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아비들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녹취자 : 정은숙B
오늘 이제 가정에 관한 마지막 시간으로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복습을 하자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가장 뛰어난 덕목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복종. 그 다음에 남편의 아내에 대한 최고의 덕목, 그 다음에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덕목은 순종, 부모가 자녀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양육하는 것입니다.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또, 또 라고 하는 것은 결국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에선 왜 부모가 아니라 아비를 부르고 있을까요? 앞에서는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에는 너희 아버지와 너희 어머니를 다 말해놓고 여기서는 굳이 아버지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가정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가정을 세워가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궁극적인 책임을 아버지가 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새벽에 일어나면 직장 나가서 없고 잘 때도 안 들어오고 다 잔 다음에 들어왔다가 또 나가고 이런 상황인데 오늘날과 같은 이런 사회에서도 이 계명이 유효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들이 가정에 매일 실업자처럼 앉아 있어서 아이를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한 가정을 바르게 세워야할 책임을 가장들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그 궁극적인 책임을 아비들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눈을 부라리고 매일 쳐다본다고 해서 아이들이 올바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좋지만 눈을 부릅뜨고 그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해서 바른 교육이 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내면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어떤 끈끈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흘러나와서 자녀들의 마음속에 흘러들어가게 될 때 뭔가 교육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모든 책임을 가장들에게 남편들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교육을 보면 어머니가 영향을 굉장히 많이 끼칩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버지가 이방인이어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아이들은 유대인으로 받아줍니다. 선천적인 핏줄보다 후천적인 교육이 훨씬 더 무섭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시대에도 분명히 믿는 자의 가정에서 아내가 자녀들의 교육에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서 그렇게 자녀들 교육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애를 많이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아버지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돈만 벌어다주면 사명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아버지들을 향해서는 성경이 오늘 일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이 이러한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하자면 사명을 지고 있다 자녀들을 바르게 길러야할 사명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들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가정으로 돌아가는 첩경입니다. 남편이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전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모든 것들이 자리가 잡히고 바르게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에 의해서 억지로 끌려나오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오늘날의 남자들의 신앙생활의 대부분의 그림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든 것들을 다 뒤틀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받은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의 교회답게끔 이 가정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이 남편 된 사람이 가지고 그렇게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지만 가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회복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부지런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도록 힘써야합니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부인이 남편보다 좀 신앙이 좋기 때문에 항상 신앙적으로 부인이 남편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아예 남편의 자리를 말하자면 점유해 버리는 그런 사태도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신앙적으로 바르게 되고 그리고 끊임없이 본인이 신앙이 더 좋아도 누가 좋은지는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그러나 본인이 더 신앙에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남편으로 하여금 가정의 주권을 행사하게 하고 남편으로 하여금 남편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서 그래서 남편이 가정의 모든 제도들을 바르게 세우고 원리들을 바르게 세우고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해야할 영적인 부담을 지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깨우쳐주어서 남편이 그 일들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들아 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뭐라고 말하냐 하면 ‘너희 자녀를’ 이렇게 말합니다. 교육의 대상이지요? 