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기원: 한 인간의 죄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진행을 하겠습니다.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지난 시간을 포함해서 이제까지 이야기되었던 것을 간략하게 간추리고 이번시간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지난 시간 살펴본 것은, 인간의 많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죄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며 그리고 인간세상에서 경험하는 악과 고통은 바로 그런 질병에 걸린 것이 증상으로 몸과 온 영혼과 삶에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 때문인데 그 죽음이라는 질병은 죄라고 하는 병균이 옮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무엇이냐 그랬을 때 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워놓으신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벗어나거나 그래서 불순종하거나 혹은 그 기준을 이행함에 있어서 모자랄 때 그것을 우리들이 죄라고 부르고, 그 죄의 불순종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생각하셨던 절대의존의 관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바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사는 것 그렇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니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가족관계 속에서 하늘은 천사들이 그리고 땅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존재하여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땅에는 인간들을 두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인간들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해 나아가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 죄의 문제인데 성경은 분명하게 처음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인간 안에도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 안에도 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무죄한 상태라고 우리들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무죄한 상태에서 어떻게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죄에 감염이 되어서 그래서 온 인류가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결국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악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행복해 지려고 애를 쓰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악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한 사람의 죄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죄로부터 시작이 돼서 그 죄가 온 인류에게 예외 없이 밀려들어와서 그 죄라는 병균에 모두 감염이 되어서 엄청난 죽음의 세력 앞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그때 무슨 바른생활 교과서쯤인가 그런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이 하나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보니까 댐이 조그만 구멍이 생겨서 물이 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데 너무 인가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알릴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막았더니 주먹이 들어가고 주먹이 들어가더니 팔이 들어가고 팔이 들어가더니 온 몸으로 막았는데 그때 마침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막아서 마을을 구했다고 하는 대충 제 기억에 그런 스토리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댐에 나는 작은 구멍을 그렇게 두려워했을까요? 작은 구멍이지만 그것이 점점 순식간에 커져서 커다란 구멍이 되면 이미 벌써 물이 댐을 잔뜩 밀고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둑이 터지게 되고 터지게 되면 그 엄청나게 고였던 물이 한 번에 동네를 향해서 밀려들어와서 모든 것을 물에 잠기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댐을 애써서 지키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똑같이 성경은 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그때에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서 마치 댐이 터지고 한 번에 물이 밀려들어와서 온 세상을 덮어버린 홍수처럼 그렇게 죄가 온 인류를 덮게 되었다고 그렇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좀 더 우리들이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는 단순히 다른 짐승들과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을 창조하는 방법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친히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창조하심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다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의 명령을 주시는데 첫 번째 주신 명령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이야기는 생식을 통해서 자손들이 많이 번져나가라는 것이 틀림이 없고, 정복하라는 말의 의미인데, 이것은 적군과 싸우면서 정복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적군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이고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의 지시에 잘 순종하는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과의 어떤 갈등관계나 이런 것들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한 예로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대로 아담 앞에 나오니까 그 아담이 이름을 붙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관계 자체가 갈등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싸움 싸우듯이 정복해 나가는 것 그런 성질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냐? 사람들이 퍼져서 땅에 많게 될 때 그것이 단지 생식해서 수만 많아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창조되어서 하나님이 날 여기에 왜 만들어놓으시고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다는 것을 아담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또 순종하면서 한동안 살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모든 자손들에게 그것이 그대로 전수가 되고 그리고 아담 한 사람이 창조 세계의 관리자가 되어서 창조세계 전체가 이 아담을 비롯해서 창조세계 전체가 함께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지상의 세계를 형성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처럼 그렇게 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돌보는 것 그것이 정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좀 어려운 말로 문화명령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혹은 노동명령이라고도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정복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고 그렇다는 면에서 문화명령이고, 그런 것들이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그것을 노동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노동의 문제가 나오는데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것 같습니까? 노동이 죄의 결과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주신 선물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노동 자체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인생을 고달프게 만드는 한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노동을 하는가 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가 교회에 다닐 때 어느 분이 그렇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희들이 왜 이렇게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고 또 어른들은 직장 다니고 이렇게 고달프게 사는 줄 아느냐? 