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자기 인식
녹취자: 조경훈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친척들과 함께 산소에 갔습니다. 꼭 나빠서 라기 보다도 서울에서 바쁘게 도회지생활을 하고 직장 다니고 하니까 오랫동안 아버님 묘소를 잘 못 찾아 갔습니다. 그 사람이 같이 부지런히 묘소에 올라가더니 어느 산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앞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가던 사람들이 가서 뭐라고 그랬나 하면 “아. 아 사람아. 왜 여기서 이렇게 우나. 자기 아버지 산소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렬히 믿는 것도 좋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도 좋은데 정확히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감정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예수님, 그 분이 어떤 분 이신지를 내가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우리의 사랑은 좀 더 인격적이 되고 하나님 받으실만한 순수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무지는 거의 악입니다. 무지한 사람이 정말 훌륭한 신앙을 갖고 거룩한 성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사건은 하나의 계기였고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면서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참말이었구나.’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유대교에서 가르쳐준 신앙관이 잘못된 것이었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가르침이 맞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맞구나.’라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있었는데 이 가르침 하나하나가 참되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아주 강력하게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의 얼개가 그 사람들 속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건이 필요했었는데 그것은 성령 강림사건 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저희들이 배운 내용 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가르침들이 있었는데 이 가르침 하나하나가 참되다고 하는 것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인정해 주신 분이구나.’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친 것도 참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런 여러 가르침들이 한 두 개가 아니라 많이 있었지만 그 가르침 중에서 참 되구나 라고 하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가르침이 무엇이었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해주신 가르침이었습니다. 다른 것도 물론 있었지만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것이 참이었구나 하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됨으로써 여기서 예수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운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이것을 믿고 구원을 얻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가르쳤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심이 틀림이 없었구나.’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이것이 예수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을까? 이것이 우리들이 궁금해 하는 요점입니다.
그러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 자신을 구원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명시적으로 잘 안하셨는데 구원자로 오셨다는 이야기는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신약의 많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신 가르침이고 이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첫 번째로 “인자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먼저 자기 자신을 인자라고 칭했습니다. 두 번째는 부정이 나오는데 “인자의 온 목적은 섬김 받음이 아니요” 인자의 온 목적은 섬김 받음이 아니라고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긍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섬김 받음이 아니라 섬김 줌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섬김 받음의 마지막 결국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나옵니다. 이 죽음의 의미는 대속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몇 시간 있으면 공부를 하겠습니다만 대속이라는 것은 대신 죄를 속한다는 뜻입니다.
옛날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귀족이 있고 평범한 사람이 있고 천민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노예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도 사형당하는 것입니다. 귀족은 사람을 잘못하다가 죽여도 벌을 안 받습니다. 귀족은 나라에 노예를 대신 바치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 것들이 대속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다른 사람이 대신 값을 물어주고 정작 본인은 용서를 받는 것이 대속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바쳐지는 제사의 제물이 대속제물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으로 오셨다고 자기 자신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명확하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를 것이 없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 제물로 주기 위함이라 이거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을 때 우리는 이해 못 할 것이 없는데 제자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대속제물입니다. 왜냐하면 제물은 그 당시에 짐승을 죽여서 제물을 드리는 것인데 ‘사람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를 제물로 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드리는 제사는 가증하게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다 이방 종교의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대속 제물로 주신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메시아로 오셨고 구원자로 오셨는데 섬기려한다고 하셨는데 그런 게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는 그 분은 왕 같은 존재인데 어디서 다윗이 자기의 백성들을 섬겼다고 돼 있냐는 것입니다. 