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지 창조(1)
녹취자: 허혜숙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1(2023.04.30. 구역공과)
우리가 배울 것이 천지창조인데 사실은 이 천지창조 1장이 구원론이라는 토대를 놓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요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인데 그것이 창세기 1장 1절위에 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차근차근 배워보면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에 관해서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것은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지혜가 깨기 시작되면서부터 탐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상대적으로 동양이라고 하는데 메소포타미아 말고 동북아 쪽에서 한국, 중국, 일본 이런 곳에서는 사실 창조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쪽 사람들은 대게 살아가는 것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니까 무엇인가 본질을 생각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만 사는 것이 편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햇빛이 나면 자라가 두고 가을이 되면 거두어들이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가 농업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농업도 했지만 에게 문명과 크레타 문명을 중심으로 무역을 활발하게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만 그대로 믿으면 낭패를 만납니다. 왜? 무역을 하고 장사를 할 때는 상대방이 속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저 말 뒤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눈에 보이는 이 물건이 가짜는 아닐까? 이렇게 자꾸 하다 보니까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동북아 철학과 그리스 철학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당연히 거기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가 왜 생겨났을까? 누가 이것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일자’라는 가상의 신적인 존재가 있는데 그 신적인 존재의 신성이 밖으로 흘러넘쳐서 이 세계가 된 것이라고 보았고 후에 그 후계자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신의 성품이 흘러넘쳐서 정신이 되고 정신이 세계의 혼이 되고 세계의 혼이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더 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은 플라톤과 같이 종교적으로 접근을 하는 성향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계로 접근하는 성향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동물들을 해부하고 인체를 보고 동식물들을 연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모든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 원인과 결과에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자연이라는 세계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 세계가 있게 된다는 것을 신이 창조했다고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들은 그렇게 연결이 되었는데 마지막에 신이라는 고리를 그는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영원 전부터 있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 세계를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이 다 뭔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왔다고 생각을 하면서 세계 그 자체는 원인이 없이 원래 있었다? 그것이 자기들이 말하는 모든 것에 전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은 그냥 모르겠다. 그것은 우리의 추측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 있었던 세계라고 치고 거기에서부터 시작을 하자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창조론, 진화론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여기에서 다 비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화를 이야기 한다고 하더라도 진화는 어쨌든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 있는 것은 어디에서 왔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면 성경은 아주 간단한 선언으로 시작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사실 이것은 번역하기에 따라 다른데 ‘한 처음에 하나님이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선언을 66권 성경의 맨 앞에 나오게 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분명한 사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세계의 근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것은 달걀이 닭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과관계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각자가 판단하기에 따라 다릅니다. 빅뱅의 이론을 이야기하고 그런 폭발이 있었고 그것이 몇 조분의 1초 사이에 어마어마 하게 폭발을 하면서 우주를 만들어 냈고 지금도 계속 폭발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최근의 사람들이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말하는 것에 대한 가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검토해 볼 수도 있고 가치가 있는 유익한 설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주장이 매우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성경이 말하는 창조에 관한 사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17세기에는 뉴턴의 물리학이 발견이 되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최근까지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인슈타인과 그 선구자들에 의해서 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시계를 땅에서 재는 것과 10km 높이의 공중에서 재는 것 사이는 아주 미세한 시간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은 지구라고 하는 질량의 영향을 어떻게 받는가에 의해 시간도 가변적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니까 뉴턴의 중요한 기둥이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물론 많은 법칙은 아직까지도 유효하기 때문에 뉴턴이 이런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는 아무리 칭찬을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이런 것들이 깨지기 시작했고 더군다나 양자물리학이 나오면서 이것은 기존에 있는 뉴턴의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사물의 위치를 파악하면 그것이 공간처럼 파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것과 파악하지 않는 것 사이에 엄청난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있고 우리가 발견한 과학적인 사실이라는 것은 있는 이 모든 세계의 비밀 중에 지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 우리가 겸손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면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의도 없이 창조되었다면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고 그러면 그분은 