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구원을 위하여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구원 받지 못한 가족을 돌아보라(1)(딤전5:8) 2003. 4. 23 (수요예배) 1
2. 구원 받지 못한 가족을 돌아보라(2)(딤전5:8) 2003. 5. 7 (수요예배) 11
3. "아나데마"의 정신으로(롬9:1-3) 2003. 5. 28 (수요예배) 19
4. 친척을 그리스도안에 세우기까지(롬16:7) 2003. 6. 11 (수요예배) 28
5. 생사를 건 기도(출32:31-32) 2003. 6. 25 (수요예배) 33
6. 구원의 은총, 그 표징을 주소서(출33:13) 2003. 9. 3 (수요예배) 44
7. 아브라함을 생각하심 같이(창19:29) 2003.9.10 (수요예배) 54
8. 전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롬10:13-14) 2003.9.17 (수요예배) 61
1. 구원 받지 못한 가족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가지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8)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일은 그 믿음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쯤에는 초대교회 시대였고, 그리고 많은 박해가 있던 때에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안으로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을 것이고, 또 밖으로 이 세상 로마제국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는 안팎으로 박해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그런 신앙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것인가, 하는 이 문제는 성경 구석구석에서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그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 문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여러 곳에서 이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자기의 신자들에게 가르쳤고, 특별히 이런 강력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믿음을 배신하는 문제는 배교의 문제인데 배교의 문제는 그 당시에 얼마나 엄중하게 생각했느냐면 배교한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신자가 된 다음에 지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죄가 이 믿음을 배반한 죄인데 사도는 일정한 상황을 가상하면서 이러이러한 삶을 살면 바로 그 사람이 믿음을 배반한 사람이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사람이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뭐냐면 자기 친척,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한 자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신앙을 갖고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믿음을 갖지 아니한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예전에는 술도 마시고 놀러 다니고 허탄한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그런 일에 흥미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보면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교제가 멀어지고 그리고 새로운 교제가 형성되는데 그것이 바로 함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 그 사람들 안에 있는 그런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경건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변화입니다. 그렇지만 가족의 문제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성경에 보면 “자기 친족 곧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이 믿지 않는 가족이든 믿는 가족이든지 간에 그 가족들과 멀어져서 그래서 무관심하게 나 혼자 열중해서 신앙생활 해 나가는 이러한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받아 들여 질만 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이렇게 되기가 참 십상입니다. 가정이 모두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자녀들과 동기간에 이르기까지 신앙 하나로 굳게 뭉쳐진 가정이고, 가족들이 명절에도 모이면 서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간증하면서 부흥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가 된다면 모르지만 믿지 않는 가족들이 다수가 섞여 있고, 그리고 평소에 암암리에 핍박을 당하고, 더욱이 가족들 간에 상처가 있고 그럴 경우에는 정말 자기혼자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가족들을 향하여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고 더욱이 함께 사는 가족도 아닌 친족들에게까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함께 믿음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워낙 신앙의 방향이 다르거나 수준이 워낙 틀려서 같이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어느 한쪽이 가슴이 답답해지는 일이 일어나면 더군다나 서로가 교만에 빠져서 서로의 신앙에 대해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의 분위기가 되면 더더욱 신앙으로 말미암는 일체감이라고 하는 것은 생겨나기 참 힘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들을 돌아보면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으려고만 하면 우리는 절대 한가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인으로서의 모든 삶을 감당해 나아가면서 우리는 그 시간을 쪼개서 예배에 참여해야 하고 또 기도해야 하고 또 봉사생활도 해야 하고 그렇게 많은 시간들을 우리의 신앙에 투자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어쩌다가 있는 공휴일이면 교회에서 행사가 있고, 또 어쩌다가 주일이라도 교회에서 좀 일찍 끝나면 반드시 모임이 있고, 이렇게 해서 매일 매일의 삶이 우리들이 부단히 바쁜 가운데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가족들과 친족들을 돌아본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이 친족, 곧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자요. 이 신자를 향해서 믿는 자가 모든 사람을 그렇게 사랑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부르심인데 이웃이나 먼 나라에 있는 다른 민족이나 혹은 교회에서 가끔 만나는 지체들을 이렇게 돌아보고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믿음을 배반한 자요. 라고까지는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이렇게 믿음을 배반한 자로 규정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입니다.
우선 첫 째는 가족들의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교회만 교회가 아니라 가정도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많은 모임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은 가정과 교회 단 두 개뿐입니다. 나머지는 사람들이 살다가 경험적으로 만든 기관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 두 교회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은 이 작은 교회인 가정이 올바르게 서므로 큰 교회인 교회가 올바로 서고, 큰 교회에서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올바로 길러내는 목적중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이 사람들을 작은 교회로 돌려보내서 거기에서 가정을 진짜 교회다운 가정으로 세우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가정을 위해서 또한 교회를 역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기관은 세상 끝날까지 이 죄와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피난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켜줄만한 피난처가 되는 그것 없이는 결코 이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과 교회를 아주 사랑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이 가정과 교회를 하나의 영적인 연합체로 묶으셔서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로 그 가정의 교회에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아무리 나쁜 교회라도, 나쁜 교회라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사람이 보기에 규모가 작고, 문제가 많고, 이런 교회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가정도 교회라고 그랬는데 그 가정은 누가 목회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회자가 있어서 목회를 하고, 그 목회의 그늘 아래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서 신자다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에 우리에게 의도하셨던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가정에도 그런 목회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잘 세워진 가정에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 곳에 가장이 목회자가 되어서 가족들의 영혼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가족사랑 그 위에 예수 안에서의 사랑이 보태져서 자기 몸을 아끼듯이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 가족들 속에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연합을 공고히 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가정이 얼마나 소수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이 없고 목회자가 없는 곳에는 교회가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세워갑니다. 그러니 믿음 없고, 하나님도 없고, 그리고 목회자도 없이 가정이 육신적인 생식의 원리에 의해서 세우질 때에 그 가족 구성원들의 연합을 통해서 그 가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정이 모두 복음화 되어서 교회 같은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데 그 때에 꼭 필요한 것은 그 가정을 목회해줄 사람입니다. 가장 그 일에 어울리는 사람은 그 집안에 권위를 가진 가장이면 제일 좋겠죠.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반드시 가장을 먼저 믿게 하시고 먼저 은혜를 주셔서 그 가정이 신앙적인 으뜸이 되게 하는 것으로 가정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빠가 먼저 회심하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께 돌아와서 십자가지고 이기는 가정도 있지만 남편은 냉담한데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는 가정도 있고, 엄마 아빠는 냉담한데 어린 자녀가 먼저 예수를 믿는 겨우도 있습니다. 이렇다면 그러면 도대체 이 가정은 가정이 교회처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될 때까지 이 가정은 누가 돌볼 것인가?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섞여 있을 때, 혹은 온 집안에 믿는 사람이 나 하나일 때 이 집안을 누가 돌볼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를 사용하셔서 이 집안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이 집안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집안으로 잘 성숙하게 만들어 가실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개인의 영적인 성숙이 있을 뿐 아니라. 교회적인 영적 성숙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신앙이 어리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환란과 시련을 많이 만나면서 그것들을 신앙으로 싸워서 이기다보면 그의 성품이 거룩해지고 진리 안에서 성숙한 그런 모습이 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처음에는 모두 어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고, 또 환란과 시련을 만나서 고통당하기도 했지만 그 환란과 시련 속에서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믿음을 사용하고 그 믿음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진리와 함께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환란과 시련을 극복하다보면 교회가 부쩍 성숙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잠들지만 않고 계속 진리 안에서 성장해 가기만 한다면 교회의 연조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환란과 시련을 견디면서 온 교회가 한 몸이 되어서 눈물의 기도로 시련을 극복하고 환란을 이기고 주님의 교회가 아플 때에 많이 희생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많이 헌신해 오는 발자취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가족이 모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서 가정의 복음화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들이 더 많이 은혜를 받고 더 주님을 알고, 더 신앙 안에서 자라가서 가정 전체가 더 성숙하고 성화된 가정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또한 구원 받은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뭐냐면 누가 이 짐을 질것인가? 입니다. 교회에서는 이 짐을 목회자가 지고 목회자와 함께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들이 누가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인격적ㄱ인 하나님을 만난 그 은혜가 가져다준 사명감 때문에 헌신하고, 그리고 희생하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믿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정은 누가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의 일환으로 오늘 성경이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니라.”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너희가 만약에 정말 신자라면 친족 특히 가족을 잘 돌봐야 하는데 이것이 너희의 마땅한 의무이다.”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답이 되느냐 이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뭐 교회는 목회자가 돌보지만 가정은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믿으면 먼저 믿은 사람도 있고, 나중 믿은 사람도 있고, 많이 믿는 사람도 있고, 조금 믿는 사람도 있는데 누가 그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목회자의 마음을 가지고 헌신할까? 정답은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먼저 믿는 사람도 아니고 나중 믿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렇게 그 십자가를 지고 가정을 위해서 많이 헌신해야 될 사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나중 믿기는 했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많이 경험했다면 누가 먼저 믿었는지 와는 상관이 없이 여러분들이 바로 그 가정에서 이렇게 헌신하여야 할 목회자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정도도 사람마다 다 다르시지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의 가족에게 골고루 은혜를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겨우 교회에 나오는 정도이고 어떤 사람은 그나마 주일을 못 지키는 형편이고 어떤 사람은 믿음의 뿌리까지 흔들려서 신앙을 버리려고 할 때에 나중 믿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인격적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연히 알고 진리 안에서 든든히 믿음으로 아름답게 성장하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가족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가게 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먼저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러면 그 책임이 크겠네요.” 그거죠. 당연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우리의 공로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은혜의 계획이 있습니다. 은혜의 계획이 있는 곳에 비로소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은 사명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라와 임금들에게 예수님 전하게 하려고 택하신 것이 언제였습니까?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만세전이었다고 그랬습니다. 만세전에 택했는데 만세전에는 사울이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이해가 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정해놓으셨는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아무리 사명을 정해 놓으셨어도 그는 사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은혜를 주심으로서 자기의 인생을 향한 계획을 드러내시고 계획을 드러내심으로서 비로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이 먼저 믿는 사람, 나중 믿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 어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 그 진리의 말씀의 빛을 더 많이 얻은 사람, 주님을 인격적으로 더 깊이 만난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런 사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기 주시는데 가정을 위해서 주신 사명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가족,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이렇게 말할 때에 사도바울이 불신자를 가리켜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신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뭐냐면 엄마 아빠도 문제가 아니고 그리고 누가 먼저 예수 믿었는지도 문제가 안 되고, 누가 돈 많이 갖고 부자인가도 문제가 안 되고, 그 가족 친족을 모두 끌어안고 그 사람들이 마치 자기 새끼인 것처럼 그렇게 돌보고 목양하고 사랑해 주어야할 장본인이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신자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정이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아름답게 서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면 예수 믿기 전 보다 삶이 편안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해 보세요. 편해집니까. 편해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얼마나 고단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도대체 말이죠. 일주일이 왜 그렇게 빠르게 갑니까. 이것은 완전히 고속전철입니다. 벌써 수요일 아닙니까. 노회에 가서도 목사님들 만났는데 도대체 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 깜박하면 토요일 눈 깜박하면 또 수요일 깜박하면 또 주일, 이것이 뭐 제트기를 탄 것처럼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주어지는 사명들을 감당하면서 살려고 하면 게으를 레야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고단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 믿기 전에는 이렇게 고달프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코피 나게 고단하면서도 마음이 참 편하고 감사하다는 것, 두 번째는 뭐냐면 그 때는 고생고생 하면서 인생을 발악, 발악 살아도 다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정말 코피 나게 살아도 이것이 다 쓸데없는 일에 우리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을 거스르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도 살게 해 달라고 많은 눈물로 기도하는 것, 예전 같았으면 새벽부터 돈 벌러 나갔거나 퍼져서 잤을 터인데 게으름 시리즈를 듣고 이른 새벽에 나와서 오는 잠을 쫓아가며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 모습, 그것이 헛것입니까. 이 세상에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까. 나 한 사람을 간수하기도 버겁고 힘든데 그런데 지체들을 챙기고 그 지체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많이 수고하는 애쓰는 그것, 쉬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데 여러분 기대하세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이 기억해주실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채 자신의 이 섬김이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의 이 부지런한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수고로운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면 현실적으로 볼 때 불행한 사람은? 예수를 믿었는데도 똑바로 못 믿어서 그냥 불만족과 괴로움 속에서 마음 고생하면서 사는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더 불쌍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버렸지, 그런데 또 신앙을 택했는데 신앙도 별로 없어요. 세상 즐거움은 버렸는데 하늘 즐거움도 별로 없어요. 불쌍한 사람 아닙니까. 아니 세상 즐거움 맛보는 사람은 하늘 즐거움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까 없는 줄 알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지만 믿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기왕 믿은 것 잘 믿어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얘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좋은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에 강도사 두 분이 목사 안수를 받았지 않습니까. 마지막 목사 고시에서 면접을 하는데 그러더래요. “가장 큰 소원이 뭐냐?” 그러니까 앞에 강도사님이 “좋은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을 보냈더니 뒤에 사람이 또 들어오더니 같은 교회래요. 그 사람이 말하는데 “자네는 이제 목사가 될 터인데 소원이 뭐냐” 그랬더니 “좋은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면접관이 그러더래요.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가지고 안수를 주니까 신자가 되고 싶다니 이상한 사람들이네” 우리가 사실은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돌아보라.” 그랬습니다. “가족들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여기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을 잘 돌보면서 사는 이것이 신자가 가정을 교회처럼 세우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기억해야 됩니다. 설교를 잘 하고 예배의 감격이 넘쳐도 잘 돌아봐주지 않으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비유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왜 아이를 낳으면 대게 몇 키로 낳습니까. 3.7이요. 그 집안은 거인 집안 인가봅니다. 한 3킬로 정도 그렇죠. 3.2, 2.8도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2.9, 3.2, 3.0 그런 정도 뭐 1.8 낳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데 중국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8.6킬로를 낳았답니다. 참 그 엄마도 대단합니다. 애가 태어나자마자 6개월 된 아이만큼 우유를 먹더랍니다. 8.6킬로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아들도 그저 8.6킬로 까지는 안 되었지만 4.2킬로니까 막강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말이죠. 8.6킬로를 낳았다고 칩니다. 그러니까 태어나자마자 묵직했겠죠. 그런데 그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묵직한 아이, 500그램으로 치면 16근 정도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묵직한 아이로 태어나서 그 아이는 힘도 굉장히 세었을 것입니다. 그래 8.6 가 태어났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볼 때에 사실 언제 한번 병원에 갔더니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저는 눈도 나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커먼 젖병을 몇 개 구루마에 싣고 가요 그런가보다. 그랬는데 젖병이 꼼지락 꼼지락 움직여요. 이렇게 쳐다보니까 사람이에요. 사람 요만한 아기인데 한 1.5킬로나 되나 1.8킬로나 되나 하여튼 야, 세상에 그것도 사람이라고 말이죠. 꼭 소시지 큰 것처럼 쫙. 그런데 그 아이를 볼 때에 이 아이가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살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8.6킬로는 낳았을 때에 이것은 진짜 사람이 태어난 것 아닙니까. 완제품이 태어났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를 그렇게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정도밖에 안 되서 도저히 사람구실을 할 수 없는 아이인데도 병원에서 잘 돌보아주고 엄마 아빠가 잘 돌보아 주니까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아이를 일찍 낳아도 아무 문제가 안 되고 씩씩하게 잘 커서 우리 교회 애들도 뛰어다닙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8.6킬로로 태어나도 돌보지 않으면 그 애는 사람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목회라고 하는 그 자체가 말씀을 통해서 많이 은혜를 받는 것이 첫 번째이지만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첫 번째이지만 그다음에 따뜻하게 잘 돌보아야합니다. 그래야지만 믿음으로 잘 자랍니다. 그러면 가정이라고 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 가정이 내 교회다. 생각하고 내가 죽어서 우리 가정이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면 내가 안방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도 좋다.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그 가정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가족 중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런 사람들이 생겨나기를 그 가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기도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을 찌르는 기도의 제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여기에서 ‘돌아본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래서 크게 세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는데 오늘은 한 가지만 하고 그리고 두 가지는 다음 주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육신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의 영혼의 구원문제를 돌아보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들의 믿음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뭐냐면 가족들을 먼저 육신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의 문맥이 무슨 이기가 나왔느냐하면 과부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나온 것입니다. 과부가 있으면 홀로 된 분이 계시면 그러면 믿는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데 만약에 그에게 자식이 있으면 자식들이 먼저 그 부모를 교회의 폐를 끼치지 않고 돌보도록 이렇게 잘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지 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다가 도저히 가족들이 말을 안 들으면 할 수 없지만 더군다나 그 자손들이 믿는 자손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게 하도록 잘 가르쳐야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족들을 잘 돌아보라고 하는 이 일에 있어서 첫 번째 중요한 것은 그 가족들의 육신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 형제들, 동기간, 특히 자식과 부모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 가족을 잘 육체적으로 돌아보아서 건강하고 어려움이 없도록 인생을 살아가게끔 힘 되는 대로 그들을 도와주는 그것이 가족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고 더욱이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자기의 가족들을 돌아보는 일들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영혼과 중요하고 육체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또한 육체는 대단하고 영혼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그들의 육체를 불쌍히 여길 줄 압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장 예수님의 마음의 관심을 끈 것은 그들의 영혼의 상태였습니다.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그 불쌍한 영혼들의 처지와 상태, 그리고 그들은 죽음 이후의 운명에 대해서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긍휼에 넘치는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영혼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이렇게 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고 예수님이 바로 그 일들을 종합적으로 하신 일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쳐서 영혼을 구원하는 그 일에만 매진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영혼이 곤고해서 당신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의 질병과 가난, 고통과 아픔, 가정의 많은 문제들까지도 지극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구원이라고 이야기 할 때에 이 구원은 영혼만 구원이 아니고 또 육체만의 구원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이 삶 전체의 전 포괄적인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신의 고통이나 견디기 힘든 삶의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전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단지 자신의 육신의 필요를 가지고 나아가서 그것을 채움 받는 의도된 목적을 가지고 조건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기복신앙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 구원은 이처럼 전 포괄적이고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들이 영혼의 아픔이 있을 때만 당신 앞에 나와서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육체가 아플 때도 “아버지 내가 너무 아픕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약에 영혼들을 돌본다고 하면 이런 구원의 관점을 가지고 영혼들을 돌보아야합니다. 그러니까 가족을 돌아보는 것도 역시 육체를 돌아보는 이 일이 그 가족들의 영혼에 대해 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육신의 필요라고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일까요? 거기에는 가족관의 관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불화해서 마음 고생하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있거나, 또 아버지 어머니와 불화해서 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의 어려움을 느껴서 고통을 받는 그 동기간이나 혹은 부모가 계실 것입니다. 또 형제들이 있어도 부부간에 서로 불화해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그러한 관계를 인해서 고통 하는 그런 지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돌아볼 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바로 동기간이 서로 불화하면 자신이 그 속에 끼어들어서 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 그들을 화평하도록 서로 풀어주고, 형제가 아버지와 등을 돌리고 살면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아버지와 그 등을 돌린 자식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서 그래서 그들을 서로 다시 화합하도록 만들어주고, 이런 화목자의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가족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그 가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이 사람들이 가족 구성원 중에 어떤 사람하고 편을 먹고 이 동기간을 갈라놓고 그리고 이간질 하고, 그리고 부모를 대적하거나 혹은 부모 보는데서 동기간을 멸시하고 이렇게 공정성을 잃어버리고 어느 한편이 되어가지고 가족들의 갈등과 불화를 심화시키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상처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서 가족들을 돌아보라고 하는 그 사명을 정면으로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뛰어넘어서 오히려 더 불순종의 삶을 살도록 가족들을 죄 짓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믿음의 사람들이 좋은 신자가 안 되면 그것이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딸려 있는 모든 가족들도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말하자면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좋은 신자가 되어야합니다.
