데 이 책을 읽으신 어느 분이 갓피플 닷컴에 글을 올렸는데 그분의 이야기가 이런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어려운 책은 처음 읽어본다. 나는 어떤 책이든지 읽으면 책의 내용이 기억에 남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 책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라면서 이 책에 대한 평가를 썼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대신에 짧으니까 오은혜 님이 꼭 읽어보시고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어려운 책이지만 짤막짤막하게 돼 있으니까 기도하시면서 읽으신다면 좋으실 것 같습니다. 마지막 선물 드리겠습니다.
[사연12] 강순구님! 멀리 시드니에서 시청하시는군요.
[사연13] 조셉신님. 청년의 때에는 마음을 드린 것만큼 시간도 드렸는데 나이가 들수록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여 마음을 드리기가 어려워지고 기도와 섬김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현실과 상관없이 마음을 드리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목사님] 첫 번째는 나이가 들면 사회에서도 지위가 좀 높아지고 책임지는 일도 많아지게 해결해야 할 일들도 굉장히 많아집니다. 자기가 관심을 가져야 할 폭도 굉장히 넓어지게 됩니다. 직원 때는 자기 일이나 잘하면 끝나는데 과장이 되고 나면 여러 직원을 챙겨야 하고 사장이 되고 나면 경영부터 국제정세까지 마음을 써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기력이 없어집니다. 젊었을 때만큼 많은 시간을 활용하지 못합니다.
현실과 상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마 이해하실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금식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제 금식기도 경험을 보면 저는 금식하면 기도를 잘 못합니다. 제 경험에서는 6~8시간 정도를 기도하는데 나머지 시간은 너무 기운이 없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냥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물드는 것입니다. 오늘 신요셉 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에 마음을 드리기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드리는 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진짜인지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지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에게 느껴지시는지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거리감, 낯섦이 있는지 한번 느껴보시라는 것입니다. 현실도 하나님이 주신 현실인데 이해하시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내 마음이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때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6)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과 뜻을 다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에서 뜻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디아노이아(διἀνοια) 라고 하는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그것은 지성에 속하는 것인데 지적인 기능 혹은 역할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당연히 목숨도 드립니다. 마음을 다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호동왕자와 낭랑 공주를 보면 왕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조국도 버리지 않습니까? 버릴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자신의 생각의 기능이 고정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 드린 사람이 목숨과 뜻을 드리는 것입니다. 목숨이 따로 있고 뜻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
마음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마음도 영혼의 기능이지만 실제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중범죄에 빠지는 사람들은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이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밀어닥치는데도 요동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의해서 전폭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영향을 받으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안개가 잔뜩 끼었을 때 적군이 침투하기가 너무 좋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설명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음이 먼저 나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아끼고 남겨두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랑이 되게끔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그러니까 자기가 굉장히 큰 손해를 봐야지만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실제 어떤 유익을 얻으시는 것이겠습니까? 그 정도의 존재라면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행복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행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도 나오고 가슴 아파하신다고도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한 화법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행복하시기만 하신 분인데 이 세상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느끼신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하고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당신의 행복을 조금도 침범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도 행복하셨고 세계가 창조된 뒤에도 행복하셨고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도 행복하셨고 인간이 구원받았을 때도 행복하셨고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모두 이루어져서 완성될 때에도 하나님은 행복하시고 그 나라가 영원히 이루어질 때도 항상 행복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행복했습니다. 죄를 짓고 불행해졌습니다. 불행한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를 돌이키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돌이키려면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계신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이 자신에게 전달이 돼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나의 행복이나 불행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도덕적인 교훈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세계에서는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는 모든 것들은 자신도 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시고 당신은 움직이지 않으시면서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고 당신은 영원하시면서 모든 것들을 시간 속에 사라지게 하십니다. 그 양면성이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행복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한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그분의 영원한 기쁨이기 때문에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처럼 느끼는 바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보면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셨는가를 느끼면서 내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프셨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아파지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제 좀 이해하시겠습니까?
문제로 돌아가서 그림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는데 이 본을 그리스도 예수가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전달해 준 것입니다. 그분이 진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앙은 구원을 통해서 받은 그 마음을 성화의 과정에서 보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빌립보서 2장 5절 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 마음을 품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럴 때만 인간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연12] 전혜완님 코로나 때문에 일을 못 하게 되었고 불안해하는 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목사님] 여러분. 코로나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왕관입니다. 바이러스가 왕관처럼 생겼다고 해서왕관, 크라운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사모하시니까 하늘에서 왕관을 받으실 것입니다.
[사연13] 하나님.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좋습니다. 주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그곳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좋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일 것입니다.
[사연14] 이경아님.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 삶은 내 것이 아니라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하나님의 뜻대로 내 모든 것을 맡길 때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네. 맞습니다. 항상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 보듯이 삼자적 관점에서 보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도 시간은 흘러가고 이것도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생각을 항상 하셔야 합니다. 진짜 잠시 머무는 세상이다. 라는 생각을 늘 하시면서 어떤 현실에 대해서 조급한 마음이나 욕망 같은 것들을 절제할 수 있게 되고 지혜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선물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달고나 만드는 법이었습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달고나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알기만 하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사랑과 지식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가르쳐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다 설명할 수 있지만, 최근에 저의 역작이 될 똑같은 책을 쓰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미셀러니를 쓰려고 합니다. 매일매일 교회를 나와서 묵상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너무 감동받은 한 구절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라틴어 원문으로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이 명언은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오늘날 여러분들이 질문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것들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탁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의 출처는 삼위일체라는 책의 제9권 12장 18절에 나옵니다. 한 절만으로 돼 있는 게 아니라 반 페이지, 한 페이지, 두 페이지씩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을 그냥 절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여러분들은 라틴어를 모르시겠지만 한 번 보면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욕구, 인식하고 싶은 사물을 동경하는 욕구는
그것을 일단 알고 나면 알려진 사물에 대한 사랑이 되고,
사랑스러운 자식을 안듯이 인식을 포옹하고 간수하며,
나아가 인식을 출산하는 주체에 그 인식을 결합시킨다.”