완전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고 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의도 없이 창조하셨다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세계는 목적이 있게끔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도구들을 둘러보면 전구는 환하게 하기 위해, 마이크는 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화면은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환풍기는 공기를 소통하기 위해, 의자는 편안하게 앉게 하기 위해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하나가 창조되었고 그 작은 개별적인 목적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이 공간이 예배를 드리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 되도록 목적 연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또 다른 행성에 인간과 같은 지성적인 피조물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데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학자들에 의하면 서로 연락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도저히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고 설령 그런 행성이 있어서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다른 인간이나 혹은 우리가 흔히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고도의 기술문명을 가지고 그들의 삶의 도리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피조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 진리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거기는 거기대로 하나님이 통치하실 것이고 성경은 여기에 있는 우리를 향해 계시된 것이고 이 지구는 물리적으로는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일 수 없지만 종교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범위 안에서는 이 지구가 종교의 중심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가 만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구원론에서 이 문제가 나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존재 목적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지만 그러면 인간이 잘 사는 것인가? 잘 못 사는 것인가?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은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시켜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잘 못 살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해하고 그 목적대로 살면 행복해지게 하셔서 더욱 사람들을 격려하여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셨고 그 목적대로 안 살면 고통스럽게 하셔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을 갖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천지창조의 목적은 사실 하나님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이 당신의 신성, 하나님으로서의 성품의 영광을 인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자, 우리들이 아무것도 몰라도 높은 알프스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아래로 6, 7천 미터의 만년설의 영봉들이 죽 서있는 광경을 봅니다. 그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아주 장황한 느낌이 들면서
(찬송)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산을 보면서 불신자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한 없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몇 십억 년이나 됐는지도 모르는 그 어마어마한 산들의 영봉들을 보면서 자기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나를 압도하는 것처럼 밀려오는 그것이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정확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지 정확하게 모를 뿐이지 그 다가오는 느낌 뒤에 본질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하나님이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그런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 세계에만 당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인간을 굳이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셔서 천사를 제외하고 이 모든 자연 피조물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지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지성적 피조물이라고 부릅니다. 지성적 피조물 중에는 인간, 천사, 마귀,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인성 등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서는 당신이 피조된 분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시지만 육체는 사람의 몸을 빌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성적 피조물의 범위를 정합니다. 그렇게 지성적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이 어떤 질서를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 속에서 그 질서를 잘 아름답게 펼칠 때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자기도 그분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여기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연속성은 제가 책을 쓰잖아요? 그러면 책을 읽으면서 아, 이것 김남준 목사님이 썼네? 이렇게 생각하게 하는 글 속에 지문 같은 것이 있죠? 하루는 어떤 학술잡지를 직원이 가지고 와서 ‘목사님 여기에 기고하셨네요?’ 해서 펼쳐보니까 제 글이 막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출한 교수님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을 제 책에서 거의 5줄 7줄씩 퍼다가 붙여서 내가 읽어도 내 책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지문이 있듯이 하나님도 당신의 세계를 창조하실 때 그런 지문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연속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흔적을 자연 세계 속에, 인간 세계 속에 하나님이 묻혀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하나님과 연속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이 세계는 세계일 뿐입니다.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나를 미켈란젤로를 능가하는 솜씨로 나를 똑같이 조각하고 색칠까지 해서 여기에다 상을 갖다 놓으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인사를 할 정도로 똑같다고 할지라도 그 작품은 내가 같이 서 있으면 사람들이 구별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과 나는 본질적으로 같을 수가 없고 다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어떤 것도 하나님과 같은 본질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는지 틀린지 대답을 해보십시오. ‘이 모든 세계 안에 하나님이 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다 손들어보십시오. 손 내리고 틀렸다 손들어보십시오. 큰일 났네. 이런 데서 허점들이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명백히 틀렸습니다. 다시 바꿔서 질문을 하겠습니다.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무식한 것이 아니라. 