너희 자녀인데 모든 자녀가 아니라 너희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이들 중에서 특별히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을 향해서는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 된 자들이 모든 이 세상의 노인들이 아니라 자기의 부모를 향하여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듯이 또한 자기도 역시 자식을 향해서 많은 어린아이들,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한테는 매우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구약을 통해서 봅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할례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례를 받을 때에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을 통해서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회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갓난아이들은 아직 깨달을 수도 없고 무엇을 믿는지 동의할 수도 없는 그런 연령의 아이들이 할례를 받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는 이유는 그 아이들 자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은 그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부모들에게 심각한 의무를 부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아세례 덤벙덤벙 주면 안 됩니다. 부모가 신앙이 없으면 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신앙에 입각해서 유아세계를 받아야합니다. 유아세례를 주는 것은 폼이 아니라 유아세례를 주면 이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자라지 못할 때는 그 책임을 내가 지겠습니다 하는 서약입니다. 심각한 서약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할례를 받은 것 다 알지 않습니까? 고추에 표시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렸을 때는 거의 벌거벗고 자라지 않습니까? 매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이 아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아이를 백성 삼으신 것은 날 보고 삼으신 것이다. 그 아이를 오줌 누이면서도 보고 목욕 시키면서도 보고 잠 잘 때도 보고 늘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백성답게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높은 지위에 올려놓지 못하거나 아니면 훌륭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거나 하는 것들은 부모에게 책임이 작습니다. 그러나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놓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유아세례 줄 때는 그 부모가 신앙이 확실해야합니다. 그 부모 밑에서 배울 것이 별로 없다 그러면 세례를 주면 안 됩니다. 거듭났어도. 더군다나 유아세례를 받으면서도 자기도 뭘 믿는지 모르는 사람, 주의 교훈과 교양으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자기가 교양이 없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교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양이 없고 주님의 교훈이 마음에 없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신지 하나님이신지 성경 마태복음이 어디 가서 붙었는지 모르는 부모들에게 그 아이 세례 주어봤자 사육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면면히 이어지게끔 만드신 하나님의 놀랍고 탁월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정교육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이 마음속에 철저하게 신앙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모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40세쯤 되었는데 이제는 세상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말과 행사가 다 능하여서 어디서든지 지도자의 행세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민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즐겁게 여겼습니다. 완전히 그 당시로서는 확 뒤집힌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집어 넣어준 것입니까? 어머니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렸을 때에는 참말 감화를 잘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부모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신앙이 물려지도록 만든 이 법칙은 정말 놀라운 법칙입니다. 그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그리고 어떨 때에 인간이 가장 신앙이 깊이 심겨지는가 하는 것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넣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집회를 많이 다녀 봐도 노인 분들이 깊이 회개하고 새사람 되는 일은 정말 극히 드물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아주 옛날에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지만 어린아이들은 여름성경학교 할 때 밤에 작년에 우리 교회도 교회에서 철야한다고 애들 모두 재우고 그랬습니다마는 철야한다고 12시까지 1시까지 있다가 재웁니다. 그러면 잘 시간이 되면 분단 별로 반 별로 마지막에 떠들면 안 되니까 불을 약간 덜 환하게 켜놓고 그 다음에 이제 선생님들이 하나씩 둘씩 무르팍에다 눕히고 부채질로 부쳐주면서 성경을 이야기해줍니다. 그걸 들으면서 아이들이 자는 것입니다. 잘 하면 참 추억에 남는 것입니다. 그렇게 눕혀놓고 앉아 있는 애들도 있고 누워있는 애들도 있고 처음에 성경 이야기를 해주면 막 떠들고 장난치고 돌아다니려고 하고 물먹고 싶다 그러고 오줌 마렵다 그럽니다. 일단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주 떠들던 아이들이 잠들기 시작하면 조용해집니다. 그러면 소곤소곤 얘기해줍니다. 어른들은 그러겠습니까? 소곤소곤 얘기해주면 아이들이 빨려들 듯이 듣습니다. 다들 자는 시간에 훌쩍훌쩍 웁니다. 그만큼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는 깊이 신앙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왜곡되고 잘못된 것들이 어린 시절에 심겨지면 비뚤어진 상이 되어서 영원히 그의 인생의 시야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바르게 잘 하라고 부모에게 말하자면 부모의 신앙을 보고 어린아이를 유아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녀들이 자기의 자녀를 향하여서는 매우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없으면 낳지 말아야 합니다. 안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혼하면 안 낳을 수도 없고 낙태를 하면 더더욱 안 되니까 장가를 가면 안 되지요. 장가만 좋아서 덜렁 가놓고 책임도 못 지고 하나님 앞에서 이웃 앞에서 자녀들 앞에서 그렇게 살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은 심각한 것입니다. 