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길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네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라(신27:16) 2004.4.18 주일오전 1
2. 부모를 업신여긴 자의 결국(겔22:7) 2004.4.25 주일오전 15
3. 먼저 내 부모를 구원하라(수2:12) 2004.5.2 주일오전 28
4. 부모공경과 순종(엡6:1) 2004.5.9 주일오전 38
5. 아버지의 통곡(삼상18:33) 2004.5.16 주일오전 50
1. 네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라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신27:16)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하고 가나안이 보이는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명을 끝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또 계획이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수여받은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었고 모세에 의해서 대표되는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나라에 이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나라 직전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보이는 건너편까지 데려가게 하시고 거기에서 그를 불러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과 이름이 같은 “여호수아”라고 하는 인물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도되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이후에 율법은 결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로 구원 그 앞에까지 인도하여 예수의 인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예표로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며 영생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세는 자기의 날이 가까워온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껏 간헐적으로 선포했던 많은 말씀들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모아서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듯이 가르치고 싶어 했는데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염려한 것은 두 가지였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과, 그리고 또 하나는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모처럼 잘 알고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그 땅에 가서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어린 이스라엘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그 당시 비어 있는 땅이 아니라 발달한 문명을 가진 선진 국가들이 속발처럼 서 있는 곳이었고 그곳 한 땅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정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주하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 그리 하신 이유는 여호와의 깃발을 이스라엘의 백성의 나라를 통해 높이 세우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들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선교적인 의도가 거기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아감으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고 그런 정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이방에 알려 그들을 선교적으로 감화시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중적인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 땅에 남아 있는 탁월한 물질문명 뒤에는 우상숭배와 그리고 비참한 죄들이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본성 속에는 바로 이런 죄들을 기뻐하는 부패성이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이후 마지막 왕국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그 긴 역사 가운데 거의 다시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희귀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순결한 신앙을 민족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여러 차례 부흥을 통하여 그런 믿음이 갱신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에 의하면 이 때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애하던 때라고 묘사하실 정도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믿음으로 충만해져 있었던 바로 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성을 다 아는 모세는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불 보듯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의 힘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제일먼저 해야 할 일들 중에 하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심 산이라고 하는 마주보고 있는 두 산으로 가서 그 돌에 오늘 명령내리는 이 계명을 돌에 새기고 에발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들을 향해 저주를 선포하고 그리심 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자들을 위한 축복을 선포하고 백성들은 아멘 이라고 화답함으로서 신앙에 있어서 중간지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네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는 이 계명은 바로 그때에 돌비에 새기도록 주어진 계명입니다. 저는 5월이면 늘 가정의 달을 설교했는데 네 주밖에 안 되니까 가정 전체에 대해서 설교하기가 늘 짧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일찍 시작해서 할 수 있으면 5월까지 가족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먼저 살펴보기에 앞서서 이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공경의 계명이 자리하게 된 이치를 먼저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주위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저주받을 죄는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키며 살아가야 할 모든 도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요약이고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해도 도저히 용서받기 힘든 죄들을 모아서 이렇게 저주를 선포하고 그 백성들을 ‘아멘’ 하게 함으로서 일평생 그 계명을 따라서 살도록 그들을 저주를 담보로 이 계명에 묶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바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하는 것과, 그리고 형상을 만들어 그 물건을 섬기는 것과,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의 계모와 함께 성행위를 하는 것과, 자기의 장모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과, 심지어는 짐승과 함께 교접을 하는 성행위를 하는 자들을 향한 단죄 속에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계명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이 계명이 바로 짐승과 성행위를 하고 자기 계모와 동침을 하고 자기 장모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는 그 입에도 담을 수 없는 그 파렴치하고 더러운 범죄,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 숭배하는 그 천인 공로할 끔찍한 죄와 함께 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죄가 여기에 어깨를 겨루고 같이 등장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이 부모 공경의 도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주인이 배를 타고 밤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인은 노를 젓고 있었고 주인은 배 뒤편에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가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자 주인이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아직 멀었냐? 주인이 아무리 가도 이게 안 나옵니다. 내가 너에게 일렀지 않니. 북극성을 보고 계속 가라. 그러면 우리가 도착해야 할 그 해변의 항구가 나오느니라. 그랬습니다. 주인님,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북극성이 없는데요. 지나쳤나 봐요.
여러분, 하늘에 떠 있는 그 찬란한 북극성을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풍조와 그리고 생각들은 시대마다 많이 변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빛나고 쇠하지 않는 도덕률은 언제나 반짝이는 북극성처럼 인간을 향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고 또 인간은 그것에 의해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해야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보편적인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효도에 대한 관념은 믿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 이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효도사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의 질서가 해체되고 그 사상이 쇠퇴하면서 함께 부모 공경에 대한 참된 도리들도 잊혀져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정말 전통적으로 유교 국가였지만 그러나 그런 유교의 흔적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껍데기는 남아 있지만 허울 좋은 위선적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밑에서는 호박씨를 까는 그런 파렴치한 일들이 사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벌써 위험수준이 육박한 이혼율을 보면 얼마나 이 유교사상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유교적인 가르침과 그 사회 속에서 성장해왔다고 하나 정말 유교에서 주장하는 선비 정신을 가진 학자들이 얼마나 되며 대도를 걷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됩니까? 물론 있습니다. 많이 훔치니까. 그것도 대도기는 대도지만, 그런 대도를 걷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되며 그리고 정말 스스로를 존경하는 제자, 그리고 제자들 앞에 올곧은 사표를 보이는 스승들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 오늘날 사회는 거의 해체 상태에 있고 이런 이 민족과 그리고 이 조국을 바라보면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전쟁이 바로 끝내고 1950년대쯤 되었습니다. 학교에는 항상 커다란 게시판이 붙어 있었고 학교 위에는 정문 위에 반드시 그 시대를 관통하는 구호가 쓰여 있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1950년대에는 교문에는 그 새빨간 글씨로 무섭게 쓰여 있던 글씨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공산 오랑케’ 뭐 이런 것이었습니다. 6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을 토해 기권을 하고 피폐해진 민생을 내다보며 내린 결론은 많이 생산을 해서 우리는 굶주려도 빨리 수출을 하고 그래서 외화를 벌여드려서 공장을 짓고 길을 만들어서 많은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문 앞에는 ‘증산, 수출, 건설’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분이 마음이 변해서 70년대에는 평생 대통령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수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릎 쓰고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후에는 교문마다 높이 써 붙이기를 ‘유신으로 번영하자’고 써 붙였습니다.
혼란스런 80년대의 시기가 지나가고 노태우씨가 정권을 잡은 후에 그분은 교문에다가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나라에 충성, 부모에게 효도’라고 말입니다. 혼란스러운 80년대의 과정이 다 지나가고 90년대가 되었을 때 학교 교문에는 뭐라고 써 붙였는지 아십니까? ‘삐삐는 진동으로’ 그리고 2000년대에 와서는 그 표지판마다 모두 떼어버렸습니다. 이게 누가 웃으면서 쓴 가식거리지만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 시대를 보는 얘기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시대는 공통된 합의된 가치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난무하는 것은 개개인의 이익과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물고 뜯는 치열한 전쟁만이 사회계층간에 갈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속에서 유교사상은 산산조각이 다 났습니다. 유교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이렇게 값싸게 성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나라도 없고 이렇게 뇌물이 통용되는 나라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를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뼈다귀도 추릴 수 없는 유교사상이 앙상하게 기반을 두고 소위 이야기하는 효도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젖어 내려왔으니 이 시대에 그것이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우리들이 허물어버리고 다시 세워야 할 그런 기초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지만 저의 인생의 경험, 목회의 경험에 의하면 효도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동정적 효도입니다. 혹은 저는 이것을 적선적 효도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이 효도는 무엇인가 하면 동기 자체가 부모에 대한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효도입니다. 늙으셨다. 힘도 없잖아.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사시겠어. 고생하셨잖아. 불쌍하잖아. 이런데서 시작되는 효도가 바로 동정적 효도이고 그런 동정적 효도 속에서 행하는 자식이 부모를 향해 베푸는 어떤 베품은 모두 적선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는 효도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나쁜 것은 보상적 효도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부모가 부유해서 부모가 아직 가지고 있는 유산을 탐내면서 경쟁적으로 효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연로하신 분들 가운데는 이야기가 돌기를 죽을 때까지 마지막에 재산을 분배해주지 말아라. 그게 끝까지 효도를 받는 길이다. 왜 그 유산을 미끼로 자녀들이 효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주위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식들이 하도 나누어달라고 하니까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주었는데 나누어주기 전까지는 그 부모를 참 공경했었는데 곶감에서 빼듯이 하나 빼서 큰아들, 둘 빼서 작은 아들, 또 하나 빼서 셋째 아들 나누어주기 시작하자 그 곶감처럼 빠져 나가서 줄어드는 유산만큼 효도의 정도도 줄어드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고 마지막에 아무 것도 없이 아들집에 얹혀살게 되자 구박을 받고 천대를 받는 그런 노년을 맞은 부모들을 저는 두 눈으로 많이 목격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보상적 효도입니다.
또 이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장 부모로부터 받는 어떤 보상들이 있기 때문에 거래 관계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보상적 효도에 들어갑니다. 부모로부터 매달 생활의 도움을 받든지 그것도 저것도 안 되면 노동력이라도 있어서 자기 자식새끼라도 좀 돌봐줄 수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보약도 해드리고 왜 열심이 먹고 빨래도 많이 하고 손자도 좀 봐주라고, 그렇게 하고 그렇게 부모를 효도하는 것은 모두 보상적 개념의 효도입니다. 세 번째 효도는 율법적 효도입니다. 이 율법적 효도는 유교적인 개념에서 인간에게 참된 도리가 무엇인가 라고 말할 때 마땅히 이런 의무를 해야지. 이런데서 우러나오는 바로 효도가 율법적 효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참 많이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내가 서울로 공부를 하러 왔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할머니하고 같이 살면서 공부를 했고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 할머니하고 사는 시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할머니하고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 할머니가 내 나이가 25살 때까지 우리 할머니도 살아계셨고 우리 할머니의 시어머니도 살아 계셨습니다. 저한테 증조할머니입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우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 한 방울을 안 흘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소리만 내셨습니다. -하여튼 일생을 자기에게 고통을 준 장본인이 바로 그 할머니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 시집살이를 얼마나 지독하게 시켰는지 그렇게 고생을 하신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는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지만 참 성품이 좋고 낙천적인 분이었습니다. 정말 걱정스러우리만치 낙천적인 분이셨고 그리고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어도 인격적이어서 평생을 사시면서도 저는 그분이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이야기를 하신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굉장히 아프게 하는 사람인데도 한번도 비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을 정도로 인격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과거 시집살이 이야기가 나오면 꼭 한번 거명하는 분이 있었는데 당신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그 원만하고 낙천적인 분이 시집살이를 하다가 몇 번을 도망칠 각오를 했다고 합니다. 왜 그럼 도망쳐서 새 삶을 사시지 못 도망치셨어요. 그러니까 동리 할아버지 한사람이 있는데 점쟁이였습니다. 어디로 도망갔다고 그러면 실눈을 뜨고 손가락 몇 번 만지면 금방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도 잃어버리고 돼지도 잃어버렸는데 그 할아버지가 실눈만 뜨면 금방 찾아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망가 봤자 잡힐 텐데 잡혀서 오면 그게 무슨 망신인가. 그래서 거기에 그냥 사신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그 할머님이 시집오셔서 할아버지와 심방을 꾸미신 그 방을 있는 그대로 아직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명승지 유적을 보듯이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16세에 시집을 오셨는데 시어머니가 32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림같이 앉아서 손 하나 까딱 안하고 32살이니까 요즘 자매들 같습니다. 그런데 16세 된 며느리를 얻어서 얼마나 매섭게 시집살이를 시키는지 아이를 낳고 삼일이 되기 전에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해야지 되었다고 하니까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결국은 시집을 왔는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젊은지 며느리가 먼저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시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시동생이지, 그런데 시어머니가 젖이 안 나아와서 시동생을 할머니가 끌어안고 젖을 먹이면서 키웠습니다. 자기 자식처럼, 자기 자식보다 두 살이나 어리니까. 그렇게 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나이 많이 들으셨어도 저에게 하신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밤이면 다림질을 하면서 어린 저를 놓고 애야 나는 소원이 있다. 다시 한번 태어날 때 정말 시집살이 없고 두 번째는 애가 없는 세상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 왜 애들 때문에 하도 고생을 하고 시동생들을 기르니까. 언젠가 하루는 심각하게 물어보십니다. 애야 천국에 애들도 있냐? 그래서 그럼요.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천국에 있지요. 할머니가 굉장히 실망하시면서 애들이 거기에 있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펑펑 눈물은 안 흘렸지만 자기 할 바는 다 하셨습니다. 명절이 되면 고기라도 사서 드리고 며느리로서 할 일은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율법적인 효도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정말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그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심지어 구약의 효도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효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적인 효도, 혹은 신앙적인 효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효도, 혹은 신앙적인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를 달아보아서 부모의 가치를 재고 그 판단에 따라서 하는 그 효도는 앞에 세 가지의 효도입니다. 이 복음적인 효도는 복음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이 고맙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효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적인 효도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할 수 없는 효도입니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많이 개선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효도는 기껏해야 율법적인 효도밖에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적인 효도로는 모든 것들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적인 문제와 그리고 이 불효의 문제는 한 집안에 저주처럼 계속해서 핏줄을 타고 흐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러분의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효도하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도 여러분하고 똑같이 했을 것입니다. 그 위에 올라가도 다른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요즘 만약에 젊은 부부들이 결혼 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바람을 피고 난봉을 하고 그러면서 성적으로 무절재한 삶을 살면 그 아버지가 그랬을 가능성이 십중팔구입니다. 그 위로 올라가 봐도 더 하면 더했지 덜 할 리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특별한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 연결의 고리를 계대적인 연결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그것이 다시 자신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끊었는데 율법적인 효도로는 이것들을 고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만이 이 모든 것을 끊어놓을 수 있고 그리고 쇄신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전에 우상 숭배하던 자들이었고 간음하던 자들이었고 이 세상에서 비루하기 짝이 없는 더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 되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옴으로 그들이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할 정도로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효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얄랑 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네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 경홀히 여긴다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막끌래”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가볍게 생각하다. 쉽게 생각하다. 하찮게 생각하다. 거기서 발전해서 경멸하다. 멸시하다. 라고 의미로까지 나아간 단어입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이 이 막끌래를 경홀히 여기지 말며 라고 번역한 것은 탁월한 번역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이 계명은 단순히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명령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명령입니다.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고 존경하라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경홀히 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먼저 그 부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게를 가지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면 누군가를 중요한 사람으로 내가 생각할 수 있고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집에 와서 앉아도 그분이 앉는데 불편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방석을 준비하기도 하고 이미 다 낡은 식탁을 다시 한번 훔치기도 합니다.