사실 이 1장을 다섯 시간은 배워야 합니다.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이 세계 안에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 맞는다 손들어보십시오. 틀렸다, 손드십시오. 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된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 분명하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물질 안에 갇히거나 물질과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한 분만 예외입니다. 모든 피조물 안에 하나님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있다’라는 말을 문학적으로 그리고 교화적으로는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적으로는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질세계 안에 침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그것이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때 배운 물활론이 되는 것입니다. 애니미즘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속에 신이 깃들여 있는 것 그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명확하게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무슨 의문이 드느냐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 할 때 그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나?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손을 드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가 화란에 갔을 때 저에게 장서를 일만 권이나 넘겨준 세계적인 신학자 빌럼 판 엇 스페이커르 박사가 계셨습니다. 96세에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대화를 했는데 학생들이 같이 앉아있었습니다. 그 직전에 학생들이 저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뭐냐 하면 ‘목사님, 제가 여기 화란에 와서 정통 개혁신학을 공부하는데 성령론이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것하고 달라서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슨 혼란이냐?’ ‘저는 어렸을 때 진짜 성령님이 신의 본질로서 내 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가 잘 못 알았다. 마스트리히트를 비롯해서 더 많은 깊은 책들을 읽어보면 성령님의 내주의 의미가 신의 본질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이다’ 그러면서 스페이커르 박사와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스페이커르 박사가 웃으면서 명확하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 본질적으로 있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랬더니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 영혼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 그것을 성령이라고 가르치는데 그 성령은 신의 본질로서의 성령도 성령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 교제 자체를 성령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캘빈도 표현은 다르지만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했고 아무도 신의 본질이 피조물 속에 들어온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렇게 말씀을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자, 그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신적인 본질은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속에 침투해서 그 공간 안에 갇혀있을 수는 없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무한하고 광대무변하고 없으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이 전부 다 내 마음에 들어온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일부가 찢어져서 내 마음에 들어온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도저히 교통할 수 없는 죽은 영혼이었는데 그 영혼을 성령이 역사하셔서 살려내셔서 그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을 문학적으로 묘사할 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 그렇게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직 신학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본질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대한 오류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것은 정확한 신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것은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라면 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질이 이 세계 안에 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오류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납니다. 그 대신 다음 말을 들어보십시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다. 말이 안 됩니다. 손들어보십시오. 말이 됩니다. 손드십시오. 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박수를 쳐야 겠습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피조물 속에 절대로 갇혀있을 수 없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벗어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딱 세 가지로만 정리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이 만드신 물질 속에 있을 수 없다, 두 번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성령님과의 교제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고 성령 체험을 하는 것이 신의 본질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체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러나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 이렇게 정리를 하시면 됩니다. 따라해보십시오. 첫째 하나님의 본질은 피조물 속에 갇혀있을 수 없다. 성령님은 교제로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신다. 그러나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 누가 들으면 성령님이 없는 것이네? 그것이 아니라 신의 본질로 우리 살 속에 침투하지는 않지만 영으로 우리와 그 교제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것을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만 정확하게 알고 그것은 모든 우리들에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것과 똑같이 다름없는 효과를 우리에게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무한한 본질이 찢어지듯이 쪼개져서 우리 각 사람 마음속에 나누어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론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해되시죠? 중요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시나 모든 사물은 바꾸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변함이 없지만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세계는 바꾸시는 것입니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것들은 움직이게 하시고 자신의 뜻은 바꾸지 않으나 모든 사물들의 일은 얼마든지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피조물은 자기가 움직이지 않고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시면서 모든 것들을 당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하나님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 사이의 불연속성입니다. 