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I. 본문 해설
바울이 편지를 보낸 대부분의 교회가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였습니다만, 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마도 에바브라 디도가 세운 교회일 것이다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를 쓸 때에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에 수감되어 있었고, 이 교회를 통해서 들려오는 소식은 옥속에 갇혀있는 사도바울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약해지고 이상 사상들이 출몰해서 영지주의를 비롯한 많은 이단들이 득세를 하고 있고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 옥속에서 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연히 골로새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골로새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수준높은 기독론을 담고 있는 편지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된 것은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 우리에게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교리를 알고 있는데 도대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만약에 예수님의 고난이 남았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가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고 속죄가 충분했다면 그 고난은 다 이루신 고난이지, 어떻게 예수의 남은 고난이 존재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언감생심 그 고난을 인간인 사도바울 자신이 받겠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부조화를 느끼지 않습니까.
II.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뜻이 숨어져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음. 혹은 그리스도와 일치됨의 교리라고 하는 그 우리 개혁 신앙에 있어서 가장 신비한 교리중 하나가 여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풀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사도바울의 이 언급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둘로 나눌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는 이루신 고난이고, 또 하나는 남기신 고난이라는 거죠. 그러면 첫 번째, 이루신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르키는가 하면, 성육신의 고난을 가르키는 거예요.
A. 이루신 고난: 성육신의 고난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가 바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이죠. 역사 속에 펼쳐지는 구원의 대드라마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작정의 전개에요. 영원전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 접힘이라면, 그 접혀진 하나님의 신적 작정이 시간과 공간의 전개 속에서 펼쳐진 것이 창조와 구속의 대 드라마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바로 뒤에서도 주신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경륜이 바로 그러한 뜻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와 그리고 구속의 대 드라마의 전개인 경륜속에서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이 사건을 통해서 이제 이 모든 타락한 인간들이 다스리고 있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구원의 성취와 함께 인간이 타락함으로 저주를 받았던 이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33년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온갖 섬김을 다 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박혀서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 형벌은 죄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심판하고 징벌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고, 처음부터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끔찍한 형벌을 대신 당하신 것은 그야말로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할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대신 당하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마지막 죽으시기 직전에 숨을 거두시면서 남긴 말씀이 바로 다 이루었도다라는 말씀이었어요. 이제껏까지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다 이루셨고, 하나님을 멀리떠난 죄인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모든 하나님 앞에 값을 다 치루셨고, 그리고 구원을 위한 모든 속죄 사역을 완수하셨다는 뜻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공이 판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덕분에 성공하고 이 세상에서 잘 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었다면, 예수님은 저주를 받고 목숨이 끊어지는 십자가에서 못박히신체 피를 흘리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을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성공하는 것, 이 세상의 번영이 예수님의 목적이셨다면, 베세다에서 오병이어이의 기적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베부를 그때에 아마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가 아니라 예수님은 마지막에 자기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고,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시는 그때에서야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루신 고난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죠.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만약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는 것이 헛된 것이죠. 아무리 믿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중심적인 메시지가 되어야 하고, 성도와 교회의 삶이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의 확산이에요.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그 피가 뿜어져 나와서 이 세상에 확 뿌려져 나온다는 거예요.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은 그 피가 폭발하듯이 확 쏟아져서 목사를 적시고 장로를 적시고 그리고 온 교인들을 적셔서 그 피를 이 세상에 흘려 보내는 것이에요. 그게 부흥이에요. 이 고난은 이미 이루신 고난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 고난에 보탤수도 없고, 참여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무죄한 인간이신 예수만이 당하실 수 있는 고난이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종종 설교하거나 기도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언감생심이에요.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난다고 해도 자신의 몫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당신 십자가는 당신이 지는 것이고,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두 번째는 남은 고난, 남기신 고난 혹은 남은 고난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무슨 고난인가.
