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마지막 사형 당하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수비대가 있는 곳에서 채찍을 맞으시고 당시의 규례를 따라서 자신이 매달리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따라 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 같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마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은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가셨고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를 지시고 자꾸 쓰러지시니까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고도 그 쓰러지실 정도로 그렇게 온 몸이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일당의 여인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마지막 남긴 부탁이라고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굶주리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고통을 받으시고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신 후 그렇게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예수님이 그저 혼잣말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몸을 돌이켜서 슬피 울며 따라 오는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경하며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을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슬픔에 잠긴 여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분과 지성으로 교통하기 가장 좋은 상태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주 기쁘게 당신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경건의 생활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 솟구치는 정념으로 마음이 쏟아지다가도 어느 한순간에는 냉담하고 싸늘하게 돌아서는 이러한 굴곡이 심한 기복의 감정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평화롭고 그리고 사랑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릴 때도 있고 안 들릴 때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의 시간을 통해서 성경을 대면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친히 보아라 하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매일 매일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Ⅱ. 골고다로 오르시는 예수님
Ⅲ.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A. “예루살렘의 딸들”을 부르심
물론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라고 불렀고, 바로 그 앞에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라고 하는 한정어구가 나오니까, 이것은 그 앞에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라다라고 하는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러한 표현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하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는 어떠한 도시의 딸 하면 그 도시에 딸린 마을들을 의미했습니다. 현대화된 사회로 이야기 하면 평촌, 과천, 안양, 이러한 것들은 서울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큰 도시가 있고 딸려 있는 작은 도시들, 옛날에는 작은 마을들이 함께 어울어져서 하나의 성이 있고, 성 주변에 하나의 마을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가리켜서 어느 도시의 딸, 이러한 표현을 히브리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라고 하는 이것이 아마도 예루살렘에 속하거나 아니면 주변의 흩어진 마을이나 작은 도시들을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많은 여자들의 무리가 따라왔다고 하는데 사실 그들이 모두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멀리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별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것에는 이렇게 이중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와 그리고 예루살렘의 사람들이었고 당신이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일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이 여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을 부르듯이 한 가족처럼 이들을 사랑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이 당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여인들을 향한 최고의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B.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것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당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계셨고 사실 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 같고 능력이 없어서 원수에게 짓밟히는 것 같지만, 바로 그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알았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도 이미 아셨으면서도 개의치 않으시고 회개도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의 길을 그들에게 미리 예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난에는 당신 혼자만 당하여야 하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울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당신 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자칫하면 이렇게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그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러나 그 슬픔의 깊이가 우리 신앙의 전부를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슬픔의 깊이는 반드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주는 그 의미를 따라 사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C. “너희와 너희 자녀들 위해 울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우는 대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적용을 갖습니다. 멀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게 될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움을 의지하는 것이고, 국지적으로는 이제 약 40년 후에 도래하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수님이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늘 로마의 압제에 반대하여 독립을 꿈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후 70년에 디도라는 장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서들은 비참한 커다란 징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들이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후에 받게 될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0년 후에 다가오게 될 이 끔찍하고 무서운 심판을 아셨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정된 대로 골고다 언덕에서 죽지만 이들에게 임할 이 심판은 너무나 크고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자녀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기를, 그래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40년 후면 이들 중에 통곡하며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이미 수명이 다하여 죽을 것이지만, 이들의 자녀들은 살아있을 터인데, 그래서 이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육체의 죽음보다 남아있는 사랑하는 영혼들의 다가올 심판을 더 염려하시며 그들의 안녕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영혼들을 더 사랑하시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까지 이들과 자녀들을 위하여 간절히 눈물 흘리도록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은 오늘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은 망하였고 커다란 환란을 이 사람들 대부분이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지만, 오늘도 예루살렘의 멸망 보다도 더 큰 심판과 멸망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심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이고, 우리의 자녀들의 회심을 위하여 힘쓰지 않으면 안 될 이유인 것입니다.