이해되시죠? 매우 어려운 것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읽어봅시다. 창조의 목적은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문학적으로 말하는 것과 철학적, 신학적으로 분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그것을 조상의 얼이 살아있습니다. 할 때 ‘얼’이 영혼인데 어떻게 살아있습니까? 그 의미는 그 정신과 그 생각과 사상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너와 나 사이에 사랑이 숨 쉬고 있다.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되겠네.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렇게 말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아, 오늘 우리가 강의를 들어보니까 성령님이 계시다고 말하면 안 되겠구나. 이 말이 맞다. 손들어보세요. 그런 것까지는 아니다. 손들어보세요. 네 맞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 이렇게 말해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찢어진 신적 본질이 우리 안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와 교제해 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실제로 내 안에 계신 것처럼 친근하게 교제하신다. 그것도 성령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하던 일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찢어져서 우리 안에 쪼가리로 들어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해되시죠? 그 이야기가 맞는 것 같죠? 확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거기에 쓰여진 단어가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토브’는 좋다, 선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완전했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뭔가를 제작하시기 좋아하시는 분들은 금방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림을 그린다든지, 디자인을 한다든지, 건축을 한다든지 의상을 제작을 한다든지 할 때에 저는 교회를 지어봤으니까 제 머릿속에서 설계도도 없이 교회를 지었습니다. 다 짓고 나서 ‘아, 정말 좋다’ 왜냐하면 내가 설계할 때 의도한 대로 거의 되었기 때문에 ‘좋다’, ‘좋다’라고 말할 때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좋다는 기준이 세계의 기원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좋다’라고 하는 나머지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이 ‘좋다’라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이 누구여야 되겠습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아, 그냥 될 대로 되어라, 하면서 만들었다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세계가 생겨나기 전에 하나님 안에 이 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있었습니다. 이것을 철학에서 ‘이데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념. 하나님이 먼저 계획을 가지고 그 계획을 따라서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계획도 하나님이시니까 완벽하고 인간은 계획을 했는데 실제로 만들어 보니까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계가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연의 세계를 기준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할 때 당신 안에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원래의 상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불이 나고 인간들이 자연의 세계를 착취를 하고 이런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 아닙니다. 그것이 재앙적인 결과로 우리 자신에게 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실 때 기본적으로 가지고 계신 이 세계가 결국은 선한 세계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 시간을 강의를 해도 못 할 정도로 이 선은 굉장히 복잡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을 성경에 기초해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의 최종적인 목적인 최고의 선을 사랑하고 그 최고의 선을 선이 가르치는 대로 그것을 그 선을 인간사회에서 베푸는 것, 그것은 사랑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자연 세계에 대해서는 선대해주는 것입니다. 그 선을 가지고 자비롭게 대우해 주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을 주지 않고 우리가 육식은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니까 먹는데 그것을 복지적으로 동물을 기르고 바람직한 환경에서 살고 그렇게 해서 식품으로 돌아와야지 그것을 비 동물적인 환경 속에서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길러서는 안 된다. 영국에서 약 2년 전에 법이 통과됐는데 살아있는 랍스터를 그릴 위에 올려놓으면 법적으로 처벌받습니다.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동물들에 대한 선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먹는 것이 선대가 아니냐 하실 텐데 그것은 성경이 금한 것이 아니니까 본인이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천지창조의 목적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정신을 가지고 인류사회 속에서 구현하면서 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결국은 행복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자연의 세계를 약탈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그것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하신 것처럼 그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이 모든 만물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될 때 이 사회 전체가 선한 세계가 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은 계속해서 증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염두에 두셨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문제 1)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왜 존재합니까?
답 : 하나님이 당신의 지혜와 의지로 말미암아 창조하셨기 때문
문제 2)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고 그 영광이라는 목표를 향해 살 때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은 거기에서 행복과 쉼을 얻게 된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은 변하지 않으시면서 끊임없이 당신의 지성과 의지를 이 세계를 향하여 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계속해서 돌보며 운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이 자연세계 속에 펼치신 능력과 위엄을 그리고 도덕 세계 속에 펼치시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보고 하나님을 인정하여 그를 찬송하게하기 위해서 세계와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문제 3)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서 ‘선’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상태나 조건을 선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