B. 남은 고난: 교회의 고난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미 이루신 고난은 혈혈단신으로 예수님 혼자 당하신 고난이에요. 그러나 이제 남기신 고난, 혹은 남아있는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당하시는 고난이에요. 영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갓난아기 태어나실 때부터 머리가 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부활하심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거예요. 부활하심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거예요.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영적인 뜻이에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있죠. 이 육체는 이게이게 소멸되는 거예요. 영적인 존재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를 생각하면, 내가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 등록한다는 뜻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예수와 상관없이 떠돌아다니던 영혼이 예수께 접붙여 지는 거예요. 영적으로 연결을 이루면서 이 열린교회나 무슨 동서울노회의 어느 지교회에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교회 이미 옛날에 살다가 죽었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과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 피부 색깔은 달라도 모두 연결이 되고 지상에 남아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미 하늘에 올라간 성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적으로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 그 자체가 교회론적인 구원이에요. 그런데 교회를 아무렇게나 해요. 그러니까 구원의 기쁨도 없고, 구원의 의미도 모르는 거예요.
여기 오늘 장로님들 많이들 오셨는데, 교회에 잘 하셔야 됩니다. 큰 일 납니다. 정말 공부 많이 하고 한번 밖에 없고 나중에 다 한다음에 몰라서 그랬습니다 통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을 한 거예요. 그래서 보헤이티우스 같은 신학자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1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요.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자 그러면 봅시다. 그러면 그렇게해서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즉시 교회에 접붙여 지는 거예요. 그게 진짜 자기 몸을 이끌고 교회를 다니든지 안다니든지 상관없이 거듭나면 우주적인 영적인 몸이 되어서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 그리고 모든 몸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셔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이루신 고난은 이미 이루신 고난이고, 우리가 참여할 수 없는 고난인데 반해서, 남기신 고난 혹은 남은 고난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영적인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 지체들 중 누가 당하는 고난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이 되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영적인 연합인 우리 모두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되는 거예요. 신앙이 깊다는 것은 교회 오래 다녀서 장로가 되는 것이 신앙이 깊다는 표증이 아니에요. 나는 목사지만, 목사나 장로보다도 훌륭한 신앙을 가진 평신도들 많이 만났어요. 순수하고 신앙이 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앙이 깊다. 믿음이 살아있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영적인 연결속에서 교회의 아픔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살아있는 신앙이고 깨어있는 믿음이에요. 깊은 신앙심이 바로 그러한 거라 이거예요. 그런데 보십시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이루신 고난이지만, 교회는 이 세상 끝날까지 마지막에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멸하시고 우리를 완전한 의에 이루게 하시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고난을 당하게 돼요. 끊임없는 고난을 당하게 돼요.
이러한 고난은 크게 세 가지로부터 오게 돼요. 우선 영적으로는 공중 권세잡은 사단으로부터 오게 돼요. 그의 가장 중요한 전략은 이미 믿는 사람들까지라도 강하게 유혹을 하고 미혹시키고 공격해서 그래서 복음의 빛으로부터 멀리 때어 놓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무지와 방탕함속에서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차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의도하셨던 그 뜻들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고, 이러한 사단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공격하기 때문에 교회에는 고난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이에요. 근본적으로 세상과 교회는 나뉘어져요. 교회는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따르려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거지이고,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의 뜻을 성취하려고 하는 세상의 정신이 지배하는 나라에요. 이 둘 사이에는 화해가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 세상 나라는 위에 있는 하늘의 영과 권세잡은 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그 고통과 곤경이 참된 신앙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교회의 고통을 가져다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오늘 같은 날 무슨 핍박이 있겠느냐 그러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20세기에 기독교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고 순교를 하였던 사람들이 3천만명이에요. 3천만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어요. 그 중에 일부를 일제시대때, 공산정권 하에서 우리들이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그러나 그것은 20세기 전세계에 일어난 기독교 박해의 역사에 비춰 본다면 아주 작은 부분밖에 되지 않아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에요. 마지막 하나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패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만약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다운 신앙과 순결한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 세상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나라 백성들의 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문제는 보십시오. 오늘날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장로님들로 섬기고 계시니까, 많이 실상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예요. 교회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바깥에서 옵니까. 안에서 옵니까.
