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신화가 아니다
녹취자: 허혜숙
오늘도 오다가 보니까 파스텔 톤으로 파란 빛이 나면서 싹이 나던 나무들이 점점 녹색 빛으로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식물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짙푸르러져서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바로 우리가 성장해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면 나무가 성장하기에 햇빛과 물과 양분 같은 것들이 필요하듯이 우리 신앙도 필요한 지식,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이 공급될 때 성장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들이 이 강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좋은 열매를 맺는 신앙으로 자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 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 되는가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몇 시간에 걸쳐서 이미 우리는 인간이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는 죽음이라고 하는 이 질병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래서 그 죽음이라고 질병상태에서 오는 각종 증상, 인생의 악과 고통의 문제, 이런 것들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이제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 해서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 그 한 분이 오늘 우리를 그런 죽음이라는 질병에서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이신가 하는 이 문제를 우리들이 몇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이라는 것 자체도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 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 졌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성경은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어떤 편견에 차 있는 글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초에는 예수님을 두고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신 것에 대한 의미와 그 실제들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계신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분이셨는가? 그리고 그 분이 정확하게 어떤 분이셨으며 또 그 분의 이 지상에서의 생애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이 예수님의 실제 존재이고 행동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들이 자꾸 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장이 될 때마다 이것을 포장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해석적인 의도를 여기에 첨가를 시켜가지고 된 결과 예수님의 실제 존재와는 아주 거리가 멀고 아주 부풀려진 그런 사실들이 오늘날 성경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의 존재와 행동을 찾아내려면 하나하나 벗겨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그래서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는데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지상에 계실 때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주가 되셨느냐?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게 되었느냐? 라고 하는 많은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이런 주장들을 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다 알 수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부활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시대에 있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보면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니까 아, 이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이 분명 하구나’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믿게 되었고 그래서 제자들이 열심히 선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니까 그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를 이루었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 더 꼼꼼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문맥이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 본다면 이것은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나느냐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그러면 이 부활하신 사건 하나만 보고 제자들이 ‘아, 예수님은 메시아다.’라는 결론을 냈다는 가설인데 그러면 정말 이 부활하신 사건 하나만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려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이 그 생각 속에서 이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사상이 있었다면 메시아도 부활을 하는데 예수님도 부활했으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을 제자들이 갖게 된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에 유대인들의 문헌들을 다 분석해보면 이 사람들 사상 속에 메시아라는 사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메시아가 죽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그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이야기는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갖고 있는 사상 속에 메시아는 죽기만 하고 부활한다는 사상은 없는데 부활하셨으니까 예수님은 메시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입증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메시아가 되셨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메시아가 되신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 유대라는 껍질을 깨고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 맨 처음에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죄가 들어와 사망에 이르게 된 것처럼 또 예수님이 모든 구원 받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고 부활하셔서 그 사람들에게 여기에는 죄가 들어왔는데 여기에는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신 것은 유대민족이나 이스라엘 하나의 메시아가 아니라 전 세계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 메시아로 예수님께서 살아가셨고 구속을 이루셨는데 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유대 민족주의적인 메시아입니다. 유대 민족주의 적인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유대 민족의 부흥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면 그 메시아는 굉장히 초인적인 존재인데 그 메시아가 와서 죽고 부활한다는 사상은 없지만 죽기까지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아서 충성하는데 그렇게 섬기는 결과 유대민족이 다시 부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성한 나라가 되어서 주위 나라의 조공을 받으면서 강대국이 되었던 것처럼 메시아가 와서 지금은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짓밟히면서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을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이스라엘을 억누르는 무리들과 싸워서 국권을 쟁취하고 그 나라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강대국으로 만든다고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적인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것이 이렇게 예수님이 이런 사상하고는 전혀 다른 삶을 지상에서도 사셨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그러셨습니다. 