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신앙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아이의 생명과 결탁하라Ⅰ(창44:30上) 2003. 4. 27(주일오후) 1
2. 아이의 생명과 결탁하라Ⅱ(창44:30-32) 2003. 5. 4(주일오후) 12
3. 아이로 땅을 정복하게 하라(창1:28) 2003. 5. 11(주일오후) 25
4. 부모공경을 말하기 전에(잠23:25) 2003. 5. 18(주일오후) 36
5. 자녀의 도리(잠23:25) 2003. 5. 25(주일오후) 47
6. 최상의 효도(잠23:25) 2003. 6. 1(주일오후) 55
7. 남편에게 순종하라(엡5:22-24) 2003. 6. 8(주일오전) 65
8. 아내와 남편의 정신적 결합(엡5:24) 2003. 6. 22(주일오전) 79
9. 연약한 그릇이기에(벧전3:7) 2003. 6. 22(주일오전) 95
10.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창2:23上) 2003. 7. 6(주일오전) 107
1. 아이의 생명과 결탁하라Ⅰ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창44:30上)”
어린이를 자녀로 둔 부모도 있고 어린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징그러울 정도로 커버린 자식을 둔 부모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자식은 늘 어린이입니다.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들으시면 되리라고 봅니다.
여기에 야곱의 집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아시는 이야기지만 잠깐 소개하자면 오늘 이 장면은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국무총리가 되었고 온 땅에 흉년이 들어서 곡식이 있는 유일한 곳인 애굽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때 야곱 집안의 자식들도 곡식을 사기 위해서 애굽으로 오게 되었고 그 때에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형제들은 자기가 요셉으로서 애굽이라는 어마어마한 나라에 국무총리가 되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론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나은 아들로 야곱에게 네 아내가 있었는데 레아, 라헬, 실바, 빌하였습니다. 실바는 라헬이 종으로 데려온 여자이고 빌하는 레아가 데리고 온 여자입니다. 아시다시피 원래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7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장가들고 싶은 여자는 라헬이었습니다. 그런데 장가를 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라헬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외삼촌이 우리 동네에서는 동생을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7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기 위해서 날밤을 새운 야곱의 꿈이 무참히 깨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위로하듯이 ‘네가 정말 원했던 라헬을 줄테니 7년을 더 품을 팔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서 7년을 허송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다시 7년을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는 대신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요셉과 베냐민이라는 아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으니까 당연히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과 베냐민을 끔찍이 사랑했고 말할 필요도 없이 요셉은 베냐민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깊은 진정한 의미의 형제로서의 애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 아무 죄도 없는 자기를 구덩이에 집어넣고 죽이려고 하다가 애굽으로 팔아버리고 결국 국무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숱한 고난의 세월을 있게 해준 장본인들이 바로 자기의 형들이었으니까 화해하는 감정을 갖기가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셉은 한 꾀를 짜냈는데 곡식을 사러 온 사람들에게 곡식을 풍부히 주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너희 동생이 있느냐? 아버지가 있느냐?’고 했더니 ‘계십니다’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그 동생을 데려오지 않으면 너희를 스파이로 알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는데 그 때 아버지 야곱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모든 혐의를 풀고 돌아가려는데 요셉이 왜 그랬는지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요셉 소유의 잔을 넣어둡니다. 그래서 멀리 떠난 그들을 종을 시켜 좇아가서 왜 주인의 물건을 훔쳐가느냐고 했더니 ‘누구든지 그 물건을 훔쳐갔다면 그 사람은 주의 종이 될 것입니다’했는데 뒤져보니 베냐민의 짐 속에서 잔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와서 요셉 앞에서 ‘이 아이는 돌려 보내주시고 제가 대신 잡히면 안될까요?’ 하고 유다가 제안을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느냐면 ‘아비의 생명과 이 아이의 생명이 결탁되었기 때문입니다’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 아이 없이 아비에게로 돌아가면 우리 아버지는 슬피 울며 음부에게로 내려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즉 ‘그 마음이 지옥과 같이 될 것이고 아마 우리 아버지는 죽어버릴 것입니다’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아비의 생명이 아이의 생명과 결탁되었다”는 것은 야곱이 이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도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자기의 자식들을 공정한 방식으로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비록 이 베냐민을 향한 야곱의 사랑이 편애처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부모들에게 자식을 향하여 기대하시는 사랑이 바로 이런 끝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아이에게 부모 노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혼란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해달라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주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이에게 적절하게 사랑을 베풀고 관계를 갖지 아니함으로 결국은 노년에 자신도 아이에게서 소외되는, 그래서 외로운 일생을 마치는 부모들도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지만 되겠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로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와 부모가 연합을 이룰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인 여러분들은 참 할 얘기가 많을 것입니다. ‘연합이요? 참 좋은 소리하시는데 연합 할만한 놈하고 연합을 하지 이렇게 속을 썩이고 에미 애비 맘도 몰라주는 이 천방지축으로 막 되먹은 이 녀석들과 어떻게 연합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말이 이해 갑니다. 연합이라는 것 자체가 깊은 사랑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유대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연합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아이를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에서 시인은 ‘자식을 아비가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합니다. 그 시인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했던 가장 깊은 관계의 비밀은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아비들이 자기 자식을 향해 갖는 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사랑이 없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청교도 죤 오웬은 이 문제를 논증하면서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 안에 역사하고 있는 죄의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힘이라고 말합니다. 짐승도 자기의 새끼를 간수하고 사랑할 줄 아는데 인간에게 있는 그 죄가 자식에 대해서 무정하게 만들고 무자비하게 만드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표현대로 사노라면 인륜을 저버리게 만드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마도 몇 달에 한번씩 ‘내가 저 자식 안 낳았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말년에 저 자식들이 없었다면 난 참 편안한 세월을 보냈을 텐데’할 정도로 자식 때문에 속 썩는 부모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자식으로 인해서 얻는 즐거움, 기쁨을 노래하는 성경의 고백들이 낯설게 여겨질 정도로 자녀 그 자체가 그 마음에 고통이 되는 사람들은 지금 저의 설교를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부모의 사랑을 못 받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단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 그 아이는 얼마든지 올바르게 고쳐질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돈으로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자식에 대해서 ‘이러 이러한 나의 요구를 따라서 살아주니까 고로 나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를 사랑하는 이 일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고 이것 역시 정말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성화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실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랑이 어느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 아이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 그 아이가 공부를 잘 하기 때문에, 효성스럽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똑똑하기 때문에, 얼굴이 잘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아이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자식과 부모라고 하는 관계 때문에 그 아이를 깊이 사랑하는 그 일은 하나님과 맺은 관계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사랑 없음에 있습니다. 이 사랑 없음의 극치는 구타나 폭행, 폭언, 이런 것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그래서 ‘네 인생은 네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하고 마치 자녀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 것 같지만 사실은 정신적으로 그 아이는 버림받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아들이 자신에게 한없이 잘해준 부모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언제 내가 잘 못한다고 때려 줘 본 적이 있느냐’고 대들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를 향해 대하는 태도가 자기를 얼마나 편하게 해주는가, 자기를 위해주는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태도나 감정을 훨씬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때렸기 때문에 아이를 버렸다고 하는 집이 있는데 사실은 매 때문에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 매보다 더 큰사랑이 아이를 구타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얘는 돈도 받고 인격적인 대접도 받고 모든 것을 다 받았는데 문제는 아버지께로부터 한 대도 맞아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가 자기를 향해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탁월함 때문에 안 맞은 것이 아니라 줄 수 있는 것들은 자유스럽게 주었지만 자기가 빗나가도 그것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따귀 한 차례 때려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바보 같은 생각은 가서 열심히 돈벌고 사업하고 집에서 빨래하고 밥하고 운동화 닦아주면서 그것을 자식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식들을 향해서 부모가 보여준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러한 부모와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아이들은 부모와 결탁하고 부모는 아이들과 결탁하는 이 사랑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식이 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 세상에서의 자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 아이로 있는 동안에 자기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후에도 부모는 그 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고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만질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에 대해서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이런 마음 아닙니까? ‘난 이제 포기했다. 너는 너대로 살아라’하고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나쁜 짓을 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젖혀놓은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그 아이에게 낳습니다. 부모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결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이가 부모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해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이 아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의 꿈과 계획은 갖지만 그러나 그것을 자기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그 아이를 끊임없이 부탁하고 많은 기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일수록 직선적으로 가르칠 수가 없고 그 아이에게 시간이 걸려도 인격적으로 승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번 만나고 다시 안 만날 사람 같으면 ‘똑바로 믿어요. 그렇게 믿어야 소용없어요. 꽝이야’하면 그만인데 다음 주에도 보고 그 다음 주에도 계속 볼 교인들이면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그렇게 설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찾아오는 어려움입니다. 남의 자식에게는 얘기하기 쉽습니다. ‘패요. 나라면 가만 안 둬. 반 죽이지’하는데 자기 상황이 되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부모가 무한대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하나님 아버지는 무한대의 사랑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아이를 낳아놓고 부모가 되긴 되었어도 어떤 때는 인격적으로 우리 아이들만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달래는 집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쳐야 합니다. 그 비결은 좋은 부모가 되려면 하나님 앞에 좋은 새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좋은 자식이 되어야지 만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대로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 시어머니, 완고한 남편, 바가지 긁는 부인, 이런 주위에 있는 가족들이 훌륭한 성화의 도구가 됩니다. 끝까지 십자가입니다. 그 도구들에 의해서 계속 닦이니까 자식 때문에 속 썩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지 단순한 내 팔자, 내 인생의 고통이라고만 생각하면 그저 그놈이 사라지든지 내가 사라지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행복하지 참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식들을 돌볼 때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다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은혜를 못 받으면 그것부터 해결이 안됩니다. 자기는 요즘 하나님 아버지 속을 곪도록 썩이고 다니면서 자식이 조금 언짢게 했다고 표독을 떨면서 개 패듯 패고 마치 남의 집 아이인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험한 욕을 해서 그 다음날 아침에 어떻게 기도가 잘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태어나서 네 사람만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첫째 부모님입니다. 말도 안 되는 부모님이 많습니다. 자식은 때려서라도 고치는데 부모님은 적응하는 수밖에 별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세 번째는 자기 자식을 깊이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항상 좋은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느 부부가 아이와 함께 예배드린 후 엄마 아빠는 왜 맨 날 돈 갖다주고 욕 얻어먹느냐고 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그렇게만 사랑하면 정말 성화의 인격에 있어서 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겉으로만 바뀌게 되면 멀리 있는 사람이 그 사람 괜찮다고 말하고 본질부터 변화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괜찮다고 순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100m 밖에 있을 때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폼 나고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고 그럴 듯 합니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이 별로라고 하고 제일 지긋지긋하게 싫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부인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인기 투표했는데 1등에 어느 유부남이 당선되자 그 부인이 무심 결에 ‘다 데려가서 살라고 해’라고 했다)
여러분들이 정말 성화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1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구역원들은 다 괜찮다고 합니다. 자기 부인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진짜 성화 되었는지는 자식에게 가서 ‘딸아 요즘 아빠 신앙 괜찮니?’해야 합니다. 거울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고 자식들을 사랑할 때, 타락한 아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고 어미의 사랑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자식이 자기 말을 안 듣고 그렇게 가슴 아프게 할 때, 양심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 새끼 때문에 죽겠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하면 하나님께서 ‘내 심정이 그 심정이란다’하십니다. ‘하나님, 우리 자식 정신 좀 똑바로 차리게 해주십시오’하면 ‘네 자식보다 내 자식이 더 문제다’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로 삼으십시오.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 완고하고 부모 말 안 듣고 자꾸 가슴 아프게 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내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내 자식이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좋은 자식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눈물을 기억해서라도 여러분들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자식들이 부모 속을 썩이는 것도 결국 속에 남아 있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역사 하는 것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논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아직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것도 아닌데 어느 한순간에 악한 행실을 버리기로 마음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술이나 먹고 담배나 피우고 불량한 행동을 하던 아이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이런 것들은 정말 쓸모 없는 일이구나‘하며 바꿔놓으시는 직접적 개입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도하면 돌아섭니다.
입만 열면 자기 아들, 딸, 며느리, 사위 흉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흉을 보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가서 자기 흉을 보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제 흉 좀 보겠습니다. 저는 정말 몹쓸 여자입니다. 수다 많지요, 게으르지요, 죄의 지배 아래 있지요, 자식에 대해서 무정하지요, 말도 마십시오’ 그렇게 진심으로 자기 흉을 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들을 위해서 많이 울어야 합니다. 어떻게 저절로 크겠습니까? 밭이 어디입니까? 자기 배속에서 나왔고 거기가 죄악의 모판인데, 그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아직 신앙도 깊이 들어가지 않은 그 자식들이 죄악 된 세상에서 또 죄와 친구 하면서 삽니다. 그러니 그들이 똑바로 자라면 정말 눈 비빌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특별한 영향력이 없다면 잘못 자라는 것은 순리입니다. 그 순리를 바꿔놓기 위해서는 그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 아이들을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첫째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보는 것이 정말 남편 다음으로 보기 싫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랑의 교제를 이야기할 때는 항상 기쁨이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비록 전교에서 1등은 못하고 얼굴이 탤런트처럼 깎아놓은 듯 예쁘지는 않고 여러 가지도 부족한 것이 많아도 나는 네가 기쁘다‘하는 것이 정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이렇게 자기를 기뻐하는 것을 통해서 자식들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잘 간수합니다.
(예화:동생에게 좋은 만년필을 받고 소중해 한다는 이야기)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이나 먹어. 사랑하니까’하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아주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주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아주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딴 사람이 ‘뭐가 귀하냐. 공부를 잘 하냐. 머리는 돌이고 얼굴은 저렇게 못생겼는데. 키는 작고 배는 튀어나오고 뭐가 잘났냐’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식들에게 보여 줘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런 생각을 해야합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되 혈육의 사랑으로서는 불가능하고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서 가능하다’ 그래서 자식이 눈에 안찰 때는 ‘나는 주님의 눈에 찬 적이 있나’하며 각성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앞에 눈에 찬 적이 없는데도 주님이 나를 인하여 기뻐하시는 것, 그리고 주님이 나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 이것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가 사랑 없음에 대해서 깨트려져야 합니다.
‘그 아이의 생명과 아비의 생명이 결탁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또 필요하냐면 부모가 올바른 모본을 보여 줘야합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 표정을 보고 배웁니다. 그래서 부모의 표정을 보며 아이들이 두려워하든지 기뻐하는 부모 표정을 보고 그 하던 일을 더 신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선악을 배웁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다음에는 논리를 보고 배웁니다. ‘이것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사람의 사는 도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해서 설복되면 ‘네’하고 안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좀 더 자라면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의 뒷모습이 자기를 가르치는 것과 일치할 때에는 부모가 싫어할 때 움찔해서 자기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만 뒤에서 보는 부모의 행동이 앞에서 자기를 가르치는 논리와 일치하지 않을 때는 부모가 싫어하는 반응을 할 때 ‘웃긴다. 꼴값하네’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은 자기의 일관성 없는 행동에 대해서 부모가 자기를 용납해줄 것을 무한정으로 기대하지만 반대로 부모의 일치하지 않는 행동과 그릇된 모본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연약한 인간일 뿐이니까’ 생각하면서 그것을 용납해 주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정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기 전까지는 부모를 향해서 그런 무한대의 이해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아이가 부모를 붙들고 매를 치면서 ‘아빤 어떻게 사는 것이 이것밖에 안돼. 좀 맞아야겠어’하지는 않습니다. ‘엄마, 그러고도 엄마 될 자격이 있어? 반성문 한 장 써봐’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괜찮은데 그렇게 못하니까 그것은 그대로 아이의 가슴속에 상처로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선악의 개념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한 대 얻어맞은 것은 금방 잊어버릴 수 있지만 부모가 자기를 가르치는 것과 상반된 행동을 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것은 그 아이의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제는 자기의 문제, 자식이 나를 이해해주고 이해해주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일을 통해서 아이가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장가 가서 아이를 쑥쑥 낳는데 제가 기도해보고 낳으라고 합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영혼에 대해서 책임지는 행동을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적 성숙이 다른 모든 성숙과 함께 결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정말 아름다운 모본을 보여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기대하고 있는 삶, 그 아이에게 기대하는 존재 이상으로 자기가 먼저 살고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써서 노력하는 그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글로 쓰여진 것들에서 들리는 것은 가슴에 오래 남고, 들리는 보다는 보이는 것이 가슴에 오래 남고, 보이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가슴에 오래 남고, 영상보다는 실제 연기하는 것이 더 가슴에 오래 남고, 그런 연기보다는 실제의 삶이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자녀들이 1년에 몇 번씩은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인격적 풍모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그 부모의 정직을 보면서, 어떤 때는 그 부모의 사랑을 보면서, 어떤 때는 그 부모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보면서, 또 너무나 자주는 그 부모의 탁월한 경건의 생활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 한 장 안 읽고 자식이 태어나서 여태까지 엄마가 성경 찬송 끼고 교회에 가는 것은 봤고, 구역예배 드리는 것은 봤지만 교회에서 편가르고 싸우는데 주동하는 것은 봤지만, 정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한나가 마음에 안타까운 시련을 주의 성소에서 털어놨던 것처럼- ‘정말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사람이구나. 완전한 분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구나’ 하는 것을 자녀들이 살면서 이따금씩 충격적으로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삶의 부르심을 따라서 생활에 나아가는 것이 바람에 떠밀리듯이 물결에 떠밀리듯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거룩한 싸움과 진실한 노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정말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릇된 모본을 자녀들에게 보이는 것은 자녀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폭력입니다. 그런 부모는 좋은 자식을 가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제발 너도 이 아빠가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이 아빠가 하나님 앞에서 좋은 자식이 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처럼 너도 나에게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엄마는 참 부족한 것이 많다. 공부는 못했고, 성질은 난폭하고, 입은 걸고, 돈은 헤프고, 텔레비전 좋아하고, 늦잠 자기 좋아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한번에는 안되지만 그렇게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이면서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고, 부족하지만 그래서 주님을 믿기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 엄마가 된 것처럼 너도 그렇게 나의 진정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까지는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모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돈 많고 아빠가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결코 그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이 없어서 한 때는 그럴 지 모르지만 철이 들면 가난한 것 때문에 아빠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못 배운 것 때문에 엄마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사리 판단이 옳지 않으니까 잠깐 동안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절대 안 그럽니다.
(예화; 아빠는 장로님이고 엄마는 권사님인 부모의 아이가 전화로 욕하는 것을 들었 다)
아이는 어른들의 눈에 보여지는 동안에는 모릅니다.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는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만들어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인격적으로 그 아이들과 하나된 삶을 살아야만 가능합니다. 올바른 모본을 보이지 않으면 절대 그 아이가 그 부모와의 연합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자기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할 지 모르지만, 아이가 존경하지 않고 이중적이고 구역질나는 위선적인 삶을 사는 자기 부모와 절대로 생명을 결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이러한 생명적인 결탁을 자식과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절대로 자식을 향해서 폭력적인 징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과도한 징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아이를 차마 견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적당히 때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아이를 때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이를 때리라는 것입니다. 때리는데 어렸을 때 때려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명료한 호 불호를 보임으로서 선악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는 ‘스?'하면 악입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면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도를 분명하게 해줘서 한쪽으로는 격려를 받고 한쪽으로는 위축되게 해야합니다. 그때에 사리판단이 분명한 아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때리는 것이 아픈 것을 알 때부터 아이를 때리는 것입니다. 표정으로 분명히 보이는 데도 아이가 계속 범법을 하려고 할 때는 때리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때리는 것의 의미가 부모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 있을 때면 그 때가 바로 맞아도 되는 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말로 설득이 가능하니까 말로 먼저 인격적으로 설득하고 설득되지 않으면 인격적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때릴 때는 항상 손을 직접 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손을 직접 대지 말로 반드시 회초리를 사용하거나 도구를 사용해서 아이를 때려야 합니다. 위압감을 느낄 수 있고 실제적인 아픔을 줄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해서 아이를 때리는 것입니다. 때리는데 항상 잘못한 것에 비례하는 정도로 아이들을 견책해야지 그것이 도가 넘으면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로 혼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말로 혼내면 꼼짝 못합니다. 그런데 말로 혼내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주먹이 날아오면 아이가 겁을 먹는 것이 아니라 ‘패라. 그런 정도에 내가 무서워할 줄 아느냐. 내가 고치나 봐라’하는 심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다한 징계는 그릇된 기대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식을 향해서 기대를 갖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왜 기대가 없겠습니까? 기대가 없다면 그 아이의 옷을 빨아주고 가방을 챙겨주고 학교에 보내는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 기대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과도한 기대입니다. 자기 아들이 몇 십 년만에 태어날까 말까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꿈을 꾼다든지 베토벤 이래의 최고의 작곡가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꾼다든지 아니면 5년에 한번만 있으면 되는 대통령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꿈을 꾼다든지 하는 허황 된 꿈을 꾸는 부모들은 그것이 기대가 아니라 과도한 집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착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아이에게 과도한 징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그 아이와의 관계가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이렇게 심하게 책망하고 다루는 부모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난 잘되라고 그러냐, 다 너 잘되라고 그러지’하는데 사실은 아이가 잘되고 못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고려해야 될 것은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파괴하면서까지 그 아이가 성취하여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취미생황에 미치게 되면 열심을 내게 됩니다. 거기에 몰두하게 됩니다. 돈 버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잘 벌리지 않으면 잘 안 벌리니까 고민하는 라고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돈이 잘 벌리면 오래간만에 일어난 불길 같으니까 잘 보유하기 위해서 또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이 멀리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난 다음에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살다보면 신앙적인 은혜와 열정이 식고 믿음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렇게 떨어지는 것들이 곧바로 아이와의 관계에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믿음이 떨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 혈기가 솟아오르고 아이들에 대해서 성화 된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이 아닌 폭력과 같은 것들이 속에서 응어리가 져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오물들을 뒤집어쓰고 자녀들이 자라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마치 똥물에서 한 송이 아름다운 백합화가 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을 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가 그것을 모두 소화하고 한 송이 백합화처럼 피기 위해서 얼마나 숱한 날을 고통하고 하나님 앞에 성화의 씨름을 해야할 지를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 가슴앓이하고 아파하듯이 잠시 후에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여러분들 놓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했던 고민을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올바르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된 우리와의 관계가 끊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자식과 나와의 관계가 끊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관계를 깨트리고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이 아이에게 얻어내야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기대는 갖고 신경을 쓰지만 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그 아이에게 걸어야할 기대는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분재를 싫어한다-성장 억제제를 뿌려서 나무가 비틀어지게 하는 것이다. 화원에 서 정이품송을 똑같이 분재로 만들었는데 속에 구리 철사 줄을 감아서 만든 것이 었다)
자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기르되 그냥 자라게 해야됩니다. 목회자가 여러분들의 믿음을 돌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아볼로와 나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셨다’고 했습니다.
(예화: 교회 마당에 나무를 너무 늦게 심어서 죽을까봐 노심초사했는데 살아났다- 우 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열심히 물주고 비료 주며 돌보는 것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부모가 그런 마음으로 기르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나 혼자 이 아이를 사람 만든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여러분이 부모로서 얼마나 무자격한 사람인지 처절하게 깨닫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그 자식을 하나님 손에 부탁하는 것도 신앙입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부탁 안 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자식에게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물주고 벌레가 끼면 잡아주고 영양이 부족하면 비료를 주고 하면서 계속 돌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가 해야할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아이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줄 수 있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 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티 내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아이들의 심정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돌보시는 지를 깊이 가슴에 새기고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돌보시는 것처럼 아이들을 그렇게 돌보고 사랑하며 그렇게 아이들이 신앙의 터전 위에서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놔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아이들이 많이 뛰노는데 웬만하면 아이들보고 ‘하지 말아라. 왜 그러니’하지 말고 좀 놔둬야 합니다. 집에서도 매일 쥐어 박히는데 교회에 와서라도 좀 하게 놔둬야 하지 안겠습니까? 좀 심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좀 절제를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불쾌감만 주지 않으면, 할 수만 있으면 아이들을 야단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자유롭게 아이들이 뛰어 놀게 하십시오.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기를 때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돌보면서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그 부모의 품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자기가 잘못했을 때 어떻게 부모가 용서해주고, 막 두들겨 패고 과도하게 징계를 하면 단숨에 꺾어버릴 수 있는데도,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자신에게 인격적으로 감화를 주어서 어떻게 돌이키게 하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다루시는구나’하는 것들을 아이들이 깊이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자녀를 사랑하면서 기르는 것이 바로 부모인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신성한 의무이자 신앙적인 특권인 것입니다.
2.아이의 생명과 결탁하라Ⅱ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창44:30-32)”
“지난 시간에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사랑 없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이에게 올바른 본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자녀를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어느 부모들도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해냈다’ 이렇게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자녀들을 기르는 문제입니다. 사실 그것은 어느 부모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참 힘든 부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자녀를 양육하고 기르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아이도 독자적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영혼이기 때문에 부모가 아무리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부모가 마음대로 그 아이를 이렇게 만들고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명절에 송편을 빚기 위한 쌀가루 반죽이 아닙니다. 동그랗게도 네모지게도 마음대로 떡을 만들 수 있는 것 같은 쌀 반죽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성공한 교육의 방법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자식을 망치는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자녀를 기름에 있어서 먼저 인정해야 될 것은 내 마음대로 이 자녀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관계를 통해서 부모의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과 모본이 그 아이 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게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는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무관심한 관계가 되면 안됩니다. 또 하나는 부모가 좋은 모본을 보여서 아이가 자라면서 인생의 다양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그 부모의 모본이 생각나게 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부모가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신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시기만 해도 우리가 언제나 감화를 받고 은혜를 받는 관계가 되지만, 우리 인간은 죄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자녀들에게 감동적인 모본을 주면서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모본이 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모본이 되시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모본이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모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독자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부모가 별로 문제가 안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 안에서 살면 부모가 조금 올바르지 못한 행실을 하면서 살아도 그 아이가 불완전한 부모인 육신의 부모보다는 완전하신 부모인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교적 그 아이의 영혼이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이 참 많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깊은 신앙과 고도의 영적인 건강한 삶이 필요합니다.
그 예는 여러분들에게서도 입증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남편이 못마땅하고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힘들게 살고 부모님이 마음에 안 들고 자식이 속을 썩여서 인생사는 것이 힘들다가 어느 순간에 그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아무 문제없이 그들을 위해서 오직 사랑하고 기도할 뿐이고 그렇게 어려운 가족들의 상황들이 나의 인생과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고 나는 공급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나는 그들을 위해서 섬기고 기도할 뿐이라고 하는 정도의 신앙이 그렇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고도의 영적인 삶을 살고 충만해질 때에 그런 삶이 지속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하지 않고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자식이 꼴 보기 싫고 부모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생겨나고 배우자에 대해서 못마땅한 마음이 생겨나서 그런 사람들이 또한 우리의 성화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그것이 쉽지 않았는데 자녀들에게 그런 것들을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그렇게 독자적으로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부모들이 좀 부족해도 자기들이 다 소화하면서 좋은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부모인 우리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리고 어버이날 되면 부모를 용서하라는 설교를 듣고 우리 용서하지 못한 것을 깊이 십자가를 지고 회개하고 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우리 때로 족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은 부모가 되고 훌륭한 모본을 보여주어도 그것 때문에 자식들이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모본을 보이십시오. ‘내가 너무 온전한 부모가 돼서 우리 아이들이 기도 제목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나라도 고난을 줘야되지 않겠어’ 그것 말고도 고난받을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들에게 좋은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불완전한데 어떻게 좋은 모본을 보일 수 있을까요? 자녀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완전한 존재로 알 지 모르지만 성장하면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점차 깨달아 갑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부모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은 부모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에게서 어떤 진실성을 찾아보기 힘들 때,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이지를 않고 비인격적인 권위가 지배하는 관계가 될 때 아이들이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모본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완전하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해도 아이들이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자기는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위선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고 일관되지 않은 삶을 살아갈 때 그 때 자녀들은 언어로 아이들에게 폭력 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가 무능해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것보다 더 커다랗게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런 상처가 계속 반복되게 되면 아이의 가치관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올바로 서있는데 삶이 가치관을 따라주지 못할 때는 어떤 악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시적 현상인데 가치관 자체가 흔들려버리면 그 사람 자체가 악을 구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악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아주 망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는 아이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이에게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아이들이 부모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사는 신자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아이들이 깊이 감화를 받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사실 그 아이들과 깊이 대화해보고 아이들의 내면 세계를 파헤쳐 보면 그들 자신도 참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능숙해져버린 거짓말, 탐욕, 미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의 사람, 이런 것들을 아이들의 양심이 상당부분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성장하면서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인간이 자라면 자랄수록 아이들은 부모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부모의 행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자라면서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영악하고 얼마나 허망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자라면서 터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람이 이래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만 참 사람의 도리이다’하는 식으로 머릿속에 정보를 쑤셔 넣는 것만 가지고는 아이들이 정보 따로 삶 따로 살지 절대로 그 정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장 근접한 모본을 보면서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이가 부모의 그늘 아래서 양육되고 자라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에 있어서도 절실하게 필요한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열린 신문에 실린 어느 지체의 간증-자녀가 ‘아빠, 도대체 우리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린 것이 언제인줄이나 알아요?’한 말이 마음속에 메아리쳐서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못살아도 인간으로서 참으로 살고 하나님을 믿어 가는 모본을 부모로부터 보는 것이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부모를 통해서 그런 모본을 보지 못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너무 불행한 아이들입니다. 불행한 아이들이라는 것은 단지 돈 없는 집안에 태어나서 등록금 못 내서 힘들게 학교에 다니고 가난한 월세 방에서 어려운 물질적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만 불행한 아이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짐승처럼 살다 죽으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가정이라는 좋은 세계에 갇혀서 살면서 선과 악,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것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을 어렸을 때 가장 강력하게 가슴에 새겨지게 되는데, 정말 가슴에 잘 새겨질 때에 부모 이외에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육학자들에 의하면 태어나서 품에 안고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4-5세 이전에 인간의 인격의 기본적 구조의 80%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누구에게서 영향을 받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엄마 아빠도 못하는 일을 탁아소에 보내겠습니까, 학교에 보내겠습니까? 그러니까 부모가 거의 전폭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한 영혼이 아니라 자기의 슬하에서 태어나는 다른 영혼과 생명적으로 결탁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자녀들에게 축복해주신다는 개념도 있지만 내가 올바른 모본을 보이면서 인생을 살면 그 자체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신앙에 대해서 냉담하게 살아가는 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부모인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이들에게 모본을 보여주는 삶을 살지 않으니까 그 아이들을 권위 있게 올바른 길로 걸어가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에게 성경을 매일 읽으라고 강력하게 책망하거나 교훈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그렇게 안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한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타이르고 그 아이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아이와 함께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유아세례를 줄 때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아이와 함께 기도하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으십니까? 그들도 영혼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영혼에 죄가 우세하게 지배해서 영혼이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굴은 청소년이라서 마른 뼈 같지 않지만 영혼은 이미 마른 뼈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그 아이가 주일마다 교회에 나온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여러분들이 부모로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아이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 아이를 책망하거나 바르게 기도하도록 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자라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는 신앙에 어떠한 성장도 없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문화에 들어섰을 뿐이지 성장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배우고 있느냐? 내가 가르쳐 줄게. 이러이러한 것들을 터득했느냐?’고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아이들에게 촉구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지식의 진전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목회자에게서 목양을 받고 싶습니까? 좀 설교가 어눌해도 안팎이 같은 사람에게서 목양을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설교는 청산유수 같은데 삶은 개떡이라면 그 좋은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설교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삶과 일치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이미 여러분 속에 있었던 진리의 내용들까지도 쓸어내 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그런 욕구를 실제로 우리에게 줍니다.