생각하고 생각하느라고 오랜 세월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심각한 것입니다. 갖춰지지 않은 사람이 가면 여러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아내도 불행하게 만들고 혹은 남편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태어난 자녀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부모를 불행하게 만들지 교회 목사를 또 불행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여러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빨리 성숙해져서 그렇다고 마냥 생각만 하고 있지 말고 성숙해져서 빨리 빨리 가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녀를 향해서는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무는 심각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식이 완전히 믿음에서 파선하고 나면 그의 인생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비들에게 자녀를 향한 특별한 의무감들을 교회는 끊임없이 고취시켜야합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하게 살아가야합니다. 뭐냐 하면 주일학교를 하면서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부모가 그 아이가 학교 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의 반만 교회 생활, 신앙생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면 정말 놀라와질 것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도 두기 전에 “공부 잘 했니? 오늘 선생님이 뭐 좀 시키디? 그래 발표했어? 야단맞지 않았니?” 교회 오는 애들한테 물어봅니다. “교회에서 선생님한테 오늘 야단맞지 않았나? 벌 받지 않았니? 친구들 예배드리는 것 방해하지 않았니?” 물어봐야 합니다. 그렇게 자녀들을 향해서는 특별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때까지 그 인생과 우리가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베냐민을 요셉이 있는 곳에 애굽으로 올려 보내면서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라헬을 사랑했으니까 그 슬하에서 나온 두 놈을 끔찍이 사랑했는데 요셉이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 베냐민 하나 가지고 애지중지하는데 애굽에 있는 국무총리가 그 놈을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 데리고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고 볼모로 하나 잡아두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데리고 가면서 그 유다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 아버지와 이 아이는 생명이 결탁되었나이다. 부모와 자식은 생명이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신앙을 버리고 인생을 망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자기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던지 간에 하나님 앞에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식만 바르게 잘 키워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 사람의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 그 사람이 신앙에 굳게 서지 않고는 그 밑에서 돌연변이도 가끔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전혀 신앙이 없이 하나님 앞에 실패하는 삶을 살았던 그 사람 밑에서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자란 아들이 하나님에게 바쳐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올바르게 자란다면 부모로서는 일단 신앙에서는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자, 숫자적으로 둘이 결혼해서 둘을 낳았다고 칩시다. 그래서 둘을 올바르게 길렀으면 둘이 사라지고 나면 둘이 남았으니까 본전 아닙니까? 수학적으로 보더라도 신앙의 질이 좀 더 좋아지면 이가 남은 거고 좀 못하면 떨어지지만 그러나 일단 신앙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한 아이를 그렇게 키워놓고 죽었다면 선교의 지도로 보더라고 그것은 일대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물학적 선교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그 아이를 위한 그런 심각한 의무를 부모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의무를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절대적인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율법에 보면 부모에게 대항하고 부모를 치는 자는 죽여 버리도록 그렇게 중죄로 다스렸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읽을 때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에 대해서 물려받은 권한과 권세를 보면서 하나님의 권세와 권한이 얼마나 큰 것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들을 권세로 가지고 다스리고 치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지만 자녀들을 장악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자녀가 자전거를 갖고 싶어 합니다. 혹은 나이가 좀 먹어서 자동차를 갖고 싶어 합니다. 좀 더 나이가 먹어서 무슨 스포츠클럽의 회원권을 갖고 싶어 합니다. 어려운데 열심히 해가지고 돈을 털어서 하나 사주면 하루 동안은 부모의 권위가 인정이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는 또 인정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잘 가리키던 못 가리키던 그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 자식을 부모가 손을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매한 신앙의 인격이 없어도 일단 어려서부터 세뇌교육을 시켜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철저히 알려주어서 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다음에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가장 커다란 위기가 무엇인가하면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 모든 권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 그렇게 보고 나니까 어디서 무릎을 꿇고 배우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학교 가서 그렇습니까? 지금 일본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뭐냐 하면 선생들에 대한 몰매, 선생님을 골목에서 학생들이 앙심을 품었다가 기습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 선생인 경우는 교실에서 강간당하는 사태가 수시로 벌어진다고 하니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꼼짝 못하는 선생님이 누구인가 하면 학생부 주임이나 이런 사람은 유단자들을 시킵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한테는 대들어도 훈육주임이나 학생주임 선생님한테는 감히 못 대듭니다. 