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부모를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경하고 깊이 그들에게 효도하기 전에 먼저 그 부모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주받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 부모에게 적선하듯이 몇 가지 의무를 다하고 그 대신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한없이 깔보고 하찮게 여기는 그런 태도에 대해서 오늘 엄중하게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런 삶을 산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나쁜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예전에 즐기던 먹거리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굴비입니다. 이 굴비는 지금이야 여러분들이 감히 쳐다보기 어려운 음식이 되었지만 그러나 옛날에는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었습니다. 거꾸로 뒤집으면 이름부터 그렇습니다. ‘비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할머니하고 서울에서 비교적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부모님들은 부자였지만 저는 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배고파 점심 줘. 그래. 애고 그런데 뭘 해서 먹냐. 그러십니다. 에고 굴비나 하나 해서 먹자. 부엌에는 항상 굴비가 이만한 게 걸려 있습니다. 요즘은 굴비를 말리지 않습니다. 작아지니까. 그런데 굴비는 원래 말려야 맛있습니다. 말려서 찢으면 거의 북어포처럼 찢어지는 그런 종류의 굴비였습니다. 그런데 말려도 이만했으니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게 가난한 집인데도 한 15-20마리씩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그거 하나 쑥 빼서 지푸라기 같은 끈에서 빼서 그래서 칼등으로 이제 굴비를 비늘을 긁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연탄불 뚜껑을 열고 거기에서 굽기 시작합니다. 굴비나 해서 점심을 먹자. 그러시면 저는 방에서 또 굴비야. 지금은 뭐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언제 한번 제가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진짜 보기 드문 굴비가 하나 나왔습니다. 10마리로 묶어져 있는데 우리가 옛날에 먹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주 토실토실하고 알까지 배어 있는 그런 보기 좋은 굴비는 아니었지만 크기나 품질 면에서는 상당히 근접해 있는 굴비였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그 굴비가 10마리가 예쁘게 깔린 천위에 대바구니에 눕혀서 잔잔하게 누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저게 얼만가 하고 보니까 15만원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가만히 보니까 공이 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쳐다봤더니 150만원이었습니다. 한 마리에 15만원씩이라는 것입니다. 대가리 하나에도 한 4-5만원은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아가씨, 이 굴비가 150만원이 맞습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마리는 안 파는가? 했더니 안 판다고 했습니다. 10마리에 150만원이라고 하는데 한 마리를 판다고 한들 그것을 15만원주고 간 떨려서 어떻게 사먹겠습니까? 능력이 되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 저게 15만원씩 150만원이면 저것을 누가 사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물었더니 아저씨 그것 없어서 못 팝니다. 그게 어디 간이 떨려서 먹겠는가, 그랬더니 그 아가씨 하는 이야기가 그것을 자기가 사다가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 다 선물하려고 사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 크고 귀한 선물은 능력이 있어도 마음에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으면 절대 할 수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갖고 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150만원 주고 사다가 비단종이로 포장해서 쓰레기치우는 사람에게 구제하는 마음으로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싸서 아예 비단보자기에 싸서까지 줍니다. 그렇게 싸서 나일론 보자기인지 비단무늬된 것으로 싸서 줍니다. 그렇게 싸서 주면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줍니다. 그게 자기의 상관이든, 거래처이든, 관공서든, 인간적으로 신세진 사람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정말 잘해주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무게를 느끼는 사람에게 그 귀한 굴비를 갖다가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누군가를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막끌래 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단어는 바로 부모를 그렇게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람, 그리고 내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사람, 너의 존재를 향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여겨라. 부모의 관계를 그렇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주어졌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의 자손의 집안을 땅이 갈라져서 모두 쓸어 넣어버려 삼켜버린 일이나, 혹은 전염병에 걸리게 만들거나, 혹은 전쟁에 칼에 쓰러지도록 만들거나 하는 재앙을 만나는 일들이 하나님이 직접 치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이일을 하시게 하는 것인데 이 부모를 향해서 불효하고 부모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들에게는 돌맹이를 쳐서 죽이게끔 법으로 정했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이 문제를 다 다룰 수 없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구속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세계의 질서를 보십시오. 모든 심지어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자식을 어미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는 그 부모에게 전적으로 신세를 지면서 자라고 그리고 그런 생존의 고리가 바로 동물적 본성에 의해서 엮어져 있고 그 동물적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식을 보호하고 자식이 그 자기의 모태가 되는 그 부모에게서 보호를 받는 것, 그런 관계입니다. 인간도 바로 그런 속에서 보호를 하고 보호를 받으면서 계대적으로 이 창조의 계획들을 이어가게 되었고 결국 그렇게 함으로서 죄로 말미암아 망가트려진 창조의 계획도 구속으로 복원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효도의 계명은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이니까, 이제 늙었으니까 이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창조의 질서와 구속의 계획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부모를 중하게 여길 줄 알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부모를 중요하게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효도의 첫걸음이요, 공경하는 계명보다도 더 근본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하시고 그렇게 해서 가정의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부모를 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모두 중요하고 그리고 사랑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그 관계가 소중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덜 사랑하는 것들은 치이게 마련이고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 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도 똑같이 물질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못 박으면서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이 여기거나 이를 경이 저를 중히 여기거나 둘 중에 하나이지 결코 이 둘을 모두를 다 섬길 수 없다고 아주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못 박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로 미루어볼 때에 우리도 부모를 진정으로 경홀히 여기지 않기 위해서는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해야지 됩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부모를 깊이 존경하는 사람들은 배나 감사하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야합니다.
내가 내 자녀에게 아버지 되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아버지 되었던 것처럼 꼭 그렇게만 되었으면 원이 없겠다. 내가 내 남편에게 아내 되기를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에게 아내 된 것처럼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어머니 되기를 우리 어머니가 나의어머니가 나의 어머니 되었던 것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복 받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은 열사람 중에 단 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아마 실제로는 두 명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와 어두운 날들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직된 기억들이 우리로 하여금 부모와 화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말할 수 없는 폭력과 가정을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서 수많은 정신적인 고통과 상처, 심지어는 폭력과 폭언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게 했던 그 난잡한 행동,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될 그런 교훈들만을 가져다 준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여러분들의 아버지 가운데 어떤 분들은 심한 편애로 어린 여러분들을 가슴에 멍들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해서 여러분들이 다 성장한 후에도 철이 멀쩡히 다 났는데 춤바람이 나서 그렇게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불행한 형제자매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돌아와서 그럴 듯 하게 살고 있지만 마음속에서 그 사람들을 정말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에게 인간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니라 가르쳐주어서 부모 행동을 보면서 항상 인간이 살아야 할 바를 거꾸로 역 해석해야지만 인간의 도리를 찾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그런 고통을 안겨준 부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혹은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한없이 무능력해서, 무책임해서 어린나이에 여러분들에게 가정의 경제부담을 떠맡기고 어머니를 힘들게 만들었던 그런 어둡고 칙칙한 과거를 가져다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분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모든 과거와 진정으로 화해했습니까? 나는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도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고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미워하는가 안 미워하는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부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경홀히 여기지 않고 무게 있게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그 부모들이 차지하고 있는가? 내가 여러분들에게 내가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효도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영악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주일을 교회에서 지키고 이렇게 하루 종일 봉사합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찾아뵙고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족들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형제들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아집니다. 그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집안에 갈등이 있고 부모로부터 이런 부당한 평가를 받는 것은 모두 자기가 참된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주 사소한 신앙적인 것을 위해서 커다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아주 쉽게 결단을 내립니다. 결단을 내리고 그리고 커다란 대매지를 입으면서 그것이 마치 신앙을 빙자한 영웅적인 피해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를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부모가 뭘 원하면 ‘고르반’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최소한 내 부모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과시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에게 마음속에 있는 것은 부모를 아주 하찮게 여기는 경멸함, 그리고 부모에 대한 눈곱만한 사랑도 없음을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이 희생이 없이 가능합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많이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이행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이 험한 세상에 내려 보내시는 그 아픈 희생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치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아주 나쁜 크리스천입니다. 더 심하게 얘기하면 막대 먹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나 복음의 빛이 가려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는 함께 섬긴다고 그러고, 사랑한다고 그러고, 발 씻긴다고 그러고 살면서 진짜 육체의 피를 나눈 형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줄 수없고 부모를 향해서는 눈곱만큼도 희생할 줄 모르는 그런 편협 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의 참 사랑을 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은 아주 단언하여 말하였습니다. 자기의 친족 곧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메아리와 같아서 산에 올라가서 여러분들이 노래를 부르면 먼 산을 휘돌아 노래로 돌아오고, 욕설을 퍼부으면 욕설로 돌아오고, 비명을 지르면 비명으로 되돌아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리고 살 붙게 하지 못하는 그런 이면에는 부모님들의 잘못이 큽니다. 매우 큽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회개해야지 됩니다.
내가 늘 이야기합니다.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시집 장가가서 애만 낳아서 다 자기 같은 동물들만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당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뒤덮기를 원하셨지 짐승천지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결혼이 뭔지,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식을 낳아서 그 애비가 에미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의 열매를 통해서 결국 뭐가 되겠습니까? 메아리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깊이 살붙여 사랑하고 그리고 그 부모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유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이렇게 오래도록 부모와 자식이 연관을 가지고 생존하는 동물이 없습니다. 물고기 같은 것은 지나가면서 알 쭉 깔려놓고 그 위에 다시 알 까고 해서 알이 자라서 돌아다닙니다. 짐승도 6개월이나 1년 키워서 떠나보내면 다시 자기 부모가 누군지 모르면서 돌아가면서 삽니다. 그게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명령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면 70을 먹고 80을 먹어도 부모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왜 그런 관계를 일생동안 계속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이 가정에서 인간이 태어나서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을 통해 인간을 교육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에 참된 도리가 무엇인가를 부모를 통해 배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일평생 그 부모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오히려 목회자를 통해서 보는 참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본은 거기에 보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부모들이 주님을 알았습니까? 우리의 부모들이 주님을 알았으면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죄의 노예가 되어서 어두운 세상에서 그냥 악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그 시대의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칸트리덱션 이 모순들이 작용을 해서 그래서 우리에게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 부모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이 정말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에 빛을 받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도 똑같이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한 부모가 되어서 여러분들의 자식에게 여러분이 겪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 큰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세상을 우리의 부모처럼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창조주인 것처럼 우주의 모든 행복이 우주의 모든 가치가 자신의 행복에 있는 것처럼 제왕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 한줄기 빛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순전하신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을까? 그리고 왜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나같이 걸fp같이 더러운 인간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존귀하신 자기의 외아들을 그렇게 가슴에 두고 사랑하시던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까? 도저히 그 사랑의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눈물만 흘렸습니다. 왜 이 벌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을까?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하나님 당신의 저에게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이제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랬더니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원수도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새 계명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며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리로다
그게 바로 이렇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제가 받았는데 이제 제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지만 일만 분지의 일이나마 주님이 나를 위해 버리신 그 큰 사랑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진정한 효도의 기초는 바로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신 그분이 내게 주시는 간절한 부탁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홀로 이익을 누리시려고 하는 것, 우리 부모에게 홀로 유익을 주시려고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살고 그 지겹도록 이어오는 우리의 핏줄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이 불효와 그리고 더러운 부도덕의 결박들을 끊어버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복음으로 우리를 치료하시고 그래서 우리 안에 경건한 많은 백성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다시는 우리의 자손들 가운데 그 부모를 인해서 이렇게 가슴아파하고 가슴에 상처를 부여안고 눈물 흘리는 자들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의해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치료자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오직 복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그 부모를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우리 부모의 입장이 되었어도 내가 그렇게 어두움 속에 살았다면 내가 그 시대 속에 살았다면 내가 그렇게 부주의하고 나태한 삶을 살았고 주님을 몰랐다면 나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마지막 남은 자식인 나에게 조차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버려진 영혼으로 그 부모가 느껴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오늘날 같이 메마르고 미움이 가득한 시대에 착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한번쯤은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생각하면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생각하면서 이 가슴에 섬유질이 찢어지도록 그렇게 흐느낄 수 있는 착한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래요. 우리가 그 부모를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부모를 향해서 의무를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가 하찮아.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자체가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도 해결이 되지 못한 이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고 그리고 수없이 가르쳐주고 올바른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도 그대로 살지 않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부모를 이런 목양의 자리에 갖다 났다면 배나 더 새 사람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힘듭니다.
주님을 알았는데도 복음이 여러분 안에 있는데도 오늘 1부 시간에 기도한 어느 지체의 기도처럼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구속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다 알았는데도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여러분들에게 했던 많은 상처와 그리고 피해, 마음의 실망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자식인 나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혹은 주님도 알지 못한 채 버려져있는 그 헐벗은 영혼, 그렇게 비참하게 된 경로가 아니라 그 비참한 그 상황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마치 집을 떠난 자식이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때 아버지가 그렇게 된 과정을 생각했더라면 그 자식을 끌어안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아들인데 이유는 나는 알기를 원하지 않지만 내 아들이 저렇게 거지와 같은 몰골로 돌아올 때야 그간 겪었을 그 고통과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하루에 한번씩 우리 아버님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눈물이 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마지막 남은 자식인 여러분들에게도 조차 마음을 터놓고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이제는 젊은 날에 물질도 사라졌고 건강한 기력도 사라졌고 가족을 모아놓고 호령하던 가장으로서의 체통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자식이 손을 내밀면 겨우 그 손을 잡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는데 도무지 자식들이 화해와 사랑의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밤이면 쓸쓸히 베개를 베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서 노년의 때를 보내는 그 부모의 외로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도 곧 그런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그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으니까.