자녀들은 더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자녀들에게 모두 포착되었고 자녀들이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깊이 존경하고 부모로서 ‘나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라고 가르쳐주는 스승이다’하는 평가를 못 받으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어떤 면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특별히 배교적인 정신에 빠져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신앙은 교회에서보다 먼저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내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부모님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그런 모본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아이 앞에서 표리부동한 그리스도인의 구역질나는 위선을 보여주고, 할 말이 없으면 소리나 질러서 아이들을 굴복시키고, 예수 믿으면서도 아내와 자녀들을 향해서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까지 있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신자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결혼하고 부부생활 하는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는데 만일 남편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쓰면 경찰에 고발해서 유치장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얘기하십시오. 용서하면 그 사람을 계속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모본을 보면서 자식들을 자라게 하는 것은 자식들을 구둣발로 짓이기면서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짓이기고 파괴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아이가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자라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부모가 가난하게 살고 큰 권력이 없고 사회적 지위가 없고 지식이 뛰어나지 못해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어렸을 때 잠깐입니다. 나이가 들고 성장하게 되면 절대로 그것 때문에 자신의 부모를 소홀하게 생각하거나 열등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 인간이 안된 사람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그래서 ‘우리 아빠의 간절한 소원은 참으로 신자되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성질도 나쁘고 돈도 헤프게 쓰고 낭비벽도 좀 있지만 그렇게 낭비하고는 날마다 회개한다’ ‘성질 내고는 날마다 깨진다’ ‘금방 고쳐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엄마는 공사 중’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 이상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그 엄마가 그보다 더 훌륭했다면 왜 자기 같은 자식을 낳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모본을 보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3일도 안갑니다. 그래서 신자 안에 있는 죄에 관한 교리에 들어가면 죄가 속에서 솟아날 때 그 근원을 말려버리면 되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니까 싫고 둑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솟아나도 넘치지 못하도록 뚝을 쌓는데 그 둑의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내가 이런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할까? 인간이라고도 생각 안 할거야’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댐을 쌓는데 쌓으면 즉시 그 물이 다시 차는 것입니다. 쌓으면 또 차고 하다가 결국은 그 댐이 무너져버립니다. 그래서 단지 자녀들에게 모본을 보여야겠다는 결심만으로는 그 모본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웅적인 행동을 일생에 몇 번해서 아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참으로 사람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정직하고 진실하고 원칙을 따라 살고 시종일관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모본으로 보면서 아이들이 그 부모를 통해서 참으로 사람답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모가 그 아이를 기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 없이 때되면 학비 뭐서 학교 보내고 배고프면 밥 먹이고 운동화 떨어졌다면 사주고 하는 것은 양육이 아니라 사육입니다. 사육은 애정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정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자녀들에게 인간이 사는 도리, 신자가 사는 도리 중에서 옳지 않은 것을 아이에게 보여 주었다면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을 깊이 인정한 모습을 보여주면 점진적이나마 그것을 지워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그런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회개하고 그런 삶을 버리고 고치려고 해야되고 혹시 기회가 주어지면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이러이러한 모습을 너희들에게 보여주면서 살았는데 나도 그 때는 날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 정말 잘못한 것이었다고 깊이 회개했다. 그리고 다시 그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오늘도 이렇게 살아간다’하는 것이 아이들이 정말 보고 싶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에 대한 잘못된 기대들이 아이와의 생명적인 결합을 끊어놓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얼마나 타락하고 못된 존재인지 자기는 아이 앞에서 그렇게 좋은 모본을 보여주지 못한 채 아이에게 그릇된 본을 보여주면서 살면서도 아이는 자기와는 전혀 다른 보다 더 완벽하고 자기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성공하고 훌륭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많이 성화 되고 세상의 길과 육신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복음적 신앙으로 충분히 변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가 자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판단이나 기대도 당연히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우상적인 것들이 모두 세상적인 것들과 육신적인 것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 바보 같은 것은 그런 것들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서슴없이 자식과 자기 사이에 있는 관계까지도 파괴하려고 드는 것이 부모 안에서 나타나는 죄악 된 본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을 가만히 보면 정말 소수의 부모들만이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서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기대하지 대부분의 부모들은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일차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기르는 양육의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은 재능이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피아노, 바이올린, 발레, 등 예술에 대한 공부들을 시킵니다. 재능이 있던 없던 무조건 피아노 학원을 보냅니다. 되지 않아도 이런 것들 속으로 아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그때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그 이이들이 그런 것들을 아주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커서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부모의 모든 관심은 그 아이의 학업에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좀 못하면 부모가 자존심이 굉장히 상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얘기해서 아이들이 어떻게 모두 1등을 하겠으며 모두 잘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 1등 하면 2등은 누가 합니까? 공부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기능이기 때문에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공부를 잘하면 일반적으로 세상 사는 것이 좀 편리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그것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훈련소에 가면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걸어갈 때 손과 발이 같이 올라가는 사람 이 있다)
공부도 되는 아이가 있고 안 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공부 안 되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길을 바꿔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학교는 졸업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은 받아야 합니다. 사람 가치관에 따라 고등학교까지냐 대학까지냐 판단이 다르겠지만 교육은 받아야 합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조금 해도 아주 잘합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해도 못합니다. 또한 재능이 있다해도 선생을 잘못 만나서 엉뚱하게 가르쳐주면 노력을 많이 해도 못합니다. 그런데 재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선생을 만나도 개발에 편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아이에게 기대하는 바가 얼마나 세속적인지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주위에서 자기 자녀들과 같은 아이들을 만났을 때 신앙이 좋은 것을 보고 정말 부러워하고 ‘나는 왜 같이 자녀를 길렀어도 아이가 저렇게 신앙이 없을까’하며 자존심 상해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을 것입니다. ‘나도 아이를 낳았고 저 집도 아이를 낳아서 똑같이 20년씩 길렀는데 저 집 아이는 저렇게 사려가 깊고 분별력이 있고 예절 바르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일에 기여하는데 우리 아이는 왜 이렇게 게으르고 인격도 돼먹지 않았을까? 정말 자존심 상한다’하는 것을 심각하게 느끼기보다는 ‘이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잘 적응하면서 살다갈 수 있겠는가’에 모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말을 안 해도 자기를 대하는 모든 태도와 언행, 자기를 무시하고 좋아하는 이유, 이런 것들을 보면서 부모의 참된 가치관이 어디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자녀들이 다 압니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보다는 자기 말을 잘 들었으면 좋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아이는 아이 독자적으로 자라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이에 대해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이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세상적인 집념을 갖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으로 볼 때 부모에게 위탁된 교육의 중요한 명령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아이들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주어서 그 아이를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부모에게 위탁된 최고의 비전입니다. 그런데 그 비전을 자기가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 비전을 자녀에게 비전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내 비전이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고 참된 신자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내가 올바른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비전이 아닌데 어떻게 자녀에게만 그것을 비전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가정교육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도 부모가 올바로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이 가정교육에 있어서 모든 문제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신앙이 없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으려고 하는 좋은 신자가 되고자 하는 성화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런 욕망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아이를 호텔과 같은 방에서 사육하느냐 아니면 하꼬방 같은 곳에서 사육하느냐, 우유를 먹여 기르느냐 고기를 먹여 기르느냐 야채를 먹여 기르느냐의 차이이지 결국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든지 그 아이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부여받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형상을 회복하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하는 의미에서 부모에게 위탁된 교육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가서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으면 ‘응답 받았느냐? 부모로서 소명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부부생활해서 어느 날 아이를 갖고 쑥 낳는다고 해서 낳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깊이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예화: 결혼한 후 7년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똘똘하게 잘 자라고 자랑스러웠다. 하나님 이 특별한 아이를 주셨다고 감사했는데 자라면서 점점 실망시켰다. 야단도 치고 설명해주기도 해봤지만 기대했던 대로 자라주지 않았고 어릴 때처럼 만족시켜주 지 않았다. 그래서 기대를 상당부분 접게 되었다)
어느 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로서 하나님께서 저를 다뤄오신 것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아버지라는 개념이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라고 할 때 아버지 이름 세자만 들어도 가슴이 녹을 것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얼마 안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아버지와 아주 어린 시절부터 2-30년 가까이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개념은 있지만 그렇게 가슴 저미는 듯한 감동이 없습니다. 오히려 할머니와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라고 할 때 그런 것이 있습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 할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습니다. ‘몇 년만 더 사셨으면 제가 교수가 되고 목회 하는 것을 다 보셨을 텐데, 한 3일만이라도 같이 지내면서 잡수시고 싶으신 것 해드리고 가시고 싶으신 데 구경시켜드리고 용돈도 쥐어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누워서 하염없이 베갯잇을 적셨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하나님 할머니’라고는 안나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그렇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기도할 때 ‘예수님’만 부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잘못 새겨진 아버지의 상들을 다 털어 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니까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런 것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거꾸로 정말 아버지와 아들인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하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소개하셨을까를 생각하니까 거꾸로 그것이 무엇인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충격적으로 놀란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아들인 나를 다루는 방법과 아버지인 내가 내 아들을 다루는 방법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아들을 다루는 방법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나를 다루셨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제 생각을 열어주는 아주 중요한 빛이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서 부모가 어떠해야 하고 자식이 어떠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는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총체적으로 어느 한순간에 들어오는 것과 단편적인 것 하나 둘이 들어오는 것은 다릅니다. 총체적으로 복음이 밀려오면서 선은 이것이고 후는 이것이며 이러이러해서 기독교 신앙의 골격은 이것이다 라는 것이 들어올 때 눈이 확 열리면서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리듯이,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했는가 하는 것이 그렇게 들어온 것입니다.
아버지를 희랍어 성경에서 ‘타테르’라고 부릅니다. 아람어로는 ‘아바’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말로 ‘아버님’ ‘부친’의 뜻이 아니고 가족 관계에서 부르는 ‘아빠’입니다. 가족들끼리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밀하고 가깝다는 것을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 주기도문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많은 신자들 중에는 아주 고도의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거의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있고 태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게으름 시리즈를 계속 들으면서도 늦잠 자는 인간이 있고 한두 번을 듣고도 회개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믿는 신자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소개하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를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해라”하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이 아들인 나를 그렇게 다루어오신 것입니다. 물론 길지 않은 세월동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기쁘게 해드리며 산 때도 있었고 특이할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때도 있었습니다. 비교적 잘 사는 때가 있는가 하면 비교적 못사는 때도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때가 있는가 하면 게으른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굴곡이 나의 삶 속에 있어도 항상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내게 소개해 줄 때 “아버지”라고 소개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 때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반응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 살 때는 어느 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너 정말 실망스럽다. 내가 너를 위해서 내 아들을 보내서 생명까지 주고 널 구원해냈는데 네가 어떻게 이렇게 밖에 못사느냐”하시고 어떤 때는 “그래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마”하시며 인정해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실망을 표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말씀을 통해서 격려해주시기도 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야단치시기도 했는데 그러나 어떤 태도를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시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아빠이시고 나는 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기본적인 사실에는 무너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특별한 사랑을 아들인 나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설교 한번 잘한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박수치시는 법도 없고 한번 죽 쒔다고 해서 ‘너는 인간도 아니다. 당장 사표 써라’하시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죄를 선택해서 하나님 앞에 잘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즉시 오셔서 귓방망이를 갈기면서 발길로 차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고 싶니? 정말 짓고 싶니?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아니? 그래도 네가 먹어보고 싶다는 말이지? (먹고 토하고 괴로워하면) 봐라. 아니지?’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교육시키십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여러 날 한없이 울었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 오오 어서
그래서 제가 정말 못된 버릇이 있는데 그것을 안 고쳤는데도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사실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내 영혼은 고통받고 하나님 앞에 신자로서 일어서는 일에 수시로 올무가 되고 어려움을 느끼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를 폐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보다도, 심지어는 죄의 심각성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심각성을 더 깊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래 살지는 않았는데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관계를 지속해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 관계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나의 거의 모든 것을 -옳다고는 말씀 안 하시지만- 모든 것을 용납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된 나의 관계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신, 그런 식으로 나를 대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부모도 ‘너 이렇게 하면 의절이다’ 동기간도 ‘너 이렇게 안 하면 다시는 너 안 본다’ 부부싸움 할 때도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합니다. 인간의 한계가 그런 것입니다. 자기 요구에 어느 정도 부합하면 그것만큼 내가 베풀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거래관계로서 서로 오고가는 것이 있는 가운데에서 관계를 유지하는데, ‘현저하게 네가 할 일을 다 안 하면 나는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과다한 희생을 지출하기보다는 접겠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버린다고 하는데 사실 부모를 버리겠습니까, 자식을 버리겠습니까? 같은 집에서 살고 주민등록이 같이 올라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부모고 자식이 아닙니다. 그 전에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음에서 접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릇된 꿈을 가지고 자녀들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버지가 되고, 그 아이들을 향한 간절한 소원은 나를 통해서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는데 있다는 교육의 목표를 가졌으면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은 안 합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면서 두 가지 사실 때문에 가슴이 아팠는데, 하나는 내가 자녀들에게 옳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옳은 자식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깊이 아파했었습니다. 그러고나서 하나님이 놀라운 마음의 변화를 주셨습니다. 아이들이 늦게 일어나면 전에는 ‘도대체 제시간에 일어나는 적이 한번도 없고 제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이큐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생애적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자식들은 부모가 말하기 전에 일어나서 뒷산에 올라가 뜀박질이라도 하는데 이럴 수가 있냐’하며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한번 말하면서도 짜증나는데 두 번 얘기하면 스트레스 받고 세 번 얘기하려면 가서 패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못한다면 물려주지 못한 내 탓이라고 하더라도 옷 벗어서 제자리에 개켜놓고 수건 쓰고 제자리에 놓고 양말 벗어서 세탁기 속에 넣는 것이 지성과 관계 된 것입니까? 그런데 누구보고 하라고 그렇게 집어던지고 가냐는 것입니다. 저는 안 그랬습니다. 제가 안 그랬다면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그래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공부도 부모가 그만큼 밖에 머리를 못 물려줬으니 탁월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50명 모인 반에서 2,3 등정도 하라는 것인데 그것도 못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속에서 솟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깊이 깨닫고 나니까, 좀 늦잠을 자면 ‘그것이 뭐 그렇게 문제인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어릴 때는 잠이 많습니다. 저 역시 늦잠 자는 것 때문에 할머니와 많이 싸웠습니다. 옷을 집어던지는 것에 있어서도, 언젠가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은 자기 아이들에게 ‘방을 치워라’ ‘책을 정리해라’ ‘입은 옷을 제자리에 개켜놔라’ ‘노트를 찢지 마라’ 하는 이야기를 안 한답니다. 마음껏 하게 둔다는 것입니다. 그림책에 동물이 나오면 아이가 토마토 케챱을 그 동물 입에 퍼 넣는답니다. 들어가지 않고 나오면 ‘흘리지 마’하며 아이가 넣어주는데, 그 분의 이야기는 그러면서 아이에게 교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정해진 틀 속에 잘 담겨지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밑에서 참모를 했지 잘 담겨지지 않는 사람들이 창의력을 가지고 역사를 주도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양말 하나를 던져도 ‘이거 정말 좋은 징조다. 이렇게 아무 데나 벗어서 집어던지고 두들겨 맞으면서도 못 고친다는 것은 고질 적인 창의력이 있다는 것이다’생각했습니다. 쉽게 제거될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창의적인 가능성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불편했습니다. 방 청소를 안 하면 이불도 개켜주면서 ‘이것이 마음에는 안들지만 그러나 아이와 나 사이에 있는 유일한 통로인 아버지와 아들 됨의 관계를 손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아 아이가 아버지에 대해서 반기를 든 것도 아니고 게을러서 그런 것인데’ 하며 청소를 해줍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무 문제도 안되고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개켜라’하며 팰 때에는 잠깐 동안만 말을 듣고 안 듣고 뭔가 충고가 주어져도 관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포 속에서 전해졌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빨간 불이다. 한번만 더 하면 뭐가 날아올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을 율법적으로 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반죽이실 것이다’하는 공포심만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절대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원리를 다루는 공식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보다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이 복음적인 감화를 우리들이 받게 될 때 -물론 그것도 율법의 감화를 통해서 오지만-오히려 죄의 무서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이 나아졌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다 핸드폰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핸드폰을 하나 사줬습니다. 그리고 제 통장에서 요금이 빠져나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너무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돈이 아까워서 보다 핸드폰을 붙들고 오래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이라, 옛날 같았으면 벌서 몽둥이가 날아갔을 텐데, 불러놓고 이야기했습니다. ‘핸드폰 요금이 지금보다 갑절이 나가도 내줄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염려되는 것은 이 요금이 나오려면 많이 핸드폰을 썼을 텐데 그렇게 정신이 갈려서 무슨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는가. 절제해라 절제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니?’하고 보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뭐가 중요합니까? 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파괴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원하시는 것 자체가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화초를 기르듯이 그렇게 자녀를 길러야 합니다. 교회 마당 잔디밭에 잔디가 잘 나왔습니다. 그 잔디가 안나온다고 회초리 때리고 발로 밟습니까?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마당에 나무를 심어놓고 노심초사했습니다. 잎이 안나와도 때 되면 물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기다려 줬더니 이제 잎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자녀도 그렇게 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최대의 목표는 그 아이가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나는 부족한 아버지 엄마지만 보다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충분히 사랑하시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도 없는 것처럼 우리를 대해주신 것처럼 그렇게 자녀들을 대해야 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 자녀 때문에 자신이 부모라는 사실에 대해서 행복해 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공부 왜 안 하니’ ‘몇 점 맞았니’ ‘왜 이 따위로 공부 하냐’ 저도 그랬습니다.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공부를 못할 수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항상 문제로 삼는 것은 자세입니다. ‘네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능의 문제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의 본분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악이다. 그래서 아빠가 문제로 삼는 것은 후자다’ 말을 비비틀어서 말장난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왜 공부 못하냐고 하지만 여러분들도 못해놓고 뭘 그러십니까? 그래도 이렇게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대개 하나님 앞에 나쁜 자녀인 부모들이 자식들의 어떤 행동이나 부족함을 보고 그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의 장애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진짜 좋은 자녀가 되고 나면 사실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가능해집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자기가 잘못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그 부모의 자기를 향한 사랑이 조건 없는 사랑이고 학교에서 학원에서 사회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때문에 내게 온 사랑이라면 그것은 세상 어디에서든지 맛 볼 수 있는 사랑인데 아버지는 언제나 거기 계셔서 나를 기다려 주시고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것을 부모를 통해서만 맛보게 되어있지 다른 곳에서는 맛 볼 수 없습니다. 그 관계가 바로 생명이 서로 결탁되어있는 관계입니다.
언젠가 훌륭한 대학의 한 교수의 인생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학을 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2년 반이 지나도 진전이 안보였다고 합니다. 조금만 있으면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와야 하는데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이것을 계속해야 하나 지금 그만둬야 하나 하며 갈등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짤막한 편지를 받았답니다. ‘아들아,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 처음 마음먹은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라’하는 아버지의 편지가 자기의 인생을 바꿨답니다. 그 편지를 보고 한없이 울고, ‘그래 내가 한번 마음먹은 이 길로 가는 것이 옳다’하며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교통의 통로입니다. 이 에너지 없이는 그 아이들이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자원을 힘입어서 살 듯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정한 자원을 그 부모를 통해서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가정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가 백골난망입니다. 그런 축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처럼 바보 같은 전철을 밟지 말고 깊이 회개하고 그 아이의 어떤 특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태어났고 이 세상에서 나의 인격과 신앙이라고 하는 둥우리 안에서 이 아이가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그렇게 아이를 위탁한 사람이 그 아이에 대해서 이 전 세계에 나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내 신앙과 인격 안에 충분히 거할 수 있도록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하든지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장사를 하든지 회사원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선생님이 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을 부모인 여러분들이 하면서 먼저 자녀들에게 그렇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자녀인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이 설교를 계기 삼아 잘 묵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것은 아니라는 것을 저처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아이로 땅을 정복하게 하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느닷없이 창세기 1장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을 읽은 이유는 이것이 지난주부터 우리들이 살펴보는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메시지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진리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축복을 동반한 명령이 인간의 죄에 의해서 좌절되었고,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도 결국은 이 축복을 동반한 명령이 다시 실현되기를 기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해 놓으신 다음에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는 명령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전자를 가리켜서 우리가 흔히 노동명령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는 것은 노동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명령 혹은 문화명령이라고 말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하는 것은 종교명령이라고 분류를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확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유지하며 계속되기를 원하셨던 관계는 절대의존의 관계입니다. 절대 의존하면 반드시 절대 순종하니까, 인간이 계속 그렇게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지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충만하라는 이 명령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셨지만, 그리고 그 창조된 세계를 하나님이 돌보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통해서 당신이 창조해 좋으신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로 그렇게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할아버지가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기타나 치고 놀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노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 대신 오늘날 경험하는 것과 같은 노동의 고통이나 노동하다 사람이 죽는다든지 과로해서 병이 난다든지 하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굉장히 행복한 마음으로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이 살집이 있을지어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살기 위해서는 자기 집을 지어야 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하나님께서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이 어떻게 짓나 보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것보다 자기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영광을 돌리는 정신으로 온 세계를 그렇게 관리해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피조물들도 하나님과는 물론이고 아담과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아담이 그들을 적절하게 지혜롭게 다스리기만 하면 모두 거기에 복종해서 이 세계는 정말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땅끝부터 하늘 끝까지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서는 번성한 인간들이 다스리는 그 아름다운 하나님을 향한 교향악이 연주되는 것 같은 세상이 되고 하늘은 천사들을 통해서 그렇게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모두 만들어 놓으셨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아담에게 주신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주관할 수 있는 위임된 권한을 오직 아담과 하와, 인간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뭉개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만 교만해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고분고분 순종을 안 합니다.
(예화: 아프리카 사막에 간 어느 선교사 이야기-사자와 사진을 찍으려다가 카메라 플 레쉬가 터지는 바람에 사자가 그 선교사를 해친이야기)
이것은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이 하나님의 명령을 새카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는 하는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서 그렇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지기까지는 하는데 하나님의 세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다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어지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로만 세상이 가득 차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거기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수이지만 언제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안된 사람들에게는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땅의 주인이 있는 것은 불법 점거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으니까 관리자가 없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었는데 아담과 하와부터 구원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손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하고 타락한 자식도 나오고 구원받은 자식도 계속 나오는데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안에 입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속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입적이 되어서 그 자녀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통해서 상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땅을 각기 사람들이 점거하고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다 인정하면서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이 주인이 아닙니다.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집안의 자녀로 입적되어있는 우리가 상속받을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후사는 법적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녀를 이야기하는데 그리스도가 후사이면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등기하고 세상 법적으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볼 때도 황당한데 정작 이 우주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당신 땅인데 사람들이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이 왕이신데 자기가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정복해 가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옛날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종을 보내어서 강력한 나라를 일으키고 군대를 일으켜서 다 때려부숴 버리고 빼앗아서 하나님이 자기 것을 찾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의 상이 너무 초라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윗 시대 때에 강대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강대국이 되었으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애굽이나 중국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손톱만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땅을 점령하신다고 해서, 요단강 건너편의 땅을 조금 넓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드러나겠습니까?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복하시는 방법이 그런 육적이고 물질적인 방법이 아닌 영적인 방법으로 정복해 가시는 것입니다.
물론 때가 되면 하나님의 것인데도 그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까불던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다 쓸어버리십니다. 싹 쓸어서 정리해버리고 하나님을 정말 이 창조 세계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창조된 세계를 다시 되찾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되찾으시냐면,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이 자기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영광을 받으실 만유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당장 무기를 들고 가서 땅 가진 사람에게 가서 ‘우리 아버지 땅이니 내놔라’ ‘네 아버지 어디 계신데?’ ‘하늘에 계시다. 네가 불법 점거하고 있는데 빨리 내놔라’하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은 조폭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나를 보고는 절대로 그 땅을 내놓을 리가 없으니까 그 땅 주인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해서 예수 믿게 만들어서 나도 왕년에는 저렇게 땅덩어리 하나 차지해서 ‘이거 내 땅이다’하며 담장을 높이 쌓고 ‘여기서는 내가 왕이다’하며 까불고 살았는데 어느 날 예수님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고 나니까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다스려 주시옵소서’하는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내게 이렇게 넓은 땅이 있는데 이 땅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하며 거기에 카바레 만들어서 분양할 일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하는 데 쓰여지게 하는 것처럼 저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를 받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땅이 하나님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들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악과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 하늘 자원이 끊어졌기 때문에 온 것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오는 증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죄를 해결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늘 자원이 끊어졌는데 땅의 자원을 긁어모아서 자기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자원만 가지고 안되니까 사람을 치고 죽이고 뺏고 야비한 경쟁, 그렇지 않더라도 탐욕을 가지고 땅의 자원들을 있는대로 긁어모아서 자기가 착복을 하고 그것들을 공급해줌으로서 자기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지하실도 못 들어가서 사는데 자기는 수백 평의 집을 짓고 살고 다른 사람들은 밥도 못 먹는데 자기는 황제처럼 밥을 먹고 이런 식으로 해서 무한대로 자기에게 자원을 공급해서 자기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잘못을 저지른 것인데 첫째 영혼의 질병은 하늘의 자원이 끊어졌기 때문인데 하늘의 자원이 끊어진 인간의 질병 상태를 땅의 자원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또 하나는 나기 것만 누리고 살아야 되는데 남의 것을 탐욕으로 빼앗으면서 살았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또 문제가 됩니다. 그것도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행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의 자원조차도 균등하게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몰리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서 그것을 가지고 별의별 짓을 다하면서 죄를 지으면서 살고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없어서 고통받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점점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어간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것도 적절해야 발전하는 것이지 너무 치열하면 경쟁에 진 사람들이 공정한 방법으로서의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행복해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한을 품은 사람들이 적어야 합니다.
이번 주에 병원 응급실에 두 번 갔는데 얼마나 불친절하고 물건 다루듯이 다루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살다가 죽는 나라가 될 수 없을까?’ 사람이 얼마나 고귀합니까? 그 사람 고치는 의료 기계도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다음은 사람입니다. 제대로 친절하게 안하고 틱틱거리는 그 사람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계 하나만도 못한 것처럼 취급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슬픕니다. 병원에 자주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좀 좋은 옷 못 입고 좋은 차 못타고 집 좀 작은 데 살아도 최소한도 먹고 몸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학교에 다니면 과외 할 필요 없이 열심히 선생님 존경하면서 공부하고, 하는 사회가 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비결이 오늘 설교에서 나옵니다.
이 자원조차도 공평하게 배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열심히 돈 벌어서 남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남 줍니까? 그런 식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됩니까? 기업들이 사회에 이익금을 환원한다고 하는데 수천 억을 벌고서 1억을 합니다. 그 광고 할 돈으로 차라리 이웃을 도우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부가 분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직업활동을 열심히 해야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릇이 다 틀리니까 누구나 다 자기 분야에서 일인자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능력이 처음부터 모자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부지런히 노력해서 자기 분야 전체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면 자기와 똑같은 수준 중에서 첫째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동차 정비 업소도 1급, 2급 3급 업소가 있습니다. 2급 업소에서 대형 버스나 트레일러는 못 고쳐도 2급 중에서는 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부가 되었든 회사원이 되었든 교사를 하든 자기의 일에 대해서 욕망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가끔 사업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목사님 저는 욕심이 없습니다’하는데, 저는 속으로 ‘욕심 낼 처지가 안 되나보구먼’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저는 욕심이 없습니다’하면 안됩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신앙을 팔거나 신앙을 도외시하면서 까지, 하나님을 뒤에 두면서까지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한다면 칭찬할만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지 그까짓 게 뭐 중요합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직업과 자기의 사업, 연구, 이런 것들이 수많은 박수 갈채를 받고 그것이 내 인생에 아무리 큰 즐거움을 가져다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을 그런 식으로 포장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 포도의 비유)
자기 일에 대해서 욕심을 갖는데 탐욕을 가지면 안됩니다. 주안에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슈퍼마켓 하나를 해도 그 슈퍼가 당장 백화점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동네에서는 제일 친절하고 좋은 슈퍼, 장사 잘하고 경영을 잘하는 슈퍼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사업은 웬만하면 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많이 하고 지혜를 구해서 사업을 잘 일궈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빼앗긴 하나님의 상속분을 자꾸 되찾아야 합니다.
직원 수를 자꾸 늘려서 고용주와 고용인들이 관계를 맺게되면 고용주는 고용인에 대해서 굉장히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게되는 것입니다. 재벌 오너는 신비에 싸인 존재입니다. 그 속에는 진정으로 자신의 기업의 오너를 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만큼 고용주는 고용인과의 관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는 이 세상의 자녀들은 양심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서 그 돈으로 비자금 만들고 노동 운동 운동하는 사람들 뒤에 가서 해코지나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주 부도덕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그룹들의 역사에서 우리가 다 보았습니다. 거짓말로 돈 세탁해서 직원들에게는 만원 짜리 한 장을 주기 싫어서 벌벌 떨던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가서 부정한 관리들에게 사과 궤짝으로 돈을 안겨서 비자금을 주고 부당한 방법으로 기회를 얻어서 그 부담은 국민들에게 떠넘기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들이 하나님의 유산을 관리해 가는 방법입니다. 자기네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해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신앙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살아가는 방법들을 배우면서 자신들은 양심의 가책이 없이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것과는 아주 다른 부적절한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칼 들고 가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내놓으라고 하면 우리보고 정신병동에 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마지막 정리하실 때까지 어쩔 수 없이 두신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서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이 손에 넣고 더 많이 지경을 넓히고 더 많이 영향력을 확대해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녀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 받으시지요? 저도 학부모라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를 제가 어떻게 정리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 얼굴이 못생긴 것은 참을 수 있겠는데 공부 못하는 것은 정말 너무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러면 부모인 우리들은 잘 했느냐면 사실 우리 부모도 우리 때문에 엄청 속 썩었습니다. 자식보고 공부 안 한다고 하지만 그 부모가 공부 안한 것은 할아버지가 압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때 일이고 어떻든 나는 지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아주 잘하라는 것도 아니고 2, 3등만 하라는 것인데 그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청 스트레스 받는데 만일 밑에서 2, 3등하고 아무래도 진급을 못할 것 같다고 하고 고등학교는 어떻게 할 것인지 부모님과 의논하라고 하고 얘는 아무래도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말이 계속 들릴 때 그 때 부모가 받는 이 심정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다음에는 아이한테 와서 아이에게 말로 깊은 감화를 주어서 ‘아 그렇구나, 내가 정말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얼굴에 심한 모욕을 돌렸구나. 공부해야지’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교과서를 필 정도의 감화를 줄 수 없으니 아이를 때립니다. 그러면서 공부 안 한다고 닥달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평범한 부모였습니다. 돈도 걸어보고 별 짓을 다해봅니다. 그런데 참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던 언제가였습니다. 제 마음속에 드는 선명한 생각이 ‘너 그렇게 네 아들 공부 안 한다고 스트레스 받고 오늘도 팼는데, 공부 잘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생각이었습니다. 속에서 대답하기를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왜 가는데?’ ‘대학 떨어지면 창피해서 어떻게 하냐?’‘그래서 창피를 면하면 뭐 하는데?’ ‘그래야지 만 하다못해 회사원이라도 되어서 밥벌이라도 할 것 아니냐?’ ‘그러면 뭐 하는데?’ ‘그래야 엇비슷하게 짝을 맞출 것 아니냐? 거렁뱅이한테 누가 시집을 오겠냐?’ ‘그러면 뭐 하는데’ ‘아니 그렇게 해서 애 낳고 사는 게 아니겠냐?’ 계속 그런 논의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쪽에 있는 내가 말발이 너무 딸렸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렇게 공부를 해서 웬만한 좋은 학교 가서 참신한 여성을 만나서 네 손자 손녀 낳고 그렇게 살면 그 아들이 공부 한 것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 부분에 가서 생각이 딱 막히는 것입니다.
