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잔잔케 하심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
녹취자 : 오희열
그저 조금 커다란 호수에 불과한 갈릴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 풍랑이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양쪽에는 거의 2000m정도 되는 엄청난 산들이 이어져있고, 아시다시피 갈릴리의 수면이 지면보다 훨씬 낮습니다. 움푹 파여 있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호수에서는 더운 공기가 올라오고 산에서는 찬 공기가 내려오면서 높새바람이 이는데, 현지 사람의 얘기로는 정말 심하게 바람이 불 때는 호수의 물결이 2.5m까지 파도가 친다고 하니까 호수의 파도로서는 굉장히 큰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형적인 독특성이 있었습니다. 그 갈릴리를 오가는 배는 지금도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배는 아닙니다. 그런 큰 배의 수요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이야기니 그 당시에도 배를 만드는 기술은 조악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작은 배가 풍랑을 견딜 때에는 큰 배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풍랑이 크게 이는데 예수님은 주무셨고 제자들은 두려워 떨며 예수님을 깨우면서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깨어나셔서 “왜 무서워하느냐, 너희들은 믿음이 참 작구나.”, “바다야 잠잠하라.” 하시니 풍랑이 멎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은 이야기 속에도 수많은 스토리들이 들어있지만 그것을 오늘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것 같고,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여기 그림처럼 묘사된 광경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는 제자들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잠을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큰 풍랑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고 있으셨던 예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제자들의 태도가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니 배가 요동치고 뒤집히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고, 이것은 아마 배에 오르긴 전의 당신의 사역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제자들은 요동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많은 기도보다는 기도가 없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더 훌륭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비교와 대조가 가능하다면 끊임없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요동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기도하지 않더라도 평소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환란과 시련 속에서 그분을 향한 신뢰 때문에 요동하지 않는 마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발견하기에 더 좋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기도, 일생을 기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가 체화(體化)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순간의 기도가 우리를 성화시킬 수 없고, 한 순간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 성화를 단박에 퇴보시킬 수 없는 것처럼 성화는 그의 전 본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해져가는 과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깊은 신뢰 속에서 주무시고 계셨으니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께 소란을 피우며 도와달라고 간청했던 제자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하나의 질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정도는 어느 정도입니까?”입니다. 삶이 요동치는 것 같은 깊은 위기가 일어나고,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 같은 풍랑이 삶 속에 일어나도 여전히 여러분은 그 요동치는 인생의 뱃머리에서 조용히 잠이 들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베여 있습니까? 한 사람이 승승장구할 때, 혹은 한 사람이 깊은 시련에 직면할 때, 그 어느 때에든지 그 사람의 태도가 주님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인격적인 신뢰가 때로는 기도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신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이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아무리 우리와 함께 하셔도 주무시는 예수님은 자기들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계속 주무시고 계셨더라면 이 파도가 점점 심해져서 배가 전복되고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죽고 예수님은 간신히 살아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든 깨어 계시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특별한 사명이 있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믿음을 예수님을 더 기뻐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큰 풍랑이 일어나고 배가 요동치게 되었지만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다.”라는 고백을 주님이 더 기뻐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을 기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깨우고 간절히 부른 것을 적용할 때는 기도로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기도라기보다는 요동치는 삶의 상황에서 불안을 억제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에 이는 파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바다를 명하여 “잠잠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정말 예수님께서 잔잔하게 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오히려 제자들의 마음속에 요동치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파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 그분의 능력을 믿는 그 신뢰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요동치는 파도를 한 마디의 명령으로 잔잔케 하심으로 인성아래 감추어졌던 당신의 위대한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주님이 명하시기만 하면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요동치는 상황도 주님의 한 마디의 명령에 잔잔해 질 수 있고, 제자들의 심령 속에는 갈릴리 바다의 폭풍보다 더 큰 파도가 그들의 전 존재를 위태롭게 했지만 “잠잠하라”는 주님의 한 마디에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의 모든 평화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평화와 함께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주권과 통치아래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칼빈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이 요동치고 고난이 겹칠 때, 원수들이 우리들을 이기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조용히 생각하고 믿자. 인생의 모든 일들이 주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는 요동침과 분노,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순순한 열정이 아닌 데에서 오는 불안한 요동은, 대부분 우리의 마음의 요동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이것은 이래야하고 저것은 저래야한다는 강력한 집착이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보면 아무리 명민하고 학문에 뛰어나도 그 나이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경륜하실 때, 사람의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와 가정에 안정감을 갖게 하고 젊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험하고 도전하게 하심으로서 이 사회의 균형을 잡아가게 하셨습니다.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승자가 되어서는 좋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이것은 이래야하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고 목숨을 걸 정도로 그렇게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인생을 한 참 살고 보면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때에는 그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고통을 받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생각도 듭니다. ‘아, 그때 그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는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선배목사님들이 나에게 그게 너무 중요하다고 애타게 충고해 주었을 때, 나는 그까짓 게 무슨 문제가 될까하고 하찮게 여겼을까? 그 결과 인생을 많이 살고 나니 너무나 좋은 많은 기회들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한 번 흘러가면 다시 거꾸로 돌아오지 않아서 기회도 그 물에 떠내려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 사람의 인격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열정과 하고자 하는 욕망, 하지 않고자 하는 욕망, 라틴어로 ‘볼로’(volō)와 ‘놀로’(nōlō) 라고 합니다, 그러한 ‘볼로’, 하고 싶어 하는 것과 ‘놀로’, 싫어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고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서 무엇이 정말 마음이 요동할 만한 것이고, 그 움직이는 요동침이 성령과 진리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말씀의 빛 아래에서 객관적으로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끗하게 해서 가치 있는 것을 향해서 마음이 계속 뛰는 것입니다. 만약 그 가치 있는 것을 향한 가슴 뛰는 마음이 없다면 그 어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 사람을 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야할 점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요동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에 직면하며 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죽음의 빛 앞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진정으로 가슴 뛸 가치가 있는 것을 향해 가슴이 요동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그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정신적인 고동들이 더 힘찬 맥박이 되어서 우리의 삶 전체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열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치있는 것을 향해 불타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우리의 얼굴에 주름을 남기지만 용기가 없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주름을 남깁니다. 그래서 아주 젊은 사람도 늙은 정신을 가질 수 있고, 늙은 사람도 젊은 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요동치는 그 파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 앞에 잠잠해지기를 바랍니다. 옳지 못한 파도는 잠잠해지고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정동의 파도는 더욱 힘차게 쳐서 우리의 삶 모두에 맥박처럼 뛰놀고 그래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역 속에 그렇게 새 생명이 불어져 넣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 사람은 너무 약하지만 주님이 그를 붙들고 계실 때에 그는 참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잠자고 죽은 자와 같은 집단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