모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다. 만약에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면 너희들이 지금 에덴동산에서 그냥 계속 놀고 있을 텐데 참 불쌍하다. 조상 잘못만나서 고생이 많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노동 그 자체는 하나님의 형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노동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까 말씀드린 그 이름을 붙이는 작업 같은 것, 그것도 얼마나 많이 인간의 노동이 필요한 것이었습니까? 다만 노동했을 때에 인간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단함, 피곤함, 괴로움 이런 것들이 죄의 결과이지 노동 그 자체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가도 노동해야 합니다. 땅을 갈고 비료를 주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어떻게 우리들이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노동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문화명령 혹은 노동명령을 주시는데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명령을 주시는데 이것을 종교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다 창조해 놓으시고 그 다음에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시는 나무를 하나 두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리켜서 선악과라고 합니다. 이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실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나무 자체는 특별한 나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두고두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시빗거리가 됩니다. “그것을 왜 거기 만드셨나? 안 만들었으면 우리가 안 따먹을 것이고 안 따먹었으면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고 범죄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아직까지 행복하게 살 텐데 아니 먹고 싶게끔 심어놓으시고 그리고 인간이 결국은 따먹고 범죄해서 하나님 멀리 떠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거가지고 시비를 걸고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말씀드리면 이해가 확 풀릴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결론부터 내리고 풀어가겠습니다.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선악과가 인간을 타락시킨 게 아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선악과는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올바로 이 선악과를 사용했으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신 본래의 목적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하는 이 생활을 오히려 더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은혜의 수단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비록 죄가 없이 완전한 인간이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들어진 이 인간 안에는 하나님이 법을 집어넣으셨는데 그 법이 무엇이냐 하면 실효적으로 이 속에서 움직이는 법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은 속에서 술이 땅깁니다. 이게 속에 법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생활 많이 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안 하면 괴롭습니다. 기도가 땅깁니다. 기도가 땅긴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기도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이 속에서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을 하나님이 넣어주셨는데 무슨 법을 넣어주셨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렇게 살고 싶은 법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었기 때문에 완전했습니다. 그런데 완전했지만 안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완전했지만 그 완전의 상태가 절대적이어서 절대로 범죄할 수 없다든지 절대로 유혹에 넘어갈 수 없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는 하나님에게나 있는 상태이지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과 똑같이 지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아니었고, 그래서 완전하기는 했지만 안전한 인간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법이 강력하게 이 사람 속에 있었고 죄는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고만 마음먹으면 지금 우리들이 순종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법을 어기니까 하나님이 그 다음에는 마음 바깥에다 법을 하나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본성 속에 넣으셨는데 이것은 마음 바깥에다 만드셔서 이것을 돌에다가 새기셨습니다. 이것을 율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이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밖에 나왔는데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 속에 이번에는 죄의 법이 존재 존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강한지 겁날 정도로 강한 것입니다. 제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예수 믿고 4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골초였습니다. 한 갑반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를 제가 못 느꼈습니다. 철이 없어서.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별짓 다 했는데 안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금단현상이 오는데 한 열흘 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겠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끊고 은혜 받은 신자가 돼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직장에 가려고 좌석버스를 탔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담배를 아침에 푹 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내가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앞으로 가서 '흠 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언제였냐 하면 담배 끊은 지 3년 반이 됐는데 내가 그러고 살았다 이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속에 이 흡연이라는 법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 죄를 좋아하는 법이 이렇게 흐릅니다. 이 속에 죄의 법이 있는데 바깥에 세워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받아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될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이것 치워버리시고 이 안에다 다시 법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하는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여기는 하나님의 법이 있고 죄는 없었는데 여기는 하나님의 법이 강력하게 있는데 죄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순종하는 것보다 아담이 순종하기가 훨씬 더 쉬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바보같이 얼마든지 안 따먹을 수 있었는데 따먹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넘어지게 만든 도구가 아니라 얼마든지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었겠느냐?