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1
우리를 구원한 십자가(딤전1:16)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기도하겠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약속드린 대로 이번 주부터는 제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연속해서 허락하는 데까지 말씀을 주일 아침에 전해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한 일 만큼 그가 누구인지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먼저 보고 감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혔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그가 행하신 일을 통해서 그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고, 그 놀라운 일을 깨달은 다음에 그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첫 시간으로 그리스도께서 왜 오셔야 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한번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만은, 이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에서 이 사도바울은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죄악에 빠지고 헛된 말에 빠지고 또 율법에 빠지고 그렇게 하면서 살인하고 악을 행하고 하는 악하게 살아가는 모든 모습을 보면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세상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죄를 보면서 바울은 자기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도바울의 마음은 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어버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께 내가 감사한다. 나는 능한 사람이 아닌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능하게 하셨고 전에는 내가 회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하나님께서 충성된 사람으로 여겨주셔서 나를 사도로 삼으신 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죄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죄를 보고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보면서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게 임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사람들은 저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러나 내가 저 사람들처럼 죄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리시고 나를 구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신 이 놀라운 사랑을 감격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할 때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에게 믿음과 사랑이 넘치도록 그 은혜가 풍성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읽어드린 본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죄인을 구하려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들어옴으로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고 죄가 유입됨으로 세상에는 죄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가 없던 때에 하나님과 인간은 완전한 교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가끔 신앙 생활하다가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큰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행복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이죠. 그때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으니까 말하자면 우리들이 참 기쁘고 행복함,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회복되는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시면 되냐면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 그 하나님과 사이에서 누렸던 그 참되고 완전한 기쁨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누리는 것을 무한하게 연장시켜서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그냥 결핍이 없고 고통이 없는 정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교통의 기쁨과 임재의 은총이 가득해서 그 안에서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최고의 복락을 누리면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죠? 죄가 어느 날 들어온 것입니다. 마치 굳게 닫혔던 문을 서서히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굳게 닫혔던 수문을 탁 여니까 물이 확 쏟아지는 그런 거죠.
청평댐은 좀 작죠. 소양강댐 정도 되면 물이 꽉 차서 수문은 열면 170미터 정도 큰 폭포를 이루면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부딪혀서 쏫아 오르는 것이 몇 십 미터 이상 쏫아 올라요. 그래서 장관을 이루죠.
문을 딱 열고 그 다음에 열리자마자 스며들어온 것이 아니라 박차고 들어온 거죠. 마치 대문이 이렇게 있는데 일본 순사들이 문을 두드리다가 사람이 문을 안 열어주니까 여러 명이서 막 달려와서 문을 쾅 부스고 그 다음에는 대문이 부셔지자 고요했던 마당에 수많은 순사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그렇게 들어오게 되자 사람들이 그 죄에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삶이 된 것이에요. 그리고 죄인들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죄를 짓는 것이 인격의 특징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행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모든 것이 철저하게 죄에 지배를 받으면서 법이라고 그랬어요. 법은 역사하고 있어요. 힘 있게 역사하고 있다구. 맨 처음에 운전을 배우고 차를 몰고 도로에 들어간 다음에 깜짝 놀란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 같이 그렇게 세상이 엉망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차가 길 따라 가는 것이 제게는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무슨 이야기냐면 노란 줄 하나 그어 놓고 하얀 줄 하나 그어 놓고 누구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길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 차가 지나가는 거예요.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 불 하나가 빨간 불이 들어오니까 모든 차가 정지하는 거예요. 파란 불이 켜지니까 모든 차가 출발하는 거죠. 사고는 그것을 안 지키는데서 일어나는 거죠. 법이에요. 법. 요즘에 식당에 가면 이쑤시개를 달라고 하면 안 줘요. 그리고 없다 얘기하고 만약에 그것을 비치하면 벌금을 받는다고 한 식당이 아니라 모든 식당에서 다 그렇게 얘기해요.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모습이에요. 법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을 역사하고 지배해요. 그렇죠? 안전 밸트를 매지 않으면 3만원의 벌금을 매깁니다 하니까 그 말 한 마디 밖에 나온 적이 없고 실제로 단속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지 않은데 사람들은 벌써 그 말에 얽매이기 시작해요. 차를 타자마자 이 안전 밸트를 해야 되겠다고 하는 억압을 받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이게 바로 죄가 법으로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거예요. 그렇게 죄가 우리들 가운데 들어와서 그 죄가 실제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그 죄가 우리 위에서 우리를 가지고 역사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죄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으면서 그러면서 그 죄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냐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알기 전에 우리들을 가리켜서 죄의 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죄의 종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스스로를 구원한 소망이 없는 것이에요. 구원할 소망이 없어요.