두 번째 가족을 돌아보는 또 하나의 문제는 뭐냐면 오늘 성경에도 기록되었듯이 경제적인 필요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욕심이 없습니까? 욕심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늘 욕심이 있습니다. 또 내가 먼저 예수를 믿었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내가 동기간 중에 가장 돈이 많고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부요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 끼니가 없어도 내가 먼저 은혜를 받고 베풀어야 할 처지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어쨌든지 간이 그런 특별한 경우는 제외해 놓고라도 우리들이 아주 분명하게 해야 할 일이 뭐냐면 가족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말이죠. 여러분 동기간에 불화하는 원인의 80-90% 이상이 무엇 때문에 불화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 안 본다. 그러고 자식이 부모 안 본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파고들어 가면 대부분이 무엇 때문입니까? 돈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아버지가 돈도 넉넉 주었고 교육도 다 시켜주었고, 아버지가 뭐 이렇게 소리, 소리 지르면서 나이 50먹은 자식을 작대기로 두들겨 팰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왠지 우리 아버지는 인격이 남의 집 아버지보다 좀 떨어진다. 그래서 그 아버지 안 보고 사는 자식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우리 아버님은 나이가 70이 넘으셨는데 교양이 너무 부족해 그래서 같이 어디를 다니면 창피해 죽겠어 그래서 내가 지금 7년째 우리 집 안 찾아가거든” 그런 자식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나이 들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식은 자식대로 포기합니다. 또 부모님이 교양이 좀 없으시면 어때요. 아니 무슨 물론 부모님이 공부도 여러분 보다 더 많이 하시고, 벼슬도 엄청 높은 것 하시고, 또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그러면서도 청렴했고,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교양도 뛰어나고, 그러면서도 자식들 사랑해주고 또 유산도 자기 다 물려줄 것 같고, 그러면 좋지 그런데 그런 훌륭한 아버지가 왜 자기 같이 못난 아들을 낳겠어요. 대부분 파고 들어가 보면 돈 문제가 개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이 가족들과의 관계를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등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말 하겠습니다. 돈 좀 많으면 괜찮겠죠. 불쾌하겠습니까. 돈 좀 생기면 불쾌하겠습니까. 좋겠습니까. 그래요. 나도 돈 좀 생기면 교회 빚부터 좀 갚겠네, 그런데 내가 얘기하겠습니다. 한 1억 괜찮습니까? 적어요. 좀더 쓸까요. 오늘 저녁에 가지고 갈만합니까. 준다면 가져 갈만 합니까? 팔 하나씩 내 놓고 가겠습니까. 도끼로 잘라서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가족은 그렇게 자기 팔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돈 몇 푼에 잘라버리고 살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돈이 급해도 오늘 저녁에 팔 자르면 1억 준다. 그러면 나는 싫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싫습니다. 팔 달고 조금 먹고 살지, 그것 여기에다 갈고리 끼고 1억 들고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갈고리 금으로 만들면 뭐합니까. 팔이 없는데 그러니까 가족은 자기의 몸입니다. 몸이니까 그것을 돈 때문에 상해서 끊어지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면 “그것이 목사님 가족을 돌아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상관이 있습니다. “가족들의 육신의 필요를 돌아보라.” 그랬는데 돈 말고 다른 것으로 돌아볼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대게 육신의 필요가 아니라 영혼의 필요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필요와 영혼의 필요는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육신의 필요와 영혼의 필요가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족들의 육신의 필요를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돌아보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뭐냐면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아이 목사님 아니 도대체 있어야지 돌아보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가족들을 돌아보라. 그런 이야기는 보세요. 과부가 있는데 가족들 보고 돌아보라고 했는데 “너희들이 자식이니까 네가 노예로 팔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벌어다가 가족들을 인신매매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다가 가족들이 인신매매를 해서다로 너희 어머니 먹여 살려라. 그것은 아닙니다. 힘닿는 한도까지 문제는 뭐냐면 자기의 개인적인 이기심을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이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선을 그어놓고 삽니다. 그래서 뭐냐면 어느 정도 까지는 즐겁게 희생합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물질적으로도 그렇고, 그런데 어느 한도가 딱 넘어가면 이제 열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속에서 혈기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자기 자신의 밑바닥까지 아직 변화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그 바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주시되 어디까지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낮아지시되 어디까지 낮아지셨습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 까지 낮아지셨습니까. 핍박을 당할 때 ”아니 내가 하나님인데도 사람의 몸을 입고 여기까지 낮아졌는데 뭐 여기에서 한 번 더 낮아져서 나보고 고난을 당하라고 이것들이 쓸어버려“ 예수님이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자기를 다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기까지 그렇게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들이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서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를 보면 가족간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가족간의 관계, 그것들이 모두 형제 중 몇 사람이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리면 다 풀려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뒤엉켜서 욕망과 욕망이 충돌을 하면서 그렇게 끔찍한 가족관계에 파괴를 낳는 것입니다. 그런 파괴를 복구하고 얽힌 것을 다시 풀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돌아보는 그 첫 번째 일은 자신이 개인적인 성화의 삶을 살면서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돈이 십 만원 밖에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왜 가족을 위해서 1억을 베풀지 않았느냐고 하나님이 그렇게 묻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액수나 도와주는 방식의 문제를 가지고 부풀려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자신들 속에 있는 이기심을 드러낼 뿐이지 하나님은 각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가족들을 위해서 서로 희생할 수 있는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가족들 사이에는 희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이 바보같이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희생했는데” 희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조금 있다. 아이들이 커서 한 달에 몇 십 만원 갖다 주면서 “엄마 이것 이달치 희생입니다.” 그리고 갖다 줍니다. 가족들 간에는 사용하지 않는 낱말이 있습니다. 그것 중 하나가 뭐냐면 희생입니다.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결국은 뭐가 나타나느냐면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은 깊어지면 깊어질 록 어떤 힘이 있느냐면 돈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우리를 그렇게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너무 아파서 병에 걸렸는데 만약에 너무 고통을 받고 죽어간다. 그러면 여러분 액수를 먼저 생각하면서 병원으로 뛰겠습니까. “아, 돈 500만원. 500만원이면 무 다 섣달은 모아야 되는데 어떻게 다 섣달 동안 그 노동을 하냐. 죽어라.” 그렇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이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육신의 형편을 돌아보는 우리 신자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 내 몸이 십자가에서 산산이 찢어지고 내가 그것을 하고 싶다.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이 생각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그 영혼의 가치, 내 눈에 보기에는 가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매일 사고나 치고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는 동기간들이나 또 전혀 부모로서 도움이 안 되게 사는 부모님이나 자식으로서 너무 본이 안 되게 살아가는 자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이득과 효과 그런 것들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억누를 수 없이 존재하는 본래의 관계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이며 눈물이며 그를 향한 긍휼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기 가족들을 늘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 믿지 않는 가족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나를 교회에 엮어서 데려가려는 사람이다. 그것 이전에 저 사람이 정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없어서 그렇지 있는 한도 내에서는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내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분들이구나. 그것을 가족들이 깊이 깨닫게 되면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의 권위라고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률적 권위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고 싶겠죠. “아이고 그러면 예수 먼저 믿고 은혜 많이 받으면 베풀 것도 많고 손해 보는 것도 많겠네요.” 많죠. 그런 정도도 아닙니다.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결국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얘야, 우리 같이 십자가 지고 나와함께 죽자. 내 사랑 모르는 이 세상을 위해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을 위해서 나와함께 십자가지고 죽자.” 그런데 그래도 됩니다. 왜? 그 사람들이 못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은 받았잖아요. 그거면 됐지 나머지는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못쓴다며 그것을 우리가 받았잖아요. 저들은 몰랐잖아요. 그래서 많이 힘닿는 대로 그들의 육신의 필요를 보면서 베풀어야합니다. 궁핍에 처했을 때 아주 적절한 시기에 천사처럼 나타나서 천사처럼 베풀고 갈 때 그 때에 한 두 번이면 모르지만 언제나 그렇게 나타날 때 그 때에 여러분들 없이는 자신들이 살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을 돌아보는 첫 번째 중요한 지침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8)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커다란 고통은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자기가 변화되기 전까지는 가족들이 함께 예수 믿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나면 그 다음에는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못한 우리 가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우리가 바로 누군가가 그렇게 울어줘야 될 정도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가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지 아니하는 다른 사람, 나와 가족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전했는데 와락 예수를 믿겠다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즉시 함께 교회에 따라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렇죠? 가족을 전도하는 것만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전도하기 힘들다면 아마 교회는 텅텅 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가족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다음에 가족들을 단순한 전도 대상자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이 선교를 원활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중요한 것은 뭐냐면 가족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입니다. 원래 가족과 같이 이렇게 관계를 밀접하게 맺어져 있는 사람들은 전하는 복음의 말씀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의 삶을 보고 또 그 사람 말이 아무리 옳은 것 같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리의 모든 삶이 가족들에게 다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족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진정함이 없이는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가족을 통해서 연단을 참 많이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면 그것은 핍박에 그치지만 가족들에게 핍박을 받으면 그것은 또한 박해를 받는 것인 것과 함께 그 가족과의 관계가 자꾸 상처로 남습니다. 그 상처로 남으면서 깨집니다. 그러니까 이중의 고난이 신자에게 계속 겹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이 가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신자의 가정으로부터 오는 박해를 통해서 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받아야 할 가족들에게 조차도 따돌림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때에 그 신자가 피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측량하기 어려운 오묘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가족의 구원들을 지연시키심으로서 오히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더 순전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족을 향해서 복음으로 접근할 때에는 먼저 그 가족을 깊이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지어먹은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 지어먹는 마음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속일수가 있어도 가족은 속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돌아보는 것 가운데 첫 번째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들의 육체적인 형편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의 육체적인 형편을 돌아보면서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들을 돌아본다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두 번째는 그 가족들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구원 문제이고 또 하나는 신앙생태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구원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사실 우리들이 냉정하게 복음을 살펴본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죄인과, 용서받은 죄인, 두 종류의 사람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죄인이지만 멸망 받을 죄인과 용서받은 죄인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명말 받을 죄인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고, 본질상 마귀의 자식들이고 하늘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상태에서 악과 고통 속에 시달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이 세상에서 웃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지옥 불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삶입니다. 그들의 삶은 아무 희망이 없고 이 세상에서는 한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하늘 자원으로부터 모두 차단되었고, 죽음 이후에는 정말 두려운 심판밖에는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죄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가 비록 죄인이지만 용서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죄에 에워싸여 살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머무는 대합실과 같은 이 세상이 지나고 나면 영광 가운데 천사들의 손에 의하여 받들어 예수의 품 안에 안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한한 영광과 그리고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살아갈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그리고 신령한 사랑을 힘입으면서 험한 세상을 이길 새 힘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그런 분명한 구원 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인가? 라고 하는 영혼 구원의 여부를 가지고 가족들을 보면 정말 우리는 그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떻게 하든지 그 가족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종종 가정에 상을 당하는 그런 지체들을 봅니다. 그 때에 그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셨다면 남편이나 아내가 불신의 상태에서 죽었다면 자기의 자녀들이 신앙고백 없이 죽었다면 그 모든 것들을 다 묻어놓고 장례를 지내고 웃으며 ( ? )하지만 그 영혼은 지옥에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모르고 멸망 가운데 죽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우리를 먼저 예수 믿게 만드시고 주님의 자녀 삼으셔서 그래서 행여나 우리를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이 그 영혼에게 전해질까 주님이 노심초사 하셨지만 결국은 우리가 불충성하고 게으른 가운데 전혀 복음을 전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 가운데 우리의 가족들이 눈을 감을 때 그 때 우리의 이 허물과 죄를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지옥의 불길 가운데서 고통 할 때 그 때 우리가 있는 천국이 정말 천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이 단순하고 진실하고 너무 명백한 이 사실을 애써서 외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또 다른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카톨릭 처럼 죽은 후에 한 번 더 찬스가 있다고 그렇게 믿는 것도 아니고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면 내가 교회에 헌금 많이 할 터인데 그러면 우리 엄마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가족들의 이 구원 여부에 대해서 너무 냉담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뭐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한 피 받아서 한 집안에 태어났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한 가족 한 가족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을 향해 죄를 짓고 너무나 멀리 떠난 죄인들, 그들이 곤궁하고 하늘 자원이 없어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악과 고통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할 때 하나님이 정말 자기를 낳은 자식들을 보실 수가 없어서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왜 보내셨을까? 왜 하나 밖에 없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시고 서른 세 해 동안 피땀 흘려서 영혼들을 섬기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 몸을 갈가리 찢어 그렇게 죽게 만드셨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아무 대책도 없이 처절하게 죽어가는 그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자존심도 없이 먼저 잘못한 것이 인간인데도 상처 받고 그들에 의해서 반역 당하신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래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그것을 보면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고난당하게 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구원 받지 못한 인간들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시고 그 영혼들을 인해서 고통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10장에서 우리 안에 함께 있는 양들만 내 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 밖에도, 다시 말하면 구원받아서 이렇게 교회에 나오고 있는 사람 말고 이 세상에도 내 양떼들이 있어서 그들도 내가 인도하여 나와함께 있게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그런 마음을 죄인들이 알아야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 아닙니까. 누가 가르쳐 주어야지만 철이 들것 아닙니까. 누가 “너는 원래 하나님의 집안의 자식이었는데 불순종과 죄로 그 집안에서 떠났고, 그리나 너희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너를 찾고 계시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려주어야지만 자기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집안의 식구들에 대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 인줄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져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이 심각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악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조금도 그 악과 고통의 원인이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그 가족들에게 다가가서 참 그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아버지께서 간절히 원하고 계신지를 누가 전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알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말할 수 없는 행복, 우리에게 먼저 알게 하신 이유는 이것을 가족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가족은 어떻습니까? 구원 받았습니까? 내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 때에 마지막 벼랑 끝에서 지옥을 향해 떨어지며 여러분들을 향해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며 떨어지는 그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에 이것보다도 더 심각하고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까. 오늘 이 글을 남긴 사도바울은 평생 이 아픔을 짊어지고 십자가처럼 살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더 이상 바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가족들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세계선교의 장을 열었던 이 이방 선교의 아버지인 사도바울도 자신의 동족과, 그리고 자신의 가족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로마서에서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예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로다.” 그러니 그 고백을 보면 그 골육지친, 특별히 자기 가족을 향한 그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일평생 가슴에 안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친족들에게 복음을 전했겠죠. 돌아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정신병자 취급, 고난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생각할 때에 그들의 결말을 생각할 때에 자기가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족들 중에는 심령이 너무 강퍅해서 결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을 가족들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믿게끔 예정하셨는가? 안 예정하셨는가 보다도 지금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했는가? 우리의 온 힘을 다해서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마치 우리의 인생이 한 오년이나 십년 덜 산다고 할지라도 내 형제, 그리고 내 부모, 그리고 내 사랑하는 자식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책에 등록할 수 있다면 그보다도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가족들의 영혼의 구원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삶을 사는 그런 신앙생활, 그것이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게 하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은혜의 세계를 알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이런 것들을 하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충분히 그 사랑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날들의 비참함과, 회개하고 구원 받은 이후의 행복을 둘 다 모두 충분하게 경험하게 해주심으로서 이제 예수 없이 죽어가는 가족들이 한 사람도 없도록 우리에게 그 영혼들을 그 영혼들을 책임 맡겨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의 나라에 갔을 때 그 곳에서 모든 가족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 곳에서 사랑하는 동기간과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일평생 내가 애지중지하던 자녀들을 그 곳에서 만나는 가족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노년에 될 수록 그들은 가족들을 재회할 소망에 눈이 빛나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해도 다가올 하늘나라에서 가족들을 만날 영광스러운 기쁨을 위로로 삼으면서 얼마든지 고난의 파도를 해치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을 것입니다.
엊그제 우리 교회에서 어린 하나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저는 참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입니다. 백혈병으로 하나님이 데려가셨는데 그렇게 착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심방 갔을 때도 “너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기다려라.” 그러니까 “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이가 먼저 간 것이 인간으로 보면 정말 가슴 아플 정도로 아프죠. 너무너무 아프고 그리고 그 어떻게 그 부모가 그 아이를 잇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를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소식을 부산에서 들었는데 어찌나 슬프고 눈물이 나는지요, 그런데 비행기가 안 떠서 그 날 못 올라오고 그 다음날 올라왔는데 그날 밤에 자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검불과 같은 것이 인생이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빨리 가는가.” 그러니까 그 아이가 예수 안에서 죽은 것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그 자녀를 데리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고 살림 차리고 손자 낳고 그렇게 데리고 살아도 그 아이가 예수 안 믿고 죽었으면 잠시 인생 끝나고 나서 천국에서 그 아이를 만날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런데 곱게 갔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숙제는 뭐냐면 인생이 빨리 지나고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바람같이 지나갑니다. 2-30년 우스운 것입니다. 바람같이 지나갑니다. 3-40년 바람같이 지나갑니다. 다만 얼마나 더 빨리 만나느냐의 차이이고 얼마나 늦게 헤어졌느냐의 차이지만 이승에서야 잠깐 만나고 가지만 그 나라에 가면 영원히 만나는데 싫도록 만나는데 그것 못 참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 받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하면 그 슬픔을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가족들이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대항하는 그런 삶을 살터인데 그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가족들이 구원받는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고도 사야 될 만큼 그렇게 시급한 문제이고 우리의 희생이 아무리 많아도 그 가족들의 영혼의 가치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가족을 위해서 누가 울어주겠습니까. 여러분들의 가족을 위해서 누가 울어주겠으며 여러분들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누가 안타깝게 자신의 영혼이 멸망에 빠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적어도 내가 예수를 먼저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까 먼 곳에 나가서 전도하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면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어도 내 가족들은 내가 이렇게 두 눈을 새파랗게 뜨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해서 멸망 받을 사람이 없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랑도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해야합니다. 정말 우리 엄마가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고, 완악하기 짝이 없는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고 신자가 될 수 있다면 손톱 밑에 살을 파내고, 내 살가죽을 벗기고, 내 뼈를 갈아도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그런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과 얼마 안 되는 물질의 문제를 놓고 다투기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그렇게 하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버린 것입니다. 사람을 적당히 사랑하는 조금 힘이 들지 아주 힘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이것은 가슴에 칼을 품는 일입니다. 너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가족들의 영혼이 구원문제가 그렇게 중요한데도 그 가족들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냉담해질 수 있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사랑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서는 참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인간의 도리라고 하는 이 선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것을 지키면서 너도 하나 주고, 나도 하나 주고, 네가 받으면 나도 하나 받고, 이렇게 하면서 서로 이치에 맞게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면 사랑하는 것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 도저히 사랑할만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형벌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서 무엇이 필요 하느냐면 자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 시대에 가족간에 불신하고, 가족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떡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해갈을 하고 그렇게 주려하고 목말라 하고, 그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지만 차갑고 냉담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냉랭한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기회입니다. 왜냐면 너무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너무 사랑에 허기지고 굶주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을 베풀기만 하면 그냥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처음에 잠시 그런 사랑이 무시당할 수 있지만 진실한 사랑이 영원히 무시당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같이 막 되먹은 인간들도 그 때에는 예수님을 못 박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안 사람, 하나님의 그 십자가의 은혜를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바로 빚쟁이 입니다. 그래도 불행한 빚쟁이가 아니라. 행복한 빚쟁이입니다. 거친 바가 그리고 험한 산과 같은 인생길을 넘어가면서 고난과 시련이 많이 닥칠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고귀하고 놀라워서 그 사랑을 받기만 하면 고난도 이길 힘이 생기고 시련도 극복할 능력이 생깁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 용서가 생기고,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살붙이처럼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관용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 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먼저 알았으니까 우리가 그 사랑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물질이 필요하다면 가지라고 주고, 우리가 조금 불편하고 희생하는 것이 주님 모르고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의 마음을 여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주께 하듯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네가 구원 얻을 수만 있다면 그대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홀로 발견되기만 해도 그것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그래서 믿지 않는 가족들이 볼 때에 그 사랑을 보고, 그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보고 비로소 아, 나에게도 정말 영혼이 있나보다. 이 영혼이 있으니까 내 아들이, 내 딸이, 우리 엄마가, 그리고 내 남편이 저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보니 진짜 내 영혼이 있기는 있나보다. 이렇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들이 전심으로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을 우리의 전부로 생각해야합니다.
