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원을 받아야 되는가(1)
녹취자 : 오희열
안녕하십니까? 평촌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입니다. 여러 시간에 걸쳐서 여러분과 함께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몇 시간에 걸쳐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강의가 필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강의를 통해서 내가 누구이고 내가 왜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하는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또 구원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되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고, 사실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전체적인 것을 알고 믿은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단하게 제시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 된 것입니다. 또 그런 간단한 복음을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열일곱 시간쯤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다 들어야만 겨우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 초대교회 시대 때에 간단하게 복음을 선포할 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주 간단한 복음의 진수를 믿고 ‘아멘’함으로써 성령으로 역사해서 믿음이 생기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내가 왜 구원받아야 했는가?’, ‘내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예수님을 내가 믿기는 믿었지만 구체적으로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은 사람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또 ‘구원받은 나를 향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을 때 기대하시던 바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우선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해 질 수 있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고, 또 그렇게 자기를 많은 희생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히려 왜 내가 예수를 믿어야 했는지를 더 탄탄하게 공부할 때에 흔들리지 않은 신앙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이런 것들이 아주 경시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복음의 진술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해서 구원 받은 자녀가 되었는데, 아주 간단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영접해야하는 것, 그러면 천당 간다는 것, 이런 정도만 내가 알게 됐지, 구체적으로 구원 받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리고 왜 예수님이 이 구원을 위해서 오셔야 했고, 왜 하필이면 평화를 위해서 수많은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고, 오로지 그 예수님의 죽음만이 나와 관계가 있으며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또 나와 어떻게 관계가 있고 종말을 기다리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주일에 성경을 들고 교회를 가냐, 안 가냐, 밥 먹을 때 잠깐 눈을 감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정도만이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지 나머지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범죄하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존재이고 이런 삶을 산다고 하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독특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창조해 놓으셨는데 창조된 그 인간들이, 이제 강의가 시작되면 아시게 되겠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구원이 필요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당신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심으로서 그 사람들이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아주 분명하게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누구이며 왜 구원받아야 하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과 글이라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통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이것의 중요성은 감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많은 정보가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님을 잘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지만 무엇인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생을 지탱해 나갈 수 없고 외부적으로 그런 절대자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하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절대자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리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호소력 있게 전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들리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집중이 되고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는 동영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시각적으로 어필을 하고 생각을 많이 이끌어냅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실물을 찍어놓고 실물은 없는 가짜 영상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실제 사람이 자기 앞에서 연기를 하듯이 보여주는 실제적인 모습이 가장 자신에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인생관과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생각나게 해 주는 훌륭한 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또 ‘편지’라고도 했습니다. 의사소통을 하는, 편지 쓴 사람의 마음을 전해주는 것이 편지 아닙니까? 사람들이 그 편지를 받고 편지에 적힌 글을 통해서 편지를 보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을 편지라고 부른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더라도 하나님이 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우리가 그런 ‘편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편지는 말로만의 편지가 아니라 삶 전체가 편지가 되어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생각나게 해 주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자신의 삶이 분명한 원리 속에서 일관성 있게 걸어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그런 삶을 살게 해 주는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살아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간단해보이지만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시종일관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견고함이라는 것은 우선 생각의 견고함입니다. 생각에 논리가 없고 선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은 그 사람의 감정도 그러하고 의지도 그러하고 삶 전체의 통일성과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라는 것은 자기가 어떤 사상을 세워놓고 나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 세상에서 보면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거나 자기는 하루에 몇 번씩 양치질을 한다든지, 혹은 다른 일은 몰라도 약속은 틀림없이 지킨다든지, 이런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정해놓고 그것을 어기지 않으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견고해 보입니다. 