(예화) 지난주에 제가 미국에 집회 다녀왔어요. 우리가 미국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해요. 도시마다 교회가 전부다 다 찢어져서 난리에요. 도시에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도시의 큰 교회들은 대부분 추문에 휩싸이거나 교회에 편들이 나뉘어서 싸워서 찢어지고 주일 예배 시간에 경관이 입회하지 않으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교회가 된 게 부지기수에요. 이름대라고 하면 내가 당장이라도 열댓개 이상 댈 수 있어요. 그러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요. 그래서 교인들을 만나면 교회라고 하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고 미국 교회로 내빼요. 거기가면 모든게 다 좋겠는가만은, 이러한 상황이에요.
그러면 그러한 대부분의 고통 네 명의 목사가 앉아서 같이 네 명이었나. 네 명의 목사가 앉아서 같이 차를 마시는데, 한 사람은 아직 목회를 하지 않는 목사고 세 사람이 저를 포함해서 세 사람의 목사가 목회를 하는 목사인데 두 명의 목사가 자기네 교회 장로님에게 소송이 걸려서 재판이 진행중이에요.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왜 일어날까. 심지어 어느 도시에는 교회 소송을 전담, 교회의 소송만 전담하는 변호사들이 문전성실을 이룬대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교인들을 꼬득이고 부추겨서 소송을 하면 장로를 이길 수 있다. 목사를 이길 수 있다고 충동질을 해서 그래서 교회 헌금을 가지고 변호사 뒷돈을 대느라고 교회가 파산에 이르는 교회도 있어요.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보면, 그 모든 고난의 이유가 교회 바깥에서 오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러면 교회 안에서 온다면, 교회 남전도회에서 내는 거예요? 아니면 여전도회에서 내는 것입니까. 누가 내놓은 거예요. 주일학교에서 내는 거예요. 아니에요. 뼛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무슨 뼈, 인간의 타락한 부패성과 본성에서 나오는 거라 이거예요. 그렇게 해서 교회에 끊임없는 고통이 가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목사님들을 만났을 때 그랬어요. 이게 무슨 희귀한 일이냐. 우리가 온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에서 칼을 맞고 몽둥이를 두둘겨 맞아서 교회가 아프다면 해볼만한 일이지만, 이것은 전쟁터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훈련소에서 훈련병들끼리 그냥 지까불고 싸워가지고 어느 누구는 불구가되고, 어느 누구는 끌려가고 이러니 이게 무슨 전쟁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그 교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계속됩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에서만의 고통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고통도 있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사명을 맡은 목회자와 그리고 장로를 비롯한 일꾼들이 어려운 환경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교회를 섬겨보려고 하는데, 그게 쉬운 일입니까.
(예화) 옛날에 내가 전도사로 모실 때, 전도사로 있을 때 모셨던 담임 목사님이 계셔요. 어느 분이 장로가 되면서 목사님, 장로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목사님이 아주 간략하게 대답을 하셔요. 돈은 많이 내고, 욕은 혼자 내는 것이 장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장로가 될 나이가 지나도록 교회에 나와도 조용히 뒤에 나와서 십일조 헌금하고 감사헌금 하고 축도 끝나기 무섭게 조용히 사라져 가면 어느 교인이 나를 무시하거나 어느 교인이 나를 우습게 알고 나한테 대들고 나를 욕하고 나를 모함하겠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받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교회 중심으로 깊이 들어오고 그리고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생각하고 집을 팔아서 건축헌금을 한다. 적금을 깨서 무슨 선교헌금을 한다. 뭐 하고 또 안 그러한 장로님들도 있지만, 내가 본 장로님들 가운데 술을 먹어요. 바람을 펴요. 아니면 마땅한 취미생활이 있어요. 취미라고 하는 것은 돈 벌어서 교회 갔다 내는 거예요. 그리고 일생동한 섬겨요. 그런데 성도들은 왜 그렇게 미워해. 시기하고 그래서 보면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구경꾼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구경꾼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섬겼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이러한 고난은 지금도 계속되는 거예요. 이루신 고난은 주님이 당신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셔요. 만약에 그랬더라면 베드로야, 너는 가지 말고 너는 거기 있어라 아마 그러셨을 거예요. 그런데 홀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잖아요. 그러니까 이 남은 고난은 예수님 혼자 당하시는 고난이 아니고, 우리를 거기에 동참시키시는 고난이에요. 그래서 이 남은 고난은 이제 교회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에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루신 고난은 예수의 고난이고 남은 고난은 우리의 몫에 태힌 십자가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III. 교회의 일꾼이 된다는 것
그래서 교회의 일꾼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거예요.