가끔 가슴 아픈 사연을 만납니다. 다른 교회 교인들을 거의 상담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원칙을 세워놓고 안 합니다. 그런데 방배동에 있을 때인데, 어느 자매가 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꼭 나를 만나고 싶다고 그래서 부부가 왔는데 안 만나주다가 다른 교역자들이 그래서 이제 만나줬습니다. 간단합니다. 자기는 어느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데 자기 아버님이 아파서 몸져 누워있는데 자기들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이 노인네다 받아들이지 않는데요. 그래서 자기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우리 아버지가 이 교회에 나오시지는 않지만 불신자지만 이렇게 병상에 있으니까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좀 전해주십시오. 한 마디로 딱 잘라서 “안 됩니다. 우리가 거기까지는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온 것입니다.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우리 아버님 구원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전하는데 우리 아버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 교회에 출석은 안 하지만 금요 예배 때도 나오고 수요 예배 때도 나오는데 너무 너무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안 된다고 하니 이 교회에서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열심히 복음 전하고 제가 가서 병상에 누워있는 그분에게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어버이날만 되면 그 자매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있는 지체들도 어버이날이나 혹은 명절 때 시골 교회에 내려가서 안 믿는 부모 때문에 저렇게 눈물을 흘리며 동네의 교회에 찾아가서 저렇게 애원할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목회자는 그런 부탁을 정말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한 명이라도 전도하려고 하는 시골 교회에서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렇게 눈물로 애원한다면 아마 그 목사님 매일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입니다. 자기가 가서 복음 전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보내서 복음 전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 정도라도 해야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 교회 지체들이 저렇게 할까? 저렇게 눈에 이슬이 맺히면서 우리 아빠의 영혼을 위해서 도움을 달라고. 시집까지 갔는데도 말이죠. 그럴 수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가족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있는데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아주 커다란 죄입니다. 죄를 짓고 있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죽어가고 있는 그 영혼을 방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이 교통사고가 나든지 아니면 갑자기 심장 쇼크가 있어서 쓰러져서 여러분 앞에 숨을 헐떡이면서 있을 때에 여러분 가만히 있겠습니까. 죽을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119에 전화를 하고 동네 사람들을 부르고 교회에 도움을 청하고, 동기간들을 부르고 어떻게 정신없을 정도로 몸부림치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죽는 것이 육체가 죽는 것보다 사소한 일입니까. 만약에 지금까지도 우리 가족들이 예수 안 믿고 있죠. 그런데 만약에 위의 눈에서 더 많이 그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물이 샘솟듯 했더라면 아마 구원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어도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예수 믿게 만드시지 않았겠습니까.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한 해 더 빨리 데려가시는 것은 괜찮지만 우리의 가족을 1년 늦게 예수 믿게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오로지 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우리의 수단 방법에 달렸습니까? 아닙니다.
이번에 12월에 ‘남편 사랑 섬김의 밤’ 할 때에도 그 영상을 인터넷에서 보고 제가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맺혔습니다. 저도 요즘 T. V 방송국에 가지만 설교가 잘 안 됩니다. 여기에다 이런 것 50개를 켜 놓고 머리는 벗어지는 것 같이 열이 나고 카메라는 큰 것을 세 개, 네 개를 들이대고 이렇게 촬영하는데 솔직히 얘기해서 이런 자유 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유 함이 없는 곳인데도 그 남편에게 정말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되라고 얘기할 때 자매들이 목이 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더 많이 눈물 흘리고, 우리의 눈에 눈물이 샘솟듯 솟고, 우리의 가슴에 더 많이 아픔이 있었더라면 아마 가족들이 벌써 예수님께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의 잔이 덜 차서, 우리가 게을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사소한 이익들을 위해서 가족의 가장 소중한 영혼을 버려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참 구원의 은혜, 그리고 버림 받은 인간의 그 비참함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너에게 둘도 없는 사랑을 보여줄 터이니 너는 일평생 내게 받은 이 사랑의 비밀을 품고, 이런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이 주고, 더 많이 허비하고, 그러라고 하나님이 그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의 것을 다 빼앗아 가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모두 다 쏟아 부어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이 지낼 때 주님이 보좌 우편에서 우리도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수 있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그리고 주님을 믿은 이후에까지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한다면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이 있는데도 잘 먹고 잘 자는 것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현상이지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밤마다 우리의 눈물로 우리의 침상을 적시고,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어떤 기도를 네게 들어주랴?” “하나님 아버지 우리 엄마를 구원해 주시기 전까지는 다른 기도제목들은 제가 의미가 없습니다. 나를 죽이셔서라도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실 수 있다면 그것이 제게 해 주실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일입니다.” 그 일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그 사랑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듭니다. 내가 먼저 예수 믿지 않고 완악한 우리 아빠가 먼저 예수 믿었더라면 나를 위해서 충분히 눈물 흘려 기도해서 나도 예수 믿게 만들어주었을 터인데 우리의 불충함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에게 이 양심의 마비된 상태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5월만 오면 그렇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가족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불현듯 죽음의 날이 이르지 아니하도록 그 가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더 이상 세월이 흐르기 전에 정말 우리의 가족이 구원받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합니다. 바로 이 5월에 우리는 그런 가족의 영혼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가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에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서 9:1-3)
오늘 성경에 보니까 사도바울이 자기의 골육친척을 인해서 가지고 있는 영혼의 강력하고 무거운 부담감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자기의 친척들, 자기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멸망 가운데 있다. 라고 하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그는 오늘 말하기를 자기가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에 있어서 조금도 과장이 없다. 그래서 내가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내 양심과 성령이 더불어 증거 한다. 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마음에 없는 거짓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작용을 가지고 그대로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뭐냐면 내 골육친척, 물론 가족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 라고 하는 사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내가 그리스도께 저주를 받을지라도 그럴지라도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 구원받지 못한 자기의 친척들과 자기의 골육들을 위해서 생각하는 그 마음의 고통이 지옥과 같은 처절한 고통이 이 사람 속에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우선 첫 째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은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큰 고통이 이 사람 속에 있었다면 그러면 그 고통이 쉽게 얘기하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라고까지 했으니까 그 고통의 크기나 아픔이 그리스도께 버림을 받는 것 같은 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고통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어디 간 것인가? 은혜 받은 사람 속에 넘치는 평강과 행복은 도대체 어디 간 것인가? 이런 의문이 먼저 현실적으로 제기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제기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도대체 이 사람은 그러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오늘 여기에 아주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명백한 표현으로 ‘저주를 받아’ 라고 했는데 ‘아나데마’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 저주를 받아. 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사도바울도 알았을 터인데 그러면 그것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끊어진다. 그러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도대체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구원을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또 하나는 그러면 이러한 처절한 열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차례대로 답을 하고 그리고 이 문제를 풀어가야 될 줄 압니다. 우선 첫 째 그렇게 고통이 가득 차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평강과 행복, 기쁨, 이런 것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간적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한 인격 속에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프면 슬프고 기쁘면 기쁩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인의 인격 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육적인 슬픔과 육적인 기쁨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기쁨인 영적인 슬픔은 한 인격 안에 공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이후로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보면 가장 슬펐던 때입니다. 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왜 그런 일이 성립되느냐면 영적으로, 신령한 면에서 가장 행복한 때에는 신령한 면에서 가장 슬픈 때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쁠 때의 시기가 어땠느냐면 눈물이 많았던 시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가장 가슴 아파서 울고, 내가 예수님께 그렇게 오랫동안 불순종하면서 살았다는 참회 때문에 울고,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는 것 때문에 아파하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큰 사랑과 은혜를 입었는데도 내가 주님을 위해서 별로 사는 것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고, 그런 아픔이 공존했던 때가 가장 기쁜 때입니다. 왜냐면 한 인격 속에 신령한 슬픔과 신령한 기쁨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령한 슬픔이 있을 때는 또 동시에 반드시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다. 정말 내가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을 모르고 왜 그렇게 긴 세월동안 방황하고, 예수님 원망하고 그렇게 못된 삶을 살았을까? 하고 그렇게 가슴 아파할 때 에는 그렇게 가슴 아픈 회개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참 사랑하시는구나. 그래서 그 다음에는 뭐가 나오느냐면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신령한 슬픔, 신령한 기쁜, 신령한 감사, 신령한 찬양, 이 네 가지가 항상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령한 의미에서 슬픔이 없는 그 곳에 그 기쁨은 절대로 신령한 기쁨일 수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오늘 자기가 구원받지 못한 자기 골육지친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굉장히 힘들게 아픈데 그런데 그 아픔만 계속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아픔 마음과 함께 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데 그 동족들이 정말 하나님을 안 믿고 정말 그 심장에 철판을 깐 것 같이 자기가 복음을 전할 때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19절에서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이 힘으로 안 되니까 간사한 꾀를 써서 사도바울과 그 일행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그리고 핍박과 그리고 시련을 가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동시에 뭐가 있었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했더니 그냥 유대관원들이 불러다가 그냥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고통을 핍박은 받은 다음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들을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핍박받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여겨주신 것을 인해서 기뻐했더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본문을 보면서 그런 식으로 그렇게 슬픔이 있는 곳에서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 아주 우리들이 조심해야할 풍조 가운데 하나는 뭐냐면 자꾸 인간을 기뻐해야한다.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기쁘게 하고자 하는 그런 시도들, 그렇지 않습니까. 참된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정말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런 하나님의 부탁에 대해서 명령에 순종하려고 기뻐하려고 애를 쓰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이 주신 그 기쁨 속에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애통하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 사람이 구원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히브리식 수사법입니다. 그 수사법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우리 말 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아이들 둘을 기르는데 어느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두 아이가 큰 애 작은 애가 있는데 엄마 아빠가 용돈도 좀 더 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말도 좀 곱게 하고, 밥 먹을 때 이거라도 좀 먹어라. 그리고 주니까 이것이 계속 첫 째만 그렇게 하니까 그렇다고 저 둘 째 보고 “넌 먹지 마.” “넌 돈 가져라.” “넌 도로 내놔.” “넌 예쁘다.” “난 맞아.” 이런 것은 아닌데 이 아이가 뭐라고 하느냐면 그렇게 계속해서 오빠만 예뻐하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는 무라고 하느냐면 “엄마는 요즘 나만 미워해.” 미워한 적 없는데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있는 수사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 처자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합당하지 않고,” 그러면 어떻게 가서 부부싸움이라고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식들을 때리고 오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그 아내와 자식이 “우리 남편 우리 아빠는 하나님밖에 몰라.” 이럴 정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미워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가 나를 미워하였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진짜 미워한 것으로 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은 관심이 없고, 육신에 속한 것들을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하나님은 당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표현은 뭐냐면 나는 지옥도 안 무섭다. 예수님께 저주를 받아, 난 그런 것 상관없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가 얻은 구원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처절한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보고 싶어.” “얼마나” “죽도록 보고 싶어.” 그렇게 전화를 받았는데 “죽고 싶다고?”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이야기가 “그리스도께 저주를 받아” 문제는 내가 저주를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내가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이 백성을 다 쓸어버려야 되겠다.” 그랬더니 “하나님 그렇게 하시려고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진짜로 지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 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런 탄원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답이 되었죠.
세 번째 답은 뭐냐면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것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비밀을 깊이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죠. 물론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도하고 싶을 때에는 전도하고 싶으니까 성령께 순종해서 해야 하고. 하기 싫을 때는 하기 싫으니까 그 불순종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됩니다. 모든 성화의 삶이 그러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야하는데 그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런데 실제적으로 보면 이 예수님을 알고 그 안에서 정말 내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모르는 사람을 일으켜서 전도하러 내 보내는 것 보다 더 힘든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그 은혜 때문에 감격하는 사람을 복음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더 힘듭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뭐냐면 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그리고 그렇게 알고 나니까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골육지친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통곡하고 울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괴로운 심정이 된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남들 보기에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왔죠. 그러다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고 크게 변화를 받게 되었을 때에 제일먼저 받은 충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과 그렇게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았던 것, 그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청교도 존 오웬에 의하면 처음 회심 때에 하늘이 열리고 육신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폭포수 수처럼 쏟아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들이 처사랑, 첫사랑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실제로 첫 번째 회심 때에 가장 강력한 능력이 하늘로부터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고 깊이 회개하고 나 같은 죄인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게 되었을 때에 그 때 여러분 제일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러면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그리고 거기에는 어떠한 타협점도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들이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타협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할 때에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충분히 스스로 돌아올 수 있으리만치 선했던 시기는 없습니다. 세상은 원래 악했고, 상항 악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악해갑니다. 그러면 도대체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세상이 악한 것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일까? 교회가 그들의 악함을 아파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악이 극에 달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그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보며 슬퍼하고 아파해서 그 마음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께 끊어질 지라도 라고 하는 그 고백이 있을 때에는 비록 교회가 소수였는데도 그 소수를 가지고 다수의 구원받지 못한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일깨워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아파하는 눈물이 없기 때문에 복음화가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가장 커다란 축복은 이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그치지 않는 것, 그것은 벌써 그 교회가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 라고 하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오늘 날에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들도 만들고, 그리고 다양한 계획들도 짭니다. 심지어는 몇 해 전에 실제로 제가 경험한 일인데 교회에서 불신자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경품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1등에는 커다란 문 두 짝 열리는 냉장고, 이것은 직접 목격한 것인데 어느 교회에 갔더니 전교인을 상대로 전도하도록 동료 하는데 가장 많이 교회에 데려온 사람에게 줄 자동차를 교회 로비에다 갖다 놓았습니다. 어떻게 문을 뜯고 그 차가 들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아, ‘아벨라’ 자동차를 아하 갖다가 그 보라색 자동차를 하나 갖다 놓았습니다. 2등은 오토바이, 3등은 금반지. 쭉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닌데 어느 잡지에서 읽어보니까 어느 개척 교회에서 “우리 교회에 1000명을 등록해주면 1억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려고 하는 많은 계획들을 세우고 그리고 지혜를 짜는데 그것을 모두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뭐 그렇게 1000명을 데리고 오면 1억을 준다든지 뭐 이런 것들은 비난 받겠지만 뭐 도든 것을 다 그렇게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좋은 지혜를 짜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겠죠.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뭐냐면 그 모든 방법이 사람들을 교회에 오게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정말 가슴을 찢으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일은 그런 경품잔치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5년 전에 총동원 주일이라고 하는 유행이 계속 번져나갔습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도 한번 했습니다. 목사님이 25년 전에 2000만원을 들여서 총동원 주일을 했는데 500여명 모이던 교회에 2500명이 모였습니다. 가득, 제가 아는 집사님은 75명을 데리고 왔답니다. 그렇게 해서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경품과 이런 모든 것들이 그 당시에 2000만원이면 20년 전이니까 상상할 수 없이 큰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2500명이 주일날 다녀갔습니다. 모두 눈을 부비면서 의심했습니다. 1년이 지난 후에 교육자 회의를 하면서 목사님이 2000만원을 들여서 2500명을 초청했는데 1년 뒤에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이 20명인데 돌아가면서 한 번씩 교회에 나온답니다. 그러면서 당신 생애에서는 다시는 안 한다. 그리고 확실히 영혼의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구나. 사람들을 데려온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도구일 뿐이지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울어줄 사람,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이 자신의 구원인 것처럼 통곡하고 그들의 구원받지 못한 것이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멸망 되어져 가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불신자를 보내는 장례식에 참여할 때에는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고인을 위해서 더 많이 울었더라면 아마 구원 받았을 터인데.