확신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정확하게 생각으로 이해를 하고, 그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그런 생각을 삶으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자원과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서 ‘편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아주 분명하게 다른 삶을 사는 우리를 보여줄 수 있고 그때에 왜 같은 시대에 똑같이 태어나서 저 사람은 다른 삶을 살까? 어떤 때에는 손해가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어떤 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톨이가 되면서도 그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는 강제력이 저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저렇게 산다고 믿어지는데 ‘도대체 저 사람의 사상은 무엇일까?’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일 때 그들에게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의 길에서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현존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구원이 왜 필요한지를 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 그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가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가 비로소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대하셨던 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참 사람이 될 때 비로소 그가 이 세상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만 더 예를 들고 본 강의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굉장히 오래전 일입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반쯤 가는 섬 마을에 가서 겨울에 몇 달을 묵으면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배를 타고 거기서 인천으로 나오는데 파도가 굉장히 심하게 쳤습니다. 그래도 배는 떠났고 중간쯤 왔는데 무전이 와서 하는 말이 폭풍이 온다는 것입니다. 빨리 배를 돌려서 출발했던 항구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온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인천으로 바로 가버렸으면 좋겠는데 다시 돌아오면서 겪은 파도는 제가 태어나서 본 파도 중에서 최대의 파도였습니다. 그때는 예수님도 믿지 않을 때였는데 ‘장가도 못 가고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파도가 치는지 굉장했습니다. 파도가 배 이쪽을 때리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저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유리창 바깥에 보이는데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파도가 치니까 배도 빨리 가지 못했습니다. 항구로 거의 다 돌아올 쯤에는 캄캄한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몇 시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동네 전체에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는 마을도 아니어서 시간제로 전기가 들어오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집도 별로 없는 마을이어서 캄캄했습니다. 배가 들어가는데 너무 캄캄해서 사면을 돌아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선창가에서 그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희미한 등대 하나가 깜박깜박 하고 있었습니다. 전기를 충전해서 무인으로 돌아가는 등대였습니다. 그 캄캄한 바다에 그 하나가 반짝거리니까 그 불빛을 보면서 우리 배는 안전하게 포구로 들어왔고 폭풍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배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배들도 그 딱 하나밖에 없는 반짝이는 등대 불빛을 보고 안전한 포구로 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적다고 하는데 사실 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몇 사람이 되든지 얼마나 성경이 바라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 원하셨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단지 정치권력을 가졌다든지 혹은 그 사람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졌다든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위치에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그런 면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에 지금처럼 인공위성 위치추적 시스템도 없고 발달한 항해도구가 없었을 때에는 별자리를 보고 배를 운행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난 후에는 나침반을 이용하고 제도하면서 배를 운행했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중에 전쟁 때 사용하는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바다 전체를 대낮처럼 밝게 해야만 뱃길을 찾아서 배가 가는 것은 아닙니다. 캄캄해도 별 몇 개만 반짝반짝 빛나면 그것을 보고 능숙한 항해사들이 배를 조종해서 이 대륙 저 대륙으로 항해를 했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다니면서 무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진실하고 참된 신자가 대다수를 이루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심지어 교회사 속에서 유럽이 거의 기독교 국가가 되어버린 시대 조차에도 진실한 신자는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다른 사람이 진실하든지 말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 받은 후에 어떻게 해야만 좋은 신자가 될 수 있는지를 우리가 배워나가고 그렇게 변화 받아 나간다면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제왕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수많은 민중들이 들고 일어서는 혁명과 봉기로 이룰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해 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오히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많이, 더 분명하게 왜 구원받아야 했는가? 그리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왜 죽으셔야 했고 그 죽으심을 나를 위한 구원에 적용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믿은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삶의 끝은 어떻게 되는가? 에 대한 분명한 생각과 얼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인생관이 되고 삶의 좌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으로써 죄가 들어오기 전에 정말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참다운 인간, 그런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사요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론을 이정도로 하고 몇 시간에 걸쳐 살펴보려고 하는 “우리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거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인생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그들은 인생을 ‘고(苦)’, ‘고통스럽다’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가리켜서 ‘고해(苦海)’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고통이 많이 있는 바다와 같은 것이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고통에 이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익숙해졌습니까? 인생을 말하려면 고통을 떼어놓고는 생각해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난 너무 행복해! 난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행복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시간이 흘러봐야 알 것입니다.