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데 사람들은 그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너무나 오래 되니까 그렇게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 고통, 그 고충에 대해서 이미 의식이 없어지고 그것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가끔 여러분들이 우주에서 사람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이 우주에 놓으면 무중력 상태에서 떠 다니잖아요. 그 상태를 기준으로 놓고 그리고 만약에 어떤 절대치를 가지고 인간의 중력을 잰다면 코끼리 세 마리를 지고 살아가는 것과 똑같다고 말해요. 분명히 이 지구에서는 걸어 다니던 사람이 달에 갔다 놓으면 붕붕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예를 들면 높이뛰기를 해서 30센티미터밖에 뛰지 못하던 사람이 거기에서는 1미터80센티미터를 뛴다는 거예요. 왜? 6배 정도 중력이 더 많아요. 잡아당기는 힘이 많다는 거예요. 죄의 지배도 마치 그런 거예요.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그 무한한 창의성,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 세상 속에서 옳고 그른 것들을 판단하며 자기의 판단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인간의 모든 자유함들이 그 죄의 지배로 말미암아서 빼앗기는 거예요. 그리고 사라져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철저하게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 죄인들이 살아가는 그 세상, 그 속에서 태어나서 또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 세상, 그러한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억눌리는 그 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켜 줄 수가 없었어요. 그 힘이 얼마나 큰지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끊임없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그리고 실제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는 이러한 영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도 말하자면 삶을 보더라도 죄가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예수 밖에 있었을 때에 그 삶은 어떠하겠느냐? 철저하게 죄의 지배를 받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는 예수를 안 믿고도 범죄해서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형법에 기록된 그런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그런 죄를 짓도록 만들어 주는 성향들이 환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형법적인 의미의 죄를 안 짓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죠? 가정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살인을 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 사람이 무인도에 홀로 있었다면 그는 아마 살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죠? 많은 사람들이 유흥비를 마련하고 그리고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 돈을 뺏으려고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돈이 많았더라면 그는 아마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경은 이 처럼 그렇게 형법적인 죄를 줄일 수는 있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죄 가운데 살아가고 그 죄를 지으려고 하는 인간의 내면 속에 깃들여져 있는 죄성, 죄 된 성품 그것은 환경이 고칠 수 없는 것이에요. 그것에 지배를 받으면서 거기에 억눌려서 인간이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에요.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나니 종이 되어서 죄의 지배를 받고 죄의 지배를 받으니까 범죄하고 범죄하니까 그 죄가 다시 자기를 얽어매고 얽어매니까 또 다시 범죄하고, 범죄하니까 또 얽어매고 하는 이런 악순환들이 계속 되풀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이 모든 결박을 푸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경배를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철저하게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리고 그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이제는 그 죄에서 자유케 해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무엇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세상에 오셨을 때에 세상에는 개척교회 하나 서지를 못했습니다. 삼 년이 넘도록 정성을 들여서 양육했던 제자들은 다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던 벳세다 광야의 보리떡과 물고기를 얻어먹던 사람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여인의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긴 했지만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든 지혜로운 사람의 시각에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실패한 생애였습니다. 철저히 실패한 생애였습니다. 그럼에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목적이 아니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넘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이 대속의 사실, 이 십자가의 복음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치 아무런 선한 것이 없고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죄인을 구하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오직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살펴볼 때에 그럴 때에 비로소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우리의 가슴에 분명히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는 이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를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구원을 받은 사도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안 사람들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깊이 알았던 사람은 모두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이 괴수는 첫 번째, 죄질의 순서대로 사람들을 정돈 시켜 놓으면 내가 첫 번째 자리에 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이러한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에 사도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죠? 죄를 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눈이 띄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히브리인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을 배우지만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는 열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 자신의 장점과 다른 사람의 결점과 자신의 선함과 다른 사람의 악함이 보이는 동안 그의 눈에는 그리스도 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가 눈에 보이게 되고 보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되자마자 그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구나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 또 나보다 못난 사람, 또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리스도와 사도와의 관계가 절대적인 관계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 앞에 있고 자기가 그리스도 앞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린 십자가를 보면서 깊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나 한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같은 그러한 깊은 고통을 이 사도가 마음에 간직하고 그리고 그것은 급기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 예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만이 비로소 사람들을 용납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어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잠시잠시 우리는 잊어버리잖아요.