저는 전에 부모님을 향해서 참 원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화의 길을 걷고 복음의 길을 발견하고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냥 이 땅에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게 자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한때는 내가 내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지금 아버지의 어머니가 여러분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영적으로는 여러분들이 그 여러분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못 받았던 그 사랑을 한번 베풀어주십시오. 그래서 견딜 수 없이 아팠던 지난날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골고다 언덕에 묻고 그리고 다시는 그 미움과 갈등에 어두움이 우리와 우리의 후세에 인생을 주장하지 않도록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획득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내 부모는 나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걱정이 없는 집안에 태어나서 좋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하늘 아버지를 이렇게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모에게 채워질 수 없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을 그렇게 미치도록 파고들었고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 모두 하나님의 섭리가 하는 일이고 그 모든 섭리, 한 틈 한 틈은 모두 실처럼 짜여져서 우리의 인생의 아름다운 자수를 놓았고 부모는 섭리 속에서 그런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마음에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부모님을 사랑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을 씻겨주고 그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빛 된 삶입니다. 그게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매인 삶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우리를 어두운 가정에서 제일먼저 빛으로 돌려놓으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님께 두 가지 선물만을 기대합니다. 오래 살아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에 제 품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 시간이 자식과 부모 사이가 가장 아름답게 결합된 그런 순간이 되는 것, 그것이 내게 기대하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이런 마음을 고백하면 어느 순간에 우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 네 어린 네 가슴에 내가 이렇게 못 박았고 너의 연약한 마음에 내가 이렇게 고통을 주었고 내가 이렇게 나쁜 아버지였지. 눈물 흘리며 회개할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평생을 모르시고 살다가 죽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이 없어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아픈 기억까지도 모두 끌어안고 그래서 그 눈물을 씻겨드리는 그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 아니 여러분의 부모도 여러분에게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고, 설교자인 나도 요구할 권리가 없지만 여러분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 주님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부모를 업신여긴 자의 결국
“그들이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겔22:7)
지난 시간에 신명기 27장 16절을 통해서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저희들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에 경고였다면 오늘 이 에스겔서 22장 7절의 말씀은 그 후로부터 약 900년 정도 흐른 후에 그것이 어떻게 예언이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 공경의 대의에 대하여 앞으로 몇 주 더 집중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이 되어서 몇 주 더 이 설교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본문을 강론해나가기 전에 본문의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끌려간 시기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 왕국 유다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 이후의 역사는 바벨론과 역사상 메디아, 페르시아, 그리고 그 이후에 헬라, 로마 해서 신약시대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 것은 주전 586년에 일이었습니다만 그러나 포로로 끌려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전인 주전 600년대 초엽부터 포로로 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크게 네 번에 걸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600년대 초입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 이제 90년대와 80년대에 각각 끌려가게 되고, 세 번째가 바로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대규모의 포로들이 끌려가게 되고 멸망당한 후에도 또 다시 581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지금 이 선지자 에스겔이 예언하고 있는 이 때는 바로 이스라엘이 그렇게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때였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 때에 에스겔 선지자는 탁월한 영성을 가지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바라보며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암 그린 힐’ 이라고 하는 17세기의 청교도는 이 사람을 가리켜서 구약의 사도 바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뛰어난 영성으로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면 에스겔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 틈에서 그는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았고 그 이후에 포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예언을 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여기 22장에는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가나안을 선택하셔서 기업으로 주실 때에 그들에게 선택하게 해주신 매우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거기를 중심으로 왕권이 수립되고 거기를 중심으로 왕들과 그리고 나라들이 서고 다스려졌으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만들어놓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면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리고 이 확신은 도를 넘어서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예루살렘은 멸망되지 않게끔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교리를 믿게 삼아서 하나님 앞에 방종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거짓된 안전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그 확신을 붙들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 오시고 또한 선택해 역사하게 하신 예루살렘을 버리시기로 결정을 하십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으니 이는 곧 육적인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깨트려지고 그리고 예루살렘도 무너지고 성전도 파괴되고 그 껍질을 깨고 태동될 남은 자들을 통해 이루어질 신앙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의 출현을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서 유서 깊은 약속의 도성 예루살렘이 파멸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죄에 대해서 22장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죄였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인애와 사랑이 없는 죄였습니다. 전자는 우상숭배의 죄였고,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사랑이 사라진 죄는 나그네를 학대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아니하고 파괴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그 패역한 죄들의 머리에 먼저 한 가지 죄가 언급되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자신의 부모를 업신여기는 죄였습니다. 사실 이 모양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생각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신 후에 시내산으로 가게 하시고 거기에서 법률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돌 판에 글을 새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구히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주셨으니 이것은 두 개의 돌 판에 새긴바가 되었습니다. 십계명은 각각 일부와 이부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일부에는 하나님께서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계명까지 기록이 되어 있고, 이부는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질 인애와 사랑의 실천에 관해서 기록되고 있는데 이부인 첫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부의 첫 계명은 그 하나님 앞에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이었고, 그리고 이부의 첫 번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명령이었으니 이 두 계명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 계명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 모든 죄를 동일한 방법으로 다루시지는 않았습니다. 죄의 본질은 모두 같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오, 반역이지만 그러나 그 죄의 크기는 동일하지가 않습니다. 작은 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묵과할 수 없는 커다란 죄가 있었으니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가장 커다란 죄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언약백성들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지을 수 있는 으뜸가는 가장 커다란 죄는 바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이 불효의 죄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서 깊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선택하셔서 이루어 오신 예루살렘을 파멸로 내어주시면서 그 죄목대로 열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성을 파멸하는 것이 우상을 섬겼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부모를 업신여겼기 때문이라고 선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들은 이 부모를 업신여기는 이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고 부모를 업신여기는 죄를 하찮게 생각하는 그것이 오늘날 커다란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미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는 것이 확정된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죄를 맹렬하게 탄핵하며 그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서 언약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파멸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 공경은 우리에게 회피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이중으로 두 가지 빛을 우리의 마음에 이 계명에 관해서 비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빛은 본성의 빛입니다. 이 본성의 빛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속에 내제하고 있는 참된 도덕에 관한 인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처럼 무한히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인간으로서 창조하시려고 했던 그 기준들을 보면 그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안전함이 그들에게는 없었지만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대비해볼 때 그들은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창조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향해서 올곧았고, 그들의 정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계명에 잘 순종할 수 있도록 채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흙으로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서 영혼과 육체가 만나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 속에는 지식이 있어서 그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이 누구이며,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 두툼한 성경책이 없었지만 우리보다 훨씬 잘 알 수 있었고 그리고 훨씬 더 쉽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서 그들 안에 있던 영광은 하나님께 되돌아가버렸고 그리고 그들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아주 심하게 파손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흔적을 남겨놓으셨는데 그 흔적 속에는 역시 지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몰라도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막연한 인식과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한한 피조물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렇게 때문에 자신이 그 절대자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최소한의 도덕들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부모 공경에 의무를 알려주는 본성에 빛이 바로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의 빛은 우리가 참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못하지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본성의 빛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부모 공경과 같은 최소한의 인간의 도덕에 대해서 의식하도록 지식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상 어느 민족 중에서 부모는 하찮은 존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대해도 상관이 없다. 그것을 도덕으로 삼아서 가르친 민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 본성의 빛이 그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본성의 빛을 우리에게 남겨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류 사회 속에는 이 본성의 빛에 충실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십자가를 모르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자신의 죄인 됨, 이 세상의 유한함과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몰랐지만 이 본성에 빛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 동안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해서 인간이라고 하는 이 계체가 멸절되지 않고 그 창조의 질서 속에서 보존되어 왔고 그리고 그 속에서 인류는 생육하고 번성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 본성의 빛 말고 또 하나의 빛이 있어서 이 부모 공경의 도리가 회피할 수 없는 명령이 되게끔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성의 빛과 함께 두 번째로 우리에게 거론되어야 할 것이 말씀의 빛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이 하나는 율법이고, 또 하나는 복음입니다. 우선 성경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부모 공경의 대의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핑계될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을 때 일부가 하나님에 대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공경을 명령하는 것이었다면 이부의 첫 부분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대의가 되었고 이 두 축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해오는 중요한 디딤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처럼 또한 그 부모를 공경함으로서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언약백성으로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훼방하거나, 부모를 모욕하거나 구타한 자를 향해서 우상숭배한 자에게 처해지는 동일한 심판을 내려서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 버리시는 죽음의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성경에서는 우상숭배와 함께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커다란 죄로 성경이 명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존중심이 사라질 때마다 이렇게 부모를 공경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고 부모를 하찮게 여기고 경홀히 대하며 부모 그 자체를 자신의 삶에 있어서 무거운 짐이요 부담으로 느끼는 사악한 인간의 모습들이 여지없이 드러났고 그런 사악한 인간의 모습들이 보편화된 사회를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눈감고 넘어가신 적이 없고 반드시 그 죄에 보응하는 심판을 내리심으로서 하나님 공경과 부모 공경이라는 이 두 명령을 주신 주인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도리가 약간의 동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명기 5장에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십계명을 다시 한번 그들에게 상기시키시기 전에 그 십계명을 주시는 주체에 대해서 소개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들에게 베푸신 구속의 은혜가 동기가 되어서 이 십계명을 지켜야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이 계명이 계속해서 유효하게 신자의 삶을 구속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 때는 살기 위해서 이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날 신약시대에서는 오히려 정 반대로 영적생활이 죽지 않기 위해서 이 십계명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표시로 지켜야 하는 그런 경륜이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율법이 이처럼 변함없이 하나님과 함께 부모를 공경할 것을 인간들에게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고 인간들은 그 반복적인 명령과 그 명령의 강도 앞에서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은 또한 우리에게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 구속이 비밀과 은혜의 풍성함을 설명한 후에 자녀들아 너희가 그 부모에게 순종하고 가르침으로서 이것이 복음이 들어온 시대에도 그 복음으로 지워질 수 있는 계명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통해서 완성된 계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중심적인 계명들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 재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으니 이는 예수께서 친히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는 그 말씀에서 이른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부모 공경의 대의가 우리의 본성의 빛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말씀의 빛으로도 우리에게 증거 되는 인간의 당연한 삶의 도리이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하나님의 의지임을 보여주셨고 이는 율법의 준엄함과 복음의 풍성함을 통해 더 많이 풍부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성경의 명백한 증언을 회피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들이 이 계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공정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뜻대로 하나님 앞에 깊이 순종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가슴 아프고 통탄할 사실을 우리를 비롯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모를 공경해야 할 계명을 유교의 잔재라고 생각하고 유교가 이제는 모두 도덕적인 기준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으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가야 할 아주 값어치 없는 교훈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성경에 보면 “너희가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라고 하는 동사가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는 지난 시간에 설교한 신명기 27장 16절에 나온 것과 똑같이 “카랄”이라고 하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카랄은 지난 시간에 설교해서 소개한바와 같이 “가볍게 여기다.” “하찮게 여기다.” 라고 하는 그 뜻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말 성경이 “경홀히 여기다.” 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후로 이제 메디아와 페르샤 시대를 걸쳐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마케도니아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긴 세월동안 그들은 그 포로 상태에서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도 헬라 이후에 이어지는 로마 시대에 와서도 역시 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계속해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 마케도니아 시대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헬라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었던 그 문화의 양상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헬레니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헬레니즘은 멀리 그리스도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고 거기에서 펼쳐 나온 모든 삶의 양식과 문화와 문명의 형태를 가리킵니다. 알렉산더라고 하는 탁월한 제왕이 출현하여 아프리카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커다란 제국을 건설하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작업을 펼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언어의 통일화작업이었습니다. 이때에 채택된 언어가 바로 희랍에서 평민들이 사용하는 코이노 헬라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헬라어가 널리 후에 퍼져서 신약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일어난 이 헬라어가 만국 공용어로 채택되게 되고 그때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디아스포라의 후손들이 오랫동안 남의 나라 땅에 살면서 이제 히브리어를 점점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서 들려주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요구와 그들의 종교적인 요구를 사용해서 헬라문화의 우수성을 많은 제국에 알리고 싶은 헬라 나라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주전 2-3세기 경에 이제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책을 가리켜서 쎄티어진트, 혹은 70인 번역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간단하게 70인 역이라고 불리는 구약의 희랍역 본입니다. 그 희랍역본 쎄티어진트에는 이 카랄이라는 동사를 에카코 레곰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서 카코스 즉 아카다라고 하는 형용사와 레고 말하다. 라고 하는 두 단어가 합쳐진 복합동사입니다. 이 뜻은 악하게 카코스 레곰 말하다. 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태도가 악하거나 혹은 부모에 대해서 부당하게 악한 말을 하거나 혹은 악한 행동으로서 부모에게 말을 할 때에 무례하게 말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어가 에카코 레굼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결국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 카랄이라고 하는 동사, 부모를 없이 여기다. 라고 하는 이 동사를 부모에 대해서 악하게 말하고 부모를 악하게 대우하면서 말하는 그것을 바로 카랄 동사가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성도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책을 펼쳐놓았습니다. 새까맣게 많은 글씨가 써 있었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니까 당신이 살면서 지은 죄악 된 행동의 목록이라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뒷장을 넘겨보니까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깨알과 같은 글씨로 새카맣게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당신이 말로서 지은 죄라고 말했습니다. 한 페이지 더 열어보니까 그냥 새카만 석탄색깔에 그 흑지가 나왔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그게 새카만 게 아니라 글씨가 너무 작아서 아예 새카만 종이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네 마음으로 지은 범죄라고 그랬습니다. 결국 부모를 가볍게 여기고 부모에 대해서 모욕하는 언사, 부모를 아주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쉽게 말하는 이 모든 부당한 행동들은 그 뿌리가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부모를 아주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부모의 존재를 안중에 없이 생각하고 그 부모에 대해서 저울질하기를 그 부모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가치, 연계시켜서 그 부모의 중요성 같은 것, 같은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결국은 부모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하게 되고 그 하찮게 생각하는 마음이 말로서 행동으로서 우러나오게 된 것이 오늘 이 칼날이라고 하는 동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렇게 부모를 업신여긴 죄로 말미암아서 우상숭배와 함께 이 양도 데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에 칼날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보신 타이타닉호는 46,000 톤급의 배이고 길이가 247미터짜리 커다란 배입니다. 당시에는 그 배가 가장 큰 배였습니다만 오늘날에는 그 배는 바다에 수없이 많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46,000톤이 아니라 46톤짜리 배도 있고 제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60만 톤짜리 배까지 생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일 것입니다. 60만 톤이라는 그 선봉양이 타이타닉호에 약 13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입니다. 그런 배가 대양을 가로지르면서 항해합니다. 동으로 가던 배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릴 때 어떻게 그 방향을 전한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어마어마한 배가 방향을 돌릴 때 한 사람의 항해사가 키를 돌리므로 말미암아 배 뒤편에 붙어 있던 방향타가 움직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작은 키 하나로 동쪽으로 향하던 배가 서쪽으로 바꾸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떻게 산 사람들이었습니까? 모두 하나님 없이 자기의 마음의 원대로 살면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고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고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마음이 점령되어서 이제는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부모의 공경과 마음드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받은바 명령,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함에 있어서 처음과 나중은 모두 그 부모를 깊이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는 자식으로서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도덕적인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연로하고 연약한 부모님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생활비도 보내드리고 그리고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사람들도 여러분 가운데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효도의 명령, 부모 공경의 대의는 단지 형식적으로 부모님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고 마치 긍휼을 베풀고 적신하듯이 그렇게 동정적으로 그렇게 자기 할 도리를 하는 것을 효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길 때 만약에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친근함과 사랑과 그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없이 신자로서 마땅한 도리를 다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것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이고 바리새인의 믿음생활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신앙생활을 얼마나 통렬하기 비난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의 마음에 있었던 대의는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 곧 하나님을 공경함에 있어서 신심이 믿음과 마음, 우리의 신심이 일체가 되어서 그 다음에 신행이,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온전히 합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의 대의인 것처럼, 또한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도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 되고,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부모를 향한 우리의 행동이 합의되어서 그렇게 부모님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부모 공경의 대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모두 알았기 때문에 지혜자는 잠언에서 자기의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아들아 너는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자식에게 의도하였던 것은 철따라 가져오는 음식이나 값비싼 의복이나 그리고 물질이 아니라 아들이 부모인 자신이 살아있는 날 동안 마음을 자기에게 주기를 원했고 그리고 자신과 동일한 장소에 있지 않을 때에도 자신이 그 아들의 마음속에 살아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효도이고,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공경인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지 않고 우리의 행동만으로 하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로 몰고 갔던 이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 이면에는 부모를 향한 무정함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었고 그 부모를 향해 무정한 굳은 마음은 곧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패역한 마음과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편으로는 우상을 숭배함으로서 자신을 애굽에서 건져주신 구원자이신 그 하나님을 멸시하였고 한편으로는 굳어진 마음으로 그 부모를 무정하게 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대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파멸로 자신의 민족을 끌어갔던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잡지에 보니까 오늘날 침해로 분리된 많은 노인들을 다시 정밀하게 진단을 해보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알쯔 하이머 병인 그 침해가 아니라 우울증이라고 하는 사실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침해라고 믿어지는 열명의 노인 가운데 두 명 정도가 사실은 이 뇌신경계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질병들은 모두 마음의 병입니다. 