이제 번호를 좁혀서 오늘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여러분의 골육친척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족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족을 전도해본 사람들은 모두 경험해본 일이지만 한번의 믿음의 기도로 가족을 구원하게 하시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기도의 눈물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병에 가득 차기 전까지는 강퍅한 가족들의 마음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남이 한 전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어떻게 그렇게 수월하게 믿게 되었을까? 하는데 그런 일들은 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지 나에게서는 안 일어납니다. 어느 목사님이 연세 많이 드신 유교사상에 푹 절은 분에게 복음을 전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유교에 푹 절었으니 그가 예수를 믿을 리가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가서 간단 간단하게말씀을 한 30분 전했더니 유교에 푹 절은 그 노인네가 “허허 예수님 믿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까. 인생사는 도리가 성경에 다 있군요. 그러면 내가 안 믿을 이유가 없지”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얼마 다니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왜 안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남의 할아버지는 그런데
그래서 말이죠. 이 가족의 선교지도는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가족의 선교지는 그러니까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참 좋은 목사님이셨습니다. 뭐 한300명밖에 안 되는 교회에 가셔서 뭐 그렇게 주위가 좋은 여건의 지역도 아닌데 1200명으로 그렇게 단숨에 성장시키고 기도로 인도하시면 온 교인들이 뜨거운 기도의 도가니가 되고 그랬습니다. 설교도 참 잘 하시고 은혜로우시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온 교인이 젊은 목사님이시지만 존경하고, 그랬는데 한 달, 두 달에 한 번씩 저도 그 교회에 가 보았는데 목사님 사택이 교회에 있는 골목에 바로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근처에 다 이렇게 살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는 김 장로 집, 여기는 최 집사 집 쭉 붙어서 사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웬 녀석이 술을 먹고 와서 그 골목 유리창을 소주병으로 다 부수고 다니는 것입니다. 누구냐면 그 목사님 동생이었습니다. “나와” 그리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내가 누군지 알아 자식들이 내가 우리 형 겸손하게 하는 가시야.” 그리고 나면 그 다음 날에는 예배 시간에 얼굴을 들 수가 없데요. 그런데 바로 그 주일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그 목사님 설교를 듣고 회심하는데 그 가시는 왜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그 집사, 장로 유리창 다 때려 부수고 다니는 것을 물어주면서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차라리 모르는 동네에 가서 살면 그냥 모른다고나 하지만 그래서 어떤 때는 참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생기리만치 그렇게 하나님이 내 가족 구원만 그렇게 힘들게 다루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집안의 선교지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인가 그것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나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정신이 뭐냐면 아나데마의 정신입니다. ‘아나데마’라는 정신이 여기에서 ‘저주를 받아’ 그 부분이 히랍어로 ‘아나데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짜 더 해설할 필요도 없고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 됨을,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께 끊어지는 고통,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우리가 한번 조용히 묵상해보면 신자에게는 더 이상의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음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가족들을 위해서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믿은 가족의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예수님을 믿어 오면서 경험해보니까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은 그 사람들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은 무제한의 헌신이 아니어도 믿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가족은 무제한의 투자. 무제한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교회 한번 나가고 예수 믿으라고 수십 번을 잘 해 준 것은 기억하지 않고 한번 열 받아서 “될 대로 되” 이러면 “그래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 응 그렇지 야, 내가 네가 예수를 믿어서 내가 안 믿는다.” 그리고 기회다. 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속을 있는 데로 긁어놓죠. 열 번 스무 번 내가 희생한 것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고 한번 희생 못한 것, 그것을 정확하게 집어내서 스무 번씩 희생할 때 아무 말 못했던 그것을 모아 두었다가 그 때에 퍼부으면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싸잡아서 욕을 할 때 그 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열을 받죠. 그러니까 어때요. 성질을 부리죠. 그리고 대판거리 싸우고 나죠. “안 믿으려고 관 둬라. 너 위해서 믿는 거지 나 위해서 믿는 거냐. 그래 지옥의 안방에 가서 드러눕던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그리고 그 다음날 하나님 앞에 가서 “주님” 기도가 될 리가 없지. 주님이 “뭘 나를 부르냐.” 그다음에 어떻게 해요. “잘못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온유하다고 했는데 나의 성화되지 못한 성격이 우리 가족을 이렇게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주님도 용서해 주셔서 기억 안하셔요. 나도 내가 잘못한 것을 잊어버렸어. 그런데 그 인간은 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네가 2년 전에 나보고 지옥의 안 방에 가서 드러눕던지 말든지 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참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뭐냐면 상당히 많이 희생하다가 한번 성질을 부려서 뒤집어엎고, 또 상당히 많이 헌신하다가 그래봐야 이것이 끝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면 무제한으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물론 우리는 구원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시시의 프란시스의 시를 그렇게 적용합니다. 나를 온전히 주면 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왜? 내가 자신을 준 것이 그 사람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 사람에게 자신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보고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누구보고? 그렇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그 예수님을 보고 나 자신을 다 주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동기가 가족들의 인격이나, 가족들이 자기를 향해서 보여주는 인정이나, 평가, 이런 것들에 의존해서는 대체로 참을 수는 있지만 정말 오래도록 참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를 사랑하셨고, 죽어 가시면서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기까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지만 예수님이 누구 바라보면서 십자가 졌습니까? 하나님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죄인입니다. 참아야합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았으니까. 인내해야합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으니까 참아야합니다. 얼마나? 무제한으로 내가 가끔 이야기하는 가기고기처럼 그렇게 무제한으로 참아야합니다. 그것이 그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가족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그것이 가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나중에 다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제적인 문제, 이해관계, 이런 것, 가지고 가족들과 싸우고 다투고 분열을 일으키고 의절한다.그러고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전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이만큼 일생을 살고 보니까 설교는 이렇게 쉽지만 실제 경험해보면 참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왜냐면 내가 우리 가족에게 뭘 바래요. 내 동생들에게 내 가족들에게 무슨 엄청나게 나를 위해서 희생한다.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상식선에서 우리 서로 추월하지 않고 중앙선 침범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 그런데 전도의 사명이 있는 그 집안에는 항상 이 차선을 안 지키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 상식이 안 통하고 말이 안 통해서 말하자면 차선을 안 지키는 그런 가족이 있습니다. 중국에를 한번 갔는데 중앙선이 있는데 차가 이렇게 달려야 되지 않습니다. 차자 좀 많이 가, 갑자기 택시가 이 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막 가려고 하는데 저기에서 차가 막 와요. 왜 이쪽으로 가냐고. 통역 좀 하라고했더니 계속 이러고 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이 길이 아깝지 않느냐 텅 비었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할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냥 주님만 부르면서 갔습니다. 길이 아깝다는데 또 저쪽에서 오는 차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서로 비키면서 달리는 것입니다. 좀 느릿느릿하게 돌아가는 007영화처럼 그냥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이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도리가 그러느냐? 왜 너는 그렇게 사느냐? 다른 사람 다 봐라. 다 그렇게 사는데 그러니까 그러면 “아, 이렇게 살아야 인생의 묘미가 있잖아.” 그리고 거꾸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고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자식도 못 고치는데 동기간을 그렇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 아버지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지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 복음화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 10사람을 만나서 물어보면 9사람은 뭐냐면 “내 가족이 상식적인 사람들이었다면 벌써 선교되었을 거라는 것입니다.” 내 혼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하세요. 뭐냐면 예수 믿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인생사는 도리가 무엇인지 배우고 깨뜨려지고 은혜 받고, 고쳐지고 해서 이제조금 눈이 떠서 “야,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아니까 “저기 중앙선이 있네, 저기 차선이 있네, 저 바보 같은 녀석 길이 아깝다고 반대차선으로 거꾸로 기어 올라가, 저런 바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 여러분도 하나님 올랐으면 여러분 가족 중에 누가 먼저 믿었으면 그 사람이 여러분보고 그렇게 얘기 했을 것입니다. “저 인간이 상식적으로만 살아도 벌써 선교 되었을 것이다.” 그랬을 것입니다. 차이는 뭐냐면 누가 먼저 주님을 알았는가? 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참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무엇을 위한 생애였습니까? 많은 사람들, 목자 잃은 양처럼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궁극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그 구원의 위대한 위협을 이루셨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한 사람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당신 자신의 품에서 참된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와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무처럼 사셨습니다. 그들을 다 품어 안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런 나무와 같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얼마나 재미있느냐면 새벽기도 끝나고 너무 힘들어서 저 마당에 가서 이렇게 앉아서 한번 한숨을 쉬고 그리고 커피를 한 잔 달라고 해서 아침에 마시면서 있으면 새가 날아와요. 아니 이 공장지대에 새가 날아다니는 것 보았습니까. 나는 눈을 씻어도 새 발톱도 안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이 새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 교회에만 날아옵니다. 그래서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면서 재잘재잘 그러면서 노래를 하다가 오전 내내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하다가 갑니다. 그런데 내가 갔을 때만 그렇게 잘 오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별로 못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갈 때마다 그렇게 새들이 날아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먼지 펄펄 나고 크레인이 왔다. 갔다. 하고 시멘트 가루 날아다닐 때 새 한번도 못 보았습니다. 새 알도 못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무가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 새들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나무가 쭉 깃들어서 그래서 거기에 작은 나무일 때는 그렇지 않지만 점점 예수를 믿어서 큰 나무가 되면 거기에 새들이 날아 깃들 듯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기간도 후루루 날아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돈은 있지만 마음이 너무 상하고 고통스러운 지체들이 우리에게 날아와서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에 있는 그런 평화를 나도 누릴 수 있겠느냐?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난 골육 친척들이 그렇게 날아오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됨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새가 울다 지쳐서 어떻게 거기 가서 한번 쉬려고 날아왔는데 나뭇가지에 간신히 앉아서 쉬려고 하는데 나뭇가지가 탁 치면서 “저리 꺼져.” 말이죠. 날아와서 좀 앉으려고 했던 갑자기 가시가 튀어나와서 발을 찌르고 날아갑니다. “다시는 내가 날아오나 봐라.” 그리고 날아갑니다. 그렇게 보내놓고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어주십시오.” 진짜 우리에게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기까지 많은 사람이 울었습니다. 여러분 천국 가 보면 정말 여러분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울었는지 알게 될 때 여러분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파하지 않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렸던 많은 사람들의 기도, 피어린 눈물의 기도의 응답으로 천하보다도 귀한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가족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리고 그 영혼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전혀 모르고 살다가 멸망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 곁에 두셔서 여러분들로 등불 삼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포구로 인도하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 가족을 위해서 울어야 되겠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러분들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지금보다도 더 많이 가슴 아파 하면서 가족을 위해 탄식하고 내 영혼인 것처럼 아파하고 기도한다면 이제껏 불가능하게 느꼈던 그 영혼의 구원이 꼭 이루어질 것 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으려던 사람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던 사람들은 정말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눈물의 기도, 당장 응답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아뢰면서 특별히 주님에 의해서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신 그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의 기도의 눈물을 자기의 병에 담으시고 그리고 그 병에 가득 차면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뭐 개인적인 이야기를 예배시간에 해서 안 되었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제껏 목회를 해 오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경험 속에서 살아오지만 가장 감동적인 것은 뭐냐면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될 때 정말 그보다도 놀라운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할 때에 그런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을 하나, 하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영혼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간절한 마음,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을 당신의 품에 불러들이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셔야합니다. 그리고 한번 결심해야합니다. “내가 우리의 형제가 구원 얻기까지, 내 남편이 구원을 얻기까지, 우리 부모님이 구원 얻기까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에게 이 일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살겠다.” 그가 나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 한 내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셨던 것처럼 나도 우리의 가족, 내 사랑하는 형제, 내 사랑하는 남편과, 거듭나지 못한 우리 아버지, 구원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서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탄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고, 그리고 유대인보다도 더 예수 믿기 힘든 헬라의 사람들과 이방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처절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맛보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오랫동안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고민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헌신 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습니까. 늘 부담을 느끼고 기도는 했지만 처절하도록 기도한 적은 얼마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런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간절히 마음을 찢고 주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 가족들의 그 비참함,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아무희망이 없는데도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그 비참한 인간들, 위해서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로 그들을 인도할 수 있게 되기를 그래서 올 해가 가기 전에 온 가족이 구원을 얻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복된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4. 친척을 그리스도안에 세우기까지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로마서 16:7)
사도바울이 그치지 않는 고통을 로마서 9장에서 언급했고, 그 때에 그 고통의 이유가 골육지친 중 몇 명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 간절한 구원의 바람 때문이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 한 번밖에 안 나오니까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 사람, 안드로니고는 남성인 것이 분명하지만 유니아는 남성일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남성과 여성이었다면 부부였을 가능성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오늘 이 사람들이 바울의 친척이었다는 것입니다. 히랍어 성경에 보면 함께 태어난 사람들, 그러니까 영어로 말하자면 킴스맨 친족인데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촌인지, 육촌인지 우리는 그 모든 가계까지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피붙이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바울보다도 훨씬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도바울의 마음에 이 사람들이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훨씬 행복했기 때문에 사도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잃어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도, 같은 동료였던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의 그 좋은 평판을 잃어버리고 그들과의 교류가 끊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전도가 총망 되는 좋은 길을 버리고 핍박과 고난의 가시밭길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그 형극의 길을 들어서서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맞기도 수 없이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굶기고 많이 하였지만 그래도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리게 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고 은혜로 그를 붙들어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는 아마 온 집안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자신의 목양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는 아마 마음속으로 많이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늘 위로로 넘치는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이 땅에 아직도 살아있는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피붙이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행복과는 관계없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 그의 가슴을 찢으면서 스며들어왔습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내 골육지친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얻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차라리 원하는 바로라. 라고 고백을 했겠습니까.” 그 때에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주님을 만나기전에는 정말 매정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16장에도 3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며 나의 사랑하는, 나의 사랑하는, 나의 기쁨이 하면서 수식어를 붙여가며 개인적인 사랑을 그렇게 표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갈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그가 만난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을 바로 예수님이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소중한 주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가족과, 친척, 골육지친을 생각하면 억누를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우리같이 영성이 순결하지도 않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인해서 가슴에 피멍이 드는데 하물며 순결한 영혼을 소유했던 이 사도, 그리스도 예수 밖에 몰랐고, 인간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생사를 넘나들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택하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이 사도는 그 영혼의 죽어가는 운명에 대해서 얼마나 처절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침묵하고 있지만 아마 두 사람은 종종 만나서 우리들은 구원받고 주님을 위해서 훌륭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도구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자신들을 가문에서 내어 쫓고 핍박하는 동족들을 위해서 둘이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에게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단순히 자기의 목양을 받는 그러한 교인,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의 골육지친이었으니까요. 뿐만 아닙니다.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이름만 걸어놓고 교회에 다니는 명목상의 신자가 아닙니다. 가족들을 모두 교회로 출석시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가족들을 모두 교회에 출석시키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고통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 진실한 신자가 아니어서. 예수의 생명이 역사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또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복음을 안 들었고, 복음자체를 싫어했고, 하나님에게 원수처럼 행하며 살아서 어떻게 하든지 저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오기를 그렇게 갈망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이제 나오고 보니까 그 사람 속에 예수가 없어요. 그렇게 복음을 듣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도록 권면하고 함께 말씀을 듣고 목양을 받는데 그렇게 안 살아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안돼요. 만약에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참 생명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주님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 은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더라면 그를 위해서 울 수 없었을 터인데 내가 예수의 참 사랑을 깨닫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고 나니까 그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니까 그리고 나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생명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그 가족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전자보다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또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명복상의 신자로서 교회는 나오지만 사도의 마음에 못을 박는 그런 이름뿐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째는 사도들 중에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들 중에 유명히 여김을 받고.” 그랬는데 히랍어 성경에는 그렇게 안 나오고 “그 사도들 안에서 유명한 자인.”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사도들 중에 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사도는 12사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원래 “보냄을 받은 자.” 라는 뜻이기 때문에 아마 여기에서는 12사도를 의미하는 그 사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아졌는데 이렇게 사도행전에 표현된 것처럼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고 믿던 많은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던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도는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자기보다 먼저 예수를 믿었고, 자기보다 먼저 믿어서 자기가 이렇게 큰 사도가 되고나니까 항상 가까이에서 있어서 자기의 목회를 도와주는 아주 진실하고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지는 그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는 이 사도바울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외롭게 자신도 혼자 예수를 믿고 친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제 이 신앙 안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적인 외로움과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그런 적막함도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강퍅하고 믿음의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까지 함으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의 마음을 깊이 아프게 했던 그 바울이 회심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 그리고 그 회심이 진실한 회심이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가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생명을 걸고, 자기들을 구원하신 예수의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며 생명을 걸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박해를 받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 바울을 인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영혼에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받았을 영혼의 그 큰 위로와 감격은 아마 바울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통해 받았을 그것 못지않게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언제쯤이면 우리의 가족들이, 겨우 교회에 나오는 가족들이 이렇게 사도들 중에서 유명한 자로 알려졌던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감화를 끼쳤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처럼 우리의 마음에 위로를 줄까요. 이것도 우리의 기도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다 사람입니까. 사람 같은 짐승은 없어도 짐승 같은 인간은 많이 있습니다. 신자면 다 신자입니까. 성도 같은 신자도 있고, 불신자 못지않게 짐승 같은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가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우리 가족들, 우리 친척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그들이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처럼 이렇게 유명한 사람까지는 못 되어도 정말 어린 아이처럼 예수 따라 가고 유명하지는 않아도 정말 신앙으로 사는 그런 진실하고 아름다운 신자가 되기를 정말 갈망하고 그를 위해서 우리들이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져야할 짐이 그렇게 큽니다. 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받았으니까. 그들을 위해서 울어야합니다. 가족 복음화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진실한 신자는 가족들을 위해서 울다가 죽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의 생전에 우리의 모든 가족들이 이렇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처럼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성도의 귀감이 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눈에 감사의 눈물이 흐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고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눈물 흘리다가 죽을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감당해야할 몫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신앙의 절개가 있었습니다. 갈대처럼 나부끼는, 그래서 세상에 붙었다가 주님께 붙고, 주님께 붙었다가 세상에 붙는 그런 쓰레기 같은 신앙이 아니라. 꺾어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신앙의 정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에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이 상황에 따라서 쉽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이었다면 바울과 함께 옥게 갇힐 필요가 있었을까요. 어느 옥에 언제 갇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무수히 많이 투옥되었기 때문에 언제 갇혔는지 모르고 어쩌면 진짜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서 같이 감옥생활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바울도 투옥이 되어서 옥고를 치루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도 다른 때에 다른 장소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인하여 매임 바 되어서 흉악한 그 옥고를 겪었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사도가 함께 갇힌 적이 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떻게 되었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정절에 있어서 탁월했습니다. ( ? ) 사도들이 순교했고, 그리고 사도바울도 끊임없이 투옥되었고 마지막에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도 왜 투옥되었을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그렇게 되었던 것은 사도 요한이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갇힌바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갇힌바 되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한 가족이 어떤 신앙의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 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 한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줄때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는 그 영적인 좌절감은 당사자들은 모릅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하고 열심히 가르쳐서 신앙생활 하게 했는데 결정적으로 희생이 필요한 순간에 주님을 택하지 않고 세상을 택하고 복음 대신 나의 행복을 택할 때 그 때에 그 가족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한 우리들이 경험한 그 영혼의 좌절감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안드로니고아와 유니아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친족으로서 함께 예수를 믿은 희귀한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자기처럼 그 복음과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 때문에 핍박을 받다가 마지막에는 투옥 되어서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그리스도에게만 붙잡힌 헌신적인 제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자랑하고,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죽을 각오를 복음을 전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의 마음에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이 이렇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통해서 큰 위로를 받고 로마교회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었던 이 놀라운 축복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먼저 믿고 바울이 사도된 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골육지친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을 것이고, 바울이 사도가 된 후에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여기에 거론된 30여명의 사람들을 위해서 늘 기도했던 것처럼 그들의 신앙이 굳건하게 서서 이렇게 모든 사람들 중에서 유명한 신앙의 본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로 교통하면서 맺은 열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가장 강퍅하고 완악한 여러분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여러분의 골육지친 가운데 한 가정이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의 남편이 지금 당장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동생이 여러분들의 자녀가 당장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형제가, 아니면 여러분의 먼 친척이라도 예수를 믿고 우리와 한 마음이 되어서 우리들을 혼자 우리의 골육지친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것이 우리 서로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하나님께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우리의 가족을 위해 함께 울고 함께 위로할 사람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곳에 기도하는 그 곳에 함께 하마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즉시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 친척들에게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거기가 우리의 선교지이고 거기에서 우리는 순교하도록 그렇게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그들이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신앙의 정절을 가진 지체들로 붙들려 세워질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들이 신앙으로 유명해지고, 그들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며 사는 그 모습을 보면 저는 일평생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람들에게 가리워도 좋습니다. 왜냐면 주님의 마음에 그러한 우리의 이름이 더 선명하게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이렇게 설교를 듣고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만 집에 돌아가면 우리가 어쩜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는 모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눈물 흘릴 수는 있지 않습니까. 기도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희생할 수는 있잖아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지금은 우리의 마음에 아픔이 되었지만 먼 훗날에는 안드로니아와 유니아가 사도바울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가족들, 우리 친척들이 또한 우리의 마음에 그런 위로가 될 날을 꿈꾸며 낙망하지 말고 끝까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눈물 흘려주는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생사를 건 기도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으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애굽기 32:31-32)
