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Ⅲ 5 (1993. 12. 22 수요예배)
능력의 도 십자가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전1:8)
녹취자: 김경애
여러분 그런 꿈을 꾸신 적 없으십니까? 저는 너무 나쁜 짓을 하고 혹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을 하고 막 도망 다니는 꿈을 꾼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어떠냐하면 꿈속에서도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만 나를 무효로 해준다면 정말 잘 살텐데 하는 한결같은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살인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사실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늘 말씀드리려는 내용은 이 십자기의 의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는 죄 사함의 표적이요, 하나님의 용서의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옳은 생각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표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를 단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죄 사함의 징표라고 믿는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십자가를 아느냐고 했던 질문은 너희는 왜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입었는데 왜 그 십자가를 기념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정도일 것이고 제가 지금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도 우리를 구원해준 십자가를 잊지 말고 살아야지만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결코 죄 사함,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죄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그랬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또 너희 범죄와 육체와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거슬러서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 의문에 쓴 율법의 증서의 효력을 지워버리셨습니다. 율법은 여전히 있으나 그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규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소서!’ 하고 외칠 수 있는 호소력을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율법을 범한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한사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심판을 행하시고 공의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율법도 무효로 만들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정사와 권세를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했습니다. 헬라어에는 정사와 권세를 무장해제 시키시고 십자가로 이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정사와 권세’ 즉 마귀의 세력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을 십자가가 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내리시는 수단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 사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우리 자신은 그런 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고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능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입니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을 때로 한정되어있습니다. 거듭나고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거의 죄와 더불어 싸우지 못하는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각성되지 못한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기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갸륵한 효도의 차원이지 정말 그런 능력 있는 삶을 살기위해서 그 십자가가 자기에게 능력이 되는 영적이 현실을 늘 경험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살아서 자기를 유혹하고 그리고 육체도 살아서 자기를 유혹할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가 끊임없이 능력이 되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거슬러 살기를 원하고 인간의 육체에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단단히 붙들어 매어있는 그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을 통해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십자가를 통한 능력이 그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사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내리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붙들려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참으로 압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참으로 아는 것은 그 십자가에 붙들리고 그 십자가에 사로잡힌 것 그것은 곧 십자가를 통해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한 일인 것입니다. 단지 죄 사함이 아니라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능력이 되는 것은 구원을 얻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가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도에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표 자체에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 망가지면 이것은 폐기처분해서 태워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깃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이것을 세워놓는 이것은 이것을 볼 때마다 십자가의 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교회당에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이것을 숭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므로 우리 교회들은 이것을 제거해야한다고 달지 않는 교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이 십자가를 숭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라볼 적마다 십자가의 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는가 하는 그 십자가의 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죄 사함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성령의 능력은 반드시 죄 사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물론 처음에 죄인이었을 때 성령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자연인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기가 구원을 체험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아주 즉각적인 성품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느냐하면 하여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더불어 살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극적인 구원의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여기에 열매가 맺혀있는 나무를 보고 뿌리도 안보고 어떻게 이것이 살았는지 아느냐고 그럽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몇 달 전부터 살아있는 나무인데 뿌리를 찾아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말라서 죽어서 시들어 가고 있다면 그것은 뿌리를 보아야 판정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이미 죽은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사함에 대한 극적인 체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현재의 결과입니다. 지금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넘치도록 살고 싶고 그렇지 않을 때 내 마음이 도무지 평화가 없고 그리고 기쁨이 없고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때 나에게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입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던 죄들이 이제는 자기의 마음에 한없는 아픔과 고민을 불러일으키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에 구원받을 때만 죄 사함을 받으면 그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우리들이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새롭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입고도 그러고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이 무엇을 앞세우며 어느 그늘아래 얼굴을 숨기며 어느 그늘아래 그 뻔뻔한 손을 감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네가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뇨?’ 하나님이 천국의 문 앞에서 우리에게 물으실 때 여러분 ‘열린 교회 창립멤버 했었습니다.’ 그런 것 가지고는 하나님이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30명을 전도하고 헌금을 몇 천만 원하고 십일조를 한 번도 떼어먹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문을 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향하여 빗장을 잠그시고 천국 문을 열지 않으시고 사자를 통하여 나를 지옥에 던지실지라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천국의 문 앞에 무엇이 서있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 뒤에 우리의 모습을 감추고 ‘보소서 아들의 피니이다.’ 