아이들을 낳아서 기르다보면 알게 되는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젖 먹는 갓난아이들이 자는 것을 보면 ‘내가 이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어도 되는가?’ 할 정도로 죄송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너무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평화롭습니다. 그것이 두 살, 세 살 되어도 점점 더 평화가 느껴집니다. 세 살 된 아이가 자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쳐다봐도 질리지를 않습니다. 못 생긴 어른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아이도 잘 생긴 아이, 못 생긴 아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눕혀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떻게 생긴 아이든지 상관없이 쳐다보는 우리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계속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드러누워서 잠을 잔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이 와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평화가 느껴지겠습니까? 안 느껴지겠습니까? 무슨 평화가 느껴집니까? 피곤에 쩔은 얼굴로 누워있는데 말입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아빠를 그려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더니 이렇게 그려서 가져갔답니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이 야단을 쳤습니다. “야, 인마! 아빠를 그려오라고 했더니 이게 뭐냐?”, “선생님, 그거 우리 아빠 맞아요.”, “아니, 너네 아빠가 이렇게 네모나냐?”, “그게 아니고 우리 아빠가 일요일에 이불 뒤집어쓰고 자는 모습이에요.” 이 속에 이렇게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는 어른들이 잠자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얼굴은 근심과 걱정에 절어 있고 침도 좀 흘리고, 잠꼬대도 하고, 그러다가 기분 내키면 이빨도 갑니다. 그렇게 자는 모습 속에서 전혀 평화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른이 자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영화 이외에는 없습니다. 영화에는 예쁜 배우로 가끔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예쁘고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그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 평화가 느껴지는데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왜?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숙제해야지, 시간 맞춰서 가방 싸 들고 가야지,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학교에 가서 처세를 잘 해야 왕따를 당하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보면 피곤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화는 다 사라집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생 그 자체가 고통과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통스러운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통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의 원인, 그리고 고통은 악(惡)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악과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할 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선 물질적인 가난, 궁핍이 이 세상을 엄청나게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 세계의 부를 공평하게 사람들에게 나누어 갖고 생활한다면 이 세상이 참 평화로울 텐데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잡지에서 보니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부의 80%를 전 인류의 10% 정도가 나누어 가지고 누리면서 산다고 합니다. 나머지 20%를 90%의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 한 곳에 가면 어떤 곳에서는 한없이 먹고 입고 쓸 것이 남아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가 하면 어느 한 쪽에 가면 너무 가난해서 도저히 끼니를 잇지 못해서 흙을 파먹고 풀뿌리를 캐먹고 죽을 먹으면서 고통 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고통은, 충분한 물질이 공급된다면 그 고통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이 그런 가난에 있다는 것도 잘못된 견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한 세월을 보내봤는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굉장히 거칩니다. 인간적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조금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니까 그렇게 느껴지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보면 가난하기 때문에 거친 면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게 거친 생활을 해 나가는데 만약에 경제적으로 충분하다고 한다면 사람에 대해서 훨씬 호의적인 태도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함이 이런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무지한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인생 자체가 불안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이가 열이 펄펄 나는 것을 보니 열병이 틀림없으니 주사를 맞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열병이 난 아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뛰어나간다고 합니다. 아이 입을 벌리고 젖은 모래를 아이 입에 쳐 넣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병들게 하는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모래가 잘못 들어가서 죽기도 한답니다. 이런 것들이 무지입니다. 호수 하나가 동네에 있는데 거기에 온갖 오물을 다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그 물에서 헤엄을 치고 그 물을 떠다먹고 그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질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호수의 신이 진노를 해서 자기들을 아프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 지내고 나온 쓰레기를 다시 그 호수에 버립니다. 