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기도하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 이런 것들은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 십자가의 그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사도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자기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를 깨달았어요. 파울루스, 이름을 바울이라고 지었지요. 가장 작은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전에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열심히는 뭐 이렇게 얘기 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니까 이전에 나의 삶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요 참 비참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예요. 이 전에 모든 가치가 다 뒤바뀌어 버리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알게 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면 우리의 교만이 설 자리가 없는 거예요. 왜 그래요? 나 같은 죄인을 구하신 것, 이것을 보면 그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깨닫는 거죠. 사도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 이렇게 말할 때에 모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던 사람들은 아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보다도 내가 더 괴수라. 이런 고백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소망이 되고 기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내가 바로 그 예수께서 찾으시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받고도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고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하면 우리는 아무도 그의 오심을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인을 오라고 부르실 때에 손들고 나아갈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그리고 십자가의 놀라운 깨달음이 마음속에 역사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고백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만한 모든 사람들과 아무 것도 아니면서도 자기가 무엇인가 낫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아직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에 더욱 감격하고 우리의 일생을 아낌없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태워서 드려도 후회함이 없는 이러한 삶을 결단하게끔 우리를 인도하신 거예요. 사도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죄인들을 보았어요. 그들 가운데 어떤 때에는 그들이 이미 구원으로부터 멀도다. 하나님일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악한 죄인들을 말할 수 없이 만났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의 가시밭길을 넘고 핍박과 시련의 길을 더듬으면서 사역의 길을 행하였습니다. 그때에 그에게 당했던 수많은 시험과 도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들은 대부분 죄인들을 통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원수들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말씀입니다. 그때에 조차도 사도는 그런 모든 죄인들을 포함해서 그 사람들의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고 크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내가 더 괴수니라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비교해서 죄의 깊이를 따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죠? 이 세상에 죄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에요. 무엇을 행하던지 내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고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이 사도가 깊이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에요. 이러한 깊은 인식을 통해서 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이 죄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만이 단 한분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동족이 그를 버려도 살 수 있고, 그리고 자기의 이웃이 자기를 버려도 살 수 있고, 동역자들이 혹은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도 살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자기를 버리시면 설 자리가 없는 죄인임을 이 바울은 깊은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렇게 말할 때에 조금도 부끄럽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모든 사람들이 밝히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자기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감격적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살아있고 숨 쉬고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이 그 구원의 기초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철저히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한 것도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가난한 생애를 사신 것도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낮고 천하고 냄새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를 즐겨했던 것도 바로 그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죄 많은 인생들을 위해서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고 그 손으로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고 하나님의 손과 맞잡도록 만들어주시는 이러한 모든 화해의 역사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베푸셨던 그 모든 눈물 나는 열심들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부지런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배울 의무가 있고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감격해야 하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물과 피를 흘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이 사실을 깊이 깨닫기 전에는 인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줄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붙잡은 것이 없으면서 모든 것을 붙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자기는 모든 것이 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비참한 죄인이고 멸망을 향해 치달아 가면서 모든 생명을 한 손안에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가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놀라운 사랑, 그 어마어마한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되자 그는 갑자기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용서하실 수 없는 죄인, 그것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었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이렇게 죄 가운데 살았고 이전에 뜨거운 열심히 살았던 삶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고, 이전에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목표 의식 속에 살았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도를 훼방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삶이었다는 사실은 이 사도는 깊이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자각은 바로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서 