Ⅳ. 자녀들의 회심을 위하여
요새도 조사를 해 보면 교회 안에서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부모가 말할 수 없이 경건하고 헌신되어 있는데도 그런데도 자식들이 신앙에 워낙 무관심해서 회심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 보다 더 많은 비율은 부모가 참된 회심이 없기 때문에 이 아이를 위하여 회심의 필요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또 회심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워낙 일천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그들의 삶의 중심관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영혼이 회심했는지 회심하지 않았는지가 그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공부하고 잘 크고 하면 아이들이 충분히 잘 될 것이라는 이러한 세속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영혼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위로하는 말이 애들이 클 때는 다 그렇지, 철이 들어야 신앙이 들어가지. 철이 들수록 신앙이 안 들어갑니다. 그게 인간의 부패성입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 자식의 영혼의 회심의 문제가 절체절명의 중요한 숙제이고, 이 아이가 크면서 점점 더 예수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깊은 두려움 속에서 이 아이들을 다루고 돌보고 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부모가 이 세상 먹고 사는 일, 자기 이 세상에서의 관심과 쾌락, 자기 생활의 즐거움, 하잘 것 없는 것 때문에 공허한 일에 바쁜 것들 핑계를 삼아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마음을 쏟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나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자녀들이 회심 못 한 것이 죄입니까. 물론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여러분 자녀들이 회심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회심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우리 아이들이 회심하지 않은 것은 다 저의 죄 때문입니다. 제가 애들을 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이에게 내가 모본을 보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를 위하여 함께 신앙생활의 기쁨을 알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 저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상명에 대해서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나, 아비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자기 손으로 실수해서 아이를 죽였을 때 그 때 부모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보시기에 그 부모들이 불쌍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래, 너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 그랬을 때 적어도 부모가 되었으면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가 그랬었던 것처럼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본다면 눈을 감아도 좋다고 기도를 했는데 이제 그 일이 이루어졌으니 내가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그게 한맺힌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맺힌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의 회심을 위하여 노력해야 될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다섯가지를 짚어보겠습니다.
A. 회심 없인 참된 구원이 없음
첫째는 회심이 없으면 참된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철이 들어서 다 자란 아이들, 적어도 인지적 발달 측면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 기독교 신앙의 대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된 아이들, 회심 없이는 참된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회심 없이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으니 이 아이가 회심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이 구원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여러분 자신은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을 위해서 이렇게 교회 나오고 출석하고 얼마간이라도 헌금하고 의무를 이행하고, 못했을 때에는 가책을 받고 하는 것이니, 허무한 일에 종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진리도 있습니다.
방금 책을 읽다가 왔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진리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명제에 위반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소위 그리스 역사에서 나오는 크레타인의 모순입니다. 크레타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은 고대 역사책에 보면 크레타 섬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하는 명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크레타 인이 그 말을 했습니다. 맞아도 말이 안 되고, 틀려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크레타 인이 거짓말쟁이라고 크레타 인이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크레타 인이 거짓말쟁이라고 말을 했는데 사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할 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레타 인이 거짓말쟁이라고 했는데 사실이 안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없다. 최소한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리여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없다. 그러면 자기 말도 잔리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감히 진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자기가 말한 그것은 진리일 것 아니겠습니까. 진리가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진리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회심 없이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상태가 어떠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영혼 속에 부어져야지만 영혼이 영혼다워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인간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B. 회심 없인 보존할 은혜 없음
두 번째는 회심 없이는 보존할 은혜도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관건은 뭐냐 하면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놓으시고, 교회에서 목양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심도 필요하고, 회심 때 받은 은혜도 보존해야 하는데 전자가 회심이라면 후자는 성화입니다. 그러면 전자가 처음 은혜를 받는 것이라면, 후자는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회심이 없는 아이들은 보존해야 할 은혜가 없습니다. 보존해야 할 은혜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눈이 멀고 마음은 어두움으로 가득차고, 감정은 충동적이 되고 의지는 완고해서 하나님께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 것이 어린 아이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아이들도 다루다가 보면 교회에서도 보면 도대체 무엇이 심통이 틀어졌는지 불과 두 세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교회 복도 바닥에 앉아서 소리소리 지르며 누워서 입술이 새파랗도록 우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뭔가 자기 마음에 안 맞는 일이 있어서 입술이 파래지도록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울 때, 그것은 온 우주는 내 마음에 들게 하라. 온 우주는 내 마음에 들게 하라. 그것입니다. 다른 우주가 거들 떠 보지 않으니까 엄마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결국엔 인간이 얼마나 바탕이 죄인인가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매일 매일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않은 아이에게는 보존할 은혜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급한 것이 회심입니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C. 회심 없인 경건생활이 없음
세 번째는 회심이 없이는 경건생활이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아이에게 돈으로 유혹을 하면서 성경을 읽힐 수도 있고, 그리고 아이들을 호되게 다루어서 가정예배에 참여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스스로 경건의 생활이 좋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매달리는 이러한 간절한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회심 없이는 경건생활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도 기도해서 그 기도의 달콤한 맛을 보아야 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이 정말 꿀같이 달다는 것을 경험해야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를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나와 함께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을 아이들이 느낄 때 자발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의지하게 되고 이러한 것들이 훈련되면서 어느날 어떤 사태가 자신에게 발생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들을 생각하고 해석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빌고 하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이 없이는 경건생활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종종 어떻게 보면 우리 아이가 분명히 회심한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원인을 경건생활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회심한 아이들의 영혼은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의 영혼과 다릅니다.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의 영혼은 처음부터 아직 죽어있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한다고 괴로워지거나, 말씀의 은혜를 못 받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회심한 아이들은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침체에 빠지면 그 겉모습은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의 겉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는데 뭐냐 하면 그 속에 영혼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목마름이 있고 배고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싫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체워질 수 없는 마음의 빈구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이들을 부모님이 따뜻하게 돌보면서 이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침체 속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어서 어린 아이들이라도 계속 경건생활을 매일 기도하고 성경읽고 예배드리는 생활을 계속하도록 그렇게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다 아이들이 말을 안하지만 항상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일을 대면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게도 말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돌보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이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신이 하나님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반드시 회심만이 아니라 회심한 후에는 그들이 끊임없이 경건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며 은혜를 받으며 자라가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목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목양도 가정의 몫이다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일차적으로 해야 할 몫이다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도와야 합니다.