A. 주의 몸을 위함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주님의 몸을 위한 일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뭐라 그랬는가 하면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은,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내가 몸된 교회를 위해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른 것이라. 교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주의 몸을 위한 주의 몸을 위한 일꾼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일꾼이에요.
(예화) 어느 교회에서는 소송이 벌어졌는데, 목회자와 장로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는데 서로 시비를 가리겠다고 명예훼손 소송이 벌어진 거예요. 언젠가 판결이 나겠죠. 둘중의 한쪽이 잘못되었다고 법원에서 판결을 내려줘서 한 사람은 명예를 회복하겠죠. 자기 한 사람의 명예를 회복하는 동안 교회는 산산히 찢어지는 거예요. 좀 불명예스러우면 어때요. 좀 뒤집어 쓰면 무슨 상관이 있어요. 하나님에게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함도 받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모함당해서 죽으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으시고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고난을 당하셨잖아요. 그게 그렇게 자기의 결백을 밝히는 일이 그렇게 교회를 산산히 찢어 놓을 정도로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렇게 해서 전쟁을 치루고 둘 중 한 사람이 옳은 사람이었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이 목사든, 장로든 교인들이 법원에서 판결내려 줬으니까 우리는 이분은 정말 존경할 수 있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죠. 다 교회가 찢어지고 산산히 갈라졌는데, 무슨 존경이 털끝만큼이라도 남아있겠습니까. 하여튼 교회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몸을 위해서 일꾼이 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죽을 각오도 안되어 있는 사람이 임직을 하겠다고 덥석덥석 올라서는 사람을 보면 난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당장 달려가서 뭐 때문에 임직을 했냐고 당장 묻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임직식때 우리 교회가 국화꽃 이외에 아무 꽃도 쓰지 못하도록 지시내린 이유가 그거예요. 국화꽃 이외에는 임직식때 꽃을 안 썼어요. 국화꽃의 꽃말이 무엇인지 압니까. 명복을 비나이다. 죽은 사람들에게나 가져다 주는 것이 국화 꽃이에요.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에요. 자신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버려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주님의 교회에 일꾼을 삼으셔요. 그래서 주님의 교회의 일꾼이 되는 자격은 무엇이냐 하면, 공부 많이 하고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세상의 높은 지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냥 그 사람이 우리 교회 나온다고 자랑하고 교회 마당에서 수없이 사진을 찍고 그러다가 몇 년 있다가 그 사람이 비리에 연루되어서 감옥소 왔다갔다 하면 그 사진 또 다 꺼내서 책생밑에다가 감추잖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죠. 주님의 교회에서 일꾼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몸을 위해서 하나님이 일꾼으로 세워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일꾼은 그야말로 노예 일꾼이고 종으로서 노예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잘 세우게 하기 위해 주님이 불러 주셨으니 총회장이 아니라 총회종이고, 노회장이 아니라 노회종이고 당회장이 아니라 당회종이죠. 회장이 아니라 회종이에요. 회종.