그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때에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족으로부터 오는 위협과 모함과 이방인들로부터 오는 살인의 위협과 순교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자기를 그런 위험 속에 두신 그리스도 예수를 자기에게 그런 사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그 하나님을 찬송했고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 크고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흘려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흠 없고 티 없는 보혈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였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사도의 직분을 맡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시밭길을 지나고 맹수의 위협이 있는 들판을 지나며 사망의 도사리고 있는 골짜기를 핍박자들의 함성을 들으며 지나야 한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돌로 침을 당하고 40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혹은 광주리에 매여서 성 밖으로 내던져지는 이러한 고난의 길을 걸어도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기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죠? 십자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그 무한하신 은혜, 모두 율법도 나를 버리고 양심도 나를 정죄하고 그 수많은 제사도 나를 건질 수 없었던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없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룩한 고난의 모습을 깊이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릴 때에 우리는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을 가진 사람 같아지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아 지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원동력들을 낫낫이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럼으로 이 사도는 오늘 이 편지를 쓸때에 인생의 말년이었어요.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순교의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는 그러한 인생의 말년이었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 편지를 쓰는 일, 이년 뒤에 그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이미 순교의 때가 가까워 왔고 내가 마실 잔이 가까워 왔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깊은 인생의 황혼이 깃들었습니다. 검은 머리를 날리며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해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여 버리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그런 패기어린 청년의 때가 지났습니다. 이제는 늙어서 노년이 깊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머리에는 반백이 희끗희끗하고 팽팽하던 얼굴은 주름으로 구비 쳤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게 되었습니다. 손은 거칠어졌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다 맞은 그 상처로 흔적이 나 있었습니다. 그 인생의 말년이 되었을 때에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수많은 사람의 그런 이야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온 교회를 다스릴 수 있었던 그야말로 살아계신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분신과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교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성자와 같이 인정을 받는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일생을 예수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리고 젊음과 명예와 세상의 욕망과 세상의 즐거움과 편함과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두 버렸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이제 옥 속에 갇혀서 이 디모데전서를 쓰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상처를 받은 몸을 이끌고 옥 속에 갇혀서 이 편지를 쓰다가 말고 사도는 다시 한 번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피 묻은 십자가 아래서 흐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가슴을 치며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큰 해 받으셨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는 다시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하면서 그는 자기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무한한 사랑을 입은 가치 없는 죄인인 자기 밖에 없음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러나 여전히 다메섹에서 만났던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형상에는 피가 마르지 아니하였고 물기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피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이 사도의 영혼 속으로 흘러 들어와서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는 감격하고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죄인들여, 나는 너희들 가운데 괴수로다 하는 이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커 보이면 그리스도는 작아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커 보이면 세상은 작아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모두 버려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습니까? 우리의 젊은 날을 모두 버려서 복음을 전하고 동족을 구원하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리고 해로의 위험과 육로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굴혈의 위험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런 고난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섬겼습니까? 여러분, 이런 모든 삶을 다 산 사도가 오늘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사도가 이 편지를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감동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쓴 것이 아닙니다. 괜히 해 본 말이 아닙니다. 그의 의식의 모든 세계를 다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사도바울 그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그는 언제나 할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그러나 그가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 이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편지를 쓸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바울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바울 할 때에 그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떼어놓고는 바울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삶을 생각할 적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그 사실과 떼어 놓고 생각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그리스도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위한 인생을 살았을 때, 그는 철저하게 그 인생이 그리스도의 종인 그런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누가 우리에게 묻거든 너희가 누구냐 하고 묻거든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십시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그가 긍휼의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다.”말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