그 때 느낀 것이 ‘내가 정말 자식을 위한다는 미명하게 공부 안 한다고 속을 끓였는데-뼈저리게 눈물 흘리면서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내가 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했는데 사실은 진짜 이 아이를 향한 생명적 결탁 속에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졌나?’ 생각해보니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해야 이 세상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쳐지지 않고 기본적인 생존을 할 수 있으니까 그냥 그런 길을 가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신앙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죄악 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관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성화를 이루는 목표를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진실한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눈이 떠지는데 목회 선상에서 만났던 수많은 젊은 부부들이 생각났습니다. 세속말로 말해서 범생이들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습니다. 좋은 대학 들어가니까 웬만한 직장에 다 취직했습니다. 취직하니까 직장에 가서 좋은 자매들 만납니다. 학교도 좋은 학교 나오고 얼굴도 예쁜, 자기 수준에 맞추어서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 애기 낳았다고 유모차 끌고 교회에 옵니다. 그러고는 직장에서 몇 푼 받아먹고 살고 친정 가서 꿔달라고 졸라서 아파트 사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떠올리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아이에게 폭언을 하고 닦달하고 아이를 구속하고 심지어는 구타하고 마음속에 아이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자녀들을 기르는 방법일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거기에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드물지만 놀 때도 공부하면서 노는 유별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몇몇 특별한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공부에 대한 관계가 여러분들의 거룩한 생활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교회에 오면 항상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본분을 자각합니다. 그런데 보따리 싸서 교회만 나가면 그 마음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요일에 머리 긁적이며 들어와서 훌쩍이며 회개합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 자신이 공부 자체가 재미있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 맛을 알 정도가 되면 공부를 꽤 하는 아이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절대로 그 맛을 모른 채 학교를 졸업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적절한 자극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계속 위로만 하면 여러분의 신앙이 망가지듯이 자녀들에게도 그런 일이 필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에게 매를 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이상 들어가면 너무 늦은 것입니다. 매는 초등학교 유치원 그 이하에서 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잘 설득해서 공부해야 할 목표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이만큼 살았는데 얼마나 정복했습니까? 내가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영광에 어긋난 방법으로 마구 낭비되었을 자원들을 여러분이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올바르게 관리하고 올바른 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있었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존재가 되지만 삶에 있어서 우리들이 그런 기회와 자원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얼마나 했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사람들은 많이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절대로 객관적으로 못 봅니다. 주관적으로 봅니다. 돈을 보면 ‘이거 다이아몬드 반지 몇 개 사겠다’ '땅이 몇 평이겠다‘하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 생각의 발상이 자기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위한 자원에 대한 발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진실한 신자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돈이 많이 벌려도 그것 때문에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마음대로 못 쓰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은행에 가면 자루들이 들어오는데 커다란 포대에 3억 원이 들어갑니다. 그런 포대 열 개쯤 풀어놓으면 그 은행 직원들이 눈길 한번 안 줍니다. ‘얼마예요’하고 세어서 영수증 써주고 갑니다. 그 돈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돈입니다. 그러나 25일 월급타면 봉투 열어보고 ‘왜 이렇게 많아’ ‘에게 요만큼이네’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돈을 많이 벌었어도 결국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것들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계속 다스려 나아가야 합니다. 제자리에 갖다 놔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돈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보다는 신앙이 좋은 사람에게 돈이 모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틀림없이 나쁜 짓 합니다. 세상을 더러운 세상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에 씁니다. 그런데 신앙이 신실한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사용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큰 사업을 하면서 경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단은 자기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경건하게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이 기도 많이 해서 직장에 갔는데 매일 이중장부 쓰게 하는 것입니다. 장부해서 죄짓고 와서 주일날 회개하고 월요일에 다시 또 범죄 합니다. 이런 경영적인 구조 속에서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 경영주가 신실한 신자이면 ‘정직’하고 한번에 정리해버리면 깨끗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밑에서 일그러진 인생을 살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안하게 하나님의 규칙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런 일들을 하라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냥 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자녀들을 가르칠 때 그런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실하게 공부해서 뛰어난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가는 방향으로 가소 중간쯤 하는 아이들은 중간쯤 하겠지만 어떻게 하든 성실하게 공부하고 주어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서 어느 분야로 가든지간에 그 분야에서 소명감을 가지고 ‘이 일그러진 세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나는 정복하러 간다’하는 정복자의 마음을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땅을 차지해서-땅이 물리적인 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지할 때 다른 사람들이 차지했더라면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모든 잘못들을 내가 차지함으로서 내 탐욕을 버리고 그것을 올바른 위치에 놓겠다’하는 소명을 가진 사람들로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다시 신앙으로 돌아옵니다.
신앙으로 돌아와서 우리 자녀들의 내면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의 마음, 어린아이라도 깨닫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내 본분이 이런 것이고 나는 이 일그러진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일그러진 세상을 내가 펼 수 있도록 하나님이 더 많은 땅과 기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지금 공부하고 지금 직장을 다니고 지금 내가 사업을 한다’는 소명감을 넣어줘야 합니다.
(예화: 대학에 있을 때 조교가 자기 동생 이야기를 했다-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바닥 이었는데 겨울 수련회에 가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방 법이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서 지금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선명한 깨달음을 얻고 무섭게 공부하게 되었다는 내용)
목표가 분명하게 세워지면 그 나이의 아이들을 거의 못 말립니다. 불량한 아이들도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아깝지 않게 그 목표를 위해 집어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식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아주 세속적이고 더러운 인간에 머물러 있는데 잘 살아서 많은 부를 누리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면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탐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이의 진실한 회심을 위해서 먼저 많이 기도하고 이 아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하게 발견하고 이 세상을 정복해서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아야 될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경건한 생각을 가진 부모가 그런 자녀들을 낳고 그런 자녀들이 계속 아이를 낳아서 이 세상을 더 많이 정복해서 하나님 앞에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정치계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정치를 정말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백성들의 흘리는 눈의 눈물을 닦아주는 봉사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부정과 부조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정치하는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정치계에 나가서 자리를 차지하면 그보다 훨씬 열등한 정치인들이 좀 못 들어오지 안겠습니까? 대세를 형성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화:미국의 정치인 스캔들 사건들을 보고 놀랐다-적은 돈을 받고도 스캔들에 걸린다 정말 깨끗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정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유행가를 가끔 들어보면 욕과 쌍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데 진출해서 온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몰아서 싹쓸이해서 찬송가를 보급하기는 힘들겠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노래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해서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그런 역할들을 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녀들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진심으로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세상을 단지 돈 벌어먹는 벌판 정도로 본다면 그 아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아무리 자기 생활을 성실히 한다고 해도 그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는 힘듭니다. 그러니 자녀의 진실한 변화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그렇게 진실한 자녀가 더 많은 기회를 갖도록 그 아이에게 깊이 자극을 주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기다려 주고 해서 이 망가진 세상들을 우리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후손들이 올바르게 펴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게 하십니다. 살아가며 조금씩 생활의 수준이 나아지는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보디발의 종으로 끌려갔습니다. 들어갔을 때는 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 집에서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아서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무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위치와 신분이 바뀌어도 신종일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올 것을 알면서 수많은 곡식을 예비하는 것이 이렇게 함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지혜와 의도를 가지고 자기의 일을 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요셉의 지혜로 말미암아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자기가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맡기셔도 거기에 넘어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관한 한, 세상의 지위에 관한 한, 변함없는 성경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에 벼락으로 맡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시험해 보십니다. 적은 물질을 맡기시면서 어떻게 쓰는지 시험해 보십니다. 이 시험에서 합격되면 하나님께서 맡기십니다. 아주 높은 자리에 올리시기 전에 하나님이 웬만한 자리에 올리셔서 시험해보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요셉을 국무총리에 올리시기 전에 먼저 보디발 집의 가정총무로 삼으셨습니다. 그 때 거들먹거리면서 노예들이나 박해하고 주인집 여자와 농간이나 부리고 했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높이셨을까요? 절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뭔가 한번에 대박이 터져서 금시 발복하는 그런 사건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꿈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반드시 맡겨보시고 하십니다.
그러면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셨을 때 우리 자신이 ‘이 자식 어디 가서 밥이라도 벌어먹게 만들어야 되는데’하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 서글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에 내가 꾸고 있는 이런 꿈을 꾸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땅을 정복하고 확장하고 충만해져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해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일그러졌을 그런 일들을 올바른 자리에 다 펴는, 물질을 맡겨주시면 물질을 가지고 다 펴서 올바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처럼 주님 보시기 선하게 하실 것인가, 권력을 맡겨주시면 그 권력을 가지고 어떻게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마음에 들도록 할까, 그래서 그 아이를 하나님이 높이시고 높이셔서 그렇게 하나님이 사용해주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건한 가문에서 경건한 자손이 나오고 하면서 땅을 정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그 아이들에게 이런 사명감을 고취시켜야 합니다. 공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생각해라. 이 세상이 먹이가 아니다. 이 세상이 원래는 하나님 것이었는데 저 나쁜 사람들이 하나님 것을 모두 불법적으로 빼앗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합법적으로 빼앗아서 하나님 안에 있는 세상인 것처럼 그렇게 바꿔 놓도록 하나님이 우리 가족들을 불러주셨단다. 엄마 아빠가 이만큼 살았지만 요만큼 밖에 그 일을 못했다. 이제 내 대를 이어서 그 일을 완수해야 될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이렇게 신앙생활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성품도 게으르고 이렇게 해서 무슨 하나님의 그런 커다란 목적을 이룰 수 있겠니?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라 . 그리고 부지런히 세상을 향해 큰 꿈을 꿔라. 큰 꿈을 꿔서 잘 해라’
그리고 여러분도 그런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전투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직장을 다니면 군대 다니는 것처럼 다녀야 합니다. 출근할 때 목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끌려가고 퇴근할 때는 총알같이 나오면 안됩니다. 사업을 하면 눈에서 반짝 반짝 빛이 나고 밤에 잘 때도 사업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고 해서 잘 해야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일그러진 세상을 제자리로 고쳐놓으실 것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의욕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죄송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안 하면 이 땅을 누가 고칩니까? 불법한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점령하고 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더럽히고 있는데 누가 이것을 정결케하고 십자가의 깃발을 꽂아서 다시 하나님 것으로 돌려 드리냐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 더없이 소중하고 귀하지만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기업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을 위해서 소신껏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우리도 성취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살고, 자녀들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부지런히 힘써서 가르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부모 공경을 말하기 전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지난 3주에 걸쳐서 ‘아이의 생명과 결탁하라’ ‘아이에게 분에 넘치는 기대를 가지고 관계를 망가트리기까지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무자비한 삶을 버려라’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부모와의 관계로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공경하라’에 쓰여진 동사가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할 때 쓰여진 동사와 같은 동사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이 계명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생활과 창조질서의 유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십계명을 보면 그 계명이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계명 가운데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즉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라’하는 계명은 사실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냥 명령하시니까 우리는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주어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만약에 그 계명을 지키면 이 땅에서 장수하고 잘되리라’고 하는 약속이 붙어있기 때문에 저는 이 십계명 중 부모 공경의 계명을 ‘현상금 붙은 계명’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데 현실은 부모를 공경할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많은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서 상처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모를 마음 깊은 곳에서 공경하고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존경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녀는 이미 상당히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그래서 우선 마음속에서 부모를 공경하기는커녕 미워하는, 내지는 화해하지 못하는 이 속에 있는 마음을 먼저 정리하는, 부모와의 화해가 없이는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은 억지로 하는 계명의 실천 밖에 되지 않고, 그럴 경우에는 그것이 부모님에게도 받으심직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에게도 역시 받음직 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모 공경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단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뿐인 과거와 화해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녀로서 부모에 대한 규정된 마땅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진정한 효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오늘 성경에 읽은 바와 같이 의무를 다하는 단계에서 뛰어넘어서 자식인 자신의 존재와 행위 때문에 부모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 효의 진정한 성경적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일그러진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앙케트에 보니까 20대 젊은이의 78%가 자기 아버지가 밉다고 답했답니다. 나머지 22% 중에서 ‘우리 아버지 그저 그래’를 빼버리고 나면 진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한번 이 문제를 공정하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녀의 입장에서 함께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든 부모들은 상대적으로 자식들이 이렇게 마음속으로 화해하지 못하는 상처를 안고 있으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영적이고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인격적으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깊이 용납하는지 안 하는지 당사자들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어머니 아버지들이 너무 소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젊어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그 가슴앓이를 하며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내지만, 우리의 부모는 마음을 열지 않고 상처 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노년을 그렇게 외로움과 소외 속에서 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똑같은 짓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부모가 자신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빨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 어머니와 화해하고 그분들을 따뜻하게 용납하는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루지 못함으로서, 의도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젊은 날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을 노년의 부모에게 앙갚음하는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에게 상처 준 게 뭐 있나? 내 언제 앙갚음했나? 생활비 또박또박 보내드리고 자식 할 노릇 하는데’ 그래도 여러분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부모가 여러분들에게 무슨 상처를 그렇게 많이 줬습니까? 밥을 안 줬습니까, 굶겼습니까? 학교를 안 보냈습니까, 아니면 옷을 안 입혔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우리가 어떻게 밥이나 옷, 학교 보내는 것만 가지고 자랍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노년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은 부모에 대한 증오심, 부모가 자신에게 준 과거의 상처, 이런 것들과 더불어서 빨리 화해하고 그 부모님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주 고귀한 존재로, 그분들이 이 땅에 살아 계신 것이 나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고 의지가 되는 관계로 화해하고 고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화를 만드는 일은 항상 많은 희생과 고통을 동반하게 됩니다.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신적인 고통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에게 진짜로 물리적으로 복수해서 한을 풀던가 아니면 마음으로 그를 끊임없이 미워함으로서 복수심을 유지함으로서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는 그 모든 위로의 기재들을 마음속에서 털어 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화해하고 그 화해를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화: 옛날에 다듬이질과 방망이질이 여성들의 정신건강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게 풀 수 있는 무엇인가를 치워버리는 것은 그 자체가 큰 고문입니다. 하물며 마음속에 있는 미움, 어느 날 아버지가 와서 ‘얘야, 젊은 시절 내가 바람피우고 너희들 돌아보지도 않고, 너희 보는 데서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돈 벌어서 허랑 방탕했던 것 정말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단 한번만이라도 진실 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식인 우리에게 참회를 하면 ‘아버지 지나간 일이데 뭘 그러세요’하며 끌어안고 용서해 주겠는데 이 세상의 아버지 중에서 그렇게 하는 아버지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영원히 그런 것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안 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정말 하나님을 만난 분이거나 깊이 뭔가 감화를 받지 않고는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자식으로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용서해 달라는 타원이 없는데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그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딘들 없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가정을 내팽개친 아버지로 인해서 고통받으면서 살아온 쓰디쓴 날들, 또 아버지가 바람이나 피우고 외간여자를 얻어서 어머니가 가슴아파하는 그 저리 저리 아픈 사연들을 장시간동안 보면서 성장한 것, 그 자체가 여러분들에 대한 강력한 무언의 폭력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는 인간으로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너무나 무능해서 술과 도박으로 소일하면서 가족들은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서 한 가정의 리더가 되기에는 인격적으로 너무나 조잡하고 너무나 배운 것이 없고 교양이 없어서, 누구 앞에 우리 아버지를 내놓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 바람 난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그런 가정을 가진 자녀들로부터 시작해서, 그 정도는 아니어도 유난히 아이들에 대한 징계가 심해서 어둡고 칙칙한 나날들을 보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 같은 것을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쏟아놓으면서 한을 머금고 살아간 우리의 어머니들, 여러 면에서 내가 그 나이가 되어 우리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은 그런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어머니로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폭력을 가한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부모가 자녀에게 해 주어야할 가장 커다란 사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참으로 어머니 되고 아버지가 아버지 됨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이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본분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인생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식을 낳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낳아도 자식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돈이면 해결될 줄 알고 돈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공부를 시키면 해결될 줄 알고 돈을 많이 투자해서 좋은 학교를 보내고 좋은 데 시집을 보내면 해결될 줄 알고 엄청난 돈을 들여서 딸자식을 좋은 집에 시집 보내지만 그것이 그를 결단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부모님과 살아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이고 말할 수 없는 상처입니다. 그것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상처와 폭력을 받으면서 자란 자녀들이 기본적으로 자녀의 의무만 다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어머니 아버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효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님은 우리보고 그렇게 끔찍하게 우리에게 상처를 준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더불어 깊이 용서하고 화해해서 의무를 다할 뿐만 아니라 밤이나 낮이나 그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고 말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또 에베소서에 나오는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모두 안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명이 아니라 믿은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교회의 회원들에게 주어진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실질적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정말 이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이조시대 때는 유교가 성행해서 많은 자녀들이 열녀문을 세우고 부모에게 효를 다했는데 얼마든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그 열녀문이니 효자니 하는 사연을 한번 뒤로 캐가 보십시오. 부모에게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 그 도덕에 복종하고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며느리들의 가슴에 한이 맺히고 못이 박혔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그때 지금처럼 시어머니에게 대들고 싸우고 심지어는 시어머니를 내쫓는 일들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국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화해 없이 요구되는 사회적이고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그런 강요받은 효를 이행하도록 억압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 깨트려진 상처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할머니께서 76세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시어머님이 살아 계셨는데 시집살이가 심해 자살을 몇 번씩 결심하고 도망가고 싶으셨다고 한다. 며느리로서 역할을 다 감당하셨지만 끝까지 그 시어머니와 화해가 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참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효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자기를 망가트리면서 효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정말 자신도 살고 부모에게도 효를 행하는 일들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효도하도록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가르침은 아주 탁월하게 유효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부모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받은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훨씬 크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모든 효도에 앞서서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정말 내 부모를 사랑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사랑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기쁨(delight)입니다. 기뻐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데 보고 싶지는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만 해도 기쁨이 샘솟아서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많은 슬픔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큰 것이 기쁨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있냐는 말입니다.
두 번째 사랑의 또 하나의 정체는 소중히 여기는 것(valuation)입니다. 사랑하면 천하게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심한지 다른 것들은 갑자기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부모님들이 살아 계신 것, 그 부모님의 존재가 여러분에게 소중합니까? 혹시 우리의 효도가 이러한 기쁨과 소중히 여김에서 출발한 사랑에 기초한 효도가 아니라 ‘나를 그렇게 상처 주더니 오래도 사네. 이제 당신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어. 돈도 내가 많고 힘도 내가 많으니 있을 때 그래도 내가 해드려야지’하는 것은 적선적 효도입니다. 동정적 효도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자기에게 주는 그 효도가 애정적 효도인지 적선적 효도인지를 평생 가슴에 묻고 말은 못합니다. ‘너 왜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을 많이 준 부모들이라면 자신들이 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 노인들을 보면 눈물이 나도록 측은합니다. 만약 노년이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분들이 자녀인 여러분들을 참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명과 결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늙기 전에는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부모들이 여러분들에게 했던 것처럼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진심을 주고, 그 아이의 생명과 결탁하고, ‘공부는 좀 못하고 얼굴이 못생기고 재능이 좀 모자라고 정리 정돈을 못하고 덜렁대도 자녀인 너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내 형상과 모양을 가진 너희를 자녀로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아빠에게는 정말 가슴 시릴 정도의 감동 그 자체다’하는 것을 아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아이의 어린 시절에 함께 해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잘 하면 동정적 효도를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원하십니까? 사실 동정적 효도를 받을 바에야 내 돈 가지고 내가 살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자녀들에게 그런 동정적 효도 정도를 받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이 아이 그 자체와의 관계를 아주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없는 관계입니다. 자녀와의 관계는 자녀와 밖에 가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생명과 결탁된 사랑의 관계를 가진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대할 때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동정은 효도가 아닙니다. 저는 자녀들이 자라서 저에게 그렇게 동정적으로 효도하면 그 효도 안 받고 내 돈 가지고 내가 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모님을 여러분들이 정말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먼저 되물어야 합니다. 그분들이 살아 계신 것이 은근히 나에게 부담되는 것은 아닌가? 그분들의 존재가 나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힘겨운 십자가,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 주된 원인입니다. 그것을 끌러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끌러버릴 수 있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하셔야 하는데 첫째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자녀들이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이 계명은 항상 부모님이 나에게 해준 것, 부모님의 존재, 부모님이 해준 대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를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속에 오가는 생각까지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권을 행사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배제된 영역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우리의 재물, 우리의 삶 전체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 우리의 행복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오가는 생각 모든 것까지도 주님의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시기시기 마다 충전되어야할 지식들이 있습니다. 연령별로 충전되어야할 최소한의 지식들이 있는데 제때 충전되지 않거나 결혼한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을 세 살 짜리 에게 가르쳐 주거나 세 살 짜리 에게 필요한 지식을 40먹어서 비로소 가르쳐주면 인간 자신이 생존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성장하면서 받아야할 사랑이 있습니다. 처음에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사랑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 다음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절대적인 영향을 줍니다. 자라면서 동기간들의 우정이 영향을 주고 가정을 벗어나면서 친구들의 사랑이 영향을 줍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배우자로부터의 사랑이 필요하고 더 나이 들게 되면 자식들로부터 사랑이 충전되어야지 만 살아갈 수 있는 피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에게 사랑을 충전 시켜서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참사람으로 완성해 가도록 되어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랬을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결혼해서 남편으로부터 흠뻑 사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그래서 경험하게 된 상처와 고통, 이 성품의 일그러짐은 남편이 아무리 많이 사랑해줘도 그것이 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아내로부터 깊이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남편, 남편으로부터 깊이 고임을 받지 못하는 아내는 좋은 가정에서 충분한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배우자의 사랑 없이 넉넉히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이 그렇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못 받아서 성품적으로 다 일그러지고 망가졌던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 그가 정말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아들은 아무리 신앙이 좋아져도 정상적인 가정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정말 상처뿐인 가정에서 자랐는데 하나님 만나고 깊이 변화되니까 좋은 가정을 이루어 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생에 꼭 필요했던 필수적인 사랑을 못 받은 모든 결함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 도다
그렇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아버지의 아름다운 사랑을 받으면서 그 인자함 속에서 성장하지 못한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었고 더욱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도덕한 삶이나 폭력을 통해서 상처받았던 우리 어린 날들의 동심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질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젊은 날 동안 무수히 방황하고 거기에서 받은 많은 상처 때문에 모방적 보복 심리 속에서 자식들에게까지 다시 전수시켜주는 불행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만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이상적으로 사랑해주시지 않았어도 우리 어머니는 나를 꼭 필요한 때에 그렇게 천사처럼 따뜻하게 돌보아 주지 않았어도 너무나 필요한 시기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주님조차 등진 채 상처뿐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기를 우리의 인생의 본분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던 무지막지한 인간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악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 무지몽매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중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택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십자가의 그 놀라운 복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보다 나를 백만 배나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우리 어머니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시고 어머니 아버지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는 그 참 어머니 되심과 아버지 되심이 하나님 한 분 속에 모두 들어있다는 사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시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우리에게 비난받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를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고 이 온 우주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랑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절망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눈 어두워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눈이 감겨서 보지 못하는 그 멸망할 죄인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특징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구속의 은혜를 받고 분에 넘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만한 그런 선한 것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까?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하나님 없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홀로 살아가는 우리를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어둠 가운데 상처받은 채 울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부모도 깊이 사랑해주지 않는 우리를 정말 자기의 자녀로 생각하시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분의 품안에서 받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누리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누렸습니다. 마치 다윗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철저히 소외된 인생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그 가슴에 상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해 주시려는 듯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자비,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무한하신 은혜, 그리고 그 긍휼, 쏟아지듯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이었는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데,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 하는 이 세상 신의 자식이었고, 진노의 자녀였으며, 버림받은 채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가던 인간들이었는데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적을 보는 대신에 당신의 형상을 가지고 부모로부터도 사랑 받지 못하고 상처에 얼룩져서 살아가는 그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네가 받지 못한 아버지의 참 사랑이 바로 이거다. 내가 너의 아버지에게 베풀어주도록 위탁했던 그 사랑이 바로 이거다. 네가 부모로부터는 이 사랑을 못 받았으나 내가 대신 사랑해 줄께’하십니다.
그래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도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사랑을 다 받고 깨닫고 보니까 전에는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만 정말 좋은 엄마였고 좋은 아빠였던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고 받고 보니까 나도 우리 엄마에게 정말 좋은 자녀였던 적, 우리 아버지에게 정말 좋은 자식이었던 적이 너무 적거나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어버이 주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을 뵙고 나를 보면 언뜻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어머님 아버님이 내게 해준 것보다는 내가 부모님께 더 잘해 드릴걸’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 신앙생활의 모습을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정말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뼈저리게 절감합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말씀을 준비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연구하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까 내가 대체로 하나님을 사랑할 뿐이지 내 안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완전한 아버지가 없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고아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데 내 안에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을 마음에 안 들어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무엇을 마음에 안 들게 하셨기에 내 안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 존재하고 있으며 내 안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반역들이 남아있는가’생각하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못 받은 아버지의 사랑, 못 받은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사랑을- 충분히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너의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전자가 하나님께 대한 것이라면 이것은 부모님들에게 대한 것인데-사실은 그 부모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아버지적인 측면은 아버지가 보여주고 어머니적인 측면은 어머니가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만약 참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그래서 끊임없는 성화의 노력 속에서 정말 우리 부모님들도 ‘내 평생의 소원은 정말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는 고백 속에서 사셨더라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고 상처 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부끄러워할 정도로 그렇게 부도덕한 삶을 살거나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이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우리 부모님이 하나님을 몰랐다고요?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내게 그렇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었을 때 우리 아빠는 장로고 우리 엄마는 권사였습니다’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가 뭡니까? 권사가 뭡니까? 여러분들이 성화의 삶을 살아보면 그렇게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직분이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 것이고 그런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직분과 직함들이 성화의 동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변화되기 전에 교회 안 다녔습니까? 형식적인 신앙생활 할 때에는 여러분들이 신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정말 여러분들을 자녀들 앞에서 참 부모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까?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부모들도 지금 여러분처럼 더 많은 계시의 빛을 누리고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더 많이 깨트려지고 참신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목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어떻게 하면 내 가진 것과 내 성품과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을 힘쓰고 사모하는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여러분들의 부모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아침저녁 읽으시던 어머님의 성경책
손때 묻은 구절마다 모습 살아옵니다
일평생 예수밖에 모르고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눈물 많이 흘린 것을 기억하는 그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를 둔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영광밖에는 모르고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것밖에는 모르며 오로지 예수만 사랑하며 산 신앙의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받은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부모들도 우리처럼 은혜를 많이 받고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성화의 이치를 깨닫고 날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힘입어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승리하는 성화의 삶을 아는 찬란한 빛 아래 있고 그 은혜 속에 있었더라면 우리의 부모들은 아마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만약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빛, 그리고 우리를 향해 가르쳐준 하나님의 선명한 진리의 가르침, 복음의 비밀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고 우리 영혼이 어두움 속에 있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 부모보다 더 완악하고 포악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리 된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고 우리 부모님들의 가장 커다란 잘못은 그분들이 주님을 깊이 몰랐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들, 제도적으로 보면 우리가 우리 부모의 자녀에 불과하지만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은혜의 깊이, 말씀의 지식의 깊이에 의해서 자녀를 아버지 삼기도 하고 아버지를 우리의 자녀 사기도 하고 어머니를 우리의 자녀 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식을 가지고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영적인 어두움과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참 신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우리 부모님도 못 받은 이 지식의 빛을 받았고 우리 부모님도 경험하지 못한 예수 사랑의 이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은총을 경험했으니까, 비록 내 부모가 내 앞에 무릎 꿇지 않아도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형식적인 신앙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오고 동정적인 효도를 겨우 받으면서 살아가는 외로운 노년에 있는 내 부모를 이렇게 대해서는 안되겠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그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입은 사람으로서는 합당한 아가페의 삶이 아니다’를 깊이 자각하면서 동정적 효도에서 인격적 사랑으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들으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부모를 모든 떠나보낸 지체들입니다. 뉘우치고 다시 하고 싶어도 계시지를 않습니다 과거에 잘못을 모두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사랑해드리고 싶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정말 거룩하고 진실한 효도를 한번 드리고 싶은데 계시지 않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이조시대 어느 선비가 그런 시를 지었습니다. ‘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이다 그 감을 품은 직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내가 이를 서러워하노라’ 다시 말하면 그 조홍감, 잘 익은 감귤을 부모님이 좋아하셨는데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것처럼 남의 집에 들어가서 대접받기 위해서 나온 것을 자기도 품고 갈만한 효심이 있는데 품어가도 그것을 반가워할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이를 서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부모님이 이 땅에 살아 계시다는 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 우리에게 속죄의 기회입니다. 부모님을 모두 잃은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없습니다. ‘이제는 정말 회개했는데,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진실한 신자로서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할 지도 이제는 충분히 알게 되었고 순종할 마음도 있는데 부모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꿈에나마 나타나셔서 단 하루만이라도 나의 섬김을 받으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지체들의 고백을 많이 들어봤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아마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할거야’ 살아 계신 동안에 동정적인 효도가 아니라, 명목상의 효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 때문에 부모와 깊이 화해하고, 우리의 품안에서 정말 기뻐함을 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으면서 노년을 지내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그 은혜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결코 무리한 요구거나 감당할 수 없는 강요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우리 부모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무한대의 사랑을, 사랑을 쏟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위해서 베풀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면서 베푸는 그 일에 도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받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수요일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말씀을 듣고 있지만 우리가 가장 어려운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우 없는 우리의 동기간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너무 힘든 것이고 이치에 닿지 않는 고집을 부리는 우리의 부모를 끝까지 용납하고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 이것이 너무 힘든 것이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도,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음을 보일 수 있는 실천의 장이 없습니다. 가끔 어버이날 부모를 여읜 지체들이 저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가슴이 그렇게 아리고 아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부모와 깊이 화해하려고 할 때 어려움은 지금 또 부모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거나 경우 없는 요구를 할 때 그 때 힘듭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에 관하여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5. 자녀의 도리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지난 시간에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부모와의 과거에 대해서 화해해야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화해하지 않으면 어떠한 공경도 실제에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와 깊이 화해를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부모님을 향한 진실한 인격적인 연합함이 있게 됩니다. 그때 떠오르는 것이, 비로소 적선적, 동정적 효도가 아니라 공경적 효도가 가능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경적 효도라고 할 때 이것은 반드시 부모의 인격적 관계를 염두에 둔 공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우선은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우선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항상 자신이 그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가 날 기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그것이 자기의 위치를 자리매김해 주는 사실로 삼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교육을 못 받았다거나 아니면 뭔가 인간사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향이나 뜻들이 자신들과는 너무 다르다거나 혹은 인격적으로 자신들이 본받을 것이 별로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자식으로서의 한계를 넘어버립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아주 금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옳지 않거나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헤치게 만들거나 불신앙적인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식이 어떤 강제적인 물리력을 행사해서 부모의 태도를 바꿔놓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해서 고쳐지는 부모도 없습니다. 부모도 자기를 못 고쳤는데 자기가 그 부모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 마음이 상하고 ‘내 부모가 이런 정도 밖에 안되니까 나는 그 부모에게 굉장히 효도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부모는 인격이나 학식, 교육의 정도나 인품, 그런 것 때문에 자식에게 공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를 낳았다는 이유, 그리고 우리를 길렀다는 이유, 그 이유 때문에 공경을 받을만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효도도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섬겨야지 만 그것이 진정한 효도가 되지 그렇게 하지 않고 곧바로 부모님의 인품이나 성격 됨됨이들을 겨냥하면서 효도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되면 효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이 효도라고 하는 것 자체도 성화 과정을 한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누구에게 대하든지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으로 대하는 그 일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식이 되었으면 부모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으로서 그 부모가 죽을 때까지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를 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문제를 자식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자기보다 훨씬 더 잘 살아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유산도 한푼 안 물려주면 먹고 입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 자식이 짐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식이 어떻든 부모를 돌아보면서 그 부모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위조차 잃어버리고 그런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본적 품위가 어느 정도 될 것이냐는 문제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자식이 가지고 있는 경제 능력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입니다. 자식도 겨우 입에 풀칠하는데 부모님에게 상류층 생활을 하시게 해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식은 자신이 가진 부를 부모와 나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님이 경제 능력이 없을 때에 그런 부모님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불신자보다 더 악합니다. 그러한 원칙 하에서 부모님들의 경제적 필요를 채우는 그 일에 자녀 된 도리를 다하여야 하는 것, 이것이 자녀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사람은 돈에 가장 민감하고 예민하니까 이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이것은 항상 불씨가 됩니다. 남자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부모를 모신다든지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결혼해서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돕는 문제 때문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왜 너네 부모만 주냐?’하는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은 ‘결혼을 하고 나면 우리에게는 두 부모가 생긴다’ 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가가 됐든 친가가 됐든 그렇게 따지지 말고 경제적으로 부모님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면 그 부모님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살 수 있게끔 자기의 경제적인 상황과 밸런스를 맞추면서 기본적인 도리를 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대부분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돕는 문제 때문에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척박한 이기심이 원인이 되어서 마찰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지 고상한 뜻이나 경향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부모님의 경제 생활을 들여다보게 되면 부부 사이에 그런 것 가지고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합하는 가운데 부모님들을 도와야 합니다.