여기에 보면 비록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받게 되었을 때에 모세가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이 백성들을 살려낸 그런 광경을 여기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 실려 있는 것들입니다. 그들이 지은 범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만들었고, 그리고 아론이 이 일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지도력을 잃고 휘둘리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만들고 범 죄 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서 아주 심하게 진노하셨고 그 진노는 굉장히 심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여버릴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 준엄한 책망의 말씀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이 모세는 자기의 가족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가족을 포함해서 자신의 민족 전체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일정한 방식으로 매달림으로서 임박한 심판을 면하고 이 백성들이 다시 구원받게 되는 장면들이 32장 33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은 그 죄를 모세 한 사람의 그 중보의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해주셨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이들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듦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죄를 범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모든 일을 인해서 모세가 심각하게 슬퍼한 장면이 나옵니다. 죄에 대한 슬픔, 이 죄에 대한 슬픔은 모세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결국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고 있을 때에 그 상태가 어떤 상태입니까. 그 상태는 바로 다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수식어로 그들을 말하지만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고 어두움의 자식들이고 이 세상 신이 그들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취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 있는 인간들이 바로 불신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내 사랑하는 자녀가, 내가 사랑하는 엄마,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아빠가, 내 형이, 내 동생이 그렇게 지옥 자식으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이 현제적인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정하고 말고가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그들이 마음에 품은 모든 소원들 중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면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린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는 자신이 깊이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든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뉘우치면서 깊이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있도록 그렇게 간구해주든지 둘 중에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범했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깊이 뉘우치면서 자신들이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그리고 이 커다란 죄를 인해서 자신에게 임할 두려운 심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떨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대신 그들이 지은 죄를 슬퍼하고 그들이 울지 않는 자신의 죄를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가 하나님을 만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렸다는 사실만 고백할 뿐 자기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의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태만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그 때는 반드시 그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지 저들을 위해서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또 바라시는 일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죄를 인해서 울 수 없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들의 죄를 인해서 슬퍼하고 아파했습니다. 그들이 그러해야했는데 그들이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모세가 먼저 주님 앞에 부름을 받은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슬퍼하며 아파하기를 자기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으로 역사하게 하셔서 불신자인 우리의 가족들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시고 우리의 복음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흔히 두 도구를 사용하시는데 그것은 뭐냐면 그들에게 들려지는 명백한 복음과, 그리고 그 복음이 유하게 우리의 가족들 속에 역사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 두 가지를 사용하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그의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그럴까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나면 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기여하고 싶어지는데 그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관계를 맺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그 사람 속에 넣어주시고, 그 생명으로 하나님과 연합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 이것이 그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고 그렇게 됨으로서 그는 비로소 이 땅의 자원이 아닌 하늘 자원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는 정말 신실한 그런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환난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칼, 고난, 이런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신령한 자원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오직 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를 그 사람이 버리고 그 사람이 그 죄에서 돌이켜야 되겠는데 그는 그 죄의 실제조차도 느끼지를 못합니다. 왜? 죄 속에서 태어나서 죄 속에서 살아왔고, 죄와 함께 먹고 마셨기 때문에 지금도 그 지를 자신의 일부처럼 생각하고 인식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볼 때는 그것이 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너무 강퍅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일 것 같습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그들의 죄를 인해서 슬퍼해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일도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의 사람들, 구원받지 못한 이 동리의 사람들이 하늘 자원을 힘입지 못하고 핍절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들의 죄를 나의 죄처럼 생각하며 가슴 아프게 눈물 흘리며 그 눈물을 씻고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서 그들의 죄가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 죄를 우리의 죄처럼 생각하며 간절히 슬퍼하며 매달리며 기도하면 돌덩이 같은 우리 가족들의 마음이 놀랍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누구만이 할 수 있습니까? 성령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그런 가족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기억하시면서 그들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혀 자기가 죄인인지 몰랐던 사람들이 뒤 흔들리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복음을 듣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 세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 최고의 영광,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뭐냐면 그 회심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을 위해서 충분히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죄가 우리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고, 안타깝게 눈물을 흘리면 여러분들의 가족의 가슴이 돌덩이라고 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어느 날 녹이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느 날 성령께서 돌 같은 그들의 마음을 녹이시고 쇠 덩어리 같은 그들의 얼굴에 복음으로 말미암는 회개의 눈물을 흐르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l
그러면 궁금한 것은 그것입니다. 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을 위해서 충분히 울지 않을까? 구원받지 못한 가족뿐만 아닙니다. 구원받았어도 옳게 신앙생활 안하는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거의 슬퍼하지 않고, 그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거의 신앙을 버린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럼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눈물 흘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왜 그럴까요? 자신이 자신 속에 있는 죄가 슬프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지를 위해서 울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우리들이 심령이 정결할 때에만 이렇게 남의 죄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안 지은 사람,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정결은 죄를 안 지은 사람을 정결하다. 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죄를 버린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와 은혜의 지배 교리를 설교 들으면서 죄 때문에 더욱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 배운 때가 있죠.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내가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되는, 내 안에 아직 정욕이 남아있고, 내가 죄가 남아있고, 내가 아직 불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 그런데 그것은 어떤 것입니다. 내가 탐닉하고 즐기고 선택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내가 선택했더라도 지금은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 길어내는 기도를 하기 시작하고 지속적으로 그렇게 마음속에서 길어내는 기도로 매달리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과 죄가 하나였는데, 정욕과 우리의 심령이 하나가 되어 있었는데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는 죄 대로 돌기시작하고 죄가 마음속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세계 속으로 못 들어가고 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내 힘으로는 이런 죄들을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아직까지도 그런 죄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결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인해서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인해서도 깊이 슬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생활도 안 하고 적당히 흔들거리면서 살고, 정말 갑갑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집사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집사가 뭐예요. 안수 집사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안수 집사가 뭐예요. 장로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단 한 시간도 좀 간절히 매달려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 없이 밥 벌어 먹기 위해서 바쁘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서 희망이 없습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이 참다운 신자가 되지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참다운 신자가 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죄송합니다. 하나님” 그리고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연약하죠. 물론 부족하죠.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그것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신자가 직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온갖 시험이 나를 흔들고 그 악한 원수들이 나 안에 내 밖에 가득 있습니다. 흔들고, 그리고 나를 깨뜨리려고 하고 나를 부수려고 하고 너무 너무 괴롭게 몸부림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버리고 수시로 하나님 앞에 깨닫고 회개하며 믿음으로 살게 해 달라고 매달리는 이 기도의 세계가 있으면 물론 약하죠. 물론 온갖 시험들이 나를 흔들죠. 그러나 그 시험이 나를 치고 나를 때리지만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심령이 더러워져요. 더러워지는데도 그것을 닦아내는 참회의 시간은 없습니다. 왜?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엔조이 하다 가니까 되는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마음이 죄와 한 덩어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자신의 죄를 인해서도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가족들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슬퍼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결국은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여러분들로부터 영적인 고임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임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사랑 받는다. 라고 하는 우리나라 말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그런 고임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정말 역사하셔서 저 사람을 도와주시고 싶어도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본인은 몰라서 안 구하고, 먼저 믿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은 자기 속에 더러운 죄 때문에 그 가족들의 죄를 인해서 슬퍼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그러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것이 안 되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태만하게 자신의 영혼을 버려둔 사람들, 주일이고 수요일이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런 정도, 남이 설교하는 것 듣고, 남이 예배드리는 것 구경하는 것처럼 참여하면서 자신은 굉장히 반듯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 가서 예배에 참석한 공로에 대한 상은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은혜를 주시는 훌륭한 방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들만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심령이 더럽고 때 묻었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인해서 울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해서 눈물이 말랐기 때문에 내 가족을 위한 진정한 기도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지 않고 있다. 라고 하는 이 심각한 사실에 대해서 별로 인정하력 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과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준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그 은혜로 정결해진 사람들은 가족을 위해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저렇게 살까? 저 끝이 어디일까? 저 마음에 정말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존재할까?” 그런 아무것도 없이 살아갑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두 눈에 구원받지 못한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이 흘러내린 때가 언제였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눈물 흘려주지 않으면 누가 여러분의 부모, 여러분의 자식, 그리고 여러분의 동기간을 위해서, 여러분의 남편을 위해서 울어주겠습니까. 다른 사람 말고, 여러분들이 눈물 흘려주도록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 사람들보다 먼저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려고 애쓰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죄와 야합하고 적당히 섞여서 살아가고, 죄를 끊임없이 지으면서도 정결해지기 위한 그 참회와 진지한 기도생활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하신 다음에 우리가 눈물 흘려주지 않으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 속으로 우리를 보내셔서 거기에 심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거시면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참 생명을 나누어주는 전달자가 되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데 전혀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하나님이 슬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아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뭐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나왔던 ‘꾸어 바디스 도미네’ 라고 하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꾸어’ ‘어디로’ ‘바디스’ ‘가다’ ‘도미네’ ‘주님’ “주님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로마의 핍박이 임박하니까 베드로가 자기의 일행들과 함께 걸어 나오다가 동구 밖에서 예수님을 만나죠. “예수님 어디 가십니까?” “얘야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해 못 박히러 들어간다.” 거기에서 깊이 회개하고 로마로 들어가서 전승에 의하면 똑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를 거꾸로 매달아라. 예수님이 박히신 것처럼 어떻게 내가 같이 죽을 수 있겠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한번 정해보세요. 한 달이면 한달, 육 개월이면 육 개월, 이 개월이면 이 개월, 가족들을 위해서 헌신해보세요. 힘 닺는 대로 도와주고 “내가 우리 엄마만 예수 믿을 수 있다면 내가 똥을 푸라고 해도 푸겠다. 6개월 동안 내가 우리 집에서 노예 살 이를 하라고 하더라도 내가 하겠다.” 그런 각오로 살면서 동시에 그들의 죄를 슬퍼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들이 강퍅해서 예수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녹지 않아서 그들이 예수를 안 믿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용서를 비는 기도였습니다. 그 죄를 인해서 슬퍼하면서 모세가 한 구체적인 탄원은 무엇이었느냐면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신의 살이 찢어지는 그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에서 입을 열어 제일 먼저 하신 기도가 무엇 이었습니까?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 했네.
망치 소리 내 맘에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를 씻었네.
그것이 예수님의 가장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기도입니까.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살을 찢고 피 흘리는 고통을 당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죄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에게 그렇게 행한 그 죄인들을 위해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하는 희생에 크기보다는 그 들의 죄가 용서받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그 심판이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희생하면서라도 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두운 땅에 박해받는 복음을 들고 고난을 받으면서 동토의 땅을 누빈 절실한 전도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 그것을 이 속에서 그냥 간직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간절히 그렇게 눈물 흘리며 전했던 것이 바로 전도자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속에 없거나 아주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시찰 회 목사님들을 만나고 나서 그 중에 어느 한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했는데 한1년 반 되었나? 2년 되었나 그런데 꽤 많이 모입니다. 100명 넘게 모인다고 합니다. 사모님과 목사님이 개척교회 하자마자 전도지 들고, 학교 앞에서 전도하기 시작해서 교회가 서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단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시냐면 다른 교회에서 장로님이 협동 장로님이 오셔서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나중에라도 제가 이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더래요. 이 목사님이 40명을 전도해서 예수 믿게 만들기 전까지는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러면 집사는 어떻게 하느냐? 그랬더니 집사 이제 세우기 시작하는데 20명을 전도해서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게끔 그렇게 역사하는 도구로서 섬기고 그리고 그들을 양육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집사가 될 생각도 말아라. 그런데 갑자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날 교회에 잘 안 나오는 집사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물론 잘 나오는 집사들이 더 많죠. 그런데 어떻게 할까요? 그런데 어떻게 또 자기가 집사라고 왔는데 교회에서 임명을 안 해줘도 자기들끼리 집사라고 불렀는데 “안 집사”라고 부를 수도 없고, “집사”라고 부를 수도 없고 “집 팔아라.”고 부를 수도 없고, “집 사는 것의 반대는 집 팔아 입니다. 너무 너무 창피했습니다.
정말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뛸 듯이 기뻐하고, 그리고 한 영혼이 실족했다면 가슴아파하고 누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왔다면 그렇게 즐거워하고 죄에 빠졌다면 그렇게 아파하고 슬퍼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입기까지 모세 한 사람의 간절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도록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만 입니다. 그런데 수백만 대 일입니다. 그런데 수백만 명이 지은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한 사람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그들의 죄를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것이 그것입니다. 절대 우리 가족들이 강퍅해서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떻게 마음이 녹아졌으면 좋겠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마음이 말랑 말랑해 졌으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 앞에 거꾸러졌으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우리가 거꾸러지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간절히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는 반드시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지금도 심판아래 있지만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지만 그 때는 그 심판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고 미끄러져서 그 음부의 불길로 들어가는 가족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모세는 이렇게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슬픔 그 위에 구체적으로 그들을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운명의 현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해서 아주 뚜렷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의 죄의 용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광의 화목 없이 넉넉히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죄가 있기 때문이고, 자신이 죄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이고, 죄와 야합하기 때문이고, 죄와 분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가족들을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그 용서를 간절히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종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항상 같이 돌보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영혼들이 마음이 강퍅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불선한 길을 걸어갈 때,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순종한 길을 가고 있을 때, 씩씩하고 담대하게 그 길을 걷고 있을 때, 그 때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눈에 보입니다. 저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면 반드시 그 마지막이 커다란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이 있습니다. 내 눈에는 보이는데 저 사람에게는 안 보입니다. 그 때 마음에 너무 아프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아가는 것 그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 아픈 것입니다. 왜?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하나님을 왜 그렇게 대적할까?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고 이렇게 복된 삶인데 왜 견디기 힘든 그 고통의 삶을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등지고 살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많이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영혼을 돌보는 구역장들이 우리 교회에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참 이상합니다. 다른 교회는 구역장 좀 해 달라고 공과 책 가지고 쫓아다녀도 나는 부족하다고 나는 못한다. 그러면서 도망을 간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는 자기 구역장 안 시켜준다고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12월 달쯤 되서 사표를 내고 나가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들을 시켜보고 싶은데 한번 구역장 되면 말뚝입니다. 안 나갑니다. 그런데 들어보세요.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안 나가는 것은 견고한 것입니다.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제자리를 온갖 시험이 흔들고 어려움이 있어도 눈물로 영혼을 섬기면 견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혼을 향한 진정한 눈물, 슬픔, 그 영혼을 위한 간절한 사모함, 영혼들에게 모본을 보이는 삶, 이런 것들은 없습니다. 그냥 시간 강사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나갑니다. 말뚝입니다. 이것은 견고한 것이 아니라. 소 심줄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안 하고 다른 사람도 못하게 가로막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그만 두겠다고 하는 사람이 년말 에 거의 없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집사를 안 시켜줘서 시험에 든 사람은 없는데 구역장을 안 시켜줘서 시험에 든 사람은 가끔 나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그냥 구역장을 만들어놓고 자기가 전도해서 구역을 만들면 좋겠는데 그것도 싫다고 하죠. 이제는 구역장 너무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혼자 1구역, 해주고 혼자 공과 공부 하라는 것입니다. 답답하면 전도해서 데려다 놓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벼슬이냐? 명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놀랍습니다. 때가 되어서 논밭에 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은 시들어가고 잡초는 무성해갑니다. 우리도 영혼을 섬기면서 정말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그 영혼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지 않으면 우리가 주일날 와서 손짓 발짓 하면서 깜박 죽도록 그 전 주일날 구역장 시간에 배운 것 반복하는 것 그것 다 바람에 흩날리는 가화 조각입니다. 이엔 바운즈 라고 하는 훌륭한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한 시간의 설교로 영혼에 생명을 주는 외침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는 가혹할 정도로 긴 시간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몸부림 쳐야 된다.” 그러면 영혼들을 돌보는 구역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용서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간절한 부르짖음이 없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이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그를 위한 중보의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제가 책에도 썼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저에게 세기에 길이 빛나는 설교자가 될래?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 언제나 응답해 주실 수밖에 없는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 될래? 그러면 나는 30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왜? 하늘나라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름도 잘 몰랐던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냐면 기도로 간절히 섬겼던 사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많은 섬김 들은 상을 미리 가불해서 쓸 위험성이 많습니다. 목회를 위해서 수고하면 교인들이 “목사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리고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주고, 아니면 아프다고 하면 죽이라도 끓여주고, 안 아프다고 하면 물이라도 사다 주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면 그 사람이 계속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떻게 보면 좋은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앞으로 받을 상을 미리 받는 것입니다. 공방에서 한 기도에 대해서는 그렇게 미리 상을 빼앗길 이유가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이 울고 그들의 죄 때문에 슬퍼하고, 용서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들의 곤고한 영혼 때문에 많이 하나님 앞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매달렸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여러분은 정말 구원받지 못한 그 가족이 용서 받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인지 자신을 정말 돌아보아야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생사를 건 중보입니다. 뭐라고 모세 말합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이들을 용서해주시지 않는다면 생명책에 기록된 저의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똑같은 기도가 바울의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차라리 원하는 바로라.” 생명책이 장난입니까. 무슨 가게 집 장부책입니까. 거기에 이름이 기록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의 생명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지워버렸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리고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앞에 혈기를 부리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자기의 가족과 그리고 동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의 멸망 될 그 자기의 가족과 동포들의 아픔에 비하면 자신의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비록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2학년 때인가? 1학년 때인가? 지리산 밑에 함영이라는 곳에 농촌 전도를 갔습니다. 가서 주일학교도 해 주고 왔는데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참 시골 사람들이 점잖고 진지합니다. 그래서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복음을 천천히 전하는데 한 40쯤 된 아낙네가 무엇을 이고 가다가 내려놓고 제가 전한 복음을 들으면서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다 전파하고 끝나니까 뭐라고 하느냐면 “그러면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천당을 가고, 안 믿으면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간단 말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대번에 영접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우리 시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어머니는 믿지 않고 죽은 것입니다. 결론이 뭐냐면 시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면 자기는 더더욱 이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웃으면서 얘기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진지하게 얘기하면서 시어머니가 지옥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나 혼자 살겠다고 천국을 가느냐. 내가 가서 그 고통에 동참해 드리는 것이 며느리로서의 도리가 아니냐.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불신자는 불신자로 죽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지옥까지 가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변할까? 우리의 가족이 믿지 않고 지옥에 간다면 내가 거기까지라도 따라 갈지언정, 내 엄마가, 내 아빠가, 내 동기간이 예수 없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 하고 나 하고는 결탁되어 있으니까 우리 돌을 같이 구원하시든지 같이 버리시든지 둘 중에 하나 해주세요.” 이것이 이 기도입니다. 내 동포와 나는 결탁되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내 가족과 내 동포는 끊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생명을 나눈 관계입니다. 저들을 버리시려거든 저도 버리시고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만에 하나라도 나를 버리실 수 없다면 내 가족도 내 동포도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그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왜? 이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결국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자기의 백성들이 죄 때문에 받아야할 그 진노의 심판의 자리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예수님이 함께 내려가시지 않습니까. 음부의 고통까지 맛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사실은 하나님께 탄원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정말 생사를 건기도, 우리에게 정말 그런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위해서 생사를 걸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변화를 위해서 생사를 걸고, 하나님 이 일은 이 기도제목은 제 생명과 결탁되어 있습니다. 함께 죽이시든지, 함께 살리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제목들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족들을 향한 이런 생사를 건 간절한 기도. 아침 밥 먹다가 습관적으로 “우리 모든 가족 구원해주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먹겠습니다.” 그런 기도 말고, 진지하게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이, 회심하지 못한 가족들이 있는 것이 한이 된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내가 가슴에 못을 빼 주시옵소서. 여러분들이 영혼을 그렇게 섬기면 목사와 같은 마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모세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동족이 끊어질 수 없는 생명적으로 연결된 관계임을 고백하면서 함께 죽이시든지, 함께 살리시든지 할 때에 그 한 사람의 간절한 사랑과, 그 헌신과 매달리는 그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모세는 한 사람이었고, 죄 지은 사람은 수백만 명인데 한 사람의 의가 그 수백만 명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들과 함께 하시는 응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은총의 표징까지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가족,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동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얼른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고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북에 있는 내 동포, 주님 모르는 불쌍한 내 민족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그렇게 간구하고 매달리는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거의 우리와 같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를 걸지 못하는 이유는 마지막으로 무엇일까?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거의 다 느낍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시면 나도 아프고, 그리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쁘시면 나는 피를 흘려도 기쁘고,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이 사람은 민족을 위해서 생사를 건 사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생사를 건 사람입니다. 생사를 건 결단은 장난이 아닌 다음에야 진실한 사랑으로 말미암는 결단이 바로 연합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어도 두렵지 않고, 무엇도 무섭지 않은, 그런 사랑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제일 두려운 것이 죽는 것인데 그것은 횡제 하는 날입니다. 이 수고스러운 인생, 고달픈 인생을 모두 끝내고 주님의 품에 가서 쉬는데 여러분, 뙤약볕에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밭을 갈다가 땡땡땡 종을 치면서 “이제 참을 먹을 시간입니다. 모두 이 그늘에 와서 시원한 얼음 냉수를 마시고 쉬십시오.” 그럴 때 “아이 씨 왜 자꾸 부르는 거야.” 그럴 사람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렇게 고달픈 것입니다.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러니까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를 걸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죽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면 생사를 걸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면 생사를 걸 수 없습니다.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 나는 사나 죽으나 아무 문제가 없다. 왜? 살아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강을 건너가면 하나님을 더 확실하게 만난다. 이러니까 생사를 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생사를 건 결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이 고통 받지 않을 때까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이 손해 보지 않을 때까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때까지만 하나님께 봉사하는 이런 봉사는 다 불에 타서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기억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생사를 건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대로 산다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된다면 되리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진리를 따라 산다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배척을 받으면 나는 당하리라.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나는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발견되리라. 그런 고백이 없기 때문에 생사를 걸지 않습니다.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여러분의 구역을 위해서, 여러분의 교구를 위해서, 아직까지도 구원받지 못한 우리 이웃을 이해서, 전도 대상자를 위해서, 누가 생명을 걸 것입니까. “하나님 지금은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지만 그들을 향해 주신 마음 때문에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쪼개지 마시고 통째로 취급해주시옵소서. 나도 구원하고 그 영혼의 죄도 용서해주시든지, 어떻게 하든지 하나로 취급해주시옵소서.” 하면 그들의 죄가 아무리 크고 그들이 아무리 강퍅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그 간절한 생사를 건 결단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십시다. 우리 교회에도 십수 년을 전도해도 안 되다가 몇 달 생사를 거니까 가족들을 구원하게 된 예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기도하고 애를 썼는데도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강도를 높여야죠. 더 이상의 헌신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생사를 건 각오로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금년 가을이 오기 전에 이 좋은 계절에 정말 돌아와서 가을에는 오히려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돌같이 강퍅한 사람의 마음도 녹이십니다. 여러분 그 찬송가 있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와
그 곡을 쓴 사람이 누구였냐면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사냥해서 팔아먹던 그 흉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돌아왔습니다. 변화시켜주십니다. 왜. 성령님은 인간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 전공입니다. 그들이 강퍅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생사를 걸지 않기 때문에 그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지체되는 것입니다. 누가 걸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기도하겠습니다.