Idemque appetitus quo inhiatur rei cognoscendae
fit amor cognitae dum tenet atque amplectitur placitam prolemi,
id est notitiam gignentique coniungit.
(De Trinitate 9.12.18)
appetitus 는 욕구입니다. 단어 에피타이저 가 여기서 온 것입니다. quo는 관계대명사이고, inhiatur는 이끈다, rei는 사물, cognoscendae는 인식들 fit는 만든다 혹은 된다, amor는 사랑, cognitae는 인식, dum은 하는 동안에, tenet은 붙잡는다, atque는 그리고, amplectitur는 끌어안다, placitam은 사랑스럽다, prolemi은 자손, id est는 것처럼 또한 that is, notitiam은 지식, gignentique는 출산하는 자, coniungit는 연결하다, 라는 뜻입니다.
한글은 알아듣기 쉽게 의역을 많이 한 것인데 직역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하고 싶도록 이끌어주는 욕망은 사랑이 된다. 마치 사랑스러운 자식을 붙들고 끌어안는 것처럼 지식은 그것을 산출한 자와 결합시킨다.”라는 뜻입니다.
좀 어려운데 제가 설명을 하면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고 들어보십시오. 편하게 한글로 부드럽게 번역된 거로 읽어보겠습니다. 욕구는 정신적인 것도 들어가고 육체적인 것도 다 들어갑니다. 어거스틴이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도 사물이라고 표시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욕구를 갖게 되면 찾을 것 아니겠습니까? 찾으면 그 사물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그림이냐 하면 여기에 우리의 지성이 있는데 지성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어거스틴은 영혼을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기억을 통해서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인데 이 기억에서 뭘 알고자 하는 욕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욕구를 가지면 찾게 됩니다. 인식을 하게 됩니다. 이 지식은 곧바로 지성과 결합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을 때가 된 배부른 엄마가 있는데 아이를 낳았습니다. 당연히 아이를 끌어 앉고 자신과 딱 붙어있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성이 어떤 인식을 통해서 지식을 낳습니다. 욕구의 힘을 빌립니다. 이 지식이 발견되면 욕구하는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이 욕구가 지성에서 나와서 찾게 만듭니다. 지식을 갖게 되면 지식은 태어나자마자 지성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끌어안아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텍스트로 돌아가 보면, 인식하고 싶은 사물을 갈망하는 욕구는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알게 된 그 사물에 대한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은 사랑스러운 자식을 누가 낳았을 때 자식을 포옹하고 끌어 앉는 것처럼 지식을 끌어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식을 출산하는 주체인 지성에 자기가 새로 인식한 것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랑은 지식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알고자 하는 의욕도 자기가 알고 있는 데서 의욕이 나옵니다. 내가 전혀 그것이 없으면 욕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고 싶다고 하면 밥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배부르기 때문에 누리는 만족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욕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욕구는 이미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욕구가 있어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면 그 지식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욕구해서 발견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있는 지성에 지식이 사랑으로 딱 결합되는 모습이 엄마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붙들고 놓지 않고 끌어 앉는 것처럼 지성도 욕구를 통해 얻게 된 인식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묵상해 보면 이것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나 정욕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의 욕망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이상하게 그것이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지식은 놀라운 흥미를 가져 다 주고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불러일으켜 지는 것입니다.
요즘은 나이가 들면 그 자체가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욕망에 덜 휘둘리게 됩니다. 여러분도 다 있을 것인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됐고 차를 타고 다니는데 차가 거의 망가졌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새 차를 사고 싶으니까 차가 망가지기만 계속 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이 망가진 상태가 되면 짠순이 아내도 “그래. 그러면 당신이 차 하나 사도록 해. 비싼 건 안 돼. 2,000만 원에서 찾아봐. 아니면 종목을 지정해서 소나타로 해. 아반떼로 해.” 그렇게 합니다. 남편은 카탈로그를 뒤지면서 밤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무슨 색이 좋을까 수없이 후기를 읽어보고 그날 밤에는 그 차이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없습니다. 차를 사고자 하는 욕망은 점점 커지고 경제적인 형편이 매우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는 겁니다. 그러면 할부를 내느라고 고생을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이 끌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해당이 됩니다. 차를 사고 싶은 사람에게 차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차를 사고 싶은 욕구를 더 많이 느끼도록 만들어 줍니다. 매우 위험하다는 정보가 있어도 사고 싶은 욕구가 강하면 그런 것은 귀에 안 들어옵니다. 사는 쪽으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외제 차를 사고 싶으면 국산 차는 눈에도 안 들어오고 꼭 외제 차를 사고 싶은 것입니다. 여성분들은 공감을 덜 하실지 모르지만, 남성분들은 급 공감하실 것입니다. 자동차는 남성들에게는 영원히 갖고 싶어 하고 놀고 싶어 하는 비싼 장난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과 지식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믿음으로 승리하고 오늘 각자 집에서 달고나 커피를 만들면서 책거리를 하십시오. 다음 주에는 ‘염려에 관하여’ 새로운 세계로 여러분과 함께 여행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