왕이 백성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외국에 가서 왕궁들을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게 왕궁에 땅이 있으면 그냥 다니면 되는데 왕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끝도 없이 넓은 왕궁바닥을 자잘한 돌멩이로 다 박아서 우리로 말하자면 포장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는 널따란 돌멩이를 깨끗하게 깎아서 깔아 놓은 데가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 궁에 가면 나무젓가락 같이 얄따란 요렇게 생긴 돌멩이를 요렇게 땅에 심어서 땅에 다 덥힙니다. 이거는 땅에 진짜 튼튼하겠지요? 천년씩 흘러도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짝 깔려있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왕이 밟고 다니게 해 주려고 수천 수 만 명의 사람이 엎드려서 그거 박다가 죽은 것입니다. 왕이 쓰는 주전자나 술잔 쟁반 이런 것들을 보면 장인들이 정성스럽게 세공을 하고 수를 놓고 혹은 문양을 넣습니다. 무슨 인상을 받느냐 하면 온 나라가 오직 한 사람 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게 옛날 고대에 왕이 다스리는 전제국가였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고 하는 것도 제자들의 사상에 의하면 왕과 방불한 존재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김을 받음이 아니고 섬기려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의 핵심은 ‘인자’입니다. ‘인자’가 도대체 무엇이냐? ‘Son of the Man’ ‘사람의 아들’입니다. 정관사 ‘the’가 붙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자기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었는데 제자들이 뭘 이해를 했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도 이해가 안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라는 건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하나도 안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되겠다고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은 엉뚱하게 ‘내가 더 크다.’ ‘내가 더 위다.’ 아니면 주님의 나라 오실 때 얘는 예수님의 왼쪽에 장관 삼아주시고 얘는 오른쪽에 장관 삼아주시고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활사건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당신 자신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자기들의 생각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해졌고 예수님이 자기의 생각 속에 올바르게 오시게 되자 자신의 인생관과 우주관 모든 이 세상에 대한 견해와 인간에 대한 사상들이 다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강력한 파워를 오늘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장 극적인 회심을 통해서 예수님께 돌아온 인물이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바울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우리에게 알려진 바울사도가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도 알고 유대민족도 사랑하고 성실하게 율법에 도리를 따라서 생활한 열심히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능력도 인정받고 뭐 이런 등등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유대교 사상에 젖어서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사상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니까 완전히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었으면 죽은 것이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 예수가 나무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면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저주를 받아 죽은 인간인데 그 인간의 편을 들면서 어쩌고저쩌고 하느냐?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우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좋은 신앙을 무너뜨린다. 죽여 버려야지.’ 그러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딱 만나게 되었는데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이 헛소문인줄 알았는데 자기가 직접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효과가 똑같이 온 것입니다. ‘다시 살아났다.’ 그러면 ‘메시아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이 없습니다. 다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렸다는 이야기인데 궁금한 것이 그러면 그 ‘예수님은 도대체 누군가?’ 사울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에는 잘못된 이단의 괴수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혼미케 하는 장본인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니까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래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여쭤 보았던 게 “주여. 누구 뉘십니까?” 이게 벌써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주여 불러놓고 뭘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입니까? “주여. 뉘십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친절하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게 두 번째 충격을 받은 장면입니다.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의미는 ‘자기는 예수님을 핍박한 게 아니라 스데반을 비롯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에게 한 핍박과 똑같은 것이었구나.’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과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무슨 관계일까?’ 이게 사도바울 마음속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구약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데 이게 캄캄한 상태에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이 가르쳐 준 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성경 전체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찬란한 불이 들어오고 나니까 아까 잠깐 그렸던 구약의 참된 신앙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신약신앙하고 연결이 되면서 ‘아! 바로 이런 것 이었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드리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100볼트 전기가 들어오는데 220볼트 전구를 끼워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희미하게 들어옵니다. 100촉짜리를 끼웠는데 10촉쯤 될 정도로 희미하게 들어옵니다. 제가 반대를 경험해 봤습니다. 시골에 갔을 때 전기가 220볼트인데 모르고 100볼트에 60와트짜리 전구를 꼽고 모르고 스위치를 탁 올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60와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눈부신 빛이 전구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오래 안 나오고 퍽하고 터져버립니다.