호르몬의 분비나 육체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면서 살아가는 그런 깊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런 가족들 속에서는 호르몬의 분비가 잘 됩니다. 그래서 입체적으로도 조화와 질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들 가운데서도 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형제들에게 학대를 받거나 이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것들이 교정될 수 있는 그 여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많은 지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뭔가 부조화스럽고 그리고 무엇인가 정신과 마음이 억눌려있고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이 고칠 수 없는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십자가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있는 자식들이 부모가 무엇이 필요한가를 정말 알고 있을까? 여러분, 아직 결혼을 안 해서 자식을 낳아보지 않아서 모릅니다만 자식을 낳아보면 그 자식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결혼하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인간의 부모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아마 잘 모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보면 그 자식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그분에게 인격적으로 마음을 준다면 아마 그런 종류의 노인성 우울증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사랑 없는 까닭에 일어나는 그 영혼의 고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로부터 소외되고 그리고 고립된 가운데 마음에 외로움을 품고 살아가는 부모를 한번 보십시오. 자식들과 함께 살아도 자식들에게 얹혀사는 것이지 당당한 가족의 일원으로 살지 못하는 부모로부터 시작해서 그것마저 허락이 되지 않아서 외로운 노년을 홀로 외로운 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동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는 그 부모들의 외로움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부모들도 우리는 많이 사랑했고 자기의 부모들은 조금 사랑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은 그렇게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많이 사랑했는데도 우리가 그분들을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똑같은 비극이 우리 시대에도 되풀이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가족간의 이기적인 사랑의 위험을 이야기할 때 그 이기적인 연결을 부모에게까지 확장시키는 사람은 거의 없고 형제들에게는 더더군다나 없고 가족의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부부와 그리고 자기 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국한되지 않습니까? 이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로부터 소외당한 그 부모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눈으로 계속 보면서도 우리 부모도 그렇게 살아왔고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산업화되면서 이런 현상들은 더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 옛날에 이 지혜자는 자기 아들에게 “너는 네 마음을 나에게 주며” 그렇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마치 네 마음만 나에게 주고 우리가 서로마음이 통하여 네 마음을 나에게 주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 마음을 통해서 너에게 넣어줄 수 있다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부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모님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무슨 일을 결정할 때도 그 부모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할 때에도 그 부모님에 대한 부담들이 그 결정에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어려운 계명이 바로 이렇게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마음을 깊이 드리면서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애착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이 효도의 첫 걸음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에도 없이 행하였던 많은 자식 된 도리들은 도덕적으로는 가치 있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는 바리새인과 같은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부모를 하찮게 생각하고 그리고 부모를 가볍게 여기고 그래서 부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고 그리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했던 그 모든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이 이 부모님들에게 대해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계명이 무엇인지 그 가치를 새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도 우리의 참된 모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그분은 이 땅에 있는 자연적인 육신의 부모뿐 아니라 또한 의무적인 부모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까지 정말 착하고 온전한 아들로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혀 죽어 가실 때 그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에 죄를 대신 짊어지신 메시야로 죽어 가신 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시면서 그분이 하늘 아버지께 얼마나 효성스러운 삶을 사셨는가 하는 것을 그분의 생애를 통해서 너무나 훌륭하게 입증되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바쳐졌고 그리고 그분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에 의해 고무되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아버지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서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담대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고 그리고 당신이 가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께서 자기를 기뻐하신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부모를 향한 진정한 사랑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모와 하나 되고 그리고 그 부모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마음이 부모 안에 있는 합일된 삶,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최상의 효도인 것입니다. 그냥 나에게 베품을 받아야 할 나를 의존하고 있는 부담스런 한 존재가 아니라 그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그렇게 마음이 부모님과 하나 된 그것이 바로 효도의 모든 행위 속에 깃들어야 할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가 모두 살아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 허전함과 쓸쓸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죽음이 그 부모님에 의해서 울타리가 되어서 막아주었던 죽음이 부모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죽음의 강물이 바로 여러분의 발 앞에까지 미치게 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먼저 떠나보낸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설교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압니다. 부모님이 이미 먼저 떠나가신 것은 남아 있는 불효한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이래도 아픔이 되고 저래도 아픔이 됩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마르지 않는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한편 소망을 주지만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한 자식이었고 그 부모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진정으로 있었던 자식이라면 그렇게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해서 효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플 것이고 만약에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해드리지 못했던 불효한 삶을 산 자식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자식이 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복음의 빛으로부터 멀리 떠나 어둠 속에 살 동안에는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지 몰랐지만 분명하게 복음의 빛을 받고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부모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부모를 향해 어떤 마음으로 그 부모를 공경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셔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지난날에 그 모든 불순종으로 돌이켰고 회개의 열매를 맺고 싶은데 그 열매를 돌려드릴 부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 부모가 부족하든지 모자라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부모님이 이 세상에 살아 계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여러분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선물입니다. 그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여러분들이 효도하면서 살수 있고 또 부모님이 살아계시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불효했던 지난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새로운 효도의 삶을 살수 있으니까 그 또한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감사한 선물입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가 내게 물려줄 유산이 없고 그리고 유명한 명성이 없어도 그래도 부모님이 살아있는 그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커다란 행복이며 기쁨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기쁨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Delight와 Valuable입니다. 사랑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뻐합니다. 그 존재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그 존재를 생각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 존재의 흔적을 보면서 그 존재를 사랑의 대상으로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소중히 여기는 감정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때 자기희생이 크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이 여러분들을 그 진자리 마른자리를 갈아 뉘시며 그렇게 오랜 세월을 여러분들을 위해 희생해왔고 그리고 돌보아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부모를 향해서 포악한 존재이고 그리고 무정한 자들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 부모에게 정말 중심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지극히 사소한 이유 때문에 드리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고 그리고 심지어는 부모는 살아 있으나 나와 함께 마음을 통하고 함께 인생의 길을 걷고 생각하기에는 세대 차이가 너무나 많고 수준이 다르다는 단순한 판단을 내리고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참을 수 없는 범죄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언약공동체를 깨트리는 말할 수 없는 불충한 행위임이 오늘 말씀의 빛 앞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렇게 부모에게 마음을 드리라고 하는 이 명령을 우리 부모 자신으로부터 받고 있다면 어쩌면 무시한 수많은 이유를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 부모 안에서, 부모와 우리 관계 안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진지하게 너희 부모에게 마음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를 그 많은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기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재물 되실 때
아무런 사랑도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마음의 무정한 탕자와 같은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흠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 속에 그 마음이 어떠한지가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갚을 수 없는 큰 구속의 빚을 진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 전에는 죽음을 담보로 차가운 돌맹이에 계명을 새기셨지만 오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물같이 녹아 살코기처럼 부드러워진 우리의 마음 안에 새로운 계명을 새기셨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나니” 라고 새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실 부모님을 마음으로부터 깊이 공경하고 마음을 먼저 드리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거의 매를 맞지 않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께 딱 한번 책으로 머리를 한번 얻어맞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던 시절은 얼마나 잔인한 시절인지 초등학교 4학년만 되면 중학교 입시를 위해서 과외를 하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그랬습니다. 요즘 대학교에 가는 것처럼, 그래서 중학교 떨어진 애들이 돌산에 올라가서 투신자살을 하고 그랬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7살 때 시골에서 서울로 공부하기 위해 교육적인 배려 차원에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분가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만한 교육적인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그러나 지금도 그로 말미암은 많은 후유증들을 여태까지 젊은 시절을 여태까지 많이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은데 방학 때 가면 짧으면 일주일, 길면 딱 열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가기 며칠 전부터 밤잠을 못자고 설레고 가기 전날은 꼬박 밤을 새우면서 설레였습니다. 그러다가 9-11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시골에 도착하면 거기에서 꿈같은 시간을 일주일내지 열흘을 보내고는 그리고는 돌아오는 날 밤에는 혼자 누워서 베게 잎이 흠뻑 젖도록 울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모님들이 잔인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냥 시골에 놔두고 그리고 좀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는 길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인데 아니면 같이 올라왔든지 그렇게 해야지 되는데, 돌아와서는 며칠 동안 밥을 못 먹고 그리고 밤이면 마당에 나가서 달을 쳐다보고 울고 그랬습니다. 우리 엄마가 저 달을 보고 있을 걸! 그러면서 그런데 그런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이 지나면서 시간이 점점 지나고 나니까 이제 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어쩌다가 한번 만나면 그렇게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앞에서 큰소리 한번 안 들었지만 무릎을 안 꿇고는 앉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어렵고 무서웠습니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마음을 드리라고 할 때 그것이 어려운 계명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 마음을 아까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그동안에 쌓인 거리감, 심지어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폭행과 배신 등으로 얼룩진 이 배반의 아픔, 실망 이런 것들이 상처로 계속해서 남아 있는 상태 속에서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라고 하는 이 계명은 생활비를 드리라고 하는 계명보다 훨씬 더 잔인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안에서 또 다른 내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정말 그 부모님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마음을 드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형식적인 효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실한 효자가 되기는 힘듭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힘이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오히려 부모가 자신에게 한 일을 생각하고는 이렇게 마음을 부모에게 드리라고 하는 이 당연한 복음적인 계명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큰 사랑이 보이는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빚을 갚았다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아버지로서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과 놀라운 은혜는 모두 눈에 보이는 육신의 아버지가 내게 준 빚을 갚은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에게도 대속자가 되어주셔서 그래서 나와 아버지 사이, 나와 어머니 사이를 중재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마음을 드리고 그리고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부모님의 인격적인 장점이나 훌륭한 우리를 위해 보여준 신앙의 아름다운 모본, 이런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어느 날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그리고 주님의 용서하신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 가치가 없는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를 모두 용납하시고 자기의 자녀로 삼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계시듯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주님이 제게 베푸신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할까? 내 머리카락을 잘라서 신발을 삼아 주님의 발에 신겨드릴까요? 내 살가죽을 벗겨서 곱게 옷을 지어서 벗으신 주님의 몸에 덮어드릴까요? 내 살점을 떼어서 구멍 난 옆구리, 뚫어진 손바닥에 메워 드릴까요? 그랬더니 주님이 하신 말씀이 괜찮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부모와 깊이 화해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들을 잊고 그렇게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런 그 상처로 얼룩진 지난날의 과거들을 잊어버리고 부모와 깊이 화해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사랑해주셨던 것처럼 그 사랑의 어떤 조건도 없고 그리고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그리고 내 존재 자체가 내 마음에 기쁨이 되고 소중히 여긴바 되어서 나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그렇게 내가 우리 부모를 사랑해야지 되겠다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얼마 후에 똑같이 여러분이 아파했던 그런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될 것이고 여러분들이 미구에 오늘 여러분들의 부모가 그대들로부터 소외되어서 겪는 그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또 다른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찬란한 빛 가운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때문에 행복해하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늘 가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여러분들을 통해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고 그리고 먼저 용서하고 화해할 마음을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복음을 몰라서, 신앙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참된 부모의 삶을 살지 못했던 그대들의 부모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이제 마음과 마음이 교류하지 못하는 그 비극은 여러분들의 시대로 끝이 나고 그러기 위해서 그 부모를 마음 깊은 곳에서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깊이 존중히 여기고 죽어도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분들의 마음이 우리로 인한 외로움이 없도록, 어떤 때이든지 자식인 내가 그분의 마음 안에 있고 당신이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그 부모님들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드려야 합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나 깃발을 높이 꽂은 위대하고 탁월한 승리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드넓은 우주의 가장 연약한 존재로 태어나서 주님이 창조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셨을 때 우리를 두고 싶으셨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한없이 기뻐하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름이 없고 빛이 없어도 그는 탁월한 사람이고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며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상처 난 가족을 잘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어떻게 부모를 사랑해야지 되는지를 자식에게 가르쳐주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에게 진정한 자녀의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나게 만들어주어서 그래서 복음과 함께 여러분들의 삶이 빛나는 그런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3. 먼저 내 부모를 구원하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수2:12)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려고 할 때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가까이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그 땅을 정탐할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었고 그리고 면밀하게 정탐을 해서 이제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계획이 짜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두 사람은 즉시 발각이 되었고 그리고 삽시간에 첩자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당국에서 이 두 사람을 체포하도록 명령이 내렸습니다. 그때 라합이라고 하는 여자가 자기 나라를 배신하면서까지 이 두 사람을 은밀하게 챙겨주고 목숨을 보존해준 사건을 오늘 여기에 적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행한 이 일은 훌륭한 일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에 이 여자의 행한 일이 기록이 되어 있고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그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하찮은 여자였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행했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 충분한 기쁨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비록 이방의 하찮은 여자였지만 이 믿음으로 행한 이 일을 계기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속의 역사를 이어오는 메시아의 가문의 한 여인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여자에게 있었던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에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면서까지 이 정탐꾼들을 숨겨줌으로 이스라엘의 품안으로 돌아오는 그런 신앙적인 귀화를 하게 되었을까? 우리들이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여자가 보여주었던 믿음은 크게 두 가지였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세 가지로 오늘 본문 기록에 나오는데 그는 첫째로 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직접 보지 못했어도 풍문에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깊이 감화를 받고 이 여자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했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했다면 반드시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한 신앙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홍해의 사건에 대한 정확한 평가였습니다. 이 여인이 그 자리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2-300만 명이나 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사람과 함께 이 여자도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큰 능력으로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물기둥 사이를 지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뒤따라오는 애굽의 병거들을 수장시키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고 그 소식은 바람을 타고 가나안에 있는 이 여인에게까지 전해졌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릴 그때에 이 여자는 그 두렵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은 신앙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혼과 옥이라고 하는 왕을 격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두 왕은 아모리 족속의 왕들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전쟁하고 싶은 의사는 없었고 그들의 땅을 잠깐 지나서 가나안쪽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시혼과 옥은 그 길을 막아섰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이 같은 핏줄이었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들이 호락호락 길을 내줄 리가 없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싸움은 잘 조직되어 발달한 병기를 가진 아모리 족속의 승리를 예상하게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들을 전멸시켜버리고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가나안 앞까지 도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나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고 정신은 혼절하게 될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두려움으로 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포 이상의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저 큰 능력과 위엄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사랑받는 종족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앙을 고백하고 이스라엘의 품으로 들어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비록 거기서 자신이 받는 대우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어먹는 상태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없이 하나님에 의하여 멸망을 기다리는 내 민족 속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그런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이 가득 찬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고 혼절할 정도가 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거기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라합이라는 비참한 그 큰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으로 가득 찬 심판 속에서 자신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여인을 비참한 여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족속 가운데서 태어나는 훌륭한 믿음의 여인으로 돌려놓게 만든 그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과 임박한 진노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구원을 갈망했고 그 믿음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예외적으로 이 여인을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가지고 있었던 구원을 바라는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믿음은 심판으로 말미암은 멸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여인이 가나안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 두 사람에게 간곡하게구원을 요청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가 나를 선대하라.” “내가 너희를 구원해주었은즉 너희는 나를 구원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는 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 달라.”