이런 것들이 질병도 불러오고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데 결국 깊이 캐 들어가 보면 그 원인이 무지(無知)에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지한 것들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람이 왜 병에 걸리는지 잘 몰랐습니다. 병이 있다는 것만 알고 병을 무엇으로 치료하면 낫는다는 경험치만 있었지 실제로 병원체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발견되고 나서 얼마나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질병으로 많은 구출을 받게 되었습니까?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가 전 세계적으로 거의 완성되었다고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70%정도 좇아왔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완성되고 나면 사람들을 현저히 그 질병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훨씬 더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질병도 계속 극복을 해 나가면 우리가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살아가니까 사람들의 고통이 점점 증가됩니다. 질병도 한 사람에게만 그치는 작용이 아닙니다. 집안 식구 중에서 한 사람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사람 때문에 직장도 그만두고 간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도 하고 집도 팔고 가족도 흩어지기도 합니다. 보통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도 역시 인간의 고통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우리가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전쟁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 사람들이 그 전쟁에 대해서 책임질만하고 죽어야할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아무 책임질 이유가 없는 불쌍한 양민들이 폭탄에 맞아 죽고 사격을 받아 죽고 굶주려 죽고 부모를 잃고 자녀를 잃으며 한을 품고 그 고통 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한 평생을 삽니다. 6.25전쟁이 끝난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50년 정도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그 상처들이 민족의 가슴 속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런 전쟁의 고통 같은 것도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밤을 새워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원인들이 이 사회,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주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사회를 이렇게 바꾸자, 저렇게 바꾸자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인들은 이렇게 다양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하나는, 이런 고통과 악이라는 것은 어떤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면 재채기가 나기도 하고 콧물이 나오기도 하고 뼈마디가 욱신욱신 쑤시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기도 합니다. 감기에 걸려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그런 증상을 보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핏줄이 터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통이 난다고 해서 뇌수술 전문병원으로 찾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감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뼈마디가 막 쑤신다고 해서 정형외과를 찾아가서 쑤시고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과 병원에 가서 감기 걸렸다고 하고 주사 맞고 약을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통도 낫고 쑤시는 것도 낫게 됩니다. 그 병이 바로, 이 악과 고통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병의 증상이라고 한다면, 이 증상을 가져온 궁극적인 병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기가 걸려서 콧물이 쏟아지면 더러우니까 콧물은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콧물을 닦는 깨끗한 휴지가 감기 몸살에서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감기에 걸렸으면 감기 자체를 고쳐야 그 감기의 증상들을 처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고통의 근원인데, 여기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서 고통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고통이라는 열매, 악의 열매들이 함께 맺히는데 이것들을 계속 따 내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따 내도 또 다시 열매가 맺힙니다. 따 내도 또 다시 열매가 맺힙니다. 언제까지? 이 나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열매가 맺힙니다. 이 나무를 인생에 비유하면 죽음이라는 고질적인 질병을 고치지 않으면 이것을 아무리 따 내어도 다시 열매가 맺히고 다시 열매가 맺히는데 이 열매가 싫으면 죽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사람이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에 나온 말씀과 같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했으니 이 세상에서 맛보는 이 고통도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게 되면 이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큰 고통을 받게 되니까 고통은 영원하다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죽음이라는 이 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제가 좀처럼 아파서 눕는 사람이 아닌데 작년에 독감을 엄청나게 걸렸습니다. 얼마나 뼈마디가 쑤시는지 견딜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가서 세미나를 하려고 여기에 왔는데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시는데 뼈마디가 쑤시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고 하니까 싸악 웃으시면서 금방 나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영양제를 한 대 맞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영양제나 보약 이런 것을 싫어했지만 저는 평소에 생각하기를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교회에 가면 목사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더니 무엇을 하는 분이기에 시키는 대로 잘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대학에서 선생을 했었고 지금은 한 교회의 목사라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목사님, 주사를 맞으십시오.” 