D. 회심 없인 목양이 불가능함
네 번째는 회심이 없이는 목양이 불가능합니다. 목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교훈하고, 잘못 살았을 때는 책망하고, 그릇되게 갈 때에는 바로 잡아주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의로 교육하고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 돌보는 것이 목양입니다. 그런데 목양은 양에게나 가능하지 맹수나 다른 짐승에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피리를 불면 양들이 풀을 뜯다가도 피리 소리를 들으면 양들이 고개를 들고 소리 나는 쪽으로 바라보면서 목자가 있는 곳으로 보일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사파리에 가서 호랑이, 사자들이 있는 곳에 한복판에서 피리를 불어 보십시오. 왠 도시락이 부는 피리인가 하고 와서 물어 버릴 것입니다. 모든 짐승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피리 소리를 듣고 코브라가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양은 양떼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맹수들에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저 사람이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일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온통 해집고 다닙니다. 교회에서는 교회는 교회가 가진 영적인 특성 때문에 진리를 알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앞에 복종하고 하나님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최고이지만, 이렇게 참답게 회심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목양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최고인 것입니다. 그리고 막 해집고 다니면 말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이 없이는 목양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모로서 아이들을 따금하게 가르쳐서 도덕적인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들을 목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서 부모들은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 회심 없인 거룩함 불가능함
마지막에 한 가지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회심 없이는 거룩함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삶은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거록이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의 도덕률에 자신의 마음이 합치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버리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쁨입니다. 나의 뜻은 날마다 버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가장 훌륭한 고백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관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적용된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합치입니다. 이것은 회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심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이 일을 위해서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실 때, 울라는 것은 슬퍼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매달려서 예수님이 알고 있는 그날에 이르게 될 그 끔찍한 심판이 이르지 않도록 너희들이 행하는 길을 돌이키고 너희 자녀들의 삶도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삶이 되라고 예수님이 촉구하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든지 아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번에 월요일에 인턴십을 하는데 어느 학생이 우리 회심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간증을 하는데 굉장히 신선하고 은혜로웠습니다. 조카와 같이 사는데 밤 10시 반이 되어서 자기는 할 일이 있어서 컴퓨터로 글을 쓰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6살 먹은 조카가 밤이 늦었는데 자기 방에 들어가 자지 않고 거기 앉아 책을 읽고 있더랍니다. 들어가서 자거라 했더니 들은 척 안 하고 책만 보더랍니다. 가서 자라 하니까 싫어 나는 삼촌 방에서 계속 책 읽을 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책을 읽나 보았더니 어린이 전도 협회에서 만든 글 없는 그림책을 계속 보고 있더랍니다. 그 순간 마음이 움직여서 이 조카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그러나 보다 하고 마음이 움직여 아이에게 글 없는 그림책을 넘기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 인간이 불순종해서 죄를 짓고 타락한 것, 그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고 돌아가신 것,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황금빛 하늘나라에 대해서 쭉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쭉 듣더니 삼촌한테 와락 덤벼들더니 끌어안고 큰 소리를 내서 울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복음을 제시할 때 너무 무섭게 했나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러냐. 전도자들이 전도받는 사람보다 믿음이 조금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가끔 그렇습니다. 복음 전해놓고 아이가 울면 누가 때렸니 그럽니다. 너무 뜬금 없습니다. 아이가 막 울더랍니다. “왜 그러냐. 삼촌 얘기 들으니까 무섭니?” “아니.” “왜 그래?”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어요. 예수님 잘 믿고 싶어요.” 그렇게 전하기만 하면 받아들이는데, 그러한 역사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데, 부모들이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이러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이었던 한 자매분도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전도학교에서 숙제를 내주었는데 밤이 되었는데도 그날 숙제를 못했습니다. 내일이면 가야 했습니다. 책상에서 앉아 공부하는 중학교 1학년 딸에게 “이리 와라.” “왜요?” “엄마 숙제좀 도와줘라.” “왜요?”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거기에서 무릎을 꿇고 자기 딸이 영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녀들을 회심하는 상태로 내버려둔 그 부모들이 얼마나, 안 그러한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만하게 아이들을 내버려 두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정말 타는 듯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이 아이를 위해 울고, 아이의 회심을 위해 주님 앞에 매달리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