(예화) 저는 벌써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이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또렷하게 마음속에 남아요. 80년대 초에 전주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어느날 어느 기독병원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어요. 어떤 시골 신사 한분이 와가지고 시골 중년 아저씨가 와서 뭘 사정을 하고 병원 의사는 손을 내저으면서 안된다고 하는 광경이에요. 이게 뭔일인가 했더니 시골의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알다시피 예전에는 목회가 시골에 안 갔습니다. 지금은 목회자 없는 교회 거의 없는 것 아시죠? 다 갑니다. 그런데 없었어요. 교인이 열댓명 남았는데, 목사님이 가끔오시는데 생활비를 못해드리니까 6개월 1년 목회하시다가 읍내의 교회로 가시든지, 다른 교회로 가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나 목사님은 없어졌어도 교회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 아니에요. 장로님도 없어요. 집사 한 사람이 가장 나이가 많고 그 교회에 오래 다녀서 할 수 없이 새벽기도도 인도하고 주일날 목사님들을 꿔다 설교를 했는데, 매주 꿔 오는 것도 쉽지 않터라는 거예요. 그래서 본이 아니게 자기가 설교도 하고 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왔대요. 그런데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는데 자기는 한벽한 집에서 자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성도들에게 교회를 짓자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성도들이 우리 열명이서 무슨 교회를 짓느냐고 그랬더니 믿음으로 해보자고 하면서 청년들을 데리고 시내에 가서 밤중이면 모래를 퍼다가 시멘트를 사다가 이겨서 벽돌을 찍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한푼 두푼 가서 노가다를 뛰어서 돈을 모으고 이렇게 해가지고 그래도 애를 썼더니 여기저기서 조금씩 도와줘서 담장을 쌓고 예배당을 조그맣게 만들고 위에 루핑친 지붕을 얹어서 아주 훌륭한 교회가 되었어요. 가구는 없지만 그냥 나무로 두들겨서 포장마차 의자처럼 만들어서 우리 초등학교때도 그러한 의자 놓고 예배 드렸잖아요. 그렇게 했는데 천막과는 비교될 수 없는 아주 좋은 교회가 되었어요. 그런데 참 하나님도 무심하신지 그냥 어느 날 비가 와가지고 그 교회에 비가 다들어오고 벽 한쪽이 무너지고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었는지 바람이 심하게 분 것이 아니라 오직 아우러지게 지었으면 지붕이 통째로 날라가서 저 밭에 가서 고꾸라져서 그래가지고 도루묵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그 위에다가 텐트를 쳐서 예배를 드리는데, 교인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에요. 어느날 이 양반이 밤새 밤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 그렇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날은 부인보고 그러더래요. 여보, 이 실화에요. 여보, 내가 장애인이 되어도 당신 나를 데리고 살 수 있어? 여보 그것을 말이라고 해요. 당신이 내 남편인데. 내가 눈이 없어도? 그것을 말이라고 해요. 여보 이것좀 봐. 신문을 내놓은 거예요. 옛날에는 장기들을 쉽게 사고 팔 수 있었으니까. 그러한 광고가 났어요. 눈을 산대요. 그래서 내가 두 눈이니까 한쪽 눈을 팔아서 그래서 교회를 짓자. 부인이 집을 팔아서 건축헌금을 한 사람은 봤지만, 눈을 팔아서 건축헌금 하는 사람은 못봤다. 그거 안된다. 일주일 동안을 돌아 앉아서 밤마다 베겟닢을 적시는 거예요. 보다 못해서 그러면 당신 뜻대로 해보라는 거예요. 그 신문을 들고 이제 병원을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러한 광고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파간다고 낸 것이 아니라 가족 중에 죽는 사람이 있으면 마지막에 좋은 일 하라고 유언처럼 남긴 사람들의 눈을 산다는 것이지,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안산다는 거예요. 제발 내 눈을 사라고 그때 돈 50만원이에요. 50만원이면 된다고, 더 이상은 내가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50만원이면 교회를 지을 수 있었는가 봐요. 그거예요. 그래서 이제 하도 답답하니까 원장한테 데려갔어요. 원장은 왜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떼를 쓰느냐고 야단을 쳤어요. 도대체 당신 그것 팔아서 돈을 주면 뭐 할라고 그러냐. 그때 이제 구구절절히 자기네 교회의 역사를 다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이 병원 원장님이 장로님이었어요. 안경을 벗으면서 눈물을 닦으면서 이야기 해요. 이보시오. 나는 한 교회의 장로로 20년이 넘게 섬겼는데도 그러한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집사가 되어서 그렇게 할 생각을 합니까. 그러면서 부끄러움에 눈물을 닦아요. 그래서 방송을 해서 점심시간에 필요한 의사와 간호원들만 남기고 모두 이제 회의실로 모았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이 집사의 희생을 간증하였어요. 그 자리에서 200만원이 거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일꾼이 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몸을 위해서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에요. 은사나 재산이나 지위나 이러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에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교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제가 전도사 할 때에 그 교회의 장로님, 말하자면 수 장로님이셨는데, 선임 장로죠. 애들 데리고 수련회 가면 꼭 따라 오셔서 교회 아이들이 혹시 어려움을 당하지 않나 꼼꼼하게 돌보셨어요. 일체 잔소리 없이. 전도사가 자기 아들뻘 밖에 안되는대도 설교를 하면 저 뒤에 앉아서 머리가 히끗히끗한 노인네가 무릎을 꿇고 한없이 우시는 거예요.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그러면서 계속 무릎을 꿇고 한없이 우시는 거예요.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됩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는 가장 훌륭한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일을 하는게 아니라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맨처음 일꾼이 되었을 때 주님이 주셨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을 고달프게 일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면서 사는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에요.