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기는 했지만 안전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런 게 없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회사를 다니는데 한 사람은 사장이고 한 사람은 전무이자 상무이자 직원이라고 합시다. 둘이 하니까. 그런데 그래가지고 일을 하는데 사장님이 잠깐 외출했을 때는 여러분들이 이 회사가 내가 최고 책임자라는 생각이 안 들지만 사장님이 출장을 가서 한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년, 삼년쯤 안 온다고 하면 여러분이 그 회사의 사장이라는 생각이 들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한 오년쯤 있다가 오면 사장이 와서 너 앉은 자리 비키라고 하고 앉아서 “야, 임마, 이것 해. 저것 해.” 막 시키면 짜증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인간이 그만큼 쉽게 자기 위치를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땅이 굉장히 넓고 하나님이 많은 우주만물들을 창조해 놓으셨는데 다 자기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는 일이 쉬웠겠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선악과가 아니었으면 다른 방법으로 더 빨리 타락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이 많은 세계에 어디를 가도 짐승이든지 새든지 사람은 없지만 뭐든지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왕같이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때 잠시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만 오면 나무가 하나 딱 서있는데 이 나무를 볼 때마다 누가 생각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 그거 따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을 맘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이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들과 함께 한 창조세계의 동창생이고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이 많은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있지만 그러나 신분상으로 말하자면 자기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 선악과를 보면서 확인하게 될 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싶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싶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비 거리는 성경을 몰라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다 쓸데없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예수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 이야기라 이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했더라면 은혜의 수단이 됐는데 이것을 따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명령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이 명령을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언약인데 사실 이 말이 참 애매한 말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말로 약속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말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베리트’라는 히브리말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베리트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근동에 있는 다른 아카드제국이나 이런데서 온 말들을 연구를 해 보면 대개 ‘바리투’라는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 족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두 사람이 있는데 각각 따로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묶어버리는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을 통해서 관계가 없었던 두 사람이 하나로 묶여버리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약이 아니라 사실은 그래서 신학에서는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계약 그러면 우리들은 자꾸 전세계약 사글세계약 그런 게 생각이 나니까, 그런데 사실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전세 놓고 사글세 들고 그럴 일을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계약이라는 말이 너무 대등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언약은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와서 내가 너 뭐 해줄게 이런 식이 되니까, 이것도 사실은 정확한 개념이 아니고 이것도 정확한 개념이 아닌데, 하여튼 양쪽이 무엇인가 의무와 복종의 관계가 있고 권리가 있는 그렇게 맺어지는 관계 수립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종교명령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신 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어떤 행위를 금지한 것인데 그래서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면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냐? 첫째는 언약을 맺으신 그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그 다음에 언약의 조건은 무엇이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이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보시고 하나님은 은혜를 내리시고, 이렇게 해서 하늘자원을 힘입어서 살아갈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위반 시에는 어떻게 되느냐? 위반 시에는, 선악과를 만약에 따먹을 경우에는 깨뜨려지고 그 다음에 죽음이 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약속, 종교명령을 가져온 행위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악과가 그렇다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아니 그 할아버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왜 내가 책임져야 하느냐, 나는 선악과 맛도 못보고 껍데기도 못 먹었는데 왜 먹기는 그 할아버지가 먹고 우리가 이렇게 뼈 빠지게 이 세상에서 노동을 하고 고단하고 죄라는 병원체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고 그래서 이렇게 악과 고통 속에서 시달리면서 살아야 되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이해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세상 끝날까지를 놓고 볼 때에 이 세상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 둘이 나타납니다. 처음 나타난 사람이 아담이라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 나타나신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분입니다. 물론 아담은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사람이신 분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 아담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이 아담이 또 예수님이 각각 혼자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끌어안고 그 끌어안은 상태에서 연관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표자였다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이냐 하면 두 번째 아담입니다. 그래서 이 아담이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을 때,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안 먹으면 네가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을 때, 계약의 성격을 가진 언약을 맺었을 때, 이 아담은 개인의 자격으로 이 언약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 끌어안은 사람의 대표자로서 여기에 참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범죄하게 되자 이렇게 아담 안에서 다 연결되어 있던 사람이, 이 아담과 다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삽시간에 온 몸 전체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류의 머리였다는 말입니다.