가끔 그런 문제를 가지고 부부가 심하게 다투어서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지는데 첫째 유형은 남편은 부모를 돕도록 아내에게 종용을 하는데 아내가 돈을 잘 안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의 마음이 상해서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드물기는 하지만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돈을 드리려고 하는데 남편이 주지 못하게 해서 싸우는 경우가 있고, 세 번째 경우는 아내가 말을 잘 안 들으니까 건너뛰어서 남편을 돈을 직접 주는 것 때문에 가정에 갈등이 일어나서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 싸움에 휘말린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가슴 아픈 사연이고 참 속이 상할 것 같습니다.
첫째 경우에 남편이 말하기를 ‘경제적으로 우리 부모님을 우리가 안 도우면 안 되는데 내가 벌어다 준 돈에서 일정액을 드리라고 말을 해도 아내가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말을 들어보면 ‘우리가 부모님보다 더 못산다. 그리고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두 분은 밥만 끌여 드시면 사시지만, 우리는 아이들 교육비를 비롯해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무조건 주라고 강요하면 1년 지나 갑자기 수입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야 그렇게 살다가 여생을 마치시면 되지만 우리는 아이도 있으니 저축도 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되는데 남편이라는 인간이 생각이 없다’합니다. 또 ‘그래서 내가 안 드렸더니 남편이 나 없을 때마다 몰래 찾아가서 계속 돈을 드리니까 시부모님들 생각은 “며느리가 얼마나 못되게 들볶았으면 아들이 밤중에 차 타고 와서 돈을 주고 가랴”하며 결국은 나를 계속 나쁜 며느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하며 실제로 머리가 터지게 싸우고 집어던지며 사니 안 사니 합니다. 다.
문제가 있습니다. 남편이 도와주라면 도와주지 왜 안 줍니까?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내의 중요한 본분 중 하나인데 그렇다고 집 팔아서 부모님 드리고 바깥에 나가 거적 쓰고 살자는 것도 아니고 20만원이고 30만원이고 더 드려라 하는 정도의 부탁인데 대를 세우고 남편의 의지를 꺾어서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남편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소리소리 질러서 안 되면 잘 달래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지 오죽 못 났으면 그렇게 하라고 해도 그 갈비뼈가 말을 안 듣습니까? 부모님이 얘들이 아닌데 용돈을 많이 드린다고 탈선을 하시겠습니까, 또 탈선할 만큼 그렇게 많은 돈을 드리는 자식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상황이 있겠지만 그런 것을 다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각자 자기 속에 있는 이기심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자식을 기르지만 어떤 때 ‘우리가 자식에게 하는 것 반만 부모에게 하면 부모는 감동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실 것이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는 티셔츠 하나 못 사 입고 발발 떨어도 자식들에게는 해줄만한 것 다 해줍니다. 부모님 댁에는 변변한 텔레비전 하나 없어도 자식 밖에 가면 최신형 컴퓨터 있는 집들이 많습니다. 온갖 편의품들을 다 갖춰놓고 그 돌대가리 같은 자식들 공부시키느라고 과외 시킨다 학원 보낸다 하고 철철이 사 입히고 비만 되도록 먹이는데,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부모님한테 자식으로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 마지막에 자식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내가 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내 자식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사랑의 정체가 기쁨과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미운 짓을 해도 기쁘고 부모에게 대들어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기쁜 사람들, 얼마나 될까요?
(예화: 아버님이 목회 하시던 교회를 물려받은 한 후배 목사님 이야기- 교인이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자기 아버님을 빼고 사진을 찍었다고 볼 때마다 마음 아파했다)
그분에게서는 정말 그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기뻐하고 자기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모든 경제적으로 부모를 돕는 문제를 가지고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좀 도와드리면 어떻습니까? 어떤 집은 남편 몰래 아내가 친정에 돈을 갖다 줬다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쫌스럽게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집을 저당 잡히고 빚을 내서 갖다줬다면 문제가 되지만 살림에서 모아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갖다줄 수도 있는 것이고, 처가에 어려운 일이 있을 것 같으며 남자가 불러서 이런 일이 있는데 좀 도와드리면 어떻겠냐고 먼저 얘기하면 대부분의 부인들이 펄펄 뛰면서 안 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좋아합니다. 그렇게 어떻든 이기심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돈 벌어서 남 준다’는 생각을 하고 내게 무엇인가 여유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인데 더욱이 부모님이 그러하다면 더더욱 우리가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선상에서 다투지 말고 부모에게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관계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이가 많이 드실수록 자식들에게 경제적인 도움도 필요하지만 관계에서 오는 도움을 정말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자신과의 관계를 싫어하고 힘들어한다고 느낄 때 노년이 굉장히 외로워집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부모님과 한시간 좋은 말동무가 되어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 그런 행동도 몇십만 원의 돈을 갖다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떻든 대부분의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와 오래 앉아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안방으로 들어오시면 2층으로 올라가고 2충으로 올라오시면 마루로 내려오고 합니다. 그래서 관계 속에서 부모님이 위로를 느끼시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자식이 그 부모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그런 데서 오는 고독감이 굉장히 큽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다 늙으실 텐데 그 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일을 하셔야 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부모와의 관계를 행복해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아이들과 관계를 다져나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엄마 아빠만 눈에서 사라지면 펑펑 울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립니다. 그런데 청소년만 되어도 엄마 아빠를 슬슬 피해 다닙니다. 더 커서 시집장가 가고 나면, 부모님 만나러 갈 때에는 항상 몇 시에 돌아올 지를 머리에 계산하고 옵니다. 다시 말하면 어렸을 때에 그 아이에게 엄마와 함께 하고 아빠와 함께 하는 관계의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하면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훈련이 안돼 있어서 그 때는 부모에 대해서 의존적이었지만 이제는 부모에 대해서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하게 되었을 때에는 부모가 의존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즐겁고 소중한 것이 아니라 짐이 되고 무거운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밥 한끼를 먹어도 마음이 맞고 늘 교제하는 사람과 먹으면 즐겁고 소화도 잘됩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 나누기가 어려운 상대와 밥을 먹으면 생각은 오직 하나 빨리 먹고 집에 가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식의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온라인으로 돈만 계속 보내드리는 것으로는 효도를 다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관계를 느끼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할 중요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연로해지셔도 그 부모님과 교제를 느끼면서 그 안에서 자식이 행복해 할 수 있고 거기에서 그 부모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고 그 부모와 대화를 잠시 나누고 돌아가면 정말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하는 진실한 결심이 마음에 묻어나는 감동을 주는 부모님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수많은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택함을 받은 정말 축복 받은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못했을 때입니다. 부모님의 인격이 조잡하고 우리처럼 많이 교육 받지 못하고 뭔가 대화의 수준도 안 맞는 경우에도 자녀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드리고 관계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사랑을 많이 부어주셔서 우리 부모님을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이 내게도 기쁨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교제를 나누고 대화할수록 우리 부모님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그런 마음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주십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쓰디쓴 교인들로부터의 가슴 아픈 반대나 도전, 거역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살다보면 힘든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면 이 목회가 하나님 앞에 가서 상 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제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 사람이 마음을 못 지켰을 수도 있고 또 부분적으로는 사단의 역사일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여러 지체들이 잘 섬기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더 크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교회에서 계속 함께 섬길 인연이 안되어서 그럴 지 모르지만 소수이기는 해도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교회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간혹 있으면 6년 7년이 지나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납니다. 그 사람은 저를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잊어버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어떤 교인이 교회를 멀리 떠났다가 왔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은 나를 잊어버렸을 지 모르지만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말하는데 매일 기도하지는 못했지만 하루도 생각 안 하는 날이 없었습니다’ 생각이 나는데 그 생각이 그렇게 아프게 생각났습니다. 어떤 때는 그런 나 자신에 대해서 짜증이 납니다. ‘남아있는 사람을 위해 늘 울고 기도해도 시원치 않은데 싫다고 가버린 사람을 왜 생각하는가’합니다. 그 사람이 꼭 필요해서도 아닙니다. 사실 온다고 해도 겁이 납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들려오는 소식에 다른 데 가서 기도생활 잘 하고 정말 은혜 많이 받는다고 하면 그래도 좀 덜한데 정말 곤고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렇게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르실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드물기는 하지만 그를 위해 기도할 때 기쁨이 안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아뢰지지 않고 가슴이 아프고 힘겨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서 사랑의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간절히 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내게는 도저히 스스로 불러일으킬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한 성도가 꼭 토요일만 되면 설교 준비할 때 전화해서 아무개 교인이 목사님을 욕하고 다닌다고 전해주는 바람에 설교 준비하기가 너무 힘들 어서 나중에 욕하든 말든 전해주지 말라고 했다는 내용-결국 해결하는 비결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목사님 자신을 위해 서 기도했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 기도하다보면 진심으로 그를 축복하며 기 도 하게 된다고 하셨다)
한 주간 동안 베트남에서 ‘인간이 정말 얼마나 약한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하나님께서 우리가 미워하던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만드실 때 사용하시는 방법이 어느 한순간 나를 미워하던 그 사람을 향해서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러고 나면 정말 쉽게 사랑이 됩니다. 피도 안 섞이고 살도 안 섞인 남에게도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시는데 어떻든 그 배속에서 나왔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그 두 분이 여러분들을 길러서 이만한 존재가 되게끔 해줬쟎습니까? 그래도 용납할 수 없고 기쁨이 안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중 하나가 자식을 떠난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돌아가고 부모를 떠난 자녀의 마음이 그 부모에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님을 위해서 눈물 흘려본 적 있습니까?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고 눈물의 부모님은 반드시 우리와 화해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일체의 가식이 없이, 부모님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그 부모님께 관계를 행복해 하실 수 있도록 그 부모님과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들어 질 때 기도하면, 살도 피도 안 섞인 남과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데 나를 낳으신 어머니 아버지신데 왜 그런 마음을 안 주시겠습니까? 반드시 주십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안될까요? 그렇게 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분적으로는 무지해서 못하는 것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부모님과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살다가 끝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효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에 따르면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정말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효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양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큰 구김을 다 풀고 그 부모님을 깊이 용납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자녀들이 우리가 경험했던 그런 구김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침저녁 읽으시던 어머님의 성경책, 손때 묻은 구절마다 다시 살아옵니다’했던 찬송처럼 눈물의 기도와 말씀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은혜에 대한 갈망 속에서 살다가 부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우리에게 만일 그런 온전한 신자되기를 사모했던 부모님들이 있었더라면 우리가 정말 이렇게 삐뚤어진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못 받으면서 부모가 참으로 신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부모로부터 알지 못하고 피눈물나고 찢어지고 부딪히고 깨어지는 인생의 모든 실체를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런 처지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정말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고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이것이 다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부모는 여러분이 마음에 들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자식이었을 때 부모님이 힘들었습니다. 자식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듭니까? 여러분의 자식도 여러분 때문에 상처받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면서 신앙으로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를 써야 하고 신앙으로 좋은 자식이 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부모에게 칭찬을 받고 자식에게 존경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많이 받은 우리를 향한 깨어진 가정 속에 두신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예수님의 바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먼저 은혜 받은 사람, 더 많이 은혜 받은 사람, 그런 사람을 부르셔서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그러면서 ‘참아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하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절대 하나님이 맨바닥에서 그 일을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앞에 말씀드린 목사님께서, 교인이 보기 싫어서 간절히 기도하면 얼마큼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람이 자기 발로 걸어와서 화해를 한답니다. 그러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때는 1년도 간답니다. 그것이 십자가 짐 같은 고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그 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려고 간절히 기도하며 애쓸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순종이라고 보시고 사랑하면서 아파하는 사람에게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한테 대든 다든지 소리소리 지른다든지 전화를 집어던진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시대 같으면 돌에 맞아 죽을죄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래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부모님이 자기에게 못한 것, 자기를 상처 준 것, 경우에 어긋나고 상식에 어긋나는 것들이 떠오르는데 그러면 힘든 것이 덜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강적을 만났구나’하며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의 실천이 정말 힘들다고 느껴지고 자식으로 주어진 관계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힘겹다고 느껴질 때 그 때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때는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였고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모님에 대해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만 사실은 우리도 하나님께 그런 고통을 드렸던 사람들이고 그런데도 주님이 우리를 용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부어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지금 우리가 부모님께 자식으로서 도리를 감당하기 위해서 져야하는 희생보다도 훨씬 더 큰 은혜요 사랑이었지 작은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기쁘게, ‘내가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일에 있어서는 힘들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사랑의 크기에 비하면 이런 희생은 사실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식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리입니다.
(예화: 동화에 나오는 중국에서 있었던 일-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막하는 것을 고치기 위해 남편이 꾀를 내어 그 며느리를 고친 이야기-아버지를 시장에 내다 팔려면 아버지를 살찌워야 한다고 하여 살찌우기 위해 애쓰다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게 되고 관계가 좋아지게 되면서 시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되 었다고 고백하였다)
지어낸 마음, 의도적인 것을 가지고 한 행동도 그런 결실을 가져오는데 하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다 내려다보시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힘입으면서 우리가 그 부모님을 섬기고 사랑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부모님을 기뻐하고 정말로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보고 싶고 부모님을 만나고 싶고 그 부모님과 함께 있고 싶고 그러한 소망들이 생겨나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어두움의 한 배경이 되어서 여러분들이 빛의 자녀로서 부모님께 진실 되게 효도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 중심의 깊은 곳에서 부모님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계에 대한 의무와 육신에 대한 공경,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다 잘해서 자녀의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그렇게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효도는 이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바로 그 위에 무엇인가 덧붙여짐으로서 완성이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6.최상의 효도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부모 공경에 대해서 마지막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는 먼저 부모의 과거와 화해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효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동정적 효도이고 두 번째는 의무적 효도이고 세 번째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효도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에는 그 부모의 과거와 화해하지 않는 효도는 동정적 내지는 적선적 효도라고 말씀드렸고 두 번째 지난주에는 의무를 다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의무의 효도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오늘은 그 마무리가 되겠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효도는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동정적 효도, 두 번째는 의무적 효도, 세 번째는 심령적 효도입니다. 심령적이라는 말은, 물론 의무를 행하는 것도 마음을 드려야 행하지만 특별히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효도는 오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 ‘너 낳은 어미를 즐겁게 하라’하는 것은 단순히 자식으로서 도리를 감당해 나아가는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효도는 단순히 부모의 과거를 용서하는 것, 그래서 더 이상 부모에 대해서 마음에 적개심이나 원한을 품지 않겠다는 자기 해결 정도가 아니고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버이날이면 사가지고 가서 달아드리는 그 카네이션이나 혹은 매달 보내드리는 생활비, 생신이면 고기라도 몇 근 끊어서 드나드는 것과는 다른 그 의무를 초월하는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심령적 효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심령적 효도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읽은 본문의 뒤에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26절에 보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라고 나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께 마음 없이 섬기는 것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똑같이 우리의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데 있어서도 제일 중요한 것, 그러면서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그 부모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자식에게 주기는 참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남편에게 아내에게 주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부부가 사흘돌이로 싸워서 맨날 쥐어박을 때는 그 마음 주는 것도 참 쉽지 않겠지요. 언제나 내리 사랑은 쉬운데 올리 사랑은 참 힘듭니다. 자기가 자식을 낳아놓으면 특별히 그 부모를 데려다가 자식을 사랑하라고 정신교육을 안 시켜도 빗나갈 정도로 자기 자식을 사랑합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하나나 둘을 낳으니까 그 내리사랑이 정말 외곬으로 흐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자식만 하나 둘이 아니라 옛날부터 부모도 하나 둘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리 사랑은 외곬으로 그렇게 잘 흘러서 너무 과보호 과사랑에 빠질 정도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쏟으면서 올리 효도는 우리가 얼마나 했습니까? 마음이 그렇게 밑으로만 흐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최근 몇 달 동안 이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깐에는 효도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정말 내가 마음을 열고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생각 하실까?’ 물론 환경적이고 상황적인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부모님 시대 때만 해도 남자가 너무 아이를 안고 업고 다니는 것이 흉이었고 더군다나 끌어안고 애지중지 하는 것은 쫌스러운 남자의 표준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생각되어서 아버지는 서너 걸음 떨어져 있는 것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세월은 많이 바뀌었고 이제 우리는 아빠가 엄마화 되어 가는 그런 필요가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자랄 때 이러한 타락한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아이들을 잘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전에는 문제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부모가 이혼하고 사업이 망하면서 상처 많은 가정의 아이들이 바깥으로 뛰쳐나가서 나쁜 짓을 하고 문제를 일으켰는데 요즘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반듯한데도 아이들이 삐뚤게 나갑니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서로 토론하는 가운데 도달되는 결론이 예전에는 가정이라는 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뭔가 문제가 있을 때 바깥으로 표출이 되는데 지금은 아이들을 움직이는 것들이 그런 내적인 요인이 아니라 외적인 유혹, 유흥, 타락,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문제가 있어서 바깥으로 그것을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달콤하고 즐거운 것들을 찾아서 향락하고 뻗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부모가 정도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만으로는 우리 품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잘 보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녀들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뽀뽀해주고 자녀들 수준에서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도록, 5-60되어 부모가 다 세상 떠난 후에 느낄 수 있는 너무 심오한 사랑 말고,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느끼고 성장에 필요한 그런, 사랑을 계속 표현하는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가정에 대한 결속력이 강하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우러러 바라볼 때 거룩하고 존경할만한 엄마 아빠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나를 정말 사랑해주는 엄마 아빠가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들을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리 사랑을 좀 깎아서 부모님께 드리라는 말씀으로 들으면 안됩니다. 내리 사랑도 부족합니다. 빗나간 사랑 빼고 잘못된 동기가 섞인 사랑을 다 빼고 나면 아이들은 여전히 사랑에 주리고 사랑에 목마릅니다. 그러니까 자식도 더 많이 사랑하세요. 너무 근엄한 아버지가 되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그렇다고 푼수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 아니고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되면 이다음에 자녀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자녀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아빠와 함께 하는 기쁨을 거의 모르고 삽니다. 시간도 많으면 여행도 다니고 탁구도 치고 등산도 다니면 좋겠지만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거창한 계획을 세워서 아이들과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만 말고 삶 속에서 그것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화: 텔레비전광고 내용-고개 푹 숙이고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는 아들에게 엄마가 컴퓨터 편지를 보내는 내용)
아이들은 1년이나 2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하는 엄청난 프로젝트 말고 늘 사랑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청소년을 둔 아빠라면 휴대폰 문자 정도는 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휴대폰 문자를 못 보내면 붓글씨로 한 통 써서 비단실로 묶어서 보내든지. 그 아이들의 높이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러니 내리사랑도 부족합니다. 문제는 사랑이 삐뚤어져서 문제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동기, 잘못된 방식의 사랑, 그런 것들을 다 제해도 내리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내리 사랑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자연적으로 많이 흘러나오는데 올리 사랑은 인격적인 노력이 없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목사님 말씀이 이해가 안 간다. 나는 우리 부모님 너무 보고 싶고 만나면 절대 헤어지기 싫고 언제나 그립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은 우리 엄마 아빠 마주 앉아서 오순도순 밤새도록 이야기하는 것인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향한 내리사랑은 본성적으로 흘러가는 사랑인데 올리 사랑은 항상 인격적인 자기 부인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지침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입니다. 마음을 먼저 그 부모님께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만큼 효도하면 됐지. 나는 그래도 꽤 효도하며 살았는데’하는 것은 서로 마음이 없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윤리이고 토론의 방식입니다. 남녀가 사랑에 깊이 빠져서 콩꺼풀이 씌였을 때 그 때 서로에게 자기가 그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했는지를 기억하는 여성이나 남성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한 것은 희생이라고 생각도 안하고 기억도 안 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효도의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주는 가장 좋은 비결은 생각을 자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죤 오웬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 속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자녀들이 살면서 하나님을 자주자주 많이 생각하는 것을 굉장히 기쁜 공경으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한참 시련이 많고 괴로웠던 청년의 때에 위로가 되었던 찬송이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그 이상 무슨 위로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늘 생각하고 계시다는데, 하나님이 마음 쓰고 계시다는데 더 이상 할 얘기가 뭐 있습니까?
그래서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자주자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버이날 되고야 비로소 1년만에 ‘아참 내게 아버지가 있었지’하며 카네이션 사들고 가는 것 말고, 생신 날이나 어버이날 같은 때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늘 생각이 나고, 날이 추우면 시골 추운 집에서 괜찮으실까, 비가 오면 관절염이 있으셔서 오늘 쑤시실 텐데, 더운 여름이 오면 시원한 내복이라도 있으신가, 봄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봄나들이 가면 우리 어머님 아버님은 누가 챙겨드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는 효도의 첫걸음입니다. 항상 생각할 수야 없겠지만 늘 어떤 것을 보면 연상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각 속에 항상 부모님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용한 시간에 조용히 생각하면서 때로는 그 부모님이 아직 이 지상에 살아 계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 어머님 아버님을 데리고 가시면 그 못한 효도 때문에 그 빈소에서 하얀 상복을 입고 슬피 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이기심과 부모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이 마음의 엉킨 것들이 풀어지고 ‘정말 나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기쁨을 누리면서 사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드리는 것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첫 번째 효도입니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먹고사는 것도 힘들고 건강도 힘들지만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홀로 있다고 하는 정신적인 소외감입니다.
(예화: 일본에서 어떤 업자가 노인들에게 하루씩 가정을 빌려주는 사업을 했다)
얼마나 외로우면 가짜 관계라도 만들어서 그렇게 하루를 지내보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을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여러분, 그런 정신적인 깊은 소외감이 부모님들의 가슴속에 있다면 이따금씩 보내드리는 생활비나 어버이날이나 생신을 챙기는 동정적인 일들이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한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먼저 마음을 드리는 효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효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원하는 것을 자기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해드리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회갑 문화가 이해가 안됩니다. 옛날에는 대청마루에 기다란 교자상 받아놓고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즐겁게 절을 받고 자녀들이 잔을 올려주면 받으면서 하루 하례하면서 지내는 것이 회갑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호텔 같은데서 거의 밥 먹을 정신도 없이 소리지르고 주인공은 어디 있는 지 모르고 객들이 나와서 가락도 고상하지 않은 가락에 맞춰서 춤을 추고, 가족들은 불려나가서 돈 내고 한 곡조씩 부르고 와야 하는 것을 보면서 다 두드려 엎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문화를 이렇게 만들어 놨을까’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효도의 올바른 문화를 만들어가지 못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문화를 이렇게 왜곡시켜서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 차고 가족들 간에 우의를 되새겨야 할 그 뜻깊은 날에 아무 의미도 없는 엉망진창의 난장판이 되고 다 부러진 젓가락 남겨놓고 흩어져버리고 파장이 되는 것이 오늘날의 회갑문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니까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때 생각하는 것이 ‘나는 회갑을 이렇게 안 할거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문화도 세상을 똑같이 따라가지 말고 좀 바꿔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을 인격적으로 잘 설득해서 해야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평범한 세대이고, 젊어서는 교육을 잘 받았어도 늙어서 좋아하는 노래는 항상 그렇게 저속한 노래더라구요. 어느 자식이 부모님이 항상 니나노나 듣는 것이 하도 싫어서 정통 클래식 음반을 잔득 선물했습니다. 부모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효도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부모를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면 그 부모가 기쁘게 따라올 수 있는 길로 회갑의 문화나 이런 것들을 바꿔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어른들에 관한 모든 행사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회갑이 2년 뒤라고 한다면 지금부터 잘 설득해야 합니다. 보통은 ‘회갑은 무슨 회갑이냐(돈으로 주지)’하십니다. 그럴 때 천천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기생 불러서 노래 가락하고 자식들이 돈 가지고 나가서 마이크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친척끼리 술 먹고 싸우는 것은 60평생 살아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족적인 행사일 수 없다’하는 것을 가르쳐드리면서 지혜롭게 충분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독교적이면서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행사가 되도록 계속 개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런 문화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상에서 이루어져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죄는 아니고 잘못은 아니어도 문화의 차이 때문에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것일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 조차도 자녀들이 정말 그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 부모님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고 수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항상 자식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고 있고 의무를 다했을 때에는 그 가책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효도의 전부 다라면 그 효도는 부모를 위한 효도라기 보다는 자신이 불효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만족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치의 기준이 부모님 자신이 되고 그분께 기쁨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선상에서 효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신 다는 것을 알기는 알지만, 그러나 너무나 많은 수고가 따르고 번잡한 노고가 뒤따르고 때로는 물질이 들고 대로는 귀한 시간을 내어야 하고 등등의 모든 것들이 뒤따르게 된다는 이유 때문에 ‘부모님이 아무리 좋아해도 거기까지는 내가 할 수 없어’하며 싹둑 끊어버리는 마음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부모를 기쁘게 하는 효도, 마음을 부모님께 주는 효도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철저하게 조상을 숭배하는 일에 열심인 분이셨는데 큰집의 외아들로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 회심을 하게 되셨습니다. 우리 온 식구들이 누구든지 다 예수 믿고 전도될 가능성은 있어도 죽어도 예수 안 믿으실 분은 우리 아버지라고 그랬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어느 날 명절 때 모두 모였는데 아버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이게 뭔지 한번 봐라’하시며 품속에서 꺼내신 것이 여의도 순복음 교회 새가족 수료 증서였습니다. 그때는 떨어져 살았었기 때문에 7주 동안 순식간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그렇게 조상 섬기는 일에 열심이시던 분이 예수를 믿고 나서 제사를 지내면 안되겠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시다가 삼촌들을 다 부르고 ‘이제는 내가 예수 믿기로 했기 때문에 이것이 마지막 제사입니다. 내가 비록 장손이지만 제사 안 지낼 테니 삼촌들이 기지고 가십시오’ 말씀하시니, 그 분들이 좋아하실 리가 없지요. 그 때 제가 느낀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할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1년에 열두 번인가 되는 제사를 그 가난한 살림에도 다 챙기셨는데 어떤 때는 저의 증조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도 그 아들들은 안 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나에게는 할머니지만 삼촌들에게는 어머니인데 어머니와 자식이 가깝소 손주와 할머니가 가깝소. 내가 다 제사 차려놓고 전화해서 오라고 해도 안 오고 날짜 잊어먹은 아들들이 삼촌들 아니요? 그런데 내가 예수 믿어서 이제 제사 안 지내겠다는데 이제 와서 뭘 얘기합니까?’ 한 마디 하시니까 모든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래서 뭘 해도 그렇게 성실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믿는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래도 정말 어떤 때는 이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셨지만 조상을 더 사랑하나, 주님을 더 사랑하나 확신이 안갈 정도로 그렇게 조상들 일이라면 나서십니다. 한식날쯤 되면 선산을 다 돌아다니시면서 고민하십니다. ‘8대조 할아버지 묘가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9대조 할아버지 묘를 넓혀야 하는데’ ‘12대조 할아버지 비석을 세워야 하는데’하십니다. 저는 생리적으로 진짜 안 맞습니다. 살아있는 당신 형제들도 있고 자식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는데 죽어서 다 지옥으로 가버린 조상들한테 무슨 신경을 쓰냐는 생각입니다. 한푼이라도 있으면 자기 가족들에게 쓰고 살아서 좋은 일 하다가 드시고 싶으신 것 드시다 가시면 되지, 종친회 회장은 도맡아서 하시면서 생기는 월급도 없이 그렇게 바쁘십니다.