걸렸다하면 죽는 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그래요, 부모에게도 그래요 그런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교회의 가르침에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통제할 수 없이 아이가 자라는 것입니다. 양심이 통제 되어야 하는데 신앙은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으로 그 아이를 잡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넓은 길로 걸어가면서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행하고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는 특별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는 모릅니다. 우리의 아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무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벗어났으면 지금부터라도 손안에 넣어야 합니다. 완력으로 손 안에 넣든지 아니면 감화를 시키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손 안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손아래서 복종하는 아이로 순종하는 아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보다 이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소극적인 명령 하나와 적극적인 명령 하나 두 개를 주셨습니다. 소극적인 명령이 무엇인가 하면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칫 오해하면 아이에게 무조건 잘해줘라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자,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기서 표현이 뭐합니다. “아이들을 때리지 말아라. 징계하지 말아라. 야단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노엽게 하지 말아라.” 그럽니다. 어떤 때 아이들이 부모들에 대해 노여운 마음을 갖게 됩니까?. 우선 첫째는 징계가 올바르지 못할 때 부모에 대해 노여운 마음을 품게 됩니다. 징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잘못한 것은 요만큼인데 이만큼의 징계를 가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도 왜 그렇게 했니?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있어? 그렇게 물어볼 때는 미안함 마음이 듭니다. 상쇄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방망이를 갖고 와서 패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잘못한 건 사살이지만 징계 정도가 자기 잘못한 것을 이미 초과했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이 속에서 반감이 생깁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대 체육과를 다닌 사람인데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의 학생이었는데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 분인지 모르겠는데 자세히는 이야기 안 하는데 이 주먹을 굉장히 잘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부모에게 매 맞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은 그 아이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매 맞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매 맞을 짓을 골라서 합니다. 하루는 고3때였는데 예비고사도 다 끝나고 학교도 학생들이 그냥 가서 예비고사가 떨어지면 대학 시험을 못 쳤기 때문에 발표 나기 전까지는 거의 공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가서는 선생님들하고 공부 조금하고 난로에 둘러앉아서 대학 이야기나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몇 주 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학교에서도 거의 졸업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널리 봐주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먹은 것입니다. 술을 먹고 자기 집을 찾아가는데 친구가 쫒아가며 그랬답니다. 그 친구한테 나 오늘 가서 우리 하버지 한 판 할 거야 세상에 내가 이제 사회인이 다 됐는데 이때까지도 우리 아버지는 나를 몽둥이로 잡으려고 그런다고 그러면서 들어가는데 친구가 보는데 발길로 문을 뻥 차면서 문 열어 그랬는데 누가 문을 열어준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보고 와서 설명을 하는데 자기는 질렸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어디서 구했는지 도끼 뭉툭한 도끼 아주 날카로운 도끼는 아니고 장작 같은 것 쪼개는 도끼를 창고에서 꺼내 가지고 와서 이놈의 자식 죽여 버린다고 하니까 걸음을 못 걷고 비척거리던 아이가 총알같이 뛰어서 체력장 특급이었습니다. 총알같이 튀어서 골목으로 뛰어가는데 믿어지지가 않더랍니다. 이런 부모의 행동들은 자녀들을 매우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했지요. 잘못했는데 징벌이 가혹하면 자녀들이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징벌을 줄 때는 벌을 줄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속히 결정해서 용서를 하려면 아주 심각하게 충고를 한 다음 확 용서를 해주고 징계를 하면 심각하게 한 다음에 그 잘못한 것만큼 징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은 요만큼인데 이만큼 혼을 날 때 그 때에 우리는 속에서 조금 잘못해서 미안한 모든 의식까지도 다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매가 사람을 방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 부모들을 노여워하게 됩니까? 두 번째, 자녀들이 부모들을 노여워하는 것은 자기들은 그렇게 안 하면서 강요할 때 노여워지는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언행이 일치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그것을 잘못했다고 강요를 하는데 자기가 그것을 말하자면 자기는 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부모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가 있겠지요. 공부를 잘해라 왜 그것밖에 못하느냐고 야단을 사실을 자기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부모가 나도 공부를 못했으니까 너도 공부 못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교육을 시키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게가 옆으로 가면서도 자식들에게 똑바로 가라고 교육을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식들이 부모에 대해서 말하자면 분노하고 노를 품고 그럴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공부 못한다고 막 때리니까 이 아이가 아빠 다니던 학교 찾아가서 성적 증명서 떼어서 들여다 볼 자식은 없습니다. 