이런 비유를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100볼트 전기시설을 해 놓고 방에 수 천 개의 220볼트 전구를 끼웠습니다. 전기를 탁 올려도 불빛이 희미하게 밖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한 천 개쯤 꼈는데도 한 10촉밖에 안됩니다. 10,000촉광 정도 되면 커다란 방에 가로등 30개 정도 켜놓은 것이 됩니다. 그것도 물론 환할 것입니다. 그런데 100볼트 전기를 220으로 승압을 해서 공급해주면 졸지에 100,000만 촉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30개가 아니라 300개 이상 들어오는 것처럼, 3,000킬로와트 전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10개니까 33,000촉광 정도가 찬란하게 들어옵니다. 100볼트 전구가 330개 정도 켜진 것처럼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두 밝기를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되자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변해서 핍박하던 사울에서 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기까지 따라가는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든 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성경 찬송가 들고 주일날 그것도 딱 한번 교회에 가는 것 이외에 나머지는 다 똑같습니다. 달라진 것은 개업식 할 때 목사님 모셔다가 예배드리고 결혼식 할 때 교회에서 하고 죽을 때 기독교식으로 장례식 지내는 것 밖에는 다른 게 없다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어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뀐 사람입니다.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예수님이 왜 나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어야 했는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뭔지 그것도 모르고 교회에 성경 찬송가만 들고 그냥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역사와 전통에 빛나서 다니면서 좋은 일이 뭐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서 이런 가치관에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었는데 사울이 이해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도저히 그 죄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불쌍하셔서 제사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제사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은혜를 주셔서 순간적으로나마 하늘자원을 공급받아서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드리고 죽으신 것이 결국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 진 것입니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딱 바뀌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옛날에 왕과 같은 메시아의 사상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비록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이 만들고 싶으셨던 나라는 장관과 군인들이 다스리고 노예와 종들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육신적인 세상 나라가 아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는데도 실제로 사시기는 우리의 종처럼 사셨구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난한 집의 아들로 오셨구나. 우리를 위해서 정말 어디로 보더라도 육신의 눈으로 보면 그분이 왕이라고 여겨질 수 없는 삶을 사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시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아! 그렇구나. 이 세상 나라는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사람들의 나라인데 예수님이 세우시려고 한 나라는 무릎을 꿇고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다고 인정을 받는 나라구나. 아! 그렇구나. 맞아. 예수님이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로 오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자라는 의미가 사람의 아들이라고는 깨달았는데 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 옳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 인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를 갖게 됩니다. 이 인자가 무엇인지 이 인자에 얽힌 비밀들을 이해하게 될 때 이 단어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 문제를 집고 나가기 전에 성경의 기록을 생각하면서 회상을 해 보면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뭐라고 호칭하셨는지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시면 사실 딱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독생자는 어머니가 낳은 아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은 사람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으신 외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정체는 사실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에 가깝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에 가깝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이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 한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 예수님을 그렇게 칭해주었지만 예수님 자신은 그렇게 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호칭 가운데 또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우리들이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 누구냐고? 나 메시아야.” 이렇게 말씀하시면 오해할 여지가 없이 간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메시아라고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희랍어로 옮기며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시아다.’ ‘그리스도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면 ‘쉿! 말하지 마라.’ 예수님이 오히려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다 사용을 안 하십니다.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관한 호칭은 딱 하나입니다. 인자입니다. 오직 인자라는 말씀만을 사용하십니다.
인자라는 것이 뜻은 그냥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인자의 온 것은, 인자가, 인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예수님의 표현 자체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인성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은 참 신이신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두 본성으로 이루어지는데 한 본성은 신성이고 또 한 본성은 인성입니다. 신성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인성은 사람의 성품입니다. 이 두 성품이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됐고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죽는다면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 율법에 기록된 죄를 용서받는 법칙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되 죄가 있으면 우리의 영원한 속죄를 위한 제물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 됐다라고 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이성, 두 개의 성을 가지고 한 인격이 되셨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 중에서 인자라고 하는 표현은 인성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해석은 인자라고 하는 이 표현 자체가 메시아를 가리키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자가 온 것은’ 이라고 말했을 때 모든 사람이 ‘나 메시아가 온 것은’ 이라고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인자라는 표현을 쓰실 리가 무엇이 있었느냐?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입니다.’ 라고 옳게 고백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왜 말하지 말 것을 주의를 시키셨을까? 이런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비밀은 이런 것이 아니었고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좀 복잡 해 지는데 예수님은 도대체 왜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최초로 인자가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예수님은 그 인자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을까?’ 거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이 확신했다는 그 의미가 판결이 나는 것입니다.