언젠가 전도사 때에 황당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오늘 종친회가 있는데, 따라가자. 나는 글씨를 잘 못쓰겠으니 네가 내 옆에서 회장 대리로 서기를 좀 봐라’고 핑계대시고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회의록을 작성하면서 수종을 들었습니다. 언젠가는 50만원, 100만원 하시면서 비석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모아서 드렸습니다. 어느 친척이 자기네는 하려고 해도 형제들이 협조를 안 해서 못했다며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마음에 안 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 지옥 가고 죽은 할아버지들, 흙에 묻혔으면 됐지 땅도 혼자서 뭐 그렇게 오래 가지고 있습니까? 다 정리해서 화장해버리고 무, 배추 심어서 산 사람들이나 먹고살면 정말 좋겠습니다. 무덤도 중국처럼 다 화장해버리면 좋겠지만 너무 섭섭한 사람도 있으니까 50년 정도만 빌려주고 50년 후에는 가족이 동의하든지 말든지 다 정리해서 없에 버리고 땅은 땅으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날 때마다 50년 동안 땅에 묻힐 수 있는 티켓을 주고 유효기간 끝나면 다 토지로 환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죽어 있는 사람 비석은 해서 뭐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너무 하시고 싶어서 밤잠을 못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 해드렸습니다. 물론 설득합니다. ‘뭘 그걸 하세요?’하면 ‘아니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돌보겠냐?’하시며 조상들 다 품에 안고 사십니다. 가난할 때도 남의 돈 빚 얻어서 9대조 할아버지 무덤 증축해주신 분입니다. 주님 믿고 깊이 변화되어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지를 아시면 좋을 텐데 아직까지도 모르시니까 어쩝니까?
그런 때 자녀 된 우리들은 참 답답하고 의사소통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식들도 우리 마음대로 가치관을 못 바꿉니다. 그러니 부모들과 그런 일이 있을 때에도 그냥 과도기려니 생각하면서 그 부모님들이 주님 깊이 만나고 참신자가 될 때까지 일체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기다려 드리는 것이 자녀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우리의 마음에는 부모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그 일을, 그것이 하나님 앞에 명백한 범죄이고 잘못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간절히 눈물로 권해서 못하게 해드려야 되겠지만, 그런 도덕적 가치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식이 최대한 해드리려고 하는 그것이 자녀가 부모가 기쁘게 하는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우리가 자라온 과정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애쓰시고 노고를 드렸던 것의 10분의 1만 우리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노력해도 아마 부모는 늘 감동 속에서 일생을 사실 것입니다. 우리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궁극적인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불효한 적이 없다. 생활비 안 보내드린 적이 없다 철철이 내가 자식으로서 도리를 안 한 게 뭐 있느냐 하는 것 말고, ‘너희들이 있어서 나의 여생이 참 기뻤다. 너희들이 내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다. 어디 가든지 너희들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고 기쁨이 되었다’고 부모님들이 말하실 수 있게끔 어떤 소외의 어두운 그늘이 없이 그렇게 사실 수 있도록 돌봐 드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효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부모를 정말 기쁘게 하는 그 일은 어떻게 하든지 부모님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궁극적 기쁨을 누리도록 그렇게 뭔가 부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불효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집도 많지만 부모 성격이 이상해서 자식들에게 고통과 눈물을 안겨주는 집안도 꽤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됐으면 자식을 사랑해야 도리지. 엄마의 가장 중요한 도리가 자식인 나를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사랑해야지. 그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겠어?’라고 교육할 수 없듯이 부모도 자식에게 효도하라는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인격 속에서 우러나야지 부모를 위해서 뭘 좀 해보려고 하는데 ‘야, 난 부모고 넌 자식이야. 내가 없으면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너 길렀어’하는 말은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면서 해야지 그렇게 따지면 진자리 마른자리 안 갈아 뉜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한 부모도 많습니다.
자녀를 감동 시켜서 자녀가 그 부모인 나한테 ‘아버님의 인생은 우리의 거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주름은 우리를 위한 시름과 걱정 속에서 더해져 갔습니다. 어머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사랑을 우리가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 존재 그 자체가 어머님께 빚진 존재입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쉼이 없는 인생을 우리 때문에 사셨습니다’라고 얘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부모와 화해하고 뭐가 좀 우러날까 말까 하는데 ‘진자리 마른자리 내가 갈아 눕혔어.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너 길렀어. 너 날 때 얼마나 배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는 지 알아? 나오려면 빨리 나오지 왜 그렇게 여러 시간동안 고통을 준거야’하며 자식에게 이야기할 때 자식에게는 그것이 감동이 아니라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보 같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가가 받은 인격적인 사랑을 자기가 발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우러나오게 해야됩니다. 그것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군화발로 사람을 짓밟고 지배하는 일은 한 사람이 일만 명을 지배하는 것도 쉽지만 마음을 움직여서 진심으로 그를 따르게 하는 것은 한 명이 한 명을 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그러면 안됩니다. ‘목사님이 그러는데 너 효도 안 하면 길거리에서 객사한데. 요절한데. 땅에서 장수할 것이며의 반대이니까’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부모는 부모에게 하는 얘기만 들으십시오. 자식은 자식에게 하는 이야기만 듣고.
세대가 함께 있는 것은 참 복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는 지를 자녀들에게 실연식 교육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식들과 함께 있으며 대화하는 가운데 ‘날이 이렇게 추워지는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시는 지 참 걱정이구나. 어디가 아프시다는데 약은 드시는 지 걱정이다’ 할아버지 생각에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녀가 뭘 생각하겠습니까?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엄마를 보면서 딸이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효도가 전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웅변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께 해드리는 것을 보는 이 자식에게 웅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대단한 집안에 며느리는 직장 다니고 시어머니가 아이를 보게 되었다. 그 런데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인사를 안하고 가는 것이 마음 상했다. 고민하다가 말 못하는 아기를 안고 나가서 ‘엄마한테 인사해야지?’하며 지혜롭게 며느리를 가르 쳤다는 내용)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놓고 말하면 안됩니다. 자식 입장에 되어보십시오. 부모와 화해를 못해서 그렇게 힘들어 하다가 설교를 듣고 눈물 콧물 흘리고 회개해서 결국은 ‘이러면 안되겠구나’하며 부모 봐서가 아니라 하나님 봐서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의 영혼이 살려고 효도해볼까 하는데 ‘똑바로 해. 자식아, 너 나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어. 너 머리카락, 피부, 다 나로부터 물려받은 거야. 너 지난 주 설교 들었어? 효도 안 하면 너 객사한데’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가르쳐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자기네 교인들은 목사 섬길 줄을 몰라서 가르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부작용 없을 지 모르겠습니다. ‘목사 똑바로 섬겨. 그렇게 해서 집사라고 말할 수 있겠어?’하고 가르친다고 해서 어느 정도 어필이 되겠습니까? 직방으로 날아가는 처방은 항상 부작용의 소지가 있습니다. 목사가 ‘자식이 그게 뭔가. 부모에게 똑바로 해. 그러고 어디 신자라고’라고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또 부모가 자식을 불러서 ‘너 목사님께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 그래서 어떻게 권찰이라고. 똑바로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직접 관계된 것이 아니니까. 부모도 자식에 대해서 지혜를 항상 가지고 인격적으로 가르치려고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감수성이 예민할 때 그것을 보며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냄새난다고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자녀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이면에는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싫어해도 엄마 아빠가 별로 안 싫어한다는 것들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소원함이 아이들에게 하나의 허가 사항으로 작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면책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 지나서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바로 그 배운 대로를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인생 노년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 소외감을 느끼는 것일 것입니다. 인생 노년이 되어 정말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두운 구름이 끼고 주님을 그렇게 친밀하게 느끼면서 살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합니까? 목사님들과의 모임에서 ‘내게는 한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내가 죽는 그날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상의 성화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죽는 그 순간이 이제껏 까지 내 인생 속에서 나눴던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 중에서 최고의 날이 되어 행복하게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듯 똑같이 여러분들도 노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빛나야지 만 행복할 수 있겠고, 그것을 제외해놓고 그 다음에 슬픈 일이 있다면 부부나 자녀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 노년에 세 당사자로부터만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면-하나님,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사랑하는 자녀들로부터만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면 좀 어렵게 살고 힘들게 인생을 마쳐도 전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이 잘 안 드실 지 모르지만 인생 노년에 들어가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인생이 열린다고 합니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두운 의미에서. 그래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시며’하는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렇게 매사에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노년에는 더 심각한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자녀들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잘 해야합니다. 자녀를 잘 사랑하고, 그 자녀가 자기에게 어떻게 기쁨을 주는, 마음을 주는, 그런 효도를 할 수 있을지를 부모에게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마지막 것이 우리가 아무리 부모에게 위로를 주고 기쁨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역시 지상에 있는 자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노고를 끝내고 삶의 휘장을 걷고 죽음 저편으로 들어갈 때 동행해 줄 수 있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신앙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연로하실 수록 천국의 위로와 기쁨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실 수 있도록 시간 날 때마다 많이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젊은 사람이지만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진실하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제대로 된 남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아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은 나만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너무나 필요하고 절실한 일입니다. 그런 소망을 부모님들에게 보여드려야 합니다.
이 인생의 휘장이 끝나고 나면 그 기다리는 참다운 하늘 나라의 소망과, 그 노년의 어려움을 세상 여행이나 하고 물질이나 쓰고 하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해드리고, 이 세상에서 주는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을 통해 공급되는 완전한 기쁨 속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그렇게 돌봐드리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효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부모를 기쁘게 해서 부모님께도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께도 기쁨을 드리고 또 여러분들의 남은 여생도 자녀로 인해서 기쁨을 얻게 되는 그런 복된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7.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엡5:22-24)
주일 오후에 계속되던 가정시리즈를 오전으로 옮겨서 몇 주 더 말씀을 드리고 오후에는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덕목이 나와 있는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이 보면 너무 케케묵은 옛날의 윤리처럼 보입니다. 사실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남성들에게 억압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억압이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탈을 쓰고 자행되어왔기 때문에 비록 성경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가르침이 나올 때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순종하고자 하는 동기가 유발되지 않을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인생을 생각할 때에 이 세상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들을 반영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면 참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하게 무엇인가 이해가 얽힌 문제에 의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충돌을 일으킬 때는 서슴없이 현실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노라고 하는 분명한 다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덕목은 사랑하는 것이고, 자식이 부모에 대한 덕목은 효도입니다. 그렇다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복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옛 사상과 성경의 사상과는 좀 다릅니다.
예로부터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일륜지 대사’라고 그랬습니다. 일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천륜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조시대만 하더라도 아내와 어머니가 동시에 물에 빠져서 죽어 가는데 한사람만 건져야 된다면 학생들이 모두 뭐라고 답했을까요? 아내는 죽게 두고 어머니를 건져야지 된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왜 다시 장가가면 되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또 하나 만약에 임금님이 빠졌으면 어떻게 하나? 임금님과 어머니 둘이 빠졌으면 누구를 구해야지 되나? 한명밖에 못 구하면 어떻게 하나? 정답은 어머니를 구해내고 임금을 구하다가 죽어야지 되는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가슴에 그렇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불변하는 진리이고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행복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부부와의 관계가 가정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아담의 아들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이제 이 세상의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부부와의 관계가 가장 가정의 기초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 부부와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여기에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데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복종과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노예적인 억압과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복종은 노예적이고 강압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격적인 복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격적인 복종, 그리고 인격적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모두 죄로 망가진 자신만의 성품으로는 복종할 수도 없고 사랑하기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지만 그들이 혼자서 살아서는 결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고 정말 인간다운 두 사람이 모여서 사는 그런 가정을 영위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두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야지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의해서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그의 본성들이 계속해서 고쳐지고 치료되어가는 그런 변화의 과정이 있을 때에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되어가고 그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통해 변화되고 그래서 본성의 변화를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아내가 복종하게 되고 남편이 사랑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보고 복종하라고 하니까 남편들은 굉장히 기분 좋은 주일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똑바로 들어야지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 아내를 향해서 성경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지만 사도가 쓰고 있는 이 문맥은 그 남편이 경건한 남편입니다. 왜 에베소서 자체가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쓰여 진 편지입니다. 신앙의 높낮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믿는 사람들을 향해 쓰인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들이 남편이 경건하지 않고 신앙도 없기 때문에 나는 독립선언 할 것이다. 그리고 저런 인간에게 복종할 수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신앙적으로 문제지만 정말 한 가정의 인도자가 될 수 없게끔 그렇게 살아가는 남편들은 아내가 그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가정이 진정한 가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도 안 믿고 매일 술과 폭언으로 가정을 상처주고 사흘거리로 아내를 구타하고, 아니면 무책임하게 게을러서 아내와 애들이 벌어다주는 것으로 먹고 살고 빈둥빈둥 놀고, 그리고 일할 의지가 없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게으름과 방탕한 삶을 살고 아버지의 도리도 거의 하지 않고, 남편의 도리도 거의 하지 않고 군림하고, 그리고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는 그런 남편을 향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뭐합니까? 그냥 아내가 바가지를 긁으면 주일날 겨우 억지로 손에 이끌려서 와서 예배드리고는 그냥 축도도 마치기도 전에 도망가고 아내 손을 이번에는 잡아당기고 교회를 뛰어나가고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름만 성도이지 그 하는 행실이나 모든 것들은 정말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비인격적인 사람들,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졸기나 하고 가고, 아이들에게 전혀 신앙의 본이 안 되고, 아이들보고는 올바르게 살라고 그래놓고 자기는 식사기도도 안하고, 아이들은 올바르게 살라고 그러고 자기는 예수 믿는 성도, 교회에 다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러면서 저녁 때 술이나 먹고 말이지 집에 들어와서 헛소리나 하고, 노름이나 하러 다니고 가정은 안 돌보고 그런 사람들이 무슨 아내를 보고 성경이 복종하라고 그랬다고 그렇게 좋아합니까? 여러분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면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것이 얼마나 커다란 사명인지 준엄하게 하나님 앞에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그 점에서 남편은 그 교회의 목사입니다. 그러면 피할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똑바른 삶을 살아서 아내가 순종하고 복종하고 싶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본받고 싶고 존경하고 싶은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지, 끊임없이 아내의 가슴에 못을 박고 아내가 와서 교회에 와서 은혜 받고 그 못을 빼고 돌아가서는 다시 못질당하고 그런 식의 가학적인 삶을 살고 자식들은 아무리 어리다고 말과 완력으로 굴복시키고 그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가지고 쥐고 흔들고 그리고 비인격적인 삶을 살고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 가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현저하게 욕보이는 것이고 교회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 올 때도 성경책 들고 다니면 안 됩니다. 도시락 가방에다 넣고 안 보이게 하십시오. 서류봉투에 넣어서 뒷주머니에 차고 다니든지. 사람이 올바르게 되어야지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사람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얼마 전에도 어느 여성이 저에게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너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동안 막 애교를 떨 듯이 사정을 해서 남편을 데려다놓으면 예배가 끝나는 시간까지 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는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너무나 미워서 괴롭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만듭니까? 누구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가정이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피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한 가정의 지도자이고 한 가정의 목회자인데 성경도 하나도 안 읽고 여러분 가장들이 되어서 자녀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읽는 것은 고사하고 시위라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365일이 지나가도 아들 한번 불러서 너 요즘 성경 읽니? 너 기도하고 자라. 한마디도 안 하는 가장들이 그게 가장들입니까? 자기 좋아서 장가는 가서 아이를 낳고 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 가장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장이 되었으면 그 책임을 심각하게 통감하고 그리고 이 가정을 자기의 품안에 안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아내와 함께 만든 이 가정의 틀 안에서 콩나물시루에서 콩나물이 자라듯이 사랑이 자라게 하는 것이 가정입니다. 사랑이 안 자라고 자식들이 짐승으로 자라가는 그런 것들을 얼마든지 보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입니까?
나는 사실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교회에 나같이 바쁜 사회적인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굉장히 아내에게 기여한 것이다 생각하고 그렇게 뭔가 자기 의를 세우려고 거들먹거리려고 그러고 말이지, 그렇게 나오려면 계속 나오십시오. 내가 어떻게 나오지 말라고 그러겠습니까? 목사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면 여러분같이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손을 뻗치셔서 그래서 그렇게 여러분 교회에 데리고 나오고 싶어 하는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심지어는 애들이 눈물로 아빠를 위해 기도하고, 구역장이 기도하고, 교역자들이 기도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그럼 변화가 되어야지, 새사람이 되어야지. 그래서 아내가 존경하고 싶은, 복종하고 싶은 남편이 되고 그리고 자녀들이 본받고 싶은 어디에 가든지 주저 없이 내가 이다음에 결혼하면 우리 아버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어야지 됩니다.
다 헛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사에 회장이고 사장이고 뭐 부장이고 돈을 많이 받고 세상 잘나가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정리해고 되거나 은퇴하고 나면 아무도 여러분들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는 여러분들의 가정밖에는 갈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사람들이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지 않고 자식들도 부모를 존중해하지 않습니다. 그때 여러분들 어디다 마음을 두겠습니까?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열심히 믿어서 한번 그런 생각 못해봅니까? 아! 내가 진짜 다른 것은 내가 모르지만 신앙 하나만큼은 진짜 아내를 가끔 불러다가 책망도 하고 여보, 똑바로 믿어야지, 그렇게 해서 되겠어. 같이 기도합시다. 애들보고도 애들아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되느니라. 이렇게 하면서 가정의 영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존중히 여김을 받는 남편이 되려고 해야지, 그냥 아내를 확 휘어잡아서 찍소리도 못하게 해서 우리 집사람이 나에게 꼼짝도 못한다고 그렇게 바보 같은 그런 소리나 하고 다니고 말이지, 애들이 꼼짝 못한다고, 꼼짝 못해도 그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꼼짝 못하고 대학교 가면 다 꼼짝합니다. 여기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복종하고 싶은데 인간이 덜 됐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운전하는데 이게 술 먹고 음주 운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도 운전대를 붙들고 똑바로 가야지, 여기에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모르니까 그들은 놔두고 기도하고,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장들은 정신 좀 제발 차리십시오. 일주일이 지나도록 10분도 기도를 안 하고 성경 한 장 어디에 읽는지도 모르고 새가족반 공부도 안하고 계속 차돌처럼 다른 데로 굴러다니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정말 변화되어서 그래서 새사람이 될 때 그때 가정의 모든 질서들이 정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은 존경할 부모님을 가진 자녀들, 그 다음에 복종하면서 평안을 느끼는 인격적인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아내들 그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하겠지만 사랑하고 싶은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남성들, 이러면 가난해도 행복한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아도 행복한 것입니다. 돈 많이 번 사람들보고 물어보십시오. 가정이 깨지고 돈만 벌면 행복한가 하고 아무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정도로 남편을 야단치는 것으로 끝내고 그리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면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남편대로 하나님이 다루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 가실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됩니다. 이런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인격적이어야지 됩니다. 인격적인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말을 하고 듣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 관계가 되어있을 때 그때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 아내를 때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듣는 중에라도 지금도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 있으면 일어나서 저 뒤에 가서 손들고 서서 계십시오. 그것은 가문의 수치입니다. 얼마나 바보 같으면 그렇게 때립니까? 아니 말로라도 눌러버리든지 논리로, 그렇게 똑똑하지 않으면 정직하게 살아서 존경을 받든지, 그것도 안 되면 오래 참음으로서 아내에게 긍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든지 아니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아니 왜 때립니까? 내가 우리 젊은 부부들 가끔 부부 싸움하다가 때리거나 그러면 내가 항상 이번에 용서해주고 돌아가는데 한번만 더 때리면 경찰서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라. 그 다음에 내가 갈 테니까 119 불러서 경찰서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라. 콩밥을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그래라. 그게 네 남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호하는 길이다. 때리면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의 형상이 더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거 하게 하면 안 됩니다.
가정에서 폭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딱 한 가지 경우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폭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지만 부모가 사랑의 마음으로 자식을 징계할 때, 그거 이외에는 그런 폭력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그런 것이 있으면 다른데 전화할 것 없습니다. 나에게 전화하십시오. 내가 당장 쫓아가서 해결을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경찰서에 다니는 사람 많습니다. 수갑을 갖고 데리고 가겠으니까 당장 집어넣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하십시오. 절대 안 됩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치리해야지 됩니다. 징계해야지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될 때에 비로소 복종과 사랑,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껏 남편의 이야기를 했지만 아내들도 참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가 많은 게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복종인 동시에 신앙 밖에서의 복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마라. 신앙의 어떤 의무를 행하지 말라. 그런 것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어느 믿는 집사님 남편이 낚시 광이라 토요일만 되면 낚시터에 가서 교회에 안 나오니까 부인 집사님이 남편을 나오게 하려고 함께 같이 다니다가 오히려 그 부 인이 낚시에 취미가 생겨서 부부관계가 좋아질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정이 깨 졌다는 이야기)
인간적으로 보면 이제 남편과 모든 게 하나가 됐으니까 잘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지 되는데 깨집니다. 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했지 아부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둘이 범죄 했지만 둘 사이에 어떤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그 다음에 남편에게 선악과를 주었습니다. 거기서부터도 벌써 가정의 질서가 깨졌습니다. 그러니까 악이 들어올 때 그런 식으로 가정의 질서가 깨지면서 리더의 자리에 아내가 서고 선악과를 따먹고 주도하면서 그 사람은 바보 같이 그 아내의 인도를 받으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이야기밖에 안 나오는데 성경 이외의 문헌에는 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느냐에 대해서 이런 재미있는 설명이 나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설명이지만 아, 내 아내가 왜 저것을 먹었을까? 저것을 먹으면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먹었을까? 저 여자는 죽겠구나. 그러면 저 여자 없는 세상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도 없는, 아내도 없는 이 세상에 나 혼자서 살아서 뭐하리. 나도 죽자. 그리고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 아담이 하와를 끔찍이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3장에 가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아담아 너 왜 먹었니?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그 여자가 내게 주므로 나는 먹었습니다. 조그만 소리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그 여자가 내게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었는데 가정이 벌써 영적이고 정신적인 유대가 균열이 간 것으로 나타납니다. 깨트려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 각자 두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니까 두 사람의 부부관계도 깨진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이 잘 살아보려고, 행복해보려고 애를 써도 그들의 행복을 붙들어주는 것은 그들 각자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일단 두 사람이 올바로 예수를 믿어야지만 가정이 가정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의 덕목이 복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 밖에서 남편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 밖이다. 신앙 안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되 복종함으로서 현저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거나 불순종하게 되거나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함에 있어서 심각한 장애가 오지 않는 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한 질서입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 안에도 하나님이 늘 강조하시는 것이 질서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고 그 질서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인격적인 질서여야지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미 목자와 양을 배우시면서 다 이해하셨겠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그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고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보양하는 방법들을 배워나가는 삶, 성숙한 삶 그런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젊은 목사님이 있었는데 어떤 형제 하나가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그래. 어쩐 일인가 그랬더니 저하고 잠깐 이야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라. 무슨 이야기인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목사님과 성도로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남자대 남자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처음서부터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남자를 찾아가서 이야기해야지, 살아있는 동안은 목사와 성도는 목사와 성도지 남자대 남자, 여자 대, 여자 무슨 인간 대 인간 그것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단을 치면서 보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목사의 입장에서 가끔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꼭 목사로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 인생의 선배로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찾아와서 우리 목사 대 성도 말고 남자대 남자로서 이야기를 합시다. 잘못하면 결투하겠네. 그런 것은 모두 그런 무질서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가 결코 좋은 열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요구받고 있는 것은 순종입니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가정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시고 그리고 그 가정을 질서 있게 인도해 가시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서 하나님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아직 신앙이 없는데,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누구인가 하는 것을 누구를 통해 배워 가는가 하면 사회를 통해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회가 말이 사회지 집밖에 없습니다. 기어 다니고 이제 걸음마하는 어린 아이가 사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교를 다닙니까, 학원을 다닙니까, 헬스클럽을 다닙니까? 집에서 같이 살아가는데 만나는 엄마 아빠가 최초의 사회 구성원입니다. 거기서 배우는 것입니다. 자라면서 가정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자랍니다.
그런데 어떤 집안을 보면 리더가 아무도 없습니다. 콩가루 집안입니다. 그러니까 아빠는 아빠대로 나가고 엄마는 엄마대로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각기 제각기 삽니다. 누가 전체적으로 우리 집안이 이렇게 하면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거나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인데 이렇게 살도록 하자, 이런 것이 없습니다. 리더가 없고 인도자가 없고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얼마나 배워나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원리는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그 하나님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표정을 보면서 호불호 기쁨과 노여움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가 가장 중요한 교육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런 물건을 건드리고 망가트리면서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어떻게 배우게 됩니까? 부모가 쉿 노여워하는 표정을 보면서 아, 이것은 아니구나. 그것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마음에 굽게 확 심어주어야지 됩니다. 이것을 안 심어주니까 그 다음에는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선악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에 대한 판단만 정확하게 살아있어도 알면서 나쁜 일을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철이 들면서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가방에다가 담배를 집어넣고 가서 담배피고 선생님 몰래 술 먹으로 다니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커서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다 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명확한 개념이 없으면 선악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 개념들을 어디서 배웁니까? 가정에서 배웁니다. 그런데 자녀가 항상 어린아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랍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딱 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개판입니다. 도덕적이지 않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사회의 법망을 피해 다니면서 비윤리적으로 돈을 벌고 세금도 안내고 정직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애가 비뚤게 삽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쉿! 하면 애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어릴 때는 이렇게 하면서 아빠가 싫어하는구나. 하면서 말을 못해도 느꼈는데 이제는 자기도 살면서 세상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똑바로 안 산다고 쉿! 합니다. 그러면 속으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나 잘해라. 아이고, 웃기네,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잘 돌아보십시오. 아버지가 쉿! 그러는데 아버지가 저렇게 나에게 선악에 대해서 분명한 표정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에서 웃기네. 그러면서 삽니다. 그 삶이 바로 아버지만 잃어버린 삶이 아니라 하나님도 사라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십시오.
아내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순종하는 삶입니다. 복종하는 삶인데 그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들을 보면서 질서가 잡혀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매일 대듭니다. 아이들이 있는데도 남편을 부를 때 인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인간 왜 안 들어오는 것이야. 그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인간끼리 사는 것이지. 그러니까 자녀들이 이렇게 보면서 그 아버지가 한 가정의 리더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아내입니다. 아내가 그것을 가르쳐주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허구한 날 대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정도가 아니라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여러분은 웃는데 우리나라에 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굉장히 웃으시는데 그런 분들은 비교적 남편을 안 때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들의 경험을 보면 남편이 뭐가 이렇게 조금만 때리든지 하려면 그럼 아내가 실신하고 졸도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기가 넘어가서, 그러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손을 못 댑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남편을 완전히 억누르고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많이 파괴되어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마음속에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은 대게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해서 마음에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시게 되면 아버지도 다시 세우게 됩니다. 그게 지난 삼주 동안에 계속 설교한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버지가 다시 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내들이 그런 식으로 남편에게 불순종합니다. 매사 불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아내로서 남편에게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본 적이 있습니까? 허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도 회개를 잘 안하는데 어느 시간에 남편에게 불순종한 것까지 회개를 하겠습니까! 그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부부관계를 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 가정을 사랑하시기는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 가정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자라나니까. 순종해야지 됩니다. 왜 순종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게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순종해야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남편에게 뭔가 항의할 게 있고 남편에게 뭔가 따질 것이 있으면 자식들 다 내보내고 문 닫고 안 보이는 데서 둘이 하십시오. 그래야지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이런 것들이 유지가 되지 그렇게 해서 아내가 애들 보는 앞에서 남편을 떡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역시 아빠 줄 뒤에 서는 것보다 우리 엄마 줄 뒤에 서는 것이 낫겠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복종해야지 됩니다. 그것이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하나님의 불변하는 명령입니다. 성령님이 슬퍼하십니다. 매사에 범사에 도저히 신앙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 이외에는 순종하면서 살아야지 됩니다. 그것이 아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그러면 왜 또 하나님이 아내들을 향해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 여성과 남성을 지으셨을 때 그 미묘함의 차이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남성과 여성을 하나님이 만드셨을 때 똑같이 만드시지 않으시고 두 사람을 보완의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음양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보안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만드시는데 좋지 않았다는 의미도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아담으로 천지창조를 끝내시고 그러고 보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안 좋아서 추가적으로 하와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자체가 하와까지 만드심으로서 천지창조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1장에 날, 첫째 날 둘째 날이라고 하는 것을 하루 24시간 날로 보든지 시대로 보든지 간에 그날 6일째 안에서 하와까지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사역이 마무리가 된 것입니다. 원래 계획자체가. 그런데 두 사람은 보안관계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생긴 것부터가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리고 달라야지만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가끔 보면 연애할 때 너무 잘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 되서 깨트려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연애할 때 아, 오늘 기분도 그런데 월급 탔는데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밥 한번 살게. 우리 한번 가서 분위기 한번 잡자. 그럴 때 여성이 안돼. 돈이 얼마인데 그것으로 하면 자장면이 몇 그릇인데 그러면 연애가 행복하겠습니까, 안 행복하겠습니까? 안 행복합니다. 그래, 가자. 어디에 가려고 하는데, 어디 내가 거기보다 더 좋은데 알고 있어. 가자.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 여행가자. 어디? 남자는 한껏 해서 제주도 좀 가자. 그까짓 것 우리가 뭐 놀면 늘 노는가. 메뚜기도 한철인데 그러면서 가자고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이야기가 제주도 좀 더 쓰자. 일본으로 가자. 이렇게 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러나 애들을 낳고 결혼생활 속으로 쑥 들어가다가 보면 그렇게 사는 집 예외 없이 망합니다. 한쪽에서 가려고 하면 한족에서 잡아당겨야지 조화를 이루고 사는 것이지 그러니까 연애결혼 할 때 이런 것들이 딱딱 들어맞던 사람들은 결혼하면 이제 갈등이 오히려 생겨나게 됩니다. 오히려 안 맞는 것 같고 계속해서 뭐가 어긋나는 것 같은 그런 커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정기를 거치면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혼 때 전혀 싸우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나중에 잘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렇게 많이 부딪히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원래 달라야 정상입니다. 단 문제가 되는 것은 죄가 없었던 아담과 하와는 좋은 면에서만 달랐는데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좋은 면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그 위에 부패성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둘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훈련을 받다가 이 붙은 부패한 것들을 떨어트려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정결하게 되면 안 맞는 것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이 조화를 이루어나갑니다.
어떤 사람이 쓴 글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차를 타고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차를 타고 찾아가는데 그 길을 남편이 잘못 찾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이야기가 차를 세우고 물어보자. 그리고 찾아가서 또 모르면 조금 가다가 차를 세우고 또 물어보고 가서 또 물어보고 가자. 그런데 남편이 아무 대답도 안하고 운전만 계속합니다. 그런데 다른 골목으로 자꾸 들어갑니다. 이 여자가 열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왜 물어보자고 하는데 그러는가. 급기야 거기서 대판거리 싸우고 말았습니다. 여자로서는 이해가 안갑니다. 아니 못 찾으면 세워서 아줌마 아무개 집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어디입니까? 그러면 저기예요. 그러다가 가다가 또 모르겠으면 또 세워서 아저씨 여기 어디에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갑니까? 이렇게 세 번만 물어보면 찾아갈 수 있는데 왜 그러는가.