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집안을 어떻게 기억해주어야 하는지를 거론할 때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이 내 부모를 구원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의 남녀 형제들을, 그 다음에 그들과 함께 한 모든 골육지친들을 살려달라고 이 정탐꾼들에게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그는 그냥 애원했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믿을 수가 없다. 나에게 그 말이 진실이라는 표를 뭔가를 보여 달라. 그러니까 이 여인이 자기의 아버지와 형제들과 거기에 딸린 골육지친의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절박하게 매달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운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아버지의 집이었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부모였습니다. 물론 이 부모는 라합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을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라합의 마음에는 부모가 그것을 알던 모르던 상관이 없이 곧 이 말, 두렵고 놀라운 심판이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찬 멸망일 테니까 거기로부터 내 부모가 안전하게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자기가 구출해준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간곡하게 징표까지 요구하면서 자기 부모의 구원을 위해서 매달렸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추격하던 모든 가나안 사람을 따돌리고 라합의 도움으로 그 창문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숲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타고 내려온 밧줄은 붉은 밧줄이었습니다. 고고학적인 탐사에 의하면 이 가나안 쪽에는 염료가 매우 발달을 해서 그래서 값싼 옷감에다가 물을 먹여서 그래서 비싸게 파는 무역업들이 성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요셉이 입었던 그 채색 옷도 아마 여기에 가나안에 발달한 염료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들이 붉은 밧줄을 타고 내려오게 되었고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대신 어린양이 죽었고 그 붉은 피가 문인방과설주에 그리고 골고루 발라지고 나서 그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창문에 드리워진 이 붉은 줄이 진실한 징표가 되어서 그 붉은 줄이 드리워진 그 창문달린 그 집에 모여 있는 라합의 집의 식구만 멸망할 당시에 구출을 받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하게 될 구원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 속에 갇혔을 때 옥문이 열리고 두려워 떠는 감시 속에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네가 구원을 얻으면 네가 주 예수를 믿으면 그러면 너의 집안 식구들은 너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 뜻이 아니라 네가 진실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면 너의 기도와 전도로 너의 가족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예고적 선언이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선언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우리 때문에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전도 구원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 뿐 아니라 우리의 가족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최선을 다해서 효도해야지 됩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식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을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잘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잘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자체는 저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 그래서 새 인생을 선택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이 지금 만족하고 있다.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면 아마 새로운 것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은 것은 새로운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집을 나와서 살았던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노인네들에게는 설득력이 강합니다. 할아버지 예수 믿으십시오. 아, 나 그런 것 싫어. 그래서 옛날에 말예요. 돈도 많고 자식들도 끔찍이 사랑하는 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철이 없어서 아버지가 매사에 간섭한다고 투덜대면서 보따리를 싸서 돈까지 훔쳐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돌아다니면서 돈도 다 쓰고 까불다가 그리고 이제 왔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재미있는 일도 많고 해서 살았는데 그 자식이 그래도 더 늙기 전에 아버지한테 돌아가서 아버지 돈 훔치고 아버지 마음 아프게 해드린 것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빌고 다만 10년이라도 그 아버지의 집에서 자식노릇 하다가 죽어야지 인간이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타향살이 하다가 거기에서 죽어버려야지 사람의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면 그 할아버지가 펄쩍 뜁니다. 그런 나쁜 놈이 어디에 있어. 당장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잘못했다고 그래야지. 당신이 바로 그렇게 집을 떠난 그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집을 떠나왔던 타향살이하던 자식이 철이 드니까 깨닫고 아버지의 집에 다시 가서 살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노인네들이 이해를 잘 하십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부모님께 효도를 잘 해야지 됩니다. 우리의 신앙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효도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 앞에서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것과 눈에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 섬김 이런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같이 젊은 시절부터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입각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참된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둥글게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어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네모반듯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결혼하기 전인데 어느 목사님이 자기는 청년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그러면 신앙을 먼저 보지 않고 성품을 먼저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먼저 되었는가. 그 인격을 보고 그 다음에 신앙의 열심을 보고 그리고 중매를 해준다고 합니다. 그분이 이름을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알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 젊은 시절에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무슨 유명한 목사님이 저렇게 믿음이 없나. 신앙이 먼저지. 신앙의 열심이 먼저고 그 다음에 다른 게 있는 것이지. 저렇게 설교 시간에 저러고 얘기할 수 있나. 그랬습니다. 나중에 제가 살고 보니까 그 목사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분 말씀이 신앙을 무시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열심의 정도보다는 신앙에 의해서 잘 닦여진 인격의 성질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더 잘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은혜가 우리를 떠밀어서 참 사람 된 도리를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런 해괴망측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그 은혜를 활용해서 그 은혜의 힘을 빌어서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앙의 열심이 있어도 가정을 거의 포기한사람들이 있습니다. 캐들어 가보면 참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로 얼룩진 집안, 형제간에 불화하고 골 깊은 형제들 간의 갈등, 그리고 부모와의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그 아픈 기억들, 그러고도 자신이 은혜를 조금 받고 뭐 좀 풀어보려고 하면 도저히 도움이 안 되는 자기 가족들이 비상식적인 반응, 이런 것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그리고 실질적으로 핍박을 받는 그런 지체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잘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그러면서 여러분 자신이 놓여 있는 여러분 자신이 인간의 도리를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막말로이야기해서 동기간 같지 않은 형제들에게 여러분들은 가장 동기간이 하여야 할 도리를 해야지 되고 부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분들에게 잘못해준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그 부모를 가장 좋은 자식처럼 그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으로는 이런 일들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그래야 합니다. 제가 얘기할 때마다 감동을 받는 장면인데,
(예화: 외국에 가셔서 들으신 이야기- 어머니가 성격적으로 불안정하셔서 자식에게 상 처를 주고 그러지만 딸이 사랑으로 엄마를 위로하며 목욕을 시키고 엄마를 진정 시키며 주무실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
결국은 누가 엄마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내 안에 평화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상처받을 수 있는 자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갈 때의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참 나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효능이 바로 그런 상처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이야기는 요만큼 하고 상처 이야기는 이만큼 합니다. 그리고 뻑 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설교를 하다가 원고 없이 설교를 하는데 하다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 한쪽으로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자기만 노려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똑같은 순간에 그 반대편의 자매는 목사님이 자기는 안 쳐다보고 다른 사람만 계속 쳐다보더랍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건 가지고 한 사람은 상처를 받고 한 사람은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사치입니다.
전쟁터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보면 폭탄이 떨어져서 친구가 쓰러져서 동료를 막 끌고 가서 보니까 허리 아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전쟁터에서 병사 하나가 대성통곡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상처받았다고 칼로 자꾸 베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그런 것을 끊임없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우리가 이 젊은 나이에 인생사는 도리를 잘 깨달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가운데로 행하며 그 인간의 도리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여러분들을 참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나는 우리 부모를 잘 용납할 수 없지만 나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하늘 아버지가 나보고 이 땅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가르쳐주실 때 그 사랑에 너무 목이 메어서 우리 아버지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철철이 좋은 옷도 사다드리고 따뜻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그리고 항상 용돈이라도 드리고 이렇게 하면서 자식 된 도리를 다 하면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오늘 도전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충분한 효도인가? 우리가 아무리 부모님께 마음을 열고 그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우리 자식의 의무를 다하고 그 부모님의 보이는 눈앞에서 춤이라도 추고 노래라도 불러서 한 시간 동안 그 부모의 마음을 아주 유쾌하게 해드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충분한 효도인가? 왜 예수를 안 믿으시는데,
장마철에 반짝 나는 햇빛, 추운 겨울에 잠깐 비추는 따뜻한 햇살, 이것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이 노인들의 건강입니다. 건강하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건강이 확 꺾어지고 죽음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것이 노인들의 육체입니다. 시간이 무한정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부모님이 예수를 안 믿고 돌아가신다. 교회는 나오셨지만 복음을 아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분의 중생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 때 그 부모님들이 돌아가셨다고 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떨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그 마음은 지금 부모님을 불신상태에서 떠나보낸 여러분들의 친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고 자기도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는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고 복음의 정직한 빛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진실을 확신하게 될 때 그때 부모님이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아니면 부모님이 불신상태에서 돌아가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무엇입니까?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하나님이 멸망시키기로 경고하시고 그래도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멸망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그 속에 자기의 가족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제 이름을 차라리 지워주십시오. 내 골육지친이 없는 하늘나라가 나에게 어떻게 하늘나라가 될 수 있겠고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내 부모, 내 형제가 지옥에서 울부짖는데 그것을 내려다볼 수 있는 하늘나라가 어떻게 나에게 천당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고백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가족들 가운데 여러분이 부모를 구원할 도구가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어두움 속에 복음의 빛을 주어서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고 그리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두 자폐증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도무지 자신 안에 있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자기가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자기 부모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들으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복음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복수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을 하면 그들은 펄쩍 뛸 것입니다. 그게 저의 경험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나 부모를 향한 원망 같은 것을 들으면서 기도는 하지만 그러나 부모님에 대한 저 부모님의 영혼이 반드시 구원을 얻어야지 되겠다. 그런 뜨거운 눈물이 안 납니다. 내가 교사하면서 내가 맡고 있는 반, 동리에서 예수 믿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눈물이 쏟아지는데 엄마 아빠를 위해서는 그런 눈물이 안 납니다. 그래서 뭔가 화해가 안 됩니다. 부모가 단지 부모로만 보이면 결코 그 영혼들에게 우리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필요한 고아와 같은 영혼으로 보여야 합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에게 그 부모님들이 상처를 남기고 여러분들을 정말 주의 교훈과 교양대로 양육해서 그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한없는 존경의 대상으로 남지 못한 것도 그 부모님에게 영적인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또 영적인 아버지가 있었다고 믿는 여러분 자신들도 그렇게 훌륭하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그렇게 밖에 못 사신 것도 사실은 어떻게 보면 부모님의 죄라기보다는 나처럼 일찍 하나님을 못 만난 그 불행 때문에 부모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많이 주면서 실망시켜드린 것이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는 여러분들이 더 큰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자신이 부모가 사랑스러운 아버지가 필요한 고아의 영혼처럼 보여야 합니다.
나는 예수 안 믿고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자식들도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가서 봐라. 네 아버지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성경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했는데 당신들도 곧 간다. 예수 믿어라. 그런데 부모는 예수를 안 믿고 죽었는데 자식은 예수를 믿습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뭐라고 얘기를 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자폐증 내지는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가 복음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 앞에 서면 한없이 오그라들어서 코딱지만 해집니다.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다가 야 관둬. 예수긴 무슨 예수야. 그러면 한없이 쪼그라들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소심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그렇게 하찮습니까? 여러분들이 받은 그 구원이 그렇게 왜소하고 초라한 구원입니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오랫동안 부모님하고 살기 보다는 할머니하고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참 잘해야지 됩니다. 효도를 잘하는 집안에 가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주 열애가 되어서 하찮게 대우하는 집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아주 따뜻하게 그리고 손자인 여러분들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째든 그런데 그 할머니가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시고 뭐 가히 그 사랑은 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안 하시는 것이 있는데 예수는 안 믿으셨습니다. 기도도 하고 권유도 하고 그랬는데 참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날을 잡았습니다. 할머니가 나에 대한 애정으로 그 마음이 가장 넘쳐나는 어느 날을 딱 잡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손을 꼭 잡고 그리고 내가 이제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간절히 할머니,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나요? 나는 너밖에 없다. 나는 네가 제일 좋다. 나도 할머니를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합니다. 그럼 할머니 내 소원하나 들어줄 수 있지? 야 내가 돈이 있니, 뭐가 있니. 아니 그런 것 말고 그래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할머니 이제 얼마 있으면 할머니도 죽을 게 아니요. 그렇지, 우리 죽은 다음에 다시 못 만났으면 좋겠어, 할머니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만나야지. 그럼 할머니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가 없어. 왜? 할머니는 지옥으로 가고 나는 천국 가. 내가 할머니께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할머니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사실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그래. 내가 여태까지 네가 교회에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갔는데 내 마음을 바꾸겠다. 내가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손자가 내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저렇게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가슴아파하는데 예수 믿어서 아무 효험이 없다고 해도 내가 너 때문에라도 내가 교회에 다니마. 그러면서 신기하게 그 이후에 돌아가실 때까지 매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교회를 빠진 적이 없으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에게 진지함과 끈질김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사랑하는 엄마를 끌어안고 한번 펑펑 울어보셨습니까? 엄마 나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엄마가 너무 불쌍해. 한번 그러면 애가 미쳤나. 그럴 것입니다. 세 번만 하면 엄마가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강퍅합니다. 우리가 너무 강퍅합니다. 엄마 아빠는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지금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그 엄마 아빠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비참한지 우리가 느낄 수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고 어떻게 그분들의 자식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도 아파할 수 없는 영혼을 우리가 끌어안고 그분들의 고단한 삶까지 사랑하면서 우리들이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이 부족합니다. 정말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진자리 마른자리 나를 갈아 뉘시며 일생을 섬기면서 사셨는데 정말 저 분들의 영혼에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들을 뜨겁게 끌어안고 정말 하나님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일 없이 이 세상의 자원으로 효도하는 것만을 가지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그들을 향한 효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여러분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칩시다. 화해하지 못할 사연이 있다고 칩시다. 그게 한 사람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만큼 그렇게 큰 것입니까? 원수에게 가서도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그리고 적군에게 가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깊이 부모를 용서해야지 됩니다. 사랑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것을 깊이 회개해야지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부모의 영혼에서 들려오는 하나님 없는 영혼의 단장의 흐느낌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것은 여러분들의 따뜻한 변화, 효도 끝에 가져다주는 이 세상의 자원들만으로는 그 흐느낌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정한 사람들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를 위해서 흐느껴보셨습니까? 애끓는 마음으로 부모의 이름 석자가 가슴에 서러움이 되도록 하나님 우리 아버지 없는 천국, 우리 엄마 없는 천국 제가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내 생명과 우리 아버지의 영혼이 결탁되어 있고 우리 엄마의 생명과 내 영혼이 결탁되어 있사오니 우리를 함께 살리시든지 함께 죽여주십시오. 이게 사도 바울의 기도였고 모세의 기도였습니다. 그게 진짜 예수 안에 있는 진정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고백이고 가족사랑입니다.
우리같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흘려주신 보혈의 그 피와 자기를 버리시는 그 희생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안 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전부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그 부모님들 속에서 그 흐느끼는 하나님 없는 영혼의 탄식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을 마음으로 깊이 끌어안고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옛날에 내 마음에 만족되지 않았던 그 부모의 삶까지도 사랑해야지 됩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생애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부모를 위해서 많이 울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히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는 우리 엄마 아빠의 구원받지 못함이 저희들의 강퍅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서 두 번 불효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눈물로 그 이름을 적시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내 생명을 주어서라도 내 부모를 구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해야지 됩니다.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서 금식해보셨습니까? 어느 때까지입니까? 부모님이 믿지 않는 이 불신상태의 원한을 내게 풀어주십시오.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해주십니다.
저희 교회 자매 한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 토요일 날 예고도 없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부부가 와서 그 자매가 말을 잇기도 전에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무엇이냐 그랬더니 자기가 변화 받지 않았을 때는 모르지만 예수님 믿고 변화받자 마자 십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하나님은 아시는데 그 하나밖에 없는 엄마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서 빌었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할 때는 많았지만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어떻게 하든지그 부모님께 희생하고 헌신하고 사랑하고 그 어머니를 위해서 눈물로 10여 년 동안을 아프기까지 하면서까지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는지 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식물인간이 되셨는데 의사가 며칠 기대하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게 사실은 목회를 하면서도 그렇게 난감한 경우에는 할말이 별로 없습니다.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그래도 위로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주면서 그랬습니다. 우리는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래도 어떻게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다음날인가 교회의 목회자들을 보냈습니다. 식물 상태에 있는 사람과 대화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문병차 가서 기도해주고 오려고 했는데 참 기가 막힙니다. 심방대원이 간 그 순간에 식물인간 상태에서 정신이 명료하게 돌아왔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 받아들이시고 나중에 그러는데 애야 내가 사실은 미션 대학을 나왔단다. 그러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 그 피로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하늘나라의 소망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다 고백하고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다 불러서 손잡고 내가 먼저 가니까 너희도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다시 식물인간 상태로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영접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죽었어도 기도는 살아남아서 다음 세대에 역사합니다. 조지 뮬러가 자기의 두 친구를 위해서 53년 동안이나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죽은 후에도 친구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그는 죽었지만 그의 기도는 살아 역사해서 그 친구의 마음에 울려 퍼졌고 결국은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안 믿는 우리 엄마, 안 믿는 우리 아빠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음 냉냉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정말 사랑이 없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깊이 깨트려져서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진지해져야 합니다.