주님이 그 아들의 보혈을 보고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실 것이라는 노예의식에서 출발되는 충성과 헌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출발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근신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들 때문에 내가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는 것이 내가 최고의 기쁨이므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 이것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인 것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그 죄 사함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이미 용서했고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용서받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떠났을 때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아가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청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간 가운데 우리는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묵상이라는 시간입니다. 거의 그들에게는 침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말하는 것을 금하는 날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고요히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묵상했습니다. 정말 생기를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이 그러한 진리를 묵상할 때 새롭게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그리고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십자가의 묵상을 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용납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면 우리가 이해가 되겠는데 어째서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십자가가 십자가는 과연 능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죄를 끊을 수 없는 인간입니다. 죄를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인간입니다. 자기로부터 자유롭고 자신을 개조하기에 절대적으로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를 끊을 수 없느냐하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습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 습관은 절대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정말 습관이 몸에 배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고통스러운 그것을 동반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쳐지지 않습니다. 30년 심지어는 35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붙어있습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막 이야기를 하고 그래도 또 술 끊은 기념으로 또 술을 먹고 그럽니다. 한번 먹었으니 또 먹고 그러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막 허랑방탕하며 살다가 빚에 쪼들려서 파산할 때는 정말 이제는 잘살아야겠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자기의 결심이지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낭비했던 사람들은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서 더 이런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건강해지면 이전의 습관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입니다. 제가 담배이야기를 가끔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하게 중독 들렸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중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담배였습니다. 술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냐 하면 미안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은 겉으로 넥타이 매고 번지르르하게 걸어 다닙니다. 그 사람들이 예비군 훈련을 가서 담배가 없으면 처음 보는 사람보고 염치불구하고 담배를 달라고 합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필 수 없으면 그 점잖은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서 가래침 묻은 꽁초를 주워서 찢어서 종이에 싸서 말아서 피워야지만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마약은 그것의 200배쯤 됩니다. 코카인 같은 것은 이것보다 훨씬 큽니다. 그런데 죄는 어떻습니까?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나쁘다는 사실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 죄라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자꾸 특정하고 복잡한 것을 생각하니까 ‘나는 그래도 살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충분히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가장 커다랗고 가장 중요한 죄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되지 않습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기는커녕 물질도 다 못합니다. 물질을 다하기는커녕 시간도 다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습니까?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주님이 무엇이라고 그러시느냐하면 ‘이것이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니라.’ 그랬습니다. ‘크레마파이’ 벽에 박힌 못입니다. 여기에 선지자, 율법, 모든 강령들이 여기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없이 살아가는데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우리를 고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뜨겁게 일어나서 쉽게 이야기해서 율법이 제시하는바에 의하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을 향해 눈이 멀어서 하나님밖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면 예를 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특혜를 주어서 누가 뛰어나면 무엇을 추가로 더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이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다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누가 거기에 도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끊을 수 있습니까? 정말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렇게 사는 방향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라.’ 정헌적인 명령입니다. ‘못살면 죽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 수 없게 하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죄시대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가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낳고 더 큰 죄는 점점 우리를 지배해서 종처럼 부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나도 나를 고칠 수 없고 거기에서 나를 건질 수 없는데 놀라운 사실은 뭐냐 하면 십자가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했던 우리의 모든 인생과 그렇게 살지 못할 우리의 모든 미래에 대해서 확정된 사형판결을 받은 우리에게 사면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자유케 되었다고 해방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속박도 주지 않고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 자유하게 된 심령들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에 미련한 것이 사실은 능력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사람을 향한 미워함, 인간관계의 모든 파괴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관계가 철저히 파괴되고 그리고 비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미움이라는 것, 그 미움이라는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어느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 비칠 때 그때에 그 모든 얽어맨 것들이 불에 탄 삼줄처럼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해방입니다.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해방되었도다.’ 그것이 우리 참된 자유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구원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던 그 모든 악한 세력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실 때 무엇으로 멸하실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멸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한때 완전히 타락한 도시에서 성중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도시에서 방탕한 인생들과 다름없이 그와 비슷한 인생을 아니면 그런 속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들을 이 타락한 도시에서 그런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제껏 까지 자기가 살아왔고 자기가 이제껏 까지 숨 쉬고 생각해왔던 모든 사고방식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철학과 그 모든 지혜가 휴지 쪽처럼 여겨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밝히 보배처럼 빛나서 그 십자가의 도 하나에 자기의 모든 인생을 걸고 이제는 선생도 없고 스승도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그 하나에 매이고 그것을 위한 인생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어떻게? 