교회 일꾼이 된다고 하는 두 번째 의미는 영혼들을 위하는 것이에요.
B. 영혼들을 위함
영혼들을 위하는 것, 그래서 오늘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왜 그래요. 왜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이죠. 내가 죽음으로 교회 지체들이 살고, 내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병든 영혼들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자기의 이름을 높이 내기 위해서 심지어는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서 주님의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교회에 일꾼이 되게 하신 것이에요. 삶과 죽음은 짝을 이루어요. 잘 죽는 그곳에 잘 살아나는 일이 있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졌는데 죽지 않으려고 한다면 밀이 생겨날 수 없겠죠. 좋은 씨는 잘 썩고 죽는 씨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영혼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잘 보시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했는데 씨가 전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씨에는 씨눈이 있습니다. 씨눈까지 죽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씨눈은 살아요. 그리고 씨눈아닌 옆에 있는 많은 알곡들이 감자에 있어서는 감자의 과육이 그 씨눈을 살리기 위해서 썩어서 거름이 되는 거예요. 쌀도 쌀눈 하나 살리려고 큰 통쌀이 모두 썩는 거예요. 그게 잘 썩을 때에 벼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쌀눈이 아니에요. 우리는 감자의 씨눈이 아니에요. 감자의 씨눈, 그리고 볍씨의 그 씨눈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셔요. 그래서 우리는 죽는 거예요. 잘 죽을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살아서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죠. 교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영혼들을 위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장로님들이 되실수록 영혼을 직접 섬겨야 해요. 전도할 뿐만 아니라 방황하는 영혼을 꼭 붙들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주고 사랑으로 심방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주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고 이렇게 영혼들을 위하여 땀과 눈물과 피흘림의 삶을 살 수 있을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의 영혼은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죠.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우리로 다시는 우리를 위해 살지 말고 영혼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신 것이죠. 교회가 작을 때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해 보이다가 교회가 커져 보이면 100명의 영혼도 귀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은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받았던 그 첫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왜 그렇게 주리고 고단하고 핍박받는 생애를 사셨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분이 조용히 집안에서 목수일이나 거들었다면, 누가 그 목수를 끌고가서 나무에 매달아 못박아 버렸을까요. 예수님을 사람들이 미워했던 이유는 그분이 영혼들을 위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했어요. 그래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음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하셨어요. 정말 우리에게 영혼을 위한 눈물이 있습니까. 우리가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내 사업 어렵고 우리 아내 병원에 입원하고 내가 병원에서 사망 선고 받아서 운 것 말고 나보다 더 비참한 영혼,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영혼, 무지와 어둠속에서 교회의 악을 행하고 방황하는 영혼들, 그 지체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 때문에 여러분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본적이 언제입니까. 주님이 만약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면, 우리는 아마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마음은 산산히 찢어져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영혼들, 주님이 우리를 목사 삼으신 것, 장로 삼으신 것, 권사 삼으신 것 모두 그 영혼들을 가꾸고 돌보라고 우리 주님이 세워 주신 것 아닙니까. 너희의 양무리를 치라고 우리를 구역장으로 교사로 장로로 목사로 불러 주셨잖아요. 삯꾼은 엄청나게 나쁜짓을 해서 삯꾼이 된 것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품삯을 받으려고 그 짓을 하는 것이 삯꾼입니다. 삯꾼은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닙니다. 사기꾼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정당하게 상업적인 거래로 그 일을 하는 것이죠. 교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영혼들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그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그들이 못만난 것을 아파하고 내가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령한 복을 못누리는 그들을 위해서 아파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 주신 것이죠. 그래서 교회의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많은 지체들의 고난을 한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매순간마다 마음속에 영혼을 향한 눈물들이 흘러야 합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의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교회의 병들고 아픈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그러면 얼마나 교회에는 얼마나 더 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까. 인간의 영혼이 이 지상에서 순수해지는 순간이 두 번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뉘우치는 그 순간이고, 또 한번은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릴 때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괴로움을 기뻐하는 길