그랬는데 그 예수님을 보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약에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단순히 부활한 사건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틀렸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셨던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맞았다라고 하는 가르침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유대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와서 지도자가 되어서 유대민족을 부흥시키고 강대국을 만들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있으니까 로마를 꺾지 않고는 그런 일을 이룰 수가 없으니까 로마를 꺾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건져내서 정말 부강한 나라 강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메시아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다분히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 즉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고 그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도 핏줄을 따라 타고 태어난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예수님에 의해서 내포 된 많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 여기에는 사람의 혈통이나 가문이나 피부색이나 나라의 경계나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영적 나라에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단순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게 되고 그 사상을 전파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결론을 우리들이 여기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부활하신 것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게 되었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결국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와 군사로 강한 나라를 만든다고 하는 개념은 신앙의 이름을 빌었지만 전적인 육적인 나라이고 또 세상나라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정치적, 폭력, 항거, 이런 개념을 모두 쓸어 묶은 그런 지도자를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신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보통사람과는 다른 아주 초인적인 존재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항상 박해를 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때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떡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실 때 사람들이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면서 그 분을 찬송했습니다. 이것들이 결국은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을 베푸시는 모습,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어떻게 몇 천 명이 먹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축복기도를 하고 나니까 이런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 이것은 정말 놀랐다. 누구도 이런 것을 한 적이 없었는데 엄청난 기적을 베푸시는구나. 그렇다면 떡과 물고기로 이런 기적을 베풀 수 있다면 이런 기적의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겠구나.’ ‘옛날의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적을 일으켜서 천사들을 통해 외적의 침입을 무찌르기도 하고 나라를 구하기도 했듯이 그런 놀라운 이적을 마음대로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 여기 계시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사람이 기적을 행하고 역사를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누굴까? 아,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 메시아구나.’ 그러면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 사람이 메시아로 오신 것 같으니까 이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이 분을 지도자로 삼아서 유대민족이 총 궐기를 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이 로마의 압제를 끊어버리고 이 나라를 다시 부강하고 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우리들이 앞장 서야 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예수님에 대한 그 사람들의 기대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까 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는 내용들이 너무 많은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자를 살리고, 천주의 병이라고 불리는 문둥병을 걸린 사람들이 나음을 입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예수라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곧 눈을 뜨게 한 사람은 눈을 멀게 할 수도 있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분이시니까 서서 걸어가는 사람을 주저앉힐 수도 있고, 문둥병을 낫게 하실 수도 있으니까 성한 사람을 문둥병이 걸리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 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사상에 예수님을 놓고 보니까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 부분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이 분이 진짜 메시아구나.’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신앙보다는 이렇게 예수님이 자기의 메시아사상에 맞는다고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이렇게 얼마 전까지 열렬하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 주간에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데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뭘 잘못 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열렬하게 환영하던 사람들이 완전히 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소리 지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일이 잘못 되었거나 자기들의 종교에 커다란 해를 입혔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실망했다’ 이것입니다. 왜 그런 메시아로 오셔서 이 로마와 더불어 싸우고 이 민족을 도탄에서 구원해 낼 줄 알았는데 이런 기적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베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끌려옵니다. 빌라도가 누굽니까? 로마에서 파송한 지방의 총독입니다. 거기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으로 선 것입니다.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실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데 믿는다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는 대상이 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정확한 앎이 없으면 사실 그것은 믿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해야 됩니다. 그래서 믿은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의 대상이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을 믿을 때에 그 분이 우리에게 무엇이 되시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예수님을 제자들이 부활 후에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은 분명한 것인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지를 못했는데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된 계기가 부활이었다고 하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제자들은 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는가? 