이제는 살아도 십자가를 위해 살고 죽어도 십자가를 위해 죽고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전하고 이 십자가를 의지해서 나아가는 이런 삶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능력이 아닙니까? 그렇게 자기를 고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십자가가 그들의 마음에 비춘바 되니까 그 도는 그들을 죄악의 도시 고린도에서 살아가고 있던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시대를 거슬러 싸울 수 있는 자유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거슬러 믿음을 지키면서 살면서 그들의 모임이 타락한 도시에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고 그리고 그들을 성도라고 구별시켜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대의 물결 속에서 고뇌하고 고민하며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어그러진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들로 나타날까 고민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와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과 같이 세상의 물결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육체를 자랑하고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매도하는 이러한 물질만능시대에는 영원을 향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그네와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 시대의 물결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이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에게 항상 감사하노라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그들은 범죄하고 타락한 도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고린도시 한가운데 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받아서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게 서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그러진 세대 가운데서도 죄악을 멀리하며 은사를 구비한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저녁의 시간에 여기에 나와서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일입니다. 굉장히 커다란 변화가 없이는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그 시대에 태어나면 모두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를 향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집은 얼마나 강한지 보십시오. 예수를 믿으라고 권해보십시오. 얼마나 고집이 센지 보십시오. 쥐뿔도 모르면서 얼마나 고집이 셉니까? 인간이 이렇게 걸어갈 때는 완고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힘이 없이 천천히 걸어가는데 돌부리를 차고 넘어지면 전치 2주, 3주 뒤통수가 깨지고 이마가 터집니다. 발이 부러지고 팔이 떨어집니다. 뼈가 부서집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저는 불교정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쉽게 교정이 안 됩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로 완고하고 교정이 안 되느냐 하면 은혜를 받아도 잘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이러한 상황으로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면 껌뻑 죽는 인생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좀 과장을 하면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전혀 교정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와 닿기만 하면 언제든지 교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유리를 보십시오. 벤치로 꺾어서 모양이 변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약품에 처리하면 녹습니까? 어림없습니다. 두드리면 굽어집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불에 대기만하면 엿가락처럼 녹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움직일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변화되기 어려운 고린도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들이 이렇게 놀랍게 변화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 때문입니다. 그 일들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십자가를 관념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가지고는 도무지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있는 제일 위험한 오류중의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과 십자가에 동의하는 것을 똑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I think so. 와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니! 그 Accept를 똑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혀 같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내가 그것에 동의한다는 사실은 구원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능력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때 가슴에 뜨겁게 타올랐던 그런 십자가에 대한 사랑 거기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감격들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식어질 때 다시 십자가는 차가운 관념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고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그 십자가를 더 확실히 느끼게 되고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십자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소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고 그럴 때 그 소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십자가의 능력 아래 살아감으로써 고린도 시민과 구별되고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 십자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시의 사람들과 다시 똑같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악을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옛날에 세상에서 하던 방식대로 교회당에 와서 파를 가르고 음행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서로의 은사의 우월성을 다툴 정도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성령은 현저히 근심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거기에 붙잡힌바 되었던 심령들은 그 사람들이 거기서 놓인바 되자 이전에 자기의 육신의 소욕을 행함으로 교회를 욕되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리자 그들은 제일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받은 그 비참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 속에 있는 육체의 소욕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 가운데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하면 정답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정통적인 교리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십자가의 능력에 붙잡히고 새로워질 때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길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 저는 우리 교회에 여러분들이 몇 년 동안 말로만 듣던 부흥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오늘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회개가 참된 회개, 참된 회개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말씀을 전하고 그런 역사가 일어날 때 그 심령들이 가슴을 치면서 뭐라고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것을 시켜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천년의 감격을 뛰어넘어서 거기에 내가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 신앙고백에 뭐라고 고백하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죽을 때에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우리도 함께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예수를 죽이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소리치는 무리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밑에서 옷을 나누는 군병들 속에 침을 뱉고 욕하는 군중들 속에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가 참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지은 윤리적인 후회 때문에 뉘우치는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회개가 진짜 깊어지면 자기의 죄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합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더 크게 부각되면서 내가 행한 이런 죄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를 못 박고 있는 피 묻은 자기의 손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그런 일들이 부흥의 때에 반드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인위적인 부흥과 구별되는 이유입니다. 