왜 그것은 부모가 그렇게 했건 못했건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녀들에게 주어진 도덕적인 명제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렸을 때에는 몽둥이가 무서우니까 잠자코 있지만 속에서는 다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유치원만 다녀도 속으로 다 생각합니다. 옳다 옳지 않다는 도덕적인 판단은 다 합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가면 몽둥이와 용돈으로 그에게 기계적인 복종을 받아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부모를 닮아야겠다는 이런 것들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여러 가지 많이 있겠지만 떠오르는 또 하나는 어떤 것들이 자식을 노엽게 하는가 하면 부모가 자신에게 너무 오랫동안 고통을 줄 때, 부모의 잘못된 성품이나 생활 관습이나 습관이나 혹은 잘못된 사상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자식들에게 너무나 같은 고통을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줄 때 자녀의 마음에 노여움이 생깁니다. 이런 것들은 부모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아야할 영역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자식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그렇게 하고도 잊어버립니다. 자식은 잊어버려지지가 않고 오랫동안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에게 상처를 받은 부모도 없지 않지만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자식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잘 알던 교수님 한 분이 계시는데 하루는 집에 찾아오셔서 자기애들이 여대 하나 다니고 대학생이 둘인데 하나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남자 아이는 대학을 다니는데 요새 너무나 외롭다는 것입니다. 얘네들이 나를 상대를 안 해준다는 것입니다. 두 부부 다 늙었고 애들 있으니까 식구가 애들 밖에 더 있습니까? 나이 먹은 부부가 서로 얼굴 쳐다보고 감상할 것도 아니고 책도 보고 하다가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잘 떠들다가도 입을 꾹 다물고 우울해지기 시작하면서 한 놈 내려가고 두 놈 내려가고 자기가 내려가면 또 이층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너무나 많이 공부하러 다닌다 하면서 집을 몇 년씩 비우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이러면서 자기 목표 하나에 미쳐서 그렇게 살다보니까 아이들의 마음속에 섭섭한 마음이 생기고 자기에 대해서 같이 있는 시간 자체가 매우 껄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제일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좀 나아졌지만 앉아있으면 늘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님한테 많이 맞으면서 자랐냐하면 딱 한번 공책으로 맞은 것 밖에는 맞은 기억이 없습니다, 맞지도 않고 그랬는데도 하여튼 그 분하고 앉아있으면 좌불안석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는 못 앉았습니다. 교장선생님과 앉아 있을 때도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아버님과 같이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서울로 와서 방학 때 잠깐 가서 잠깐 얼굴보고 아버님은 사업하시고 나는 고기 잡으러 다니고 책보고 그러다가 일주일이나 열흘 만에 다시 돌아오고 그러니까 만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낯설고 말을 할 때도 아주 높은 사람을 만나면 말을 속에서 자꾸 만들어서 하지 않습니까? 말을 만들어보고 이런 말 하면 뭐라 그럴까 그것을 생각을 해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피곤하고 너무 힘듭니다. 물론 당신은 아직도 모르실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입니까? 자녀들이 나이가 점점 먹으면 부모를 자꾸 피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가 생기면 부모들하고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문제는 결국은 쉽게 얘기하면 그런 것 아닙니까?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지만 속으로 저런 사람이 무슨 목회를 한다고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아있는 사람과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고 저분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참 진리일거야 하는 신뢰감을 갖고 듣는 사람 사이에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엄청난 차이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부모가 끊임없이 교훈과 교양과 바르게 함으로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자식들과 그런 관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노여움을 쌓아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속에 깊은 벽을 쌓아서 더 이상 주의 교훈과 교양으로 양육하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주위에서 정말 이상적인 가정들을 보기가 힘든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 자녀의 마음을 노엽게 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자녀가 노여운 마음을 갖게 되어서 쉽게 말하면 소극적인 명령을 부모들이 바르게 이행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적극적인 명령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적극적인 명령이 무엇인가하면 읽어봅시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분도 사실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분인데 신문인가 어디에다 자기 집의 가정교육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는데 자기는 원칙적으로 종교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일단 종교를 갖지 못하게 하고 판단이 서면 그 다음에 불교든지 유교든지 기독교든지 힌두교든지 알아서 자기네들이 믿게끔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아주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교육법인 것처럼 말합니다.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직 교훈과 교양으로 훈계하는데 어떤 교훈이냐 하면 주의 교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을 사상적으로 올바르게 신본주의적인 올바른 기독교 사상이 들어가는 것도 부모의 가장 심각한 의무라는 사살입니다. 