단순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언급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이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제까지 가르쳐주신 것이 참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뭔가를 말씀하셔도 제자들이 죽어라고 못 알아듣는 광경을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뭔가를 가르쳐주셔도 제자들이 그것을 자꾸 못 알아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지했고 머리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렇게 A라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B라는 방향으로 자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미리 생각하고 있는 방향이 A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B라고 말씀하시니까 B를 끌어다가 자기 생각으로 맞추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완전히 다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메시아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 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잘못 된 신앙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나? 역사적으로 이렇게 됩니다. 신약시대에 사도들이 활동하던 때 까지만 해도 구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구약시대가 기록이 되고 신약시대가 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가르침이 펼쳐져 나갑니다.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신학적 가르침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말라기 선지자로 끝나고 세례요한으로 도입이 되어서 예수님의 새로운 신약시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구약에서 전해 내려오는 종교를 우리들이 ‘야훼종교’라고 부릅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는 말입니다. 그것과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쳐 준 기독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라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질적으로는 다르지만 이것이 연속성, 계속성이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의 야훼 종교가 신약의 예수님에 의해서 도입된 기독교에 정상적인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날 신약만 신앙생활에 참고하지 않고 구약과 신약을 함께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구약에 대한 생각과 해석은 신약에서 가르쳐 주는 바를 따라서 구약으로 가면서 구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는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 율법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구약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셔서 이 신약시대를 도입하고 기독교라고 하는 신앙을 사람들이 갖게 되었지만 이것이 구약과 단절 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연속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불연속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은 제사의 종교였습니다. 제사는 더 이상 드리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연속성이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연속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취 된 것들에 대해서는 연속성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의미도 구약에서 지키는 의미와 신약에서 지키는 의미가 다릅니다. 율법은 연속적으로 계속 있는데 율법에 대한 의미는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이 같이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믿는 것, 인간의 도리, 이런 많은 가르침들,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바로 복음서 속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과 교훈을 주었을 때에 당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해를 잘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만약에 구약에서 전해 내려왔던 야훼 종교에 대한 정확한, 그리고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새 것이기는 했지만 명료하게 잘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기록이 끝나고 예수님에 의해서 신약시대가 시작되는 400여년의 어간 동안에 변화가 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로니아에 의해 이스라엘 나라가 망합니다. 남 왕국유다와 북 왕국으로 나뉩니다. 북 왕국은 벌써 오래 전 722년에 앗수르, 역사적으로 앗시리아에 의해 망합니다. 남 왕국은 586년 주전까지 계속 됩니다. 160~170년까지 더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바벨론은 다시 메다와 바사, 여러분들이 페르시아로 배운 그 나라로 역사적으로 헬라나라와 로마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면서 계속해서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가 주인만 바뀐 것이지 피지배국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를 계시의 침묵기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선지자들을 보내시지 않은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모두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면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하면서 바벨론이 삼인 정책이라는 것을 씁니다. 이사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민족들을 자꾸 흩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는 강제로 흩어진 사람도 있고 자신들이 원해서 흩어진 사람들도 있는데 어쨌든 사람들이 흩어집니다. 이 흩어진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데 이 흩어진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고 흩어지다 보니까 제사가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종교에서 핵심이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무리들이 생겨나고 제사장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제사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여전히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후손들에게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유지해야 되겠다고 하는 갈망을 아울러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제사가 불가능해 지니까 그 다음에는 제사보다도 더 중요한 방법이 들어오게 되는데 교육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책이 아주 중시되는 종교적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회당을 지었습니다. 회당이 있어서 거기에 랍비가 있고 가르치는 선생이 있어서 자녀들 교육도 시키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당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제사 대신에 책들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으면 구약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 대한 해석도 가르치고 해석에 대한 해석도 가르치고 이렇게 하면서 만들어 진 책이 우리들이 탈무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에 시간이 지나면서 구약에 면면히 내려오던 야훼신앙의 전통적인 흐름이 이탈을 하게 됩니다. 이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역사적인 이탈이 아니라 신학적인 이탈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맨 처음에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 로마 사람들은 유대교 안에 한 분파가 생기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의 기독교를 도입하셨을 때에 이미 이런 긴 세월을 두고 제사가 사라지고 교육이 중시되고 책이 중심으로 하고 곳곳에 회당들이 만들어지고 이 회당에는 누구든지 선생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가서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말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하는 체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들이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여기에 가서 성경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훌륭한 도구로 쓰여 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다 하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언어까지도 모두 희랍어로, 헬라어로 통일이 됩니다. 어디 가서든지 희랍어로 설교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신학적으로 이탈을 한 것입니다. 