인위적인 부흥에서는 그런 십자가에 대한 인식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를 알고 거기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 그것입니다. 요즘은 왜 십자가를 향해서 이렇게 냉담하게 되었을까? 한창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게 될 때 지금도 그 테이프가 집에 있습니다. 거의 눈물 없이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눈을 감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부터 시작을 해서 유월절 만찬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쭉 묵상하면서 골고다언덕까지 올라가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이 물같이 녹습니다. 그 속에서 이미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주님의 그 사랑을 간절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의 유일한 희망이요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 실패가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교훈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교회에 세우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세상의 구원의 주가 없다는 사실을 굳게 확신한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천하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이 없는 것처럼 그분에게 매달리는 인생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만 붙잡히고 그분에게만 속박되어지고 그리고 그분만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삶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숲속에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시중에 나가서 경건서적을 막 뒤져보십시오. 십자가에 대한 경건서적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있어도 그저 간단하고 얕습니다.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진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자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런 건강과 삶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우리 인생의 남아있는 여백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인생은 계속 안개 속을 헤매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 약도는 구원받기 전에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약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그곳이 아닙니다. 똑같은 곳이지만 그 약도로는 통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변화된 국적을 소유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서울지도를 놓고 경복궁을 찾아 헤매는 인생이 늘 비슷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가는데 인생이 늘 혼돈과 공허 속에 헤맵니다. 나는 예수 믿고 나서 예수 믿기 전보다 훨씬 더 헤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예수 믿기 전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변화된 인생의 맞는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지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지도를 가지고 살아가려면 인생이 살아가는 것이 계속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지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구원 취소,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시면 그 약도를 가지고 통할 텐데 그러나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후회가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하면 우리의 남아있는 인생의 그 인생이라는 그 여백은 거기에다가 우리의 안락함과 편안함과 즐거움을 써놓기 위한 빈칸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 그 예수를 우리의 온 영혼으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의 편지를 우리의 삶으로 고백하기 위해 주어진 여백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살기를 원하면 좀 더 긴 편지를 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건강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좀 더 많은 고백을 내 인생의 백지에 쓰고 싶습니다. 그것입니다. ‘주여 오늘 내영 혼을 거두시옵소서.’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할 말이 없사옵나이다.’ 라는 말입니다. 인생을 보는 그 자체를 십자가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우리가 사로잡혀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님을 생각만 해도 우리의 마음이 좋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신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이상은 하나님은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상에 붙은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그 십자가에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힐 때 다 부서지는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우리를 위하여 그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 이가 또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적마다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보다 귀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고 또 우리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휴지 짝처럼 여겨도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사신 것입니다. 형제가 마음에 안차고 자매가 마음에 거슬릴 때 저를 위해서도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저 사람 한사람만 세상에 있었어도 나 혼자 있으면 오실 주님이 나 혼자 있으면 안 오실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더 이상 줄 수 없는 최고의 것을 주셔서 사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에 깊이 사로잡혀서 늘 이 십자가에 감격하고 늘 이 십자가에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고정되어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그 십자가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진 능력으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어리석은 세상의 총명과 지혜를 파하고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나눠진 세상도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눠진 사람도 정말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도 정말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나눠진 세상도 오직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부어질 때 그때 참된 하나 됨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도의 초보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최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댓 명 가까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들의 영혼을 놀랍게 변화시키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그리고 우리도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붙은 욕심이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헛된 것처럼 떨어져나갑니까? 온 세상 만물을 가져도 주를 위해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이 십자가를 볼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깨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도에 사로잡혀서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줄 수 있도록 그런 십자가의 도가 우리의 삶속에 깊이 체험되어져서 흐르는 십자가의 보혈에 전에는 그 십자가의 피를 보고 붉은 줄 알았으나 이제는 우리의 손을 그 보혈에 담구면서 그 피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인지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형상을 들었으나 이제는 밝히 그분의 십자가 아래서 못 박힌 그 발을 만지며 그리고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며 과연 고귀한 어린양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흐느낌과 감동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이 모두 끝날 때에도 ‘주여 아들의 십자가를 인하여 우리를 받으시옵소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살아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는 인생임을 매일 매일 고백하며 좀 더 진하고 그리고 또렷한 글씨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의 인생의 남은 여백에 적어나갈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 말씀을 생각하면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147장을 찬송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