그런데 그 남자는 무슨 생각이 있는가 하면 그 작가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그게 남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원래 천성적으로 있는 성품이라고 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아무에게도 안 물어보고 내가 단방에 갈수 있다. 그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 바퀴를 돌아도 자기 힘으로 아내를 거기에 데려다주었다는 점에서 무한한 성취감을 느끼는 존재가 그게 남성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공감을 했습니다.
제가 생전 안하는 게 돈 빌려 달라는 것과,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길을 안 물어보는 것입니다. 절대 안 물어봅니다. 어떤 신념이 있는가 하면 모든 길은 통하게 되어있다. 가다가보면 나온다. 절대 안 물어봅니다. 그런 성격은 제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잘못타고 가도 아무에게도 안 물어봅니다. 내려서 자기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타고 갑니다. 왜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나 아무한테도 안 물어보고 왔다.
하나의 예를 들어본 것이지만 그래서 남자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남자는 더 일에 몰두를 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기반으로 해서 가정을 기반으로서 해서 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일에 몰두하기가 굉장히 좋습니다. 밥도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워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발을 벗어놓으면 빨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들어가도 됩니다. 하숙집은 언제까지 안 들어가면 문을 닫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여성들은 다릅니다. 여성들은 이런 나무를 하나 집에다 심었습니다. 남편이 보니까 계속 거치적거립니다. 그리고 꽃도 거의 집니다. 그래서 확 뽑아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대판 싸웁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왜 이랬냐. 그러니까 남편이 하는 이야기는 그까짓 것 몇 푼이나 된다고,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 매일 심어놓고 꽃하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아, 예쁘다. 오늘 또 자랐구나. 아이고, 잎이 났네. 너는 시드니까 어떻게 하니. 그랬는데 남편이 확 뽑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물어보는 말이 또 사다주면 되잖아. 그만큼 여성은 일 중심적인 게 아니라 관계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부부 싸움하는 게 매일 그것입니다. 남편은 죽어라 일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나 혼자 먹고 살라고 이 고생하나. 다 너 먹여 살리고 여우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새끼들 먹여 살리고 내가 이렇게 발버둥치며 벌었으니까 이만한 집이라도 갖고 살지. 진짜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알아. 내가 이른 밤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점심도 못 먹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당신 한번 내 자리에 서볼래.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 알아. 그렇게 합니다.
아내가 매일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뭐 밥으로만 사는지 알아. 돈만 벌어오면 다야. 그러면서 남편에게 대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성은 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오래 가지고 있던 물건 이런 것들이 남자보다 여성들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리고 또 오래 사귄 친구, 그 다음에 손때 묻은 화장대, 그 다음에 꽃 이렇게 심어놓은 것, 집, 애완동물 이런 것, 이런 관계 속에서 계속 만족과 성취를 느낍니다. 그러니까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이렇게 다르게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이 남성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여성들은 남편이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그래도 사랑을 해주지 않는 자체가 아내에게 상처가 되듯이 남편은 무시당하고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리더십이 꺾이고 이런 것에서 끊임없는 상처를 받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상담을 하다보면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 꼭 교회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둘이 삽니다. 아내가 너무 훌륭합니다. 젊고 얼굴도 예쁘고 그리고 똑똑하고 그리고 또 돈 관리도 잘하고 진짜 모든 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람을 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누구도 동의해줄 수 없는 게 얼굴도 더 못생기고 돈도 더 없고 살도 더 많이 찌고 그리고 더 못생기고 그런데 그렇게 빠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객관적으로 볼 때는 아내가 정말 표준형이고 모든 면에 있어서 더 뛰어나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그런 사람하고 산다고 해서 남편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용납되어질 때 한 남녀의 관계에서 자기가 리더로서 존중되어지고 이해될 때 그때에 남성은 거기서 소속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일 대들고 매일 뭘 하자고 그래도 항상 시비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만 훨씬 못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이유는 모든지 그 아내에게서 받지 못하는 것을 거기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으로서의 뛰어남은 없는데 지금 이 사람은 서로 인격적인 관계가 될 때 얼굴이 예쁘고 돈도 잘 관리를 하고 뭐 지성이 있고 이런 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관계가 성립이 안 되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지만 청년들이 결혼한 남성들을 놓고 인기투표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남자집사님들 가운데 누가 제일 결혼하고 싶은 남자인가? 그랬더니 누구를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내가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자기 남편이 여자 청년들에게서 인기투표가 1위가 나왔다고 하니까 그 반응이 재미있는 게 갔고 가 데리고 살라고 그래. 제가 생생하게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표정이 농담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한이 맺혀있는 비슷한 표정입니다. 가지고 가서 데리고 살라고,
그래. 들어보십시오. 이 부부관계는 목회자와 교회관계하고 비슷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유명하고 신문에 나오고 무슨 위성방송에 뜨고 그래서 전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슨 폭탄 같은 부흥의 은혜를 끼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래도 교회에 와서 목회자로서 할일을 다 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목회자 싫어합니다. 나는 항상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목회를 합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을 잘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들이,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아내들이, 교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케네디 형제가 많이 헷갈리겠는데 아내들이 이해를 잘 해줄지 알았는데 잘 이해를 못해줍니다. 나중에 아, 이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김남준 목사를 알아주고 뭐 방송에 내보내고 수만 명을 모여서 집회를 한다고 포스타를 붙이고 그것다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싫다고 그러면 내 인생은 목회자로서 없는 것입니다. 아멘도 안합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수의 교인과 잠깐 함께 있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있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그렇게 살아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한번만 나가면 수없는 일을 이룰 수 있고 엄청난 돈을 벌수 있는데 아내와 잠시 대화하고 아내와 같이 있기 위해서 그 엄청난 보상이 돌아오는 일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관계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내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게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에서 아내들은 깊이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똑같은 게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이 굉장히 예쁩니다. 자기 친구들은 자기 부인만 보면 막 너무 감동을 받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돈도 잘 관리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백만 원을 맡겨도 열흘이 지나면 하나도 안 남았다고 하는데 오십 만원만 맡겨도 석 달 지나면 오천만원으로 늘립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 아내를 보면 전부다 펑펑해있는데 자기 부인하고 같이 가면 사람들이 자꾸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불륜의 관계가 아닌가 하고, 그리고 재혼하셨는가 하는 소리나 하고 아무리 그래도 남편들은 그런 것으로 감동을 안 받습니다. 하나가 충족되어야지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두 사람과의 관계에 리더가 되어야지 됩니다. 그때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어떤 일들을 이루고자 하실 때에는 결코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성품과 특징들을 인간 속에 주심으로서 그것을 도구로 사용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 손색이 없는 그런 여성과 함께 살면서,
나는 가끔가다가 이번에도 왜 어떤 미국의 굉장히 유명한 영화배우인데 부인이 정말 진짜 몇 십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빼어난 미인입니다. 그런데 남편도 굉장한 미남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와 결혼생활이 깨지고 다른 여성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여성을 보니까 그 미모에 대해서 전혀 동의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바로 그런 관계, 그러니까 관계에서 오는 것들이 충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세워주지 않으면 관계에서 오는 것들이 충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인간 속에 질서 속에 만들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너무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아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쓸데없는 잔소리, 그게 모든 리더십에 대한 방해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잔소리를 하지 말고 큰소리를 하십시오. 결정적일 때 모아두었다가 당신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버리신다. 똑바로 살아라. 이렇게 살다가 몇 년에 한번씩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그렇다고 아침마다 똑바로 살아. 저녁때 똑바로 살아. 못삽니다. 여러분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오종모 여사님이셨는데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광장한 여성이었는데 남편이 감옥 속에 갇혀있으니 거기서 손톱발톱이 빠지고 등껍질을 벗기고 소금을 바르고 이랬으니 살아가는 게 사실 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도 어디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너무 목사님이 힘드니까 마지막 면회에 갔을 때 여보, 내가 아무래도 교회에 돌아가야 할 모양이야.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우면 그랬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모님이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목사님, 거기서 죽으십시오. 그리고 딱 돌아서셨습니다. 마지막 면회에 돌아서는 그 아내의 마음이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남편인데 갈갈이 찢어지지, 그런데 그게 바로 큰소리입니다. 아무리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근거를 가지고 깊은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감동 속에서 정곡을 찌르면서 분명하게 말할 때 그게 얼마든지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쓸데도 없고 유익이 없는 그래서 끊임없이 남편을 달달 볶는 그리고 무엇이든지 남편이 기를 펴고 혼자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나는 정말입니다. 내가 차를 몰고 찾아가면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모든 남성들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할 수 있는데 기도하고 갈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을 존중해주어야지 됩니다. 그것을 자녀들 앞에서 보여주어야지 됩니다. 자기는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는 남편을 존중해주는 것을 못하면서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평소에는 그것을 못 보여 주면서 말로서 자기 남편을 자기가 존경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많이 이야기를 해도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그 엄마와 아빠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다 압니다. 우리 아빠는 엄마에게 쥐어서 산다. 그리고 안방 문 달칵 잠그면 아빠는 꼼짝도 못한다. 그런 것을 아이들이 다 압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성품 속에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내들의 입장에 돌아가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온전하고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는 하나님께도 그렇게 복종하기가 힘이 드는데 흠이 많고 어떤 때는 논리도 안 맞고 어떤 때는 인격도 동의가 안 되고 그런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것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동기 자체가 남편의 인격적인 훌륭함이나 또 남편의 어떤 성품적인 특성, 이런 것들 때문에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는 그런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아내로서 남편을 너무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그런 남성과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남성도 그런 여성과 꼭 한번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아내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랑을 받을만하게 행동을 하는지 안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한없이 불쌍히 여겨주면서 그 넓은 마음으로 자기를 따듯하게 사랑해주는 남편을 원하듯이 남편도 똑같이 자기가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고뇌하든지 안 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자기밖에 없는 줄 알고 자기를 의지하면서 사는 여자와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렬함은 양쪽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에게 있는 마음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안 그렇겠지만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됩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을 애완견처럼 사랑해준다고 해서 만족을 누리는 남편은 없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아내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존경과 그리고 깊은 존중심입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참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하시고 실수도 없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런 하나님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데 남편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사랑의 감화 그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많은 감화를 받고 그래서 존경하기에는 모자라는 사람인데 존경하고, 사랑하기에는 모자라는 사람인데 사랑하고, 또 순종하기에는 모자라는 사람인데 순종하고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럴 마음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여러분들 기회가 있으면 한번 들어보십시오.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미움과 용서라는 시리즈를 설교한 적이 있는데 참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리즈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간증들이 많이 나왔는데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있어서 사랑을 못하는 것입니다 존경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동의할 수 없는, 존경할 수 없는 면들을 봤기 때문입니다. 또 순종할 수 없는 것은 그냥 순종할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인간의 힘으로는 너무나 불가능해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생기게 하고 용서할 능력도 주십니다.
그래서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할 수 없는데 남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 속에 있는 교만을 보면서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보입니다. 그 남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무릎을 꿇고 승복을 하고 그리고 존경하기에는 모자라는 남편인데도 존경할 마음이 생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마음도 변화시켜주시고 능력도 주시면서 그를 계속해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 가정을 회복시키고 치유시켜가는 한 과정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불신 남편인 경우에는 더 많이 노력해야지 되고 여러분들이 신앙 안에서 있다면 더 더욱 많이 노력하고 여러분의 남편이 경건한 사람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들은 더 많이 노력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 아주 존중히 여겨주는 모습을 보이십시오. 구별된 사람으로서 대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가정에 대한 리더십을 인정하고 그리고 그의 머리됨을 아내로서 깊이 인정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의 마음으로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래서 남편을 높이고 존중히 여기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남편을 통해서 이 가정을 참으로 가정되게 하시도록 남편을 칭찬하고 아직은 신앙이 어리지만 격려하고 가정의 예배도 인도하게 하고 아이들 위해 기도해주게 하고 이러면서 계속해서 그 남편을 존중히 여기며 세워갈 때 그때 가정의 질서가 바른 관계로 돌아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모습으로 꽃피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아내와 남편의 정신적 결합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엡5:24)
지난 시간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성경이 가정을 말할 때 세우신 원리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째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원리이고 그 원리를 따라서 가정은 세워져갔기 때문에 아내는 반드시 아내에게 복종해야지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단순히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어떻게 부부의 정신적 결합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자기 남편들에게 범사에 복종할찌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그러나” 라고 하는 반의 접속사입니다. 그러나라는 말이 나오려면 앞에 반대되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나 이렇게 나와야지 되는데 여기서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또한 남편도 그 아내의 머리되었다. 그러나 말이 안 됩니다.
이게 희랍어 성경에 보면 ‘알라’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의미는 강한 반의적 접속사입니다. 그래서 앞에 한 이야기를 뒤집는 강한 반의어인데 그래서 여기에 ‘그러나’ 라고번역이 되어 있는데 앞의 이야기가 완결되었을 때에는 여기에 나오는 ‘알라’라고 하는 단어는 앞에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고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할 때 도입되는 그런 접속사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좀 애매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뉴 인터내셔널 버전 같은 영어성경에서는 이 부분은 now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그것은 그렇고, 자 이제 그래서, 혹은 아까 그 이야기는 그렇고 이제 그렇다면, 이런 정도의 뜻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맥을 보자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 것 같이 남편도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고 그러니까 이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범사에 복종하여야 된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명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무슨 반신불수든지 풍에 걸렸든가 아무튼 몸에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머리가 움직이고 지시하는 대로 몸이 자지우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가 이처럼 교회의 사령부로서 교회 몸보다 훨씬 존귀하고 높은 부분으로서 사령탑으로서 교회가 그 명령에 복종하고 그 권위에 순종해야지 된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했을 때에는 단순히 상하 관계만을 말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하고 싶었던 광경은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 몸이지만 그 몸과 머리의 관계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한 생명을 나누어가진 한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머리만 굴러다니는 그 머리가 인격체일 수 없고 또 아무리 무능해도 목이 잘린 그 몸을 우리들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몸이 없는 그리스도,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 이런 것 서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있는 생명적인 관계를 몸과 머리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고 싶었던 것인데 사실 이 부분들은 약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실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를 가지고 비유적으로 설명했을 때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적합한 비유를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편과 아내는 어떤 면에서 이런 생명적이 연합의 관계를 갖게 되는가. 남편과 아내는 결혼을 하게 되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결혼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과 함께 두 사람은 신비한 영적인 연합의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연합을 이루듯이 신랑과 신부가 한 연합을 이루고 아내와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죄악 된 세상에서 막 살다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리스도와 한 연합을 이루게 되고 성령님이 그 안에 오셔서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의 일부가 된 자신 속에 함께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생명적이 연합이 이루어지고 이것은 결코 파기되지 않습니다. 그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못살아도 파기되지 않고 심지어는 죽음도 그 관계를 파기시킬 수 없고 그 관계로 하나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까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바로 이런 결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비적인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 남편과 아내는 또 다른 작은 교회가 되어서 남편의 고통은 아내의 고통이 되고 아내의 죄악은 남편의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둘을 한 몸으로 다루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의문이 있습니다. 만약에 남편과 이혼하거나 사별하거나 그럴 경우에 또 남편과 아내가 함께 예수를 안 믿다가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을 때는 이 결합은 어떻게 되는가. 우선 원칙적으로 말하면 이 남편과 아내의 신비적인 연합은 함께 믿는 사람일 경우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결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것에 미련을 가지고 있으면 지금 떨쳐버리고 그리고 신앙 안에서의 결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최소한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결혼이 불가능합니다. 처음서부터 그 신앙 밖에서의 남성이나 여성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처음서부터 완전히 접어야지 됩니다. 신성한 결혼의 제도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결합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죽었을 때는 어떻게 되나. 그것은 이제 두 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희랍정교회 같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유효하실지라도 오직 한 남자를 위해서 한 여자의 영혼을 창조하셨다고 보고 그 한번만 결혼이 가능하고 그리고 한사람이 죽으면 그 한사람은 마지막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죽은 사람과의 영적인 결합을 유지하면서 홀로 살다가 죽어야지 된다고 이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또 다른 입장에서는 성경이 분명히 재혼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으면 그 결합이 끊어진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남편, 혹은 아내와의 결혼이 이루어지면 다시 부부관계가 성립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자체로 보면 이 재혼에 대해서 권하기는 하는데 적극적으로 권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소극적으로 권합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으면 혼자 살아가고 그리고 만약에 정욕이 불붙는 것 같아서 더 큰 죄를 질 것 같으면 차라리 그렇게 살지 말고 그럴 바에야 결혼을 해라. 그러니까 할 수만 있으면 홀로 사는 것을 성경은 오히려 권장하고 있다고 봐야지 됩니다.
궁금한 것은 그러면 둘이 안 믿는 사람이었다가 아내나 남편이 먼저 믿었을 경우에는 그러면 그런 결합이 존재하는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잠정적인 결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남편과 아내의 완전한 결합은 아니지만 그러나 잠정적인 결합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는 견줄 수 없는 말하자면 임시적인 결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끼리 남녀가 결혼한 것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성경에서 지금 이야기하는 남편과 아내, 믿는 사람들끼리의 이 결합과는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 안에서 부부가 된 사람들 속에는 공히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들은 부부로서 결합이 있기 전에 먼저 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서의 결합이 있는 사람이고 불신자들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와 유사한 결합이 없다고는 말할 수없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남편과 아내를 신비한 결합을 가진 결합체로 보는 그런 의미에서의 결합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지 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결합은 다시 실질적으로 둘로 다시 나누어서 생각되어져야지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원리적인 결합과 실제적인 결합입니다. 혹은 실행적인 결합입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또 오는가 하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서 유비가 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습니다.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께 모두 접붙여졌다는 점에서 이미 원리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는 연합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교회 나쁜 교회, 큰 교회 작은 교회, 건강한 교회 병든 교회 이야기할 것 없이 어느 교회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이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더 잘된 교회도 없고 더 덜된 교회도 없고, 또 모자라는 교회도 없고 남는 교회도 없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모두 그 생명에 참예한바 되었고 그리고 그 연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실천적으로 실제적으로 실행적으로 연합되어 있는가 하고 말할 때 그 연합의 정도는 모든 교회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면에 있어서는 좋은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가 있고, 건강한 교회가 있고 병든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온 성도들이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께 실제적인 결합을 풍부히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결합을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가니까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는 그 교회도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있습니다. 왜 거기 자신들이 사랑하시는 신랑 되신 예수님이 계시니까.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이 식으면 그러면 교회는 그리스도께 덜 연합되어 있습니다. 원리적으로는 항상 연합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덜 연합되어 있습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자식들이 항상 사랑스럽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때는 더 많이 사랑스럽고 어떤 때는 속상하면 덜 사랑스럽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도 원리적으로 항상 연합되어 있고 그것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고 그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다시 살리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교회가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사랑하면 더 많이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실제적인 연합을 교회가 못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지난주에도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데 자기는 자기 교회의 당회 때문에 괴로워죽겠다고 해서 왜 그러는가 하니 나이 많은 장로님 한분이 있는데 당회를 하다가 당회 돌아가는 이야기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아무 때든지 가방 들고 벌떡 일어나서 담임 목사실 문을 쾅 닫고 나간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가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도 장로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럴 수 있습니다. 은혜가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혈기만 충천하게 남아 있으니까 담임 목사고 당회원이고 눈에 안 들어오고 예수님도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서 가방 들고 나가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얼마나 연합되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성령과 말씀으로 얼마나 은혜를 받는가. 그것에 의해서 실제적인 연합을 많이 이루면서 살아갈 수도 있고 아까 예를 든 그분처럼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안 계신 안하무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범위는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모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굉장히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못 누리면서 사니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교회도 원리적으로 연합이 다 이루어진 상태지만 실질적인 연합은 얼마나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가에 따라서 이 연합이 좌우가 된다. 또 얼마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가에 따라서 그 연합의 정도는 다릅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과 함께 각방을 쓰든 별거를 하든지 간에 그 연합은 존재합니다. 죽지 않고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둘 사이의 연합은 깨트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끊어놓을 수가 없느니라. 그것입니다. 여전히 존재합니다. 나 너 같은 인간 보기 싫어. 너하고는 안 살아. 그리고 별거를 한다고 해서 그 결합이 깨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적으로는 계속 존재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것은 두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이제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순간에 예수님께 접붙여졌다고 해서 우리들이 항상 나, 주님 안에 있는 일체된 삶을 삽니까? 아니라고 말해야지 됩니다. 그게 우리의 경험이고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런 삶을 산다면 더 이상 설교도 필요 없고 신앙생활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살면 됩니다. 야단맞을 필요도 없고 책망 받을 필요도 없고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안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과 함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은 그 영적인 결합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순종해야지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좋은 대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연합을 나누어갖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뒷방에 있는 노인네처럼 생각하고 밥상을 알아서 갖다 주겠으니까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주님을 섬기는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런 섬김이 아닙니다.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빠져서 제 좋은 맛에 교회 섬기고 제 좋은 맛에 봉사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생명의 누림이 그 안에 없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결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 결합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관계가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연합이 되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을 안 합니다. 그러면 이 연합은 불가능해집니다. 영적으로는 연합되었지만 실제적인 연합은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아주 취약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실제적으로 이 연합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좋은 취미생활 때문에 가정을 팽개치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정신적인 연합이 취미생활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보다는 낚시가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갑니다. 돌아와서 머리가 터지게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내보고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단순히 질서다 그것이 아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에 그 남성은 여성인 아내와 영적인 결합을 토대로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해놓으신 것입니다. 아내는 그런 연합 속에서 공급되는 사랑을 통해서 남편과 하나 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품을 그렇게 만들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명령은 단순히 성경이 누구의 편을 든 명령이 아닙니다.
오늘날 빗나간 인본적 성경해석학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고대로부터 이 사회가 남성중심의 지배 체재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성경의 저자들이 남성우월주의 적인 관점에서 써내려간 것이 성경에 나오는 가정의 가르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을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것도 여기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in everything 범사에 그랬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크고 중대한 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남편에게 거역해야 할 뚜렷한 명분이 없는 한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그렇게 안 합니다. 그렇게 안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올바른 아내의 길을 걷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그 모본을 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원인은 있다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만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함으로서 가정의 질서가 바르게 세워질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두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하면서 영적인 결합을 토대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을 강화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점점 더 결합이, 결속이 나이가 들수록 강건해져서 유혹이나 시련 환난 같은 것이 와도 도저히 끊어질 수 없는 그런 사랑의 결합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성과 여성을 만나 결혼시키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복종을 안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사랑해주면 복종하지. 그렇게 합니다. 먼저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가 좀 어폐가 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 우리 사랑해주시면 복종하지. 교회가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시겠습니까? 왜 진짜 내가 먼저 해야지 되겠구나. 그런 식의 생각 자체가 결혼을 계약관계로 보는 아주 세속적인 방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먼저 아내들에게 범사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결과가 오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성도 사람이고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 그때 아무리 남성의 생각에 아내가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정을 세우는 원리라고 할지라도 과도히 피를 흘리면서까지 그 일을 순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완수하려고 들지는 못합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아내가 기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막 잡아 패고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자신의 복종시키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관계는 그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복종입니다. 그런데 복종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야기를 하고 남편인 자신이 타이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또 그렇게 아내를 성경의 원리로 가정을 설명해가면서 그러니까 아내인 네가 복종해야지 된다고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식이 있는 남편도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부인 손에 억지로 등 떠밀려서 교회에 나와서 앉았다가 졸고 가는 사람들이 무슨 해박한 지식이 있어서 부인을 앉혀놓고 그것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가정의 머리가 되고 지도자가 되려면 머리에 뭔가 좀 든 게 있어야지 빈 머리를 가지고 어떻게 지도자가 되고 머리가 되겠습니까? 공부 좀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충분히 가르치기 전에는 결혼할 자격을 부여하지 말자. 왜냐하면 너무 무지막지하니까. 그런데 순종을 안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그런 무질서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본성적으로, 그러니까 그것을 이게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시도를 하는데 남성이 성품 면에 있어서 여성보다 약합니다. 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런 갈등기가 정리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말씀이 승리한 가정이 질서가 된 게 아니라 힘센 놈이 이기는 가정의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남편에게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남편이 원인을 제공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워낙 처세술을 못한다든지 경제적인 것들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든지 지적인 능력이 떨어진다든지 그렇게 될 경우에 아내가 남편에게 몇 번 맡기고 시도를 해봤는데 남편이 머리로서 제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놔. 나와, 그리고 끌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앉았는데 자신이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복종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복종시켜야지 이제 가정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어떻게 될까요? 남편은 아내와 영적으로는 결합되어 있는데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망가지면 또 망가진 대로 살아갑니다.
진짜 제가 아는 남성 가운데는 이메일 주소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못 갖는 남편이 있습니다. 통장의 모든 비밀번호는 부인에게 공개되고 어 그제도 누구 이야기를 들으니까 남편이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카드로 긁으면 아내의 핸드폰에 딱 뜬다고 합니다. 청담동 설렁탕 집 25,000원 딱 뜬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며 삽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지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아내가 날 왜 사랑 안 해주나. 사랑해주면 순종하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가정과 결혼에 대한 의무는 각각의 배우자 앞에서 주고받는 계약으로서의 의무뿐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속에서 소속된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그런 당사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결단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젊은 부부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목회자에게 가정에 관한 것을 많이 말하고 지도를 받으십시오. 여러분들은 스스로 성경적인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랍니다. 결합이 안 됩니다. 이제 아내는 불편이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남편 입장에서는 결합이 안 됩니다. 결합이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집입니다. 가정이 아닙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이 안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적인 결합도 잘 안됩니다. 싫은 사람과 어떻게 매일 그 짓을 하겠습니까? 많은 문제들이 그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그래도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는 이런 정신적인 연합을 잘못 이루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은혜를 받으면 위로가 넘칩니다. 그래 은혜를 받으면 곧바로 결합이 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결합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뿐이지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아내가 바뀌기 전에는 결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아직 남편이 안 믿고 여러분 혼자 예수를 믿는 여성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많이 받고 집에 가면 어느 날 남편이 무릎 꿇고 기다립니까? 여보, 당신을 핍박해서 미안해. 나 혼자 내버려두고 교회에 다니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어. 그렇게 합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기고만장해서 소리소리 지르고 까붑니다. 그런데 은혜 받았을 때와 안 받았을 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은혜를 못 받았을 때는 그래. 너는 잘났니. 꼴에! 그래, 갈라서자. 도장 가져와라. 이러는데- 웃지 좀 마십시오. 뭐가 그렇게 우습습니까?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그때는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남편이 변해야지 됩니다. 내가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 때문에 남편이 저절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져주실 일이고, 그러면 그 남편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니까 자신이 어떻게 결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치를 깨달으면 아내인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지 될 것인지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아내와의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이 약해도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이 위로와 결합의 기쁨은 모든 결합에 대한 보상이 됩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많이 사랑해주지 않아도 상처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랑해주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덜 받아도 부랑아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원망 안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많이 순종하고 아내가 그 남편을 믿어주고 기대고 이렇게 해서 남편을 세워주어야지만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게 좀 모자라도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넘치면 그렇게 모자라는 부부관계를 미끄러지게 영위해갈 수 있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주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거나 은혜가 떨어질 때가 문제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안 믿는 사람은 집어치우고 믿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합시다. 남편이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순종을 안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결합이 없습니다. 있는 데도 아주 미약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이 충만하게 있습니다. 그럼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해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자기 위치를 알고 혁명적으로 변화되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안돼.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삽니다. 어느 순간에 은혜가 떨어집니다. 고갈됩니다. 은혜가 고갈되어도 살아가는 삶의 환경이 워낙 경건하면 그러면 고갈되어도 고갈될 뿐이지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노출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을 때 그때 놀랍게 자기를 받아들여주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나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데 이 사람은 나를 인정해줍니다. 아내는 나를 별로 존경하지 않는데 이 여자는 나를 존경하고 믿어줍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못 찾아도 구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찾을 것이라고 그러고 맛없는 것 사주어도 당신 때문에 오늘 저녁 잘 먹었고 즐거웠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거기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을 느낍니다. 그런 결합을 아내 이외에 누군가와 이루면서 살아가는 그 자체기 이미 범죄입니다. 정확하게 여러분들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마귀의 시험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결합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내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합을 아내와 못 가질 때 촉진됩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촉진이 됩니다. 그게 다행히 남성일 경우에는 그 놀라운 우정으로 갑니다. 그러면 문제가 좀 적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문제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문제가 좀 적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막 고민이 있는데 자기에게는 말하지 않고 친구에게 찾아가서 부부생활까지 다 이야기를 하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어도 좀 적습니다.
그러나 그게 이성일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인격적인 결합을 이루게 되면 성적 타락에 가깝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타락한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인격이 있고 도덕성이 있고 신앙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상당히 가깝다고 봅니다. 흔히 요즘도 보면 남편들이 바람을 펴서 부부의 순결을 지키지 않아서 가정이 파탄되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면식도 없는 여자와 벌거벗고 침대에 올라가는 것 아닙니다. 이미 장구한 세월동안 이 결합이 있고난 후에 올라간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짐승같이 돈 주고 여자도 사고해서 마구잡이로 그런 성적인 타락에 빠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도 처음에는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또 펼치면 굉장히 커다란 세계가 나옵니다. 새로운 시리즈가 계속 머리에 떠올라서 내가 더 이상 확대는 못 시키겠는데 그런데 하여튼 이런 위험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실제적인 정신적인 연합이 없습니다.
여러분, 공처가인 사람이 애처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다 헛소리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보일 뿐이지 마음은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데 그 남편이 그 아내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이루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 한 부부 집사님이 계셨는데 사실 여성은 집사님이라고 그랬는데 그 남편을 집사라고 불러주기에는 좀 사실 어패가 있을 정도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진짜 범사에 남편에게 불복종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그러다가 목사님이 한번 심방을 가서 그랬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머리가 그게 뭐냐. 폭탄 맞은 것처럼, 할아버지 목사님이니까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월남치마에다가 티셔츠 바람에, 목사님이 가셨는데도 화장도 안하고 머리도 막 이러고 말이지, 그런데 그 남편이 오히려 매력이 있습니다. 운동해서 몸도 슬림 하고 용모도 괜찮습니다. 다만 이제 사업한다고 돈을 자꾸 갔다가 버려서 실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부인에게 억압을 받고 억눌려서 사는 그런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제 40대 초반인데 그러다가 네 남편 바람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니. 막 껄껄 웃으면서 아주 독특한 표정으로 에이고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그 병신이 그런 짓이나 할줄 알면 내가 말을 안 합니다. 그 주제에 그 위인은 절대로 그런 것도 못합니다. 웬 걸 몇 달 있다가 바람이 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미모의 젊은 여성과 그렇게 스캔들이 생겼습니다. 태반은 그 여성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남성에 대해서 그렇게 모르는지 모릅니다. 남성과 결혼을 하는데 아니 회사에 입사를 해도 그 회사에 사장이 누군가 하고 대충 알아보고 들어가는데 남성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무조건 애를 낳고 살면 되는 줄 알고 결혼을 합니다. 무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개중에 보면 지난 시간에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자기 아내를 버리고 묘령의 여성과 옳지 않은 관계 속에 들어갔는데 그 부인이 펄펄 뜁니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남편이 외도를 해서 문제를 일으킨 그 여성과 만났는데 나이도 자기보다 많고 학벌도 떨어지고 얼굴도 무쪽이고 그리고 돈도 없고 자기한테 교양도 없고 부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골 무지랭이와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자존심 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기가 다 가지고 있어도 자기에게 없는 단 한 가지가 그 여성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은 그 여성과 만나면서 최초로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인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남성으로서 여성이 자기를 믿어주는데서 오는 성취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기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 때 느끼는 그 달콤한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 자기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그런 고백이 주는 의미가 뭔지 하는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 사람의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을 빨아들인 것입니다.