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한자말로 요약을 하자면 내포적인, 내포하고 있는, 유기적인 대표자로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결과가 한꺼번에 미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더러운 음식을 먹으면 우리들이 질병이 걸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발이 그것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입이 먹었는데 그게 온 몸에 다 악영향을 주는 것처럼 이 아담이 질병에 그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래도 섭섭할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왜 먹었을까?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먹었지만 나는 안 먹었는데.” 계속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 그런 불편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우선 첫째 무엇이냐 하면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이 명령은 많은 신학자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명령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일정기간동안 하나님이 시험한 것인데 이 시험을 만약에 아담이 통과했더라면 그러면 우리도 계속해서 낙원에 있었을 것입니다. 죄가 없는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선악과 먹고 싶은 것 침 삼켜보고 참은 적 있느냐 말입니다. 그런 것 안 참았어도 우리가 아담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다 아직까지도 영생을 누리며 살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아담이 잘못했을 때에 우리에게 형벌이 이르게 된 것,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된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불공정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의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구원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이 있는데 이 일이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많이 고난을 받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곁에서 우리도 피한방울 흘려본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룬 사람으로서 이해하시고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격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 십자가 지는데 보태준 것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덕분에 구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 모두를 끌어안고 그들과 이런 유기적인 연관을 이룬 상태에서 그들의 대표로 우리들의 대표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형벌을 받을 때 그 형벌이 내가 받은 형벌이 되는 것이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실 때 그게 내가 살아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표원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이 사건이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그 품에 끌어안고 대신 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 죄로 말미암아서 물밀듯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라는 병원체가 그 아담 속으로 들어와서 그 태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전부 다 뱃속에서부터 그 죄에 감염된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태어난 다음에 죄를 품고 태어났으니까 그러니까 그 죄가 이 속에서 자라서 꽃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실질적인 악입니다. 그 악이 다시 죄를 낳고 이렇게 해서 인간이 안팎으로 죄에 말하자면 휘감긴 상태가 된 채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살아야할 본분에서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가는 막돼먹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인류의 불행이 궁극적 질병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무엇이냐 하면 물어봐야 대답도 안 해주시겠지만, 할아버지 왜 따먹었습니까? 왜 그것을 좀 참으시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모자라는 게 뭐가 있었습니까? 다 있었습니다. 그 창조 세계를 다 줘버렸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제왕의 영광을 다 합쳐도 아담의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왜 그러셨을까? 왜 그러셨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냐 하면 물론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뱀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몇 년 전에 여름 수련회를 교인들을 다 데리고 갔습니다. 기도원에 장로님이 내려오셔서 교인들에게 광고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철조망 있는 쪽으로 가지마라는 것입니다. 거기 뱀이 굉장히 많다고. 그랬더니 그 광고를 듣더니 여자성도님들은 ‘으악’ 이러는데 남자 성도님 몇 분은 ‘뱀이 정말 있다는 말입니까?’ 굉장히 아주 반가운 소식처럼. 뱀에 대해서 크리스천들이 상당히 저항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그럴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뱀은 사단 자체라기보다는 사단의 도구였습니다.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가 되어서 뱀이 유혹을 한 것입니다. 이게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 유혹이. 여기 아담이 있었단 말입니다. 멍한 아담이. 하와도 있고. 하와가 당사자가 된 것이지요. 아담을 공격을 하지 않고 하와를 먼저 공격을 했습니다. 이쪽이 훨씬 쉬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하여튼 하와를 먼저 공격을 했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냐?" 하나님이 안타깝게 물으니까 "뱀이 나를 꼬였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 쓸데없는 변명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이 안에다가 집어넣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죄 같은 것을 확 집어넣는 그런 게 아닙니다. 유혹은 뭐냐 하면 자기도 모르지만 있었는데 혹은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유혹을 통해서 그것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혹이 가지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유혹을 했을 때에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따먹고 싶은 마음이 이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담도 아무리 변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데, 그러면 ‘왜 이것을 따먹으려고 하는 마음이 여기에 있었을까?’ 이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날 첫 시간에 잠깐 다루었는데 인간에게는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독립해서 혼자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충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존재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설명 잠깐 드렸지만 온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비가 오면 식물이 자라고 식물이 잎이 떨어지면 땅이 기름져지고 기름져지면 벌레들이 살고 벌레들이 살면 새들이 먹고 이렇게 다 연결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 연결된 속에서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의지하면서 모든 유기적 관계 속에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사는 게 싫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독립하고자 하는 욕망인데 이 독립성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있었는데 그것을 이 유혹이 끌어낸 것입니다. 