잘 먹고 잘 커서 잘 자라서 성인이 되는 것만이 부모가 잘 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말하자면 잘못된 사상을 섭취하지 않도록 자녀를 교훈하고 바르게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주의 교훈과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렇게 말했는데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겠지만 굳이 이야기를 한다면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어떤 내면적인 성숙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훈계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신앙의 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의 교양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이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몸가짐인가 하는 것들을 실제적인 삶속에서 가르쳐주는 것이고 이 훈계는 이 객관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지워지지 않도록 가슴 속에 깊이 새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이 세상 최고의 신학교는 엄마 무릎이다 거기에서 부모들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아이를 무르팍에서 기르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그릇된 신앙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객관적인 올바른 신앙을 넣어주려고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론 기독교의 교훈이 객관적인 진리가 이 아이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도록 하는데 가장 좋은 곳이 무르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서 내면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질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삶속에서 계속 함양시켜주는 의무를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이미 부모에게서 자라서 초등학교 정도 들어가고 졸업할 정도 되면 무엇을 믿고 자기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고 또 세상을 위해서 어떠한 의무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부모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는지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해가는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녀들을 교육을 시켜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노엽게 하지 않는 가운에 그 관계를 통해서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그 영혼들을 아이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올바른 성장을 하도록 그 아이를 도와줘서 최소한 우리가 사라지고 그 아이가 우리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우리보다는 나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신앙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살아가게 만들어줄 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 가정 속에서 다시 또 그런 자녀들이 출생하면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하게 서 갈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무너진 교회 뒤편에는 반드시 무너진 신앙교육의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무들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아주 심각하게 고취시켰습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은 교회에만 맡겨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24시간 일주일을 보고 있으면서도 못 고치는데 주일에 달랑 교회 와가지고. 그것을 이 아이를 바르게 교육시키는 일들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교회에서 뭘 배우고 왔으면 물어보십시오. 무엇을 배우고 왔느냐. 주일학교에서도 보니까 부모님한테 가서 물어보고 오라고 했답니다. 신앙이 이만큼 커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라고 했답니다. 정답이 나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라고 가르쳐주는데 아이들이 정말 집에 가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웠느냐 선생님이 무얼 알아가지고 오라고 그랬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하나 늘어가는 것을 인해서 부모가 1234 하나 더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주된 관심사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새겨질 때에 아이들도 신앙을 위해서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복습을 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가정에 관계된 주제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자, 맨 첫 번째는 세상이 뭐라 그러던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가정에는 질서가 있어서 한 남자를 세우시고 한 여자를 세우셔서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시는데 그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말하자면 주재권을 남편에게 가장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서기 위해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듯이 그렇게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관계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사랑의 깊은 덕목을 성취해야할 심각한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의 몸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부모에게 가져야할 것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가져야 할 것은 양육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아름답게 자녀의 교육이 우리가 돈을 벌고 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 더 심각한 관심의 주제가 되어서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주실 때 우리에게 부과하신 그 심각한 의무를 지고 그 아이가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