세계적인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라고 하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뭐 2년 후에는 은퇴한다고 70을 바라보고 있는데 60이 훨씬 넘어서 20된 미모의 젊은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비서였습니다. 그런 스캔들을 벌써 알고 그 가정을 사랑하는 친구가 부인에게 가서 부인도 이런 뚱뚱보인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그 여자가 피자를 엄청 잘 만드는가보네. 그러니까 자기 남편을 피자나 퍼먹는 돼지처럼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주제에 무슨 바람이냐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20된 젊은 미모의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둘이서 해변에서 수영을 하는 것이 사진에 찍혀서 신문에 다 깔린 다음에야 남편이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남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내의 자리에 서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일 없이는 둘이 함께 살아가는 결혼생활은 있는데 영적으로는 결합이 됐는데 실제적인, 그리고 정신적이고 그리고 인격적인 결합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속 터지도록 답답할 수도 있고 워낙 대가 세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되기 때문에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하는 것이 우스운 명령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남편을 좌지우지 하거나 혹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껍데기밖에 없는 남편과 살아가는 고통보다 훨씬 크다면 선택하십시오. 그것은 자기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가장 좋은 것을 버리고 가장 더러운 것을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스스로 불행의 늪을 판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얼마나 도덕적인가에 감동을 받는 게 아닙니다. 윤리 교사가 아닙니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에 의해서 감동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약한 것입니다. 그럼 원하는 것은 인격적인 매임과 인격적인 헌신, 거기에서 오는 그런 충실함, 이런 것들을 통해서 연합이 촉진됩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그것을 택합니다. 그 남편을 쥐고 살아서 그래, 카드한번 쓰면 그것까지 핸드폰에 뜨게 그래서 가정경제를 꽉 잡았다. 그렇지 경제적으로 규모가 없는 남편을 그렇게 꽉 잡고 있으면 뭐 한달에 몇 십 만원 절약하겠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좋습니까? 아니 시장에서 지게를 지고 살면 어떻습니까? 시장바닥에서 구루마를 끌고 같이 살면 어떻습니까? 그래 부부라는 게 무엇입니까? 서로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결합이 되고 서로가 소중하고 서로가 사랑스럽고 그런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인격적인 가정생활이지 그런 것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기 마음대로 모두 마음대로 하고 그리고 결국은 가장은 있지만 남편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그게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가정이겠습니까? 나는 그 여성이 인생 말년에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굳게 믿습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내로서의 참다운 행복, 남편으로서의 진정한 행복은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순종해야지 됩니다. 복종해야지 됩니다. 오늘 성경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중요한 일에서 뿐만 아니라 in everything 모든 일에 있어서 다시 말하면 남편을 거슬려야 할 명백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기 전까지, 타당성이 있는 신앙적인 이유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순종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 남편을 세워주고 그렇게 함으로서 가정이 아내와 남편 사이에 이루어놓은 영적인 결합을 토대로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결합들이 실제적인 연합 안에서 증진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삽니까? 너무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으로 눈물을 흘리며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자신의 성화되지 못한 태도로 남편과의 결합을 상처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한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사는 것 가지고 기도할 때 가장 힘이 나는 것이고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살 때 가장 힘이 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태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껍데기밖에 없는 가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어리석습니다. 너무너무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기껏 성경을 찾아서 내린 결론이 남편이라는 인간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나도 복종할 수 없다. 왜 복종 안하는가. 네가 나를 사랑해준 게 뭐가 있는가. 사랑해줘 봐라. 내가 복종 안하나. 이런 어리석은 결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설계도를 가지고 가정을 지어가야지 됩니다. 여러분, 교회를 이렇게 짓는다고 그러면 제일 먼저 땅부터 파는 것 같지요. 아닙니다. 땅파기 전에 한 6개월 1년 전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설계도 다 그려놓고 설계도가 관청에서 통과되었을 때 비로소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막 지으면 불법입니다. 그러면 가정을 일구어갈 설계도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서로 이해하면서 살면 되지, 아니 이해가 됩니까? 아니 복종하지 않는 아내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이루어갈 수 있게끔 그렇게 이해가 잘 됩니까? 또 사랑해주지 않는 남편과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을 이루어가는 그런 것들이 이해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뭐가 됩니까?
그러니까 오늘날의 이 가정을 다루는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보면서 이 시대에 난무하는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책도 ‘살까 말까’한 그런 책도 나오고, ‘부부 살아말아’ 그런 책도 나오고 별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오는 책들이 굉장히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고민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답을 가진 것들은 없습니다. 대부분 엉터리입니다. 일리는 있지만 그러나 그 설계도들은 부분적으로는 옳은데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는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존중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다 올바른 것들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정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는지에 대해서 꼼꼼하게 생각을 하고 그 설계도를 기초로 해서 하나씩 하나씩 지어져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자신의 가정을 교역자에게 많이 노출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문제를 많이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을 받고 그리고 그 판단된 것을 삶에 적용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들을 여러분들이 계속해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양이 없이는 결코 온전한 가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두 사람이 전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는데 신앙생활을 할 뿐 아니라 또 은혜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이 가정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몰라서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껍데기밖에 없이 살아가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이제 잘못됐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느껴야지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러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없이는 이런 어떤 정신적인 결합이나 인격적인 연합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려워지게 되면 부부관계가 점점 더 결합이 느슨해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처음 결혼식이 있을 때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 히브리 성경에 ‘바사르 에하드’라고 나오는데 에하드는 one 하나입니다. 바사르는 몸입니다. 그런데 그 몸은 이런 육체의 살코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깃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상과 모양을 전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모두 가진 그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의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이 결합은 물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부부가 서로 육체적으로 결합을 해서 호르몬을 나누어갖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져서 하나의 영적인 결합을 이루는 것을 시작해서 그래서 멀리 떨어지면 서로 보고 싶은 이런 인격적인 결합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신적으로 그 사람을 기대고 그 사람에게로부터 어떤 삶의 자양분을 빨고 싶은 그런 정신적인 연합에 이르기까지 인격적인 연합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연합을 바사르 에하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같이 둘이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종하지 않습니다. 결합이 안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결합이 안 이루어지게 되고 인격적으로 결합이 자꾸 장애를 받게 되면 육체적인 결합도 느슨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남성이 신앙이라도 있고 경건해서 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해지고자 씨름하면 몰라도 그런 세계가 현저히 뭉개져버리거나 그러면 성적인 타락으로도 갈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 복종하지 않는 문제가, 그래서 최악의 상황을 치달을 수 있는 길들이 열리게 됩니다.
목회자의 가슴은 비밀창고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도저히 여러분들은 죽을 때까지도 살아도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목회자는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영원히 침묵을 지킬 의무가 목회자에게는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상담 들은 내용을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이것은 제가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읽은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크리스천은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사회적으로도 그럴 수 없는 도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고 성직자는 아니었습니다. 교육자였는데 그리고 모본적인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술집 화류계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여성은 정숙하고 이런 여성이 아니라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팔고 그러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단이 무엇인가 하면 친구에게 이끌려서 술집에 갔는데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그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입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어야지 돈을 받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그 다음에 자기를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해주는 최초의 여성을 그 술집에서 만났답니다.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결합이 그 여자와 이루어졌습니다. 부지런히 찾아갔습니다. 그 여성도 그렇게 그 남성을 사랑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남성이 그것을 느꼈다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이 느슨해졌을 때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신앙이 있고 거룩을 추구하고 하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런 것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남성이 그런 정도의 신앙을 가진 남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 또 경건한 부인에게 왜 그렇게 무시를 당하며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더 깊이 들어가면 사실은 굉장히 넓은 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까지는 안 들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다른 시리즈들이 문밖에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남편에게 있어서 범사의 순종, 남편의 의견과 의지와 생각을 단호하게 꺾지 않는 순종함은 여성인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결혼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복종이 중요한데 왜 그러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지 못할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무지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가정이 세워져가는 설계도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기센 놈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그러기를 안 되면 쥐어 패서라도 질서를 잡아라. 선배 누구의 하는 이야기를 듣고 했더니 한번 패니까 부인이 졸도해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패려고 손만 들어도 기절합니다. 병원에 거품 물고 실려 갑니다.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해결책이 안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지식의 빛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남편이 싫어도 가정의 원리를 주신 주님이 싫을 수는 없습니다. 내 남편이 오류가 있어도 아내의 자리가 어디다, 라고 가르쳐주시는 성경의 가르침에 착오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성경을 상고하면서 그 무지에서부터 남편과 아내와 함께 벗어나야지 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도리를 배워나가고 그리고 천국의 설계도를 가지고 우리의 가정이 올바로 지어져가고 있는지를 꼼꼼히 점검해야지 됩니다.
두 번째는 죄 때문입니다. 죄 속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질서를 멸시하고 그 질서에 대한 공격적인 성격을 죄가 가지고 있습니다. 입증해보겠습니다. 처음 무지 상태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이 들어올 때 하와를 통로로 삼았습니다. 그때 유혹이 들어왔던 게 무엇입니까? 안 죽는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사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면 설령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해야지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자리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과 같이 되는 방법이라면 하나님이 주실 방법일리가 없으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사실도 아니겠지만 사실이라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판단이 섰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질서가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어떻게 무너져버렸습니까? 만물이 다 아담과 하와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다스리며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짐승이 무서워서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고 열심히 땅에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데 내가 왜 널 위해서 곡식을 내랴. 그리고 땅이 항거하면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 결국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자기가 선택한 무질서에 최대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뭔가 하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아내는 자기의 몸을 칼로 해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삶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속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질서를 파괴하고 싶어 하고 그 질서를 무너트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질서를 만들고 싶은 것인가 하면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에 갖다 놓는 질서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성화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변화되고 성화되고 그리고 주님의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한 여성의 성품이 계속 새로워지면 그 사람이 성도로서 그 여성이 하나님 앞에서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갈 때 남편 앞에서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단정한 여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두개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남편의 성화,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내의 성화,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그 아내에게 가서 물어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직 멀었다고 그러면 교회에서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고 높은 지위에 있고 수많은 사람이 존경해도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죄가 이렇게 순종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이 세우신 그 질서에 저항하면서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죄성을 끊임없이 누르면서 살아야지 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에 들게끔 인도해주실 때만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처럼 남편이 사랑을 해주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편이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지혜롭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남편이니까 이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게 무지와 죄인데 그런 삶을 계속 살게 되면 그러면 결국은 가정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가정이 이끌어져가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 가지 결과가 나오는데 우선 첫째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내와 남편의 정신적인 결합이 촉진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설명을 드렸고 두 번째는 자식들이 망가집니다. 자녀들은 거기에서 그 어머니와 아버지 속에서 함께 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성화된 신앙생활을 통해서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어떠해야지 되고 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부부의 순종과 사랑하는 이 결합의 관계를 통해서 가정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과 남편이 어느 자리에 서야지 되고 아내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자녀들이 그 속에서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서 자녀들이 이렇게 번식해 나아가게 한 중요한 원리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참 사람으로 살아가고 참 아내와 남편으로 되어가는 것에 진면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그 환경 속에서 교육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을 낳아서 밥 먹이고 고액과외 시키고 해외 연수나 보낸다고 해서 그게 부모 역할을 하는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과외선생,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부모인 여러분 자신들이 그 자녀에게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아내의 자리가 어디고 남편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남편에게 절대로 복종하지 않고 수시로 폭력과 구타 속에서 혹은 남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경제적으로 남편을 비굴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그 가정에서 자라나는 딸이 남편이 어떤 사람이어야지 된다는 참된 모습에 대한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까? 가질 수 없습니다. 거기서 자라나는 아들이 아내의 참다운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어디서 그것을 배우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부부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못하면 그 다음대가 필연적으로 불행해집니다. 불행해지지 않을 비결이 있는데 그 애들이 부모인 우리들을 통해서 잘못 쌓아올려진 가정에 대한 상을 예수님 만나고 왕창 부서져서 다 뭉개버리고 새로 좋은 목회자를 만나고 교회를 만나서 새로 쌓아 올라가면 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이 가정의 참 도리는 가정 속에서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보고 자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복종하지 않는 아내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하지 않은 속에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그리고 그 속에서 가정이 잘 운행되어가고 있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자녀들의 불행들이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이 참다운 가정의 이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성경으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복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제왕적 콤플렉스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그 위에서 끌어내리고 그 하나님 위에 올려버리고 싶던 것이 우리의 조상이오, 우리 안에 있는 이 육체의 타락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한 남성에게 복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자연적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아내로서 어떻게 남편에게 복종해야하는가를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구속하신 교회에게 끝없는 순종을 요구하심으로서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신 그 순종의 모본을 구체적으로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떤 생애였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듯이 그렇게 복종하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성화의 싸움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어쩜 그렇게 내 생각에 집착이 가고, 어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버리기가 쉬운데 내 생각은 그렇게 버릴 수가 없고, 내 자아의 집착은 어쩜 그렇게 떨쳐버릴 수 없는지 그것이 우리의 성화의 길에 가장 커다란 대적이었고 그리고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의 말씀과 그 십자가의 은혜로 끊임없이 깨트려지면서 주님 없이 살았던 때의 그 삶의 비참함을 생각하고 주님이 없는 그곳에는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도 없고 기쁨도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어렵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키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그 법을 배워온 것이 눈물로 얼룩진 우리의 성화의 길이었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남편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기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완전하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께도 복종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허물많고 모자라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없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정말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가 주님의 말씀이라면 껌뻑 죽는 것, 예수님의 권위라면 그 자리에서 부복하는 것,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목숨을 거는 그런 종류의 순종, 그런 종류의 복종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실까요?
아내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보면서 주님이 어떻게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아야지 하는가 모본을 보여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래서 부부사이 영적인 결합을 토대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이 연합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그런 복된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연약한 그릇이기에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엡5:24)
두 시간에 걸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는 것과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부부의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의 유지를 위해서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해야 할 의무인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성분들은 오래도록 고대하셨습니다. 지난주에 이런 설교를 할줄 알고 남편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그랬는데 그만 빗나갔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내를 가리켜서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릇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슈큐오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컵이나 접시, 양푼 모든 것을 통칭하는 그런 의미의 진짜 그릇입니다. 여기서 왜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우리 남편들은 아내를 말로는 그렇게 안하지만 자기에게 딸린 부속물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는 것을 조화로운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명하복의 관계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성경이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상관이고 아내는 부속물 내지는 그야말로 자기를 보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남성과 여성으로서 하나님이 동등하게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남성을 하나님이 흙으로 빗어서 직접 창조하시고 아내를 하나님이 여성을 남성인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여 만드신 것은 그가 남성에게 존속된 삶을 살아야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의 근원에 관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인 하와를 남성의 갈비뼈에서 만드신 것은 둘이 존속된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뉘어줄 수 없는 연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위함이고 따라서 주석가 메튜헬리가 지적한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여성이 남성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신체 일부를 떼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공히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함께 부여받은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그 점에 있어서 남성은 조금도 여성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가진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또 여성의 역할이 남성을 위해 돕는 배필이지만 그것은 보조적 역할이라기보다는 횡적인 나누어진 역할이라고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할 때에도 그와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성 우위론적인 사고에 빠져서 여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종하라는 명령이 상령하복의 관계 내지는 종속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풍조에서 여러분들이 배워온 것입니다. 혹은 성경에도 보면 여자를 무시하고 아내를 하찮게 여기는 듯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기록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보여준 오류 내지는 실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은 항상 올바른 모본을 보여줌으로서만 우리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릇된 모본을 보여주어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머리 속에서 정리해야지 될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질서의 문제일 뿐이지 결코 복종을 받는 남편이 아내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든가 혹은 아내가 자신의 존재보다 열등하고 부속품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을 모두 담고 있는 말이 그릇 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을 그릇에다가 비유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몇 차례 나오는데 모두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즉 디모데 후서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하면서 그릇 이야기를 하십니다.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자기가 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담는다, 라는 면에서 그릇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금 그릇과 같이 사용하시고 어떤 사람은 은그릇과 같이, 질그릇과 같이 사용하시는데 결국 그것은 그 그릇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비유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울을 두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그릇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이방의 임금들과 나라를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는 쓸모없는 사울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퍼 담을 수 있는 훌륭한 그릇이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그릇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결코 여성이 남성 즉 아내가 남편에 의해서 지배되고 부속물처럼 여겨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여성인 이 아내가 엄연히 존귀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이고 선택된 존재이고 또 하나님의 백성인 경우에는 구속해서 비록 그가 아내에게 복종하는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이 아내라고 하는 그 그릇에 하나님의 뜻을 담을 수 있는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로 하나님이 불러주셨음을 암시하는 단어가 바로 그릇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그릇은 반드시 사명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하는 주되신 사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남편으로서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서 어떤 일을 해나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나만 그 일을 가지고 있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역시 그릇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의 뜻을 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성경적 사상이 이 짧은 그릇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선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강아지 좋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개를 좋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보신탕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애완견을 좋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개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이불에 데리고 자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완견으로서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 아내 사랑이라고 하는 그 성격이 애완견적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사랑해줄게. 말썽피지 말고, 까불지 말고 네 자리에 잘 있어라. 마치 강아지에게 방에다 똥 싸지 말고 밥그릇 엎지 말고, 그리고 입에다 뭐 물어뜯지 말고 말 잘 들어. 그러면 사랑해줄게. 사료주고 우유도 주고 리본도 매달아줄게. 그런 애완견적인 사랑, 또 어느 성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이게 애완견적인 사랑인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정상적인 그런 인격적인 사랑인지를 분별을 못하고 좋아하다가 그 다음에 나중에는 안 좋아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완견적인 사랑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애완견적인 사랑은 자기가 좋을 때까지만 사랑합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사랑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랑은 인격적 헌신과 위탁이 동반된 사랑입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이제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갑니다. 안 갈수가 없습니다. 부르면 가야지 됩니다. 가서 훈련을 받고 군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자대에 배치되어서 근무를 합니다. 거기에 있는 군인들이 항상 군대생활 하기가 좋겠습니까?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젊은이들은 좋을 때는 한번도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대하고 나면 또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싫다고 해서 총 놓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군대생활입니다.
서로 연애할 때 사랑하는 것과 결혼해서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연애할 때 사랑하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노을이 지는 해변가에서 어깨동무하고 깨끗한 하얀 벤치에 앉아서 노을이 참 아름답지? 그래. 정말 예쁘다. 그리고 속삭이는 것과 결혼한 후에 사랑이라는 것은 둘이 쪽배를 타고 함께 노를 저으면서 그 노을이 지는 황금빛 파도를 헤치면서 일정한 목적지를 향해서 항해하는 것입니다. 물도 들어오고 뒤집어질 수도 있고 쓰러지기도 하고 이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노를 저어야지 됩니다. 결혼한 후에도 바닷가에서 어깨동무하고 노을을 감상하는 것 같은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철딱서니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성숙한 후에 시집 장가를 가야지 됩니다. 계속 안 성숙하면 가지 마십시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여성이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냥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더 연약한 그릇이다. 누구에 비해서, 남자도 연약합니다. 기억을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여러분, 여성들에게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찬송 부르고 싶을 때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고 그리고 넓은 바다에 던져진 돗대도 없고 삿대도 없이 내던져진 조각배와 같이 그래서 정말 하나님밖에는 바라볼 수 없는 안으로안으로 오그라드는 그런 연약한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깨어질 것 같은 그런 연약함, 그게 여성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 그런 것을 경험합니까? 아닙니다. 남성들도 경험합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천하를 호령하고 지칠 줄 모르는 전투적 경향성을 가진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고 곤고하오니,
모세! 그러면 떠오르는 그림이 무엇입니까? 비록 백발이 휘날리지만 우람한 팔에 그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들고 바람이 막 부는 광야에서 바다를 명하여 홍해가 갈라지는 그런 광경, 모세를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내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나는 이제 내 생명이 족하니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인간은 모두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는 풀이오, 그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다른 것으로 안 만들고 흙으로 사람을 빗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에 의하면 티끌입니다. 티끌을 빗어서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먼지를 빗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인간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는 그런 뜻도 되고 하나님에 의해 존귀하게 됐지만 그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뜻도 됩니다. 남성도 연약합니다. 그런데 여성은 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남성 속에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 속에도 남성성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남자에게서는 남성호르몬이, 여자에게서는 여성 호르몬이 나오는 것 같지요. 아닙니다. 여성 속에도 남성호르몬이 나오고 남성들도 여성호르몬이 나옵니다. 남성이 여성호르몬이 풍부해지면 노화가 잘 안 옵니다. 그런데 또 너무 많이 섭취하면 신체적인 이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 호르몬도 남성이 여성을 공유하고 여성이 남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잘 들으십시오.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모두 아담은 당신을 닮고 하와는 제 삼의 인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우리가 부르지만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그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우리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 속에서 경험하는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읽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아버지에게 많이 맞아보셨을 것입니다. 위로해주십니까? 나는 경험 못했습니다. 때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위로는 누가 해줍니까? 그렇습니다. 엄마는 잔소리를 하다가도 아빠가 몇 차례 때리고 지나가면 반드시 빈방에 들어가서 아이를 위로해줍니다. 그래 아빠가 때렸지만 뭐 너 잘되라고 때렸겠냐. 화나서 때렸지. 그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아빠 편을 들어서 네가 미워서 때렸겠는가. 그래도 아빠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렇게 얘기를 해줍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해줍니다. 여성성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아이를 때릴 때 엄마가 더 패요. 그렇게 패서 되겠어요. 그리고 커다란 야구방망이 가져다주면 그것은 계모입니다. 친엄마가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리시고 어루만지십니다. 저는 한 10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이것을 발견하면서 막 진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그래서 제가 책을 쭉 읽으면서도 이런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많이 못 읽었습니다. 나중에 이제 좀 빗나간 방향이기는 하지만 해방신학에서 여성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성경에다가 이렇게 써났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또 너무 저쪽으로 치우쳐나간 것이고,
그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갔습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그래서 멀리 갔다고 하니 벌써 동리에 망신입니다. 가서 허랑방탕하다는 소문을 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낼 때 매일 동구 밖에 나가서 눈이 짓무르도록 아들을 기다리는 그 모습은 사실은 아버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는 말할 수 없는 강한 귄위와 능력, 위엄 그 다음에 뛰어난 우리를 향한 그 지도력 이런 남성성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세미한 그런 아주 델리키트 한 여성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이 절대로 사람들을 동일한 방법으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다루시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다릅니다. 사람을 보며 이렇게 다루시는 게 다릅니다.
어그제 뉴스를 보니까 무서운 세상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인터넷에서 유료로 게임을 많이 하고 그래서 야단을 쳤더니 자기 방에서 목매어 죽었습니다. 신문에 났습니다. 부모도 좀 화가 났을 것이 한달에 인터넷 요금이 백 몇 십 만원이 나오고 그랬다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부모가 미리 알았어야지 됩니다. 이렇게 야단을 치면 애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모두 아시면서 그렇게 각기 이 사람, 이사람 다 다르게 다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남성성과 여성성 안에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남성을 만드실 때는 남성성에 많이 주시고 여성성을 조금 주셔서 남성을 만드셨고 여성을 만드실 때는 여성성을 많이 주시고 남성성을 조금 주셔서 만드셔서 여성이 가진 남성성과 남성이 가진 여성성을 매개체로 해서 이 남성이 결합을 하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남성성과 여성이 가진 여성성이 이렇게 조화를 이루도록 그래서 온전한 사람됨을 구현해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처음 믿을 때 우리가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처음 믿을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알아갈 때는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여성성을 배워가고 아버지를 통해서 남성성을 배워가서 그래서 엄마 아빠, 남편과 아내의 연합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의 대화, 행동, 사고방식, 그 다음에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와 관계가 있고 그 관계가 다시 자식들에게까지 확대되어서 관계 안에 함께 섞여서 살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것은 확 뒤집어서 어떤 집안에 어떤 사연이 있어, 남편이 매일 집에서 빨래나 하고 꽃꽂이나 하고 방청소나 하고 그러면서 앞치마를 두르고 헤어나지를 못하고 밥이나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부인은 막 여장부처럼 휘두르면서 동서남북에 있는 돈들을 긁어모으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편이 여보, 쌀이 떨어졌는데. 그래. 사! 이렇게 해서 그래서 아빠 나 뭐 좀 줘! 그러니까 야, 아빠는 돈 없다. 엄마에게 얘기해라. 이런 집안이 만약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데 또 남편은 아내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빨리빨리 돌아가야지. 이게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어떻든지 간에 잘 돈도 벌고 자녀들도 잘 자라간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중대한 지장이 온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 아이들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해가기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자란 딸이 어머니가 남편에게 복종한 것을 본적이 없고 그 다음에 거기서 자란 아들이 그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한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노예적으로 복종하는 것만 보면서 자랐을 뿐입니다. 이게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가정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교회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똑바로 못하고 참된 신자가 안 되어 가면 반드시 자식농사는 망칩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단 예외가 있는데 그 자식들이 더 크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서 왕창 깨트려져서 새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신비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에서 두 번째로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지식을 따라서 아내와 동거하며” 라고 했습니다. 뭐가 필요하다고?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지식인가.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을 깊이 받고 그리고 그 지식 안에서 사람을 잘 이해하는 지식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이야기도 새로운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다 안다고 그러면 내가 섭섭합니다. 한 10년 전에 이것은 나에게는 코페르쿠스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보는 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조금 빗나간 것 같지만 조금만 더 해볼게 들어보십시오. 이것을 저의 성경적인 생각을 입증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최근에 불행한 가정과 행복한 가정을 전부다 조사를 했는데 가부장적인 가정치고 행복한 가정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가정이 좀 행복한가하면 남편이 약간 여성스러운 부분이 있는 그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지금 남성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여성들은 알아듣는데 남성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지금, 그래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제 친구가 벌써 죽었는데 그 죽은 친구가 이틀 동안 엄마가 시골인가 어딘가 내려가셔서 집을 비었는데 엄마 돌아올 때까지 계속 굶다가 다시 엄마가 오셔서 차려주시는 밥상을 받았습니다. 내가 볼 때는 그 인간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집에 가보니까 찬장에 라면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빠가 그렇게 산 것입니다. 사내자식이 무슨 부엌에 들어가서 렌지를 켜고 그러는가. 좀 하면 어때. 그런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가끔 방이 더러우면 남자가 좀 치우고 그리고 아내가 바쁘면 자기가 냉장고 꺼내서 밥도 좀 차려먹고 여력이 생기면 매일 그럴 수는 없지만 일년에 몇 번씩 아내가 밖에 외출했는데 들어와 보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린다든지, 여성들은 감격스럽고 남성들은 가소롭다고 지금 웃는 것입니다. 그런 약간 기울어진 여성성을 가진 가정이 행복한 가정으로 통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그 이야기는 또 가면 한없이 나가니까 그래서 결국 뭐가 필요한가 하면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녀가 결혼을 하는데 머리 속이 하얗습니다. 아무 지식이 없어, 하나님의 결혼의 원리가 무엇이고, 가정의 원리가 무엇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결혼하는가? 나이가 찼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결혼의 성경적인 대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살다가 행복해지는 가정이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소 뒷다리에 개구리 맞은 격입니다. 정말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고 불행해지는 것은 아주 자연적인 수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런 결혼의 제도를 주시고 남편과 아내를 만드시고 둘을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라고 하신 그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이것을 끊임없이 배워가고 그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때 아! 그렇구나. 그것을 깨닫습니다.
말 들으니까 지난주에 여성들이 많이 찔리셨다고 그러는데 그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죽어라 희생하는데 왜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왜 나는 이렇게 많이 집안을 위해서 애들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살아가는데 남편이 왜 다른 생각만 하며 살아갈까? 그런 것들이 지난주 설교에서 다 답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식에서 자라갈 때 무지함을 면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동거가 가능합니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지식이 무엇인가 하면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아내를 아는 지식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아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아는 지식과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 남의 아내를 배워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하고 살게 아니니까. 우선 일반적으로 아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더 연약한 그릇이다. 때로는 강해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약함을 이야기할 때 아이고 목사님 우리 아내는 산소 같은 여자입니다. 산소가 얼마나 좋습니까? 훅! 하! 저 사람 참 행복 하겠구나 했더니 그런 산소가 아니라 ‘산소’ 지금 케네디 형제가 이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산소는 oxygen 이고 산 소 그러면 living cow, 그래 연약하다고요. 제가 연약하지 어떻게 우리 집사람이 연약합니까? 제 평생에 소원은 우리 아내가 연약해지는 것 좀 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겉모습일 뿐입니다.