해서 주사를 맞았는데 신기한 것이, 뼈마디를 바늘로 쑤시는 것 같았는데 주사를 맞고 5분이 지나니까 통증이 멎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 같다고 생각하고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까, 이 감기 바이러스가 공격을 할 때 아무 곳이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제일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데 그 약한 부분, 공격해서 뜯어먹기 좋은 곳이 바로 이 뼈마디라고 합니다. 거기에 집중적으로 몰려서 뼈마디가 쑤시는데 한참을 뜯어먹다가 별로 먹을 게 없던 찰나에 피를 타고 맛있는 아미노산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게 맛있는 거라고 거기에 다 달라붙어서 먹기를 시작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영양주사 한 대를 맞고 독감이 낫느냐? 낫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도 가서 맞고 그 다음날도 가서 맞습니다. 닷새 동안 매일 갔지만 결국 다 낫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즉 이런 고통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접근을 하면 어느 정도는 고통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만 A의 고통이 해결되면 B가 떠오르고, B가 해결되면 C가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보면, 가난할 때는 구루마를 끌고 야채를 팝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남편은 소리치고 아내는 돈 받으면서 둘이 같이 먹고 살았습니다. 싸우고 갈등을 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습니다. 꼭두새벽에 나와서 죽어라 하고 물건 팔고 쌀 한 되라도 사들고 집에 가서 발 씻고 나면 그냥 쓰러져 잡니다. 시간이 있어야 싸우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돈을 좀 벌게 되었더니 집에 가만히 앉아서 TV보고 가끔 가게에 나가도 돈이 몇 천만 원씩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이런 생각이 들어옵니다. “내가 이 정도 경제생활을 하는데 저런 여자보다 훨씬 더 괜찮은 여자와 살 수도 있을 텐데……. 왜 저렇게 촌스럽지?” 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집니다. 돈이 생기니까 헬스클럽도 다니고 성형수술도 하고 나니까 자기는 뭔가 상류층으로 올라온 것 같은데 왠지 자기 남편은 돈만 있지 좀 촌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남으니까 항상 그런 것만 생각하며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굶주림이라는 A라는 고통은 돈이 많아지면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B라는 문제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애정과 갈등, 신뢰, 이런 것들이 깨어지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떠오르니까 결국 하나를 죽이면 다른 하나가 떠오르고 또 떠오르면서 이 고통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악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엄청난 질병을 우리에게 가져왔고 그 질병 때문에 인간이 커다란 고통 속에 시달리게 만드는가? ‘죽음’이 무엇인가? 입니다. 어떤 글을 읽어보니까 ‘죽음’을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죽었다고 하는가? 뇌의 활동이 멈춘 것인가? 뇌사 상태에서 깨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숨을 안 쉬는 것인가? 숨을 안 쉬어도 배를 몇 번 누르면 다시 숨을 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장이 멎은 것인가? 전기쇼크를 주면 심장이 다시 뛰기도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죽음을 배경에 깔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세사에서는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생명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모든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 생명이다.”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생명이 떠나가 버리는 것, 생명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고통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여기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어야 나쁜 짓도 하고 고통도 생기고 악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죽음이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혼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갑자기 영혼은 왜 뛰어 들어 옵니까?
이 문제를 풀어가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을 안 믿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육체는 무엇이고 영혼은 무엇인가?”, “한 번 죽는 것은 죽는 것이지 영혼이 또 죽는 것인가?” 육체는 눈에 보이니까 존재한다는 것이 인정이 되고 숨이 끊어지는 것도 눈에 보이고 생명이 떠나가는 것도 시체가 썩는 것이 보이니까 육체의 죽음이 입증되지만 영혼의 죽음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그 이전에, 영혼이 정말 존재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인 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간에게 정말 영혼이 있는지를 다뤄야만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이 있는가 말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성경은 인간에게 육체가 있고 영혼이 있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육체라는 용기 속에 영혼이 담겼는데 단, 육체라는 용기 속에 영혼이 담겨있지만 육체는 영혼과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어서 이 영혼의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육체가 영향을 받고, 반대로 육체가 어떤가에 따라서 영혼도 다소 영향을 받는 그런 상호간의 작용 속에 만들어진 유기적인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다음 시간에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