이 인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구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인자사상입니다. 인자사상의 배경은 다니엘서 7장 13절이나 이사야서 53장이나 시편 8편에 나옵니다. 다니엘서 7장 13절에 보면 ‘인자 같은 이’ 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메시아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구름을 탄다는 점에서 보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인자 같은 이’ 라고 했는데 여기서 인자라고 하는 말은 특별한 뜻이 아니라 그냥 ‘a son of man’, ‘사람의 아들’입니다. 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무슨 이야기냐 하면 메시아이긴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이지만 그러나 겉보기에는 사람같이 생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렇게 얘기하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런 사상이 나옵니다. 이게 여기 뿐 만 아니라 에스겔서에서도 나오고 성경 전체에 인자에 대한 사상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냐하면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 인자라고 했는데 희랍어 성경에서는 그냥 사람의 아들이라고 안하고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서 ‘the son of man’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은 셈족들의 문맥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사람의 자식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the’라는 것을 붙임으로써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뭔가 배경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핵심은 ‘너희들이 다니엘서 7장에 보면 인자 같은 이가 구름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지? 그것을 너희들은 메시아라고 해석을 하지? 그는 구름을 타고 온다는 점에서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이지?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지? 거기서 이야기하는 이야기에서 그 인자가 나오는데 그 인자가 바로 나다.’ 이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이 났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르침에 대한 핵심은 당신에 대한 가르침이었고 당신에 대한 가르침 중에 핵심은 당신이 바로 구약에서 말한 그 인자라고 말씀하신 이 은밀한 암시가 진리라는 것을 제자들이 확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직설적으로 ‘나는 메시아다.’ 그렇게 얘기하시지 않고, ‘너희들이 메시아라고 알고 있는 인자 같은 이,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이렇게 빙빙 돌려가면서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은 이렇게 말씀하셔도 문제가 없고 두렵거나 무서워서 말씀 안하신 게 아니라 이것을 그대로 이야기 하시면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혼란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이 ‘나. 메시아야.’ 이렇게 하실 때에는 A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데 이 사람들은 이미 유대교의 그릇된 유대교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 그래요? 예수님. 메시아예요? 아! 이제 우리가 알겠어요.’ 그러고 B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어느 날 주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예전에는 왜 이렇게 행복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악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좌절하며 인생을 사는지를 자기도 몰랐는데 복음을 듣고 나니까 자기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악과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지 이게 단순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죄라는 병원체가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지고 왔는데 자기의 힘으로 이 질병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는 순간에 복음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인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이 죽음이라는 질병에서 나를 건져내 주실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 이니라
‘아! 그렇구나. 내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인데도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나를 죄의 어두움에서 이끌어 건져내시고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셨구나.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구나.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내가 산 것이 아니구나.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거구나. 이제는 나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 위해서 살고 이 땅에 하나님이 세우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야지.’ 그 신앙의 고백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메시아야.’ 이렇게 말하면 이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메시아. 야! 예수가 메시아래. 다 칼 가지고 나와. 우리 그분을 쫓아가서 로마 놈들을 때려죽이자.’ 그리고 예수님을 군사처럼 따라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바는 죄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시고 죽은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영적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이 아니라 유대 나라를 위한 독립투사로 살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이면서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 없어서 암시적으로 말 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인자야.’ 라고 말씀 하실 때 귀 있는 사람들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뭔가 암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곧 당신 자신은 메시아다. 그러나 또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니다. 이런 의미라고 하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 의문이 안 풀립니다. 메시아라고 당신 자신이 소개를 안했으면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 뻔 했습니까? ‘나.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랬으면 명쾌하게 이야기가 풀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사상을 구약을 더듬어서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도 말씀하실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고 이것을 고백했지만 예수님 자신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정은 사무엘하 7장 12절과 13절에 보면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 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이거하고 아주 유사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인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계속해서 위를 이어가는데 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왕국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워져서 이 왕국을 번성하게 하신다는 물리적인 왕국, 세상적인 왕국으로만 이해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전쟁의 용사이고 능력 있는 임금입니다. 여러 나라를 쳐서 복종시키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구원자로서의 임금입니다. 이런 사상을 예수님 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이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만약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러면 이 사상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시라는 말이지?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일으키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모든 사건을 보니까 틀림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맞구나. 됐다. 때는 왔다. 중요한 건 이제 드디어 우리의 대장이 오셨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로마를 쳐부수자.’ 이렇게 백성들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온다면 예수님이 보냄 받을 때 목적이 그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도망가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겁하게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런 사람들하고는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예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신앙에 관한 결론이 무엇인지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