우리 옛날에 이조시대 때 근대화 이전의 여성들이 얼마나 강인했습니까? ‘이혼’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열 몇 살 나이에 청산과부가 되어도 평생을 열녀문 남기고 죽었습니다.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게 살 수밖에 없어서 살았지만 사실은 어떻습니까? 너무 연약한 것입니다. 그 연약함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가식적인 태도를 오래 반복하면 이 진실로 돌아가는 게 부자연스럽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식을 일삼으면서 살던 사람은 외식의 껍질을 벗고 진실로 돌아갈 때 이렇게 닭살이 돋기 시작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설명을 더 안하지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해보여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연약합니다. 그게 여성의 본성입니다. 일반적인 모든 여성, 아내인 모든 여성이 바로 이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그러니까 일반적인 아내가 여성이고 그 여성이 어떤 사람인가 끊임없이 배워가야지 됩니다. 성경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여성이 어떤가? 강하고 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무력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여성은 또 강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성에게는 없는 섬세함이 있습니다. 그런 섬세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섬세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섬세함이 뭐고 그 아내인 여성이 가지고 있는 아내로서 공통된 연약함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배워갈 때 비로소 그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다룰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전제품이 엄청나게 좋아졌습니다. 저는 중국 가서도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삼성에서 만든 가전제품이 그 도시 전체에서 가장 커다란 마케시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있는 소니나 히따지 제품보다도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 제품이 훨씬 고급 제품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20%이상 비싸게 파는데도 그것만 사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서는 광경을 봤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솔직히 일본의 아끼아라 같은 곳에 가도 저것은 꼭 사가고 싶다는 물건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만듭니다. 그런데 옛날에 정말 국산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가전제품을 놓고 80년대까지만 해도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가 하면 외제는 잘 안나올 때 때리면 아주 망가지고 국산은 다시 들어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튼튼하게 만들어진 옛날에 진공관 라디오가 선이 많았습니다. 안 들어오면 탁 때리면 한대 맞으면 정신 차리고 다시 들어옵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고급 전자제품 같은 것 안 들어오면 때리면 몇 백 만원 날라 갈 수도 있습니다. 3-400만원하는 여러분, 디지털 캠코더나 아니면 1800-1900만원하는 PDP 같은 안 들어온다고 한번 발길로 뻥 차면 그 속에는 머리털보다 더 가느다란 줄들로 전기 줄로 선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 떨어져서 깨트려지든가 하면 결국 부속품을 전부다 갈아야 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절대로 안 들어온다고 때리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옛날 시대입니다. 요즘은 즉시 AS 센터에다가 부탁해야지 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는 말하자면 남성은 단순한 진공관 라디오 같은 것이라면 그래서 안 되면 툭 때리면 되지만 여성은 아주 섬세한 PDP 같습니다. 각막형 TV와 같아서 망가지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잘 수리하고 고쳐야지 발길로 툭 차고 에이씨! 그러면서 이렇게 때리면 안 됩니다. 아주 망가집니다. 그런 차이들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작은 두 번째는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남녀가 결혼하면 아무리 결혼 예비교육을 많이 시켜도 도움은 되지만 그러나 여전히 갈등들이 생겨나고 문제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일반적인 아내와 여성에 대해서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 배운 지식이 아직 체험된 지식이 아니고 쉽게 이야기하면 전쟁에 대해서 많이 배웠지만 전쟁을 아직 못 경험한 것과 똑같습니다.
두 번째는 일반적인 아내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내 아내는 또 일반적인 성품도 있지만 그러나 내 아내이기 때문에 독특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남자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고 다 다릅니다. 여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내가 다르고 남의 아내가 다르고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들딸 시집장가 보내고 둘이 같이 살면서 티걱거리고 싸웁니다. 굉장히 크게 염려하는데 괜찮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싸웁니다. 그것을 저는 가리켜서 갈등의 조정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단 그 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거의 없고 무지하면 그 싸우는 것이 심각한 결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결혼 초기에 인격적인 연합이 안 되고 분열을 자꾸 경험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부부로서의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동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말씀에 끊임없이 은혜를 받아서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들이 잠시 갈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갈등이 해소됩니다. 왜 내 아내를 아는 지식, 내 남편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와 함께 동거할 때 지식을 따라서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어떤 것들이 힘들어하는가. 어떤 것들을 싫어하는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그런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야지 됩니다.
보신탕을 전혀 못 먹는 아내에게 오늘 외식시켜줄게, 아! 정말 좋아. 이게 얼마만이야. 그리고 야호! 그리고 따라갔는데 보신탕집에 가자. 그리고 꾸역꾸역 먹으면서 왜 안 먹노? 이리 도. 다 갖다놓고 자기 혼자 먹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두 달 후에 다시 외식하러 갔는데 그걸 또 잊어버렸습니다. 또 거기로 갑니다. 그것은 아내를 아는 지식에서 전혀 안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하나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따라서 어떻게 하라고?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거하라는 것은 둘이 함께 같이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함께 깊이 기대고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 상태를 가리켜서 동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거하지 않고 그냥 살기만 할 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연합도 없이 그냥 살아갑니다. 별로 싸우지도 않는데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동거가 아닙니다. 그렇게 연합을 이룬 함께 살아가는 삶이 동거인데 그런 동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이 필요합니다.
가끔 보면 결혼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사실 결혼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난센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알고 있는데 문제는 집과 같습니다. 집을 지었다고 해서 모두 집이 아니라 어떤 재료로 지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워낙 그 지식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그 다음에 아내를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도 부족해서 그래서 지어진 생각과 사상의 집이 아주 쓰레기 같은 사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부부생활의 원리를 터득했다고 나오는 이야기가 뭐 그런 것이 아닙니까? 마누라와 북어는 계속 패야지 된다.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 배워온 잡다한 재료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가정생활을 영위해가는 원칙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결코 가정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한 가정에서 정말 좋은 사람의 남편이 되는 이 일은 사실은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성화의 과정과 일치합니다. 목회가 어려운가, 한 가정의 가장과 남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냐고 그러면 나는 일분도 망설이지 않고 목회가 더 쉽다고 말하겠습니다. 쉽습니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전 삶을 다 보여주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위장이 불가능합니다. 진실로 승부를 해야지 되는데 그렇게 진실로 승부해서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지어낸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참된 남편, 참된 아버지, 가장이 되어가는 변화의 과정이 있어야지 되는데 이것이 자신의 힘으로 변화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속에 끊임없이 역사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한 아내의 남편으로 온전하게 되어가고 자녀들의 한 아버지로서 가정의 한 가장으로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끊임없는 고민이 되고 자기의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분투하는 성화의 한 과정이 되지 않으면 그가 결코 그렇게 온전한 남편, 온전한 아버지, 온전한 가장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신자가 되어갑니까? 내가 정말 이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립니다.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깨트려집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이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확인을 받게 됩니다. 아픕니다. 깨트려집니다. 그리고 변화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됨으로서 우리가 겨우 걸음마 하듯이 주님의 성품을 본받으면서 참된 신자가 조금씩 조금씩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점점 짐승과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고 그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키드멘스타 리차드 백스터에 마더스 카터키즌이라고 하는 어머니의 교리문답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아이를 앉혀놓고 엄마가 가르칩니다. 질문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애야. 교리문답 배우자.’ ‘엄마 교리문답이 무엇이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란다.’ 아이가 또 묻습니다. ‘엄마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 안 배우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왜 배워야지 되요?’ 엄마의 대답이 무엇인가하면 ‘그들은 다 짐승이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네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지 된다.’ 그렇게 해서 겨우 주님의 사람으로 조금씩조금씩 되어갑니다.
얼마나 느린지는 여러분들이 증인이 아닙니까? 그렇게 똑같이 그 빛 아래서 아내의 잔소리나 불평, 집을 뛰쳐나가겠다는 공갈, 협박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아내의 남편으로 이렇게 이런 존재가 되어서 살아가도 되는가. 이것을 지고 십자가처럼 씨름하면서 자기가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데 아내 때문에 변화되어 가는 것은 애완견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왜 우리가 아내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 소유주가 우리 아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참다운 남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남편으로 변해가고 또 성경이 이야기하는 아버지로서 이런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되어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그가 성화의 도상에서 분투하면서 그가 살아가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변화들입니다. 바로 그런 지식을 따라서 살 때 아내와 동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남편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더 연약합니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강함이 아내에게는 모자랍니다. 그 대신 남편의 연약함이 남편에게는 연약한 부분이 아내에게는 강한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내가 남성인 우리도 연약하지만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연약하다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남성도 연약합니다. 정말 연약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는 이렇게 지도자의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어떤 상상을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지도를 받는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뭔가 이렇게 내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냥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연약함이 남성들에게도 모두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은 그것보다 더 연약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연약하다고 느낄 때마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연약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연약할 때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연약할 때에 귀찮게 여겨질 수도 있고 불쌍히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사랑하지 않아. 이게 자꾸 연약해. 그럼 나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라고 회사에서 채용을 했는데 매일 아프다고 그러고 오늘은 감기, 내일은 몸살, 그 다음에는 두통 그러면서 계속해서 직장도 안 나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사장이 어떻게 생각하면 잘라 버려. 그것은 관계는 있지만 사랑이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서 충성하고 회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쳐서 일해 왔는데 오늘은 아프고 내일은 편찮고 모레는 두통이 온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럼 사장 생각에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아내의 연약함이 여러분들에게 사랑이 있으면 그것이 불쌍히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연약함이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그래서 귀하게 여기라고 그랬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과 같이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고” 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의 두 정체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기뻐하고 그 다음에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Delight 그리고 Valuation 그래서 기뻐하고 그 다음에는 Valuation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떻게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인가? 성경은 동정적인 사랑을 아내에게 주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최고봉을 말합니다. 그것을 적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최고봉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대한의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최대한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 잘 들으며 살아갈 때에만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 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구원 했네
우리가 주님을 모르고 철없이 주님을 대적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 그때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생각도 짧고 마음에 그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는 그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었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는 사랑이 아니었고 자기를 다 내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인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고통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셨습니까?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시간도, 자신의 마음도 모두 우리의 범죄하고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한 인간들을 위해서 내어주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으심으로 구속을 이루신 것이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순종할 때에만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을 때에도 사랑하셨습니다. 다만 순종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사랑해주지 하는 그런 태도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처럼 또한 아내는 아내라는 사실 단 하나 때문에 사랑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이고 우리는 일평생동안 그 사랑을 실현해가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이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며 자기를 낮추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끊임없이 깨트려져서 사랑할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하고 참을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참을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하고 그래서 한 여자의 한 아내의 좋은 남편이 되어가는 그 모든 과정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한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과 일치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2:23)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이야기를 두 주에 걸쳐서 했다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이야기도 두주에 걸쳐서 하는 것이 남녀평등에 맞는다고 해서 오늘 한주 더 설교를 하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인류 최초의 결혼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담은 직접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만드셨고 하와는 그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셨을까? 한번 창세기 2장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던져본 즉한 진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6일에 이르기까지 제일 처음에 “빛이 있으라” 부터 시작해서 육축을 창조하실 때까지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공중에 나는 새가 날고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다니고 육축이 있으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 하늘에 나는 새 빛과 이 세상의 우주의 광명들, 모두를 오직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은 사람이 있으라 이렇게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흙으로 그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훅! 그래서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창조한 방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피조물과 구별됨으로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새나 짐승, 돌과 나무 풀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과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의미가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인간이 그런 존재라서 아담을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도 똑같이 흙으로 여자를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하와가 되게 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흙으로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아담을 잠들게 하셔서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은 창조의 행위 그 자체에 뭔가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메시지가 있을까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는데 아담의 몸에서 하와의 재료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심으로서 이 여성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소속과 질서를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도 하와가 먼저 지음을 받지 않고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라 이렇게 말함으로서 창조의 순서, 창조의 방식이 바로 둘이 만나서 이루는 가정의 질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 질서는 노예적 예속과 억압의 질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질서였으며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그 갈비뼈를 취하여 만들어졌다는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은 남성을 머리로 하는 가정이 세워질 것을 보여주셨고 그렇게 해서 그 두 사람이 질서를 가지고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하와가 나중에 지은바 되어서 하나님이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남성을 부르시고 이런 사랑과 조화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세상을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뜻들이 죄가 들어온 다음에 오해되어서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의 깨어진 관계 때문에 여성들을 완력과 사회폭력으로 억압하고 그리고 짓밟으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인간들이 취한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행동들이었습니다. 어떻든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심으로서 이것을 통해서 비록 노예적 예속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담이 먼저이고 하와가 그 후라는 질서를 하나님께서 세우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와를 따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하와를 만드심으로서 두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만 사실 원래는 한 뼈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깊이 잠들었고 그 잠든 사이에 하나님은 갈비뼈를 취해서 하와를 만드셨지만 깨고 나서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그에게 나아오게 하셨을 때 그는 그 하와를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그러나 본능적으로 그는 그 여인이 바로 자신의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으니 히브리문학에서 무엇 중에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Choice 혹은 best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너는 내 몸의 일부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나 그러나 너는 남아 있는 내 몸의 모든 부분보다 더욱 귀하고 내 남아 있는 내 몸의 모든 요소보다 더욱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고백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살, 자신의 뼈의 일부인 하와를 향한 사랑이 아담의 마음속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더 연약한 그릇을 소중히 여기는,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기초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언을 퍼붓거나 혹은 미워하거나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백, 이런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라고 하는 고백을 유지하는 상태 위에 가정을 건설해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고백이 교회로 말하자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가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는 것처럼 가정이 세워지는 초석이 되는 것이 바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그 고백을 통해서 그 위에 가정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합 속에서 사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경험했던 것과 같이 동일하게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가 들어와 있고 우리는 죄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던 이 때에 아담이 하와를 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고 하와가 또한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그대의 뼈의 일부요, 또한 살들의 일부라고 고백을 했을 때 그때 두 사람이 느꼈을 완전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 거기에서 비롯되는 그 지고한 사랑의 기쁨과 그 신비를 오늘 우리들은 동일하게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루어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남편과는 그런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내와는 그런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정도만큼 누리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지만 그의 에너리지(?) 유비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통해서는 깨닫게 됩니다.
에베소서에서 분명하게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이 곧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 유사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누차 강조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복종하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그 영적인 결합, 그것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결합이며 또 그렇게 그 결합이 유지되어야지 한다는 사실을 에베소서에서 강조했던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그런 완전한 사랑을 완전한 결합을 아담과 하와가 누렸을 정도까지의 완전한 결합을 경험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정말 참된 신자가 되어가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식이요, 타락한 자손이요,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리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핍박자요 포행자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경험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받아본 적이 없는 무제한으로 우리를 용납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이렇게 시작되어서 우리의 성화의 상태에 따라서 촉진되기도 하고 혹은 지연되기도 했지만, 느슨해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참회하고 순종하며 기쁨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계명을 따르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연합이 경험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보고 시편의 고백들을 보면 그리스도와 혹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면서 살았던 그때의 성도들의 행복을 노래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 같은 완전한 연합, 그 연합의 경험은 반드시 사랑의 경험이 동반됩니다. 더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그 연합 속에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정말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들이었고 쓸모없는 인간들이었지만 그 피로 구속해내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 되어서 그런 신앙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어떻게 그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경험했던 그런 종류의 연합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예수님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을 때에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온전해질 때 그때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더 이상 사랑스러운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소중한 것이 없고 우리의 고통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더 많이 그리스도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더 온전한 순결함으로 사랑해드리지 못하는 것에 우리의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결합이 바로 아담과 하와사이에 있었던 결합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에 남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결혼시키셔서 한 가정을 만드셨을 때에 그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기를 원했던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사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가정을 보면 그 결합이 계속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깨트려졌습니다. 어떻게 깨트려졌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졌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차례대로 타락의 원흉인 뱀부터 시작해서 하와, 그리고 아담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하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담, 하와, 뱀 모두 하나님의 국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물어보셨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장본인이었고 뱀이 하와를 꼬인 원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둘을 찾지 아니하시고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당사자가 바로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했던 아담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내가 먹지 말라고 명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가르쳐준 그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아담은 펑펑 울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내가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주님 이외에는 건드릴 수 없는 처치할 수 없는 그 선악과나무를 따먹고 범죄 했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참회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는 예전의 아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가 내게 줌으로 나는 먹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사실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선 첫째는 자신은 피해자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그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내게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먹지 아니하였을 텐데 그 여자가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여자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 타락의 책임이 여자에게 있다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내게 줌으로 그 여자가 자신을 타락시킨 원흉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마지막에 세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깃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 여자를 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주어오거나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기까지는 나의 어떤 의지도 없었고 하나님 홀로 하셨는데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 여자가 생겨났고 그 여자 때문에 나는 피해를 입고 하나님 앞에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기에서 우리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던 그 사랑스러운 고백이 산산조각이 난 가정파탄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최초가 경험한 부부의 파경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렇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뼈와 살이 녹는 것 같은 그 애정의 고백과 함께 결혼을 했는데, 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사랑의 아름다운 고백이 처절히 파경으로 이른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처절하게 파괴되어버리고 이제는 나와 함께 있는 그 여자도 싫고 그 여자가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상황이 죽기보다 괴롭고 심지어는 그 여자를 내게 주신 하나님도 원망스러운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둘 사이에 어떤 다툼이 있었습니까? 갈등이 있었습니까? 가난이 찾아왔습니까? 둘 사이에 어떤 성격차이가 있었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남편이 아내 몰래 무슨 잘못된 일을 했습니까? 아내가 남편 몰래 부정한 일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일에 있어서도 먼저 따먹은 것은 하와였지만 옆에 있다가 얻어먹은 것은 아담이었습니다. 아담도 자신의 의지로 하와에 의해서 떼어내어진 그 과일을 먹었습니다.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까지 밖에 안 나오지만 성경 이외의 자료를 보면 아담이 왜 선악과를 따 먹는가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큰일 났구나. 너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너 죽을 텐데 너 따먹었니? 네가 죽고 없는데, 네가 죽는데 나 혼자 이 세상에서 뭐하겠니. 같이 죽자.’ 그리고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일 수는 거의 없겠지만 그러니까 얼마나 아담이 하와를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어떤 갈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두 사람 각자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입니다. 둘은 갈등도 없었고 다툼도 없었고 분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자 이제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뼈 중의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일체된 고백들이 파괴되어버리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대신에 언제든지 저 인간이 내 삶 속에 들어와서 나를 괴롭히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인생으로 데려갈 수 있는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경계심들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 속에는 무한대의 희생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살인데 뼈인데 그러니까 내가 만약에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계속 살아있다면 아담이 몸에 상처를 입고 아픈 것보다 하와가 몸에 상처를 입고 아픈 것이 더 마음이 아픈 그런 상태가 될 것입니다. 왜 가장 귀한 살, 귀한 뼈니까. 살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심장의 살은 한점만 떼어내도 죽습니다. 그러나 발바닥의 굳은살은 아무리 떼어내도 괜찮습니다. 뼈도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엉덩이뼈 같은 것은 필요하면 수술해서 깎아서 허리에다가 붙입니다. 그런데 목뼈 같은 것은 하나만 부러지면 평생 바보로 살아야지 됩니다. 불구로 살아야지 됩니다. 틀립니다. 네가 더 소중하고 네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산산이 깨트려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남편과 아내라고 하는 이 관계는 어두운 죄악 속으로 들어가면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그 아름다운 조화와 일체의 고백을 뒤로 한 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과 복종의 그 토대위에서 이룩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하나의 유니티, 일체로서의 고백을 상실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서로 충돌을 하고 남편은 완력으로 아내를 폭압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하고 아내는 잔꾀로서 남편을 밟고 일어서려고 하는 무질서와 반항들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개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의 혼돈스러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아무런 갈등이 없었고 오직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뿐인데 가정은 파탄이 나고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경험했던 그 온전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토대 위에 이룩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결합의 고백을 망각의 저편으로 떠내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생활에서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가 뭐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못생겼기 때문이다 등등 이야기를 하지면 사실은 그것은 모두 핑계거리에 불과하고 제 이, 제 삼의 원인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원인의 그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깨어진 부부관계의 뿌리에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깨어진 부부와의 관계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두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고 싶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진실하게 믿고 신실하게 살지 않아도 부부둘이 서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부가 드물기는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화목하게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에 가끔 가정에 관해서 나오는 책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가 엄청나게 갈등을 일으키고 사는데 아내가 기가 세서 그래서 늘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인 내가 그래 죽어 살자. 그리고 엎드려 있으니까 가정에 행복이 찾아오더라. 그런 이야기를 아마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또 반대로 남편이 기가 세. 그래서 아내인 나도 지기 싫어서 힘겨루기를 하고 그렇게 살 때에는 늘 바가지가 날라 가고 국자가 돌아다니고 했는데 그저 짧은 세상 그렇게 살아서 뭐하겠는가. 그리고 남편 하자는 대로 했더니 가정에 평화가 오더라.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교인의 가정의 목표는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인간에게 원래 계획하셨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듯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진정한 가정으로 회복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죄가 들어오기 전에 가정은 둘이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그 고백이 가능했던 토대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그 하나님에 의해 피조 된 만들어진 비천한 피조물일 뿐임을 아는 경외의 정신의 토대 위에서 그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부부의 결합의 고백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데 수시로 방해가 되는 그런 종류의 부부사랑은 변형되고 타락한 부부사랑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을 통해서 더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되고 하나님의 명령에 더 많이 복종하게 되는 열매들이 맺히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돌아가게 하고 싶은 그 가정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남편이 기가 세다고 해서 꺾이지 마십시오. 부인이 기가 세다고 해서 죽어지내지 마십시오. 그럼 어떻게 되는가. 그 인간들이 서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트려져서 사람이 되어야지 됩니다. 그러기까지 그 투쟁을 그치지 마십시오. 바보입니다. 아내가 기가 세다고 해서 왜 죽어 삽니까? 그리고 남편이 기가 세다고 해서 왜 거기에 엎드려서 삽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 남편이라는 인간도 변화되어야지 되고 그 아내라고 하는 인간도 변화되어야지 됩니다. 하나님이 그냥 으스러지도록 깨트리셔서 부서서 그래서 새사람을 만들어야지 됩니다. 도자기 만들다가 망치면 연못에다가 던져서 다시 발로 밟아서 다 떡을 만들어서 그래서 말랑말랑하게 진흙을 만들어서 다시 빗듯이 그렇게 만들어야지 됩니다. 아니 왜 거기 적응하고 삽니까? 미쳤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편이 혈기가 세고 제멋대로 하는데 그렇게 순종하고 살아서 남편을 점점 죽일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가 제멋대로하고 기가 셉니다. 그런데 남편이 눈감아주고 포기합니다. 그러면 마음 놓고 잘못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싸움하지 않고 사는 게 그것이 부부의 행복이라고 성경 어디서 말하고 있습니까? 그럼 성화가 무슨 필요가 있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이 무슨 엄청난 승리가 된 것처럼 자랑을 하고 책을 써내고 하는데 다 사람들을 혼돈스러운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죄 아래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가 물밀 듯이 이 세상에 들어오고 나서 그 들어온 죄들이 다 이렇게 온 땅을 뒤덮고 결국은 가정도 그 죄의 물아래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일그러진 가정의 모습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몸을 해하고 고통 받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단의 계획도 살아 있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럼 사단의 계획이 무엇인가? 아주 가정을 향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이 가정의 파괴를 향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그 원래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그 죄가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왜 그러면 죄가 그렇게도 치열하게 역사해서 처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 만드셨던 죄 없던 상태의 그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인간은 태어나면 아담과 하와 시절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인간이 태어나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는데 그 둘을 남편과 아내에게 도입해서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을 그려내게 하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그 아버지가 남성성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어머니가 그 여성성을 가지고 어떻게 섬세하게 하나님을 공경하는지를 그 가정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배움으로서 그 어린아이들이 인간이 참으로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인간의 위치가 어디이고, 그 인간의 위치 중에서 특별히 남자로 태어난 나의 위치와 여자로 태어난 너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어도 그들이 그 부모의 껍질을 깨고 다시 부모가 살았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만약에 그렇게 여러 가지 많은 이 거룩한 투쟁을 통해서 가정이 그 원래의 가정의 모습으로 복원되면 그 가정이라고 하는 샘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많은 자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의 결합 그 자체가 그것이 타락하게 되면 사단의 자식들을 만들어내는 소굴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게 되면 여호와를 경외하고 이 악한 세상을 거스르고 마귀의 계획에 도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산해내는 그런 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것들을 뭉개버려서 막아보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계획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이나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번지는 수많은 음란문화들을 보십시오. 그것들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시간이 없어서 그 문제를 다 다루지 못하지만 결국은 가정 속에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성, 이런 것들이 깨트려지고 파괴된 관계를 통해서 왜곡된 가운데서 행해짐으로 말미암아 가정의 질서들이 파괴되고 성적인 질서들이 무너져서 그래서 실질적으로 가정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연합의 고백 없이 존재하도록 껍데기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못된 성적인 탐닉들을 가정 밖에서 찾게 함으로서 그래서 가정의 이 모든 질서들 자체가 다 무너져버리고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아는 엄마도 없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아빠도 없는 가정에서 막대 먹은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행히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음을 만나고 깊이 회심하고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면 그나마 우리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참된 인간의 위치로 귀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데 그런 특별한 기회를 공급받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아주 악한 자손들의 땅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단이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와 사단이 가정을 향한 원대한 계획입니다. 그런 원대하고 치밀한 계획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아는 것이 없고 가정에서 이 관계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면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적용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혼자 예수를 믿고 남편은 아직 그리스도밖에 있고 혹은 남편인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지만 아내가 신앙밖에 있다고 할 때 그때 여러분들이 명심하여야 할 사실은 속히 그 남편과 아내를 구원해서 거듭나게 해야지 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그것보다 중대한 숙제는 없습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이 구원받지 못한 남편으로 인해서 울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날이 올 것이고, 변화 받지 않은 여러분들의 아내로 인해서 무릎으로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던 여러분들의 그 태만한 죄에 대해서 가슴 아프게 회개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부부의 결합을 누리는 것, 여러분들의 아내가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하나가 되어서 진정한 연합을 이루는 것, 그래서 가정이 참된 대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들이 아파트를 사고 새 차를 사고 자식들을 유학 보내는 것보다도 절대 절명의 과제입니다.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고 영화를 누리는 것, 오늘 죽는가, 내일 죽는가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가족을 위해서 잃어버린 남편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아내를 인해서 가슴을 찢는 배우자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반듯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강도만큼 간절해지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나와 함께 부부된 내 남편이 구원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속에서 사는 내 아내를 구원해주시옵소서. 그를 용서하실 수 없다면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왜 불신 남편을 위해 울지 않습니까? 왜 불신 남편을 위해서 그의 영혼은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여러분들은 그의 일부이고 그는 여러분들의 일부입니다. 우리 남편 정신 못 차리는데 혼 좀 나야지 됩니다. 남의 이야기처럼 하면 안 됩니다. 당신의 뼈요 당신의 살입니다. 많이 울어야지 됩니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병든 것처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야지 됩니다.
믿지 않는 남편과 힘들게 사는 여러분 믿지 않는 남편하고 살면서 힘들게 교회에 다니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눈에는 믿지 않는 남편과 살면서 힘들게 교회에 다니는 여러분들이 불쌍한 게 아니라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안 여러분들의 눈물의 중보의 기도를 받지 못하는 남편의 영혼이 더 불쌍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은혜를 너무 받기 때문에 이 은혜를 모르는 남편 때문에 아프고, 은혜가 없는 날에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남편이 불신 상태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그렇지 않습니까? 마땅히 있어야 할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은 죄로 말미암는 무감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남자들에게 시집을 가는 여자들은 폭탄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사람밖에 주위에 없으면 홀로 사십시오. 왜 그렇게 까지 구걸을 하듯이 시집을 가려고 합니까. 그 이후에 당하게 될 그 아픔과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는 이 설교를 듣고 흐느껴 우는 불신남편을 둔 여 성도들의 절절히 스미는 아픔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믿음이 없는 아내를 둔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권위와 폭압으로서는 결코 아내의 마음을 열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그 아내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그 죄의 비참함에 눈뜨게 해주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오래도록 아내가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홀로 교회에 다니십니까? 구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고 그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며 하나님의 심판의 길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누가 기도해주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마치 자신의 영혼이 불속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살이 타들어가고 자신의 뼈가 깨트려지는 것처럼 아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원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몸과 마음을 바쳐 기도했더라면 벌써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도 없는 자매들에게 눈이 팔려서 장가가려고하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씀드립니다. 끝은 쓰디쓴 열매가 될 것입니다. 마치 롯이 자기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소알 땅을 선택한 뒤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유황 불비를 맞으며 아무 재산도 없이 도망 나와야지 된 것처럼 그런 결과가 뒤따를 것입니다. 신앙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기까지 기다리든지 아니면 포기하시든지 그리고 신앙 안에서 자매를 찾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오늘 남편과 아내 둘이 동시에 저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경우입니다. 여러분들 속에는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도 그래도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고 나도 집사인데,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왜 우리에게는 그런 결합, 그 여자를 볼 때 아! 정말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처럼 여겨지기는커녕 살은 살인데 튀어나온 혹처럼 느껴지고 뼈는 뼌데 잘못 된 디스크처럼 생각이 되어서 수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들이 함께 신앙을 고백해도 하나님 앞에 아직까지도 이 속에 남아 있는 많은 죄악들이 여러분들을 참으로 아내의 자리로 참으로 남편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마음의 자만심과 남편을 하찮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들이 그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에 남아 있는 포악함과 완악함들이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허락하신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둔 채 껍질로만 그럴듯하게 살아갑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아내를 혹처럼 생각하고 남편을 디스크의 튀어나온 뼈처럼 생각하는 그런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해결의 길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이고 나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하셨으며 구속받은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주님의 자녀 만드시기를 원하시는가. 배워나가야지 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남편은 싫어, 아내는 성에 안차. 끊임없는 결점이 보이고 그리고 마음에 완전히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에게는 아내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니고 남편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내 남편은 존경스럽지 않고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까지 다 찢고 그리고 물과 피까지 아낌없이 다 쏟으신 예수님이 평생에 소원이 그 남편에게 복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살아야지 됩니다. 남편은 마음에 안 들고 그 인간은 부족한 것이 많아도 예수님이 부족한 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자란 게 있습니까? 모두 주셨습니다.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함을 대속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인생의 전부이고 우리의 삶의 목표이고 우리의 죽음의 이유입니다. 그분이 남편에게 복종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남편 때문에 못해도 예수 때문에는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왜? 전할 수밖에 없는 예수사랑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힘들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때 얼마나 힘드셨는가 하는 그 신앙의 고백이 있기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자라는 것이 많고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용서해도 결점은 다시 나타나고 이해해도 또 가슴 아픈 일들은 일어납니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내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끝없는 욕망을 가진 타락한 또 다른 인간을 어떻게 완전히 만족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내 때문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주신 주님, 아내는 나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여기지 않아도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여기셨기 때문에 당신의 살처럼 뼈처럼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뼈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피 흘리시고 그리고 찢으셔서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좋으신 주님이 우리보고 아내를 사랑하라고 그러십니다. 그럼 해야지, 아내 때문이 아니라 아내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 세상에서 버려져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어떤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타락한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찾아오신 그래서 자기의 모든 생명을 주시고 범죄 한 우리들의 살과 뼈를 구하기 위해서 당신 살과 뼈는 십자가에 못 박고 피 흘리신 그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그러십니다. 해야지요.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사랑의 마음도 주시고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도 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 그래요. 남편은 우리를 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우리를 외롭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부족한 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모자라는 내 아내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잖네
그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은혜를 받아야지 됩니다. 신앙생활을 똑바로 해야지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고 내가 어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니 그래서 내가 어떻게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야지 되는가.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한 신자가 되는 그 일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고 의무인가 하는 것을 배워나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예수님 사랑하고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아내가 나에게 무릎 꿇기를 바라지 말고 예수님 만나고 그 사랑 알아가기를 힘써서 기도해준다면 언젠가 내 아내가 좋은 신자가 되고 내 남편이 참된 신자가 되어가면서 사랑할 수 없는 나를 사랑해주고 복종할 수 없는 내게 복종해야지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설복되게 하시고 인격적으로 승복되게 만드셔서 가정의 참된 질서를 회복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동안에 이런 관계를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망가지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아내의 자리로 남편의 자리로 돌아가고 부지런히 신앙생활 하면서 돈 없고 환경이 어렵고 자식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고 부부의 관계를 회복하고 대의를 회복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자녀들이 오히려 우리 부부를 통해서 더 아름답게 회복되어가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바르게 살아가야지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을 향한 아버지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가족과 신앙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