6. 구원의 은총, 그 표징을 주소서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33:13)
얼마만입니까. 수요일 날 거의 두 달 넘었죠. 지난 6월 마지막 주에 했던 그 설교,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마지막 주에 무엇을 설교했더라. 그것이 뭐냐면 생사를 건기도, 그래서 32장에서 모세가 “너희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섬겼으니까 이제 이 백성을 다 쓸어버리고 그리고 내가 이제 새 백성을 세우겠다.” 그러시니까 모세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자기의 영혼을 비는 것처럼 비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누그러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 발짝 물러나셔서 이제 모세에게 ”그렇다면 올라가라.” 이것이 이제 33장의 문맥입니다. 그래서 그 예비적인 이야기를 보면 “올라가라. 가나안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내가 약속했으니까 주마. 올라가라. 그런데 사자는 내가 보내주어서 그 사자가 너희들을 인도해 가기는 하겠지만 나는 같이 가지 않겠다. 다시 말씀드리면 임마누엘 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더니 놀라운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뭐냐면 하나님이 안 쫓아가시는데 우리가 가나안을 얻으면 뭐하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는 아니지 않느냐 우리 민족의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웃깁니까. 그렇게 귀한 하나님을 바로 앞에서 배반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제 정신이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제정신이 안 돌아왔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소중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잃어버려요. 그리고 어둠 속에 들어가고 나면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소중한 하나님, 그렇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또 왜 배반한 것입니까? 그 때는 세상 욕심에. 육체 사랑에, 옛사람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잠시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안은 은사를 받아야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안은 순결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영안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있는데 물질을 사랑하게 되면 등불이 마음에서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순결하게 사랑할 때는 분별력이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이 발전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다 쓸어버리시려고 했는데 이제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 너희끼리 가라. 나는 안 가고 사자를 보내겠다. 그래도 하여튼 가나안 땅은 얻겠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그 말씀이 33장에 보면 “황송한 말씀”이라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재앙의 말씀”이라. 고 나옵니다. 그것이 재앙의 말씀처럼 들린 것입니다. “핫다바라 하라.” 라고 나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별로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드디어 모세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단장품들을 다 제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님을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처소를 마련해놓고 이제 목 매이는 사람들은 거기에 가서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부터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했을까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제발 그들을 형벌 내리지 말아주시도록, 심판하지 말아주시도록 생사를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마음이 누그러지셨습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벌하셔서 천하에서 다 쓸어버리시면 하나님 그러면 이 백성 어떻게 합니까?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됐어요? 안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그들을 용서해주시도록 생사를 걸고 기도했는데 두 번째는 그들을 사랑해 주시도록 은총의 표징을 구하며 생사를 걸었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이 뭐냐면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주시옵소서.” 그런데 사실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길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들에게 어울리는 존재가 되고 거기에 부합하는 삶을 살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불리는 것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욕을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기 자식이 참 똑똑하고 착하고, 말하자면 잘 자랐으면 그냥 자랑합니다. 언젠가 한번 시골에 가서 기도원을 갔나, 어디를 갔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냥, 다 늙은 분들이 거기에서 험하게 부엌일을 하면서 기도원에서 그렇게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방은 있습니까? 밥은 어떻게 먹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니까 그런 대답은 하나도 안 하고 자기 아들 서울 대학교 다닌다는 이야기만 계속했습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기도하러 간 사람이, 왜? 그 부모의 마음에는 “야, 내가 이 시골 기도원에서 나무 해다가 불이나 떼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아들은 서울 대학교 다닌다.” 그것을 너무 자랑하고 싶은데 누가 물어봤나?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물어본 사람이 없어도 대답부터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자식들이 사고 쳐서 신문지상에 크게 오르내리고 그 재판 받아서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언도받고 형무소에 갇혀서 감옥살이를 한다면 아마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정말 자랑스러운 자녀들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말이죠. 모두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살아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떳떳하게 그 예배당에 올 때에 도시락 봉지에 성경 넣어가지고 그렇게 다니면 안 됩니다. 떳떳하게 성경, 찬송 내놓고,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야지, 그런데 삶이 그렇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름에 어울리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들, 직장 다니는 사람들, 가정주부뿐만 아니라, 많이 사람을 만나고 이익에 많이 연류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장사하고 사업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이라고까지 이야기 하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열린 교회 교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번더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 열린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그렇게 고백했으면 그러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잘 살아야 되지만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잘못 살게 되면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만 열린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하나님과 열린 교회가 동시에 욕을 먹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분 좋을 때는 “제가 열린 교회에 다닙니다.” 그래놓고 사업하다 멱살잡고 “이 자식, 저 새끼” 그러면서 싸우고 그러면 처음에 아예 얘기를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열린 교회 교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고 생명을 걸고 그 이름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일컬음을 받으시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뭐냐면 이 백성을 사랑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뭐가 필요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죄의 진정한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는 뭐냐?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일단 심판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업이 고작해야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모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업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지옥에 안가잖아.” 그렇게 대답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썰렁해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녀석을 말이지 내 아들까지 주어서 피를 발라서 그렇게 뜨겁게 사랑해서 신자로 만들고 그 위에 은혜를 주셔서 이제까지 먹이고 입히시면서 홍해건너 만나 먹여, 샘을 터트려, 원수들을 무찔러, 이 은혜의 나라로 인도했더니 네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얻은 것이 뭐냐? 그랬더니 지옥 안가잖아.” 그렇게 이야기 할 때 그 하나님의 마음이 아들을 주시고 여기까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서늘하시겠습니까.
당연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업은 뭐냐면 하나님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하는 그 곳에서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미지근한 싫증이 있는 그런 곳에서는 결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쁨, 그것이 있는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안 기뻐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벌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하나님이 잠시 면제해 주셨지만 그러나 모세가 볼 때에 정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지셔야할 관계는 간신히 심판을 모면할 그런 관계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하나님 이 족속을 주님의 백성으로 여겨주시옵소서.” 그 주의 백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주의 백성인 자들에게 베푸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심이라.” 그런 마음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에게 가지셔야할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 그 자체가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실만한 그러한 거룩한 존재들이 못 되는 것입니다. 왜?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고, 그리고 무너져서 그래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왜? 이 백성들에게는 촉구하고 또 이 백성들에게 외치지만 이 백성들이 냉담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뜨거운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변화되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훨씬 울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에게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실 수 없겠죠.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환란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실 때 숙명처럼 노예 상태로 살던 애굽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홍해가 앞길을 막아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던 그 때에 인간의 상식을 깨고 홍해를 갈라 길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력하게 변화시켜주셔서 그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그래서 노예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그 가나안의 선진국가의 군대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그리고 가나안 땅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 족속을 주님의 백성으로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죄의 용서가 아니라. 단순한 위기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의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내버려두시면 지옥 갈 터인데.” 그것이 아니라. 아직도 앞길이 청청한 가족들을 보면서 겨우 전도의 목적이 지옥을 모면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복음증거의 동기가 너무 초라합니다. 왜? 불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면 살아온 그 가족들이 걸어온 인생의 길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뭐냐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또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인간들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은 그 긴 세월동안 인생을 살았는데 단 한 번도 그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행복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었고, 혹시 행복이라고 느꼈다면 그것은 착각이었고, 그것은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감으로서 얻어진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그 행복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해된 만족입니다. 행복이라기보다는 오해된 만족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가는, 그것을 볼 때에 우리 속에 가장 간절히 떠올라야 할 제목은 뭐냐면 “하나님 우리 엄마도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해 주십시오. 일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온 우리 어머니도 우리처럼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해 주십시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고난의 길을 헤치면서 살아온 우리 아버지도 한번 하나님 앞에 뜨거운 사랑을 받고 인간으로 이 세상에 창조된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고, 그리고 나 같이 형편없는 이런 인간,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고집스럽게 불순종하며 살아왔던 나 같은 인간을 통해서도 창조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구나. 나 같은 인간 때문에 그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는구나. 아들을 정말 이 세상에 보내실 정도로 나는 소중한 존재였고,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구나.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는 창조주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으로 지은바 된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다.” 그것이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난 인생으로서 누구나 고백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고백해보고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왜 그렇게 성화의 삶을 살자. 게으르면 안 된다. 그래서 게으름을 고쳐보려고 했더니 또 게으름만 고친다고 되느냐 영혼의 싫증도 없어야지.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끊임없이 자신 안에 있는 거짓된 육체를 죽이고 죄를 죽이는 그 모든 일은 무엇 때문입니까. 원래 창조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계셨던 그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고 사람이 정말 변화되면 잠시 동안 창조의 목적으로 훌륭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서 자기가 죄 가운데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알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하나님 내 안에 계시는 주님, 편하세요. 하나님이 편하시면 나는 괜찮습니다.” 거기에서 바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 때문에 기뻐하신다.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나를 두셨던 그 자리로 돌아가면 나는 기쁘다. 그래서 내가 거기에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다. 그래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과 자기의 행복, 이것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는 쓴물을 마시면서 괴로운데 하나님은 영광을 받는다. 그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은 순교를 하는 순간에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만히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의존하지 못하게 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해야 하는 인간의 본분을 버리고 세상을 기뻐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내게 만드는 것이 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못 돌아가게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들을 제 정신으로 돌아와서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돌아가게 하려다 보니까 이렇게 설교를 많이 해야 하고, 야단도 쳐야 하고, 훈련도 시켜야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은 우리는 그래도 가끔이라도 사경회 때라도 한번씩 돌아가 본적이 있지만 며칠씩. 그래서 사경회를 자주해야합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그 다음 약을 지어서 먹어야합니다. 약으로 살아야합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몇 번씩 해서 돌아오는데 그 때는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돌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죽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한번도 돌아와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되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살았다면 개 한 마리가 복 날에 죽고, 풀 한 포기가 가을에 쓰러지는 것과 인간이 죽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인간의 참다운 존재의 의의와 가치는 궁극적이고 최상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데 그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겨우 시작 일뿐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별로 못 돌리며 사는 것 보면 증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영광을 돌리며 살기 위해서 참회하고, 깨뜨려지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나 내 구원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매일 매일 만져주시는 은혜, 분초마다 사로잡으시는 은총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그 창조 시에 가졌던 의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족들은 뭐냐는 것입니다. 정말 창조의 목적을 모르고 그 긴 세월을 버리적 거리며 살았는데 창조주 하나님은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고, 그 하나님 때문에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최고의 기쁨을 한 번도 누려 본적이 없고, 인간들을 통해서만 받으실 수 있는 그 독특한 영광을 창조주 하나님께 단 한 번도 돌려드리지 못한 채 죽어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이 세상의 들풀들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피조물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다 죽어간다고 하더라도 좀 낫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왜? 모든 피조물의 면류관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시기할 정도로 천사들도 시기할 정도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리 가족이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내 동생, 우리 누나가 몰라서 그렇지 그들이 모르는 동안에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눈물겨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냉담하시고 어떤 사랑을 베푸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피조물로서 참다운 피조물의 위치로 한번 돌아가 보지 못한 것이 불행한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열망을 끊임없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하는 자가 없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우리 마음 속 깊은 그 곳에 영혼을 내리신 주. 하나님이 이 피조물에게 베푸신 사랑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그런 사랑을 당신의 창조의 세계를 향해 부으시고, 그리고 지금도 그 창조의 세계를 주님의 그 두 팔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운행되어가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형상을 나누어가진 이 세상의 인간들, 자기 아들이 위하려 피 흘려 죽어야했던 우리의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바라보실 때 전하는 자가 없어서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그 백성들을 볼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돌아앉은 불신 가족을 위해서 생사를 걸고, “하나님 우리 엄마, 우리 아빠를 당신의 백성으로 여겨주십시오. 내가 열심히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증거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도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형, 우리 동생들에게로 돌아와 주십시오. 그래서 자격은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죽으신 아들의 그 구속의 공로를 보시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이 가족들을 주님의 백성이라고 여겨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나아가야합니다. 정말 가족들에게 이런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이 가족을 주님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호소할 때에 눈물 흘리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불신 가족들에게 나아가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의 목적으로 회기한 것이다. 가르쳐 주어야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가 그를 기뻐하든지 싫어하든지 열심히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전해야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돌아앉은 범 죄 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하여 주님이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생사를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어떻게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옛날에 나보고 그러셨죠. 뭘 내가 너를 이름으로도 알고,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모세, 하나님이 이렇게 아시고 또 너희는 내게서 은총을 입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것은 구약의 표현에서 보면 하나님의 최상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자기 계시입니다. 이것을 예수님 시대의 신약 용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될까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정도와 아마 짝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은혜를 베풀다’가 (“ )이라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하난’ 'HNN' 이라고 자음 스패링이 들어간 이름이 굉장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인 요한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 뜻입니다. 또 여호하난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스라서에 나옵니다. 여호하난의 방에 들어가서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똑같이 여호와라는 이름과 하난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정말 기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 “너는 내게 은총을 입은 자다.” 그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도 나오고 쭉 보면 하나님과 사람이 대화하다가 또 사람이 믿는 사람끼리 대화하다가 이런 대사가 나오는 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기억할 것입니다. “주여 제가 은총을 입었거든,” 이런 부탁을 좀 들어주십시오. 이것은 뭐냐면 은총을 입은 다는 표현자체가 뭐냐면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사람과 친교의 대상이 되었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저 보통 사람 아니죠.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 하나님하고 나 하고 보통사이 아니죠.”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보통 그냥 오다. 가다 만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죠? 하나님과 저 사이가 보통사이가 아니죠? 물론 보통 사이가 아니죠. 왜? 사연을 이야기하면 길지 않습니까. 뭐 갈대상자 떠내려가다 구하고, ..... 밤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다 건져서 공주 집에 들어가서 엄마가 젖 먹여서 기르고, 그것을 이 엄마 무릎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배웠습니다. 그랬더니 그래서 나이 40되어서 학문 좀 익히고 혈기 왕성하니까 내가 뭔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한번 해 보겠다. 그리고 사람을 때려 죽였더니 하나님은 하나도 안 도와주시고 싹 모른 척 외면하시는 바람에 지명수배 내려서 그렇게 도망가고 말이죠. 그래서 소똥, 양 똥, 염소 똥에 파묻혀서 또40년을 살다가 이제는 완전히 파파 할아버지가 다 되었더니 “내 백성을 건져라. 네가 가서 구원해라.” 그러니까 모세가 이제 40년 동안 삐친 것이 풀어지겠습니까. “내가 왜 갑니까?” 대 놓고 얘기합니다. “난 안 갑니다. 난 못갑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이 달래고, 또 야단치시고 그래서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까지 오기까지 밤 새워서 이야기해도 다 못하겠죠. 그렇죠. 그러니까 보통사이가 아니죠. 그 기간 동안에 모세와 하나님이 나누었던 그 관계와 그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긴 세월이었겠습니까.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 저 하나님과 보통 사이가 아니죠.” 그럴 때에 그 하나님이 “내 백성을 구원해라.” 그러니까 “못하겠습니다. 딴 데 가서 알아보시죠. 난 내가 왜 갑니까.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독한 마음을 품고 버티고 하나님 대적하고, 혈기를 부리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우리 보통사이 아니죠.” 그렇게 얘기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보통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런 것은 잠깐이었고 모세에게 무슨 꿈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죠? 다 젊음도 버리고 미디안에서 이제 짐승 치는 노인네가 부름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서 그 노후를 이끌고 그 완악한 백성, 돕는 사람도 별로 없이 외로운 지도력의 벌판에 서서 하나님에게 책망을 들으면서 혹은 그 백성들에게 타절을 당하면서 그러면서 고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살아왔는데 뭐 번듯한 사택한번 줘 보았습니까. 좋은 마차한번 타고 다닌 적이 있습니까. 뭐 만난 음식을 먹었습니까. 저처럼 안식 휴가를 받아서 애굽에 놀러를 가 보았습니까. 그래도 주일 한번 빠졌습니다. 그것도 로마에 가서 설교했습니다.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생애는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 모세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충성하였느니라. 왜냐면 내가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꿈과 이상으로 말하였거니와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말하였음이니라. 그는 충성되었음이니라.”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왔던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밀어로 점철되었던 하나님 없는 모세. 모세 없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그 사이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특별한 사이죠.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이름으로도 내가 너를 알고” 이것은 히브리 표현으로 친 가족적 친밀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가끔 전화 와서 “목사님 저 제자인데요. 그리고 누구입니다.” 저는 또 정직 시리즈를 설교하지 않습니까.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모르면 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말합니다. 아주 굉장히 섭섭해 합니다. 자기는 자기 친구들에게 나를 잘 안다고 했는데 전화를 해 보니까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잘 아는 사람인데도 이름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고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생각이 나는 것 같다고 그렇게 해 놓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이름만 들어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총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무엇을 끌고 들어가느냐면 세상 말로 빽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인간들을 봐서는 하나님이 그런 마음이 안 내키시겠죠. 그렇지만 하나님 우리가 보통 사이입니까. 저 이름으로도 안다고 그러셨죠. 그리고 내가 은총을 입은 자라고 주님이 말씀해주셨죠. 하나님 내 백성과 내 생명은 결탁되어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 백성들을 주의 족속으로 여기시기 전까지는 제 마음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가슴에 사금파리를 끌어안고 온 몸이 곪아가는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는 그 기도의 강력한 힘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 그러면서 이해가 안 될까봐 누구의 예를 들었습니까? 엘리야의 예를 들은 것입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이 비가 오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 아닙니까. 농경사회에서 3년 6개 월동안 비가 안 오면 그것은 전국적인 가뭄이 아니라. 전국적인 사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안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아마 하나님을 찾았을 터인데 하나님이 백성이, 그런데 성경에 그런 사람 기도는 거론도 안 합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그들의 기도가 합쳐져서 하나님이 비를 내리셨다. 아닙니다. 엘리야 한 사람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고 비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 가는 엘리야를 가리켜서 “기도로 하나님의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사람.” 이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그 동안은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사람.”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엘리야 한 사람의 기도를 주목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의인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 표현으로 들자면 이름으로도 알고,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변화 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되셔서 두 사람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이루실 구속의 대역을 의논하는데 그 중에 두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적으로 많이 받았던 그 두 사람을 변화 산에서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연합된 사람, 당신의 마음에 합하고, 이름으로도 그를 알 수 있고, 그리고 당신에게 은총을 입은 사람의 기도에는 하나님이 너무 약하신 것입니다. 약한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왜 그럴까요? 첫 째는 기도의 내용이고, 두 번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기도해도 하나님이 해 주시고 싶은 것만 기도를 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노릇 해 보면 압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보면 그 선생인 내가 이름으로도 알고 내게 은총을 입은 학생들은 질문을 하고 부탁을 해도 그렇게 기쁜 부탁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교수님 우리 수업 5분만 더 하면 안 됩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더 많이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더 많은 책을 소개해주세요.” 그리고 이름으로도 모르고 은총도 받은적이 없는 놈들은 “끝납시다.” “다음 주에도 학교 와요?” “내일 6.25인데 수업 있습니까?” 6.25하고 수업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의 사람됨과 그의 기도제목이 나뉘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이루리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 구절을 놓고 실지로 그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 정말 무엇이든지 구해도 정말 하나님이 해주십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럼요.” 그러면 이 세상의 황제가 되게 해 달라고 해도 해줍니까?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고 그 사람이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소원을 안 가집니다. 절대로 그런 소원을 안 가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안심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름으로도 알고 은총을 입은 사람들의 이 기도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뭐냐면 기도하는 그 사람이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똑같은 말을 하는데 이름으로도 모르고 은총도 받지 않은 사람이 얘기하면 “저것 또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구나.” 그런데 그렇게 성실하고 이름으로도 알고 레포트 써서 은총을 입은 학생이 그렇게 얘기하면 이 공부뿐만 아니라. 다른 공부도 더 많이 균형 있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안 좋은 학생이 레포트는 냈는데 너무 깨끗하게 성실하게, 내용도 풍부하게 써서 냈어요. 그러면 교수인 우리는 이렇게 보면서 이것 또 어디에서 배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렇게 잘 하던 학생이 레포트를 내 놓았는데 조금 글씨도 좀 날아가는 것 같고 그래요.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면 무슨 일이 집에 있나?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뭐 아버지가 사고가 났다든지, 무슨 일이 있나? 글씨는 이렇지만 아마 내용은 있을 거야. 그리고 한 번 더 읽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 불쌍한 우리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사용할 은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그렇게 억지에 가깝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내 가족들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달라고 하나님과 내 사이를 생각해서라도, 하나님과 내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걸고 내가 기도합니다. 그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을 왜 불신 가족들이 기뻐하겠습니까. 자신도 소중하지 않는 신앙을 어떻게 믿음이 없는 가족들이 그 신앙을 귀하게 생각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우리 개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이 우리를 사명의 자리에 세워 놓으시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까지 다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내가 정말 잘 믿는 사람이 되어서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그리고 너는 내게 은총을 받은 자라는 확증을 받고, 그래서 그 불신 가족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렇게 눈물로 간구하는 사랑스러운 우리가 측은해서 우리의 가족들을 변화시키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설교만 들을 뿐 1년이 지나가도 복음이 부끄러워서 가족들에게 제대로 한번 말씀드려본 적도 없고, 예수 믿으라고 해본 적도 없고, 테입 하나 선물해 본적도 감히 없는 사람들도 여러분들 중에 있겠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전하려고 애쓴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어떻게 하든지 좀 예수 믿게 만들어서 가족을 하나 되게 해 보려고 애쓴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애를 썼는데도 별로 진전이 없다면 오늘 한번 그 모든 전도되지 않는 이유를 여러분의 불신 가족의 강퍅한 가슴 속에서 원인을 찾지 말고, 정말 나에게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기도할 담보가 되는 은총이 있는가? 정말 하나님이 내가 내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사랑하는 자의 음성이라 인정하시고 귀를 기울여 주실만한 그런 삶을 살았는가?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기적이나 신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그것입니다.