얼마 전에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새가족 환영회를 하는데 한 사람이 교회에 끌려왔는데 완전 생짜배기입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는 안 듣고 졸다가 깨어나서 손장난 하다가 또 졸다가 하늘 쳐다보고 한숨쉬고 계속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그리고 결심을 했습니다. 설교가 거의 끝나가는 데 다 끝났을 때 다음 주에 다시 와야지. 그래서 뭐가 있었는가 하면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마지막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랍니다. 자기는 그 순간에 왜 설교자가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왜 아무 것도 들을 것이 없으니까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하나 가슴에 명료하게 새겨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뭔가 진정한 의미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진지해질 수없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그게 뭘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무엇일까? 진실이 무엇일까? 그게 구도자의 마음이 아닌가. 회심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회심합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복음과 구원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깊이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대신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깊이 우리 엄마 아빠의 이름을 끌어안고 내 생명과 우리 어머니의 이름을 결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부모님을 구원해주십시오. 비웃어도 기도하고, 핍박해도 전하고, 우리를 멸시해도 편지하고 온 방법을 다해서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복음 전도는 결과에 의해서만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는 우리의 삶의 발자취에 의해서 상을 받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그런다고 할지라도 우리 부모님이 예수를 안 믿기로 예정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생명 있는 날 동안 그 영혼을 깊이 끌어안고 흐느껴 울고 그리고 긍휼히 여기고 한없이 불쌍히 여기면서 어머니 아버지 이제껏 까지 하나님 없이 살아온 것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러우신데 이제는 예수를 믿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을 깊이 끌어안고 살아가는 그래서 속히 여러분 속에 구원의 기쁜 날이 이르게 되는 복된 가정 복음화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 부모 공경과 순종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사도는 이 에베소서에서 그 구원의 위대한 축복성과 그리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만들었던 그 위대한 구원 교리에 대해서 1장서부터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도 처음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이처럼 장엄한 복음의 비밀들에 대해서 다 알지는 못했겠지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며 성화의 길을 가고 진리에 대한 인식이 확정되기 시작하면서 그 은혜의 장엄한 세계들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훨씬 더 성숙한 필체로 이제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성도의 놀라운 축복성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장엄하고 위대한 교리에 대한 선언을 피력하기를 마친 다음에 5장 이후로부터 6장 마지막까지 끝날 때까지 이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권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서신을 쓸 때 흔히 하던 방식이었습니다. 5장 뒷부분에서 교회와 성도,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림과 같이 그려낸 후에 이제 6장에 처음 시작을 하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자식과 부모의 관계, 그 앞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더불어서 이제 고용주와 고영인의 관계 등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6장을 처음 시작하면서 “자녀들아 너희 부모들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렇게 말씀하면서 두 절을 더 걸쳐서 부모 공경의 도리에 대해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순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시사 받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들이 구원에 관한 장엄한 교리를 인식하고 그리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그 장엄한 구원 계획에 대해서 우리들이 폭 넓게 듣고 또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우리의 진정한 신앙의 고백은 우리의 지성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분투하는 실제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6장 마지막 끝에 가서 “종말로” 하면서 도입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라” 이렇게 선언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체가 신령한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의 전개방식은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구원의 장엄한 도리들, 그리고 깊은 신학적인 교리와 진리의 내용들,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마지막 한 가지 지점으로 모두 모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실제의 삶입니다.
그런 복음의 장엄한 교리를 깨닫고 큰 은혜를 받은 후에 그 다음에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아버지의 아들로 우리 어머니의 딸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한 직장의 고용인으로 혹은 고용주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가.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게 직접적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의 영성과 모든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내적 변화가 만년필에 가득 채워진 잉크의 상태라고 한다면 나는 우리의 삶은 그것을 위해서 쓰여 져 나가는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삶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부모 공경의 대의에 대해서 세 가지 사실을 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다루었지만 한 번 더 간략하게 살피고 오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처음에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것은 신명기 본문을 기초로 해서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부모 공경의 대의라고 저희들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효도는 동정적이거나, 의무적이거나, 율법적인 혹은 도덕적인 그런 효도가 아니라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효도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을 아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그 형제들 간에 다툼 끝에 발언권이 약한 내가 그 부모를 떠맡게 되었다는 식의 부채감을 갖는 것은 그것은 이 개념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않고 그 부모를 깊이 소중하게 여기며 섬겨야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이것이 효도의 대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 우리들이 살펴본 것은 그 부모를 이렇게 진정으로 효도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드리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렸습니다. 의무적으로 혹은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그 부모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효도의 대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인 우리 사이에는 세대간에 넘기 어려운 커다란 벽이 존재하고 아울러서 부모와 자식인 우리 사이에 상처와 원망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넘기 어려운 인격적 갈등의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벽과 갈등들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는 그 계명의 당위성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해서 우리의 부모와 매인 것들을 마음속에서 깊이 풀고 그리고 한번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마음을 드리는 그 일이 효도의 대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그 세 번째는 부모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효도의 궁극적인 대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효도가 단지 입술과 그리고 개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효도이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우리의 효도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만 채워짐으로서 효도가 완주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값진 의복과 좋은 음식으로 부모를 대접한다고 할지라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부모가 진정으로 구원받지 못했다면 자식으로서 그 부모를 위한 마땅한 섬김을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효도의 내용들은 이 세상에 있는 육신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공궤 받고 그리고 아름다운 의복을 우리들에게 얻어가지신다고 하고 마음으로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부모님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부자의 집에서 빌어먹고 살던 나사로가 낙원이라고 불리는 천국의 입구 같은 곳에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지옥의 출입구쯤 된다고 할 수 있는 음부에서 고통하고 있는 그 주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서 낙원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만약에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듣고 그리고 우리에게 한모금의 물을 구하는 신음소리를 우리 부모로부터 듣는 다면 거기가 어떻게 낙원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잠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효도하는 그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과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내세의 구원을 동시에 부모님들에게 누릴 수 있도록 해드리는 그것이 영원에 이르는 효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에 대해서 희미하게 밖에 알지 못했던 라합과 같은 여자도 자신이 구원을 갈망하게 되니까 그 부모와 형제, 거기에 딸린 식구들의 구원을 함께 갈망하게 되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우리들이 부모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부모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만 마치 그 부모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인 것처럼 그 구원 문제에 대해서 고뇌하고 분투하면서 그 부모님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서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함으로 말미암아 부모님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깨닫고 인간의 본분인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고 섬기는 생애를 살다가 저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도록 그렇게 효도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진정으로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부모님을 용납하고 그 부모님의 영혼을 한없이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그런 자비로운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그럼 부모 공경과 순종함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들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부모를 공경하는 구체적인 표현이 순종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하나님에게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 되는데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보장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렇게 순종하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대한 공경이 필요하고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함으로서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그 부모에게 순종해야지 된다고 하는 명령을 준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우리들이 놓여 있는 이 삶의 상황과 이 에베소서를 봤던 수신자들의 삶의 상황은 좀 다르다는 사실을 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편지를 쓸 때 상정하고 있는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가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있게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참된 신자이고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간절히 살기를 원한다고 치고 그 부모의 꿈이 어떻게 하든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참된 인간이 되고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날마다 자기 깨어짐과 그리고 내적인 성찰 가운데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식들은 그 부모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지 됩니다.
인간이 결함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부모가 그렇게 참된 신자가 되기를 눈물로 갈망하고 그리고 구도의 길을 걸어간다면 아마 그 부모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에 되는 그런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잠시 후에 우리들이 다루겠습니다만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다른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부모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많이 있고 그리고 심지어는 5월이면 가슴에 저리도록 계속되는 우리 안에 있는 가슴앓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직까지 모르십니다. 그런 사정을 보면서 우리는 그 분들이 하나님을 모르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소원이나 분부가 하나님의 명령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부모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신앙적으로 너무 어리거나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진실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깊이 부서지는 이 내적인 쇄신의 경험이 없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생각은 여전히 저 세상에 있고 가치관도 전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못 박히지 않는 가치관입니다. 거칠고 조잡한 인생관을 가지고 그 속에 아주 부조리한 형태로 신앙과 그리고 신앙에서의 교훈 일부와 이 세상적인 가치관이 뒤범벅이 되어서 거기서 나온 모든 판단과 이런 것들이 전혀 경건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모를 가졌을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을 해야지 될 것은 우리들이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부모님들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들이 가려서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가정의 참 모습은 가족들이 일단 모두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겨우 참된 가정으로 돌아가는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성화의 작용이 계속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 참된 아버지가 이런 아버지가 아니 구나를 깨닫습니다. 깨트려져가면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것이 곧 참된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과 성화로 연결이 됩니다. 자식은 자식대로 하나님 앞에 그런 성화의 깨어짐의 세계를 가지고 성숙해나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깨트려지면서 자기 안에 있는 부모를 향한 원망과 미움을 끊고 그리고 그 부모를 깊이 용서하고 자신 속에 얽혀있던 그런 부조리하고 더러운 부패한 것들을 도려내고 그래서 부모님을 깊이 용납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식은 자식대로 그러고 부모는 부모대로 그렇습니다. 동기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진리 앞에 마음이 녹고 나니까 자신이 정말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과 같이 인정머리 없고 아버지의 집에 동생과 함께 사는 진정한 행복도 몰랐던 막대 먹은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동생을 사랑하게 됩니다. 동생은 동생대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이런 변화가 다 함께 동시에 일어날 때 우리의 가정이 진정으로 가정다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꿈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나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그리고 우리의 몸으로 낳은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내 아내와 내 남편을 통해서도 함께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참 변화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열망이 진실한 열망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결코 자기 혼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리자이션이라고 불리는 그 결심문 속에서 일번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이웃들도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야지 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거기 삶의 목표를 고정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자기 혼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 가지고는 만족을 할 수 없습니다. 나뿐 아니라 너도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 모두 동시에 함께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믿지 않거나 혹은 형식적인 신자인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는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사실은 우리가 영적인 부모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가 형식적인 신자라고 해서 그 부모를 공경해야 할 우리의 자녀로서의 책임이 면제될 수 없고 더구나 부모가 불신자라고 해서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고 사랑해야 할 자녀인 우리의 책임이 면제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런 때일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다 깊은 영성과 경건의 삶으로부터 부채적인 삶으로 이끌어내서 자식인 우리들의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아버지 됨이 무엇이고 진정한 어머니 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부모님들에게 보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라고 하는 단서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순종하되 그 부모님의 바라는 바 그분의 분부와 명령이 주 안에 있을 때에 우리들이 주님께 순종해야지 됩니다. 순종하듯이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맞는 뜻을 말할 때만 부모에게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우리에게 분부하고 명하는 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것과 명백히 충돌할 때 그때는 우리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늘아버지가 우리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욱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부모가 우리에게 원하는 바가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성경과 성경의 정신이 우리를 허락하는 모든 한도 안에서 그 부모에게 순종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질서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창조의 모든 세계의 질서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각 피조물 속에 본성의 빛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어렸을 때보면 기와집 처마 끝에 봄이면 제비가 날아와서 집을 짓습니다. 그 밑에 막 똥을 싸서 지저분한데도 그 새가 들어오면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그 밑에 널빤지를 대고 그리고 벽에다 달아서 그 제비들이 거기서 배설물을 해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만들고 그리고 제비가 와서 집을 짓게 허락을 해줍니다. 이윽고 거기에서 알을 까고 노란 주둥이를 가진 병아리 새끼들이 나옵니다. 얼굴 전체가 입입니다. 그렇게 입이 큽니다. 그러면 그 어미 새가 날아와서 벌레를 물고 옵니다. 그 얼마나 먹고 싶겠습니까? 자기도 새니 얼마나 먹고 싶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물고 오면 저기 전기 줄을 지날 때쯤이면 둥주리에 가만히 있던 제비새끼들이 대 여섯 마리가 고개를 쭉 빼고 그 얼굴 전체가 입인 그 얼굴을 들고 그리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래도 그 어미 새는 한번도 그 순서를 깨트리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입을 벌려도 넣어줄 자에게 차례대로 넣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그 제비들을 다 장성하도록 먹여서 날아다닐 정도로 만들어놓습니다. 그래서 그 둥지를 떠나서 훨훨 창공을 날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날아간 제비가 그 은혜에 감사해서 벌레를 물고 부모 제비가 누워있는 둥지를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연의 모든 동물들이 세계에는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내리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본성의 빛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그렇게 본성적으로 사랑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보면 자식들을 막 버리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정말 거듭나지 못한 인간 속에 역사하고 있는 이 죄의 잔인함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창조의 거대한 세계가 내리사랑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그리고 그 질서에 의해서 이 피조세계가 집행되도록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동물들에게 없는 또 다른 명령을 주시는데 그것은 올리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리사랑은 본성의 빛을 많이 받지만 올리 사랑은 인간 개개인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 이 부패성과 결탁이 되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꺾는 일을 동반해야지만 그 빛을 발하는 그런 종류의 본성의 빛입니다. 그리고 어째든 올리 사랑이 본성을 인간 속에 심어놓으셨다고 하더라도 내리사랑만큼 그렇게 열려하고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낳은 자식을 부담스러워하는 애미 애비 보다는 연로한 자기 부모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자기 자식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최근에 신문에 보니까 절대 빈곤층에서 허덕이는 노인들이 2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용돈 하나 없이 거의 극빈의 상태에 놓여 있는 노인들이 2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유럽과 같이 나라가 이제 노인들을 책임져야지 된다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자식들이 그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고 사랑해서 그 부모를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올리 사랑의 도리를 다하면서 부모를 섬긴다면 20만 명이라는 그 절대 빈곤층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능력이 안 되는 자녀를 제외하고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교회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이었지만 과부의 문제에 있어서는 엄히 명하기를 자녀들이 있으면 그 자녀들로 먼저 부모를 섬기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그렇게 할 여력이 없을 때는 교회가 돌보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먹고 살고 지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올리 사랑의 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7-8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요즘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일본에 서비스 업종 중에 양로원에 있는데 그래도 돈이 좀 있는 노인네들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 개발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어염 집 가정에 할아버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 돈으로 3만 엔이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한 30만원쯤 되는데 그렇게 이용료를 내면 평범한 그 가정에 그 할아버지가 들어가서 하루 동안 그 집에서 어른으로 관계를 가져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의 여주인은 그 할아버지를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그 집의 남자도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그 집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하루 동안에 그 사람을 할아버지 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해서 같은 식탁에서 밥도 먹고 TV도 보고 혹은 소풍도 가고 이렇게 한 가족이 일심동체가 되어서 그 할아버지와 함께 있어주는데 30만원, 그 다음날이면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여자의 아버지가 되겠으며 그 피도 살도 안 섞인 애들이 어떻게 자기 손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혼자 있는 것이 외로우면 그렇게 돈을 내고 이용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위장된 관계를 가져보려고 하겠습니까? 올리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모든 정신적인 특성까지 고려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책임감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노인들에게서 생기는 많은 정신적인 질병들 가운데 상당수가 외로움과 단절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깊고 심오한 신앙의 세계나 학문의 세계가 있어서 끝까지 후예들의 존경을 받거나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재능을 소유한 노년을 맞은 사람들은 안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리고 노인으로서 자기 나름대로 어떤 성취욕을 느끼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다면 외롭지 않겠지만 현직에서 떨어지고 나서 경제력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서 자식에게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식들 속에 자기를 향한 어떤 부담감만 있을 뿐 인격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그때에 그들은 특별한 신앙이 없는 한 정신적인 공항상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벌써 오래전서부터 노년을 맞을 준비를 꼼꼼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뭐 벌써 그런 것을 이야기한다는 게 우습지만 그렇지만 우스울 정도로 또 세월이 빨리 갑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죽는 날까지 외롭지 않게 정말 잘 살다가 죽어야지 되겠다. 그래서 저는 은퇴 후가 훨씬 더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 지금서부터 꼼꼼하게 준비를 하고 심지어는 제가 죽은 후 50년 후까지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제가 이미 이 땅에서 사라져서 죽어서 없어졌는데도 제 이름으로 일년에 한두 번 정도씩 한 50년에 걸쳐서 꾸준히 책이 나오게, 아니 여러분들은 웃지만 저는 벌써 한 7-8년 전서부터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 후 50년 후의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꼼꼼하게 준비를 해서 그래서 누군가 그냥 출판사에 전달만 하면 그 책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좀 생각을 해두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부모님들 중에 그런 여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올리 사랑은 단순히 물질을 공급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관계에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부모님들을 의사결정 속에 좀 끼어드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부모님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오늘 순종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 명령도 결국은 그 부모님을 위한 공경의 도리 중에 하나가 순종이기 때문에 그것을 떼놓고는 공경을 말할 수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오늘 부모 공경의 도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제일 먼저 순종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뜻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한 우리가 우리 부모의 명령에 우리 부모가 원하는 바에 깊이 순종하고 그래서 우리가 자녀로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부모의 마음이 기쁨이 되게끔 그렇게 해드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효도이고 순종은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부모를 중요히 여기는 것이 순종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래서 창조의 질서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들이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간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런 모든 효도, 이런 모든 공경의 기초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순종은 부모를 향한 공경에 기초해서 가능해지는 것이고 부모에 대한 진정한 공경은 사랑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부모를 깊이 사랑해야지 됩니다. 이것이 대의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부모님을 사랑해야지 된다는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가? 첫째는 그 부모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부모님이 주는 것을 기뻐한다기보다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부모님의 존재 그 자체가 자식인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여기 영아부실에 가면 이제 갓난아이들을 데리고 아주 어렸을 때는 자모실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좀 크면 영아부에 집어넣고 그래서 한 6개월 된 아이서부터 한 24개월 된 아이들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가 아이들이야. 매일 엄마 품에 있다가 떨어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회 건물만 보면 엄마 떨어질까 봐 벌써 울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가면 엄마 아빠와 헤어져야지 되는 것을 아니까 데려다 놓으면 그때 엄마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너도 가서 예배를 드려라. 딱 자르고 돌아오면 한달만 지나면 애가 딱 적응이 됩니다. 아이들도 다 눈치가 있어서 부모가 미적미적 하면 개기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칼로 자르듯이 딱 자르면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빨리 포기하고 적응을 합니다. 그래서 데려갑니다. 떼어놓습니다. 막 선생님 품에 안겨서 통곡을 하면서 웁니다. 돌아올 때 엄마가 운다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한 70분 후에 만날 텐데 눈물을 흘립니다. 심방을 한번 갔는데 9시 반에 지기 자녀를 유치원에 보냅니다. 스쿨버스를 태워서 보내는데 스쿨버스를 태워서 보내고 들어와서 책상에 엎드려서 막 울었답니다. 11시 반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자녀를 낳아보지 않은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그 부모의 마음속에 자식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그렇게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영아부 실에 떼어놓으면서 막 웁니다. 그래서 보면 남북 이산가족 같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담대한 부모들은 딱 떼어놓습니다. 막 울어도 어려서부터 고난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야지 된다. 그 애가 거기서 연단을 많이 받고 조금 있으면 기저귀차고 헌금위원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려서부터 그것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시간에 아이를 충분히 사랑해서 그래서 아이들이 과감하게 떼어놓고 부모들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 하면 존재 그 자체가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기쁘면 그러면 그의 채취도 기쁘고 그리고 그가 앉았던 자리도 앉으면 채취가 느껴지고 그가 쓴 글, 그의 발자국 하여튼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그렇게 추억거리가 됩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5월이 오면 떠오르는 생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화: 전도사로 있었던 교회에 어느 부부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남편이 갑자기 죽어 아이가 아빠를 찾으면 아빠의 옷을 꺼내 아빠의 냄새를 맡게 했다는 이야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존재 그 자체가 너무나 그립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너무나 기쁜 것, 그러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정말 솔직히 물어보고 싶습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초등학교 때 말고, 지금 다 커서 말입니다. 자식들은 중 고등학교만 되면 용돈 몇 푼 받고 뛰어나가면 오밤중이 되어도 부모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안 그렇습니다.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여러분들은 부모가 아직 모두 살아계신 분들은 저의 말하는 것을 아직 잘 이해를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를 여위 본 사람은 오늘 저의 이야기가 이해가 될 것입니다. 부모님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고 심지어 과거에 여러분들에게 상처밖에 준 것이 없어도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자식인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선물로 다가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니까 그 부모의 살아계신 것이 선물이고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그리고 부모와 사이가 깨트려졌던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부모가 살아계신 것이 그게 선물입니다.