마지막으로 그는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서 주님이 교회에 남기신 그 고난을 육체에 채워가면서 살아가는 것은 괴로움인데, 그 끔찍한 괴로움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일까. 첫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함
그래서 내가 당하는 이 일이 억울하고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언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고 부귀를 누리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위해 섬기신 그 모든 섬김의 마지막은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한 생애였고, 그리고 그래서 그분의 별명은 충성이었고, 그분의 별명은 아멘이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도 사람의 몸을 입으신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끔찍한 고난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할 정도로 두려운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다시 확인하시고 그분은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애원하며 당신 자신을 기쁨으로 십자가에서 못박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은 고난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아닌 것처럼 성공과 번영,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그리고 만족, 이러한 것들을 주는 것이 복음인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할 때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슬퍼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2천년동안 우리 교회를 살려왔던 피묻은 복음은 멸시를 당하고 있고, 족보도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복음인것처럼 오늘 우리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 쓰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속에서 언제나 교회는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복음을 붙들 때, 이 세상의 번영과 성공보다는 고난당하신 그리스도께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게 해주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 크신 고난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 고난에 빚진자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회 시대마다 복음은 활짝 꽃 피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것은 당신의 피를 콸콸 솟아나게 해서 그 피에 우리 교인들을 담그고 이 세상에 그 피를 쏟아내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거늘 교회 자신이 이 피에 낯선사람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고난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시련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의 번영과 영광과 쓰레기같은 사상들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말하던 사도들의 이 담대한 외침은 금과 은도 내게 있으니라고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명하노니라고 외칠 수 없는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과연 깊은 밤 조용한 예배당에서 교인들이 흐느껴 우는 기도소리가 교회 담장넘어가는 교회를 얼마나 볼 수가 있을까요.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저희 초등학교때 교회 가면, 늘 부르던 찬송가는 이러한 찬송가였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예수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에.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우리가 80년대 초에 많이 불렀던 찬송가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새카맣게 잊혀졌는지 모릅니다. 꼭 이 부르지 않는 찬송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교회를 위한 고난을 참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주의 형상 닮아감을 기뻐함
마지막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감을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몇일에 한번씩이라도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섬길수록 그 사람이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때문이죠. 맨 처음 주님의 일꾼이 되었을 때는 좀 가볍고 경박하고 그리고 천했는데, 온갖 시련과 고난을 다 당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많이 받은 후에는 주님의 모습을 더 닮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교회에 목회를 하다가 어려울 때마다 항상 가슴에 손을 얹고 되내이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교회를 섬기라고 불러주실 때, 우리가 무릎 꿇고 사정하는 주님께 거들먹 거리며 가는 것이 아니라 존귀하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면서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묻겠습니다. 그래서 존귀하신 보좌에 앉으신 주님 앞에 빗길을 걸어가 무릎 꿇고 일꾼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꾼이 된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를 섬기다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며 역정이 생긴다면 그것은 종의 신분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되내이십시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깊이 고백하며 예수 십자가의 죽으신 것이 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이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