변화 산에서 예수님이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요단강에서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이 한 번 더 들렸습니다. 뭐라고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거기에다 하나 더 추가되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을지니라.” 뭐든지 그 아비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최고의 섬김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기도해야합니다. 정말 우리는 이제껏 불신 가족들이 세월이 많이 지나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그들의 강퍅한 가슴에서 이제껏 찾았다면 마음속으로 우리는 이미 그들을 정죄해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번 이 시간에 한번 생각을 바꾸어서 하나님 정말 제가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까? 그리고 정말 내가 목숨을 건다. 그랬을 때 주님이 귀 기울여 주실 만큼 이름으로도 주님이 저를 아시고, 그리고 제가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 살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예전에는 막 살았지만 이제는 잘 살고, 예전에는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그래서 이름으로도 주님이 우리를 알고, 또 우리를 은총 받은 자로 기억하셔서 우리의 작은 신음, 부르짖어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의 도고의 기도에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그 때에 오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던 가족 구원의 놀라운 소망들이 우리 안에 다시 새롭게 불탈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아브라함을 생각하심 같이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홍수를 통해서 온 세계를 멸망시키신 하나님의 심판에 버금가는 두려운 심판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아주 매우 발달한 문명을 구가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 속에는 아브라함과 헤어진 조카 롯이 살고 있었습니다. 롯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롯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게 하였고 그래서 그는 물이 넉넉해 보이고 따라서 짐승을 기르기에 좋아 보이는 소안들을 택했고, 후에 이제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는 그 지방에서 우거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진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더 가난한 마음이 되어졌고, 그래서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고 더욱이 하나님의 큰 위로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 소돔과 고모라성의 부르짖음을 듣게 하시고 그리고 그 땅의 패역한 죄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멸망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관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와 함께 피를 나눈 조카 롯이 거기에 살고 있었고, 만약에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면 롯이 그 심판의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18장에서 간절히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그 성에 의인이 섞여있다면 멸하시겠습니까? 하면서 50이면, 40이면 하면서 내려가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관심사는 그 성의 멸망이 아니라. 그 성과 함께 죽어가는 조카 롯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우한 변형된 중보 기도가 바로 18장의 형식에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그렇게 아브라함이 매달려도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그 땅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심판은 그대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그 심판의 광경은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었으니까 이미 잘 아시겠지만 하늘에서 유황불비가 내려서 소돔과 고모라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소돔과 고모라성이 전설상의 소도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나 70년대 후반 89년대 초에 소돔과 고모라성의 흔적이 사해 밑바닥에서 발굴되기 시작함으로서 이것이 전설상의 도시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땅의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서 성들이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파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을 모두 심판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롯 한 사람을 거기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인 창세기에서 보는 롯의 그림과 그리고 베드로서는 통해서 보는 롯의 그림이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서 에서는 베드로가 롯의 경건함을 칭찬하면서 “무법한 자들의 불법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롯을 건지셨다.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살았지만 그들에게 물들지 않고 그들의 무법하고 불법한 행실을 위해 고통 하는 경건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심판 속에서도 건지셨다.” 라고 그렇게 롯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롯이 방탕한 사람이고 또 소돔과 고모라 사람과 모두 한 통속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고, 여호와께서 보낸 사자를 대하는 그의 경건한 태도를 볼 때에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건져냄을 받은 다음에 술 취하고 그리고 흐트러진 가운데 자기의 딸들과 함께 동침하는 장면에 와서는 과연 이 롯이 정말 그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무법한 자들의 불법한 행실을 인해서 고통 하던 사람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창세기와 베드로 사도의 글을 종합하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이 롯이라는 인물은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그 타락상에 비추어 볼 때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섞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절대적인 표준으로 볼 때에는 이 사람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이런 사람처럼 그렇게 탁월한 경건을 소유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오늘 여기에 보면 그 대답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하나님께서 롯을 건져내신 것이 단순한 롯 자신의 경건이나 의로움 때문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이 조카 롯을 건져내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롯을 그 심판가운데서 건져내셔서 내어보내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만약에 아브라함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혹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롯이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무엇을 기억하셨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고 하는 이 기록을 미루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첫 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신과의 친교를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는 롯 보다는 아브라함과의 친교가 탁월했고, 그리고 롯 보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훨씬 중요한 인물로 택하셔서 당신의 이름을 그 핏줄을 통해 보존하고, 또 그 핏줄을 통해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머리, 그리고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것입니다. 그 점에서 롯도 하나님이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아브라함과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서 살았던 순종하는 삶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에서 볼 때에도 롯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친교가 아브라함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 라고 할 때에 그 첫 번째는 아브라함과의 친교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다만 그 손에 의해서 지음 바 된 피조물일 따름이고 그리고 그 존재 자체의 능력과 존재 자체의 항구성도 아주 유한해서 그래서 능력으로 따지자면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고 얼마나 이 땅에 오래 있느냐고 하는 항구성으로 본다면 심겨진 나무 한 그루만큼도 오래 살지 못하고 산에 박힌 풀뿌리만큼도 오래 살지 못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알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면서 사는 그것이 지음 바 된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과 친교가 깊은 당신의 자녀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성품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에 롯이 함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심판을 받는다면 그래서 멸망해서 죽어버린다면 아파하고 괴로워할 아브라함의 마음의 고통을 헤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롯이 머물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가족을 위한 훌륭한 전도자가 되고 그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생각하셔서 그 가족들을 차마 심판하지 못하시는 그런 마음이 되도록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친교 속에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의 악한 행실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돌 같은 가슴,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 강퍅한 심령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싶으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멸망으로 우리의 가족을 데려가면 하나님 당신과 매우 사랑스러운 친교를 나누고 있는 우리가 너무 많이 아파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나님이 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이 일은 자기만은 위한 일이 아니라 또한 가족을 위한 일입니다. 아직까지도 변화 받지 않고 육신에 속한 삶을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그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믿음을 가지고 보면 가족 중 한 사람이 좋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사는 그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그 사랑받는 한 가족에 의해서 놀랍게 바뀌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족들에게 복음을 잘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라도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8장에서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어떻게 그들에게 임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그 심판을 돌이키게 하여 거기에서 롯을 건져내고자 하는 간절한 간구의 마음이 엿보이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기도를 생각하셔서 심판이 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멸하시되 그 중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건져 내셔셔 다시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가족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각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일을 통하지 않고는 단지 남편이 믿은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구원하시거나 부모가 믿은 하나님 때문에 신앙이 없는 자녀들이 구원 받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각 사람들을 건져내시는 것인데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간절히 빌어주는, 그를 위해 비는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그래서 그에게는 응답하셔서 믿음을 돈독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던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 기도를 통해서 구원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 롯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실 때에 그 롯을 거기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언제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할 때 복음을 사용하시고 그리고 그 복음이 효과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해서 구원의 역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누군가의 기도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뜻밖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절히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을 보고 여러분들은 정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 앞에 부르짖는 그 기도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나 롯을 건져내신 것처럼 지금도 수많은 믿는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 믿는 사람들의 가족들을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불비의 심판을 받고 살아남은 자 없이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멸망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날들이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예언대로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고 단기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언제 우리의 가족들을 데려가실지 알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충분한 예고 속에서 남녀가 사랑하고 아이를 갖고 하면서 태어나지만 죽음은 그러한 예고가 없이 다가오기 십상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시고 오늘 우리들이 이 땅에 살아남은 이 시간들은 그렇게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들은 그렇게 아직까지도 믿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을 위해서 더 빌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아직 우리를 이 세상에 영혼들을 섬기게 하고 남겨두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이 기도했을 때에 그 기도를 기억하셔서 롯을 살려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족들에게 조금 복음을 전해놓고 많이 불평합니다. 조금 사랑해 놓고 크게 원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족들을 향해서 아주 간단하게 “그 인간은 마음이 너무 강퍅해서 돌아올 리가 없어 우리 아버지는 강퍅한 돌덩어리야, 전해도 결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처럼 그렇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내 자신의 머리에 의지해서 하나님 없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오히려 그런 확신을 강화하는데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이것 봐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잖아. 하나님이 없으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 그러는 것이지.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직접 보여주시지 왜 이렇게 유치하게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복되다. 그러시냐? 하나님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누구의 설득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가장 나를 감동시켰던 그 하나님의 성품이 뭐냐면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때리시고 어루 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 오오 어서.
그래서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성품은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여러분도 나중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어느 순간에 그렇게 없는 것 같이 살았던 수많은 날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나를 향한 간절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을 만나고 그 환란과 시련 속에서 다시 구출 받고, 구출 받은 그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떠났을 때 다시 풍랑이 일어나고 곤고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을 때에 그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행복과, 불행, 고통과 시련, 기회와 절망, 이 모든 것들을 결국은 하나님이 주셨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속에는 하나님의 그 피어린 음성, 간절히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시는 그 간절한 울부짖음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이들을 때리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하면서 그를 옳은 길로 인도하려고 하듯이 하나님도 천애의 얼굴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그래서 우리를 수없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은 커다란 원리에 있어서는 같지만 구체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다 다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큰 환란을 주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란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하고 견질 수 없는 외로움 속에 빠지게 함으로서 비로소 이 세상은 자신의 영원한 집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가장 가슴 아프고 또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성품이 뭐냐면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나 같았으면 그렇게 오래 참았을 리가 없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 이따금씩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라고 훈계하고 가르쳐 줄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간단하게 “그는 너무 강퍅해. 돌 같은 가슴이야 그는 마치 멸망 받기로 태어난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아” 이렇게 간단하게 내리는 것은 정말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그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겸손해 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고, 왜?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데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내 동생, 우리 형, 그리고 우리 누나, 우리 누이,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 우리의 일가친척들,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과 딸들을 보면서 무엇을 보탤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서 그들의 구원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큰 맘 먹고 이번 추석에 가서는 믿는 않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마음에 각오를 하고 내려가지만 왜 그렇게 불신 가족들은 커 보이고 예수 믿는 자신은 한없이 작아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볼 때에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 돌같이 굳어진 우리 가족들의 가슴,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강철같이 차갑게 굳어버린 그의 뺨에 뜨거운 회심의 눈물을 흘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하나님이 그런 역사를 안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가족, 우리 가족보다 더 강퍅한 그런 사람들의 가슴을 녹이셔서 하나님이 변화시키시고 새 사람을 만드시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기도하는 우리의 가족들은 변화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이렇게 정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놓고 그 영혼을 위해서 애달파 하며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죄가 자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17세기의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크든민스턴에서 목회했던 리차드 백스터의 회심이라는 책을 읽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서 여러분들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얻어야만 여러분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그렇게 외쳤지만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나의 이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죽음은 다가오고 그 휘장 뒤에 지옥의 불길을 타오르는데 나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 때에 내가 우리 하나님 앞에 가서 “너 왜 혼자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솟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죄가 끊임없이 죽죠. 그래서 다른 것들에 대한 소망은 종종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죠? “아 교회를 지어야 될 터인데 이것 어떻게 하나?” 그러면 하나님이 돈 있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해 주실 수 있죠. 무슨 일이 해야 되는데 기술이 없어요. 어떤 기술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영혼을 회심시키시는 분은 내가 목회하는 교회, 내가 복음을 전하는 내 가족들,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회심시키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입니다. 그것뿐입니까? 회심한 사람이 다시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을 보면 회심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회심을 보존하면서 사는 것이 또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힘을 다해서 외치고 기회 있는 대로 예수 사랑을 증거 하지만 그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를 위함이고 하나님이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자기와 같은 더러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깨달음에서 그 가슴을 찢고 회심의 눈물이 흘러내리게 만드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구원받지 못해서 아파하는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이 목회자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바로 오늘날 믿지 아니하는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욕망이 세상적인 것이면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쉽게 인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면 사람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령한 일이라면 그 목마른 갈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이 많고 이 세상의 헛된 것들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다가도 어느 날 하나님이 내 마음을 변화시키셔서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영혼들을 보면서 뜨거운 아픔을 느끼게 할 때에 그 때에 하얗게 세상에 뭍은 욕망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 오로지 그렇게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바로 그를 위해서 그의 죄를 대신해서 매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그가 그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여름마다 무 교회 지역으로 전도를 가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몇 명을 내가 강제로 꼭 가봐라. 그리고 권해서 보냈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면 정말 우리 인간이 이 도시 속에서 얼마나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서 쓸데없는 일에 자기를 복종시키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그 영혼들이 얼마나 곤고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쌍한 영혼들인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에 전도하러 갔던 사람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7-80이 넘도록 가슴에 한을 품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던 노인네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신다면 그 그리스도를 믿고 싶다. 라는 고백을 할 때, 탯마루에 앉아서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도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야할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너무나 간단하게 우리의 가족은 마음이 강퍅하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너무나 마음이 굳어져 있다. 그래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쉽게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깊이 나를 향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그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 줄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엎으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건지신 것처럼 우리의 가족도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하나님은 언제나 이 기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혹시 오랫동안 예수 안 믿어서 아파하고 괴로워 하다가 가정 복음화의 꿈을 이룬 사람들은 한번 붙들고 간증을 들어보세요. 사람이 좋아서 교회에 나오고 인간성이 좋아서 주님을 영접한 것 같지만 그 뒤에는 정말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정말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가족이 너무 하나님 앞에 패역하고 부족하면 그렇게 매달리는 우리를 생각하셔서 우리의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지금도 구해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죽는 날까지 가족의 모든 영혼이 더 많이 사랑받고 은혜 받은 우리의 영혼인 것처럼 그렇게 끌어안고 오래 참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참고 사랑하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보다 그 영혼을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가족의 마음의 강퍅함을 능가하지 못하고, 그들이 구원 받아야 한다. 라고 하는 마음에 뜨거운 열 열함이 우리 가족들의 냉담하게 식어진 그 가슴에 냉랭함을 능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가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절에도 새롭게 우리의 가족들을 대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전해서 생명의 길로 돌아오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이제까지 우리를 그렇게 세우시기 위해서 베푸셨던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랜 꿈들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금년이 가기 전에 이런 일들이 우리의 가정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8. 전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로마서10:13-14)