병원에서 사역을 하던 어느 전도사님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병동에 있는데 식물인간이 되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그런 상태로 다시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아내가 물수건으로 남편을 세수시켜드리고 그리고 양치물까지 다 해드리면서 딸아이와 함께 그렇게 매일 그 아버지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물론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녀가 나누는 대화가 야 이렇게 아버지가 살아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직 부모님이 겸수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몇 주 전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모님보다는 할머님과 더 오래 살아서 부모님과는 정이 별로 없었지만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도 명절 때면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들을 합니다. 저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대부분 다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나 할머니가 몇 십 년 동안 만들어놓은 전통이니까 자연스럽게 집 식구들이 그런 메뉴를 따라서 이제 상을 차려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같이 식탁을 나눕니다. 그런데 명절 때만 되면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보면 마음속이 그렇게 허전하고 쓰라릴 수가 없습니다. 76세 때 돌아가셨으니까 사실 인간으로서의 수명은 누릴 만큼 누리셨습니다. 건강하게 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질병으로 짧은 시간 안에 데려가셨습니다. 고통 없이. 그리고 얼마나 평안한 가운데 운명하셨는지 제가 마지막 입관하기 전에 그 관 뚜껑을 열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할머니를 대면하게 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평안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은 처음이었습니다. 평소에 제게 유언을 하셨습니다. 애야, 나는 일생을 속박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절대로 염을 하지 말라. 그냥 평상복대로 입고 가게 해다오. 그래서 그 분부를 받들어서 전혀 염하지 않고 하얀 치마저고리를 예쁘게 만들어서 그 옷을 입혀드리고 그리고 관에 줄 하나 없이 편안하게 눕혀서 그래서 모셨습니다. 76세에 돌아가셨으니까 자연인으로서는 수를 누리셨고 남편보다 30년을 더 사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아릴 수가 없습니다. 87년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때는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했는지 할머니가 딸집에서 받은 오천 원 이렇게 얻어 오시면 그것을 주일날 만나서 내 주머니에 찔러주고 혹은 우리 집 사람 집에 찔러주고 가면 그것을 받아서 요긴하게 쓸 정도로 그렇게 가난한 세월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88년도에 제가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1년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손자가 대학교수가 되는 것도 보시고 그리고 그때보다는 더 여유가 있으니까 좀 고운 옷도 해 입혀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해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가시고 싶다는데 차 태워서 모시고도 가고 그랬을 텐데 그렇게 험하게 고생하는 것만 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한동안 마음속에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프고 고생스럽게 사시고 내가 그 마음에 위로를 드리지 못했던 물론 사랑했지만 부분적으로는 미숙해서 부분적으로는 불효해서 그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돌아가신지 거의 20년 가까이 다 되어가고 제가 이제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몇 달에 한번씩은 배게 잎을 적시면서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면 여러분들은 아마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된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는 이런 신앙적인 소원 이외에 너의 육신의 소원이 있으면 한번 얘기해보라 그러시면 나는 우리 할머니가 한번 살아 돌아오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길게도 말고 일주일, 그것도 만약에 너무 과한 욕심이라면 병상에 누우신 그 모습이라도 좋으니까 일주일만이라도 살아계신다면 제가 평소에 못해드린 따뜻한 물수건으로 이마도 닦아드리고 손도 닦아드리고 그리고 손자와 마주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 옆에 앉아서 옛날이야기도 해드리고 팔이라도 주물러드리고 싶은데 가셨습니다. 없습니다.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부모님을 그렇게 여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 아프겠습니까?
지금은 하도 어렸을 때 외워서 이름도 잊어버린 이조 시대의 어느 선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가 시조에 짓기를 대게 이런 구절을 지었습니다. ‘반중 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나이다. 반중 조홍감을 가슴에 품은직 하다마는 품어가서 반길 리가 없으니 내가 그를 서러워하노라’ 중국 고사에 보면 어느 효자가 남의 집에 대접을 받으러 갔는데 잘 익은 과일을 내놓기에 그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얼른 자기가 먹은 것처럼 품에 감추었다가 그것을 가서 부모를 공경하였다고 하는 그 고사를 생각하면서 이조 시대의 이 선비가 나의 집에 대접을 받았을 때 ‘반중’ 그러니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마련한 그 쟁반 한가운데 조홍감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 잘 익은 일찍 익은 감이거나 아니면 혹자의 해석과 같이 아주 그 당시에 보기 드문 귀한 과일이었던 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어째든 그것을 가슴에 품어 간직하다가 왜? 그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시던 과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니까 와락!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것을 품고 가서 그 부모님을 섬겨드리고 싶은데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까 그것을 가슴에 품고 집에 가도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으니까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부모님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부모가 여러분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 중에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부모님을 그리워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부모가 많은 유산을 남기지 않고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름을 내노라 할 정도로 뛰어난 평판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부모가 우리 부모가 아닐 수 있습니까? 남의 부모가 나의 부모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 부모가 나의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기뻐하는 것, 이것이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부모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 한분이 북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면서 실제 절절히 어느 잡지에 글을 썼습니다.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그렇겠구나. 더군다나 그 어머님 사진을 중국을 통해서 봤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기부에 끌려가서 그렇게 취조를 받고 그 사진을 압수까지 당했다니까 자식이 부모 사진을 자기고 있는 게 그게 무슨 보완법 위반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애절하고 절절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 많은 자식들이 부모님이 살아있는 것을 선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부담이나 아니면 자기 몸에 붙은 군더더기 살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패역한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입술로만 하나님의 사랑, 희생하는 사랑, 인류의 아픔을 쓸어안은 사랑 그런 것 이야기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가족, 눈에 보이는 우리 부모, 나를 낳아주고 기르고 우리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고 허덕이면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를 섬겼던 그 부모님들이 살아있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당신도 뭘 몰라서 그렇지 한번 부모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고 집은 가난하고 한번 그래보라. 충분히 이해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집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누워있고 똥오줌을 받아내고 심지어는 괄약근이 약해져서 대변을 할 수가 없어서 장갑을 끼고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서 똥을 꺼내는 노인들을 공경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 고충과 괴로움이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우리에게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을 좋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못사는 것은 다음의 문제이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의 교훈을 따라서 정직히 판단해본다면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부모를 깊이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부모님이 이 땅에 살아계신 것 자체가 내게는 큰 선물이로다. 불효한 나를 속죄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부모님을 사랑하면서 산 나로 하여금 눈물 흘리며 이별하지 않게 만들어주시는 부모님 살아있는 것이 저에게는 큰 선물입니다. 존재 자체가 저에게 선물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든지 간에 그의 영성의 마지막 특징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성 한복판에는 항상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랑의 영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부모 그 존재 자체를 너무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부모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를 그렇게 기뻐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할 때 드는 희생과 노고, 내가 개인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손해 같은 것들이 먼저 계산되지 않고 내가 순종함으로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 먼저 내 마음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 속에서 우리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사랑의 정체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88년도에 제가 대학의 선생으로 갔을 때 그때에 컴퓨터가 그렇게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수실이 쭉 있었는데 교수님들 중에서 돈이 있어서 컴퓨터에 들여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전혀 안 사주고 개인이 사야 했습니다. 교수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게 ‘도트 프린터’ 찍찍! 하고 나는 그 소리였습니다. 교수들이 그것을 하나 사면 일부러 방문을 열어놓고 프린터를 합니다. 소리를 들으라고, 그러니 능력이 있어야 그것을 사지. 그래도 어떻게 강의안을 마련하고 하려니까 도저히 없이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다 고심을 해서 그때 150만 원 짜리 포트벌 워드 프로세서를 하나 샀습니다. 그때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최신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쳐서 프린터를 하고 했는데 그것을 제가 어떻게 가지고 다녔는지 아십니까? 학교에 근무가 끝나면 그것을 품에 안고 운동장으로 내려와서 차에 타고 조수석 옆에다가 놓고 안전벨트를 하고 그리고 웅덩이 파진 데는 절대 차가 안 들어가고 왜? 덜컹거리다가 거기에 충격이 올까봐. 살살 피해 다니고 그리고 가게 음료수라도 사러갈라면 다시 안전벨트를 풀러 그것을 가슴에 안고 가서 물 한 병 사서 와서 다시 채우고 왜? 차를 잃어버려도 괜찮은데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물론 그 안에 내용도 문제가 되기는 했습니다만 어째든 그렇게 살았습니다. 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하게 다루는 것은 대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게 사랑하는 것은 모두 귀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아주 귀하게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귀한 이유를 우리는 너무나 이 세상에서의 지위, 그런 것을 많이 봤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도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서로 부모를 이야기할 때 너의 아버지는 뭐하시는가? 우리 아버지는 은퇴하시고 집에서 쉬시지, 옛날에는 장관도 하시고 은행장도 하셨지만 요즘은 집에서 놀고 계시지, 그때는 왠지 우리 아버지는 계속 은퇴중이셨는데 특별히 은퇴하실 게 없으니까 한량하게 계시다가 그냥 나이만 드셨으니까 할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 그 자체에서 가치와 의를 찾으면서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존재가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은 사람이래도 내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면 상관없습니다.