속에 조금 있는 것을 유혹을 계속 하면 이게 커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계속 유혹을 하면 그것이 바깥으로 콱 튀어나오면서 실질적인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 어려서부터 성교육을 시키는데 물론 너무 무지하니까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될 게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에,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꾸 자극을 하면 없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자극을 계속 가하면 유혹을 계속 하면 그게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게 점점 커져서 그 사람 안에 그것으로만 꽉 차버립니다. 어느 순간에 펑 하고 터집니다. 그러면 범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욕이든지 권력욕이든지 뭐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이 속에 있는 것을 끌어낸 것입니다. 뱀이 유혹을 통해서. 그러고 나니까 인간은 철저하게 죄를 범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고 죄가 물밀듯이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짓게 되고 그렇게 되니까 그 죄가 들어오게 되자 엄청난 결과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만지작거리면서 따먹었을 때는 설마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죄의 결과란 말입니다. 죄의 결과가 엄청나게 일어났는데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단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있어서 여기에 잇대어서 하나님이 위로부터 계속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자원들을 공급해 주심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창조해 놓으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끊어져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더 이상 하늘로부터 이것들이 공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창조주인줄을 알아보고 그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엄청난 두려움과 죄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로막은 게 이게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입니다. 하나님과 자기를 원수처럼 여기는 게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본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인간이 가지게 되어서 인간과 죄가 서로 분리가 안 되고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이 인간도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친구가 두렵습니까? 적이 두렵습니까? 적이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친구와 같았었는데 죄가 들어온 다음서부터는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는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더니 “제가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걸리면 죽어.”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죄가 들어오니까 스스로 하나님과 적대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러니까 하나님께 두려운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숨어버린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인간이 가장 소중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늘자원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 믿고 새 사람이 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미움과 증오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놓고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안 좋아서 그를 잠들게 한 다음에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데려오시는데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무엇 중의 무엇이라는 표현은 영어에서도 그렇듯이 히브리문학에서는 베스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최고. 무엇 중의 무엇. ‘왕 중의 왕’ 그러면 최고의 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자 중의 여자’ 그러면 가장 못생긴 여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남자 중의 남자’ 그러면 아주 쩨쩨하고 야비한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늠름하고 배포가 크고, 말하자면 권위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의 사랑의 고백이 없습니다. “난 네가 좋아, 난 네가 필요해, 나는 너 없이는 조금밖에 못살 것 같아.”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삼류입니다. 일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단순히 “너 없이 못살겠다.” 그게 아닙니다. “너는 나의 일부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이런 사랑의 고백이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싸움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싸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이외의 어떤 문헌에 보면 왜 아담이, 하와는 철이 없어서 그랬다고 해도 아담은 왜 먹었을까 그랬더니 어떤 분은 성경 이외의 문헌의 예를 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담이 먹으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여보 당신이 지금 먹으면 죽는 그 선악과를 먹은 거야? 그러면 당신 죽을 거 아냐? 당신 없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혼자 살겠어? 나도 죽을 거야.” 그리고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헌이 맞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사랑이 그렇게 지극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었습니다. 진짜 성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까지는 안 나오지만 갈등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난 다음에 3장에 가니까 하나님이 “너 왜 따먹었느냐?” 하와한테 물어보니까 “뱀이 꼬였습니다.” “아담 너는 왜 따먹었느냐?” 그랬더니 이 사람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그 여자가”, 거기까지 전부 다 하나님 탓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줌으로’, 그것도 자기 탓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여자 탓이고, “내가 먹었나이다.”, “나도 사실 잘못을 안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여자가 나한테 입에 넣어주었는데 그 여자를 만드신 분은 당신 아닙니까? 그러니까 왜 나만 가지고 자꾸 그래요? 왜 나만 갖고 그렇게 문책하듯이 물어보지 마세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면서 미움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똑같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면 절대로 사람과의 관계에 평안이 없습니다. 반드시 깨뜨려집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가 보면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미끄러지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부부관계의 불화입니다. 집안이 다 콩가루 집안이 되가지고 다 각기 살고, 맨날 와서 못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은혜 받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게 뭐냐 하면 부부가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 맺었던 형제들이 화해하고, 엄마아빠를 미워하던 자식들이 엄마 아빠를 용서하고, 자식들과 등 돌리고 살았던 엄마아빠들이 회개하고 자녀들과 화해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자연과 함께 잘 어울려 살았는데 이제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자기와의 관계까지도 모두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참한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