누구든지 자기의 가족,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이 만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 부담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이 특별히 부르셔서 그들을 만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그 자각의 강도가 매우 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자각의 강도가 매우 흐리다. 라고 하는 차이지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면 불신자와 만났을 때, 더군다나 그 사람이 매우 사랑하는 사람일 때 말할 수 없는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각의 강도는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얼마나 연합되어 있고 깨어있느냐에 비례할 것입니다. 많이 깨어있으면 자각하는 정도가 매우 클 것이며 많이 깨어있지 못하다면 자각하는 정도가 매우 적을 것입니다.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혹은 스치다 만날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자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런 자각을 느끼게 하는 상대가 한번 만나고 다시 흩어져서 만나지 않는 그런 우연한 만남의 사람이라면 부담이 덜하겠지만 그러나 매일 반복적으로 만날 때에는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과 매우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삶 속에 들어와 버린 사람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자각이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닫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얼마나 사랑해주시는지를 더 많이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그렇게 바로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그를 만나도록 허락해주셨다. 라고 하는 자각은 점점 더 깊어져갈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그 자각이 매우 깊어져간 나머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헤아리면서 매우 고통스럽게 그 영혼을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우리 안에 계신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탄식하시는 우리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자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내 주위의 가족들, 그리고 친지들, 그리고 직장에서 반복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할 수 없는 부담감을 갖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을 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 마음의 부담을 일반적으로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담은 그들을 만나고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주실수록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부담으로 계속 남습니다. 부담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또한 우리들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과 같이 어떻게 하든지 그들에게 믿는 자로서 좋은 본이 되어서 그들 앞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하면서 조심스러워하고 여러 방면에서 많이 희생하고 양보하려고 노력을 하고 그런 불신자들의 눈에 우리들이 부덕하게 비쳐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날들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신자가 정말 신경 쓰지 않는 때는 거의 없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렇죠. 기도를 태만히 하는 때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남은 부담은 종종 우리 속에 기도를 불러일으킵니다. 때로는 열 열하게 우리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그리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기도를 거르기도 하고, 때로는 그 기도가 형식에 흐르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정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기도가 정말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은혜 때문에 간절한 기도가 되고 때로는 그러한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는 어떤 모정의 확신을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노력들은 하나님 앞에 정말 받음직한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섬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그들을 위해서 마음에 영혼 구원에 대한 부담을 간직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우리의 행실로서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도덕적인 모범이 되고 그들을 위해 많이 양보하고 사랑하고 헌신하고, 그런다고 할지라도 또 마지막 세 번째 그들을 위해서 잊지 않고 기도하고 그리고 때로는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라고 할지라도 한 가지가 없으면 그들을 위한 그런 모든 수고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 열매를 거두게 하는 결정적인 섬김이 무엇이냐 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들에게 그들이 믿어야할 사실을 말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입으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고 삶으로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입을 열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시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믿는 자에게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셔서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진정한 구원을 성취해 가신다. 라고 하는 이 복된 복음적 사실들을 그들에게 증거 하는 것을 결코 그 아름다운 행실이 대신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텔레비전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저희 중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당신네들은 정말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살았지만 너희들 때가 되면 이제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한 대씩 있는 것이 아니라. 애들 방에도, 안방에도, 마루에도 그렇게 텔레비전을 놓고 살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 온 학생들이 전부다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그 웬 가능성도 없는 이야기를 오늘 선생님이 종례시간만 길어지게 저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시나. 그랬습니다. 지금 이루어졌습니다. 텔레비전 엄청 쌉니다. 어디 전파산 앞에 가니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2만원이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뭐 개집 앞에다 갖다놓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라디오가 고작이었습니다. 그것도 켜면 한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전기 라디오, 진공관 라디오, 켜면 전파는 또 왜 그렇게 방해가 많은지 지지직 그러다가 또 기분 나쁜 날은 이북 방송도 나오고 “아바이 수령 동지께서는” 이러다가도 또 뛰뛰 땡 “대한민국에서 방송해드립니다.” 그러면서 전파가 엉키고 그랬습니다. 그 때에 저녁 시간에 되면 불도 아껴야 되니까, 그 때는 똑 특선 빼고는 다 불이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이제 다들 모여서 어머니는 바느질 하고 며느리는 숯불 담아서 후라이펜 같이 생긴 다리미로 다림질 하고 이러면서 희미한 전등불 앞에서 모두 귀를 기울이면서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탁 켰는데 춘향전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주 악질적인 변학도의 음성이 막 나오면 온 식구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분괴하죠. 발 발굽소리가 나면서 아행어사 출두요. 그러면 “야 온다.” 이러면서 우리가 유치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그 때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저희 반 학생들이 한 80명 되었는데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딱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정말 부자라서 있었고, 한 집은 텔레비전을 가지고 밥을 벌어먹고 사는 집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놓고 한번 보여주고 돈을 10원씩 20원씩 이렇게 받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별로 본적이 없으니까 그 생생하게 거기에서 효과음을 내는 발 발굽 소리가 나고 그러면 간장 종지 두개 가지고 두드리는 것인데도 진짜 벌판이 느껴지면서 먼지가 나고 깃발이 휘날리면서 진짜 새카만 말이 달려오는 것 같이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지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뭐냐면 우리가 아름다운 행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고 빛으로 나타나야 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아주 찬란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주석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본문만 딱 써 놓고 각주가 없어도 이해가 가지만 그런데 물론 각주까지 읽으면 이해가 더 풍부해집니다. 이번에 “마음지킴의 교리” 하면서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 각주를 제가 1년 동안 쓴 것입니다. 그렇게 연구를 해서 써 놓으면 이해가 굉장히 깊어지고 한권의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 권을 공부하면 7권정도 읽은 것 같은 맞잡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왜? 필요한 것만 거기에다 집어넣으니까 실제로 여러분이 공부한 마음 지킴의 교리는 10대 8이었습니다. 본문이 10이고 각주가 8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 밑의 분량이 책 한권 분량이었습니다. 그것도 두꺼운 책 한권 분량이었습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각주를 이해하면 본문만 읽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연관관계를 다 이해하면서 아주 풍부한 이해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분면하게 말하고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아주 분명하고 명증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살면 정확한 본문에 풍부한 해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을 갖다 주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간단한 분이 아니라고 하는 인상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만 있고, 분명하게 전파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각주는 풍부하게 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 하다가 이 얘기가 나왔는지 본문이 없이 매달려 있는 각주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직접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주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유명한 아나운서였는데 한번 간증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분 간증이 오늘 이 성경 구절하고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집니다. 자기는 날 날이 그리스도인으로 그렇게 예배시간에 참석했다가 목사님 설교만 끝나면 약속시간 때문에 살그머니 빠져나오고 교회 늦게 가기를 밥 먹듯 하고 그랬는데 술도 마시고 그랬었는데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래 은혜를 받고 보니까 이제 하나님이 자신에게 전도하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골목에 살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은 대게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주택을 크게 디귿자로 지어놓고 사람들이 여러 가구가 한 마당에 있으면서 같이 살았잖아요. 기억나죠. 그런데 디귿자로 된 집이었습니다. 쭉 돌아가면서 대 여섯 가구가 같이 살아요. 그런데 이제 다섯 가구가 사는데 자기가 예수를 믿고 그다음에 건너편 집에 있는 사람이 믿어요. 그런데 그 중간에 안 믿는 사람들이 섞여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예수 믿고 보니까 간절한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옆집에 자주 만나는 아주머니를 전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간절히 기도하고 그다음부터 저 사람에게 본이 되어야 되겠다. 생각하고 가서 옛날보다 인사도 더 공손하게 하고 국이라도 끓이면, 반찬이라도 있으면 갖다 주고, 그리고 걸레를 빨면 같이 동무해서 빨고 말이죠. 이렇게 마당도 쓸면 그쪽 집을 신경 써서 쓸어주고 이렇게 많은 본이 되어야 되겠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어느 날 감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열심히 기도하는데 건너편에 있는 사람은 말이죠.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자기는 장로교를 다니고 그 사람은 순 복음 교회를 다니는데 이 사람은 매일 동네방네 다니면서 돈 꿔서 안 갚고, (뭐 없으니까 안 갚겠죠.) 그리고 하여튼 수다스럽고 그리고 두부장사하고 가끔 싸우고 말이죠. 골목을 떠나가라 소리 지르면서 싸우고 그래서 이 사람은 정말 창피했대요. 그리고 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저렇게 가리는데 하나님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말이지 내가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자기가 가서 뭐라고 할 수는 없고 말이죠. 저렇게 행동하면 누가 예수를 믿겠나. 아, 그런데 자기가 그 사람을 마음속에 찍어놓고 계속해서 전도하려고 기도하는데 조금씩 그 사람의 마음이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에 대해서 동네에서 다 ( ? )그리고 심지어 가지가 마음에 찍어놓은 그 사람도 그 사람 말이지 예수 믿는다고 말이지 동네방네 광고하고 그러면서 삶이 그렇게 부실한 것에 대해서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아 그래서 자기가 용기를 내서 “교회에 갑시다.” 한두 번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했는데 “아 아빠서요.” 그러더래요. 안 간다. 그러더래요. 그러더니 어느 날 진짜 열 받을 일이 생겼는데 그 교회에 가서 등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냐 자기는 그렇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했는데 그 사람은 단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살아계시다. 내가 만났다.” 이 여자가 완전히 물동이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간 사마리아 여인같이 그렇게. 사실 사마리아 여인이 그 순간 약간 맛이 간 것입니다. 자기가 동네사람 창피해서 아무도 물 안 길으러 오는 그 시간에 아서 물을 길었는데 은혜를 받고나니까 이 사람이 맛이 간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어마나 창피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와 봐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그리고 막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게 단기전으로 승부한 사마리아 여인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아마 그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만 변화되고 아름다운 행실로서만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더라면 아직까지도 못 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내가 물어보겠습니다. 1년 전보다 놀랍게 거룩해 졌소? 또 저 쪽에 물어보겠습니다. 6개월 전보다 정말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럴 정도로 새것이 되었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더 나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겠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지만 정말 우리의 행실과 말 한 마디, 인격하나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서 그래서 우리를 보는 사람마다 주님 보는 듯 하게 될 정도로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천국복음은 완전한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진실한 삶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감화를 끼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목적이라기보다는 결과적인 효과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 닮고 싶어 하시죠? 우리 가족을 위해서요, 동네 사람에게 감화를 주려고, 사람들 전도하려고, 전도용 성화.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하나 물어봅시다. 그것이 성화의 목적이라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하나만 무인도에 살아있다면 성화도 필요 없겠네. 그 효과를 믿을 사람이 없잖아요. 누구보라고 성화되느냐고요. 우리를 보고 영광 돌릴 사람이 없는데 그러면 거기에 개처럼 살아도 됩니까? 무인도의 강아지처럼 안 되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의 착한 행실로서 하나님께 영광들 돌리게 하라”는 것은 그것이 목표라는 것이 아니라. 효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난주에 설교한 것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자리에다 나를 갖다 놓고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려고, 살려고 애를 쓰니까 내가 거룩해지고 그렇게 내가 변화되어 가고 같은 세상에 살아도 자기와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되고 그런 삶을 추구하도록 움직인 것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결과적인 효과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성화되는 것도 아니고, 전도용 성화를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화 되면 하나님이 전도에도 사용하실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셔서 악인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고난당하는 의인에게는 격려를 주실 것입니다. 그렇죠? 그렇지만 그런 목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인도에 홀로 살아있어도 우리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행복이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것이고 그다음에는 분명하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너는 지금 이런 사람이고 하나님은 너를 이렇게 구원하려고 하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들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들죠? 그런데 왜 아까 전기 라디오 얘기는 하다가 맙니까? 이제 여기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어지느냐면 이것입니다. 그 텔레비전도 없는 시대에 온 가족이 그 전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면서 연속극을 들으면서 그 연속극을 이해하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습니다. 충분히 연속극을 이해했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여러분들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서 영화를 보라면 하나는 연속극이 드라마인데 그렇게 옛날의 전기 라디오처럼 선명한 효과음이 나오고 음성이 들리는 라디오를 통해서 연속극을 듣겠느냐? 소리 안 나는 텔레비전을 보겠느냐?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차라리 그림 없는 라디오를 듣고 이해하는 것이 낫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분명한 복음의 전파가 없는 전파함이 없는 아름다운 삶은 소리 나지 않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은 마치 화면은 나오지 않지만 또렷하게 음성이 들리는 라디오의 스피커와 갔습니다. 그러니까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복음을 전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구원 받을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름 받는 의미는 뭐냐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이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무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였다. 그분이 바로 너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너희의 죄는 정말 하늘을 찌르는 듯 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너희가 죽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가슴을 치니까 그러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죄 사함을 얻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 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그분을 전 생애 적으로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꼭 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 구원자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을 이 죄에서 사망의 형벌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짖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바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오는 것, 예수를 믿는 나와 좋은 관계를 갖는것,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느낌을 갖고 우호적인 생각을 갖는 것, 그런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는 것입니까? 듣는데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듣는 것을 통하지 않고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기독교를 충격적인 종교로 소개하는 것이 복음 전파의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을 잘 이해시켜서 그래서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분히 들릴 수 있도록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들을 때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 가지 경로로 우리들이 모두 다 새 가족 반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어떻게 하든지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는 이미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 믿음의 길에서 뒤돌아서지 않지만 그러나 내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믿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왜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모두 다 핍박의 먹구름이 가득한 고통스러운 시기인데 그런데 신자 속에는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분사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꿈틀거리며 역사하는 그런 소망으로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볼 때에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 너 왜 그렇게 살아있는 소망이 너 안에 있냐?” 이렇게 물어볼 때에 왜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잘 정리된 지식으로 정확한 복음을, 그것은 많이 배워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작은 것이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그들은 들을 수 있고, 들을 때에 비로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듣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세 번째 논리는 뭐냐면 부르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들어야 하는데 듣기 위해서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태도가 어떤지, 그리고 그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갖게 될지는 복음이 정직하게 그들에게 제시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늘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좋아하고 그 속에서 익숙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복음과 화해하지 못하고 복음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있는가 하면 교회에 대해서 반대하고 신자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정확하게 증거 할 때 “아멘” 하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영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선교사가 그런 간증을 한번 했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있었던 일인데 뭐 그 당시에 유교시대고 하니까 꼭 유교를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어떤 기독교 하면 외래 종교라는 것 때문에 들어보지도 않고 모두 배척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배척을 받다가 선교사 한 사람이 다행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정말 고루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선비에게 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종교의 도리를 가르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상세하게 한 시간을 잘 가르치고 나니까 그 사람 하는 말이 뭐냐면 “거 다 듣고 보니까 진짜 사람답게 사는 참 길이 성경에 다 있구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를 접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에 관한 어떤 인상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평가하고 그것도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느낌을 가지고 기독교 전체에 대해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전도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교회 한번 갑시다. 우리 교회 가면 참 좋아. 거기 가면 참 재미있어. 아는 사람도 많고.” 이런 정도로 했지 진짜로 그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고, 당신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야할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직하게 제시 받아본 적은 별로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따라서 무한정 길게 장기전을 펼쳐야지만 우리 가족들이 구원을 얻고 또 내 주위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로부터 충분히 감화를 받아야지만 예수를 믿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아직까지도 이렇게 당신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직장의 누구, 누구는 그렇게 같이 오랫동안 직장에 근무하셨다면서 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으십니까?” 항상 하는 말이 뭐냐면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그런데 사실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참 재미있습니다. 전도학교를 지금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도학교를 하면 들어가서 자기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전하고 싶어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눈물나게 불쌍해서가 아니라. 하루에 서너 명에게 전도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누구에게 전하겠습니까. 자기 부인은 교회에 나오고 애들도 교회에 나오니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이모도 찾아가고, 고모도 찾아가고, 생전 안 찾아가던 사람들이죠. 그리고 뭐 하수도를 고치러 온 사람도 만나고 뭐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하면서 또 수시로 그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내가 전도용 성화가 많이 되었다고 이렇게 보여주고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숙제 하느라고 가서 “나에게 딱 5분만 시간을 내주세요. 이모” “뭔데” “그냥 만나고 싶어서 가는데 이모얘기 내가 한 시간 들어주고 맛있는 것도 사가지고 갈 테니까 딱 5분만 내 얘기 들어주면 내가 저녁 사줄게” 뭘 얘기해도 5분을 못 듣겠습니까. 그래서 “그래라.” 그리고 다 얘기를 들은 다음에 딱 5분 그 대신 5분 동안은 일어나면 안 돼 그러면서 5분 동안 예수 믿는 도를 간단간단하게 증거 하는데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렇게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기의 구원자로 부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전도용 성화가 되었다. 라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복음을, 진짜 복음의 정확한 내용을 그들에게 제시해 보여주는 것이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항상 별로 또 같이 가야할 그런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죠. 우리 전도학교 같은 데서 보면 하도 숙제를 하라고 하니까 직장 다니다가 밤늦게까지 할 사이가 없어서 가만히 보니까 예수 안 믿는 아들, 하나를 밤늦게 저 위 옆방에서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데 저놈에게라도 숙제를 하고 가야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야, 이리 와봐라.” “왜요.” 그러니까 야, 너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5분만 엄마 얘기 좀 들어봐라. 그리고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니까 유치 부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아이가 거기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내가 굳게 믿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고 영접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런 역사는 진짜 자기 자신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본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훌륭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결코 우리가 입을 열어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을 절대 대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까지 제자들은 숨어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래서 숨어들어간 곳이 마가의 다락방 아닙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기도하죠. 그렇죠?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서 기도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그러면 당시 예루살렘 눈에 사도 베드로는 누구였습니까? 당시 그 유대인들의 눈에 요한이 누구였습니까? 시몬 베드로는 누구였습니까? 야보고는 누구였습니까? 사실 그들에게 그렇게 사도들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였습니까? 사실 솔직히 예루살렘 사람이나 유대 사람들이 “저 사도들이 그 동안 성화가 많이 되었나? 어떻게 예수님 믿는다더니 옛날 그 더러운 기질들은 좀 많이 사라지고 어떻게 전도용 성화가 많이 되었나?” 그런 것 사실 그 사람들은 있는 줄도 몰랐고, 또 그렇게 관심을 끌만큼 그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 같은 경우는 어땠습니까? 못난이 바보 깡통, 그렇게 불렸을 것입니다. 왜? 지조도 없이 예수 따라 다닌다고 그러더니 예수님 잡아가니까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고 그렇게 깝죽거리고 하더니 그다음에 정작 대제사장의 뜰에 와서는 “너 예수님과 한 일행이지?” 그러니까 부인하면서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고 그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하나님이 마지막에 십자가에 그래도 제일먼저 회개하고 돌아온 요한도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베드로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제일먼저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강림 이후에. 그랬더니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사실 성화가 전도에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할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들이 벌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실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우리가 성화를 통한 전도가 아무리 훌륭하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 거룩함의 효과라고 할지라도 그것 보다는 죄인들을 각성시키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보여주어서 십자가 앞에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게 만드는 힘은 그것보다도 직접적인 복음 전파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선교의 역사를 전수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 원리가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을 말해야합니다. 최악의 경우 복음을 전하고 돌아섰을 때 여러분들 보고 “미친놈, 못난 인간” 이렇게 밖에 이야기를 더하겠습니까. 그 때 기뻐하세요. 하늘나라에 여러분들의 상급이 쌓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자격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신의 자격으로 여러분들이 전하는 것입니다. 설마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여러분들의 가까이에 있는 이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여러분들에게 따귀를 때리겠습니까? 따귀를 좀 때리면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니까 막 두들겨 패고 그랬더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것을 인해서 기뻐하였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모르겠다. 그러면 전도학교라도 들어가세요. 모르는데 어떻게 합니까. 전도학교에 들어가서 그것, 1주일에 한번만 나와서 몇 번만 들으면 되는데 그냥 가르쳐주겠다는데 배워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러면서 일생을 살아서 자신은 매일 매일 하나님 믿으면서 그냥 살았는데 수시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살아온 인생길 자체가 강물에 떠내려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건지게 하는 밧줄을 던지는 인생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그 사람의 인생을 기뻐하실지. 그런 아무 노력도 없이 묵묵히 불순종하며 자기 길만 쓰러지다 엎어지다 하면서 걸어갔던 사람들의 삶과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 받으심에 있어서 그 두 사람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대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인 됨과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고통 하는 인간의 처지와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구원자로서 오셨다는 것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하며 살 것을 전파해서 수많은 구원의 역사가 이 가을에 여러분들의 주위에서 맺혀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가족구원을 위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