이탈 된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이 이런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와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연장선상에서 가르쳐 주셨을 때 이런 차이 때문에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복음신앙이 자기에게 받아들여지는데 자기가 이렇게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어도 이것을 듣는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돈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무데나 다니면서 배우고 책임이 없이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믿는 것이 없는 상태가 때로는 잘못 믿는 상태보다 훨씬 더 참된 신앙을 갖기에 좋은 조건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아주 명백하게 가르치시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다 감추어져 있게끔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약속을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결례 받으러 가시는 날에 두 선지자를 만납니다. 시므온과 안나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도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례를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면서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도 상당히 상세하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 라고 했습니다. 즉 일생을 살면서 자기가 이 예수님 오심이라고 하는 이 하나의 사건에 목매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시대에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시대적인 이 신학적으로 잘못 된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유대주의라고 합니다. 이 유대교는 구약종교의 빗나간 형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 유대교 속에서 기독교가 나왔지만 신학적으로는 이 유대교 속에서 기독교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표현하기를 ‘유대주의라고 하는 오류 속에 하나님이 기독교라는 백조의 알을 숨겨놓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알을 품고 자기 새끼인 줄 알고 깠는데 걸어 다니고 모이를 먹고 자라는 것을 보니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역사적으로는 이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왔지만 신학적으로는 이 유대주의에서 기독교가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잘못 된 유대주의의 가르침 속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구약의 성경을 해석해 주셨을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맨 날 가르쳐 주셨는데 예수님을 볼 때에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같고, 예수님을 뵈올 때는 참 좋으신 분인 것 같고, 그 가르침이 거짓이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왜 그런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당시 유대주의적인 사고방식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안 맞고 자꾸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흔쾌히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주의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이 A가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인 B가 있었습니다. A는 유대교에서 믿는 유대교 신앙이었고 B는 결국 기독교에서 믿는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맞는 것도 같고 안 맞는 것도 같고 혼돈 된 상태였는데 예수님이 죽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좋으신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음 그 자체로서 이미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실망하고 상당한 혼돈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뵈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한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살아 나셨구나.’ 그랬을 때 이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어떻게 살아나셨을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 이외에 누가 다시 살리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주셨다면 결국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들이 옳다는 증거가 아니냐?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설마 그 아들이 가르쳐준 것이 전부 다 거짓말이었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전부 부인할 수 없이 살아난 거룩한 모습으로 제자들인 자기를 찾아오시게 해 드렸겠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자체가 아니라 이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이렇게 비슷하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결국은 이 틀린 것이 분명해져서 이 유대교 신앙의 가르침은 A였고 예수님이 가르친 신앙인 B는 복음이었는데 결국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사건을 보면서 ‘아,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구나.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제껏 가르쳐주신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도장 찍어 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구나.’ 하는 것을 여기에서 제자들이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충격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예수님이 그렇게 살아나셨으니까 그 예수님이 이제껏 가르치시던 모든 것들이 참 뜻이 무엇이었느냐에 관심이 집중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모든 가르침과 자신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예전에는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이런 모든 것이 혼돈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이렇게 전체적으로 정리가 된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돌아다니는 지식이었는데 그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이것이 조각조각 사건이었지만 이것이 전부 다 ‘맞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어도 아직 제자들이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조각조각 흩어진 이 사건이 모두 가르침이 다 맞는 것이다, 맞는데 어떻게 맞는 것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그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이런 조각조각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참된 지식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되는지를 그 때에야 비로소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이해는 안 갔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준 모든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정확한 것이다. 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이제껏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교훈이 틀림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하나는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연결 된 것이라는 것은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그 지점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 이니이까?’ 또 다윗의 왕국을 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실 때 제자들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 때에 이것이 하나하나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파악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장엄한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사도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선포한 골격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