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감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녹취자 : 김세나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북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라고 합니다. 거기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아리마대 출신이었고, 이 사람이 돈이 아주 많은 부자였습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로 열주 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하면 열두 제자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라다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 가장 넓은 뜻으로 사용되는 의미로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고, 유대인 중에서는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매일 따라다녔던 전도대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매일 따라다녔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받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숨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확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였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고백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였지만 무엇인가 용기, 결단, 자신의 정체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하는 신앙의 확고한 자세 같은 것들은 부족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 당시에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사람이 돌연 태도를 바꿔서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빌라도는 당시 총독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못 박아 죽이도록 사형 언도하여 내준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유대인의 매우 중요한 종교지도자로서, 그리고 부자로서 유대인 가운데 명망 있는 한 사람으로 빌라도를 찾아갈 수는 있었겠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모든 것을 볼 때 아마 청을 넣어서 빌라도와 면담은 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음모와 암투들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부터 예수를 죽여도 예수가 살아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진실한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어디엔가 가져가 감추고 그렇게 해서 소문을 증폭시킬 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염려를 종교지도자들이 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든지 간에 매우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아리마대 요셉이 무엇인가 심경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이러한 행동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기에 이러한 행동을 하였는가 따지기 전에 먼저 그러면 아리마대 요셉은 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리마대 요셉뿐만 아니라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모든 제자들, 넓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던 예수님의 제자들 까지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무엇인가 또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였지, 진짜 죽은 사람으로서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만약 그것을 굳게 믿었다면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으신 후 그렇게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 두려워하며 도망가고 숨어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그 예루살렘에서 온 여자들이 그렇게 슬피 울며 가슴 아파 했을 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예식이 장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랍비, 선지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는데, 그 분이 십자가에서 흉악한 죄수들이나 당하는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후 그 시체가 내팽개쳐져 있을 때 그것이 너무 마음 아팠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모셔다가 자기가 돈이 많고 여유가 있으니까 자기의 소유의 매장지 중 좋은 곳으로 예수님을 모셔서 편안히 안치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향품을 넣기 위해서 이른 새벽 언덕을 오르던 그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헌신도 역시 그렇게 예수님의 장례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공의회 의원으로서, 부자로서,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적인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경건한 인물로서 무엇인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에게 그 사실을 감추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 사람이 분연히 일어나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고, 유대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사람의 시신을 가져다가 마치 자신의 친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의 소유지에 그 분을 훌륭하게 매장하려고 했다는 것은 자기 정체가 폭로되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놀라운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냥 간단하게 ‘이 일 후에’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 후에” 무슨 일이었겠습니까? 바로 앞을 보십시오. 34절을 보겠습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이 일 후에.” 무슨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그 후에 바로 이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어쩌면 이 사람도 바로 그 자리에 있어서 그 현장을 목격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 올라가신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골고다 언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고 당신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신 것을 절실하게 마음 아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였지만 두려웠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지위, 사회적인 명망,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모든 평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유대인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추었습니다. 숨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그 분이 죽어야 우리가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든지, 혹은 그 분이 죽은 후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든지, 그러고나서 성경이 강림하셔서 새로운 시대가 올것이라는 등등의 구속사의 신학적인 의미를 그는 몰랐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던 예수 그리스도, 선지자, 혹은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그 분은 하나님 곁으로 갔겠지만, 자신은 여기에 남아있고, 그러면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시고 진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신 분, 우리를 눈물로 희생으로 섬김으로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진리 때문에 죽임 당하였던 십자가의 사건을 보고 자신이 진리 때문에 예수님처럼 그렇게 용기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내 놓으라 할 때에는 자신이 이 일 때문에 예수의 제자인 것이 알려져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잃어버려도 나는 괜찮다 라는 굳은 결심이 섰던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용기 없었던 아리마대 요셉에게 가져다 준 커다란 변화였습니다. 이전에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사람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직후에 그는 깊은 감화를 받아서 예수의 제자인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좀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하시기 전 두려워 도망가다가 다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을 받들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모든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다짐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이 정작 고난을 당할 때 도망하였고 멀찍이 따라왔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고 그리고 처형되시자 숨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일생동안 예수를 버린 것이 가슴에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고 예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사도들은 한결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주는 의미에 자신의 인생을 묶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제외하고는 열두 제자 중 누구도 자기의 목숨을 다 산 사람이 없이 그렇게 예수를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기 전에 쓴 베드로 서신에서 그는 바로 그렇게 임박한 핍박 앞에 흔들리고 있는 교인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불타는 소망을 가지고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고 자신의 가슴으로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날 위해 바친 고귀한 희생
나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예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찬양)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내가 지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아리마대 요셉을 보십시오. 그렇게 몰랐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얼마나 분명합니까? 신학적으로 얼마나 풍부합니까? 그 당시의 사람이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합쳐도 우리 한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십자가의 죽음이 아리마대 요셉에게는 숨겼던 제자의 신분을 기꺼이 드러내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바꿔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해 가면서 역경과 시련을 만날 때 우리들이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근거 없는 비난에 흔들리고 소심해 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하고 그러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신 진리와 복음의 정신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감화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어 살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은 죽었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정받게 하기 위하여 당신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그 분은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가슴에 새기고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들려 주님 앞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