여기도 보면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내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분들을 공경하라는 계명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그 부모가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면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의 정체는 기뻐하는 동시에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그 부모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러면서 그 부모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식인 나로 인해서 우리 부모의 심중에 있는 것들이 좌절되는 고통을 맞보지 않도록 오히려 나를 통해서 부모의 심중에 있는 뜻이 이루어져서 그것 때문에 부모님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깊이 소중히 여기고 그래서 그 부모님께 매 순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 그것이 우리의 깨어진 가족관계들을 새롭게 회복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반드시 지나야 할 우리의 가슴속에 쌓여 있는 많은 상처와 그 어두운 기억들을 지워버리게 만든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우리 부모님을 그렇게 순종하고 그렇게 부모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소중하게 여기면서 우리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엇보다도 마음으로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려고 하고 부모님 살아있는 그 자체가 정말 우리에게는 선물이라고 그리고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소중한 특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모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아버지의 통곡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5월은 가정의 달이고 특히 지난주간에는 어버이날이 끼어 있었습니다. 지지난 주간입니다. 성경에서는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교회에서도 믿는 자녀들에게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다윗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그 가족 안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26명이나 되는 많은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옛날이니까 몇 명의 부인들을 거느렸고 각각 배다른 자식들이 26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그 첫아들은 암논이라는 아들이었고 셋째 아들은 압살롬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바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고 부르는 그 이름이 바로 셋째 아들입니다. 이 셋째 아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를 조금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첫아들 암논이라고 하는 자식이 있었는데 그만 많은 여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자기의 누이동생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배다른 누이동생을 자기가 몸이 아팠을 때 가까이 오도록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그래서 결국은 이 젊은 혈기에 이 동생을 겁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여자아이는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고 그리고 또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가장 분노하던 사람이 오늘 죽은 압살롬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누이가 바로 자기와 같은 어머니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왕위는 형에게 돌아갈 것인데 셋째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자기의 친동생을 형이 겁간했으니 오라비로서의 그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 압살롬은 아주 지혜롭고 똑똑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슬피 우는 누이를 다독이며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중에 한번 내가 혼내주겠다. 그리고 때를 벼루고 기다리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버지 다윗의 마음이 첫 아들에게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의 몸으로 낳은 자기의 몸으로 낳은 아들이 욕을 보였으니 아버지의 마음에 그 아들이 금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이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으니 “너희 집안에 칼이 그치지 아니하고 백주에 너의 처가 네 원수들에게 욕을 보이리라”고 한 주님의 예언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 아버지의 마음이 암논에게서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압살롬은 구체적으로 이 암논을 죽일 계획을 갖습니다. 여기에는 아마 형을 죽여 버리면 둘째 건너 셋째인 자기에게 왕위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정치적인 계산까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째든 그래서 이제 큰 형을 연회에 초청해서 그래서 은밀하게 그 형을 죽여 버립니다. 아버지 다윗이 암논을 매우 미워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압살롬이 그 형을 죽였을 때에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고 도저히 압살롬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진노하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도망쳤고 상당한 기간동안 이 아버지와 이 아들은 남남처럼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깐 동안이고 이 상처와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위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잘 남아도 아래로부터 받은 상처는 쉽게 잊혀지는 법입니다. 자식과 부모가 불화할 때 먼저 화해하자고 손을 내미는 쪽은 자식이 아니라 사실은 부모입니다. 이 부모의 마음속에 압살롬이 그렇게 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깨달은 신하들이 압살롬을 불러다가 아버지 다윗과 화해를 시킵니다. 그래서 일단 화해하고 이 압살롬이 아버지 가까이 살게 되었지만 그러나 다윗의 마음의 상처도 완전히 씻어지지 않았고 또 그 일로 인해서 압살롬의 마음은 더욱 굳어져서 아버지를 자기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가슴에 큰 못을 박을 끔찍한 욕망을 마음에 품게 되었으니 그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그 나라의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똑똑한 이 압살롬이라고 하는 아들은 철저하게 그 일을 준비했고 우선 50명이나 되는 개인 근위병들을 돈을 들여서 만들어 거느렸고 아버지의 측근에 있는 막료 장수들 중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매수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성문 앞에 서서 재판을 받으러 나아가는 백성들에게 무슨 일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가,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는가. 이렇게 백성들에게 접근함으로서 부왕이신 아버지 다윗에게로 향하던 백성들의 마음을 이제 자신에게로 도적질하는 그런 일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헤브론이라고 하는 곳에서 나팔을 불고 자신이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은 바로 아버지가 기름부음을 받고 왕 되었다는 사실을 선언했던 곳이었으니 이는 머리 좋은 이 압살롬의 생각에 아버지가 왕이 되었던 그곳에서 내가 왕이 되었다고 선언하면 신앙을 가진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이 아버지는 버리고 나를 새 왕으로 세우셨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하는 추측으로 이제 압살롬은 그런 정치적인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반란군을 토벌하기에는 아직까지도 이 압살롬이 반란군에게 원수처럼 보이지 않고 자식처럼 보였으니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압살롬의 휘하에 있는 아이도벨이라고 하는 장수가 아주 천박하고 더러운 꾀를 내는데 그것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끔찍이 미워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여야지만 당신에게로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가장 수치스럽게 여길 일을 하십시오. 그게 무엇인가? 당신의 아버지가 함께 자던 그 후궁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동침하십시오. 그래서 그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왕궁을 쳐들어왔고 쳐들어왔을 때 다윗은 슬피 울며 재를 무릅쓰고 맨발로 궁을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도망치는 그 아비의 가슴에는 이미 칼이 꽂혀 있었으니 그것은 단지 왕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든지 나라의 왕관을 빼앗기고 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든지 하는 세상 욕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아비의 마음에 깊이 칼이 꽂힌 것은 자기가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는 그 아들이 자기를 배반하고 자기는 그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는데 그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자객을 풀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동침하던 자기의 후궁들을 능욕하고 육신적으로 보면 어머니의 인연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동침했으니 아버지의 이 마음은 똥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수치스러웠고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치욕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정도면 아버지의 마음에 깊이 칼이 꽂혔고 그랬으니 자식을 향한 견딜 수 없는 적개심이 불길처럼 이 속에서 타오를 수 있지 않습니까?
전쟁은 냉혹한 것이니 반란은 일어났고 따라서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는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와 추격이 이루어졌고 압살롬이 우세한 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 이 다윗을 사랑하셔서 압살롬의 군대를 이기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결국은 압살롬의 군대는 모두 토벌되었고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였으며 토벌군에 의해서 반란군이 진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비보가 날라들었으니 그것은 사랑하는 압살롬이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전투의 결과를 알리기 위해서 달려오는 군인에게 제일 먼저 아버지가 물었던 것은 승리였는가가 아니라 내 아들 내 소년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내 아들 내 소년, 여기에 소년이라고 쓰여 있는 히브리 단어가 ‘나아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어린아이라고 하는 뜻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내 아들, 우리 아가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처들을 능욕하고 말할 수 없는 수치를 안겨준 그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죽음으로서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는 모든 손길을 뿌리치며 문루로 올라갔고 거기에 올라가면서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울부짖으면서 문루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모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 세상에 보전하시기 위해서 참으로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 속에 심어놓으신 본성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가시고기라고 하는 그 물고기의 일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름이 가시고기인 이 고기는 가시가 투명한 살 사이로 잘 보이는 그런 종류의 고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고기는 태어나서부터 일생을 지날 때까지 그야말로 인간들이 본받아야 할 정도로 자식을 참 사랑합니다. 알을 낳아놓고 가면 이 애비가 그 알을 낳아놓은 그 앞에서 끊임없이 일주일 이상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느러미로 물질을 해서 그래서 신선한 물을 그 알들이 있는 곳으로 몰아 보내고 그래서 부화를 촉진합니다. 그리고 다른 물고기들이 거기에 근접해서 알을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합니다. 그래서 그 물고기가 그렇게 밤낮으로 일주일이 넘도록 그렇게 다 물질을 하면 그 일주일 동안 지느러미가 너덜너덜 떨어지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제자리에서 물질을 하니까 이 비늘까지 다 떨어지면서 온 몸이 걸레가 되다시피 합니다. 이제는 도저히 힘이 없어서 더 이상 물질을 할 수가 없어서 지느러미의 힘이 빠져서 세 번, 네 번 움직이던 지느러미가 한번, 두 번 움직이고 아비의 고기의 몸이 물에 자꾸 가라앉게 될 즈음에 새끼 고기들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그 고기들이 이제 멀리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몸집을 더 키우게 되는데 그때에 그 힘을 잃고 서서히 물에 가라앉는 아비 고기는 자기의 몸을 방금 알에서 깨어 나와서 이제 헤엄치는 자식들에게 자기의 몸을 먹이로 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먹고 그래서 아비의 몸을 뼈만 남기고 다 머리까지 뜯어먹을 때쯤이면 이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물고기들의 새끼의 몸집이 어느 정도 커지고 독자적으로 이제 물속을 헤엄칠 수 있는 그런 생존의 장에 등장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부모로부터 상처도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그리고 부모로부터 아픔도 많이 겪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향한 그 사랑은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자식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떠버리고 다녀도 부모는 자식에게 베푼 사랑을 가슴에 묻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오고 자식이 죽으면 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일을 당하였습니다. 자식이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을 안겨주고 자기 목에 칼을 대고 생명까지 노렸지만 자식의 그 패역한 범죄가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자식을 향한 사랑의 불을 끌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부모가 그렇게 자녀 된 우리들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이 진실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의 그림자인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부모를 깊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먼저 관계를 갖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 부모는 어렸을 때 세계 전부였고 그 품에서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먹고 그리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배웠습니다. 물론 우리의 부모는 완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준 그 놀라운 사랑과 보살핌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생존해있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즐거움과 안락한 삶을 모두 뒷전으로 미루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불면 꺼질 새라 날아갈 새라 가슴 졸이며 양육하고 자녀를 근심한 그 부모님의 공로 때문에 사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서 우리의 인생에 장을 엮어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부모를 깊이 공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수시로 생각하면서 그리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모님이 베푸신 그 크고 놀라운 희생과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자녀를 낳아서 길러보기 전에는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만 자식을 낳아서 자식 때문에 마음 고생도해보고 가난과 고통 속에서 눈물도 흘려보고 질병에 시달리며 병상에 누워있는 자식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도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말없는 사랑과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보이는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고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마음을 드리고 진심으로 그분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 사랑이 이 땅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땅에 있는 아버지는 살과 피와 몸을 빌어주어서 우리의 육신을 만드는 도구가 되었지만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우리의 부모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그렇게 돌봄을 받으면서 살아올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육신의 보이는 아버지보다도 더 큰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 육신의 아버지도 만든 아버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아버지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물속을 떠다니며 작전을 수행하는 잠수함을 두고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잠수함이 물속에 떠다니지요. 누가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화의 과정을 걸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치는 이렇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물위에 떠다니는 철이 바다 밑에 가라앉기 시작했고 그것은 단단한 덩어리가 되기 시작해서 커다란 철판을 형성하게 되었고 반복되는 심해의 깊은 파도 속에서 그 철판이 일어나서 둥그런 형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쇳가루들이 모여서 장구한 세월이 이르는 동안에 나사로 변했고 그것은 바닷물의 흐름 속에서 적절한 구멍을 찾아서 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 것인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직은 과학이 모두 밝혀내지 못했지만 세월이 지나면 밝혀지게 될 것인데 갑자기 엔진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이 다 밝혀내지 못하지만 차차 밝혀지겠지만 엔진이 가동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잠수함은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웃으시는 것처럼 이 세상이 그냥 존재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 하나 만든 자 없이 존재하는 사물이 하나도 없는데 사실 창조된 이 세계에 정교함은 물속을 떠다니는 잠수함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들 속에 있는 인체의 작은 실핏줄 하나만 끊어져도 여러분들의 생명이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런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가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낫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논쟁하지 않고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모두 창조하시고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명령하심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동물들에게는 없는 영혼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죽은 것을 가리켜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육신은 이 세상에서 온 흙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그 본래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영혼을 창조하신 이유는 그 영혼을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하나님과 가족관계를 누리면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며 그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하나님 대신해서 다스려서 이 세상을 창조해놓으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끔 온 세상을 경영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빚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인간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으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것을 따먹었으니 이것은 선악과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오늘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인간관계의 파괴와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무지와 이 모든 고통과 전쟁,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뼈아픈 일들은 바로 이 죄가 가지고 온 영혼의 죽음이라는 질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영혼을 교통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 생명으로 살게 하셨는데 죄가 들어오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육체는 살았으나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권력을 많이 손에 넣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이 끝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많이 사랑하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분 안에는 당신을 거스르는 인간의 죄는 반드시 형벌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성품이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지만 그 자녀를 때려야 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떤 형벌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셔야 했는데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예수님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고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빚쟁이의 집안에서 태어나면 그 집 자식들이 빚쟁이가 되듯이 죄인의 몸에서 그 피와 살과 그 모든 체액을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유전될 때 우리 안에 동시에 그 영혼 안에 죄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짓는 죄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하루에 인간이 10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그중에 백분의 일만 해도 천 가지의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 중에 백분의 일만 실행에 옮겨도 열 번의 죄를 짓는 악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 죄에 매어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21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꿈은 많았지만 좌절한 청년이었고 몸까지도 매우 병약한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을 찾았고 마음의 평안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상을 넘나들었지만 그러나 마지막에는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이런 상처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때에 어느 그리스도인이 전해준 기쁜 소식을 통해서 몇 권의 책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오랜 세월동안 황당하게 믿어지지 않은 사실들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죄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인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예수님이 33년 동안 이 세상에 흠 없이 사시면서 특별히 3년 동안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르치셨고 그것을 우리들이 복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우리를 섬기다가 마지막에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죽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마음속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 마음속에 깊이 믿어지게 되자 내가 하나님 앞에 그동안 얼마나 원수 같은 자식으로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능욕한 자식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깊은 후회가 내 마음에 찌르듯이 밀려왔습니다.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하나님 앞에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기 시작했고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그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그래서 가장 비참하게 버려져서 인간으로 존재하며 살아가는 자체를 도저히 힘겨워서 이기지 못하며 자살을 생각하는 이 젊은이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얼굴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셨지만 나에게 어린시절에 들었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르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방황하고 고생하는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대신 형벌을 당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밖에는 나에게 어떠한 인생의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주님 앞에 고백할 때 어느덧 내 마음이 열리면서 생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콘크리트더미처럼 쌓아올렸던 그 무슨 건물인 듯한 것들이 내 마음속에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인생살이들이 눈에 떠올랐는데 그 순간에는 이 세상의 인생살이는 다 사라지고 하늘높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고 두 손에 못 박히고 찢어진 몸으로 매달리신 그 예수님의 피어린 고난의 형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좋은 아버지가 계신데 나는 왜 이 좋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그 긴 세월동안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그렇게 아버지의 가슴에 못 박는 삶을 살았을까? 그러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와 돌아와 마음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와
어서 와 주께 오라
그러면서 한 20년 밖에 안 산 인생이지만 참 소설처럼 고생도 많이 하고 살았는데 그 인생의 의미가 명료하게 떠올랐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가는 길도 막으시고 고난도 당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 아무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외로움도 겪게 하셨구나,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에 주님이 제 마음에 오셨습니다. 내 영혼 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영으로서 오셨습니다. 30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도 떠나지 않고 내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길거리에서 집을 나오고 가출하여 때 덩어리가 되어서 먹을 것이 없고 잘 곳이 없어서 남의 돈 통이나 훔치려고 하는 청소년을 보면 뭐라고 권하시겠습니까? 애야, 왜 여기 이러고 사니? 너의 부자인 아버지의 집, 그리고 모든 것이 많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거라. 권하시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한 아버지가 있었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부자인 그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했으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죽어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래도 마음씨 좋은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대로 유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유산을 가지고 이 아들은 부모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재산을 다 낭비했습니다. 결국은 짐승을 치는 목부가 되었고 그 돼지우리에서도 사료라도 먹고 배를 채워보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궁핍과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절망 중에 아버지의 집이 아련히 떠올랐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하게 일하며 그 아버지의 집에서 배불리 먹고 웃으면서 사는 아들이 아니라 품꾼들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일꾼으로 살며 그래서 먼 발취에서나마 아버지를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 아들이 결단하고 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긴 세월동안 방탕하게 살았고 돼지우리에서 목부까지 했으니 그의 옷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하게 되었고 수염도 길고 얼굴에는 병색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아들이 나간 그 날부터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그 눈동자였습니다. 먼발치에서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가 달려와서 그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의 해후를 한 후에 아들의 기대와는 달리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예쁜 옷을 입힌 후에 다시 자기 아들로 맞아주며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긴 후에 잔치를 벌여주어서 예전보다 더 많이 사랑받게 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렸을 때는 철모르고 부모님 곁은 떠나 제 멋대로 살았지만 나이가 들고 자식을 낳게 되자 부모님의 그 큰 사랑, 그리고 이렇게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서 불효하게 사는 나를 보고 가슴을 저려하고 아파하실 그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처럼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까지 이 세상에 보내셨던 그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돌아오지 않은 자식을 바라보며 그래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내 아들 아무개야, 내 아들 아무개야 그러면서 이름을 부르고 계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가슴이 아프도록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알고 나서부터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간절히 부르십니다. 아무 것도 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것과 오늘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제가 오늘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로 제가 돌아가고 싶습니다. 기도하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새 생명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길 1